2020-05-26

이용수(1928)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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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1928)

최근 수정 시각: 
이용수
李容洙|위안부 피해자
파일:이용수_할머니.jpg
출생
소속
정의기억연대 (공동대표)
직업
사회운동가, 인권운동가

1. 개요2. 생애3정대협 공동대표4. 강제동원에 대한 증언
4.1. 1993년 첫 번째 증언4.2. 2004년 증언4.3. 2006년 증언4.4. 2014년 7월 증언4.5. 2014년 9월 증언4.6. 2017년 증언4.7. 증언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과 반박
5. 귀국 후 삶에 대한 증언
5.1. 93년 증언5.2. 99년 증언
6. 도와준 일본 장교에 대한 증언
6.1. 98년 증언6.2. 2015년 증언6.3. 증언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과 반박
7. 정의기억연대 고발 기자 회견8. 관련자료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사회운동가이다.

2. 생애[편집]

1928년 12월 13일 대구부 금정2정목(현 대구광역시 북구 고성동)에서 6남매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본적은 성주군 벽진면 봉계동이다.#&@ 부잣집 유모 생활을 하는 어머니 대신 남동생 4명을 키웠다고 한다.[1]

2007년 2월 15일, 미 하원 외교위에서 열린 "종군위안부 결의안(HR121호)"에 대한 회의에 증인으로 참석하였다. 기사 참조

2012년 민주통합당의 비례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공천 과정에서 비례대표 후보 명단에 들지 못하고 탈락했다고 한다. 참고로 처음에는 새누리당에 공천신청을 했는데 연락이 없어서 민주통합당에 신청했다고 한다. #

2017년 촛불집회에 3월과 5월 참가했다. 98주년 3.1절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하고, 진정한 광복 맞자”

2017년 5월 성주 사드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

2017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개봉 되면서, LA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YTN

3. 정대협 공동대표[편집]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빈 방문을 하면서 만찬을 가졌을 때, 초대되어 트럼프 대통령과 포옹을 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사실 이용수 할머니는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에 비하면 아직까지 건강한 편이라 대외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며,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표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2015년 위안부 합의 논란 당시 방송에 나와서 우리 46명 할머니들은 얼마를 주고 그런 것은 원치 않는다며 찬성하는 할머니들은 치매라고 주장했다. 진행자가 이용수 할머니 같은 의견도 있으나 이 정도면 받아들이자는 할머니들도 계신다고 하자 이용수 할머니는 '치매'라고 단언하며 모두가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의견이 갈린다는 왜곡보도 말라고 엄중 경고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의 뜻으로 판단한 대중들은 합의 반대 여론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다만 자의든 타의든 46명 피해자 중 36명이 수령하거나 수령 의사를 밝히기는 했다.#[2][3]

그녀의 위안부 피해 증언들은 다음과 같다.

4. 강제동원에 대한 증언[편집]

4.1. 1993년 첫 번째 증언[편집]

내 동갑내기 친구 중에 김분순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 집에 놀러가니까 그 어머니가 “너 신발 하나 옳게 못 신고 이게 뭐냐, 애야, 너 우리 분순이하고 저기 어디로 가거라. 거기 가면 오만 거 다 있단다. 밥도 많이 먹을 거고, 너희집도 잘 살게 해준단다”라고 했다. 당시 내 옷차림새는 헐벗고 말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분순이가 우리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 하며 소곤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분순이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냥 분순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통치마에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을 입고 게다를 끌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옷보퉁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 속에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있다고 했다. 보퉁이를 살짝 들쳐 보니 과연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 나까지 합해 처녀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 길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주까지 갔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기차를 타보았다.
경주에 가서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여관 앞 개울가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산비탈에 보라색 꽃이 한송이 피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꽃이어서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까 도라지꽃이라고 했다.
거기서 이틀밤인가를 지냈는데 또 여자 두 명을 더 데리고 왔다. 그래서 여자가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경주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를 지나가게 되었다. 달리는 기차의 깨진 유리 차창 저편에 우리집이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집생각이 나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난 우리 엄마에게 가야 한다고 하면서 막 울었다.
옷보퉁이를 밀치며 이거 안 가질 테니 집에 보내 달라고 하며 계속 울었다. 울다가 지쳐서 곯아떨어졌는데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다.
여러 날을 간 것 같다.

여성가족부의 일본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에 93년 증언 전문이 기록되어있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더이상 남아있지 않다. 첫번째 증언은 '취업사기'에 가까운 증언인지라, 영화 '귀향'에도 반영된 일본군에 의한 강제납치 증언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내용의 일부가 남아있다.e역사관 페이스북 페이지

첫번째 증언의 신뢰성이 높은 이유는 사건 발생과 가장 가까운 시기이고, 내용이 구체적이며, 아직 유명세를 타기 전인지라 증언이 때묻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유명세를 타면 여기저기서 부추김도 있고, 특히 첫번째 증언에서 등장하는 '국민복에 전투모를 쓴 일본남자'에 대해 '일본군'이 아니었냐는 추궁을 받거나, 당시 일본군이 이래저래해서 납치했다더라 등등의 말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2020년 정의기억연대에서 언급한 '기억왜곡'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제 '일본군이 꼬드겼다 -> 일본군이 자는데 납치했다'처럼, 점점 한국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서사 구조로 바뀌어 간다.

게다가 2014년 9월에 첫번째 증언과 비슷해진다는 사실이 눈여겨 볼 대목이다. 첫번째 증언에서 핵심 키워드는 '원피스와 가죽구두'이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며, 할머니에게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실 오래된 기억은 사소한 부분들은 틀릴 수도 있으나, 큰 줄기는 강렬하게 뇌리에 박히기 때문에 여러 증언들을 대조해보면 지엽적인 부분은 틀릴 수 있어도 핵심적인 큰 줄기는 일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본군 개입설로 바뀐 후에는 자취를 감췄던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2014년 9월에 뜬금없이 또 등장한다.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할머니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4.2. 2004년 증언[편집]

대구 고성동에서 16살까지 살았고, 1943년 어느 여름 16살 때 코와 입밖에 보이지 않는 모자를 쓴 일본군인이 동네언니 4명들과 함께 우리를 강제로 끌고갔다.
어디로 가는지 왜 데려가는지도 몰랐다.
창문이 없는 기차에 우리를 태웠는데, 가지않겠다고 하니 조센징이라고 하면서 구둣발로 밟고 때렸다.
집에 가겠다고 하니 또 때리더라. 너무 많이 맞아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4.3. 2006년 증언[편집]

열다섯 살이던 1942년경 집에서 자다가 일본군에 의해 대만으로 끌려갔다.

4.4. 2014년 7월 증언[편집]

15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일본 군인이 '이리오라'는 손짓을 했다. 무서워서 도망갔는데 또 다른 일본 군인에게 붙잡혀 기차를 타고 대만의 한 일본군 부대로 끌려갔다. 뉴시스

4.5. 2014년 9월 증언[편집]

16세에 원피스와 빨간 가죽구두를 보여주며 '배불리 먹여주고 집도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일본 남자의 말에 속아 친구와 함께 따라 나섰다. 중국을 거쳐 대만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다. 위안소의 주인이었다. 이 주인에게 전기고문도 당했다#[4]

4.6. 2017년 증언[편집]

열다섯 살에 집에서 자다가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다.

4.7. 증언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과 반박[편집]

"우리가 강간당한 여성의 진술에 진정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 진술이 현실적으로 믿기 어렵고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를 겪은 주체가 자신의 경험을 진술할 때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면이야말로 그 진술에 진정성이 깃들어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통일 이슈] 거짓·과장·왜곡 탈북자 증언 ‘밥벌이 메커니즘’을 고발한다 -신동아

진술이 일관적일 때는 정교하게 만들어 낸 거짓말일 수도 있으나, 진실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면 거짓말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어떠한 피해를 당한게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진정성' 자체는 신뢰할 수 있을 지언정, 진술 하나하나가 다 '팩트'는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외국의 사례에선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이 있었는데, 정작 그녀의 몸은 처녀로 밝혀졌다. 성추행을 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심한 피해망상과 기억왜곡이 더해졌기에, 성범죄에 대한 '진정성'은 있었으나 그녀의 진술은 대부분 환상이었다.

탈북자와 위안부의 진술은 비슷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우선 진술의 팩트체크가 어렵다는 점, 또한 이들을 필요로 하는 정치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북한 인권 실상의 아이콘이던 신동혁의 진술 일부가 거짓으로 밝혀지자 그것을 근거로 '가짜 탈북자'로 모는 여론도 있던 반면, 그의 진정성과 북한 인권의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변호하는 여론도 있었다.

탈북자들의 증언이 과장되거나 왜곡되는 원인으로는, 그들이 자극적인 발언을 내놓기를 원하고 그러지 못하는 탈북자들을 갈음하는 사회구조가 꼽힌다. 예를 들어 신동혁도 자극적인 진술로 인해 뜬건데, 만약 진술이 약하다면 사회에서 외면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용수 할머니도 만약 초기 증언, 즉 '취업사기'에 가까운 증언으로 밀고 나갔다면 이용수 할머니가 지금처럼 유명해졌을까를 고려해본다면 신동혁의 처지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신동혁처럼 시위 등에 나와 앞장서는 탈북자들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하는 탈북자들도 존재하는데, 위안부운동의 '대모'로 꼽히는 김문숙 부산 정대협 이사장은 윤미향이 정대협 대표 맡은 뒤 돈벌이에 열중하며 위안부 퍼포먼스화를 했다고 강하게 성토했다.# 옷을 잘 차려입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카메라 앞에서 영웅처럼 퍼포먼스를 하는 방식이 맞지 않아 갈라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서는 점점 자극적인 진술에 대한 압박을 직간접적으로 받기 때문에 기억이 왜곡될 소지가 있다.

경찰서에서도 진술만으로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강요나 부추김 등으로 왜곡될 수 있기에 수사의 '참고'만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특히 과거엔 경찰이 "이런 거 있었지?" 물어보며 못봤다고 하면 "있었잖아. 잘 기억해봐" 이런 식으로 유도질문을 하여 허위진술을 끌어낸 사례도 많았기에 더더욱 진술만으로는 단언할 수 없게 되었다. 실제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이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하던 정의기억연대도, 막상 칼끝이 자신들을 향하자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은 정의기억연대 측에 악감정을 가진 단체가 부추겨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몇 부분들에 대한 증언이 바뀐다는 것을 지적하는 측이 있지만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에 일관성이 요구되는 것은 '역사적 사실'처럼 간주되기 때문이다. 실제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을 근거로 영화가 제작되어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피해자의 고통 운운하며 증언의 일관성을 강조하면 안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을 때부터 이용수 할머니가 첫 증언을 할 때까지 약 50년의 시간이 흘렸다. 또한 약취 및 유인이든 납치이든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고, 이러한 사건들은 어린 그에게 엄청난 정신적 트라우마를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에게 증언의 일관성을 강요하는 것은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증언의 신빙성이 절대적인 경우는 증거가 증언밖에 없거나 피해자 한 사람의 증언 밖에 없을 때이다. 피해자 한 사람의 증언이 절대적인 '일반적인' 성폭행 사건과 일본군 위안부 성폭행과 같은 '집단적' 성폭행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같은 장소나 같은 환경에서 겪은 이야기라면 객관성이 확보가 되므로 신빙성이 있다. 위안부로서 일본군과 같이 지낼 때 경험은 공유되는 부분이 있으니, 교차 검증이 가능하므로 그 부분에 대한 논란은 크지 않다.

어디까지나 지금 논란을 일으키는 부분은 끌려갈 때 당시 증언이 제각각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이다. 기억이 오래되고 트라우마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제각각인 증언을 가지고 어떻게 신빙성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증언이 더욱 드라마틱하고 자극적이어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은, 더욱 진실성에 의문을 짓게 하는 원인이 된다.

5. 귀국 후 삶에 대한 증언[편집]

5.1. 93년 증언[편집]

대만에서 2년 동안 있다 귀국 뒤 술집종업원, 가정부 등 밑바닥 생활을 떠돌다가 가족들의 끈질긴 권유로 지난 87년 60살의 나이로 8남매를 둔 75세 노인의 후처로 들어갔다. 때늦었지만 면사포도 써보고 혼인신고도 처음이고 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5년 동안 살면서 돌아온 것은 치매걸린 남편의 행패와 폭력, 가족들의 냉대뿐으로 지난 3월 위자료 한푼 못 받고 이혼하고 말았다. #

5.2. 99년 증언[편집]

일제 당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야학에서 한문 등을 배웠으나 43년 16세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대만에서 고생하다 해방 이듬해인 46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결혼을 하지않고 보험회사 등에 다니며 홀로 지냈다. #

6. 도와준 일본 장교에 대한 증언[편집]

6.1. 98년 증언[편집]

16살 때 일본군 막사에 들어가지 않으려다 두들겨맞고 초주검이 되어있는데, 21살된 이 장교가 데려가 보살펴줘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 장교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죽으러 간다"며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대만에 가서 이름도 모르는 장교였지만 인형에 '하세가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영혼결혼식을 치뤘다. 중앙일보

6.2. 2015년 증언[편집]

17살에 가미카제 부대 안에 있는 위안소에 끌려가 어린 일본군인을 만났다. 그 군인은 위안소에서 맞고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나에게 도움을 주고 '도시꼬'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군인의 이름은 '하야까와 기꾸쇼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야까와는 어느 날 저녁 "내일 죽으러 가야 된다"고 하면서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하야까와는 "도시꼬, 너의 부모별도 있고 나의 부모별도 있어. 내가 내일 죽으면 별이 하나 떨어질 거야"라고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하야까와는 다음날 보이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1945년 5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었다.

6.3. 증언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과 반박[편집]

정리하자면 위안부에 끌려간 과정만 봐도 여성가족부에서 조사했던 바에 따르면 이웃의 농간과 수동적 자발성이 곁들여져 위안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후에는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다고 주장하며,이 강제로 끌려간 과정도 어떨 때는 자는 중에 납치, 어떨 때는 도망가다 납치를 당하는 등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측이 있다. 이들은 거기다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이 학계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음을 들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증언의 방법론적 고찰" (이선형, 2002, 서울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등 수많은 논문에서 인용하고 있으며 학계에서 그녀의 진술을 참고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은 거짓에 불과하다. 물론 증언의 신빙성을 따지기 위해 남아있는 자료나 다른 증언과 교차검증해야 하기 때문에 학술 논문에서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과 비슷한 형태의 다른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증언들이 많이 남아있고, 이를 뒷받침할 문서나 영상 같은 자료들도 발굴되고 있다. 따라서 고령의 성폭행 피해자의 증언이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는 것만 보고 무조건 그녀의 모든 증언이 거짓이거나 사실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7. 정의기억연대 고발 기자 회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관련자료[편집]

낮은 목소리 - #1#2#3
시대의 초상 - 위안부라 하지마라 - 이용수 (EBS)
MBC 느낌표 경림이의 길거리특강
美의사당 울려퍼진 '위안부 할머니' 통한의 절규 (연합뉴스)
프랑스 의회서 눈물 떨군 위안부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연합뉴스)
[단독] 최봉태 변호사 "이용수 할머니의 분노, 위안부 청구권에 소홀한 정부 탓"(한국일보)
일본군 위안부 참상, 홀로그램으로 ‘영원한 증언’이 되다(경향신문)
"아베는 역사 산증인 똑똑히 보라" 美의회서 위안부할머니 울분(연합뉴스)
위안부 피해 할머니 “문희상 안 집어치워라…일본 사죄 받아야 한다”(서울신문)
한글날도 수요시위 계속…"日주장 답습하는 적폐세력 청산해야"(연합뉴스)
“증오만 가르치는 수요집회 없애야… 성금 어디 쓰는지 몰라”(세계일보)
우희종 "이용수 할머니, 기억 왜곡된 듯…검증 필요하다" (중앙일보)
이용수 할머니 비판에 윤미향 "할머니 기억 달라졌다" (오마이뉴스)
이용수 할머니 발언 파장, 그간 무슨 일 있었나 (오마이뉴스)
이용수 할머니는 왜 ‘30년 동행’ 수요집회를 비판했을까 (한겨레)
이용수 할머니 “한·일 학생들 왕래 ·교류하면서 역사 배워야” (동아일보)
[1] 가족 중에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람이 있으며 6.25 전쟁 중 사망했다고 한다.[2] 여기에 대한 해석은 엇갈린다. 과거 1997년 아시아여성기금 수령 당시 석복순 할머니는 "정대협에서는 큰 돈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천년 세월이라면서, 우리는 나이 먹고 자꾸 죽어간다며, 그냥 주는 보상금 받아서 쓰고 죽겠다, 이게 다수''라고 주장하였고, 2015년 합의 때도 받지 말기를 종용했다는 다른 할머니의 증언도 있다.[단독/레이더P] 정의연, 과거에도 위안부 할머니에게 "더러운 돈 받으면 화냥X 된다" 발언 반대로 당시 박근혜 정부 관계자들이 돈을 받도록 회유했다는 일본군 위안부 연구자의 지적도 있다.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의 글[3] 단, 전자의 해석이어도 그것이 피해자들이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를 일본의 진정한 사죄로 승낙했다는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앞의 석복순 할머니의 증언에서도 나이 때문에 보상금을 받는다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밝히고 있으며,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취재했을 때 배상금을 받은 피해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연세가 많았다. 자식들이 돈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울자 겨자 먹기로 이를 승낙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일본 측 사죄의 승낙과는 별개로 경제적, 사회적 약자인 위안부 피해자들이 언제 이 돈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승낙한 것으로 보인다.[4] 링크는 아시아경제의 인터뷰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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