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초래한 역사적 변혁과 향후 과제 : 한미우호협회
6·25전쟁이 초래한 역사적 변혁과 향후 과제
칼럼
6·25전쟁이 초래한 역사적 변혁과 향후 과제
이용준
전 외교부 차관보, 북핵 담당 대사
본 협회 편집위원
세계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고대로부터 전쟁은 승리하건 패배하건 관련국들에게 커다란 정치, 사회, 경제적 변혁을 가져왔다. 전쟁의 규모와 피해가 크면 클수록 그 변혁의 범위는 더욱 컸다. 기원전 2세기 이탈리아 반도의 맹주였던 로마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지중해의 최강국 카르타고와 힘에 부치는 전쟁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수십만 병력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 전쟁에서 가까스로 승리함으로써 지중해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만일 카르타고와의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 없었다면 로마는 그저 그 지방의 지역맹주로서 대국 카르타고의 그늘 아래서 주변국들을 지배하는 변방세력으로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변혁을 초래한 전쟁을 꼽는다면 단연 6·25전쟁이 아닐까 싶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도 큰 전쟁이었지만, 그 두 전쟁은 별다른 개혁도 긍정적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고 국력의 쇠락을 촉진했을 뿐이었다. 그와 비교할 때, 한국이 1948년 정부수립을 한 지 불과 2년 만에 발발한 6·25전쟁은 한반도의 역사에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등 여러 면에서 많은 혁명적 변화들을 불러왔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인적, 물적 손실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은 가히 대한민국 근대화의 진정한 시작점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만한 커다란 긍정적 변화들을 가능하게 했다.
동북아 과거사와의 결별과 서방 진영 합류
6·25전쟁을 통해 한국이 겪게 된 가장 의미심장한 변화는 조선 시대 500년간 중국과의 주종관계에 안주하면서 폐쇄적인 삶을 살았던 한국이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문을 활짝 열고 미국의 동맹국이자 서방 진영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한 일이었다. 그 전쟁에서 중국은 위기에 처한 북한을 구원하기 위해 130개 사단 135만 명의 병력을 파병해 한국군 및 유엔군과 교전했고, 결국은 한반도를 다시 두 동강의 상태로 고착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오랜 세월 한국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이 적국으로 참전했던 이 전쟁을 통해 한국은 과거 수백 년간 중국의 그늘 아래서 반독립적, 반자주적 존재에 머물렀던 수백 년의 과거사와 결별했고, 파괴적 전쟁의 와중에 일제 식민통치의 흔적도 상당부분 사라졌다. 그 때문에 한국은 종전 후 수백 년 과거사와 절연하고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과 서유럽 등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으로서 국가 운명을 새로 개척해 나가게 되었다.
2017년 4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 한다. 그건 아마도 “한국은 일시적으로 집을 떠난 중국의 속방이고 언젠가는 다시 중국의 품으로 돌아올 테니 미국이 한중관계에 너무 나서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1882년 조선과 청국 간에 체결된 최초의 무역협정인 ‘조중 상민수륙무역장정’에도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이 명기되어 있다. 같은 해 조선이 미국과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당시, 종주국으로서 조선을 대신하여 미국과 협정문안을 교섭하던 중국은 협정문에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명기하려 했고 조선 조정도 이를 원했으나, 미국의 거부로 인해 협정문에 포함되지 못했다.
조선 시대 당시 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종주국인 중국과 이에 복종하는 속방들이 국제질서의 중심을 이루고, 그 외곽에 흉노, 인도, 일본, 베트남 등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던 나라들이 포진하고 있는 형태였다. 그중 조선은 가장 모범적인 속방 중 하나였고, 중국의 속방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나라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 당시 중국의 속방이었던 나라들은 지금도 모두 중국의 지배하 또는 영향력 하에 있고, 당시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독자적 세력을 형성했던 일본, 베트남, 인도 등 나라들은 지금도 중국과 대치하면서 미국 및 그 동맹국들과 더불어 대중국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 예외는 오직 한 나라, 한국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중화주의 부활을 꿈꾸는 시진핑의 중국이 한국을 어떻게든 중국 휘하로 복귀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은 과거사로의 회귀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대하고 의미심장한 도전이 되고 있다.
북한의 6.25 남침을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도움으로 격퇴하고 미국과 동맹조약을 맺어 주한미군이 한반도 안보유지를 지원하게 됨에 따라, 그 후 수십 년간 한국이 지향해 나갈 운명은 결정되었다. 더욱이 6·25전쟁 이후 1990년대 초까지 40년간 지속된 동서냉전 체제 하에서 한국이 어떤 다른 길을 모색할 여지는 없었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 된 이래 미국으로부터 1961년까지 무상 경제원조를, 1970년대 말까지 무상 군사원조를 받았고, 국제 문명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포함된 미국 진영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던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와 개방적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혜택을 크게 받았다.
그 결과 고도의 민주적 정치체제를 달성했고, 경제적으로도 세계 10위권 안팎의 경제국이자 무역국으로 성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전쟁으로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남북한 사이의 극심한 체제경쟁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더욱 촉진하는 요소가 되었다. 또한 6·25전쟁의 여파로 미국이 중국에 대해 취한 수십 년간의 경제제재 조치도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위한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6·25전쟁이 발발하지 않고 한미동맹도 주한미군도 없었더라면, 한국은 아마도 소련·중국과 미국·일본 사이에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면서 그들의 군사적, 경제적 그늘 아래서 여느 동남아 국가 정도 수준의 국가로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반대의 길을 간 북한
6·25전쟁 이래 서방 진영의 일원으로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 경제, 개방사회를 지향해 나간 한국과는 달리 북한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현재와 같은 세계 최악의 독재국, 인권침해국, 빈곤국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이 처음부터 그리 빈곤하고 세계의 지탄을 받는 나라는 아니었다. 북한은 6·25전쟁 이전부터 한국보다 훨씬 부강한 나라였고, 전쟁 이후에도 거의 30년간 군사, 외교,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우월한 나라였다.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도 한국보다 우세했다. 최소한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가 끝날 무렵까지는 그것이 사실이었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였고, 그에 이어 1990년대 초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로 재기불능의 결정타를 맞게 되었다.
필자가 1979년 외교부에 입부하여 처음 배속된 곳은 국제기구국 휘하의 유엔과였다. 당시 북한 문제를 관할하던 주무부서였다. 신참 직원으로 입부한 후 사무실 내의 과거 비밀문서들을 공부삼아 들추어보던 중 두 가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한국이 1974년 북한의 국민소득(GNP)을 추월할 때까지 북한이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더 부유했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북한이 한국에 무슨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대남 경제지원을 제의하곤 했는데, 한국 정부가 이를 모두 거부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북한은 예전부터 줄곧 헐벗고 굶주리는 나라였다는 교육을 받아온 필자에게 이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남들이 모르는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줄 생각하여 과장께 보고했더니, 비밀사항이니 절대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는 경고가 되돌아 왔다.
외교부에서 일을 시작한 이래 항상 의문스러웠던 점들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매년 유엔과 비동맹회의에서 남북 외교전쟁이 붙을 때마다 한국 외교부는 100여 개 교섭대상국에 사용 가능한 예산이 기껏 몇십만 달러 수준이었는데, 당시 북한은 우리의 백배에 달하는 수천만 달러를 대외원조에 퍼부어 가며 득표교섭을 하고 있었다. 또한 가난하다는 북한이 대체 어떻게 가무단을 전세기까지 동원해 수시로 해외에 파견하는지 궁금했고, 이따금 접하는 북한 문서들에 나타난 종이와 인쇄의 질이 한국 정부의 허접한 인쇄물들과 비교할 때 어쩌면 그리도 고급스러운지 항상 궁금했었다. 이 모든 것은 북한 경제력이 우리보다 한수 위였기 때문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경제 상황 악화로 한국에 대한 외교적, 군사적, 경제적 우위를 상실해 가던 북한은 대남 우위를 회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핵무장에 착안했고, 곧바로 1979년부터 영변 핵 개발의 효시인 5MW 원자로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북한은 근 40년간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2017년 마침내 핵무장 완성을 선언할 수 있었다. 북한은 그 덕분에 대남 군사적 우위를 회복하는 데는 성공했고 핵과 미사일로 미국을 위협하는 이른바 ‘강성대국’을 달성했다.
그러나 핵 개발에 따른 경제 파탄과 유엔 경제제재 조치로 인해 북한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한 체제상 위기를 맞고 있다. 유엔 제재조치는 과거 한국의 좌파정부들이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강력히 추진했던 대북 무상지원과 협력사업들마저 모두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고, 미국의 제3자 제재, 즉 세컨더리 보이콧 압력으로 인해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의 대북한 지원 또한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밀수 등의 방법으로 비밀리에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나, 그런 방식으로 한 나라 경제를 부양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북한 경제는 지속적 쇠락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는 북한의 핵무장 성공이 초래한 ‘성공의 저주’이기도 하다. 이미 성공하고 완료한 핵무장을 취소한다는 건 북한의 국내정치 여건상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도 장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좌파진영이 갈망하는 대북한 경제지원도 장기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격변 움직임의 기로에서
6·25전쟁은 냉전 시대 한반도의 정통성과 주도권을 둘러싼 남북한 경쟁의 산물이었고, 그와 동시에 한국사회 전반에 풍미하던 좌우 이념대립의 산물이기도 했다. 전쟁이 무승부로 끝나고 남북한 사이의 체제대립과 군사적 대립이 70년간 더 지속됨에 따라, 그 부산물로서 한국사회 내의 이념대립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과거 1960년대 서유럽과 일본에서 기승을 부리다 소멸된 교조적 좌파 사회주의 운동이 한국에서는 이제야 점점 본격화되고 있다.
이는 한국사회의 역사발전이 다른 나라들보다 60년이나 늦었다기보다는, 냉전체제 종식과 북한체제의 경제적 몰락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사이의 체제경쟁과 주도권 경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대남 적화통일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북한 당국의 끊임없는 대남 선전선동 공세, 통일전선 책동, 수많은 간첩조직들의 교란활동 등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북한체제가 완전히 몰락하여 소멸되지 않는 한, 한국사회 내부의 이러한 이념적 대립은 앞으로도 장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그러한 가운데, 한국의 좌파정부는 노골적인 대중국 굴종 외교와 친북 정책을 통해 한국의 외교·안보 정책 방향을 지금까지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후진시켜 과거 시대로 되돌리려는 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단순히 특정한 대중국, 대북한 정책의 변경이 아니라, 한국이 6·25전쟁 이래 70년간 그간 소속되어 왔던 국제정치적 진영을 미국과 유럽으로 대표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중국, 러시아, 북한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전체주의 진영으로 전면 전환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인 것으로 보인다.
미·중 패권경쟁이 노골화되고 있는 미묘한 와중에 한국의 대외정책이 중국과 북한 편으로 현저히 경사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고, 대일관계 악화와 한미 간 안보상 이견도 심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의 대한국 방위공약이 크게 약화될 전망이고, 방위비 분담, 전시작전권 전환, 한미 합동훈련 등 동맹현안들을 둘러싼 이견 확대로 이 나라 안보의 주축인 주한미군의 대폭감축 가능성마저 거론되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중국, 대북한 편향 정책은 단순히 외교정책이나 안보정책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이미 국내적으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진 국가주도 경제정책, 복지 확대, 노동권 강화, 국가의 기업통제 등 제반 사회주의 지향적 국내정책들과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어떤 큰 틀의 계획에 따라 내치와 외교에 있어 동시에 진영 바꾸기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현 정부의 정책은 4.15총선 압승으로 더욱 그 추진이 가속화될 전망이며, 최소한 앞으로 수년간 한미관계와 한일관계가 현 수준 이상으로 복원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로 인해 한국의 안보와 대외관계는 향후 결정적인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중국의 경제가 크게 침체되고 대외적 이미지가 폭락하여 미국과의 패권경쟁에서 조기 후퇴할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또한 코로나 사태 이후 범세계적인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퇴조 가능성은 세계 각국의 대중국 경제 의존도를 크게 감소시킴으로써 향후 중국의 경제와 군사력 신장에 심대한 타격을 주게 될 전망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현재와 같은 친중 정책으로부터 얻을 이익은 감소하고 불이익은 증가하게 될 것이므로, 문재인 정부로서는 대미, 대중국 정책을 전환함에 있어 보다 신중해질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 대두된 김정은 유고설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그로 인해 초래될 북한 내 권력 승계에 따른 불확실성과 체제상의 위기는 한국의 안보에 있어 위험요소보다는 안정적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은이 사망한다고 북한이 정책을 급선회하여 핵무기를 포기하거나 남북한 관계가 급속히 호전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북한은 내부적 불안정성이 해소될 때까지는 남북한 관계의 현상유지를 선호할 것이므로 모험적 대남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김정은이 사망하더라도 북한이 핵무장을 포기하지 않는 상황 하에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완화될 가능성은 없으므로, 문재인 정부가 희망하는 남북 협력사업의 실현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4.15총선에 따른 국내 좌파세력의 정치적 세력 강화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새로운 대외적 요인들은 앞으로 상당 기간 중국과 북한의 대한국 압력과 책동을 약화시키는 한편 안보와 존립의 위기에 놓인 한국에게 그나마 숨 쉴 여유를 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주변 정세의 급변상황을 현명하게 활용하여, 우리의 대외관계를 정상화하고 안보태세를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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