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3) 좌우파 문학 논쟁 -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3) 좌우파 문학 논쟁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입력 : 2015.04.20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해방공간서 문학은 정치와 분리될 수 없었다
1945년 광복은 우리 사회 많은 것들의 원점을 이룬다. 광복에 담긴 의미가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건설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45년에서 1948년까지의 이른바 ‘해방 공간’ 3년 동안 진행된 미군정, 대한민국 건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분단 시대의 개막은 현대사의 구조적인 조건을 형성했다.
광복에서 한국전쟁 발발에 이르는 5년이 결코 긴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기간에 현대 국가가 등장했고, 시민사회는 분출하고 폭발했다. 이 열정과 폭풍의 시대의 한가운데 놓인 것은 이념 논쟁이었다. 새로운 국가와 사회 건설에서 우파와 좌파는 서로 다른 기획을 제시했고, 공론장에서 치열하게 격돌했다. 이러한 이념 논쟁에서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문학 논쟁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당시 문학은 시민사회와 문화를 주도했다. 둘째, 문학 논쟁은 우리 사회 모더니티 이해의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1949년 스물여덟 살을 맞이한 시인 김수영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에는/ 안경이 걸려 있고/ 내가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현실처럼/ 그의 눈은 깊이 파지어서 (…) 나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이 있소”(시 ‘아버지의 사진’)라고 고백했다. 이 진술에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전통에의 애착과 그 전통으로부터 결별하려는 의지라는 애증병존의 자의식이 담겨 있다.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이뤘는데,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주도한 시인 임화는 해방 이후 대중적 참여를 통한 민족문학의 수립을 주창했다(왼쪽 사진). 우파 쪽 문학이론의 선봉에 섰던 소설가 김동리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순수문학이 민족문학이라고 역설했다(오른쪽).
■ 임화 대 김동리의 문학 논쟁
논쟁은 본디 두 차원에서 진행된다. 하나는 서로의 견해와 주장을 비판하고 반비판하는 직접적인 논쟁이라면,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논리와 세계관이 충돌하고 경쟁하는 포괄적인 논쟁이다. 후자의 의미로 논쟁을 이해할 때 광복 직후 좌우파 문학 논쟁을 주도한 이들은 임화, 이원조, 한효, 김동리, 조연현, 조지훈이었다.
먼저 포문을 연 이들은 좌파 쪽 이론가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주도했던 임화는 계급성·당파성보다 대중성·민족성을 중시했다. 그가 겨냥한 것은 광범위한 대중적 참여를 통한 민족문학의 수립에 있었다. 이육사의 동생인 이원조는 이런 좌파적 민족문학론을 인민민주주의 민족문학론으로 개념화했다.
인민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은 무산계급을 중심으로 지식인·농민·소시민이 결합해 민족의 해방, 국가의 완전독립, 토지 문제의 평민적 해결을 추구하는 온건좌파 문학론이었다.
반면 한효는 민족성보다는 계급성을 중시했다. 그는 예술을 이데올로기로 이해하고, 이데올로기는 당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광범위한 계급연합을 추구한 인민민주주의 민족문학론에 맞서 무산계급 단일독재를 주장한 한효의 견해는 급진좌파 문학론이었다.
좌파 문학계 안에서 이러한 이론적 차이는 문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당시 남로당 노선과 북로당 노선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좌파에 대응해 우파 쪽 문학이론의 선봉에 섰던 이는 소설가 김동리였다. 김동리는 인간성 옹호의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순수문학이 민족문학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민족문학이란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을 발견하고 그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생(生)의 구경적 형식’ 탐구였다. 문학평론가 조연현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문학이 정치에 예속되는 것을 비판하고, 문학과 정치의 분리를 강조했다. 특히 조지훈은 본래의 가치와 사명에 주력하는 문학의 역할을 주목했다.
우파 문학이론이 순수문학을 부각시켰다고 해서 정치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나라 만들기가 치열하게 모색됐던 당시에 문학은 처음부터 정치와 분리되기 어려웠다.
문학이론은 다양한 문학운동 조직들과 긴밀히 결합됐고, 이 조직들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을 의식하고 있었다. 좌파의 대표 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 창립대회에 소련 총영사가, 우파의 대표 조직인 조선문필가협회 창립대회에 미군정관이 참석한 사실은 당시 문학의 정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좌익들이 1947년 5월1일 서울 남산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있다.
우익들이 1947년 8월15일 광주 중앙공립국민학교에서 해방 2주년 기념식을 주최하고 있다.
■ 문학 논쟁의 현재적 의미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고비로 문학계 헤게모니는 점차 우파에게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좌파 문학이론을 주도했던 임화·이원조·이태준은 이미 월북한 상태였다.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1947~1948년에 진행된 김동리와 김동석의 논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학평론가 백철로 대표되는 중간파의 활동이었다.
문학평론가 김동석은 김동리의 순수문학론이 광복이 이뤄진 상황에선 존재할 근거가 부재하다는 점을 비판하고, 인민의 생활 묘사에 주력하는 리얼리즘 문학론을 제시했다. 이에 김동리는 생활을 넘어서 삶의 본질적 의미를 추구하는 고전으로서의 민족문학론으로 맞섰다. 평론과 대담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논쟁은 당시 좌파와 우파의 논리를 반복한 채 감정적 대응으로 진행된 아쉬움을 남겼다.
중도적인 백철은 좌파의 조급함과 우파의 완고함을 모두 비판했다. 그는 중간파적 문학이론을 작가가 놓인 현실을 주목하는 ‘신현실주의파’라고 명명하고, 좌우파와 구별되는 새로운 리얼리즘과 윤리를 부각시켰다. 정부 수립 이후 우파가 문단 헤게모니를 장악한 상황에서 이러한 백철의 논리는 영향력이 크지 않았지만, 당시 중간파 작가들인 염상섭·계용묵·황순원 등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유용한 문제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이뤄진 문학 논쟁의 핵심은 민족문학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있었다. 문학이 문화를 주도하던 당시 이 과제는 결국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의 문제와 분리되기 어려웠다. 이런 측면에서 계급문학을 주장하든 순수문학을 표방하든 문학 논쟁은 새로운 국가와 사회의 건설이라는 정치 과정과 긴밀히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광복 직후 문학 논쟁에 대한 뛰어난 연구 업적을 남긴 국문학자 김윤식이 날카롭게 지적하듯 해방 공간은 ‘역사를 선택할 수 있는 참으로 희귀한 공간’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특징은 문학의 이념적 대결을 격화시킨 셈이었다.
7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광복 시기에 이뤄진 문학 논쟁에는 낡음과 새로움이 공존한다. 먼저 그 낡음은 광복 이후 그동안 누적된 역사의 무게로부터 비롯된다. 민족문학에서의 ‘민족’은 이제 세계화의 진전과 다문화사회의 도래를 맞이해 새롭게 재구성돼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한편 그 새로움은 문학으로 대표되는 예술의 본래적 의미에서 비롯된다. 민족문학에서의 ‘문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의 재현인가, 아니면 이상의 추구인가. 문학으로 대표되는 문화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의미는 개인 및 사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과 해명에 있다.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한 유토피아적 기획들이 치열하게 경쟁했던 광복 직후 문학 논쟁은 우리 문화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여전히 작지 않은 메시지를 안겨준다.
▲ 광복 직후 가장 주목받은 작가들
이태준, ‘해방 전후’서 좌파로의 변모 과정 담아
황순원,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이념논쟁 성찰
이태준(왼쪽)·황순원
광복 직후 가장 주목받은 작가는 이태준과 황순원이다. 이태준은 일제강점기에 9인회를 이끌던 순수문학의 대표 소설가이자 문장론의 고전인 <문장강화>의 저자였다. 광복이 되자 그는 좌파로 변신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해방 전후>(1946)는 이태준의 자전적 중편소설이다. 주인공 현의 행적은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소시민적 소설가에서 이념문학을 추구하는 좌파 소설가로 변모해가는 작가 내면의식의 변화를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직후 지식사회의 현실과 풍경을 생생하게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1946년 월북한 그는 불행한 말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광복 당시 고향인 평안남도에 머물러 있던 황순원은 1946년 월남했다. 광복 직후 황순원은 중도적 입장을 견지했다. 좌파 문학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 ‘문학’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그가 평생 추구한 것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 탐구였다.
<목넘이 마을의 개>(1948)는 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황순원의 단편소설이다. 버려진 개 신둥이의 강인한 생명력과 그 새끼들을 돌보는 간난이 할아버지의 배려는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잘 보여준다.
오랫동안 전승된 겨레의 이야기를 소설화해 이념논쟁으로 뜨거웠던 광복 직후 현실을 우회적으로 성찰하려는 황순원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202205255&code=210100#csidx2dc8181e0d668bcb82a9c86e17397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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