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2

강미숙 |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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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2 Mar  · Public  · …커지고 있다. 게다가 위안부 연구로는 최고 권위자라 인정되는 일본의 석학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도 일본군과 정부가 개입한 명백한 인신매매 계약이라고 전면 반박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 신드롬이 그동안 전쟁 성노예를 인정하지 않았던 일본 정부의 태도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몰라서' 일본 편을 들었던 서구인들의 시각을 상당부분 교정시켜 주는 효과는 분명해 보인다. 애초 사태의 엄중함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학문의 자유라며 안이하게 대응했던 하버드대 총장은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동의 부동의를 떠나 이런 무신경함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독일 베를린에서 소녀상을 철거를 강요했다가 시민사회의 공감과 반발로 오히려 영구설치에 이른 것처럼 미국에서도 더이상 학문, 표현의 자유라는 커튼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감추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자 함도 있었겠지만 인류보편적인 가치인 평화와 연대라는 지향을 견지했기에 가능했을 하버드대 한인학생회, 반크, 현지사회와 연대를 이끌어낸 한인사회의 지혜와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저들도 남의 일에 저토록 발벗고 나서서 목소리 내주고 싸우는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나.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두 가지다. 첫번째는 반일종족주의 같은 책을 펴내고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고소득이 보장된 기회였다고 지껄이는 전 서울대 교수 이영훈 같은 자가 건재하며, MB정권 시기에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결성된 뉴라이트가 학계, 정치계, 종교계, 교육계, 의료계, 연예계, 체육계 등 영역을 망라하여 세를 넓히고 반민족적인 언행을 일삼아도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고 있으며, 뉴라이트(실질적으로 자금출처는 일본 극우재단이겠지만)에서 청년학생들을 취업과 유학을 미끼로 잠식해가는 것을 15년이 넘도록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아왔다는 것이 기함할 노릇인 것이다. 우리는 사사건건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민족의 이익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에 복무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 토왜들을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 두번째는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자행한 학살과 강간에 대해 사죄하고 후속대책을 마련하는 일을 더는 지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강제개항 당하고 동학농민의 혁명성과 선진성에도 이땅을 청일전쟁의 싸움터로 내준 끝에 식민지로 전락했으니 대체로 근대사를 다룰 때 피해자의 관점에서 침략주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피해자로 살아온 우리에게 베트남전은 엄연히 전쟁폭력에 가담한 가해자였다. 꼬꼬마 시절 전파사마다 울려퍼지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라는 노래가 있었다. 신중현이 만들고 '님은 먼 곳에', '커피 한잔'으로 시대를 풍미한 김추자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였다. 나는 예닐곱살 무렵 신나고 뭔가 설렘이 느껴지는 이 노래를 따라부르며 월남이란 곳이 어딘가 파라다이스쯤 되는 곳인 줄 알았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내가 기억하는 건 이 두소절이지만 가사를 찾아보면 "말썽많은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달고 돌아온 김상사"라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이들 의젓하고 남자답고 용맹무쌍한 김상사들이 실은 무자비한 학살과 성폭력을 자행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러고도 어찌 어른들은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단 말인가 분개하며 앞세대에 대한 반항과 혐오를 가지게 되었던 아픈 기억이 있다. 이젠 어른이 된다는 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일에 공범이 되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끊임없이 기억하고 말하는 것만이 유일하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후손들이 나와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램지어 교수에 대한 세계적인 비판과 항의가 이루어지는 것과 동시에 며칠전 영국 노동당의 데이비드 의원은 인디펜던트지에 남한이 베트남 성폭력 의혹을 인정해야 한다고 기고했다. 그는 "한국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사과를 받으려고 수십년간 노력하고 있으며 일본정부가 발뺌하는 동안 피해자 상당수가 사망했다. 한국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앞장서고 있지만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성폭력 의혹에 관해서는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며 당시 수만명의 여성 그중에는 12,13세 어린이도 있었으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들이 존재를 부정당하며 살고 있다며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했다. 실제 베트남전 당시 현지 주민들에게 한국군은 공포 그 자체였으며 한국군 1명이라도 사살하면 인근마을의 양민을 학살하고 여성은 강간하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한국군을 피하라고까지 했다는 증언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미국의 용병으로 파병된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의 파월 장병들이 돌아왔을 때 우리 언론은 한국군이 4만명을 사살했다고 보도했지만 이중 9천여 명은 민간인이었음을 밝히지 않았다. 대표적인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68년 2월 12일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퐁넛마을에서 한국 해병대 청룡부대에 의해 70여명이 학살된 사건이다. 당시 한겨레21의 베트남 통신원이었던 구수정씨의 르뽀와 참전군인 인터뷰로 세상에 알려졌고(구수정,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 한겨레 21 279호) 2004년 한국시민사회의 모금으로 추모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가난했던 시대 한몫 잡을 수도 있었던 데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시절 자유수호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갖고 떠난 청춘들이었으니 이들도 국가의 피해자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뜻했든 뜻하지 않았든 민간인 학살과 여성들을 강간한 오욕의 역사를, 있었던 과거의 폭력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사건은 100여 건 이상이다. 이외에도 빈집을 털어간 한국군의 숱한 강도, 강간은 현지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화인을 남겼다.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수 없지만 끝까지 쫓아가 응징하는 집요함은 미군들마저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이 민간인학살이 있었던 마을마다 증오비를 세웠는데 유독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 "하늘을 찌를 죄악, 만대에 기억하리라"였다니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서늘하다. 누군가 우리 민족의 죄악을 만대에 기억하라고 염원하는데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이 팬데믹을 거치면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 새로운 표준과 기준을 만드는 국가의 가능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관을 쓴다는 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오욕이 되지 않는다. 선두에 선다는 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혹은 영향력이 미미하여 관심사에 오르지 않았던 흑역사에 대해서도 책임있는 자세를 견지할 것을 요구받는다. 한국은 이제 누가 봐도 개도국은 물론이요 중진국도 넘어선 선도국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영광과 오욕은 한몸이라서 거부할 수 없는 무게다. 한국은 더는 피해자 포지션만 강조할 수 없는, 그래서도 안되는 나라가 된 것이다. 독일 뉘른베르크 박물관에 갔을 때 그 많은 전시와 자료를 매우 꼼꼼하게 읽는 연인과 가족들이 많았다. 진지하게 둘러보고 아이에게 설명해주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독일인들을 보며 시민교육의 위력과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을 선도하는 저력이 여기에 있구나 생각했다. 우리는 과거를 반성하며 청산하는 노력을 지금도 게을리 하지 않는 독일을 칭찬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일본을 비난하고 조롱해왔다. 자신의 선조가 저지른 범죄를 낱낱이 공개하여 가르치는 나라, 남이 하는 걸 칭찬하긴 쉬워도 내가 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우리 차례인 것이다. 우리가 덴노니 일본 군가니 하는 걸 들으면 오싹해지는 것처럼 베트남인들이 훈장을 가슴에 달고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노래를 듣는다면 어떤 마음이 될까. 자신들에겐 지옥에서 온 사자같았던 한국군이 청춘남녀의 야릇한 설렘과 경쾌한 리듬에 맞춰 미래를 꿈꾸는 듯한 노래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대한의 독립뿐만 아니라 동양의 평화, 인류의 평화를 위해 거사를 일으켰다는 안중근 의사의 가르침이 계속 자랑스럽게 남으려면 미얀마 시민들의 민주화투쟁에도 지지와 연대를 표해야겠지만 베트남과도 과거의 전쟁폭력, 성폭력에 대한 한국군 자체적인 진상조사와 진심어린 사죄를 함으로써 아시아 국가들과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위안부 여성들의 사망자가 늘고 생존자도 고령이 되어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를 받아내야 하는 시간이 촉박한 우리는 한국군에게 강간당하고 아직 생존해 있는 8백 여 전쟁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동일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위안부의 전쟁 성노예 인정을 요구해온 그간의 외침이 공허해지지 않는다. 그래야 전쟁폭력의 기억 속에 사는, 라이따이한이라 차별받는 베트남인들이 치유받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 그래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물려줄 수 있다. 그래야 위협적인 가스통 해병대 할배들이 아니라 약소국의 설움으로 남의 전쟁에 용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진심어린 사죄를 통해 그들도 넓은 의미에서 전쟁폭력의 피해자로 치유받고 생을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국가적 치욕으로 삼아 거짓과 날조를 후손들에게 강요하는 일본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진상조사를 통해 진심어린 사죄와 적절한 배상을 하고 진실한 관계개선으로 나아가는 독일의 길을 갈 것인가, 이것도 아니면 베트남 민간인학살과 관련한 일을 민간에 맡기고 국가는 계속 모른 체 할 것인가. 국가의 품격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이제 한국은 오이디푸스왕이 선택해야만 했던 세 갈래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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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5 Mar  · Public  · …9월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을 한분한분 안아주시며 할머니들이 증오가 아니라 화해를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노벨평화상 후보로 손색없다며 진심어린 위로와 감사를 전했다는 것이다. 또 가해자의 용어인 ‘위안부’라는 말을 쓰지 말 것과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한 분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릅니다”고 방명록에 남겼다니 참으로 냉철하면서도 다정하고 따뜻한 품성의 지도자인 듯하다. 독일은 1970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죄라 평가받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죄가 있다. 그는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꿇고 사죄함으로써 ‘기억과 책임, 그리고 화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슈뢰더 전 총리도 재임중인 2000년 나치 강제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합의를 이뤄내고 2004년 바르샤바에서 또한번 독일침략을 사죄했다고 하니 그의 나눔의 집 방문은 하등 이상할 게 없지만 최고위층 인사로는 매우 이례적인 행보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자서전 <문명국가로의 귀환> 한국어판 출간 기념으로 방한한 일정이었는데 나눔의 집 방문이 민감한 한일관계를 감안한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는 독일 외교부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처음 한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고위층으로는 나눔의집 방문이 처음 있는 일로 아무리 전 총리라 해도 민감한 이슈였을 텐데 처음의 약속을 지켰다니 과거 반대를 무릅쓴 사민당 슈뢰더 개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일면을 보는 듯하다. 방문당시 이옥선 할머니가 팔목에 끼워준 팔찌를 방한 내내 끼고 다녔으며 4년이 지난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니 정치인의 진정성과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우리로서야 민주정부 두분 대통령을 제외하면 죄 국외로 도망가거나 감옥간 대통령 뿐이라서 그런지 정치인이 아니고서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대답하는 시민들이 거의 없는데 독일은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나 음악가를 제치고 정치인들이 존경받고 사랑받는다고 하니 참 생경하다. 한때 가장 존경하는 독일인 1위를 콘라도 아데나워 전 총리가 차지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참 좋은 정치인이었구나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들이라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능하지도 않고 말이다. 우리는 존경한다고 하면 O빠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김대중•노무현• 문재인, 누가 되었든 가장 존경하는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좋은 리더란 무엇일까.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앞장서서 나를 따르라 하는 장군형 리더가 필요했고 또 선호했다면 쌍방향 소통의 시대인 지금은 공감으로 사회적 약자를 품을 줄 알며 이웃의 눈물을 닦는 데 자신이 가진 힘을 쓸 줄 아는 따뜻하고 포용력있는, 그러나 일관된 원칙을 견지할 수 있는 단호함과 냉철함을 갖춘 리더를 필요로 한다. 슈뢰더 전 총리와 한번이라도 이야기를 해본 사람은 한결같이 그가 매우 유머러스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후 전임 대통령으로서 평화와 국제사회의 협력을 위한 여정을 걷는다면 그런 모습이 아닐까 기대해본다. 우리도 이제 그런 전임 지도자를 가질 정도는 되는 시민들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 한 사람, 화선지에 붓으로 한 자 한 자 정성껏 마음을 담는 사람, 소연 슈뢰더 김 님의 부드럽고 미래지향적인 리더십에 박수를 보낸다. 내게는 딸이 독일 교환학생을 하며 겪은 매우 다채로운 경험을 전해들은 것과 딸이 동행해준 보름간의 여행이 독일에 대한 경험의 전부다. 유학 초기에 딸은 버디가 되어준 소피의 고향 밤베르크 부모님의 집에 초대받아 1박2일을 머물렀는데 그녀의 부모님은 하루종일 뉘른베르크 여행을 함께 하며 전쟁박물관, 전당대회가 열린 운동장 등 나치의 참상 이모저모를 소상하게 설명하고 안내해주셔서 딸아이도 몹시 의외였다고 했다. 어떤 마음이면 동양의 나라에서 온 어린 여성을 아름다운 밤베르크의 성이나 자연이 아니라 오욕과 수치로 가득한 나치의 현장으로 안내하게 만들까. 치부를 기꺼이 드러내보이는 용기와 기꺼운 수고, 일상에 초대하여 보통의 독일인들이 사는 모습을 공유해주는 친절함, 그것에서 나는 독일의 힘을 보았다. 그리고 딸의 특별한 친구가 된 호프만이 한국에 왔을 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그런 그를 있게 한 독일의 교육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0월 3일은 한국의 개천절이고 독일은 분단을 극복한 새로운 통일 독일의 시작을 기념하는 통일절이다. 분단과 갈등, 가족애와 이웃에 대한 배려도 많이 닮은 나라, 이미륵과 윤이상을 품어준 나라, 5.18 광주의 참상을 전세계에 알린 참된 저널리스트 힌츠 페터의 나라로 기억하는 독일은 딸 덕분에 더욱 가까운 이웃으로 다가왔고 Soyeon Schröder-Kim 님 덕분에 독일 시민들의 연대와 평화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면서 마치 이웃처럼 가까워진 나라가 되었다. 아, Soyeon Schröder-Kim 님, 인사가 늦었어요. 정성껏 보내주신 한아름의 선물 잘 받았어요. 소연님의 새해 첫날 덕담대로 이미 뜻밖의 기분좋은 일을 만났고요, 올 한해가 다채로워질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어요. 건강과 행복을 기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소연님도 옆지기와 함께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하는 한해가 되시길 바랄게요. 팬데믹은 우리에게 함께 하는 공간은 앗아갔지만 함께 하는 마음자리가 얼마나 더 넓어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언젠가 한국 방문길에 강원도에서 뵙게 되는 날이 온다면 더없이 기쁠 거예요. 그런 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네요. 두분도 '하소즐'의 기쁨을 벗삼아 오랫동안 행복한 동행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1.3.5 강미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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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14 Jul 2019  · Public  · …일본계 미국인 감독의 위안부 다큐멘터리 <주전장> 때로 한편의 영화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1965년 미국은 중국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한일 수교를 압박했고 2015년 한일 위안부 협상도 오바마 정권이 한일 양국에 압력을 행사한 결과다. 미국은 전쟁을 감안한 군대를 일절 금지하는 평화헌법 9조를 포함한 일본의 평화헌법 초안을 작성했지만 몇년후 공산세력이 동아시아 지역에 확장하자 일본에 재군비 압력을 가했다. "전후 당시 일본 정부가 재군비에 반대하자 일본을 친미 재군비로 전향시킬 인물을 찾았고 기시 노부스케라는 적임자를 감옥에서 찾아내 그를 석방하고 총리선거를 위한 비자금을 댔다." 기시 노부스케는 진주만 공격을 감행한 도조 히데키 내각의 각료로 당시 A급 전범 혐의자로 수감중이었고 그의 외손자가 아베총리다. 영국은 브렉시트로 제국주의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일본은 수출규제로 제 발등을 찍기 시작했는데 미국의 워싱턴 룰은 이단아 트럼프로부터 균열이 시작되는 걸까.
mnews.joins.com
일본인도 "무섭다"···'위안부 집착' 아베 뒤엔 이 종교 있다

강미숙
26 Feb  · Public  · 폭력 미투 유감 초등학교 때 학교 야구부원이었던 두살아래 남동생은 허구헌날 야구빠따로 두들겨 맞고 들어와 시퍼렇게 멍든 엉덩이를 부모님 몰래 안티푸라민으로 마사지해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투수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중학교로 이어졌지만 매를 드는 법이 없었던 부모님이 강제로 그만두게 할 때까지 지독한 매질과 폭력에 시달렸다. 동생이 가여웠지만 꿈을 위해서라면, 운동선수가 되려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 시절엔 야트막한 담장너머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저씨에게 두들겨맞는 게 특별할 것도 없었고 일반적으로 애들은 맞으면서 큰다는 신념을 철썩같이 믿었던 시대였다. 사춘기 때 딱 한번 아빠에게 대들다가 한 대 맞은 일을 제외하면 온갖 체벌과 언어폭력, 성폭력은 꼭 내가 직접 겪은 것은 아니더라도 12년간 학교에서 부족함 없이 경험했다. 내 아이들의 유년기 돌보미였던 분(배우자가 교사였다)도 애들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말로 해서는 안 된다며 따끔하게, 아주 정신이 번쩍 들도록 때려야 한다는 말씀을 틈틈이 강조했다. 유치원 다닐때 고등학생이던 그 집 오빠가 제 부모에게 손으로 귀싸대기 맞은 걸 여러번 이야기해서 계속 맡겨도 되나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은 아주 선량하고 사랑이 많고 인정많은 분들이셨다. 사랑의 매를 폭력이라고 보지 않았던 시절 부모들은 괴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과거 폭력에 대한 인권감수성이 매우 낮은 사회에서 살았다. 국가가 앞장서서 국민에게 정서적 신체적 폭력을 가했으며 군대는 폭력으로 점철된 군사문화를 주입함으로써 전 사회를 병영화했다. 학생은 병사, 죄수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으며 어떤 식으로든 항변은 주어지지 않은 권리였다. 지각해도, 공부를 못해도, 떠들어도, 다투어도 선생님들은 매를 들고 군대식 기합을 강요했다. 엄마들은 때려서라도 가르쳐달라고 선생님에게 읍소했고 부모가 자식을 폭력으로 훈계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 인식했다.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매를 들어서라도 정신차리게 해주겠다는 학원들은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내 자식은 더 때려달라고 특별 주문하는 부모도 있었다. 2016년 미투열풍 때도 느낀 것인데 마치 폭력의 무균지대를 지나온 것처럼 착각하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많다. 드라마에선 아직도 술취한 가장이 상을 들러엎거나 아내와 아이들에게 손찌검하는 장면이 이해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버젓이 전파를 타고 가정으로 배달된다. 내 아이가 유아기였을 때 성교육의 전도사로 혜성처럼 나타난 구성애씨가 TV에 나와 “만지지 마세요. 전 아이를 가질 몸이란 말예욧!”하라고 가르친 것이 획기적인 성교육(지금 기준으로 보면 여성혐오적 발언일)으로 받아들여진 시대를 지나왔다. 경제규모 세계 10위권, G7 이탈리아를 능가하는 국민총소득, K방역, K팝의 환상 뒤에 숨겨진 우리의 자화상은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겨우 음담패설과 타인의 외모에 대해 칭찬이든 비하든 언급하는 것 자체가 성희롱임을 자각해 가고 있다. 시대적 변화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문화적 지체현상이 우리의 삶을 둘러싼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아직도 꼬리잡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 과정인 것을. 그저 보다 나은 사회로 가는 올바른 방향이라는 믿음으로 한발한발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홉스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본능적 욕망이 통제없이 날뛰는 자연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 즉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와 같다고 했다. 이런 야만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 계약이며 인간의 감추어진 본성인 폭력을 낳는 심리적 근원을 성찰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쌍둥이 배구선수의 학창시절 폭력을 시작으로 스포츠계, 연예계의 학폭 미투가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되거나 미화될 수 없으니 마땅한 일이겠으나 난 이 사태를 지켜보는 게 불편하다. 과거의 맥락을 무시하고 현재의 관점, 법감정이나 인권의식의 잣대로 과거를 해석하는 휘그주의의 오류는 없는가. 성폭력 미투든 학교폭력 미투든 우리 사회가 집단광기와 마녀사냥, 혹은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는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10여년 전에는 위법이나 편법이 아니었던 입시 포트폴리오 준비과정에서 불거진 표창장 하나로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것도 모자라 묵묵히 미래를 준비하며 매진해온 젊은이를 기필코 파멸시키고야 말겠다는 기괴한 잔인함, 스텐포드 대학을 조기졸업한 수재가 음악적 재능까지 뛰어나자 온갖 말도 안되는 뇌피셜로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려 한 타진요(타블로의 학력위조를 집요하게 제기한 집단)의 집단광기, 미투 열풍으로 서정범교수가, 박진성 시인이, 박재동 화백이 감내해야 했던 야만의 시간들. 그리고 오늘 스포츠계와 연예계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검증되지 않은 폭로가 필터링 없이 보도되는 현상까지 다 사회적 계약의 범주를 넘어선 마녀사냥을 닮았다. 수십년을 진보정치판에서 고군분투하다 이제야 마이크를 쥔 김종철씨가 동료에게 성희롱을 한 바람에 하루아침에 삶의 모든 것이 부서졌다. 그의 대표직 박탈은 응분의 처사라고 생각되지만 당적마저 박탈한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미투를 제기한 것이 김종철이라는 개인을 응징하고 진보정치판에서 퇴출시키고자 함인가, 아니면 보다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들고자 함인가. 박진성 시인은 거짓미투임이 밝혀졌지만 지금도 일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매년 미투가 있었던 10월만 되면 정수리부터 장기를 관통하는 발바닥까지 온갖 통증이 자신의 신체를 핥는 느낌이 너무도 고통스럽다며 자살을 암시하기도 했었다. 그는 어떤 의혹과 의심과 불신만으로 한사람이 20년 가까이 해온 일을 못하게 하는 풍토는 없어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과거 서정범 교수가 그랬고 박재동 화백이 그러하다. 성폭력이든 학교폭력이든 미투의 목적이 무엇인가. 가부장적, 성차별적 문화를 약화시키거나 나아가 종식시킬 수 있는 데 기여하고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다. 단지 가해자로 지목되는 개인의 삶을 부숴버리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진행된다면 과거의 피해자는 곧 오늘의 가해자가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범죄에 적용되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미투에서만큼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이름하에 작동하지 않는다. 확인되지 않은 폭로만으로 악마화하고 인격살인과 시회적 매장으로 이어지는 마녀재판은 우리사회가 자연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성폭력, 가정폭력, 군대폭력, 학교폭력 그 외 어떠한 폭력이든 피해자가 부끄러워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관행과 관습으로 치부되어 침묵을 강요받고 가해자가 응분의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위에 오르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한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자 하는 사덴 프로이데 현상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좀 더 정교해져야 한다. 진정한 사과를 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선정적인 폭로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성찰과 사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과거 인권감수성, 성인지감수성이 낮았던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누구도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미숙했던 성장기에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잘못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했든 타인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나또한 여고시절 담임선생님에게 성추행 당했고 대학시절 후배였을 때는 선배들에게 하키스틱으로 맞고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 불쾌함의 연원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도 갖지 못했던 시절의 치욕스러웠던 기억을 오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도 가부장과 군사문화의 피해자였음을, 우리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였음을 알기에 내 마음을 다독인지 오래다. 그럼 나는 피해자이기만 했을까. 내가 선배라는 강자가 되었을 때는 명예남성으로 살며 여성성을 강조하는 여자후배들을 힐난하고 남녀후배들에게 기특하다고 엉덩이 두드려주거나 어깨동무도 서슴없이 하는 등 지금 기준이라면 성희롱이라 할만한 언행을 여러번 했다. 만날 기회가 있다면 진지하게 사과하고 싶다. 대부분은 한때의 치기라고 잊어버리고 살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상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사회적 지위가 있어 발언권이 많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에 분노한 후배가 미투를 하면 나의 삶은 파괴되어야 하는가. 쌍둥이 배구선수를 비롯한 운동선수들의 경우 학교폭력이 아니라 스포츠 폭력, 엘리트 체육이 조장한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만 두루뭉술하게 학교폭력으로 다뤄진다. 학교 운동부 치고 폭력에 노출되지 않은 선수들이 얼마나 될까. 운동선수들은 스포츠 폭력의 관점에서 그 근원부터 살펴야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온당한 일인가. 쌍둥이 배구선수의 경우 그들의 어머니와 감독, 코치들의 무신경이나 권력의 남용은 문제시되지 않는 것인가. 학폭, 스포츠폭력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부모나 주변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어른들의 무책임이 더 큰 문제 아닌가. 이번에 가해자로 지목된 기성용 선수의 경우 초등선수시절 선수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폭력에 감독이 세심하게 신경쓴 덕분에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아이가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있을 때 부모나 교사, 학교는 아이가 보내는 신호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정당하고 합당한 절차를 밟았는지, 가해자가 그 행동의 무게만큼 처벌받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며 재발방지를 위해 학교 당국이 철저하게 관리감독했는지 묻는다면 과연 가해자 본인에게만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인가. 폭력의 가해자를 한줌도 옹호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시절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는 어른들의 무책임과 불성실함은 쏙 빼고 어린 학생들만 지금에 이르러 악마화하고 응징하여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 묻고 싶다.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사건을 들추어내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을 피해자 포지션에 가두고자 함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변화의 주체로 자리매김하여 사회 정치적으로 재해석하고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와 또다른 피해자를 미연에 방지하는 성과로 이어져야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고 진정한 치유와 해방을 기대할 수 있다. 한때의 잘못이 결코 가볍다 할 수 없겠지만 공인이 된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삶 전체를 부숴버리고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것을 무위로 만들어버리는 마녀재판식 가중처벌은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와 다를 게 없다. 좀더 냉정하게 책임을 묻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번 입에 오르내리면 무고가 밝혀져도 삶이 복구되기 어렵다는 것을 여러 사람들을 통해 보아왔다. 온갖 종류의 폭력 미투를 보며 인간 본성에 감추어진 폭력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세월이 좀더 흐르면 분명 트랜스젠더나 동성애, 양성애자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은 범죄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로를 통한 악마화가 아니라 과거 폭력에 대한 성찰과 사과, 아직 늑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온갖 차별과 폭력을 근절하고자 하는 집단의지가 아닐까.
강미숙
10 Jun 2020  · Public  · …사퇴에 열을 올리며 통합당 위안부 할머니 피해 진상규명 TF위원장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연일 핏대를 세운다. 2017년 11월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계비 지원과 기념사업 추진의 법적 근거인 피해자 보호,지원법 개정안이 발의되었을 때 기권을 행사한 사람이 말이다. 곽상도와 이용수 할머니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늘 윤미향 의원 보좌관이 손영미 소장의 죽음을 염려한 것이 마치 그들이 손소장의 죽음과 모종의 연관성이 있는 듯한 뉘앙스로 보도된 기사를 보며 충분히 그런짓을 하고도 남을 인간들이지만 그래도 나의 예감이 틀리기를 바랄 뿐이다. 줄리언 반스는 주인공 토니가 사건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떠한 예감도 하지 않았음에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제목을 달았다. 예감은 자신이 한 행동을 자각할 때, 타인의 선택을 기억할 때에만 유의미하다. 3년전 위안부할머니들을 지원하는 법률안에 기권을 던졌던 곽상도는 대통령을 향해 윤미향을 처벌하라고, 정의연을 해체하라고 공격하는 오늘을 예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 틀림없이 그는 "예감"할 만한 그 어떤 행동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곽상도가, 검찰과 언론이 예감한대로 흘러가게는 안될 것이다. 이제는 너무나 많은 시민들이 검찰과 언론, 극우세력이 주거니 받거니하며 의혹으로 부풀려가는 공식과 문법을 다 알아챘으니 말이다. 20대를 시작하자마자 마주한 자랑스럽고 벅찬 87년 6월, 하지만 매년 6월이 되면 언제나 91년 6월이 더 아프다. 2020년 6월이 그런 방식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강미숙
17 Jul 2020  · Public  · …위해 양보하고 화해하자며 위안부 할머님들에게 2차 3차 가해를 서슴지 않던 김재련이 2차 가해 운운하는 것이 왜 블랙코미디로 느껴지는 걸까. 미투를 제기하는 피해자 대부분은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원한다고 한다. 미투의 목적이 상대방의 사회적 파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이 고소인 여성과 연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당사자인 고소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인지감수성에 경종을 울려 성차별 없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최소한 기자회견에서 명백한 성범죄라고 보기에 애매한 몇몇 건을 찌라시처럼 흘리며 망자가 된 피고소인을 악마화하고 고소인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마저 등돌리게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의견을 달리 하거나 조심스럽게 문제제기하는 사람들과 판단중지를 선택하며 지켜보고 있는 다수의 대중을 2차 가해라며 무조건 박원순을 애도하는 이들을 비판하고 고소인을 옹호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성인지감수성이고,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인가. 당신들의 그런 태도는 합당한 것인가. 그의 이름 석자를 빼고는 한국의 시민사회를 논하기 어려울 만큼이었기에 아직도 애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시민들과 자신의 성인지감수성을 돌아보려고 노력해온 선량한 남성 일반을 적으로 몰아 건강한 시민사회를 분열하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이건 정상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한남들이 하던 극단주의를 답습하는 것이며 당신들의 분노에서 파시즘이나 메카시즘의 광기마저 느껴진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첫째, 박원순 시장이 실종이 보도된지 두시간도 채 안되어 월간조선과 청년의사 등에서 박원순 시장의 사망을 보도했다. 와룡공원 어드메라고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장소도 특정하였고 서울대 병원에 운구가 도착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왜 이런 일이 그냥 넘어가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실종보도와 거의 동시에 미투고소, 사망이라는 마치 계획되어 있었던 것같은 언론의 보도가 시민들로 하여금 미투를 정치적으로 악용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시발점이 되었다. 따라서 시민들의 입에만 재갈을 물릴 게 아니라 기사를 쓴 1차 언론과 확인도 않고 받아쓴 2차 언론을 수사해야 한다. 이젠 사망도 거짓으로 보도하는 인간말종같은 망나니짓을 하는 언론을 더이상은 두고 볼수가 없는데 어디에서도 이것을 문제삼지 않는다. 참 신기하다. 둘째, 고소인의 요구가 진정어린 사과였다면 피고소인의 장례절차를 끝내기도 전에 무리하게 기자회견을 강행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막장드라마 보여주듯 예고편을 날리며 진행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속옷, 입술, 침실, 기쁨조 같은 선정적이고 야릇한 상상을 하게 하는 일방적인 주장이 확인되지 않은채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미투가 정쟁수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결정적인 성추행 증거를 하루빨리 제시하여 고소인 여성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게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려면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이 성희롱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고도 위력을 행사하였는지 조사해야 할것이니 상호 주고받은 문자에 고소인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도 밝혀야 할 것이다. 고소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부관참시를 해서라도 분노를 투사하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선배여성으로서 고소인이 하루빨리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피해자 우선원칙을 중시하고 있으니 진혜원 검사의 말처럼 민사소송을 통해 법적 판단을 받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미투에 대해, 미투를 제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대해 여성단체가 어떤 메뉴얼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론을 타블로이드화 하게 만드는 기자회견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소인 편에 서지 않을 거라면 무조건 입 닥치라 하고, 피고소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아파하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동의하는 시민들, 너무 고통스러워 잠시 침묵하는 모두를 악마화하는 건 여성단체가 그동안 약자의 편에 서서 가시밭길을 걸어오며 보여준 모습과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다. 온갖 비난과 모욕 속에서도 여성운동이 지금까지 견지해온 여성주의 가치는 사람을 살리는 데 있다. 우리는 이미 소중한 사회적 자산을 잃고 이유야 무엇이든 저마다의 이유로 아파하고 있다. 그것이 고소인에 대한 적대행위가 아닐진대 그렇게 몰아가서야 되겠는가. 그동안 여성인권을 위해 최전선에서 일해온 여성의 전화와 성폭력상담소는 김재련의 일련의 발언에 동의하는지도 입장을 밝혀야 한다. 미투의혹의 진상을 밝히는 게 목적인데 어떤 이유로 서울시 특별조사단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1차 진상조사를 마치면 경찰조사로 넘기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여성단체는 남녀 모두가 성차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미투 메뉴얼을 가동하고 2차가해를 유도하는 김재련을 견제해주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후 여성단체의 정체성과 정당성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며 피해는 어디선가 위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성추행을 당할지도 모르는 진짜 피해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강미숙
7 Jun 2020  · Public  · …혼자 지내기 힘든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을 돌보며 살아오신 마포 평화의 우리집 쉼터 손영미 소장님. 올해 육십세라는데 2004년 서대문쉼터 시절부터 무려 16년을 할머니들과 살아왔으니 그 세월이 차마 가늠이 되지 않는다. 마포쉼터는 작년 1월 김복동할머니를 보내고 길원옥할머니 한분만 기거하셔서 그분과 동거하며 파주 자택에는 주말에만 잠깐씩 다녀오셨다고 한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것 외에 그녀에게 개인의 삶이란 게 있기는 했을까. 마흔 네살 꽃다운 시절부터 16년 세월동안 많은 할머니들을 떠나보내고 언젠가 다 떠나실 그 곳에서 자신을 조용히 불사른 사람. 그녀를 그 자리에서 견디게 한 것은 최저임금도 후원금도 찬사도 아닌, 자신이 만든 삶의 지향과 지도였을 것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명분과 당위성으로 설명해도 노인들을, 그것도 피해자 할머니들을 보살피며 사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었더냐 온몸으로 사랑하고 한덩이 연탄재로 쓸쓸히 남는 게 두려워 연탄 한장되지 못하는 우리가 아니더냐" 했던 안도현 시인의 일갈처럼 기꺼이 스스로 연탄재의 길을 걷던 분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한번도 타인을 위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함부로 휘두르고 써제끼는 칼과 펜은 이미 사회적 흉기가 된지 오래다. 자신의 신념으로 지탱해온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지옥의 삶. 개인의 행복을 위한 삶을 내려놓고 길원옥 할머니의 아들도 못한 16년을 타인을 위한 삶을 살고도 끝내 부정당한 현실을 못견뎌 극단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검찰은 고발장 하나로 정의연 사무실 압수수색도 모자라 정의연 회계자료를 은닉했을 거라며 마포 쉼터를 압수수색하고, 안성쉼터와 안성쉼터 시공업체 사무실도 압수수색했다. 사람들에게 겁주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기술자들이 고인을 조사한 일도 출석요구를 한 일도 없다고 뻔뻔하게 시치미를 뗀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이후 윤미향 의원도 손영미 소장도 어떻게 살아왔을지 짐작이 된다. 시도때도 없이 초인종을 누르고 전화를 걸고 마당에 카메라 렌즈를 고정시키고 사람만 나타나면 낮밤을 가리지 않고 플래시를 터뜨렸을 파파라치들. 데칼코마니다. 전직대통령을 그렇게 보내고 조국과 그의 가족을 모두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그렇게 많은 억울한 피의자들을 보내고도 아직도 그 못된 습을 버리지 못하는 벌레같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며 더러운 웃음을 짓는 똥파리들. 며칠전 국회의 윤미향 의원사무실 문틈에 기자들이 매달려 핸드폰을 들이대고 역시 삼성폰이 더 좋다느니 하는 한장의 사진은 악마의 얼굴이었다. 블라인드의 빈틈으로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그녀가 웃는다고 보도하는 사람들을 누가 기자라고, 언론인이라고 부르는가. 이용수 할머니는 이제 당신이 무슨 일을 하신 건지 생각이라는 걸 하고 계실까 싶다. 시모께 혹독한 시집살이를 받은 트라우마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않은 나의 시어머니는 치매가 아니어도 변덕이 심하고 심술이 많은 게 노인이라고, 시기심과 질투가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며 나에게 노인과 함께 일할 생각을 하지 말라셨는데 그분을 보며 그 말씀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면 너무 무례한가. 92세의 연세답지 않게 세련된 디자인의 멋진 자켓을 입으시고 정대협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이 26년간 당신들을 하나도 도와준 게 없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팔아먹었다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왜 난 그분께 감정이입이 안되는 것일까. 당신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윤미향과 정대협, 정의연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 그리고 당신들과 함께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던 시절부터 광야에서 눈비를 맞은 수많은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오랜세월 함께 쌓아올린 성과임을 진정 모르시는 것일까. 먼저 가신 당신의 동료들에게 진정 당당한 문제제기인가 묻고 싶어지는 나는, 인류애가 부족하고 패륜적인 사람인가. 노인혐오로 이어질까 두렵다는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가족과 함께 한가하고 평화로운 주말을 즐기다 부고소식을 듣고 내 마음도 함께 무너졌다. 내마음 더 다칠까봐 거리를 두고 일상에 충실했던 내가 죄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누리는 소소한 행복같은 개인의 삶을 마다하고 오로지 위안부할머니들에게 당신의 생을 내어주며 헌신해오신 손영미 소장님, 그동안 정말 애쓰셨습니다. 부디 편히 영면하소서. 당신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헌신을 기억하겠습니다.
강미숙
27 Jun 2019  · Public  · …말을 듣고 싶다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말한다. 심지어 아무런 힘이 없는 소녀상에게조차 적대적이다. 미군의 동아시아 전략 속에서 진행된 부실한 도쿄전범재판이 지금까지 동아시아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또한 식민지 후처리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전범 일본에 대한 교육은 도외시한 채 해방전후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탄압과 왜곡에만 열중하며 정치인들은 전범들과 흥정했다. 일본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 자들은 다름아닌 식민지배체제에서 기득권이 된 자들이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이것이 2차세계대전 종전 후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젊은이들에게 역사의식을 요구만 했지 공론의 장에서 제대로 논의한 적이 있던가. 가해자인 독일은 지금도 중등과정에서 의무적으로 조상의 폭력에 대해 가르치고 있건만 피해자인 우리는 민족적 정한에만 기댄 채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을 못하고 있다. 민족주의자라면 당당하게 요구하고 당당하게 책임을 물어야 하건만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슬프고 또 슬프다. 어쩌다 전범기업이 징용자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이라도 나오면 화들짝 놀라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줄까 걱정된다고 설레발치는 게 유력한 정치세력이라는 게 부끄럽다. 아베집권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 경향이 심상치 않다고 한다. 그들은 다시 강한 일본을 요구하고 있고 평화헌법을 부정하는 발언의 횟수도 잦아지고 있으며 군국주의의 발톱을 심심찮게 드러내고 있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의 당사자인 자유당이 일본과 모종의 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나의 우려는 허무맹랑한 공상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오후 4시 40분, 크라쿠프에서 이번 여정의 종착지인 구 동독지역이었던 드레스덴으로 가는 플릭스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라이름처럼 가도가도 끝없는 밀밭이 이어지는 바깥풍경에 평원에서의 삶도 꽤나 단조롭겠다 싶다. 문득 눈을 들어 하늘을 볼 때마다 어디든 산이 둘러쳐있는 우리의 산천이 그립다. 모퉁이를 돌면 또다른 능선과 계곡을 만나는 강원도의 길, 척박하고 좁은 농지에서 삶을 일구어 온 우리 농업이, 선조들이 참 힘겹고 존경스럽다. 우리 산천이 평야가 더 많았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싶은데 산천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성정에 정말 지대한 영향을 주겠구나 싶다. 버스안에서 지평선으로 보는 일몰은 너무나 낯설어 마냥 쳐다보게 되는데 바다처럼 너른 하늘에 비끼는 석양이 쓸쓸하다. 독일 국경 가까이 가서 주유하기 위해 잠시 휴게소에 들르자 너나없이 나가서 담배를 태운다. 11시쯤 드레스덴에 도착해 호텔로 가는 트램을 타자 행사가 있었는지 한껏 흥에 겨운 장년들로 만원이다. 어딜 가나 서로 아이컨택을 하며 속삭이듯 조곤조곤 말하는 게 신기했는데 이분들은 거침없이 웃고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우리 시골버스를 탄듯 정감있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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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24 Jul 2019  · Public  · …공공기관에서1억4천만원, 심지어 위안부 할머니들조차 이웃의 아픔을 나누자며 6백여만원을 내놓으시면서 총 600억원에 이르렀다. 6백억이란 규모는 자연재해 피해모금으로는 최대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지진돕기 성금모금이 한창일 때 일본은 독도는 일본땅이며 한국이 불법점유하고 있다는 내용의 중학교 교과서 표기강행을 발표하여 뒤통수를 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문제와 재난은 별개라며 이웃의 아픔을 헤아렸던 한국인의 애정어린 성금은 일본에 전달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생수를 비롯한 한국 구호물품을 그냥 두고가라며 구석에 처박아두었으며 막대한 성금에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내가 너희들 돈을 받는 것은 아주 모욕적이야 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당시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일본인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하던 주한 일본대사는 아마도 속으로는 수치심으로 입술을 깨물었을 것이 틀림없다. 한국전쟁 때 연합군으로 참전한 나라들 중에는 우리보다 경제발전이 늦은 나라들이 꽤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을 찾아와 잘살게 되어 너무 기쁘다, 피를 흘린 보람이 있노라며 고맙다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어쭈 꽤 컸는걸? 까불고 있네. 니네가 우릴 돕겠다고? 하는 심사인 것으로 읽혔다. 이것은 전적으로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좁은 소갈머리로 보이지만 양날의 검처럼 깊은 열등감의 소산이라 생각된다. 2011년 당시 구제역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에 대한 대책은 시늉만 하고 일본돕기 성금에만 열올리는 놈들이 꼴보기 싫어 십원 한장 보태지 않았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니 방송3사를 비롯한 언론사, 대기업, 정부기관이 얼마나 열과성을 다해서 온정을 모았을지 요즘 토왜들을 보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솔직히 아둔하게도 그때는 그들이 그토록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는지 미처 몰랐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후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적자생존으로 왜곡시키며 사촌 프랜시스 골턴과 아들 레너드 다윈에 의해 우생학이 등장했고 나치의 인종청소에 이론적 바탕이 되었었다. 그것이 일본으로 건너와 혈액형으로 성격을 분류하는 변조된 우생학으로 발전했는데 서양인들은 대부분 A, O형이 많고 B, AB형은 10%에 지나지 않는다며 조선인과 일본인은 피가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일본인들이 너무나 절실하게 탈아입구를 꿈꾸었듯 오늘날 토왜, 부왜들은 피를 바꿔서라도 일본인이 되고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다카기 마사오가 그랬던 것처럼.
강미숙
26 Jul 2019  · Public  · …아사히신문은 91년부터 2년간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일본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기사를 내보냈고 제주도에서 폭력으로 끌고 갔다는 일본군 남성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실어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1991년 8월 14일 일본정부의 뻔뻔함에 분노한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공개증언을 하며 위안부 문제는 한일외교의 중심으로, 여성인권 침해로 국제적인 이슈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첫 증언한 8월 14일은 세계위안부의 날로 지정되었다) 이로써 93년 위안부 동원과정에서 군의 개입과 강제성을 인정하는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인 고노담화를 견인해냈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도쿄전력 관련자 증언기사로 일본사회의 전방위적 압력을 견디다 못해 2014년 8월 아사히신문 기무라 사장은 원전관련 증언은 허위라고 인정, 도쿄전력 관계자들에게 사죄하며 기사를 철회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위안부 관련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도 잘못됐다며 자신들의 기사를 철회했다. 그럼에도 "위안부는 전시 여성 인권문제로 의지에 반해 군 등이 관여한 강제성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는 입장은 굽히지 않았다. 아사히신문 전직기자들이 지금도 테러위협에, 신문사는 폭탄테러의 위협에 시달린다고 하니 언론지수가 후진국 수준으로 급락한 이유를 알만하다. 우리가 지금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은 일본,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의 군국주의를 추억하는 극우 파시즘 세력임을 분명히 해야 할 이유다. 민족주의는 어디나 한 국가 안에서 혐오와 때로 폭력의 방법으로 응집하지만 자유, 민주와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표방하는 세력은 그 이름이 무엇이건 국제적인 연대를 가장 큰 힘으로 한다. 조선일보의 사악한 일본어판 보도를 폭로하여 아베정권이 노리는 궁극의 목적은 한국 정치가 보수정권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밝혀낸 호사카 유지 교수를 보아도 그렇다. 안사고 안가는 불매운동의 연장으로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사회에서 어느날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에 떨면서도 건강한 목소리를 견지하고 있는 양심적인 시민사회와 민간차원의 건강한 교류마저 아사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필부의 조심스러운 바람, 간절하다.
강미숙
11 Aug 2018  · Public  · …통한 치유를 노래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따뜻하게 품는다. 화폭 6에는 촛불시민들과 오월광주에서 시민들에게 밥을 해먹이는 그림 속에 그리운 얼굴들이 있다. 전교조 초대위원장이자 평생 교육운동에 헌신하신 윤영규 선생님, 김남주 시인, 5.18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선생님이 평화와 연대의 세상에 계신다. 마지막으로 화폭 7에는 아베의 군국주의 망령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4대강에서 헤엄치는 명박 로보트물고기가 그려졌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고통으로 깨지고 일그러진 비참한 모습이라 보는 사람마저 날카로운 비수에 찔리는 듯한 아픔이라면 세월오월은 조선후기 민화의 화려한 채색 뒤에 비극의 아우라를 담아냈다. 슬프지만 참담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지나치지 않으며, 섬뜩하지만 공포스럽지 않다. 특히 6폭의 로보트물고기를 쳐다보며 웃는 윤한봉선생과 김남주 시인의 넉넉함은 작품 전체를 감싸안고도 남음이 있다. 세월호는 문명사적 계기가 되는 사건이라는 화가는 광주 오월과 세월호까지 일관되게 관통하는 메시지에 주목한 것 같다. 그는 광주여인을 묘사하며 사천왕상도 남성이라 여성신상이 없어 애를 먹었노라 사족을 다셨다. 제주 마고할미도 신화로만 존재할 뿐 이미지가 없으니 화가의 그림은 이미지 권력이라던 성완경 평론가의 말씀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세월오월은 관의 지나친 간섭으로 박근혜 얼굴에 꼭맞는 닭대가리를 양면테이프로 붙이는 수모를 겪었는데 그럼에도 게시되지 못해 복구하면서 접착제 부분이 문제가 되어 아예 비닐로 붙여버렸다. 그래서 이작품의 상처이자 상징처럼 되어버렸고 마치 의도한 오브제인 양 더 돋보이게 되었다. 예술가들과 싸우려는 정부라니, 그들은 진정 댓글과 자본의 힘으로 영원하리라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북악산의 세월이라는 부제가 붙은 '홍수'그림을 보면 화가의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화가는 이번 전시회에는 사회면이 아니라 문화면에 실리고 싶어 남성과 권력 섹션,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출산' 등은 제외시켰다고 웃프게 말했다. 문제작들은 내년에 홍대앞에서 한번더 기회를 갖겠노라 약속했다. 세월호,위안부,박정희 등 국가권력의 폭력에 천착한 작품들을 선보인 화가는 앞으로는 탈핵과 베트남 한국군 민간인 학살문제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만들어놓은 계엄령 체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는 요원할 거라는 게 이유였다. 그러려면 우리가 베트남에 적정한 배상,보상을 하는 등 도덕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일본의 대본영 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위안부 폭력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것과 베트남에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향해 작가정신을 곧추세우고 가는 그는 이 시대의 살아있는 예수다. 광주까지 내려가지 않고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귀한 전시회의 입장료는 불과 3천원, 게다가 선착순으로 장르를 뭐라 규정하기 어려운 홍성담의 책 '난장'(격월간 <에세이스트>에 연재한 '그의 죽음 뒤엔 음악이 흘렀다'를 수정보완하여 엮은 책이란다)도 주셔서 어리둥절해하며 받아왔다. 이달 19일까지 1주일 연장된만큼 관심있는 분들은 전시회에 꼭 한번 다녀오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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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25 May 2020  · Public  · …것이지 누구도 심지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당신들조차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 당신의 말씀대로 잘못이 있으면 경중을 따져 징계하고 처벌하고 제도적으로 보완할 일이지 30년간 당신들의 곁을 지켜준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며 원색적으로 비난할 일이 아니다. 나는 시민단체의 활동가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에 형편이 어려움을 알고도 때로 손사래치고 얼마 안되는 회비와 후원금으로 면죄부를 받고 있지만 부채감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무슨 자격으로 말하겠나 싶어 ‘할많하않’이기도 했고 팩트확인도 안돼 판단을 유보해온 것조차 한없이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오늘이다. 이번 일이 그동안 곳곳에서 오직 공공선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자신의 재능과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으며 활동하고 있는 많은 분들이 도매급으로 취급받거나 폄하되지 않기를, 그들이 처한 노동환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강미숙
23 Mar 2020  · Public  · 언젠가 남편, 아들과 한국남성의 젠더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한민국의 성문화는 기본적으로 강간문화라고 했다가 너무 가학적이지 않냐고 거센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남자로서 듣기 싫기는 하겠지만 그동안의 대화를 생각해보면 상식 아닌가 했는데 이야기 나누면서 남성들이 얼마나 일면만을 바라보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50여년을 살아오면서 겪은 성희롱, 성추행 경험과 남성들이 일상적,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과 행동들이 얼마나 여성에게 폭력적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구체적이지 않으면 남자들은 저멀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동안 전혀 짐작조차 못했다며 안쓰러운 눈빛이길래 “그거 일일이 다 말하면 여성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 죽을 때까지 그것만 얘기해도 모자랄 걸. 여자들이 말하는 건 1할도 안되는데 남자들이 아주 지랄들을 하시잖아.”했다. 그리고 말나온김에 "한국사회가 강간을 조장하고 방임하며 심지어는 장려하기까지 하는 강간사회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해." 너무 지나치다 펄쩍 뛰던 두 사람은 부끄럽다고 했다. 평소 젠더이슈에 대해 자주, 다양하게 이야기해온 사람들도 이 정도면 일반적으로는 참 갈 길이 멀구나 생각했다. N번방. 노래방도 키스방도 아니고 스스로 짐승이 되는 방이라니, 그런데 이것은 이미 우리 사회가 그래도 된다고 늘상, 아주 강력한 시그널을 준 결과라 그리 놀랍지 않다. 다만 내가 놀란 것은 그 연령대가 매우 낮아졌다는 것.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20대 젊은 남성들의 이상한 눈빛과 젠더 이슈에 달리는 일베스러운 혐오의 댓글들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5급 행정고시 합격후 연수도중 휴대전화로 동료여성 연수생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다 적발돼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이 내린 퇴학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에서 승소, 2019년 5월 퇴학처분 취소. *2019년 11월 춘천지법은 자신이 소지한 9만여개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성착취물 중 2500여개를 텔레그램을 통해 판매한 남성에게 징역 1년 선고 *2017.5-2019.8까지 서울 강남구 한 고등학교 교실에 침입해 24차례 음란행위를 한 대학생에게 1심에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서울중앙지법의 양형사유는 젊다, 반성한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과 윤중천씨의 성폭행사건 무혐의 선고 *성매매알선 의혹을 받은 양현석 전 YG 엔터테인먼트 대표 무혐의 *여성을 만취시킨 후 집단성폭행하고 단체채팅방에서 부적절한 영상을 수차례 공유한 가수 정준영과 최종훈 1심에서 각각 징역 6년과 5년 선고, 현재 항소심중. *버닝썬게이트 가수 승리 구속영장 두차례 기각, 군입대 *故가수 구하라씨는 전 남친인 최씨가 리벤지 포르노를 전송하고 자신을 협박했다며 최씨를 성폭력처벌 위반과 협박 등의 혐의로 고소했으나 불구속 기소 *최근 3년동안 검경에 수사받은 서울시 교육청 성범죄 사건의 74.5%가 일선 교사이고 2019년 3월부터 6개월간 교육공무원 성비위 사건 310건 대부분 솜방망이 처분 *초중고 성범죄 교사 연간 50여명, 그중 20-30명이 교단에 복귀 *2010년 이후 481명의 교사가 성범죄(절반이상이 미성년자 대상)로 징계, 182명은 교단에 복귀. 성비위 교사 대부분 견책, 감봉 등 경징계. 정직되더라도 10명 중 7명은 추후 복직 *2019년 3월 같은 과 신입여학생들의 나이, 얼굴을 공유, 품평하며 성희롱 발언을 일삼고 초등 제자를 대상으로 가상의 성희롱을 한 서울교대 국어교육과 남학생들에게 2-3주 정학 징계 *길거리에서 자위한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은 기소유예, 변호사 등록 *교사시절 지속적으로 여고생 제자를 성폭행한 배용제 시인에게 1심 징역 8년 선고 *몰카 판사, 후배 성추행 판사 법조계 복귀 *아동 청소년 성범죄 유죄판결 받은 79명의 목사 중 절반이 목회활동 복귀. 일부는 법원명령을 무시하고 등록된 거주지에 살고 있지 않아도 처벌하지 않음 굵직한 성범죄 처벌현황이다. 이것 뿐이겠나. 아마 밤을 새도 모자랄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소위 O양 비디오 사건이 무려 20년 전의 일인데 사회적 반성과 강력한 법을 제정하여 통제했다면 지금 한국은 좀 다른 모습이 아닐까. 이러고도 한국이 강간문화가 아니라 할 수 있나. 국민청원 1호 법안으로 제안된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안을 다루는 올해 3월 3일 국회 법사위 제1소위 회의록을 보자. 딥페이크(사진을 음란영상에 합성) 관련하여 '반포' 등을 목적으로 한 합성물 제작만 처벌할지가 쟁점이었는데 채이배(민생당 비례) 의원이 “반포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딥페이크로 (피해자의)인격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참석자 다수는 개인 소지 목적의 영상제작까지 처벌하는 것은 과하다며 회의적이었다. -“자기만족을 위해 이런 영상을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갈(처벌할) 것이냐.” (정점식 미통당,경남 통영)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 (김오수 법무부 차관) -“자기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 있다.” (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 이에 백혜련 의원이 문제제기하자 송기헌 민주당 법사위 간사(강원 원주)는 -“일기장에 혼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지 않냐.” 고 했고 김도읍(미통당 부산북구), 김인겸 차장도 동의했다. 결국 3월 5일 국회 본회의에서 단톡방 집단 성착취와 같은 N번방 청원에 관한 법안은 본회의에 부의되지 않고 딥페이크 영상의 제작, 유통행위를 처벌하는 내용만을 넣은 성폭력범죄 법안 개정안으로 졸속처리, 3월 17일 공포되었다. 회의록을 보면 정점식, 김오수, 김인겸, 송기헌, 김도읍은 디지털 성범죄를 옹호하는 사법처리감이지만 그들은 오늘도 당당하다. 결과적으로, *현재 대한민국 법에는 성착취 범죄라는 게 없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집단성폭행 혐의가 없다.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이 없다. *N번방에서 스트리밍으로 본 관람자를 처벌할 조항이 없다. *25만원, 150만원을 지불하고 성착취에 가담한 성범죄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없다. 결론은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조항은 없으며 성폭력처벌법상 촬영죄, 유포죄, 협박죄로만 처벌할 수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떼를 쓸 때도 엄마의 눈치를 살핀다. 어디까지 떼를 쓰는 게 좋은지, 울고불고 할것인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좋은지 아이들은 양육자가 대응하는 태도에 대한 나름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양육자를 들었다 놨다 한다. 부모의 양육태도에 따라 아동의 행동양식이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아동심리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엄마들은 이러한 사실을 안다. 법도 마찬가지다. 범죄는 늘 법의 테두리를 뛰어넘지만 가만히 보면 법이 허용하는 선 언저리에서 일어난다. 10대 후반 20대 남성들이면 소위 386세대의 아들딸들이다. 신천지도 그렇고 디지털 성착취도 그렇고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자식을 키웠길래 우리 아이들이 이지경이 되었을까 정말 가슴이 찢어진다. 우리 사회가 미투를 희화화하고 성범죄를 혈기왕성한 남자의 일탈쯤으로 여기며 웃어넘기는 강간문화가 끔찍한 괴물들을 만들었다. 3월 3일 국회 법사위 회의록을 보면 왜 국회의원을 잘 뽑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때 국민청원 1호 N번방 법안을 제대로만 만들었어도 갓갓이든 박사든 강력한 처벌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안일하게 사안을 바라본 후진적인 젠더의식을 가진 법사위원들도 이 사건의 선량한 가해자라는 점이다. 모든 남성들은 잠정적인 성범죄자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말을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1만명 선에서 코로나는 관리되고 통제되겠지만 26만이라는 디지털성범죄는 한국이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국가로 나아가는 데 또다른 책임을 묻고 있다.
강미숙
30 Jan 2020  · Public  · 우한에서 조국으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들. 우리 동네만큼은 절대 안된다며 트랙터를 몰고 나온 소수의 사람들에게 공포와 혐오를 부추기는 더러운 혀와 방역에 실패하기를 고사지내는 자한당을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것은 우리말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말, 환향녀(還鄕女)였다. 상황도 조건도 많이 다르지만 한줌도 안 되는 무능을 넘어 파렴치한 세력과 분별없이 휩쓸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4백년 전의 부조리극과 너무도 흡사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만큼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늘 그렇듯이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과 노약자들이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조선후기 소설 중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이란 작품이 있다. 여기서 강도(江都)는 소현세자 등의 왕족이 피난간 강화도가 임시왕도로 정해진 당시의 호칭이다. 국가의 위기관리능력을, 그것도 여성의 입장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이어서 당연히 작자는 알 수 없으나 여성이 쓰지 않았을까 싶다. 고전소설 중에서 역사적 사실을 직설적으로, 때론 은유적으로 가차없이 비판한 드문 작품으로 병자호란에 대한 생생한 고발문학이라 할 만하다. 소설은 '청허'라는 선비의 꿈을 통해 강화도에서 죽은 15명 여인들이 모여 저마다 자신이 어떻게 죽었고 어떤 원한이 있는지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여인들은 관리였던 남편과 시아버지의 무사안일과 부조리, 비루함을 고발하고 인조반정 공신계층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남편이 싸울 생각은 않고 스스로 변발하고 청의 종이 되는 모습, 왕비의 언니이자 중신의 아내는 아들이 자신을 찔러죽이고 정절로 표창을 받은 것을 비판한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류의 부인은 사사로이 자식에게 중책을 맡긴 남편의 불편부당함과 밤낮 향락에 빠져 방비를 게을리한 아들 김경징(두 사람은 인조반정 공신이다)이 부끄럽다며 자신은 자결했지만 원한이 사무친다고 하소연한다. 그 외에도 며느리, 딸과 함께 자결한 늙은 여인 등 전쟁의 참상은 말로 다하기 어렵다. 여인네들이 오죽했으면 남성 중심의 완고하고 경직된 사회구조가 혼란을 초래했다며 용골대를 물리친 박씨부인 같은 여성영웅을 만들어냈을까.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청은 조선의 여인 수십만 명을 끌고가 궁궐이나 고관대작의 후처로 들였다. 그리고도 남은 조선인들은 봉천(지금의 심양,선양) 노예시장에서 매매했다. 자금력이 있는 양반들은 가족을 되사왔고 이때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수완을 발휘하여 많은 재물을 모아 속환(贖還)시장에서 꽤 많은 조선인의 몸값을 치르고 구해냈다고 한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들은 대개 경제력이 있는 왕족이나 양반가의 여인들이었는데 절개를 잃었다는 이유로 시집과 친정에서 버림받는다. 국가의 치욕을 초래한 지배층의 무능으로 아내와 딸, 어머니들은 가문을 위해 자결이나 이혼을 강요받았다. 동의없이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상소가 빗발치며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급기야 이혼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차츰 ‘환향녀’는 절개를 잃은 여인이라는 일반명사 화냥년이 되었고 화냥질, 화냥기 등 성적으로 문란한 여인을 가리키는 치욕의 말이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국가와 사회가 여성에게 집단적으로 행사한 성폭력의 증거이다. 자신들의 무능함으로 치욕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족속들, 돌아온 딸과 며느리에게 자결을 강요하고 정절부인 칭호를 하사받거나 열녀문을 세워 가문의 거짓된 영광으로 삼았던 족속들이 이 땅의 기득권 세력의 뿌리다.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은 정부를 국민이 선택할 수 있고 다행히도 이번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집단이라는 점이다. 속절없이 수십만의 여성과 장정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던 무능한 조선이 4백년이 지나 제 나라 국민들을 전세기를 띄워 데려올 만큼 국력이 강해졌다. 이번엔 여보란 듯이 극진히 모셔와서 잘 보살피고 안전해질 때까지 조국이 품어줄 수 있을만큼 경제적으로 부강해졌다. 그러려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세금 낸 것이다. 더 이상 국민을 욕되게 하지 말라. 분명해진 것은 저들은 언제든 정치논리를 앞세워 국민의 생명과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하긴 지난 세월호에서 똑똑히 보았으니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본심이라는 것, 국민을 죽어없어져도 좋을 개돼지로 여긴다는 점을 만방에 공표했다. 다만 그들에게 부화뇌동하여 연신 짐승의 언어를 토해내는 일부 몽매한 사람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럴수록 자신의 무덤을 점점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임을, 톨스토이의 우화에서처럼 결국은 벌레가 되어 땅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내일, 아니 오늘 우한 교민들 일행이 무사히 돌아와 시설에 입소하기를, 중국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의료진과 두려움에 놓여있을 중국인들을 위해 기도한다.

===도올의 노자해설을 다 엉터리라고 하는 도인들이 나타났기 때문

2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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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지고 있다. 게다가 위안부 연구로는 최고 권위자라 인정되는 일본의 석학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도 일본군과 정부가 개입한 명백한 인신매매 계약이라고 전면 반박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 신드롬이 그동안 전쟁 성노예를 인정하지 않았던 일본 정부의 태도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몰라서' 일본 편을 들었던 서구인들의 시각을 상당부분 교정시켜 주는 효과는 분명해 보인다. 애초 사태의 엄중함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학문의 자유라며 안이하게 대응했던 하버드대 총장은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동의 부동의를 떠나 이런 무신경함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독일 베를린에서 소녀상을 철거를 강요했다가 시민사회의 공감과 반발로 오히려 영구설치에 이른 것처럼 미국에서도 더이상 학문, 표현의 자유라는 커튼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감추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자 함도 있었겠지만 인류보편적인 가치인 평화와 연대라는 지향을 견지했기에 가능했을 하버드대 한인학생회, 반크, 현지사회와 연대를 이끌어낸 한인사회의 지혜와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저들도 남의 일에 저토록 발벗고 나서서 목소리 내주고 싸우는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나.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두 가지다. 첫번째는 반일종족주의 같은 책을 펴내고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고소득이 보장된 기회였다고 지껄이는 전 서울대 교수 이영훈 같은 자가 건재하며, MB정권 시기에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결성된 뉴라이트가 학계, 정치계, 종교계, 교육계, 의료계, 연예계, 체육계 등 영역을 망라하여 세를 넓히고 반민족적인 언행을 일삼아도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고 있으며, 뉴라이트(실질적으로 자금출처는 일본 극우재단이겠지만)에서 청년학생들을 취업과 유학을 미끼로 잠식해가는 것을 15년이 넘도록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아왔다는 것이 기함할 노릇인 것이다. 우리는 사사건건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민족의 이익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에 복무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 토왜들을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 두번째는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자행한 학살과 강간에 대해 사죄하고 후속대책을 마련하는 일을 더는 지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강제개항 당하고 동학농민의 혁명성과 선진성에도 이땅을 청일전쟁의 싸움터로 내준 끝에 식민지로 전락했으니 대체로 근대사를 다룰 때 피해자의 관점에서 침략주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피해자로 살아온 우리에게 베트남전은 엄연히 전쟁폭력에 가담한 가해자였다. 꼬꼬마 시절 전파사마다 울려퍼지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라는 노래가 있었다. 신중현이 만들고 '님은 먼 곳에', '커피 한잔'으로 시대를 풍미한 김추자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였다. 나는 예닐곱살 무렵 신나고 뭔가 설렘이 느껴지는 이 노래를 따라부르며 월남이란 곳이 어딘가 파라다이스쯤 되는 곳인 줄 알았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내가 기억하는 건 이 두소절이지만 가사를 찾아보면 "말썽많은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달고 돌아온 김상사"라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이들 의젓하고 남자답고 용맹무쌍한 김상사들이 실은 무자비한 학살과 성폭력을 자행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러고도 어찌 어른들은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단 말인가 분개하며 앞세대에 대한 반항과 혐오를 가지게 되었던 아픈 기억이 있다. 이젠 어른이 된다는 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일에 공범이 되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끊임없이 기억하고 말하는 것만이 유일하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후손들이 나와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램지어 교수에 대한 세계적인 비판과 항의가 이루어지는 것과 동시에 며칠전 영국 노동당의 데이비드 의원은 인디펜던트지에 남한이 베트남 성폭력 의혹을 인정해야 한다고 기고했다. 그는 "한국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사과를 받으려고 수십년간 노력하고 있으며 일본정부가 발뺌하는 동안 피해자 상당수가 사망했다. 한국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앞장서고 있지만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성폭력 의혹에 관해서는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며 당시 수만명의 여성 그중에는 12,13세 어린이도 있었으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들이 존재를 부정당하며 살고 있다며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했다. 실제 베트남전 당시 현지 주민들에게 한국군은 공포 그 자체였으며 한국군 1명이라도 사살하면 인근마을의 양민을 학살하고 여성은 강간하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한국군을 피하라고까지 했다는 증언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미국의 용병으로 파병된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의 파월 장병들이 돌아왔을 때 우리 언론은 한국군이 4만명을 사살했다고 보도했지만 이중 9천여 명은 민간인이었음을 밝히지 않았다. 대표적인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68년 2월 12일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퐁넛마을에서 한국 해병대 청룡부대에 의해 70여명이 학살된 사건이다. 당시 한겨레21의 베트남 통신원이었던 구수정씨의 르뽀와 참전군인 인터뷰로 세상에 알려졌고(구수정,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 한겨레 21 279호) 2004년 한국시민사회의 모금으로 추모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가난했던 시대 한몫 잡을 수도 있었던 데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시절 자유수호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갖고 떠난 청춘들이었으니 이들도 국가의 피해자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뜻했든 뜻하지 않았든 민간인 학살과 여성들을 강간한 오욕의 역사를, 있었던 과거의 폭력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사건은 100여 건 이상이다. 이외에도 빈집을 털어간 한국군의 숱한 강도, 강간은 현지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화인을 남겼다.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수 없지만 끝까지 쫓아가 응징하는 집요함은 미군들마저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이 민간인학살이 있었던 마을마다 증오비를 세웠는데 유독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 "하늘을 찌를 죄악, 만대에 기억하리라"였다니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서늘하다. 누군가 우리 민족의 죄악을 만대에 기억하라고 염원하는데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이 팬데믹을 거치면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 새로운 표준과 기준을 만드는 국가의 가능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관을 쓴다는 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오욕이 되지 않는다. 선두에 선다는 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혹은 영향력이 미미하여 관심사에 오르지 않았던 흑역사에 대해서도 책임있는 자세를 견지할 것을 요구받는다. 한국은 이제 누가 봐도 개도국은 물론이요 중진국도 넘어선 선도국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영광과 오욕은 한몸이라서 거부할 수 없는 무게다. 한국은 더는 피해자 포지션만 강조할 수 없는, 그래서도 안되는 나라가 된 것이다. 독일 뉘른베르크 박물관에 갔을 때 그 많은 전시와 자료를 매우 꼼꼼하게 읽는 연인과 가족들이 많았다. 진지하게 둘러보고 아이에게 설명해주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독일인들을 보며 시민교육의 위력과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을 선도하는 저력이 여기에 있구나 생각했다. 우리는 과거를 반성하며 청산하는 노력을 지금도 게을리 하지 않는 독일을 칭찬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일본을 비난하고 조롱해왔다. 자신의 선조가 저지른 범죄를 낱낱이 공개하여 가르치는 나라, 남이 하는 걸 칭찬하긴 쉬워도 내가 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우리 차례인 것이다. 우리가 덴노니 일본 군가니 하는 걸 들으면 오싹해지는 것처럼 베트남인들이 훈장을 가슴에 달고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노래를 듣는다면 어떤 마음이 될까. 자신들에겐 지옥에서 온 사자같았던 한국군이 청춘남녀의 야릇한 설렘과 경쾌한 리듬에 맞춰 미래를 꿈꾸는 듯한 노래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대한의 독립뿐만 아니라 동양의 평화, 인류의 평화를 위해 거사를 일으켰다는 안중근 의사의 가르침이 계속 자랑스럽게 남으려면 미얀마 시민들의 민주화투쟁에도 지지와 연대를 표해야겠지만 베트남과도 과거의 전쟁폭력, 성폭력에 대한 한국군 자체적인 진상조사와 진심어린 사죄를 함으로써 아시아 국가들과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위안부 여성들의 사망자가 늘고 생존자도 고령이 되어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를 받아내야 하는 시간이 촉박한 우리는 한국군에게 강간당하고 아직 생존해 있는 8백 여 전쟁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동일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위안부의 전쟁 성노예 인정을 요구해온 그간의 외침이 공허해지지 않는다. 그래야 전쟁폭력의 기억 속에 사는, 라이따이한이라 차별받는 베트남인들이 치유받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 그래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물려줄 수 있다. 그래야 위협적인 가스통 해병대 할배들이 아니라 약소국의 설움으로 남의 전쟁에 용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진심어린 사죄를 통해 그들도 넓은 의미에서 전쟁폭력의 피해자로 치유받고 생을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국가적 치욕으로 삼아 거짓과 날조를 후손들에게 강요하는 일본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진상조사를 통해 진심어린 사죄와 적절한 배상을 하고 진실한 관계개선으로 나아가는 독일의 길을 갈 것인가, 이것도 아니면 베트남 민간인학살과 관련한 일을 민간에 맡기고 국가는 계속 모른 체 할 것인가. 국가의 품격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이제 한국은 오이디푸스왕이 선택해야만 했던 세 갈래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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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k Bom Kwon, 이은선 and 81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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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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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을 한분한분 안아주시며 할머니들이 증오가 아니라 화해를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노벨평화상 후보로 손색없다며 진심어린 위로와 감사를 전했다는 것이다. 또 가해자의 용어인 ‘위안부’라는 말을 쓰지 말 것과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한 분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릅니다”고 방명록에 남겼다니 참으로 냉철하면서도 다정하고 따뜻한 품성의 지도자인 듯하다. 독일은 1970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죄라 평가받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죄가 있다. 그는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꿇고 사죄함으로써 ‘기억과 책임, 그리고 화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슈뢰더 전 총리도 재임중인 2000년 나치 강제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합의를 이뤄내고 2004년 바르샤바에서 또한번 독일침략을 사죄했다고 하니 그의 나눔의 집 방문은 하등 이상할 게 없지만 최고위층 인사로는 매우 이례적인 행보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자서전 <문명국가로의 귀환> 한국어판 출간 기념으로 방한한 일정이었는데 나눔의 집 방문이 민감한 한일관계를 감안한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는 독일 외교부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처음 한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고위층으로는 나눔의집 방문이 처음 있는 일로 아무리 전 총리라 해도 민감한 이슈였을 텐데 처음의 약속을 지켰다니 과거 반대를 무릅쓴 사민당 슈뢰더 개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일면을 보는 듯하다. 방문당시 이옥선 할머니가 팔목에 끼워준 팔찌를 방한 내내 끼고 다녔으며 4년이 지난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니 정치인의 진정성과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우리로서야 민주정부 두분 대통령을 제외하면 죄 국외로 도망가거나 감옥간 대통령 뿐이라서 그런지 정치인이 아니고서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대답하는 시민들이 거의 없는데 독일은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나 음악가를 제치고 정치인들이 존경받고 사랑받는다고 하니 참 생경하다. 한때 가장 존경하는 독일인 1위를 콘라도 아데나워 전 총리가 차지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참 좋은 정치인이었구나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들이라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능하지도 않고 말이다. 우리는 존경한다고 하면 O빠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김대중•노무현• 문재인, 누가 되었든 가장 존경하는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좋은 리더란 무엇일까.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앞장서서 나를 따르라 하는 장군형 리더가 필요했고 또 선호했다면 쌍방향 소통의 시대인 지금은 공감으로 사회적 약자를 품을 줄 알며 이웃의 눈물을 닦는 데 자신이 가진 힘을 쓸 줄 아는 따뜻하고 포용력있는, 그러나 일관된 원칙을 견지할 수 있는 단호함과 냉철함을 갖춘 리더를 필요로 한다. 슈뢰더 전 총리와 한번이라도 이야기를 해본 사람은 한결같이 그가 매우 유머러스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후 전임 대통령으로서 평화와 국제사회의 협력을 위한 여정을 걷는다면 그런 모습이 아닐까 기대해본다. 우리도 이제 그런 전임 지도자를 가질 정도는 되는 시민들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 한 사람, 화선지에 붓으로 한 자 한 자 정성껏 마음을 담는 사람, 소연 슈뢰더 김 님의 부드럽고 미래지향적인 리더십에 박수를 보낸다. 내게는 딸이 독일 교환학생을 하며 겪은 매우 다채로운 경험을 전해들은 것과 딸이 동행해준 보름간의 여행이 독일에 대한 경험의 전부다. 유학 초기에 딸은 버디가 되어준 소피의 고향 밤베르크 부모님의 집에 초대받아 1박2일을 머물렀는데 그녀의 부모님은 하루종일 뉘른베르크 여행을 함께 하며 전쟁박물관, 전당대회가 열린 운동장 등 나치의 참상 이모저모를 소상하게 설명하고 안내해주셔서 딸아이도 몹시 의외였다고 했다. 어떤 마음이면 동양의 나라에서 온 어린 여성을 아름다운 밤베르크의 성이나 자연이 아니라 오욕과 수치로 가득한 나치의 현장으로 안내하게 만들까. 치부를 기꺼이 드러내보이는 용기와 기꺼운 수고, 일상에 초대하여 보통의 독일인들이 사는 모습을 공유해주는 친절함, 그것에서 나는 독일의 힘을 보았다. 그리고 딸의 특별한 친구가 된 호프만이 한국에 왔을 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그런 그를 있게 한 독일의 교육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0월 3일은 한국의 개천절이고 독일은 분단을 극복한 새로운 통일 독일의 시작을 기념하는 통일절이다. 분단과 갈등, 가족애와 이웃에 대한 배려도 많이 닮은 나라, 이미륵과 윤이상을 품어준 나라, 5.18 광주의 참상을 전세계에 알린 참된 저널리스트 힌츠 페터의 나라로 기억하는 독일은 딸 덕분에 더욱 가까운 이웃으로 다가왔고 Soyeon Schröder-Kim 님 덕분에 독일 시민들의 연대와 평화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면서 마치 이웃처럼 가까워진 나라가 되었다. 아, Soyeon Schröder-Kim 님, 인사가 늦었어요. 정성껏 보내주신 한아름의 선물 잘 받았어요. 소연님의 새해 첫날 덕담대로 이미 뜻밖의 기분좋은 일을 만났고요, 올 한해가 다채로워질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어요. 건강과 행복을 기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소연님도 옆지기와 함께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하는 한해가 되시길 바랄게요. 팬데믹은 우리에게 함께 하는 공간은 앗아갔지만 함께 하는 마음자리가 얼마나 더 넓어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언젠가 한국 방문길에 강원도에서 뵙게 되는 날이 온다면 더없이 기쁠 거예요. 그런 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네요. 두분도 '하소즐'의 기쁨을 벗삼아 오랫동안 행복한 동행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1.3.5 강미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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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F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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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미투 유감 초등학교 때 학교 야구부원이었던 두살아래 남동생은 허구헌날 야구빠따로 두들겨 맞고 들어와 시퍼렇게 멍든 엉덩이를 부모님 몰래 안티푸라민으로 마사지해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투수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중학교로 이어졌지만 매를 드는 법이 없었던 부모님이 강제로 그만두게 할 때까지 지독한 매질과 폭력에 시달렸다. 동생이 가여웠지만 꿈을 위해서라면, 운동선수가 되려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 시절엔 야트막한 담장너머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저씨에게 두들겨맞는 게 특별할 것도 없었고 일반적으로 애들은 맞으면서 큰다는 신념을 철썩같이 믿었던 시대였다. 사춘기 때 딱 한번 아빠에게 대들다가 한 대 맞은 일을 제외하면 온갖 체벌과 언어폭력, 성폭력은 꼭 내가 직접 겪은 것은 아니더라도 12년간 학교에서 부족함 없이 경험했다. 내 아이들의 유년기 돌보미였던 분(배우자가 교사였다)도 애들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말로 해서는 안 된다며 따끔하게, 아주 정신이 번쩍 들도록 때려야 한다는 말씀을 틈틈이 강조했다. 유치원 다닐때 고등학생이던 그 집 오빠가 제 부모에게 손으로 귀싸대기 맞은 걸 여러번 이야기해서 계속 맡겨도 되나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은 아주 선량하고 사랑이 많고 인정많은 분들이셨다. 사랑의 매를 폭력이라고 보지 않았던 시절 부모들은 괴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과거 폭력에 대한 인권감수성이 매우 낮은 사회에서 살았다. 국가가 앞장서서 국민에게 정서적 신체적 폭력을 가했으며 군대는 폭력으로 점철된 군사문화를 주입함으로써 전 사회를 병영화했다. 학생은 병사, 죄수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으며 어떤 식으로든 항변은 주어지지 않은 권리였다. 지각해도, 공부를 못해도, 떠들어도, 다투어도 선생님들은 매를 들고 군대식 기합을 강요했다. 엄마들은 때려서라도 가르쳐달라고 선생님에게 읍소했고 부모가 자식을 폭력으로 훈계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 인식했다.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매를 들어서라도 정신차리게 해주겠다는 학원들은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내 자식은 더 때려달라고 특별 주문하는 부모도 있었다. 2016년 미투열풍 때도 느낀 것인데 마치 폭력의 무균지대를 지나온 것처럼 착각하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많다. 드라마에선 아직도 술취한 가장이 상을 들러엎거나 아내와 아이들에게 손찌검하는 장면이 이해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버젓이 전파를 타고 가정으로 배달된다. 내 아이가 유아기였을 때 성교육의 전도사로 혜성처럼 나타난 구성애씨가 TV에 나와 “만지지 마세요. 전 아이를 가질 몸이란 말예욧!”하라고 가르친 것이 획기적인 성교육(지금 기준으로 보면 여성혐오적 발언일)으로 받아들여진 시대를 지나왔다. 경제규모 세계 10위권, G7 이탈리아를 능가하는 국민총소득, K방역, K팝의 환상 뒤에 숨겨진 우리의 자화상은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겨우 음담패설과 타인의 외모에 대해 칭찬이든 비하든 언급하는 것 자체가 성희롱임을 자각해 가고 있다. 시대적 변화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문화적 지체현상이 우리의 삶을 둘러싼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아직도 꼬리잡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 과정인 것을. 그저 보다 나은 사회로 가는 올바른 방향이라는 믿음으로 한발한발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홉스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본능적 욕망이 통제없이 날뛰는 자연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 즉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와 같다고 했다. 이런 야만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 계약이며 인간의 감추어진 본성인 폭력을 낳는 심리적 근원을 성찰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쌍둥이 배구선수의 학창시절 폭력을 시작으로 스포츠계, 연예계의 학폭 미투가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되거나 미화될 수 없으니 마땅한 일이겠으나 난 이 사태를 지켜보는 게 불편하다. 과거의 맥락을 무시하고 현재의 관점, 법감정이나 인권의식의 잣대로 과거를 해석하는 휘그주의의 오류는 없는가. 성폭력 미투든 학교폭력 미투든 우리 사회가 집단광기와 마녀사냥, 혹은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는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10여년 전에는 위법이나 편법이 아니었던 입시 포트폴리오 준비과정에서 불거진 표창장 하나로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것도 모자라 묵묵히 미래를 준비하며 매진해온 젊은이를 기필코 파멸시키고야 말겠다는 기괴한 잔인함, 스텐포드 대학을 조기졸업한 수재가 음악적 재능까지 뛰어나자 온갖 말도 안되는 뇌피셜로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려 한 타진요(타블로의 학력위조를 집요하게 제기한 집단)의 집단광기, 미투 열풍으로 서정범교수가, 박진성 시인이, 박재동 화백이 감내해야 했던 야만의 시간들. 그리고 오늘 스포츠계와 연예계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검증되지 않은 폭로가 필터링 없이 보도되는 현상까지 다 사회적 계약의 범주를 넘어선 마녀사냥을 닮았다. 수십년을 진보정치판에서 고군분투하다 이제야 마이크를 쥔 김종철씨가 동료에게 성희롱을 한 바람에 하루아침에 삶의 모든 것이 부서졌다. 그의 대표직 박탈은 응분의 처사라고 생각되지만 당적마저 박탈한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미투를 제기한 것이 김종철이라는 개인을 응징하고 진보정치판에서 퇴출시키고자 함인가, 아니면 보다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들고자 함인가. 박진성 시인은 거짓미투임이 밝혀졌지만 지금도 일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매년 미투가 있었던 10월만 되면 정수리부터 장기를 관통하는 발바닥까지 온갖 통증이 자신의 신체를 핥는 느낌이 너무도 고통스럽다며 자살을 암시하기도 했었다. 그는 어떤 의혹과 의심과 불신만으로 한사람이 20년 가까이 해온 일을 못하게 하는 풍토는 없어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과거 서정범 교수가 그랬고 박재동 화백이 그러하다. 성폭력이든 학교폭력이든 미투의 목적이 무엇인가. 가부장적, 성차별적 문화를 약화시키거나 나아가 종식시킬 수 있는 데 기여하고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다. 단지 가해자로 지목되는 개인의 삶을 부숴버리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진행된다면 과거의 피해자는 곧 오늘의 가해자가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범죄에 적용되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미투에서만큼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이름하에 작동하지 않는다. 확인되지 않은 폭로만으로 악마화하고 인격살인과 시회적 매장으로 이어지는 마녀재판은 우리사회가 자연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성폭력, 가정폭력, 군대폭력, 학교폭력 그 외 어떠한 폭력이든 피해자가 부끄러워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관행과 관습으로 치부되어 침묵을 강요받고 가해자가 응분의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위에 오르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한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자 하는 사덴 프로이데 현상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좀 더 정교해져야 한다. 진정한 사과를 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선정적인 폭로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성찰과 사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과거 인권감수성, 성인지감수성이 낮았던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누구도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미숙했던 성장기에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잘못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했든 타인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나또한 여고시절 담임선생님에게 성추행 당했고 대학시절 후배였을 때는 선배들에게 하키스틱으로 맞고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 불쾌함의 연원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도 갖지 못했던 시절의 치욕스러웠던 기억을 오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도 가부장과 군사문화의 피해자였음을, 우리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였음을 알기에 내 마음을 다독인지 오래다. 그럼 나는 피해자이기만 했을까. 내가 선배라는 강자가 되었을 때는 명예남성으로 살며 여성성을 강조하는 여자후배들을 힐난하고 남녀후배들에게 기특하다고 엉덩이 두드려주거나 어깨동무도 서슴없이 하는 등 지금 기준이라면 성희롱이라 할만한 언행을 여러번 했다. 만날 기회가 있다면 진지하게 사과하고 싶다. 대부분은 한때의 치기라고 잊어버리고 살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상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사회적 지위가 있어 발언권이 많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에 분노한 후배가 미투를 하면 나의 삶은 파괴되어야 하는가. 쌍둥이 배구선수를 비롯한 운동선수들의 경우 학교폭력이 아니라 스포츠 폭력, 엘리트 체육이 조장한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만 두루뭉술하게 학교폭력으로 다뤄진다. 학교 운동부 치고 폭력에 노출되지 않은 선수들이 얼마나 될까. 운동선수들은 스포츠 폭력의 관점에서 그 근원부터 살펴야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온당한 일인가. 쌍둥이 배구선수의 경우 그들의 어머니와 감독, 코치들의 무신경이나 권력의 남용은 문제시되지 않는 것인가. 학폭, 스포츠폭력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부모나 주변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어른들의 무책임이 더 큰 문제 아닌가. 이번에 가해자로 지목된 기성용 선수의 경우 초등선수시절 선수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폭력에 감독이 세심하게 신경쓴 덕분에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아이가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있을 때 부모나 교사, 학교는 아이가 보내는 신호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정당하고 합당한 절차를 밟았는지, 가해자가 그 행동의 무게만큼 처벌받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며 재발방지를 위해 학교 당국이 철저하게 관리감독했는지 묻는다면 과연 가해자 본인에게만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인가. 폭력의 가해자를 한줌도 옹호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시절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는 어른들의 무책임과 불성실함은 쏙 빼고 어린 학생들만 지금에 이르러 악마화하고 응징하여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 묻고 싶다.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사건을 들추어내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을 피해자 포지션에 가두고자 함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변화의 주체로 자리매김하여 사회 정치적으로 재해석하고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와 또다른 피해자를 미연에 방지하는 성과로 이어져야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고 진정한 치유와 해방을 기대할 수 있다. 한때의 잘못이 결코 가볍다 할 수 없겠지만 공인이 된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삶 전체를 부숴버리고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것을 무위로 만들어버리는 마녀재판식 가중처벌은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와 다를 게 없다. 좀더 냉정하게 책임을 묻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번 입에 오르내리면 무고가 밝혀져도 삶이 복구되기 어렵다는 것을 여러 사람들을 통해 보아왔다. 온갖 종류의 폭력 미투를 보며 인간 본성에 감추어진 폭력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세월이 좀더 흐르면 분명 트랜스젠더나 동성애, 양성애자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은 범죄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로를 통한 악마화가 아니라 과거 폭력에 대한 성찰과 사과, 아직 늑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온갖 차별과 폭력을 근절하고자 하는 집단의지가 아닐까.
Hyuk Bom Kwon, 이은선 and 83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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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Jun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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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퇴에 열을 올리며 통합당 위안부 할머니 피해 진상규명 TF위원장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연일 핏대를 세운다. 2017년 11월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계비 지원과 기념사업 추진의 법적 근거인 피해자 보호,지원법 개정안이 발의되었을 때 기권을 행사한 사람이 말이다. 곽상도와 이용수 할머니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늘 윤미향 의원 보좌관이 손영미 소장의 죽음을 염려한 것이 마치 그들이 손소장의 죽음과 모종의 연관성이 있는 듯한 뉘앙스로 보도된 기사를 보며 충분히 그런짓을 하고도 남을 인간들이지만 그래도 나의 예감이 틀리기를 바랄 뿐이다. 줄리언 반스는 주인공 토니가 사건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떠한 예감도 하지 않았음에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제목을 달았다. 예감은 자신이 한 행동을 자각할 때, 타인의 선택을 기억할 때에만 유의미하다. 3년전 위안부할머니들을 지원하는 법률안에 기권을 던졌던 곽상도는 대통령을 향해 윤미향을 처벌하라고, 정의연을 해체하라고 공격하는 오늘을 예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 틀림없이 그는 "예감"할 만한 그 어떤 행동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곽상도가, 검찰과 언론이 예감한대로 흘러가게는 안될 것이다. 이제는 너무나 많은 시민들이 검찰과 언론, 극우세력이 주거니 받거니하며 의혹으로 부풀려가는 공식과 문법을 다 알아챘으니 말이다. 20대를 시작하자마자 마주한 자랑스럽고 벅찬 87년 6월, 하지만 매년 6월이 되면 언제나 91년 6월이 더 아프다. 2020년 6월이 그런 방식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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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Jul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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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양보하고 화해하자며 위안부 할머님들에게 2차 3차 가해를 서슴지 않던 김재련이 2차 가해 운운하는 것이 왜 블랙코미디로 느껴지는 걸까. 미투를 제기하는 피해자 대부분은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원한다고 한다. 미투의 목적이 상대방의 사회적 파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이 고소인 여성과 연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당사자인 고소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인지감수성에 경종을 울려 성차별 없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최소한 기자회견에서 명백한 성범죄라고 보기에 애매한 몇몇 건을 찌라시처럼 흘리며 망자가 된 피고소인을 악마화하고 고소인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마저 등돌리게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의견을 달리 하거나 조심스럽게 문제제기하는 사람들과 판단중지를 선택하며 지켜보고 있는 다수의 대중을 2차 가해라며 무조건 박원순을 애도하는 이들을 비판하고 고소인을 옹호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성인지감수성이고,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인가. 당신들의 그런 태도는 합당한 것인가. 그의 이름 석자를 빼고는 한국의 시민사회를 논하기 어려울 만큼이었기에 아직도 애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시민들과 자신의 성인지감수성을 돌아보려고 노력해온 선량한 남성 일반을 적으로 몰아 건강한 시민사회를 분열하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이건 정상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한남들이 하던 극단주의를 답습하는 것이며 당신들의 분노에서 파시즘이나 메카시즘의 광기마저 느껴진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첫째, 박원순 시장이 실종이 보도된지 두시간도 채 안되어 월간조선과 청년의사 등에서 박원순 시장의 사망을 보도했다. 와룡공원 어드메라고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장소도 특정하였고 서울대 병원에 운구가 도착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왜 이런 일이 그냥 넘어가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실종보도와 거의 동시에 미투고소, 사망이라는 마치 계획되어 있었던 것같은 언론의 보도가 시민들로 하여금 미투를 정치적으로 악용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시발점이 되었다. 따라서 시민들의 입에만 재갈을 물릴 게 아니라 기사를 쓴 1차 언론과 확인도 않고 받아쓴 2차 언론을 수사해야 한다. 이젠 사망도 거짓으로 보도하는 인간말종같은 망나니짓을 하는 언론을 더이상은 두고 볼수가 없는데 어디에서도 이것을 문제삼지 않는다. 참 신기하다. 둘째, 고소인의 요구가 진정어린 사과였다면 피고소인의 장례절차를 끝내기도 전에 무리하게 기자회견을 강행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막장드라마 보여주듯 예고편을 날리며 진행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속옷, 입술, 침실, 기쁨조 같은 선정적이고 야릇한 상상을 하게 하는 일방적인 주장이 확인되지 않은채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미투가 정쟁수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결정적인 성추행 증거를 하루빨리 제시하여 고소인 여성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게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려면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이 성희롱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고도 위력을 행사하였는지 조사해야 할것이니 상호 주고받은 문자에 고소인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도 밝혀야 할 것이다. 고소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부관참시를 해서라도 분노를 투사하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선배여성으로서 고소인이 하루빨리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피해자 우선원칙을 중시하고 있으니 진혜원 검사의 말처럼 민사소송을 통해 법적 판단을 받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미투에 대해, 미투를 제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대해 여성단체가 어떤 메뉴얼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론을 타블로이드화 하게 만드는 기자회견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소인 편에 서지 않을 거라면 무조건 입 닥치라 하고, 피고소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아파하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동의하는 시민들, 너무 고통스러워 잠시 침묵하는 모두를 악마화하는 건 여성단체가 그동안 약자의 편에 서서 가시밭길을 걸어오며 보여준 모습과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다. 온갖 비난과 모욕 속에서도 여성운동이 지금까지 견지해온 여성주의 가치는 사람을 살리는 데 있다. 우리는 이미 소중한 사회적 자산을 잃고 이유야 무엇이든 저마다의 이유로 아파하고 있다. 그것이 고소인에 대한 적대행위가 아닐진대 그렇게 몰아가서야 되겠는가. 그동안 여성인권을 위해 최전선에서 일해온 여성의 전화와 성폭력상담소는 김재련의 일련의 발언에 동의하는지도 입장을 밝혀야 한다. 미투의혹의 진상을 밝히는 게 목적인데 어떤 이유로 서울시 특별조사단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1차 진상조사를 마치면 경찰조사로 넘기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여성단체는 남녀 모두가 성차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미투 메뉴얼을 가동하고 2차가해를 유도하는 김재련을 견제해주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후 여성단체의 정체성과 정당성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며 피해는 어디선가 위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성추행을 당할지도 모르는 진짜 피해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세영, Eun Sook Kim and 1.9K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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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Jun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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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지내기 힘든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을 돌보며 살아오신 마포 평화의 우리집 쉼터 손영미 소장님. 올해 육십세라는데 2004년 서대문쉼터 시절부터 무려 16년을 할머니들과 살아왔으니 그 세월이 차마 가늠이 되지 않는다. 마포쉼터는 작년 1월 김복동할머니를 보내고 길원옥할머니 한분만 기거하셔서 그분과 동거하며 파주 자택에는 주말에만 잠깐씩 다녀오셨다고 한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것 외에 그녀에게 개인의 삶이란 게 있기는 했을까. 마흔 네살 꽃다운 시절부터 16년 세월동안 많은 할머니들을 떠나보내고 언젠가 다 떠나실 그 곳에서 자신을 조용히 불사른 사람. 그녀를 그 자리에서 견디게 한 것은 최저임금도 후원금도 찬사도 아닌, 자신이 만든 삶의 지향과 지도였을 것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명분과 당위성으로 설명해도 노인들을, 그것도 피해자 할머니들을 보살피며 사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었더냐 온몸으로 사랑하고 한덩이 연탄재로 쓸쓸히 남는 게 두려워 연탄 한장되지 못하는 우리가 아니더냐" 했던 안도현 시인의 일갈처럼 기꺼이 스스로 연탄재의 길을 걷던 분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한번도 타인을 위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함부로 휘두르고 써제끼는 칼과 펜은 이미 사회적 흉기가 된지 오래다. 자신의 신념으로 지탱해온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지옥의 삶. 개인의 행복을 위한 삶을 내려놓고 길원옥 할머니의 아들도 못한 16년을 타인을 위한 삶을 살고도 끝내 부정당한 현실을 못견뎌 극단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검찰은 고발장 하나로 정의연 사무실 압수수색도 모자라 정의연 회계자료를 은닉했을 거라며 마포 쉼터를 압수수색하고, 안성쉼터와 안성쉼터 시공업체 사무실도 압수수색했다. 사람들에게 겁주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기술자들이 고인을 조사한 일도 출석요구를 한 일도 없다고 뻔뻔하게 시치미를 뗀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이후 윤미향 의원도 손영미 소장도 어떻게 살아왔을지 짐작이 된다. 시도때도 없이 초인종을 누르고 전화를 걸고 마당에 카메라 렌즈를 고정시키고 사람만 나타나면 낮밤을 가리지 않고 플래시를 터뜨렸을 파파라치들. 데칼코마니다. 전직대통령을 그렇게 보내고 조국과 그의 가족을 모두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그렇게 많은 억울한 피의자들을 보내고도 아직도 그 못된 습을 버리지 못하는 벌레같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며 더러운 웃음을 짓는 똥파리들. 며칠전 국회의 윤미향 의원사무실 문틈에 기자들이 매달려 핸드폰을 들이대고 역시 삼성폰이 더 좋다느니 하는 한장의 사진은 악마의 얼굴이었다. 블라인드의 빈틈으로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그녀가 웃는다고 보도하는 사람들을 누가 기자라고, 언론인이라고 부르는가. 이용수 할머니는 이제 당신이 무슨 일을 하신 건지 생각이라는 걸 하고 계실까 싶다. 시모께 혹독한 시집살이를 받은 트라우마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않은 나의 시어머니는 치매가 아니어도 변덕이 심하고 심술이 많은 게 노인이라고, 시기심과 질투가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며 나에게 노인과 함께 일할 생각을 하지 말라셨는데 그분을 보며 그 말씀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면 너무 무례한가. 92세의 연세답지 않게 세련된 디자인의 멋진 자켓을 입으시고 정대협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이 26년간 당신들을 하나도 도와준 게 없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팔아먹었다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왜 난 그분께 감정이입이 안되는 것일까. 당신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윤미향과 정대협, 정의연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 그리고 당신들과 함께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던 시절부터 광야에서 눈비를 맞은 수많은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오랜세월 함께 쌓아올린 성과임을 진정 모르시는 것일까. 먼저 가신 당신의 동료들에게 진정 당당한 문제제기인가 묻고 싶어지는 나는, 인류애가 부족하고 패륜적인 사람인가. 노인혐오로 이어질까 두렵다는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가족과 함께 한가하고 평화로운 주말을 즐기다 부고소식을 듣고 내 마음도 함께 무너졌다. 내마음 더 다칠까봐 거리를 두고 일상에 충실했던 내가 죄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누리는 소소한 행복같은 개인의 삶을 마다하고 오로지 위안부할머니들에게 당신의 생을 내어주며 헌신해오신 손영미 소장님, 그동안 정말 애쓰셨습니다. 부디 편히 영면하소서. 당신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헌신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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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Jun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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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듣고 싶다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말한다. 심지어 아무런 힘이 없는 소녀상에게조차 적대적이다. 미군의 동아시아 전략 속에서 진행된 부실한 도쿄전범재판이 지금까지 동아시아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또한 식민지 후처리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전범 일본에 대한 교육은 도외시한 채 해방전후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탄압과 왜곡에만 열중하며 정치인들은 전범들과 흥정했다. 일본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 자들은 다름아닌 식민지배체제에서 기득권이 된 자들이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이것이 2차세계대전 종전 후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젊은이들에게 역사의식을 요구만 했지 공론의 장에서 제대로 논의한 적이 있던가. 가해자인 독일은 지금도 중등과정에서 의무적으로 조상의 폭력에 대해 가르치고 있건만 피해자인 우리는 민족적 정한에만 기댄 채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을 못하고 있다. 민족주의자라면 당당하게 요구하고 당당하게 책임을 물어야 하건만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슬프고 또 슬프다. 어쩌다 전범기업이 징용자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이라도 나오면 화들짝 놀라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줄까 걱정된다고 설레발치는 게 유력한 정치세력이라는 게 부끄럽다. 아베집권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 경향이 심상치 않다고 한다. 그들은 다시 강한 일본을 요구하고 있고 평화헌법을 부정하는 발언의 횟수도 잦아지고 있으며 군국주의의 발톱을 심심찮게 드러내고 있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의 당사자인 자유당이 일본과 모종의 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나의 우려는 허무맹랑한 공상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오후 4시 40분, 크라쿠프에서 이번 여정의 종착지인 구 동독지역이었던 드레스덴으로 가는 플릭스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라이름처럼 가도가도 끝없는 밀밭이 이어지는 바깥풍경에 평원에서의 삶도 꽤나 단조롭겠다 싶다. 문득 눈을 들어 하늘을 볼 때마다 어디든 산이 둘러쳐있는 우리의 산천이 그립다. 모퉁이를 돌면 또다른 능선과 계곡을 만나는 강원도의 길, 척박하고 좁은 농지에서 삶을 일구어 온 우리 농업이, 선조들이 참 힘겹고 존경스럽다. 우리 산천이 평야가 더 많았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싶은데 산천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성정에 정말 지대한 영향을 주겠구나 싶다. 버스안에서 지평선으로 보는 일몰은 너무나 낯설어 마냥 쳐다보게 되는데 바다처럼 너른 하늘에 비끼는 석양이 쓸쓸하다. 독일 국경 가까이 가서 주유하기 위해 잠시 휴게소에 들르자 너나없이 나가서 담배를 태운다. 11시쯤 드레스덴에 도착해 호텔로 가는 트램을 타자 행사가 있었는지 한껏 흥에 겨운 장년들로 만원이다. 어딜 가나 서로 아이컨택을 하며 속삭이듯 조곤조곤 말하는 게 신기했는데 이분들은 거침없이 웃고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우리 시골버스를 탄듯 정감있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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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Ju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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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에서1억4천만원, 심지어 위안부 할머니들조차 이웃의 아픔을 나누자며 6백여만원을 내놓으시면서 총 600억원에 이르렀다. 6백억이란 규모는 자연재해 피해모금으로는 최대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지진돕기 성금모금이 한창일 때 일본은 독도는 일본땅이며 한국이 불법점유하고 있다는 내용의 중학교 교과서 표기강행을 발표하여 뒤통수를 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문제와 재난은 별개라며 이웃의 아픔을 헤아렸던 한국인의 애정어린 성금은 일본에 전달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생수를 비롯한 한국 구호물품을 그냥 두고가라며 구석에 처박아두었으며 막대한 성금에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내가 너희들 돈을 받는 것은 아주 모욕적이야 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당시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일본인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하던 주한 일본대사는 아마도 속으로는 수치심으로 입술을 깨물었을 것이 틀림없다. 한국전쟁 때 연합군으로 참전한 나라들 중에는 우리보다 경제발전이 늦은 나라들이 꽤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을 찾아와 잘살게 되어 너무 기쁘다, 피를 흘린 보람이 있노라며 고맙다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어쭈 꽤 컸는걸? 까불고 있네. 니네가 우릴 돕겠다고? 하는 심사인 것으로 읽혔다. 이것은 전적으로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좁은 소갈머리로 보이지만 양날의 검처럼 깊은 열등감의 소산이라 생각된다. 2011년 당시 구제역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에 대한 대책은 시늉만 하고 일본돕기 성금에만 열올리는 놈들이 꼴보기 싫어 십원 한장 보태지 않았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니 방송3사를 비롯한 언론사, 대기업, 정부기관이 얼마나 열과성을 다해서 온정을 모았을지 요즘 토왜들을 보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솔직히 아둔하게도 그때는 그들이 그토록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는지 미처 몰랐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후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적자생존으로 왜곡시키며 사촌 프랜시스 골턴과 아들 레너드 다윈에 의해 우생학이 등장했고 나치의 인종청소에 이론적 바탕이 되었었다. 그것이 일본으로 건너와 혈액형으로 성격을 분류하는 변조된 우생학으로 발전했는데 서양인들은 대부분 A, O형이 많고 B, AB형은 10%에 지나지 않는다며 조선인과 일본인은 피가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일본인들이 너무나 절실하게 탈아입구를 꿈꾸었듯 오늘날 토왜, 부왜들은 피를 바꿔서라도 일본인이 되고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다카기 마사오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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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Ju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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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은 91년부터 2년간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일본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기사를 내보냈고 제주도에서 폭력으로 끌고 갔다는 일본군 남성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실어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1991년 8월 14일 일본정부의 뻔뻔함에 분노한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공개증언을 하며 위안부 문제는 한일외교의 중심으로, 여성인권 침해로 국제적인 이슈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첫 증언한 8월 14일은 세계위안부의 날로 지정되었다) 이로써 93년 위안부 동원과정에서 군의 개입과 강제성을 인정하는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인 고노담화를 견인해냈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도쿄전력 관련자 증언기사로 일본사회의 전방위적 압력을 견디다 못해 2014년 8월 아사히신문 기무라 사장은 원전관련 증언은 허위라고 인정, 도쿄전력 관계자들에게 사죄하며 기사를 철회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위안부 관련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도 잘못됐다며 자신들의 기사를 철회했다. 그럼에도 "위안부는 전시 여성 인권문제로 의지에 반해 군 등이 관여한 강제성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는 입장은 굽히지 않았다. 아사히신문 전직기자들이 지금도 테러위협에, 신문사는 폭탄테러의 위협에 시달린다고 하니 언론지수가 후진국 수준으로 급락한 이유를 알만하다. 우리가 지금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은 일본,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의 군국주의를 추억하는 극우 파시즘 세력임을 분명히 해야 할 이유다. 민족주의는 어디나 한 국가 안에서 혐오와 때로 폭력의 방법으로 응집하지만 자유, 민주와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표방하는 세력은 그 이름이 무엇이건 국제적인 연대를 가장 큰 힘으로 한다. 조선일보의 사악한 일본어판 보도를 폭로하여 아베정권이 노리는 궁극의 목적은 한국 정치가 보수정권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밝혀낸 호사카 유지 교수를 보아도 그렇다. 안사고 안가는 불매운동의 연장으로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사회에서 어느날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에 떨면서도 건강한 목소리를 견지하고 있는 양심적인 시민사회와 민간차원의 건강한 교류마저 아사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필부의 조심스러운 바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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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Aug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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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한 치유를 노래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따뜻하게 품는다. 화폭 6에는 촛불시민들과 오월광주에서 시민들에게 밥을 해먹이는 그림 속에 그리운 얼굴들이 있다. 전교조 초대위원장이자 평생 교육운동에 헌신하신 윤영규 선생님, 김남주 시인, 5.18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선생님이 평화와 연대의 세상에 계신다. 마지막으로 화폭 7에는 아베의 군국주의 망령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4대강에서 헤엄치는 명박 로보트물고기가 그려졌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고통으로 깨지고 일그러진 비참한 모습이라 보는 사람마저 날카로운 비수에 찔리는 듯한 아픔이라면 세월오월은 조선후기 민화의 화려한 채색 뒤에 비극의 아우라를 담아냈다. 슬프지만 참담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지나치지 않으며, 섬뜩하지만 공포스럽지 않다. 특히 6폭의 로보트물고기를 쳐다보며 웃는 윤한봉선생과 김남주 시인의 넉넉함은 작품 전체를 감싸안고도 남음이 있다. 세월호는 문명사적 계기가 되는 사건이라는 화가는 광주 오월과 세월호까지 일관되게 관통하는 메시지에 주목한 것 같다. 그는 광주여인을 묘사하며 사천왕상도 남성이라 여성신상이 없어 애를 먹었노라 사족을 다셨다. 제주 마고할미도 신화로만 존재할 뿐 이미지가 없으니 화가의 그림은 이미지 권력이라던 성완경 평론가의 말씀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세월오월은 관의 지나친 간섭으로 박근혜 얼굴에 꼭맞는 닭대가리를 양면테이프로 붙이는 수모를 겪었는데 그럼에도 게시되지 못해 복구하면서 접착제 부분이 문제가 되어 아예 비닐로 붙여버렸다. 그래서 이작품의 상처이자 상징처럼 되어버렸고 마치 의도한 오브제인 양 더 돋보이게 되었다. 예술가들과 싸우려는 정부라니, 그들은 진정 댓글과 자본의 힘으로 영원하리라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북악산의 세월이라는 부제가 붙은 '홍수'그림을 보면 화가의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화가는 이번 전시회에는 사회면이 아니라 문화면에 실리고 싶어 남성과 권력 섹션,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출산' 등은 제외시켰다고 웃프게 말했다. 문제작들은 내년에 홍대앞에서 한번더 기회를 갖겠노라 약속했다. 세월호,위안부,박정희 등 국가권력의 폭력에 천착한 작품들을 선보인 화가는 앞으로는 탈핵과 베트남 한국군 민간인 학살문제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만들어놓은 계엄령 체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는 요원할 거라는 게 이유였다. 그러려면 우리가 베트남에 적정한 배상,보상을 하는 등 도덕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일본의 대본영 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위안부 폭력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것과 베트남에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향해 작가정신을 곧추세우고 가는 그는 이 시대의 살아있는 예수다. 광주까지 내려가지 않고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귀한 전시회의 입장료는 불과 3천원, 게다가 선착순으로 장르를 뭐라 규정하기 어려운 홍성담의 책 '난장'(격월간 <에세이스트>에 연재한 '그의 죽음 뒤엔 음악이 흘렀다'를 수정보완하여 엮은 책이란다)도 주셔서 어리둥절해하며 받아왔다. 이달 19일까지 1주일 연장된만큼 관심있는 분들은 전시회에 꼭 한번 다녀오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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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Ma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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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남편, 아들과 한국남성의 젠더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한민국의 성문화는 기본적으로 강간문화라고 했다가 너무 가학적이지 않냐고 거센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남자로서 듣기 싫기는 하겠지만 그동안의 대화를 생각해보면 상식 아닌가 했는데 이야기 나누면서 남성들이 얼마나 일면만을 바라보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50여년을 살아오면서 겪은 성희롱, 성추행 경험과 남성들이 일상적,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과 행동들이 얼마나 여성에게 폭력적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구체적이지 않으면 남자들은 저멀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동안 전혀 짐작조차 못했다며 안쓰러운 눈빛이길래 “그거 일일이 다 말하면 여성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 죽을 때까지 그것만 얘기해도 모자랄 걸. 여자들이 말하는 건 1할도 안되는데 남자들이 아주 지랄들을 하시잖아.”했다. 그리고 말나온김에 "한국사회가 강간을 조장하고 방임하며 심지어는 장려하기까지 하는 강간사회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해." 너무 지나치다 펄쩍 뛰던 두 사람은 부끄럽다고 했다. 평소 젠더이슈에 대해 자주, 다양하게 이야기해온 사람들도 이 정도면 일반적으로는 참 갈 길이 멀구나 생각했다. N번방. 노래방도 키스방도 아니고 스스로 짐승이 되는 방이라니, 그런데 이것은 이미 우리 사회가 그래도 된다고 늘상, 아주 강력한 시그널을 준 결과라 그리 놀랍지 않다. 다만 내가 놀란 것은 그 연령대가 매우 낮아졌다는 것.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20대 젊은 남성들의 이상한 눈빛과 젠더 이슈에 달리는 일베스러운 혐오의 댓글들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5급 행정고시 합격후 연수도중 휴대전화로 동료여성 연수생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다 적발돼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이 내린 퇴학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에서 승소, 2019년 5월 퇴학처분 취소. *2019년 11월 춘천지법은 자신이 소지한 9만여개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성착취물 중 2500여개를 텔레그램을 통해 판매한 남성에게 징역 1년 선고 *2017.5-2019.8까지 서울 강남구 한 고등학교 교실에 침입해 24차례 음란행위를 한 대학생에게 1심에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서울중앙지법의 양형사유는 젊다, 반성한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과 윤중천씨의 성폭행사건 무혐의 선고 *성매매알선 의혹을 받은 양현석 전 YG 엔터테인먼트 대표 무혐의 *여성을 만취시킨 후 집단성폭행하고 단체채팅방에서 부적절한 영상을 수차례 공유한 가수 정준영과 최종훈 1심에서 각각 징역 6년과 5년 선고, 현재 항소심중. *버닝썬게이트 가수 승리 구속영장 두차례 기각, 군입대 *故가수 구하라씨는 전 남친인 최씨가 리벤지 포르노를 전송하고 자신을 협박했다며 최씨를 성폭력처벌 위반과 협박 등의 혐의로 고소했으나 불구속 기소 *최근 3년동안 검경에 수사받은 서울시 교육청 성범죄 사건의 74.5%가 일선 교사이고 2019년 3월부터 6개월간 교육공무원 성비위 사건 310건 대부분 솜방망이 처분 *초중고 성범죄 교사 연간 50여명, 그중 20-30명이 교단에 복귀 *2010년 이후 481명의 교사가 성범죄(절반이상이 미성년자 대상)로 징계, 182명은 교단에 복귀. 성비위 교사 대부분 견책, 감봉 등 경징계. 정직되더라도 10명 중 7명은 추후 복직 *2019년 3월 같은 과 신입여학생들의 나이, 얼굴을 공유, 품평하며 성희롱 발언을 일삼고 초등 제자를 대상으로 가상의 성희롱을 한 서울교대 국어교육과 남학생들에게 2-3주 정학 징계 *길거리에서 자위한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은 기소유예, 변호사 등록 *교사시절 지속적으로 여고생 제자를 성폭행한 배용제 시인에게 1심 징역 8년 선고 *몰카 판사, 후배 성추행 판사 법조계 복귀 *아동 청소년 성범죄 유죄판결 받은 79명의 목사 중 절반이 목회활동 복귀. 일부는 법원명령을 무시하고 등록된 거주지에 살고 있지 않아도 처벌하지 않음 굵직한 성범죄 처벌현황이다. 이것 뿐이겠나. 아마 밤을 새도 모자랄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소위 O양 비디오 사건이 무려 20년 전의 일인데 사회적 반성과 강력한 법을 제정하여 통제했다면 지금 한국은 좀 다른 모습이 아닐까. 이러고도 한국이 강간문화가 아니라 할 수 있나. 국민청원 1호 법안으로 제안된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안을 다루는 올해 3월 3일 국회 법사위 제1소위 회의록을 보자. 딥페이크(사진을 음란영상에 합성) 관련하여 '반포' 등을 목적으로 한 합성물 제작만 처벌할지가 쟁점이었는데 채이배(민생당 비례) 의원이 “반포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딥페이크로 (피해자의)인격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참석자 다수는 개인 소지 목적의 영상제작까지 처벌하는 것은 과하다며 회의적이었다. -“자기만족을 위해 이런 영상을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갈(처벌할) 것이냐.” (정점식 미통당,경남 통영)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 (김오수 법무부 차관) -“자기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 있다.” (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 이에 백혜련 의원이 문제제기하자 송기헌 민주당 법사위 간사(강원 원주)는 -“일기장에 혼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지 않냐.” 고 했고 김도읍(미통당 부산북구), 김인겸 차장도 동의했다. 결국 3월 5일 국회 본회의에서 단톡방 집단 성착취와 같은 N번방 청원에 관한 법안은 본회의에 부의되지 않고 딥페이크 영상의 제작, 유통행위를 처벌하는 내용만을 넣은 성폭력범죄 법안 개정안으로 졸속처리, 3월 17일 공포되었다. 회의록을 보면 정점식, 김오수, 김인겸, 송기헌, 김도읍은 디지털 성범죄를 옹호하는 사법처리감이지만 그들은 오늘도 당당하다. 결과적으로, *현재 대한민국 법에는 성착취 범죄라는 게 없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집단성폭행 혐의가 없다.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이 없다. *N번방에서 스트리밍으로 본 관람자를 처벌할 조항이 없다. *25만원, 150만원을 지불하고 성착취에 가담한 성범죄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없다. 결론은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조항은 없으며 성폭력처벌법상 촬영죄, 유포죄, 협박죄로만 처벌할 수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떼를 쓸 때도 엄마의 눈치를 살핀다. 어디까지 떼를 쓰는 게 좋은지, 울고불고 할것인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좋은지 아이들은 양육자가 대응하는 태도에 대한 나름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양육자를 들었다 놨다 한다. 부모의 양육태도에 따라 아동의 행동양식이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아동심리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엄마들은 이러한 사실을 안다. 법도 마찬가지다. 범죄는 늘 법의 테두리를 뛰어넘지만 가만히 보면 법이 허용하는 선 언저리에서 일어난다. 10대 후반 20대 남성들이면 소위 386세대의 아들딸들이다. 신천지도 그렇고 디지털 성착취도 그렇고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자식을 키웠길래 우리 아이들이 이지경이 되었을까 정말 가슴이 찢어진다. 우리 사회가 미투를 희화화하고 성범죄를 혈기왕성한 남자의 일탈쯤으로 여기며 웃어넘기는 강간문화가 끔찍한 괴물들을 만들었다. 3월 3일 국회 법사위 회의록을 보면 왜 국회의원을 잘 뽑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때 국민청원 1호 N번방 법안을 제대로만 만들었어도 갓갓이든 박사든 강력한 처벌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안일하게 사안을 바라본 후진적인 젠더의식을 가진 법사위원들도 이 사건의 선량한 가해자라는 점이다. 모든 남성들은 잠정적인 성범죄자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말을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1만명 선에서 코로나는 관리되고 통제되겠지만 26만이라는 디지털성범죄는 한국이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국가로 나아가는 데 또다른 책임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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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Jan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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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에서 조국으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들. 우리 동네만큼은 절대 안된다며 트랙터를 몰고 나온 소수의 사람들에게 공포와 혐오를 부추기는 더러운 혀와 방역에 실패하기를 고사지내는 자한당을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것은 우리말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말, 환향녀(還鄕女)였다. 상황도 조건도 많이 다르지만 한줌도 안 되는 무능을 넘어 파렴치한 세력과 분별없이 휩쓸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4백년 전의 부조리극과 너무도 흡사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만큼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늘 그렇듯이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과 노약자들이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조선후기 소설 중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이란 작품이 있다. 여기서 강도(江都)는 소현세자 등의 왕족이 피난간 강화도가 임시왕도로 정해진 당시의 호칭이다. 국가의 위기관리능력을, 그것도 여성의 입장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이어서 당연히 작자는 알 수 없으나 여성이 쓰지 않았을까 싶다. 고전소설 중에서 역사적 사실을 직설적으로, 때론 은유적으로 가차없이 비판한 드문 작품으로 병자호란에 대한 생생한 고발문학이라 할 만하다. 소설은 '청허'라는 선비의 꿈을 통해 강화도에서 죽은 15명 여인들이 모여 저마다 자신이 어떻게 죽었고 어떤 원한이 있는지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여인들은 관리였던 남편과 시아버지의 무사안일과 부조리, 비루함을 고발하고 인조반정 공신계층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남편이 싸울 생각은 않고 스스로 변발하고 청의 종이 되는 모습, 왕비의 언니이자 중신의 아내는 아들이 자신을 찔러죽이고 정절로 표창을 받은 것을 비판한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류의 부인은 사사로이 자식에게 중책을 맡긴 남편의 불편부당함과 밤낮 향락에 빠져 방비를 게을리한 아들 김경징(두 사람은 인조반정 공신이다)이 부끄럽다며 자신은 자결했지만 원한이 사무친다고 하소연한다. 그 외에도 며느리, 딸과 함께 자결한 늙은 여인 등 전쟁의 참상은 말로 다하기 어렵다. 여인네들이 오죽했으면 남성 중심의 완고하고 경직된 사회구조가 혼란을 초래했다며 용골대를 물리친 박씨부인 같은 여성영웅을 만들어냈을까.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청은 조선의 여인 수십만 명을 끌고가 궁궐이나 고관대작의 후처로 들였다. 그리고도 남은 조선인들은 봉천(지금의 심양,선양) 노예시장에서 매매했다. 자금력이 있는 양반들은 가족을 되사왔고 이때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수완을 발휘하여 많은 재물을 모아 속환(贖還)시장에서 꽤 많은 조선인의 몸값을 치르고 구해냈다고 한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들은 대개 경제력이 있는 왕족이나 양반가의 여인들이었는데 절개를 잃었다는 이유로 시집과 친정에서 버림받는다. 국가의 치욕을 초래한 지배층의 무능으로 아내와 딸, 어머니들은 가문을 위해 자결이나 이혼을 강요받았다. 동의없이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상소가 빗발치며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급기야 이혼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차츰 ‘환향녀’는 절개를 잃은 여인이라는 일반명사 화냥년이 되었고 화냥질, 화냥기 등 성적으로 문란한 여인을 가리키는 치욕의 말이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국가와 사회가 여성에게 집단적으로 행사한 성폭력의 증거이다. 자신들의 무능함으로 치욕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족속들, 돌아온 딸과 며느리에게 자결을 강요하고 정절부인 칭호를 하사받거나 열녀문을 세워 가문의 거짓된 영광으로 삼았던 족속들이 이 땅의 기득권 세력의 뿌리다.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은 정부를 국민이 선택할 수 있고 다행히도 이번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집단이라는 점이다. 속절없이 수십만의 여성과 장정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던 무능한 조선이 4백년이 지나 제 나라 국민들을 전세기를 띄워 데려올 만큼 국력이 강해졌다. 이번엔 여보란 듯이 극진히 모셔와서 잘 보살피고 안전해질 때까지 조국이 품어줄 수 있을만큼 경제적으로 부강해졌다. 그러려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세금 낸 것이다. 더 이상 국민을 욕되게 하지 말라. 분명해진 것은 저들은 언제든 정치논리를 앞세워 국민의 생명과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하긴 지난 세월호에서 똑똑히 보았으니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본심이라는 것, 국민을 죽어없어져도 좋을 개돼지로 여긴다는 점을 만방에 공표했다. 다만 그들에게 부화뇌동하여 연신 짐승의 언어를 토해내는 일부 몽매한 사람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럴수록 자신의 무덤을 점점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임을, 톨스토이의 우화에서처럼 결국은 벌레가 되어 땅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내일, 아니 오늘 우한 교민들 일행이 무사히 돌아와 시설에 입소하기를, 중국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의료진과 두려움에 놓여있을 중국인들을 위해 기도한다.
최봉영 and 77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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