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7 h ·
오늘의 역사 한 토막: “6.3사태”
내일이 6월 3일, 우리 현대사에 ‘6.3사태’ 또는 ‘6.3세대’라는 말을 빚어낸 날입니다. 1964년 야당과 대학생들이 “민족 반역적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자, 박정희가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 일체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모든 대학 문을 닫아버렸지요. 이 사건을 ‘6.3사태’라 부르고, 지금은 80세 안팎일 당시 대학생들을 ‘6.3세대’라 일컫습니다.
한국은 1910년부터 45년까지 35년간 일본의 강제점령/식민통치를 당하고도 20년 만에 적대관계를 끝내고 수교했습니다. 미국의 압력에 따라. 그러나 1950년부터 53년까지 3년간 북한과 전쟁하고는 70여년이 흐르도록 적대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어요. 미국의 거부 때문에.
1960년대 졸속적이고 굴욕적인 한일수교는 아직까지 갈등을 빚고 있는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 등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며 우리 서글픈 현대사 한 토막 공부해보시기 바랍니다. 미국 국무부가 비밀해제한 외교문서를 바탕으로 3년 전 신문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이재봉 드림.
“한일수교와 미국의 압력” 전문 읽기:
한일 수교와 미국의 압력 | 미국 바로 알기
이재봉 2021. 6. 1. 22:13http://blog.daum.net/pbpm21/556
한일 수교와 미국의 압력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1. 시작하는 글
한반도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일본의 강제점령 또는 식민통치를 당하고 20년이 흐른 1965년 남한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국민의 반일감정이 가시지 않은 터에 서둘러 하느라 ‘졸속 협상’이란 비판이 나왔다. 일본이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금이 아니라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차관을 포함해 모두 8억 달러를 건넸으니 ‘굴욕 외교’라는 비난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강요와 다름없는 압력 때문에 “양키 입 닥쳐”라는 시위 구호가 나오기도 했다.
이 같은 졸속적이고 굴욕적 협상 과정에서 ‘독도 폭파’ 얘기가 나왔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일본의 협상대표가 한 망언이 아니라, 한국의 협상대표가 제안한 것이었다. 독도 영유권 문제가 협상에 걸림돌이 된다면서. 2018년 6월 죽은 김종필이 1961년 박정희와 5.16쿠데타를 일으킨 뒤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그 부장이 되어 1년 반이 지난 1962년 10월 일본에 건너가 한일협정의 기초를 마련했던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합의하면서 독도를 폭파해 없애버리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오히라 (大平)는 그 때 일본 외상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4년부터 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르자 야당과 대학생들이 “민족 반역적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64년 6월 3일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 일체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모든 대학의 문을 닫아버렸다. 이른바 ‘6.3 사태’다.
요즘 횡령과 뇌물 수수 등의 죄로 감옥에 있는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나도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유행시킨 적이 있는데, 그가 데모를 해봤다고 내세우던 게 바로 1964년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였다.
2. 한일협정에 관한 정부문서와 미국의 역할에 관한 연구
미국 국무부는 1960년대 외교문서를 1980년대부터 비밀 해제해 공개하기 시작했다. 한일회담이 시작되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2-1960)의 한국 관련 외교문서집은 1994년 출판되었다. 케네디 행정부 (1961-1963)의 한국 관련 외교문서집은 1996년에, 존슨 행정부 (1964-1968)의 한국 관련 외교문서집은 2000년에 출판되었다. 이 가운데 2000년 출판된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4-1968, Volume XXIX, Part 1, Korea 편에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촉진하기 위한 미국의 노력 (U.S. Efforts To Encourage Normalization of Relations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이라는 별도의 항목 아래 약 40건의 문서가 실려 있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왜 그리고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한.일 두 나라는 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 외교통상부는 1995년부터 1950-60년대의 외교문서들을 공개하기 시작해 2005년까지 약 160권에 이르는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들을 모두 공개했다. 2005년 1월 한국 정부가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겠다고 예고하자 일본 정부가 반발했다. 한국의 친일 보수신문들도 거들었다. 일본의 치부가 드러날까봐 우려한 것이다.
남한이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자 북한은 4일 후 2005년 1월 21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당시 남조선 당국은 일제시기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03만 2천여 명에 대해 1인당 생존자는 200달러, 사망자는 1천 650달러라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북한은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감행한 100여만 명의 학살만행, 840여만 명의 강제련행, 20여만 명의 일본군 ‘위안부’ 등 중대 인권피해 문제”에 대해 “별도의 사죄와 함께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조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 강조해오던 터였다.
한일협정에 관한 연구는 박정희가 1979년 죽은 뒤부터 발표될 수 있었다. 1980년대엔 이재오의 ≪한일관계사의 인식: 한일회담과 그 반대운동≫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1964-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앞장서고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1984년엔 “분단 40년, 그 고난의 벽을 깨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 ≪해방 후 한국 학생운동사≫를 펴내기도 했다. 2018년 7월, 친구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 전도사 노릇을 한 게 명예스럽다고 말한 자유한국당 상임고문이기도 하다.
1995년엔 <민족문제연구소>가 한일협정 30주년을 맞아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는 책을 펴냈다. 지금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의 글을 포함해 10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이종원 일본 동북대학 교수가 “기밀 해제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미국정부의 외교문서” 등을 활용하여 쓴 <한일회담의 국제정치적 배경>이란 논문이 주목할 만하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실 한일회담은 한국과 일본의 2국간 교섭이라기보다는 미국을 포함한 3국간 교섭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상에 가깝다. 미국은 자신의 동아시아 정책의 필요에 따라 한일관계의 재구축을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한일 양국정부도 교섭의 상대방보다는 미국의 정책과 의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치 경제적인 힘의 원천인 미국이라는 세력을 서로 자신에 유리한 방향으로 동원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이도성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1995년 “서울의 외무부 본부는 물론 동경의 주일대사관까지 수도 없이 드나든 끝에” 정부 서고의 관련 자료들을 입수하여 ≪실록 박정희와 한일회담: 5.16에서 조인까지≫라는 자료집을 펴냈다. 이 가운데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내용의 자료들이 몇 가지 제시되어 있다.
2018년 통일연구원장을 맡은 김연철 교수는 2016년 펴낸 ≪협상의 전략≫에서 한일협정도 다루고 있다. <쉽게 타협하면 역사가 복수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일본에 유리한 청구권 협상과 미국의 압력,” “미해결 과제로 남은 독도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3. 한일 수교를 위한 미국의 개입과 압력
한국과 일본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구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반공정책에 따라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한일협정은 미국이 1947년부터 소련과 냉전을 벌이면서 추진한 동아시아 지역통합 전략의 일환이었다. 한일협정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양자협상보다는 미국의 중개와 압력에 의해 시작되고 진행된 삼자협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미국이 195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한일수교를 위한 협상을 제안하고 주선한 것은 안보와 경제 문제 때문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의 공산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삼각공조가 필요했고, 미국의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일본과 분담해야 했다.
1) 이승만 정부 시기 (1948-1960년)
미국은 1945년부터 38선 이남에서 군정을 실시하며 1947년부터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그 경제를 일본 경제에 결합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아울러 실행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1949년 1월 도쿄에 한국 주일대표부가 개설되고 1949년 4월 한일통상협정이 맺어지도록 이끌었다. 1950년 2월엔 이승만 대통령을 일본으로 초청하고,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10월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최초의 예비회담이 열리도록 주선했다.
1952년 2월 제1차 한일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한 달 전 이승만 정부가 내놓은 ‘평화선’ 또는 ‘이승만 라인’이라 불리는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과 재산청구권 문제 등으로 곧 결렬되었다. 이 과정에서 트루먼 (Harry Truman) 정부는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는 한국보다 미국의 개입을 반대하는 일본을 더 배려하여 소극적 개입 자세를 지켰다.
1953년 1월 들어선 아이젠하워 (Dwight Eisenhower)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지역의 집단안보체제 구축을 주요 정책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1953년 1월 이승만을 일본으로 초청한 데 이어 국무부 관리들이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이 열리도록 했다. 두 나라 사이의 이견으로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다.
1953년 10월 열린 제3차 회담 역시 이른바 ‘구보타 (久保田) 망언’으로 결렬되었다.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가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며,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인들에게 오히려 이익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말썽이 일자 오카자키 (岡崎) 일본 외무상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한 것”이라고 오히려 망언을 거들었다.
이후 미국 국무부 관리들이 4개월 동안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공식적이고 직접적으로 중개에 나섰지만 한일 간의 불신과 갈등을 좁히지 못했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한일회담의 가장 큰 걸림돌이 이승만의 완고한 반일감정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직접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국무부장관이나 주한미국대사 등 국무부 고위 관리들은 이승만과 회담할 때마다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주문했다.
사실 이승만의 반일감정은 미국의 노력에 걸림돌이 되었고 그의 완고한 성격은 미국의 영향력 행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1954년 7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Allen Dulles) 국무부장관이 한일협정을 강요하다시피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반발함으로써 회담이 결렬되기도 했다. 덜레스가 한미 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한일 관계정상화에 있다며 한국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을 위해 반일정책을 포기하라고 하자, 이승만은 변함없이 한국을 식민지처럼 간주하는 일본을 비난하며 반발했다. 아이젠하워가 이승만의 완고한 태도에 불만을 드러내며 퇴장한 데 이어, 곧 재개된 회담에서는 이승만이 도중에 퇴장해버린 것이다.
한편, 한국전쟁을 통해 재정적자가 심각해진 미국은 1950년대 중반부터 국방비 감축 및 대외원조 축소 등을 통해 정부 지출을 줄이고자 했다. 그 무렵 미국이 가장 많은 원조를 제공한 나라 가운데 하나가 한국이었는데. 1950년대 중반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 및 군사 지원 액수는 1년 평균 10억 달러 안팎이었다.
이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줄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가 한일관계 개선이었다. 한국과 일본이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수교하면 일본이 미국 대신 한국에 원조할 수 있고 한미일 삼국조약 (tripartite treaty)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줄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는 주한미군의 핵무기 배치였다. 1950년대 중반 북한 병력은 약 35만 명이었는데 남한 병력은 두 배가 넘는 72만 명이었다. 남한은 미국의 원조로 거대한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미국이 재정 적자를 줄이려면 남한 병력을 감축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재정의 70% 이상을 국방비로 쓰면서도 무력 북진통일을 이룰 때까지 병력을 조금도 감축할 수 없다며 미국의 계획에 거세게 반발했다. 이승만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며 남한 병력을 감축함으로써 미국의 군사 지원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 핵무기를 비롯한 주한미군 장비의 현대화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58년 1월부터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하고 1959년부터 한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 원조를 급격히 줄이면서 이승만을 더욱 압박했다. 그래도 이승만은 여전히 한일협상을 완강하게 거부하며 비타협적 자세를 취했다.
이승만 정부는 ‘평화선’ 또는 ‘이승만 라인’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격침하거나 나포하고 어부들을 구속했다. 일본은 이에 맞서 1956년부터 재일동포를 조선 (북한)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자 미국은 1959년 5월 ‘평화선’에 항의하는 각서를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나아가 1960년부터 한일협정을 위한 압력을 서울과 도쿄 그리고 와싱턴에서 입체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학생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미국은 “한국 역사상 최악의 선거”에 대해 경고하며 이승만 정부의 이러한 약점을 한일협정을 위한 압력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해를 침범한 일본 어부들을 구속하고 일본과의 무역을 단절하는 등 “일본에 대한 한국의 비현실적 대외정책”은 미국의 요구대로 바뀌지 않았다.
이승만은 주한 미국대사에게 국무부 각서가 “진실과 매우 동떨어진 것”이고, 국무부장관이나 관리들이 동북아시아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데다 한국인들보다 일본인들을 더 신임하는 등 너무 친일적이라고 비판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래도 미국의 지속적인 압력에 따라 3월 18일 한일회담 재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4월 초 양국 간에 무역이 재개되었으며, 4월 15일에는 한일회담이 다시 열렸다. 그러나 4월 27일 이승만의 하야로 중단되고 말았다.
2) 허정 과도정부 및 장면 내각 시기 (1960-1961년)
이승만이 1960년 4월혁명으로 물러나자 미국의 압력은 더욱 다양해지고 강해졌다. 국무부는 주한 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허정 과도정부 수반에게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꾀하고 미국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추구하도록 주문했다. 마침 허정은 1959년 8월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는데 미국은 일본에 대한 그의 협상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한일관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며 자신이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에 ‘특별히’ 힘쓸 테니 미국은 일본정부의 재일동포 북송을 막는 데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매카노기 (Walter McConaughy) 주한 미국대사의 “충고와 도움”에 따라 1960년 5월 3일 과도정부 ‘5대 시책’을 발표했는데, 첫째가 “반공주의 정책을 더욱 견실하게 추진한다”는 것이고, 다섯째가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도쿄의 매카써 (Douglas MacArthur) 주일 미국대사는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미국은 한국의 새 정부를 이용해야 한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1960년 7.29 총선을 통해 들어선 장면 정부 역시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일본과 “새롭고 적극적인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3) 박정희 정부 시기 (1961-1965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자, 미국은 그가 해방 전에는 친일 활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자로 변하여 “친공 혹은 반미감정의 증거”가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쿠데타를 승인하며 한일회담을 서두르도록 촉구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961년 6월 13일 열린 국가안보회의 (NSC)에서 케네디 (John Kennedy) 대통령은 한국의 발전에 가장 큰 장애물이 한일 간의 지속적인 반목이라고 결론 내렸다. 버거 (Samuel Berger) 주한미국대사 지명자에게 서울에 가면 한일관계 개선에 집중해달라고 지시하고, 케네디 자신은 일주일 후 미국을 방문한 이케다 (池田) 일본 수상에게 한일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1961년 10월부터 제6차 한일회담이 시작되었는데, 박정희는 1961년 11월 케네디의 초청으로 와싱턴으로 향하다 도쿄에 들러 이케다와 회담하며 한일수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은 1962년부터 한일협정을 “미국정부의 최고 관심사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제6차 한일회담이 이른바 ‘대일 청구권’이라는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금 문제로 1962년 3월 중단되자 한국과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국이 “비현실적으로 높게 (unrealistically high)” 8억 달러를 청구하고 일본은 “비현실적으로 낮게” 7천만 달러를 제공하려 하기 때문에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다고 파악하면서, 한국보다 일본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은 보상금 규모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미국에 알렸지만 일본은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1962년 5월 케네디는 요시다 (吉田) 전 수상에게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일본 안보에 대한 중요성 때문에 한국 안보를 지켜왔다. 한국이 일본과의 밀접한 경제관계 없이는 경제성장을 이룰 수 없다. 이제 일본이 역할을 해줘야 할 때다.”
그 무렵 5.16 쿠데타 이후 ‘제2인자’로 행세하며 한국정치를 쥐락펴락하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1962년 10월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오히라 (大平) 외무상 및 이케다 수상을 만났다. 그리고 와싱턴에 도착해 러스크 (Dean Rusk) 국무부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오히라 및 이케다와 대일 청구권, 어업문제, 평화선, 독도문제 등에 관해 주로 논의했다. 재일동포 지위와 문화재 반환 등도 얘기했지만 이들은 사소한 문제다. 청구권과 관련해 오히라는 1년에 2,500만 달러씩 12년 동안 3억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난 3억 달러는 충분하지 않고 12년은 너무 길다면서 3억 달러 이상과 차관을 포함해 모두 6억 달러를 요구했다..... 오히라는 3억 달러까지 줄 수 있지만 ‘보상금 (reparations)’ 명목은 될 수 없고,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축하하는 (congratulatory in recognition of Korean Independence)’ 명목으로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3억 달러는 충분하지 않고 보상금 3억 달러 이상과 차관을 포함해 6억 달러가 되어야 한다고 거듭 요구했다. 차관이 아닌 돈의 명목에 대해 한국인들에게 전체 금액에 보상금이 포함되는 것으로 알려진다면 ‘보상금’이라는 말을 고집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러스크는 한국과 일본이 될수록 최대한의 노력을 해달라고 강력하게 촉구해왔다며, 한일수교는 두 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김종필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일본에 들러 오히라와 다시 만나겠다고 대꾸하며 독도 문제에 관해 보고했다. 일본이 최근에 독도 문제를 협상 주제로 들고 나오기 시작했는데, 김종필은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미루자고 했다. 독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러스크가 묻자, 김종필은 “갈매기가 들르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김종필이 오히라에게 독도를 폭파해버리자고 제안했다고 하자, 러스크도 그 해결책을 떠올렸다고 대꾸했다. 오히라는 김종필의 제안에 만족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케다 수상에겐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는 게 일본의 유일한 해결책이냐고 김종필이 묻자, 이케다는 대중의 관심이 식을 때까지 연기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밝혔다. 독도 폭파를 한국이 제안하고 일본이 거절했던 셈인데,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진 내용과는 정반대다.
김종필은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오히라와 다시 만나 두 번째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김종필-오히라 메모’다. 한일협정의 기초가 된 문서다. 주요 내용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차관 1억 달러로 청구권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자금의 명목을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은 ‘독립 축하금’으로 건네고 한국은 ‘보상금’으로 받았다고 서로 편리하게 주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내용이 한국에 알려지자 야당과 대학생들이 “민족 반역적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64년 6월 3일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 일체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모든 대학의 문을 닫아버렸다.
케네디가 1963년 11월 암살당하고 들어선 존슨 (Lyndon Johnson) 행정부 역시 “한일협상의 조기 타결을 가장 급선무”로 삼았다. 존슨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의 주미대사들을 부르기도 하고 러스크 국무부장관이 일본 수상과 한국 대통령을 만나기도 하면서 다그쳤다. 그 이유는 1964년 5-7월 작성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가안보위원회 (NSC) 보고서에 잘 드러나 있다.
“요즘 동북아의 가장 급선무는 한일협정이다. 이는 병력을 감축하는 것보다 미국의 재정 부담을 줄이는 장기적 방법이다. 미국은 아직도 2,000만 인구의 한국에 매년 3억 달러 이상을 쓰고 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은 장기간에 걸친 부담을 나눌 수 있는 나라를 찾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일본이다. 한일협정이 맺어지면 6억 내지 10억 달러의 다양한 일본 자금이 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남한에 38억 달러 이상의 경제원조와 28억 달러 이상의 군사원조를 쏟아 부었다. 우리의 모든 원조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여전히 미국의 불안정한 의붓자식 (this nation is still an unstable U.S. stepchild)이다..... 우리는 1965년 한국에 대해 3억 5천만 내지 4억 달러의 원조를 계획하고 있는데, 결실이 나타나지 않는 지불을 계속할 수는 없다.....”
1964년 10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압력은 더욱 거세졌다. 마침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1월부터 미국 방문을 추진하는데, 미국은 이를 이용해 한국정부를 더욱 압박할 수 있었다. 정권의 정통성 확보 및 유지를 위해 국민의 지지보다 미국의 승인과 지원을 더 중시했던 박정희는 미국 방문 이전에 한일협정이 서명되어야 한다는 미국의 강력한 압박을 받고 일본 정부에 합의문 작성을 서둘러줄 것을 촉구했다.
이에 반해 일본은 한국처럼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한국과의 수교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라 외상은 주일 미국대사에게 미국의 압력이 일본에서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으니 일본정부에 압력을 가하지 말고 한일협상을 “일본인들의 방식으로 일본인들의 페이스에 따라” 추진하도록 내버려두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일본은 한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망언까지 곁들이며 ‘피해 보상’이 아닌 ‘독립 축하’ 또는 ‘경제 협력’의 명목으로 돈을 주겠다고 배짱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은 195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의 수교에 큰 관심을 보여 왔는데 미국은 이를 이용해 일본을 압박할 수 있었다. 당시까지 일본과 중국의 관계개선을 허용하지 않던 미국이 일본에게 한일협정을 먼저 타결하면 중국에 대한 일본의 어떠한 접근에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다고 암시한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박정희는 1965년 5월 미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미국에게 한일협정을 6월까지 체결할 수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주일한국대사에게 친서를 보내 6월 15일까지 한일협상을 매듭짓도록 지시하면서 성사를 위해 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이에 한국의 협상대표들은 일본 측에서 문제 삼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합의문 끝에 “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은 쟁점은 무엇이든지 추후 협상의 주제가 될 것”이라는 문구를 덧붙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일본과 협상하면서 쟁점이 되는 부분은 국내적으로 처리하자고 제안해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미루게 된 배경이다.
1965년 6월, 한국에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이동원 외무부장관이 일본을 방문해 한일협정에 서명했다. 그는 5개월 뒤 미국을 방문해 국무부 관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큰형 (the big brother)이다. 두 동생들이 과거에 서로 다투었는데, 앞으로 동생들이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집안일 (family matters)에 관해 얘기할 수 있도록 형님이 이끌어주면 좋겠다.” 미국은 한국을 ‘의붓자식’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한국은 미국을 ‘큰형’으로 받들고 싶어 했고, 한국정부는 국민의 깊은 반일감정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 가족이 되기를 바랐던 셈이다. 굴욕적이고 졸속적으로 처리된 한일협정과 관련해 미국의 오만함이나 일본의 무례함을 비판하기에 앞서 한국의 종속성과 비굴함을 먼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 덧붙이는 글
2018년 위 글을 신문에 연재하던 중 뉴욕의 한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받았다. “왜 그 끔찍한 서울대학교 총장놈 이름은 밝히지 않으세요? 권중휘.” 1970년대 초 경북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다 민주화운동을 한 죄로 군대에 끌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약혼자 때문에 한 맺힌 삶을 살아온 칠순 여성의 피맺힌 절규였다.
그 할머니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며 역사 한 토막을 밝히기 위해 좀 더 자세히 소개한다. 1964년 6월 3일, 야당의원들과 대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박정희가 계엄령을 선포한 날,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국무부로 보낸 전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박정희는 계엄령에 대한 미국의 동의와 협조를 얻기 위해 버거 (Samuel Berger) 주한미국대사와 하우즈 (Hamilton Howze) 주한미군사령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서울대학교 총장이 그 날 나용균 야당 국회부의장을 통해 자신에게 “65명의 서울대 학생과 시위대를 부추기는 다수의 교수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정보를 제공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하우즈에게 6사단과 28사단 병력을 작전통제권에서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우즈는 버거의 동의를 얻어 승인했다. ‘미국의 승인이나 동의 (approval or agreement)’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말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 때 서울대학교 총장이 권중휘. 일본 동경제국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한사전을 펴냈다는 대단한 영문학자였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해인 1961년 총장으로 취임해 퇴임을 5일 앞둔 1964년 6월 3일, 박정희에게 자기 학생들과 교수들이 빨갱이라고 밀고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군사독재의 탄압으로부터 학생들과 교수들을 보호하기는커녕.
나용균 국회부의장은 해방 전에 독립운동을 하다 제헌국회부터 6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원로 정치인이었다. 1960년 4월혁명 직후엔 장관도 지내고 1963년엔 야당 몫으로 국회부의장까지 된 사람이 야당이 주도하는 한일협정 반대시위에 앞장서는 ‘빨갱이들’ 명단을 박정희에게 건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자기가 앞장서기는커녕.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 겸 최고 대학의 총장과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까지 군사독재자의 끄나풀 노릇을 하며 대학생들과 야당의원들이 주도한 민족 반역적이고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방해했던 것이다. 폭압적인 박정희 군사독재가 18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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