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대학의 조센징 -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정종현 (지은이)휴머니스트2019-06-24
책소개
해방 이후 독립 국가를 세우는 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중 좌우를 막론하고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장치였던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에서 유학했던 조선인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상당수가 제국 일본의 관료로 복무하며 친일을 했거나, 제국의 첨단 지식과 관료 경험을 밑천으로 해방 후에도 남북한의 행정, 경제, 사법, 지식 체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제국대학에 유학 갔던 이들이 모두 출세를 염원한 관료가 되지는 않았다. 급진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고 변혁운동에 뛰어든 이도 있었고, 세속적 성공과 시대적 한계 사이에서 갈등한 이들은 학문으로 파고들었다. 이들 모두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 유무형의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여전히 대한민국에 유령처럼 떠돈다.
이 책은 일제 치하에서 일본으로 유학 갔던 조선인들이 왜 유학을 떠났으며, 가서 누구에게 무엇을 배웠고, 돌아와서는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부 정종현 교수가 교토에서부터 10년간 여기저기 흩어진 기록을 더듬고 고뇌한 결과물이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현해탄을 건너는 청년들
1장. 제국대학,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장치
유럽(독일) 대학을 번안하다 / ‘법학부’ 엘리트가 지배하는 나라 / ‘신진카이’ 혹은 저항과 전향의 정신구조 / 제국대학과 노벨상 그리고 강좌제
2장, 조선인 교토제국대학생, 제국의 사업가가 되다
오사카공단에 매혹된 식민지 소년 / 민족기업가인가, 제국의 부역자인가 / 제국대학이라는 사회자본 / ‘경방장학생’과 계급재생산
3장, 누가 제국대학으로 유학을 갔는가
일본 ‘내지’ 제국대학을 선호한 까닭 /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의 규모 / 제국대학의 관문, 구제고등학교 / 제국대학 학생들은 금수저?
4장, 관비 유학, 가난한 조센징에게 건넨 제국의 장학금
가난했던 제국대학생들 / 고학생의 고단한 생활 / 일본 제국의 관비 유학생 / 관비 유학생은 친일파일까? / 인간적 후의와 제국의 이익 사이 / ‘자강회’는 왜 조선인학생을 지원했나? / 자강회의 장학금을 받은 유학생들
5장, 기숙사에서 제국 엘리트의 정체성을 익히다
대학 예과로서의 고등학교 / 기숙사라는 특수공동체 / ‘방 칼라’ / ‘스톰’ / ‘데칸쇼’의 노래 / 고등학생의 독서 / 제국대학 입시 / 제국대학생의 공부와 오락 그리고 연애
6장, 제국대학의 교수들은 누구인가
제국대학의 캠퍼스 풍경과 교수들 / 요시노 사쿠조와 김우영 / 가와이 에이지로와 이동화 / 가와카미 하지메와 연희·보성 전문학교의 상과 / 후지나미 아키라와 윤일선
7장, 총독부 ‘나리’가 되어 돌아온 조센징들
제국대학 유학생들의 진로 / 식민지판 과거, 고등문관시험 / 행정관료들의 변명 / 사법관료들의 변명 / ‘고병국’, 혹은 예외적 인간 / 식민지 관료들의 해방 이후
8장, 식민지인, 과학기술을 통해 제국의 주체를 꿈꾸다
과학(자)과 조국 / 식민지판 ‘문송합니다’ / 차별을 극복하는 ‘과학’ 판타지 / 식민지 문학이 그린 과학기술(자) / 교토제국대학의 두 조선인 교수 이야기 / 과학자의 선택: 도덕과 합리 사이 / 리승기의 과학은 도덕적인가?
9장, 제국의 지식으로 제국에 저항한 사람들
별이 된 청년, 송몽규 / ‘곰’이라 불린 투사, 박영출 / 유형식, 제국대학 출신 소시민의 초상 / 친일파 아버지와 좌익 아들 / 운동권 대학생에서 총독부 경찰로 / 마르크스주의자에서 도색영화 브로커로
10장, 금녀의 영역, 제국대학으로 유학 간 여성들
제국대학에 등장한 여학생들 / 신의경, 최초의 제국대학 여자 유학생 / 조현경, 규슈제국대학의 첫 여자 유학생 / ‘내 이름은 김삼순’, 최초의 여성 농학박사 /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제국대학 / 신진순, 북한의 문학예술을 움직인 제국대학생
11장, 식민지인들의 제국대학 동창회
연합 학우회에서 제국대학 동창회로 / 간토대지진과 1920년대의 교토학우회 / 《학조》와 1920년대 제국대학 유학생의 인식 / 《동창회보》와 식민지 후반기 제국대학생의 인식 / 식민지 유학생회에서 제국의 지방향우회로
12장, 제국대학 유학생들은 해방 후 무엇을 하였나
임시정부와 ‘행정연구위원회’ / 제국대학 법학부와 제헌헌법 / 사사오입 개헌과 제국대학 출신들 / 권력과 지식인, 두 동창의 다른 처세 / 민관식과 고교평준화 / 제국대학과 ‘문학’의 사회적 위상
13장, 남한의 지식 재편을 주도하다
제국대학 출신과 해방 후 교육·학술 / 식민지 청산과 ‘국대안’ 파동 / ‘교수자치’의 이상과 허상 / 일본 지식에서 미국 지식으로 / ‘조선학’에서 ‘한국학’으로
14장, 북한 지식 제도를 확립한 제국대학의 졸업생들
김일성종합대학의 창설 / ‘애국미’와 ‘인민의 대학’ / 제국대학 출신들이 김일성종합대학으로 간 까닭은 / 일본 지식에서 소련 지식으로 / 최응석과 냉전의 보건의료체계
에필로그: ‘제국대학 유학’의 역사화를 위하여
본문의 주
부록
〈부록 1〉 도쿄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 · 동창생 명부(1877~1945)
〈부록 2〉 도쿄제국대학 조선인 재적생 · 졸업생 명부(1897~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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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메이지 일본의 화두는 서구 따라잡기였다.
메이지 일본의 화두는 서구 따라잡기였다. - 윤박사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기업인을 낳고, 악덕기업은 현을 낳고.....
동학군은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도배장이는 남상이를 낳고..... - 피그말리온효과
일본 제국-식민지 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도부 행정사법 및 식산은행과 관립학교 등 식민지 국가 기구의각 영역에서 그들은 제국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유용한 부품으로작동했다.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부정적 요소 때문에 제국대학이라는 지식 제도와 관련된 근대 한국의 경험을 도덕적인 이분법으로 모두 ‘악‘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적출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한국 근현대의 지식과 문화, 제도는 솜씨 좋은 외과의사가 좋은 세포만을 남겨두고 암 덩어리를 도려내듯, ‘일본적인 것‘ 혹은 ‘미국적인 것을 발라내면 ‘민족적인 것‘만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본질주의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고일지도 모른다. 접기 - marx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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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정종현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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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식민지 후반기 한국 문학에 나타난 동양론 연구〉로 200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동아시아 비교문학, 지성사, 독서문화사, 냉전문화연구 등 20세기 한국학의 다양한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2010년부터 1년간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에서 박사후 연수를 한 후,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HK연구교수와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교수를 거쳐 2019년 현재는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동양론과 식민지 조선문학》(창비, 2011), 《제국의 기억과 전유-1940년대 한국문학의 연속과 비연속》(어문학사, 2012)이 있고, 공저로 《신라의 발견》(동국대출판부, 2009), 《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동국대출판부, 2009), 《문학과 과학》(소명출판, 2013), 《검열의 제국》(푸른역사, 2016), 《미국과 아시아》(아연출판부, 2018), 《대한민국 독서사》(서해문집, 2018) 등이 있으며, 공역서로 《고향이라는 이야기》(동국대출판부, 2007), 《제국대학-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장치》(산처럼, 2017)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제국대학의 조센징>,<대한민국 독서사>,<다산(茶山)의 초상> … 총 1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본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 1,000여 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그들은 무엇이 되고자 떠났고, 무엇이 되어 돌아왔나?
친일 엘리트 양성소이자 조선 독립운동의 수원지,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들의 흔적을 추적한 집단 전기!
해방 이후 독립 국가를 세우는 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중 좌우를 막론하고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장치였던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에서 유학했던 조선인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상당수가 제국 일본의 관료로 복무하며 친일을 했거나, 제국의 첨단 지식과 관료 경험을 밑천으로 해방 후에도 남북한의 행정, 경제, 사법, 지식 체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제국대학에 유학 갔던 이들이 모두 출세를 염원한 관료가 되지는 않았다. 급진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고 변혁운동에 뛰어든 이도 있었고, 세속적 성공과 시대적 한계 사이에서 갈등한 이들은 학문으로 파고들었다. 이들 모두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 유무형의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여전히 대한민국에 유령처럼 떠돈다. 이 책은 일제 치하에서 일본으로 유학 갔던 조선인들이 왜 유학을 떠났으며, 가서 누구에게 무엇을 배웠고, 돌아와서는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부 정종현 교수가 교토에서부터 10년간 여기저기 흩어진 기록을 더듬고 고뇌한 결과물이다!
1. 왜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에 주목하는가?
-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제국대학 유학생의 계보와 네트워크를 살피다
2002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통령직을 두고 겨뤘던 후보는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였다. 이회창 후보는 제국대학으로 유학 갔던 엘리트 집안이 어떻게 세습되어 지금까지 계속되는지를 보여준 매우 상징적인 사례다. 그는 본가, 외가, 처가가 모두 제국대학, 고등문관시험,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의 종합적 구현체였다. 이회창의 조부는 충남 예산의 지주였고 백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를 지냈던 이태규였으며, 외삼촌 김성용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일본 군수성 관료를 역임했다. 이모였던 김삼순은 홋카이도제국대학 식물학과 출신의 농학박사였으며, 이회창의 장인은 일제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를 패스하고 해방 이후 대법원장 직무대행 및 대법관을 지낸 한성수였다.
식민지 조선 굴지의 기업, 경성방직을 경영해 조선인 최고의 사업가로 인정받았던 김연수는 인촌 김성수의 동생이었다. 김연수는 열다섯 살에 일본으로 유학 가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 역시 전라도 대지주 집안의 자제였지만 그의 사업이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의 사업가로서 그가 일본 제국의 차별을 어떻게 비켜났으며 위기 때마다 그를 도운 인물들은 누구였을까? 그 물음표의 자리에 늘 교토제국대학 졸업생이라는 네트워크가 있었다. 김연수의 집안은 여전히 일본의 미쓰비시사와 관계를 유지하며 비스페놀 공장을 설립하는 등 네트워크의 덕을 톡톡히 대물림하고 있다.
이처럼 여전히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는 인물들의 계보를 거슬러 오르면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과 만나게 된다. 제국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제국대학 유학생이라는 찬란한 휘장 속에 가려진 그들의 네트워크와 현재까지 지속되는 영향력에 대한 역사적 이해이다. 지주와 관료, 제국대학, 사업가 등이 얽힌 그 유기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도모했을까?
2. 일본 본토 제국대학 유학생에 관한 최초의 집단 전기
- 교토에서 처음 조선인 유학생의 흔적을 더듬은 한 소장학자의 10년간의 역작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부의 정종현 교수는 10년 전 교토에서 처음 조선인유학생 명부를 보고 이들의 실체에 관심을 가졌다. 교토제국대학에서 시작한 작업은 당시 제국대학의 가장 핵심이었던 도쿄제국대학에 유학했던 조선인들의 명부를 정리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살피며 다시 옮겨서 정리하는 데에만 꼬박 1년이 걸렸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이들의 이후 행적을 여러 자료를 종합해 하나씩 채워 넣고 서사를 발굴하다 보니 근 1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애초의 목표는 일곱 개의 제국대학을 전수조사하여 제국대학 졸업생 또는 재적생의 행적을 모두 정리하는 것이었지만 그 작업의 분량과 시간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우선 제국대학 중 가장 핵심이었던 도쿄·교토 제국대학의 명부를 완성하고 그들의 삶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어내기로 했다. 물론 당시 주목할 만한 인물들은 일곱 개 제국대학을 가리지 않고 함께 엮었다. 일제 치하에 본토에 유학했던 학생만 근 1,000여 명을 넘는다. 이들에 대한 조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은 대한민국의 근현대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데 중요한 밑그림이 될 것이다.
3. 제국대학이란 일본과 한국에 과연 무엇이었는가?
-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장치, 제국대학의 명과 암을 들여다보다
제국대학은 일본 본토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으며 조선인들에게는 어떤 대상이었을까?
제국대학은 당시 일본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면서 국가 관료를 양성하는 수급처였다. 국가가 직접 경영하는 대학이었기에 제국대학은 특권적 위상을 부여받았다. 이를테면 ‘학사’라는 타이틀도 제국대학 졸업생에 한정된 것이었다. 최고의 학문 수준을 갖춘 제국대학의 교수들은 관료에 버금가는 대우와 사회적 존경을 받았다. 제국대학을 설립한 이후 후신 대학을 합쳐 일본의 노벨상의 이과 수상자가 미국에 이어 2위라는 사실은 이들의 학문 수준이 당시부터 세계적이었다는 반증이다. 제국대학 제도가 없어진 후에도 이 같은 사회적 인식은 계속되어 구제국대학이었던 국립대학들은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대학이 되었다.
이런 특권적 지위를 지닌 제국대학에 조선인 유학생이 입학한다는 것은 대단한 영전이었다. 따라서 조선인이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으로 유학 갈 때는 대다수가 출세와 식민지 중반기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의 부실한 교육환경 때문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다수의 조선인 졸업생은 식민지 총독부의 관료로 돌아와 ‘나리’로 대접받으며 일했지만, 정작 본토의 중요한 공직자는 되기 어려웠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제국 최고의 엘리트라는 자부심과 동시에 식민지인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했다.
조선인 유학생의 모든 학생이 관료나 판검사의 길을 택한 것은 아니다. 당시 제국대학은 국가가 주도해서 운영했지만, 교수들의 학문적 자율성도 보장된 편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교토제국대학의 가와카미 하지메 교수 같은 이는 일본 내 마르크스 사상의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에 감화받은 유학생들은 조선에 돌아와 사상 전파에 일조하기도 했다.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진 않지만 제국대학 유학생으로 마르크시즘에 빠졌다가 친일파로 변신, 이후 도색영화 브로커로 전락했던 김린이 같은 이의 삶도 빼놓을 수 없다. 아울러 금녀의 영역이었던 제국대학에 조선인 여학생으로 홋카이도제국대학에 당당히 유학했던 김삼순 같은 여성들의 서사도 이 책이 길어올린 새로운 성과다.
4. 해방 후 대한민국 건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집단, 제국대학 유학생 그룹
- 역사적 사실로서의 제국대학의 경험과 영향력에 대한 객관적 성찰이 필요하다!
제국대학에서 유학한 조선인들은 식민지 관료였거나 판검사, 혹은 교수나 사업가였던 경험을 밑천으로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의 행정, 사법, 교육, 경제 거의 모든 부문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일본 제국주의의 일사불란한 관료제를 경험한 이들은 새로 건설하는 대한민국에서는 급한 대로 참조해야만 하는 롤모델처럼 보였을 것이다. 특히 이들의 영향력은 지도자 부류에서는 공식적으로 부인되거나 묵살되면서도 대부분의 현장 실무를 총괄하는 실질적인 역할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제국대학의 경험을 부인하거나 역사에서 지워내면 오롯이 민족적인 것만 추릴 수 있을까? 우리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혼종되고,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또렷하게 드러내고 그것의 공과를 좀더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암묵적으로 또는 관습적으로 반복하는 적폐를 청산하고 좀더 나은 시스템과 지식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이 같은 경험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쌓여야 한다. 제국대학의 명암을 따지기에 앞서 제국대학 유학의 실체에 접근해 역사적 사실로서 읽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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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말미에 붙은 부록만 보아도 이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노력이 필요했는가를 알 수 있다. 매우 흥미로우며 그 내용 또한 알차다! 매우 추천합니다. 구매
커피를끓이는우디 2019-07-03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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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보고 싶었던 분야인데 놓쳤네...ㅠㅠ 구매
사과나무 2019-06-29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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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고 의미있는 꼼꼼한 작업. 그렇지만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구매
밀리 2019-08-29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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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널리 읽어봐야할 책이다. 이런 연구가 왜 이제야 나왔나! 현재의 한국 밑바닥 기반이 어떻게 이루어졌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구매
알퐁소 2019-12-2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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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나왔어야 하는 책이 드디어 나왔네요. 이 노작을 토대로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의 지식인지도의 완성이 더 빨라지기를 바랍니다... 구매
workersplaytime 2020-05-0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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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마이리뷰] 제국대학의 조센징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촉발된 일본산 제품의 불매운동이 연일 뜨겁다. ‘노노재팬’이라는 사이트는 일본산 제품의 불매와 더불어 대체 가능한 상품까지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고, 국내 최대 일본 여행 커뮤니티는 잠정 폐쇄에 들어갔다. 시민의 자발적인 불매운동은 촛불혁명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민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시점에 ‘제국대학의 조센징’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이 주의를 끌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제국대학에 유학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부제에 나타난 것처럼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인 동시에 해방 이후 대한민국 관료조직의 상층부를 차지한 고급 관료들이다.
책은 동경제국대학으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대학(동경제국대학 포함 총 9개 제국대학)의 탄생 배경과 일본 제국대학에 유학한 조선인이 어떤 사람들이며, 졸업 후 식민지 조선에서 어떤 일을 하였는지,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모든 부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남겼는지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일본 제국대학에 유학한 조선인의 숫자는 1,0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제국대학 출신자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반사적으로 친일파가 떠오른다. 당연하게도 식민지 조선에는 좋은 일자리가 많지 않았다. 제국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들은 거의 대부분 조선총독부 관할의 관료조직에 들어가거나 관립교육기관의 교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이다. 결국 제국-식민지 체제를 공고하게 하는데 일정 정도 부역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현실적인 이유가 이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물론 정반대의 길을 간 사람도 많다. 영화 ‘동주’에도 나온 윤동주의 사촌 송몽규나 사회주의 운동으로 옥사한 박영출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최초의 제국대학 여성 유학생인 신의경과 그 외의 여성 유학생들의 이야기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식민지 시기와 관련된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명쾌해지기보다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최근에 읽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일회담편’이나 이 책 ‘제국대학의 조센징’처럼 예민한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이것이 현재의 한일관계와 서로 얽히게 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무엇이든 선악의 이분법이 가장 쉽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 접기
다사랑 2019-07-20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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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적 지식인/ 기득권층의 탄생
일제가 설립한 제국대학은 근대 일본의 엘리트(Elite) 교육기관으로 일본 뿐만아니라 조선의 식민지 엘리트도 같이 양성하던 기관이었습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 한 이후 미군정에 의해 '제국대학'제도가 폐지되기 이전까지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제국대학은 일본제국의 대학에서 가장 뛰어난 대학으로 군림하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가장 뛰어난 수재들이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에서 최신의 '근대학문'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 철저한 차별교육을 행했던 일제는 조선 땅에서 사실상 '고등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아 배움에 목마른 젊은이들은 보통 10여년 넘는 기간동안 일본에서 지내면서 중학교-고등학교- 제국대학의 모든 과정을 배워야 했습니다
10대 감수성이 어린 시절 일본에서 일본인 친구들과 함께 일본어를 통애 시와 소설을 읽게 되니 사실상 이들의 정체성 (identity)는 일본인으로 만들어 집니다.
모든 사고를 일본의 시각을 통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땅과 조선인들을 철저히 '타자'로 인식하는 경향을 띠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지금도 일제 식민 말기 교육을 받았던 원로라고 불리는 고위 관료 출신들이 아직도 일본을 어려워하고 일본어가 편하다는 발언을 하는 경우를 접하게 됩니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절 소위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정계 원로라는 분들을 청와대에서 모아 의견을 듣는데 일본의 애로사항을 '일본어'로 청취하고 논의했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단지 대법원이 의도적으로 개입해 '강제징용' 관련 판결을 늦추고 행정부와 거래한 사법농단만이 문제가 아니라 원로라는 분들의 이런 태도는 다분히 일제 강점기의 교육이 한국에 남겨놓은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입니다.
협상이 내용도 중요하지만 태도 (attitude)가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면 한국의 소위 원로들이 보여준 지나치게 협조적인 태도는 일본이 한국을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식민지 조선의 엘리듵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제국대학 (帝国大学)은 1886년 근대 일본의 초대 대각 출범 당시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의해 일본제국대학령으로 설치되었습니다.
총 9개의 학교 (도쿄, 교토, 홋카이도, 규슈,도호쿠,나고야,오사카,타이코구 그리고 게이조 혹은 경성)가 세워졌는데, 대만에 설립되었던 타이코구제국대학과 조선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 본토에 세워졌습니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 연구를 위해 프러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 개인적으로 당시 수상이던 비스마르크를 존경하였기 떄문에 초기 프러시아의 제도를 많이 받아 들이는데, 대학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즉 제국대학들은 모두 프러시아의 대학을 모델로 만들어졌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철저하게 차별적 교육정책을 시행했는데 유일한 제국대학인 경성제대를 제외하고는 연희전문, 보성전문으로 대표되는 전문학교들이 최고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 중 이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제국대학으로 유학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영화 '동주(2016, 이준익 감독)'으로 잘 알려진 송몽규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제국대학 출신 조선 유학생들은 한국에 크게 두가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첫번째는 현대 한국의 근대적 헌정질서 (憲政秩序)를 수립한데 기여한 것입니다.
한국 '제헌헌법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유진오 박사는 경성제대를 졸업한 인사입니다.
한국의 제헌헌법(制憲憲法)은 유진오 박사와 조선 총독부에서 근대적 행정을 경험한 제국대학 졸업생들이 같이 초안을 작성했다고 합니다. 당시 근대적 행정을 경험한 이들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관료들 밖에 없었고 임시정부 인사들도 일단 이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국에 공화국 정체 ( 政體, forms of government)를 구상할 수 밖에 없었다는 현실적 사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이들이 근대 한국의 한국과 지식사회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남한과 북한에 동일하게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상당수의 제국대학 출신 조선 유학생들은 졸업 후 조선 총독부의 관료가 되거나 각급 학교의 교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로 초기 한국의 지식사회는 이들 제국대학 출신들에 의해 주도됩니다.
예를 들어 역사학계에 식민사관을 정립시켰다는 평을 듣는 이병도부터 한글학회를 만들어 국어학의 기틀을 잡은 외솔 최현배 선생까지 모두 제국대학 졸업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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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근대 (Modern)'의 개념을 서양으로보터 직접 들여온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들여왔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어의 흔적과 일본식 번역에 의한 용어들이 일상생활에 존재합니다. 교육을 통한 일제의 영향력은 아직도 그 꼬리를 한국에 그대로 드리우고 있습니다.
최근 기존의 전형적인 역사해석 (conventional interpretation)을 배격하고 좀더 독창적인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학자들으 그저 학문의 소명이란 서양학문 또는 일본으로 들어온 서양학문의 수입으로 알았습니다.
제대로된 번역본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고, 그나마 해제가 제대로 달린 책들이 나오기 시작된 지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제가 접하게 되는 영어권 학자들의 책을 보면 우선 분량에서 기가 질립니다. 한 주제에 대해 800-10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즐비하고 그중 약 200 페이지는 주석과 참고문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책을 저렇게 읽을 수 있을까 경외심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 학자들의 책들은 그런 정도의 심도와 근거를 가진 책을 보기 힘듭니다.
한국의 연구환경이 아직 영어권에 비해 열악하기 때문이라고 외부인로서 추정하게 될 뿐입니다.
두가지를 더 이야기하고 마무리 하려 합니다.
하나는 어릴 적 보았던 기억입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초만 해도 잡지와 책은 모두 일본식으로 출판되어 있었습니다.
책은 모두 세로쓰기가 되어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문고판과 유사한 작은 문고판 책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렸을 때 기억에 남겨졌던 이런 것들이 모두 일본의 영향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일본에 가보고 알았습니다.
두번째로 이책의 성격입니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이책은 '제국대학 출신 조선 유학생'의 행적을 연구한 첫 연구서로 주로 도쿄/교토제국대학 졸업생들을 위주로 쓰여졌습니다.
한국의 지식인/기득권 층의 기원을 고찰하는데 중요한 시작을 한 것으로 앞으로 후속연구가 필요한 것이지요.
요 근래 조국 전 법무장관을 둘러싼 공방으로 한국에서 '엘리트'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엘리트들이 국민을 계몽대상으로만 여기고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제도를 주무른다는 사실이 어느정도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당연히 이 책에서 언급된 인사들과 맞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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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nis Kim 2019-11-01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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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대학의 조센징 / 정종현 새창으로 보기 구매
프롤로그 현해탄을 건너는 청년들
"조선인 유학생들은 '식민지(인)/제국(엘리트)'의 사이에서, '출세'와 '지시' 사이에서, '일본인화의 과정'과 '조선인 된 슬픔' 사이에서 분열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식민 권력은 조선 청년들의 일본 유학을 조선 지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친일적인' 엘리트의 양성 과정이면서 역설적으로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세력을 육성하는 '조선 독립운동의 수원지(水源池)'라며 골치 아파했다." "('출세'와 '지사'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의 논리가 '동족을 위한 출세' 혹은 '실력양성론'이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식민지 관료가 된 많은 제국대학 출신들은 자신의 '출세'를 고통에 신음하는 식민지 동족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했다. 유능한 행정 관료가 되어 동족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고, 올곧은 사법 관료가 되어 억울한 일을 당하는 동족을 보살폈다는 변명은 해방 이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던 알리바이다."(18-9)
1장 제국대학,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장치
"근대 일본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엘리트들이 이끌어온 관료제 국가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본의 군부 파시즘을 지탱한 것도 도쿄제국대학 엘리트의 관료 카르텔이었다."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 히로타 고키, 히라누마 기이치로 등 패전 이전 일본 근대사의 고비를 장식한 민간 정치인 총리 대부분이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이었다. 패전 이후에도 한국전쟁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며 전후 부흥을 이끈 요시다 시게루, '쇼와의 요괴'로 불리며 만주국을 경영했고 전후에는 총리로 미·일 안보 조약을 개정한 기시 노부스케, 그의 동생이자 핵확산금지조약 체결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토 에이사쿠, 레이건·전두환과 함께 한·미·일 보수 정권의 트라이앵글을 형성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일본 현대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총리들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이었다."(28-9)
"1918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정치 동아리인 '신진카이(新人會)'가 창립되었다. 이 동아리는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로 이곳 출신들의 일부는 이후 일본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다." "1933년 (신진카이의 핵심 인물이던) 사노 마나부는 옥중 전향성명을 발표하여 소련의 지도를 받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일본 천황제의 특수성에 맞는 일국사회주의로 자신의 사상을 전환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옥중 성명의 충격은 컸다. 사노를 따라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전향했다. 전향한 사람 대부분이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의 정치 동아리 '신진카이' 출신이었다. 또 전향한 신진카이 회원 대부분은 제1고등학교 출신이었다." "후지타 쇼조는 이들을 "제도 통과형 수재"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한순간도 국민적 지도자의 지위에서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들은 비록 이념을 바꾸었지만 자신들이 국민을 지도한다는 내적 일관성에서는 벗어난 적이 없었다."(32-3)
2장 조선인 교토제국대학생, 제국의 사업가가 되다
"김연수는 도쿄의 아자부중학교와 교토의 제3고등학교를 거쳐 1921년 조선인 최초로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다. 일본 유학 11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형이 주도해서 만든 경성방직의 2대 사장이 되어, 영등포 일대는 물론이고 국경 너머 만주에서도 방직공장을 늘려나갔다." "친형인 고려대 설립자 김성수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김연수는 식민지 시기 명실공히 조선을 대표하는 기업가였다. 그는 경성방직, 남만방적, 삼양사 등으로 사업체를 늘려가며 한국 최초의 거대 기업 집단, 곧 '재벌'을 일구었다. 이제는 익숙한 '재벌'이라는 용어는 1932년 급성장하는 고창 김씨가의 사업체에 기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김연수의 '경방'은 삼성과 현대, SK, 한화 등이 창업자들이 자기 사업을 막 일구기 시작할 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한국형 재벌의 기원이었다. 김연수는 '조선인 본위'의 근대적인 공업을 육성하는 것이 조선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41)
"해방 이후 김연수는 그의 생에에 짙은 얼룩으로 남아 있는 전시체제기의 각종 직함과 헌금, 학병 권유 등의 활동 때문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구속된다. 김연수는 무죄로 방면되는데 이때 재판부의 논리가 흥미롭다. 재판부는 김연수가 "결코 민족정신을 버리지 아니한 증좌"로 첫째, 경제인으로서 '민족자본' 경성방직을 운영하고 일본 자본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많은 인재에게 장학금을 주어 민족의 동량으로 키웠다는 점. 셋째, "경방 자본의 표시인 각 주권이 무궁화의 회란에 태극기를 모사하여서 간절히 민족혼을 상징한 점과 경방의 생산 광목 선전 포스터에서 역시 태극기를 상표로 한 사실 등"을 거론하고 있다. 재판부가 내세운 무죄판결의 근거들은 민족과 제국 사이에 걸쳐 있던 김연수의 삶과 경성방직이라는 기업이 지닌 애매함과 복잡함을 잘 보여준다."(45)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은 형 김성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성수에게 와세다대학 유학비를 후원받은 이광수와 여러 조선 지식인들은 문화적 민족주의 운동에서 김성수의 업적과 애족심을 칭송하는 글을 기고하여 후원에 보답했다. 민족의 이익과 자기 가문의 사업을 합치시키고, 그러한 논리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민족 엘리트들과 적극적으로 경제적·정신적 유대를 맺은 것이 이 형제의 성공 비결 중 하나였다. 전시체제기에 들어서면서 이들은 민족의 이익과 일본 제국의 이익이 다르지 않다는 입장에 서게 된다. 민족의 이익은 몰라도, 적어도 이들 가문의 이익과 제국의 이익은 배치되지 않았다." "야마구치고등학교를 거쳐 194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김연수의 둘째 아들) 김상협은 해방 이후 가업 중 하나인 고려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거쳐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했다."(53-4)
3장 누가 제국대학으로 유학을 갔는가
# 일본 '내지'의 제국대학을 선호한 까닭
1. 일본 지방제국대학이나 식민지 제국대학에 비해 교육과 설비 수준이 월등함
2. 일본인과 경쟁할 수 있는 지반을 확보하여 차별을 일거에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의 산물
3. 제국의 중심부는 식민지에 비해 억압 강도가 덜한 유연한 공간
"식민지의 귀족들은 일본 화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천황가의 후손이나 귀족 자제가 다니던 학습원(學習院)을 거쳐 제국대학에 진학했다." "한일병합 직후 '조선귀족령'에 의해 작위가 수여된 사람은 모두 일흔여섯 명이었는데, 작위 거절과 반납으로 인해 실제로 작위를 받은 사람은 모두 예순여덟 명이다." "김호규는 자작 김성근의 손자로 도쿄제국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조선 귀족 시국 단체인 '동요회' 이사를 지냈으며, 조선총독부 촉탁으로도 일했다. 민덕기는 휘문고보 교주인 '자작' 민영휘의 증손자다.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식민지 재계에서 활동하며 풍문여고를 설립했다. 해방 이후에는 '적산 기업'인 삿포로맥주를 불하받아 '조선맥주주식회사(지금의 하이트맥주)'를 설립하여 사장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휘문고와 풍문고는 여전히 민씨 집안 중심의 재단이 운영하고 있다."(73-4)
4장 관비 유학, 가난한 조센징에게 건넨 제국의 장학금
"우장춘의 삶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데 가담한 아버지를 둔, 한국 사회의 입장에서는 '악질' 친일파의 자식이다. 그가 관비 유학생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옛 동지들인 당대 친일파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농학부 실과를 졸업한 후 그는 일본 농림성의 농업시험장인 '코노스'와 교토의 다키이 종묘주식회사 농장에서 일본 국가를 위해 '농림 1호', '교토 3호' 등 무와 배추의 개량종을 개발했다. 1950년 우장춘은 가족을 모두 일본에 남겨두고 홀로 한국에 건너와 일본에서의 경험을 활용하여 한국형 무, 배추, 감귤, 무병감자, 벼의 개량을 통해 한국 농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1959년 죽기 직전에 우장춘은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공훈을 기려 정부는 안익태에 이어 두 번째 문화훈장을 우장춘에게 수여했다."(84)
"'내선융화'라는 제국의 슬로건을 진심으로 믿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민간 차원의 노력이 있었다. 그 민간 유지들은 제국 일본의 가치를 식민지인에게 적극적·조직적으로 전파하고 심어주려 했다. 일본 제국을 유지하고 나아가 더 확장해야 한다는 사명감, 식민지인을 제국의 일원으로 지도하고 교화하려는 동기,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정열적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들은 서구의 식민지 선교사(colonial missionary)와 흡사한 존재였다." "식민지 조선의 여자 유학생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한 야나기하라 기치베는 "장래 조선인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을 일본 문화 아래서 교양시켜 그들 자신을 융화의 이음쇠가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지당한 일이라고 확신"했다." "(제국의 유지들이 조선인 유학생들을 문화적으로 감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육'을 통해서 일본식 교양을 내면화하는 것이었다. 학비 지원은 그러한 교육을 지속시키고 제국의 후의를 각인시키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었다."(86-7)
"그렇지만 (도쿄의 일본인 유력자들이 주요 후원자였던) 자강회 장학금의 수혜자가 그들의 의도대로 성장했는가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농림부 차관을 지내며 북한 방식의 토지개혁안을 주장한 농업경제학과 강정택, 사회주의 관련 활동으로 구속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북한 보건의료 체계 수립의 산파가 된 의학과 최응석,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탄압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사위였지만 남로당의 비밀당원이었다고 전해지는 경제학과 채항석, 해방 이후 진보적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사회학과 신진균 등의 도쿄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들은 자강회 입장에서 보면 '빨간 속을 감추고' 장학금을 받아먹은 '먹튀'로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진흙 속에서도 연꽃이 피듯이, 제국의 장학생 중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해방 후 남북한에서 자기가 습득한 지식으로 각자의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을 살았다."(94-5)
5장 기숙사에서 제국 엘리트의 정체성을 익히다
"고등학생들은 일반 사회를 '족까이(俗界)'라고 불렀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3년 동안 속계의 유혹 없이 공부하는 것이었다. 이 속계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대가족주의와 치안유지법(반공법)으로 다스리는 사회였다.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에는 속계에는 없는 '독서와 사상의 자유'가 있었다. 교우회와 선거를 통해 뽑은 대표들이 운영하는 기숙사에서 학생들은 '자유와 자치'를 습득했다." "조총련 부의장을 지낸 백종원은 가나자와의 4고 시절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서로 인격을 존중하는 기풍 속에서 우정을 나누었다고 기억한다. 독서회 사건에 연루된 조선인 학생들을 경찰이 검거하자 일본인 기숙사생들이 항의하며 저항했고, 이들의 우정은 전후 일본 사회로 이어졌다. 또래 집단 중에서도 특출한 소년들만이 격리된 시공간에 모여서 미래의 리더가 될 것이라 격려받으며 생활하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환경은 선민의식을 지닌 특권적인 집단을 형성시켰다."(100-1)
6장 제국대학의 교수들은 누구인가
7장 총독부 '나리'가 되어 돌아온 조센징들
"제국대학 출신의 유능한 총독부 관료들은 만주로 진출하여 대륙 침략의 첨병이 되었다. 민생단을 조직하여 참혹한 풍파를 일으킨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박석윤을 비롯한 적지 않은 제국대학 출신들이 만주를 누비고 다녔다. 최남선의 매제이기도 한 박석윤은 192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유학하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부사장을 거쳐 만주로 건너갔다. 박석윤은 이주한 조선인의 이익 보호를 명분으로 일본에 우호적인 자치 조직 '민생단'을 조직했다. 그가 뿌린 공작의 씨앗은 1930년대 만주 공산 유격대 내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스파이 혐의로 숙청되는 이른바 '반민생단 투쟁'의 원인이 되었다." "만주국의 대다수 조선 관료들은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에 가입했다. 박석윤이 본부 총무로 활약한 이 후원회에서는 항일 조선인을 '선비(鮮匪)'라 부르며 그들을 토벌하는 관동군을 적극 지원했다."(144-5)
"총독부 관료 중에서도 사법 관료, 즉 판사와 검사는 더욱 특별한 존재였다." "조선인은 조선총독부 당국자에게 '사상운동' 혹은 항일 민족운동과 어떠한 관련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받지 않고서는 사법관으로 임용될 수 없었다. 총독부 판검사 경력이란 한마디로 총독부가 보증한 친일파의 증명서였다. 그들은 총독부 체제에 저항한 동족에게 실형을 구형하거나 판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관 경력을 비정치적인 영역으로 특화하거나 동족을 위한 행위로 합리화한다. 이를테면 총독부 판사 이충영을 옹호하는 가족의 논리는 한 사례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의 후손인 이충영은 도쿄제국대학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사법관시보를 거쳐 함흥지법과 광주지법 판사 등을 역임했고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맏아들 이수성을 비롯하여 나머지 세 아들도 모두 국회의원 및 교수가 되었다."(146-7)
"총독부 이력을 '준비론'으로 합리화한 농림부 장관 임문환, 내무부 장관과 자유당 정책위원장으로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장경근, 조봉암에게 사형을 판결한 대법관 변옥주 등 식민지 행정·사법관을 거쳐 해방 이후에도 승승장구한 너무나 많은 이들이 있다. 그들 대다수는 식민지 경력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축적한 사회자본은 다시 그 후손들의 사회적 신분으로 상속되었다. 제국대학과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가 지난 1997년과 2002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이다. 그는 본가·외가·처가가 획득한 제국대학, 고등문관시험,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의 종합적 구현체다. 이회창의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예산의 지주다. 이회창의 백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 이태규이며, 아버지는 경성법학전문학교 출신으로 총독부 검사서기를 거쳐 해방 이후 검사를 역임한 이홍규다."(151-2)
"이회창의 외가는 담양의 만석꾼 지주 집안이다. 외삼촌인 김성용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후 일본 군수성 관료를 역임했다. 김성용 등 이회창의 외삼촌 3형제는 모두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모인 김삼순은 훗카이도제국대학 식물학과 출신의 농학박사다. 이회창의 장인은 1942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해방 이후 대법원장 직무대행 및 대법관을 지낸 한성수다. 한성수의 장남인 한대현도 헌법재판관을 지냈다. 알다시피 이회창도 대법관을 역임했다. 이처럼 이회창의 본가·외가·처가는 구한말 이래 지주 집안이면서 제국대학과 고등문관시험, 관료라는 제국의 사회적 신분 상승의 주요 장치를 공유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계층의 사람들은 현대사회 각 분야에서 두드러질 가능성이 더욱 크다. 이러한 좋은 배경을 타고난 것이 그 개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의 역사성은 문제 삼아야 한다."(152-3)
8장 식민지인, 과학기술을 통해 제국의 주체를 꿈꾸다
"식민지인들에게 과학이란 무엇이었을까? 앞질러 결론을 말하자면, '과학'은 차별을 극복하고 세계적 수준의 학문 주체로 비약할 수 있다는 환각을 제공했다. 식민지인은 삶의 전 영역에서 차별을 겪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분야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이태규와 리승기가 차례로 모교인 교토제국대학 이학부와 공학부의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태규와 리승기의 제국대학 교수 임용 소식에 식민지 저널리즘은 열광했다. 이태규가 프린스턴대학으로 연수를 떠났다가 돌아오거나 리승기가 '합성 1호' 같은 인조섬유를 발명한 일은 조선인의 자긍심을 높이는 업적으로 곧바로 보도되었다." "식민지 저널리즘은 과학 내용보다 그 성취가 얼마나 '세계적 수준'이며 그를 통해 어떤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식민지에서 과학은 스포츠 내셔널리즘과 유사한 기능을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세계적 과학자는 민족의 울분을 풀어준 스포츠 스타와 비슷한 방식으로 소비되었다."(162-3)
9장 제국의 지식으로 제국에 저항한 사람들
"1917년 옌지(延吉)의 명동촌에서 태어난 송몽규는 민족주의 정서가 충만한 공동체에서 성장했다. 송몽규의 삼촌인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싸우다 전사한 독립군이었다." "1937년 4월 지린성(吉林省)의 대성중학교에서 학업을 재개한 송몽규는 1938년 4월에 윤동주와 나란히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다. 1942년 봄 송몽규는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입학 시험을 치르고 문학부에 선과생으로 들어간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재(在)교토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으로 윤동주와 3고 학생 고희욱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45년 3월 7일에 스물아홉의 나이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다." "공개된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징병제도가 언젠가 조선이 무장 실력을 갖춰 독립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정치적 발언을 했고, 윤동주는 일제가 조선어 과목을 폐지한 것을 비판하는 등 조선 문화 보존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178-80)
"박영출의 반일 의식은 집안 분위기가 깊은 연관이 있었다. 아버지 박인표는 동래군 기장면의 대지주로 1910년대에 백산상회의 안희제 등 기장·양산 지식인들과 함께 '광복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1917년경에는 김두봉 등과 함께 합자회사 고려상회를 인수·운영하며 독립운동 조직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생물의 진화·발전에 흥미를 가졌던 이과 학생 박영출은 마르크스 서적을 읽으면서 인간 사회의 진화·발전을 규명하는 경제학 전공으로 방향을 틀어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한다. 대학 시절을 거치며 박영출은 반일 의식과 운동에 대한 열정이 더욱 커졌다." "1934년 봄, 졸업과 함께 귀국한 박영출은 이관술을 통해 1930년대 좌익운동의 핵심이었던 이재유를 만나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검거된다. 이후 1936년에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8년 8월 옥사했다. '곰'과 같은 우직함과 불꽃같은 열정으로 일관한 삶이었다."(182-4)
10장 금녀의 영역, 제국대학으로 유학 간 여성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네 명 중 한 명인) 신의경은 1927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서양사를 전공했다." "식민지 말기 전시동원체제가 더욱 강화되면서 신의경은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서사(맹세)' 등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공직 활동에서 물러나 가정에서 은둔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에는 월남 이상재의 감화가 영향을 미쳤다. 1921년 당시 감옥에서 나온 신의경을 위로하며 이상재는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나왔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그녀는 월남의 말에 깨달음을 얻어 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더욱 험난한 길을 걸어야겠다고 각오했다고 한다. 해방 후 미군정이 1946년 12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장 김규식)을 발족시키자 신의경은 여성 의원으로 참여했다. 해방기에 신의경은 김규식과 일정한 관련을 맺고 활동하며 그의 정치 노선을 지지했다."(204-6)
"김삼순은 1929년 경기공립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33년에는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이과를 졸업한다. 졸업 후 귀국하여 진명여자고등사범학교와 경기공립고등여학교에서 6년여 동안 수학과 화학 교사로 있었으나 식을 줄 모르는 학구열로 다시 일본으로 떠난다. 1939년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연구과 수료 후 1941년 훗카이도제국대학 식물학과에 입학하여 1943년에 졸업했다. 그녀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김삼순은 1972년 '한국균학회'를 창설하고 초대 및 2대 회장을 역임했다. 당시는 양송이를 제외하고 대부분 야생 버섯만을 따다 수출하던 시절이었다. 김삼순은 일본에서 종균을 들여와 한국에 맞는 느타리버섯 인공재배법을 농가에 보급하여 한국 버섯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삼순은 여든한 살의 나이에 한국의 야생 버섯들을 정리한 《한국의 버섯도감》(1990)을 출판하는 등 아흔한 살로 죽을 때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211-2)
11장 식민지인들의 제국대학 동창회
"1920년대 당시 교토제국대학 학생들은 도시샤대학 유학생들과 함께 교토학우회의 주축을 형성했지만, 제국대학생이라는 특권 의식은 없었다. 제국대학에 대한 자부심이야 있었겠지만 당대 분위기가 그것을 억눌렀다. 1920년대 유학생 사회는 학력·출신·계급 등을 뛰어넘는 평등 의식이 강했고, 무엇보다 반일 의식이 넘쳤다."(223) "민족운동, 사회운동과 연관되어 있던 교토학우회의 성격은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급격하게 변한다. 제국대학 학생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만주사변 이후 식민지인이라는 자각과 운동성은 약해졌고 팽창하는 제국 엘리트로서의 자의식은 점점 강화되었다."(229) "1940년대의 일본 제국주의는 더 이상 조선이 식민지가 아니라 제국의 동등한 한 지방이라고 선전했다.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은 '식민지 출신의 유학생'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수재'가 되었다. 식민지인이라는 자의식은 사라졌고, 시골 출신의 수재로서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게 되었다."(233-4)
12장 제국대학 유학생들은 해방 후 무엇을 하였나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를 위원장으로 1945년 12월 17일 처음 모인 '행정연구위원회'는 약 70명의 총독부 고등문관 출신들로 조직된 임시정부 산하 단체였다."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국가를 운영할 구체적인 방안도 행정조직도 없었다. 이에 임시정부는 행정 경험이 있는 총독부 조선 관료들 중심으로 '행정연구위원회'를 설립하고 산하에 국토계획, 행정조직, 법제, 재정, 보안 등 총 19개 전문위원회를 만들었다. 행정연구위원회는 한마디로 임시정부가 집권하기 위해 꾸린 건국준비위원회(인수위원회)였다." "신익희는 식민지 시기 행정 경험자들을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 건설을 위한 '조력'의 대상으로 포용하는 실용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나쁘게 보자면, 친일파를 활용하여 국가 운영의 틀을 고민한 점에서 이승만의 노선과 근접해 있었다. 총독부 고등문관들에게 '행정연구위원회'는 복음과도 같았다."(237-8)
"임시정부 행정연구위원회 산하 헌법분과위원회는 1946년 1월 중순부터 3월 1일 사이에 여섯 차례 회합을 통해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이것이 1단계 헌법 초안으로 이른바 〈한국헌법〉이라고 불린다. 행정연구위원회의 헌법 초안을 주도한 사람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농상과장을 지낸 최하영이었다." "1948년 5·10 총선 이후 정부 수립 일정이 구체화되자 행정연구위원회는 자신들의 1단계 헌법 초안인 〈한국헌법〉을 검토하는 작업을 재개했다. 이때 신익희의 권유로 유진오가 합류했다. 대략 1948년 5월 14일부터 5월 31일까지 10여 차례 회합하여 2단계 초안인 〈유진오-행정연구위원회〉 공동안이 마련되었다."(240) "행정연구위원회의 핵심 성원들은 이 과정을 거쳐 신생 대한민국 권력의 중추로 되살아났다. 최하영은 제1공화국의 심계원장(감사원장)이 되었고, 장경근은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 차관과 국방부 차관, 내무부 장관, 자유당 정책위원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242)
"사사오입 개헌 파동에는 잘 배운 엘리트들의 곡학아세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개헌 부결과 가결 사이를 오간 국회 부의장 최순주는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나와서 미국 유학 후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한 엘리트다. 연희전문학교 교수, 조선은행 총재, 재무부 장관을 거쳐 국회 부의장으로 재임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개헌을 관철시키겠다고 호언했다. 자연인(인간)을 정수가 아닌 소수로 나눌 수는 없다며 엄숙한 '생명 존중'의 논리로 사사오입을 강변한 이재학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총독부 산하 충청북도 사회과장과 단양군수 등을 역임했다. 수학적 권위로 불려 나온 대한수학회장 최윤식 서울대 교수는 도쿄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 졸업생이었다." "(자유당의 주장이 억지에 불과하다는) 자명한 상식을 석학인 최윤식은 애써 외면함으로써 자신의 프로필에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최초' 타이틀을 추가했다. 그는 해방 이후 '최초로' 정치 권력에 부역한 과학자가 되었다."(245-6)
13장 남한의 지식 재편을 주도하다
"패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경성제국대학 일본인 교수들을 중심으로 1950년 10월 조선학회가 창립된다. 이들은 해마다 학회를 개최하고 논문집을 간행했다. 1961년에 열린 12회 조선학회는 열 명의 한국 학자들을 초청했다. 해방 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첫 번째 공식 학술 교류였다. 한국 학자들의 항공료와 체재비를 지원한 건 뜻밖에도 조선학회가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재단이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공산주의 블록에 대응하는 냉전 전략을 수립하고, 이러한 전략의 현안인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박정희 정권에게 압박했다. 텐리에서 조선학회가 개최되던 같은 시간에 도쿄에서는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12회 조선학회는 미국이 주선한 한일 학술의 국교 정상화였던 셈이다." "한국 학자들의 좌장 이병도를 비롯하여 최호진, 김두헌 등 참석자 대부분은 식민지 시기 일본 유학생이었거나 경성제국대학 졸업생이었다."(268-9)
"그렇지만 막상 학술회의가 시작되자 이들은 자신들이 공유했던 제국의 '조선학'이 해방 이후 새롭게 재편되었음을 자각했고, 서로 달라진 위치에서 발화했다. 식민사학의 원흉으로 지목되곤 하는 이병도의 개막 강연은 다분히 민족주의적이었다. 삼국시대 고분에 대한 강연에서 이병도는 고구려·백제·신라의 능묘가 중국과 변별되는 독자적 구조와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신라의 고분은 "중국 역대의 능묘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신라만의 독특한 것으로, 서양의 이른바 스톤 서클(stone circle) 류의 발달된 형태로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고대 한국문화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지니는 보편성을 '서양의 스톤 서클류의 발달된 형태'로 이해하는 논법에서 한국문화를 서구적 보편성과 연결하려는 이병도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일본 제국의 '조선사' 연구자였던 이병도는 미국 헤게모니 아래의 '한국사' 학자로 전신했다."(270)
14장 북한 지식 제도를 확립한 제국대학의 졸업생들
"출범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은 제국대학 지식의 연장 속에 있었지만, 불과 1~2년이 지나지 않아 소련식 지식으로 급격히 재편성되었다. 황장엽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의 지식 재편과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사례다. 그는 식민지 시기 평양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대학 야간부를 다니다 삼척의 시멘트 공장에 징용되어 1년 6개월간 노역을 했다. 해방 이후 모교인 평양상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선노동당에 입당, 1948년 중앙당학교 이론반에서 소련 교과서로 철학 집중 강습을 받는다. 이후 황장엽은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원(대학원)에 진학하여 1년 만에 소련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49년부터 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연구원에서 4년간 유학했다. 1953년 11월 귀국한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 전공 교수 및 철학 강좌장을 거쳐 10년 후인 1963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었다. 일본 유학생 황장엽은 소련 유학을 통해 새로운 지식의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 있었다."(288-9)
에필로그 '제국대학 유학'의 역사화를 위하여
"우리 사회는 제국대학을 민족주의에 토대를 둔 도덕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데 아주 익숙하다. 물론 그 책임의 대부분은 제국대학 유학생들에게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유학생 대부분은 일본 제국-식민지 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총독부 행정-사법 및 식산은행과 관립학교 등 식민지 국가 기구의 각 영역에서 그들은 제국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유용한 부품으로 작동했다.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부정적 요소 때문에 제국대학이라는 지식 제도와 관련된 근대 한국의 경험을 도덕적인 이분법으로 모두 '악'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적출'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한국 근현대의 지식과 문화, 제도는 솜씨 좋은 외과의사가 좋은 세포만을 남겨두고 암 덩어리를 도려내듯, '일본적인 것' 혹은 '미국적인 것'을 발라내면 '민족적인 것'만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본질주의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고일지도 모른다."(296)
- 접기
nana35 2020-01-1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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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제국대학의 조센징 새창으로 보기
marx94 2020-02-1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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