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3

윤상원 평전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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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평전

최근 수정 시각: 

1. 개요2. 박노해 평전과 논란
2.1. 시민들이 미리 무장계획을 했다는 내용2.2. 송곳으로 사람죽이기를 했다는 내용2.3. 광주 민주화 운동 목적 내용
3. 박호재, 임낙평이 쓴 평전

1. 개요[편집]

'들불야학'의 멤버였으며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활약했던 민주화 운동가 윤상원에 대한 평전이다.

2019년 현재 '윤상원 평전'이라는 제목을 단 글 혹은 책은 두 가지가 있다.

2. 박노해 평전과 논란[편집]

박노해 시인의 평전이다. 문제는 오히려 이 평전이 사실과는 관계 없는 주장으로 난무해 5.18 민주화 운동을 폭동으로 폄훼하는 각종 떡밥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2.1. 시민들이 미리 무장계획을 했다는 내용[편집]

박노해가 쓴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군대 투입과 무장 진입에 대항해서 쇠파이프, 각목, 화염병 등을 준비하고 만일의 경우에는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기를 확보하고 TNT를 제작해서 자체 무장을 해야 한다고 상원은 힘주어 말했다.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원은 노동자 대중이 부산 연합 철강을 불지르는 등 민중들의 정치적 진출이 확대되고 있고, 파쇼 무리의 내부분열로 통일적인 권력 통제가 잘 되지 않고 있는데, 민중운동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이야말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니냐고 다그쳤다.
상원의 단호하고 강력한 주장에 대하여 '군이 먼저 총을 쏘면 함께 쏘자'는 말은 나왔지만 더 이상의 얘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엔 공수부대 투입은 물론이고 5.17 내란도 예상하지 못했다. 근데 이 책에선 미리 예상했다고 작성했다.
못 믿겠으면 국방부보고서에서 5.17 쿠데타 내용을 읽어보자

2.2. 송곳으로 사람죽이기를 했다는 내용[편집]

"나 골목길에서 공수 한 놈 해치웠다."
"예? 어떻게요? 형은 다친 데 없소?" 상집은 깜짝 놀라 물었다.
"응. 송곳으로 봐버렸다."
아니, 개미새끼 한 마리도 못 죽일 것 같던 상원이 형이 사람을 죽이다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상집은 송곳을 들고 나가며 시범을 해 보일 때의 단호하고 결연했던 상원을 떠올렸다.

2.3. 광주 민주화 운동 목적 내용[편집]

다음은 윤상원씨 주변사람들의 증언이다.

먼저 임낙평. 윤상원의 대학교 후배고 함께 들불야학 강학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때 그는 도청에 없었다. 도청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에게 채무의식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런 것 없다'고 말했다. 5·18 이후 전남대학교 사회문제연구소에서 일했고 지금은 광주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장으로 있다. 1991년, 윤상원의 평전으로 '들불의 초상'을 쓰기도 했다. 그는 박노해와 시각이 다르다.
그때는 노동운동이라는 개념도 없었어요. 운동판도 좁았고 다들 독재에 맞서 사회 민주화를 쟁취하는 게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했죠. 윤상원씨를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혁명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그건 같이 활동했던 내가 잘 압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임낙평은 1980년 광주에는 노동운동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공장이 없고 노동자가 없는데 어떻게 노동운동이 가능했겠느냐는 이야기다. 다만 1980년은 세계적으로 독재가 무너지던 무렵이었다. 이란과 알제리, 니카라과 등에서 잇따라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독재 정권이 무너졌다. 임낙평은 그때 광주에서도 조금만 더 버티면 민주주의가 온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다들 '10일만 더 버티면 무너진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5·18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윤상원의 대학 선배, 김상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학생운동으로 수감된 전력이 있었던 그는 5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직후 일찌감치 경찰에 잡혀 들어갔고 그래서 살아남았다. 그는 5·18을 프롤레타리아나 노동자 계급이 주도했다고 말하는 건 '소설'이나 다름없다고 단언한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말고 정확히 들여다보자는 이야기다.

출처링크

3. 박호재, 임낙평이 쓴 평전[편집]

1991년 당시 이름은 '들불의 초상'이였는데 2005년에 윤상원 평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나왔다.글쓴이만 해도 윤상원 씨와 관련된 임낙평 씨이고 출판사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와 다큐멘터리 소설인 '봄날'을 낸 풀빛 출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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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1950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윤상원
출생1950년 9월 30일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사망1980년 5월 27일 (29세)
구 전남도청 민원실 2층
성별남성
직업사회운동가
윤상원과 박기순의 묘. 국립5·18민주묘지 소재.

윤상원(尹祥源, 1950년 9월 30일 (1950년 음력 8월 19일)[1] - 1980년 5월 27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이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으로서 활약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윤개원도 있다.

단기 4283년(서기 1950년전라남도 광산군에서 태어나 임곡국민학교, 북성중학교, 살레시오고등학교, 1978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1979년에 들불야학 1기에 일반 사회를 가르치며 참여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과 광주시민의 눈과 귀와 입이었던 〈투사회보〉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다가 5월 27일 전남도청 본관 2층 민원실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윤상원의 사인을 두고 '자상', '화상', '총상'이라는 엇갈린 견해가 있었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총상으로 밝혀졌다. 항쟁지도부 기획실장 김영철이 윤상원을 매트에 눕힌 뒤 최루탄 때문에 불이 붙은 커튼이 매트에 눕혀져 있던 윤상원에게 떨어지면서 윤상원의 시신에 화상 흔적이 남게 됐다.[2]

1978년 12월 27일에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치렀고, 이를 모티브로 한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가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만들어졌다.

윤상원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링크
  2.  김영철 열사가 전하는 윤상원 열사의 죽음 연합뉴스 2008년 5월 16일자 기사
  3.  광주 최치봉기자,‘화려한 휴가’ 주인공 윤상원 열사, 모교 전남대에 조형물] 서울신문 2007년 10월 1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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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평전   
박호재,임낙평 (지은이)풀빛2007-05-15
정가
23,000원
- 절판 확인일 : 2020-04-28

새상품 eBook 중고상품 (2)
판매알림 신청 출간알림 신청 47,000원
양장본424쪽
책소개5.18 광주 민주화 항쟁 이후 1991년 <들불의 초상>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던 <윤상원 평전>을 복간한 책. 5.18 항쟁의 시작과 끝을 지키고 30년의 짧지만 굵은 생을 살았던 한 청년의 삶이 이 평전 속에서 다루어진다. 윤창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터전이었던 들불야학의 동지인 임낙평씨가 지은이로 참여했다.

윤상원은 1970년대 박정희 윤신 정권과 전두환의 512.12 군사쿠테타 그리고 광주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급변하는 한국현대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살았다. 그 흐름 속에서 문리대학생에서 공장 위장 취업자로,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시민군을 지휘하는 선봉대장으로 변화해가는 그의 모습은 시대의 문제를 자각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그 현실을 뚫고 나가려는 하나의 모습과 강고한 기품을 보여준다.
목차
헌시
《윤상원 평전》개정판을 내며
서문

서장

제1부_성장 과정
소년의 꿈 | 사춘기의 숲을 헤쳐가며
절망스러운 시간들 속에서 만났던 여학생, 첫사랑 | 늙은 대학 신입생 윤상원

제2부_앎과 함
다시 대학에 돌아왔으나 | 깨치고 나아가다 | 노동자였던 동생들
행동해야 한다 | 현실에 등을 떠밀린 취직 | 서울살이

제3부_실천과 투쟁의 길을 위하여
노동 현장으로 | 함께 들불이 되어 | 비바람 속에서 피는 사회운동의 꽃
우리들의 영원한 누이 박기순 |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 야학에 불어 닥친 북풍
들불의 시련 | 사랑과 신념 | 내리막길을 걷는 유신독재
이제 일어날 때다 | 격변의 시간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건만
전민노련의 중앙위원으로 | 5월로 치달으며 | 민족민주화 횃불성진

제4부_광주여 무등이여
항쟁 전야 | 5월 18일, 박관현과의 이별 | 타오르기 시작한 항쟁의 불길
사람 사냥 |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되자 | 목숨을 건 투쟁
부처님 오신날, 금남로의 피바람 | 차라리 총을 듭시다 | 해방광주의 거리를 누비며
대중 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새로운 투쟁지도부 | 밤낮없이 뛰는 야생마
새로운 항쟁지도부의 대변인 윤상원 | 죽음의 행진 | 죽음은 영원히 사는 길

윤상원 열사 연보

접기
책속에서
노동자다운 생각, 그것은 정말 상원이 깨친 중요한 인식이었다. 그때껏 상원이 표피적으로만 머릿속에 갖추고 있던 논리나 박해받는 노동자에 대한 서정적인 연민 따위만 가지고는 현장활동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착안이었다. 우선 개개인이 스스로 노동자라는 불리한 입장에 대한 인식을 함께하고 그 계층적 유대감에서 비롯된 끈끈한 단결력을 획득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적인 일이었던 것이다.-p142-143 중에서

'형님, 몸조심하십쇼!'
두 사람이 합창을 하는 듯 하나가 된 두 개의 목소리가 되어 마지막으로 어둠을 달려와 막 발걸음을 돌리려 하는 상원의 등을 거머쥐었다. 멈칫 하다 말고 상원은 그대로 도청 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갈 길을 가자. 어둠속을 걸으며 상원은 그렇게 가만히 입술을 달싹였다.-p409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박호재 (지은이)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1981년 『한국문학』으로 등단해 1980년대 민중민족문학의 흐름에 합류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하의도의 토지 투쟁사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눈뜨는 섬>과 소설집 <다시 그 거리에 서면>, 윤상원 열사 평전 <들불의 초상>과 르뽀집 『5월의 아픔을 통일의 환희로』, 예술 비평서 <유럽건축 순례>를 썼다. 『전남매일신문』과 『광남일보』에서 편집국장을 지냈다.
주요 작품으로 단편소설 〈양동... 더보기
최근작 : <5월문학총서 2 : 소설>,<사랑해요 DJ>,<윤상원 평전> … 총 3종 (모두보기)
임낙평 (지은이) 
1957년 전남 해남 출생, 1985년 전남대학교 독문과 졸업, 1978~80년 전남대 재학시 윤상원·박관현·신영일 등과 ‘들불야학’ 운영, 1981년 신영일 등과 전남대 9·29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 수감되어 2년여의 투옥생활을 함, 《광주의 넋 박관현》(1987) 정리, 1989년 광주환경공해연구회를 창립하여 환경운동 시작. 1993년 광주환경운동연합으로 재창립하여 사무처장 및 상임위원장 역임, 2007년 현재 광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로 활동 중
최근작 : <윤상원 평전>
임낙평(지은이)의 말
책 간행 이후 17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5월 무렵만 되면 언론의 초점을 받았다. 그에 고나한 TV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도 하고 때로는 언론의 기획보도 또는 잡지의 기획 취재보도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그를 기록한 <윤상원 평전>은 절판이 되었다. 그 사이 책을 찾는 이들이 있었고, 그의 삶을 되새기고 그의 죽음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개정판 발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새롭게 윤상원의 삶과 일생을 담은 평전을 다시 간행하여, 많은 이들이 그의 삶을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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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비나리...그 좋은 직장 주택은행을 뛰쳐나와 민주투쟁의 길에 앞장서 장렬히 산화한 삶! 괴로웠을 것이다. 장남으로서의 역할과 부모님의 기대... 
sprenown 2017-06-30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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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광주에 윤상원이 있었다 새창으로 보기
1980년 5월의 광주는 내게는 너무나도 먼 곳이었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그곳에서 참혹한 학살의 시간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공공장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책과 필름 속에서 광주는 내게 충격적인 곳으로 각인되었다. 몇 년 전 문상 때문에 광주 땅을 처음 밟게 되었을 때, 금남로를 지나며 혼자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그 기억과 무관하지 않을 터.
이제는 모두가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속에서 우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섭기만 한 군인들, 처참하게 도륙당하는 학생과 군중들,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이 사실 내 기억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을 또렷이 알게 되었다. 그가 광주에서 무엇을 했는지, 그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무명씨’였던 광주가 갑자기 여러 명의 ‘윤상원’으로 내게 다가온 것이다.  
해방 광주의 마지막 날, 계엄군의 도청 진압과정에서 총탄을 맞은 윤상원. 어렴풋하게 시민군에서 영웅적인 존재가 있었고, 어떤 여성과 영혼 결혼식을 올린 사람이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의 대변인으로, 시민군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자 회견을 열었던 사람이었기에 많은 이에게 기억되었다. 그 날 그를 목격한 미국의 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그의 두 눈이 나를 향해 다가오자 나는 그 자신 스스로도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 그는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계엄군의 처참한 진압과 발포 후 광주 시민들은 벌떼 같이 일어나 계엄군을 일시적으로 몰아내고 도청을 점거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사실 잘 몰랐다. 도청 안에서 총기를 반납하고 투항하자는 의견에 맞서, 광주 시민들을 독려하고 시민군에게 결사항전을 권유했던 것이 윤상원,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이었다. 결사항전. 이 말이 이처럼 가슴에 꽂히는 적이 또 있었던가. 끝까지 남은 이들은 정말 죽음을 맞이하였다. 거짓말처럼.
서른의 짧은 생애를 살았던 윤상원은 대학을 다니고 군대를 다녀올 때까지 소위 ‘의식화’된 사람은 아니었다. 대학에 복학한 늦은 나이에 비로소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현실과의 타협 속에서 잠시 서울에서 은행원 생활을 하였지만 다시 광주로 내려갔고, 들불야학의 강학(교사)으로 활동하면서 지역운동, 교육운동을 펼친다.
대학을 졸업한 장남에게 희망을 걸었던 부모가 있었고, 형을 위해 고등학교만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동생들이 있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괴롭지만 부모와 형제들을 잊도록  만들었는가. 그를 죽음으로 이끈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현재 교수, 장학사, 국회위원이 되어 있는 동지들도 있었다. 그날 죽음을 각오하지 않았더라면, 윤상원은 현재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광주에는 수많은 윤상원이 있었다. 그 시대에는 어느 곳에나 수많은 윤상원이 있었다. 지금 그 정신은 남아 있는가. 어떤 모습으로 이어가야 하는가. 1980년과 비교하면 외형적으로는 지극히 평온한 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 광주는 다시 살아나서 내게 묻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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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도서관 2007-06-17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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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같은 삶이란 이런 삶이다 새창으로 보기
싸우고 있는 이들과 끝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매우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총을 든 특전사 군이들이 달려오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5.18 해방광주에서 민중들과 함께 했던 마지막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의 삶을 기록한 이 평전은 개인과 역사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가장 진실되게 그린 책 중의 하나입니다. 평전이 갖기 쉬운 감정의 과잉이나 역사적 정당화를 위한 미화가 절제된 점도 아주 좋았습니다.
바람소리 2010-11-0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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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들불 열사 윤상원 새창으로 보기
윤상원 평전.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지나치는 사람들이 이 책을 힐끗 보며 윤상원? 그사람이 누구에요? 란 질문을 종종 받았다.
이 책을 접하기 전만 해도, 나도 체게바라 같은 외국의 혁명가 이름은 얼핏 들어봤어도 윤상원은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책을 읽고 난 지금 윤상원 그의 이름은 내 마음에 자리잡은 5월의 거인이자 젊음을 산화한 장엄한 투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됐다. 책을 읽어나가며 젊은 나이에 그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란 의혹은 계엄군이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잔인하게 척살하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나를 이끌어주면서 이해할수 있었다. 만일 내가 그 곳에서 서 있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평전은 글쓴이의 주관성이 많이 개입된 전기라서, 이미 고인이 된 그의 일대기적 모습을 돌이켜 본다는 것이 약간의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했을것이란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책을 읽어가면서 그와 동고동락을 나눈 동료들의 눈으로 본 그의 모습을 자연스레 뇌리에 떠올릴수 있었다.

투사적 위대한 삶을 살아낸 윤상원은 대학시절 여느 보통 젊은이들과 진배없어 보였다.
그는 언제부터 민중운동가로서의 삶을  인식하기 시작했을까? 가장 관심의 촛점이 되는 부분이었다.
삼수만에 대학에 입학했고 연극 동아리 활동에 몰두했다. 33개월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도 자발적인 의식의 변화는 없었지만 친구 철홍의 소개로 김상윤을 만나면서 시대적 상황과 정당한 삶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야겠다는 필사의 신념은 본격적인 학습조직을 결사하여 민중사를 연구, 학습한 스물일곱의 지각에서 출발했다.
이 책에서는 윤상원의 성장 과정 속에서 당시 국내외 사회적 정황들을 숨가쁘게 나열해 놓았다. 윤상원의 호흡과 그들과는 뗄레야 뗄수없는 불가분의 관계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미처 몰랐던 역사적 진실들을 알게 되었을때, 지금에서야 5월의 광주를 알려면 진작에 알았을 그런 진실을 외면하고자 시선을 돌렸던 내 스스로의 무덤덤한 모습에 채찍질을 가하고 싶었다.
 
유신체제에 최초로 저항한 학생운동 1973년 전남대 함성지 사건, 1973년 12월 재야인사의 유신헌법철폐 개헌청원운동, 1974년 민청학련사건, 1978년 6.27 교육지표사건, 1979년 부마민주항쟁, YH사건, 남민전사건, 이윽고 10.26 박정희 시해 사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흘리고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독재의 아성에 대항해 맞서 싸웠을까.
가슴 한켠이 서늘하게 메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민중의 적은 기업인가? 위정자인가? 자본과 노동의 타협은 이루기 힘든 요원한 일임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해보인다. 
이 책에서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부분은 당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지도급 인사들과 더불어 김남주, 황석영, 이문구, 고은, 조태일, 김정한, 김지하, 백낙청, 염무웅 등 시인, 소설가 분들의 삶과 저술활동이 되었다. 민중항쟁이란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불사른 그분들의 업적을 읽고 배워야 할 의무를 느낀다.
 
총칼로 짓밟은 쿠테타의 주역들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옥살이를 하다 나왔고 망월동 묘역에는 추모탑이 세워졌음에도 여전히 5월이 되면 그날의 아픔과 슬픔이 재연된다. 몸바쳐 젊음을 장렬히 산화한 민주애국열사들의 분노와 좌절, 슬픔이 어울러내는 환상에 광주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외면했던 상처들이 지근지근 아팠다. 쉽게 페이지를 넘길수 없었다.
내게 윤상원 평전의 의미는 윤상원 열사를 비롯해 5월의 영령들을 온전히 기억하는데 있다.
국가를 무장 전복하려는 간첩의 무리들로 은폐시키고 엄폐하려는 위정자들의 술책이 결코 진실과 정의를 훼손시킬수 없음을 배웠다. 2007년 6월 모교에 퉁소를 불고 있는 윤상원 열사의 반신상이 세워졌다는 뉴스를 보면서 '새벽을 넘기면 필코 아침이 옵니다' 비장한 마지막 연설의 끝자락에서 의연한 그의 모습을 가슴에 깊이 담고 싶다.
 
<님을 위한 행진곡 31쪽>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니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접기
북라이크 2007-06-1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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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평전 - 1980년 5월, 광주를 지킨 최후의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삶과 죽음   
김상집 (지은이)동녘2021-05-18
20,000원, 400쪽
책소개
1980년 5월, 광주. 날짜와 지역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하나의 이름을 떠올린다. 아직 제대로 처벌받지도, 반성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은 가해자. 계엄군, 탱크, 시민군, <임을 위한 행진곡>. 그리고 잘하면 이름 하나가 더 떠오를 수도 있다.

열사, 윤상원. 5‧18 시민군 대변인으로 서른의 나이에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는 순간까지 앞의 이름과 싸운 사람. 광주시에서는 그 행적을 기려 생가를 사적지로 세우려 하고, 그의 민주화운동 한 걸음 한 걸음은 광주시 지정 ‘오월길’ 코스 안에 빠짐없이 담겼다.
목차
서문 윤상원 평전을 쓰면서
프롤로그 최후의 항전

1장 한국사회의 현실에 눈뜨다
2장 1970년대 활동가들과의 교류
3장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다
4장 녹두서점
5장 짧은 은행원 생활
6장 노동 현장으로
7장 들불야학
8장 부문운동의 분화와 폭발적인 성장
9장 꿈틀거리는 노동 현장
10장 유신의 몰락
11장 새로운 군부독재의 풍랑 속에서
12장 1980년, 전열을 가다듬다
13장 불타오르는 5월
14장 작전 명령 ‘화려한 휴가’
15장 국민연합의 전국 동시다발 시위
16장 전라 민중, 무기를 들다
17장 총기 회수와 재무장
18장 우리가 광주를 지키겠다
19장 마지막 밤
20장 5월, 그 후

에필로그 임을 위한 행진곡
윤상원 연보
참고문헌, 도판 저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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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66 취직을 축하한다며 김상윤이 양복을 한 벌 맞춰주었다. 그런 그에게 윤상원은 “곧 내려올 겁니다”라고 답례의 말을 전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철학적 바탕이라고나 할까,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렴풋이 깨달았소.”
인생의 지향점을 전환하게 된 건 김상윤을 만나면서부터 시작한 학습 덕분이었다. 외무고시를 대학 생활의 전부로 여겼던 정외과 학생에서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를 깨야 한다며 낯설기만 한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는 전사로 거듭난 것이다. 그 과정에 번민이야 있었지만 김상윤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외교관을 꿈꾸던 정외과 학생이 인간의 진실한 생각은 노동에서 비롯됨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훌륭한 대학 생활을 보낸 셈이었다.  접기
P. 90 민족의 대명절 추석 연휴인 9월 9일 아침, 박숙녀는 기숙사 베란다에 500여 명의 동료들을 모이게 한 뒤 〈단결의 노래〉를 부르며 임금 인상, 기숙사 외출의 자유 보장, 공휴일 근무제 폐지, 부서 복귀, 노조 결성 등 7개 사항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돌리고 이를 구호로 외쳤다. (…) 이는 유신 기간 ‘버스안내양’들의 집단 탈출(1964년 1월 16일 새벽 2시, 서울 영등포구 신대방동에 있는 삼양여객 소속의 버스안내양 74명이 합숙소를 집단으로 탈출했다) 이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등이 엄존한 상태에서 공장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나선 가두시위였다.  접기
P. 212 학생들의 머리 위로 피가 솟구치고, 공수들은 쓰러져 실신한 학생들의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전남대 정문 안으로 사라졌다. 흩어졌던 학생들이 서너 번 다시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더니 “도청 앞으로!”를 외치면서 대열을 이루어 도청으로 가기 시작했다. 윤상원도 대열에 합류하여 가다, 신역 앞에 이르러 급히 공중전화를 찾아 녹두서점으로 전화를 걸어 지금까지의 상황을 김상집에게 알려주었다. 김상집에게는 계속 상황을 알려줄 테니 상황일지를 써놓으라고 당부했다.  접기
P. 248 윤상원의 계획은 의로운 무명 용사들을 아르헨티나처럼 실종자로 만들지 않고 역사의 영웅으로 기리기 위해 모든 차량에 시민이 탑승하여 그대로 도청 안으로 밀고 들어가 공수들을 무장해제하고 무명 용사들의 시신을 인수하여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윤상원은 가능한 많은 차량에 연락하여, 오늘 오후 1시에 가톨릭센터... 더보기
P. 263 두어 번 더 외쳐보았으나 대답이 없자, 김상집은 바닥에 있는 벽돌을 빼내어 운전석 옆 유리창을 깨고 운전석에 앉았다. 김상집은 군대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해 차량 정비에도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운전대 아래에 있는 배선 뭉치를 빼내고 시동모터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일행이 모두 전남대 스쿨버스에 타고 강당 앞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김태진 학생처장과 운전사들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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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상집 (지은이) 
1956년 전남 장성군 필암에서 태어나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수의대를 나와 동물병원을 운영했다. 1980년 5월 민중항쟁 당시 녹두서점에서 윤상원과 함께 화염병을 제작하고 투사 회보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했으며 전남대 스쿨버스를 타고 가두방송을 했다. 5월 23일부터 열린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에서는 대학생과 예비군을 시민군으로 편성·배치하는 일을 했다. 저서로는 《필암서원》(공저, 2018), 《녹두서점의 오월》(공저, 2019) 등이 있다. 현재 (사)광주전남6월항쟁 이사장으로 일하며 (사)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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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윤상원 평전>,<녹두서점의 오월>,<필암서원> … 총 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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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5‧18민중항쟁의  핵심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

1980년 5월, 광주. 날짜와 지역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하나의 이름을 떠올린다. 아직 제대로 처벌받지도, 반성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은 가해자. 계엄군, 탱크, 시민군, <임을 위한 행진곡>. 그리고 잘하면 이름 하나가 더 떠오를 수도 있다.
열사, 윤상원. 5‧18 시민군 대변인으로 서른의 나이에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는 순간까지 앞의 이름과 싸운 사람. 광주시에서는 그 행적을 기려 생가를 사적지로 세우려 하고, 그의 민주화운동 한 걸음 한 걸음은 광주시 지정 ‘오월길’ 코스 안에 빠짐없이 담겼다.
윤상원의 짧은 삶은 며칠간의 5‧18민중항쟁 그리고 이 항쟁의 토양이 된 사회현실과 운동 흐름 모두를 아우른다. 이 책 《윤상원 평전》은 그 불꽃같았던 삶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5‧18의 전체 모습과 그 뿌리에 닿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5‧18은 무엇인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지역에서 이루어진 민주화운동이며, 대한민국 민주화 시위의 도화선이, 그리고 문민정권 수립의 핵심이 된 항쟁이다. 5·18의 핵심은 “광주를 비롯한 전남 전 지역의 무기고를 열어 군부 쿠데타에 항거한 전라 민중 무장봉기”(5쪽)였다는 것, 민중의 항쟁이었다는 것이다. 이 항쟁의 한복판에서 계엄군과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이끌었던 민주 인사들은 1970년대에 이미 숱한 옥고를 치르면서 노동·농민·빈민·청년학생 운동을 이끌어온 이들이었다. 그러나 문민정부 들어 진상을 밝히고 재평가하기까지, 이 사건은 오랫동안 ‘불순분자들의 반동’ ‘김대중의 사주를 받은 폭력 시위’로 왜곡되었다.
《윤상원 평전》은 1980년 5월 27일 5‧18민중항쟁의 마지막 날, 즉 결사항전의 날로부터 시작한다. 유신체제가 몰락한 뒤 다시금 몰아닥치는 군부의 폭력에 광주의 시민군은 총을 들고 맞섰지만, 애초 계엄군과의 전투가 승산이 있을 리 없었다. “시민군과 지도부인 민주투쟁위는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자리를 지켰을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의연히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11쪽)
이 책은 이 물음에 답하는 여정이다. 그 온전한 답은 5‧18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과 항전의 주역들이 1970년대부터 각 부문에서 어떠한 활동을 해왔는지, 이들의 노력으로 성장한 광주전남 지역의 운동 역량이 “어떻게 죽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도 결사항전이라는 초인적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7쪽) 더듬어보아야만 찾을 수 있다. 저자인 김상집은 윤상원과 끝까지 함께 싸운 동지로서 윤상원을 둘러싼 기존의 논의를 넘어 5‧18을 광주지역의 민주화운동 흐름 속에서 조망하고, 계엄군에 더해 투항파와도 맞서야 했던 결사항전파의 시각에서 항쟁의 긴박한 며칠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형님 어쩌실라요?”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이미 지도부 몇 사람이 도청을 빠져 나간 것 같으니 우리도 나가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양현이 말했다.
“아까 궐기대회 때 분수대에 올라가서 ‘최후의 일 인,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하겠다고 말해놓고 어쩌겠는가? 나는 여기 남을라네.”
이양현의 굳은 결심을 확인한 윤강옥은 소파에 드러누우며 “나도 형님 뜻에 따를라요” 하곤 머리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13쪽)

당시 광주전남권의 운동 상황은 아직은 여전히 과도기적인 형태였다. (…) 들불야학을 통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나아가 주민운동까지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의 폭이 넓어졌고 많은 운동가들이 성장했다. 동시에 1977년 광주앰네스티가 창립되면서 재야인사들이 공개적·합법적으로 시국 강연을 개최하고 양심수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에 힘입어 송백회가 결성되고 광주양서협동조합이 조직되자, 그동안 대학가와 개신교·천주교 중심으로 전개되던 민주화운동에 교사 등 일반 시민과 고등학생까지 참여하게 되었다.(114쪽)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
그 ‘탄생’부터 결사항전까지

이 책의 전반부가 평범한 외교관 지망생이던 윤상원이 어떻게 투사로 변모하고 김상집‧이양현‧정상용‧김영철‧윤한봉 등 항쟁의 주역들과 만나는지를 그린다면, 후반부는 연이은 군부독재의 야만 속에서 태동하고 폭발한 항쟁을 증언한다.
1975년. 군에서 제대한 윤상원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복학해 외무고시 패스를 꿈꾸던 학생이었다. 그는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상황이었음에도 김상윤이라는 걸출한 운동가를 만나기 전까지 민청학련 사건부터 가까운 광주일고 학생들의 무더기 제적 사태까지 피상적으로만 알았을 뿐 한국사회의 현실에 제대로 눈뜨지 못했다.

의식화 학습을 강조한 사람이 김남주였다면, 이를 체계화한 사람은 김상윤이었다. 김상윤은 체계적인 커리큘럼의 필요성을 느끼고, 분야별로 필요한 책들을 정해서 한 권 한 권 독파해나갔다. 책은 김상윤이 직접 헌책방과 도서관을 뒤져 구해 왔고, 모두 함께 정독하며 공부했다. 아마 ‘의식화 학습 커리큘럼’이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32쪽)

윤상원은 김상윤을 만나 민청학련 선배들과 교류하며 운동가로서 성숙해갔다. 그 과정에서 만난 이들과 인연을 맺은 단체들은 실로 광주전남 지역 사회운동의 산증인 또는 역사 그 자체였다. 특히 그는 청계피복 노조가 운영하는 노동교실에서 활동하다 수배되어 있던 이양현을 통해 노동운동의 꿈을 키웠다. 짧은 은행원 생활을 마치고 노동 현장과 들불야학에 투신하는 동안 윤상원은 이양현과 이태복을 통해 YH투쟁, 호남전기 및 일신방직의 임금투쟁 등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던 투쟁 현장과 연결되었다.

들불야학은 윤상원이 서울에서 은행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한남플라스틱에 입사한 1978년 후반부터 애정을 쏟아 활동한 터전이다. 윤상원은 야학의 한계도 잘 알았지만 가능성도 믿었다. 들불야학에 몸담는 과정에서 새로이 관계를 다지게 된 동지들도 많았다. 언제나 물심양면으로 윤상원의 곁을 지킨 김상윤과 이양현 외에 김영철과 들불야학 교사들, 학생들이 그러했다.(96쪽)

유신의 마지막 해인 1979년 한 해의 인권운동은 이 대회로부터 우렁찬 서막을 올렸다. 전국 어디에서도 양심수인을 위한 행사가 불가능하던 때, 앰네스티 광주지부의 활약으로 개최된 광주 문학의 밤 행사는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기도 했다.(125쪽)

1980년. 위세가 꺾이지 않을 듯했던 유신은 느닷없이 균열해 박정희의 암살로 몰락했지만 군부독재는 얼굴만 바꾸어 계속, 또 새로이 시민들을 위협했다. 박정희의 양자임을 자처한 전두환이 5‧16 군사 쿠데타 즈음하여 간첩단 사건 등을 조작해 핑계를 대며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정권을 탈취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히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대학가의 시위가 가두시위로 전환되는 와중에, ‘군부에 탄압의 빌미를 주어선 안 된다’는 지도부의 판단으로 투쟁의 열기를 꺼트리고 15만 명을 해산시킨 서울역 회군 사건이 벌어져 도리어 짧았던 서울의 봄을 끝내고 광주 학살의 여건을 조성하고 말았다.
광주가 일촉즉발에서 아비규환으로 이행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룻밤 사이 녹두서점의 김상윤이 예비검속돼 합수부로 잡혀가고, 계엄령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는 전남대 학생들을 전경들은 최루탄과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시위대는 자동차를 불태워가며 공수와 맞섰다. 윤상원은 이 모든 현장을 지키며 상황을 파악하고 녹두서점에서 상세한 일지를 작성하게 해 시민들에게 알렸으며, 한편으로는 김상집과 화염병을 만들었다.

공수들의 만행에 분노한 윤상원은 녹두서점으로 전화를 걸어 화염병을 만들자고 했다. (…) 윤상원이 김상집에게 화염병을 만들 줄 아느냐고 묻자, 김상집은 정상용·이양현 선배들이 박정희 암살을 계획하고 있을 때 소총으로는 불가능할 테고 폭탄을 터트려야겠다고 해서 화염병부터 만들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 곁에서 배웠노라고 했다. (223쪽)

무차별적으로 폭행과 살해를 자행하는 공수들과 맞서 시민들은 무기고를 털어 무장했고, 시민군은 이후 군부만이 아니라 투항파와도 싸워야했다. 민주화운동의 동지들과 연락이 닿지 않던 며칠간 분투하며 시민군을 이끌었던 윤상원은 한순간도 총기를 회수하고 투항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이끌리지 않았다.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해 백주대낮에 시민을 향해 발포하고 드디어 수습위를 민주투쟁위로 세워 결사항전의 결의를 기자회견으로 알리던 순간, 총에 맞아 쓰러진 그 순간까지. 5‧18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마지막 모습은 외신기자들이 송고한 기사로 남았다.

그 침착함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그가 죽고 말 것이라는 예감을 뚜렷하게 받았다. 그의 눈길은 부드러웠으나 운명에 대한 체념과 결단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335쪽)

왜 지금 우리는 5‧18 광주와 윤상원을
기억해야 하는가?

윤상원은 죽고, 살아남은 시민군 지도부는 전남도청의 함락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고 옥살이를 했다. 그뒤로 한동안 군부독재는 시퍼렇게 살아 있었지만 윤상원을 주인공으로 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모든 시민들의 노래가 되고, 죽음을 이겨낸 많은 시민군을 만들어내 ‘6월 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순간순간 승리했고 벌써 40년도 더 훌쩍 지났지만 5‧18은 우리에게 끝난 일일 수 없고, 끝난 적도 없다. 당시 광주에서 공수와 계엄군을 동원해 시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사건의 책임자들, 특히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광주시민들에게 사과하거나 제대로 된 처벌을 받기는커녕 발포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마저 여지껏 부인하고 있다. 광주 지역에서 며칠간 벌어진 부정할 수 없는 사건조차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을진대, 더욱이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새롭게 쌓아가고 바라고 추구하지 않으면 희미해질 수 있는 체제라는 것을 우리는 끊임없이 배운다. 정권의 변화에 따라 기본권은 더 많이 침해당했고, 차별과 혐오는 더욱 고삐 풀리고 무자비해졌다. 정부는 때로 주민들의 터전을 빼앗으려 하거나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해고하는 자본가의 편에서 폭력을 행사했다. 이럴 때 약자들은 고립된다. 우리만이 아니다. 2021년 2월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하는 미얀마의 시민들도 폭력 속에 고립되어 있다.
어디에서도, 5‧18은 끝나지 않았다. 이것이 지금 윤상원을 읽어야 하는, 5‧18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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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은 죽을 걸 알면서 왜 자리를 지켰을까

5·18 최후의 시민군이자 노학연대로 민중혁명 꿈꿨던
윤상원, 그의 평전 출간한 김상집 인터뷰

제1364호
등록 : 2021-05-21 23:42 수정 : 2021-05-2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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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집 광주전남6월항쟁 이사장이 제41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5월17일 광주 북구 망월동 5·18 유공자 및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있는 윤상원의 묘를 찾아 그를 기리고 있다. 류우종 기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 41돌을 앞둔 2021년 5월6일, 광주에 있는 옛 전남도청에선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19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최후의 진압 작전을 끝낸 직후 도청 안의 처참한 상황을 기록한 사진들이 최초로 공개됐다. 당시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이던 노먼 소프가 찍은 사진 중에는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불에 그을린 주검, 소설가 한강이 쓴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인 고등학생 문재학과 친구 안종필이 총에 맞아 숨진 모습도 고스란히 담겼다.

2021년 5월19일 <한겨레21>은 광주에서 김상집(65) 광주전남6월항쟁 이사장을 만났다. 바로 전날, 김상집이 ‘최후의 시민군’ 윤상원의 삶을 재조명한 <윤상원 평전>(동녘 펴냄)이 출간된 참이었다. 김상집도 1970년대 중후반 광주에서 민중운동을 했고, 5월 항쟁 당시엔 윤상원 등과 함께 시민군으로 활동하며 <투사 회보>를 찍었다. 현재 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이기도 하다.

2021년 5월19일 광주 광산구 지산동의 활터에서 김상집 광주전남 6월항쟁 이사장이 <한겨레 21>과 인터뷰를 하기 앞서 활을 쏘며 조선 시대 호남 지역 의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일준 기자

‘새 세상 여는 것’… 살아남은 자의 의무감
 김상집과의 인터뷰는 광주시 광산구 지산동에 있는 용진정 활터(국궁장)에서 이뤄졌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호남 유림이 의병을 일으켰던 터인 이곳에서 활을 쏘며 심신 수양을 한다고 했다. 김상집은 광주일고 재학 시절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가 정학당했다. 그게 빌미가 돼 전남대 입학 시험에 합격하고도 입학을 거부당했다. 그 뒤 녹두서점을 운영하며 노동운동과 들불야학에 헌신했고, 광주항쟁 시민군으로 싸웠으며, 1985년에야 서른살 늦깎이로 전남대에 입학해 졸업했다. 그에게 ‘5월’은 어떤 의미일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강하지요. 그래서 저희들(시민군 생존자)은 망월동(국립5·18민주묘지)에 가기를 싫어해요. 가면 죄인이 되니까…. 하지만 또, 먼저 가신 영령들의 뜻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자로서 의무감이랄까,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싸움을 멈출 수 없다는 의무감에서 5월을 맞게 되죠.”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이 전남도청 앞에서 스피커의 애국가 방송을 신호로 시민에 집단 발포했다. 그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의 본격적인 학살극은 광주 시민의 무장 저항을 촉발했다. ‘해방 광주 공동체’도 잠시, 5월27일 새벽 3시, 최후의 진압 작전에 나선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워 시내로 진입했고, 새벽 4시에는 헬기에서 내려온 공수부대가 도청에 들이닥쳤다. 윤상원은 최소 160여명의 시민군과 함께 마지막 순간까지 도청에 남아 싸우다 서른살 삶을 마감했다. 

그 전날인 5월26일,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외신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기자회견을 마친 윤상원은 시민군 앞에서 투쟁 의지를 다지는 연설을 하며 물었다. “끝까지 싸울 수 있습니까?” 시민군 모두 우렁한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윤상원과 김상집은 곧바로 도청 1층 무기고로 가서 시민군들에게 무기를 지급했다. 여성과 고등학생들에게는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돼야 한다”며 귀가를 독촉했다. 이는 살아남은 자들의 빚이 됐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부 독재 시대를 끝내는 밑거름이 됐다.

그로부터 41년이 지난 2021년 5월, 윤상원은 출판계에서도 새삼 재조명됐다. 김상집의 <윤상원 평전>이 나온 5월18일, 인문학자 황광우가 편저자로 정리한 <윤상원 일기>와 윤상원의 아버지가 쓴 <윤석동 일기>도 함께 나왔다. 윤상원은 초등학교 시절인 1960년부터 1979년까지 19년 동안이나 꾸준히 일기를 썼다. 앞서 2007년에도 <윤상원 평전>(박호재·임낙평 공저)이 출간된 적 있으나 지금은 절판됐다. 김상집은 왜 다시 윤상원에 주목했을까.

“지금도 윤상원이란 인물에 대해선 낭만적 시각이 강해요. 들불야학 활동이 중심이었던 ‘계몽주의자’ 이미지가 일반적이죠. 그게 아닙니다. 윤상원은 헌신적인 노동운동가였다, 당시 국민연합(재야 민주화운동 협의체)이 생각하던 ‘선거를 통한 순조로운 민주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본 사람이었다, 노동운동가로서 ‘노학(노동자-학생) 연대’를 통한 민중혁명을 꿈꾼 사람이었다, 이런 게 정확히 알려져야 하겠다는 게 책을 쓴 첫 번째 이유입니다.”

2021년 5월19일 광주 광산구 지산동의 활터에서 김상집 광주전남 6월항쟁 이사장이 <한겨레 21>과 인터뷰를 하기 앞서 활을 쏘며 조선 시대 호남 지역 의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일준 기자

전남도청 산화까지 5년의 청춘 함께해
두 번째 이유는 이렇다. “5·18 항쟁이 가능했던 건 광주·전남 지역의 엄청난 운동 역량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농민운동·노동운동·청년학생운동·종교운동으로 대중과의 접촉을 넓히고, 엄혹한 긴급조치 시대에 광주 앰네스티 같은 합법조직을 통해 대중강연을 하고, 양서협동조합 회원 교사들이 각 학교에 독서회를 만들어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사회와 역사를 제대로 보는 학습을 해오고 있었지요. 또 송백회라는 단체에선 전국의 모든 양심수에게 영치금과 책뿐 아니라 직접 짠 스웨터와 양말을 넣어주는 옥바라지 활동을 했고요. 그런 역량이 쌓여서 5월 항쟁 때 모두가 합심해서 전라 민중 무장봉기에 나서고 마지막 ‘결사항전’까지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정확하게 알려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두 번째 동기가 됐지요.”

김상집과 윤상원의 짧고 굵은 만남의 시작은 1975년 가을. 윤상원은 군복무를 마치고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광주 지역 민중운동가 김상윤을 만났다. 김상집의 친형인 김상윤이 민청학련 사건(1974년 4월)으로 구속됐다가 출소한 지 열 달이 지났을 때다. 당시 윤상원은 “한 손에는 <타임>을, 다른 한 손엔 테니스 라켓을 들고 다니며” 외무고시 공부에 전념하던, 가난한 농부 아버지의 장남이었다. 그런 윤상원이 김상윤을 시작으로 윤한봉·이강·김정길·박형선·윤강옥·김남주 등 당대의 수많은 운동가를 만나면서 유신체제의 폭압에 눈뜨고 민중운동에 뛰어들었다. 윤상원이 복학하기 몇 달 전인 1975년 4월,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꾸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채 하루도 안 돼 피고인 8명의 사형을 집행하는 ‘사법 살인’을 저질렀다. 윤상원이 복학하던 즈음의 살풍경이다.

김상집은 자기보다 6년 선배인 윤상원이 대학에 복학해서 전남도청에서 산화하기까지 5년의 청춘을 내내 함께했다. 운명의 5월27일, 그는 전남도청이 아니라 녹두서점에 있었다. 투쟁 속보를 전하는 <투사회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엇갈렸다. <윤상원 평전>을 쓰기 위해 지난 기억을 하나하나 들춰내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테다. 그는 “좀 그랬지요. 책을 쓰면서 이빨이 막 들썩이고…”라며 말을 아꼈다.

 처음 출판 제안을 받고 1년 3개월 만에 책이 나오기까지 취재와 집필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그동안 구술 증언이랑 책도 많이 나왔잖아요. 50~60권의 책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이쪽저쪽 다 맞춰봐야 하니까 하나하나 확인했지요. 제가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상황을 알고 있잖아요. 팩트 체크를 하다 보니 그동안 잘못 알려진 내용이 많더라고요. 특히 개인의 기억에 의존한 구술은 세월이 오래됐기 때문에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서 반드시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맞춰보고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이러다 보니까 시간이 엄청 걸리더라고요.”

윤상원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김상집이 책 서문에서 “시민군과 지도부인 민주투쟁위원회는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자리를 지켰을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의연히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라고 화두처럼 던진 의문의 답변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김상집은 1980년 5월26일 항쟁 지도부 다수가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국민연합이 이끌던 ‘수습위원회’를 ‘민주투쟁위원회’로 전환한 과정을 자세히 밝혔다.

1980년 5월26일 도청에서 민주투쟁위원회가 죽음을 각오하며 끝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하는 회의 장면을 그린 그림. 김상집 기록화

5·18은 ‘전라 민중 무장봉기’
“재야 수습대책위원 중에 이성학 장로님이 큰 힘이 되셨지요. 그분이 1906년생(당시 74살)으로 최연장자셨고 제헌의회 의원을 하셨습니다. 이분께서 아주 열정적으로 ‘절대 항복해선 안 된다. 어떻게 평화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향해 백주대로에서 집단 발포를 할 수가 있나. 이건 학살이다. 자네들이 나라를 구해야 한다’ 이렇게 당부하셨지요.”

김상집은 책에서 ‘전라 민중 무장봉기’란 표현을 썼다. 국가가 정한 공식 명칭인 ‘5·18 민주화운동’은 물론, 흔히 쓰이는 다른 별칭들과도 구별된다. 여기엔 공식적으로 ‘5·18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된 1980년 5월 사건의 성격과 의미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항쟁 당사자들의 고민이 담겨 있다.

“1980년 5월27일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체포돼 재판을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됐어요. 어느날 가족 면회를 나갔다가 마침 남민전 사건으로 수감중인 이학영(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선배를 만났는데, 얼굴은 외면한 채 자꾸 발을 건드는 겁니다. 겨울인데 맨발이었어요. 자세히 보니, 발가락 사이에 종이쪽지가 있어요. 몰래 받아와서 보니 시 2편을 썼는데, 그중 하나에 5·18 항쟁을 ‘전라 민중혁명 무장봉기’라고 썼더라고요. 수감자들 사이에 5·18의 성격을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죠. 광주가 중심이긴 했지만 광주에 국한되지 않은 저항이었다, 일부 명망가 중심이 아니라 각계각층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무장투쟁으로 맞섰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했죠.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처참하게 진압된 봉기를 ‘혁명’으로 규정하는 게 맞는지를 두고는 의견이 갈렸어요.” 김상집은 그 쪽지에 적힌 시를 공동번역 성서에 연필로 흐리게 필사한 뒤 밖으로 내보냈고, 그뒤로 외신에도 시가 소개됐다고 했다.

3년 전부터 김상집은 그림(서양화)을 배운다. 광주 항쟁 당시 중요 장면들을 사실대로 묘사한 기록화를 남겨야겠다는 결심에서다. 5·18을 그린 민중미술 작품의 주류가 시민들의 투쟁 장면이나 공동체 광주를 추상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걸개그림과 판화에 치중된 것에 답답했다고 한다.  

“그전까진 유화를 그려보긴커녕 물감 타는 법도 몰랐지요. 그런 제가 그림을 배우겠다고 나서니 주변에선  흘려들었어요. 기록화는 풍경화나 정물화보다 인물화가 중심인데, 화가도 소개받고 미술학원도 가보고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 오광섭 선생님 화실에서 배움과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여 점을 그렸다는데, 최후 결사항전을 결의한 ‘민주투쟁위원회 회의’(5월26)와 ‘윤상원의 최후’(5월27일)가 대표작이다. 인물들의 몸짓과 표정이 사진처럼 생생하다.

일부에선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시감과 피로증을 주장하기도 한다. 2021년 5월 현재, 나아가 미래의 ‘5월 광주’는 어떤 의미일까?

“‘사자 명예훼손’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전두환은 한 번도 반성한 적이 없지요? 광주 항쟁을 기리는 기본 원칙이 있어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정신 계승, 기념사업, 이런 순서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발포 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았어요. 용서와 화해라는 건 가해자의 진심 어린 반성이 선행돼야죠.”

2020년 7월, 김상집 광주·전남6월항쟁 이사장이 5·18 광주항쟁의 마지막 운동 옛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은 윤상원의 죽음을 그린 작품 ‘최후의 항전’을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정신 계승…
김상집은 광주 항쟁을 이어간 1987년 6월 항쟁의 결실이 형식적 민주주의로 고착화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87년 체제’가 30년 넘게 지속되고 있어요. 이제는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헌법 전문에 ‘5·18 정신’과 ‘6월 항쟁’을 명기하고 그에 걸맞게 법령을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5·18 정신의 미래지향적 계승을 위한 ‘민주시민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보훈처가 2천억원 넘는 예산을 들여 ‘나라사랑 교육’이란 걸 했어요. 5·18을 폄훼하고 반공 교육을 했죠. 촛불정부 들어 민주시민 교육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컸는데 여야 정쟁에 휘말려 예산도 쥐꼬리란 말이에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과정만 가르치는 걸 민주시민 교육이라고 한정하는 우를 범하는 건 아닌지….”

김상집은 긴 인터뷰의 마지막을 1980년 5월26일 밤에서 27일 새벽까지 최후의 몇 시간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항쟁 지도부에게 (전남도청에서) 나올 것을 간곡하게 권했어요. 뒷날을 도모하라고. 그들은 거부했지요. ‘민중이 봉기했는데 우리가 항복하거나 도망치면 결국 유신헌법과 군부 쿠데타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이 사람들 하나하나가 위대한 철학자여서라거나 가장 용감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총을 들고 있는 그 작은 몸짓 하나로, 자기 몸을 내던지면서까지 전 국민과 후세인들에게 ‘민주주의’라는 희망을 외치고 싶었던 거예요. 그것이 ‘광주 정신’입니다. 저는 그걸 꼭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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