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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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 주동자 |
12·12 군사반란 十二十二軍事反亂 Coup d'état of December Twelfth | |
중앙청을 장악한 하나회 휘하 반란군 | |
일시 | |
장소 | |
원인 | |
교전군 | |
하나회 (반란군) | |
지휘관[1] | |
병력[10] | |
결과 | |
영향 | |
1980년 5.17 내란(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및 5.18 민주화운동 발발에 영향 | |
피해[24] | |
1. 개요[편집]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29] |
2. 원인[편집]
1979년 10.26 사건 이후 새벽 4시 김재규가 체포된 후 국방부 회의실에서 각료들은 서둘러 비상조치를 내렸다. 신현확은 대통령이 서거했고 그 범인은 김재규였다는 것을 알리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 국가원수직이 비어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에 의하면 대통령 유고 시 국무총리가 승계하도록 돼 있으니, 지금부터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로 인한 계엄의 선포로 인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통령 권한대행과 함께 정국을 이끌게 되었다.
최규하는 이때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최규하는 권한 대행 수락 당시 "지금 이 순간부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겠다."라고 전국 계엄이 아닌 부분 계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사실상 최규하 스스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군 통제권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지면 총 책임은 대통령이 맡게 되지만 일부에 한해 계엄령이 내려지면 국방부 장관이 총 책임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원래 최규하는 정치에 휘말리기를 싫어했기에 정치적 부담감이 크다고 판단하여 제주도를 제외하고 계엄을 선포해버렸다. 이 때문에 계엄령 이후 '계엄사령부'가 유일한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수사 총책을 맡은 전두환이 더더욱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거기에 국방부 장관이었던 노재현은 그릇이 부족하고 전두환과 각별했기에, 훗날 정승화와 전두환이 권력투쟁을 벌일 때도 전두환을 두둔하기에 바빴다.
그 와중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철저한 원칙론자로, 정치에 휘말리기 싫어서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스스로 막았다.[32] 실제로 권한대행 당시에 정승화가 계엄사의 업무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자, 지금은 전국 계엄이 아니라 부분 계엄이니 자신한테 보고하지 말고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라 할 정도로 정치에 무관심했다. 이로 인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10.26 사태 수사를 총괄하게 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33] 그리고 계엄사령관 정승화 입장에서 전두환은 곧 숙청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미 전두환을 위시한 군내 비밀 사조직 하나회는 전두환의 동기생들인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들을 주력으로 서로 상부상조하여 군부 내의 요직을 하나 둘 차지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는 기존에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기존 군부세력을 위협할 만한 수준으로[34] 군 내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권력 집중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또한, 기존에 정보활동을 하던 대통령경호실[35]의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의 김재규가 동시에 무력화되면서 사실상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정보기관이 보안사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정보력이 국군보안사령부로 집중된 것도 전두환의 세력이 강화된 주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더욱이 전두환은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으므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합법적으로 자연스럽게 중앙정보부와 검찰, 경찰, 군검찰 등 모든 정보·수사 기관들을 지휘 및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자신이 사실상 독점하게 된 정보력과 수사력을 이용해 전두환은 정치인들의 이러저러한 비리를 캐내어 이용하거나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10.26 사건의 수사 내용을 임의로 편집하여 보고하는 등,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도하고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망각한 채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정치에 관여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전두환은 10.26 사건 다음날 사건 수사를 빙자하여 윤일균 중앙정보부 제1차장 겸 부장 직무대리, 오탁근 검찰총장, 손달용 치안본부장 등을 보안사로 불러들여 국가원수 시해 책임을 물어 당신들을 다 잡아들여야 하지만 자신에게 협조하면 체포하지 않겠다는 압박을 하면서 사실상 자신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에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헌병, 군검찰을 장악한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심지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불러들인 후 사실상 대통령인 양 굴기까지 했다.
이러한 내용은 당연히 정승화에게도 보고되었고 정승화는 직접 전두환을 불러 "당신은 군인이지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대통령인 양 굴지 말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한편 전두환은 김계원을 조사하던 중 김계원의 집에서 약 9억 원 정도의 수표 뭉치를 발견했다.[36] 전두환은 이 돈을 먼저 박근혜에게 6억 원을 전달하고 노재현에게 5천만 원을 전달했다. 마지막으로 정승화에게 2억 원을 전달하려 했으나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핀잔만 들었다. 정승화는 이런 전두환의 월권에 화가 나서 노재현에게 전두환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뇌물을 받은 노재현은 전두환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정승화는 노재현을 찾아가 전두환을 처벌해야 한다고 계속 요구했고, 특히 사조직이 군의 기강을 다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인사 개편을 통해 하나회 장교들의 기세를 꺾어놓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 겸 합수부장 직에서 쫓아내기 위해 동해안경비사령관[37]으로 보직 이동시킬 것을 계획하고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과 상의했고[38], 하나회의 인사들을 군 핵심부 요직으로부터 밀어내어 제거하려는 계획을 은밀히 세운다. 그리고 당시 강직하고 청렴한 참군인으로 평가받던 갑종 출신인 장태완 소장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39] 하나회 측의 불온한 움직임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조치들도 서두른다.[40]
노재현 장관은 전두환 보직 이동에 관한 정승화 총장의 계획을 김용휴 국방차관에게 알렸고, 김용휴는 이를 전두환에게 전달했다. 보안사의 정보력과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군부에 거대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던 하나회 측이 정승화의 계획을 매우 빨리 감지한 것. 요직이란 요직은 모두 하나회가 장악했고 더욱이 당시에는 누가 하나회인지 정확히 알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정승화의 움직임은 이런 사조직의 인맥을 통해서 속속 전두환 측에 전해졌다.
최규하는 이때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최규하는 권한 대행 수락 당시 "지금 이 순간부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겠다."라고 전국 계엄이 아닌 부분 계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사실상 최규하 스스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군 통제권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지면 총 책임은 대통령이 맡게 되지만 일부에 한해 계엄령이 내려지면 국방부 장관이 총 책임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원래 최규하는 정치에 휘말리기를 싫어했기에 정치적 부담감이 크다고 판단하여 제주도를 제외하고 계엄을 선포해버렸다. 이 때문에 계엄령 이후 '계엄사령부'가 유일한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수사 총책을 맡은 전두환이 더더욱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거기에 국방부 장관이었던 노재현은 그릇이 부족하고 전두환과 각별했기에, 훗날 정승화와 전두환이 권력투쟁을 벌일 때도 전두환을 두둔하기에 바빴다.
그 와중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철저한 원칙론자로, 정치에 휘말리기 싫어서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스스로 막았다.[32] 실제로 권한대행 당시에 정승화가 계엄사의 업무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자, 지금은 전국 계엄이 아니라 부분 계엄이니 자신한테 보고하지 말고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라 할 정도로 정치에 무관심했다. 이로 인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10.26 사태 수사를 총괄하게 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33] 그리고 계엄사령관 정승화 입장에서 전두환은 곧 숙청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미 전두환을 위시한 군내 비밀 사조직 하나회는 전두환의 동기생들인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들을 주력으로 서로 상부상조하여 군부 내의 요직을 하나 둘 차지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는 기존에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기존 군부세력을 위협할 만한 수준으로[34] 군 내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권력 집중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또한, 기존에 정보활동을 하던 대통령경호실[35]의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의 김재규가 동시에 무력화되면서 사실상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정보기관이 보안사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정보력이 국군보안사령부로 집중된 것도 전두환의 세력이 강화된 주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더욱이 전두환은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으므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합법적으로 자연스럽게 중앙정보부와 검찰, 경찰, 군검찰 등 모든 정보·수사 기관들을 지휘 및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자신이 사실상 독점하게 된 정보력과 수사력을 이용해 전두환은 정치인들의 이러저러한 비리를 캐내어 이용하거나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10.26 사건의 수사 내용을 임의로 편집하여 보고하는 등,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도하고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망각한 채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정치에 관여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전두환은 10.26 사건 다음날 사건 수사를 빙자하여 윤일균 중앙정보부 제1차장 겸 부장 직무대리, 오탁근 검찰총장, 손달용 치안본부장 등을 보안사로 불러들여 국가원수 시해 책임을 물어 당신들을 다 잡아들여야 하지만 자신에게 협조하면 체포하지 않겠다는 압박을 하면서 사실상 자신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에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헌병, 군검찰을 장악한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심지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불러들인 후 사실상 대통령인 양 굴기까지 했다.
이러한 내용은 당연히 정승화에게도 보고되었고 정승화는 직접 전두환을 불러 "당신은 군인이지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대통령인 양 굴지 말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한편 전두환은 김계원을 조사하던 중 김계원의 집에서 약 9억 원 정도의 수표 뭉치를 발견했다.[36] 전두환은 이 돈을 먼저 박근혜에게 6억 원을 전달하고 노재현에게 5천만 원을 전달했다. 마지막으로 정승화에게 2억 원을 전달하려 했으나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핀잔만 들었다. 정승화는 이런 전두환의 월권에 화가 나서 노재현에게 전두환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뇌물을 받은 노재현은 전두환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정승화는 노재현을 찾아가 전두환을 처벌해야 한다고 계속 요구했고, 특히 사조직이 군의 기강을 다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인사 개편을 통해 하나회 장교들의 기세를 꺾어놓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 겸 합수부장 직에서 쫓아내기 위해 동해안경비사령관[37]으로 보직 이동시킬 것을 계획하고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과 상의했고[38], 하나회의 인사들을 군 핵심부 요직으로부터 밀어내어 제거하려는 계획을 은밀히 세운다. 그리고 당시 강직하고 청렴한 참군인으로 평가받던 갑종 출신인 장태완 소장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39] 하나회 측의 불온한 움직임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조치들도 서두른다.[40]
노재현 장관은 전두환 보직 이동에 관한 정승화 총장의 계획을 김용휴 국방차관에게 알렸고, 김용휴는 이를 전두환에게 전달했다. 보안사의 정보력과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군부에 거대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던 하나회 측이 정승화의 계획을 매우 빨리 감지한 것. 요직이란 요직은 모두 하나회가 장악했고 더욱이 당시에는 누가 하나회인지 정확히 알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정승화의 움직임은 이런 사조직의 인맥을 통해서 속속 전두환 측에 전해졌다.
10.26 사건에 대한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
3. 전개[편집]
3.1. 계엄사령관 체포 계획[편집]
절대로 그냥 당할 생각이 없었던 전두환과 하나회는 정승화 총장보다 한 발 빨리 움직여서 정승화가 박정희 시해 사건 현장에 있던 것을 구실로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운다. 전두환은 10.26 사건 당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와 한 패였다고 주장하면서 정승화 총장을 체포할 구실을 만들었고, 하나회 조직원들과 함께 모여서 1주일 만에 12월 12일에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의한다.[41]
전두환과 하나회 측은 12·12 사태가 박 대통령 서거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어 절대 권력자가 된 정승화 총장의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두환 본인은 군사 반란 혐의로 재판받을 당시 숫자 짝을 좋아해서 12월 12일에 결행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12월 12일이면 그동안 장성 진급심사가 끝나 하나회 요인들의 일정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로 인한 개각 등 정부의 대규모 인사 변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을 해치우기 위한 의도였다. 유신 헌법하에서 박정희가 시행했던 대통령 간접선거에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가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는 국정 운영과 내각 수립에서 안정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 사건에 앞서 전두환 본인이 직접 발표한 수사 결과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와 한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정승화 총장이 초기에 김재규를 신속하게 체포할 것을 명령하여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때문에 전두환은 정승화와 김재규가 사전에 공모하였다는 것이 추가 조사결과 드러났다고 우기며 정승화를 억지로 체포하기로 한다.[42]
전두환과 하나회 측은 12·12 사태가 박 대통령 서거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어 절대 권력자가 된 정승화 총장의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두환 본인은 군사 반란 혐의로 재판받을 당시 숫자 짝을 좋아해서 12월 12일에 결행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12월 12일이면 그동안 장성 진급심사가 끝나 하나회 요인들의 일정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로 인한 개각 등 정부의 대규모 인사 변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을 해치우기 위한 의도였다. 유신 헌법하에서 박정희가 시행했던 대통령 간접선거에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가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는 국정 운영과 내각 수립에서 안정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 사건에 앞서 전두환 본인이 직접 발표한 수사 결과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와 한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정승화 총장이 초기에 김재규를 신속하게 체포할 것을 명령하여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때문에 전두환은 정승화와 김재규가 사전에 공모하였다는 것이 추가 조사결과 드러났다고 우기며 정승화를 억지로 체포하기로 한다.[42]
12.12 사태 - 장군들의 현장육성-1 | 12.12 사태 - 장군들의 현장육성-2 |
월간조선 1995년 9월호 부록으로 제공된 녹음 테이프 자료. 다만 육성과 자막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이 훗날 작성한 수기 전재본
영화 서울의 봄이 대유행을 일으킨 뒤 MBC 측이 한 번 더 자료를 공개했다.
영화 서울의 봄이 대유행을 일으킨 뒤 MBC 측이 한 번 더 자료를 공개했다.
3.2. 작전 개시[편집]
드디어 1979년 12월 12일 저녁, 전두환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하나회 소속의 주요 지휘관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경복궁 옆 구 일본 육군 헌병 주둔지[43]에 위치한, 장세동 보병 대령이 단장이던 수도경비 사령부 30경비단에 집결하였다. 당시 30경비단과 33경비단은 서울 방위의 정예부대로 수경사 소속이기는 했지만 수경사령관도 무장 출입은 불가할 정도로 독립적인 부대[44]였기 때문에 이들이 몰래 모이기에는 딱 좋았다. 이날의 작전명은 '생일 집 잔치'. 이들의 본래 계획은 보안사의 합수부 수사관들과 육군 수경사의 헌병들을 동원하여 참모총장 공관에서 정승화를 납치해서 합수부로 데리고 가는 동시에 전두환은 대통령에게 가서 정승화의 추가 혐의를 조사하기 위한 합수부로의 체포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이 체포 행위를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이후 법적 처벌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대통령 재가를 먼저 받지 않은 이유는 정승화 체포 의도가 정승화에게 알려질 경우, 반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보안사령부 인사처장이자 합동수사본부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허삼수 육군 보병대령[45]은 합수부 수사관들 및 수경사 33헌병대와 함께 정승화 총장의 관저를 찾아가서 김재규에 동조했다는 혐의에 대한 진술 조사를 해야겠다는 명목으로 정 장군의 신병을 확보하여 강제로 서빙고로 끌고 오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정승화 체포와 동시에 정승화 체포수사에 대한 대통령 재가를 받아서 합법화하려던 원래 계획이 대통령의 재가 거부로 인해 실패했다는 것이다. 당시 최규하는 전두환의 단순 진술로는 절대 정승화의 체포에 동의할 수 없으며, 합동수사본부의 상급자에 해당하는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과 상의를 한 후에야 재가를 검토하겠다고 버텼다. 당시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전두환 측에서는 국방장관을 사전에 확보해놓지 않았었고, 국방장관 공관에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은 인근의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나자 무슨 일인지 확인조차 안 한 채 가족들과 도망가버려서 찾을 수 없었다. 노재현 국방장관의 구체적인 도망 행적을 보면, 먼저 근처 단국대학교 교내로 가족과 함께 피신했다가 부하의 집에 가족을 맡긴 뒤 육본 B-2 벙커로 가서 상황을 보고받은 뒤 다시 미 육군 제8군 영내에 있는 한미연합군사령부로 이동했다가 국방부의 장관집무실로 갔는데 이때 국방부로 쳐들어온 반란군에게 체포당한다. 다만 노재현이 단순히 피신만 한 것이 아니라 공관에서 도망치고 난 직후 노재현은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예하 부대에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예하 부대 단속을 지시하는 한편 전시와 평시 모두 부대 이동 권한이 있었던 한미연합사에 야전부대를 이동시켜 쿠데타를 방지하고자 동의를 구하려 한 것이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존 위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여튼 대통령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합수부의 정승화 체포가 법적으로 위법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 산하에 있었으므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는 전두환의 직속 상관이 되기 때문에 군 지휘체계상 전두환이 함부로 체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계엄사령관보다 위에 있는 것은 국방장관과 대통령밖에 없었으므로 이들의 허가를 받아야만 계엄사령관 겸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체포가 합법이 되는 것이다.
긴박했던 정 총장 연행 과정의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일 밤에 정 총장 연행을 위해 허삼수 대령이 이끄는 보안사의 합수부 수사관들이 보안사 승용차 2대에 타고 한남동의 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발했고, 이들을 백업하기 위해 수경사 33헌병대원들이 마이크로 버스에 탑승하여 뒤따라 갔다. 총장에게 급히 보고드릴 게 있어서 방문하겠다고 미리 연락하여 방문 약속을 잡아놨던 합수부 수사관들은 공관 정문을 통과해서 곧바로 총장 관저로 들어갔다. 뒤이어 33헌병대를 태운 마이크로 버스도 정문에 도착했고 헌병들이 몇 명 내려서 정문 경비를 서는 해병대 경비병들에게 다가가 우리는 정문 경비임무를 교대하러 온 육군 헌병들이라고 하자 경비병들이 그런 지시는 못들었다며 상부에 확인해 보겠다고 하는 순간 헌병들이 기습적으로 해병대원들을 제압하여 무장해제 및 포박한 뒤 초소 안에 감금시켰다. 그렇게 33헌병대원들은 정문을 장악한 뒤 총장 관저건물 주변 등에서 사주 경계를 섰다.
한편 합수부 수사관들과 함께 관저 안으로 들어간 허삼수와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에게 박정희 시해 사건과 관련된 의혹과 혐의에 대해 자세한 조사를 할 게 있다며 보안사 합수부로의 동행을 요구하자 정총장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허삼수는 임의동행을 거부한다면 수사를 위해 강제로라도 연행할 수 있는 재가를 대통령에게 이미 받았다고 주장하며[46]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정승화 총장은 대통령의 연행 승인 재가가 있었는지를 먼저 확인해 봐야겠다며 전속부관인 이재천 육군 보병소령(육사 26기)에게 전화로 확인해보라고 지시했고 이 소령이 청와대에 전화를 걸려고 하자 이를 제지하고 협박하기 위해 합수부 장교가 권총을 발사해서 이 소령은 총상을 입었다. 그러자 참모총장 경호장교인 김인선 육군 보병대위(육사 29기)가 합수부 수사관들을 향해 권총을 뽑아들었고 그 순간 수사관 장교들이 총을 발사해서 김 대위 역시 총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33헌병대를 데리고 온 같은 편인 우경윤 헌병대령도 유탄으로 인한 총알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정 총장을 강제로 끌어내어 승용차에 태운 후 두 승용차는 공관을 떠났고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로 데려갔다. 그러나 데리고 온 헌병대를 직접 지휘해야 할 우경윤 헌병대령은 오발로 중상을 입은 뒤 업혀 나가서 정신이 없었고 합수부 수사관들도 탈 많고 요란했던 정승화 장군 연행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관저 건물 밖에 있던 33헌병대원들에게 우리 뒤를 따라 철수하라는 명령을 누구도 내리지 않고 깜빡한채 자기들만 떠나버렸다. 아무 지시도 받지 못하고 공관 내에 남겨진 33헌병대원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결국 자기들도 철수하기로 하고 마이크로 버스에 탑승하였다.
한편 연행을 위해 합수부와 정승화 총장 측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공관 관리관 반일부 육군 준위가 몰래 공관 밖으로 탈출하여 공관 인근에 주둔한 해병대 경비대 막사로 달려가 괴한들이 침입해서 총장을 납치하려 한다고 알렸다. 반 준위의 급박한 신고를 받은 경비대가 공관으로 출동하여 공관 정문 초소를 탈환하고 정문을 봉쇄했다. 그리고 아직 공관 영내에 있던 마이크로 버스를 포위하고 그 버스에 타서 막 출발하려고 하던 헌병들에게 사격을 가해서 헌병들은 그 마이크로 버스 안에 그대로 갇혀있게 된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한 합수부 차량은 이미 공관을 떠난 후였다. 정승화 총장을 태운 합수부 차량이 공관 정문을 떠난 지 약 10여 분 후에 공관 경비대 병력이 정문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리고 총성으로 인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공관 쪽 총성을 듣거나 보고를 받고 출동한 대한민국 해군본부의 기동타격대와 대한민국 공군본부 기동타격대, 국방부와 수경사의 5분대기조[47], 그리고 33헌병대가 따라나오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은 하나회 측이 가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려서 출동한 30경비단 5분대기조 병력 등이 캄캄한 밤에 공관정문에서 피아식별도 안 되고 대체 무슨 일인지도 모른채 그저 벙찐 상태로 대치하는 혼잡한 상황이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들 중에서 총성을 듣거나 총장이 납치됐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병력들도 이게 북한 무장공비의 짓인지,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인지 등을 아직 파악조차 못한 혼란한 상태였다. 아침 5시 30분경에 국방부 차관이 공관 측에 전화를 걸어 거기 있는 병력은 모두 아군인 국군들이고 다 해결됐으니 출동한 부대들은 대치 상황을 끝내고 모두 원대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모두 이에 따르면서 이 일은 일단락된다.[48]
한편, 혹시 저항할지도 모르는 친(親) 정승화 계열의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그리고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은 연희동의 비밀 연회장으로 미리 초대하여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 대신 접대하도록 유인해 두었다. 이때 수경사 헌병단장이던 조홍 대령도 있었는데, 당시 조홍은 하나회 소속이 아니었지만 정병주, 장태완, 김진기 장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와 있던 것이었다.
이날 회식의 의미가 매우 중요한데 장태완 장군의 저서 <12·12 쿠데타와 나>를 보면 전두환이 장 장군에게 12월 5일에 김장값 하라며 1백만원짜리 수표 한장을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을 통해 보내주었고, 이어 12월 8일에는 다시 전두환이 조홍 대령을 메신저로 하여 12월 12일 회식 약속을 잡은 것이다. 이것은 12·12가 12월 5일 전부터 계획 되었으며, 정확한 거사 날짜는 12월 8일 전에 정해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전두환을 좌천 시키려 했기 때문에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말도 있으나, 정승화 참모총장이 노재현 국방장관과 일요일에 골프 치며 보안사령관 교체 문제를 논의 한 것은 12월 9일이었다.[49]
직속 부하인 헌병단장이 연회장에 있는 것에 장태완이 "허락도 없이 여긴 왜 와 있느냐?"고 호통을 치자 조홍은 "전두환 장군이 저한테 준장 진급주를 산다고 해서 왔다"라고 답했고, 장태완은 혀를 차며 "그걸 오란다고 오는 네놈이나 직속상관은 건너뛰고 술을 사주겠다는 전 장군이나 똑같이 문제다."라고 면박을 주었다. 이를 보다 못한 정병주는 "이번에 조 대령이 준장으로 진급했으니 겸사겸사 축하나 해주자."고 장태완을 달래어 조홍은 연회에 동석할 수 있었다. 사족이지만 당시 이 연희동 연회장은 일반 술집이 아니라 가정집으로, 전두환이 연회를 부탁한 '민 마담'의 여동생 집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하나회 회원들이 반란를 모의하기도 했고, 이후에 이곳은 제5공화국 요정정치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평범한 민가로 재건축되었다.[50]
어쨌든 전두환 대신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의 접대를 받으며 저녁 7시까지 전두환을 기다리면서 먼저 식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국일 참모장은 하나회 출신이 아니어서 완전한 정보 통제가 되지 않았고[51], 그러던 중 김진기 헌병감에게 총리공관에서 총격이 발생했고, 참모총장이 납치되었다는 전화가 오자[52] 그 셋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귀했다. 이때 장태완은 수경사로, 정병주는 특전사로, 김진기는 육군본부로 간다. 그리고 같이 연회장에 있던 조홍은 사령관을 따라 수경사로 복귀하던 도중에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뉴데일리에서는 "연회에서 술을 마신 장태완 장군이 술에 취해 앞뒤 분간 못 하며 즉흥적으로 명령을 내렸다."라고 하며 반란군을 강력하게 진압하라는 장태완의 명령이 취중에 잘못된 판단에서 내려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당시 장태완 장군을 비롯한 일행들은 전두환을 기다리다 보니 술은 단 한 잔도 마시지 않았었다. 그래서 기다리다 지친 정병주 사령관이 "전두환 장군이 늦을 것 같은데, 그냥 우리끼리 먼저 한잔 하죠?"해서 막 한두 잔 마실 찰나에 상황을 알게 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정병주의 저 발언 이후 일행이 사태 소식을 접했던 때까지의 시간이 10분 내외이다. 말 그대로 술 한 잔 마실 시간. 본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술 한 잔을 비우는 둥 마는 둥 하고 곧바로 튀어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매우 강직하고 고지식한 성품의 소유자들이다. 아무리 전두환이 자신들의 후배라지만, 자신들을 초대한 주빈인 전두환이 오기도 전부터 곤드레 만드레 취해 있을 정도로 몰상식한 행동을 할 이들이 아니었다. 육군본부 측은 정승화 참모총장의 부인이 건 전화에 의해 처음으로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승화를 납치한 사람들이 누구인지조차 알 길이 없어서 처음에는 북한 공비들의 짓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곧 납치세력이 합동수사본부, 즉 보안사 소속임이 확인되고 여타 정황들이 종합되면서 전두환 측이 벌인 일임을 확인하였고, 전군에 비상을 걸고 대응에 들어갔다.
당시 상황에 대한 노재현 국방장관·장태완·김진기 장군 국회 증언
수경사령부로 가면서 장태완은 참모장 김기택 준장을 통해 헌병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53] 경장갑차 2대, 헌병특공대 1개소대, 부상자 구조를 위한 구급차 1대로 기동타격대를 꾸려 총장공관으로 급파하라는 작전지시를 내린다. 이후 사령부로 복귀한뒤 참모장 김기택 준장으로부터 30경비단에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일당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54] 30경비단장 장세동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신 전화를 받은 선배인 황영시와 유학성이 "알 만한 친구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가? 30경비단으로 와서 우리랑 얘기해 보면 정승화 총장 체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득하려고 했지만 장태완은 펄펄 뛰면서 "마! 너거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55]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드라마 제5공화국과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황영시-유학성 순으로 통화하는 것으로 묘사됐으나, 실제 통화에서는 유학성-황영시 순으로 이뤄졌다. 이에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일당들은 장태완이 공격해올 것을 걱정하며 대비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하나회를 통해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대통령경호실 소속 병력[56]으로 최규하가 있던 국무총리 공관을 확보하였다.
이미 12월 6일에 대선은 끝났으며, 특히 10.26 사건으로 인한 보궐선거였기에, 비록 12월 21일 취임식을 하긴 했어도 최규하는 12·12 당시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인수인계와 공관 이전 절차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최규하는 국무총리 시절 이용했던 총리공관에 있었다. 원래 총리공관 경비는 육군본부 헌병대[57]가 맡고 있었다. 이 때문에 헌병감 김진기에 의해 전두환 체포 명령이 내려왔으나 재가를 받기 위해 전두환이 총리공관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게 되자, 임기응변으로 대통령경호실 병력을 보내 헌병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총리공관을 장악한 것이다.
이후 최규하를 총리공관에 구금하다시피 조치한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해 사후 재가를 계속 요구했지만 최규하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동의 없이는 체포를 허가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숨어버린 국방장관을 찾기 위해 하나회는 발에 땀나게 뛰어다니게 되었고, 육군본부 측에서는 그들이 장관을 찾아서 재가를 받기 전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하나회는 보안사 감청망 활용을 통해 이미 정보력에서 육군본부를 앞서고 있었고 조직도 넓게 분포해 있었다. 원래 보안사 자체가 군을 위한 정보기관이다. 그런데 이들이 배신했으니 육군본부는 정보를 얻을 곳이 없어진 셈이다. 전두환 측은 육군본부에 화해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척하면서, 정상적인 국군 명령 체계를 완전히 무시한 채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강직한 군인인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합동수사본부[58] 측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수도권의 충정부대를 대상으로 병력출동을 독촉하고 있었다.
전두환 측은 장태완의 병력동원 시도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정승화 총장의 연행을 기정사실화하고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즉, 겉으로는 신사협정을 맺어서 육군본부의 병력출동을 가능한 한 오래 저지하면서, 한편으로 자기 측 병력을 본격적으로 동원하여 수뇌부를 무너뜨리겠다는 작전이었다. 애초에 작전에 앞서 전두환은 1, 3, 5 공수여단장들에게 잇달아 지시를 내렸었다. 경복궁 30경비단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 여단장 가운데 3공수여단장 준장 최세창과 5공수여단장 준장 장기오는 비상령이 떨어진 후, 자신들의 부대를 장악하기 위해 부대로 돌아갔고 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한발 늦게 행주대교로 우회해서 귀대해 있었다. 30사단 관할이던 행주대교를 제외한 모든 한강 다리는 수경사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 아무튼 각 부대에 내려진 지시는 다음과 같다.
일단, 보안사령부 인사처장이자 합동수사본부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허삼수 육군 보병대령[45]은 합수부 수사관들 및 수경사 33헌병대와 함께 정승화 총장의 관저를 찾아가서 김재규에 동조했다는 혐의에 대한 진술 조사를 해야겠다는 명목으로 정 장군의 신병을 확보하여 강제로 서빙고로 끌고 오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정승화 체포와 동시에 정승화 체포수사에 대한 대통령 재가를 받아서 합법화하려던 원래 계획이 대통령의 재가 거부로 인해 실패했다는 것이다. 당시 최규하는 전두환의 단순 진술로는 절대 정승화의 체포에 동의할 수 없으며, 합동수사본부의 상급자에 해당하는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과 상의를 한 후에야 재가를 검토하겠다고 버텼다. 당시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전두환 측에서는 국방장관을 사전에 확보해놓지 않았었고, 국방장관 공관에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은 인근의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나자 무슨 일인지 확인조차 안 한 채 가족들과 도망가버려서 찾을 수 없었다. 노재현 국방장관의 구체적인 도망 행적을 보면, 먼저 근처 단국대학교 교내로 가족과 함께 피신했다가 부하의 집에 가족을 맡긴 뒤 육본 B-2 벙커로 가서 상황을 보고받은 뒤 다시 미 육군 제8군 영내에 있는 한미연합군사령부로 이동했다가 국방부의 장관집무실로 갔는데 이때 국방부로 쳐들어온 반란군에게 체포당한다. 다만 노재현이 단순히 피신만 한 것이 아니라 공관에서 도망치고 난 직후 노재현은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예하 부대에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예하 부대 단속을 지시하는 한편 전시와 평시 모두 부대 이동 권한이 있었던 한미연합사에 야전부대를 이동시켜 쿠데타를 방지하고자 동의를 구하려 한 것이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존 위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여튼 대통령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합수부의 정승화 체포가 법적으로 위법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 산하에 있었으므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는 전두환의 직속 상관이 되기 때문에 군 지휘체계상 전두환이 함부로 체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계엄사령관보다 위에 있는 것은 국방장관과 대통령밖에 없었으므로 이들의 허가를 받아야만 계엄사령관 겸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체포가 합법이 되는 것이다.
긴박했던 정 총장 연행 과정의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일 밤에 정 총장 연행을 위해 허삼수 대령이 이끄는 보안사의 합수부 수사관들이 보안사 승용차 2대에 타고 한남동의 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발했고, 이들을 백업하기 위해 수경사 33헌병대원들이 마이크로 버스에 탑승하여 뒤따라 갔다. 총장에게 급히 보고드릴 게 있어서 방문하겠다고 미리 연락하여 방문 약속을 잡아놨던 합수부 수사관들은 공관 정문을 통과해서 곧바로 총장 관저로 들어갔다. 뒤이어 33헌병대를 태운 마이크로 버스도 정문에 도착했고 헌병들이 몇 명 내려서 정문 경비를 서는 해병대 경비병들에게 다가가 우리는 정문 경비임무를 교대하러 온 육군 헌병들이라고 하자 경비병들이 그런 지시는 못들었다며 상부에 확인해 보겠다고 하는 순간 헌병들이 기습적으로 해병대원들을 제압하여 무장해제 및 포박한 뒤 초소 안에 감금시켰다. 그렇게 33헌병대원들은 정문을 장악한 뒤 총장 관저건물 주변 등에서 사주 경계를 섰다.
한편 합수부 수사관들과 함께 관저 안으로 들어간 허삼수와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에게 박정희 시해 사건과 관련된 의혹과 혐의에 대해 자세한 조사를 할 게 있다며 보안사 합수부로의 동행을 요구하자 정총장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허삼수는 임의동행을 거부한다면 수사를 위해 강제로라도 연행할 수 있는 재가를 대통령에게 이미 받았다고 주장하며[46]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정승화 총장은 대통령의 연행 승인 재가가 있었는지를 먼저 확인해 봐야겠다며 전속부관인 이재천 육군 보병소령(육사 26기)에게 전화로 확인해보라고 지시했고 이 소령이 청와대에 전화를 걸려고 하자 이를 제지하고 협박하기 위해 합수부 장교가 권총을 발사해서 이 소령은 총상을 입었다. 그러자 참모총장 경호장교인 김인선 육군 보병대위(육사 29기)가 합수부 수사관들을 향해 권총을 뽑아들었고 그 순간 수사관 장교들이 총을 발사해서 김 대위 역시 총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33헌병대를 데리고 온 같은 편인 우경윤 헌병대령도 유탄으로 인한 총알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정 총장을 강제로 끌어내어 승용차에 태운 후 두 승용차는 공관을 떠났고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로 데려갔다. 그러나 데리고 온 헌병대를 직접 지휘해야 할 우경윤 헌병대령은 오발로 중상을 입은 뒤 업혀 나가서 정신이 없었고 합수부 수사관들도 탈 많고 요란했던 정승화 장군 연행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관저 건물 밖에 있던 33헌병대원들에게 우리 뒤를 따라 철수하라는 명령을 누구도 내리지 않고 깜빡한채 자기들만 떠나버렸다. 아무 지시도 받지 못하고 공관 내에 남겨진 33헌병대원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결국 자기들도 철수하기로 하고 마이크로 버스에 탑승하였다.
한편 연행을 위해 합수부와 정승화 총장 측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공관 관리관 반일부 육군 준위가 몰래 공관 밖으로 탈출하여 공관 인근에 주둔한 해병대 경비대 막사로 달려가 괴한들이 침입해서 총장을 납치하려 한다고 알렸다. 반 준위의 급박한 신고를 받은 경비대가 공관으로 출동하여 공관 정문 초소를 탈환하고 정문을 봉쇄했다. 그리고 아직 공관 영내에 있던 마이크로 버스를 포위하고 그 버스에 타서 막 출발하려고 하던 헌병들에게 사격을 가해서 헌병들은 그 마이크로 버스 안에 그대로 갇혀있게 된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한 합수부 차량은 이미 공관을 떠난 후였다. 정승화 총장을 태운 합수부 차량이 공관 정문을 떠난 지 약 10여 분 후에 공관 경비대 병력이 정문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리고 총성으로 인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공관 쪽 총성을 듣거나 보고를 받고 출동한 대한민국 해군본부의 기동타격대와 대한민국 공군본부 기동타격대, 국방부와 수경사의 5분대기조[47], 그리고 33헌병대가 따라나오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은 하나회 측이 가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려서 출동한 30경비단 5분대기조 병력 등이 캄캄한 밤에 공관정문에서 피아식별도 안 되고 대체 무슨 일인지도 모른채 그저 벙찐 상태로 대치하는 혼잡한 상황이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들 중에서 총성을 듣거나 총장이 납치됐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병력들도 이게 북한 무장공비의 짓인지,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인지 등을 아직 파악조차 못한 혼란한 상태였다. 아침 5시 30분경에 국방부 차관이 공관 측에 전화를 걸어 거기 있는 병력은 모두 아군인 국군들이고 다 해결됐으니 출동한 부대들은 대치 상황을 끝내고 모두 원대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모두 이에 따르면서 이 일은 일단락된다.[48]
한편, 혹시 저항할지도 모르는 친(親) 정승화 계열의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그리고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은 연희동의 비밀 연회장으로 미리 초대하여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 대신 접대하도록 유인해 두었다. 이때 수경사 헌병단장이던 조홍 대령도 있었는데, 당시 조홍은 하나회 소속이 아니었지만 정병주, 장태완, 김진기 장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와 있던 것이었다.
이날 회식의 의미가 매우 중요한데 장태완 장군의 저서 <12·12 쿠데타와 나>를 보면 전두환이 장 장군에게 12월 5일에 김장값 하라며 1백만원짜리 수표 한장을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을 통해 보내주었고, 이어 12월 8일에는 다시 전두환이 조홍 대령을 메신저로 하여 12월 12일 회식 약속을 잡은 것이다. 이것은 12·12가 12월 5일 전부터 계획 되었으며, 정확한 거사 날짜는 12월 8일 전에 정해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전두환을 좌천 시키려 했기 때문에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말도 있으나, 정승화 참모총장이 노재현 국방장관과 일요일에 골프 치며 보안사령관 교체 문제를 논의 한 것은 12월 9일이었다.[49]
직속 부하인 헌병단장이 연회장에 있는 것에 장태완이 "허락도 없이 여긴 왜 와 있느냐?"고 호통을 치자 조홍은 "전두환 장군이 저한테 준장 진급주를 산다고 해서 왔다"라고 답했고, 장태완은 혀를 차며 "그걸 오란다고 오는 네놈이나 직속상관은 건너뛰고 술을 사주겠다는 전 장군이나 똑같이 문제다."라고 면박을 주었다. 이를 보다 못한 정병주는 "이번에 조 대령이 준장으로 진급했으니 겸사겸사 축하나 해주자."고 장태완을 달래어 조홍은 연회에 동석할 수 있었다. 사족이지만 당시 이 연희동 연회장은 일반 술집이 아니라 가정집으로, 전두환이 연회를 부탁한 '민 마담'의 여동생 집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하나회 회원들이 반란를 모의하기도 했고, 이후에 이곳은 제5공화국 요정정치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평범한 민가로 재건축되었다.[50]
어쨌든 전두환 대신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의 접대를 받으며 저녁 7시까지 전두환을 기다리면서 먼저 식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국일 참모장은 하나회 출신이 아니어서 완전한 정보 통제가 되지 않았고[51], 그러던 중 김진기 헌병감에게 총리공관에서 총격이 발생했고, 참모총장이 납치되었다는 전화가 오자[52] 그 셋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귀했다. 이때 장태완은 수경사로, 정병주는 특전사로, 김진기는 육군본부로 간다. 그리고 같이 연회장에 있던 조홍은 사령관을 따라 수경사로 복귀하던 도중에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뉴데일리에서는 "연회에서 술을 마신 장태완 장군이 술에 취해 앞뒤 분간 못 하며 즉흥적으로 명령을 내렸다."라고 하며 반란군을 강력하게 진압하라는 장태완의 명령이 취중에 잘못된 판단에서 내려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당시 장태완 장군을 비롯한 일행들은 전두환을 기다리다 보니 술은 단 한 잔도 마시지 않았었다. 그래서 기다리다 지친 정병주 사령관이 "전두환 장군이 늦을 것 같은데, 그냥 우리끼리 먼저 한잔 하죠?"해서 막 한두 잔 마실 찰나에 상황을 알게 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정병주의 저 발언 이후 일행이 사태 소식을 접했던 때까지의 시간이 10분 내외이다. 말 그대로 술 한 잔 마실 시간. 본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술 한 잔을 비우는 둥 마는 둥 하고 곧바로 튀어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매우 강직하고 고지식한 성품의 소유자들이다. 아무리 전두환이 자신들의 후배라지만, 자신들을 초대한 주빈인 전두환이 오기도 전부터 곤드레 만드레 취해 있을 정도로 몰상식한 행동을 할 이들이 아니었다. 육군본부 측은 정승화 참모총장의 부인이 건 전화에 의해 처음으로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승화를 납치한 사람들이 누구인지조차 알 길이 없어서 처음에는 북한 공비들의 짓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곧 납치세력이 합동수사본부, 즉 보안사 소속임이 확인되고 여타 정황들이 종합되면서 전두환 측이 벌인 일임을 확인하였고, 전군에 비상을 걸고 대응에 들어갔다.
당시 상황에 대한 노재현 국방장관·장태완·김진기 장군 국회 증언
수경사령부로 가면서 장태완은 참모장 김기택 준장을 통해 헌병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53] 경장갑차 2대, 헌병특공대 1개소대, 부상자 구조를 위한 구급차 1대로 기동타격대를 꾸려 총장공관으로 급파하라는 작전지시를 내린다. 이후 사령부로 복귀한뒤 참모장 김기택 준장으로부터 30경비단에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일당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54] 30경비단장 장세동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신 전화를 받은 선배인 황영시와 유학성이 "알 만한 친구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가? 30경비단으로 와서 우리랑 얘기해 보면 정승화 총장 체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득하려고 했지만 장태완은 펄펄 뛰면서 "마! 너거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55]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드라마 제5공화국과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황영시-유학성 순으로 통화하는 것으로 묘사됐으나, 실제 통화에서는 유학성-황영시 순으로 이뤄졌다. 이에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일당들은 장태완이 공격해올 것을 걱정하며 대비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하나회를 통해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대통령경호실 소속 병력[56]으로 최규하가 있던 국무총리 공관을 확보하였다.
이미 12월 6일에 대선은 끝났으며, 특히 10.26 사건으로 인한 보궐선거였기에, 비록 12월 21일 취임식을 하긴 했어도 최규하는 12·12 당시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인수인계와 공관 이전 절차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최규하는 국무총리 시절 이용했던 총리공관에 있었다. 원래 총리공관 경비는 육군본부 헌병대[57]가 맡고 있었다. 이 때문에 헌병감 김진기에 의해 전두환 체포 명령이 내려왔으나 재가를 받기 위해 전두환이 총리공관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게 되자, 임기응변으로 대통령경호실 병력을 보내 헌병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총리공관을 장악한 것이다.
이후 최규하를 총리공관에 구금하다시피 조치한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해 사후 재가를 계속 요구했지만 최규하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동의 없이는 체포를 허가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숨어버린 국방장관을 찾기 위해 하나회는 발에 땀나게 뛰어다니게 되었고, 육군본부 측에서는 그들이 장관을 찾아서 재가를 받기 전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하나회는 보안사 감청망 활용을 통해 이미 정보력에서 육군본부를 앞서고 있었고 조직도 넓게 분포해 있었다. 원래 보안사 자체가 군을 위한 정보기관이다. 그런데 이들이 배신했으니 육군본부는 정보를 얻을 곳이 없어진 셈이다. 전두환 측은 육군본부에 화해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척하면서, 정상적인 국군 명령 체계를 완전히 무시한 채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강직한 군인인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합동수사본부[58] 측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수도권의 충정부대를 대상으로 병력출동을 독촉하고 있었다.
전두환 측은 장태완의 병력동원 시도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정승화 총장의 연행을 기정사실화하고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즉, 겉으로는 신사협정을 맺어서 육군본부의 병력출동을 가능한 한 오래 저지하면서, 한편으로 자기 측 병력을 본격적으로 동원하여 수뇌부를 무너뜨리겠다는 작전이었다. 애초에 작전에 앞서 전두환은 1, 3, 5 공수여단장들에게 잇달아 지시를 내렸었다. 경복궁 30경비단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 여단장 가운데 3공수여단장 준장 최세창과 5공수여단장 준장 장기오는 비상령이 떨어진 후, 자신들의 부대를 장악하기 위해 부대로 돌아갔고 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한발 늦게 행주대교로 우회해서 귀대해 있었다. 30사단 관할이던 행주대교를 제외한 모든 한강 다리는 수경사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 아무튼 각 부대에 내려진 지시는 다음과 같다.
전두환 측은 공수여단 외에도 사단장 노태우가 이끄는 9사단 29연대[65]와 30연대[66] 소속 1개 대대, 30사단의 90연대[67], 제2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68]도 중앙청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9사단은 당시에는 물론이고 현재도 우리나라 최전방 예비사단으로 활약 중이며, 특히 당시엔 평시작전통제권까지 주한미군측에 있었기때문에 최전방 부대 병력의 동원이 필요할 경우 '한미군사동맹' 협정에 의거해 한미연합군사령관[69]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만 가능하다. 반란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한미연합군사령관 존 위컴이 격렬하게 화를 낸 것도 이 때문이다. 박정희의 암살로 엄청난 혼란상태였고 암살범 김재규는 체포했지만 김재규가 북한의 사주를 받고 암살을 했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언제 북한이 남침할지 모른다는 위기까지 팽배해 있을 때, 중대한 병력의 절반 가까이를 반란을 위해 무단으로 사용한 이러한 행위는 당연히 불법인 동시에 매국노짓이나 다를 바 없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게 얼마나 엄청난 미친짓인지 잘 보여주는 대사가 장태완 장군의 "저놈아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전방 병력까지 출동시키진 않겠지…?" 그리고 노태우의 9사단 예하 1개 연대 무단 병력 동원은 노태우가 하나회 세력에서 전두환 다음으로 2인자 자리에 오르는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작용한다. 노태우는 12·12 군사반란 당시 병력동원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중요한 순간에 남침까지 무릅쓰고 자신의 전방병력을 동원한 덕분에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장관 및 여당 대표를 두루 거치면서 결국 대통령까지 올라서는 확실한 전두환의 후계자로 올라선다. 물론, 기존 제5공화국의 헌법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 직선제 대선에서 이겨서 된 것이기는 했지만 전두환이 자신의 퇴임 이후 안위를 위해서 노태우 당선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엄청난 지원을 해줄 수밖에 없었기에 사실상 전두환의 후계자가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현대사에서 이렇게 최전방을 지키는 부대를 제멋대로 빼돌려 서울로 진격시켜서 쿠데타로 악용한 사례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라 5.16 군사정변 때도 이미 육군과 해병대에 의해 저질러진 전례가 있었다. 바로 철원 축선을 지키던 제5보병사단과 김포, 강화를 지키던 해병대 제1여단[70] 병력을 각각 사단장 육군준장 채명신과 여단장 해병대 준장 김윤근이 빼돌려 쿠데타에 동원했던 것. 이때도 만약 북한이 알아챘다면 북한군이 철원이나 김포를 지나 서울까지 일사천리로 접수할 뻔 했다.
3.3. 작전 성공[편집]
그때 인천에 있는 9공수여단이[71] 특전사령관 정병주의 지시로 서울을 향해 출동했다는 급보가 보안사 합수부 측에 전해졌다.[72] 전두환 측 장성들은 대경실색했다. 9공수여단이 경인고속도로를 타면 1시간 이내로 서울에 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 측이 9공수특전여단을 포섭해놓지 못한 이유는, 9공수여단장 준장 윤흥기[73]와 참모장 대령 신수종이 모두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갑종간부후보생 출신이어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연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전두환 측의 공수여단 병력들은 이들을 지휘할 여단장이 아직 부대에 도착하지 않았거나, 행주대교 등의 검문소를 통과하는 데 잠시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74] 9공수여단이 훨씬 먼저 서울에 도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리고 그 9공수여단의 1차 공격목표는 다름 아닌 자신들이 모여있는 보안사령부와 경복궁 30경비단일 것은 더더욱 뻔한 일이었다. 오죽하면 이때 노태우는 자결을 결심했었다고 회고했다. 조선일보 기사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보안사령관실에 모여 있던 전두환 측 장성들은 제각기 전화통을 붙잡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9공수여단 출동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반란군 측인 중장 유학성과 중장 황영시는 육군본부 측에 전화를 걸어 '서울 한복판에서 아군인 국군끼리 전쟁을 벌이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우리도 더 이상의 무력 동원은 안 할 것을 약속할 테니 진압군 측에서도 9공수를 원대복귀시켜라'는 내용의 상호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그리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육군본부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전두환 측이 정말로 그 신사협정을 지킬 것으로 믿어보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사실은 꼭 믿었다기보다는 그들이 전두환의 신사협정에 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남침의 절호의 기회를 맞은 김일성을 눈 앞에 두고 같은 국군 병력들끼리, 그것도 서울 도심지에서 대규모 유혈사태를 벌이는 위험천만한 참극만은 피하자는 이유 때문이었다.[75]
물론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해당 상황은 반역이라는 최악의 비상식적 사태였다. 당시 하나회가 처한 처지를 생각하면 응할 가치가 없는 협정이었다. 협정 이전에 장태완 소장이 반란군이라며 펄펄 날뛴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육본 측에서는 하나회와 전두환 측의 움직임이 명백한 쿠데타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나회 측에서 그렇게 군대를 움직이고 난리법석을 떨며 정승화를 납치하는 등 노골적인 반란의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래도 몰랐다고 한다면 당시 육본 간부 전원이 '무능'을 이유로 총살당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육본 측에게 반란군으로 찍힌 상황 아래에서, 하나회 입장에서는 북한이 쳐들어오든, 육본 측의 승리로 사태가 수습된 후 반란군으로 몰리든 어차피 죽는 상황이다. 이러나 저러나 죽기는 매한가지였고, 하나회 입장에선 신사협정을 지켜봐야 득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하나회의 시각에서 보면 육본이 이기는 것보다 북한이 내려오는 편이 나았다면 나았는데, 육본이 이기면 운이 아주 좋아도 군에 평생 발을 못 디디게 되며, 보통은 내란죄를 이유로 그냥 총살당했을 것이다.[76] 그러나 북한군이 남침하게 될 경우, 미국도 있으니 자기들이 군권을 장악해 잘 막아낼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적어도 육본 측에게 진 후 살아남을 확률보다는 높을 것이다. 육사 11기를 포함한 하나회 세력은 공수여단장, 전방사단장, 보안사령관 등 북한군과 최전선에서 싸우게 될 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렇기에 남침 상황에서의 혼란을 틈타 군에 붙어있게 될 확률도 없지 않다. 남로당이었던 박정희조차 6.25 전쟁을 빌미로 군에 복귀하였던 실제 사례가 있다.
결국 간단한 앞뒤 사정만 따져봐도, 하나회 입장에선 신사협정으로 일단 코앞의 위기는 넘기고 나서, 그 후로는 신사협정을 무시하고 전방사단이든 공수여단이든 투입해서 군부를 장악해 버리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었기 때문에 배반할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육본측이 저지른 실수는, 상대의 의도도 파악하지 못하고 '협상'의 기본조차 어긋난, 그야말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음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한 육본 측에서도 신사협정을 어기면서 할 핑계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반란군 진압하는데 비겁이고 뭐고가 어디 있는가? 설령 협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도 육본 수뇌부가 수경사로 이동할 게 아니라 방어에 더 적합한 육본 B2 벙커를 마지막까지 사수했어야 했다.[77]
이는 주한미군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후 미국에서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기는 하나, 이는 전두환이 적극적으로 핵포기를 했고, 일단 전두환이 대세가 된 후라 끌어내리기에는 좀 늦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진압군은 제압당하지 않은 채 우주방어를 구사하며 시간만 끌어도 무조건 이기는 것이었다. 당시 한미연합군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인 존 위컴이 이후 보인 태도만 봐도 진압군을 적극적으로 도왔을 가능성이 크며, 카터가 딱히 전두환을 인정할 이유도 없었다.
노재현 국방장관의 책임도 크다. 자신과 자기 가족만 살리겠다고 밤새 도망다니다가 은근슬쩍 육본에 나타난 노재현은, "이곳엔 직할 병력이 충분치 않으니 실병력이 보다 많이 있는 수경사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 육본 측에는 최소한의 경계와 방어를 할 경비대, 헌병대 정도 외엔 직속 실병력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부대의 병력이라도 끌어와서 그곳에서 방어할 생각을 해야지, 진도 8 이상의 강진에도 버틸 수 있는 철옹성인 육본 B2 벙커를 버리고 수경사 사령부로 이동하라고 명령한 것은 이미 그 순간 패배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78]
결국 전두환의 낚시질에 걸린 육군본부 수뇌부는 쌍방간에 상호 병력을 동원하지 말자는 전두환의 '신사협정' 제안을 수락한다.[79] 이에 따라 반란군 진압의 실질적인 최고지휘관이었던 육군참모차장 중장 윤성민[80]은 9공수여단장 준장 윤흥기에게 부대로 복귀할 것을 지시하였고, 윤 준장은 이 명령에 따라 9공수여단 병력을 부천IC 부근에서 회군시킨다.[81] 그리고 곧 진압군 측 수뇌부는 반란군 측의 신사협정 제안을 순진하게 믿고 수락해버린 어리석은 판단의 대가를 확실하게 치르게 된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1공수여단 병력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당하였다. 진압군 측이 국방부 청사 옥상에서 20mm 발칸포를 발사하면서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대지용이 아닌 대공용으로 설치된 것을 눕혀서 발사한 것이기에 제대로 된 각도가 나오지 않아 반란군 측의 실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82] 또한 소수의 방어병력으로 정예 병력의 기습공격을 견뎌내는 것은 애초에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83]
한편 사령관 정병주가 있는 특전사령부 본부는 최세창의 3공수여단 병력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되었다. 당시 특전사령부 본부 건물은 바로 3공수여단의 영내에 위치해 있었으며 사령부 본부 건물 내엔 행정병과 인원들만 있어서 사령관 정병주가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무장병력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 부하들의 하극상으로 수도권의 1, 3, 5여단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데다가 자체 직속 무장병력도 없는 상태에서 반란부대인 3공수여단 영내의 사령부 본부건물에 있던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독 안에 든 쥐같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3공수여단장 최세창의 명령을 받은 예하 15대대장 중령 박종규[84]에 의해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고, 이 와중에 특전사령부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은 단신으로 사령관을 지키려 권총으로 사격하며 저항을 하다가 반란군의 총에 사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도망다니던 국방장관 노재현은 하필이면 하나회 쪽 병력이 국방부를 치기 직전에 국방부로 털레털레 왔다가 바로 하나회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이때부턴 비굴하게 반란군에게 협조했다. 당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마지막으로 반란수괴들을 체포할 작전을 준비한다. 김기택 참모장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1. 전차를 선두로 수경사 내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투조로 구성한다.
2. 목표는 경복궁과 보안사령부로 하며, 공격 개시선은 아스토리아 호텔[85] 앞이다.
3. 출발은 내가 선도하며, 중앙청 부근에 적절한 진지를 잡아 전차포, TOW 대전차포[86], 106mm무반동포, 3.5로켓포로 2개 목표를 동시에 타격후, 역모자들을 사살 또는 포획하고 반란을 진압한다.
이걸 듣고 놀란 윤성민 참모차장이 장태완 사령관을 말리며, 마지막으로 3군사령관에게 병력동원이 가능한지 물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26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은 출동이 불가하다는 답변만 돌아왔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병력들이 집결한 연병장으로 향하여, 준비태세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전차 대열에 다가가는 그때, 비서실장 김수택 중령이 나타나 "사령관님, 제가 지금 저 앞의 전차소대 쪽에 갔더니, 30경비단 편에 있는 전차대대 본부에서 사령관님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하셔서 사령부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희의 최후 공격 주력이 저 전차 4대뿐인데 저놈들이 저러니 나머지 병력들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사후정리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장 사령관은 곧 전차 무전에 귀를 귀울여본다.[87] 이를 들은 장사령관은 결국 허탈해하며, 병력들을 해산시키고 사령부로 돌아온다. 그리고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전화해서 장 사령관에게 "말로 하란 말이야. 피를 흘려서는 안돼. 병력을 철수시키고 상황을 끝내도록 해."라며 상황 종료를 명령한다.
그리고 바로 수경사 헌병단[88] 부단장 중령 신윤희가 헌병대를 이끌고 장태완 사령관과 수경사로 피난왔던 육본 지휘부를 모두 체포한다.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보안사령관실에 모여 있던 전두환 측 장성들은 제각기 전화통을 붙잡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9공수여단 출동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반란군 측인 중장 유학성과 중장 황영시는 육군본부 측에 전화를 걸어 '서울 한복판에서 아군인 국군끼리 전쟁을 벌이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우리도 더 이상의 무력 동원은 안 할 것을 약속할 테니 진압군 측에서도 9공수를 원대복귀시켜라'는 내용의 상호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그리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육군본부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전두환 측이 정말로 그 신사협정을 지킬 것으로 믿어보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사실은 꼭 믿었다기보다는 그들이 전두환의 신사협정에 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남침의 절호의 기회를 맞은 김일성을 눈 앞에 두고 같은 국군 병력들끼리, 그것도 서울 도심지에서 대규모 유혈사태를 벌이는 위험천만한 참극만은 피하자는 이유 때문이었다.[75]
물론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해당 상황은 반역이라는 최악의 비상식적 사태였다. 당시 하나회가 처한 처지를 생각하면 응할 가치가 없는 협정이었다. 협정 이전에 장태완 소장이 반란군이라며 펄펄 날뛴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육본 측에서는 하나회와 전두환 측의 움직임이 명백한 쿠데타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나회 측에서 그렇게 군대를 움직이고 난리법석을 떨며 정승화를 납치하는 등 노골적인 반란의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래도 몰랐다고 한다면 당시 육본 간부 전원이 '무능'을 이유로 총살당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육본 측에게 반란군으로 찍힌 상황 아래에서, 하나회 입장에서는 북한이 쳐들어오든, 육본 측의 승리로 사태가 수습된 후 반란군으로 몰리든 어차피 죽는 상황이다. 이러나 저러나 죽기는 매한가지였고, 하나회 입장에선 신사협정을 지켜봐야 득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하나회의 시각에서 보면 육본이 이기는 것보다 북한이 내려오는 편이 나았다면 나았는데, 육본이 이기면 운이 아주 좋아도 군에 평생 발을 못 디디게 되며, 보통은 내란죄를 이유로 그냥 총살당했을 것이다.[76] 그러나 북한군이 남침하게 될 경우, 미국도 있으니 자기들이 군권을 장악해 잘 막아낼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적어도 육본 측에게 진 후 살아남을 확률보다는 높을 것이다. 육사 11기를 포함한 하나회 세력은 공수여단장, 전방사단장, 보안사령관 등 북한군과 최전선에서 싸우게 될 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렇기에 남침 상황에서의 혼란을 틈타 군에 붙어있게 될 확률도 없지 않다. 남로당이었던 박정희조차 6.25 전쟁을 빌미로 군에 복귀하였던 실제 사례가 있다.
결국 간단한 앞뒤 사정만 따져봐도, 하나회 입장에선 신사협정으로 일단 코앞의 위기는 넘기고 나서, 그 후로는 신사협정을 무시하고 전방사단이든 공수여단이든 투입해서 군부를 장악해 버리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었기 때문에 배반할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육본측이 저지른 실수는, 상대의 의도도 파악하지 못하고 '협상'의 기본조차 어긋난, 그야말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음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한 육본 측에서도 신사협정을 어기면서 할 핑계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반란군 진압하는데 비겁이고 뭐고가 어디 있는가? 설령 협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도 육본 수뇌부가 수경사로 이동할 게 아니라 방어에 더 적합한 육본 B2 벙커를 마지막까지 사수했어야 했다.[77]
이는 주한미군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후 미국에서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기는 하나, 이는 전두환이 적극적으로 핵포기를 했고, 일단 전두환이 대세가 된 후라 끌어내리기에는 좀 늦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진압군은 제압당하지 않은 채 우주방어를 구사하며 시간만 끌어도 무조건 이기는 것이었다. 당시 한미연합군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인 존 위컴이 이후 보인 태도만 봐도 진압군을 적극적으로 도왔을 가능성이 크며, 카터가 딱히 전두환을 인정할 이유도 없었다.
노재현 국방장관의 책임도 크다. 자신과 자기 가족만 살리겠다고 밤새 도망다니다가 은근슬쩍 육본에 나타난 노재현은, "이곳엔 직할 병력이 충분치 않으니 실병력이 보다 많이 있는 수경사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 육본 측에는 최소한의 경계와 방어를 할 경비대, 헌병대 정도 외엔 직속 실병력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부대의 병력이라도 끌어와서 그곳에서 방어할 생각을 해야지, 진도 8 이상의 강진에도 버틸 수 있는 철옹성인 육본 B2 벙커를 버리고 수경사 사령부로 이동하라고 명령한 것은 이미 그 순간 패배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78]
결국 전두환의 낚시질에 걸린 육군본부 수뇌부는 쌍방간에 상호 병력을 동원하지 말자는 전두환의 '신사협정' 제안을 수락한다.[79] 이에 따라 반란군 진압의 실질적인 최고지휘관이었던 육군참모차장 중장 윤성민[80]은 9공수여단장 준장 윤흥기에게 부대로 복귀할 것을 지시하였고, 윤 준장은 이 명령에 따라 9공수여단 병력을 부천IC 부근에서 회군시킨다.[81] 그리고 곧 진압군 측 수뇌부는 반란군 측의 신사협정 제안을 순진하게 믿고 수락해버린 어리석은 판단의 대가를 확실하게 치르게 된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1공수여단 병력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당하였다. 진압군 측이 국방부 청사 옥상에서 20mm 발칸포를 발사하면서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대지용이 아닌 대공용으로 설치된 것을 눕혀서 발사한 것이기에 제대로 된 각도가 나오지 않아 반란군 측의 실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82] 또한 소수의 방어병력으로 정예 병력의 기습공격을 견뎌내는 것은 애초에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83]
한편 사령관 정병주가 있는 특전사령부 본부는 최세창의 3공수여단 병력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되었다. 당시 특전사령부 본부 건물은 바로 3공수여단의 영내에 위치해 있었으며 사령부 본부 건물 내엔 행정병과 인원들만 있어서 사령관 정병주가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무장병력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 부하들의 하극상으로 수도권의 1, 3, 5여단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데다가 자체 직속 무장병력도 없는 상태에서 반란부대인 3공수여단 영내의 사령부 본부건물에 있던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독 안에 든 쥐같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3공수여단장 최세창의 명령을 받은 예하 15대대장 중령 박종규[84]에 의해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고, 이 와중에 특전사령부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은 단신으로 사령관을 지키려 권총으로 사격하며 저항을 하다가 반란군의 총에 사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도망다니던 국방장관 노재현은 하필이면 하나회 쪽 병력이 국방부를 치기 직전에 국방부로 털레털레 왔다가 바로 하나회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이때부턴 비굴하게 반란군에게 협조했다. 당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마지막으로 반란수괴들을 체포할 작전을 준비한다. 김기택 참모장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1. 전차를 선두로 수경사 내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투조로 구성한다.
2. 목표는 경복궁과 보안사령부로 하며, 공격 개시선은 아스토리아 호텔[85] 앞이다.
3. 출발은 내가 선도하며, 중앙청 부근에 적절한 진지를 잡아 전차포, TOW 대전차포[86], 106mm무반동포, 3.5로켓포로 2개 목표를 동시에 타격후, 역모자들을 사살 또는 포획하고 반란을 진압한다.
이걸 듣고 놀란 윤성민 참모차장이 장태완 사령관을 말리며, 마지막으로 3군사령관에게 병력동원이 가능한지 물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26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은 출동이 불가하다는 답변만 돌아왔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병력들이 집결한 연병장으로 향하여, 준비태세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전차 대열에 다가가는 그때, 비서실장 김수택 중령이 나타나 "사령관님, 제가 지금 저 앞의 전차소대 쪽에 갔더니, 30경비단 편에 있는 전차대대 본부에서 사령관님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하셔서 사령부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희의 최후 공격 주력이 저 전차 4대뿐인데 저놈들이 저러니 나머지 병력들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사후정리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장 사령관은 곧 전차 무전에 귀를 귀울여본다.[87] 이를 들은 장사령관은 결국 허탈해하며, 병력들을 해산시키고 사령부로 돌아온다. 그리고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전화해서 장 사령관에게 "말로 하란 말이야. 피를 흘려서는 안돼. 병력을 철수시키고 상황을 끝내도록 해."라며 상황 종료를 명령한다.
그리고 바로 수경사 헌병단[88] 부단장 중령 신윤희가 헌병대를 이끌고 장태완 사령관과 수경사로 피난왔던 육본 지휘부를 모두 체포한다.
하나회는 반란 초기에 경호실 병력을 동원해 최규하를 구금하다시피 했고, 참모총장인 정승화는 반란군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당시 상황에서 정상적인 명령 체계를 동원해 반란 진압을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국방장관 노재현뿐이었다. 그 때문에 반란군도 반란을 진압하려던 장군들도 노재현의 행방을 찾고자 했고, 최대한 자의적으로 병력을 움직이려 한 장태완 사령관을 육군본부 측에서 말릴 때도 이유가 "국방부 장관이 있어야 된다."였다. 하지만 노재현이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그냥 도망쳐 다닌 끝에, 정상적인 명령체계를 지키려던 이들이 정상적인 명령 체계를 무시한 반란군의 행동에 끌려다니다 반란군에게 제압당하는 상황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붙잡힌 노재현은 눈치껏 정승화 체포 동의안에 서명했고, 최규하에게 "옳지는 않지만 사태가 더 악화되고 군이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라는 이유로 서명을 할 것을 부탁했다.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재판 당시 노재현은 이러한 이유를 변명이랍시고 자기 입으로 말했다. 결국 최규하는 정승화 체포 동의안에 재가 서명을 했는데, 이때 동의안 표지에 재가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90] 이 때문에 체포 당사자들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두환 측의 행위가 재가를 받고 나서야 체포해야 하는 당연한 절차를 어긴, '선체포 후동의'라는 명실상부한 불법행위라는 확실한 증거가 남았다.
이렇게 작전 개시 약 10시간 만에 반란은 성공하였다.
이렇게 작전 개시 약 10시간 만에 반란은 성공하였다.
4. 반란의 성공 원인[편집]
무엇보다 당시 전두환이 사령관이었던 국군보안사령부가 모든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정보가 각 부대에 소속된 보안부대에 의해 속속들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전두환 측이 진압군을 자기들 손바닥 안에 두고 급박히 돌아가는 상황이나 정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또한 특전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대통령 경호실 등 서울과 서울 근교의 주요부대의 대다수를 전두환의 심복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점도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특전사의 수도권 4개 여단들 중에 무려 3개 여단의 여단장이 전두환의 심복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박정희의 밀명에 의해 속칭 군 내부에서의 박정희 친위대라 할 수 있는 하나회가 결성되었다. 하나회는 전두환이 주장(主將), 노태우가 부장(副將)인 상태로, 대통령 경호실에서 전두환은 작전차장보, 노태우는 행정차장보를 역임할 정도로 박정희가 힘을 실어주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이 두 사람은 주요 요직을 거쳤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을 정도로 박정희가 공을 들여 키우던 친위세력이었다. 본인 별명인 '물태우' 답게 베트남에서도 기본은 했던 노태우와 달리, 전두환은 베트남에서도 온갖 기행을 벌였으며, 당시 박정희가 베트남 전쟁을 주요한 국군 현대화와 외화 획득 수단, 주한미군 축소 방지 대책으로 판단하고 사활을 걸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전두환의 행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그럼에도 잠시 승진이 미루어졌을 뿐 아무런 조치도 없이, 승승장구한다.
하나회의 리더인 전두환과 2인자인 노태우는 본인들이 이렇게 요직을 거치며 세력을 불렸으며, 여타 요직에도 자기 사람들을 심어놓았다. 전두환은 오랫동안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맡았다. 박정희가 좋아서 이렇게 한 것은 아니었는데, 상술하였듯 전두환이 베트남 전쟁에서 기행과 비리를 저질러 군부 상급자들에게 찍힐 대로 찍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위치가 위치이고, 전두환의 기행도 상상을 초월했던만큼[91] 천하의 박정희도 군부가 가진 전두환에 대한 불만을 찍어누를 수는 없었다.
자연히 전두환의 준장 진급도 늦어졌다. 그렇기에 박정희는 당시 대령이었던 전두환이 맡을 수 있는 최고의 보직인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줬던 것이다. 이후 제1공수가 여단으로 증편되는데, 박정희는 기어이 전두환을 있지도 않은 '여단장 직무대리'로 두다가 임기제 준장으로 삼아 정식 여단장으로 만들고, 기어이 정식 준장으로 삼는다. 박정희가 얼마나 전두환을 총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전두환은 제1공수특전여단의 지휘권을 5년이나 가지고 있었다. 전두환은 1공수여단장에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영전했고, 후임 1공수여단장 자리는 하나회 후배이자 심복인 박희도에게 물려줬다. 게다가 준장이 소장으로 진급하면 무조건 사단장으로 나간다는 당시의 관례를 깨고 경호실 작전차장보 자리에서 소장으로 진급했고 청와대 경호실 근무를 마치고는 일약 제1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영전했으며 이번에도 9공수여단장으로 있던 노태우를 자기 후임 작전차장보로 천거해 임명되도록 했다. 노태우 역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거쳐 제9보병사단장으로 영전했다. 그뿐 아니라 장기오, 최세창 등도 모조리 하나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장기오는 5공수여단장, 최세창은 3공수여단장이었다. 한마디로 특전사의 수도권 여단 4개 중에 3개의 여단장이 모두 하나회, 전두환 패거리들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특전사 여단들 중에 하나회 출신이 여단장으로 있던 수도권 3개의 여단(1, 3, 5여단)은 사실상 전두환 측의 영향권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육군특수전사령관인 정병주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모두가 하나회 패거리이자 전두환의 심복이었기 때문에, 수도권 4개 여단들 중에서 정병주가 지휘할 수 있었던 부대는 갑종장교 출신인 윤흥기 준장과 신수종 대령이 각각 여단장과 참모장을 맡았던 제9공수특전여단 밖에 없었다.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이 세 여단장은 서류상으로만 부하들일 뿐이었다. 특전사 내부에서의 싸움은 자기의 최측근 심복들을 수도권 부대 여단장으로 심어놓은 전두환의 압승으로 이미 결판이 난 상태였다.
특전사 이외에도 서울의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경비사령부의 주요부대들인 30경비단(단장 장세동), 33경비단(단장 김진영), 헌병단(단장 조홍, 부단장 신윤희)도 모두 전두환의 최측근 심복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차지철이 사망한 이후 대통령 경호실마저 전두환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 작전과장 고명승 모두가 하나회였다. 결국 정동호와 고명승은 대통령 경호실 병력으로 총리공관을 지키던 헌병들을 제압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사실상 감금하였다.[92]
또한 하나회는 아니지만, 후원자들 중 12·12 당시 적극적으로 참여한 황영시와 차규헌은 1군단장과 수도군단장으로 서울 서북(파주-문산)과 서남(인천 등) 지역에 부대들을 관할하고 있었다.[93] 헌병 또한 병과장인 헌병감 김진기와 총리공관 경호대장 중령 구정길 등 일부 장교들을 제외한 나머지 주요 인사들[94] 대부분이 하나회 인사였다.
진압군 수뇌부 측의 오판도 한몫 했다. 결과와 하나회 멤버들의 배치만 하나회의 계획대로 움직인 완벽한 작전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의 실제 진행 과정은 절대 순탄하지 않았다.
일단, 진압군은 북한의 동향을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이 북한에게 우위를 갖게 된 것은 정말 이르게 봐도 1980년대 중반 이후이다. 이미 10·26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전반이 흔들리고 있었고, 북괴 김일성에게 있어 역대급 남침 기회라는 것은 진압군은 물론, 하나회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6.25 전쟁 자체가 고작 30여년전의 일이었으며, 당장 10·26으로 숙청당한 김재규, 김계원과 12·12 군사반란에서 불법 체포당한 정승화 모두가 6.25 전쟁 참전용사였다.
당시 북한은 꾸준히 대한민국에 간헐적 공격을 가하고 있었으며, 대표적 사례가 1968년 벌어진 1.21 사태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를 직접 겨냥한 것으로 유명한 이 사건은, 이 사건 때문에 예비군이 창설되었고, 실미도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만 보아도 1.21 사태가 대한민국에 끼친 영향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인민군이 발휘하는 남침 위협은, 미군을 제외한 대한민국 국군 전력 만으로 조선인민군을 확실히 묵사발 낼 수 있는 2020년대에는 실감하기 어려운 당시 시대의 특수한 여건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당시 군 수뇌부는 베트남의 공산화를 직접 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의 남침 위협을 감수하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국군을 총동원하여 반란군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강경론을 거세게 주장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6.25 참전용사이자, 당시 총알받이 소위 취급 받았던 갑종 출신에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한 인물인데, 그의 용기와 혜안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압군이 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대통령 최규하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이 각자 지위의 수행에 걸맞지 않은 무능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제3군사령부 사령관 이건영 장군은 비상계엄 아래에서 계엄사령관(정승화)이 유고 상태면 국방부 장관(노재현)의 명령이 있어야 군을 움직일 수 있다는 원칙적 자세를 취했으며, 이것은 장태완 장군, 정병주 장군, 김진기 장군 등 일부 강경파를 제외한 대다수 군 지휘관들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즉,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의 명령이 있었다면, 제1군, 제3군 올스타 팀이 서울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특전사령부가 꽤 강한 전투력을 가졌고, 보안사령부가 강력한 정보자산을 가지고 있었다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냥 끝난다.
이렇게 중요한 국면에서, 노재현은 큰 오판을 한다. 일단 총성을 듣고 가족들과 도주한 것 자체가 육군참모총장까지 했던 군인이 보일 행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도망쳐서 미8군 사령부 지하벙커로 들어갔으면 그냥 거기 있으면서 사태를 파악하는 편이 나았다. 북한이 습격했든, 쿠데타가 일어났든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미8군이며, 미군의 정보자산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또 국방부로 털레털레 왔다가 국방부를 급습한 신군부 세력에게 체포당해서 결국 신군부의 편을 든다.
최규하 역시 마찬가지다. 나름 정승화 장군 체포 재가서에 재가 시간을 써서 체포 절차가 부당하다는 증거를 남겼지만, 12·12에서 최규하가 잘한 것은 딱 그거 하나다. '주사'라는 멸칭이 있을 정도로 최규하는 무능하고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받았다. 재가서에 재가 시간을 쓴 것에서 알 수 있지만, 최규하는 당시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규하가 작정하고 '서울을 직접 순시하겠다.' 식으로 뻗대기 시작했으면 신군부 입장에서는 정말 크게 곤란했을 것이다. 애당초 신군부에서는 정승화를 체포하려는 명분(사실상 12·12 군사반란의 명분)으로 10.26 사건에서 김재규와 정승화가 같이 있었으니 수상하다는 것을 내세웠다. 만일 신군부가 최규하를 죽게 만든다면 신군부는 제2의 김재규가 되는 것이며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 자체를 잃는다. 뒷감당이 전혀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신군부가 군 내부 인사와 요직을 장악했다지만, 당시 대통령은 유신 헌법 아래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박정희가 휘두른 권력을 최규하 또한 가지고 있었다.[95]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대통령 자의적으로도 반란 진압 명령을 내릴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긴급조치[96]를 날릴수도 있었다. 또한 상술했듯 신군부가 대통령을 죽거나 다치게 만든다면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을 잃어버리기에 타국의 쿠데타처럼 대통령을 체포하거나 구금할수도 없었다. 이런 부분들에서 보면, 최규하가 목숨을 걸고 배팅할 만한 상황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최규하는 그런 귀중한 시간을 반 연금 상태에 있는 채, 하나회와 입씨름하며 날리고 만다.
또한 특전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대통령 경호실 등 서울과 서울 근교의 주요부대의 대다수를 전두환의 심복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점도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특전사의 수도권 4개 여단들 중에 무려 3개 여단의 여단장이 전두환의 심복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박정희의 밀명에 의해 속칭 군 내부에서의 박정희 친위대라 할 수 있는 하나회가 결성되었다. 하나회는 전두환이 주장(主將), 노태우가 부장(副將)인 상태로, 대통령 경호실에서 전두환은 작전차장보, 노태우는 행정차장보를 역임할 정도로 박정희가 힘을 실어주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이 두 사람은 주요 요직을 거쳤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을 정도로 박정희가 공을 들여 키우던 친위세력이었다. 본인 별명인 '물태우' 답게 베트남에서도 기본은 했던 노태우와 달리, 전두환은 베트남에서도 온갖 기행을 벌였으며, 당시 박정희가 베트남 전쟁을 주요한 국군 현대화와 외화 획득 수단, 주한미군 축소 방지 대책으로 판단하고 사활을 걸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전두환의 행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그럼에도 잠시 승진이 미루어졌을 뿐 아무런 조치도 없이, 승승장구한다.
하나회의 리더인 전두환과 2인자인 노태우는 본인들이 이렇게 요직을 거치며 세력을 불렸으며, 여타 요직에도 자기 사람들을 심어놓았다. 전두환은 오랫동안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맡았다. 박정희가 좋아서 이렇게 한 것은 아니었는데, 상술하였듯 전두환이 베트남 전쟁에서 기행과 비리를 저질러 군부 상급자들에게 찍힐 대로 찍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위치가 위치이고, 전두환의 기행도 상상을 초월했던만큼[91] 천하의 박정희도 군부가 가진 전두환에 대한 불만을 찍어누를 수는 없었다.
자연히 전두환의 준장 진급도 늦어졌다. 그렇기에 박정희는 당시 대령이었던 전두환이 맡을 수 있는 최고의 보직인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줬던 것이다. 이후 제1공수가 여단으로 증편되는데, 박정희는 기어이 전두환을 있지도 않은 '여단장 직무대리'로 두다가 임기제 준장으로 삼아 정식 여단장으로 만들고, 기어이 정식 준장으로 삼는다. 박정희가 얼마나 전두환을 총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전두환은 제1공수특전여단의 지휘권을 5년이나 가지고 있었다. 전두환은 1공수여단장에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영전했고, 후임 1공수여단장 자리는 하나회 후배이자 심복인 박희도에게 물려줬다. 게다가 준장이 소장으로 진급하면 무조건 사단장으로 나간다는 당시의 관례를 깨고 경호실 작전차장보 자리에서 소장으로 진급했고 청와대 경호실 근무를 마치고는 일약 제1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영전했으며 이번에도 9공수여단장으로 있던 노태우를 자기 후임 작전차장보로 천거해 임명되도록 했다. 노태우 역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거쳐 제9보병사단장으로 영전했다. 그뿐 아니라 장기오, 최세창 등도 모조리 하나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장기오는 5공수여단장, 최세창은 3공수여단장이었다. 한마디로 특전사의 수도권 여단 4개 중에 3개의 여단장이 모두 하나회, 전두환 패거리들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특전사 여단들 중에 하나회 출신이 여단장으로 있던 수도권 3개의 여단(1, 3, 5여단)은 사실상 전두환 측의 영향권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육군특수전사령관인 정병주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모두가 하나회 패거리이자 전두환의 심복이었기 때문에, 수도권 4개 여단들 중에서 정병주가 지휘할 수 있었던 부대는 갑종장교 출신인 윤흥기 준장과 신수종 대령이 각각 여단장과 참모장을 맡았던 제9공수특전여단 밖에 없었다.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이 세 여단장은 서류상으로만 부하들일 뿐이었다. 특전사 내부에서의 싸움은 자기의 최측근 심복들을 수도권 부대 여단장으로 심어놓은 전두환의 압승으로 이미 결판이 난 상태였다.
특전사 이외에도 서울의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경비사령부의 주요부대들인 30경비단(단장 장세동), 33경비단(단장 김진영), 헌병단(단장 조홍, 부단장 신윤희)도 모두 전두환의 최측근 심복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차지철이 사망한 이후 대통령 경호실마저 전두환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 작전과장 고명승 모두가 하나회였다. 결국 정동호와 고명승은 대통령 경호실 병력으로 총리공관을 지키던 헌병들을 제압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사실상 감금하였다.[92]
또한 하나회는 아니지만, 후원자들 중 12·12 당시 적극적으로 참여한 황영시와 차규헌은 1군단장과 수도군단장으로 서울 서북(파주-문산)과 서남(인천 등) 지역에 부대들을 관할하고 있었다.[93] 헌병 또한 병과장인 헌병감 김진기와 총리공관 경호대장 중령 구정길 등 일부 장교들을 제외한 나머지 주요 인사들[94] 대부분이 하나회 인사였다.
진압군 수뇌부 측의 오판도 한몫 했다. 결과와 하나회 멤버들의 배치만 하나회의 계획대로 움직인 완벽한 작전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의 실제 진행 과정은 절대 순탄하지 않았다.
일단, 진압군은 북한의 동향을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이 북한에게 우위를 갖게 된 것은 정말 이르게 봐도 1980년대 중반 이후이다. 이미 10·26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전반이 흔들리고 있었고, 북괴 김일성에게 있어 역대급 남침 기회라는 것은 진압군은 물론, 하나회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6.25 전쟁 자체가 고작 30여년전의 일이었으며, 당장 10·26으로 숙청당한 김재규, 김계원과 12·12 군사반란에서 불법 체포당한 정승화 모두가 6.25 전쟁 참전용사였다.
당시 북한은 꾸준히 대한민국에 간헐적 공격을 가하고 있었으며, 대표적 사례가 1968년 벌어진 1.21 사태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를 직접 겨냥한 것으로 유명한 이 사건은, 이 사건 때문에 예비군이 창설되었고, 실미도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만 보아도 1.21 사태가 대한민국에 끼친 영향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인민군이 발휘하는 남침 위협은, 미군을 제외한 대한민국 국군 전력 만으로 조선인민군을 확실히 묵사발 낼 수 있는 2020년대에는 실감하기 어려운 당시 시대의 특수한 여건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당시 군 수뇌부는 베트남의 공산화를 직접 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의 남침 위협을 감수하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국군을 총동원하여 반란군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강경론을 거세게 주장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6.25 참전용사이자, 당시 총알받이 소위 취급 받았던 갑종 출신에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한 인물인데, 그의 용기와 혜안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압군이 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대통령 최규하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이 각자 지위의 수행에 걸맞지 않은 무능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제3군사령부 사령관 이건영 장군은 비상계엄 아래에서 계엄사령관(정승화)이 유고 상태면 국방부 장관(노재현)의 명령이 있어야 군을 움직일 수 있다는 원칙적 자세를 취했으며, 이것은 장태완 장군, 정병주 장군, 김진기 장군 등 일부 강경파를 제외한 대다수 군 지휘관들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즉,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의 명령이 있었다면, 제1군, 제3군 올스타 팀이 서울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특전사령부가 꽤 강한 전투력을 가졌고, 보안사령부가 강력한 정보자산을 가지고 있었다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냥 끝난다.
이렇게 중요한 국면에서, 노재현은 큰 오판을 한다. 일단 총성을 듣고 가족들과 도주한 것 자체가 육군참모총장까지 했던 군인이 보일 행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도망쳐서 미8군 사령부 지하벙커로 들어갔으면 그냥 거기 있으면서 사태를 파악하는 편이 나았다. 북한이 습격했든, 쿠데타가 일어났든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미8군이며, 미군의 정보자산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또 국방부로 털레털레 왔다가 국방부를 급습한 신군부 세력에게 체포당해서 결국 신군부의 편을 든다.
최규하 역시 마찬가지다. 나름 정승화 장군 체포 재가서에 재가 시간을 써서 체포 절차가 부당하다는 증거를 남겼지만, 12·12에서 최규하가 잘한 것은 딱 그거 하나다. '주사'라는 멸칭이 있을 정도로 최규하는 무능하고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받았다. 재가서에 재가 시간을 쓴 것에서 알 수 있지만, 최규하는 당시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규하가 작정하고 '서울을 직접 순시하겠다.' 식으로 뻗대기 시작했으면 신군부 입장에서는 정말 크게 곤란했을 것이다. 애당초 신군부에서는 정승화를 체포하려는 명분(사실상 12·12 군사반란의 명분)으로 10.26 사건에서 김재규와 정승화가 같이 있었으니 수상하다는 것을 내세웠다. 만일 신군부가 최규하를 죽게 만든다면 신군부는 제2의 김재규가 되는 것이며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 자체를 잃는다. 뒷감당이 전혀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신군부가 군 내부 인사와 요직을 장악했다지만, 당시 대통령은 유신 헌법 아래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박정희가 휘두른 권력을 최규하 또한 가지고 있었다.[95]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대통령 자의적으로도 반란 진압 명령을 내릴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긴급조치[96]를 날릴수도 있었다. 또한 상술했듯 신군부가 대통령을 죽거나 다치게 만든다면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을 잃어버리기에 타국의 쿠데타처럼 대통령을 체포하거나 구금할수도 없었다. 이런 부분들에서 보면, 최규하가 목숨을 걸고 배팅할 만한 상황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최규하는 그런 귀중한 시간을 반 연금 상태에 있는 채, 하나회와 입씨름하며 날리고 만다.
당시 최규하는 전형적인 관료적 마인드에 머무르던 사람으로, 굳이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계엄을 내리는 것을 통해 계엄의 책임에서 빠지고자 한 행적을 볼 때, 자신을 군부정권과 민정이양 사이의 징검다리 정도로 치부했던 정황이 보인다. 좋게 말하면 민정이양을 위해 권한을 내려놓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유신 헌법 시대 대통령의 위치를 망각한 보신주의적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군인의 나라였고, 민정이양을 제대로 하려면 대통령이 중심을 잡아 군부의 폭주를 제어해야 하는 사상누각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최규하는 그런 시대의 특수성을 애써 백안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레임덕이 온 노태우 정부 후반, 민주자유당을 장악하여 하나회를 쓸어버린 김영삼의 행적과 수완을 생각해 보면, 최규하는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지켜야 하는 대통령에게 필요한 자질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박 대통령 서거 이후 김종필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수 있다. 실제로 최규하는 대통령이 되기 싫어 김종필에게 대통령이 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직선제 대통령의 꿈을 갖고 있던 JP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이후 권력자로 떠오른 전두환에게 부정축재자로 낙인 찍혀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2인자였고 군 선배였던 김종필이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면 신군부는 아예 반란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일으켰다고 해도, 김종필의 수완과 군 내에서의 카리스마를 생각해보면 수월하게 진압이 가능했을 것이다. 신군부가 김종필을 구금하고 재산도 몰수하긴 했지만 정 총장도 모질게 고문했던 것과 다르게 고문은 없었으며 석방 당시 노태우가 직접 대접하고 조언도 받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김종필은 신군부에게도 두려운 선배였으나 당시 공화당 총재에 불과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다.
9공수가 출동하던 시점은 노태우가 자살을 고려할 정도로 반란군 세력에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보안사가 모든 통신을 감청하고 있고 1, 3, 5공수를 장악하여 병력동원에서 우위에 있었다고 하지만, 9공수가 그 어떤 부대보다도 빨리 서울에 진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9공수가 그대로 진입하여 보안사를 공격한다면 반란군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육본 수뇌부가 수경사로 옮기지 않고 육군본부 B-2 벙커에 그대로 남은 상황이라고 한다면, 소규모 병력 정도로도 충분히 농성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버티면서 일단 날이 밝고 나면, 미국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태반이 쿠데타에 절대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반란군이 결국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반란군이 총리공관을 접수하여 최규하 대통령의 신변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거 자체가 10.26이나 다를 바 없고, 10.26에서 정승화가 보인 행보가 의심스러우니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란군은 스스로 명분을 잃어버리는 꼴이 된다. 대통령을 인질로 잡아 협상을 한다 한들 반란군 수뇌부의 신변보장 정도를 얻어낼 수 있을지 몰라도 대세 자체를 뒤집어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 보안사의 협박에 넘어가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고 육본이 신사협정을 체결했기에 그랬던 것이지, 전국의 대다수 지휘관들은 처음부터 반란군의 편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박 대통령 서거 이후 김종필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수 있다. 실제로 최규하는 대통령이 되기 싫어 김종필에게 대통령이 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직선제 대통령의 꿈을 갖고 있던 JP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이후 권력자로 떠오른 전두환에게 부정축재자로 낙인 찍혀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2인자였고 군 선배였던 김종필이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면 신군부는 아예 반란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일으켰다고 해도, 김종필의 수완과 군 내에서의 카리스마를 생각해보면 수월하게 진압이 가능했을 것이다. 신군부가 김종필을 구금하고 재산도 몰수하긴 했지만 정 총장도 모질게 고문했던 것과 다르게 고문은 없었으며 석방 당시 노태우가 직접 대접하고 조언도 받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김종필은 신군부에게도 두려운 선배였으나 당시 공화당 총재에 불과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다.
9공수가 출동하던 시점은 노태우가 자살을 고려할 정도로 반란군 세력에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보안사가 모든 통신을 감청하고 있고 1, 3, 5공수를 장악하여 병력동원에서 우위에 있었다고 하지만, 9공수가 그 어떤 부대보다도 빨리 서울에 진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9공수가 그대로 진입하여 보안사를 공격한다면 반란군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육본 수뇌부가 수경사로 옮기지 않고 육군본부 B-2 벙커에 그대로 남은 상황이라고 한다면, 소규모 병력 정도로도 충분히 농성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버티면서 일단 날이 밝고 나면, 미국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태반이 쿠데타에 절대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반란군이 결국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반란군이 총리공관을 접수하여 최규하 대통령의 신변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거 자체가 10.26이나 다를 바 없고, 10.26에서 정승화가 보인 행보가 의심스러우니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란군은 스스로 명분을 잃어버리는 꼴이 된다. 대통령을 인질로 잡아 협상을 한다 한들 반란군 수뇌부의 신변보장 정도를 얻어낼 수 있을지 몰라도 대세 자체를 뒤집어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 보안사의 협박에 넘어가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고 육본이 신사협정을 체결했기에 그랬던 것이지, 전국의 대다수 지휘관들은 처음부터 반란군의 편은 아니었다.
5. 사후 결과[편집]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을 보도하는 1979년 12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
5.1. 진압군 측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처리[편집]
12.12 이후 전두환에 맞선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 |
이 사건 이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고문을 당한 이후 불명예 제대를 당했다.[97] 그것도 모자라 10.26 사건 당시 김재규와 함께 쿠데타를 공모했다는 죄목으로[98] 최고 계급인 대장에서 최하 계급인 이등병까지 무려 17계급을 강등당했다. 물론 전두환이 백담사로 들어간 이후에는 대장으로 복권되었으며, 1987년 대선에서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취임하면서 김영삼의 추격전에 일조할 때도 당연히 대장이라고 다 불렀다.
이때 정승화 총장과 함께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 갔던 사람은 총 5명인데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3총사와 이건영 제3야전군 사령관, 문홍구 작전 본부장이다.[99] (이중에서 김진기 준장은 서빙고에서 나오자 마자 바로 자진 예편원을 내서 제외하고) 12월 24일 국방부에서 발표하기를 정 총장은 김재규에 대한 내란방조죄로 구속 입건하였고 이건영 중장, 장태완 소장, 정병주 소장, 문홍구 소장 등 4명은 김재규에게 돈을 받았으며 12.12 때 병력을 출동시키는 등 조직적인 저항을 했다고 밝혔다. 즉, 이들 몇 사람은 전두환 측에서 언론을 통해 공지할 정도로 12.12에 저항하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는데 일단 육사 11기인 전두환 소장보다 윗기수인 육사 5기(정승화 총장)~8기와 종합행정학교 출신들이 대대적으로 전역하게 되었으며 기수와 상관 없이 전두환 측에 비우호적인 세력들도 좌천되거나 군문을 떠나게 된다. 이로서 전두환과 하나회 일원들은 군부 요직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실권자가 되었고, 이후 이들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야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는 등의 피를 뿌리면서 결국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미국은 처음에는 이를 막으려 했지만 초반 정보의 혼선과 부족으로 대응 시기를 놓쳤고 이때 지미 카터는 레임덕이라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게다가 나중에는 전두환이 알아서 설설 기었기에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손을 떼며 사실상 전두환 정권을 묵인했다. 그 결과로 전두환 정부는 임기 동안 정치적으로 미국에게 많이 의지하게 된다.[100] 더군다나 당시 한국은 박정희와 카터의 대립으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101] 때문에 전두환은 정권의 인정을 위한 적극적인 친미정책을 밀었고, 이에 레이건 정부는 물론 미국 군부의 주도로 전두환 정부가 묵인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과 5.18 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을 미국이 별다른 조치 없이 침묵했다는 사실이 대한민국 내에 알려지면서 80년대에는 운동권을 중심으로 반미감정이 거세게 일어났다.[102] 이런 상황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미국은 1987년 6월 항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전두환 정권이 무력 진압을 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기도 한다.
정승화 외 진압군 주요 인사들이 반란 세력에게 당한 처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각 인물 문서에도 나와 있다.
수도경비사령관(소장) 장태완은 체포 후 서빙고로 끌려가 수사를 받은 후 소장 신분으로 강제 예편당하고 6개월간 가택 연금을 당했다. 이후 아버지를 잃고, 심지어 아들까지 잃는 안타까운 일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그 후엔 전두환의 화해의 제스쳐였는지 1982년에 전두환이 장태완에게 공기업인 한국증권전산 사장직을 제안했고 장태완이 이를 수락해서 공기업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사실 전두환과 직접적인 갈등을 겪은 사람은 정승화였고 의외로 장태완은 12·12 군사반란 이전까지는 전두환과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다만 육사 출신이 아닌 장태완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전두환의 손아래동서 김상구를 예편시킨것이 장태완 이었기에 껄끄러움은 남아있는 정도.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군에서 밀려나게 된데다가 간접적인 피해(아버지와 아들의 죽음)까지 입었던 장태완에 대한 전두환의 사과와 이미 집권한 마당에 더이상의 분란을 막으려는 회유 조치로 보인다.[103]
육군특수전사령관(소장) 정병주 역시 체포 후 현역부적합 판정이란 명목으로 소장 신분으로 강제 예편당했다. 이후 1988년 10월에 실종되었고 이듬해인 1989년 3월에 양주군 장흥면의 빈 부대막사에서 자살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장태완은 정병주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호소했다. 심지어 시계는 실종될 무렵에서 멈춰있어 타살의혹이 강하다.
육군본부 헌병감(준장) 김진기는 체포 후 국군보안사령부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준장 신분으로 자진예편했다. 전두환, 노태우가 수 차례 공직을 제안했으나 모두 거부했다. 이후 김영삼 정부에서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지냈다.
제9공수여단장(준장) 윤흥기는 쿠데타 직후 여단장 직위를 하나회 출신의 이진삼(육사 15기)에게 넘겨줘야 했다. 쿠데타 당시 유일하게 진압군 편에 섰던 공수여단장이었지만 비중이 큰 것은 아니어서 위의 세 장군들 처럼 강제 예편까지 당하지는 않았다. 이후 소장 진급에는 성공했으나 신군부 세력에 찍혀 소장이 되었음에도 사단장을 절대 하지 못 했다.[104] 1980년 육군본부 교훈처장을 거쳐 1983년 1월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부 차장[105]을 끝으로 전역했다.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대장) 류병현은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한미연합사의 특성상 미군과 연결되어서 쿠데타 세력도 건드리지는 못하였고, 이후 군 인사에서 내무부 장관으로 입각한 김종환 대장의 뒤를 이어 합참의장까지 지낸 뒤 대장으로 예편했다. 다만 이 시절에 합참의장의 힘은 상당히 약한 명예직에 가까웠다. 이 당시에는 각군 참모총장들이 군령권과 군정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나, 훗날 합참의장에게 군령권이 이관된다.
육본 군수참모부장(소장) 안종훈은 장태완 사령관이 탱크로 밀어 붙이자고 했을 때 유일하게 찬성을 한 사람이다. 12.12후 육대 총장을 거쳐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밀려난다. 1980년 5월 17일 국방부에서 열린 전군지휘관 회의 때 유일하게 할말이 있다며 발언권을 얻은 사람인데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한다.' 라고 하였다가 전역조치 된다.
이 사건이 발생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는 영문도 모르는 채 군부로부터 직간접적인 하야 압박을 받았고, 결국 친구 김정렬의 하야하라는 압력에 못 이겨서 1980년 8월에 스스로 하야하고 말았다. 이 외에도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쿠데타 세력에 대한 대규모 영전이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제1야전군사령관(중장) 김학원, 제3야전군사령관(중장) 이건영, 합참 작전본부장(중장) 문홍구,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소장) 하소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소장) 황의철 등이 군복을 벗어야만 했다.[106] 이들은 남은 계급 정년을 1년에 500만 원씩으로 계산받고 전역식 없이 허울뿐인 공로훈장과 퇴직금을 받고 군복을 벗어야만 했다. 1차 숙청에서 경질된 30명의 장성들은 대부분 육사 8~10기 혹은 갑종, 육군 종합학교 출신들로, 6.25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이들이었으나 당시 육사 11기가 주류가 된 신군부는 이들을 부담스러운 선배들로 여겼고 결국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총 96명의 육군 장성이 전두환의 친위 세력으로 물갈이가 되었다.
이 같은 개편 작업을 위해 1980년 11월에 군인사법이 개정되어 기존의 중장 계급정년은 6년에서 4년으로, 7년이었던 소장 계급 정년은 5년으로, 8년이었던 준장도 5년으로 대폭 단축되고 이로 인해 6.25기간 모집 되었던 준장, 소장급 비육사 출신들도 대거 옷을 벗어야 했다.
또한 개각이 병행되어 반란 당시에 한심한 행보를 보였던 국방장관 노재현이 경질되고 공군참모총장 주영복이 국방부 장관으로 영전하였다. 그리고 총무처 장관도 친 하나회 성향을 보였던 국방부 차관 김용휴로 내정되었으며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던 이희성이 대장 진급 후 육군참모총장으로 전보되면서 중앙정보부 1차장 윤일균이 다시 직무대리를 맡게 되었다.
5.2. 정권을 장악한 반란군[편집]
12.12사태 직후 보안사 위로 파티 | 12.12. 그 후, 신군부의 화려한 잔치 |
군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반란군은 이른바 '신군부'를 구축한 후 5.17 쿠데타를 거쳐 1년도 안 되어 리더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추대함으로써 정권을 찬탈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후 전두환 정권 7년[107], 노태우 정권 5년[108], 도합 12년 동안 사실상 대한민국의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며 갖은 영화를 누렸다.
- 국군보안사령관 소장 전두환: 중장 진급 →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임 → 대장 전역 → 대통령
육군을 장악한 전두환은 3개월 후 중장으로 진급한 뒤 불과 5개월 후 대장으로 광속 진급하였으며, 그 와중 현역 장성 신분으로 중앙정보부장 서리직까지 겸임해 군 조직과 정보조직을 장악했다.[109] 이후, 5.17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압박하여 하야시킨 뒤, 기어이 대통령직을 차지했다. 전두환은 쿠데타 선배 박정희를 오마주한듯 제법 비슷한 행보를 취했다. 박정희의 경우 1961년 5.16 쿠데타 - 1961년 8월 중장 진급 - 1961년 11월 대장 진급 - 1963년 8월 전역 - 1963년 12월 대통령 취임을 했으며,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 - 1980년 3월 중장 진급 - 1980년 8월 대장 진급 - 1980년 9월 대통령 취임을 했다. 사실상 자기가 스스로를 진급시켰다는 점은 똑같았으나 박정희의 경우 군정 이후 직선제를 거쳤지만, 전두환은 정권을 장악한 후 간선제를 거친 체육관 대통령이라는 점이 다르며 전두환이 좀 더 '광속'[110]으로 진행됐다는 사실에 차이가 있다.
노태우는 휘하 9사단의 최전방 부대(29, 30연대)를 무단으로 빼내 반란에 가담시켜 반란군 내 2인자 위치를 확보했다. 직후 논공행상에서 군사정권 최고 요직인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영전했으며, 대통령이 되기 위해 예편한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자리[111]를 이어받았다. 이후 대장으로 진급한 후 예편하여 정계에 진출, 정무2장관, 체육부장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내무부장관 등을 거쳐 12대 총선에서는 집권여당 민주정의당 전국구 1번으로 국회에 진출해 곧바로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어 1987년 6월 항쟁 시기까지 재임했다. 그리고 전두환의 후계자가 되어 13대 대선에서 야권의 분열을 틈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육사 10기, 황영시는 반란에 참여한 전두환의 선배 장성들 중에서도 사전에 전두환과 반란에 대한 교감이 제일 높았던 반란의 주도자였다. 반란 직후 논공행상에서 대장 진급 코스인 육군참모차장으로 영전한 뒤 6개월 후 대장으로 진급해, 대장 1차 보직 중 최고 요직인 3군사령관을 차지했다. 이후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하였고 임기를 마치고 예편한 후에도 부총리급인 감사원장으로 기용되며 영화를 누렸다.
육사 8기, 5.16군사정변에도 가담한 인물로 반란 직후 논공행상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내정되나 최규하 대통령의 반대로 인해 취임하지 못했다.[112] 이미 논공행상이 끝난 뒤인지라 마땅히 차지할 자리가 없어 일단 한직인 육군사관학교장으로 가게 된다. 이후 참모차장을 거쳐 대장으로 진급해 2군사령관[113]을 지냈으며 예편 후에는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유학성: 3군사령관(중장) → 대장 전역 → 국가안전기획부장 → 국회의원
정훈장교 1기, 군수차관보[114]라는 한직에 있던 유학성은 반란 직후 논공행상에서 3군사령관을 차지한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 대장으로 진급한 뒤 예편한다. 유학성의 임기 중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되어 초대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냈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안기부장에서 경질되지만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12대, 13대, 14대 3선 의원을 지냈다.
반란이 끝난 다음 날 오전에 합류한 정호용은 비록 반란에 공은 없었으나 전두환과 노태우와 절친한 하나회 창립멤버로서 이후 3인자로서 승승장구했다. 반란 직후 논공행상에서 정병주를 대신해 특수전사령관으로 영전했으며 황영시처럼 3군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내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지내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육사 동기인 친구 전두환의 정권과 친구 노태우의 정권에서 영화를 누렸다.
1등 공신 박희도와 달리 반란에서 활약한 바는 적지만 박준병은 같은 하나회 12기 멤버 박희도, 박세직과 더불어 '쓰리박'으로 불리며 5공화국 초기 군부 실세로 꼽혔다. 소장 최고 요직인 인사참모부장을 지낸 후 군사정권 최고 요직인 보안사령관으로 영전했다. 이후 1984년 12월에 정계에 차출되어 대장 예편한 뒤, 3선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민정당/민자당의 사무총장으로서 승승장구했다.
반란 직후 동기 황영시의 요청으로 반란군에 합류한 김윤호는 이후 6인 위원회(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김윤호, 전두환, 노태우)의 일원으로 군부 내 논공행상 및 반대파 숙청 작업에 참여했다. 원래 육군보병학교장은 소장 한직 중 하나였으나 반란을 계기로 입지가 달라진 셈이었다. 또한 미군과의 교섭 작업도 맡은 공으로 명실상부한 신군부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후 황영시만큼은 아니어도 대가를 톡톡히 누렸다. 대장까지 진급했고 비록 당시에는 명예직이었지만 합참의장까지 역임했다.
동기인 전두환을 형님처럼 모셨던 백운택은 동기들에 비해 많이 뒤쳐져있던[115] 본인의 입지를 역전시키기 위해서인지 반란에 적극 가담했다. 정승화 참모총장 체포에 대한 사후 재가를 얻어내기 위해 반란군 멤버들이 최규하 대통령을 설득하던 자리에서는 일부러 품에 있던 권총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 덕분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요직인 9사단장도 맡고, 중장으로 진급하여 군단장까지 지냈으나 재임 중 사망하여 더 이상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직속상관이자 은인인 정병주를 배신[116]한 대가는 참으로 달콤했다. 반란의 1등 공신이자 전두환의 직계 충복으로서 전두환 정권 내내 승승장구했다. 쿠데타 당시 준장이었는데 불과 4년 만에 대장까지 광속 진급했으며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랐다. 본래 하나회 동기 박준병, 박세직에 비해 진급이 1년 뒤진 후발 주자였으나 모두 제치고 기어이 참모총장이 되었다. 또한, 2년의 참모총장 임기가 끝난 뒤에도 전두환에 의해 임기가 1년 유임되며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후 전두환과 결별하고 전두환계 군맥을 숙청한 노태우에 의해 해임되어 강제 예편당했으며 두 번 다시는 공직을 맡지 못했다.
- 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최세창: 20사단장(소장) → 수도경비사령관(소장) → 1군단장(중장) → 육군참모차장(중장) → 3군사령관(대장) → 합동참모본부의장(대장) → 대장 전역 → 국방부 장관
박희도와 마찬가지로 직속상관인 정병주를 배신한데다 심지어 체포하기도 했던 최세창 역시 달콤한 배신의 대가를 누렸다. 전두환의 직계 충복 중 하나로 5공화국에서 내내 승승장구했으며 비록 전두환의 최고 충복 중 하나인 박희도의 임기 유임으로 인해 참모총장은 되지 못했지만 대신 명예직인 합참의장까지 지내며 영화를 누렸다. 전두환계였음에도 후일 노태우에게도 등용되어 국방부 장관도 역임했다.
- 5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장기오: 수도사단장(소장) → 수도군단장(중장) → 교육사령관(중장) → 중장 전역 → 총무처 장관
박희도, 최세창과 함께 불법적으로 휘하 공수특전여단 실병력을 동원한 3인방이지만 효창운동장에서 예비대로 대기만 한 까닭에서인지 요직도 별로 맡지 못한 편이며[117] 대장을 달지 못했고 중장으로 전역했다. 예편 후에 총무처 장관으로 보상받았다.
-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준장 정동호: 경호실장(준장/소장) → 5군단장(중장) → 육군참모차장(중장) → 중장 전역 → 국회의원
전두환의 명을 받아 하나회 후배 고명승 경호실 작전담당관과 함께 경호실 병력을 불법 동원해 총리 공관을 점거, 최규하 대통령[118]을 사실상 연금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 정식으로 경호실장을 지냈으며 최세창과 더불어 하나회 육사 13기의 선두주자로 꼽혔으나 참모차장 시절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의 책임을 지고 예편했다. 이후 한국도로공사 사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대령 허화평: 준장 전역 → 청와대 비서실 보좌관 → 청와대 정무제1수석비서관 → 국회의원
전두환의 비서실장으로 반란에서 전두환의 책사로 맹활약한 허화평은 전두환을 따라 청와대로 들어갔다. 준장 계급장만 달고 예편한 뒤 청와대 비서실 보좌관에 임명되었는데, '비서실 보좌관'이라는 직책은 허화평을 위해서 만들어진 전무후무한 자리였다. 대통령 집무실 바로 밑 사무실에서 모든 정보를 장악한 사실상의 비서실장 자리였다. 군사 반란과 정권 장악에 있어 책사로 맹활약한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후 전두환의 눈 밖에 나기 전까지 명실상부한 전두환 정권 초기 최고 실세로 군림했다. 조금씩 전두환의 눈 밖에 나던 허화평은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중에 완전히 전두환의 눈 밖에 나 미국으로 사실상 추방당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국회의원을 지내다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으로 심판받았다.
-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대령 허삼수: 준장 전역 → 청와대 사정수석 → 국회의원
허화평과 단짝으로 전두환의 핵심 참모였으며, 12·12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한 허삼수는 허화평과 마찬가지로 준장으로 예편한 뒤 전두환을 따라 청와대로 들어갔다. 사정수석 비서관으로서 실세로 군림하며, 정부 최고 사정기구로 창설된 '사정협의회'의 의장으로서 관가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허화평과 마찬가지로 전두환의 눈 밖에 나 청와대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향했다. 허화평과 마찬가지로 귀국한 이후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마찬가지로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으로 심판받았다.
- 보안사령부 대공수사과장 중령 이학봉: 준장 전역 → 청와대 민정수석 →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 → 국회의원
수사와 공작 전문가로 반란과 전두환 정권 창립 과정에서 진압군 장성들, 정치인, 재야인사들의 수사와 조사를 지휘한 이학봉은 허화평, 허삼수와 함께 전두환을 따라 청와대로 들어갔다. 민정수석비서관을 맡았으며, 전두환과 불화를 겪고 쫓겨난 허화평, 허삼수와 달리 전두환 정권 내내 전두환의 충복으로 정권 유지 작업 등에서 활약했다.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을 보좌하는 안기부 2차장을 지내며 평화의 댐 건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에 관여했다. 이후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5공 비리 청산으로 단죄되었다.
-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 대령 장세동: 특수전사령부 작전참모(준장) → 3공수특전여단장(준장) → 경호실장(소장/중장) → 중장 전역 → 국가안전기획부장
전두환의 최고 충복으로 꼽히는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실세로 군림했다. 전두환의 경호실장이 되어 비록 군은 떠나야했지만 경호실장[119]과 안기부장을 역임하며 전두환의 후계자로도 꼽히는 등 정권의 최고 실세로 꼽혔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등 정권 유지를 위한 갖가지 공작에 관여 하였고, 결국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정권이 끝나자 정권 내 여러 범법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옥 신세를 졌다.
- 수도경비사령부 33경비단장 대령 김진영: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준장) → 경호실 차장보(준장/소장) → 수도사단장(소장) → 3사관학교장(소장) → 수도경비사령관(중장) → 교육사령관(중장) → 한미연합부사령관(대장) → 육군참모총장(대장) → 대장 전역
수경사 30경비단장 장세동과 함께 직속상관 장태완의 명령을 무시하고 반란에 가담한 김진영은 명실상부한 하나회의 대표 주자이자 차기 육군참모총장으로 꼽혔으나 강직한 성격과 정치적 흐름으로 인해 군생활은 나름대로 파란만장했다. 사단장 시절, 상부의 부정선거 동참 지시를 거부하여 좌천당했고 이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부활한 후에는 노태우의 전두환계 군맥 제거 작업으로 또 좌천당했다. 여러차례의 고초를 겪었지만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끝내 부활하여 육군참모총장에 오르긴 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대숙청의 첫 타자로 숙청당했다.
- 9사단 29연대장 대령 이필섭: 9사단장(소장) → 1군단장(중장) → 육군사관학교장(중장) → 2군사령관(대장) → 합동참모본부의장(대장) → 대장 전역
반란 당시 사단장 노태우의 명을 받아 최전방 29연대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출동했다. 그 역시 하나회 멤버였으며 노태우의 직계 군맥에 속해 노태우 정권에서 승승장구했다. 대장까지 진급해 합동참모본부의장[120]을 지냈다. 재임 시절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더불어 김영삼에게 숙청당했다.
- 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 대령 고명승: 경호실 차장(준장) → 9사단장(소장)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소장) → 수도경비사령관(중장) → 보안사령관(중장) → 3군사령관(대장) → 대장 전역
하나회 선배인 정동호 경호실장 직무대리와 함께 경호실 병력을 불법 동원해 최규하 대통령을 사실상 연금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전두환계 군맥으로 전두환 정권에서 승승장구했으며 군사정권의 최고 요직인 인사참모부장, 수도경비사령관, 보안사령관, 3군사령관을 모두 역임하며 영화를 누렸다. 육군참모총장까지 따놓은 당상인 셈이었으나 노태우가 취임한 뒤 전두환계 군맥을 숙청하기 시작했고 고명승은 2년 임기는 채우나 참모총장이 되지 못하고 전역했다.
반란의 중심에 있었던 특전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특전사령부의 직할부대인 707특임대를 창설하게 된다. 3공수여단의 반란으로 3공수여단 영내에 있던 무방비 상태의 특전사령부 본부가 너무 쉽게 접수되자, 나중에 혹시나 자신들도 똑같이 역관광을 당할까봐 특전사령관을 호위하는 사령관 직속 무장병력 친위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만든 것이다. 특전사령부는 기존 3공수여단의 영내가 아닌 독자적인 공간을 가진 3공수여단 바로 옆의 부지로 옮겨지게 되었고 707특수임무대대도 그곳에 위치하게 된다. 이후 상황이 안정화되면서 역쿠데타나 하극상의 우려가 희박해져서 사령관 보호라는 임무는 차차 없어졌고,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대비하면서 대테러 전문 임무 쪽에 전념하게 된다.
반란의 중심에 있었던 특전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특전사령부의 직할부대인 707특임대를 창설하게 된다. 3공수여단의 반란으로 3공수여단 영내에 있던 무방비 상태의 특전사령부 본부가 너무 쉽게 접수되자, 나중에 혹시나 자신들도 똑같이 역관광을 당할까봐 특전사령관을 호위하는 사령관 직속 무장병력 친위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만든 것이다. 특전사령부는 기존 3공수여단의 영내가 아닌 독자적인 공간을 가진 3공수여단 바로 옆의 부지로 옮겨지게 되었고 707특수임무대대도 그곳에 위치하게 된다. 이후 상황이 안정화되면서 역쿠데타나 하극상의 우려가 희박해져서 사령관 보호라는 임무는 차차 없어졌고,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대비하면서 대테러 전문 임무 쪽에 전념하게 된다.
6. 재판[편집]
16년만에 이루어진 반란군 수괴들의 재판 |
1. 반란수괴 2. 반란모의참여 3. 반란중요임무종사 4. 불법진퇴 5.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6. 상관살해 7. 상관살해미수 8. 초병살해 9. 내란수괴 10. 내란모의참여 11. 내란중요임무종사 12. 내란목적살인 13.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대법원 판례) |
1심 선고공판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유기징역 최고형량인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는 감형되어 각각 무기징역, 징역 17년으로 감형했다. 참고로 군 형법상 내란죄는 사형, 형법의 내란 목적 살인 주동자의 형량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다. 이미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을 확정받아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 기준인 금고형을 초과했기 때문에 경호·경비를 제외한 모든 예우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121][122] 물론 문민 정부 임기 말인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을 받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사망되기까지 '필요한 기간의 경비 및 경호'만은 유지되었다. 하지만 추징금은 벌금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까지 사면되지는 않았다. 노태우는 그나마 2013년까지 추징금을 모두 냈지만, 전두환은 사망 시까지 고액 체납으로 탈세 현행범이었다.[123]
6.1. 사면[편집]
전두환, 노태우에 대해 사면권을 행사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으로, 이미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기 이전부터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시켜주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97년 4월 기사 97년 9월 기사. 국민[124] 대화합 차원에서 김영삼이 사면 얘기를 수차례 꺼냈다. 물론 김대중 역시도 1997년 4월 30일 “김영삼 대통령 임기 내에 사면을 단행, 하루빨리 동서화합의 길이 열리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힘으로써 사면을 적극 찬성했다. 1997년 4월 기사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 복권을 주장했다.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운 만큼 사면에 동의했다고는 할 수 있겠으나, 이를 주도적으로 나서 사면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 왜곡이다. 아예 2009년 김영삼은 인터뷰에서 1년 정도 수감하고 석방할 생각이었고, 내가 전부 사면했다고 말했다. 2009년 인터뷰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운 만큼 사면에 동의했다고는 할 수 있겠으나, 이를 주도적으로 나서 사면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 왜곡이다. 아예 2009년 김영삼은 인터뷰에서 1년 정도 수감하고 석방할 생각이었고, 내가 전부 사면했다고 말했다. 2009년 인터뷰
7. 5.16 군사정변과의 비교[편집]
한편, 12·12 군사반란은 이전의 5.16 군사정변과는 성격이 매우 판이하다. 5.16 군사정변이 바로 청와대까지 들이밀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데 비해[125] 12·12 군사반란은 군부를 장악했을 뿐, 당시 국민들이나 야당의 분위기 때문에 눈치 보느라 '정변'을 일으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사태라는 애매한 이름이 붙었던 것도 이런 혼란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26]
따라서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반란의 성공이 곧바로 신군부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엄연히 최규하 대통령과 내각이 그들 위에 존재했으며, 이후로도 야당과 대학생 등 반대 세력의 저항은 거세어지는 등 신군부의 정권 장악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때문에 신군부 측에서는 또 한 번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듬해 1980년에 벌어진 5.17 군사 쿠데타였으며 이때 비로소 신군부의 정권 장악이 완성된다.[127] 이로써 전두환은 대통령 바로 밑의 '사실상' 계엄사령관 같은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당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자는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대장이었으나, 그는 어디까지 바지사장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의 끔찍한 비극의 원인이 된 사건이다. 이렇게 쿠데타 치고는 정권 장악까지 걸린 긴 시간 때문에 전두환의 정권 장악은 5개월짜리[128]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는 이상한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129] 물론 실제로 가장 긴 쿠데타라는 것은 아니다. 내전을 포함한 양상의 다른 쿠데타들도 많으므로.[130]
12·12 이후 5.17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정권 장악은 크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차근차근 진행되어 나갔고 이런 과정에서 여러 언론들이 전비어천가로 그들을 찬양하는 뉴스로 장식하기도 했다. 한편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전두환과 휘하 부하들에 의해 권력이 장악되어 나간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알아챈 사람들은 많았다.[131] 이 때문에 최규하는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국민들에게 허수아비 대통령 운운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박정희는 직접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서 대권을 잡은 반면, 전두환은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정권 찬탈'이라는 오명을 벗기가 어려운 점이 있고, 5.16은 그나마 일부 집단으로부터 정치적 정당성이 있다는 식으로 미화되기도 하지만 12·12는 그런 것 일절없이 비난 받는다는 점도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반란의 성공이 곧바로 신군부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엄연히 최규하 대통령과 내각이 그들 위에 존재했으며, 이후로도 야당과 대학생 등 반대 세력의 저항은 거세어지는 등 신군부의 정권 장악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때문에 신군부 측에서는 또 한 번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듬해 1980년에 벌어진 5.17 군사 쿠데타였으며 이때 비로소 신군부의 정권 장악이 완성된다.[127] 이로써 전두환은 대통령 바로 밑의 '사실상' 계엄사령관 같은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당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자는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대장이었으나, 그는 어디까지 바지사장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의 끔찍한 비극의 원인이 된 사건이다. 이렇게 쿠데타 치고는 정권 장악까지 걸린 긴 시간 때문에 전두환의 정권 장악은 5개월짜리[128]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는 이상한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129] 물론 실제로 가장 긴 쿠데타라는 것은 아니다. 내전을 포함한 양상의 다른 쿠데타들도 많으므로.[130]
12·12 이후 5.17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정권 장악은 크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차근차근 진행되어 나갔고 이런 과정에서 여러 언론들이 전비어천가로 그들을 찬양하는 뉴스로 장식하기도 했다. 한편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전두환과 휘하 부하들에 의해 권력이 장악되어 나간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알아챈 사람들은 많았다.[131] 이 때문에 최규하는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국민들에게 허수아비 대통령 운운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박정희는 직접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서 대권을 잡은 반면, 전두환은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정권 찬탈'이라는 오명을 벗기가 어려운 점이 있고, 5.16은 그나마 일부 집단으로부터 정치적 정당성이 있다는 식으로 미화되기도 하지만 12·12는 그런 것 일절없이 비난 받는다는 점도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8.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김영삼 전 대통령의 소신 증언 |
8.1. 내란행위에 대한 승인여부 (부정)[편집]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판시사항】
[1]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경우의 가벌성 여부(적극)【판결요지】
[1] [다수의견] 우리 나라는 제헌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의 근본이념 및 기본원리로 하는 헌법질서를 수립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헌법개정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한결같이 위 헌법질서를 그대로 유지하여 오고 있는 터이므로,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폭력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우리 나라의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따라서 그 군사반란과 내란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
위 판결문에서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라는 것은 선거 또는 투표를 뜻한다. 대한민국은 대의제 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 국가로서 선거 또는 투표가 아닌 폭력에 의한 불법적인 집권을 원칙적으로 부정한다.[132][133]
라. 피의자 전○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등을 통한 간접선거에 의하여 두 차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나 제5공화국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에 의하여 통과된 것은 그것이 비록 형식적으로는 당시의 헌법과 법률의 규정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진상이 은폐되고 계엄령 하의 강압적인 분위기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거나 국민의 의사를 정확히 반영할 수 없었던 대의기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어서 이를 가리켜 국민이 자유롭게 그들의 주권적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상태에서 피의자들의 이 사건 내란행위에 대하여 승인을 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피의자 노○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이 사건 내란행위에 의하여 창출된 제5공화국의 질서가 국민의 저항으로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국민의 의사에 따른 새로운 헌법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 진상이 정확히 규명되지 아니한 채 국민의 상대적인 다수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여 이로써 이 사건 내란행위에 대하여 국민의 승인이 있은 것으로 볼 수도 없다.
8.2. 통치행위에 대한 사법심사 가능성 (긍정)[편집]
통치행위에 대해서는 종래 대한민국 사법부와 법학계에서는 '고도의 정치적 결단'이라면서 사법심사에 대한 자제를 하는 것을 넘어서 사법심사를 부정하는 입장이었으나,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이 이뤄진 1997년 기점으로 사법심사를 긍정하고 있으며 특히 국민의 기본권 침해에 직접적으로 관련될 경우 사법심사를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다. 이 사건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이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은 아래와 같다.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판시사항】
[14]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행위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는지 여부(한정 적극)【판결요지】
[14] 대통령의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 행위는 고도의 정치적·군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행위라 할 것이므로, 그것이 누구에게도 일견하여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 것으로서 명백하게 인정될 수 있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러하지 아니한 이상 그 계엄선포의 요건 구비 여부나 선포의 당·부당을 판단할 권한이 사법부에는 없다고 할 것이나,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가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하여진 경우에는 법원은 그 자체가 범죄행위에 해당하는지의 여부에 관하여 심사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이 사건의 통치행위성이나 사법심사 가능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판단하지는 않았으나, 원론적인 입장은 아래와 같다. 참고로 아래 결정문은 김영삼이 실시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에 대한 판단이다.
가. 대통령(大統領)의 긴급재정경제명령(緊急財政經濟命令)은 국가긴급권(國家緊急權)의 일종으로서 고도(高度)의 정치적(政治的) 결단(決斷)에 의하여 발동(發動)되는 행위(行爲)이고 그 결단(決斷)을 존중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는 행위(行爲)라는 의미에서 이른바 통치행위(統治行爲)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통치행위(統治行爲)를 포함하여 모든 국가작용(國家作用)은 국민(國民)의 기본권적(基本權的)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한계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고,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는 헌법(憲法)의 수호와 국민(國民)의 기본권(基本權) 보장(保障)을 사명으로 하는 국가기관(國家機關)이므로 비록 고도(高度)의 정치적(政治的) 결단(決斷)에 의하여 행해지는 국가작용(國家作用)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국민(國民)의 기본권(基本權) 침해(侵害)와 직접 관련되는 경우에는 당연히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의 심판대상(審判對象)이 된다.
9. 형사재판 판결문으로 바라본 군사반란 당시 상황[편집]
가.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최세창, 장세동,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은 공모하여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하였다. (1)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체포) 1979.10.26.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세칭 '10·26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10.27.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됨과 동시에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된 국군보안사령부사령관 육군소장 피고인 전두환은 1979.12.12. 오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재 보안사령관 사무실에서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인사처장 겸 합수부조정통제국장이던 육군대령 피고인 허삼수에게 총기와 실탄을 준비하고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당시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육군대장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예상되는 총기의 사용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살해될 가능성이 있음을 피고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용인하면서 필요시에는 총기를 사용하기로 결심하였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이와 같이 체포하는 것을 국군통수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이 사전에 재가한 일이 없었고 국방부장관이 이를 승인한 일도 없었으며 구속영장이 발부되거나 군검찰관의 사전지휘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가) 피고인 허삼수는 피고인 전두환의 위 지시를 실행하기 위하여 당시의 합수부 수사2국장 육군대령 우경윤,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육군대령 성환옥, 수도경비사령부 제33헌병대장 육군중령 최석립, 육본 헌병대장 육군중령 이종민 등과 함께 1979.12.12. 18:00경 합수부 수사관 7명, 경복궁 구내 주둔 수경사 제33헌병대 3개 제대 병력 60여 명을 권총과 엠(M)16 소총으로 무장케 한 다음 18:50경 위 부대를 인솔하고 서울 용산구 한남동 소재 총장공관에 도착하여 공관주변에 위 병력을 배치시켰다. (나) 이어 피고인 허삼수와 우경윤은 19:10경 총장공관 응접실로 들어가 정승화 총장에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받아야 하겠으니 녹음준비가 되어 있는 곳으로 가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육군상사 박원철이 총을 들고 위협하는 가운데 피고인 허삼수와 육군소령 한길성이 함께 정승화 총장의 양팔을 붙잡고 강제로 끌고 나와 승용차에 태워 19:30경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하였다. (다) 이 과정에서 총장 수행부관 육군소령 이재천 등에게 합수부 수사관 육군소령 김대균, 육군소령 한길성, 육군상사 박원철 등이 총을 난사하여 위 이재천과 경호장교 육군대위 김인선 등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그들의 머리와 허리 등에 총상을 입히는데 그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2) (대통령에 대한 강압) 피고인 전두환은 (가) 1979.12.12. 18:20경 보안사 대공처 대공제2과장 겸 합수부 수사제1국장인 육군대령 피고인 이학봉과 함께 서울 종로구 삼청동 소재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박대통령 시해과 관련하여 정승화 총장에 대한 새로운 혐의사실이 발견되어 연행·조사하여야 하겠으니 재가하여 주십시오."라고 요구하였다. (나) 이 요구가 거절되자 20:20경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육군준장 정동호, 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 육군대령 고명승에게 지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시경 대통령의 승인이나 대통령 비서실과의 협의 없이 청와대 경비업무를 담당하는 제55경비대대 부대대장 육군소령 권중원 및 5분 대기조 24명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출동하여 20:40경 대통령 특별경호대장 육군중령 구정길과 그 대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그 곳 막사에 억류하고, 위 제55경비대대 2개 제대 병력 64명을 추가로 출동시켜 그 일대에 배치케 함으로써 국무총리공관을 장악하고 그 곳에 대한 출입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국무총리공관을 점거·포위하고, 이어 당시의 국방부 군수차관보 육군중장 피고인 유학성, 제1군단장 육군중장 피고인 황영시, 수도군단장 육군중장 피고인 차규헌 및 당시의 제71훈련단장 육군준장 백운택과 제1공수여단장 육군준장 박희도 등과 함께 1979.12.12. 21:30경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정승화 총장의 연행·조사에 대한 재가를 재차 요구하면서 최규하 대통령을 강압하였으나 재가가 거절되었다. (3) (구출병력의 동원) (가) 당시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육군대령 피고인 허화평은 1979.12.12. 19:35경 경복궁 구내 수경사 제30경비단의 당시 단장 육군대령 피고인 장세동에게 전화를 걸어 피고인 전두환이 정승화 총장의 체포·조사 문제를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국무총리공관에 가 있다고 알려 준 후 다시 피고인 허삼수로부터 정승화 총장을 서빙고분실로 연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하여 우경윤이 부상을 입었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다시 19:40경 피고인 장세동에게 전화를 걸어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였고 그 과정에서 총격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나) 피고인 장세동은 뒤에 보는 바와 같이 수경사 제30경비단 단장실에 집결해 있던 피고인 유학성 피고인 황영시 등에게 위 사실을 보고하고, 잠시 후 피고인 허화평으로부터 총장연행을 위하여 지원나간 제33헌병대 병력이 총장공관경비를 맡고 있는 해병대 병력에 포위되었다는 연락을 다시 받고는 위 병력을 구출하기 위하여 당시의 수경사 제33경비단장 육군대령 김진영과 의논한 뒤 그로 하여금 제33경비단 병력 대신 제30경비단 소속 5분대기 중대 병력 80여 명을 인솔하고 총장공관으로 출동하도록 하였다. (4) (병력동원의 준비) 12.12. 20:30경 육본에 집결한 육군참모차장 육군중장 윤성민, 국방부차관 김용휴, 수도경비사령관 육군소장 장태완 등의 정식지휘계통에서는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일부 피고인들에게 정승화 총장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피고인들의 부대복귀를 명령하였으나 피고인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군의 정식지휘계통에서는 피고인 등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휘하의 각 부대에게 그의 육성지시 없이는 출동을 하지 않도록 명하고 9공수여단 등에 출동준비를 명령하는 등 이를 진압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피고인들은 계엄지역에서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사전 승인을 받지 아니함은 물론 명시적인 병력출동 금지명령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지휘하에 있는 병력을 동원하여 육군 정식지휘계통을 공격하기로 하고 그에 앞서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따라 피고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할 가능성이 있는 부대의 출동을 막거나 늦추는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그에 따라 피고인 유학성은 정승화 총장 연행을 항의하는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의 전화를 제30경비단장실에서 받고 그에게 "장장군, 거 잘 알면서 왜 그래, 이쪽으로 와"라고 회유하고 다시 피고인 유학성은 1979.12.12. 21:00경부터 23:00경까지 사이에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국방부차관 김용휴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정승화 총장의 체포가 적법하다고 주장하면서 육본 측의 병력출동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고, 당시의 육군 제1군단장 육군중장 피고인 황영시는 22:30경 제6군단장 육군중장 강영식, 제26사단장 육군소장 배정도에게 전화를 걸어 병력출동을 만류하고, 그 시경 제30경비단장실과 보안사에 있던 당시의 육군 제9사단장 육군소장 피고인 노태우 등은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지시에 따라 출동할 가능성이 있는 각군 사령부, 제9공수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에 전화를 걸어 그 부대장이나 참모들에게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아 달라고 회유하여 각 부대의 출동을 사전에 저지하였다. 한편, 피고인 장세동은 전차에 포탄을 장전하는 등 대항체제를 구축하였다. 나. 피고인 박종규는, 피고인 전두환, 최세창 등이 위와 같이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고 육본정식지휘계통에 대항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피고인 최세창을 통하여, 피고인 신윤희는, 피고인 전두환 등과 조홍이 위와 같이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고 육본정식지휘계통에 대항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조홍을 통하여,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최세창, 장세동,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과 순차 공모한 뒤, 피고인들은 다음과 같은 행위를 계속하였다. (1) (육군본부와 국방부의 점령) 피고인 전두환은 이어 보안사령관 사무실에서 육군 정식지휘계통에 대한 선제공격을 결의하고 (가) 1979.12.12. 23:00경 제1공수여단장 육군준장 박희도에게 지시하여 위 박희도로 하여금 병력출동을 금지한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12.13. 00:05경 서울 강서구 공항동 소재 제1공수여단 연병장에서 제1, 2, 5, 6대대 병력 1,500여 명을 인솔하고 나와 육본 건물과 국방부 청사를 점령하게 하였다. (나) 제1공수여단 제5대대 제15지역대 소속 장병들로 하여금 국방부를 경비하는 병력과 총격전을 벌여 그 과정에서 초소에 근무하는 초병 육군병장 정선엽에게 총격을 가하여 정선엽이 사망하게 하였다. (다) 그 결과로 02:40경 국방부장관실에서 합동참모회의의장 육군대장 김종환 등 장성 8명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03:50경 국방부장관 노재현을 보안사로 연행하게 하였다. (2) (특전사령관의 체포) 피고인 전두환은 무장병력에 의하여 경호되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체포를 강행할 경우 총기의 사용으로 정병주 또는 그를 경호하는 사람이 살상될 수 있음을 알면서 이를 용인하는 의사로, 1979.12.12. 당시의 제3공수여단장 육군준장 피고인 최세창에게 1979.12.12. 23:00경 그의 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 육군소장 정병주를 체포하고 병력을 경복궁으로 출동시키도록 지시하여 (가) 위 최세창으로부터 다시 지시를 받은 제3공수여단 제15대대 대대장 육군중령 피고인 박종규로 하여금 그날 24:00경 서울 송파구 거여동 소재 특전사에서 위 15대대 소속 1개 지역대 병력 38명으로 사령부 외곽을 포위하고 육군대위 김홍열, 육군대위 나영조, 육군중사 신현수, 육군하사 성명불상 6명과 함께 안으로 진입하여 위 정병주를 체포하면서 비서실장 육군소령 김오랑에게 육군하사 성명불상 6명이 엠(M)16 소총으로 사격을 가하여 김오랑을 살해하고, 상관인 정병주의 팔 등에 총상을 입혀 살인미수에 이르렀다. (나) 피고인 최세창은 병력출동을 금지한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12.13. 02:00경 서울 송파구 거여동 소재 제3공수여단 연병장에서 2개 대대 병력 600여 명을 인솔하고 03:00경 경복궁으로 진주하였다. (3) (효창운동장의 점거) 피고인 전두환은 1979.12.12. 당시의 제5공수여단장 육군준장 장기오에게 1979.12.12. 24:00경 휘하 병력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라고 지시하고 이에 따라 위 장기오는 병력출동을 금지한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제5공수여단 제23대대장 육군중령 정낙준과 제26대대장 육군중령 장용주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고 정낙준, 장용주 등은 12.13. 02:00경 인천 북구 부평동 소재 제5공수여단 연병장에서 제23대대 및 제26대대 병력 480여 명을 인솔하고 용산의 삼각지에 도착하였다가 이미 육군본부와 국방부가 제1공수여단에 의하여 점령된 뒤이므로 다시 효창운동장으로 이동하여 진주하였다. (4) (수경사령관의 체포) 피고인 전두환은 1979.12.12. 당시의 수경사 헌병단장 육군대령 조홍에게 1979.12.12. 23:00경 수경사에 있는 육본지휘부와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도록 지시하여 (가) 위 조홍은 12.12. 23:30경 제30경비단에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육군중령 피고인 신윤희에게 전화를 걸어 당시 서울 중구 필동 소재 수경사에 모여 있던 위 장태완, 육군참모차장 육군중장 윤성민, 육본 작전참모부장 육군소장 하소곤, 합동참모본부장 육군중장 문홍구 등 육본측 장성들을 체포하라고 다시 지시하고, 피고인 신윤희는 12.13. 03:00경 헌병 55명을 지휘하여 사령부 외곽과 1, 2층 복도를 포위케 한 후, 03:40경 사령관실로 진입하여 장태완을 체포하고 윤성민, 하소곤, 문홍구 등의 권총을 빼앗아 그 무장을 해제하였다. (나) 그 과정에서 육군대위 한영수가 엠(M)16 소총 1발을 발사하여 하소곤에게 좌흉부관통상을 입혀 살인미수에 이르렀다. (5) (중앙청의 점령) (가) 1979.12.12. 당시 육군 제9사단장으로 근무하던 육군소장 피고인 노태우는 1979.12.12. 24:00경 제30경비단 단장실에서 당시의 제9사단 참모장 육군대령 구창회에게 전화하여 중앙청으로의 병력 출동을 지시하고, 이에 따라 위 구창회의 지시를 받은 제9사단 제29연대장 육군대령 이필섭이 병력출동을 금지한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12.13. 02:20경 경기 고양군 벽제읍 소재 제29연대 연병장에서 제29, 30연대 병력 1,300여 명을 인솔하여 03:30경 중앙청으로 진주하였다. (나) 당시의 제1군단장 육군중장 피고인 황영시는 보안사에서 1979.12.13. 00:30경 당시의 제2기갑여단장 육군준장 이상규에게 중앙청으로의 병력출동을 지시하고 이에 따라 위 이상규는 병력출동을 금지한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제16전차대대 대대장 육군중령 김호영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고, 김호영은 12.13. 02:30경 경기 파주군 금촌읍 아동리 소재 제2기갑여단 연병장에서 제16전차대대 전차 35대와 병력 180여 명을 인솔하고 나와 03:25경 중앙청으로 진주하였다. (6) (고려대학교의 점령) 피고인 황영시는 1979.12.13. 01:10경 보안사에서 당시의 제30사단장 육군소장 박희모에게 고려대학교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이에 따라 위 박희모의 지시를 받은 제30사단 제90연대장 육군대령 송응섭이 병력출동을 금지한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12.13. 03:30경 고양시 신도읍 삼송리에 집결한 제90연대 병력 1,100여 명을 인솔하고 나와 06:20경 고려대학교 운동장에 진주하였다. 다. (사전계획 등) (가)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최세창, 장세동,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은 그 동안의 수사과정에서 혐의 없음이 밝혀지긴 했지만 정승화 총장은 10·26 사건 당시 박대통령 피살 장소 부근인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의 본관 식당에 있다가 김재규와 육군본부로 동행한 사실로 인하여 일부 군인들 사이에 그가 위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김재규와의 관련 혐의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체포하여 그 지휘권을 박탈하고 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피고인 전두환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체포를 결심하게 되었다. (나)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는 위에서 본 육군참모총장의 체포에 앞서 1979.12.7.경 보안사에서 서로 만나 참모총장의 연행 조사 문제를 논의한 끝에 그 연행일자를 12.12.로 결정하고, 피고인 전두환이 보안사 대공2과장 겸 합수부 수사1국장 육군중령 피고인 이학봉에게 체포 장소 등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여 그 검토결과를 토대로 12.8.경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연행 장소로 결정한 후, 12.9.경 피고인 이학봉, 피고인 허삼수, 육본 헌병감실 범죄수사단장 겸 합수부 수사2국장 육군대령 우경윤 등에게 구체적인 체포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하여 그들이 계획을 수립하였고 그 계획대로 정승화 총장의 체포가 실행되었다. (다) 피고인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의 연행에 대응하여 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특전사령관 육군소장 정병주, 수경사령관 육군소장 장태완, 육본 헌병감 육군준장 김진기 등을 수경사 헌병단장 육군대령 조홍으로 하여금 12.12. 당일 만찬 초청 명목으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소재 상호불상 한정식집에 유인하여 부대 지휘를 사전에 차단하기로 계획하고 이에 따라 위 조홍이 위 장태완 등을 12.12. 18:30경 약속장소인 위 한정식집에 오게 하여 그들의 부대 지휘를 사전에 차단하였다. 라. (지휘부의 설치와 운영) 피고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그들을 지지하는 피고인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최세창 및 공소외 백운택, 박희도, 장기오, 김진영 등을 역시 그들을 지지하는 피고인 장세동의 제30경비단 단장실에 집결시켜 유사시 자신들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구성하기로 결의하고 피고인 노태우가 12.9. 피고인 황영시에게, 피고인 전두환이 12.7.부터 12.12. 오전까지 사이에 피고인 유학성, 차규헌, 최세창 및 공소외 백운택, 박희도, 장기오, 김진영 등에게 각 연락 또는 지시하여 12.12. 18:00경부터 19:00경까지 사이에 경복궁 구내 수경사 제30경비단 단장 피고인 장세동의 사무실에 피고인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최세창, 장세동 및 공소외 백운택, 박희도, 장기오, 김진영 등이 집결하여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지휘부로 기능하였다. 한편, 피고인 전두환은 피고인 허화평으로 하여금 당시의 보안사 정보처장 육군대령 권정달, 보안사 보안처장 육군대령 정도영 등과 함께 보안사 상황실을 거점으로 하여 각급부대 지휘관의 전화를 도청하는 등의 방법으로 부대동향과 병력이동상황을 파악하여 수시로 위 지휘부에 보고하였다. 마. 위에서 인정한 일련의 행위는 그 일부가 상관살해미수{나. (2) (가)}, 살인{나. (2) (가)}, 살인미수{가 (1) (다)}의 각죄를 구성하는 이외에 피고인들이 사전에 공모하여 작당하고 병기를 휴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경우에 포괄적으로 해당한다. 바. 그 중 피고인 전두환은 반란수괴의 역할을 담당하고 피고인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허화평, 이학봉, 장세동은 반란의 모의참여자로, 피고인 최세창, 허삼수는 반란의 지휘자로, 피고인 박종규, 신윤희는 반란의 살상자로 인정된다. |
10. 헌법재판소 결정문으로 바라본 군사반란 당시 상황[편집]
(상략) (1) 비상계엄 전국확대 전의 시국상황 (가) 정치·사회·학원 등의 동향 1979.10.26. 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당시 헌법규정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청구외 최○하 국무총리는 10.27. 04:00를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나, 그 후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하는 한편 청구외 문○환, 함○웅 등 재야인사들을 석방하고, 청구외 김○중에 대한 가택연금을 해제하는 등 민주회복을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런데, 피의자 전○환이 군내의 추종세력을 규합하여 1979.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청구외 정□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내 반대세력을 제거한 뒤, 그의 추종세력을 군요직에 중용시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980.4.14.에는 그 스스로 중앙정보부장서리직까지 겸임하자, 국민들 사이에는 민주화와 정치발전에 대한 비관론이 더욱 우세해졌다. (하략) |
11. 창작물[편집]
- 코리아게이트 4~6회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23년 12월 3일자 제1091회
12. 여담[편집]
- 당시 미 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육군 장성 30명 정도가 전두환을 제거하는 역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훗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에 대해서는 함구했으며, 병력 규모를 얼마나 갖췄는지 파악할 수가 없어 역 쿠데타를 반대했다고 한다. 이후 2021년 9월 16일에 역쿠데타를 주도했던 장군이 밝혀졌는데, 당시 국방부 방산차관보였던 육사 8기 이범준 중장이 미국 측에 역쿠데타를 제의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 5.16 군사정변에 이은 두 번째 쿠데타로 군인의 직급과 예우를 급격히 상승시켰다. 현재 일부 정상화되었지만 1958년대처럼 문민우위와 문민통제로 갈길은 아직 멀다고 볼 수 있다.
- 12·12 사태 10년 후인 1989년 12월 12일에 대대적인 증시 부양책이 발표되었다. 1989년 4월 1일 1009P를 고점으로 코스피 지수가 하락세를 띠었고 증시 침체가 가속화되자 투신권을 동원해서 무제한 매입을 시켰는데 덕택에 일시적으로 코스피 지수가 900P선을 다시 넘기도 했다. 그러나 약빨은 오래가지 못해서 결국 1989년 증시는 908P선으로 1985년 이후 전해 대비 하락세를 보였던데다가 다음 해에 주식시장은 거하게 망해서 600P선까지 밀려났다. 덕택에 증권가에서도 흑역사로 치는 사건이다.
-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평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내걸었을 때 하나회로 이루어진 군 상층부에서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당시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던 일을 상기시켜서 반대여론을 무마시켰다고 한다. 작전권 환수에 대한 의지는 박정희 정권 이후로 쭈욱 있어왔지만 공약으로 내걸고 공론화 시킨 것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실제로 평시작전통제권이 환수된 시점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이다.
- 12·12의 주요 사건들이 벌어진 장소는 수경사 30, 33경비단이 있던 경복궁 앞, 참모총장 공관이 있는 한남동, 국방부, 육군본부, 보안사 분실이 있던 용산구 지역이었다. 그런 관계로 유사시에 대비, 잔여 병력 차단을 목적으로 12일 밤 10시 계엄군은 한남동 주변 제3한강교를 비롯한 모든 한강 다리들을 접수한 후 차량 통행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때문에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앞두고 서둘러 한강 건너 퇴근하려던 시민들은 영문도 모르고 엄청 큰 불편을 겪었다고 하며 다음 날 아침 정승화 총장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또 한번 놀랐다고 한다.#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되자 각 한강다리 앞 뒤에 묶여있던 시민들은 그 추운 날씨에 걸어서 다리를 오갔으며 자정 넘어 통행금지 시간이 되자 집에 가지도 못하고 여관방 신세를 지는 등 고생 좀 했다고 한다. 다만 반란이 성공하자 이례적으로 한강 교량만 야간 통행금지를 풀어줘서 묶여있던 차량이 다니게끔 조치했다고 한다.
- 반란군(군사반란 책임자)들은 50세를 일기로 사망한 백운택[137], 70세에 사망한 유학성[138]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 80세를 넘겨서 장수한다거나 죽더라도 80세 넘어서 별세한 것이 특징이다. 사실 완전히 우연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 기본적으로 건강하고 체력 좋은 육사 출신 장교들이었던 데다, 하나회 가입 조건 중 하나가 우수한 육사 성적이었는데 사관학교에서 체력이 나쁘면 좋은 성적이 나올 수 없으므로 그중에서도 특히 더 체력이 좋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당장 두 주동자인 전두환과 노태우부터가 육사 동기들 중 체력으로 1, 2위를 다투었다고 한다. 특히 전두환은 미국으로까지 유학가서 미육군 특수전학교와 레인저스쿨을 수료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
-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 중 한 명인 유승민은 이 당시 김진영이 지휘하던 33경비단 소속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일개 병사 신분이라서 무슨 영향을 끼친 것은 전혀 없었다. 당시 유승민은 여자친구(현 아내인 오선혜)의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근처에서 복무하고 싶다는 이유로 당시 장포스로 유명한 장태완 장군이 엄격한 군기와 강한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알려졌었던 수도경비사령부에 자원해서 갔다고 한다.[139] 일등병 시절 평소처럼 군대에서 지내다 동기들에게 아군 간에 충돌이 일어나 특전사령관은 잡혀가고 이를 막으려던 특전사 장교가 사망했으며, 장태완 장군이 막으러 갔다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다음 날 노태우가 그 자리에 새로 취임했었다고 한다.[140] 이후 유승민은 김오랑의 보국훈장 추서를 추진해서 실현시켰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김오랑 기념사업회에게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 육참총장 관리관 반일부 준위는 사건 이후 딱히 처벌받거나 하진 않았지만, 일단 공관이 함락된 것을 해병대에 전화한 사실 때문에 눈칫밥을 먹었는지 사건 후 소리소문없이 전역해 택시를 몰며 살았다는 후문이 있다.
- 사건 40주기인 2019년 12월 12일에는 최세창, 정호용 등 쿠데타 주역들[141], 그리고 김장환 목사 내외와 함께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고급 중식당에서 인당 20만원씩 하는 호화만찬을 즐기는 모습이 공개되었다.[142] 반면 노태우[143]와 이미 사망한 자들을 제외한 쿠데타 주역 대부분이, 하필 12·12 쿠테타 40주년이 되는 날 옛 부하들과 모였다는 점에서 영상을 촬영한 정의당 임한솔 부대표는 만찬장을 나오는 전두환에게 쿠데타기념회가 아니냐고 질문했지만 전두환은 단순 친목회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임 부대표는 알츠하이머라는 전두환이 줄곧 큰 목소리로 대화를 주도했으며 각하 소리까지 나왔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이에 5.18 관련 단체들은 반성 없는 뻔뻔한 태도에 경악하여 비난성명을 내고 여론도 꾀병으로 법원을 농락하는 전두환을 제대로 법정에 세울 것을 촉구하고 있다.
13. 관련 문헌[편집]
1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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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볼드체는 주요 지휘관[2] 사실 계엄 상황에서 부대 운용은 계엄사령관 소관이지, 국방부장관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다만 이 때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진 부분계엄 상황이었기에 국방부 장관이 일선 부대를 지휘할 여지가 충분했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 대한 체포를 국방부 장관과 협의 뒤에야 허가할 수 있다고 한동안 버텼기 때문에 노재현 국방장관의 신병확보는 쿠데타의 분수령이 된다. 당시 국방부장관 공관과 육군참모총장 공관은 서로 붙어있었는데 육참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미8군 사령부 지하벙커로 가족들과 도피했다.[3] 12.12는 정승화 총장 연행에서 시작된 것으로, 계엄사령관인 정 총장이 납치되지 않았다면 반란은 애초에 성공할 수 없었다.[4] 왜 야전군사령관이 중장이냐면 이때는 야전군사령관이 되고 대장 진급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야전군사령관은 실질적으로 대장(진)이었던 셈.[5] 수기사 보안부대장에 의해 설득되어 출동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6] 26사단 보안부대장 김현 중령이 사단장실로 향하는 모든 통신선을 끊은 다음 양주를 들고 가 배정도에게 술을 먹였고 이후 배정도는 취해 곯아 떨어지며 출동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7] 수도권 공수특전여단 중 유일하게 갑종 출신이었다.[8]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겸직[9] 이후 그는 5.18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하여 무고한 광주시민들에게 직접 발포했다.[10] 진압군 측에 있는 곳들은 실 병력이 없는 육본과 사령부들이 주축이며, 실 병력이 있는 곳들은 진압을 위한 부대로 활용하고자 수경사에 배속을 요청한 곳들이다.[11] 수도권에 4개 공수여단(1, 3, 5, 9)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 9공수를 제외한 3곳이 모두 반란군이고, 특전사령부는 당시 3공수여단 영내에 위치했다. 한마디로 실 병력 하나 없는 무늬만 존재했던 것.[12] 현 수도방위사령부. 수경사령부 영내 소수의 병력과 야포병단, 방공포병단 정도만 장태완 사령관이 지휘하고 있었고, 제30, 33경비단과 헌병단 및 전차부대는 군사반란에서 하나회의 지휘 아래에 공수여단과 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최후에 수경사에 있던 장태완 사령관과 육본 지휘부를 무장해제한 것도 수경사 헌병단이며, 30경비단과 33경비단에는 반란군 수뇌부들이 저녁이 되기 전부터 모여있었다.) 그런데 원래부터 수경사의 평시 편제는 병력이 많이 있지도 않았는데, 그나마 있는 주요 병력이 모두 하나회의 통제하에 있었다. (장태완 소장이 나중에 쓴 글에서 수경사 장교 450여 명 중에서 50여 명만 있고, 390여 명이 반란군에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수경사가 진압군에 속하는지 알 수 없다.)[13] 훗날 제26기계화보병사단.[14] 해군본부 기동타격대, 각군 참모총장 공관에 배치된 해병대 경비대대. 당시 해병대는 박정희 前 대통령에 의해 해체되어 완전히 해군에 흡수된 상태였다. 계룡대로 이전하기 전 해군본부는 (당시 기준)관악구 대방동에 있었다.[15] 공군본부 기동타격대.[16] 현 서울특별시경찰청. 육군참모총장 공관 근처에서 총성이 있다는 신고로 출동.[17] 훗날 국군기무사령부, 현 국군방첩사령부[18] 현 국제평화지원단.[19] 현 제1경비단.[20] 현 제1경비단.[21] 훗날 제20기계화보병사단.[22] 현 제71보병사단.[23] 현 대통령경호처. 처음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총장 관저에서 강제 연행하도록 지원하고, 심지어 본인들이 지켜야 할 최규하 대통령이 있던 총리 공관을 포위하고 총리 공관을 경비하던 육군 헌병감실 소속 경비헌병들을 무장해제(당시 최규하는 대통령에 당선된 상태였으나 아직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지 않아 총리 공관에 있었고 경비는 헌병특별경호대장 구정길 중령이 이끄는 육군 헌병감실 소속 헌병 경호대가 맡고 있었다.) 시켜 외부와 단절시켰다. 정승화 납치에는 제33헌병대가, 최규하 고립에는 101경비단과 제55경비대가 동원됐다.[24] 반란 후 12월 24일, 당시 군에서는 "사망자 3명, 중상자 4명, 경상자 16명"이라 밝혔다. 그러나 부상자 20명이 모두 누구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어 아래에는 확인된 6명만 적었음. (출처: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35쪽)[25] 육군특수전사령관 비서실장 소령 김오랑, 국방부 헌병중대 병장 정선엽(반란군 1공수여단 5대대에 의하여)[26] 육군참모총장 전속부관 소령 이재천, 육군참모총장 경비소대장 대위 김인선,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소장 하소곤, 육군특수전사령관 소장 정병주[27] 청와대 경호실 33헌병대 일병 박윤관(참모총장 공관 경비 책임부대 해병대에 의하여)[28]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대령 우경윤(하나회 측 오인 사격),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여단 제15대대장 중령 박종규[29] 12·12 반란을 성공하고 군내 인사가 발표된 후인 1979년 12월 14일에 국군보안사령부 현관 앞에서 관련 인물들을 담은 사진이다. 박준병, 백운택은 사진 찍을 당시 없어서 이후에 편집해서 넣은 사진이다. 해당 인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나회 문서를 참조 바람.[30] 군에서 이러한 사조직을 구성하여 자신들이 군내 요직을 독식하는 것은 불법이다.[31] 1980년 12월 13일자 매일경제 기사엔 신현확의 입을 빌려 12.12 총격사건으로 언급되기도 했다.[32] 원래 최규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남이 돌다리를 두드려 건너는 것을 본 뒤라야 그 위를 건너는 사람', '특징이 없었던 점이 그의 특징이었다'라는 말을 정도로 무색무취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33] 계엄상황에서 수사업무는 보안사가 담당했고, 하필이면 당시 유신 정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3명 중 대통령과 대통령 경호실장은 사망했고 나머지 1명인 중앙정보부장은 사건의 피의자로 조사 대상자였다. 여기에 책상물림 공무원인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면서 국방장관과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 그리고 수사 총책임자이자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인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가장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국방장관이 노재현이었다는 점에서 사태는 이후 최악이 되었다. 실제로 전두환은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될 때까지만 해도 표면적으로는 차지철 경호실장 라인으로 행세하였지만 국군보안사령관이 된 이후부터 유사시에 보안사가 대통령경호실과 중앙정보부를 제어할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 살폈고, 10.26 이후 차지철 경호실장이 사망했고 경호 실패 책임으로 경호실의 2인자인 이재전 차장이 구속되고 3인자인 김복동 경호차장보도 지방으로 좌천되어 경호실의 4인자이자 하나회 멤버였던 정동호 상황실장이 경호실장 직무대리를 맡으며 전두환이 대통령경호실을 장악했고 비상계엄 선포에 따라 국군보안사령부를 중심으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면서 중앙정보부 역시 전두환이 장악하게 된다.[34] 윤필용 사건 참조[35] 본래는 정보활동과 아예 무관하지만 차지철의 월권행위를 통해 사설 정보 부서를 만들어 중앙정보부에 버금가는 정보활동을 하였다. 대부분 국가안보와는 관계가 별로 없는 정치권에 대한 사찰이나 민간 동향 파악 등 박정희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주로 캐냈다.[36] 당시에 직장인의 월급이 평균 10만 원, 서울 아파트 1채 값이 1000만 원이던 때였다. 2023년 평균 월급이 350만원 가량으로 저 당시 9억은 지금 화폐가치로 300억이 넘는 돈이었다.[37] 지금이야 요직인 제7기동군단장이지만 이 시절의 7군단, 아니 동해안경비사령관은 한직이었다. 군단급 기능사령부 주제에 보병여단 1개와 훈련단 1개, 예비군연대 1개가 전부였었기 때문. 대통령의 비호를 받아 최고 요직인 제1보병사단장과 국군보안사령관까지 역임한 전두환이 느닷없이 이런 보직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중장 진급 자체도 막혀버릴 수 있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38] 국방장관과 상의한 것은 정승화 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서 합수부장에 대한 인사권은 있었지만 보안사령관은 직제상 국방부장관 직속이었기 때문이다. 정승화 총장이 정말로 전두환의 보직이동 직책으로 동해안경비사령관을 생각했느냐는 데엔 논란의 여지가 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선 이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고 정승화 총장 본인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그렇게 밝혔으나, 노가원 씨의 저서 264일의 쿠데타에 따르면 정작 정승화 총장 본인은 이 사실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정 총장은 단지 합수부의 수사 중 벌어지는 전두환의 월권행위를 경계해 그의 경질만을 염두에 두었을 뿐 구체적인 보직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다만 백운택, 문홍구, 김병수, 최성택 등 수도권에 근무하던 주요 장성들과 당시 미 대사관 주재 무관인 제임스 V. 영은 11월 말부터 전두환의 동해안경비사령부 좌천 소문이 파다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정승화 총장의 발언 여부와 상관없이 전두환의 좌천 소문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39] 특히 장태완은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전두환의 손아랫동서이기도 했던 수경사 방공대대장 김상구 중령을 상관 모독에 업무태만으로 영창을 보낸 뒤 전역시켜버린 이력을 갖고 있어 전두환을 불만스럽게 했었다.[40] 그러나 정승화는 마치 자신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서 전두환 일당에게 당한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정승화 자신도 정치적인 중립을 어기면서 "김대중 씨가 (선거로) 대통령이 되더라도 군에서 비토(veto, 거부권 행사)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말하자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군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전두환처럼 노골적인 정치적 개입은 하지 않았지만, 정승화도 정치적 중립을 어긴 것은 마찬가지였다.[41] 사실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대한민국 육군본부에 갔으며,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후, 대통령의 저격에 의한 피살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숨기고 국방부장관에게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으니 자세한 경위는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보라고 했으며 차지철이 지휘했던 수경사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 김재규의 정권장악시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10.26 사건의 혐의자로 수사 선상에 오르는 빌미를 제공했다. 허나 결과적으로 정승화 총장의 혐의는 사실무근이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전두환 일당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나 노재현 국방장관의 재가 없이 사전에 무단으로 정 총장의 공관에 쳐들어갔으므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최규하 대행과 노재현 국방장관이 정승화 총장의 위에 있음에도 이들을 무시하고 하급자인 전두환이 무단으로 정승화 총장을 강제연행한 것은 명백한 반란이다.[42] 당시 정승화 총장에 대한 수사 결과 발표 내용은 이곳을 참조. 실제로 민주화 이후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재심이 이루어졌을 때 결국 정승화는 내란방조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는다. 애초에 당시는 최규하 권한대행이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하기로 예정된 상황이었고, 신현확 총리 이하의 내각도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정승화 총장이 혐의가 있었다고 한들 굳이 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밤중에 총까지 쏴대며 기습적으로 그를 연행할 필요성은 전혀 없었다. 정승화 총장은 계엄사령관이기는 했지만 철저히 내각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군인의 신분으로 내각을 무시하고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두른 이는 전두환 본인이다.[43] 현재 경복궁 태원전 자리[44]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이 자신의 라인으로 관리하던 곳이였다. 비록 배속은 수경사였으나, 대통령경호실의 통제를 받던 곳이기에 이런 행위가 가능했다. 훗날 민주화 이후 두 부대는 축소 통합되어 제1경비단이 된다. 지금도 제1경비단은 수도방위사령부 소속이나 실제로는 대통령경호처가 관리하다시피 한다.[45] 전두환의 직속 오른팔이었던 허삼수가 방문한다고 하면 의심받을 것이기에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육군 보병대령을 사칭해서 권 대령이 총장님을 잠깐 방문하겠다고 연락했다. 그래서 사태 초기에는 정보처장이던 권 대령이 진압군 측으로부터 욕을 먹었다. 권정달은 이후 5.17 내란의 계획을 작성함으로써 신군부의 정권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46] 물론 먼저 재가를 받지 않고 왔으므로 구라였다.[47] 당시 한남동은 외무부장관,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육·해·공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 공관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기에, 여러 단체의 병력들이 기동타격대로 운용되고 있던 것이다.[48] 공관의 혼란한 상황을 보고 받은 뒤 일단 아군끼리의 무력 충돌은 피해야겠다는 판단에서 모든 무장병력의 복귀 명령을 내린 것이다.[49] 골프 회동후 노재현 장관은 김용휴 국방차관에게 의견을 물었고, 김 차관은 2시간 만에 즉시 전두환에게 달려가서 귀띔해준다.[50] 서대문구 연희로15안길 33-10 자리.[51] 우국일은 쿠데타 사실은 전혀 모른 채 다른 장군들을 대접하며 이들을 초대한 당사자인 전두환이 왜 이렇게 늦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훗날 우국일은 김영삼 정부의 전두환, 노태우 사법처리 때 증인으로 출석해, 이들의 군부와 정권 장악 움직임을 증언하기도 했다.[52] 김진기 헌병감이 연회에 참석하기 전 연회장 전화번호를 헌병감실에 알려놓고 나와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53] 이후 신윤희는 전두환 측에 회유되어 진압군 지휘부를 체포하는 만행을 저지른다.[54] 이때 보고를 듣던 장태완 사령관이 이들의 안하무인격 행보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보고를 중지시키고 줄담배를 연거피 피워댈 정도였다.[55] 흔히 장포스로 대표되는 "야, 이 반란군 놈의 새ㄲ야! 니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니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어!"라는 말을 남겼다고 잘 알려져 있고 장태완의 회고록에도 비슷하게 전차를 몰고 가서 박살내 버리겠다는 맥락으로 말했다고 적혀 있지만, 보안사 녹취록으로 남은 실제 발언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56] 당시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 준장,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작전과장 고명승 대령은 모두 하나회 소속.[57] 당시 총리공관 경호대장은 육군 중령 구정길[58] &하나회[59] 여단장 (하나회) 준장 박희도[60] 여단장 (하나회) 준장 최세창[61] 여단장 (하나회) 준장 장기오[62] 이날 수경사령관 체포작전을 주도한 수경사 헌병부단장 중령 신윤희는 하나회 멤버가 아니었으나 반란군 측에 회유된 상태였다. 이후 신윤희는 소장 계급으로 헌병감을 지내 제대로 반란의 댓가를 받았고 이후 12·12를 적극 변호하는 책을 내기까지 했다.[63] 원래 진압군 지휘부는 국방부에 있었으나 실병력을 지휘하기 용이한 수경사로 지휘부를 이동했다.[64]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육군헌병감 김진기,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안종훈 등[65] 16기 이필섭. 이때 공로로 훗날 합참의장[66] 연대장 김봉규. 이때 공로를 세우긴 하였으나, 이건영 군 사령관에게 병력 이동을 보고하는 바람에 별을 못 달았다.[67] 30사단장 소장 박희모는 육군본부의 진압 명령을 받았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전두환 측에 가세했다. 이후 제90기계화보병여단을 거쳐 2020년 12월 부대해체.[68] 2기갑여단장 준장 이상규는 하나회 멤버다.[69] 주한미군사령관이 겸직[70] 현 해병대 2사단[71] 참고로 그 당시 9여단은 5여단과 함께 인천 부평에 위치해 있었고, 80년대 중반경에 부천으로 이전했다.[72] 당시 9공수여단은 1개 대대를 제외한 나머지 대대가 모두 훈련 나가 있었기 때문에 당장 이용할 차량이 없어, 인근 3군지사에 차량 지원을 요청하여 차량을 지원받아 일단 부대에 있던 1개 대대만을 서울로 출동시켰다.[73] 5.18 민주화운동 때 시위대 진압을 거부한 중장 윤흥정(당시 전투교육사령관 겸 계엄사 전남지역 분소장)의 친동생이다.[74] 1공수가 행주대교에서 지체되고 있었는데, 한강의 다리들 중에서 행주대교를 제외한 나머지는 수경사 통제하에 있었다. 비록 수경사 주력병력은 반란군이었지만, 수경사 사령관 소장 장태완의 지시가 먹히는 곳이었다. 당시 행주대교는 30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장 소장은 만약을 위해서 다리 봉쇄를 부탁하였지만, 이를 도청한 보안사의 1공수 통과요구를 수용하였다. 강변북로, 자유로가 잘 닦여있는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행주대교까지 우회한다고 해서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나 할 수 있지만 당시까지 강변북로는 양화대교까지만 개통되어 있었고 행주대교까지의 구간은 80년 1월에 착공예정이었다. (이후 82년 7월 개통) 아울러 당시나 지금이나 경복궁에서 1공수여단까지의 최단루트로 볼 수 있는 성산로의 경우도 성산대교가 아직 개통되지 않았을 때였다.(성산대교는 80년 6월에 개통) 당시 박희도가 최단시간 내에 경복궁에서 1공수 여단까지 가는 길은 양화대교를 건너 공항로를 거치는 루트였는데 양화대교를 통과할 수 없다면, 합정동에서 방향을 틀어 연희동, 수색을 거쳐 화전 30사단 앞을 지나 행주대교까지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수색을 거치는 길 역시 수색을 지나면 구불구불한 예전 왕복 2차선 국도였다. 수색에서 고양시까지 이어주는 중앙로가 완공된 것은 90년대 일산신도시가 들어서게 되면서다.[75] 경복궁에 앉아 있는 면면들을 살펴보면 국방부 군수차관보인 유학성은 지휘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것 없고, 수도군단장 차규헌도 한강 이남의 부대들이니 동원해도 전력상 아주 도움이 되지는 않으나, 1군단장 황영시는 예하에 1, 9, 25, 30사단과 2기갑여단이 있는데, 이 중에 9사단과 2기갑 일부는 실제로 동원되었다. 물론 이 부대들 모두 3군사령관의 통제하에 있지만, 명령이 무시되고 있었다. 여기에 특전사 예하 4개 공수여단 중 반란군 통제하에 있던 3개 공수여단은 이미 동원 중이였고, 수경사 예하 30, 33경비단과 헌병단은 사건 당시에 알게 모르게 반란군이 통제하고 있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육본 측이 본인들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진압군 측에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 수경사 부대 대부분이 이미 반란군 측에 있었으며, 시가전 특화부대인 공수여단도 3/4이 반란군 측에 있었다. 적의 부대가 더 확장되는 것을 막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대 자체가 거의 없었다. 공수여단 없이도 수경사와 특전사는 반란군이 마음만 먹으면 점거가 가능했는데,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76] 실제로 노태우는 신사협정이 불발되고 수경사와 9공수가 30경비단에 들이닥칠 경우 자살할 생각까지 했다고 회고에서 밝힌 바 있다.[77] B2 벙커는 북한군과 전면전을 벌일 때 HQ로 쓰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당연히 대한민국에 있는 방호시설 중에서도 최상위급 방어력을 갖춘 곳이고, 수경사 사령부보다 훨씬 방어력이 높을 수밖에 없다. 즉 방어태세만 잘 갖추면 그 어떤 부대도 넘보기 어려운 곳이다. 그 때문에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 육본 수뇌부가 B2 벙커를 버리고 수경사로 이동했다는 말에 전두환이 매우 기뻐하는 모습이 묘사되었다.[78] 참고로 노재현 장관은 예비역 대장에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모두 거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어리석은 행보를 보인 것은 장군으로서의 자질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한 꼴이었다.[79] 다만, 상기했다시피 단순히 낚였다기보다는 서울에서 아군끼리 유혈사태를 벌이면 안보에 큰 위험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80] 정승화 총장이 납치로 인해 유고상태였으므로, 육본의 2인자인 그가 반란군 진압의 최고책임자가 됐다. 그럼에도 전술했듯 반란군과 '신사협정'을 맺고 안일하게 대응하다가, 결국 반란군에게 상황을 정리당하고 만다. 이렇게 반란군에게 미온적으로 대응했기에 신군부의 바지사장이 되어 1군사령관, 합참의장 등을 거쳐 국방장관에까지 올랐다.[81] 이때 회군 명령을 늦게 했더라면 부천IC에 진입하여 일단 서울까지는 가서 회군했어야 한다.[82] 방공포병이 운용하는 대공 발칸은 지상 사격이 가능하나, 포구조임쇠 등을 지상 사격이 가능하도록 교체하는 등 지상 화력 지원을 위해선 제반 준비가 필요하다. 게다가 방공진지들의 특성상 대항공기 사격을 상정해 배치되지 지상 사격 시의 사각을 고려하진 않으므로, 제대로 지상 표적을 공격하려면 결국 위치를 옮겨야 하며 청사 지상, 정문에 대한 사각 또한 확보해야 된다. 적 지상군과 조우할 위급상황은 대비할 시간이라도 있지, 쿠데타란 이 급박한 상황에서 이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83] 게다가 육군본부의 B2 벙커는 방어시설은 탄탄했으나 방어병력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고, 육군본부의 수뇌부들은 모두 수경사로 옮겨간 상태였다.[84]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소장으로 진급 후 56사단장을 지내고 예편했다. 하지만 하늘도 이 작자가 김오랑을 살해한 것에 대해 격분했는지 2010년에 식도암으로 사망했으며 향년 67세였다.[85] 명동역과 충무로역 사이 퇴계로에 있던 소규모 관광호텔로 당시 수경사령부 주둔지(현 남산골한옥마을)의 코앞이다. 아스토리아 호텔은 2015년에 철거된 뒤 재건축해 현재 '디어스 명동'이라는 이름의 호텔로 영업 중이다.[86] 토우미사일은 유선유도 형식이라 시가지에서 끊어지기 쉬워서 참모들이 동원을 반대하였으나, 육탄공격을 각오한 마당에 그런거 따질 장태완 사령관이 아니었다.[87] 전차는 엔진 소음으로 인해 무전기 소리가 매우 크게 세팅되어있다.[88] 이들도 전두환에게 포섭된 상태였다.[89] 뒤로 중앙청이 보이고 경복궁 담장은 일제에 훼손된 채 그대로 남아있다. 경복궁 남쪽 담장이 복원된 건 2010년의 일이다.[90] 후일 12·12 공판 당시 신현확 당시 총리의 진술에 의하면 서명 시각은 12월 13일 오전 5시 10분이었으며, 전날인 12일 밤에 이루어진 정승화 총장 체포가 재가 이전에 벌어진 불법행위임을 명시하기 위해 기지를 발휘한 조치였으리라고 밝혔다.[91] 열대 지역인 베트남에서 온수샤워를 했던 것은 기본이고, 다른 부대원들은 정글에서 죽어나는데, 테니스만 치고 있다는 비토를 받았다. 그나마 이 정도면 똥대령 수준에서 끝났겠지만, 무기밀매로 적성 무기를 획득해 전공으로 둔갑시킨 것은 군인으로서 기본이 안 된 행위였다.[92] 10.26 이후 처음에는 중정부장 김재규의 농간으로 경호실장 차지철이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되면서 대통령 경호실이 사실상 무력화 되었으나, 전두환이 합수부장으로 있으면서 조직이 다시 재건되었다.[93] 1군단은 4개 사단(1, 9, 25, 30사단)과 2기갑여단을 거느리고 있는 부대로서 일부 병력이 직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94]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 33헌병대장 최석립 등[95] 부분 계엄이라 국방부 장관이나 계엄사령관이 정국을 지휘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96] 당시 긴급조치는 헌법조차도 무력화시킬수있는, 왕의 어명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권한을 가지고 국군통수권자라는 위치를 이용하면 반란군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장태완도 훗날 MBC에서 "불충한 말인 것은 알지만, 최규하 대통령이 '반란군 진압해' 한 마디만 했어도 진압할 수 있었다" 라는 식으로 말을 하며 원망을 드러냈다. 그만큼 장 장군에게 있어서 최상급자인 대통령의 명령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97] 며칠동안 곡괭이 자루로 두둘겨 맞고 물고문까지 당했다고 한다.[98]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박정희를 암살하고 뛰쳐나온 김재규에게 육본으로 가자고 한 것도 정승화였으며 김재규 체포 명령을 헌병감 김진기에게 하달한 것도 정승화였다. 자세한 내용은 10.26 사건 문서를 참조.[99] 이들 5명 외에 진압군 측에서 결사 항전한 사람으로는 육본 작전부장 하소곤이 있는데 공수부대가 들이 닥쳤을 때 권총에 손을 뻗었다가 흉부 관통상을 입어 병원으로 실려 갔다. 12.12 당시 유일한 장군 부상자. 그리고 왜 서빙고에 끌려가지 않았나 모르겠는데 안종훈 육본 군수참모부장은 장태완 사령관이 탱크로 밀어 붙이자고 했을 때 유일하게 찬성한 사람이다. 이 정도가 진압군 측 강경파들이고 나머지는 양다리 걸치거나 흐리멍텅. 대표적으로 진압군을 이끌던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이 양다리였고, 김종환 합참의장과 류병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흐리멍텅.[100] 이때 미국에 갖다바친 조공 중의 하나인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항목을 참조. 그 이후 또 한번의 조공으로 민간 로켓까지 제한당해버렸다. 이는 한국의 우주 개발에 심대한 타격이 되어버린다. 결국 이 지침은 41년이 지난 2021년 문재인 정부 시기에야 폐기되었다.[101]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카터의 외교정책과 전반적으로 성향이 맞지 않았고, 박정희가 독자적인 핵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추진하면서 한미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102] 대표적으로 1982년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있다.[103] 혹은 아들의 의문사, 그리고 직접적인 친분은 없지만 사건 당시 사망한 김오랑 소령의 아내가 몇년 후 실족사라는 무언가 구린 냄새가 나는 사망을 하자 남은 가족이라도 지키기 위해 때를 기다리며 몸을 숙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104] 보통 소장 1차 보직은 사단장이다. 사단장을 못 하면 중장 진급은 사실상 불가능하다.[105] 해당 보직은 21세기에 들어 합참 작전부장, 육본 정보작전지원부장과 더불어 중장 진급 가능성이 높은 소장 보직이다.[106] 이 외에도 육군본부 교훈참모부장 소장 채항석, 육군본부 작전참모차장 소장 안철원, 육군본부 예비군참모차장 소장 이호봉, 국방부 인력차관보 소장 유병하 , 민사군정감 소장 신정수, 제2관구사령관 소장 정상만, 제3관구사령관 소장 김종구, 제5관구사령관 소장 김명수, 육군교육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백윤기, 제1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박승옥, 제2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곽응철,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김수중, 육군대학 총장 소장 김한용, 포병학교장 소장 박재종, 제2훈련소장 소장 이필조, 제2훈련소 부소장 준장 김병삼, 육군 행정학교 교수부장 준장 정우봉, 육본 감찰차감 준장 장영돈 등이 옷을 벗어야 했다.[107] 80년 8월 27일 ~ 88년 2월 24일[108] 88년 2월 25일 ~ 93년 2월 24일. 사실 노태우는 논란이 있지만 13대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된 것이니 전두환과 동렬로 서기에는 부적절한 감이 있다. 해당 선거에서 수상한 투표용지, 인주가 발견된 상황이 있었지만 이건 뭐 선관위가 일을 제대로 못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구로구청 선거부정 항의 점거농성 사건에서 구속된 시민들이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받긴 했으나, 13대 대선이 부정선거라서 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경찰이 과잉진압을 해서 피해를 입었기에 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다만 해당 문서에서 보듯, 이후 개표된 구로구 부재자투표함에서는 노태우 표가 74%로 구로구 전체 개표결과인 28%와 비정상적으로 차이가 나는 등 군사정권에서 그래왔듯 부재자투표가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존재한다.[109] 사실 10.26 이후 중앙정보부는 보안사령부를 위시한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강도높은 수사가 이루어지면서 그 영향력이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이후 제5공화국 정부가 출범하고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될 때까지 중앙정보부는 사실상 허수아비가 되어버린다.[110] 박정희 2년 7개월, 전두환 10개월[111] 수경사령관과 마찬가지로 군사정권 최고 요직이었다.[112] 본인이 고사했다는 설도 있다.[113] 야전군 사령관 중 최고 요직인 3군사령관을 지낸 황영시와 유학성에 비해 야전군 사령관 중 제일 한직인 2군 사령관을 지냈다.[114] 이후 소장이 보임되는 군수관리관을 거쳐 군무원 보직이 되었다.[115] 일단 71사단장 자체는 말년 준장이 보임되는 한직이다.[116] 1976년 전두환의 간청을 받아 1공수여단장이 될 수 있도록 적극 후원했던 점, 1978년 무장공비의 1공수여단 위수지역 통과사건에 보직해임 위기를 맞은 박희도를 정병주가 당시 육군참모총장 대장 이세호 앞에서 간곡히 간청하여 구해줬던 두 번의 은혜를 배신한 셈.[117] 하지만 수도사단장은 요직이 맞다. 물론 애매한 포지션인 수도군단장은 그렇다 쳐도 교육사령관 자체는 중장 중에서도 한직이다.[118] 당시 취임식 전이므로 총리 공관에 있었다.[119] 심지어 경호실장을 하며 준장에서 소장을 거쳐 중장까지 갔다.[120] 당시에는 정부의 군 개혁으로 군령권이 주어져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명예직이 아니었다.[121]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7조 2항: 전직 대통령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금고 이상의 형 포함)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제6조제4항제1호(경비 및 경호)에 따른 예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에 따른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하지 아니한다.[122] 경호, 경비가 제외되지 않는 이유는 납치에 따른 국가기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함이다.[123] 물론, 법령상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받지 못한다고는 되어있지만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직 대통령 이름으로 사열을 받기도 한 것을 보면 실질적으로는 크게 차이는 없었다. 물론 이 사열 때문에 한때 정치적으로 문제가 발생한 적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124] 정확히 말하자면 영호남[125] 이것이 약간 애매한데 2공화국은 내각책임제로서 비록 대통령이 윤보선이었지만 총리였던 장면이 정부 수반으로 정권을 운용하는 체계였다.(지금의 독일을 생각하면 쉽다.) 5.16 정변이 일어나자 정부 수반인 장면은 도주하였지만 대통령 윤보선과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활동하는데 특별한 제재가 없었다.(5.16 기록을 보면 윤보선은 미국 대사, 미군 사령관과 접견하고 그들로부터 정변 진압을 요구 받지만 거절한다. 또한 장도영은 5.16 이후 장면 내각의 업무를 대행할 군사혁명위원회(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의 의장으로 추대 받고, 대통령 윤보선으로부터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다.[126] 그러나 10.26 관련 사건 조사 차원에서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헌병까지 불러서 통제(중정은 수장이 대통령 암살범이라는 약점이 잡혔고, 계엄령 하에서 경찰은 상식적으로 계엄사가 통제하여야 한다. 여기 당시에는 군검찰이 별도로 없었고, 사건을 보안사가 조사하고 있었으며 또한 헌병은 몇몇 제외하고는 하나회 통제 하에 있는 곳이었다.)한다고 할 수 있지만, 12·12 이전에 이미 정부 각 부서의 차관들을 불렀다는 내용을 생각해보면 이미 정권을 장악했다고 볼 수도 있다.[127] 이때 전두환은 전국적인 계엄을 내리도록 국무회의 의결을 종용했는데, 토론은커녕 확인도 없이 '8분 만에' 의결 처리되었다.[128] 대통령 취임까지 따지면 10개월[129] MBC 드라마 제5공화국 1화에서도 나레이터가 이를 언급한다.[130] 단, 10.26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계엄령이 발령되어 있었는데, 계엄 상황 속에서 이를 관리해야 할 육본과 주요 부대장들이 반란에 의한 교체가 된 상황 자체는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다고 봐야 한다. 국회가 개원하여 계엄을 해제하여 상황을 종료할 방책이 있다는 점에서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국회 개원을 막고자 한다면 못 막을 것이 없다. 그리고 이미 충정 훈련이라고 해서 각 부대에 시위 진압 훈련을 시행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만 않았다.[131] 실제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됐던 구호가 바로 '전두환 물러가라'였고 한편으로는 '김대중 석방'도 있었다.[132] 여기서 '저항권, 혁명은 괜찮은 것이냐'는 의문점이 나올 수 있는데, 자연권을 긍정하는 입장(결단주의, 통합주의)으로 보자면 당연히 주권자인 국민은 천부적으로 저항권, 혁명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 행사가 가능하다는 견해이고 반면 자연권을 부정하는 입장(법실증주의)으로 보자면 실정 헌법에라도 저항권, 혁명권이 명시되어 있어야 하는데 만약 없다면 그 행사가 불가능하다는 견해이다.[133] 참고로 저항권은 국가 내부의 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집권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134] 역사의 역류 12.12 상하편.[135] 12.12 군사 쿠데타 I~VI편.[136] 정확히는 29연대와 30연대 1개 대대[137] 1982년 1군단장 취임 직후 사망.[138] 1997년, 재판 도중에 사망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139] 이 때문에 당시 유승민의 동기들은 유승민이 근무했던 그 시절의 수경사는 장태완 장군의 영향으로 군기가 엄했기 때문에 굉장히 빡센 군생활을 했었다고 평했다. 당시 장태완 장군 밑에서 일하던 자들의 수기를 보면 확실히… 오죽했으면 대선 당시 유승민의 편을 든 수경사 동기들이 유승민은 특전사 출신인 문재인 못지않은 빡센 훈련을 받았던 자라 문재인 후보에게 군 쪽으로 꿀리지 않는다고 했을 정도로 장태완 장군 시절의 수경사의 엄격한 군기와 강도 높은 훈련이 장난 아닌 수준이었다고 한다.[140] 묘한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닌데, 신임 수경사령관인 노태우가 자녀(시기상 노재헌으로 추정)의 과외병을 뽑으려고 똑똑한 병사들을 추렸을 때 후보들 중에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중 입대한 유승민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당사자의 극구 거부로 과외병 자리는 다른 병사에게 돌아갔다고.[141] 다들 전 前 대통령을 각하라고 높여부르며 윗사람 대우를 했고 정호용만 '두환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둘이 사적으로는 육사동기인데다가 5공 내내 요직을 시킬 정도로 친한 친구사이여서 가능한 일로 보인다.[142] 코코넛 제비집, 양등심 탕수육 샥스핀, 와인 등이 포함된 고가의 메뉴이다. 불도장을 세트와는 별개로 주문하기는 했으나 테이크 아웃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불도장은 좀 빠르게 준비하라고."[143] 다만 노태우는 지속적으로 5.18 관련해 사죄한다는 표현을 하고 있어서 다른 12·12 주모자들과는 선을 사실상 긋고 있다. 게다가 본인부터가 이미 오늘내일 할 정도로 골골대고 있던 상태이기도 했다.[144] 2020년에 영화로도 개봉됐으나 영화는 10.26 사건까지의 사건들만 다루고 있어 12·12 군사반란에 대한 내용은 마지막에 몇줄의 문장을 제외하면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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