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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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컴 회고록에 대한 盧載鉉ㆍ柳炳賢의 反論 : 월간조선


03 2000 MAGAZINE

위컴 회고록에 대한 盧載鉉ㆍ柳炳賢의 反論


우종창 woojc@chosun.com

①美 8군 벙커內 崔圭夏-盧載鉉의 대화는 진실인가?
②한국군 장성에 의한 「反全斗煥 쿠데타 제의」는 新軍部측의 工作이 아니었을까?


●崔대통령권한대행이 鄭昇和 총장을 비난했다는 위컴의 기록은 기억에 의존한 것인가? 녹음에 의존한 것인가?
●12ㆍ12 사태 후, 위컴은 사전 예고도 없이 찾아온 한국군 중장으로부터 역쿠데타 모의를 들었다고 했으나, 글라이스틴 회고록에는 위컴이 미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주모자를 만난 것으로 돼있어 차이가 난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위컴 前(전) 駐韓(주한) 미군사령관이 쓴 「벼랑에 선 한국-12·12 사건에서 광주봉기, 1979~1980」이란 회고록에 등장하는 국내 일부 인사들이 『나와 관련된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 회고록의 신뢰성에 부분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12·12 사태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盧載鉉(노재현·74)씨는 『12·12 그날 밤, 내가 美(미) 8군 지하 벙커에서 崔圭夏(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전화통화를 하고, 이어서 全斗煥(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통화한 후 국방부에 간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과 통화한 내용과 당시 정황에 대한 위컴의 기록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10·26과 12·12 사태 때 韓美(한미) 연합사 부사령관으로서 사령관인 위컴 장군을 보좌하고, 1980년의 5·17, 5·18 때는 합참의장으로서 위컴을 상대했던 柳炳賢(유병현·77) 장군은 영문판 회고록을 읽은 뒤, 『내 기억과 비교할 때 위컴이 사실을 잘못 알고 쓴 부분이 상당히 있다』며 『위컴 장군은 옛 자료에 충실하려고 애를 썼으나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柳炳賢 장군은 위컴이 회고록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분별력 있는 장교이며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영자 신문과 잡지 등을 술술 읽었다. 힘겨운 몇개월간, 나는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에 대한 柳대장의 성실하고 명석한 자문을 지켜보면서 역시 훌륭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그는 나의 가장 친한 한국인 친구』라고 소개했던 사람이다.

위컴 회고록은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암살에서부터 全斗煥 대통령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긴박했던 순간들을 미국측의 입장에서 쓴 기록이다.

위컴 자신도 회고록 서문에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군사쿠데타에 대한 광범위한 사례연구이며, 한국 국민들이 당시의 사건들을 균형있는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썼다』고 했다. 그러나 등장 인물들이 『일부 내용은 무책임한 기록』이라 비판함에 따라 논란의 소지를 남겼다.


▲ 柳炳賢 당시 합참의장


위컴 회고록에서 새로 밝혀진 내용은 1979년 12·12 그날 밤 盧載鉉 국방장관이 美8군 지하 벙커에서 미군 통신망을 이용, 崔圭夏 대통령권한대행과 전화통화를 했으며 이 통화에서 崔대통령권한대행은 보안사 수사관들의 심문에 불응한 鄭昇和(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행동은 잘못이라고 말했다는 부분이다.

위컴은 통화 내용을 盧장관 바로 옆에서 들었다고 했는데 崔대통령권한대행이 그런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14만 페이지에 이르는 검찰의 5·18 수사기록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다.

崔대통령권한대행은 검찰 수사에도 불구하고 12·12와 관련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12·12 그날 밤, 全斗煥 그룹이 鄭총장 연행에 대한 결재를 요구했을 때 국방장관과 같이 와야 결재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崔圭夏-盧載鉉 간의 전화 통화가 이뤄진 시점은 鄭총장 연행에 대한 대통령권한대행의 결재가 나기 전이다. 崔대통령 권한대행이 결재도 하기 전에 鄭총장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2·12 사태에서 全斗煥 그룹이 병력 동원을 결심한 것은 鄭총장 연행에 대한 대통령의 결재가 계속 미뤄져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崔대통령권한대행의 결재가 떨어진 것은 1979년 12월13일 오전 4시경이며, 이로서 12·12 사태는 종료되었다.


위컴은 한국말을 몰라


前 국방장관 盧載鉉씨는 기자가 보여준 위컴 회고록에서 자신이 崔圭夏 대통령 권한대행과 전화 통화한 대목을 소리내어 꼼꼼히 읽고 난 뒤, 껄껄 웃으며 『위컴이 사실을 잘못 알고 제 마음대로 썼다』고 말했다. 盧장관은 『지하 벙커에서 있었던 통화 내용은 위컴 회고록과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盧장관은 12·12 그날 밤, 자신이 국방부가 아닌 美 8군 벙커로 가게 된 과정과 벙커 도착 후 있었던 일을 이렇게 말했다.

『鄭昇和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울린 후(편집자 注:국방장관 공관과 육참총장 공관은 1백m 거리에 있어 보안사 요원들의 鄭昇和 총장 연행 과정에서 발생한 총성을 盧장관은 공관에서 들었다) 국방부로 가고 있는데, 수도경비사령부에서 탱크를 출동시켜 국방부를 공격한다는 첩보를 육군본부에서 입수했습니다. 사건 초기라 상황 파악이 잘 안됐어요. 장관인 나를 수도경비사령부로 모시고 가겠다는 참모도 있었지만, 너희들만 가라고 하고 국방부로 가고 있는데 柳炳賢 장군이 韓美연합사에 잠시 들르는 게 좋다고 건의해서 거기로 간 것입니다.

지하 벙커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처음 한 일은 3군사령관(李建榮 중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 명령 없이는 절대로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라는 지시였습니다. 그 다음에 崔圭夏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전화를 걸라고 지시했습니다. 軍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해 국방장관으로서 대통령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데 보안이 되는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韓美연합사 통신망은 감청 방지 장치가 부착돼 있습니다. 누구에게 지시 내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대통령 권한대행 집무실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崔대통령 권한대행과의 통화 내용에 대해 盧장관은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盧載鉉:국방장관입니다. 진작 전화를 드려야 되는데 보고가 늦어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崔圭夏:어떻게 된 거요?

盧載鉉:아직도 구체적인 상황 파악을 다 못했습니다. 상황 파악 후, 제가 올라가서 직접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崔圭夏:그러면 내가 기다리겠소>


지하 벙커 안의 「상황반」


盧장관은 『통화 내용은 이게 다요. 다른 얘기는 아무 것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다음은 盧장관과의 일문일답.

―崔대통령 권한대행이 혹시 鄭昇和 총장 연행 件(건)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까.

『내가 올라가서 보고를 하겠다고 했으니까 묻지 않았어요』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鄭총장 연행의 재가를 요청하는 결재서류를 들고 대통령을 찾아왔다는 말도 없었습니까.

『그런 말도 없었어요』

―全斗煥 보안사령관과 전화통화를 하라고 崔대통령 권한대행이 권유하기는 했습니까.

『그런 일도 없었다니까요』

―崔대통령 권한대행과 전화 통화를 할 때 위컴 장군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전화한 곳은 통신시설이 구비된 지하 벙커 안의 조그만 사무실입니다. 韓美연합사 사령관인 위컴 장군은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아래에 글라이스틴 駐韓 美대사가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들 앞에서 통화를 했기 때문에 내용은 들었을 겁니다. 그 당시 내가 흥분하고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컸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위컴 장군은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위컴 장군은 12·12가 나기 5개월 전에 부임했는데, 나는 국방장관으로서 일주일에 한번씩 위컴 장군과 조찬을 같이 해서 그를 잘 압니다. 위컴의 전임자인 베시 장군은 유머 감각도 풍부하고 한국말도 잘하는 분이지만, 위컴은 깔끔하고 성격도 까다롭고 유머가 없는 장군이었습니다. 한국말도 모르는 위컴 장군이 어떻게 그렇게 보고 들은 것처럼 회고록에 쓸 수가 있습니까.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미군 통신선을 이용했기 때문에 미국이 통화 내용을 녹음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 해도 崔대통령권한대행과 통화한 내용은 그게 전부입니다』

崔圭夏-盧載鉉 간의 전화 통화가 이뤄진 美 8군 지하 벙커는 韓美연합사가 관장한다. 출입증을 가진 사람만 들어갈 수 있으며, 유사시엔 출입자 통제가 더욱 엄격하다고 한다. 전화 통화가 이뤄진 무렵에 盧장관 근처에 있었던 사람은 위컴, 글라이스틴 駐韓 美대사, 金鍾煥 합참의장, 柳炳賢 韓美연합사 부사령관 등이다.

柳炳賢 장군은 당시 지하 벙커 내부의 정황을 이렇게 말했다.

『지하 벙커는 1백평 규모인데 7~8개의 방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위컴, 글라이스틴, 盧載鉉, 金鍾煥 장군과 내가 있었던 곳은 지하 벙커 안에서 제일 중요한 「상황반」입니다. 이곳에는 미국 본토는 물론, 한국군 全부대와 연결된 통신시설이 구비돼 있으며, 청와대와 직통 전화도 설치돼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통신은 감청이 불가능합니다. 盧載鉉 장관은 「상황반」에서 崔대통령권한대행과 통화했고, 그 방에 있었던 사람들은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柳炳賢 장군에게 崔圭夏-盧載鉉 간의 전화 내용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柳장군은 『국방장관과 육참총장이 그 당시 지휘계통상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1군 사령관과 3군 사령관이 서울에서 일어난 일을 韓美연합사로 문의했습니다. 尹興基(윤흥기) 공수여단장도 무슨 일 때문에 출동명령이 떨어졌느냐는 전화를 나에게 걸었습니다. 이런 전화에 응대하느라 국방장관이 崔대통령권한대행과 전화한 것은 알고 있지만 통화 내용은 다 듣지 못했습니다』고 하면서, 그러나 『내 판단으로는 위컴이 회고록에 쓴 대로의 대화는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柳장군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崔대통령권한대행이 국방장관에게 「鄭昇和 총장이 보안사 수사관들의 심문에 불응하고 자신의 보좌관들에게 총격을 지시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는데, 통화가 이뤄진 시점에는 12·12 사태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崔대통령권한대행이 무슨 정보를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는지가 첫번째 의문입니다.

두번째는 崔대통령권한대행의 성격입니다. 그분은 돌다리를 건널 때 남이 먼저 건너가게한 뒤에 건너갈 만큼 신중합니다. 워낙 신중하고 처신을 조심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평판에 대해 결코 코멘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분이 鄭총장의 행동이 잘못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세번째는 위컴 장군이 한국말을 못알아 듣는다는 점입니다. 당시 韓美연합사 전화는 모두 녹음되었고, 위컴이 당시 상황을 기록한 것은 사실이지만 위컴이 한국말에 능통한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통화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유사시엔 위컴 장군의 부관이나 통역관은 지하 벙커 출입을 제한받습니다. 나는 위컴 장군에게 통화 내용을 통역해주지 않았습니다』

柳장군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위컴이 20년 전의 일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柳장군은 『위컴 회고록에 보면 盧장관과 金鍾煥 합참의장이 지하 벙커를 떠나 국방부로 갈 때 내가 동행했고, 그 동행 과정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위컴의 착각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지하 벙커에 있었던 글라이스틴 駐韓 美대사는 위컴에 앞서 발행한 그의 회고록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서 盧載鉉 장관이 지하 벙커에서 全斗煥 보안사령관과 통화한 내용은 언급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崔圭夏-盧載鉉 통화에 대해서는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盧載鉉-全斗煥 통화 내용 검증


盧載鉉 前 국방장관은 자신이 崔대통령 권한대행과 통화를 한 후, 全斗煥 보안사령관과 통화를 했는데 그 내용도 위컴 회고록에는 전혀 다르게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盧載鉉-全斗煥 통화에 대해 위컴 회고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계속 주저하기만 하던 盧載鉉 국방장관과 金鍾煥 합참의장은 결국 全斗煥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그 측근들과 통화하기에 이르렀다.

통화가 점점 격렬해지자 쿠데타 주동자중 누군가가 盧장관에게 『입닥쳐!』라고 소리지르며 자기들 이야기나 잘 들으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盧장관은 몹시 화가 난 듯했지만 수화기를 꼭 잡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하략)>

盧載鉉 장관은 『이 부분도 사실과 맞지 않는다』면서 『자기(全斗煥)가 아무리 쿠데타 주역이라 해도 그 당시에는 나한테 뭐라고 말할 처지가 못되었다. 全斗煥이와 몇 마디 통화도 하기 전에 兪學聖(유학성)이가 전화를 나꿔채 兪學聖과 통화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盧장관은 全斗煥 보안사령관과 나눴던 통화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全斗煥:장관님, 당황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盧載鉉:거기에 누구누구가 있느냐? 거기서 뭘하고 있느냐?

全斗煥:몇 분이 있습니다(全사령관은 참석자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갑자기 兪學聖(유학성·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부)씨가 나타났다고 한다)

兪學聖:장관님, 여기에 몇 사람이 모여 있는데 여기로 오실 수 없겠습니까?

盧載鉉: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너희들이 나한테 보고할 사항이 없느냐?

兪學聖:보고할 게 있습니다.

盧載鉉:그렇다면 장관인 내가 있는 여기로 와야지.

兪學聖:장관님, 이곳으로 오십시오.

盧載鉉:(고함을 치며) 그게 무슨 소린가? 당장 이곳으로 와. 全斗煥이 한테 물어보고 나한테 와서 보고하라.

兪學聖:8군 벙커는 저희들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盧載鉉:내가 전화를 끊고 국방부 장관실에 올라가 있을테니 장관실로 와. 나도 崔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가야 돼>

대화 내용을 소개한 盧載鉉 장관은 『통화 내용은 이게 전부이고, 고함은 내가 쳤다』며 『그들을 국방장관실로 오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전화를 끊은 후, 바로 지하 벙커를 떠나 국방부 장관실로 갔다』고 말했다.

―위컴 회고록에 따르면 全斗煥 그룹은 장관님과 전화 통화에서 鄭昇和 총장의 체포동의서에 서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하는데요.

『그런 요구는 없었습니다』

―또 위컴 회고록에 따르면 全斗煥측은 계엄사령관 자리에 자신들이 준비한 李熺性(이희성) 장군을 앉힐 것을 요구했다는데요.

『그런 건의도 없었습니다. 나한테 결재맡으러 와야지 내가 어떻게 거기(보안사)에 가느냐고 고함친 후 내가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외에는 全斗煥측 사람과 전화 통화한 일이 없어요』

―장관께서 美 8군 지하 벙커에 머무르고 있을 때, 위컴 장군은 12·12 사태의 전말을 파악하고 있었습니까.

『내가 있을 때만 해도 위컴 장군 역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위컴 장군은 어떤 유형의 군인입니까.

『한 5개월 정도 접촉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盧載鉉 前 국방장관은 『역사적 사실은 정확히 기록될 필요가 있다』면서 『위컴 회고록 중 사실이 아닌 부분은 검증해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위컴은 회고록에서 「全斗煥 보안사령관과 전화 통화를 끝낸 盧載鉉 장관이 계속 지하 벙커에 머물고 있다가 국방차관의 전화를 받고 마지못해 국방부로 갔다」고 했으나, 글라이스틴 前 駐韓 美대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통화 후 盧장관과 金鍾煥 합참의장은 위컴 사령관과 내 만류도 뿌리치고 국방부로 돌아갔다」고 써, 사실관계에서 차이가 났다.


글라이스틴 회고록의 역쿠데타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회고록에서 똑같이 12·12 쿠데타 이후 역쿠데타 모의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상당히 차이가 난다. 위컴은 역쿠데타 주역이 「아침 일찍 연락도 없이 韓美연합사 사령관실을 찾아왔다」며, 찾아온 날짜도 밝히지 않았다. 글라이스틴 회고록에는 역쿠데타 주역이 위컴을 찾아간 것은 1980년 2월14일이며, 연락도 없이 찾아간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위컴이 역쿠데타 주역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글라이스틴 회고록에는 역쿠데타 부분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80년 1월 마지막 주, 약 30명의 장성급 장교들이 全斗煥 제거를 모의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며칠 후 고위 전투 지휘관을 지낸 한 인사가 우리에게 접근해왔다. 그는 한국군 장교단의 反(반)全斗煥 분위기를 전하면서 非육사 출신 장교들의 90%와 육사 출신 장교 50%가 全斗煥에 반대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다른 정보원을 통해 反全斗煥 그룹이 미국의 지원을 바라고 있으며 우리가 만난 인사를 자신들의 리더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컴과 브루스터(편집자 注:당시 美 CIA 한국지부장), 그리고 나, 우리 세 사람은 미묘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우리는 정보가 누출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면서 거사계획의 상세한 내용 파악에 나서는 한편,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한번은 보안을 위해 위컴의 차 속에서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1980년 2월1일, 나는 워싱턴에 반란 장성들에 대한 대응 지시를 요청하면서 거사계획과 지원 요청을 통보받은 마당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12·12 사태보다 더욱 심각한 사태가 초래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모든 당사자들에게 미국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전과 같은 경로를 통해 우리는 우리와 접촉했던 인사 및 불만 장교들에게 별도로 회신을 보냈다. 그들이 실망한 것은 당연했다. 우리의 메시지가 전달된 뒤인 1980년 2월6일, 나는 崔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그 문제와 관련된 아무런 정보도 보고받지 못했다면서 우리의 정보 능력을 치하하며 우리가 취한 조치가 현명했음을 인정했다.

약 1주일 후, 위컴이 워싱턴에서 돌아오자 우리는 부정적인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에게 접근했던 인사를 그가 직접 만나야 한다고 결정했다. 2월14일 위컴이 그 인사를 만났을 때 그는 계획이 취소되었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틀 후 위컴은 全斗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군부가 더 이상 불안해질 경우의 위험을 강조했다. 그는 12·12에 반대하는 장교들에 대해 우리가 어느 정도 강경하게 대응했는지 알려주면서 민간정부를 넘보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했다>

역쿠데타 모의는 12·12 직후부터 나돌았다. 역쿠데타 모의자로 지목되었던 사람은 국방부 방위산업 담당 차관보 李範俊(이범준) 장군이다. 李장군은 육사 8기생으로 당시 중장이며 영어에도 능통했다. 李장군은 기자와 전화 인터뷰에서 자신은 역쿠데타 주모자가 아닌데도 오해를 받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12·12 이틀 후인 1979년 12월14일, 나는 美8군 영내에서 미군 장성과 점심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사전 약속이 없었던 위컴 장군이 나타났습니다. 세 명이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위컴이 12·12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12·12는 대세이기 때문에 미국이 무력을 동원해 저지하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은 12·12를 인정해야 한다」고 위컴에게 말했습니다.

그날 내가 美8군 영내에서 위컴과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보안사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12·12 직후의 아주 민감한 시기여서 보안사는 대화 내용을 파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보안사 중령이 내가 위컴에게 12·12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며 내 말을 거꾸로 보고하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나는 역쿠데타 주동자로 지목돼 1980년 4월1일, 갑자기 예편되고 말았습니다. 예편 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중에 위컴이 全斗煥 대통령에게, 12·12 직후에 있었던 점심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정확히 전달해 오해가 풀렸습니다. 덕분에 全대통령으로부터 훈장도 받았습니다』

李範俊 장군은 『역쿠데타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라고 말했다.

위컴은 역쿠데타 주모자의 신분과 관련, 「서울에 배치된 육군 중장으로 영어에 능통하고 강인한 인상의 장군」이라고 밝혔다. 예비역 장성들에 따르면 1980년 초에 이 조건을 구비한 장군은 ▲육군 참모차장 黃永時(황영시) 중장 ▲1군단장 金潤鎬(김윤호) 중장 ▲777 부대장 金OO 중장 ▲수도군단장 朴魯榮(박노영) 중장 등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예비역 장군은 『역쿠데타 주모자를 굳이 꼽는다면 全斗煥 그룹에 협조했지만 全斗煥과 사이가 좋지 않은 金모 중장이다. 그는 駐美 한국대사관 무관을 지냈기 때문에 영어도 잘하며 위컴이나 글라이스틴과도 친했다. 인상도 강인한 분이다. 그러나 보안사 요원들의 감시 속에서 역쿠데타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金모 중장이 위컴이나 글라이스틴을 만난 것은 역쿠데타를 모의하기보다는 12·12 사태에 대한 미국측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金모 중장은 노환으로 입원중이어서 인터뷰가 불가능했다.

역쿠데타 모의가 있었다는 위컴과 글라이스틴의 회고록 내용에 대해 柳炳賢 장군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가능성이 몹시 희박한 일』이라고 말했다.

柳장군은 『12·12 사태가 나기 전에는 군의 질서와 군의 자세에 대해 장교들의 불만이 높았다. 10·26 당시의 鄭昇和 총장이 행동이 이상하다는 말도 있었고, 金載圭(김재규) 사건 수사가 끝났으면 합수부가 해체돼야 하는데 왜 그대로 남아 있느냐, 全斗煥 합수부장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불만도 있었다. 그러나 12·12를 기점으로 全斗煥 그룹이 군을 장악해 역쿠데타 가능성은 희박했다』고 말했다.

柳장군은 『위컴 회고록대로라면 몇 가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柳장군의 설명이다.

『모르는 사람이 사전 약속도 없이 남의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軍의 격식상 아주 드문 일입니다. 위컴의 방은 부속실을 통해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고 부속실 근무자는 모두 미군인데, 한국군 중장이 약속도 없이 찾아가서 만났다는 것은 상례를 벗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얘기가 끝난 후에 위컴이 현관까지 따라 나가 배웅했다고 하는데 사령관이 현관까지 배웅하는 일도 아주 드문 일입니다.

때문에 全斗煥 그룹이 12·12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역쿠데타 모의가 있는 것처럼 하여 위컴에게 접근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12·12 당시 보안사 참모장이었던 禹國一(우국일·72) 장군은 『12·12 이후 보안사는 주요 지휘관의 부관이나 보좌관에 보안사 요원을 배치해 동태를 감시했다』며 『그 당시 역쿠데타 모의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禹장군은 『국회 해산과 전국 계엄확대를 논의한 1980년 5월17일의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유일하게 반대한 사람은 安宗勳(안종훈) 군수기지사령관이었다』며 『全斗煥 그룹에 대항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대장들의 회의」와 全斗煥


위컴은 회고록에서 1980년 5월의 光州 문제에 全斗煥 前 대통령이 개입돼 있다는 주목되는 기록을 남겼다. 그 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다.

<5월21일, 光州(광주)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연합사령부와 미국 대사관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광주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걸어온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도 있었다. 나는 光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柳炳賢 합참의장을 찾아갔다. 그는 全斗煥과 周永福 (주영복) 국방장관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과의 중요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중략).

周永福 장관, 全斗煥과의 회의 때 柳炳賢 합참의장은 光州의 상황을 진압하는 데 군이 성급하고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또한 柳炳賢 합참의장은 해질 무렵까지 광주 시내에서 군을 완전 철수시키자는 제안도 내놓았다. 周永福 장관과 全斗煥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했다>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등이 光州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에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참가했다는 것은, 全斗煥 전 대통령이 光州 문제에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全 前대통령은 검찰 조사에서도 光州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는데, 위컴 회고록이 사실이라면 全 前 대통령은 그동안 거짓말을 해온 셈이다. 柳炳賢 장군은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말했다.

『光州 문제는 전투교육사령부(CAC)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모든 책임은 CAC에서 책임져야 하지만 군사시설인 광주비행장과 그 인근인 木浦(목포) 해군 경비사령부의 경비 강화가 필요했습니다. 해상을 통한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합참의장인 내가 육·해·공군 참모총장은 물론,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과 해·공군의 주요 대장들을 회의에 소집했습니다. 참석자들의 계급이 모두 대장이기 때문에 「대장들의 모임」이라 불렀습니다.

국방장관실 옆에 차트를 걸어놓고 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입수하는 정보는 군사 정보로 제한돼 있기 때문에 全斗煥 보안사령관으로 하여금 보고토록 했습니다.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보고를 위해 이 회의에 한두 번 참석한 일은 있습니다. 그는 중장이었기 때문에 정식 회의 멤버가 아니고 일종의 옵저버라 보면 됩니다.

軍을 광주 시내에서 철수시키자는 것은 그 회의에서 내가 제안한 것입니다. 李熺性(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좋은 생각이라며 지지했습니다. 李熺性 사령관이 CAC 사령관 蘇俊烈(소준열) 장군에게 지시를 내려 시행된 것입니다. 위컴 회고록대로 全斗煥 보안사령관의 동의 아래 이뤄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위컴은 회고록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결성 후, 柳炳賢 장군은 나에게 자신이 全斗煥 그룹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柳炳賢 장군은 『위컴의 오해』라고 말했다. 柳장군은 『盧泰愚와 鄭鎬溶 장군은 내가 군단장일 때 내 밑에서 연대장을 지냈기 때문에 자문을 구하러 온 일이 있는데 이것을 위컴은 영향력 행사라고 오해했다』고 말했다. 柳장군은 『나도 보안사의 감시를 받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全斗煥이 대위일 때 나는 장군이었소』


『12·12 다음날, 鄭鎬溶 장군이 내 방에 찾아왔기에 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혁명은 하기가 쉽지만 朴正熙 대통령만큼이나 훌륭한 장군이 있소, 없소. 朴대통령이 예편할 때 나같이 불행한 장군은 나 혼자로 족하다는 말을 했소. 무슨 일을 하더라도 헌법 절차에 의해서 하라고 했어요. 이 말이 보안사에 들어가지 않을 리 만무하지요. 그후 내 사무실에 보안사 요원이 상주했고, 내 방에 찾아온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어요.

全斗煥 장군을 내가 부하로 데리고 있었던 적은 없지만, 5·16 후 全斗煥 장군이 육군 대위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일할 때 나는 장군이었고 최고회의 위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었지만 나는 그들을 대변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柳炳賢 장군은 결론적으로 위컴 회고록에 대해 『양호한 글이기는 하지만 우수한 작품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위컴 회고록에서 「약삭빠르고 교활한 인물」로 묘사된 全斗煥 전 대통령은 閔正基(민정기) 비서관을 통해 『대응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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