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충공 감독의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다큐멘터리>
오충공 감독의 관동대지진 관련 다큐멘터리 제3편이 9월 2일 일본 히비야도서관 컨벤션홀에서 상영된다고 합니다. 평생을 바쳐 제작한 소중한 작품입니다.
<제1편> '감춰진 손톱자국'(1983년),
<제2편> '불하된 조선인–관동대진재와 나라시노수용소'(1986년)에 이어
대망의 3부작이 완성된 것입니다.
무려 40여년에 걸친 감독님의 삶이 녹아든 대하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사진 한 장이라도 철저한 검증을 거친 열정이 돋보입니다. 또한 작품에는 제작의 원동력이었던 故 강덕상 선생님의 유지가 반영되었습니다. 그동안의 열정과 수고에 경의의 마음을 바칩니다. 자세한 정보는 도착하는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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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회 수상] 1923년 관동대학살을 다룬 오충공감독의 세번째 영화를 후원해주세요by 오충공활동소개 전체포스트
https://juspeace.net/shop/item.php?it_id=1691568692&ckattempt=1

2023년 저스피스가 주최하는 제25회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자가 된 영화감독 오충공은 지난 40년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이란 주제로 관객들과 소통하며 아픈 역사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오충공감독은 1955년 재일동포 2세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민족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두 편의 영화
26세 때 일본 영화학교에 입학, 1982년 졸업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감춰진 손톱자국 :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학살>를 제작해 1983년에 발표했습니다. 3년 뒤인 1986년에는 두 번째 작품 <불하된 조선인 : 나라시노 수용소>를 제작, 발표하였습니다.
이 영화들은 일본 정부가 부정하고 있는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며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겨 현재까지도 귀중 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두 편의 영화는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며 조선인 학살의 진상규명에 또 하나의 길을 열었습니다.

첫번째 영화, <감춰진 손톱자국>에서 당시 참상을 증언하는 생존자 모습. 인터뷰하는 오충공감독
오충공 감독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도시가 파괴되고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보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새 작품을 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2023년 관동대지진 100주년에 맞춰 발표하고자 준비 중인 세 번째 작품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부정>은 제작 과정에서 희생자 유가족 10여명을 찾아내는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2021년 타계한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을 비롯한 연구자들의 연구사를 기록하는데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

영화제작 뿐 아니라 유가족과 생존자를 찾고, 역사자료를 모으는 활동을 하는 오충공감독.
오로지 진상규명을 향해 달려 온 40년 세월
오감독의 지난 40년 세월은 일본 각지의 조선인 학살지를 찾고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증언을 모으며 영화를 만드는데 오롯이 바친 시간이었습니다. 첫 영화를 만들 때 청년이던 감독은 이제 장년이 되었지만 진실을 쫓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그의 열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이 사건과 희생자들을 역사로 기억하고, 가해자들의 사과가 이뤄져 후대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25회 지학순정의평화상 기념식에서 오충공감독

저스피스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1923년 학살 당시 상황을 그린 일본 아이들의 그림을 설명 중인 오충공감독
저스피스가 주최하는 지학순정의평화상 올해 수상자이자 지난 40년간 1923년 관동대지진과 한국인 학살의 진실을 파헤쳐 온 재일동포 오충공영화감독은 이를 소재로 올해 세 번째 영화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부정>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오충공감독의 세번째 영화에 많은 관심과 후원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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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학살 100년 그의 카메라에 담겼다[사람IN]
[사람IN] 40년간 관동대지진(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기록해온 오충공 감독은 “그때 기록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기억이 있다”라고 말한다. 올해 8월 관동대지진 100년을 맞아 기록 다큐멘터리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 부정〉 개봉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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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회 수상] 1923년 관동대학살을 다룬 오충공감독의 세번째 영화를 후원해주세요by 오충공활동소개 전체포스트
https://juspeace.net/shop/item.php?it_id=1691568692&ckattempt=1

2023년 저스피스가 주최하는 제25회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자가 된 영화감독 오충공은 지난 40년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이란 주제로 관객들과 소통하며 아픈 역사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오충공감독은 1955년 재일동포 2세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민족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두 편의 영화
26세 때 일본 영화학교에 입학, 1982년 졸업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감춰진 손톱자국 :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학살>를 제작해 1983년에 발표했습니다. 3년 뒤인 1986년에는 두 번째 작품 <불하된 조선인 : 나라시노 수용소>를 제작, 발표하였습니다.
이 영화들은 일본 정부가 부정하고 있는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며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겨 현재까지도 귀중 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두 편의 영화는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며 조선인 학살의 진상규명에 또 하나의 길을 열었습니다.

첫번째 영화, <감춰진 손톱자국>에서 당시 참상을 증언하는 생존자 모습. 인터뷰하는 오충공감독
오충공 감독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도시가 파괴되고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보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새 작품을 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2023년 관동대지진 100주년에 맞춰 발표하고자 준비 중인 세 번째 작품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부정>은 제작 과정에서 희생자 유가족 10여명을 찾아내는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2021년 타계한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을 비롯한 연구자들의 연구사를 기록하는데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

영화제작 뿐 아니라 유가족과 생존자를 찾고, 역사자료를 모으는 활동을 하는 오충공감독.
오로지 진상규명을 향해 달려 온 40년 세월
오감독의 지난 40년 세월은 일본 각지의 조선인 학살지를 찾고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증언을 모으며 영화를 만드는데 오롯이 바친 시간이었습니다. 첫 영화를 만들 때 청년이던 감독은 이제 장년이 되었지만 진실을 쫓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그의 열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이 사건과 희생자들을 역사로 기억하고, 가해자들의 사과가 이뤄져 후대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25회 지학순정의평화상 기념식에서 오충공감독

저스피스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1923년 학살 당시 상황을 그린 일본 아이들의 그림을 설명 중인 오충공감독
저스피스가 주최하는 지학순정의평화상 올해 수상자이자 지난 40년간 1923년 관동대지진과 한국인 학살의 진실을 파헤쳐 온 재일동포 오충공영화감독은 이를 소재로 올해 세 번째 영화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부정>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오충공감독의 세번째 영화에 많은 관심과 후원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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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학살 100년 그의 카메라에 담겼다[사람IN]
[사람IN] 40년간 관동대지진(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기록해온 오충공 감독은 “그때 기록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기억이 있다”라고 말한다. 올해 8월 관동대지진 100년을 맞아 기록 다큐멘터리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 부정〉 개봉을 앞두고 있다.
김영화 기자다른기사 보기입력 2023.03.29
호수 810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수십 년간 기록해온 오충공 감독이 제25회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시사IN 신선영
“(그 조선인에게) 어떻게 죽는 방법이 좋은가 묻자 ‘눈을 가리고 총으로 쏴줘’라고. 막대기를 줄지어 세워두고 3명을 한 명씩 한 명씩 총으로 쐈지….” 일본인 노인 기미즈카가 카메라 앞에서 범행 사실을 털어놓자, 객석이 고요해졌다. 1923년 관동대지진(간토 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에 관한 가해자 증언이다. 당시 일본 계엄군이 ‘보호’ 명목으로 조선인 3500명을 나라시노 수용소에 이송한 후, 인근 마을 자경단에 조선인 15명을 ‘불하(팔아넘김)’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소학교 3학년 때 조선인이 나무에 묶여서 죽임당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할머니의 증언도 이어진다. 증거가 남지 않도록 시체를 불태우는 일은 “경찰 입회하에” 이뤄졌다.
1986년 다큐멘터리 〈불하된 조선인〉은 일본과 한국, 미국 등에서 1200회 이상 상영됐다. 일본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낳았다. 이미 40년 전이라 카메라 앞에 선 일본인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증언은 필름에 남았다. 영화를 찍은 오충공 감독(68)은 “그때 기록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기억이 있다”라고 말한다. “일제 식민지 때 재일조선인 200만명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끌려온 사람들도 많다. 그 역사를 일본인 학자는 안 쓴다. 재일조선인이 안 쓰면 누가 하겠는가?” 재일동포 2세인 그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실을 40년간 기록해오고 있는 이유다. 3월10일 제25회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수상했다. 인권 탄압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하는 이들에게 매년 주어지는 상이다. 올해 9월1일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된다.
처음엔 그저 사건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1983년 요코하마 방송영화전문학원에 다닐 당시, 관동대지진 때 매장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한다는 뉴스를 봤다.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그는 곧바로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유골이 나오지 않았다. 〈독립신문〉 기록을 보면 학살된 희생자는 6661명. 유족은 나타나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학살이 정부와 관계없는 문제라고 일관했다. 한국 정부는 무관심했다. “유족을 찾는 게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찾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분이 언제 일본에 갔고 어떻게 일하다가 죽었는가, 그리고 유골은 어디에 묻혔는가.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비극의 책임을 묻고 싶었다.” 일본 관동(간토) 지방 각지에 매몰된 조선인 추도비는 물론이고 일본 순사의 증언, 주민 목격담을 조각조각 모았다. 그의 오랜 노력 끝에 당시 생존자인 조인승 할아버지가 증언을 시작한다. 이 이야기가 1983년 다큐멘터리 〈감춰진 손톱자국〉에 처음 담겼다.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을 위해 3월 초 한국을 찾은 그는 일정이 빠듯했다. 올해 8월 개봉될 영화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 부정〉 제작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한국을 오가며 유족 14명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다. 30년 만에 다시 카메라를 잡은 이유는 그간의 변화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매년 9월1일 일본 도쿄에 있는 요코아미초 공원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몇 년 전부터 맞은편에서 우익단체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폭행한 일본인들을 위한 위령제를 열고 있다.” 아베 정권부터 역사 수정주의 바람이 크게 불면서 조선인 학살을 은폐·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커졌다. 차기작에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집요하게 파고들 예정이다. “역사를 바로 알자는 목소리를 반일로 매도해선 안 된다.” 101년, 102년이 되어도 영화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오충공 감독의 말이다.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young@sisain.co.kr#오충공 #불하된 조선인 #관동대지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지학순정의평화상 #감춰진 손톱자국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 부정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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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수십 년간 기록해온 오충공 감독이 제25회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시사IN 신선영
“(그 조선인에게) 어떻게 죽는 방법이 좋은가 묻자 ‘눈을 가리고 총으로 쏴줘’라고. 막대기를 줄지어 세워두고 3명을 한 명씩 한 명씩 총으로 쐈지….” 일본인 노인 기미즈카가 카메라 앞에서 범행 사실을 털어놓자, 객석이 고요해졌다. 1923년 관동대지진(간토 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에 관한 가해자 증언이다. 당시 일본 계엄군이 ‘보호’ 명목으로 조선인 3500명을 나라시노 수용소에 이송한 후, 인근 마을 자경단에 조선인 15명을 ‘불하(팔아넘김)’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소학교 3학년 때 조선인이 나무에 묶여서 죽임당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할머니의 증언도 이어진다. 증거가 남지 않도록 시체를 불태우는 일은 “경찰 입회하에” 이뤄졌다.
1986년 다큐멘터리 〈불하된 조선인〉은 일본과 한국, 미국 등에서 1200회 이상 상영됐다. 일본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낳았다. 이미 40년 전이라 카메라 앞에 선 일본인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증언은 필름에 남았다. 영화를 찍은 오충공 감독(68)은 “그때 기록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기억이 있다”라고 말한다. “일제 식민지 때 재일조선인 200만명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끌려온 사람들도 많다. 그 역사를 일본인 학자는 안 쓴다. 재일조선인이 안 쓰면 누가 하겠는가?” 재일동포 2세인 그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진실을 40년간 기록해오고 있는 이유다. 3월10일 제25회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수상했다. 인권 탄압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하는 이들에게 매년 주어지는 상이다. 올해 9월1일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된다.
처음엔 그저 사건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1983년 요코하마 방송영화전문학원에 다닐 당시, 관동대지진 때 매장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한다는 뉴스를 봤다.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그는 곧바로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유골이 나오지 않았다. 〈독립신문〉 기록을 보면 학살된 희생자는 6661명. 유족은 나타나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학살이 정부와 관계없는 문제라고 일관했다. 한국 정부는 무관심했다. “유족을 찾는 게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찾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분이 언제 일본에 갔고 어떻게 일하다가 죽었는가, 그리고 유골은 어디에 묻혔는가.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비극의 책임을 묻고 싶었다.” 일본 관동(간토) 지방 각지에 매몰된 조선인 추도비는 물론이고 일본 순사의 증언, 주민 목격담을 조각조각 모았다. 그의 오랜 노력 끝에 당시 생존자인 조인승 할아버지가 증언을 시작한다. 이 이야기가 1983년 다큐멘터리 〈감춰진 손톱자국〉에 처음 담겼다.
지학순정의평화상 수상을 위해 3월 초 한국을 찾은 그는 일정이 빠듯했다. 올해 8월 개봉될 영화 〈1923 제노사이드, 100년의 침묵, 역사 부정〉 제작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한국을 오가며 유족 14명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다. 30년 만에 다시 카메라를 잡은 이유는 그간의 변화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매년 9월1일 일본 도쿄에 있는 요코아미초 공원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몇 년 전부터 맞은편에서 우익단체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폭행한 일본인들을 위한 위령제를 열고 있다.” 아베 정권부터 역사 수정주의 바람이 크게 불면서 조선인 학살을 은폐·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커졌다. 차기작에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집요하게 파고들 예정이다. “역사를 바로 알자는 목소리를 반일로 매도해선 안 된다.” 101년, 102년이 되어도 영화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오충공 감독의 말이다.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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