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문성모
20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문성모 :
2015. 11. 19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우리나라 근대 문단의 거목이었던 춘원 이광수는 본래 동학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3 1907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하였는데, 이때 친구의 권유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된다. 이광수는 1910년에 조선에 건너와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
면서 기독교의 신앙을 더 가까이 접하게 되었다.
이광수는 기독교에 대한 애정은 가지고 있었으나 신앙인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번 기독교에
대한 글을 실었는데, 처음에 긍정으로 시작한 글은 차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글로 바뀌었다.
그는 조선의 기독교기 당시 가장 조직적이고 단결된 사상적 집단이라고 진단했으며, ‘불교의 조
선’이 ‘유교의 조선’이 되었듯이 머지않아 ‘유교의 조선’이 ‘기독교의 조선’이 될 것을 예언하기
도 했다.
그는 1917년 7월에 기고한 “야소교의 조선에 준 영향”이라는 글에서 기독교를 암흑 속
의 조선에 신문명의 서광을 비춘 은인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기고한 “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에서는 지식인의 눈으로 기독교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① “제일은 계급적이외다.” 동양의 계급사상을 기독교가 타
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목사와 장로는 언제나 보통교인의 위에 서려한다는 비판이다.
② “제
이는 교회지상주의외다.” 그 결과 기독교는 교회와 세상을 너무 심하게 구별하고, 세상 학문을
천하게 여기고, 종교 이외의 일을 천시하고, 종교적 의무 이외에 여러 의무를 소홀히 한다는 비
판이다.
③ “제삼의 흠점(欠點)은 교역자의 무식함이외다.” 보통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도 없는
사람들이 신학교에 와서 공부하면 목사가 되어 만인의 정신적 지도자가 됨을 비판하고 있다.
④ “제사의 흠점(欠點)은 미신적이요.” 미국 선교사들이 신앙의 심오한 이론을 가르치지 않고,
미개한 민족에게 전도하는 방법으로 가르쳐서 미신적으로 기도하고 병 낫고 자식을 얻으려고
한다는 비판이다.
그는 이러한 글을 쓴 자신을 책망하기 전에 기독교가 먼저 반성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이러한
글을 쓴 이유는 교회와 사회를 위한 애정 때문임을 하나님 앞에서 장담한다고 하면서 글을 마
치고 있다. 이광수의 비판은 오늘 한국 기독교가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100년 전의 비판적
인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오히려 비판거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이 안타깝다.
(2014.9.27.한국장로신문/ 문성모 목사 서울장신대학교 전 총장)
한국장로신문
공식적인 선교가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모국어로 성경이 번역된 나라 조선.
그 성경을 품에 지니고 다니던 조선인 신자들에 의해 자생
적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나라. 이런 점에서 조선의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특별했다.
1884년 맥클레이의 알현을 계기로 고종은 2년 전에 체결된 조미수호조약 11조(“양국간에 언어,
문예, 법률 등 문화학술교류에 보호와 원조를 다한다”)에 근거하여 외국인들의 교육과 의료사
업을 윤허했고, 이후 조선에는 기독교와 함께 서양 근대문명의 산물인 병원과 학교가 함께 소
개됐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히 조선 기독교의 초기 30년은 왕실을 비롯하여 개화지식인들과 백
성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었고 이는 20세기 초 교회가 부흥기를 맞이하는데 좋은 토양
이 되었다. 하지만 교회 부흥의 또 다른 측면에서는 기독교가 조선이 처한 당대의 현실을 외면
한 채 지양했던 내세적 신앙과 전통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 1919년
3.1운동이라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사회주의자
들로부터 기독교는 본격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기독교 비판에 앞서 식
민지 조선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17년 11월 이광수
가 「청춘」에 게재한 “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과 1918년 9월 6일부터 10월 19일까지 「매일
신보」에 연재한 “신생활론”에 의해서이다.
춘원, 종교를 만나다.
1892년 평안북도 정주의 소작농 가정에서 3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이광수는 1902년 부모를 여
의고 외가와 재당숙 집을 전전하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술회한바 있다. 이 시기 이광
수는 동학의 지도급 인물인 박찬명을 만나 1903년(12세) 동학에 입문하여 동경과 서울로부터
오는 문서를 베껴 배포하는 심부름을 하게 된다. 그러다 1904(13세)년부터 동학에 대한 일본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상경하여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추천으로 1905년(14세) 일본유학의 기
회를 얻는다.
일본유학 과정에서 세계관의 일대 전환을 맛보게 되는데 1907년(16세) 명치학원(
明治學院)에 입학한 후 기독교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908년(17세) 명치학원의 급우 야마
사키 도시오(山崎俊夫)의 권유로 톨스토이에 심취하게 된 이광수는 전쟁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
난다는 톨스토이의 반전론에 공감하며 국가주의를 앞세운 일본식 기독교로 인해 회의를 품었
던 신앙을 새롭게 받아들인다. 1910년(19세) 명치학원 보통부 5학년을 졸업한 이광수는 향리의
오산학교 교장 남강 이승훈의 초청으로 오산학교 교사로 일하기 위해 귀국한 후 그해 10월 백
혜숙과 결혼한다. 하지만 결혼생활에 정착하지 못한 이광수는 결혼 직후부터 홀로 해외와 국내
를 오가다가 결국 1914년 다시 오산학교 교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5년(24세)
김성수의 도움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 예과에 편입한 후 철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 이곳에서의 공부는 그와 기독교와의 틈새를 벌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수는 이때부터 인도철
학과 불교의 세계관에 심취하게 되면서 1920년을 전후해서부터는 그의 작품에 불교적 색채가
점차 농후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광수는 동학, 기독교, 불교로 이어지는 종교편력을 보였지만 그에게는 정작 종교의 차별상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 종교는 새로운 문명과의 부단한 대면에 있어서의 통로 혹은 돌파
구와 같은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는 이광수에게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서구문명 그 자
체였고, 조선문명화를 위한 필수 수단이었다. 그러기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은 기독교에 대한
‘문명기호론’이라는 그의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춘원에게서 자유로운가? 3
이광수가 1917년 “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에서 비판하는 대상은 그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
이 ‘야소교회’라기보다는 ‘야소교인’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조선야소교인’으로 그는 다음 네 가
지 결점을 비판한다.
“제일은 금일 조선야소교회는 계급적이외다.”
이광수는 동양의 계급사상이 기독교에 의해 극복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근본정신에
반하여 목사, 장로들이 평신도들 위에 군림함으로써 교회가 오히려 계급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
다고 비판한다.
“제이는 교회지상주의외다.”
이광수는 교회만 제일이라고 하여 비기독교인을 모두 악인이요, 신용 없는 이방인으로 보고, 기
독교 교리 외의 모든 세상 학문을 천히 여기는 교회지상주의를 비판하며, 목사, 전도사의 사역
외에도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제삼의 흠점(欠點)은 교역자의 무식함이외다.”
이광수는 목사와 전도사는 최하의 사람도 접하지만 최고의 사람들도 접해야 됨으로 성경이나
몇 번 읽는 것으로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되고 세상의 여러 학문에 상당한 지식을 얻어야 함을 지
적한다.
“제사의 흠점(欠點)은 미신적이요.”
이광수는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인에게 미개한 민족에게 전도하는 방법을 채택하여 심오한 원
리는 가르치지 않고 고래의 미신을 이용하여 천당지옥설과 사후부활, 기도만능설 같은 것으로
몽매한 민중을 죄악에서 구원하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이후 이광수는 1918년 9월에 「매일신보」에 연재한 “신생활론”에서 30년의 역사와 30만의 교
도를 가진 야소교회가 아직 신앙고백이나 교리해석서 한 권을 내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자기
교회 역사책 한 권도 저술치 못한 조선야소교회를 비판했다.
이광수가 이렇게 한국 교회를 비판한지 거의 한 세기가 흘렀다. 과연 2012년 현재 한국교회는
100년 전 제기됐던 춘원의 비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참고문헌
강명숙. “1920년대 초 한국 개신교에 대한 사회의 비판.” 『한국기독교와역사』, 제5호(1996,9).
김영일. “이광수의 한국기독교 비판.” 『기독교사상』, 제250호(1979,4).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의 역사上』.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4.
박슬기. “이광수의 개조론과 기독교 윤리.” 『한국현대문학연구』, 제35집(2011,12).
신광철. “이광수의 기독교 비평에 대한 연구.” 『한국기독교와역사』, 제17호(2002,8).
이광수. “금일 조선야소교회의 결점.” 『이광수 전집 제10권』, 서울: 우신사, 1979.
.
“야소교의 조선에 준 은혜.” 『이광수 전집 제10권』, 서울: 우신사, 1979.
정재림. “근대소설에 나타난 기독교 비판의 세 양상: 이광수, 김동인, 김동리의 경우.” 『서강인문
논총』, 제27집(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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