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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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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1909년 ~ 1949년)는 한국의 철학자이다.
생애[편집]
1909년 8월 22일 함경북도 성진에서 출생하였다. 1936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1935년 6월 동아일보에 《불안의 정신과 인테리의 장래》를, 1936년 1월 조광에 《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1938년 숭의실업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역임했다. 1세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서 해방공간에서 <현대일보> 주필을 맡았다. 빨치산이 되어 유격투쟁을 벌이다 토벌대에 사살되었다.[1][2]
관련 서적[편집]
윤대석·윤미란. 《사상과 현실》.인하대학교출판부. 2010년. ISBN 9788974072575
위상복.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 길. 2012년. ISBN 9788964450437
박치우 지음, 홍영두 해설편집, 《사상과 현실》. 역사와철학. 2016년. ISBN 9791195280162
각주[편집]
↑ 최원형. 빨치산이 된 천재철학자 박치우를 아시나요. 한겨레신문. 2012년 2월 17일.
↑ 장정일. 근본적 질문 던졌던 ‘빨치산 철학자’의 복권 . 시사IN. 2012년 3월 31일.
박치우
최근 수정 시각: 2020-02-14 19:03:40
분류
대한민국의 철학자
한국의 공산주의자
1909년 출생
김책시 출신 인물
1949년 사망
1. 생애2. 평론/저술
朴致祐
1909~1949
1. 생애[편집]
1909년 함경북도 성진, 지금의 김책시에서 태어났다. 개신교 목사 박창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함경도 벽촌, 시베리아 등지에서 전도 활동을 하면서 박치우는 넉넉지 못한 삶을 살았다. 1928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에 입학한 후 1936년 졸업하였다. 1938년 숭의실업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역임했으며, 1935년 6월 동아일보에 「불안의 정신과 인테리의 장래」, 1936년 1월『조광』에 「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1930년대 말 우리 비평사의 중요 논점이었던 고전론·교양론·신체제론 등에 대한 글을 발표하면서 신남철(申南澈)·서인식(徐寅植)·인정식(印貞植) 등과 함께 전형기 비평계의 신경향을 대표하는 평론가로 부상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6년 2월 조선문학가동맹에서 개최한 조선문학자대회에서는 「국수주의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를 발표하여, 민족 감정에만 호소하는 국수주의 및 파시즘이 비합리성의 원리에 입각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합리성의 원리, 합리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여 민주주의 전선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 후 3월에는 이태림, 김기림 등과 함께 현대일보를 창간해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또한 민주주의민족전선,남로당의 정치활동에 참여하다가 월북하였다.
북한에서 그는 남한 내 게릴라부대인 빨치산의 정치교육을 담당한 강동정치학원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실제 조선인민유격대 제1군단 정치위원으로 남하하였다.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이현상 부대에서 활동했던 이태(李泰)는 저서 ‘남부군’에서 박치우를 언급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여순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강동정치학원 출신 180명을 유격대로 편성해서 1948년 11월 오대산 지역에 침투시켰고 박치우도 그 중 하나였다. 이후 6개월 동안 약 600명의 유격대원이 추가로 투입됐지만 이들 대부분은 사살되거나 도주했다.
한편 박치우는 살아남아 1년여간 남과 북을 오르내리며 빨치산 정치교육에 종사하다가 11월 경에 국군에 의해 사살되어 1949년 12월4일자 동아일보에는 “약 2주일 전 태백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하였다”는 육군총참모장의 발언이 보도되었다.
2. 평론/저술[편집]
현대철학과 인간문제 (조선일보, 1935.9.3.∼11.)
세대 비판의 완성으로 (조광, 1937.1.)
고문화 음미의 현대적 의의 (조선일보, 1937.1.1.∼3.)
고전의 성격인 규범성 (조선일보, 1938.6.14.)
예지(叡智)로서의 지성 (비판, 1938.11.)
전체주의 철학적 해명 (조선일보, 1939.2.)
교양의 현대적 의미 (인문평론, 1939.11.)
지식인과 직업 (인문평론, 1940.5.)
동아협동체론(東亞協同體論)의 일성찰(一省察) (인문평론, 1940.7.)
빨치산이 된 천재철학자 박치우를 아시나요
등록 :2012-02-17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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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우(1909~1949)
[토요판]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
한국전쟁 직후 1970년대까지 우리 지성계는 황량했다. 분단현실과 이를 활용한 독재정권은 국민이 ‘생각하는 시민’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에야 한국 지성계는 금기였던 유물론과 변증법을,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을, 홍명희·백남운·김태준을 조금씩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겐 잃어버린 지성사의 고리들이 남아 있다.
1세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서 해방공간에서 <현대일보> 주필을 맡는 등 활발한 지적 활동을 펼쳤던 박치우(1909~1949)는 철저하게 잊혀진 학자다. 경성제대 교수들이 ‘일본에도 없는 천재’라고 했을 정도였고, 당시 대표적 철학자인 박종홍과 쌍벽을 이루는 철학자로 꼽혔던 인물이었지만 그의 삶과 사상의 전모는 지금껏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80년대 초 정권의 감시를 피해 복사본으로 금서들을 돌려 읽었던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 그가 남긴 단 한 권의 책 <사상과 현실>이 기억되는 정도였을 뿐이다. 빨치산이 되어 유격투쟁을 벌이다 토벌대에 사살된 이력 때문에 그는 학계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였다.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 위상복 지음/길·4만5000원<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은 이렇게 사라졌던 박치우의 삶과 사상을 복구해낸 역저다. 지은이 위상복(오른쪽 사진) 전남대 교수는 전국 도서관을 뒤져 자료를 찾는 데만 7년을 보냈고, 이후 2년 가까이 집필에 전념해 1000쪽에 육박하는 이 책을 썼다.
위 교수는 왜 이렇게까지 박치우에게 매달린 걸까? 그는 “서양철학 수용사의 1세대였던 박치우는 당시 가장 중요한 흐름이었던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의 선구자”였다고 평가하고, “분단현실에 힘입어 관념론과 실존철학만이 주류를 이뤘던 우리 학계가 꼭 되짚어봐야 할 인물”이라고 의미를 말했다. 그는 박치우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경성제대 동기이자 한국의 대표 철학자로 자리매김한 열암 박종홍과의 대립구도를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 선구
잊혀져버린 삶과 사상 복구
7년 조사 발품 1천쪽에 담아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 지은이 위상복식민지 엘리트들이 모여들었던 1920~30년대 경성제대에서 박치우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박종홍은 실존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위 교수는 “박치우는 실존철학에 대해 ‘전체주의 철학으로 휩쓸리기 쉽다’며 경계했고, 시종일관 마르크스주의를 도구로 삼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박종홍의 실존철학은 일본의 전체주의·군국주의에 대한 긍정을 거쳐, 철학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반공주의와 유신의 사상적 밑받침이 된 ‘국민윤리’로 나아가지 않았냐는 것.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적 접근을 시도했던 박치우의 사상은 그가 빨치산 유격투쟁을 벌이다 사살당한 뒤로 우리 철학사상계에서 더욱 터부시되었다. 그러나 현실과 실천에 대해 강한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는 그의 사상은 암울한 현실을 뚫고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고 위 교수는 말한다. 80년대 <사상과 현실>이 대학가에 남몰래 유통됐던 것이 단적인 사례다. 위 교수는 “박치우뿐만 아니라 경성제대 출신의 학자들 개개인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질 때, 비로소 철학과 사상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19666.html#csidx1c57d53e57d14a3b21c479fefb16800
빨치산이 된 철학자 박치우의 사상 60년 만에 햇빛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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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2.13 21:22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위상복 교수 책 출간
1949년 12월4일자 동아일보에는 “약 2주일 전 태백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하였다”는 육군총참모장의 발언이 보도됐다. 이것이 해방공간에 월북했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와 무장 투쟁을 벌인 한 빨치산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그러나 그는 빨치산이기 이전에 철학자였다. 박치우(사진)는 이후 한국 철학계의 거두로 자리 잡은 박종홍(1903~1976)과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제5회 동기였으며,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몰래 복사해 돌려 읽던 마르크스주의 철학서 <사상과 현실>의 저자였다.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철학자 박치우의 삶과 사상을 본격적으로 살핀 책이 처음으로 나왔다. 위상복 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도서출판 길)이다.
박치우는 1909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개신교 목사 박창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함경도 벽촌, 시베리아 등지에서 전도 활동을 하면서 박치우는 넉넉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8년 박치우는 당시 조선 최고의 수재들이 모였던 경성제대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다. 박종홍, 훗날 6대 국회의원과 전북대 총장을 지낸 고형곤 등이 그의 철학과 졸업 동기였다. 그는 평양숭의실업전문학교 교수, 조선일보 기자 등을 거치며 전체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쓰다가, 일제 말기 중국으로 건너간 뒤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경성제대 시절 박치우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받아들였다. 1930년대의 전 세계적 경제 대공황, 일본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군국주의 세력의 발흥에 대해 마르크스주의는 가장 강력한 비판의 무기였다.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조선의 문제를 식민주의로 파악했을 때, 박치우는 전체주의적 파시즘을 경고했다. 아울러 부르주아 민주주의 역시 전체주의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했다.
박치우의 ‘합리주의적 이성에 근거한 변증법’은 박종홍의 ‘비합리주의적 실존철학’과 대조를 이뤘다. 박치우의 변증법이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작동했다면, 박종홍의 변증법은 ‘전체주의적 사생결단’의 논리 속에 잠적했다.
북으로 간 박치우는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완성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가 40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고, 남한에 남은 박종홍은 국민교육헌장을 만든 유신체제의 이데올로그로 살아남았다.
박치우의 유일한 저서인 <사상과 현실>(1946)에는 “진리의 탐구라는 것이 곧 학자 자신의 일신상의 이익만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이 같은 용의와 결의에는 어느 의미에서는 순교자의 그것과 흡사한 비장한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1946년 월북한 박치우는 해주제일인쇄소에서 일하다가 1949년 8월 ‘붓의 실천’이 아닌 ‘총의 실천’을 위해 ‘인민유격대’의 일원으로 다시 남하했다. 그리고 3개월 뒤 태백산 자락에서 숨을 거뒀다. 위상복 교수는 “그(박치우)는 이론과 실천을, 철학과 사상을,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분리하지 않고 통일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며, 그것을 변증법이라고 불렀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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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202132122345#csidx7987ebb910b1bf296c35c99decdc9b3
근본적 질문 던졌던 ‘빨치산 철학자’의 복권
장정일 (소설가)
호수 236
승인 2012.03.31 13:42
‘1세대 철학자’ 박치우는 철학과 삶을 일치시키려 했다. 그는 하이데거 유의 ‘불안의 철학’이 주류로 자리 잡은 시대에 당파성을 가진 철학을 옹호했다. 철학이란 무엇일까, 이 땅의 철학이란 무엇일까.위상복의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박치우의 삶과 철학사상〉(길 펴냄, 2012년)은 중층적인 저작이다. 먼저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공간에 이르는 이 땅의 지식사회학으로 읽을 수 있고, 또 한편은 박치우라는 잊힌 철학가에 대한 평전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 어느 편에 치중하든, 마지막에는 두 갈래가 하나의 초점으로 모인다. 즉 이 책은 지식사회학이라는 일반적 방법론과 평전 형식의 개별적 사례를 통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거기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철학’이라는 용어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철학자 니시 아마네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를 일본어로 옮긴 것이다. 비단 이 용어만이 아니기는 하지만, 일본을 통해서 유입된 철학이라는 용어야말로 임화의 ‘이식’ 문학론이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철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정착되어간 과정을 통해 더욱 잘 증명된다. 3·1운동에 덴 일제는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고 좀 더 효과적인 내선일체를 수행하기 위해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이지영 그림이 땅의 철학은 경성제대에 철학과가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학문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던 경성제대 철학과는 그 특성상, 지식사회학이 가리키는 시대적·사회적 구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철학은 어떠한 학문보다 사상이나 비판과 직결되어 있는 까닭에, 피식민지 조선 학생들에게는 강한 금기가 설정됐다. 모든 교수가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특히 유념해야 할 경성제대 철학과의 교과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양철학 가운데 주로 독일 관념론과 하이데거 유의 실존철학만 취급됐다. 둘째, 관념론 위주였던 만큼 당연히 마르크스 철학은 뿌리째 배제됐다. 셋째, 조선 시대의 성리학과 같은 전통 사상은 철학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철학을 일컬어 ‘우리의 문제나 삶과 상관없는 뜬구름 잡는 헛소리’라고 손사래를 친다면, 그 원인은 현실과의 괴리로부터 시작한 식민시대의 철학 교과에 있지 않을까? 아니, 우리나라 철학계가 아직도 그때의 관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경성제대 설립, 철학의 시작
박치우는 1909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던 1928년, 같은 강의실에는 훗날 5·16 쿠데타를 반기고 박정희를 도와 ‘국민교육헌장’을 작성한 박종홍이 있었다. 지은이는 박치우와 박종홍을 경쟁 관계로 놓고, 이 책의 곳곳에서 두 사람의 글과 삶을 비교하거나 평가한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 유럽과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까지 번졌던 ‘하이데거 유행’에 대한 박치우와 박종홍의 시각은 무척 예시적이다.
지은이는 두 사람에게 고루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호세이 대학 철학과 교수였던 미키 기요시를 꼽는다. 1923년 독일 마르부르크에서 하이데거를 사사한 그는 귀국해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보급하기 위해 애를 쓴 학자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독서와 인생〉(범우사 펴냄, 2007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극과 당면한 세계공황 앞에서 하이데거가 유행하게 된 사정을 이렇게 암시하고 있다. “마르부르크 시절 이래 내가 경험한 이른바 불안의 철학이나 불안의 문학이 몇 해 뒤에는 일본에서도 유행하게 되었다. 그것이 몇 년 뒤에 유행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유행하기 위해서는 프랑스나 독일에서처럼 하나의 요소, 즉 마르크시즘의 유행이 앞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순서다.”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박치우의 삶과 철학사상〉위상복 지음길 펴냄미키 기요시에 따르면, 하이데거 유의 ‘불안의 철학’이 유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했어야 했다. 저 언명은, 불안의 철학이 마르크스주의의 반정립(antithese)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바이마르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과 일본의 부르주아들은 ‘마르크스만 아니면 무엇이라도!’라는 심정으로 불안의 철학을 받아들였고, 불안의 철학이 열어놓은 뒷문으로 구세주인 양 들어온 것이 바로 나치즘(독일)·파시즘(이탈리아)·군국주의(일본)였다.혜성과도 같이 빛나는 문장으로 시대에 경종을 울린 박치우는, 자주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불안의 철학을 공박했다. 프랑스혁명으로 획득된 시민계급이 산업사회가 빚어낸 소외와 위기(공황)의 극복을 시민계급 내부의 모순(빈부)과 경제 기구에서 찾지 않고, 정신이나 내면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바로 불안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박치우는 이들에게 놓인 전망이라고는 슈펭글러와 같은 숙명론의 설파나 파시즘에의 투항밖에 없다면서 나치에 협력한 하이데거를 비판했다. 반면 하이데거로 졸업 논문을 쓰기도 했던 박종홍은 나치에 협력했던 하이데거의 오류까지 따라 하는 오욕의 길을 갔다.
박치우와 박종홍의 다른 길
박치우는 제1세대 철학자치고는 드물게 많은 글을 남겼다지만, 생전에 저서는 〈사상과 현실〉이라는 단 한 권뿐이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철학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했던 그의 궤적을 쫓아야 한다. 그는 “사상가란 별다른 사람이 아니라 현실의 강박, 현실이 그의 해결을 위하여 우리를 향하여 부르짖고 있는 그 소리를 ‘심장’을 통하여 힘 있게 들을 수 있는 인간이다”라면서, 산더미 같은 고민을 가진 “오늘의 이 땅에는 왜 아직까지 이렇다 할 사상가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아카데미 철학을 나오며’)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한 어느 글에서 철학은 수학이나 과학처럼 이론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당파성을 가진다면서, ‘철학은 우선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특정한 계급의 공명을 얻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선언한다(‘철학의 당파성’).
이 책을 읽으면서 윤대석·윤미란이 박치우의 모든 글을 모아 엮은 〈사상과 현실-박치우 전집〉(인하대학교출판부 펴냄, 2010년)을 함께 읽었는데, 지금 읽어도 문제성과 신선도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 명저가 아닌가 한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드센 철학계에서 완전히 도외시된 박치우를 되살린 지은이의 공도 크지만, 무엇보다 큰 것은 문학비평계가 박치우에게 덮어씌운 ‘친일 비평가’라는 오명을 벗겨준 일이다. 나아가 지은이는, 태백산에서 사살된 ‘빨치산 철학자’ 박치우를 통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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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정신은 철학사상의 생명…박치우-박종홍 깊은 연구 필요"
최익현 기자
승인 2012.02.20 14:50
저자 인터뷰_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박치우의 삶과 철학사상』펴낸 위상복 전남대 교수
잊혀진 사상가 박치우의 삶과 철학사상을 복원한 위상복 교수는 박치우의 유물론이나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앞으로 좀 더 연구해야 할 과제로 꼽고 있다. 사진:이정아 한겨레 기자△내년이면 정년퇴임이라고 들었습니다. 정년 퇴임전에 856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 게다가 사상사에서 거의 잊혀진 인물을 이렇게 복원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또 자료 접근도 매우 어려우셨을텐데, 어떻게 단행본 저술을 완성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연구하는데 정년이란 것이 따로 있겠습니까만 시간에 쫒기다보니 약간 초조해진 것 같기도 했나봅니다. 박치우는 일제시기나 해방공간에서 철학계는 물론 문학계에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기구했다면 너무 기구한 것이어서(?) 모두들 잊어버렸던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꽤 오래 전부터 박치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조건들이 그것을 허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료의 수합과 정리, 집필, 교정 등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애초의 생각처럼 결코 간단하지가 않아서 애를 먹었나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헤겔 철학과 헤겔 철학의 국내 수용에 관련된 연구를 진행해오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박치우와 선생님의 조우는 일견 예정된 측면도 있지만, 사실 다소 의외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선생님께서 박치우를 조명하는 일은 '한국 서양철학의 역사를 복원하는 시도'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점에서 과연 그런지 여쭙고 싶군요.
"물론 서양철학 일반이나 헤겔 철학이 우리나라에 어떤 과정을 겪으며 유입되고 수용되었던가는 근래 들어 조금씩 연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맑스 철학이나 맑스주의 사상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헤겔과 맑스는 철학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깊은 관계에 있으면서도 때로는 상반되는 관계에 있었기도 합니다. 헤겔 철학의 수용 문제는 필연적으로 맑스 철학의 수용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을 일반적으로는 변증법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30년대의 우리의 철학사상적인 주제는 변증법이었습니다. 변증법에 대한 이와 같은 주제는 관념론적인 경향이기보다는 유물론적인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철학사상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일반은 물론 문학비평계에서도 그런 문제를 다루곤 했던 것입니다. 헤겔이나 맑스의 철학을 바라보는 박치우의 관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어렵게 연구하셨을텐데, 철학자로서, 시대와 불화한 사상가로서 박치우를 짧게 논평한다면, 그는 한국 철학계 어디쯤에, 어떻게 놓일 수 있는 인물인가요? 흥미롭게도 선생님께서는 박종홍과 박치우를 대비하고 계십니다. 두 인물을 좀더 입체적으로 대비한다면, 한국 철학계의 흐름이랄까, 이런 계보가 그려지지 않을까요?
"박치우와 박종홍은 단순히 경성제대 철학과 동기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철학사상적으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서로 떨어질 수 없을 만큼 깊은 길항관계 속에 있었으며, 그러나 두 철학자는 차츰차츰 전혀 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그 한 중심적인 측면이 전체주의에 대한 이해와 비판이었습니다. 박종홍은 결국 전체주의적인 철학사상을 대변하는 길로, 박치우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대항적인 길로 나아갔습니다. 박치우의 유물론이나 맑스주의 철학에 대한 이해는 앞으로 좀더 연구해보아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만, 그것을 떠나 박종홍의 철학사상적 신념은 이미 한 개의 허망하기 그지없는 희극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고 있을 것입니다. 그 역시 좀더 심화된 각도에서 연구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서구 지성계가 '마르크스'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합니다. 분명 박치우에게 한계가 있었겠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의 심화된 위기 측면에서 볼 때, 마르크스/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박치우에 대한 재평가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제시기, 해방공간과 분단체제, 그리고 6?25전쟁 등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질곡이고 알 수 없는 미로입니다. 왜곡과 의곡(?)이 중첩된 비극적인 미로인 것 같습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 철학사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지 못한다면 그 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시기 지식인들이 노상 한다는 말이 ‘젊어서 자본론 안 읽어본 사람이 있나, 그러나 나이 들어서도 그걸 읽고 있으면 바보지’라고 떠들어댔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자유란 무엇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보면 박치우는 자신의 시대에 철저했던 사상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철학계 나아가 사상계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시대와 불화한' 사상가,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사상가가 썩 드물지 않습니까? 이렇게 된 데는 짐작할 수 있는 사정이 있겠지만,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자유와 더불어 비판적 정신은 철학사상의 생명일 것입니다. 그 속에서만이 진정성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것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진정성이 없다면 오류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뒤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 저술에 이어, 후속으로 구상하고 계신 작업은 무엇인지요?
"특별히 다른 계획은 없고, 기왕에 해오던 일들이 몇 개 있는데 계속해야 되겠지요. 언제부턴가 부족한 능력에 저술보다는 후학들이나 힘껏 가르치려고 세미나를 항상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저술 몇 권했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일 뿐입니다. 너무 스스로를 자책하다보니 이리 늦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대학과 정부의 학술정책(제도)가 많이 바뀌어 왔습니다. 단행본 저술을 북돋는 평가문화가 아니라, 단순한 논문 업적 평가 중심이어서 이에 대한 비판도 많았습니다. 이런 여건 속에서 『박치우의 삶과 철학사상』을 출간하신 것은, 여간한 결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감히 생각합니다. 이제 퇴임을 1년 앞둔 시점에서, 철학 저술 문화, 고민이 깊이 응축된 단행본 저술을 인문학의 본령인 철학에서부터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대학과 학문, 제가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조금 한심스럽지 않나요? 교육계와 대학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 모양 아닙니까? 다산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 시에 ‘애절양’(哀絶陽)이 있지요. 바닷가 마을에서 벌어졌던 한없이 슬프고도 비참한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 시입니다. 그 비슷한 것이 서양의 ‘카스트라토’라고 하던가요? ‘나를 울게 내버려두세요.’ 요즘 다산이라면 ‘신(新) 애절양’이라도 읊었을 것입니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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