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4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모두를 위한 자유’ 편 - 시사IN

“한국에 변화가 이는 것은 분명”
 이종태 편집국장 호수 665 승인 2020.06.20 14:52프린트


 묶음기사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의외의 응답 편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갈림길에 선 한국 편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모두를 위한 자유’ 편


10여 년 전 어떤 연구소에서 일하던 당시 〈시사IN〉의 풋내기 기자 한 명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순진하고 약간 ‘띨’해 보였지만 잠시만 이야기를 나눠도 ‘앗! 총명하네’라고 느낄 수 있는 기자. 그 예상이 빗나가지 않아 그는 지식과 필력에 기획력까지 겸비한 〈시사IN〉의 ‘커버 기사 메이커’로 성장했습니다. 최근 ‘포스트 코로나 한국 사회’ 3부작을 쓰고 있는 천관율 기자입니다.

이 기획은 어떻게 시작?

지난 4월 총선 분석을 위해 시행한 여론조사에 코로나 관련 문항을 집어넣었는데, 사회보험 등 공적제도에 대한 신뢰도가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높게 나와서 경악. 그 의미를 고민하던 차에 KBS가 ‘포스트 코로나’ 관련 프로그램을 만든다기에 여론조사 설계에 참여.

그 여론조사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한마디로 요약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요약. 한국 사회에서 뭔가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확실. 이 변화가 반드시 우리 사회 전체를 좋은 방향으로 도약시킬지는 불분명. 도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질문해야 하는 시기.

기사들이 너무 긴 것 아닌가? 게다가 3부작이라니.

지난해 ‘20대 남자’ 시리즈에서 3부작 형식을 처음 실험. ‘주간지에서만 볼 수 있는 기사가 뭐냐’라는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개인적 대응. 정기 구독자 처지에서 3주에 걸쳐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어떤 경험일지, 나도 궁금.

천관율 기자는 앞으로 한동안 ‘도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천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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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모두를 위한 자유’ 편 - 시사IN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모두를 위한 자유’ 편


천관율 기자
호수 666
승인 2020.06.24 00:16


-〈시사IN〉, KBS 공동 기획 대규모 웹조사

〈시사IN〉은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조망하는 사회조사를 기획했다. 세계보건총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외치는 미국식 자유와 결별한다. 코로나19라는 보편적인 위험은, 위험관리가 자유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납득시켰다.

묶음기사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의외의 응답 편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갈림길에 선 한국 편
“한국에 변화가 이는 것은 분명”

ⓒReuter4월30일 무장한 시위대가 코로나19로 인한 자택 대피령을 풀어달라고 요구하며 미국 미시간주 의회 의사당에 진입했다.
Scene 1. 자유

2020년 4월30일, 미국 미시간주의 수도 랜싱. 1878년 완공된 유서 깊은 주 의회 건물을 총으로 무장한 시민 700여 명이 점거했다. 미시간주는 총기 면허가 있으면 공개 장소에서 총을 휴대해도 합법이어서 이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무장 시위대는 코로나19 감염을 확인하는 발열 검사를 받고 주 의회로 들어갔다. 이들은 주 정부가 코로나19 대응으로 선포한 비상사태와 자택 대피령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레천 휘트머 주지사(민주당)는 “시위대가 마스크를 쓰지 않아 실망스럽다. 많은 사람을 감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코로나19 방역전은 코로나19 말고도 힘겨운 적과 동시에 싸워야 한다. ‘자유’다. 봉쇄 등 방역정책에 저항하는 미국 시민들은 국가가 사람들의 자유를 제약할 권리가 없다고 믿는다. “My body my choice(내 몸이고, 내 선택이다)”라는 구호가 있다. 원래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관련된 문제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구호(특히 임신중절 문제에서)인데, 요즘은 의미가 좀 달라졌다. ‘코로나19에 걸릴 위험을 감수할 자유’ ‘방역지침을 따르지 않을 자유’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라는 뜻으로 시위대가 쓴다. 통행금지 도로표지판에 마스크를 합성한 이미지도 단골로 등장한다. 전기차 회사 테슬라 창립자로 유명한 기업인 일론 머스크는 4월29일 자신의 트위터에 대문자로 이렇게 썼다. “FREE AMERICA NOW(이제 자유로운 미국을).” 그리고 물론, 자유를 외치는 시위대의 수호성인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

태평양 건너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당황스러운 이야기다. 방역은 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안전이 달린 문제인데, 그걸 훼손할 자유라는 게 말이 될까. ‘내 몸이니까 내 선택’이라고 해버려도 되는 걸까. 꽤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미국의 풍경은 코로나19 재난을 맞이한 한국 사회에도 생각보다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누 파르타넨은 핀란드에서 태어나 미국에 사는 기자이자 작가다. 미국인 남편을 따라 이주한 그녀는 ‘미국식 자유’에 지금 우리가 느끼는 당혹을 한발 먼저 느끼고 미국과 북유럽을 비교하는 책을 썼다.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있다. 미국과 북유럽을 비교한다면 자유와 평등 가운데 평등을 예찬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파르타넨은 일관되게 미국식 자유와 북유럽식 자유를 비교해나간다. “미국에서 살수록 나는 점점 더 당황스러웠다. 외부자인 내가 보기에 오늘날 미국인의 삶 전반에 송두리째 빠져 있는 것이 바로 자유와 개인의 독립과 기회다.”

미국은 직업선택의 자유가 흘러넘쳐 보이지만, 사실은 직장에 종속된다. 의료보험과 연금 등 각종 사회보장을 회사가 제공한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라도 있으면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 파산할 운명이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광대해 보여도 사실은 발이 묶인다. 육아휴직과 보육 서비스가 취약해서, 아이를 키우려는 사람들은 부모나 친척이 사는 도시를 떠나기 어렵다. 파르타넨이 보는 미국식 자유의 모순은 계속 이어진다. 자유로운 선택이 무한정 가능하지만, 위험에 노출된 개인을 보호하는 장치는 아주 취약하다. 그 결과 개인은 선택의 자유를 앙상하게 손에 쥔 채 회사와 가족에 의존하는 상태로 내몰린다. 북유럽식 자유의 접근법은 정반대다. “북유럽 사회의 목표는 개인을 가족이든 시민사회든 모든 형태의 의존에서 자유롭게 하자는 것이다.” 북유럽 사람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지독한 개인주의자여서 누구에게든 의존하는 상태를 못 참는다고 그녀는 쓴다. 설사 그게 부모라도 마찬가지다.

ⓒReuter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4월19일 자택 대피령에 반대하는 차량 시위를 의료진이 막고 있다.

개인이 누구에게든 의존적이 되는 이유는 그가 지독히 무능하거나 게을러서만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위험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의존적이 된다. 개인이 자기에게 닥칠 위험을 계산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삶이 가는 길은 위험투성이다. 사람들은 언제 아플지 모르고, 얼마나 오래 살지 모르고(돈이 충분하지 않으면 장수도 큰 위험이다), 일하다가 언제 다칠지 모르고, 경기변동이나 기술혁신이 언제 내 일자리를 날려버릴지 모르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생각하는 자유란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다.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그는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마스크를 쓰기 싫어도 써야 할 때 자유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방역정책은 자유의 적이다. 북유럽이 생각하는 자유는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다. 자유란 의존이 최소화된 상태다. 위험은 의존을 낳는다. 그러므로 위험이 자유의 적이다. 자유롭고 싶다면 위험을 다루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
Scene 2. 보험

그런데 어떤 국가도 개인에게 닥치는 위험을 없앨 능력은 없다. 그렇다면 위험을 다룬다는 게 정확히 무슨 말인가. 미히르 데사이는 하버드 경영대학원 금융학 교수다. 그는 책 〈금융의 모험〉에서 찰스 샌더스 퍼스라는 19세기 미국 수학자이자 철학자를 소개한다. 데사이가 보기에 금융의 본질을 가장 정확히 꿰뚫은 사상가인 퍼스는 1869년에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보험회사다.”

퍼스는 확률을 연구했다. 우연과 무작위성을 근본적으로 통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숙명적으로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그는 봤다. 하지만 퍼스는 숙명론과 결별할 돌파구를 연다. 우연과 무작위성은 운명이지만, 전체를 보면 패턴이 드러난다. 내가 몇 살에 죽을지는 근본적으로 알 수 없지만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꽤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이런 걸 ‘큰 수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데사이는 이렇게 쓴다. “무작위성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총체적으로는 예측 가능하다는 퍼스의 인식은 보험과 현대 금융의 토대다.”

고대 지중해는 해상무역이 활발했다. 짐을 잔뜩 실은 배는 무겁다.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자주 배가 바닥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럴 때는 일부 화물을 버려서 배를 띄워야 하는데, 누구의 화물이 버려질지는 알 수 없다. ‘당첨’된 화물주는 손해가 너무 크다. 그래서 로도스섬에서는 모든 화물주가 각자 돈을 모아 손해를 메워주는 규칙을 만들었다. 고대에 로도스법으로 불린 이 원리는 현대에도 ‘공동해손’ 원칙으로 살아남아 있다. 이제 위험은 ‘당첨’된 사람을 파멸시키지 않는다. 위험은 계산 가능하고 관리 가능한 무엇이 된다. 위험을 한데 묶어서 골고루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험의 본질이다.

보험의 원리는 금융을 넘어 사상가들을 열광시켰다. 로널드 드워킨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다. 그는 ‘가상적 보험시장’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그는 이것으로 정의로운 조세 수준을 결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원리는 이렇다. 사람들이 위험의 패턴은 알고 있으나 자기가 ‘당첨’될 확률은 모른다. 데사이가 보험의 토대라고 부른 그 상황이다. 내가 가난한 집에 태어날지, 지능이 낮아서 좋은 대학에 가기 어려울지, 유전적으로 암에 취약할지 등 숱한 위험을 개인은 알 수 없다. 여러 위험에 대해 보험을 만든다면 보험료를 어느 수준으로 책정해야 사람들이 가입할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드워킨은 이렇게 쓴다. “나는 이것이 어느 정치공동체에서나 최적 세율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상적 보험료 총액으로 총세수를 결정한다면, 그것으로 불평등을 시정하는 조세제도를 만들 수 있다.” 이 보험료 수준은 위험에 ‘당첨’된 사람들을 도울 만큼은 충분할 것이다. 위험의 총체적 확률은 미리 알려져 있으므로 그에 맞는 보험료를 책정할 수 있다. 보험료는 누진적일 것이다. 부자들에게는 돈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더 낮으므로, 부자들은 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더 많이 지불할 것이다. 드워킨에 이르면 국가란 일종의 보험기구가 되고, 세금이란 곧 보험료가 된다.

드워킨은 물론 일종의 은유로 가상적 보험시장을 끌어왔다. 하지만 여러 연구자들은 실제로도 현대 자유주의 국가의 핵심 속성이 보험기구라고 본다. 과거에는 위험에 대처하는 보험체제가 기껏해야 친족공동체나 마을공동체였다. 아프면 농사일을 대신 해주고, 일찍 죽은 부모의 아이를 맡아 키워줬다. 물론 친족이나 마을 밖 낯선 사람은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는 애초에 위험을 나눠 든 적이 없다. 그래서 전통적인 공동체는 이방인에게 극히 배타적이다. 하지만 현대 자유주의 국가는 위험을 더 넓게 분산시킨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새뮤얼 볼스는 책 〈도덕경제학〉에서 이렇게 썼다. “자유주의 사회는 위험을 줄여준다는 측면에서, 전통적인 가족이나 교구 단위 유대를 대체한다. 그 결과 혈족뿐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보편적 규범이 진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현대국가에 사는 우리는 낯선 사람과도 그럭저럭 계약도 맺고 신용거래도 튼다.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모두에게 이득이 돌아온다.

보험이 현대국가의 기본 원리라면, 북유럽 복지국가는 그 기본 원리를 극대화한 모델이다. ‘당첨’된 개인이 감당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위험들이 있다. 생계가 곤란할 때까지 장수할 위험, 나나 가족이 병에 걸릴 위험, 경기변동이나 기술변화로 일자리가 사라질 위험, 그리고 일을 하다가 다칠 위험이 그것이다. 선진적인 현대국가들은 이런 위험을 한데 모아 분산시킨다. 그게 사회보험이다. 장수의 위험은 연금이, 질병의 위험은 건강보험이, 실직의 위험은 고용보험이, 산재의 위험은 산재보험이 감당한다. 흔히 4대보험이라고 불린다.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보편적이고 탄탄한 사회보험을 제공함으로써 ‘위험으로부터의 자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연합뉴스5월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신도들이 간격을 두고 줄을 서 있다.

사회보험은 전 국민 강제가입이 원칙이다. 아무래도 자유의 원리와 좀 동떨어져 보인다. 왜 그럴까. 보험이 가진 본질적 약점 때문이다. 건강보험 가입을 자율에 맡기면 건강에 자신 있는 젊은 사람은 대부분 가입을 피할 것이고, 병원에 자주 가는 노인들만 대거 가입할 것이다. 이런 걸 ‘역선택’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 건강보험 재정은 파탄이 난다. 보험은 개인차가 있는 위험을 한데 모아서 분산하는 시스템인데, 역선택이 작동하면 고위험군만 쏠리고 저위험군은 빠져나가므로 보험의 원리는 무너진다.

그렇다면 선택은 둘이다. 한쪽에는 강제가입을 자유의 침해라고 보고 개인 선택의 자유와 자기책임 원리를 강조하는 길이 있다. 미국식이다. 위험은 개인이 직접 감수하거나 민간 보험시장에서 알아서 대비할 문제가 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정책 ‘오바마케어’도 이런 논리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또 한쪽에는 ‘위험으로부터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보고, 강제가입을 통해 역선택 문제를 제거하는 길이 있다. 북유럽을 비롯한 주요 복지국가들이 이 길을 갔다. 강제가입의 장점은 또 있다. ‘큰 수의 법칙’ 덕분에 위험의 크기를 더 잘 예측할 수 있다. 자연히 위험을 관리하는 비용도 낮아진다. 강제가입은 선택의 자유를 제약하는 대신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증진한다.

하지만 이 강제가입은 자유의 침해라는 논란을 불러오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곤란한 문제를 일으킨다. 한국의 국민연금을 둘러싼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Scene 3. 공정

2018년 12월 보건복지부는 제4차 국민연금 종합운영 계획안을 냈다. 국민연금을 받는 수급자가 일찍 사망했는데 국민연금법이 정하는 유족이 없을 경우, 장례비 명목으로 4촌 이내 친척에게 사망일시금을 준다. 종전에도 조기사망자 유족에게 유족연금을 주었는데, 지원 범위를 더 확대한 셈이다.

당시 〈연합뉴스〉 보도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낸 보험료보다 받은 액수가 훨씬 적기 때문에 괜히 손해 봤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국민연금은 의무가입이어서 내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가입했는데 일찍 죽으면 아무런 혜택도 없다는 불신으로 번질 수 있다.” 이 해설은 국민연금을 보는 가입자들의 마음을 꽤 잘 설명한다. 일찍 죽으면 넣은 돈만큼도 못 받아 손해이니, 강제가입까지 시킨 마당에 국가가 돈을 돌려줘야 공정하다는 감각이다. 복지부의 정책 방향도 그에 호응했다.

“보험의 원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연세대 양재진 교수(행정학)는 책 〈복지의 원리〉에서 유족연금과 사망일시금을 놓고 이렇게 잘라 말한다. 사회보장은 ‘원금 보장’이 아니라 ‘위험으로부터의 보장’이다. 보험 가입자는 자기 수명을 놓고 도박을 한 사람이 아니라,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산 사람이다. 연금의 경우 ‘경제력 없이 장수할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사는 셈이다. 따라서 그는 언제 사망하든 보험의 가치를 돌려받았다. 이 가치를 빼놓고 돌려받은 돈만 계산하는 것은 보험의 기본 원리를 무시하는 셈법이다.

하지만 보험의 원리야 어쨌거나 여전히 우리는 ‘기여한 만큼은 받아가야 한다’라는 원리에 더 끌린다. 이편이 명백히 더 공정해 보여서다. 심지어 강제가입을 당했으니 더 그렇다. 앞서 본 〈연합뉴스〉 기사의 제목은 ‘국민연금 받다 일찍 숨져도 손해 안 본다’였다. ‘손해’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다. ‘기여한 만큼 받아간다’ 원리는 우리 마음이 무언가를 공정하다고 판단할 때 대단히 강력한 기준이다(〈시사IN〉 제546호 ‘문재인 정부를 흔든 공정의 역습’ 기사). 공정의 직관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미국식 자기책임의 원리와 만난다. 자기책임의 원리는 ‘기여한 만큼 받아간다’의 가장 순수한 형태에 가깝다. 공정의 직관은 사회보험의 원리에 맞서는 꽤 까다로운 도전이다. 선진 복지국가들은 이를 어떻게 뛰어넘었을까.

ⓒ연합뉴스1998년 1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외환위기 타개를 위한 금모으기 행사가 벌어졌다.
Scene 4. 연대

재난은 사람들이 연대하게도 만들고 각자도생으로 빠지게도 만든다. 이 갈림길 자체가 재난 국면의 정치적 본질인 것 같다. 1997년 외환위기는 연대의 시대를 남길 수도 있었다. ‘금 모으기 운동’은 극적인 사례다. 그러나 외환위기 재난에서 한국 사회는 실직과 탈락의 위험에 ‘당첨’된 사람들을 내버려뒀다.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짐을 버렸는데, 버린 짐 값을 십시일반 모아주는 로도스법은 작동하지 않았다. 이 경험은 결국 각자도생의 시대를 남겼다. 한국은 사반세기동안 이때 잘못 들어선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 재난 국면에서 이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합의는 폭넓다. 연대가 답이라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연대는 보기보다 복잡한 키워드다.

유럽에서 연대는 원래 ‘연대보증’ 등을 뜻하는 법률 용어였다. 그러던 것이 프랑스혁명의 ‘형제애’, 이어진 노동운동 전성기의 ‘노동자 연대’ 등으로 거듭 개념이 확장됐다. 레옹 부르주아는 1851년에 태어나 1925년에 사망한 프랑스 사상가이자, 수상까지 지낸 정치가다. 국제연합의 전신인 국제연맹을 제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연대라는 개념을 독자적인 사상으로 끌어올렸다.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이 치열하던 시절에, 부르주아는 연대를 둘의 절충이 아니라 종합으로 제시했다. 둘 사이의 어딘가에 점을 찍는 게 아니라, 제3의 꼭짓점을 찍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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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는 인간이 혼자서는 스스로의 안녕을 보살필 수 없고,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에 기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폐결핵이 유행하는 상황을 예로 든다. 다른 사람과 만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지만 누가 보균자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각자가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다. 코로나19 유행기를 사는 우리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접촉을 늘리면 감염병이 돌고 접촉을 끊으면 경제가 죽는 진퇴양난에서, 유일한 활로는 외출을 자제하고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고 2m 간격을 지키는 일련의 행동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남을 보호하는 행동이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나를 보호해줄 거라고 믿는 행동이다. 부르주아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회적 도덕의 기초를 발견했다. 나의 고유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지킬 의무를 지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의무를 다할 때에만 나의 자유를 지킬 수 있다. 이제 연대는 자유로 가는 길이 된다.

연대는 동료 시민들을 서로 돕는 일이지만, 자선과는 거의 정반대일 만큼 다르다. 자선이 시혜적이라면, 연대는 상호 의무로 묶인 관계다. 자선이 누군가의 불행을 안타깝게 여기는 접근이라면, 연대는 위험을 분산시키는 공동의 노력이다. 그래서 보험은 연대의 한 종류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대응하는 연대를 제도화하면, 그게 보험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역사가 프랑수아 에월드는 “연대의 이념은 구호사업이 아니라 보험의 경제학에 속한다”라고 했다. 부르주아가 주창한 ‘상호 의무의 거미줄’은 이 장면에서 보험이라는 제도적 실체를 얻는다. 강제가입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인가? 연대의 문화가 자리 잡은 공동체에서는, 그렇지 않다. 연대는 상호 의무의 거미줄로 서로를 묶어서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공동의 노력이다. 여기에서 국가는 보험 가입을 강제하는 권력이 아니라, 그저 연대의 원리를 집행하는 행정 서비스 제공자에 더 가까워진다.

ⓒ연합뉴스5월10일 코로나19 방역체계가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바뀐 후 한강공원에서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정치권에서는 전 국민 고용보험 논의가 한창이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노동단체들도 전향적으로 논의에 참여한다. 대기업 정규직 처지에서는 전 국민 고용보험 도입이 유리하지만은 않다. 이들은 해고당할 위험이 매우 낮은데, 전 국민 고용보험이 도입되면 보험료를 더 많이 낼 가능성이 높다. 마치 병원 갈 일 없는 건강한 젊은이가 건강보험료를 더 내라고 요구받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대 노총의 주력이다. 따라서 ‘기여한 만큼 받아간다’라는 공정의 직관으로 보면 전 국민 고용보험은 이들에게 불공정한 변화다. 하지만 위험을 나눠 든다는 연대의 원리로 보면 이 변화에 동참하게 된다. 양대 노총이 전 국민 고용보험 논의에 전향적인 것은 연대의 원리가 작동하는 사례다.

사회보험은 연대의 특수한 형태다. 그리고 연대는 사회보험이 논리적·실천적 난점을 뛰어넘도록 해주는 힘이다. 공정의 직관이 내놓는 문제제기에 선진 복지국가들이 내놓는 대답도 연대의 원리였다. 옌뉘 안데르손은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스웨덴 출신 연구자다. 책 〈경제성장과 사회보장 사이에서〉에서 그녀는 1950년대 스웨덴 사민당의 이념을 이렇게 요약한다. “경제가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해방은 사회안전망에 전적으로 좌우된다. 사회안전망이 있을 때에만 모든 사람의, 특히 변화에 취약한 사람의 선택의 자유, 인생의 기회, 잠재적 역량이 비로소 보장된다. 한 사람의 자유는 모든 이들의 연대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북유럽의 이 지독한 개인주의자들은 자유롭고 싶어서 연대를 택했다.
Scene 5. 모두를 위한 자유

5월18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최고 의결기관인 세계보건총회를 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초청 연설자로 선정돼 화상 연설을 했다. 연설 제목은 ‘모두를 위한 자유’였다.

“한국 국민은 담대한 선택을 했습니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모두를 위한 자유’로 확장시켰습니다. 나의 안전을 위해 이웃의 안전을 먼저 지켰습니다.”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협력하는 힘은 바이러스가 갖지 못한 인류만의 힘입니다. 코로나19는 인류 공동의 가치인 자유의 정신까지 위협하지만, 자유의 정신에 기반한 연대와 협력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모두가 코로나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도록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연설에서 대통령은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외치는 미국식 자유와 분명히 결별한다. 직접 표현하지는 않지만, 미국식 자유는 사실상 ‘나를 위한 자유’로 규정된다. 이제 자유는 고립된 개인들의 권리가 아니라, 상호 의무로 묶인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일종의 공공재에 더 가까워진다.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는 위험을 한데 모아 고루 나눠질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속성상 ‘모두를 위한 자유’일 수밖에 없다. “나의 안전을 위해 이웃의 안전을 먼저 지켰습니다.” 이 표현은 레옹 부르주아의 연대 이론에서 곧바로 건져 올린 문장처럼 읽힌다. 연설문의 주제를 한 줄로 요약하려면 옌뉘 안데르손이 스웨덴 사민당의 이념을 묘사한 이 문장이 어울린다. “한 사람의 자유는 모든 이들의 연대에 달려 있다.”

이 연설문이 어떻게 나왔는지 신동호 청와대 연설비서관에게 물었다. “대통령의 일관된 관심사가 상생과 연대다. 대통령은 ‘광주형 일자리’로 대표되는 상생형 일자리에, 밖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관심이 많다. 이게 일자리 정책이기도 하지만, 대통령은 노사 상생과 연대의 모델을 만들어내고 싶어 한다. 처음에는 관 주도로 하지만 이후로는 상생과 연대가 문화로 자리 잡아야 희망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대통령은 연대와 상생의 철학을 국제사회에 말하는 방식으로 ‘모두를 위한 자유’를 선택했다.”

ⓒ청와대제공문재인 대통령이 5월18일 세계보건총회 초청 연설을 하고 있다.

5월10일에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주년 연설을 한다. 그런데 이 연설에 “전 국민 고용보험 시대의 기초를 놓겠습니다”라는 말이 들어간다. 이게 여권에서 조용한 파장을 일으켰다. 5월10일 이전 상황을 보면,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이 ‘전 국민 고용보험’ 의제를 던졌다가 기획재정부와 여당이 속도조절에 들어가면서 의제에서 탈락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걸 대통령이 연설에서 다시 살려낸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정책의제가 경기부양 일변도(‘뉴딜’이라는 표현은 그런 착시를 주기 쉽다)로 흐르지 않도록 제동을 걸었다. 더 분명한 표현은 6월9일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나왔다.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습니다. 위기를 불평등을 줄이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상생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위기 극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판 뉴딜의 궁극적인 목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한국판 뉴딜을 경기부양이나 성장동력 발굴을 넘어 사회 재계약 프로젝트로 분명히 규정한 중요한 장면이다.

재난은 속성상 매우 특별하고 압축적인 정치의 공간을 연다. 코로나19는 이 위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라는 비교적 단순한 질문으로 출발하지만, 놀랍도록 풍부하고 복잡한 정치의 질문들을 쏟아낸다. 이 위험의 속성이 무엇인가, 위험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위험에 ‘당첨’된 사람들을 사회는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나하나가 정치의 본령에 닿아 있는 질문이다.

코로나19의 경험은 한국의 진보주의에 낯선 언어를 공급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파들에게 익숙한 단어는 주로 평등과 분배와 복지였다. 자유는 보수의 언어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재난을 겪으면서 일련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코로나19라는 보편적인 위험은, 위험관리가 자유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낯설던 접근법을 직관적으로 납득시켰다. 위험관리의 핵심 아이디어는 보험의 원리에 뿌리를 둔다. 보편적 위험의 시대에 보편적 사회보험의 원리도 보다 친숙해졌다. 정치권에서 전 국민 고용보험 논의가 활발해도 “사회주의 발상”이라는 반발은 별로 들리지 않는다. 이 역시 큰 변화다. 보험은 위험을 더 많이 한데 묶어낼수록 더 잘 작동한다. 연대는 동료 시민들을 상호 의무의 사슬로 묶어내는 원리다. 한국 정치에서 사실상 의미 있는 취급을 받지 못했던 이 단어는 코로나19 위기 이후 빠르게 시민권을 얻고 있다. 이제 복지국가는 자선이나 빈민 구제가 아니라, 연대와 보험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자유의 확장 프로젝트로, 본뜻에 더 가깝게 이해된다. 그리고 대통령은 일련의 과정에서 도출되는 결론을 ‘모두를 위한 자유’로 정식화해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진보주의자들의 가치 목록이 재구성되고 있다. 재난이 열어주는 정치의 공간에서, 도구상자에 새로 추가된 가치들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외환위기가 남긴 각자도생의 교훈이 이후 한 세대를 지배했듯, 코로나19 재난이 남긴 교훈도 이후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규정할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외환위기도 재난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고양된 연대로 출발했지만, 결국 싸늘한 각자도생으로 귀결됐다. 코로나19 재난에서도 우리는 좋은 출발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고양된 감정이 식어가고 경제위기가 취약계층만 골라 때리는 상황이 오면, 다시 외환위기 때의 실패를 반복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까지 〈시사IN〉은 KBS와 공동기획으로 ‘코로나19 시대’를 3회에 걸쳐 탐구했다. 이제는 드물게 열린 정치의 공간에서 정치가들이 던지는 의제를 직접 만나볼 차례다. 〈시사IN〉은 다음 호부터, 코로나19 시대의 사회계약을 고민하는 정치가들에게 듣는 ‘진짜 뉴딜’ 시리즈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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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의외의 응답 편

천관율 기자
호수 663
승인 2020.06.02 11:53

-〈시사IN〉, KBS 공동 기획 대규모 웹조사

〈시사IN〉은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조망하는 사회조사를 기획했다. 한국인들은 개방적·수평적이어서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했을까, 순응적·수직적이어서 성공했을까. 질문은 꼬리를 물었고, 결과는 의외였다.

묶음기사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바이러스를 이기려면 필요한 것
‘보수의 전향’ 조사 어떻게 했나?
민주당 장기집권 ‘문재인 뉴딜’에 달렸다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갈림길에 선 한국 편
“한국에 변화가 이는 것은 분명”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모두를 위한 자유’ 편
ⓒ시사IN 윤무영

“이 결과가 정말 맞습니까? 이건 지나치게 깔끔한데요?”

“저도 코딩을 잘못했나 싶어서 몇 번 다시 봤어요. 이게 맞습니다.”

“사회조사에서 이렇게까지 결과가 딱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가요?”


“거의 없죠. 정말 드물어요 이런 건.”

둘 사이에 노트북 한 대를 놓고, 기자와 임동균 교수(서울대 사회학과)가 이런 대화를 몇 번씩 주고받았다. 숫자를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가 어려웠다. 우리 앞에는 방대한 조사 문항을 분석한 결과가 주르륵 떠 있었다. 데이터는 일관되게 하나의 결론을 가리켰다. 사회심리학 연구자로 이런 종류의 데이터를 숱하게 다뤄본 임동균 교수를 당황시킬 만큼 결과가 선명했다. “이런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나왔네요.” 5월15일 서울 양재동의 한 카페에서 나눈 대화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한국 사회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말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시사IN〉과 KBS는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사회조사를 공동으로 기획했다. 해결해야 할 질문이 많았으므로 문항을 대규모로 써야 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리서치의 웹조사를 이용했다.

5월1일. 서울대 임동균 교수 연구실에 〈시사IN〉과 KBS, 그리고 한국리서치가 모였다. 주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국 사회’였고, 그거 말고는 결정된 게 없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부터 불확실했다. 흥미로운 도전 과제는 뜻밖에 프랑스에서 날아왔다. 기 소르망. 프랑스가 자랑하는 석학이다. 거시적인 문명비평으로 이름이 높고, 한국에도 그의 저서 여러 권이 출간돼 있다. 그는 4월27일에 프랑스 주간지 〈르푸앵〉과 인터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유교문화가 선별적 격리 조치의 성공에 기여했다. 한국인들에게 개인은 집단 다음이다.” 한국이 방역에 성공한 이유가 정부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국민성 덕분이라는 얘기인데, 유럽이나 미국은 정부 말에 순응적이지 않은 주체적인 국민이라서 방역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뜻도 된다.

ⓒ연합뉴스기 소르망 파리정치학교 교수는 유교문화가 한국의 방역 성공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한국은 왜 방역에 성공했는가. 이것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끝없이 논란이 된 질문이었다. 일종의 해석 투쟁이 세계적으로 벌어졌다. 첫 상대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방역을 일종의 체제 경쟁으로 받아들였다. 재난 상황에서는 유약한 민주주의보다 단호하고 유능한 권위주의가 더 낫다고 보여주려 했다. 2월26일 관영지인 〈인민일보〉 논평은 이렇게 쓴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가 이 전쟁에서 이길 중요한 제도적 보장이며, 세계적인 방역 전쟁에도 귀중한 노하우다.”

이 시기에 서방 언론은 중국의 주장에 대한 반례로 한국을 내세웠다. 한국은 개방성과 투명성을 무기로 방역에 성공한 모델 국가였다. 3월11일자 〈워싱턴포스트〉에 칼럼니스트 조 로진이 올린 논평 제목은 ‘민주주의가 코로나19에 맞설 수 있다는 걸 한국이 보여줬다’이다. 〈뉴욕타임스〉, BBC 등 주요 서방 언론의 논조도 이와 비슷했다. 이 시기는 서방 주요 선진국들이 코로나19를 ‘동아시아의 문제’로 한발 떨어져서 보던 때다.

이후 코로나19가 유럽과 미국을 휩쓸기 시작한다. 이제 미묘한 문제가 생긴다. 한국이 민주적 개방성과 투명성 덕분에 성공했다는 해석을 고수하면, 미국과 유럽이 그에 못 미친다는 뜻이 된다. 이때부터 한국의 방역 성공을 ‘감시국가’ ‘통제사회’ ‘동아시아적 집단주의’ 등으로 설명하는 시도가 일각에서 등장한다. 프랑스에서는 비르지니 프라델이라는 변호사가 4월6일 〈레제코〉 온라인판에 이 같은 주장을 담은 글을 올렸다. 주프랑스 한국 대사관이 이 글에 공식 항의하는 소동도 있었다.

한국을 중국의 라이벌 모델이 아니라, 큰 틀에서 ‘중국 모델’로 묶어 설명하는 담론이 등장한다. 권위주의, 집단주의, 개인 자유를 침해하는 강한 정부 등이 핵심 속성이다. 그 반대편에 서구 문명이 있는데, 이들은 개방적이고 시민 자유를 중시하며 정부를 끝없이 의심하는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감염병 대응에는 취약하지만, 그것은 더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다. 4월27일 기 소르망의 인터뷰는, 거물급 지식인이 이런 맥락에서 한국 방역을 평가한 중요한 자료다. 그러니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인들은 개방적·수평적이어서 성공했나, 순응적·수직적이어서 성공했나? 한국 모델은 중국 모델의 반대편에 있나, 중국 모델의 옆에 있나?

어떻게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방역 참여 태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 가능한 변수를 최대한 많이 검토했다. 권위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중 누가 더 방역에 적극 참여할까? 개인주의자와 집단주의자는? 정치 성향상 우파와 좌파는? 순응적 성향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은?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하는 성향과 그렇지 않은 성향은? 결과를 알고 보면, 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답을 모르던 5월1일의 시점에서, 우리는 이 모든 질문들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기 소르망의 지적은 틀렸다

그물은 최대한 넓게 쳤다. 어느 그물에 걸릴지는 결과를 봐야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도 있었다. “특정한 상황에 처할 경우, 나는 원숭이 고기를 먹을 수도 있다.” 우리가 당황스러워하자, 이 문항을 제안한 임동균 교수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역겨움에 민감한 정도를 테스트하는 문항입니다. 역겨움에 민감한 사람은 감염병을 더 위협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방역에 더 적극적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죠. 그걸 검증해보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가설을 최대한 집어넣고 나니 문항 228개짜리 방대한 조사가 나왔다.

5월15일은 어느 그물에 답이 걸렸는지 확인하는 날이었다. 이날 임동균 교수는 모든 가설을 통계 검증한 결과를 가져왔다. 방법은 이랬다. 조사 문항 중에는 방역에 적극 참여한 정도를 묻는 질문이 10개 들어가 있다. ‘전혀 하지 않는다’ ‘가끔 하는 편이다’ ‘자주 하는 편이다’ ‘항상 한다’ 네 단계로 답을 받았다. ‘전혀 하지 않는다’를 1점, ‘항상 한다’를 4점으로 해서 점수를 매겼다. 문항이 총 10개이므로, 최소 10점에서 최대 40점까지 ‘방역 참여 점수’를 계산할 수 있다. 10개 문항은 다음과 같다.

1. 외출 시 마스크 착용
2. 대중교통, 사무실 등 실내에서 마스크 착용
3. 손 씻기
4. 손세정제, 소독제 사용
5. 외출 자제
6. 외식 자제
7. 극장, 백화점, 대형마트 등 출입 자제
8. 모임, 회식 불참 또는 취소
9. 대중교통 이용 자제
10. 종교행사 불참(종교인만)

방역 참여 점수와 응답자들의 성향을 비교해보면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 방역에 더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를 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기 소르망은 틀렸다. 권위주의 성향은 방역 참여 점수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 성향이 강할수록 방역에 적극 참여하는 경향은 발견되지 않았다.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권위주의 성향이 강할수록 방역 참여에 오히려 더 소극적인 경향이 약간 있습니다.” 임 교수가 덧붙였다. 순응적인 성향도 방역 참여 점수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 집단주의 성향도 마찬가지로 나왔다.

이 결과는 꽤 의외였다. 방역 참여에 적극적인 사람은 정부 지침을 잘 따르는 사람이고, 정부 지침을 잘 따르는 사람은 권위에 순응하는 집단주의 성향이 강할 것이다. 이것은 비르지니 프라델 변호사와 기 소르망이 연이어 제기한 그 가설인데, 직관적으로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데이터는 다른 결론을 낸다.

그렇다면 방역에 참여하는 정도를 결정하는 무언가 다른 요인이 있다는 뜻이다(‘원숭이 고기’는 아니었다). 임동균 교수는 가설 둘을 지목했다. 첫째는 ‘민주적 시민성’이었다. 이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일수록 방역에 적극 참여하는 경향이 통계적으로 확인됐다. 둘째, ‘수평적 개인주의’ 성향이 강할수록 방역 참여에 더 적극적이다.

통계분석 결과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표 1〉을 그렸다. 권위주의 성향의 강도에 따라 응답자를 상중하 세 그룹으로 나눈 뒤, 각 그룹의 방역 참여 점수를 비교해보았다. 순응적 성향, 집단주의, 민주적 시민성, 수평적 개인주의도 같은 방법으로 그렸다. 앞의 셋(권위주의, 순응 성향, 집단주의)은 상중하에 상관없이 비슷하거나 차이가 크지 않다. 뒤의 둘(민주적 시민성, 수평적 개인주의)은 각 성향이 강해질수록 방역 참여 점수가 올라가는 경향이 더 확연하다. 권위주의, 순응 성향, 집단주의는 한국의 방역을 성공시킨 힘이 아니다. 민주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들, 수평적 개인주의자들이 방역 성공의 주역이다. 결과가 하도 선명해서 다른 결론을 내기가 불가능했다.



이쯤에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동화 같은 마무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동화보다 복잡하다. 민주적 시민성이라는 게 대체 뭘까? “그게 참 오묘합니다. 민주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데도 또 뚜렷하게 공동체 지향이 강해요.” 임 교수가 말했다. 민주적 시민성을 측정하는 데 우리가 쓴 방법은 아래와 같다. 다음 7개 문장을 제시한 후, 좋은 국민이 되는 데 각각이 어느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중요하다는 응답이 강할수록 민주적 시민성이 높다고 분류된다.

1. 선거 때 항상 투표한다.
2. 법과 규칙을 항상 잘 지킨다.
3. 정부가 하는 일을 늘 지켜본다.
4. 사회단체나 정치단체에서 적극 활동한다.
5.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6. 조금 비싸더라도 정치, 윤리, 환경에 좋은 상품을 선택한다.
7. 나보다 못사는 사람들을 돕는다.

민주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은 집단주의자나 권위주의자와는 구별된다(3번, 5번 등). 그렇다고 개인주의나 자유주의로 이들을 온전히 설명하기도 어렵다(2번, 6번 등). 개인주의 대 집단주의,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분법이다. 민주적 시민성은 이런 이분법으로 잘 포착되지 않고, 둘을 적당히 섞어놓은 절충과도 다르다. 이들은 개인이 자유롭기를 바라지만, 좋은 공동체 안에서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데 강하게 의무감을 느끼므로, 자신처럼 하지 않는 동료 시민들을 무임승차자라고 싫어하는 성향도 강하다. 그러니 마냥 이타적인 시민과도 다르다.

우리는 어쩌면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한국 방역의 성공을 두고 등장한 해석 투쟁은 대체로, 익숙한 이분법 위에서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논쟁이었다. 그런데 데이터는 아예 이 이분법을 뛰어넘는 곳에 답이 있다고 암시한다. 공동체 지향적인 개인주의자, 공공재 생산에 기여할 의지를 가진 시민, 무임승차자를 처벌하고 싶어 하는 자유주의자. 이런 사람은 한 단면만 보아서는 권위 순응형 인간으로도 보이고, 반대편에서 보면 공동체 자체에 무관심한 자유주의자로도 보인다. 민주적 시민성은 둘의 절충이 아니라 제3의 꼭짓점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에 기여하고자 하는 시민’을 뜻한다.

이 렌즈를 통해 사회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 한국인들은 물론 코로나19를 두려워한다(〈표 2〉). “내가 확진자가 될까 두렵다”라는 문장에 64%가 동의했다(다소 그렇다 46%, 매우 그렇다 18%). 하지만 한국인들은 감염 자체보다도, “주위 사람들에 피해를 끼칠까 봐 두렵다”라는 문장에 더 많이, 더 강력하게 동의했다. 86%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 중 ‘매우 그렇다’는 강한 응답도 48%나 되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으므로 매우 이기적이다”라는 문장을 주고 동의하는지 물었다. 85%가 동의한다고 답했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까 봐 가장 걱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방역 지침을 지키려 노력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어서 문제다. 무임승차자다. 하지만 그걸 국가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의견이 엇갈린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정부가 처벌해야 한다”라는 문장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47%다.

코로나19 국면에는 대단히 독특한 합의가 존재한다. 코로나19는 치명률은 높지 않은 반면 전파력은 대단히 강해서, 개인 건강보다 사회관계에 끼치는 파괴력이 더 크게 느껴진다. 감염을 조심해야 하는 핵심 이유는 남에게 피해를 줄 것이기 때문이고, 방역지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다. 이렇게 해서 코로나19 방역이란 질병을 회피하거나 건강을 염려하는 태도보다도, 공공재를 함께 만들어가는 싸움에 더 가까워진다. 민주적 시민성이 강할수록 방역 참여에 적극적인 이유가 여기서 확인된다.

공동의 목표를 앞에 두고 함께 싸워나가는 경험, 공동체에 중요한 일에 참여하는 경험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양시킨다. 극단적인 사례는 전쟁이다. 전시에 사람들이 들뜨고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느끼는 힘은 널리 알려져 있다. 코로나19 방역전에서 시민들은 전시 고양감을 저강도로 경험하는 것 같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방역 참여를 이례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방역 지침을 내가 잘 지킨다고 응답한 비율은 96%, 우리나라 국민이 잘 지킨다고 응답한 비율은 82%다. 일종의 ‘전우애’가 작동하고 있다.
응답자 48% “정치에 관심 늘었다”

코로나19 유행 이후로 생각이 바뀐 대목이 있는지, 여러 질문을 던져봤다(〈표 3〉). 우리 국민이 ‘단결이 잘되는 편’이라고 생각을 바꾼 비율은 64%나 되었다. 26%는 변화가 없었고, 11%는 ‘분열이 잘 되는 편’이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고양된 감정과 공동체 소속감이 뚜렷하게 잡힌다. ‘정치에 관심이 늘었다’는 응답도 48%로 상당히 높았다. ‘변화 없다’ 43%, ‘관심이 줄었다’ 10%였다. 이 숫자는 2020년 총선 투표율이 크게 오른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한다. 더 놀라운 결과는 다음 질문에서 나온다. ‘내가 낸 세금이 제대로 쓰인다고 믿게 되었다’라는 응답이 43%다. ‘낭비된다고 믿게 되었다’는 24%다.



코로나19 국면에서는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뢰가 크게 상승했다. 심지어 세금조차 그렇다. 세금 관련 질문에서 신뢰도가 올라갔다고 답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는데, 그 드문 일이 일어났다. 방역 공공재가 잘 생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정부가 매끄럽게 작동했다고 평가하는 한국인들은 공적 제도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전시 고양감과 한 쌍으로, 전시 사령부에 대한 신뢰다.

그 결과, 한국은 해묵은 선진국 콤플렉스를 벗어던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표 4〉). 선진국과 한국의 역량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을, 역시 여러 방법으로 던져봤다. 국가의 총체적 역량에서, 한국이 선진국보다 더 우수하다는 응답은 39%였다. 비슷하다는 응답도 31%였다. 둘을 합치면 70%가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일반 시민의 역량에 대한 평가가 더 후하다. 58%가 한국이 선진국보다 시민 역량이 더 위라고 평가한다. 비슷하다는 응답은 26%였다. 둘을 합치면 84%인데, 우리 국민이 방역 지침을 잘 지킨다는 응답 82%와 거의 일치한다. 방역 공공재를 함께 만들어내는 시민들의 역량을 서로 지켜보는 중이고, 이것이 코로나19 국면에서 두드러지는 자부심의 원천인 것 같다.

한국 사회 대부분 영역에 대해 신뢰가 쌓이고 있다. 우리는 사회 각 분야에 대해, 코로나19 이전과 대비해서 더 신뢰하게 되었는지, 불신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신뢰하게 되었다는 응답에서 불신하게 되었다는 응답을 빼서 ‘신뢰 변화 지수’를 뽑아봤다. 신뢰가 늘어난 분야는 플러스(+)로, 줄어든 분야는 마이너스(-)로 표시된다. ‘신뢰 변화 지수’가 큰 순으로 늘어놓은 결과가 〈표 5〉다. 질병관리본부가 +75, 의료인·의료기관이 +72로 단연 높다. 감염병을 직접 다룬 최전방이 가장 큰 폭의 신뢰 상승을 맛봤다. 특히 공적 제도 신뢰가 눈에 띄게 올랐다. 청와대가 +29, 정부가 +27이었다. ‘전우애’를 반영하듯 한국 국민에 대한 신뢰도 +21이었다. 가족(+67)이나 친척(+41) 등 혈연집단 신뢰가 높아졌다. 신뢰가 깎인 영역도 있다. 언론은 -45를 기록해 갈수록 신뢰 위기를 겪고 있다. 종교기관은 -46으로 언론과 비슷한 수준의 위기다. 국회는 -33인데, 제1당과 2당을 쪼개보면 결과가 엇갈린다. 1당인 민주당은 -3으로 선방했다. 2당인 미래통합당은 -56으로 크게 흔들렸다.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가 -36으로 낮아진 사실은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것은 감염병 국면의 전시 고양감이 진짜 전쟁 국면의 전시 고양감과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이다. 감염병은 연대와 협력의 의지를 북돋는다는 점에서 전쟁과 닮았지만, 같은 국민이라도 낯선 사람을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배척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전쟁과 다르다. 임동균 교수는 감염병 특유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들이 목표를 기꺼이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함께 추구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협이다.” 목표를 공유하는 ‘추상적인 동료 시민들’은 끈끈해진다(한국 국민 +21). 하지만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구체적인 동료 시민들’은 밀어낸다(낯선 사람 -36).

한국은 저신뢰 사회의 대표 국가로 오랫동안 알려져 있다. 혈연집단에 대한 신뢰는 강한 반면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는 낮다. 신뢰가 낮으면 같은 일을 할 때도 더 많은 계약과 보증서와 변호사와 치안 능력이 필요하다. 이게 다 비용이다. 그래서 한 사회의 신뢰수준은 그 사회의 보이지 않는 재산,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평가받는다. 코로나19 국면에서 신뢰수준이 올라간다는 발견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정부와 같은 공적 제도에 대한 신뢰는 올랐다. 한국 국민과 같은 추상적인 대상에 대한 신뢰도 올랐다. 하지만 사회적 신뢰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는 오히려 후퇴한다. 한국을 저신뢰 사회로 규정했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내 연구는 사회 신뢰를 다룬 것이고, 최근 한국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제도 신뢰 상승이므로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음 문항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표 6〉은 각각의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답한 비율을, 코로나19 유행 이전인 2019년의 기존 조사와 비교한 것이다. 코로나19 국면을 거치며 응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볼 수 있다. “정부는 우리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우리나라는 복지제도가 잘 갖춰져 있다”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다”라는 응답은 모두 크게 올랐다. 하지만 “법이 공정하게 집행된다” “계층 상승 기회가 열려 있다”라는 항목에는 예나 지금이나 응답자들이 시큰둥하다. 코로나19 국면이 만들어낸 고양감과 신뢰는 특정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 같으며, 이것은 ‘저강도 전시(戰時) 효과’여서 상황이 안정되면 사라질 수 있다. 이 힘이 사회를 질적으로 도약시켰다는 인식은 아직 없다. 법 공정성이나 계층 이동성에 대한 평가는 그리 호전되지 않았다.



감염병은 공동의 목표를 향한 준전시 상태를 가져왔다. 그로부터 ‘전우애’, 승리를 거둔 시스템에 대한 신뢰, 그 결과로 나타나는 자부심과 고양감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물론 좋은 출발이다. 사회가 질적 도약을 이뤄내려면 이런 재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재료들과 질적 도약 그 자체는 구분해야 한다.

민주적 시민성이 ‘자유로운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에 기여하는 좋은 시민’을 뜻한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동체’의 폭과 깊이다. 이 공동체는 넓어지고 있는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우리끼리의 결속’을 다지는 것은 아닌가? 깊이는 깊어지고 있는가? 감염병 특유의, 낯선 사람을 밀어내려는 힘과 민주적 시민성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이런 복잡한 질문들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코로나19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아직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왜 방역에 성공했나?”라는 질문을 붙들고 밀어붙이다 보니 더 많은 질문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코로나19라는 경험은 우리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나? 그 변화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단계로 나아가는 중인가? 한국 사회가 이 재난을 계기로 질적 도약을 이뤄낼 가능성이 있는가? 그걸 이뤄내려면 지도자는, 시민은, 지식인은,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다음 호에서 이 질문들에 답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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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위대한 세대’는 출현할 수 있을까?

-〈시사IN〉, KBS 공동 기획 대규모 웹조사


〈시사IN〉은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조망하는 사회조사를 기획했다. 코로나19 이후 한국인들은 복지제도에 대한 신뢰는 높아졌지만 복지에 찬성하는 태도는 약해졌다. ‘시스템 정당화’ 경향이 강해지면서 권위주의 성향도 함께 높아졌다.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놓여 있다.
ⓒ시사IN 이명익
코로나19는 한국에 ‘위대한 세대’를 탄생시킬까. 좀 낯선 질문이다. 맥락을 보려면 미국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미국에는 ‘가장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세대가 있다. 1901~1927년 태생이다. 이 세대는 청년기에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이겨냈고, 1950년대에는 미국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 개념을 널리 알린 〈나 홀로 볼링〉을 썼다. 이 책은 미국 사회의 질이 왜 갈수록 나빠지는지, 사회적 자본이 왜 갈수록 쪼그라드는지 추적했다. 답은 의외였다. 사회적 자본을 유난히 풍부하게 가졌던 윗세대가 퇴장했기 때문이다. 그게 전쟁을 겪은 세대, 그러니까 위대한 세대였다(퍼트넘은 1910~1940년생까지로 좀 더 넓게 잡는다). 이 세대는 후속 세대보다 공적 토론에 더 관심이 많고, 더 많이 투표하고, 시민적 결사와 공공업무에 더 많이 참여하고,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돕고, 동료 시민들을 더 신뢰한다. 한마디로 더 나은 시민이다.
위대한 세대는 가장 가혹한 전쟁의 자식들이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응집력을 극적으로 높이므로, 때로 전쟁은 더 나은 시민을 만드는 용광로다. 퍼트넘은 방대한 데이터를 검토한 후, 결론으로 이렇게 쓴다. “1945년(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다)에 절정에 달했던 국가 통합의 시대정신과 전시(戰時)에 불붙은 애국심이 시민정신을 강화했을 것이다.” 그 힘은 이 세대가 살아 있는 내내 사라지지 않을 만큼 오래갔다. 이들이 주도한 시대에 미국은 최전성기를 달렸다.
ⓒAP Photo1945년 8월14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축하하는 뉴욕의 인파 속에서 한 수병이 키스하고 있다
코로나19 방역전은 낮은 강도의 전시상태와 비슷한 경험을 모든 국민이 공유하도록 만든다. 이 경험은 한국에서도 더 나은 시민들의 세대, 그러니까 ‘위대한 세대’를 탄생시킬까. 〈시사IN〉과 KBS는 공동으로 코로나 시대 사회조사를 기획하면서 결국 이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 그렇다면 물어봐야 할 주제는 정해져 있었다. ‘신뢰’다.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핵심 중 하나가 신뢰다. 기획 단계이던 4월28일, 사회학자 장덕진 교수(서울대)와 통화했다. 우리가 신뢰를 다룰 생각이라고 하자, 그는 곧바로 이렇게 답했다. “아이템 잘 잡았네요. 그게 요즘 사회학계에서도 최대 화두예요. 코로나19 이후 한국 사회의 신뢰도가 어떻게, 왜 움직이나.” 5월1일,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임동균 교수가 합류했다.
〈시사IN〉·KBS 공동기획 사회조사는 한국리서치의 웹조사 방식을 이용해 228개 문항을 사용하는 방대한 조사다. 크게 두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첫째, 지금까지의 방역전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그 결과를 지난주 〈시사IN〉 제663호에서 소개했다. 둘째, 그 경험은 우리를 어떻게 바꾸었나. 신뢰도의 폭발적인 상승은 여러 사회조사에서 되풀이해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바뀐 것은 무엇이고 그대로인 것은 무엇인가. 그 변화는 한국 사회를 어디로 끌고 갈까. 이번 호의 주제다.
장덕진 교수가 “신뢰”를 듣자마자 “요즘 사회학계의 최대 화두”라고 말한 이유는, 신뢰도 수치가 폭발적으로 움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신뢰는 그 사회가 얼마나 건강하고 유능한지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신뢰가 낮으면 같은 일을 할 때도 더 많은 계약과 보증서와 변호사와 치안 능력이 필요하다. 이게 다 비용이다. 그래서 한 사회의 신뢰수준은 그 사회의 보이지 않는 재산, 즉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한국은 대표적인 저신뢰 사회로 알려져 있다. 공적인 제도 신뢰는 대체로 낮다. 이번 기획과 별개로 〈시사IN〉이 창간 이후 매년 시행해온 신뢰도 조사에서, 각 정부기관 신뢰도는 10점 만점에서 대체로 4점대를 꾸준히 맴돈다. 2019년 조사에서 가장 높은 신뢰 점수를 받은 국세청이 4.7점이었다. 사적 사회 영역에서, 가족 신뢰는 강한 반면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는 낮다. 저신뢰 사회의 전형적 특징이다.
좋은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좋은 공공재를 만드는 일을 잘 해낸다. 그런데 신뢰수준이 낮으면 이게 안 된다. 특히 낯선 사람을 못 믿으면 문제가 된다. 저신뢰 사회는 공동의 프로젝트를 해내기에 더 무능한 사회다. 코로나19를 겪으며 한국의 신뢰수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얘기는, 그러니까 ‘한국이 저신뢰 사회를 탈피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코로나19는 한국 사회를 질적으로 도약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표 1〉은 대통령, 정부, 국회 등 공적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를 10점 만점으로 물은 결과다. 대통령과 정부 신뢰도는 과거 데이터와 비교해 크게 올랐다. 대통령 신뢰도 6.2점과 정부 신뢰도 6.1점은 각종 신뢰도 조사에서 거의 등장한 적이 없을 만큼 높다. 과거 조사 대비 50% 가까운 폭등이다. 미묘하지만 의미심장한 변화는 국회 신뢰도다. 응답자들은 대체로 국회를 싫어하기 때문에, “국회를 신뢰하게 되었는지 불신하게 되었는지” 물어보면 불신한다는 답이 훨씬 높게 나온다. 지난 호에 소개한 ‘신뢰 변화 지수’에서 국회가 -33점이 나온 이유다. 하지만 10점 만점으로 물어본 뒤 과거의 같은 질문과 비교해보면 결과가 다르다. 국회 신뢰도 3.8점은 2016년 조사(3.0점) 대비 27% 상승한 결과다.
〈표 2〉는 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주요 복지제도 신뢰도가 일제히 높게 나온다. 건강보험 신뢰도는 무려 88%에 이른다. 건강보험제도의 위력을 코로나19 국면에서 실제로 경험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코로나19와 직접 관련되지 않는 다른 복지제도들도 신뢰도가 매우 높다. 고용보험 신뢰도는 78%, 기초노령연금 신뢰도는 72%, 이번에 일시 도입된 재난지원금 신뢰도는 73%였다. 심지어는 급속한 노령화 때문에 젊은 가입자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국민연금조차 67%가 신뢰한다고 답했다. 세대별로 보면, 가장 신뢰도가 낮은 20대에서 56%가 국민연금을 신뢰한다고 답했다. 과거 조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U자 곡선’의 덫 빠져나오는 중일까

코로나19 국면은 특정한 제도가 아니라, 공적 시스템 전반의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것 같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다. 장덕진 교수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공적제도 신뢰가 ‘U’자 모양 곡선을 그리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권위주의 시절에는 다른 정보가 없어서 정부를 신뢰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래서 국제 비교를 해보면 권위주의 저개발 독재국가의 정부 신뢰가 꽤 높게 나온다. 그러다가 민주화가 진전되고 투명성이 높아지면, 그때부터는 다른 정보와 의견에 노출되면서 공적제도 신뢰가 추락한다.
한국은 민주화가 진전된 1980년대 후반부터 이 고비를 겪었다. 장 교수의 설명이다. “이 U자 곡선의 가운데에 걸린 시기가 되게 힘들어요. 정부가 뭘 하려 해도 신뢰가 없어서 일이 안 굴러가니까. 그렇다고 권위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이 시기를 견디면서 투명성과 민주주의 수준을 더 높여서 U자의 오른쪽 꼭대기로 가야 하거든요. 이런 반등 계기가 한국에서는 거의 안 보이고 신뢰가 지속적으로 낮은 구간에 걸려 있었는데, 코로나19 유행 이후 나오는 조사들에서 정부 신뢰가 전반적으로 높아지는 경향이 보입니다. 이건 굉장히 드문 일이고, 신뢰가 반등하는 계기가 될지 지켜봐야겠죠.”
공적제도 신뢰만 놓고 보면, 우리는 U자 곡선의 덫을 마침내 빠져나와 오른쪽 꼭대기를 오르는 중일지 모른다. 하지만 신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속성이 있다.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로 나타나는 사회적 신뢰다. 이건 왜 중요한가? 다른 사람들 없이 온전히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내 뒤통수를 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안심할 수 있을까? 유력한 수단은 국가의 강제력이다. 법이 제대로 집행되면 타인에게 속을 걱정은 덜 해도 된다.
하지만 자녀의 학교 일일교사 당번이나 눈 오는 골목 쓸기와 같은 일상적이고 삶 내내 반복되는 약속마저 변호사와 경찰을 대동해야 한다면, 타인을 신뢰하기 위한 비용이 너무 높아져서 신뢰 자체가 의미 없는 지경에 이른다. 공적제도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디에고 감베타는 “신뢰를 유지하는 데 무력에 의존하는 사회는 다른 수단으로 신뢰를 유지하는 사회보다 비효율적인 동시에 불쾌하다”라고 지적했다. 사회적 신뢰는, 변호사와 경찰 없이도 사회가 굴러가도록 만들어주므로 비용을 크게 낮춰준다.
그리고 이 논리에서 보듯, 사회적 신뢰와 공적제도는 어느 정도 서로를 대체해주는 경향도 있다. 사회적 신뢰가 높으면 사람들끼리 자율적으로 문제를 푸는 걸 더 좋아하고, 정부가 끼어들어서 제도와 규칙을 만들려 드는 걸 더 꺼린다. 사회적 신뢰가 부족할 때는, 정부가 규칙을 만들어서 집행하는 게 더 깔끔하고 억울할 일이 없게 느껴진다. 한국에서 사회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낮은 사회 신뢰를 예측 가능한 공적제도로 바꿔 끼우는 시도다.
한국의 사회적 신뢰도 공적제도 신뢰처럼 증가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여기서는 가족 신뢰는 강고하고, 낯선 사람 신뢰는 부족한 기존 경향이 그대로 이어진다. 10점 만점으로 물어본 낯선 사람 신뢰도는 3.9점이다. 가족(8.7점), 친척(7.3점), 이웃 사람(6.1점)은 물론이고 외국인 노동자(4.0점)보다도 낮다. “코로나19 이후 낯선 사람을 신뢰하게 되었나, 불신하게 되었나?”로 변화를 직접 물어본 문항도 있다. “신뢰하게 되었다”는 4%, “불신하게 되었다”는 40%이다.
감염병은 연대와 협력의 의지를 북돋는다는 점에서 전쟁과 닮았지만, 같은 국민이라도 낯선 사람을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배척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전쟁과 다르다. 임동균 교수는 감염병 특유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들이 목표를 기꺼이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함께 추구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협이다.” 각 집단에 대한 호감도를 물은 뒤, 2018년 한국종합사회조사(KGSS)와 비교해보았다. 2018년 대비 호감도가 떨어진 그룹은 넷이었다. 떨어진 폭이 큰 순서대로 보면 동성애자, 낯선 사람,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 이민자 순서였다. 감염병이 더 밀어낸 사람들이다.  
사회적 자본 연구자들은 긴밀하고 자주 보는 사이의 신뢰와, 낯설고 다시 만날 일 없는 타인과의 신뢰를 구분한다. 로버트 퍼트넘은 전자를 ‘두터운 신뢰’, 후자를 ‘얇은 신뢰’라고 불렀다. 그리고 후자가 사회적 자본에 더 결정적이다. “얇은 신뢰는 두터운 신뢰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를 넘어 신뢰의 반경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두터운 신뢰’는 일종의 접착제다. 내부 결속을 다지고 강한 동류의식을 끌어올린다. ‘얇은 신뢰’는 일종의 윤활유다. ‘우리’와 ‘저들’ 사이의 마찰을 줄이고 연결을 더 매끄럽게 만들어, 결국 ‘우리’ 자체를 확장한다. 코로나19는 한국 사회에서 접착제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윤활유 구실은 사실상 하지 않았다. 동성애자나 낯선 사람에 대해서는 더 냉담해졌다.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는 위대한 세대를 만들어가는 동료 시민인가, 그저 방역 성공에 열광하는 관중인가.
방대한 문항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매던 임동균 교수가 흥미로운 단서 하나를 포착했다. 복지 철학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는 이를 물어보는 질문 세 개를 던졌다.
1. 고소득자와 저소득자 간 소득 차이를 줄이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2. 정부는 실업자도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3. 정부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혜택을 줄이면 안 된다.
각각의 문항은 ‘매우 반대’부터 ‘매우 찬성’까지 5점 척도로 답하도록 되어 있다. 응답 평균을 점수로 환산해보았다. 셋 다 엇비슷하게 3.4~3.5점 정도가 나왔다. 보통보다 약간 찬성에 기운 수준이다. 그런데 이게 과거와 비교해 어떻게 바뀐 것일까?  
우리는 앞에서 복지제도에 대한 신뢰가 하늘을 찌르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따라서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설명은 이렇다. 코로나19 국면에서 복지제도가 좋은 것이라는 효능감을 사람들이 맛봤다. 따라서 복지 태도를 묻는 질문에는 복지를 지지하는 성향이 높아졌을 터이다. 정말일까. 2018년 한국중앙연구원 조사에서 같은 문항들을 뽑아 비교해봤다. 그 결과가 〈표 3〉이다.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복지를 찬성하는 취지의 세 문장에, 일관되게 동의 정도가 낮아졌다. 특히 1번 문항에 낙폭이 컸다. 2018년에 3.89점이었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3.54점으로 떨어졌다.

대통령 지지층이 더 권위적

복지제도 신뢰는 대단히 높은데 복지에 찬성하는 태도는 떨어졌다. 이 모순되어 보이는 결과를 설명할 방법이 필요했다. 효능감을 느껴서 복지제도 신뢰가 올랐다는 설명 말고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어쩌면 ‘시스템 정당화 심리’일 수도 있겠네요.” 임 교수가 말했다. “그게 뭡니까?” “현재의 제도와 시스템이 문제가 없고,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정당화하는 식으로 마음이 작동하는 겁니다. 시스템에 외부 위협이 닥쳐올 때 이 스위치가 켜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기 국면에서는 정치 지도자의 지지율이 오른다.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일단 제쳐두고, 똘똘 뭉쳐서 위기를 극복하는 게 먼저라는 식으로 우리 마음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비슷한 논리로, 위기는 현재 시스템의 모순과 하자를 일단 제쳐놓도록 만든다. 일단은 지금 있는 시스템으로 위기를 뛰어넘어야 하니까 그렇다. ‘시스템 정당화 심리’가 켜지면, 공적제도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이 강화된다. 국가 자부심도 높아진다. 반면 시스템을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 욕구는 줄어들고 현상 유지 성향이 강해진다.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 상태라면 복지제도는 신뢰하면서 복지 강화에는 시큰둥한 조합이 가능하다.
우리 조사에서는 시스템 정당화 성향을 측정한 문항이 없어서 이 가설을 직접 검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징후를 살펴볼 수는 있다. “권위주의 성향이 전반적으로 올라갔어요. 권위주의 측정 문항 7개에서 모두 상승세가 잡힙니다.” 임동균 교수가 말했다. 권위주의 성향을 측정할 때 쓴 문항은 아래와 같다. 7점 척도로 답을 받았다.
1. 우리나라를 망쳐놓고 있는 극단주의를 제압할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2. 정부 권력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국민들을 쓸데없이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3.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싸워 나라를 옳은 길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라면 무력 사용도 정당화될 수 있다.
4. 우리나라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폭넓은 인권 보장이 아니라 좀 더 강력한 법질서이다.
5. 권위에 대한 순종과 존경은 우리 아이들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6. 우리의 가치관과 법질서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문제 집단들을 강력히 척결해야 한다.
7.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국가 지도층의 인도에 잘 따르는 질서정연한 국민들이다.
이 결과를 2016년 KGSS 조사와 비교했다. 권위주의 성향이 모든 문항에서 약간이라도 상승했다. 변화를 잘 보여주는 네 문항만 추려서 그린 결과가 〈표 4〉이다.
지난 호에서 우리는, 한국의 방역 성공이 권위주의 성향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권위주의 성향은 방역 참여를 결정하지 않았다. 방역 참여를 결정한 변수는 민주적 시민성과 수평적 개인주의였다. 하지만 코로나19 방역전을 거친 후, 한국인들은 좀 더 권위주의적으로 이동하는 징후가 포착됐다. 이 둘은 다른 얘기다. 임 교수는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다’ 문항이나 ‘나는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럽다’ 문항에 동의하는 사람들일수록 권위주의 성향이 높게 나타납니다”라고 분석했다. 국가 자부심의 상승이 권위주의 성향 상승과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시민들 덕에 방역에 성공했지만, 성공의 결과 우리는 더 수직적이고 권위 지향적인 사람들이 될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드러난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가지 경로를 손에 쥐었다. ‘효능감’으로 출발하는 길과 ‘시스템 정당화’로 출발하는 길이다. 먼저 효능감으로 출발해보자. 우리는 방역전에서 제대로 잘 작동하는 공적제도를 보았다. 세계 선진국들과의 비교로 이게 확인됐다. 따라서 국가 자부심과 공적제도 신뢰가 올랐고, 특히 코로나19 국면에서 위력을 발휘한 건강보험제도가 나머지 복지제도의 신뢰까지 끌어올렸다. 효능감을 느낀 시민들은 더 자신감을 갖고 공적제도를 업그레이드해 더 큰 효능감을 맛보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정치에 더 참여하려 할 것이고, 정치 효능감도 더 크게 느낄 것이다.
이 설명을 뒷받침할 만한 데이터로 정치 효능감 응답을 살펴보자. 정치 효능감을 묻는 질문은 모두 네 개인데, 모든 질문에서 정치 효능감이 올랐다. “나 같은 사람은 정부가 하는 일에 어떤 영향도 주기 어렵다”라는 문장에, 응답자들은 5점 만점에서 3.25점을 기록했다. 이건 2014년 KGSS 조사의 3.49점보다 낮아진 것이다. 즉, 정부가 하는 일에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더 많이 생각한다. 나머지 세 문항도 추세는 일관된다.
이제 반대쪽 경로, ‘시스템 정당화’로 설명하는 길을 따라가보자. 위기 국면에서 사람들은 갖고 있던 불만을 접어두고 현재 시스템을 지지하도록 결집했다. 그 결과로 국가 자부심과 공적제도 신뢰가 올랐고 복지제도 신뢰도 따라서 올랐다. 하지만 현재 시스템이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에 복지를 요구하는 강도는 줄어들었다. 수직적 성향, 권위주의적 성향도 함께 올랐다. 이건 위기 국면에서 지도자를 중심으로 결집할 때 드러나는 전형적인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시스템 정당화’ 설명이 타당하다면 흥미로운 예측이 하나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일수록 권위주의 성향이 강해졌으리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평소라면 말이 안 된다. 문 대통령 지지층은 진보 성향이 강하고, 진보주의자들은 권위주의 성향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하지만 ‘시스템 정당화’ 가설은 이런 결과를 예측하도록 만든다. 임동균 교수는 ‘대통령 신뢰도 점수’를 기준으로 응답자들을 상중하 세 그룹으로 나눴다. 그리고 권위주의 7문항 응답을 기준으로 권위주의 성향 지수를 뽑았다. 그 결과가 〈표 5〉이다. 대통령 신뢰도가 높을수록 권위주의 성향이 높아졌다. 이 둘의 관계는 통계적으로 유의했다.
감염병 재난은 간명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법이 없다. 거의 언제나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상충하는 설명을 동시에 요구한다. 감염병은 우리가 더 큰 공적제도 효능감을 느껴서 더 적극적인 시민이 되도록 만드는 동시에,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더 보수적이고 내부 지향적인 시민으로도 만드는 것 같다. 효능감 경로와 시스템 정당화 경로는 둘 다 뒤엉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염병은 평등한 동시에 불평등하다. 모두를 동시에 위험에 빠트려서 평등하고, 똑같이 때려도 약한 곳부터 부러지니까 불평등하다. 감염병은 유대감과 거리감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공동의 싸움을 함께 겪고 있다는 유대감과 국가 자부심 위로 낯선 사람이 나를 감염시킬지 모른다는 거리감이 뒤섞인다. 감염병은 정말이지 독특한 재난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재난의 원래 속성이 그럴 수도 있다. 재난은 각자도생의 욕망과 서로 돕고자 하는 연대의식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것 같다. 미국의 위대한 세대는 2차 세계대전의 산물이지만, 모든 전쟁이 더 나은 시민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로버트 퍼트넘은 〈나 홀로 볼링〉에서, 왜 베트남전쟁은 2차 세계대전처럼 시민성 높은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못했나를 묻는다. 답은 이렇다. “2차 세계대전은 미국 경제사에서 평등 효과를 가장 크게 발휘한 사건이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소득 상위 5%가 차지하는 몫은 28%에서 19%로 떨어졌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노동조합이 대규모로 조직되고, 군수산업이 대규모 고용을 창출하고, 고소득자 세금이 크게 올랐다. 이 모든 변화가 평등화에 기여했다. 그렇다면 베트남전쟁은? “저학력자, 빈곤층, 흑인이 주로 참전했던 악명 높은 불평등은 냉소주의가 널리 퍼지는 데 크게 공헌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인들을 더 나은 시민으로 만들기는커녕 원자로 해체해버리는 전쟁이었다.
ⓒAP Photo1965년 베트남전쟁 때 어린이와 여성을 미군이 경비하고 있다.

우리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감염병 재난이 ‘위대한 세대’ 한국판을 만들어낼지, 외환위기 이후의 각자도생 시대를 되풀이할지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 갈림길이 외환위기 이후 사반세기 만에 맞이한 한국 사회의 대전환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데이터로 답을 내보고 싶었다. 그러나 데이터는 답 대신 꽤 평범한 진리를 알려주었는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정해진 법칙대로 굴러가는 예정된 답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세대가 만들어질 토양도 있고, 그에 반하는 징후도 있다. 갈림길 그 자체가 현재 상황의 본질이다.
공적제도 신뢰와 국가 자부심이 높아졌다. 이건 굉장한 자산이다. U자형 곡선의 함정을 빠져나갈 기회가 열렸다. 하지만 재난이 곧바로 신뢰와 호혜성이 넘치고 연대의 폭을 확장하는 좋은 시민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얇은 신뢰’는 사실상 움직이지 않거나 심지어 나빠지는 징후가 있다. 재난은 약간이라도 사람들을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금 국면에서 권위주의 성향이 올라간다는 사실이, 우리 미래가 나빠질 것이라고 결정되었다는 뜻은 또 아니다. 사회적 자본이, 특히 접착제와 같은 ‘두터운 신뢰’가 강화될 때는 내집단 충성심이 강화되면서 외집단을 밀어내는 부작용을 낸다. 사회적 자본과 편협한 태도는, 어느 정도는 함께 간다. 자산에 묻어 있는 부채와 비슷하다.
ⓒ연합뉴스5월28일 밤 서울 서소문역사공원에 마련된 임시 선별진료소에서 주민들이 코로나19 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갈림길 자체가 본질이라면 핵심 질문이 바뀐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는 일단 첫 판을 크게 이겼고 공적제도 신뢰를 판돈에 추가했다. 하지만 재난은 그냥 두면 불평등을 가속시키는 힘이 있다. 그리고 불평등은 위대한 세대의 출현을 가로막을 최대의 적이다. 퍼트넘은 간명하고 단호하게 이렇게 쓴다. “불평등과 사회적 연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외환위기 이후에 한국 사회는 재난의 갈림길에서 각자도생의 길을 갔다. 이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합의는 한국 사회에 폭넓다. 갈림길의 반대편에는 연대의 길이 있다. 여기까지도 이견이 크지 않다. 그러나 연대는 신뢰만큼이나, 어쩌면 신뢰보다 더 복잡하고 의미심장하고 풍성한 키워드다. 지금까지는 데이터가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었지만, 연대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낼지 숫자가 알려줄 수는 없다. 여기서부터는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의 영역이다. 19세기 사상가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이런 문장을 썼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이리저리 해석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이 문장은 재난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정치 지도자와 지식인들에게 특히 진실이다. 이걸 다루려면 또 하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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