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한인사] 반공포로 50명은 이렇게 해서 브라질에 왔다.
재외동포신문 승인 2004.10.23 00:00 댓글 0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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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언옹 편
김창언, 1956년이래 아니 내가 글을 쓸 수 있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이렇게 나의 이름을 쓴다. 미국식으로 창언 김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불러온 나의 이름 나의 부모가 지어 주신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부터 먼저 쓰고 이름을 쓰지 않는가? 36년 동안 브라질 회사 사원으로 일할 때도 나는 낑<KIM>이었고 부르기 쉬우라고 브라질 이름도 갖질 않았었다. 물론 내 여권 그러니까 약 50년전의 낡은 여권에는 국적불명(indefinida)이라 되어있다. 아직까지 난 한 번도 브라질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 박통땐가에도 특별 초청이 있었고 몇 년전 KBS에서 대단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계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반공포로들을 초청해 주었던 일. )
당시 나는 장인어른 (장승호 미다 할아버지)을 세아라에서 간병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석의 어른을 놓아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그때 영사관 직원들이 총출동하여 그 자리에서 소위 반공포로였던 우리 친구들에게 대한민국의 여권을 만들어 주었었다. 고맙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실은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1956년 우리들 반공포로 50명을 위해 미국에서 양유찬 대사가 리오에 왔었던 일이다.
그분은 꼬빠까바나 호텔에 머물며 우리들에게 대한민국여권을 만들어 주었었다. 그 일은 신문에 크게 났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데 그 때도 난 리오에 없었다. 친한(親韓) 인사인 미국선교사가 포어도 배울 겸 고이아스를 가라고 하여 7개월간 그 곳에 가 있었었다. 운명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운명이란 것이 이렇게 두 번씩이나 나를 빗겨 가버렸다.
지금 나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1933년생이니 내 나이 71세, 내 처와 세 아이들 모두 건강하고 이만하면 물질적인 어려움도 없고 그저 사후에 극락정토에 가기를 바라는 한 늙은이에 불과하다.
다만 하나. 올 11월에 일본 교또 근교의 도야마시(市)에 지금 내가 다니는 절의 본사가 크게 불사(佛事)를 하고 낙성식을 하는데 거기에 한 번 가보고 싶은 정도의 작은 바람이 있을 뿐, 그것도 여의치 못한 것이 난 국적불명자인데다가 출생지가 이북이므로 한국 여권을 내 줄 수 없다는 공식적인 답변때문이다.
꼭 가고 싶다기 보다 갔으면 하는 마음이니 못 가도 할 수 없는 일, 얼마나 많은 기막힌 일들을 겪으며 살아 왔는데….누구는 브라질로 귀화하면 되지않느냐고 하기도 한다.
그럼 왜 진작에 나는 브라질로 귀화하지 않았는가?
내 고향은 청진이다. 지금의 내게 제일 그리운 것은 학교 때 친구들이다. 청진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흥남 공대를 지원하자 전쟁이 났다.
전쟁은 청진시의 80%를 폐허로 만들었으니 부모님인들 온전하셨으랴. 게다가 난 외아들, 친척도 없었다. 학생들 500여명이 공병으로 전쟁터에 내몰렸다 우리는 학생이었지만 모두 끌끌했고 (실력이 있었고) 기계들을 잘 만졌었다.
전세가 위급해짐에 따라 우리도 최일선에까지 나가야 했었다. 전쟁이란 것은 영화에서 보는 것과는 아주 판이하다. 나외에는 다 적, 공포를 부듬켜 안으며 같이 있던 친구는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려 오로지 있다면 죽는구나 하는 생각뿐인 곳. 사상도 이념도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북의 공산당을 지지하는 사람은 실제로 없었으니 그냥 우리는 전쟁터로 끌려 나갔던 영문 모를 학생들에 불과했었다. 두만강 부근 풍산에서 유엔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가 8월이었던가? 포로들은 부산 수용소를 거쳐 거제도로 옮겨졌다.
한 겨울, 몹시 추웠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장면들, 아침이면 저 쪽에 공화기가 올라가고 이쪽에 태극기가 올라가고 동시에 서로의 국가를 부른다. 그리곤 돌싸움이 벌어진다. 공포의 나날들. 판문점에서는 정전협정이 벌어지고 있었고, 정전을 절대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을 종용하는 유엔을 상대로 많이 싸웠다.
당시 이북에 포로가 된 국군과 미군은 1만명도 안되었고,유엔군에 포로가 된 숫자는 15만도 넘었다., 그 쪽에서는 포로 전체를 맞바꾸자고 했고 이남에서는 1:1로 하자고 했다.
53년 6월 18일 새벽,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석방이라는 전격적인 역사적 선언을 하였다. 애국청년들을 더 이상 붙잡아 둘 이유가 없다. 국군 보초에게 철망을 끊어주라고 지시를 하였고.국민들에게는 반공 애국포로들을 누구나 가리지말고 접대해주라고 부탁도 하였다.
이러한 결단이 내리기까지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었다. 이북 보위부부장 이학구소장이 수용소내 포로들을 지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포로가 되어 들어왔다. 하루에도 잔혹한 학살로 죽어나가는 숫자가 엄청났다. 그는 66수용소에서 5천명을 훈련시키며 기회룰 보다가 포로의 대우,학대 등을 폭로하고자 도트 수용소 소장을 생포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그 사건은 세계의 톱뉴스가 되면서 휴전협정의 자기네 입지를 높이는데 이용하기도 했다 정전협정은 진행되었고 수용소안에서는 스위스, 인도 , 스웨덴 등의 중립국위원들이 1만여명인가 남은 포로 설득작전으로 들어갔다. 3개월의 설득 후 끝내 중립국을 희망한 76명의 한국인 포로는 8명의 중국인(대만도 중국도 싫다고 한)포로와 수용소를 관리했던 인도군 5천명과 함께 인도로 향했다.
76명, 평균 나이 20세 안팎. 성분도 각계 각층이었다. 5,6명은 나이가 좀 있었던 정치 보위부 장교 출신으로 이북으로 간대도 총살될 것 뻔한 사람들. 그러나 북한에 포로가 되었다가 귀국하여 범국가적인 영웅대접을 받았던 미국의 딘 소장과는 너무도 다른 경우가 아니랴!
집에 가야 가족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밖에 나가 원하던 공부나 하고자 했고. 그리고 옆의 친구들의 충동에 이끌렸던 사람들 등등…그러나 76명에게 공통되는 한 가지 의식은 “두 번 다시 전쟁은 싫다. 사상은 더욱 싫다.??였다.
뉴델리에서 2년, 많은 나라들이 우리를 외면했다..전쟁에 직접 관계가 된 나라는 대상이 되지 않고 우리가 가고자 원한 나라들은 받아 주질 않았다. 결국 알젠틴(15명이 선택)과 브라질(50명)과 인도(4명)가 우리를 받아 주었다. 그 사이 마음이 변해 이북으로 간 사람도 있었다. 선택 후 반 년간 브라질 영사를 통해 우리는 포어를 배웠다.또 브라질 영사관에서 우리들 50명을 초대해 주기도 했다. 그때까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 알고 있던 것은 아마존 밀림뿐이었던 브라질이 우리를 그 넓은 품에 안아 주었던 것이다..
56년 2월 마침내 우리는 비행기를 탔다. 에어 인디아로 런던으로 가서 다시 에어 프랑스를 타고 리오에 도착. 한참 카니발이 온 도시를 뒤엎고 있었던 때였다.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광경들이 우리들을 매혹시켰다. 지금도 나는 브라질을 천국이라 생각하지만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리오의 정경은 천국 바로 그것이었다. 천국, 정치적 증오가 없는 곳.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가 또 죽어나가지는 않나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곳. “ 너, 이리 나와!?? 뭔가를 조사하겠다고 날 불러 내지는 않을까? 공포와 불안에 떨던 수용소의 나날이 떠오르며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이민청에서 우리들은 영주권과 노동수첩을 받았다. 그때 내 나이 24세.
그런데 놀라운 일을 하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리오데자네이로 공항에 우리들 50명을 마중 나온 세 사람의 동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불안과 기대와 놀라움에 싸여 있던 우리들을 얼싸안아 준 세 사람의 동포. 그것도 브라질땅에서 말이다.
브라질 땅에서 듣는 우리말
아오끼로 불리던 김수조씨와 ‘미다 할아버지?? 장승호씨, 택시 운전사 이준창씨였다. 귀화한 일본인으로 이민선을 탔던 분들, 우리말을 잊어서 우리와는 비록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어야 했지만 지금도 그 감격과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우리를 한국 이민과 연결시켜 주신 분들이기도 했다.
6,7년 후였나? 산토스항으로 첫 이민들을 만나러 내려 갔었던 일 또한 잊을 수 없다. 많이 내려 갔었다. 배에서 내리는 한국 사람들을 본 순간, 가슴 가득히 차오르던 감격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아픔같기도 하고 행복같기도 했던 그 느낌을 어찌 전하랴. 그 분들이 주고 받는 우리말을 듣는 순간의 감격, 그들과 얼싸 안고 우리 말을 나누던 그 감격을 어찌 잊겠는가! 그땐 지금보다 우리 말을 더 잘 했었을 때였다.
그런데 잊히지 않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 분들이 가지고 온 짐이었다. 짐들이 참 굉장하기도 했다. 항아리까지 가져 온 이들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먼 이야기인 최초의 한국이민. 실패해 버린 농업 이민. 얼마든지 넓고 넓은 이 땅에 우리 부지런하면서도 지혜로운 한국 사람들의 세계를 심을 수도 있었는데, 그래서 계속되는 이민으로 지금쯤 더 큰 기회를 만들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당시 양국의 사업을 중간에서 이어주던 한 개인의 대실수 그리고 농업이민이라 온 사람들이 전혀 농사도 모르던 사람들이었던 본국 정부의 대상선정의 대실수 실수라기보다 개인적인 욕망의 발로라고 본다. 브라질 신문에는 한국에서 농사 특별전문가가 온다고 났었다.
그러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20년전인가 브라질에 무슨 기념식이 있어서 왔던 친구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이다. 알젠틴을 선택했던 친구 중 평양고보를 나온 정아무개가 있었는데 알젠틴에서 배의 선장이 되었다.그 친구가 자기 배를 가지고 한국에 나가 직접 어부들을 모집한 일이 있었단다.
어부이민을 추진한 것이다. 그 때 이민을 원한 사람 70여명을 데리고 떠났는데 운항하다 보니 배에서 토하는 사람들이 많고 고급 카메라로 사진도 막 찍는 것이 아닌가! 인도양 쯤해서(인도양은 파고가 아주 높은 곳) 어디 한 번 시험해 보자하는 마음으로 몇 사람에게는 그물을 던져 보라고도 하고 물 속에 들어가 보게도 했는데 결국 정말 어부였던 사람은 단 2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수영도 못하는 가짜 어부였었다고.
장인 어른이 좋아하신 한인 사회
당시 기계 기술자가 전무하던 브라질은 그 분야에 일감과 일자리가 무진장이었다.나는 10월경 썽빠울로에 와서 어려움없이 회사에 입사하였고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깜삐나스 같은 곳엘 갔었으면 공부도 할 생각이 들었을 텐데 썽빠울로의 생활은 일에서 안주하게 만들었다. 차차 눈이 높아지자 회사를 옮기게 되었고 골덱스사에서만 정년퇴직까지 25년간 일하였으니. 썽빠울로에서 내 생애를 거의 보낸 셈이다.
이제 나는 내 생애의 좋은 인연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장인이 되신 여러분의 미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 그 분은 기독신앙이 아주 깊었던 분이었다. 참신앙인이셨다. 이민 오기 전 16세 땐가? 천한 직업의 하나인 불 때는 일을 하면서도 성경을 읽었다고 하셨다. 성인(聖人)이 따로 있을까? 기독교 정신 그대로 살다 가셨던 분, 욕심을 전혀 모르던 분이셨다.
.그 분은 우리들 포로 출신들을 종종 집으로 초대하셨다. -9남매를 두셨는데 (2남 7녀, 현재는 2남 5녀) 그 중 둘째 따님과 나는 연애결혼을 하였다.- 부지런하시고 일하길 좋아하셨다. 참을성도 많았고 힘도 장사셨다. 옛날에 씨름도 하셨다고 들었지만 난 쌀 짐을 60킬로도 못 드는데 영감님은 그걸 번쩍 드시곤 했다. 85세때도 60킬로를 드셨으나 힘에는 한도가 있지 않은가!.
80년대 말이었나? 마침 난 퇴직하고 별 일이 없었던 때, 쌀장사를 하던 장인 어른을 도와 한 2년간 운전을 해드리며 가까이서 많은 것을 보게 되었다. 첫째 영감님이 외상을 많이 주고 그만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알았다. 기억을 잘 못하시는 것이었다. 사실 쌀 장사 그 자체는 괜찮은 것이었다.
주로 봉헤찌로에 많이 다니셨는데 세무서원도 80이 넘은 분이니까 별로 까다롭게 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익금을 아주 조금밖에 붙이질 않으셨고 아무나 한국 사람이면 쌀을 외상으로 주셨으며 물론 적지도 않으셨다.
쌀값을 주면 받으시고 안 주면 달란 말씀을 못하셨으며 게다가 목사님댁에는 더 싸게 드리기까지 하셨으니 어려움이 많을 수 밖에. 가끔 내가 “가솔린값도 나오지 않겠습니다.?? 하면 듣기 싫어하셨다. 도무지 악의없는 분이셨다. 그리고 얼마나 한인 동포를 좋아하셨는지…
나의 도움으로 쌀장사가 그런대로 안정이 되자 난 처제와 의논하여 2년간 모은 돈으로 한국 여행을 시켜 드렸던 것을 지금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영감님은 집보증도 참 많이 서주셨다. 한 번은 집세를 내지 않고 떠난 사람이 있어서 혼난 적이 있었다. 등기소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다시 문서를 만들기도 했지만 사람을 너무 믿는다고 말씀드려도 듣지 않으셨고 돈이 없어서 못냈겠지 하셨다. 잊어버리고 미국으로 간 경우도 있었지만 나중에 친척이 물어 주었다고 하셨다. 브라질에 <mereci>란 말이 있는데 우리 영감님이야말로 많은 은혜 받은 분이 아닐까?
7년간 중풍으로 누워 계시다가 92세에 가셨다. 장모님이 먼저 가신 후인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고 딸부자집이어서 돌아가며 간병을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다행이었다. 나중에는 목판에 뉘어 욕실로 갔다. 조금만 건드려도 뼈가 부러지는 위험 때문에 였다. 처남 하나는 꾸리찌바에서 자동차 수리소를 하고 있고 한 처남은 마나스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다.
요즘의 나날
동포의식,민족의식. 도대체 동포란 무엇인가? 지금도 나는 가끔 이 질문을 스스로 해본다. 제일 중요한 문제이다. 이 땅에서 오래 살다 보니 또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난 국제인이 된 것 같다. 그러나 나이들수록 고국이 그립다. 말할 수 없이 그리워진다. 김치도 만들어 먹고 그걸 아는 집사람도 김치를 자주 담가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모님 기억!
인터뷰때마다 그 얘기가 나오지만 잊을 수 밖에 없어서 잊었고 억지로라도 잊으려 하니 잊어졌고 생각할수록 그립고 그리다보니 잊어졌다. 이따금 꿈 속에 나와 다음 날이면 너무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아지기도 했었다. 우리 친구들 가운데에는 집 생각, 부모님 생각에 골몰하다 머리가 도는 경우도 있었다. 전쟁도 그렇다. 자꾸 잊으려 노력해도 잊어지지 않는다. 한국 ? 물론 가보고 싶다. 그러나 …
왜 나는 브라질로 귀화하지 않았는가?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국적이 문제 된 적이 없었고 1956년 이래 지금까지 난 단 한번도 귀화의 필요성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귀화를 하게 되면 선거권을 가지게 되고 투표를 해야 하며 정치적 소견도 가져야 하는 것, 나는 그것이 싫었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돈밖에 모르는 것 같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은데도 돈이면 만사가 다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결과인가 하다가도 전쟁터에서 온 나는 그래서 돈에다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생각을 떠올린다...이웃을 보며 옆 사람을 보며 살아야 한다.
인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 땅에 같이 왔던 친구들이 사라져 간다. 거의 다 죽고 이제 몇이 남질 않았는데도 만나기가 어렵다. 오늘도 같이 나오자고 했더니 인터뷰라면 모두 부정적인 반응이다. 그 많던 인터뷰! 우리들을 따라 다니는 ‘반공포로??란 말. 그런 우리들이 필요하면 불러내고 묻고 또 물었다. 참 많은 사람들, 신문사에서 방송국에서 우리를 찾았다. 기자,방송인, 작가,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인터뷰의 마당으로 불러 냈다. 그들의 필요성이 끝나면 다시 우리는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 오곤 했다.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사실 오늘도 나는 친구들을 만보고 싶기도 해서 전화를 했었는데 만나는 일조차 우린 힘들다. 지금의 나는 몸이 아픈 친구들이 걱정이 될 뿐이다.
강하진 않지만 함경도 억양이 있는 우리 말과 브라질 말,일본 말 모두 유창하신 김창언옹은 1933년 5월 18일생... 2남 1녀를 모두 대학교육을 시켰고 딸은 일본인 2세와 결혼하여 손녀가 둘이다. 장남은 USP 체육과, 막내는 BOTUCATU 수의대를 졸업하였고, 딸은 PUC 사범과를 졸업하여 유치원 경영 중. 부인이 일본국적도 있어서 두 아들은 데까사끼 붐을 타고 일본으로 일하러 갔었다.
지금은 막내는 일본에서 컴퓨터 계통의 일을 하고 있고 장남은 영국에서 일하고 있다. 둘 다 미혼. 세 아이는 장모님이 키워 주셔서 일본말을 좀 한다고 하신다. 두 아들이 일본에서 번 돈으로 식당을 차려.두 내외분은 그걸 돌보고 있다고.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 취미. 일본절에 다니시며 환자 방문등 자원봉사도 하신다. 절에 다니기는 한 2년 되었는데 인과(因果)원리를 이해하게 되면서 전부터 알았으면 좋았었을걸 하신다.
시야가 나빠져서 운전은 되도록 하지 않으며 브라질에 조금의 불만이 없다고. 회사 다닐 당시의 월급으로 세 아이 대학교육 시켰고 금요일이면 식구들 모두 함께 여행을 가곤 했었던 지난 생활이 행복하다고 느끼신다.
인프레가 심했을 때였어도 최저 임금의 10배의 기사 봉급으로 별 어려움은 없었던 생활.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아 퇴직 2년 전에 계약금만 주었던 집의 나머지를 다 내고도 남었었다고 기억하신다. 브라질 연속극은 보질 않는데 그 이유는 주로 여자들이 남자들의 질투를 일으키게 하는 스토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며 질투를 잘 참는 동양여자와의 차이를 지적하기도 하셨다.
우리말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받침이나 철자법에 자신이 없어서 뭔가 쓰고 싶어도 쓰게 되지 않는다고. 악몽과도 같은 지난 전쟁의 기억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한탄하는 김창언옹, 우리나라 고된 역사의 한 증인이 우리 옆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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