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끝난지65년지났는데도국군포로들이고국으로돌아오지못하는이유
2019년2월1일·zznz
↑유엔군포로들이남측지역으로송환되는모습
by김지지
6·25정전협정직후인1953년8월유엔군사령부는북한군중국군에포로가되거나전투도중실종된국군이8만2318명이라고발표했다1954년까지진행된포로교환에서한국에
돌아온국군포로는8343명이었다북한은나머지는모두북에전향했고따라서국군포로는없다고주장했다하지만1994년조창호소위가탈북한이후총80명의국군포로가
한국으로탈출했다상당수는전향한적이없다고증언했다북한인권단체인물망초에따르면80명중27명이생존해있다<조선일보2019년2월1일>
6·25전쟁휴전이늦어진가장큰이유는포로송환문제
625전쟁의휴전이늦어진것은전적으로포로송환문제때문이었다중공군의1951년춘계공세후전선이38선을경계선으로교착상태에빠지자미국은전쟁을명예롭게마무리할
생각을했다공산측역시무리하게전쟁을지속할생각은없어양측은협상을모색했다
양측은1951년7월10일개성에서제1차휴전회담을시작해7월26일군사분계선설정전투행위와정전상태감시기구설치등5개항의의제와의사일정에합의했다예상대로가장큰
걸림돌은5개항가운데제4의제인전쟁포로처리문제즉포로송환이었다포로송환문제는1951년10월처음협상의제에올랐다그러나회담벽두부터휴전협정조인즉시양측의
모든포로를석방하자는북한의주장에가로막혀더이상의진전을보지못하고공전을거듭했다
포로송환은1949년의제네바협정제118조전쟁포로는전쟁이끝나면지체없이석방되고송환되어야한다는자동송환원칙을준수해야한다는점에서공산측의주장은옳았다문제는
북한이나중국으로돌아가기를원치않는북한군과중공군포로들이많다는데있었다따라서그들을억지로송환하는것도인도주의에어긋난다유엔군은이런사정을감안해포로의
자발적송환원칙을고수했다
결국유엔군측은포로의개별의사를존중한다는자발적송환원칙으로도덕적우위와이념적승리를도모하려했고공산측은포로가운데북한이나중국으로귀환을거부하는자가나올
경우침략자를물리쳐남한을해방시키겠다는이른바정의의전쟁의가치가퇴색할것을우려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로이송돼온공산당포로들
문제는또있었다공산측이제시한유엔군의포로숫자가지나치게적었던것이다1951년12월18일유엔군이공산군포로13만2474명인민군9만5531명을공산측에통보한것과
달리공산측은한국군7142명과유엔군4417명을합쳐고작1만1559명의포로숫자만을유엔군에통보했다이숫자는나중에부상병포로잔류포로시신으로인도된경우등이
추가되어1만4000여명으로늘어났다
그렇더라도전쟁중북한언론에보도된전쟁발발후첫9개월간6만5000여명1951년6월25일북한군총사령부가전쟁발발1주년을맞아한국군등유엔군포로가10만8257명이라고
노동신문을통해구체적으로밝힌것과비교하면터무니없이적은숫자였다더구나전쟁개시후1년간의통계였기때문에휴전까지는포로가더늘어났을가능성이높다반대로공산
측이전투성과를과장했을수도있다
유엔군측은포로협상초기부터6만5000명을근거로사라진5만명에대한해명을요구했다반대로공산군측은5만여명을이미석방했다면서유엔군의포로명단에서남한출신
의용군등민간인억류자4만여명이제외된것을항의했다또한공산포로중다수의송환거부자가발생한것을두고유엔군측에서이들포로를강제로억류하려한다고반발했다이
때문에유엔군측은어쩔수없이북한이제시한포로명단을받아들여야했다
공산측이통보한1만1,559명의포로는터무니없이적은숫자
양측의휴전협상대표는1952년5월7일까지모든의제에합의했다그러나포로송환문제만은여전히합의를보지못해결국1952년10월8일무기한휴회에들어갔다그러던중양측을
다시협상테이블로끌어들이는새로운사태가미소양국에서거의동시에일어났다휴전을선거공약으로내건드와이트아이젠하워가대통령에취임19531하고전쟁의배후주동자인
스탈린이사망19533해양측에서전쟁을더이상지속할필요성이사라진것이다
양측은포로송환문제를다시논의했다의제가운데부상포로교환협정이1953년4월11일먼저체결되어4월20일부터26일까지부상포로교환이이뤄졌다이렇게포로교환협정에한
걸음더다가가자공산측은1953년5월7일포로송환문제에관한8개항을제시했다휴전협정후2개월이내에송환을원하는포로들은송환하되송환반대포로들은한국안에
잔류시키는데동의하겠다는양보안이었다단조건이있었다북한과중공의설득대표단을비롯해폴란드체코인도스위스스웨덴으로구성된5개중립국송환위원회가한국에서
자유롭게활동할수있어야한다는것이었다
미국은송환위원회는송환반대중국인포로들의관리만맡고한국인포로들은휴전과동시에북한이든남한이든스스로결정한자유를보장한채개인자격으로석방해야한다며맞섰다
하지만공산측이난색을표명하자5월25일한국인포로들도중국인포로와마찬가지로중립국송환위원회에넘겨운명을결정하도록하겠다는양보안을내놓았다공산군측은미국의
‘5·25제안에원칙적으로동의했다이로써포로송환문제는해결의가닥을잡아나갔다
이승만의반대에도불구하고양측은6월4일송환을원하는포로는휴전조인후2개월내에송환을완료하고잔류를원하는포로에대해서는90일의설득기간을둔다는내용에합의했다
또이도저도아닌포로는민간인신분으로변경중립국송환위원회에의해한국도북한도아닌제3국으로보내기로결정했다그리고마침내1953년6월8일유엔군수석대표윌리엄
해리슨과공산군수석대표남일이포로송환협정에조인함으로써2년간을끌어온포로송환문제는일단락되었다
중립국송환위원회위원들이포로에게남쪽과북쪽중어디로갈것인지묻고있다
반공포로석방은세계사에유례가없는엄청난도박
그러나휴전협상자체를맹렬히반대해온이승만대통령과국민은분노했다유엔군과공산군이정한송환위원회가친공적인데다반공포로들이수개월동안이들의설득공작을받아야
했기때문이다당시포로수용소는북으로돌아가기를원하는골수공산주의자포로들이장악하고있었다친공포로들이그들과뜻을달리하는포로를학대하거나죽이기까지하자유엔군
사령부는친공과반공포로들을분리수용했다이에따라북한출신포로9만명중40%,남한출신포로5만명중50%,중공군포로2만명중75%가반공포로로분류되어부산마산
광주논산대구영천부평등7개지역에분산수용되었다북쪽으로돌아가겠다는친공포로는계속거제도에남겨두었다
반공포로수용소는주로한국군이경비를맡았다이승만은반공포로를풀어주어자신이요구하는한미상호방위조약에대해미적미적한반응을보이는미국으로부터분명한약속을
받아내야겠다고작심했다이승만이반공포로석방을처음구상한것은1953년초였다결심이서자원용덕헌병총사령관을불러반공포로를자유롭게하고싶다는자신의의견을
전했다원용덕은부산정치파동때계엄업무를담당하며정치탄압의선봉에섰던이승만의충복이었다
원용덕은반공포로석방과수용소접수두가지안중처음에는수용소접수안을이승만에올려재가를받았다그러나미군측이낌새를눈치채고한국군에대한경계를강화하자수용소
접수계획을포기하고반공포로석방안을다시재가받았다원용덕은원활한임무완수를위해각군헌병은헌병총사령관의지휘를받는다는내용도대통령의재가를받았다그후계획은
국방장관과참모총장도구체적인내용을알지못하는가운데극도의긴장과비밀속에서추진되었다명령계통은대통령→헌병총사령관→육군헌병사령관→포로경비부대로이어졌다
장맛비가퍼붓고있는6월18일새벽12시북쪽송환을반대하는반공포로들이수용되어있는7개포로수용소하늘에예광탄이발사되었다뒤이어3만5400여명의반공포로가우리
헌병의보호를받으며포로수용소철조망을뚫고대탈출을감행했다
이승만대통령은오전11시미국을상대로감행한세계사에유례가없는엄청난도박이자신의지시로이뤄졌다는사실을대내외에공표했다세계는이승만대통령의대담한조치에
경악을금치못했다미군이탱크와헬기까지동원해포로들을붙잡으려했지만주민들이포로들에게옷을갈아입히고침식을제공하며돕는데는당해낼재간이없었다
덕분에3만5400여명의반공포로가운데2만6930명이자유를찾았다하지만미군이경비하고있는수용소에서는경비병의발포로61명이사망하고116명이부상했다8293명은탈출에
실패해다시철조망에갇혔다이들은중립지대인도군수용소로옮겨져90일의설득기간을거친뒤1954년1월석방되었다반공포로석방뉴스는면도를하고있던처칠로하여금
휴전회담을깨는것이되지않을까걱정스러워얼굴에생채기를낼정도로세계를놀라게한쾌거였다
석방된반공포로들이이승만대통령의사진을들고행진하고있다
우리군에도 깊은상처를냈다 반공포로석방에격노한모택동이휴전을앞둔상태에서대규모공격을명령했기 내렸기때문이다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팽덕회는반공포로석방
다음날인6월19일유엔군사령관클라크장군에게유엔군사령부는한국정부와군대를통제할능력이있는가라고질의서를보냈다전쟁막바지에벌어진중공군의대대적인공격의
신호탄이었다전투는강원도평강군에서발원김화군에서합류하는북한강지류인금성천에서벌어졌다전사에는한국전쟁중국군의7대패전의하나로불리는금성전투로기록되었다
금성전투에는공산군측에서는중국인민지원군6개군단과인민군2개군단유엔군측에서는국군4개사단과미제9군단휘하국군수도사단및제9보병사단이격돌했다 전투결과
중국인민지원군제20병단사령관은유엔군5만2783명을섬멸전사혹은실종하고그중2836명을포로로잡았다고 밝혔다반면아군전투사에따르면7월1227일전사자와실종자는
5569명이다실종자의상당수가전사자로처리된것을감안하면국군포로는28365569명사이다결국포로문제끝에벌어진마지막대규모전투가또다른포로를낳은것이다
중공군1만4,000여명은자유중국(현대만)으로떠나
1953년7월27일휴전협상조인후송환을희망하는포로들은별무리없이8월5일부터한달간판문점에서교환되었다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군사편찬연구소의전신통계에따르면
휴전후한국으로돌아온포로는1만2783명국군7870명유엔군4913명이고북쪽으로송환된포로는7만6451명북한군7만371명중공군6080명이다남쪽으로의송환을거부한
포로는349명국군327명유엔군22명북쪽으로의송환을거부한포로는2만1976명북한군7712명중공군1만4264명이었다
북한군포로들이유엔군에서지급한옷을벗어던지고속옷차림으로돌아가고있다
송환을원치않는한국인중국인포로들은포로교환협정에따라인도스위스스웨덴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5개국으로구성된중립국송환위원회에넘겨져인도군이관리하는판문점
근처비무장지대에수용되었다남북한과중공대표들은송환을원치않는포로들의자국송환을위해3개월동안설득작업을벌였다뒤이어포로수용소에삼거리가만들어졌고어느길을
선택하느냐에따라남한북한중립국인도행이결정되었다
1954년1월22일자동아일보경향신문에따르면최종적으로본국송환을거부한포로는중공군1만4227명북한군7582명등이었다이가운데마음이바뀌어다시본국행으로돌아선
포로는중공군72명북한군32명등총104명이었다
포로들은1954년1월20일석방되어3일간자신의행로를선택했다송환을거부한북한군은그대로한국에남았지만중공군1만4000여명은자유중국현대만을선택했다자유중국
정부는이들을맞기위해연예인을포함한환영팀을한국에급파했고이들은1월21일인천항에서미LST수송선을타고자유중국으로떠났다이후자유중국에서는이들을주제로1만
4000명의증인이란반공영화를만들고이들이자유중국에도착한1월23일을자유일로정해기념했다
자유중국으로돌아가기를희망한중공군포로들이청천백일기자유중국국기태극기성조기와장제스총통
사진을들고행진하고있다
중립국선택한76명은인도로갔다가브라질아르헨티나북한으로뿔뿔이흩어져
중립국을선택한포로들은당초에는200여명이었으나최종적으로는88명만이제3국행인도행을선택했다88명중12명은중공군76명인민군74명국군2명은한국인포로였다
한국인포로들은1954년2월21일인천항을떠나는2만2000톤급오스트리아선적여객선아스투리아스호를타고16일간의항해끝에인도남단마드라스항현재의첸나이에내렸다
이들은인도정부가제공한군막사에기거하면서자신을받아줄나라를기다렸다당초그들이원했던목적지는미국캐나다스위스스웨덴등이었으나받아주겠다는나라가좀처럼
나타나지않았다미국은참전국이라불가능했고스위스와스웨덴은수용을거부했다다행히멕시코에서그들을받아들이겠다는소식이왔으나6개월이나시간을끌다가난색을표명
또다시무작정기다려야하는신세가되었다
2년이다되도록받아들이겠다는나라가나타나지않자기다림에지친일부포로는이승만대통령에게탄원서를보내자신을남쪽에서받아주기를요청했다그러나남한정부로부터도
반응이없었다결국자포자기한10여명은북한으로돌아갔다나머지포로들은유엔에청원했다그러자브라질과아르헨티나로부터전갈이왔다포로들은인도잔류브라질
아르헨티나로갈렸다50명이브라질19562도착11명이아르헨티나19575로떠나고나머지는인도에눌러앉았다
중립국을선택한포로76명이아스투리아스호에서기념촬영했다
브라질로간포로중상당수는포르투갈어를배우고기술을익혀자동차정비공재봉공선반공장직공등으로진출했다신학을공부해목사가된포로살인을저질러27년간
정신감호소에갇힌포로도있었다아르헨티나로간포로들이주로터전을잡은곳도공장지대였다인도에남은포로들은1962년우리나라가인도에총영사관을개설할때도움을주었다
인도행포로들의이야기는최인훈의소설광장에그려졌다주인공이명준은정치보위부간부로625에참전해낙동강전투에서포로가된다그는거제도포로수용소를거쳐판문점
포로송환위원회에서남북한대표들의설득에도불구하고자신의정착지로인도를선택한다그러나이명준은크레파스보다더진한남지나해에서바다로뛰어들어투신자살한다는
내용이다
남으로송환되지않은국군과유엔군은북에서삶과죽음의경계에서살았다전쟁중에는부상이악화되거나질병과기아혹한북한군의살해로스러졌다이동이어렵거나저항하는
포로들을즉결처형하는경우가많았다살아남은상당수는강제로북한군에편입됐다제대후에는북한전역의도로철도주택복구와각종건설사업에동원되고탄광에서살인적인
강제노역에종사했다각종감시와처벌을받았으며아이들은노동당입당이나대학진학이어려웠다
이들중2012년까지북한을탈출한국군포로는80명이다2000년남북정상회담이후남측정부는납북자문제와함께국군포로문제해결을시도했지만북측은협의자체를거부해왔다
이산가족상봉행사의범주에넣어126명의생사확인을요청했지만북한은그중93명이확인이안된다고답해왔다결국17건의국군포로가족상봉만이성사됐으며그나마북한은
이들이해방전사라고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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