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일본인의 조선인식 : 혼마 규스케 (本間久介) 의 朝鮮雜記를 중심으로
김대래
Ⅰ. 서론
여행기가 진지한 연구의 텍스트로 받아들진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에드워드 싸이
드(Edward Said)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에서 동양에 대한 서양인들의 인식론적 담론적 구별짓기에 관한 놀라운 분석을 내놓은 이후 여행기들도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었
다. 사실 여행기는 사이드의 연구가 발표되기 전에는 진지한 텍스트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여행기가 서양인들의 인식론과 담론의 왜곡된 형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가 장 전형적인 텍스트로 인식되면서 활발하게 연구가 되어왔다. 사이드에 의하면 서양인들은 동양을 ‘타자’로 설정하고 그들로부터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적이 고 식민주의적인 담론을 형성하였다. ‘타자만들기(Othering)는 유럽이 유럽의 행위를 보편적 규범으로 간주하고 스스로를 우월한 인종으로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2) 서양이 동양을 인식함에 있어 취했던 중요한 태도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었다. ) 첫 째는 동양은 무시간적이라는 인식이다. 서양이 역사적 진보와 과학적 발전의 장소로 간주된 다면, 동양은 역사적 변화의 영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오리엔탈리즘은 변하지 않는 동양을 가정했다. 둘째는 동양은 낯설다는 것이었다. 동양은 그냥 다른 것이 아니라 괴상하게 다른 것이었다. 이 괴상하게 다름은 곧 동양의 열등함을 입증해 주는 것으 로 나타났는데, 서양이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고 친숙하다면 동양은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 인 것이었다. 세 번째는 인종에 대한 가정이다. 동양인들의 타고난 인종적 특성에 관한 가 정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서양인들은 우월하고 문명화되었다고 스스로 여기는 인식을 지지해 주는 지렛대였다.
1) Edward Said, Orientalism, London ; Routledge & Kegan Paul, 1978(박홍규 옮김, 오리엔탈리즘, 교보 문고, 2008).
2) 박지향, 여행기에 나타난 식민주의 담론과 남성성과 여성성, 영국연구 제4호, 2000, p.145.
3 ) John McLeod, Beginning Postcolonialism, Manchester University Press(박종성 외 옮김, 탈식민주의 길 잡이, 한울아카데미, 2003), pp.73-75.
4 ) ‘세계인식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정신은 세계인식의 불완전성을 수긍하는 정신이다. 오리엔탈리즘에는 이런 지 적 겸손이 없다. 그래서 서양인의 동양인식은 대개 지적 오만으로 가득 찬 왜곡된 허구이기 십상이다.’ 김현, 한국문학의 위상 : 그 전개와 그 좌표, 문학과 지성사, 1977.
결국 식민주의 담론의 핵심은 문명과 야만의 대비였다. ) 문명사회를 대표하는 것은 예절, 청결, 근면, 개인의 자유 등으로 이것들은 19세기 영국인들이 문명사회의 가치로 정의한 것 들이었다. ‘19세기 영국인들이 정의한 문명사회는 예절, 청결, 근면, 개인의 자유가 중시되 며, 사회적 협동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부와 권력이 증대하는 사회를 의미했다. 문명사회이 조건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예의범절이었다. 18세기 말 영어권에서 ’civilisation'이라 는 단어가 사용되기 전에 비슷한 개념으로 ‘civility'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두 개념의 관계는 분명해진다. 이 예의는 서양인들이 동양을 평가할 때 우선 사용한 척도였다
.’5)
‘서양인들의 또 다른 상징은 청결이었다. 19세기말, 20세기 초에 비유럽세계를 방문한 여행 가들의 설명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이 인종적 차이가 실상 청결 여부였다....중요한 빅 토리아 가치 가운데 하나인 근면 역시 서양인들의 타자만들기에 사용된 개념이었다. 근면은 실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문명과 비문명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6) 예외7)가 없지는 않지만 한국을 여행했던 대부분의 서양인들의 시각에 이러한 문명과 야만의 2분법 이 스며있다. 당시의 조선은 불결하고 게으르고 무례한 나라였다.
사진기의 발명과 보급으로 한국에 관한 이미지들이 생산 유통되면서 활자매체와 함께 중요 한 역할을 하였다. ‘카메라는 총으로 상징되는 군사력만큼이나 강력하게 제국주의의 정신을 지탱하는 과학적 도구였다. 카레라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사이에 형성되는 시선의 권력 을 증명하는 서구 문명의 총아가 되었다. 19세기 말 사진을 촬영하는 자는 총을 가진 자였 으며 동시에 지배자이자 통치자였다. 이들이 촬영한 사진들이 대량으로 인쇄되어 널리 소비 되었던 사회적 현상은 총의 경우와 충분히 비교될 수 있다. 총이 서구 근대문명을 표상하는 물리적인 폭력 기계였다면 사진엽서와 같은 시각 이미지는 상품과 오락의 형태로 대중에 은 밀히 스며들어 지배자적 시선을 내재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었던 것이다.‘8) ‘똑 같은 사물도 <바람봄을 당하는 자>, <사진을 찍히는 자>에게는 달리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진기를 통해 <바라보는 것>은 타자의 삶과 시각을 떠나서만 전달 가능해 질 뿐 아니라, 사진기를 통해 타자를 본다는 것은 타자를 보존하고, 서양이 세계를 바라보 는 표상 방식(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분류 정리하고자 하는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라봄을 당하는 자>, <사진을 찍히는 자>는 자신을 바라보 고, 사진기를 조작하는 자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되는 것이다. 20세기 초 이래 한국에서 사진관을 경영했던 일본 사진사들이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풍속사진>을 상 당수 유포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타자의 표상방식과 지배효과간의 상관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9)
Ⅱ. 근대 일본에서의 조선인식
1. 일본의 한국인식의 특수성
서양이 아시아에 적용했던 동양관을 일본은 아시아의 다른나라들에 적용했다. 특히 일본과 특수 관계에 있었던 일본은 한국에 대한 인식에서 특수한 인식론을 발전시켜 왔다. 근대일
5) 박지향, ‘고요한 아침의 나라’와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 - 이자벨라 버드 비숍과 조지 커즌의 동아시아 여행 기 -, 안과밖 제10호, 2001 상반기, pp.302-303.
6) 박지향, p.304.
7) 대표적인 예외적인 인물로는 초대 주한 미국 특명전권공사의 부인이었던 Mrs. Rose F. Foote를 들 수 있다. 그녀는 한국에 거주한 최초의 서양외교관이었던 푸트(Lucius Harwood Foote - 1883.5.20-1885.1.10)의 부 인으로 서울에 들어와 상주하였던 최초의 서양여성으로서 명성황후와 깊은 인간적 신뢰를 쌓았다. 오인영, 미 국 여성의 개화기 한국 체험-푸트 부인(Mrs. Rose F. Foote)의 사례를 중심으로-, 동양학, pp.275-276.
8) 권혁희,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민음사, 2005, p.35.
9) Frederic Boulesteix, 이향․김정연 옮김,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서양인이 본 한국인 800년-, 청년사,
2001, pp.161-162.
본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조선관의 원형은 ‘삼한정벌’의 신화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 벌’을 배경으로 근세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들은 에도시대(1603-1867) 일 본의 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들이었다...古事記, 日本書紀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神國 일본의 모습을 그려냈다. 국학자들은 신이 조선의 신이나 왕이 되었으며, 조선의 왕이나 귀 족이 일본에 복속하였다고 주장하였다...이러한 조선관은 막부(幕府) 말기부터 일어나는 정 한론(征韓論)의 논거가 되었으며, 후대헤 영향을 미쳐 메이지 시대 이후 한국강제 병합과 일본의 한국지배를 합리화하는 유력한 지배이념이었던 日鮮同祖論을 낳게 했다.’10) 그리고 조선관의 핵심은 ‘멸시관’이었다.11) 이미 에도시대 지식인들 사이에는 ‘朝鮮藩國觀’ 이 널리 공유되어 있었다. 그러다 적어도 일본의 막부말기에 이르면 지역 중간층을 매개로 한 ‘공론’의 발달과 메이지 초기의 언론을 비롯한 정보전달 매체가 근대일본의 조선인식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면서 일본민중들에게도 멸시관이 확산되어 갔다. 메이지초기에는 ‘征韓’을 둘러싼 논의가 나왔으며, 강화도사건을 전후하여 조선속국관에 입각하여 무례한 조 선을 응징해야 한다는 인식들이 나왔는데, 민권파 신문에서도 공유되고 있었다.
조선멸시관은 근대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문명화와 국권의 확립이라는 과제가 제기되면 서, 문명화를 추진하는 일본과 그 대극에 위치하는 야만국으로서의 조선이라는 분할선이 그 어지면서 더욱 증폭되어 갔다. 특히 개항이 되면서 저널리스트, 여행객, 이주민 등의 도항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불결한 생활상, 정치적 부패와 압정, 민중의 무지와 무기력, 노예근성 등 이 갖가지 매체를 통하여 조선에 대한 선입견을 추체험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 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대조선 멸시관은 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우월감과 문명화이데올로기가 결합된 것이었는데, 이것은 개항장에서 실상을 목격하고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확인되었 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고착되어 갔다. 조선이 1910년 식민지로 전락 하기 오래전부티 개장항에서 자행되었던 일본인들의 온갖 오만과 폭력은 이처럼 메이지 유 신을 거치면서 근대국민국가 형성기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던 ‘야만․미개’한 조선이라는 이 미지를 배경으로 한 일본민족의 우월감과 조선멸시관에 기초하고 있었다.
‘일본인의 조선여행기가 세간에 선을 보이게 된 것은 대체로 1890년대에 들어서의 일이며, 특히 청일전쟁(1894-1895)을 전후한 시기에 집중되고 있다. 그 이전에도 조선에 관한 서술 은 출간되고 있었으나, 지리서나 정치서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청일전쟁 시기에 여행기가 집중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이미 일본인들이 조선을 바라봄에 있어 이문화에 대한 객관 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속에서 조선을 여행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실제로 여행 기에서 드러나는 일본인들의 「시선」은 불결한 거리와 가옥, 게으로고 부정부패에 시달리는 조선인의 모습에만 고정되어 있다.’12)
1890년 이전에도 조선에 관한 일본측의 기록은 많았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대개 조선의 정 치, 사회에 관한 기초지식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일본인의 여 행기가 본격적으로 출판되기 시작하는 것은 1890년대, 특히 청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들의 조선상은 전쟁과 맞물리면서 일본인들의 의식에 적지않은 영향을
10) 최혜주, 일본은 19세기 조선을 어떻게 인식했을까(本間久介, 조선잡기, 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67).
11) 근대일본의 대조선인은 박진우, 개항기 부산에서 본 일본의 조선인식(한일민족문제학회, 한일민족문제연구, 제11호, 2006.12)에서 정리함,
12) 박양신, 19세기말 일본인의 조선여행기에 나타난 조선상, 역사학보 제 177집, 2003.3, p.106.
미쳤을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인 여행자의 대부분은 부산에 도착해서 부산을 기점으로 여행을 시작하는데 경상도와 충청도를 거쳐 한성과 인천에 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전라도 지방은 별로 없다. 그 들은 대체로 말을 빌리고 통역을 대동해서 여행을 했다. 조선여행기를 남긴 일본인 중에는 전문여행가가 거의 없다.
일본인들의 조선여행기에서 으뜸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조선인이 불결하다는 인상이었다. ) 1893년 여름 조선을 여행하였던 矢津昌永(야즈 쇼에이)는 ‘잘 정돈된 일본인 거류지를 지나 부산내의 조선인 거주지역으로 접어들자 그곳에서는 「일종의 악취=조선고유의 썩은 냄새」 가 풍겼으며, 그들의 집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누추했다...초량에서 부산으로 오는 도중의 광경에 대해 도처에 나태, 불결, 누추와 협소함이 눈에 들어왔다.’14) 거리에 넘쳐흐르는 인분과 그로 인한 악취, 주로 주막에서 목격되는 주모의 불결한 손놀림 과 더러운 그릇들, 토벽에 좁아터진 더러운 여숙, 이는 어느 조선여행기에도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문명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한국을 문명화된 시각으로 바라볼 때 불결은 「야만」 의 상징으로 인식되는데 바로 그런 시각에서 한국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조선여행기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두 번째 내용은 여행에서 발견한 임진왜 란 시의 전적지에 대한 언급이다. ) 그리고 세 번째로 등장하는 단골메뉴는 ‘조선인들은 게 으르고 천하태평이며 내일을 도모할 계획도 의지도 없는 무기력한 인간들이라는 이미지와 인민을 수탈하는 부패한 관리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 양자는 인과관계로 그려진다. 즉 관 리들의 수탈이 도를 지나쳐 재산만 있으면 관에 탈취당하므로 인민들은 저축할 생각이 없고 그날그날 연명만 하면 되니 애써 일을 하려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에서 길들여진 인간의 눈에 조선인은 그저 빈둥대고 게으른 것으로만 비쳤던 것이다. 사실 「근면」이라는 덕목 또한 근대문명의 산물이었다. 시장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시간이 곧 돈이다. 비싼 기계는 쉬게 할 수 없으 며 기계의 리듬에 따라 작동해야 하는데, 여기서 공업문명 특유의 동시화가 발생하였다. 나 아가 공업생산이 일반화되면서 기계자체의 비싼 가격과 노동에서의 상호의존성이라는 두 요 인에 의해 더욱 엄격한 동시화가 요구되었다. 노동에서 요구된 동시화는 기계의 리듬에 맞 추어 사회생활에도 적용되어 하나의 규범이 되었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특별히 출근 하는 작업장이 없이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은 놀고 있는 것으로 비치게 되고 더욱이 농업노 동의 계절적 성격은 많은 시간 동안 사람들은 빈둥거리는 것으로 비치게 된다. 그리하여 이 러한 게으른 조선인의 인상은 거의 정형화되어 그 후의 여행기에서도 반복된다.18) ‘이렇듯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게으르고 무기력한 조선인에 대한 여행자들의 감정은 한편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모멸감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엽다」는 동정심을 착종 된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관리들의 부패와 조선인민의 게으름과 내일을 도모하지 못하 는 무기력함의 강조는 조선이 쇠망해가고 있음을 인상짓고, 나아가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여 불쌍한 인민들을 구해야 할 필요성을 유도해 내고 있다. 결국 이러한 조선인상은 「백인들의 책무」 아닌 「일본인들의 책무」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문명화의 사명 이는 바로 「제국의 식」의 주요한 한 축인 것이다.’19)
‘이들의 조선상에서 분명 「문명」의 측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서양인들이 동양을 바라볼 때의 시선과 동일한 성질의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고 임진왜란의 전적지를 순례하며 기록하는 그들의 행위에서는 일본의 조선정책에 대한 뒷받침이라는 정치성을 읽을 수 있다....러일 전쟁 종결후에 출간된 한 여행기에는 거 의 판에 박힌 듯한 내용이 한층 더 차별적인 어조를 띠고 기술되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보호」, 「계발」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며, 일종의 「개발」론을 전개한다. 종전의 여 행기에서는 단지 암시에 그치고 있던 일종의 「문명화의 사명」, 「일본인의 책무」를 여기서는 드디어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20) 이러한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삽화의 분석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박양신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에 사진이 보급되기 이전인 188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서는 실물과 다 른 조선인의 형상이 일반화되어 있었다...이는 직접 본 적이 없는 조선인을 자신과는 다른 이국인으로 표상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그글 삽화에는 이미 조 선인이 자신들과는 달리 문명화되지 못한 ’뒤떨어진‘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표출되고 있었 다. 이는 막말이래 서양에서 유입된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세계관이 일본인에게도 수용 된 결과였으며, 비교적 일찍부터 일본이 스스로를 ’문명‘측으로 전위시키고 있었음의 반영이 기도 하다. 1880년대 후반이후 일본에서 사진기가 일부에서나마 일반인에게도 보급되고, 사 진이 기존의 그림들을 서서히 대체해가기 시작하면서 조선인의 형상에 대한 일본인의 인지 도 실물에 가깝게 되었다...그러나 청일전쟁을 결정적인 획기로 해서 기존에 갖고 있던 막연 히 뒤떨어진 조선이라는 이미지는 보다 구체화되면서 차별적 이미지가 고정화된다. 불결하 고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그것이며,....이는 서양에서 구축된 ’야만‘담론의 내용을 쏙 빼닮아 있다. 이렇듯 ’제국‘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 해나가는 과정에서 그곳에 사 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재생산함으로써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해 갔던 것이다.’21)
2. 야즈 쇼에이와 혼마 규스케
‘有山輝雄(아리야마 테루오)의 해외관광여행의 탄생(2002)라는 책을 보면 일본에서 해외 관광여행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06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직후의 일이라고 한다. 도쿄와 오사카의 아사히신문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인 승전한 격전지를 방문하는 「滿韓巡遊船」 관광프로그램을 시작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만주와 한국에의 관광여행 붐이 조성되었다. 특히 일본정부의 문부성은 교사와 학생들의 만주․한국 수학여행을 적극적 으로 장려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만주․한국 관광여행 붐속에서 수많은 학자, 언론인 등 지식 인들도 이에 편승하여 만주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수많은 여행기들을 남겼 다.’22) 일본의 한국여행기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사람 중의 하나는 야즈 쇼에이(矢津昌永 : 1863-1922)이다. 지리학교수였던 쇼에는 1893년 7월 24일부터 약 20일간 부산과 원산 그
19) 박양신, p.127. 20) 박양신, p.128.
21) 박양신, 명치시대(1868-1912) 일본 삽화에 나타난 조선인 이미지, 정신문화연구 제28권 제4호, 2005, p.327.
22) 박찬승 엮음, 여행의 발견, 타자의 표상, 민속원, 2010, p.4.
리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견문하였다. 이 때의 내용을 1894년에 간행하였는데, 같은 해 발행 되었던 혼마 규스케의 조선잡기와 함께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읽은 조선견문기 )였다고 한다.24)
쇼에이는 일본 큐슈의 구마모토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7월 26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일본 총영사 무로다 요시후미(室田義文)을 방문하고 들은 주의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한다. 첫째 는 무더위에 조선내지를 여행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경성까지 17-8일이 걸릴 것이고 도 로는 인도가 아니라 水道다. 둘째, 비가 와서 4-5일 체류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주막은 냄새가 심하고 밤에는 빈대, 모기, 이, 벼룩 때문에 잘 수가 없다. 셋째, 음식물과 침구, 韓錢을 싣기위해서 말 두필과 통역 1명이 필요하다. 이 설명을 듣고 야즈는 해로를 이용하여 부산-원산-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25) 야즈는 부산거류지의 소학교, 우편전신국, 병원, 은행, 우선회사지점, 총대역서, 상업회의소, 공원 등지를 시찰하고, 「완연한 일 소식민지로 몸이 해외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 라고 생각하였다. ) 다음날에는 초량동과 부산포를 견문하고 부산에 있는 임진왜란의 전적 지를 답사하고 부산의 일본인 소학교를 시찰했다. 소학교는 本願寺 승려들에 의해서 설립되 었다.
부산의 거류지를 지나가다 본 한국인들의 모습은 ‘한인이 살고 있는 5, 6호를 보면 더럽고 가난한 모습이 심하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그대도 다른 곳보다는 (부산이-인용자) 나은 편이다’ )고 하면서 거류지 주변의 모습을 모두 게으르고 불결하며 누추하고 좁은 것 이 가는 곳마다 눈에 비친다고 썼다.
‘야즈의 여행기에 나타난 조선의 풍속 및 습관 등에 대한 시선이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7월 26일 부산항 거류지에 처음 도착하고 나서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소식민지」의 조선인이 흰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쓰고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빈민들이 지게를 지 고 짧은 일본어로 “쇠고기 사세요. 참외 사세요”하고 외치며 장사를 하고, “피가 흐르는 소 머리를 찌개에 넣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다.’28)고 쓰고 있다. 소머리국밥을 끓이는 광경을 이렇게 그는 보았다. 지리학자로서 한반도 남부지방을 3차에 걸쳐 여행을 하고 세밀한 조사 기록을 남긴 여행기로서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 )의 것도 있다. 이것은 일반여행기와는 달리 한반도 남부의 지형과 지질 등에 관한 서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야즈 쇼에이와 함께 또 하나의 개항기 일본의 대표적인 여행기는 혼마 규스케(本間久介, 1869-1919)의 조선잡기이다. 조선잡기는 혼마 규스케가 1893년 조선을 견문하고 정탐 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혼마는 <이륙신보> 특파원, 天佑協, 黑龍會 ) 회원으로 활동하고
통감부와 총독부가 설치 된 뒤에는 관리가 된 인물이다. 1893년에 처음으로 내한하였는데, 부산에 머물면서 경성, 중부지방을 정탐하고 해상을 하며 황해도와 경기도 충청도 지방을 여행하였다. 도쿄에 돌아가 <이륙신보>에 조선 정탐 내용을 연재하고, 154편의 글을 한권 으로 묶어 7월 1일 간행했다. ‘또한 이 자료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청일전 쟁 발발과 함께 간행되어..일본인의 조선 이미지 형성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 다.’31)
Ⅲ. 혼마 규스케의 조선인식
1. 역사와 국민성
혼마 규스케가 한국을 보는 시각의 근저에는 과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였다는 그릇된 역사 관이 깔려있다. ‘부산의 거류지에서 서북 7리에 김해부라는 도시가 있다....바다를 낀 이 지 역은 우리나라(이하 일본으로 표기)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진구(神功) 황후가 삼한을 정 벌하기 위해 보낸 군대는 틀림없이 여기에 상륙했을 것이다.’32) 또한 혼마는 한국이 중국에 종속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독립정신의 결여로 인해 나라가 일어설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조선의 선비는 支那를 불러 항상 중화라고 말하고, 스스로 소화라고 부른다‘33)고 하 여 중국에 대한 사대를 지적하면서, ‘조선사를 꺼내 열람하는데, 상고부터 금일에 이르기까 지, 다른 나라의 속박에 관계되지 않은 시대가 거의 드물다. 즉 조선은 진정으로 독립한 적 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가 이미 독립국이 아니다. 인민이 어찌 떨칠 것인가
?’34)라고 하고 있다.
관리들의 부정부패가의 극심함을 지적하기 위해 혼마는 ‘지금의 관리는 도적이 아닌 자가 없다’35)고 적고 있으며, 허례 위주의 신분사회가 실체를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음을 다 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과 같이 종족 계급이 정해진 나라에서는 언어행동에도 자연히 계급 이 있다...도로변에서 이름 모를 양반이 걸어가는데 만나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감추고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대개 허례는 여기에 있다. 실례(實禮)의 빈약함은 어찌할까
?’36)
그리고 나라를 걱정해야 할 사람들이 전부 명분과 허례에 사로잡혀 사사로운 개인을 걱정하 고 있다. 그가 만나본 명문가의 자손은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이 아니고 집을 걱정하는 사 람이었다.....국운이 급급하고 위태함에 직면한 지금, 단지 집있는 것만을 알고 나라 있는 것 을 모르는 자, 한인이 모두 이러하다.’37) 여기서 공공을 위한 관념이 생길 수 없다. 나아가 사람사이에 협동심이 나올 수도 없다. ‘제방사업에 한정되지 않더라도 무슨 사업에서든 사 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그 사업을 성사시키는 따위의 일은 조선사람에게 바랄 수 없다. 도로
pp.273-274).
31) 최혜주, 일본은 19세기 조선을 어떻게 인식했을까(本間久介, 조선잡기, 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66).
32) 本間九介, 조선잡기-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최혜주 역주, 김영사, 2010, p.20. 33) 本間九介 조선잡기-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최혜주 역주, 김영사, 2010, p.23.
34) 本間九介 조선잡기-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최혜주 역주, 김영사, 2010, p.24.
35) 本間九介 조선잡기-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최혜주 역주, 김영사, 2010, p.54.
36) 本間九介 조선잡기-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최혜주 역주, 김영사, 2010, p.29.
37) 本間九介 조선잡기-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최혜주 역주, 김영사, 2010, p.58
가 수리되어 있지 않고 위생적이지 못한 것도, 공동정신이 부족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아무 리 이익이 있는 사업이라도 개개인이 소자본을 가지고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도모하는 습성 이 있기 때문에..상공업은 여전히 발달하지 못하고 있다.’38) 결국 경제발전이 늦은 것은 한국이 독립적이지 못하고 허례에 빠져있으며 공공의 이익을 우 선하는 가치를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사람들은 만사에 무사태평이며, 비 굴하고 구걸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근성이 배어있다. ‘일본의 목수라면 반나절 걸려서 할 수 있는 일을 조선의 목수는 3, 4일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작업의 태평함에 화 가 치밀어 오늘 정도이다...조선 사람들은 담배를 좋아하는..손에서 놓은 일이 없다.’ ) 심지 어 ‘조선에서 싸우는 모습의 무사태평함은 거의 한심할 정도이다’ )고 하여 화끈하게 싸우 지도 못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사람은 대개 스스로 비굴하고 구걸근성이 있다.’ ) 또 ‘내가 처음에 부산에 도항하자 바로 나의 눈에 비춰오는 것은 한인이 거류지 안을 돌면서 물건을 파는 광경이다. 노인과 어린이, 몇사람의 한인이 파를 지거나 닭 생선을 자기고 여러 번 거류지를 배회하며 고객을 찾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이 일본말로 <닭은 어떻습니까>, <파 있습니다>라고 이상하게 소 리지르며 팔고 있는 모습은 꽤나 가슴 아프게 들렸다. 한인들이 때가 끼고 찢어진 옷을 입 은 채, 조그만 이익을 얻기 위해 고객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납작하게 하는 모양은 깊이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다’42)고 쓰고 있다. 여행중에 경험한 몇가지에서 엄청나게 부풀 린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이러한 멸시적인 사고에 젖어있기 때문에 한국인은 예술적 감각도 떨어지고 식탐이 많은 종 족이 되어버린다. ‘조선사람은 미술적 감정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전국의 가는 곳마다 정원을 볼 수가 없다.’ ) 또 ‘조선사람은 진미를 조금씩 맛보기보다는 맛이 없는 것이라도 배부르게 먹기를 원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 비가 오는데도 우산도 없이 사는 한국사람 들은 가련한 대상이다. ‘조선에 우산이라는 것이 없다. 근년 일본에서 우산 혹은 양산 등을 수출하면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은 10인 중 겨우 한두 사람으로 대개는 우산 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조금이라도 비가 내릴 때에는 갓 위에 기름종이로 만든 덮개를 붙이 고 의복은 젖은 그대로 걸어간다.’ ) ‘조선 사람은 대개 2번 식사한다.’ ) ‘조선에서는 상류 인사가 아니면 신발을 신지 못한다. 대개는 짚신을 신는다’ )는 지적도 발전이 늦은 한국인 은 가련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물론 자신이 한국인들의 순수성을 잘못 보았던 것에 대해 사례를 하나 들고 있기는 하다. 하룻밤을 묵어가기 위해 들렀던 집 주인이 굳이 자신의 돈꾸러미를 빼앗다시피 가져갔던 것 에 대해 그것이 빼앗는 것이 아니라 보관해주었던 것임을 알고는 다음과 같이 덤덤하게 마 음을 표하고 있다. ‘주인은 지난밤의 돈을 가지고 와서 내 앞에 두었다. 지금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주인은 내가 돈을 허리에 차고 자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나를 위해 일부 러 이것을 맡아두었던 것이다. 아아, 나는 의심 도깨비를 만든 것이다. 그는 지난 밤 너무나 진지했다.’48)
이런 한국인들의 상태를 생각할 때 일본인들의 역할은 중요하다. 종교와 관련하여 일본승려 의 분발을 촉구하면서 ‘조선사람이 금일 무종교, 무도덕의 파도에 출몰하는 것을 보고 막연 히 손을 놓고 있다...조선에 주재하는 일본 승려를 보면 한 사람이 야소 선교사와 같이 열심 히 하는 자가 없다. 재한 일본 승려는 실로 열심히 하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는다’49)고 질 타하고 있다.
한편 ‘3항과 경성의 거류지에서 한국 부인이 일본의 조계지에 들어갈 수 없는 곳은 단지 부 산뿐이다. 부산은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개항장으로...봉건시대에 일본사람 중에 처음 조선 에 체류한 자가 함부로 부인을 잡아서 강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조선사람도 자못 일본 인 정에 익숙하여 부인도 역시 일본을 꺼리는 기색이 없다....이번에 부산 총영사와의 담판에서 부산 감리사는 다음과 같은 게시를 시읍에 붙이게 하고, 大婚式날 용두산에서 행해지는 양 폐하 요배식장에 1천여명의 한인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50)
2. 중국인과 일본인의 비교
여행을 하면서 혼마는 항상 일본인을 중국인과 비교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다툴 대상이 중국이라고 보고 이에 대해 일본인들이 분발을 촉구하는 시각이 깔려 있다. 중 국사람들이 일본인에 비해 한국에서 장사를 더 잘한다는 얘기는 여러 곳에서 쓰고 있다. ‘松都는 경성을 떠나 16리에 있다...호상의 대부분이 이곳에 살고, 상업은 오히려 경성보다 도 성대하다. 여기에 사는 지나인은 백명이고, 일본사람은 두명의 약상과 인삼매입 때문에 때때로 들어오는 수명의 상인이 있을 뿐이다. 원래 일본 사람은 자본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기품만 매우 높다. 내지를 행상하는 것은 지나인의 일이다. 그것은 당당한 일본인이 그들과 나란히 이익을 다투면서 돌아다니는 것은 국체에 관계되는 일이고, 또 적은 이익을 쌓아 거 부가 될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투기적인 일을 좋아하고...거부를 모은 자가 없다. 오히 려 그 1문을 얻으면 그 1문을 쉽게 놓지 않는다는 지나인보다도 본국에 돈을 갖고 돌아가 는 자가 적다.’51)
송도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일상은 청상에 밀리고 있었다. 한국인들도 일본상인에 대해서 는 막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 사람이 남대문의 아침시장에서 노점을 내면 그 앞에 사 는 한인에게 매일 아침 항상 약간의 사례금을 내야 한다. 그러나 지나인은 어디에 노점을 펴도 일문 반전도 징수당하는 일이 없다. 이것은 일청 양국사람이 경성에서 갖는 세력의 강 약을 알 수 있는 예증이다. 일본사람이 한인에게 모욕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징후이 다.’52)
중국상인들이 일본상인에 비해 더 장사를 잘 하는 것은 마음자세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팔도 가는 곳 마다 있는 시장에서, 지나인을 보지 않는 지역이 없다. 삼삼오오 열을 지어서 시내를 누비는 자가 기백명일 것이다. 그들이 파는 물건은 하나 같이 바늘, 못, 唐紙, 당실, 부싯돌, 성냥, 담백대 등으로, 적은 자본을 가진 자는 金巾 등을 파는 자도 있다.
48)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49).
49)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19).
50)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12).
51) p.172).
52) p.195).
한인과 섞여서 시장에 점포를 펴고 형편이 없는 것을 먹고 싼 옷을 입고 근검해서, 드디어 크게 벌어서 귀국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쓸데없이 뜻밖의 이익을 얻으려고 욕심을 내서, 이 러한 노동을 조롱하고 지나인을 천하게 본다. 한 재산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파산해서 빈손 으로 귀국하는 자가 많다. 아아, 지나인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다.’53)
‘일본사람으로서 조선에서 상법을 경영하는 자는 모두 자본이 적은 것을 걱정한다. 그렇지 만 조선은 빈약한 나라이다. 자본을 써서 상법을 영위할만한 나라가 아니다. 얼마 안되는 10만엔의 자금이 있을 때는 그 운전의 방도가 없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빈손으로 1만내외의 적은 자금을 저축한 자가 있어도, 만약 모아서 10만엔에 달할 때에는 운만으로 는 가능하지 않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서양인과 같이 조선에서 상법을 영위하기에 부족함을 알기에, 무역에 종사하는 자가 적다. 요컨대 조선은 무자본으로 자본을 만들려는 사람이 손을 댈만한 나라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자본이 적어서 상법에 손을 댈수 없다고 하 지 말라. 저 지나인을 보라. 한푼의 자금도 없이 와서 거액의 재산을 얻어 귀국하는 자가 많지 않은가? 일본사람은 기품을 고상하게 하는데에만 집착하여 행상하는 것을 부끄러워한
다. 노점을 펴는 것을 바보같이 생각하는 등, 한갓 實利界에 먼 사상을 가지고....어리석음이 심한 것이다.’54)
경성의 일상들이 한국인에 의해 모욕을 당한다고 씌어 있지만 이때에 이미 한국에 온 일본 의 순사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다. ‘경성에 거류하는 일본의 인민은 그 수가 적기 때문 에 관민사이에도 스스로 화목하고, 만사에 대해서 원활하다. 그러나 생각보다 순사가 뽐내 는 것에는 크게 놀라게 된다. 대개 순사는 월급 이외에 체재수당을 받고 있어 거의 주임관 이상의 생계를 영위할 수 있다고 한다.’55)
3. 불결함
문명과 야만의 대비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문명의 깨끗함과 야만의 더러움이다. 이에 대해 혼마는 아주 많은 곳에서 한국의 불결함을 지적한다. 우선 한국인들의 옷은 아름답지 만 집은 형편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한인의 의관은 정말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 가옥은 게 집과 제비집과 같이 매우 추하다. 거의 돼지우리라고 평할 만 하다.’56) ‘넓은 방이라고 해 도....주인을 따라다니던 종자의 뒷간과 비슷하다....앉아있는 손님이 만일 가래를 뱉을 때에 는 앉아있던 멍석을 들고 그 아래에 뱉고, 콧물이 떨어질 때는 손을 비비고 바로 벽에 바른 다.’57)
그래서 혼마는 ‘불결은 조선의 <명물>이다. 경성은 말할 것도 없고, 팔도 가는 곳마다, 시가 다운 시가를 볼 수가 없다. 우마의 인분은 주머니 안에 넘치고, 그 불결한 것은 말로 할 수 가 없다. 시장의 중앙에는 공동변소를 설치했지만 그것은 다만 짚으로 지붕을 엮고, 거적으 로 사방을 두른 조잡한 것이다. 그 분즙으로 개돼지를 길러, 사람이 들어가면 옆에서 기다 렸다가 인분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데에 이르러서는 거의 구토를 하게 된다. 음식물의 불 결은 역시 이 나라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썩은 생선과 야채를 사용하는 것은 물 론이고, 그 음식물을 조리하는 모양을 볼 때는 어떠한 호걸이라 해도 수저를 드는데 주저하
53)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04).
54)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09).
55)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02).
56) 本間九介 조선잡기-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최혜주 역주, 김영사, 2010, p.81.
57) p.239).
지 않을 수 없다. 요리하는 자가 삷고 볶은 것을 간을 보는데 반드시 자기의 손을 갖다 댄 다. 젓가락 같은 것은 오랫동안 거의 씻은 일이 없고, 콧물을 닦은 손으로 바로 김치항아리 를 젓는 등 일본 사람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또 상류사회는 각별하지만 중류이하에 이르러서는 실내의 불결한 것을 필설로는 다 말할 수 없다. 벽은 누런색으로 닿 으면 의복이 더러워지고 지붕밑에 진흙을 바른 천정은 낮아서 하품을 하면 목이 지붕에 닿 을 정도다.’58)
요강을 방안에 두는 관습을 보면서 혼마는 또 하나의 비난거리를 찾는다. ‘오줌은 더러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선 사람은 이것을 더운물, 혹은 물처럼 생각하고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조선 사람이 불결한 인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으로 삼을 만하다.’59)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불편이 불결함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더한다. ‘객사라고 해도 만사 이와 같다...이불도 없고 옷만 입은 채 목침이라고 하는...외방인으로서 조선을 여행하는 자 는 그 곤란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특히 어느 객사에도 목욕탕이 없는 것은 더욱 여행자를 고통스럽게 한다.’60) 그리고 ‘객사에는 빈대, 모기, 이. 벼룩이 많아서 실내에서 잠을 잘 수 없다. 여름에는 객사의 주인도 실내로 안내하지 않고, 안에 있는 정원 혹은 길 위에 돗자리 를 깔고 목침을 가지고 와서 그 위에서 자게 한다.’61)
‘조선의 요리점도 여관도 이름뿐이고, 없다고 해도 거의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요리점이라고 하는 것은 주막이라고 부른다...따로 손님방이라는 것이 없다...마부 가마꾼과 함께 한방에 앉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이다. 술안주라야 명태, 돼지고기, 절인야채 등에 그쳐, 겨 우 취하고 배고픔을 채울 뿐이다.’62) ‘여관은 음식값을 받을 뿐이고 그 외에는 숙박료를 요 구하지 않는다....또 때에 따라서는 둥근 된장을 천정에 매달아 두는 집도 있었다. 그 냄새가 매우 심하여 집안에 들어가면 곧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조선사람들은 담배를 좋아해 서..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도 문을 열어 환기시키려 하지 않는다...한방에 수십인 여기저 기 흩어져서 누워있다....날이 저물어 묵을 여관이 없어 고통스러운 적이 많다.’63)
4. 교통의 불편
한국의 곳곳을 여행하면서 도로사정이 열악하다는 것을 혼마는 누누이 지적한다. ‘내가 처 음 부산에서 육로로 경성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동래온천에 묵다가 이별장이라는 사람과 필담으로 경성에 가는 역을 차례로 물었다. 별장은 나에게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양산, 울 산, 용궁을 지나는 것과, 구포, 원동, 밀양을 지나는 두 가지 방법이었다. 그러고 전자는 후 자보다 돌아가게 되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따라 후자를 취했다. 온천의 배후인 높 은 산을 의지해서 2리 정도 가자 한 마을이 나왔다. 이곳은 구포라는 하는 곳이었다. 별장 의 말에 의하면 구포는 경성에 도달하는 큰 길과 접해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한 갈래의 작 은 길 외에 이른바 큰 통로는 없었다. 의심할만하다고 해도 기로에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면 이 작은 길을 가면 혹은 큰 길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찾아가 보아도 결국 큰 길은
58)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38).
59) 本間九介 조선잡기-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최혜주 역주, 김영사, 2010, p.116.
60)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39).
61)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25).
62) p.235).
63) pp.236-237).
없었다. 여기서 비로소 별장이 말한 큰 길이란 이 작은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선의 도로가 형편없는 것에 몹시 놀랐다. 역사에는 신라시대에 이미 백성에게 牛車법을 가르쳤다고 나와 있지만...부산에서 경성까지의 도로는 올산 쪽도 이와 비슷하다...경성에서 송도, 평양 등을 거쳐 압록강반의 의주까지는 도로 모양이 나쁘지 않아서 대개 2열의 군대 가 행군을 할 수 있다. 의주가도는 사대의 결과로서 지나사신의 왕래길이라 다른 길보다도 더 좋게 만들었던 것이다.’64) 그래서 물건을 운반하는 비용이 많이 든다. 게다가 한국의 통화는 너무 무거워 사람이나 말 이 지고 가지 않으면 안되는 불편함이 너무 크다. ‘미곡 혹은 우피, 우골과 같은 물건을 사 려고 내지에 들어가는 경우에 가장 불편을 느끼는 것은 통화가 무거운 것이라고 한다. 말 1 필에 겨우 20관, 즉 30엔밖에 실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운임은 통상 1리에 4, 5백문 즉 14.5전이 필요하다. 내지에 들어가 30리를 갈 때에는 4엔 50전의 운임이 필요하므로 이미 그 1할5푼을 운반 때문에 쓰지 않을 수 없다.’65) ‘내가 처음으로 부산에 도항했을 때, 경성 까지 육로로 가려고 생각하여 한전을 허리에 감았다. 조그만 짐을 어깨에 메고 거류지를 출 발했을 때, 처음 도항하는 여행이라....약간은 곤란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처음부터 각오 한 바 있었다.’66)
다리가 잘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강을 건너는 것도 힘들다. ‘조선 내지의 강에는 대개 교 량이 없다. 배로 건너가서 여객에게 편리를 주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다리도 배도 없는 강을 만나면 나체가 되어 헤엄쳐가지 않을 수 없다...선착장의 뱃사공들이 다른 지방의 여행객을 보면 무법의 뱃삯을 탐하여 왕왕 우리 여행하는 자로 하여금 분노케 한다.’67) ‘평 안도 대동강의 배는 목면으로 만든 돛이다. 다른 것은 모두 왕골로 만든 돛을 볼 뿐이다’68) 고 하여 강을 운항하는 배가 구식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5. 경제발전의 미흡 1) 치수와 농기구
한국의 농업생산력이 높지않은 것은 수리시설의 부족과 전근대적 농기구 때문이다. ‘조선의 산악은 대부분 민둥산으로, 수목이 없으며 조금만 가물어도 수원이 바로 마른다,. 논밭이 갈 라지고 벼모종이 붉은 색을 드러내어, 백성들이 고생하고 근심하게 된다...가뭄..조선에는 수 차가 없어 겨우 물통으로 물을 퍼올리기 때문에 그 불편이 실로 적지 않다. 요컨대 조선은 수차를 발명할 지식이 없는 불쌍한 인간의 쓰레기터인 것이다.’69) 그러다가도 홍수가 지면 ‘조선 팔도의 하천은 평소에는 물이 적거나 완전히 말라버린 상태이지만, 조금이라도 비가 오면 물의 양이 바로 불어난다...제방사업이 발달하지 않은 탓이다...천연적으로 좋은 지세에 씨를 뿌리고 묘를 심은 것은 알아도, 인공으로 천연의 나쁜 지세를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모른다.’70)
64)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p.126-127).
65)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121).
66)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47).
67)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31).
68)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56).
69) p.138).
70) p.142).
치수가 안되어 가뭄과 홍수에 무방비인데가 농기구도 원시적이다. ‘조선의 농기구는 낫, 쟁기, 절구, 삼태기 외에 없다. 쟁기는 일본의 것과 만드는 방법이 완전히 같은데, 소가 이것을 끌게 한다...벼의 줄기를 훑어서 쌀을 얻을 때에는 두 개의 작은 대나무를 왼손에 쥐고 오른속으로 몇줄기의 벼를 붙잡 고 훑는다. 보리를 치는 모양은 일본과 다르지 않다.’71) 다만 혼마의 눈에도 한국에도 벼농사 2모작 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것을 혼마는 임진왜란때 일본이 가르쳐준 것이라고 말한다. ‘정한의 역에 일본 병사가 난폭하게 약탈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8도는 거의 초토화되었다. 그 사이 조선에 하나 의 이로움을 준 것은 벼모종을 이식하는 것, 즉 모를 심는 기술을 가르쳐 준 것이다. 조선은 지금 여 전히 그 법을 전하여 만민이 그 이로움에 의지한다.’72)
농업생산력이 낮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농작물을 재배하는 밭은..자못 정연하다. 솟아있는 산록, 유 창한 물가, 노인이 쟁기를 거둘 때, 목동이 소를 탈 때, 그런 풍광과 마주하고 있으면 심중이 담담하 고 참으로 사랑스러워 보인다’73)고 하여 한국농민들이 논밭을 얼마나 정갈하게 가꾸고 있는가 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 또 ‘조선의 현재 미술품 중에는 하나도 감복할 만한 것이 없어도, 삿갓이나 관 등을 말꼬리로 짜는 것을 보면 그 손끝이 여문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74)고 하여 한국인의 손재 주나 기술이 상당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2) 시장과 무역
한편 시장에 대해서는 ‘조선 사람은 일상 꼭 필요한 것을 빼고는 돈을 들여서 구매하는 것이 없다’75) 고 하여 교환경제의 발전이 늦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장시에 대한 서술도 지나치게 간략하다. ‘경 성, 공주, 평양, 송도 등의 대도회는 각별하다고 해도 기타의 소도회에서 시장이라는 것은 4개의 기둥 을 세워 짚으로 엮어 얹은 조잡한 가옥들이 2, 30개씩 줄지어 선 형태이다. 1, 6일이나 2, 7일 정해 진 날에 장이 선다. ..장이 서는 날 이외에는 바늘 한 개도 파는 곳이 없으므로 식용품부터 잡화에 이 르기까지 모두 이날에 사두지 않으면 안된다.’76) 일본상품의 한국내 판매와 관련하여 많은 글을 쓰고 있다. ‘해관세를 내고 수출입한 물품에 다시 내지에서 세금을 부과할 이유는 없을 터인데도, 실제 우리나라 상인은 이런 부당한 세 금을 징수당하고 있다. 2, 3년전까지는 곳곳에 징세소가 있어서 내지 상업자에게 적지 않은 방해가 되었는데, 지금은 경기도에서는 김천군 조포(助浦), 경상도에서는 양산군 완동(浣洞) 뿐이라고 정해졌다. 집세관은 매월 2관5백문을 정부에 상납하는 약속으로 징세소를 설치하 고 다른 수입은 자신의 몫으로 한다. 지금 그 과세는 다음과 같다. 쌀 1가마(한섬에 5말 들 어있다) 50문, 소맥 1가마 50문, 대두 1가마 50문, 唐木 1負 30문, 대맥 1가마 30문, 우피 1부 30문. 만약 이것을 지급하지 않으면 강제로 그 물건을 몰수하고, 혹은 그 선박을 몰수 하는 등, 악역무도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77) 또 염색용 염분이 한국시장에서 중국에 밀려 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가격때문이었다. ‘조선 에는 염직물 가게가 없다. 염분(染粉)을 사서 자기 집에서 면백을 염색하고 의복을 만든다. 5, 6년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염분을 수출해 크게 이익이 있었는데, 요즈음은 지나에서 수
71)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140). 72)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166).
73)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141).
74) 本間九介 조선잡기-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최혜주 역주, 김영사, 2010, p.89.
75) 本間九介 조선잡기-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최혜주 역주, 김영사, 2010, p.92.
76) p.132).
77) p.210).
출한다. 염분의 싼값에 압도되어 버렸다.’78) 그렇지만 일본에서 상품을 가져와 한국에서 팔 면 이익이 좋은 상품도 추천하고 있다.‘일본 내지에서 쓰시마를 거쳐 전라 경상 양도의 해 안에 물품을 밀수출하면 크게 이익이 있다고 한다. 물품은 석유, 금건, 비단, 비누, 제등, 붓, 묵, 종이, 도기, 램프, 냄비종류, 기타 잡화 일체이다.’79) 그러면서 일본상품들이 싸구려 이미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한다. ‘우리 일본 인도 한인은 싼물건을 판다고 하여, 조선에 맞는 조악한 제품을 수출한다...다만 인천, 경성 에서는 조악하고 싼 물건이 있지만 파는 곳이 매우 멀다. 부산은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개 항장이므로 조악하고 싼 물건을 사기보다는 오히려 견고한 것을 사려고 하는 풍조가 생긴 다. 이에 의해 우리나라 수출상인 사이에는 부산에 적합한 혹은 인천에 적합하다고 하는 상 투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80) 3) 일본의 어업진출
상인의 진출과 일본상품의 판매 못지않게 일본어업의 한국진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해관보고에 의하면 전라도 경상도 양도의 연안에서 어업에 종 사하는 일본 어선수는 1,500척에 달한다. 그 외에도 항상 1천척 이상의 어선이 출입하고 있다. 지금 가령 한 척에 타는 사람을 5명이라고 하면 1만2천명의 어부가 매년 양도 연안 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것이다. 이들 어부는 대부분 히로시마, 야마구찌, 쓰시마 등의 출신으 로 매해 수확 총계 150만엔을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3항과 경성에서 일본 사람의 무역 액 6백만엔 정도에 비할만 하다...어업도 보호할 필요가 없지 않을 것이다.’81) ‘어민 일반을 살펴보면 교육이 있는 자가 드물고, 따라서 한인 등의 이들 연해에 떠도는 어 민에 대한...오만 무례를 거의 말하지 않는 자가 없다...어부만이 아니라 일반의 일본사람에 대해서 경멸하고 모욕하는 거동이 많다. 조선지방을 여행하는 자가 널리 아는 사실이다....조 선에 거주하는 자를 한사람 늘리면 한 사람만큼의 국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어찌 알겠는가
?’82)
무지한 어민들은 한국민으로부터 많은 괄시와 억압을 받고 있다. ‘(어부가-인용자) 쌀, 된장 등 일용품을 미리 탑재해서 가는 것은..할 수 없는...포획한 어류를 연해의 한인에게 팔아 쌀 이나 소금....이러한 약점을 알고 있는 한인 들은 어부가 잡아온 어류를 가령 10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 2, 3원 정도 떼어먹고, 어부가 팔지 않을 때에는 노를 빼앗아 배가 떠 나지 못하게 한다...어부는 생선이 부패될까 두려워하고 또 양식이 고갈되기 때문에....팔지 않을 수가 없다.’83)
‘나는 작년에 경상도 연안 서천현에서 우리 상인이 한인에게 공격 당하는 것을 보았다. 해 안이 백사 위에 거적을 펴고 읍내의 중요한 자가 그 중앙에 자리를 차지하고, 곁에는 무려 수십인이 나란히 앉아서 우리나라 사람 하나를 모래위에 앉히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는 고문도구 즉 엉덩이를 치는 기계 하나를 두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오오카에치젠(大岡越
前)의 재판정이라고 할만한 모양으로 상석에 앉은 자가 무슨일인가 하고 엄격하게 상인을
78)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59).
79)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p.261-262).
80)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03).
81) 本間久介 조선잡기(최혜주 옮김, 김영사, 2008, p.214).
82) p.216).
83) pp.216-217).
꾸짖고 있다. 동포의 형편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그 이유를 상인에게 물으니, 전라도 영광에서 선박으로 미곡을 가져와 이곳을 지나는데, 서천현이 대흉년으로 곡물이 적었기 때 문에 한인 모두가 상인에게 반드시 이곳에서 팔아줄 것을 강요했다 한다. 상인이 다른 사람 에게 의뢰받은 곡물이라 자기 마음대로 팔 수 없다고 하자, 서천인이 죽더라도 돌아보지 않 는 비정한 사람이라고 하여 오늘 많은 사람이 이렇게 담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84)
Ⅳ. 맺는 말
혼마의 조선잡기는 한국의 풍습과 한국인의 일상생활을 세밀히 파악하고 서술한 여행기 이다. 여행의 일정에 따라 서술한 것이 아니라 주제에 따라 신문에 쓴 글을 모은 것으로서 일반적인 여행기와는 다른 형식이다. 혼마의 여행기 속에 드러나는 조선, 조선인의 주된 이 미지는 순진함, 무사태평과 함께 불결, 나태, 부패 등이다. 문명국 일본에서 바라보는 후진 국 한국의 시선이 잘 나타나 있다. 때문에 혼마의 글에서 한국에 대한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부정적이고 왜곡된 조선관이 잔뜩 묻어나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글 행간에 묻어나는 일본의 관점이 중요하다. 글 하나하나에 일본의 관점이 녹아있 으며 어떻게 일본의 이익을 극대화할 것인가가 깔려 있다. 이것은 같은 시기 한국을 여행하 였던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서양인의 경우 문명의 시각에서 한국을 바라보면서 무시하거나 연민을 갖는 것이 대부분이다. 거기서 서양인 자신이 속한 나라의 역사적 책무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혼마의 여행기가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서 널리 읽혀졌다는 것은 일본의 한국침략과 일본인들의 한반도 이주를 촉진하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84) p.217).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