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역사, 역사 속 사진[22회~33회]-흥남철수,심리전단 '삐라',송환포로수용소,전쟁고아,유엔군위안부,빨갱이 공포,반공만화,
대한민국 / 시간여행
2018. 12. 6. 21:32
https://blog.naver.com/ohyh45/221413955374사진 속 역사, 역사 속 사진[22회~33회]
흥남철수/'삐라'/송환포로수용소/전쟁고아/유엔군 위안부/
빨갱이 공포/반공만화/백선엽이야기/검찰이 식민지 시기 영광을 되찾은 비결/
오제도검사/보도연맹/임진강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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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역사,역사 속 사진』[ 1회~ 7회] https://blog.naver.com/ohyh45/221280469995
① 위안부, ② 근로정신대, ③ 사진병, ④ 분할 점령, ⑤ 신탁과 반탁, ⑥ 좌·우익충돌,
『사진 속 역사,역사 속 사진』[ 8회~13회] https://blog.naver.com/ohyh45/221280490532
① 여수·순천 반란,② 4·3사건,③ 피난민,④ 좌익 수감자 처형,⑤학살,⑥끊어진 대동강 철교,
『사진 속 역사,역사 속 사진』[14회~21회] https://blog.naver.com/ohyh45/221399717222
① 인천상륙작전,② 포격과 민간인 희생,③ 국군의 날,④ 두번의 대전 학살,⑤ 흥남철수,
⑥ 흥남부두에 버려진 피난민,
『사진 속 역사,역사 속 사진』[22회~33회] https://blog.naver.com/ohyh45/221413955374
①전쟁 고아, ②유엔군위안부, ③빨갱이공포, ④반공만화, ⑤⑥⑦백선엽 이야기,
⑧식민지시기 영광되찾은 검찰,⑨국회프락지사건과 검찰권 강화,⑩대한정치공작대 사건,
⑨보도연맹에 검찰이 적극 개입,⑩임진강 다리,
22. 반공자유주의 가족의 탄생
한국전쟁 고아 돌본 미군의 인도주의… 대량 파괴 뒤 사상심리전으로 활용하기도

서울폭격으로 집을 잃은 고아들이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1950.10.29. 강성현 제공
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이란 영화가 있다. 지난해 12월3일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가 주최한 문화 담소 행사로 영화 상영회와 감독과의 대화를 할 때, 난 ‘팬심’ 가득한 마음으로 보러 갔다. 영화 앞부분에 북한 ‘꽃제비’(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아이) 영상을 보는 ‘엄마’로서의 추상미가 나왔다.
이 장면은 감독과의 대화에서 다시 화제가 되었다. 꽃제비 영상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전쟁 시기 북한의 전쟁고아로 관심이 확장되었다 한다
가족 이미지로 체화된 혈맹
북한의 전쟁고아가 전시에, 전후에도 사회주의 국제연대의 하나로 ‘사회주의 형제국’들에 위탁 양육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51년부터 1959년까지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지로 1만 명 넘는 고아들이 보내졌다가 돌아온 사실은 잘 몰랐다.
고아들과 양육 관계자들의 드라마틱한 사연이 넘쳐날 것이다. 전쟁고아를 매개로 보니 사회주의 진영의 ‘형제’라는 가족 메타포(은유)도 새롭게 느껴진다.
폴란드 사례를 보니 부모 잃은 전쟁고아들에게 진심을 다한 파란 눈의 양육자들은 사실상 새 부모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북한의 귀국 명령으로 그 부모와 또 헤어지는 건 고아들의 생애에 또 다른 ‘이산’(離散)이 새겨지는 건 아니었을까? 복잡한 생각이 오갔다.
생경한 ‘꽃제비’란 단어에도 관심이 갔다. 찾아보니 어원에 대한 여러 추정이 있었는데, 내겐 ‘부랑아’란 의미로 다가왔다. 추상미는 1990년대 북한 식량난 이후 대규모로 생겨난 부랑아의 모습에서 북한 전쟁고아의 흔적을 직관한 셈이다.
그날 난 집에 돌아와서 늦게까지 사진 폴더를 들여다봤다. <한국전쟁 사진의 역사사회학>(2016)이란 책에 쓰려고 모아두었지만, 결국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다음 숙제로 미뤄둔 한국전쟁 고아 사진들과 관련 기록들이었다.
사진 속 피사체로 포착된 아이들. ‘고아’일까? ‘미아’(부모와 헤어진 아이들)나 ‘기아’(생활고로 부모가 버린 아이들)일까? 기록을 보면, ‘전쟁고아’ ‘부랑 고아’ ‘요구호 아동’ 등 다양한 이름이 나열돼 있다.
아이들 얼굴만 보면 참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오가지만, 사진 속 구도와 배치에서 ‘전쟁고아’들을 포착하는 시선의 의도는 너무 단순해서 단번에 간파할 수 있다.
한마디로 미군(또는 유엔군이나 ‘자유 진영’)의 ‘반공인도주의’적 구원을 전시하고 있다. 전쟁고아는 “공산악마의 침략을 심판하고 한국을 군사적으로 구원하러 온 ‘하나님의 십자군’ 미군의 인도주의적 구호와 원조를 확인하는 피사체로서 포착된다.
어디 이게 미군 사진병의 사진뿐이었을까. 당시 보도사진과 기사, ‘삐라’(전단) 등을 통해 이런 시각적 이미지는 양산됐고, 지금까지도 각종 전쟁 사진집과 사진전 등을 통해 재생산된다.
흥미로운 건 전쟁고아에 대한 구원의 손길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가족 이미지를 강력히 차용했다는 사실이다. 부모를 잃었지만(더구나 공산악마의 침략과 파괴·학살로), 미(국)군이 고아들의 ‘새아버지’가 되어주면서 한-미 관계는 반공인도주의로 계약된 ‘혈맹’이 된다.
한국의 자리는 당연히 ‘보육’돼야 하는 ‘고아’다. 가끔 고아들의 어머니 자리로 젠더화되어 재현되기도 한다. 반공자유주의 가족의 탄생이다.
행복산 고아원의 웃음

부산 ‘행복산’ 고아원의 아이들은 전쟁의 부침으로 고아가 되었지만, 여전히 삶에서 기쁨을 구할 수 있었다. 1951년 6월11일. 강성현 제공
한국전쟁 때 고아가 얼마나 많았는지 여러 추정치가 있지만, 5만여 명에서 17만여 명까지 분분하다. 1958년 보건사회부가 낸 통계에 따르면, 1953년 ‘육아 시설’이 440개였고, 수용 아동이 5만3964명이었다. 연령대로 보면, 7~13살이 제일 많고, 다음으로 14살 이상, 6살 미만 순이었다.
전쟁고아가 모두 수용되기에 역부족이었으므로 실제로는 5만4천 명을 훨씬 상회했을 것이다. 게다가 거리에서 생존을 이어가던 ‘부랑(고)아’도 많았다. 부모가 있든 없든 간에 부모 보호 밖에 방치된 셈이어서 전쟁고아 문제로 연속해서 볼 수 있다.(소현숙, ‘전쟁고아들이 겪은 전후’, 2018)
행콕(Ronald L. Hancock) 상병에게 포착된 일곱 아이는 서울 거리에 흔했던 부랑아 모습을 하고 있다. 행콕은 1950년 6월28일부터 한국에서 사진 활동을 하면서 군과 전투뿐 아니라 전쟁의 일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피사체를 인도주의적인 시선으로 포착하곤 했다.
‘수복’ 직후 서울은 곳곳이 폐허였고, 그 더미 사이사이에서 아이들이 기어나왔다. “흙투성이가 된 거무칙칙한 얼굴 속 하얀 이빨”에 맨발로 “유랑 걸식”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아이들은 미군을 상대로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깡통을 내밀거나 울면서 깡통을 본다. 그러면 미군은 먹을 것을 주거나 아이들을 어디론가 데려갔다. 당시 고아원, 보육원 관련 신문기사에서 보통 묘사되는 장면이다.
미군은 그렇게 데려간 고아들을 부대 마스코트로 삼고 간단한 통역, 심부름을 시키면서 부대 안에서 돌보거나 비공식적으로 입양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기존 육아시설을 후원·원조했는데, 육·해·공군과 해병대 모두가 마치 경쟁하듯 나섰다. 심지어 직접 시설을 세우고 한국인 원장과 직원을 고용해 간접 운영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부산 아미동 산봉우리에 세워진 ‘행복산’(Happy Mountain) 고아원이다. 이 시설은 미8군 배속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 8201부대)의 부산팀 장교인 매키언(Clifford G. Mckeon)이 1950년 11월에 세웠다.
UNCACK는 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의 통로였고, 피란민과 전쟁고아의 식량, 위생, 집, 교육 등의 구호 활동을 한국 정부와 지방 행정기관과 함께 집행하는 민사(Civil Affairs) 관련 군 조직이었다. 게다가 부산 팀은 물자가 들어오는 항만 시설을 관할하는 제2 병참사령부에 있었다.
사진❶는 라그론(G. Lagrones) 상병이 찍은 시리즈 중 하나다. 그는 행복산으로 올라가는 계단들 아래 또는 옆 위치에서 아이들을 포착했다. 다른 사진을 보면 다리가 잘린 아이들이 목발을 하고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는데, 그런데도 라그론은 그게 행복한 상태임을 응시하려 했을까?
아이들은 하나같이 밝게 웃고 있다. 사진❷의 아이들도 악기를 즐겁게 연주하고 있다. 밝은 표정, 옷차림, 악기를 포착하는 것만으로 부족했을까? 고아원 정문에 쓰인 문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른 위대한 나라들처럼 한국의 미래는 오늘 아이들의 교육과 복지에 달려 있다!”
인도주의 빛난던 매키언 소령과 헤스 중령
1951년 8월 기준으로 이곳에 163명의 고아가 있었다. 그중 80여 명이 유아였다. 그 후 아이들이 급격히 늘어나 1952년 3월에는 650명이 되었다. 고아원 운영 관리가 한국 정부 사회부로 이관되기 전까지 “매키언 그룹의 동정”으로만 유지됐다.
매키언 소령이 전역해 한국을 떠나게 되어 고아원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아이들은 오직 그를 위해 배우고 익힌 송별가를 불렀다. 전쟁터에서 집이 불타고 부모도 잃고 굶주리고 몸과 마음이 다쳤는데, “어린이의 아버지” 매키언 소령이 “하늘보다 높은 덕 바다보다 넓은 사랑”으로 다 품어주었으니 “성스러운 그 이름” 영원히 기억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동아일보> 1952년 3월6일치)
매키언과 송별한 바로 직후 고아원 운영 관리자가 고아들을 위한 구호 양곡 258가마를 횡령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이와 대조적으로 고아들의 아버지 매키언과 미군의 인도주의는 더 빛이 나게 되었다.
그보다 더 이름이 빛나는 고아들의 아버지가 있다. 그가 쓴 회고록이 바탕이 되어 1957년 미국에서 <전송가>(Battle Hymn)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한국 공군의 아버지로도 평가받는 헤스(Dean F. Hess)다. 그는 ‘장난감 자동차 작전’으로 전쟁고아 1천여 명을 제주도로 수송했고, 한국보육원을 세우고 후원했다.
전쟁고아 구출 작전의 전개가 참 드라마틱하다. 서울 소개(1·4 후퇴)를 앞두고 서울시립고아원 아이들을 인천항에서 미군 수송선 LST에 태우고 제주도로 데려가, 제6146 공군부대가 있는 K-40기지 근방에 있는 제주농업학교 건물을 확보해 수용하겠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흥남 철수’로 작전이 어그러졌다. LST는 인천으로 오지 않았고, 아이들은 추운 인천항 부둣가에 버려졌다. 아이 7명이 곧바로 죽어나갔다.
그때 헤스 중령이 나서서 제5공군 사령부에 수송기를 요청했다. 함경남도 흥남과 원산에서 대규모 철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서울과 인천도 군 작전의 우선순위에 따라 대량 소개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전쟁고아 1천여 명을 태울 비행기를 보내줄 리 만무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기도에 응답이 있었”던 것인지 C-54 수송기 15대가 왔다. 그것도 담요와 의약품을 충분히 가지고 공군 간호장교 등이 동행한 비행기였다. 1950년 12월20일 전쟁고아 907명, 직원 100여 명 등 1천여 명은 그렇게 제주도로 피란할 수 있었다.(딘 헤스, <신념의 조인>, 288~292쪽, 2010)
1951년 3월 헤스 중령은 프란체스카 리 여사의 추천을 받은 황온순을 원장으로 맞이했다. 황온순은 한국보육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고 여러 악조건을 이겨내며 전쟁고아 900여 명의 어머니가 되었다. 헤스 중령도 제주도 임무를 아예 한국 공군 조종사 훈련과 한국보육원 후원·원조로 설정할 정도로 온 힘을 쏟아부었다.
한국보육원의 고아들은 잘 먹고, 잘 입고, 아프지 않도록 치료받는 데 그치지 않고 잘 교육받았다. 아이들에게 ‘아동시 헌법’을 만들어 민주주의 교육을 했고, 보이스카우트 활동과 ‘브라스밴드’를 운영했으며, 제주 지역사회와 연계하는 다양한 활동을 했다.
제주 도민들 사이에서 한국보육원은 ‘유엔고아원’으로 명성이 자자했다.(이방원, ‘전쟁고아의 어머니 황온순의 아동복지활동’, 2108)
무자비한 파괴자와 선의의 구원자

장난감이 제주에 있는 전쟁고아들을 행복하게 했다. 수백 개의 선물이 제5공군으로 계속 들어오고 있다. 1951년 3월.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미 해군 소속 카메라맨들이 한국 해군기지에서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해병대 고아원의 이야기 <고아원 운영>을 촬영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사진❸은 미국과 일본의 제5공군으로부터 전달된 구호물자와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 등이 비행기로 공수된 것을 아이들이 맞이하러 가는 모습이다. 여기저기서 보내는 선물을 받기 위해 이 많은 아이가 직접 비행기 앞으로 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건 의도를 갖고 다분히 연출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가운데 아이들을 안고 있는 여성이 바로 황온순 원장이다. 원장 뒤편에 비행기 안을 들여다보는 뒷모습의 장교가 헤스 중령이다. 이 사진 이미지의 수신자는 누구일까?
한국으로 구호·원조 물자와 돈을 보내주는 미국 등 자유 진영의 시민들이다. 그리고 반공주의를 종교적 믿음으로 승화시킨 자유 진영의 여러 종교 단체(특히 기독교 복음주의 단체들)와 신도들이다. 전쟁고아들을 통해 자유 진영의 결속감을 가족의 이미지로 꾀했다.
다시 말해 사진의 ‘기록’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전쟁고아를 통해 ‘적’의 만행을 생생히 고발하고 ‘우리’를 상상된 혈연관계로 결속하는 사상심리전으로 발전했다.
사진❹가 바로 미 해병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연출되는 여러 장면을 영화로 담는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이렇게 제작된 영상은 유엔군, 미국, 자유 진영의 여러 국가에 뉴스 영상으로, 영화의 자료 영상으로 활용됐다.
매키언 소령, 헤스 중령, 많은 미군이 한국의 전쟁고아들에게 선의로 인도적 구호 활동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여러 이유로, 때론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아이들을 진심으로 도우려 했고 아꼈다.
헤스의 말처럼 “주검을 수없이 목격했던 우리 장병들은 새로이 피어나는 생명들을 보살피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혀 이처럼 온정을 베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신념의 조인>, 320쪽)
헤스가 유럽과 한국에서 수많은 전투 출격 횟수를 기록하는 동안 고아원과 피란민들을 오폭한 적이 있고, 이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고아에게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베풀며 자신의 죄과를 용서받으려 했다는 글도 있다. 뭐가 되었든 난 고아들의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했던 그 마음은 ‘숭고한 구원자’의 그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젠 그 마음마저 전쟁고아를 활용한 미군의 사상심리전 프레임에서 어떻게 재현됐는지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난 그렇게 사상심리전으로 재현된 구원 이미지가 대량 파괴의 이면이자 사후적 수습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군은 전쟁을 하면서 적군뿐만 아니라 비전투 지역에 대량으로 인적·물적 피해를 낳았고, 점령 후에는 민간 구호와 원조(작전)를 하는 모순적 상황을 연출했다. 이 모순을 봉합하는 길은 하나였다. ‘적’에겐 무자비한 파괴자이지만, ‘우리’에겐 선의의 구원자라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양면 함꼐 살펴야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봉합된 이미지보다 더 잔인하게 나타났다. 적과 우리를 가르는 경계가 톱질 전쟁으로 이동하는 전선만큼이나 요동쳤기 때문이다. 최전선에서 대량 폭격과 기총소사하는 헤스 중령에게도 그 상황은 비켜가지 않았다.
예컨대 부서진 대동강철교를 건너는 피란민, 특히 아이들을 순수한 우리라고 인식했지만, 아군의 최전선을 통과하려는 피란민과 아이들은 적 게릴라가 변장했을 수도 있다는 인식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 인식이 바로 수많은 ‘노근리 사건’들을 전국 곳곳에서 일으켰다. 이런 맥락에서 미군을 숭고한 구원자로 재현하는 사진 속 시각은, ‘우리’를 파괴했던 사진 속 사각과 함께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출처] :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 : 사진속의 역사,역사속의 사진 <반공주의 가족의 탄생> / 한겨레 21.제 1250호 , 2019. 2.15.
23. 우리가 몰랐던 ‘위안부’의 끈질긴 역사에 대해
- 일본군 위안부 유엔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①부산 1951년 6월. 이경모 촬영(<격동기의 현장>, 121쪽). 강성현 제공
2월25일부터 3월20일까지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이란 주제로 전시회가 열렸다. 2014년 여름 미미하게 시작했던 일이 큰 성과를 내며 창대하게 끝난 셈이다. 공문서·사진·영상 등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수집, 연구자를 위한 학술 자료집과 일반 시민을 위한 대중서 발간, 그리고 전시회와 디지털 아카이브(기록 보관) 구축 준비로 마침표를 찍게 되었으니 말이다.
‘위안부’ 문제를 지난하지만 고통스럽게 대면하고 응답하는 데 제법 긴 시간과 온 열의·열정을 쏟았다. 자료에 말 걸고, 자료가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피해 여성들이 남긴 증언과 교차하며 전쟁에 성적으로 동원된 여성들의 여러 이야기를 길어올리려 했다. 그 이야기들은 결코 ‘강제연행’의 증거나 민족 피해의 여성적 재현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난 특별 도슨트(전문 안내인)로 몇 차례 관람객에게 전시를 설명하면서 일본 오키나와로 끌려가고 버려졌던 배봉기의 삶과 이야기를 몇 번이나 곱씹었다.
“살아남았으니 살고자 했다” “일상이 전쟁이었으니, 전쟁 또한 삶이었다”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던 일상이 이미 전쟁 같았다”는 말은 전쟁의 일상과 일상의 전쟁에 동원돼 살아야 했던 여성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할 것인지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전쟁이 끝나도 전쟁처럼 살아야 했던
잘 알려졌듯, 배봉기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배봉기의 선택이었지만, 가난과 ‘정조’ 등의 이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계급적·가부장제적 구조의 구속이 내면화된 결과로 나온 선택이었다. 사실상 강제로 남은 거로 봐야 한다. 배봉기는 민간인을 억류했던 수용소를 빠져나와 절망적으로 오키나와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전전하며 술집에서 접대하고 식모로 일하는 등 그의 삶은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평생 겪으며 트라우마적 삶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전쟁 때 총알 한 발로 죽었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내뱉은 말은 전쟁이 끝났어도 전쟁 같은 삶의 고통과 고단함을 웅변한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말의 다층적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한국으로 ‘귀환’한 ‘위안부’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고향에, 집에 돌아가 이제는 전쟁 없는 일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을까? 오키나와에 잔류한 배봉기의 삶과 완전히 달랐을까? 미국과 소련의 38선 분할(분단)점령과 군정, 정부 수립 전후의 내전,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과 일상에서 ‘귀환’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겪었던 일을 가족, 친지, 공동체에게 함구해야 했다.
‘정조’를 지키지 못한 죄와 수치심을 내면화해 자기를 부정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배봉기처럼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키나와 군사기지는 한국전쟁의 전장과 연결돼 있었다. 오키나와에 남은 배봉기와 한국으로 귀환한 ‘위안부’의 전쟁 일상도 연결돼 있었다.
전쟁을 치르는 국가가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그게 일제든 한국이든, 변함없이 위안·위무·위문이었다. 각종 오락과 유흥은 물론 성의 제공을 포함했다. 여성사의 시각과 방법으로 한국전쟁을 연구한 이임하(‘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2007)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남성 국민을 ‘병사형 주체’로, 여성 국민을 ‘위안형 주체’로 젠더화했다.
위안·위무·위문은 위안하는 주체의 계급에 따라 민간 외교 활동으로 치장된 오락·유흥·성의 제공인지, 유엔군 위안소에서 은혜로운 미군의 노고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유흥과 성의 제공인지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김활란·모윤숙·임영신·박마리아 같은 여성 지도자들은 여학생이나 대한여자청년단, 대한부인회의 젊은 여성들을 동원해 병사들을 위무·위문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주로 ‘파티대행업’에 나서 유엔군 장교와 외교관 등 영향력 있는 남성들을 위안했다.

②‘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 지시에 관한 건’ 표지. 한국 국가기록원 소장
빅토리아하우스의 용도
1951년 계속되는 필승각(빅토리아하우스) 파티에는 이화여대 학생·졸업생들이 동원됐다. 노래와 무용이 곁들여지거나 여러 유형의 시중이 더해졌다. 낙랑클럽은 더 갔다. “낙랑 걸”들은 유엔군 고위급과 외교관들을 상대로 ‘국부’(國父) 이승만을 위한 로비와 정보 수집을 했고, “밤에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불빛을 받으며 접대”했다.
이임하는 “성을 매개로 하여 열리는 파티,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시중을 드는 여학생들, 노래와 무용 등은 전형적인 이승만식 외교”였다고 평한다.
사진❶은 이경모가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문관을 그만두고 한국사진신문사 사진부장으로 활동할 때 찍은 것이다. 정통 르포르타주 형식이 두드러지는 이경모 사진답게 사진 속 구도와 피사체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속삭이듯 말을 걸고 있다.
이기붕 국방장관 취임 축하를 위해 박마리아가 초대한 주한 미국대사와 미8군 수뇌부, 그리고 문 밖에서 노래하는 여학생들을 포착하고 있다. 적산가옥을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 국방장관 관사 안방에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가 흰저고리 검정치마 차림으로 앉아 있고, 그 옆에 존 무초 주한 미국대사와 콜트 미8군 부사령관이 앉아 있다.
화각이 넓지 않아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사진 왼쪽에는 이기붕 장관(시계를 찬 손목)과 양옆으로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과 김활란이 앉아 있었다. 군과 외교의 최고위층 인사들이다. 안방에 신발을 신고, 게다가 발(군화)을 쭉 뻗은 자세를 보고 종속적인 한-미 관계를 절묘하게 포착했다는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난 적산가옥이 자아내는 (탈)식민주의적 장소성과 “여흥을 돋우기 위해” 문 밖에 서서 “팝송”을 부르는 “이화여대 학생”들의 모습에 더 눈이 간다. 이를 두고 한-미 관계를 촉진한 민간 외교로 보고 넘어갈 수 있을까?
분명한 건 김활란·모윤숙·박마리아 등 여성 지도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또는 스스로 청원해 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에 당시에도 사회적 시선과 여론이 곱지 않았다는 거다. 직접적인 성적 유흥을 제공했든 안 했든 말이다.
그래도 이건 약과였다. 이승만 정부는 ‘공창제도 등 폐지령’(과도정부 법률 제7호, 1947년 11월14일 공포, 1948년 2월14일 시행)에 반하는 불법을 저질렀다. 아예 업자를 두고 유엔군 전용 위안소를 설치·운영하는 데 개입했다.
단지 유엔군의 노고에 감사 보답하기 위해서였겠는가? 박정미의 연구에 따르면, 여러 의도를 가지고 불법이지만 “묵인 관리”하는 방식으로 개입했다(‘한국전쟁기 성매매 정책에 관한 연구: 위안소와 위안부를 중심으로’, 2011).
정부가 내세운 건 전선 이동이 미미하고 주둔군 병사들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군이 저지르는 성범죄(강간 등)로부터 “일반 여성의 정조를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로 삼기 위해 유엔군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거다.
미군이 요청해서 한국 정부가 개입했다는 논의도 있다. 전쟁으로 생계 수단을 이어가기 위해 많은 여성이 성을 팔았고, 돈과 물자가 있는 미군 주둔지 주변으로 여성들이 몰렸는데, 이에 현실적으로 성병 점염을 통제하고 “제5열(내부의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해 미군이 한국 정부에 유엔군 전용 위안소 설치와 관리를 요청했다는 거다.
공창제 폐지해놓고 위안소 설치
미군 등 유엔군 주둔 지역 주변 거리에 위안소가 들어섰다. 군부대 막사, 야산, 들판 가리지 않고 이동형 위안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9~10월 등장해 1951년 6월 전후 전선이 38선 부근에 고착화하면서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1953년이 되면 ‘필요악’이라 주장될 정도로 상설화됐고, 전국적으로 분포하면서 특정 지역의 격리 설치도 논의되기에 이른다.
흥미로운 건 이승만 정부가 불법임을 의식하고도 전쟁 상황이라는 특수성을 내세워 위안소를 설치하고 관리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 행정명령을 지시했다는 거다. 하위 명령이 상위 법률을 위반하는 성매매에 대한 “묵인 관리”였다.
박정미가 처음 밝힌 바에 따르면, 첫 사례는 1951년 10월10일 보건부가 결재한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 지시에 관한 건’(보건부 방역국 1726호)이다. 이 지시에서 ‘위안부’는 “위안소에서 외군을 상대로 위안접객을 업으로 하는 부녀자”로 정의됐다.
이 지시는 위안소 신설과 영업 허가, 위안부 건강 진단, 위안소와 위안부의 격리 등을 규정한다. 기타 준수 사항에 “이 영업은 6·25 동란을 계기로 전쟁 수행에 수반된 특수영업태이며 의법적 공무사업이 안이(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여 취급할 것”이라고 명기한 것으로 보아, 정부 스스로도 법에 반하는 지시를 내렸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표지에 이 지시의 “영문자료(를) CACK(미8군 하부 조직인 UNCACK 부대 지칭)에게 제시할 것”이라고 쓰인 것으로 볼 때, 그리고 지시 사항 중 “허가 신설은 주둔군 당국의 요청에 의할 것”과 “건강진단을 취체(단속)하기 위하야 외군헌병대에도 연락”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미군이 군 전용 위안소를 승인하고 성병 관리 차원에서 한국인 여성의 몸을 위생·경찰의 시각과 방법으로 통제했음을 알 수 있다.
전후에 기지촌 성매매 집결지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성병에 걸린 미군 병사가 “컨택”(성병을 감염시켰을 것으로 의심되는 여성을 찍는 것을 의미)하면 “낙검자 수용소”로 끌려가 성병이 치료돼 나오거나 죽어서 나왔다는, 이를 두고 “토벌당한다”고 표현했던 미군 ‘위안부’의 말은 그 자체로 국가폭력, 국가범죄가 여성의 몸에 자행됐음을 드러내준다(‘[토요판] 인신매매 당한 뒤 매일 밤 울면서 미군을 받았다’, <한겨레> 2014년 7월5일치).
사진❸은 사진병 크리잭(Kryzak)이 찍은 것으로, 한국인 의사가 성병 치료를 위해 미 제3보병사단에서 운영하는 민사구호소로 데리고 온 성매매 여성들을 진료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구호소 막사 안 화사해 보이는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검진을 기다리는 여성들의 표정은 어둡다. 이 사진은 당시 “대외비”로 분류돼 이용이 제한됐다.

③미 제3보병사단 민사구호소의 한국인 의사가 성매매 여성들을 진료하고 있다.
1952년 5월11일. 강성현 제공
일본군 경력자들의 발상
1952년 유엔 당국과 UNCACK(“주한유엔민사처”)의 지시로 한국 정부는 전국에 성병진료소를 설치해 건강진단서를 발급하고 성병 예방과 치료에 나섰다. 2월20일 한 보도에 따르면, 보건장관은 전국에 약 40개의 성병진료소를 설치했고, 더 증설 중이라고 했다(<경향신문> 1952년 2월23일치).
당시 보건 통계에 따르면, 1952년부터 성병 검진 연인원이 비약적으로 늘었고 건강을 회복한 “연인원”이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성병 예방과 치료 대책이 성과를 거두었다는 말이다.
이승만 정부가 성병 관리를 거부하는 대상을 강력히 단속하고 처벌한 효과도 작용했을까? ‘위안부’들은 “밀정”이나 “제5열 분자”로 의심받고 단속되기도 했다.
인도주의적 의료구호로 보이는 성병 예방 조치에는 사실 성병을 유발하고 옮기는 존재, 즉 위생적 차원의 ‘불순분자’가 있고, 이들을 위생 처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전제돼 있었다.
성병으로부터 미군과 유엔군의 신체를 보호하는 보건위생 조치가 제5열 침투를 통한 공산주의 전염을 차단하고 유엔군과 자유세계를 수호한다는 담론과 연결돼 있었다.
이 정도 얘기했으니 한국군이 군 위안소를 설치, 운영했다는 항간의 이야기가 생뚱맞다고 치부하지 말길 바란다. 김귀옥은 2000년대 초반부터 육군본부가 1956년 출간한 <6·25사변 후방전사>에서 관련 내용을 발견했고, 참전 장군과 병사 등의 회고와 증언을 종합해 한국군 위안부와 특수위안대의 존재를 주장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병사의 사기를 진작하고 전시 집단강간을 방지하며, 성병을 예방하고 군사기밀 누설을 미연에 방지할 목적으로 과거 일본군 경력이 있는 일부 간부들의 발상으로 특수위안대를 직영으로 설치, 운영했다.
유엔군 위안소가 업자를 내세운 군 전용 위안소로 한국 정부와 미군은 설치 요청, 허가·취소, 성병 관리와 처벌의 방식으로 개입했다면, 한국군 특수위안소는 군이 직접 설치해 운영하고 ‘5종 보급품’으로 ‘위안부’를 ‘조달’(동원)한 것이다.
부대마다 ‘조달’ 방식은 달랐지만, 종삼(서울 종로3가) 등 사창가에서 여성들을 동원하거나 일부는 ‘빨갱이’ 여성 등의 강간과 납치를 통해 강제 동원했다.
그 수가, 빈약한 자료와 회고를 종합하면 최소 79명에서 최대 240명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위안소를 이용한 병사가 1952년에만 연인원 20만 명이 넘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누가 포주인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소생했다. 그 제도를 떠올린 “발상”, 그 발상을 어떤 제지도 없이 실행한 한국군 수뇌부, 법 위반임을 의식하면서도 “묵인 관리”하겠다고 조처를 하고 나선 이승만 정부,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쟁, 일본 오키나와와 한국 점령에 이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위안부’ 제도의 관리 방식에 동화된 미군, 그들은 전쟁에 동원된 여성들에게 ‘포주’의 위치와 다를 바 없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전쟁의 일상, 일상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살고자 한 인생 전체가 국가가 관여한 성폭력으로 얼룩진 ‘위안부’ 여성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대면하고 기록 기억하며, 응답해야 할까?
[출처] :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 : 사진속의 역사,역사속의 사진 <우리가 몰랐던 '위안부'의 끈질진 역사에 대해> / 한겨레 21.제 1255호 , 2019. 3.27.
24. 빨갱이 공포’는 어떻게 시작됐나
1950년 한국전쟁 수복 후 서울을 방문한 미국 학자들, 그들의 심리전 연구 프로젝트

❶한국에 현지 조사하러 온 미 공군 인적자원연구소(HRRI) 연구팀.
1950년 12월 루시 샐리크(Lucy Sallick) 소장 사진. 김일환 제공
1951년 7월 〈빨갱이가 도시를 점령하다〉(The Reds Take a City, 이하 〈빨갱이 서울 점령〉)란 소책자가 나왔다. 부제는 ‘목격자 이야기로 보는 공산주의자의 서울 점령’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출간했을까? 저자는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부총장인 윌버 슈람 교수와 러트거스대학교 사회학과 학과장인 존 라일리 교수다.
근데 책 제목과 달리 이들은 북한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그곳에 있지 않았다. 미국에 있었다. 어떻게 책 부제에 ‘목격자’(eyewitness)란 말이 붙을 수 있었을까?
소비에트 사회체제 연구자가 왜
슈람과 라일리 교수가 서울에 온 것은 ‘수복’ 후인 1950년 12월9일이었다. 심리전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러 한국에 현지 조사하러 왔다. 이 프로젝트는 미 공군 산하 맥스웰공군대학교 인적자원연구소(HRRI) 의뢰로 시작됐고, 공군 참모총장 반덴버그 장군과 극동공군 사령관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이 재가했다. 슈람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전시정보국(OWI)에서 심리전을 연구해왔다.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웰, 사회학자 폴 라자스펠드와 함께 커뮤니케이션학자 슈람은 전후 미국 사회과학계를 이끌었던 중요 인사다. 라일리 교수도 나중에 근대화론으로 유명해진 대니얼 러너와 함께 육군 심리전부에서 심리전을 연구했고, 전후 러트거스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연구를 계속했다.
면면을 보니 미국의 군과 학계를 잇는 거물들이 전쟁이 한창인 한국에 들어와 수행했던 프로젝트의 목적과 내용이 궁금해진다. 심지어 한국에 다녀간 지 반년 만에 저 소책자를 미국(러트거스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했다. 왜?
이 주제와 관련해 집요하게 파고든 연구가 있다. 2017년 김일환·정준영의 <한국전쟁의 ‘현장’은 어떻게 냉전 사회과학의 지식으로 전환되는가?>와 김민환·옥창준의 <냉전의 텍스트화, 텍스트의 냉전화>가 나왔다.
이 연구에 따르면, 슈람과 라일리 교수가 이끄는 연구 프로젝트의 목적은 “소비에트 사회체제” 연구다. 종전 후 세계는 미국 주도의 ‘자유 진영’과 소련의 ‘공산 진영’으로 양분됐고, 냉전이 적대적으로 전개됐다.
미국은 적인 “소비에트 사회체제”의 원리와 실상을 알고 싶었다. 차갑든 뜨겁든 전쟁은 지피지기(知彼知己) 아니었던가? 소련을 빠져나오는 피란민들의 심문이나 인터뷰로는 감질났다.
그러던 차에 냉전의 주변부 한국에서 열전이 터졌고, 심지어 ‘톱질 전쟁’ 양상으로 전개됐다. 서울이 공산군에 3개월 동안 점령됐다가,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수복한 데 그치지 않고 평양을 점령했다. 미국으로선 평양과 서울의 현지 조사로 ‘소비에트(화된) 체제’를 가늠할 기회가 생겼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38선 돌파” 후 미군 연구팀의 현지 조사 계획이 세워졌는데, 서둘러 준비했지만,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전선이 내려가는 게 문제였다. 연구팀이 서울에 도착한 12월9일은 유엔군이 평양을 포기하고 서울도 다시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처벌 광풍 속 ‘자기 증명 수기’들
슈람과 라일리 교수 등은 1950년 여름 한강교 폭파로 피란을 갈 수 없어 서울에 ‘잔류’했던 공무원과 지식인도 수십 명 인터뷰했다. 6~7일의 촉박한 기간이었지만, 허탕은 아니었다. 11월 전후 미군도 공산주의의 만행을 선전하기 위한 기록을 만들고 있던 차였다.
‘도강파’에 의한 ‘부역자 처벌’ 광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잔류파’ 지식인과 문화인은 자발적으로 역도에 협력하지 않았음을 자기 증명하려고 수기 묶음을 막 펴내려던 때다. 그 가운데 <고난의 90일>(11월27일 출간)과 <나는 이렇게 살았다>(12월1일 출간)가 슈람과 라일리 교수의 주목을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빨갱이 서울 점령〉은 바로 두 수기에서 3개월 동안의 “공산 지배의 만행과 참상”을 목격하고 체험한 각계각층 인사 11명의 이야기를 뽑아서 각색한 것이다. 시인 모윤숙을 비롯해 고려대 총장 유진오, 검사 엄상섭, 국회의원 박순천, 기자 김영상, 배우 복혜숙, 교육자 황신덕, 김인영 목사 등이었다.
또 흥미로운 점은, 목격체험담 사이사이에 슈람과 라일리 교수 등이 쓴 글이 편집됐다. ‘공산주의가 한국에 미친 영향에 대한 예비적 연구’(1951)라는 보고서의 요약글이었다. “북한 공산체제의 실상과 자유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한국인들의 목격체험을 더 보편적으로 발신하기 위해 배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독자는 세계시민이다. 좁게는 자유 진영 시민들에게 공산주의라는 ‘악의 축’의 만행을 생생하게 고발하면서 ‘우리’의 사기를 북돋우려 한 것이고, 넓게는 공산 진영에도 너희의 만행을 똑똑히 봐라 하면서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한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북한이 서울 점령 뒤 “소비에트 사회체제를 이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을 포착해 적 사회체제의 취약 지점을 판별하고, 이를 심리전 전략에 활용해 북한 체제, 더 나아가 공산체제를 약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김일환·정준영, 앞의 글, 109쪽)하는 데 의도가 있었다.
사진❶은 HRRI 연구팀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모습을 포착했다. 존 라일리 교수의 딸인 루시 샐리크가 소장했던 사진으로 누가 찍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진 설명 정보가 없다. 다만 비행기에서 내리는 장면을 찍은 것으로 서울이라면 12월9일이고, 부산이라면 12월15일이다.
사진 속 한국인 4명은 미국인 사회과학자들을 지원하던 이들로 보인다. 당시 한국인 협력자 25명이 통역과 정보 제공은 물론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심리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철학 등의 배경을 지닌 유학 경험이 있는 저명한 지식인들이었다.
고려대 총장 유진오, 국립박물관장 김재원,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이진숙, 서울대 철학과 교수 김두헌, 저명한 내과의이자 사회부 차관을 한 최창순 등이었다.

❷(왼쪽) 시인 모윤숙이 유엔군의 서울 수복 전까지 서울 인근 야산에 숨어 어떻게 공산주의자를 피해 지냈는지를 말하고 있다. 1950년 11월8일. ❸ 맥아더 총사령부의 사진부 영상팀이 중앙청 건물 앞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이교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교선은 국회의원이다. 1950년 11월24일. 강성현 제공
공산당 집권 가능성 높던 이탈리아에 번역
사진❷는 맥아더 총사령부의 사진부 소속 71통신대 A중대 영상팀이 모윤숙을 인터뷰하는 모습을 스틸사진팀 데인절 상병이 찍은 것이다. 모윤숙은 적화삼삭(赤化三朔·공산 치하 3개월)의 고난을 이야기했다. 이를 바탕으로 영상팀은 “모윤숙 공산주의를 피해 숨다”라는 극영화를 만들었는데, 모윤숙이 실제 주연을 맡아 재연했다.
현재 이 영화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영화의 주요 장면을 포착한 스틸사진 19장이 있다(정근식·강성현, <한국전쟁 사진의 역사사회학>, 2016). <고난의 90일>의 ‘나는 정말로 살아 있는가’에서 나오는 모윤숙 이야기와 대동소이하다. 이 이야기는 〈빨갱이 서울 점령〉에서 ‘비밀경찰이 추적하다’라는 제목으로 번역 수록됐다.
사진❸도 모윤숙처럼 서울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잔류했다가 결국 “괴뢰집단에 자수하고 지지성명을 발표”했던 한 국회의원을 미군 영상팀이 찍고 있는 모습이다. 이교선 의원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 릿쿄대학 상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뉴욕대학에 유학을 갔다. 해방 후 그는 주한 미군정에서 일했고, 군정이 끝나기 직전에 중앙물가행정처장을 지냈다. 그 경력으로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첫 기획처장에 발탁됐다(다음날 사의를 표명해 처리됐다).
서울대 부총장을 지냈고,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핵심 지도층 인사인 그도 끝내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서울 수복 후 국회는 “도강”하지 못하고 북한에 자수하고 지지 성명을 발표한 21명의 의원을 심사 처단하자고 논의한다(<동아일보> 1950년 11월2일).
여기에 이교선 의원도, 〈빨갱이 서울 점령〉에 나오는 박순천 의원도 포함됐다. 박순천처럼 이교선 의원에게도 ‘자수’와 ‘지지’에 대한 철저한 고백과 반성이 요구됐다.
〈빨갱이 서울 점령〉은 영어 출간에 그치지 않고, 자유 진영의 여러 지역과 국가에 번역 전파됐다. 1953년 이탈리아어판과 중국어판이, 1957년에는 스페인어판과 포르투갈어판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출판됐다.
사진❹는 이탈리아판 표지다.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함께 선거를 통한 공산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악의 축’ 소련의 만행을 선전하고 사회당과 공산당의 분열을 꾀하는 심리전을 전개했다.
특히 CIA의 문화 냉전은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진보적 지식인의 ‘환멸’을 증폭하는 방식을 취했다(김민환·옥창준, 앞의 글, 148쪽). 〈빨갱이 서울 점령〉에 나오는 한국 지식인의 공산 점령과 지배 만행의 목격과 체험은 이탈리아 상황에 안성맞춤이었다.

❹ 〈빨갱이가 도시를 점령하다〉의 이탈리아판 표지
〈빨갱이가 왔을 때〉(Quando arrivano I Rossi·1953). 강성현 제공
낙인에 대한 공포
“빨갱이가 판치는 세상”에 대한 공포의 원체험과 냉전적 지식이 한국에서 ‘자유세계’로 발신됐다. 냉전 공포의 원체험과 지식은 자유 진영의 ‘상상적 공동체’ 형성과 윤리·도덕, 그리고 정체성 내용의 주재료가 되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그 공포의 정체는 ‘빨갱이의 만행(또는 악행)’이 판치는 현실에서 기인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빨갱이 ‘부역자’(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자) 낙인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빨갱이 점령으로 오염된 공간에 있던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오염되지 않았음을 필사적으로 자기 증명하지 못하면, 물리적·사회적 죽음의 문턱으로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의 외양으로 만들어지고 전 지구적으로 환류된 냉전적 지식의 커튼 뒤로 그런 공포가 가려져 있었다. 빨간 점퍼를 입은 ‘빨갱이 감별사’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을 점령하고 ‘종북좌파’를 부르짖고 선동하는 지금이야말로 반드시 ‘적화삼삭’ 공포의 원체험을 성찰해야 한다.
난 2002년 서울 도심 골목골목에 울려퍼진 ‘비 더 레즈’(Be the Reds) 구호와 ‘오 필승 코리아(한반도)’ 함성의 기억을 강렬히 체득하고 있다. 이 구호와 함성이 새로운 맥락으로 종전과 탈분단 평화로 가는 길목에서 울려퍼질 때 그 공포를 뒤로할 수 있지 않을까.
[출처] :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 : 사진속의 역사,역사속의 사진 <'빨갱이 공포'는 어떻게 시작됐나> / 한겨레 21.제 1260호 , 2019. 5.2.
25. 반공만화는 어떻게 ‘반공시민’을 만들었나
미 공보원, 아시아 각국서 “공산당이 가족해체” 만화 제작·번역·배포

<동순이와 순최>. 미국 공보원 필리핀 마닐라 극동지역제작센터. 1953년 7월27일 발행.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옥창준 제공
지난 연재(제1260호 ‘빨갱이 공포는 어떻게 시작됐나’)에서는 1951년 ‘1·4 후퇴’ 직전 서울을 방문한 미국 석학들이 어떤 목적으로 심리전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그 결과로 나온 <빨갱이가 도시를 점령하다>란 소책자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했다.
서울 ‘잔류파’ 각계각층 엘리트의 입을 통해 자기 고백과 증명의 형식으로 터져나왔던 “빨갱이가 판치는 세상”에 대한 체험과 공포가 이승만 정부에 의한 빨갱이 ‘부역자’ 낙인과 ‘처리’(처형)에 대한 공포와도 뒤범벅됐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럼에도 ‘관제 빨갱이’ 낙인 공포는 사회과학 외양의 냉전적 지식 커튼 뒤로 가려진 채 ‘진짜 빨갱이’의 악행·만행 공포만 부각돼 전쟁터인 한국에서 ‘자유세계’로 확산됐다는 것도 확인했다.
이번 연재에서는 전 지구적으로 수출된 이 이야기가 만화라는 대중매체 형식으로 냉전 아시아, 종국에는 한국으로 ‘귀환’해서 ‘빨갱이 적’에 대한 공포의 원체험에 또 어떻게 작용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동순이와 순최>라는 단편 만화책이 있다. 2016년 4월19일 냉전 아시아의 사상심리전을 나와 함께 연구했던 옥창준·김민환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The Reds takes a City’로 검색된 자료를 확인하다가 이 만화책을 우연하게,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적으로 마주쳤다.
한국어 반공 이야기→영어→한국어 만화로
만화책 앞표지를 보고 참 낯설었다. 컬러풀한 표지에 ‘동순이와 순최’라는 빨간색 글씨가 도드라져 보여 ‘이게 뭐지’ 싶었다. 설마 사람 이름? 주인공 이름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근데 뒤표지를 보니 영문 제목이 ‘The Reds takes a City’ 아닌가. 만화를 보니 실제 주인공은 한강교 폭파로 피란 가지 못한 <서울신문> 기자 ‘김융상’이다.
윌버 슈람·존 라일리 교수가 쓴 <빨갱이가 도시를 점령하다>에 ‘신문기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나’(What happened to a Newspaperman)란 글이 실려 있다. 이것은 1950년 12월1일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한 <나는 이렇게 살았다> 중 ‘김영상’이 쓴 ‘사선 200미터’를 각색한 글이다. 흥미로운 건 <동순이와 순최>가 이 ‘신문기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나’를 만화로 재각색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한국어로 서울에서 출판한 ‘적화삼삭’(공산 치하 3개월)의 신문기자 버전 이야기가 영어로 번역돼 전세계에 확산됐고, 이것이 다시 한국어 만화로 ‘문화번역’돼 한국에 돌아왔다는 말이다.
뒤표지를 보면, 1953년 7월2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5만150부가 제작됐고, 그중 5만 부가 주한미공보원 부산지부로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일이다. 만화작가는 미상이다.
옥창준·김민환은 “만화가의 작화 방식이나 만화에 기록되어 있는 작가 서명 등을 고려할 때 마닐라 소재 극동지역제작센터(마닐라센터)에서 근무하는 미국인이나 필리핀인으로 추정”한다.(백원담·강성현 편, <열전 속 냉전, 냉전 속 열전>, 153~154쪽, 2017년, 이하 쪽수만 표기)
마닐라센터는 미 공보원 상하이지부가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 홍콩을 거쳐 마닐라로 옮겨온 것이다. 주로 필리핀과 홍콩, 대만을 중심으로 동남아 지역인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인도차이나·타이·버마 등의 화교를 대상으로 제작했는데, 그런 곳에서 한국전쟁기 ‘적화삼삭’이 배경인 한국어 만화가 만들어진 것은 참 흥미롭다.
연구가 밝힌 바에 따르면, 영어로 작성된 (만화) 텍스트 초본이 여러 국가의 미 공보원 지부에 배분되면, 각 지부에서는 해당 지역 언어로 그 초본을 번역한 것을 덧붙여 오프셋(평판인쇄) 틀을 마닐라센터로 보내고, 센터는 이를 통해 대량 인쇄해 다시 각국의 미 공보원 지부로 발송했다는 거다.(158쪽)
‘가족 위협’ 빨갱이 서사, 만화로 ‘실감 나게’
만화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서울신문> 기자로 피란을 가지 못해 숨어 지내던 융상을 대신해 그의 딸 순최는 먹을 것을 사러 시장에 갔다 오는 길에 인민군에게 붙들려 성희롱을 당한 뒤 도망치다가 약혼자 동순이를 만나 안전하게 귀가한다.
그 뒤 동순이는 서울을 탈출하다가 붙들려 의용군에 끌려가고, 민청원(빨갱이) 근호는 순최에게 구애하며 접근한다. 순최는 약혼자 동순이의 존재를 언급하며 거절하지만,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근호는 순최의 아버지 융상을 ‘반동’으로 끌고 간다.
폭력적인 취조 끝에 융상은 기회를 잡기 위해 거짓 협력하기로 서약하지만, 구금됐다가 평양으로 끌려간다. 그 길에 남한 유격대에 구출되는데, 유격대에는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동순이 있었고, 융상과 동순은 유엔군의 서울 ‘수복’ 작전이 전개되는 즈음 집으로 ‘귀환’해, 순최가 근호에게 몹쓸 짓을 당하려는 순간 근호를 사살하고 순최를 구해낸다는 이야기다.
이런 서사는 한국뿐 아니라 냉전 시기 동아시아에서 제작된 반공만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공산당이 혁명적 가치를 앞세워 가족을 해체한다는 것은 냉전의 초창기부터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단골 소재”였고, 만화가 이를 실제 이야기처럼 각색하면서 현실성이 더해졌다는 거다.
이 만화에서도 아버지(융상)와 딸(순최)의 관계로 표상되는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가 빨갱이 근호다. 마지막에 근호를 죽이고 가족의 위기를 해결해주는 자식 세대의 남성도 반공주의자인 약혼자(예비 가부장) 동순이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 서사의 ‘토착성’을 두고 옥창준·김민환은 동아시아의 토착적 맥락에서 나온 거라고 논의한다. 마닐라센터가 반공 심리전에 활용했던 중국 공산화 이후 중국인 가족이 겪는 참상 이야기도 그랬다는 거다.(159쪽)
그렇더라도 이 만화가 한국적 맥락을 강하게 투영하는 건 부동의 사실 아닐까. 융상의 말만 봐도 그렇다.
“내 자신이 목도한 바에 의하면 서울시에 ‘살도’(쇄도의 오기)해온 것은 북조선 인민군이었소!”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굶어 죽으면 죽었지 이북 공산주의자들을 위하여 일하면 안 된다.”
전쟁의 기원으로서 북한 공산주의의 ‘남침’ 야욕과 만행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강교 폭파로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남게 돼 숨어 살았고, 공산주의자 ‘역도’에게 협력하면 절대 안 되지만, 기회를 엿보기 위해 거짓 협력하고 유엔군의 서울 ‘수복’을 열렬히 환영하고 이에 기여했다는, “부역자 색출” 광풍에서 살아남으려는 필사적인 자기 증명의 서사가 반영돼 있다. 빨갱이 ‘부역자’ 낙인에 대한 공포 서사만큼은 ‘자유세계’를 돌고 돌아도 변형되지 않은 채 한국에 도착했다.
<공산 침략과 유엔의 응수>란 만화도 미 공보원이 14쪽짜리 소책자로 만들었다. <동순이와 순최>가 1953년 7월27일 ‘휴전일’에 제작됐다면, 이 만화는 한국전쟁 개전 1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만평’(한 칸 만화) 형식으로 각 만화에 설명글이 달렸다.
소련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 정권의 ‘남침’을 분명히 고발하고 그로 인한 학살과 파괴, 약탈, 강제 동원 등 공산주의 만행을 밝힌다. 대조적으로 유엔군의 세계 평화를 위한 성전과 영웅적 면모, 압도적 군사력을 부각한다.
해골이 된 ‘북한 괴뢰정권과 군’의 모습과 스탈린이 마오의 ‘중공의용군’을 해골로 가득한 전쟁터로 몰아넣는 모습, 그리고 무기체계의 우수함과는 거리가 먼 ‘인해전술’ 재현 방식이 흥미롭다.
이 만화를 출판한 때는 유엔군이 중국의 춘계 공세를 거듭 막아내면서 전선이 교착된 시기다. 그래서 분명한 결과를 보여주지 않지만, 유엔군이 적을 단지 막아낸 것이 아니라 “섬멸”시켰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의 사기를 고양하기 위한 대내 심리전 만화다.

<공산 침략과 유엔의 응수>.미 공보원.1951년 6월25일 발행.김현식 소장, 백정숙 제공
미 공보원, 부산서도 ‘공산주의 만행’ 만화 배포
이 만화는 부산 삼미당에서 오프셋 방식으로 인쇄됐는데 몇 부가 제작됐는지 알 수 없다. 만화작가도, 설명글을 쓴 사람도 미상이다. 다만 백정숙 연구(‘전쟁 속의 만화, 만화 속의 냉전: 한국전쟁기 만화와 심리전’)에 따르면, 박광현이 부산 피란 시절 미 공보원 홍보요원으로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174쪽)
당시 부산에는 이름깨나 날린 만화가들이 피란해 있었다. 중앙동에 있던 다방 밀다원(소설가 김동리의 <밀다원의 시대>가 유명하다)은 문인뿐 아니라 만화가 등 많은 문화인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코주부’ 김용환, 웅초 김규택 등도 그랬다. 이들은 해방 후부터 탁월한 만화 그림과 제작으로 명성이 높았다. 다만 그 재능과 능력, 명성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삶을 겪어야 했다.
만화가들, 부역·반공 ‘반전의 반전’ 활동
이들은 전쟁 전에는 국민보도연맹원으로 반공만화를 그렸다. 전쟁 직후에는 피란의 때를 놓쳐 북한군에 붙들렸고, 보도연맹원이기에 ‘반동’으로 몰릴 수도 있었지만, 가진 재능 덕분에 북한 선전물 화보와 포스터를 만드는 데 동원됐다.
이 때문에 서울 ‘수복’ 후에는 부역자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고, 또 ‘골’로 갈 수도 있었지만 살아남았고, 또 가진 재능 덕분에 유엔군과 국군의 심리전 문관으로 선발됐다.
김용환은 “보도연맹 때의 안면으로” 중앙동 합동수사본부의 오제도 검사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육군본부 작전국 심리전과 이기건 대령에게 ‘픽업’됐고, 김규택도 일본 도쿄 연합군최고사령부 심리전과의 요청으로 부산에 와서 만화가를 구하던 김을한 <서울신문> 특파원을 만나 발탁됐다.
김규택은 1959년까지 잡지 <자유의 벗> 만화작가로 일했는데, 그 후임 작가로 김용환이 가게 되었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 그들의 삶을 보면, 자연스레 ‘인간사 새옹지마’란 말이 떠오른다.
김용환은 특무대 수사실에서 취조받으며 경찰서 유치장과 형무소에서 미결 상태로 구금됐고, 문화인 동료들의 죽음까지 목도한다. 특히 유명 만화가인 임동은의 죽음은 김용환에게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 대목을 회고하고 김규택 등의 예도 들어가며 공산 치하에서 역도에게 자발적으로 협력한 ‘부역자’(附逆者)와 공산당이 강제노역에 동원해 마지못해 협력한 ‘부역자’(賦役者)를 구분해야 한다고 구구절절 설명한다.
만화, ‘자유세계 반공시민’ 상상 공동체 일조
김용환 등 만화가들은 한국의 사상심리전 전장에서, 미군이 아시아·태평양을 무대로 하는 심리전의 전장에서, 미 공보원이 자유·공산 세계를 무대로 하는 글로벌 심리전의 전장에서 만화 활동을 했다. 만화는 의미뿐 아니라 감정의 전달이 탁월한 커뮤니케이션 도구였고, 삐라(전단) 제작에도 적합해서 반공 사상심리전 활동에 유용한 미디어였다.
이들이 그려내는 빨갱이 적의 이미지화와 공포의 재현은 공산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자유시민’에게 마치 체험한 것처럼 생각과 감정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자유세계의 반공시민이라는 상상공동체 형성에 일조했다.
[출처] :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반공만화는 어떻게 ‘반공시민’을 만들었나>
/ 한겨레신문, 2019. 5.23. 제 1263호
26. 한국인은 모르고 일본인은 아는 백선엽의 진실
- 5성 장군 추대도 거론되던 한국전쟁 최고의 영웅 첫 번째 이야기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 1회 연재와 ‘회고록을 시작하며’,<경향신문>1988년 6월24일 3면.
백선엽. 올해 99살인 그는 한국전쟁의 ‘최고 영웅’이자 살아 있는 우상이다. 한국전쟁 때 한국군 최초 4성 장군의 명예를 얻었던 그는 이명박 정부 때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명예원수(5성 장군) 추대 움직임에 힘입어 전인미답의 고지에 오를 뻔했다. 일부 군 원로와 재향군인 단체가 추대했고, 국방부가 관련 법령 개정까지 고려하며 검토했다.
그러나 언론과 시민단체, 학계의 반대가 컸고 결정적으로 “베트남전쟁의 영웅” 채명신 장군과 일부 한국전쟁 참전 군 원로들이 반대해 명예원수 추대는 무산됐다. 그의 만주군·간도특설대 경력과 항일 무장 독립운동 세력(동북항일연군)을 토벌했던 사실 때문이다.(“군 원로들이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명예원수 추대를 좌절시켰다”, <경향신문> 2017년 2월5일치)
그는 일본에서 출판된 자신의 책들에서 항일연군을 ‘게릴라’로 칭하면서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도 독립이 빨라졌다고 할 수 없었을 것”(<대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 29쪽, 1993)이라고 했다. 자신의 과오에 대해 변명했을 뿐 사죄하지 않았다.
명예원수 추대 무산이야 백선엽에게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의 기억, 말과 글이 이미 그 자체로 한국전쟁의 역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6월24일부터 방영된 한국전쟁 특집 다큐 2부작 <전쟁과 군인>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방송 제작과 방영 전부터 KBS 노조와 시민사회의 반대가 심했다. 제작진은 백선엽을 영웅화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다루겠다 했다. 그러나 “백씨의, 백씨에 의한, 백씨를 위한 방송”이었고 영웅 미화 방송이었다.(‘KBS 친일파를 영웅으로… 시청자 경악 친일 방송 축하’, <미디어오늘> 2011년 6월25일치)
간도특설대 언급조차 안 한 방송
백선엽이 깜깜한 스튜디오로 걸어 들어오고 큰 화면을 보며 당시 미군이 찍은 영상을 보면서 “기억나요” 하면서 시작하는 전쟁에 대한 그의 말은 “이게 바로 ‘한국전쟁’의 이야기고 역사야”라고 하는 것 같았다.
방송은 자신이 직간접으로 관여한 일부 신화화된 전투들(다부동전투, 평양 점령, 운산전투, 대관령전투, 임진전투 등)을 중심으로 배치됐다. 한국군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패배의 대명사인 현리전투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의 실패가 아니었다. 그는 과오를 말하는 대목에서 스스로 한국군을 대표한 시각에서 말하거나 자신이 지휘하는 예하 부대 또는 일부 장병의 실패로 이야기한다.
방송에서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해 일본군 장교가 되었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는 몇 초 정도의 멘트가 전부였다. 간도특설대 경력은 아예 언급되지도 않았다.
그는 한국전쟁과 관련해 모르는 게 없었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의 시각에서, 유엔군의 시각에서 그려내는 몇몇 전투 영웅담이 주를 이루었고, ‘호국’을 위해 “부수적으로 희생”된 일부 학생과 양민은 양념처럼 언급됐다.
군인보다 민간인의 피해가 훨씬 큰 한국전쟁의 참혹한 현실은 철저히 ‘사각화’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들이 바로 그 전투 영웅담 이면의 참혹한 현실, 민간인의 대량 피해를 대면하고 응답했지만, 정작 핵심 관계자인 백선엽은 이를 외면했다.
백선엽의 영향력이 한국전쟁의 공식 전사(戰史)·군사(軍史) 서술에 미치지 않았나 하는 우려도 있다. 그동안 대표 공식 전사는 1960~70년대 간행된 <6·25전쟁사> 시리즈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군편)는 이것을 2003년부터 11권으로 증보 개정하는 편찬 사업을 했다.
2004년 1권 발간을 시작으로 2013년 11권이 발간 완료됐다. 군편은 새로 조사된 미국·소련·중국 등의 자료와 이를 바탕으로 한 국내외 연구 성과를 반영하면서 그간 집적한 연구 역량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런데 군편 자문위원장이자 새로운 <6·25전쟁사> 편찬 자문위원장인 백선엽을 둘러싸고 여러 의혹이 제기됐다. “백선엽이 전쟁 초기의 전사를 임의로 개작해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 유리하도록 서술케 했다”든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의 이적 행위를 감추기 위해 <채병덕 장군 평전>을 출간케 하여 이적 행위 하나하나를 변명”으로 감싸안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인터넷 카페 ‘박경석의 서재’)
심지어 이를 폭로한 박경석 장군은 <6·25전쟁사> 1·2권 자문 명단에 자기 이름이 올랐지만 실제 자문한 바 없다고 해 파문이 일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새로운 공식 전사 서술의 신뢰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전쟁사가 전투를 중심으로 한 군사적 시각이 강하게 투영되다보니 집필 주제와 시기 구분, 연구진 구성이 편향적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거기에 백선엽 ‘자문’의 영향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니 그의 기억과 말이 곧 공식 전사이고, 그래서 그가 영웅화·신화화한 것이라는 세간의 소문이 심각하게 다가온다.
군의 위기감에서 나온 ‘전쟁기념관 건립’
안 그래도 백선엽이 곧 전쟁기념관이라는 평가가 있던 터였다. ‘6월25일’에서 비롯한 위기를 공간적으로 재현한 전쟁기념관의 외부 전시물과 6·25전쟁실 1·2·3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끝없이 상기시키며 ‘호국’을 위해 국민에게 ‘육탄’이 될 것을 웅변한다. 전쟁이 난 것을 기념하는 공간 전시의 끝은 호국정신과 힘에 의한 평화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걸어다니면서 끊임없이 말하는 ‘전쟁 영웅’이 바로 백선엽이다.
백선엽은 전쟁기념관 건립에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일본에서 출간한 회고록에서 “해방 후 38선 분쟁, 공비 토벌, 한국전쟁, 베트남 파병의 수많은 전투 속에서 순국한 많은 사람들을 모실 수 있는 시설이 서울에 없다는 것을 두고 우리들이 태만”한 결과라고 했다.
그러다 육군본부의 계룡산 이전이 기회가 되어 “오랫동안 같은 생각을 해왔던 대통령 노태우 장군의 제안”으로 육군본부 자리(서울 용산)에 기념관 건설을 추진하게 된 것을 높이 평가하고, 그 자신도 민간 쪽 회장으로 이 사업에 참여한 것을 염원이 이루어진 것으로 소회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사업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결집”됐고, 건립을 위해 전 국민적 운동이 있었다고 자평하면서, 비록 건군 이래 군을 둘러싸고, 또는 군에 의해 여러 불상사가 있었지만, 이 운동의 확산이야말로 국민이 군을 신뢰한다는 증거 아니겠느냐고 평가한다.(<젊은 장군의 조선전쟁>, 437~438쪽, 2000)
현실은 그의 자평과 달랐다. 기념관 건립 사업은 국방부가 주관하되 정부는 지원하고 ‘참전 용사’의 자발적 활동을 표면적으로 내세워 전 사회적으로 추진하려 했지만, 실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노태우 정부와 군이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전쟁기념사업추진위원회(이후 전쟁기념사업회)는 사실상 국방부와 군이 통제 관리했다.
건립 예산 1246억원도 국방예산에서 충당됐다. 애초 계획은 건립에 필요한 예산의 많은 부분을 자발적 성금으로 충당하려 했지만 참여가 저조해 20억원 정도 모금됐다.
전쟁기념관의 주체가 사실상 국방부와 군이고 “이러한 주체의 존재 기반인 적과 나를 구분하는 적대성과 배타성, 보안을 위해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조직, 정보의 비개방성과 폐쇄성, 상명하달, 지배와 복종의 위계성과 일방성이 기념관의 형식과 내용”(‘냉전의 공간화와 기호화: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중심으로’, 최선영, 32쪽, 2016)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를 두고 “국민이 군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6·25전쟁의 뒷면이 알려지던 때
1964년부터 전쟁기념관 건립 논의는 시작됐지만, 1988년 “대통령 노태우 장군의 제안”과 국방부·군의 합심으로 건립을 강력히 추진한 배경에는 군의 위기감이 있었다. 이는 백선엽의 위기감이기도 했다. ‘한국동란기념사업계획’(1988년 7월)의 건립 목적과 주요 내용을 보면 쉽게 확인된다.
1987년 민주화운동이 한반도 통일과 평화 요구로 확산되자 노태우 정부가 이를 안보 위기로 판단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옮기자면 “지금의 상황이 6·25전쟁의 기억이 흐릿해져가는 동시에 좌경운동 세력 등의 북침설이 일반화되고 있다고 판단되어 이를 차단하고 전후 세대에게 6·25전쟁이 북한의 남한 침략임을 정확히 알리고 이 전쟁에 민족사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반공안보 의식과 바른 역사관을 전 국민에게 내면화하고 안보 공감대를 확산시키며 참전 용사의 무공과 애국심을 고취시켜 민족 통일을 이루겠다”(최선영, 35~36쪽)는 것이다.
이는 백선엽이 1988년 6월24일치 <경향신문> 지면을 빌려 ‘군과 나’를 연재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경향신문>의 연재 기획 의도는 “6·25 38주년을 맞아 통일 문제와 한-미 관계가 국가적인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창군, 한국전쟁, 전후 재건기, 한-미 군사외교 주역의 한 사람이자 산증인인 백선엽 장군의 회고”를 받아 “공과 과를 기억이 허락하는 한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연재 배경과 관련해 몇 마디 추가한다면, 그즈음 1987년 민주화 이후 브루스 커밍스 등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 연구 결과와 한국 학자들의 새로운 한국전쟁사 연구 성과가 대중적인 출판 성과로 이어졌던 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태의 <남부군> 같은 ‘빨치산 전쟁 수기’도 출간되면서 그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전쟁 양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분단과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분단문학, 전쟁문학의 출간도 활발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폭동’의 섬으로 규정됐던 제주도에서 ‘제주4·3’ 40주년을 맞아 제주4·3 사건 진실 규명 운동이 물밑에서 올라왔던 해다. <제주신문>에서 장기 기획 ‘4·3의 증언’(1989년 4월3일 연재 시작)을 준비하기 위해 4·3 취재반을 구성한 것이 1988년 3월이었다.
백선엽 회고록은 매주 1회 연재됐고, 1989년 4월27일 41회 연재로 끝났다. 5월11일 42회 “장기 연재를 마치며 좌담”회를 포함시킬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고, 백선엽판 ‘6·25전쟁’ 대서사의 시작이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에 대한 반격이 이 정도에서 멈출 리 없었다. 그전까지 육군참모총장을 한 창군 원로 중 하나였던 백선엽이 이때부터 이 반격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1989년 6월 한국전쟁 39주년을 맞아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가 대륙연구소에서 출판됐다.
그해 12월 “대한민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켜온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 성우회(星友會)가 만들어졌고, 초대 회장에 백선엽이 선임됐다.

<군과 나> 한국판(1989), 영어판(1992), 일어판(2000) 표지.
만주군 경력을 추가한 일본판 <군과 나>
<군과 나>는 미국과 일본에서 곧바로 번역 출간됐다. 미국에서는 1992년 <부산에서 판문점까지: 한국의 최초 4성 장군의 전쟁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한국어 책을 그대로 영어로 번역했고, 백선엽의 전우인 유엔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과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서문을 썼다.
그의 책은 일본에서도 2000년 5월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한국판과 달리 평양 출생부터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성장했고, 왜 군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썼다. 특히 봉천군관학교, 만주군과 간도특설대 경력을 자랑스럽게 긴 분량을 할애해 쓰고 있다. 한국판에 없는 내용이다.
백선엽에게 일본 독자층을 대상으로 회고록을 쓴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흥미로운 점은 <경향신문>에 한창 연재 중이던 1988년 8월 이미 <한국전쟁 천일, 백선엽 회고록>이 일본에서 출간됐다는 것이다.
1993년 3월에도 <대게릴라전, 미국은 왜 졌는가>가 일본에서 나왔다. 두 책에는 백선엽의 만주군과 간도특설대 경력 내용이 있지만, 한국판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 독자보다 일본 독자가 자신의 삶과 전쟁을 더 잘 이해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일까.
당시 <정일권 회고록> 말고는 핵심 군 장성의 회고록이 많지 않았던 한국적 상황에서 백선엽의 회고록은 큰 주목을 받았다. <군과 나>는 군사 연구에서 반드시 참고하는 중요 문헌이 되었다. 그런데 이 회고록은 유사품이 여럿 있다. 2010년부터는 한 유사품이 오리지널 전작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2010년 1월4일부터 <중앙일보>에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으로 277회 연재한 글을 묶은 책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백선엽 장군의 6 25전쟁 이야기, 1128일의 기억>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명예원수 추대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였다. <군과 나>에서 평양 일착 입성을 말하며 짧게라도 언급했던 만주군과 간도특설대 이력의 소회를 밝혔던 대목은 많은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아예 사라졌다.
그리고 미·중(G2) 시대로 접어드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반영해서인지, 새로운 회고록은 <군과 나>를 저본으로 하되, “중공군과의 조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50년 10월에 참전한 중국을 “전쟁의 판도를 바꾼 존재”로 부각하고 있다.
지난 6월 현충일 추념식 때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와 한-미 동맹의 토대가 약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면서 완성된 광복군임을 선언했다. 이는 2016년 12월 전쟁기념관의 전쟁역사실 2관 재개관 때 새롭게 구성되며 선보인 국군 족보(계보)다.
그걸 두고 자유한국당은 광복군은 보지 않고 그걸 가리키는 김원봉만을 문제 삼으면서 그를 ‘6·25 남침’의 김일성 주구(앞잡이)로 취급했다. 황교안 대표는 백선엽을 예방했다. 그 자리에서 백선엽은 2013년부터 <프리미엄 조선>에서 연재한 것을 묶어 출판한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을 선물했다. 백선엽을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 삼고 그의 기억, 말과 글을 역사로 삼겠다는 이벤트로 비쳤다면 과도한 생각일까.
이에 대해 비판적인 여당과 역사학계, 시민단체들이 만주군과 간도특설대로 복무하며 항일 독립운동을 토벌했던 백선엽의 과오를 부각하면서 친일파 프레임을 걸었다. 이런 구도에서 반론은 예상된 것이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것이 한국전쟁에서의 공로가 그 과오를 덮고도 남는다는 식의 주장이다.
불굴의 의지와 위대한 승리로 백선엽이 공산화 위기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했다는 것이다. 이걸 미국도 인정하고 그를 깊이 존경한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서의 공로가 과오를 덮는다?
백선엽이 기억하고 말하는 한국전쟁의 역사가 진지하게 종합적으로 검토된 적이 없다. 그가 관여했고 승리해 자랑스러워하는 전투의 이면에서 사각화한 이야기를 길어올리면서 전쟁의 진짜 참상이 무엇인지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 입각해 객관적으로 말하는 듯 보이는 그의 방법과 미국·일본에 대한 인식과 태도도 다각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그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봐야 한다.
그러려면 다음 연재에서는 대표적으로 낙동강 방어 때 대구 정면에서 적을 막아낸 다부동전투, 인천상륙작전 후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한 것, 그의 이름을 딴 백야전전투사령부의 ‘공비’ 토벌을 중심으로 영웅 신화화한 그의 공로의 ‘사각’(blind side)을 재조명할 것이다.
백선엽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기억하라”라는 용산 전쟁기념관에 새겨진 문구를 곧잘 인용한다. 문제는 그 전쟁에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다.
[출처] :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반공만화는 어떻게 ‘반공시민’을 만들었나>
/ 한겨레신문, 2019. 5.23. 제 1263호
27.민간인 주검으로 쌓은 ‘영웅신화’
- 주한미군 사령관이 취임하면 찾는다는 백선엽 두 번째 이야기

1950년 8월16일 실시된 왜관 지역의 B29기 대량 폭격 현장. 강성현 제공
“의문의 여지 없이 그는 한국군 최고의 작전사령관이었다.” 백선엽, “그는 작전교리, 애국심, 개인 명예, 도덕적 용기, 부하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견지했다.” 한국전쟁 때 유엔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과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영문판 백선엽 회고록 서문에서 쓴 평가다. ‘주례사 서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군에게 이만큼 찬사를 받은 한국군 인사가 있을까? 백선엽은 미군에게도 신화화한 영웅이고, 그의 회고록은 미 육군 교재로 쓰인다. 지금까지도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에 취임하면 백선엽을 찾아가 ‘전입신고’를 하는 게 관례라고 할 정도로 그는 한-미 군사동맹의 상징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백선엽 영웅 서사의 시작 ‘다부동전투’
백선엽 스스로 자신의 “군생활 전 기간을 통해 뗄 수 없는 부분이 미군”(백선엽, <군과 나>, 329쪽, 1989)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모든 미군에 우호적이고 긍정적 견해를 가졌다.
일각에선 그가 미군에 고분고분한 태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고 미 고문관들을 잘 모시고 다녔다는 비판이 제기되지만, 또 다른 쪽에선 미군에 겸손하고 항상 배우는 자세(백선엽은 스스로 ‘지도 구걸’이라고 표현했다)로 일관한 것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한다.
분명 백선엽은 한국전쟁 때 한-미 ‘연합작전’에서 신뢰를 쌓았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으며 성공적 결과를 냈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하나같이 낙동강 방어작전 때 다부동전투 이야기에서 백선엽의 영웅적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반인은 낙동강 방어선은 알아도 다부동전투는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한국군 공식 전사는 실패의 연속이던 한국전쟁 초기 국면에서 성공한 낙동강 방어전 사례로 다부동전투를 내세운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81년에 별도로 다부동전투를 공간사로 발간했을 정도다.
다부동전투는 한-미 연합작전의 효시로 평가된다. 이 전투 기간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폭격작전인 ‘왜관 융단폭격’이 있었고, 다부동계곡(천평동)에서 ‘6·25전쟁’의 첫 ‘전차전’이 전개됐다. ‘최초’ ‘최대’ 수식어가 화려하게 따라붙는 전투였다.
이 시기 중동부 지역과 동부 지역을 방어한 한국군 부대와 지휘관들의 작전 성공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중서부 지역 제1사단 백선엽의 역할과 다부동전투의 성공이 주로 조명되고 높이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 적 3개 주력 사단과 맞붙어 싸운 3 대 1의 신화. 그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3 대 1 신화가 지운 희생들
다부동은 대구에서 20㎞ 정도 북쪽에 있다. 바로 위로는 수암산과 유학산, 가산으로 이어지는 천혜의 방어선이 형성돼 있다. 백선엽은 이 저지선이 뚫린다면 부산을 내주고 바다로 내몰리면서 조국의 운명이 여기에 걸렸다고 인식했다.(<군과 나> 60~61쪽)
그러나 다부동만 절대 중요했겠는가? 낙동강 방어선은 왜관을 축으로 동서 95㎞, 남북 140㎞에 이르는 ‘얇은 방어선’이었고, 뚫리면 바로 부산이 위태로워지는 요충지가 대구 말고도 여럿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다.
북한군은 이 지점들을 한 달 반 가까이 줄기차게 두들겼고, 한국군과 미군은 “지키지 못하면 죽음뿐(Stand or Die)”이라는 워커 장군의 명령대로 방어선을 끝까지 지켜냈다.
8월13일부터 8월 말까지 제1사단 13연대(이후 15연대로 개칭)가 치른 수암산과 왜관 사이 328고지 전투, 12연대가 반격전 양상으로 방어에 나선 유학산과 수암산 전투는 주검이 쌓여 산이 되고 피가 흘러 하천이 되는 혈전진퇴의 연속이었다.
11연대가 맡은 다부동 전면 계곡의 직선로는 적 전차의 공격에 아주 취약했다. 이 방어선은 존 마이켈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미 제25사단 27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그 뒤를 미 제2사단 23연대가 받쳤다. 미 27연대는 적의 전차연대와 보병사단을 상대할 수 있는 전차중대와 중포병 전력을 갖춘 최정예 부대였다.
8월21일까지 숨가쁜 일진일퇴 공방이 계속됐고, 양쪽 병력은 말 그대로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21일 마지막 위기를 언급하면서 전쟁영화의 한 장면 같은 에피소드를 상세히 들려준다.
마이켈리스의 27연대 왼쪽을 엄호하던 한국군 11연대 1대대가 후퇴하면서 미군 퇴로 차단 가능성이 높아졌고, 이에 미군의 힐책을 받고 미 27연대 후퇴를 통보받은 백선엽이 전방으로 나가 권총을 들고 후퇴하는 한국군 11연대 병사들을 설득해 돌격, 고지를 재탈환했다는 이야기다.
백선엽은 마이켈리스 대령이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사단장이 직접 돌격에 나서는 걸 보니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라고 감탄했다는 말을 강조한다.(<군과 나> 70쪽)
미 27연대가 백선엽의 1사단에 배속되거나 작전통제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최초로 미군이 한국군 방어 지역에서 연합작전으로 이룬 것이기에(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5권>, 166쪽, 2008),
무엇보다 방어에 성공했고 미군의 신뢰도 얻었기에 백선엽의 자부심은 컸을 것이다. 위기 때 사단장이 솔선수범한 권총 돌격은 작전 측면에선 무모하지만, 미군이 참 좋아할 만한 영웅 이야기 소재다. 그래서 백선엽 자신도, 군사가(軍史家)들도 이 에피소드를 유독 ‘만능양념장’처럼 활용한다.
한-미 양군의 다부동전투 관련 공식 전사, 한-미 지휘관급 회고록과 노병들의 증언 조각들을 들여다보고, 시기별 여러 작전 상황도를 보면서 다부동‘전투들’을 그려나가면 마치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전투 중심 장면들 사이사이에 ‘사각’(blind side)으로 처리된 장면의 조각보들도 흐릿하지만 눈에 들어온다.
백선엽과 공간사의 시선에서 외면됐지만, 내가 응시한 것은 8월16일 다부동 방어의 하나로 이루어진 ‘성공적 왜관 폭격’의 이면과 전투에 동원된 노무자와 인근 마을 주민, 피란민, 즉 민간인 ‘희생’의 이면이다.
‘융단폭격’ 당한 흰옷 입은 피란민들
사진(맨 위)은 8월16일 B29 98대가 26분간 960t 폭탄을 쏟아부은 모습을 찍은 것이다. “8·15 부산 해방” 대신 대구 점령이라는 김일성의 독전으로 북한군은 15일 전후로 총공세를 펼쳤다. 그전부터 미8군은 왜관 부근에 적의 증강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관련 보고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융단폭격’을 지시했다. 전황이 급박하더라도 지상군 근접지원작전으로 B29 중폭격기들을 동원해서 얻는 효과에 미 공군 수뇌부는 다소 회의적이었지만, 가로 5.6㎞·세로 12㎞ 직사각형 구역에 3084발을 쏟아내는 고공 ‘맹목 폭격’이 강행됐다.
백선엽의 표현을 빌리면 “그 지역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됐다. 미군 폭격 뒤 10년 동안 풀이 제대로 자라지 않”을 정도였다.(백선엽,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257쪽, 2010)
그런데 폭격이 이루어진 장소는 시무실과 사창마을(현 경북 구미 형곡동)로 각각 70가구, 60가구로 구성된 촌락이었다. 인근에 피란민도 많았다. 마을 주민 131명과 그 이상의 피란민들이 불바다에 휩싸인 채 사라졌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8권, 178쪽)
이게 도시와 농촌, 주요 역과 조차장, 작전지역에 대한 융단폭격 신화의 실체다. 꼭 융단폭격이 아니더라도 미 공군의 근접지원작전에는 오폭 사례가 매우 많았다. 오폭은 “흰옷을 입은” 수많은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해 쓰러뜨렸으며, 심지어 아군도 비켜가지 않았다.
문제는 이 피해와 ‘희생’이 우연하거나 예외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미군은 계속된 연전연패의 원인으로 흰옷을 입고 변장한 적(게릴라)을 들었고, 이들이 피란민 무리에 숨었다고 확신했다.
7월25일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어떤 피란민도 전선을 통과시키지 말라”고 지시했고, 이 지시는 전선 지휘관들에게 확대해석돼 피란민에게 ‘치명적 무력’으로 사용됐다.
이것이 미 제1기병사단 7기병연대가 저지른 ‘노근리 사건’의 배경이며, 낙동강 방어작전 때 미 지상군이 전선 인근 마을 주민과 피란민들에게 저지른 초토화작전과 학살의 배경이다.
‘노근리 사건’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은 <ap> 기자들은 “미군이 지나간 곳은 민간인들의 주검과 초토화된 마을만 남아 있었다. 미군 폭격기들의 로켓과 네이팜탄으로 수많은 마을이 불탔다”는 사실을 미군의 공식 기록들을 발굴해 입증했다.(최상훈 외, <노근리 다리>, 204쪽, 2003)
노무현 정부 때 특별법에 근거해 조사를 진행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보고서들도 이와 관련한 사례들의 진실을 규명했다.

다부동에서 팔공산 지역으로 이동해 미 제1군단의 지휘를 받아 반격작전을 준비 중인 백선엽 준장.
1950년 9월18일. 강성현 제공
애국·용사·영웅으로만 기억하는 역사
그럼에도 1989년 백선엽 회고는 물론 2010년 회고에도, 2013년 공적으로 간행된 <6·25전쟁사>에도 이런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진화위 조사팀장을 지낸 한성훈의 논의에 따르면, 국방부와 군은 이런 내용을 부정하거나 수정하는 지침을 세워 적극 대응했다. “전시 긴박한 군사작전 과정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대응하도록 세부 실무 지침을 세웠다.
국방부와 군은 진화위 보고서들에 대해서도 “현재에도 남과 북이 대치 중인 상태에서 친북 적대세력의 선동에 부합할 수 있는 편향된 보고서”이고 “오도된 시각을 갖게 해줄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안 그래도 전쟁사나 회고는 일반적으로 군 전투사 중심 ‘외눈박이’ 기록과 서술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한국에서는 ‘과거사 정리’에 대해 국방부와 군의 역사수정주의적 반동이 시도됐다.
마지막으로 다부동전투에 동원된 노무자들의 ‘희생’ 기록을 보자. 1989년 백선엽 회고록에는 “인근 주민들은 지게를 메고 나와 전방고지의 포화를 무릅쓰고 탄약, 식량, 물과 보급품을 져 올렸다”는 한 문장이 할애됐다.
2010년 회고록에서 이 서술은 짧은 한 단락으로 늘어났다. “조국과 민족, 가족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쟁의 또 다른 주역”이고 “희생 또한 아주 컸다”고 했지만 노무 동원 과정의 불법성이나 강압성, 노무자와 그 가족이 겪은 고통이나 피해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당시 다부동 지역을 가득 메웠던 시산혈해는 한국군과 북한군의 병사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노무자도 날마다 50~60명씩 죽어나갔다 한다.
그런데도 국가와 군은 전선에서 죽음으로 동원된 노무자들을 조국과 민족, 가족을 위해 희생한 애국적 무명용사로 소환하고 기억할 뿐, 그 밑에 가려진 진실을 대면하려는 노력은 방기하고 있다.
백선엽이라는 영웅 신화는 전사한 병사들과 군적 없이 죽음으로 동원된 학도병뿐 아니라 죄 없는 주민과 피란민, 그리고 보급품과 부상병을 지게로 날라야 했던 노무자들의 주검으로 쌓인 것이다. 애국 명명 뒤에 가려진, 산더미를 이룬 주검들의 사연과 진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적지만, 한국전쟁 영웅이 필요한 사람은 많다. 여전히 우리는 전쟁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출처] :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민간인 주검으로 쌓은 ‘영웅신화’> / 한겨레신문, 2019. 8. 8. 제 1274호
28. “지리산 안은 다 적이었다”는 백선엽 마지막 이야기
- ‘빨치산 소탕 작전’ 군이 숨기려 했던 사진들

사진❶ 빨치산 혐의를 받는 여성과 아이들 포로. 강성현 제공
“공산주의 빨치산 혐의를 받고 있는 두 여성 전쟁포로”가 수용소로 이송되기 전 포로 등록 절차를 위해 조사받고 있다.(폴 E. 스타우트 상병의 사진 설명) 여성의 오른쪽으로 갓난아기를 업은 남성과 앳된 아이들도 있다. 이 여성과 아이들은 어디에서 포획됐기에 “빨치산 혐의”를 받고 “전쟁포로”로 등록되고 있을까?
사진❶의 촬영일은 1951년 12월10일. 바로 이날 스타우트 상병이 찍은 사진은 필자가 확인한 것만 해도 12장이다. 백선엽 장군의 이름을 딴 백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이하 백야사)가 12월2일부터 1차 토벌 작전을 전개하면서 생포한 포로 수가 빠른 속도로 늘던 때였다.

사진❷ 수도사단 기갑연대가 포획한 빨치산 포로들과 이를 지켜보는 송요찬 장군. 강성현 제공
미군이 찍은 사진엔 전쟁포로 여성과 아이들
백야사는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백선엽의 대게릴라전 경험을 높이 사 작전 책임을 맡기면서 설치됐다. 기존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을 맡던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와 각급 경찰부대 병력에다 새로 최전방에 있던 국군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빼내서 후방 작전에 투입했다. 또한 한국 공군과 미 극동사령부 심리전 부대의 지원을 받아 유례없는 대규모로 구성했다.
1차 토벌 작전은 계엄 선포 뒤 12월2일 아침 6시에 개시돼 12월14일까지 진행됐다. 지리산을 남북으로 나눠 수도사단이 남쪽에서, 제8사단이 북쪽에서 ‘타격부대’가 되어 지리산 산정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갔고, 나머지 예비대는 ‘저지부대’가 되어 포위망을 빠져나오는 ‘공비’를 토벌했다.
작전 지역에 지리산 인근 마을들이 포함됐고, 공군의 폭격과 기총소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토벌군은 “포위망을 좁혀가며 산골의 가옥과 시설을 모두 소각해 다시는 공비들이 거점으로 이용할 수 없도록 하고 주민들을 구호소로 소개시켰다”(<군과 나> 224쪽) 한다.
백선엽에 따르면,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곳곳에서 전과 보고와 함께 포로들이 수용소로 끌려오기 시작했다. 포로는 “북한 정규군 출신과 남로당 출신의 입산자, 공비에 가담한 지역 출신자들”이었고, “나이는 10대부터 40대까지 분포됐으며… 여자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225쪽) 한다.
사진❷에서는 헌병의 삼엄한 경계 속에 수도사단장 송요찬 장군과 미군 선임고문관 코너드 힐데란트 대령이 수도사단 기갑연대의 토벌 작전 결과 생포된 빨치산 포로들을 지켜보고 있다. 다친 빨치산 포로는 지도와 여러 문서철을 갖고 있던 간부급이어서 산 채로 잡혔을 것이다. 그 뒤로 트럭에서 아직 내리지 않은 여성들이 보인다.
사진❸의 피사체는 대부분 여성이다. 나이 든 여성들, 혹은 혹독하게 추운 지리산 겨울을 나기에는 초라한 행색의 사람들이다. 과연 모두 빨치산일까? 이들은 간단한 심문을 거쳐 ‘혐의’만으로 모두 전쟁포로가 되었다. 사진❹에는 동상에 걸려 앉아 있는 여성이 전쟁포로임을 나타내는 ‘꼬리표’를 들고 있다. 포로가 된 일시, 장소 등 정보가 적혀 있다.

사진❸ 수도사단 사령부 내 임시 방책 안에서 대기 중인 빨치산 포로들. 강성현 제공
백야사 1차 사살·생포 2540명 “기대 못 미쳐”
당시 대규모 후방 토벌 작전이 전개됐기에 국내외 신문기자들은 남원과 구례로 몰려와,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224쪽) 하지만 이 넉 장의 사진은 군 검열로 언론 배포가 제한됐다. 군은 토벌 작전의 경과와 전과를 언론에 알려야 했지만, 여성과 아이들 위주의 피사체가 담긴 사진을 배포하기는 어려웠다.
‘토벌’되는 게 빨치산인지 지역 주민인지, 언론이 의문을 제기하는 사태는 껄끄러웠을 것이다. 1950년 겨울부터 1951년 초까지 이어진 공비 토벌 작전, 특히 1951년 2월 일어난 ‘거창 사건’이 그해 4월부터 미국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알려지면서 신성모 국방장관, 김준연 법무장관, 조병옥 내무장관이 경질됐고 군 관계자들이 유죄판결을 받았던 때다. 심지어 ‘자유 진영’ 내에서도 전쟁의 정당성에 회의감이 들고 있었다.
제11사단의 토벌 작전은 ‘거창 사건’뿐 아니라 함평 사건, 고창 사건, 산청·함양 사건 등 숱한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귀결됐다. 제11사단장 최덕신 장군은 부하 지휘관들에게 “100명의 공비를 사살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중에 상당한 부분이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광복군 출신인 최덕신이 이럴 정도인데 일본군 출신이거나 제주도, 여수·순천 등 전남 동부 지역에서 주민들을 토벌한 경험이 있는 부하 연대장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최근 백선엽의 평가도 이런 생각의 뿌리가 쉽사리 제거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수백 명의 양민이 국군의 총구 앞에서 숨져간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수비를 위한 방벽을 견고하게 쌓고 들판을 비워 적을 없앤다는 ‘견벽청야’의 독한 토벌로 빨치산이 상당한 타격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다.”(<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2> 355쪽)
이쯤 되면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베트남전쟁 때 훈령은 고마울 지경이다. 물론 현실은 어떤 훈령과도 괴리가 너무 커서 민간인들이 대량 토벌되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백야사 작전이 개시되기 전 김성수 부통령은 백선엽에게 친필 서한을 전했다. “주민들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군경의 민폐가 심한 현실을 직시하고 부디 국민을 애호하여 민간에 폐를 끼치지 말고 치안을 확보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앞의 책 366쪽)달라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건 백선엽의 반응이다. “과거 빨치산 토벌 작전은 대개 1개 사단이 나서서 빨치산이 숨어 있는 지역을 초토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백야사의 작전은 빨치산을 즉석에서 사살하지 않고 생포했으며, 이들을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따랐던 사람들을 하나라도 건져내기 위해서”(367쪽)였다 한다. 양민 곁에 빨치산이 바싹 붙어 있어서 서로 섞여 있으니 토벌 작전의 핵심은 비민(匪民, 공비와 양민) 분리에 있고, 공비 소탕은 토벌 못지않게 기회주의적 태도를 가지는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백선엽의 말도 같은 선상에 있다.
‘양민’이니 ‘주민’이니 했지만, 빨치산 옆에 있는 한 보호받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거둔 백야사의 1차 토벌 작전 전과가 “사살 940명, 생포 1600명”. 백선엽은 “주력이 아니라 말단 부대와 빨치산을 따라다녔던 부역자들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데 그쳤”으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자평한다(390~392쪽).
사진❹ 동상에 걸려 앉아 있는 여성 빨치산 포로. 강성현 제공
빨치산 잡으려 자국민도 학살
2·3·4차 작전이 연이어 전개됐고, 1952년 3월14일 모든 토벌 작전이 완료됐다. 이에 대한 전과 기록은 다소 제각각이다. 전사편찬위원회의 <대비정규전사>(1988)는 4차 작전을 제외하고도 사살 7737명, 생포 7993명, 귀순 506명으로 기록했다. 백선엽은 최근 회고에서 사살 5009명, 생포 3968명, 귀순 45명이라 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는 사살 6606명, 포로 7115명으로 집계했다.
이런 공식 통계는 최소치일 것이다. 백선엽도 “실제 사살 및 포로는 추정 숫자를 훨씬 상회했다. 이는 공비들의 세력이 강력했고, 공비들에 포섭된 비무장 입산자도 많았음을 반증한다”(<군과 나> 229쪽)고 말했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피란민이었다.
빨치산의 완전 소탕, 이를 위한 계엄 선포와 비민 분리. 그 와중에 파괴되는 주민들 삶의 터전. 더 나아가 빨치산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면 자국민 학살도 각오하겠다는 백선엽과 군 수뇌부의 발상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빨치산 토벌 작전 계획은 미군에서 나왔다. 안정애의 연구(2005)에 따르면, 백야사는 전적으로 밴 플리트가 구성하고 작전 개요를 세웠다. 밴 플리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의 최전선 그리스의 미군사고문단 단장으로 부임해 좌익 세력 척결과 공산 게릴라 토벌에 큰 공을 세운 대게릴라전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그리스에서 함께했던 윌리엄 도즈 중령 등 고문 장교 60여 명을 백야사에 지원했다. 장비 지원만 한 것이 아니라 작전, 연락, 통신, 심리전 등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전단 992만 장이 지리산에 하얗게 덮일 정도로 대량 공중 살포된 것도 그런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만주군 출신 장교의 한국전쟁과 주한미군에 대한 인식’ 348~349쪽)
미군의 대게릴라 토벌 방식 전수는 1948~49년으로 거슬러 간다. 미군은 제주4·3 사건과 여순 사건의 진압, 1949년 빨치산 완전 토벌 여부를 이승만 정권의 생존 능력을 알아보는 ‘리트머스시험지’로 간주했다. 미군사고문단은 토벌 작전 계획을 세우고 현장에서 감독했다. 국군 정보국 고문이던 하우스만과 리드 대위는 여순 진압 작전 계획을 주도적으로 세웠다.
1949년 초 지리산 토벌 작전의 고문이었던 그린피스 소령도 모든 수단을 동원한 소탕 작전을 입안했다. 이 작전에 마을 파괴와 ‘무자비한 살상’이 포함됐다. 미군의 적극적인 계획과 지원 아래 정일권이 지휘하는 토벌대는 여순 사건의 주동자 홍순석과 김지회 등을 사살하면서 지리산 토벌 작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잔혹 행위’ 간도특설대 경험도 바탕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49년 한여름에 육국본부 정보국장에서 광주 5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겨 1949년 겨울 토벌을 지휘했던 백선엽의 행보다. 그는 미군 고문 장교의 의견에 언제나 긍정적이고 우호적이었다. 미군의 빨치산 토벌 작전 개요와 방식도 잘 이해했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른 경험 자원이 있었는데, 바로 간도특설대 경험이다. 빨치산 유격대의 각 근거지를 봉쇄·고립시키고, 산간 마을 주민들을 소개한 뒤 근거지에 대규모 소탕전을 전개하는 건 일본 관동군과 간도특설대가 벌였던 반만항일 유격대 토벌 작전에서 나왔다.
백선엽은 회고를 통해 “만주군에 있을 때 익히 들었던 것”이라며 마오쩌둥 전술을 설명하고, 1949년 전후를 “중국의 상황과 다를 바 없었다”고 주장한다(322~323쪽). 이건 정일권이 예관수와 함께 1948년 8월에 펴낸 유격전 교육교재 <공산군의 유격전법과 경비와 토벌>의 인식, 주장과 일치한다.
그들은 “제주도 폭동 세력”이 중국 공산군의 유격전법을 쓴다는 미확인 주장을 유포하면서 제주4·3을 ‘폭동 사건’으로 낙인찍었다. 이런 인식에서 보면 초토화 작전과 민간인 학살은 기껏해야 폭동 진압 명령을 과도하게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실수 정도로 취급된다.
흥미로운 점은, 2011년 백선엽 회고록에서 “마을을 모두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이 “적과 아군을 제대로 식별할 여유가 없을 때에는 빠른 진압을 위해 국군이 간혹 펼치곤 했던 극단적인 방법”이고 “빨치산과 관련이 없는 양민에게는 한순간에 가옥과 전 재산을 잃는 절망적인 일”(326쪽)이라고 인정했다는 거다.
그럼에도 그는 1949~50년과 1951~52년에 초토화 작전이 벌어진 것은 부하 장교의 원한이나 잘못 등으로 치부하고,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회피한다. 이게 백선엽 회고의 특징이기도 하다. 작전 오류를 순순히 인정하는 대목에서 본인은 전지적 시점으로 숨어버린다. 동료와 부하의 잘못이고, 국군 처지에서 보면 불행이지만 예외적인 것이라는 태도를 취한다.
백선엽은 정일권·김백일·김응조·신현준·이용 등 만주군 출신이 민심 획득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배웠고, 특히 간도특설대가 이를 잘 지켰다고 주장한다. “죽이지 말라, 태우지 말라, 능욕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며, “게릴라 토벌은 민심을 얻어야만 성공한다는 점을 항상 마음속에 새겼다”(<실록 지리산> 52쪽)는 것이다.
그러나 허은 교수는 간도특설대의 잔학 행위는 이미 여러 자료로 입증됐고, 1951년 백야사도 실제 민심 획득을 최우선하는 작전을 전개했는지 의문이라고 평가한다.(허은, ‘냉전분단시대 대유격대국가의 등장’ 449~450쪽) 무엇보다 “공비 토벌을 위한 민심 획득”은 백야사가 지역 주민의 안전을 우선한 것이 아니라 토벌 작전 과정의 선무 대상으로 주민을 바라봤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지리산 인근 주민 20만 명 있었지만…
백야사 작전 참모였던 공국진 대령이 1965년 백선엽을 비판한 증언을 봐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지리산 주변 9개 군 주민이 20만 명인데 백선엽이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인식이 깔린 토벌 작전으로 많은 아이와 부녀자가 포로로 포획됐고, 광주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리 되면 아이든 부녀자든 다 얼어 죽을 거다. 동족상잔하는 마당에 양민과 적은 가려서 취급해야 하지 않냐고 공국진이 백선엽에게 항변했다고 한다. 그는 수많은 양민이 광주 포로수용소에서 반수 이상 죽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성을 보호하면서 전투를 해야지 성과 위주로 하면 안 된다. …송요찬(수도사단장)도… 최영희(제8사단장)도 다 반대했”고, “길이길이 두고 욕을 먹”을 거라고 했다.(‘백선엽 지리산 토벌 작전 때 양민 집단 동사’ <한겨레> 2011년 6월21일치, ‘백선엽, 이 양반은 지리산 안은 모두가 적이다 이래서…’ <미디어오늘> 2011년 6월29일치)
공국진 증언에 대한 백선엽의 반론은 별도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반해 올해 한국전쟁기 광주 중앙포로수용소를 분석한 석사 논문(정찬대, ‘국민 만들기의 폭력적 동화’)이 나왔는데, 공국진의 증언이 허언이 아님을 뒷받침하고 있다.
[출처] :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지리산 안은 다 적이었다”는 백선엽 마지막 이야기 - ‘빨치산 소탕 작전’ 군이 숨기려 했던 사진들> / 한겨레신문, 2019. 9. 26. 제 1280호
29.검찰이 식민지 시기 영광을 되찾은 비결
미군정기 경찰·법원에 치이다가 ‘좌익 사냥’으로 부활 후
검찰청법 제정 통해 검찰권 대폭 강화

‘검찰사법’이란 말이 있다. 형사사법 전반에서 검찰이 가진 막강한 권한과 주도적 영향력을 표현한 것이다. 즉, 수사·기소·공판·행형이라는 형사사법의 입구부터 출구까지 주도적인 검찰권 행사를 의미한다. 여기에 법무행정 전반에 검찰이 행사하는 권한과 영향력까지 생각하면 검찰권력은 무소불위, 막강함 그 자체다.
‘검새’ 같은 짓이 가능한 이유
한국에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칼끝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전쟁과 독재정권 시절에는 군, 경찰, 정보기관(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등) 등 물리적 폭력에서 권력이 창출되고 유지됐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형사사법 전반에 개입하는 ‘검사’의 칼끝에서 나온다는 거다.(최강욱, <권력과 검찰>, 37~38쪽)
검찰은 정권 초기에 전 정권을 대상으로 칼을 휘두르면서 현 정권에 검찰의 쓸모를 유혹한다. 그렇게 검찰은 ‘권력의 시녀’로서 정권에 충실하고 보위하다 집권 중·후반에 여론을 봐가며 집권세력의 일부 부정부패에 칼을 휘두르고 그다음 정권으로 가서 전 정권을 칼끝에 올리는 행태를 반복해왔다.
‘검찰개혁’이란 말도 오랫동안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다. 검찰 수사(지휘)권을 경찰과 나누는 방식으로 조정하는 시도가 있어왔고, 검찰의 기소 독점과 기소/불기소 재량을 견제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그때마다 검찰은 저항했다.
저항은 다양한 방법의 ‘검란’으로 나타났다. 때때로 검찰 조직은 검찰총장 사직을 희생양으로 삼으면서까지 외부 검찰개혁 시도에 맞섰다. ‘총장’에게 상명하복하는 규정과 문화가 강력한 검찰에서 사람보다 조직이 우선함을 잘 보여준다.
법무행정에서 검찰의 지휘 감독자인 법무부 장관은 검찰의 그런 저항에 속수무책일 때도 있었다. 심지어 검찰의 정치적 독립성과 검사의 직무적 독립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검찰개혁을 추진했던 대통령에 대해서도 검찰은 ‘검새’(오만한 검찰 조직을 비난하는 말)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한 ‘검사와의 대화’는 이를 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검찰사법의 핵심 기반인 공안의 인적·제도적·조직적 개혁을 꾀했지만, 용두사미로 끝났다.
어떻게 이런 막강한 권한이 검찰권에 용해돼 들어갔을까.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면, 역사적으로 그렇게 형성된 상황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 검찰사법의 역사적 형성 과정이 있을 것이다.
요즘 부쩍 “무소불위 한국 검찰의 탄생기”에 관심이 많아졌다. 특히 ‘조국 사태’를 계기로 국내 언론은 물론 국외 유수 언론(프랑스 <르몽드>, 일본 <닛케이신문> 등)에서도 학술논문 쓰듯 일제와 식민지 검찰사법 계보를 탐사하는 기획기사를 내고 있다.
형사소송법(이하 형소법)에 한정해 말한다면, 식민지 조선형사령은 물론 동시대 일본 다이쇼 형소법과 여타 식민지(대만, 부분적으로 만주국까지) 형사사법제도가 어떻게 착종돼 그물망을 이루었고, 이후 대한민국 검찰사법을 구성하게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반쪽짜리 설명이다.
수사권을 경찰에 돌려준 미군정
일제 패망, 조선 해방, 미군 점령이라는 조건에서 “과거의 것이 새로운 것의 외피 아래 강고하게 유지되었다”고 말하려면 단절 속 연속의 과정 자체로 설명해야 한다.
미군정기에 검찰이 미군정 당국, (군정)경찰, 법원과 경합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검찰사법의 옛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어떻게 ‘사상검찰’(공안)을 부활시켰고 검찰청법을 제정했는지, 정부 수립과 국가보안법 성립 뒤에는 어떻게 사상검찰 재조직화가 성공했고, 경쟁적 위치에 있던 경찰, 헌병대, 육군 방첩대(군사안보지원사령부)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사상검찰이 어떻게 상대적 우위를 확보했는지, 그 과정에서 오제도 검사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규명해야 한국 검찰사법 탄생기가 완전하게 된다.
미군정이 해방 뒤 붕괴된 식민지 사법제도와 기구를 재건했지만, 검찰과 법원의 위상은 초라했다. 점령과 군정 통치 상황이라 한국인 검찰과 법원의 관할권은 미군점령재판소에 넘겨지지 않은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했다. 점령 상태가 준전시였기에 한국 민간인이 군법으로 군재판을 받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29일 검사 직무를 조정하면서 검찰권을 기소 기능에 한정했다(검사에 대한 훈령 제3호 ‘검사의 선결 직무’). 이것을 검찰은 “대륙법에 입각한 형사수속 실무에 무지한 미군 장교들이 단순하게 영미법적 시각에서 검찰권을 제약”한다고 인식했다.
“조선의 형사제도에서 검찰이 모든 범죄 수사와 치안 확보의 중추기관이며, 검사는 수사의 주재자이고 사법경찰관은 보조자”라는 의견을 이인 검사총장이 미군정 수뇌부에 전달한 건 그런 인식에서였다.(대검찰청, ‘검찰제요’, 1948)
미군정 조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영미법적 시각에서 식민지 ‘검찰 파쇼’를 해체하고 수사권을 경찰에 돌려줘서 검찰과 경찰의 관계를 상명하복이 아닌 상호협력으로 만들려는 조처라는 해석이 있다.
또한 미군정이 점령 통치와 치안 질서 유지에 방해되는 세력(대개 좌익, 통제 안 되는 우익도 포함)을 진압하는 데 강한 물리력이 필요했고, 따라서 검찰보다 경찰에 힘을 실어준 조처라는 해석도 있다.
사상검찰 조직 재건에 사활
검찰은 검찰사법의 옛 영화를 되찾으려면 미군정 수뇌부와 경찰(경무부) 사이를 파고들어야 했다. 사상 문제와 좌익 사건에서 검찰 주도의 수사 일원화가 어떤 강점이 있는지 보여줘야 했다. 사상검찰 부활이 검찰 조직의 사활적 과제가 된 것이다.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한 계기가 되었다. 사건 진위를 떠나 “좌익 사냥의 ‘전범’이 만들어진 사건”이었다.(김두식, <법률가들>, 301쪽, 2018)
그해 5월23일부터 조재천, 김홍섭 검사가 경찰 수사를 지휘했다. 7월9일 이 사건은 검찰로 송치됐고, 7월19일 박낙종·송언필·김창선 등 13명을, 8월22일 이관술을 통화 위조와 동 행사죄로 구속 기소했다. 7월29일 1차 공판을 시작으로 약 4개월간 30차례 공판이 열렸다.
이관술·박낙종·송언필·김창선은 무기징역, 나머지는 징역 15년, 3년이 선고됐다.(오제도, <추적자의 증언>, 29~31쪽, 1969) 재판 입회 검사였던 선우종원에게 이 사건은 사상범죄 처리에 동기부여와 실습의 장이 되었다. 그는 “공산당과 나의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표현했다.(선우종원, <사상검사>, 94쪽, 1992)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을 거치면서 좌익 탄압이 더 본격화됐다. 미군정 수뇌부는 경찰 물리력에 더 의존해갔지만, 그럴수록 사태 진정이 아니라 악화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덮어놓고 경찰’이라는 비난 여론을 불식하고, 경찰이 아닌 사상 문제와 좌익 사건에 효과적으로 강력히 대응하는 새로운 기관이 요청됐다.
검찰이 그 역할을 자임하면서 사상검찰 조직이 본격 부활됐다. 검찰은 1947년부터 조재천 정보부장이 지휘하는 서울지검 정보부를 신설해 좌익 관계 소요, 파업, 테러 사건 등의 수사(지휘)와 기소를 전담시키려 했다. 그러나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1947년 8·15 폭동 음모 사건을 비롯해 굵직한 좌익 사건에서 정보부 역할은 기소에 국한됐다. 정보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자체 정보 수집 능력이 빈약해 경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법원의 소장 판사들을 중심으로 영미사법제도를 모델로 한 민주적 사법개혁과 검찰개혁 논의도 영향을 줬다. 판사들은 영장주의, 사인소추주의, 배심재판 등 미국식 제도 도입에 대해 토론했다.
1946년 11월9일 한미법률교류협회가 설립된 이래 미군정기 말까지 한국과 미국의 법률가들이 사법제도 개혁 등 포럼을 매달 조직하고 논의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검찰은 영미 사법제도의 “섣부른 선택”이나 “법원 판사의 위상 강화를 의미하는 개혁안”을 강하게 비판하되, 독자적 개혁안을 제시했다. 검찰은 경찰 수사권에 대해서도 경찰의 검거와 취조 과정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에 반감이 있는 여론을 자극하면서 검찰 수사 지휘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검찰권 강화라는 본의는 숨기고 억압적인 경찰권에 대한 견제와 수사 민주화라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꽤 효과적이었다. 동시에 이건 검찰에 양날의 칼이었다.
당시 형사사법 제도의 개혁 논의는 검찰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판사와 변호사 일부가 식민지 검찰사법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제기하면서 검찰의 기소독점권과 불기소처분권, 기소유예 남용에 제동을 걸었다.
검찰 숙원을 한번에 처리
검찰은 경찰과 법원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상황이었다. 경찰은 미군정 수뇌부를 업고 파워게임을 벌였고, 개혁적 판사와 변호사들은 법조계와 일반 여론의 지지를 받아 명분게임을 벌였다. 수사·공판 절차뿐 아니라 기소 절차에서 검찰권 약화를 시도했던 이 논의에 검찰이 강력히 반발한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온 게 정부 수립 직전 1948년 8월2일 조용하게 제정된 검찰청법(군정법령 제213호)이다.
이 법령 제2조는 법원과 검찰청의 분리를 전제로 검찰청의 종류를 규정해서 검찰의 오랜 숙원을 반영하고 있다. 법원에서 검찰의 완전 분리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제 6조는 검찰관(검사)의 직무와 권한으로 공소 제기와 그 유지는 물론 수사(지휘)권도 규정하고 있다.
제12조는 검사동일체 원칙을 규정하는데, 이를 상명하복과 일사불란한 행동 통일 원칙으로 동일시한다.
제14조는 사법부장(법무부 장관)을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 명시하고, 개별 사건에 대해서도 검찰총장을 경
유해 지휘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제25조와 제26조는 검찰 직속 사법경찰기구 설치와 함께 대검에 정보과를, 지검에 수사과를 설치하는 것을 규정한다.
‘검사 직수 사건’이 아니어도 “사회의 이목을 끄는 사건, 기타 중요 사건 및 일반 경찰관이 취급함에 불편 부적당한 사안”을 수사하고, “사회 각 부분의 동향과 인심의 추세 등을 사찰 보고”할 수 있게 한 것이다.(이인 검찰총장 훈시 요지)
수사(지휘)권을 둘러싼 경찰과의 갈등에 너무 고생한 검찰이 형소법에 담아야 할 사항을 검찰청법에서 ‘스스로’ 규정해 확실히 해결하려 한 것이며, 검찰이 수사 주재자임을 재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사진 속 역사,역사 속 사진>-검찰이 식민지 시기 영광을 되찾은 비결> / 한겨레신문, 2019. 11. 7. 제 1286호
30.군경에 밀리던 해방공간, 검찰권 강화 주역 반공검사 오제도
-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날개 단 ‘사상’검찰

특별수사본부 1탄 <기생 김소산>. 감독 설태호, 원작 오재호. 오제도 검사 역은 최무룡, 김소산 역은 윤정희가 맡았다. 제12회 대종상영화제(1973)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
반공검사 오제도가 있다. 1970년대 책깨나 읽었거나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반공 히어로(영웅)’ 오제도를 잘 알 것이다. 동아방송의 라디오 드라마 <특별수사본부>는 당대 빅히트작이었다. 이것이 실록소설 <특별수사본부>(1972년 초판 전 14권, 1974년 중판 전 21권)로 출판됐고, 1973년 <기생 김소산>을 시작으로 <936 사건>까지 총 7편의 영화로 제작됐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수사시리즈물의 간판은 단연 문화방송(MBC)의 <수사반장>이라 할 수 있지만, 유신체제 아래에서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남로당 지하당”과 싸우는 반공검사의 수사 무용담, 특별수사본부의 이야기도 당대 사람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다.
반공 뒤에 가려진 고문과 조작
<특별수사본부> 서사의 소스(출처)는 오제도가 1969년 출간한 <추격자의 증언>이다. 이 책에서 오제도는 자신을 정부 수립 전후에 있었던 ‘좌익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마치 스파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그린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반공검사의 활약을 과장하거나 미화한다.
직접 수사하거나 수사 지휘를 하면서 다반사로 벌어진 고문과 조작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러면서도 검찰이 지배하는 형사사법 전 과정에서 반공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검사의 무소불위와 막강함에 대해서는 꼼꼼히 보여준다. 이 책을 추천한 이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라는 사실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오제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반공검사로서 그의 면모를 영웅화하는 평가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김두식 교수는 오제도가 “학력과 경력에 대한 집착”이 많았다 한다.(김두식, <법률가들>, 244쪽, 2018) 오제도는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3년제) 법과 졸업 뒤 1940년부터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일했다.
이때 오제도는 사상검사 나가사키 유조의 사상 전향 정책이자 (권력)기술인 ‘대화숙’ 사업에 영향받았는데, 일제강점기 검찰의 사상 통제와 전향의 방법과 기술을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45년 해방 당시 7년 이상의 경력을 갖추지 못해 검사가 될 수 없었고, 1946년 9월19일 실시된 ‘시험 없는’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을 통해 검사가 되었다.
오제도 검사는 열등감으로 월등한 학력과 경력을 가진 피의자들을 “참으로 모질게 다뤘다”고 한다. 그는 반공·타공 전선에서 직접 수사하거나 수사를 지휘하면서 수사 피의자의 고문과 사건 조작을 서슴지 않았는데, 검찰은 오 검사의 ‘타공(打共) 선봉장’으로서 활약이 검찰권 강화에 부응하는 한 그를 용인하고 비호했다. 김익진 검찰총장 시기에는 평안도 인맥이 ‘공안 라인’을 장악해, 오 검사를 끌어주고 밀어주었다.
지난 연재글에서 나는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한민국 검찰의 ‘슈퍼 파워’(막강한 힘)를 이해하려면 한국 검찰사법의 역사적 형성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고, 이 역사는 일제와 식민지 검찰사법의 족보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지난 글에선 미군정기에 검찰이 미군정 당국, (군정)경찰, 법원과 경합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사상검찰’을 부활시켰고, 형사소송법에 담아야 할 검찰 권한 사항을 ‘셀프(스스로) 제정’한 검찰청법에서 수사 주재자임을 ‘셀프 규정’했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정부 수립 뒤 검찰이 경쟁적 위치에 있던 경찰, 헌병대, 육군 방첩대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어떻게 사상검찰을 재조직하고 상대적 우위를 확보했는지, 그 과정에서 한국 공안검사의 아버지인 오제도 검사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1948년 12월1일 국가보안법 제정이 사상검찰의 재조직에 큰 계기로 작용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다만 국가보안법은 검찰이 기획하고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이인 법무부 장관과 권승렬 검찰총장은 법을 제정하는 국회 독회 과정에서 이 법이 내포한 예비검속적 성격, 즉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마음속에 있는 목적을 사전에 판단해 처벌하는 것이 일반 형사법 원칙에 어긋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랬더라도 검찰은 일제강점기 ‘사상사법’의 경험 속에 이 법의 시행이 검찰권을 강화하는 데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았다. 그 기회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이 법으로 수사와 기소 기관에 엄청난 권한과 재량이 부여될 것이고, 이를 둘러싸고 경찰과 군 수사기관과의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될 터였다.
1948년 (과도)검찰청법은 대검에 정보과, 지검에 수사과 설치를 규정하고 있지만, 여러 현실적 제약으로 대검에 정보부서를 설치하는 대신 서울지검의 ‘사상계 사무’를 더 특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장재갑 부장검사를 중심으로 정보부에 오제도, 선우종원, 정희택 검사를 배치해 사상검찰을 재조직했다.
1950년 5월20일 국민보도연맹 월간지 <창조> 창간호 편집회의. 콧수염을 한 오제도 검사가 한가운데 앉아 있다. 그 왼쪽은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인 정백이, 오른쪽은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이던 이선근이 있다. 경향신문
군경 vs 검찰
사상검찰은 사상범죄 처리의 구체적인 실무 방침을 세워나갔다. 먼저 ‘사상범’을 정치범과 분리하고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작업을 했다. ‘일제 사상범=정치범=독립운동가’ 인식이 지배해 사상범 용어를 적대적으로 쓰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건국을 방해하는 범죄” 용어의 등장이 중요하다. 이때부터 “납치, 감금, 파괴, 살상 등 정치적 색채를 띤 사건의 관계자”를 더 이상 정치범으로 취급하지 말고, ‘적색 사상’을 가진 ‘파렴치범’으로 처리하게 되었다.(권승렬 검찰총장 통첩, ‘건국에 방해되는 범죄 처단에 관한 건’, 1948년 12월16일) 이로써 사상범을 전문 처리하는 사상검찰의 존재 이유가 확보됐다.
다음으로, 사상검찰은 1948년 12월27일 전국 검찰감독관회의(검사장 회의)에서 국가보안법의 구체적 해석과 운용 지침을 마련했다. 이 회의에서 오제도 검사는 서울지검 명의로 제출된 ‘자문답신안’을 써서 냈다.
그 내용은 일제강점기 검찰의 사상범 처리 방법과 기술을 답습했다. 우선, 수사 주재자로서 사상검찰의 위상 강화를 강조한다. 수사 단계에서 경찰을 지휘해 ‘사상 관계 요시찰인’을 사찰해 정보를 수집하고 ‘검사 직접 수사’ 체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소 단계에서 전향 가능한 사상범 피의자의 공소를 보류하고 사회로 복귀시킨 뒤 감시하고 보호, 지도하도록 한다.
이 공소보류처분제는 일제강점기 사상검찰의 ‘유보처분’이라는 권력기술과 거의 같다. 마지막으로 엄벌주의 기조 아래 사상범을 처벌하되 “사상의 시정”, 즉 ‘개전의 정’이 있는 사상범 피의자는 교화해서 “공산당을 때려잡는 반공 전위대”로 삼도록 실무 방침을 세우고 있다.
일제 사상범보호관찰소·사상보국연맹·대화숙의 방법과 기술이 오제도를 거쳐 1949년 국민보도연맹의 조직 발상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오제도의 구상은 검찰감독관회의에서 그대로 채택됐다. 회의에 참석한 법무부 장관과 검찰 수뇌부는 식민지 검찰과 변호사 경력이 있던 인물들로, 식민지 검찰의 사상 문제 대책에 매우 익숙했다.
이후 오제도 검사는 이 답신안과 회의에서 논의된 여러 문제에 대해 경찰학교, 각 경찰서, 헌병학교 등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한 법조문 해석과 통용 한계”를 강의했고 이를 정리해 1949년 8월 <국가보안법실무제요>를 펴냈다.
이 책자는 국가보안법의 법리적 설명이 아니라 법을 실무적으로 운용할 때 쓸 수 있는 지침을 묶어놓은 것이다. 부록에 각종 조서, 보고서, 작성례와 좌익 용어 해석, 좌익 기구와 조직 체계표 등을 실었다.
1949년 반공 드라이브
1949년은 사상검찰에 아주 중요한 해였다. 기회는 주어졌고 결과는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성공과 실패, 어느 쪽으로 기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습격 테러, 국회 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등으로 전개된 1949년 ‘6월 공세’ 속에 검찰, 경찰, 헌병, 육군 방첩대는 ‘타공 투쟁’ 능력의 우위를 점하고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정받으려 출혈경쟁을 벌였다.
검찰은 김익진 검찰총장의 지휘 아래 서울지검 ‘사상 라인’에 이태희 검사장, 장재갑 정보부장, 오제도와 선우종원 검사 등 ‘서북파’로 채워 반공 드라이브(몰이)를 걸었다.
검찰이 실질적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검찰의 기소 지휘만으로 역부족이었고, 독자적 수사 지휘가 가능해야 했다. 그 계기는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마련됐다. 이 사건으로 김약수 부의장 등 소장파 국회의원 총 18명이 구속됐다. 5명은 국민보도연맹 가입 등을 조건으로 기소유예(공소보류) 처리됐고, 나머지 13명은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당시 당국 발표와 달리, 최근 학계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작된 사건으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제헌국회 내에서 정부에 비판적 목소리를 낸 소장파 그룹을 파괴하기 위해, 위에서는 이승만 정부와 민주국민당이 공조하고, 아래에서는 서울지검 정보부, 서울시경 사찰과, 헌병대가 수족이 되어 활약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서울지검 정보부의 수사 지휘 활동이 주목된다. <좌익사건실록(상)>(1964)과 <서울지방검찰청사>(1985) 등 당국의 자료와 오제도의 회고를 보면, 오제도 검사가 서울시경 사찰과와 공조해 김호익의 특별수사팀을 지휘해 국회 프락치 사건을 적발했다 한다.
이에 대해 ‘여간첩’ 정재한에게서 나온 암호문서(증 제1호)를 가공해 끌어와서 대형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조작했다고 비판하는 연구들은 오 검사의 수사 지휘가 결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미군정기 내내 검찰은 기소 지휘에 국한된 채 경찰에 대한 수사 지휘가 거의 불가능했고, 검찰청법 제정 뒤에도 사정이 바뀌지 않았는데, 국가보안법 제정 이래 첫 ‘중대 사건’인 국회 프락치 사건을 계기로 사상검사가 수사 지휘에 나섰던 것이다. 게다가 내사 단계에서는 서울시경 사찰과, 2차 검거 뒤 취조 단계에서는 헌병과 협력했다.
1949년 8월에 나온 <국가보안법실무제요> 초판본. 초판본만 1만여 권이 팔렸다고 한다. 경향신문
사상검찰 수사 지휘로 탄생한 법조 프락치 사건
민간인 접근이 불가능한 헌병사령부에서 오제도 검사와 헌병대 수사관이 현역 국회의원을 밀실 수사하는 상황은 변호인 접견을 차단한 채 ‘소통 불능’ 상태에서 행해진 반복적인 고문이었다.(김정기,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 161~163쪽, 2008)
국회 프락치 사건은 법조 프락치 사건으로 확대됐다. 이때만 해도 검찰, 경찰, 헌병대는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를 벌이는 듯했다. 그러나 곧바로 사상검찰의 수사 지휘는 반공 투쟁에 한정된 것이었음이 판명됐다. 사상검찰의 조직과 역량이 경찰, 헌병, 군 방첩대와 비교할 때 우위에 있지 못했다.
[출처] :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사진 속 역사,역사 속 사진>-30.군경에 밀리던 해방공간,검찰권 강화 주역 반공검사 오제도-국회프락치 사건으로 날개 단'사상'검찰 / 한겨레신문, 2019. 12. 7. 제 1286호
31.검찰과 오제도,그 사상검사는 대권을 꿈꿨다?
-서울지검 일개 검사를 허위 모략한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의 배경

‘국회 프락치 사건’ 선고 공판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50년 3월15일치). 강성현 제공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은 ‘프락치’ 반공 신화의 고전 텍스트다. 이 사건 이후 한국에서 프락치는 오랫동안 ‘빨갱이’처럼 저주받은 낙인으로 각인됐다. 각인되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사회에서 추방돼야 할 존재가 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받아도, 조작된 증거로 ‘사법 살인’을 당해도 사회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특히 당시 언론은 수사 당국이 발표하거나 누출한 범죄혐의를 아무런 검증 없이 ‘사실 보도’의 이름으로 진실인 것처럼 보도했다. 현직 국회의원 18명이 납치되듯 고문수사 받고 재판 없이 장기간 구금(최장 1년 가까이 미결 구류)된 사실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김정기,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 216~221쪽, 2008)
“취조와 고문”과 “말눈깔사탕”
이 사건은 오제도 검사 등 서울지검 공안 라인이 경찰과 헌병 등 수사기관을 수사 지휘했다. 내사 단계에선 서울시경 사찰과와 협력했고, 취조 단계에선 헌병대와 협력했다. 1949년 11월17일 첫 공판부터 1950년 3월14일 선고 공판에 이르기까지 공소유지를 담당한 오제도, 선우종원 검사 등과 사광욱 판사 등 재판부는 환상적인 ‘공안 재판’을 연출했다.
일제강점기 사상검사와 사상판사들의 조화를 떠올리게 했다. ‘소장파 의원’ 13명에게 최고 10년부터 최하 3년에 이르는 실형이 내려졌다. 마찬가지로 떠들썩했지만 사건 피의자가 검사·판사·변호사이던 법조 프락치 사건 관계자들이 집행유예 또는 무죄판결로 일단락된 것과 대조적이었다.(김두식, <법률가들>, 471~472쪽, 2018)
현직 국회의원들이 극심하고 반복적인 고문을 받고 거짓 자백을 한 것은 재판에서 피고인의 고백문과 최후 진술, 변호사의 변론, 판사의 사실심리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판사는 고문을 아주 당연하다는 식으로 대응했고, 그 자백에 신빙성을 두었다.(김정기, 193쪽)
김옥주 의원이 있었다. 그도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 취조를 받았고, ‘고백원문’(자백문)을 제출했는데, “취조와 고문 등”과 관련해 “당하는 사람도 쓰라리지마는 하는 사람도 참으로 못할 노릇”이라는 심경을 우회적으로 토로했다. 이 문장은 황윤호 의원의 자백문처럼 검열돼 흑색으로 지워지지 않았다.(김정기, 163~165쪽)
그런 일을 당한 김옥주 의원에게 오제도 검사는 1950년 2월10일 결심 공판에서 6년을 구형했다. 그러면서 일본 와세다대학 동기동창으로 가까운 친구였는데 검사와 피고인으로 만나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김옥주를 감옥으로 면회 갈 때 그가 좋아하는 말눈깔사탕을 사다주기도 했고 조사가 끝난 후 정담을 나누기도 했다”며 “친구를 단죄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각색한다. 오제도와 검찰은 수사 지휘하면서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냈다. 그런데 기만적으로 우정을 말하는 오제도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시 고문수사와 오제도 검사(검찰)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실제 국회와 법조 프락치 사건의 수사·기소가 진행되던 즈음, 또 다른 고문치사 두 건이 벌어졌다. 하나는 고희두 동대문 민보단장의 의문사 사건이었다.
죽은 사람이 ‘우익 인사’여서 은폐되지 않고 파장이 커졌다. 10월15일 검찰은 김창룡의 육군 방첩대에 의한 고문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방첩대 도진희 이등중사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상관인 김창룡 중령은 공군본부로 좌천성 발령을 받고 한동안 한직을 돌았다. 또 다른 사건은, 10월23일 경기도 경찰국에서 국보급 식물학자 장형두 교수가 경찰 취조 중 ‘변사’한 사건이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과 달리 두 고문치사 사건으로 신문지상에서 연일 경찰과 군 수사·정보기관의 불법 체포와 고문 사례가 보도됐다. 검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국회와 일반 여론에 경찰과 헌병대, 육군 방첩대의 불법 수사 행태와 인권침해를 견제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국회에서 심의 중이던 검찰청법을 조속히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1949년 12월19일 헌병과 국군정보기관의 수사한계에 관한 법률(법률 제80호)과 12월20일 검찰청법(법률 제81호)이 공포됐다.
국가폭력 그 자체 경찰과 군수사기관
헌병과 국군정보기관의 수사한계법 핵심은 민간인 수사, 구속, 구금을 제한하는 것이다. 방첩대 등 군정보기관의 민간인 범죄 수사는 완전히 불법화됐다. 헌병 등 군수사기관은 반드시 검사의 지휘를 받도록 했으며, 형사소송법에 근거하되 긴급구속을 할 수 없다는 조건 아래 민간인 수사가 허락됐다.
이를 위반했을 때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또한 헌병대 유치장 또는 영창에 불법 구속자는 없는지, 구속·구금자 가혹행위는 없는지 군법무관이 감찰하도록 했다.
검찰청법은 정부 수립 직전 제정된 (과도)검찰청법의 연속에 있으며, 신설 조항도 있다. 바로 대검 직속 중앙수사국 설치, 검찰수사관 제도 도입, 사법경찰관에 대한 직무(수사) 중지 명령권 및 체임(교체) 요구권이다.
중앙수사국은 범죄 수사의 지도 연구, 검찰총장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범죄 수사를 맡으며, 산하에 수사과·사찰과·특무과를 두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을 모델로 해 검찰총장 직속의 전국적인 범죄 수사를 지휘·감독하고 중대 사건을 직접 수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사법경찰관에 대해 지검장이 수사 중지를 명령하는 등 경찰에 대한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더 명확하게 했다.
두 법은 검찰 중심 수사 지휘와 수사기관 일원화의 의지를 전면에 드러낸 것이다. 경찰과 군수사·정보기관이 크게 반발했지만, 국회와 언론은 큰 논란 없이 검찰 손을 들어주었다. 경찰과 군의 불법 체포, 고문 취조를 통한 자백 강요 등 ‘거악’(巨惡)의 수사 관행에 ‘차악’(次惡)인 검찰이 견제해주길 바라는 심리가 깔렸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6·6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 6·26 김구 암살, 여러 프락치 사건들, 그 밖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사건 처리에서 경찰과 군수사·정보기관의 행태는 사실상 국가폭력과 테러 그 자체였다.
검찰도 이런 행태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국회와 언론은 법이기에 최소한의 합리성과 절차성은 갖출 것이라 보고 상대적으로 나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검찰도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타공(공산당 타도) 투쟁’에 적극적이어서 반공 사법에 내포된 정권안보 사법 성격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때론 검찰 중립성을 극단적으로 침해하는 대통령과 대립하는 모습도 보여줬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검찰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는 김익진 검찰총장이나 최대교 서울지검장의 모습은 최고권력자의 충복으로 활동하는 다른 기관과 비교됐다.

주한미국대사관 그레고리 헨더슨이 미 국무부에 보낸 국회 프락치 사건 선고 공판 관련 발송문(1950년 3월14일)
사상검찰의 산실이 공식적으로 재편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검찰조직을 위한 것이었다. 두 법의 제정으로 경찰과 군수사·정보기관의 불법 수사와 구금, 고문 사례가 줄었는지는 검찰의 궁극적 관심사가 아니었다. 주도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해 검찰권을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일등공신은 서울지검 공안 라인의 정보부 검사들이었다.
1949년 12월2일 검찰은 대검을 비롯해 서울고검과 대구고검, 그리고 각 지방검찰청에 정보부를 설치하고, 대검·고검·지검 차장검사를 정보부장에 임명하며, 정보부 전담 검사도 1명씩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궤도에 올라 있던 서울지검 정보부에 대해서는 부장검사 1명을 정보부장으로 전임하게 하고, 검사 5명을 전담 배치한다고 밝혔다.(<국도신문> 1949년 12월2일치)
이 조치로 사실상 사상검찰의 산실이었지만 조직 체계상 애매모호했던 기존 서울지검 정보부가 공식적으로 제1정보부(또는 정보1부)로 재편됐다. 이와 함께 장재갑 정보부장은 서울지검 차장검사로 승진했고, 오제도 검사가 새로운 제1정보부장이 되었다.
이렇게 이태희 서울지검장, 장재갑 차장검사, 오제도 제1정보부장, 선우종원 검사(법무부 검찰과장 겸직)로 이어지는 평안도 공안 라인을 중심으로 전국 검찰의 정보부와 연계되는 사상검찰 진용이 일차 완성됐다.
서울지검 제1정보부는 대검 중앙수사국이 아직 발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숱한 ‘사상전’을 벌였고, 반공 사법 확립의 선봉장이 되었으며, 검찰은 물론 정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까 검찰이 ‘공안계’와 ‘특수통’이라는 쌍발 엔진으로 날아다니기 전에 정보부가 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공투쟁의 경쟁 기관뿐 아니라 여러 정치세력의 견제가 상당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권력자나 권력기관 간 암투가 문제를 항상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하는데, 1950년 4월 ‘대한정치공작대 사건’도 그러했다.
이는 대통령 직속 정보·사찰·수사를 할 수 있는 최초의 민간 정보기관 설립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욕망과 이에 부응하면서 ‘정적’ 제거를 시도하던 일부 친이승만 정치세력이 벌인 조작 사건이다.
그 정적 명단에는 김성수, 조병옥, 김준연 등 반이승만 성향의 유력 정치인과 그 계열의 군경 수뇌부뿐 아니라 신성모 국방부 장관 같은 또 다른 친이승만 인사도 포함됐다. 게다가 타공 진영의 선봉장 오제도 정보부장과 최운하 서울시경 사찰과장도 있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인지 수사했고, “빨갱이 허위 모략 조작”(<국도신문> 1950년 4월11일치)을 밝혀냈다.
오제도는 한참 세월이 지난 뒤 회고에서 대한정치공작대 창설 배후 세력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신을 모함했는데, ‘오제도가 전국 규모의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한 게 대권을 꿈꾼 것이고, 고향이 평안북도로 흥사단 계열이니 야당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 공산당 전향을 위해 아량을 보이는 것이 수상하다’ 했다는 거다.(<동아일보> 1976년 6월24일치)
사상검찰은 그대로, 바뀌는 건 사람뿐
이런 허위 모략의 배경에는 오제도 검사의 ‘힘’에 대한 견제가 자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오제도 검사는 서울지검의 일개 정보부장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사상검사에게 부여된 수사와 기소, 기소유예 권한을 통해 정국을 좌우할 힘을 가진 반공 사법, 공안 사법의 실무 지휘자였다.
사상사건의 인위적 창출과 조작은 그와 사상검찰진에도 능숙한 방법이자 도구 같은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을 기소하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김익진 검찰총장은 불기소 처분이 불가하다고 회답했다. 국회에서 국회조사단이 진상 보고를 했고, 언론도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이 사건을 전혀 없었던 것처럼 덮기는 어려웠다.
서울지검 제1정보부와 대검 차장검사의 수사·기소 지휘는 이 사건을 ‘추악한 정치 브로커의 음모’ 수준으로 축소했지만, 이것도 대통령 눈 밖에 나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은 인사 교체를 당했다. 특히 김익진 검찰총장은 서울고검장으로 좌천 인사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쯤 되니 사람만 바뀔 뿐, 사상검찰 조직의 위상과 제도화된 권한에는 거의 타격이 없었다.
[출처] :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사진 속 역사,역사 속 사진>-31.검찰과 오제도,그 사상검사는 대권을 꿈꿨다?-서울지검 일개 검사를 허위 모략한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의 배경 / 한겨레신문, 2019. 12. 29. 제 1294호
32, 검찰과 오제도 마지막편 '보도연맹은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 ‘민간인 학살’ 보도연맹에 검찰이 적극 개입한 배경

1949년�6월2일
1949년 4월20일 서울시경찰국 한 회의실에서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이 창설됐다. ‘보도’(保導)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좌익 사상에서 국민을 보호하고 지도해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대표(간사장)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던 박우천이 맡았다.
솔직히 현대사 연구자에게도 박우천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그와 함께 발기인이 된 전향자 500여 명도 그렇다. 그런 전향자들이 모여 대한민국에 충성하고 공산주의(와 남로당)를 타도하는 단체를 만들었으니 세간의 관심을 크게 끈 것 같지는 않다.
보도연맹 키워 검찰권 강화
그런데 6월5일 명동 시공관(市公館)에서 열린 결성 선포대회에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성식의 하이라이트는 보도연맹 임원 발표였다. 보도연맹 총재로 김효석 내무장관, 부총재로 백한성 법무차관과 장경근 내무차관이 선임됐다.
이사장은 김태선 서울시경찰국장(서울지방경찰청장), 명예이사장은 치안국장(경찰청장)이 맡았다. 고문 명단은 더 휘황찬란하다. 신익희 국회의장, 김병로 대법원장 등 국가요인 24명이다. 박우천은 전향자를 대표하는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주한 미국대사관도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에버렛 드럼라이트 참사관은 결성식 직전인 6월2일 미 국무부에 ‘국민보도연맹’(National Guidance Alliance)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보냈다. 그가 쓴 3쪽짜리 보고 외에 보도연맹 취지, 강령, 활동 계획, 조직도가 첨부돼 있었다.
그는 나름 중국통으로 “적을 이용해 적을 친다”(以夷制夷)는 발상을 모를 리 없고, 한국에 대해서도 아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이제이’를 위한 단체 결성에 한국 정부 기관과 요인의 이름이 총출동하는 것은 그에게도 생경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성 초기 보도연맹은 내무부 주관 아래 서울시경이 주도하고 서울지검 정보부가 협력하면서 운영됐다. 그러나 그해 12월 보도연맹 조직개편 뒤에 서울지검이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보도연맹을 관리·운영한 실질적인 의사결정 기구가 최고지도위원회였는데, 최고지도위원 6명 중 4명이 이태희 서울지검장과 정보부의 사상검사였고, 나머지 2명이 서울시경국장과 사찰과장이었다.
그 배경은, 지난 연재에서 다루었듯이, 사상검찰이 국회·법조 프락치 사건의 수사 지휘와 경찰 및 군수사·정보기관이 저지른 ‘불법 체포’와 ‘고문치사’ 사건 수사에 나서면서, 라이벌인 경찰과 군수사·정보기관을 견제하고 주도권을 갖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제1294호 ‘그 사상검사는 대권을 꿈꿨다’ 참조)
이 무대의 진짜 주인공은 오제도 검사였다. 그는 보도연맹 창설의 기획자이자 실질적인 운영자였다. 오제도는 서울지검 제1정보부를 중심으로 전국 검찰의 정보부를 연계하는 사상검찰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다. 그런 ‘힘’이 있던 그가 전국 규모로 조직한 반공 ‘관변단체’가 보도연맹이었다. 약 1년 동안 전국 조직으로 급성장해 그 규모가 ‘6·25전쟁’ 직전에 약 30만 명을 넘어섰다.
그런데 왜 이런 단체를 만들었을까? ‘이이제이’ 발상이 있었다는 건 검찰·보도연맹 관련 문서와 오제도 등 관계자의 말에서 금방 확인된다.
오제도와 사상검찰은 남로당 및 좌익 계열의 정당과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던 자, 국가보안법 위반자 중 ‘개전의 정’이 있는 ‘사상범’ 피의자(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숱하게 만들어낸 피의자)에 대해서 ‘공소보류’(기소유예) 처분하고, 보도연맹에 가입시켜서 “공산당을 때려잡는 반공 전위대”로 삼으려 했다.
당시 검찰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해 조문에 ‘보도구금’ 제도 관련 조항을 넣었는데, 현실 여건의 어려움으로 이를 도저히 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보도소’ 구금 대신 보도연맹 단체를 동원해서 전향자를 관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이 검찰권을 강화하고 오제도의 입지도 단단하게 했다.

부역자
‘좌익 무관’ 알고도 가입시키기
그럼 보도연맹에 동원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중앙본부와 지방지부의 요로에 있는 인사들은 거의 좌익 전향자로 봐도 무방하다. 그 외 상당수는 좌익 사상이나 활동과 상관없이 ‘빨갱이’ 자루에 마구잡이로 쓸어담긴 사람들이었다. 중도 민족주의자, 한국독립당 같은 김구 계열 우익도 그 자루를 피해가기 어려웠다.
친이승만 외에 정치적으로 선명하지 않은 회색지대는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보도연맹에는 자진(자수) 가입자가 많았다. 여러 이유로 “알아서” 자수 가입했다. “나라를 위해서 도장을 찍으라” 해서, “가입자들은 대부분 비료를 준다”는 말에, 명부 작성자에게 개인적 원한을 사서, 그 이유와 계기도 각양각색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가입한지도 몰랐던 사람도 꽤 있다. 명부 작성자가 상부에서 회원 가입 할당을 받고 이를 채우기 위해 ‘애매한 사람’의 이름을 동원한 사례가 여럿 있다. 지방의 어떤 단체는 통째로 단체 회원 명부가 보도연맹 가입 명부로 바뀌기도 했다.
보도연맹 관리 당국도 이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1950년 2월11일 국회 본회의(제6회 제28차)에서 논의된 ‘보도연맹 조직 및 운영에 관한 긴급질문’에서 오간 질의와 답변을 보면, 이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됐음을 보여준다.
장경근 내무차관은 사람들을 최대한 가입시켜놓고 교육·훈련한 뒤 심사해 사람들을 내보내는 게 당국의 방침이라고 답변했다. 김갑수 법무차관은 더 구체적으로 “앞으로 한 사람의 가맹자도 없게 하는 것이 본래의 취지인 만큼 우선 서울에서는 3월에 2천 명을 탈맹”(〈자유신문〉 1950년 2월12일치)시킬 방침이라고 했다.
이에 보도연맹 최고지도위원회 위원장인 이태희 서울지검장은 “완전 전향자”의 탈맹 사업 구상을 발표했고, 오제도의 정보부는 탈맹 심사 기준을 마련해 심사했다. 그렇게 추려낸 탈맹자가 6982명이었다.
6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2만여 보도연맹원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탈맹식을 열었고, 6982명은 “완전 전향자”, 다시 말해 ‘빨갱이’가 아님을 공인받았다.
그런데 오제도와 사상검찰의 기획, ‘이이제이’하면서 검찰권도 강화하고, ‘빨갱이’ 적의 마음을 완전히 탈바꿈해서 대한민국에 충성하게 만든다는 국가 프로젝트가 애당초 가능한 것이었을까? 게다가 ‘빨갱이’라고 새겨진 주홍글씨를 지우는 ‘탈맹’이라는 게 진정 가능한 일이었을까?
만일 ‘6·25전쟁’이 벌어지지 않고 이 사업이 계속 진행됐다면, 학교를 졸업하듯 모든 맹원이 탈맹해 궁극적으로 보도연맹이 자연 해소될 수 있었을까?
당국은 겉으로 탈맹을 축하했지만 그 후에도 마음속 진정한 전향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않았다. 검찰과 경찰은 ‘요시찰인’ ‘요경계인’ ‘사찰전과자’ ‘감시대상자’ 등 다양한 호칭의 탈맹자 명부를 작성해 관리했다.
겉으로는 충성스러운 반공 국민으로 추어올렸지만, 실제로는 ‘비국민’처럼 보았다. 애초 확인 불가능한 마음속 문제에 대해 당국은 “엄격한 심사”를 해서 판정했지만, 그 속의 속, 그러니까 진정한 속은 혹시 여전히 빨간 게 아닐까 의심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상 관계 당국의 임무이자 권력의 원천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오제도와 사상검찰의 보도연맹 기획이란 건 빨간 안경을 쓰고 국민을 줄 세우고 보면서 결국 ‘배제한 채 포섭’하는 꼴이었다.
이 기획의 끝이 ‘자국민 대량학살’이라는 엄청난 파국으로 귀결됐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약 10만 명이 조직적으로 학살됐을 것으로 추산한다.
전쟁의 발발로 탈맹 여부와 상관없이 보도연맹원은 전방의 군사적 적, 그리고 도처의 ‘빨치산’과 호응할 수 있는 내부의 적으로 간주해 절멸 대상이 되었다. 보도연맹원 예비검속과 학살은 경찰과 군(헌병, 방첩대 등)의 손에 의해 저질러졌지만, 검찰도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자신이 만든 ‘부역자 처리 요령’ 자랑도
오제도는 전쟁 기간 법으로 국가폭력을 견제하기는커녕 적극 편승하더니 아예 법으로 국가폭력을 작동시키는 법-폭력의 기술자가 되었다. 그는 훗날 회고에서 자신이 부산에서 마련한 <부역자 처리 요령>이 ‘부역자’(附逆者·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행위자)를 심사하는 매뉴얼이 되었다고 자랑했다(<동아일보> 1976년 6월28일치).
실제 오제도는 ‘서울 수복’ 뒤 부역자 심사와 처벌을 위해 조직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서 김창룡 대령(합동수사본부장)과 함께 실세 중의 실세였다. 이임하에 따르면, 합동수사본부는 수사기관이 아니었다.
심사반은 서류 심사 등을 통해 부역자를 군법회의에 넘길지, 검찰을 통해 민간재판에 부칠지, ‘포로’로 간주해 헌병에 넘길지, 석방시킬지 결정하는 재판 기관 행세를 했다(서중석 외, <전쟁 속의 또 다른 전쟁>, 선인, 150쪽, 2011).
그곳에서 그는 ‘검사 대표’라고 자처하고 다녔다. 그는 잔류파 국회의원, 문화인 등 주로 ‘거물’을 맡았고 관대하게 처분했다고 회고하는데, 분명한 건 부역자에게 생사여탈권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김두식, <법률가들>, 창비, 489쪽, 2018).
‘오제도 천하’의 위세도 오래가진 않았다. 오제도의 ‘힘’은 검찰권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상대가 누구든, 심지어 상대가 검사일 때도 오제도는 프락치 사건으로 상대를 제거하거나 굴복시켰다. 검찰 안팎에서 평안도 공안 라인에 대한 반감도 커져가고 있었다. 결국 검찰이 토사구팽하듯 직접 나섰다.
오제도에게 프락치로 몰려 당할 뻔했던 검사들을 동원했다. 오제도에게 씌운 혐의는 착복죄였다. 오제도가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13일 보도연맹에 배급된 면사를 임의로 매각 처분해 2천여만원을 착복했다는 것이다. 오제도는 1952년 1월 초부터 도망 다녔고, 약 6개월을 은신했다. 그는 그해 7월12일 검찰에서 파면됐다.(<법률가들>, 489~492쪽)
오제도의 인생은 거기서 실패한 채 끝나지 않았다. 1957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오제도를 서울지검 정보부장으로 불러들여 힘을 실어주었다. 그의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1958∼59년 국가보안법 3차 개정과 ‘2·4 보안법 파동’에서 조용히 활약했던 그는 1960년 3·15 부정선거 이후 마산과 부산 등에서 시위와 저항이 격렬해지자 다시 한번 대공3부 합동수사위원회 검찰 대표로 나섰다. “공산오열”이니 “적색분자 준동”이니 평생 갈고닦았던 방식으로 증거 없이 학생시위를 공산당의 음모로 몰아붙이려 했다.
‘4·19 혁명’ 뒤 그는 처벌받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몇 차례 부침이 있었지만, 1970년대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특별수사본부> 시리즈가 크게 히트하면서 그는 다시 ‘반공 영웅’으로 등장했다. 그 인기에 힘입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공안검찰의 상징에서 한국 극우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 때 가장 쿨했다”며 반성 없는 검찰
오제도의 인생은 한국 검찰과 공안의 역사와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시도되는 검찰개혁은 단지 검찰 제도와 조직을 개편하고, 무슨 ‘통’이니 ‘계’니 하는 라인과 인사를 청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법의 외피를 쓰고서 자국민에게 국가폭력을 저질러왔던 과거의 사실을 철저히 조사하고 대면해서 응답하는 방식으로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한국 검찰과 공안은 자신의 흑역사에 대해 깜깜했던 건지, 지금껏 단 한 번도 조직 차원에서 사과한 적 없다. 노무현 정부 때 경찰·군·국가정보원, 그리고 법원이 조직 차원에서 과거사위원회를 구성해 과거의 부끄러운 일을 형식적으로나마 사과했던 것과 대조적인 행태다.
“우리가 직접 한 것은 없고 경찰, 군, 정보기관이 저질러서 넘어온 것을 법적으로 처리했을 뿐, 우리는 직접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옛날이 좋았지” “○○ 때 가장 쿨했다”라는 말을 무심코 내뱉는 것이다.
[출처] :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교수,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연구센터장 : <사진 속 역사,역사 속 사진-32, 검찰과 오제도 마지막편 '보도연맹은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 ‘민간인 학살’ 보도연맹에 검찰이 적극 개입한 배경 / 한겨레신문, 2020. 2. 15. 제 1300호
33.전쟁통 다리를 끊으며 끊긴 남북관계,
임진강 다리가 평화 건너오는 길목 되기를- 끊긴 이야기가 흐르는 평화를

①낙동강 방어전을 위해 득성교 폭파를 준비하는미 14공병대대 A중대.1950년8월2일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한다. 또한 새로운 것을 만들기도 한다. 전쟁통에 여러 ‘길’이 차단되고 파괴된다.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고 열리기도 한다. 강을 건너는 길인 다리는 이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전쟁 때 다리는 군이 공격과 방어를 위해 통제 관리하는 핵심 시설이다. 군은 적의 공격과 침투를 방어하는 방벽으로 삼기 위해 다리를 폭파하거나, 아군의 병력 투입과 보급을 위해 다리를 만들기도 한다. 이 때문에 민간인, 특히 피란민이 다리에 접근하는 것을 막거나 통제한다.
그러나 전란이 있기 전에는 지역주민이 일상적으로 오갔던 다리다. 급격하게 전선이 밀리고 정부와 군의 피란 통제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폭파나 폭격으로 인한 다리의 파괴는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낸다.
다리 못 넘고 잔류한 국민은 ‘부역자’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한강, 금강, 낙동강의 큰 다리들이 파괴됐다. 적의 주공로와 침투로를 파괴해 차단하고 적의 전진을 ‘지연’하는 군사작전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이 작전은 사람들의 피란길을 차단하는 것이기도 했다. 심지어 어처구니없게도 아군 후퇴로를 끊어서 아군 병력과 군수 장비를 고스란히 적에게 갖다 바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군 최고수뇌부(육군총참모장)의 잘못된 판단과 지시로 이루어진 한강 다리 폭파(1950년 6월28일 새벽 2시30분)가 단적인 예다. 서울 창동·미아리 방어선에 투입된 한국군 9만8천 명의 퇴로가 차단됐고, 2만4천 명만이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것으로 집계됐다.(김동춘, <전쟁과 사회>, 91쪽, 2000년) 다리 위에서는 수백 명의 경찰과 피란민이 폭사당했다.
다리 파괴의 피해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서울에 돌아와서 이승만 정부가 긴급히 한 일은 다리가 끊겨서 피란 가지 못해 서울에 ‘잔류’했던 국민을 ‘부역자’(“역도에게 협력한 자”)로 낙인찍는 것이었다. 국민을 버리고 ‘도강’한 국가가 그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거꾸로 ‘잔류’한 국민에게 “너 적과 역도들에게 협력했지? 왜 서울에서 도망쳐 나오지 않았어?”라며 처벌하고 죽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한 “부역하지 않은 개, 해피” 일화는 잔류하게 된 국민을 ‘개만도 못한 부역자’로 바라보는 것이었다.(이임하 외, <전쟁 속의 또 다른 전쟁>, 144~146쪽) 이러한 피해를 겪고도 살아남은 국민이 1·4 후퇴 때 어떻게 됐는지는 너무 분명하다.
한겨울 피란길에 얼어 죽더라도 선택지는 하나였다. 개전 초 여름과 달리 1951년으로 넘어가는 엄동설한의 ‘반공 엑소더스’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한국을 공산화로부터 구하고 자유 진영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참전한 미군(유엔군)은 그래도 이승만 정부의 행태와 다르지 않았을까? ‘전후’ 세계 질서를 주조한 헤게모니 국가이자 자유 진영의 리더인 미국을 어찌 자국민의 안전에는 국가부재 상태를 여실히 드러냈고 정권의 안전에는 국가폭력을 자행했던 신생 이승만 정부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②한강철교 복구 뒤 처음 운행하는 기차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등이 미 62공병대대, 기차 승무원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50년 10월19일.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다리 위엔 피란민뿐이었는데
그러나 예상과 달리 미군도 개전 초기 이승만 정부의 실패를 답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군은 적에게 급격하게 밀리면서 ‘지연전’ 차원에서 다리는 물론 마을과 도시를 파괴했다. 거듭되는 패배로 인한 패닉(혼란) 상태가 인종주의적 멸시와 맞물리면서 피란민을 적대시하는 통제 관리 정책을 시행했고, 여기저기서 피란민을 포로로 포획하거나 발포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다리에서 벌어진 참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군은 낙동강 방어전을 준비하기 위해 8월3일까지 모든 부대에 낙동강을 건너 철수하도록 하고, 왜관교와 득성교 폭파를 지시했다. 14공병대대가 득성교 폭파 임무를 맡았다.
미 25사단 24연대와 한국군 17연대가 다리를 건너 철수를 완료했지만, 피란민이 뒤이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래도 다리를 폭파했고, 피란민 수백 명이 죽었다. 북한군은 아직 득성교 강가에 이르지 않았던 때다.
득성교 40㎞ 상류에 있던 왜관교는 8공병대대가 폭파를 준비했다. 8월3일 해가 저물 때까지도 미 1기병사단의 도강이 진행되고 있었다. 철수가 완료되자 사단장 호바트 게이 장군은 부대의 후위를 쫓아 다리로 밀려드는 수천 명의 피란민을 저지하고 다리 폭파를 지시했다.
피란민들도 필사적이었고, 결국 수백 명의 피란민이 폭사당했다. 왜관교도 득성교처럼 폭파 시기가 너무 빨랐다. 북한군 주력 부대가 적어도 24㎞는 떨어져 있었을 때다.
사진①은 8월2일 미군이 득성교 폭파를 준비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사진에는 ‘RESTRICTED’ ‘SECURITY INFORMATION’ 스탬프가 찍혔고, 그 위로 줄이 그어져 있다. 자체 검열에서 기밀로 묶였고, 이후 해제된 것이다.
미군 사진병이 찍은 수많은 교량 폭파 사진 대부분 기밀이 아니었는데, 득성교와 왜관교 폭파 준비 사진은 기밀로 취급된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작전상 이유일까? 아니면 다리 폭파로 피란민 폭사 사건이 불거져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까?
폭파된 다리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복구되거나 새로 건설됐다. 적의 남하를 막던 방벽 구실을 하는 다리가 이제는 병력과 보급에서 북진 통로가 되었다. 큰 강의 다리가 복구되거나 부교가 가설되면 어김없이 한국 정부와 미군의 요인이 개통식에 참여해서 ‘기념’했다.
서울 ‘수복’ 직후인 1950년 10월19일 미 62공병대대는 한강철교를 복구했다. 첫 철도 개통 행사에 이승만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신성모 국방부 장관, 김석명 교통부 차관 등이 참석했다. 1951년 4월18일 낙동강 다리 개통식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리는 복구됐지만 주로 군사 목적으로 활용된 다리는 전쟁 전처럼 지역주민의 일상에서 멀어졌다. 대신 미군이 민사 원조 차원에서 작은 다리를 새로 만들어주는 일이 많았다.

③ 정전협상 대표단의 차량이 개성 내봉장을 나와 기러기 다리를 건너 유엔군임시사령부로 가고 있다. 1951년 7월 영상 촬영. 파주시·성공회대 냉전평화센터 제공
세 차례 복구 뒤 다리를 건너 회담장으로
개성과 서울 사이에 있는 임진강에서도 다리의 파괴와 복구 건설이 반복됐다. 1951~52년 임진강에는 11개 다리가 있었다. 전쟁이 끊어놓은 ‘자유의 다리’(임진강 철교)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기러기(Honker) 다리, 저어새(Spoonbill) 다리, 엑스레이(Libby) 다리, 홍머리오리(Widgeon) 다리는 지역민이 아니면 잘 모를 거다.
이 다리들은 현재 경기도 파주를 만들어온 ‘길’이다.(파주시·성공회대 냉전평화센터, <파주 DMZ 및 접경지역 국외자료 수집과 콘텐츠 활용 종합계획 보고서>, 275쪽, 2020년)
기러기 다리 자리는 원래 아군이 개성 부근에서 적의 탱크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부교(뜬다리)를 만들었던 곳이다. 이 군사 목적의 부교는 ‘6·25전쟁’ 1주년에 철거됐다.
대신 개성 내봉장에서 열린 정전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파주 선유리에 설치한 유엔군임시사령부에서 출발해 임진강을 건너갈 다리가 필요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게 기러기 다리다. 이 다리로 협상 대표단과 기자단이 오갔으니 정전, 종전, 평화로 가는 가교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다리가 한 달여 만에 파괴됐다.(앞의 책, 276~277쪽) 폭파나 폭격이 아닌 홍수였다. 임진강은 여름철엔 장마로 급류가 형성되고 홍수가 발생했다. 겨울철엔 유빙이 교각을 파괴하기도 했다. 대안은 그나마 튼튼하고 안전하게 건설된 임진강 철교, 즉 자유의 다리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파주를 거쳐 개성을 연결해주던 이 다리는 폭파와 폭격으로 철교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1950년 11월 한 번 복구됐지만 다시 파손돼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였다.
임진강 철교는 1952년 2~3월 세 차례 상행선 복구 작업을 했고, 협상 대표단과 기자단은 나룻배와 헬기 대신 자유의 다리를 건너 회담장으로 갈 수 있었다.(277쪽)
임진강에는 저어새 다리와 엑스레이 다리도 있다. 각각 ‘전진교’와 ‘북진교’라는 군사 용도를 물씬 풍기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명명은 대상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에 따른 효과를 유발한다.
다리 이름‘들’은 하나의 다리를 바라보는 여러 기억과 욕망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새 이름으로, 누군가는 작전 지역으로, 또 누군가는 어떤 열망으로 이 다리들을 부를 것이다.(284쪽)

❹ 미 84공병대대가 임진강 철교를 복구하고 있다. 그 옆에 부설된 가교로 차량이 통행하고 있다. 1952년 7월 촬영. 파주시·성공회대 냉전평화센터 제공
새 이름, 작전 지역 그리고 어떤 열망
전쟁이 남긴 다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다리 위에 무엇이 오가게 할 것인가? 바로 지금은 평화의 이름으로 다가오고 있다. 군사적 평화만이 아니라 금지됐던 땅을 열고 끊어진 마을과 마을을 이어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르는 평화여야 한다. 전쟁통에 복구되거나 새로 만들어진 임진강의 많은 다리가 조만간 평화가 건너오는 길목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출처] :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교수,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연구센터장 : <사진 속 역사,역사 속 사진> - 33. 전쟁통 다리를 끊으며 끊긴 남북관계, 임진강 다리가 평화 건너오는 길목 되기를- 끊긴 이야기가 흐르는 평화를 / 한겨레신문, 2020. 4. 4. 제 13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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