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 일반
‘여성 외교클럽’ 낙랑클럽, 왜 호스티스 클럽으로 낙인찍혔나
이세아 기자입력 2024.04.04
1995년 비밀해제된 CIC 보고서
이승만이 낙랑클럽 등을 매개로 공산주의와 연관됐을 가능성 살펴
당시 미 특파원 ‘미인계 간첩조직설’ 보도
관음증적으로 해석한 국내 언론 보도 영향
이임하 교수, "여성 고정관념 근거 이승만식 외교 결정판"
이승만 정권 시절 여성 지도자들은 여성들을 여러 외교 무대에 동원했다. 1951년 6월 부산에서 이기붕 국방장관 취임 축하연이 열렸다.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와 그가 초대한 존 무초 주한 미국대사와 콜트 미8군 부사령관, 문 밖에서 노래하는 이화여대 여학생들이 보인다. 사진 왼쪽엔 이기붕 장관(시계를 찬 손목)과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 앉아 있다. ⓒ이경모 촬영(‘격동기의 현장’, 121쪽). 강성현 제공.조상호 더불어민주당 법률위원회 부위원장이 ‘김활란 등이 이끈 낙랑클럽은 고급 접대부 호스티스 클럽’이라며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경기수원정 국회의원 후보의 발언을 두둔하고 나선 이후, 낙랑클럽의 실체가 다시 구설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김준혁 후보와 조상호 부위원장이 인용한 논문과 미군 방첩부대(CIC) 보고서를 여성신문이 확인한 결과, CIC는 낙랑클럽을 한국 여성 엘리트들과 국내외 주요 인사들의 ‘사교 모임’으로 보고 여기서 정보 유출 즉 간첩행위가 있었는지를 조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미군 CIC 정보 보고서 2(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2)' 영어 원문에 따르면 “낙랑클럽(Nang Nang Club)은 여성들이 1948년 또는 1949년 서울에서 귀빈, 한국 정부와 육군 고위 인사, 외국 정부 인사 등을 즐겁게 할(entertain) 목적으로 조직한 사교 모임”이라고 CIC는 봤다.
CIC가 낙랑클럽에 주목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미국은 휴전 성립 이후에도 ‘북진통일’ 노선을 고집해 미국과 갈등을 빚던 이승만이 낙랑클럽 등을 매개로 공산주의와 연관됐을 가능성을 살폈다.
CIC는 이 보고서에서 “한국 경제는 침체했는데 낙랑클럽에선 호화로운 대접(entertain)이 이뤄지고 제재를 받지 않는다”며 “낙랑클럽이 이승만 정부의 은밀한 지원을 받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 보고서는 “낙랑클럽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미군 주한합동고문단(JACK)의 첩보를 언급했다. 아울러 미군의 기밀 정보를 빼내 북에 넘긴 ‘간첩 혐의’로 1950년 사형당한 김수임이 ‘낙랑클럽의 핵심 멤버였다’는 데 주목하기도 했다.
미군의 기밀 정보를 빼내 북에 넘긴 ‘간첩 혐의’로 1950년 사형당한 김수임. 생전 낙랑클럽에서 활발히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연합뉴스1953년 9월7일 리처드 콜린스 미군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대령은 한국 주둔 정보참모부 산하 기관에 모윤숙의 활동 상황과 낙랑클럽이 공산주의자들에 이용당하고 있는지 등도 묻는다. 시인 모윤숙은 1948년 낙랑클럽 결성 당시 유엔총회 한국대표였으며 1950년엔 대한 여성청년회 총본부 단장이었다.
1953~1956년까지 3년간 수사한 결과, CIC는 “낙랑클럽이 공산주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입증할 정보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모윤숙은 1971년에 제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낙랑클럽이 공산주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입증할 정보는 없”으며 수사를 종결한다는 CIC 수사 결론. ⓒ여성신문사실 낙랑클럽은 1970년대 말까지도 세간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모윤숙은 1979년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기자가 낙랑클럽에 대해 묻자 “낙랑구락부(낙랑클럽)는 어찌 알고 물어”라고 반문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도 최근 들어 낙랑클럽이 ‘고급 접대부 호스티스 클럽’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1995년 비밀해제된 CIC 보고서를 관음증적으로 해석한 언론 보도들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의 외교활동은 어떻게 스캔들이 됐나
1949년 8월26일자 동아일보 기사 ’로버쓰將軍(장군)을招請(초청) 樂浪俱樂部(낙랑구락부)서宴會(연회)’. 낙랑클럽이 윌리엄 로버츠 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장을 주빈으로하는 연회를 이날 고급호텔 천향원에서 개최했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 기사 캡처낙랑클럽은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을 총재로, 시인 모윤숙을 회장으로 1948~1949년께 발족한 고위층 사교 모임이었다. 회원은 25~40세 이상의 고학력 여성들. 이들은 국내외 주요 인사들을 초대해 한복 차림으로 직접 만든 음식을 선보이는 등 한국 문화를 알렸고, 사교댄스 등 서양식 파티 문화도 향유했다. 참전용사에 대한 구호·원호 활동도 펼쳤다. 1953년~1954년께 해산했다.
해방 이후 독립국가 건설 과정에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시대였다. 여성 엘리트들은 건국 과정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이승만에게 협력했다. 공직에 진출하고자 했고, 미군정과 한국 남성정치인 간 다리 역할을 했다.
모윤숙과 절친했던 전숙희 작가는 낙랑클럽이 “미군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적어도 일제시대에 외국 유학을 갔다 올 정도의 교육받은 사람들, 또 잘살고 좋은 일도 많이 한 사람들”, “모습이 아름답고 영어 몇 마디라도 할 수 있으며, 교육도 받고 매너도 좋은 사람들”이 회원으로 활동했다고 했다. 이들은 “미군들의 파티에 가서 같이 대화도 하고 나중에는 으레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췄다”고 한다.
낙랑클럽 초대 총재였던 김활란과 낙랑클럽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모윤숙. ⓒ여성신문 DB남성 중심적·야만적 ‘요정 정치’(料亭政治)를 깨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모윤숙은 회고록에서 ‘기생파티’를 반대하는 차원에서 낙랑클럽을 만들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 남자들은 요정에만 가면 희희낙락해지고 싸움을 하던 사람들도 그렇게 의기투합할 수가 없었다. 요정에서 기생을 안고 천하 국사를 논하다 (...) 다음날이 되면 부인이 달여준 약을 먹고 부인이 빨아서 다려놓은 와이셔츠와 양말을 신고 다른 여자와 천하국사를 논하는 것이 그 당시 우리나라 정치가들의 패턴이었다.” (『사상의 창가에서: 모윤숙 전집 4』)
그런 낙랑클럽은 어쩌다 ‘여성 엘리트들의 부적절한 사회 활동’의 대명사가 됐을까.
1950년 2월4일 동아일보 기사 ‘七百名突破(칠백명돌파) 美人加入數(미인가입수)’. 그해 1월 말 미국인부녀봉사단과 한국인으로 구성된 ‘낙랑구락부’(낙랑클럽) 부녀들이 시내미국대사관 등지에서 회원모집운동을 펼쳤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 기사 캡처미 언론 ‘미인계 간첩조직설’ 보도...국내 매체 재인용하며 ‘관음증적 호기심’ 자극
이분법적 냉전 구도가 굳어지던 시기, 여성들의 국제적 감각과 외교 능력은 남성들이 차지한 공적 영역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오히려 여성 리더와 외국 남성 외교관의 개인적인 경험, 반민족적이고 성적인 관계로 치부됐다.
공임순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정의 힘에 대한 압도적 선망과 질시가 해방 한국을 집단적으로 사로잡”은 상황에서, “미군정의 고위 관료가 참석하는 사교 파티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알고자 하는 욕구는 파티의 섹슈얼한 시각화와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한국의 엘리트 여성들이 이들을 접대하는 성적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관음증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소문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오가며 뒷공론을 만들어낸다”고 분석했다(『한국근대문학연구』 17).
언론의 책임도 있다. CIC 보고서에 나온 1952년 9월 24일자 미 ‘데일리 팔로알토 타임즈’ 기사는 낙랑클럽을 ‘미인계 간첩 조직’으로 보이게 묘사했다. 이 기사는 “남한에서 가장 멋진 여성(모윤숙)은 외교관, 군 고위층, 기타 장교들을 위해 한국의 젊은 여성들 200만 명을 파티에서 손님들을 즐겁게 할 이들(party entertainers)로 조직했다고 주장하는 시인이자 정치인”이라며 “모윤숙은 그녀의 군단을 ‘낙랑 걸스’라고 부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들(낙랑클럽)을 현대판 마타하리(latter-day Mata Haris)로 묘사한다”고 썼다.
기사엔 다분히 선정적인 묘사들이 등장한다.
“부산에 있는 모윤숙의 수뇌부(her high command)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중년 여성들로 구성됐으며, 장군들과 외교관들을 위한 파티를 기획한다. (...) 기자들, 고위층과 가까운 젊은 장교들을 위해 젊고 예쁜 여자들을 보내기도 한다. (...) 낙랑클럽 수뇌부는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하는데 밤에는 얇은(filmy) 한복을 차려입고 계급이 높은 남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make light and gay), 낮에는 한국군을 위한 물품을 요구하려고 (미군) 막사 문을 두드린다.(데일리 팔로알토 타임즈, 1952년 9월 24일자 )”
보고서가 인용한 1952년 9월24일자 미 ‘데일리 팔로알토 타임즈’ 기사 전문. ⓒ여성신문
보고서가 인용한 1952년 9월24일자 미 ‘데일리 팔로알토 타임즈’ 기사 전문. ⓒ여성신문한국 언론들의 보도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CIC 보고서가 1995년 비밀해제되자 월간 중앙, 월간 말지 등은 이를 기초로 ‘6.25. 무렵 모윤숙의 미인계 조직 낙랑클럽에 대한 미군방첩대 수사 보고서’ 관련 기사를 냈는데 여기서 데일리 팔로알토 타임즈의 자극적인 표현들을 재인용했다. 이승만 정부로부터 이어져 온 보수 정권의 타락한 도덕성을 폭로하려는 의도에서였지만, 낙랑클럽에는 선정적인 낙인을 남긴 것이다.
이를 두고 여성학자 권김현영·김신현경은 『한일/반공 여류명사 모윤숙 다시 읽기』에서 “남성 정치인들의 ‘요정 정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도, 해방 후 여성 정치에게 허용되었던 성별화된 공간에 대한 역사의식도 모두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이성애 남성 판타지에 기반한 성애화된 스캔들로서 기호화된 ‘여성’뿐이었다”라고 비판했다.
다만 낙랑클럽이 여성의 정치 역량 강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느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공임순 연구원은 “낙랑클럽이 한국을 알리는 데 공헌했다는 자부심의 밑바탕에는 ‘사교’의 젠더 정치, 즉 사교는 남성들이 할 수 없거나 남성만으로 부족한 여성적 영역이라는 성별 분리 정치가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금전이 오가지 않는 자선의 행위라는 점에서 주로 기독교계 여성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노동 아닌 노동”이라고도 봤다.
이임하 성공회대 교수는 논문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에서 “낙랑클럽은 여성의 고정된 성역할에 근거한 이승만식 외교의 결정판으로 이러한 방식의 외교에 여성 지도자들이 앞장섰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참고문헌
이임하,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역사연구』 14, 2004
중앙일보현대사연구소, 美軍 CIC 情報 報告書 :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2 : 단체활동조사보고서(1), 중앙일보현대사연구소, 1996
전숙희, 『8.15의 기억』, 한길사, 2005
모윤숙, 『사상의 창가에서: 모윤숙 전집 4』, 성한출판사, 1986
공임순, 「스캔들과 반공 -‘여류’ 명사 모윤숙의 친일과 반공의 이중주-」, 『한국근대문학연구』 17, 2008
권김현영·김신현경, 「한일/반공 여류명사’ 모윤숙 다시읽기」, 2008[단독] 조상호 "낙랑클럽은 고급 접대부 클럽"...미 CIC "근거 없다"
키워드#낙랑클럽#김준혁#김활란#모윤숙#성상납#이화여대
이세아 기자 saltnpepa@womennews.co.kr
다른기사 보기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