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미군에 이대생 성상납” “박정희, 위안부들 상대로 XX”
역사 교수 출신 野 수원정 김준혁
과거 막말 줄줄이 드러나며 논란
이혜진 기자
입력 2024.04.02.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경기수원정 국회의원 후보의 과거 유튜브 발언들이 최근 줄줄이 드러나며 논란을 빚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김활란 여사 등이 여성들을 성적(性的)으로 착취하는 비위를 저질렀다는 주장을 펴면서도 명확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식이었다. 그런 발언들을 내보낸 채널은 2012년 총선에서 막말 논란 끝에 낙선한 나꼼수 출신 김용민씨의 방송이었다.
그래픽=박상훈
김 후보는 2022년 8월 14일 ‘김용민TV’에서 “전쟁에 임해서 나라에 보답한다며 종군 위안부를 보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이화여대 초대 총장) 김활란”이라며 “미 군정 시기에 이화여대 학생들을 미 장교에게 성상납시키고 그랬다”고 말했다.
2019년 2월 3일에는 최태민 목사를 언급하면서 “박정희가 대통령 당선되고 나서도 사실은 박정희하고 섹스파트너였다”며 “두 사람이 동침을 했다 이런 것들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같이 술 마시고 마약을 함께 하고”라고 했다.
같은 방송에서 김 후보는 또 “박정희라고 하는 사람이 그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정신대 종군 위안부들을 상대로 섹스를 했었을 테고…”라고 했다.
이때 진행자 김용민씨가 “(박 전 대통령이) 문경초등학교 선생 할 때도 학생하고…”라고 하자, 김 후보는 “신문자 배우러 나이 먹은 학생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하고의 관계도 분명히 있었던 거죠”라고 했다.
김 후보는 2017년 9월에는 김용민씨의 또 다른 인터넷방송이었던 ‘국민TV’에 출연, 자신을 “궁중 문화의 에로 문화가 내 전공”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는데 이 자리(융릉)는 바로 여인의 젖가슴의 자리이고 그래서 딱 이 자리는 유두(乳頭)”라고 했다. 그러자 김용민씨는 김 후보에게 “(당신의) 아호가 ‘유두(柔頭)’로 결정됐다”고 했고, 자막에 ‘유두 김준혁 교수’라는 표기를 띄웠다.
국민의힘은 1일 “김준혁 후보는 지금이라도 저급한 언행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수많은 국민에게 모욕감을 준 본인의 과오를 반성하고, 후보에서 사퇴하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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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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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0600&code=kc_age_40&fbclid=IwAR1QTY9zhRVLQopF6wEEwlYlKvIoaFlRSfmeXWk4aaPGCVXpEJDr-egMNIc_aem_AepBobPysNR9ownO9hdYJaKO9rkLij0PrmD8bcixYhX3jFYA00oTvgkrFLECheFolhuwEKlBVxjrA-pIRriOGXNp
=김활란[金活蘭]대표적 여성 교육자이자 여성 운동가, 친일파로 변절하다
1899년(고종 36) ~ 1970년
김활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1 개요
김활란(金活蘭)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최초 한국인 교장(총장)으로 여성교육가이자 외교활동가, 기독교운동가로 이름이 높다.2 김활란의 출생과 성장
김활란은 1899년 2월 27일 인천에서 태어났다. 김활린이 출생하였을 때 인천에서는 선교사업이 활발하였으며 초기교회로 대표적인 감리교 소속의 내리교회가 있었는데 김활란이 세례를 받은 교회가 바로 이 교회였다. 김활란은 그녀의 어머니인 박또라의 손에 이끌려 세례를 받았고 8세에 내리교회 부속학교인 영화소학교에 입학하였다. 박또라는 빚 때문에 부호집에 몸종으로 팔려가 소실이 되기까지 하는 불행한 삶을 경험했기에 딸들만은 그런 삶을 살지 않게 하려는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기독교도가 되고 어머니의 교육열로 김활란은 신식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김활란의 집안은 1907년 김활란이 9세가 되었을 때 서울로 이주하였다. 서울 이주 후 김활란은 이화학당에 입당하였다. 당시 양반들은 딸들을 신식 교육기관에 보내지 않아서 당시 신식학교에는 중인이나 평민 출신의 여성들이 많았으며 개화파 집안이나 기독교 집안의 자손들이 많았다. 김활란은 이화학당에 다니면서 사회 참여 의식과 여성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기숙사에서 살면서 김활란은 집단생활 속에서 자매애와 연대의식, 정치의식을 배우게 되었다. 교육을 받지 못했던 대다수의 또래 여자아이들과 달리 김활란과 같이 여학교를 다닌 여성들은 교육혜택을 받았고 기숙생활 속에서 정서적으로 교류하고 정치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김활란은 학교생활을 하면서 배운 여성으로서 지도적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김활란은 “학교에 나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도 우리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다. 우리 민족을 구해낼 수 있는 길은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모든 젊은이들이 그 결심을 닦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김활란은 이화학당의 중등과, 고등과를 졸업하고 대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과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의 결혼 권유가 있었으나 어머니의 도움으로 무사히 진학할 수 있었다. 김활란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이화학당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학내 사건에 연루되어 도피 생활을 하였다. 1922년에는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오하이오(Ohio)주의 웨슬리안대학(Wesleyan University)에서 1924년까지 공부하여 학부 과정을 마쳤으며, 1924~1925년까지 보스턴대학(Boston University)에서 종교철학 석사과정에 수학하였다. 교육받은 여성이 흔치 않던 시절 미국 유학까지 한 김활란은 여성계와 기독교계에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3 일제강점기 김활란의 활동
1) 김활란의 기독교 사회개혁운동
여성교육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김활란은 YWCA(기독교여자청년회, 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와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女子專門學校, 약칭 이화여전梨花女專)을 주 활동무대로 하였다. YWCA는 1922년 김활란, 김필례(金弼禮), 유각경(兪珏卿)에 의해 창립되었다. 이 단체는 3·1운동을 통하여 성장한 여성의 힘을 모아 기독교계 여성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192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김활란은 여성교육과 사회운동에 전념하였다. 김활란은 현실 참여적이면서 민족주의 운동 계열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서울지역의 기독교계 인사로 구성된 YMCA와 흥업구락부 인사들과 함께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윤치호(尹致昊), 신흥우(申興雨)를 중심으로 한 서울지역 기독교 세력은 실력양성론을 운동의 방침으로 하였고,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를 결성하여 외교운동에 참여하였다.
김활란은 세계기독교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기독교의 현실참여와 사회개혁을 강조하는 사회복음주의를 받아들였고 그것을 한국사회에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회복음주의는 1차 세계대전의 경험과 식민지 피억압민족의 민족주의가 고양되는 가운데 등장하였다. 김활란은 사회복음주의를 조선사회에 수용하여 기독교를 통한 사회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1925년 12월 28일 조선기독교봉역자회의, 1926년에는 기독교연구회를 조직하여 기독교 현실 참여 운동에 참여하였다. 김활란은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국제선교협의회에 조선대표로 참여하여 현실참여적 기독교주의 확립에 매진하였다. 국제선교협의회에서는 농촌문제가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김활란은 “조선민족 운동에 8할이 되는 농민을 제외하고는 근본적 문제 해결이 못 된다”라는 언급을 YMCA의 기관지인 『청년』의 지면을 통하여 하였다. 김활란이 국제선교협의회에서 돌아온 후 1928년부터 YWCA의 농촌사업이 본격화되었다. 1930년에 김활란은 콜럼비아대학(Columbia University)으로 농촌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유학을 떠나 1931년에 「한국 농촌 재건을 위한 교육」(Rural Education for the Regeneration of Korea)이라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이 논문에서 김활란은 한국 농촌 궁핍의 원인으로 너무 적은 토지소유, 높은 소작료, 고리대금과 세금, 경제 불황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특히 지주소작제를 주원인으로 지목하였다. 농촌문제의 해결방안으로 김활란은 현대적인 농업기술을 농민들이 배워야 하며 이를 위해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였다.
김활란은 태평양문제연구회(太平洋問題硏究會)에 참여하며 외교독립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1926년에는 신간회와 근우회에 창립위원으로 참여하였는데 근우회 창립대회에서는 임시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2) 김활란의 여성교육활동
개화기 이래 여성교육이 확대되고 남녀평등의식이 서서히 퍼져나갔고 이것은 개인적 욕구와 주체의식을 가진 여성을 등장시켰다. 특히 1920년대에는 여성문제는 세계의 3대 문제라 불릴 만큼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김활란은 여성이 사회에 기여하여 능력을 인정받아 남녀평등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김활란은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고 여성의 특질인 사랑 봉사 헌신 모성 등의 덕목을 발휘하여 가정주부로 어머니로서 역할을 잘 할 것을 주장하였다. 자녀 양육은 사회에 나갈 인재를 기르는 일이므로 가정의 일은 사회의 일이며 이를 잘 하는 것이 여성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 하였다. 김활란은 이러한 생각 하에 여성교육이 중요하다고 하였으며 이화여전에서 교육자로서 활동하였다.
3) 일제협력자 김활란
재차 귀국 후 이화여전에서 교감으로 여성교육에 종사하면서 사회운동에 주력하던 김활란은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녀의 친일행적은 사회운동에서 이룬 김활란의 명성과 활동에 대비되면서 충격을 안겨다준다.
김활란이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한 시기는 중일전쟁 이전인 1936년경이었다. 김활란은 1936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가정의 개선과 조선인 교화운동의 촉진을 위한 간담회’에 참여하였고 1937년 1월 13일에는 ‘방송선전협의회 부인강좌’에 강사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같은 해 역시 1월에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관하는 조선부인문제연구회(朝鮮婦人問題硏究會)에 상무이사로 참여하였다. 학무국은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조선부인문제연구회는 생활개선과 부인을 계몽하고 그 내용을 연구하는 단체로 활동 내용으로 보면 김활란이 YWCA 등을 통해 해왔던 계몽운동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김활란은 중일전쟁 직후 결성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에 친일행위를 하였고 특히나 일본이 벌인 전쟁이 적극 협력하였다. 1941년 8월에는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미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각계 인사들이 결성한 전쟁선전단체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활란은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데 적극 나섰다. 김활란은 야마기 가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주최의 ‘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에서 여성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였다. 1942년 1월 조선총독부는 조선임전보국단 산하에 부인대를 신설하여 여성 동원을 강제하였는데 김활란은 지도위원으로 이 단체에 참여하였다. 일제가 전쟁에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하여 1942년 징병제 실시를 발표하였을 때 김활란은 징병제를 맞이하는 조선 여성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국가를 위해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이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내 남편도 내 아들도 물론 국가에 속한 것이다. 국가에 속한 남편이나 아들 또한 내 생명이 국가에서 요구될 때 쓰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출처: 「여성의 무장」, 『대동아(大東亞)』, 1942년 3월 발행 )
이러한 친일, 전쟁협력의 와중에 김활란은 1939년 이화여전의 교장이 되었다. 일본은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가 전시정책에 따를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기독교계 학교를 인수하거나 폐교하였다. 이때 일제는 선교사 교장을 한국인으로 교체하였는데 이때 김활란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의 뒤를 이어 최초로 한국인으로 이화여전의 교장이 되었다. 김활란은 일찍이 이화여전의 교육을 자신의 손으로 이끌고자 하였고 교육의 내용, 학교 분위기를 ‘조선적’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한 평소의 소신으로 김활란은 일제의 전쟁에 적극 협력하면서 이화여전의 교장으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이화여전에서 기독교의식과 교육은 금지되었고 급기야 1943년에는 ‘전시교육임시조치령’에 의해 대학교육이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화여전은 1년제의 ‘이화여자전문학교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 양성과’로 격하되어 운영되었다.4 해방 후 김활란의 행적
해방 후 김활란은 자신의 적극적인 친일행적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 없이, 타고난 활동가답게 활발하게 움직였다. 1945년 9월 백낙준, 정인보 등과 함께 미군정의 조선교육심의회 자문위원으로 일하였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국면을 맞아하여 독립촉성부인회를 만들어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하였다. 김활란은 이화여전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화여전은 1946년 8월에 종합대학이 되었다. 김활란은 1948년 제헌의회 선거인 5·10선거에 서대문구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마하였다. 1948년 9월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연합총회에 파견되어 한국에 대한 유엔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활란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공보실장에 임명되어 3개월간 활동하였다. 공보실장에서 물러난 후 김활란은 민간외교단체인 전시홍보외교동맹(戰時弘報外交同盟)을 만들어서 홍보활동을 하였다, 김활란은 이화여전 졸업생들을 모아 위문단을 조직하여 부산 인근에 주둔한 군부대를 찾아다다니며 위문활동을 하였다. 김활란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거처로 쓰던 ‘필승각’에서 육해공군의 장성과 민간인 대표를 위한 파티를 열었으며 유엔군의 휴양처와 같이 사용하였다. 또한 홍보활동의 일환으로 필승각에 소규모 박물관을 만들어 홍보활동에 사용하였다. 김활란은 『코리아타임스』(The Korea Times)라는 영자신문을 발행하여 민간홍보외교 활동을 하였다. 1951년에는 전시홍보외교동맹의 주선으로 유엔본부를 방문하여 유엔총회 의장과 사무총장을 만났으며, 미국 대통령 트루먼(Harry Shippe Truman)을 만나 한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였다. 김활란의 외교 활동은 전쟁 후에도 이어졌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김활란은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여하여 한국의 유엔가입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한국전쟁 후 김활란은 유네스코(UNESCO: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가입을 정부에 적극 권유하였고 1962년에서 1966년 유네스코 한국대표로 활동하였다. 전쟁 중 임시 수도 부산에서 김활란은 이화여자대학을 열어 1951년 9월에 개학식을 하였고 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61년 5·16쿠데타 후 정부는 「교육에 관한 임시 특례법」에 따라 60세 이상이 된 사람들을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하면서 당시 62세였던 김활란은 이화여대의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퇴임 후 김활란은 이화여대의 재단이사장과 명예총장직을 맡아 학교일을 계속하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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