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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
최근 수정 시각: 2019-06-08 10: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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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역사학자
▲빈에 있는 오스트리아 의회 건물 앞 투키디데스 동상
사진출처 : en.wikipedia.org
Thucydides[1]
Θουκυδίδης (BC 460?~BC 400?)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
1. 생애2. 역사학자 투키디데스3. 비판점4. 투키디데스의 함정5. 명언
1. 생애[편집]
투키디데스의 삶은 너무도 흐릿하여 그의 정확한 출신은 알 수 없지만, 그리스 아테네의 부유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임은 확실하다. 그는 자연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의 제자였다. 또한 그는 아티카(앗티케) 10대 웅변가 중 한 명이었던 안티폰에게 웅변술을 배웠는데, 이 때는 스승을 따르지 않았다. 안티폰은 귀족파였지만, 그는 민주파로서 페리클레스를 지지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24년, 아테네의 장군으로 뽑힌 투키디데스는 '트라케' 지역으로 파견된다. 그의 임무는 이 지역 주요 도시인 '암피폴리스' 수비였는데, 얼마 뒤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의 공격을 받아 도시를 빼앗긴다. 이 일로 아테네는 그에게 반역죄를 선고하고, 그는 20년 동안 아테네 밖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이 추방 기간 동안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쓰게 된다. 그의 저술은 종전이 6년 6개월이나 남은 411년에 멈추는데, 그 이유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죽음 역시 출생만큼이나 흐릿하다. 그에 관해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사망 연도조차 기원전 400년경으로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2. 역사학자 투키디데스[편집]
널리 알려진 그의 업적은 신화(+설화)와 역사의 분리이다. 투키디데스 이전까지의 역사는 신화와 이분법적으로 딱딱 분리되지 않았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나 일리아스에서 인간은 신의 의지 혹은 신탁에 의해 움직인다. 따라서 전쟁은 모두 신들의 게임이었다.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세계가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신의 섭리라고 서술했다.[2] 실제 당시 그리스 인들도 트로이 전쟁은 곧 신들의 전쟁이라 믿었다.
투키디데스는 달랐다. 소피스트의 회의주의와 히포크라테스의 과학정신의 영향을 받은 세대였다. 그는 이를 역사학에 적용했다. 그는 전설이나 신화처럼 확신할 수 없는 요소는 걷어내고,[3] 오직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적으려고 애썼다. 이를테면 투키디데스 이전까지 그리스인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테베가 오랜 기간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을 테베인의 용감함에서 찾았다. 반면 투키디데스는 이를 당시 헬라스의 경제발전 상황과 연관짓는다. 그에 따르면 당시 헬라스는 경제발전 정도가 낮아 가난했다. 자연히 트로이 원정군의 장비나 보급 수준도 엉망이었다. 그렇기에 테베는 손쉽게 공격을 버틸 수 있었다.
그는 사회에 대한 분석과 함께 '개인'을 강조한다. 역사는 개인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의 판단에 따라 방향이 바뀐다. 지도자의 한 수(一手)는 폴리스 시민에게 평화를 줄 수도 있고, 그들을 타국의 노예로 만들 수도 있다. 역사 속에서 현명한 지도자는 여럿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가장 현명한 지도자는 페리클레스였다. 그는 페리클레스가 정치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고, 전쟁의 흐름을 크게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아테네의 몰락은 페리클레스만큼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는 후계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역사가 신에 대한 찬양이나 강연이 아닌 현재, 미래세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에 일정한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은 비슷한 상황이 되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4] 이는 그가 최초로 역사학자의 사명, 역사학의 목적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저술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 썼다.) 그런 이유로 그는 신화가 아닌 사회, 정치, 경제를 중점으로 그가 살던 세계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분석했고, 그를 토대로 전쟁사를 적었다. 이는 훗날 '실증주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그는 국제정치학 이론 중 '현실주의'의 시초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폴리스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이유를 공포, 명예(위신), 이익이라고 보았는데(아테네인과 멜로스인의 대화에서 두드러진다.), 투키디데스의 이 설명은 현대의 국제사회에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이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사람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국제분쟁 이해를 위한 고전으로 보고 연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책이 가장 빛을 발하던 시기는 양차대전보다는 냉전시대이다. 헬라스 세계를 양분했던 기존의 강대국 스파르타와 떠오르는 별 아테네 제국은, 20세기 세계를 양분해 무력충돌 직전까지 갔던 미국과 소련을 떠오르게 한다. 다른 국가들은 미국과 소련을 골라 동맹에 들어갔고, 중립국을 외치던 약소국은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이는 놀라우리만큼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와 비슷하다. 아시아를 양분하려고 하는 신흥 강국 중국과 기존 패권을 지키려는 미국을 보면, 이들 두 강대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경합하는 지역들 가운데 하나인 한반도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역사의 패턴이 반복되고, 그러므로 역사를 통해 현재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투키디데스의 혜안이 맞았던 것이다.
또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실적 판단과는 별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인용된 연설들의 수사학적 퀄리티로도 유명한 책이다. 다만 인용된 연설들이 구체적으로 연설자의 원문 그대로는 아니고, 투키디데스가 재구성한 것들이다. 어찌보자면 민주정에 대해 사나이의 피가 끓어오르게 만드는 남자의 로망으로 가득한 페리클레스의 연설 마저도, 페리클레스의 색체보다는 투키디데스의 색체가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말씀(...)
각각의 인물이 전쟁 직전이나 전쟁 중에 발언한 연설에 관해 말하자면, 직접 들었든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든 나로서는 정확히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실제 발언의 전체적인 의미를 되도록 훼손하지 않으면서 연설자로 하여금 그때그때 상황이 요구했음 직한 발언을 하게 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 22장 1
3. 비판점[편집]
그가 아무리 객관성을 추구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저술에서도 특정 사상이나 인물에게 기울어진 평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페리클레스를 높이 평가하며 시칠리아 원정이라는 재앙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니키아스를 동정한다. 이에 반해 아테네를 궁지에서 구한 승리를 거둔 클레온 등은 거세게 비판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연구를 선도해온 역사학자 도널드 케이건에 의하면, 투키디데스는 독자들을 자신의 의견에 공감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료를 선택했으며, 여러가지 기법을 동원해 독자의 생각을 은연 중에 한 방향으로 이끌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신이나 로봇이 아닌 감정과 경험을 지닌 인간이다. 더군다나 투키디데스는 수백 년 뒤의 후손이 아닌 저술의 대상이 된 시대를 직접 살았던 사람이다. 또한 헬라스 안에서 제3자가 아닌 조국 아테네의 편에서 직접 전쟁에 참여했었다. 아테네로 안으로 법위를 좁히더라도 그는 정치적으로 중립이 아닌 페리클레스의 열렬한 지지자 였다. 자연스럽게 그는 페리클레스의 반대파(이를테면 클레온)를 싫어했으며,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를테면 니키아스)을 좋아했다.
투키디데스는 끊임없는 객관성 추구로 역사 저술에 있어서 신화와 역사를 분리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역시 인간이기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까지 걷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투키디데스의 저작은 맹목적이 아닌 비판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다른 모든 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기존의 국제질서를 주도하던 강대국이 약화되고, 신흥 강대국이 등장할 때, 이들 두 세력 사이의 패권 교체는 전쟁을 포함한 직접적인 충돌을 수반한다는 주장. 투키디데스가 직접 경험했던 아테네 대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을 비롯해서, 세계 패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대규모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일종의 비관적인 국제정치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21세기에는 미국 대 중국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해석, 주장하는 상황.
5. 명언[편집]
(천병희 번역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발췌)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 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 않게 아실 텐데요.(5권 89) [Right, as the world goes, is only in question between equals in power, while the strong do what they can and the weak suffer what they must.]
번영을 누리는 평화 시에는 도시든 개인이든 원하지 않는데 어려움을 당하도록 강요받는 일이 없으므로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한다. 그러나 일상을 필요가 충족될 수 없는 전쟁은 난폭한 교사이며, 사람의 마음은 대체로 그들이 처한 환경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린다.(3권 82)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통치되기에 우리 정체를 민주정치라 부릅니다. 시민들 사이의 사적인 분쟁을 해결할 때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합니다. 그러나 주요 공직 취임에는 개인의 탁월성이 우선시되며, 추첨이 아니라 개인적인 능력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가난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할 능력이 있다면 가난 때문에 공직에서 배제되는 일도 없습니다.(2권 37, 페리클레스의 추도사 中)
[1] 영어발음은 영국식과 미국식이 서로 다르다. 영국식의 경우 "투키디데스" 가 아니라 "두시디디-즈", 미국식의 경우 "더시다잇-즈" 에 가깝다. 발음기호 확인되면 추가바람.[2] 그 까닭은 페르시아는 그리스에 비해서 발전된 문명이고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 인들과는 다르게, 이성적인 인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윗인 그리스가 골리앗인 페르시아를 이긴 까닭은 신의 섭리로 밖에 설명이 안 돼 그 서술을 신에게 의지하였다.[3] 이 때문에 투키디데스를 무신론자로 보는 시선도 있는데, 역사와 신화를 분리하여 설화나 기적의 요소를 배제하고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후대의 그리스도교 역사가들에게도 점점 확산되는 현상이다. 신실한 유신론자들 역시도, 기적 등에 관한 진술들은 매우 쉽게 왜곡되고 날조될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투키디데스를 무신론자로 단정하기에는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무리가 많으며, 오히려 본인부터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서 "저자 양반이 무신론자이군"이라는 판단을 듣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동시대 사람인 소크라테스가 다름 아닌, 신을 우습게 보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누명으로 처형되었음을 감안할 때 특히 그렇다. 독자들에게 제발 자기를 법정에 고발해달라고 광고하려던게 아닌 이상, 황금기 아테네의 저술을 읽고 저자를 무신론자로 단정하기는 어렵다.[4] 사실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이전 그리스인들의 시간관념은 기본적으로 있었던 일이 반복된다는 순환론적인 시간관이었다. 세상이 영원불멸하다는 그리스적 관념과도 관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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