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6

알라딘: 나는 사회주의자다 -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 선집



알라딘: 나는 사회주의자다 -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 선집

나는 사회주의자다 -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 선집
임경화 (엮은이),박노자교양인201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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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쪽
152*223mm (A5신)
1087g
ISBN : 9788991799622


박노자의 한국 공산주의 문화사 6강

책소개

조선과 중국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한 동아시아 운동의 선구자인 고토쿠 슈스이는 1907년에 일본의 조선 식민화에 반대한다는 위험한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문제적 인물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처형당하고 3개월 후인 1910년 6월 고토쿠 슈스이는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그리고 1911년 1월 24일, 비밀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후 불과 일 주일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물이다.

고토쿠 슈스이 사후 100년을 맞아 최초의 한국어판 저작집을 출간했다. 번역에만 4년이 넘게 걸린 이 저작집을 위해 옮긴이 임경화 박사는 희귀 자료를 찾아 몇 차례나 일본을 오가며 연설문과 신문 사설부터 저서까지 고토쿠 슈스이가 직접 쓴 글은 물론이고 고토쿠 사후에 그와 관련되어 나온 자료들도 모두 철저히 연구했다. 학문적 성실함과 지난한 노력의 결과로 마침내 200자 원고지 2천 장에 이르는 번역 원고와 250여 개의 풍부한 주석이 완성되었다.

1901년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일본 지성계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불과 10년 동안 동아시아 전역에 최초로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민족을 뛰어넘는 민중 연대를 주창한 위대한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의 치열했던 삶과 사상을 그의 육성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고토쿠 슈스이가 한·중·일 3국의 근대사에 끼친 영향과 그의 사상의 현재적 의미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박노자 교수의 한국어판 해제는 이 저작집의 의미를 한층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목차


한국어판 해제 - ‘조숙한 전위’의 아름다운 비극 _ 박노자(오슬로대)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

장광설
19세기와 20세기 | 혁명이 도래한다 | 파괴주의인가 폭도인가 | 금전을 폐지하라 | 위장의 문제
최근의 노동 문제 | 제국주의의 쇠운 | 암살론 | 무정부당 제조 | 위험한 국민 | 월폴 정책
일본의 민주주의 | 외교상의 비입헌국 | 재정의 대혁신 | 호전적인 국민인가 | 후대받는 병사
비전쟁문학 | 비정치론 | 이상 없는 국민 | 마비된 국민 | 목적과 수단 | 의무감
노인의 손 | 문명을 모욕하는 자 | 이토 후작의 성덕 | 평범한 거인 | 《수신요령》을 읽다
자유당 제문 | 세모의 고통 | 신년의 환희 | 고등교육의 권리 | 연애문학 | 자살론 | 불완전한 연회

사회주의 신수

기타 논설 편
비전론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는 자 | 러시아사회당에 보내는 글 | 러시아사회당으로부터
전쟁과 소학 아동 | 아아, 증세! | 톨스토이 옹의 비전론을 평하다 | 사회당의 전쟁관

부인론
부인과 전쟁 | 부인과 정치 | 나의 부인관 | 부인 해방과 사회주의

직접행동론
러시아혁명이 주는 교훈 | 앨버트 존슨에게 보내는 편지 | 일파만파 | 무정부 공산제의 실현
사회혁명당 선언 | 세계 혁명 운동의 조류 | 내 사상의 변화(보통선거에 대하여)
일본사회당대회 연설문 | 사회주의강습회 제1차 개회 연설 | 병환 중의 망언 | 혁명 사상

조선 관련
포기인가 병탄인가 | 경애하는 조선 | 조선병탄론을 평하다 | 《만조보》 기자에게 답하다
도덕론 | 도쿄평론(제3신) | 안중근 초상 그림엽서에 시를 더하다

기타
나는 사회주의자다 | 사회주의와 종교 | 사회와 희생 | 나는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나
인류와 생존경쟁 | 어느 정도까지는 찬성 | 적색기 | 채식주의 | 번역의 고심

옥중수기
진술서 | 절필시 | 사생(死生)

해설
옮긴이 해설 - 혁명가가 된 지사 고토쿠 슈스이
고토쿠 슈스이 연보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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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그는 아나키스트였다, 왜?
-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저자 및 역자소개
임경화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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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 문학박사이며, 전공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비교연구와 일본사회운동사 연구이다. 저서는 『1905년 러시아혁명과 동아시아 3국의 반응』(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공저)가 있으며, 역서로는 『나는 사회주의자다』(교양인, 2011), 『나의 1960년대』(돌베개, 2017) 등이 있다.


최근작 : <분단생태계와 통일의 교량자들>,<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1905년 러시아 혁명과 동아시아 3국의 반응> … 총 14종 (모두보기)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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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한국 고대사와 불교사 등을 연구했고 지금은 근대사, 특히 공산주의 운동사에 몰입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당신들의 대한민국』(1·2) 『우승열패의 신화』 『주식회사 대한민국』 등이 있다.


최근작 : <전환의 시대>,<한국지성과의 통일대담>,<러시아 혁명사 강의 (리커버 에디션)> … 총 99종 (모두보기)
인터뷰 : 이중의 타자, 박노자 교수와의 e-만남 - 200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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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동아시아 최초로 《공산당 선언》을 번역한 혁명 사상가,
일제의 조선 식민화를 비판하고 안중근을 존경했던 양심적 지식인,
조선과 중국의 혁명가들에게 국제 연대의 정신을 전파한
동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출발점 고토쿠 슈스이 사상을 읽는다!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루었네
안중근이여, 그대의 일거에
천지가 모두 전율했소

1909년 10월 26일 제1대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 의거를 기리는 이 시는 놀랍게도 일본인의 작품이다. 이 위험한 시를 쓴 사람은 일찍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반군국주의, 반침략주의 운동을 펼친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담은 사진엽서를 만들어 그의 의거를 기리는 시를 직접 엽서에 써넣기도 했다. 현재 전하는 안중근 초상 엽서(오른쪽)는 고토쿠 슈스이가 체포될 때 품속에 넣고 있던 것이다.

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1871~1911)는 1907년에 일본의 조선 식민화에 반대한다는 위험한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문제적 인물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처형당하고 3개월 후인 1910년 6월 고토쿠 슈스이는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그리고 1911년 1월 24일, 비밀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후 불과 일 주일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른바 ‘대역 사건’의 전모는 사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나는 사회주의자다》는 고토쿠 슈스이 사후 100년을 맞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 소개되는 고토쿠 슈스이 선집이다. 1901년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일본 지성계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불과 10년 동안 동아시아 전역에 최초로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민족을 뛰어넘는 민중 연대를 주창한 위대한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의 치열했던 삶과 사상을 그의 육성으로 듣는다!

고토쿠 슈스이 사후 100년 만에 만나는 최초의 한국어판 저작집!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을 넘어 조선과 중국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한 동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자였으며,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비판하고 제국주의 전쟁의 본질을 꿰뚫어본 정치사상가였다. 그는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 피지배 계급의 연대와 저항을 외친 국제주의의 주창자였고, 일제의 조선 병합을 비판한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나는 사회주의자다》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 순정한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의 주요 저술을 망라한 최초의 한국어판 저작집이다.

이 책은 고토쿠 슈스이의 주요 저서인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장광설》《사회주의 신수》를 비롯해 그가 《만조보》와 《평민신문》 등 여러 신문에 발표한 논설과 연설문, 선언문 등을 싣고 있다. 이 글들은 20세기 초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사상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의미가 깊은 문헌들이다. 사회주의 사상과 아나키즘에 대한 탁월한 이해,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비판, 러시아혁명 등 국제 혁명 운동에 대한 분석과 진단, 사형 집행을 앞둔 지식인의 철학적 고뇌를 엿볼 수 있다.

번역에만 4년이 넘게 걸린 이 저작집을 위해 옮긴이 임경화 박사는 희귀 자료를 찾아 몇 차례나 일본을 오가며 연설문과 신문 사설부터 저서까지 고토쿠 슈스이가 직접 쓴 글은 물론이고 고토쿠 사후에 그와 관련되어 나온 자료들도 모두 철저히 연구했다. 참고할 수 있는 한국어 번역본이 전무한 상황에서 현대 일본어와 크게 다른 100년 전 일본어 문장은 번역 이전에 해석부터 쉽지 않았다. 학문적 성실함과 지난한 노력의 결과로 마침내 200자 원고지 2천 장에 이르는 번역 원고와 250여 개의 풍부한 주석이 완성되었다.
더불어, 고토쿠 슈스이가 한·중·일 3국의 근대사에 끼친 영향과 그의 사상의 현재적 의미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박노자 교수의 한국어판 해제는 이 저작집의 의미를 한층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고토쿠 슈스이는 우리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이름이지만, 우리가 그를 모르는 것은 우리 역사 교육의 한심한 수준과 일본학 전공자들의 일본 및 동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 대한 한탄스러운 무관심을 노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사실, 근대 동아시아의 진보적 담론을 만드는 데 고토쿠야말로 선구적인 기여를 했다. ……
나중에 중국어로 번역된 《사회주의 신수》와 같은 그의 저서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조선인에게도 사회주의의 기초 개념을 심어줌으로써 이후 전개될 사회주의 운동의 담론적 밑바탕을 만들어놓았다. 구한말의 신채호와 같은 조선의 급진 논객들은 고토쿠의 저서에서 아나키즘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처음 익히는 등 고토쿠를 통해 세계적인 계급 해방 운동의 본류와 접촉하게 됐다. 일제의 조선 식민화에 반대하고 안중근에게 한시를 바쳐 무한한 존경을 표한 고토쿠는, 한일 간 ‘민중 해방을 위한 연대’의 창시자였으며, 1907년에 그가 여러 동지와 함께 주도한 아주화친회는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반제국주의, 반침략 운동의 연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처럼 아시아 민중 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고, 결국 ‘대역 사건’이라는 국가 탄압의 희생자로 혁명을 위해 그 일생을 장렬히 바친 고토쿠 의사를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이 책이 계기가 되어 우리에게 낯설고 멀었던 고토쿠의 인생과 사상의 전모는 최초로 읽기 편한 현대 한국어 문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 박노자 (‘한국어판 해제’에서)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원형을 만나다

《나는 사회주의자다》는 1901년에 발표한 최초의 저서인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부터 1911년 사형을 앞두고 감옥에서 쓴 <사생(死生)>에 이르기까지, 고토쿠 슈스이의 10년에 걸친 사상의 궤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저작집에 실린 글들은 자유주의에서 의회사회주의를 거쳐 아나키즘에 이르는 고토쿠 사상의 전모를 보여준다. 고토쿠의 저술을 통해 그의 사상을 읽는 것은 고토쿠 슈스이라는 한 혁명가에 대한 관심을 넘어 근대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원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고토쿠 슈스이의 글을 통해 제국주의 비판 담론과 사회주의의 이념을 받아들였다. 즉, 고토쿠 슈스이가 받아들이고 이해한 사회주의가 곧바로 근대 동아시아 사회주의 사상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는 일본 출간 이듬해인 1902년에 중국어로 번역되어 중국 신해혁명의 주역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중국 반제국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구한말의 변영만 등 조선의 선구적인 제국주의 비판자들도 고토쿠 슈스이의 작업에서 처음으로 중요한 실마리를 얻었으며, 신채호는 1928년 일제에 체포되었을 때 고토쿠의 《장광설》을 읽고 무정부주의(아나키즘)에 공명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동아시아 최초의 제국주의 비판서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
1901년 4월 20일에 출간된 고토쿠 슈스이의 데뷔작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는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운동의 역사를 연 책이다. 이 책에서 고토쿠는 제국주의를 애국주의와 군국주의의 결합으로 파악하고, 동서고금의 역사를 근거로 들어 그 허구성을 낱낱이 파헤친다. 그는 애국심이란 언제나 전제 정치가가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동원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또 제국주의자들이 인구 증가와 시장 개척의 필요성을 내세워 영토 확장을 부르짖는 것은 군인과 정치가, 소수 지배 계급의 허영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함일 뿐이며, 제국주의는 인민을 부강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부패하고 타락하게 만들 뿐이라 주장한다. 고토쿠가 펼친 반제국주의 논리는 이후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투쟁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그들의 대제국 건설은 필요가 아니라 욕망이다. 복리가 아니라 재해다. 국민적 팽창이 아니라 소수 인간의 공명과 야심의 팽창이다. 무역이 아니라 투기다. 생산이 아니라 강탈이다. 문명을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명을 괴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사회 문명의 목적인가. 국가 경영의 본지인가. 이민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말라. 이민은 영토 확장이 필요하지 않다. 무역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말라. 무역은 결코 영토 확장이 필요하지 않다. 영토 확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오로지 군인과 정치가의 허영심뿐이다. 금광과 철도의 이익을 좇는 투기꾼뿐이다. 군수를 공급하는 어용 상인뿐이다. ― <제4장 제국주의를 논하다>114쪽에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절망이 무정부주의를 낳는다! -《장광설》
1902년 2월 20일에 출간된 《장광설》은 신문, 잡지에 썼던 글 34편을 단행본으로 엮은 평론집이다. 사회주의에 관한 글들이 핵심을 이루는 이 책에서 고토쿠 슈스이는 제국주의가 초래한 참상과 해악에서 인류를 구제하려면 사회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며, 필연적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할 수밖에 없다고 역설한다.

부패와 타락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길이 없다. 지금의 경제 조직을 근본적으로 개조하고 의식주에서 자유 경쟁을 폐지하는 데 있다. 생활의 곤궁을 제거하고 금전 숭배 풍조를 몰아내는 데 있다. 만민이 평등하게 교육받을 자유를 누리고, 사회적 지덕을 증진하는 데 있다. 만민이 평등하게 참정권을 누리고 국가 사회의 정치 · 법률을 소수 인사가 독점하지 않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곧 근대 사회주의를 실행하는 데 있다.
― <암살론>161쪽에서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국가에 대한 개인의 절망이 무정부주의와 테러, 암살을 낳는다고 주장한 <무정부당 제조>나 <암살론> 등은 류스페이나 허쩐 같은 중국 혁명가들과 신채호를 비롯한 조선 혁명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동아시아의 혁명가들에게 《장광설》은 혁명의 필연성과 방법을 알려준 책이었다.

정치도 학술도 기계도 자본도 생산도 오로지 왕후를 이롭게 하고 부자를 이롭게 하고 관리를 이롭게 하고 군인을 이롭게 할 뿐, 추호도 일반인들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현재의 국가 사회에 절망하는 다수가 생겨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추세가 아닐까.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무정부당뿐만 아니라 각 계급 인사들도 마찬가지로 인정했다. 이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노동 보호 주장도 일어났다. 만국 평화 논의도 제창되었다. 공산주의도 설파되었다. 사회주의 운동도 전개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앞길에 찬란한 희망을 크게 품고 지금의 병적인 현상을 고치고자 하는 것이다. 무정부당도 본래는 이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국가 사회의 타락과 죄악과 곤란한 생활이 날이 갈수록 격심해지는 것을 보고 그들은 결국 앞길의 희망을 포기했다. 그들은 완전히 절망한 자들이 되었다. 세상에 절망한 자만큼 용기 있는 자가 없고 대담한 자가 없으며 흉악하고 사나운 자가 없다. 설령 그들이 흉포함을 들고 공명심으로 나아갔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 흉포함에 기대지 않고는 공명을 얻을 방도가 없다고 생각할 만큼 절망했던 것이다. ― <무정부당 제조>163쪽에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사회주의 신수》
1903년 7월 5일에 출간된 《사회주의 신수(社會主義神髓)》(‘神髓’는 ‘본질’, ‘핵심’이라는 뜻)는 토지와 자본 등 생산수단의 사회적 공유와 관리, 부의 민주적 분배에 의한 평등 사회 실현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골자를 담고 있다. 출간 후 같은 해 11월까지 6판이 발행되면서 사회주의의 기본 서적이 되었고 1907년에는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에서 고토쿠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역사적?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산업 제도의 진화가 자본 집중을 불러와 빈부 격차가 심화된다고 지적하고, 소수 지배 계급이 부를 독점하는 현 상황을 타파하려면 생산수단의 사유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사회주의가 전 인류의 자유, 평등, 복지를 향상시킬 것이므로 사회주의가 곧 민주주의이자 평화주의라고 설득한다.

토지와 자본 등 모든 생산수단은 인류 전체를 생활하게끔 하는 근본 요건이다. 이것을 독점하고 점유하는 것은 곧바로 인류 전체의 생활을 좌우하고 삶과 죽음을 제압하는 것이다. 지주와 자본가들은 과연 무슨 덕이 있고, 무슨 권리가 있고, 무슨 필요가 있어서 이것을 독점하고 전유하고 증대시켜서 다수 인류의 평화와 진보와 행복을 짓밟는 것일까. 다름 아니다. 요행일 뿐이다. 교활함일 뿐이다. 탐욕일 뿐이다. …… 그들은 조금도 손발을 움직이지 않고 따뜻하게 포식하고 편안히 놀면서 다수 인류의 노동 결과를 약탈한다. 그리고 약탈한 부는 더욱 전화하여 자본이 되고 다시금 많은 부를 약탈하는 무기가 된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돌고 도는 동안에 부유한 소수는 더욱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다수는 더욱더 가난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프루동은 “재산은 강탈의 결과다. 자본가는 도적이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 <제2장 빈곤의 원인> 257쪽에서

사회주의는 지금의 국가 권력을 승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하여 군비와 전쟁을 배척하고 있다. 왜냐하면 군비와 전쟁이란, 지금의 ‘국가’가 자본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견성(堅城)과 철벽으로 삼고 있는 것이기에, 다수 인류는 이 때문에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 전쟁의 결과는 단지 소수 군인의 공명과 투기꾼의 이익뿐이다. 인류의 재앙과 죄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만약 세계 만국에 지주와 자본가 계급이 존재하지 않고 무역 시장의 경쟁이 없고 재부의 생산이 풍부하고 분배를 공평하게 할 수 있고 사람들이 각자 생활을 즐기게 되면, 누구를 위하여 군비를 확장하고 전쟁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비참한 재앙과 죄과들은 그로 인해 일소되고, 사해동포의 이상이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한편으로 민주주의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위대한 세계 평화주의를 의미한다. ― <제5장 사회주의의 효과> 293~294쪽에서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 동아시아 최초로 《공산당 선언》을 번역 소개하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11월, 고토쿠 슈스이는 동료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와 함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을 번역해 《평민신문》 제53호에 발표하고 이듬해 책으로 펴냈다. 이 번역본에서 고토쿠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자산계급, 무산계급이라는 용어로 최초로 번역했다고 한다. 고토쿠의 번역본이 출간된 뒤 일본에 머물던 중국인 혁명가들이 그 번역본의 영향으로 자신들이 펴내는 잡지에 《공산당 선언》 일부를 소개했다. 이후 중국에서 《공산당 선언》이 완역된 것은 1920년 4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 창당을 준비하던 천왕다오(陳望道)가 번역한 것이었고, 한국에서는 1921년에 여운형이 최초로 번역하였다.

금기가 된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는 누구인가?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로 처형당한 후 고토쿠 슈스이는 철저히 지워졌다. 공판 과정부터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재판 기록은 비밀에 부쳐졌으며, 처형 뒤에는 그가 묻힌 무덤은 쳐다보지도 말라는 당국의 지시가 내려졌다. 지금은 고토쿠가 사건의 주모자라는 당국의 주장이 날조된 것이었음이 밝혀졌지만,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 학계에서 금기시되는 이름이다. 일본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안인 ‘천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탄압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인민의 자유와 평등,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한치도 물러섬 없이 자신을 바친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가난한 집안의 신동, 민권 사상의 스승을 만나다
고토쿠 슈스이는 작은 체구에다 평생 병마에 시달린 병약한 천재였다. 그런 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의지를 지닌 혁명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언급했듯이 궁핍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독서 덕분이었다. 본명이 덴지로(傳次郞)인 고토쿠 슈스이는 1871년 9월 도사 번 고치 현에서 약재상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토쿠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집안이 어려워졌고 고토쿠는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고토쿠는 같은 도사 번 출신인 자유민권운동가 하야시 유조나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을 직접 만나면서 민권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870년대부터 들불처럼 일어난 자유민권운동은 메이지 전제 정권에 맞서 국회 개설과 자유 민권 등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민권 운동가들과의 만남은 중학교 중퇴 후 좌절에 빠진 고토쿠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다. 자유민권운동의 이론적 지도자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을 만나 사제 관계를 맺고 공부를 계속하게 된 것이다. 고토쿠는 1888년부터 5년 반 동안 나카에 조민의 집에서 기숙하면서 한학과 영어 공부에 매진했고, 나중에 기자가 되어 스승의 집을 떠난 뒤에도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1893년 고토쿠 슈스이는 나카에 조민의 추천으로 당시 자유당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자유신문》에 입사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기자로서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사회의 부정을 폭로함으로써 자신이 익힌 자유민권사상의 정신, 즉 자유, 정의, 평등, 박애의 정신을 추구하려 했으며, 이런 성향 때문에 1898년 진보적인 《만조보》에 들어가기까지 여러 신문사를 전전한다. 《장자》의 편명으로 유명한 ‘슈스이(秋水)’라는 호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이치를 따지는 비타협적인 제자에게 스승 나카에 조민이 젊은 시절 자신의 호를 물려준 것이었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고토쿠는 《만조보》에 입사할 무렵 사회주의 사상으로 눈을 돌린다. 청일전쟁 이후 급속히 불거진 심각한 빈부 격차와 노동 문제에 주목하면서 “소수의 욕망 때문에 다수의 복리를 빼앗는” 자본주의 제도를 사회주의 제도로 바꾸지 않는 한 이상 사회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마침내 1901년 4월 9일 《만조보》에 기고한 <나는 사회주의자다>라는 글을 통해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선언하고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01년 5월에는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 창립인으로 이름을 올린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은 치안경찰법으로 곧바로 활동을 금지당하고 만다.

노동 문제 해결에 힘쓰는 인사는 심사가 매우 진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열성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방법은 진정으로 도의에 맞고 학술에 맞고 문명 진보의 큰 법에 맞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수천 번의 논설도 억만 번의 운동도 완전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진지하고 열성적인 심사는 오로지 공고하고 일정한 이념과 이상, 신앙을 견지하고 변하지 않는 사람일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다. 도의에 맞고 학술에 맞고 문명 진보의 큰 법에 맞는 방법은 오로지 근대 사회주의라야 비로소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고자 한다, 사회주의가 아니라면 노동 문제의 최후의 해결은 성공할 수 없다고. ……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단언한다. 천하의 공중을 향해 공공연하고 당당하게 ‘나는 사회주의자다, 사회당이다’라고 선언하는 진지함과 열성과 용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직 노동 문제의 앞날을 맡기기에는 부족하다. ― <나는 사회주의자다> 468~469쪽에서

이때부터 고토쿠 슈스이는 반제국주의, 반애국주의, 반군사주의, 의회사회주의를 이념의 토대로 삼아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 등 여러 권의 책을 연달아 발간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03년 가을 《만조보》가 러일전쟁 개전론으로 신문의 논조를 바꾸자 동료인 사카이 도시히코와 함께 반전론을 주장하며 퇴사해 ‘평민사’를 결성하고 《평민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한다. 평민사는 사회주의와 평화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러시아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운동을 펼쳤다.

의회사회주의에서 아나키즘으로
그러던 중 반전 운동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1905년 1월 《평민신문》이 폐간되고 고토쿠 슈스이도 필화 사건으로 1905년 2월부터 5개월간 감옥에 수감된다. 고토쿠는 정부의 탄압을 경험하면서 일본과 같은 비민주적 국가에서는 의회 제도에 입각한 합법적 사회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방법으로 노동자의 총동맹 파업 등을 통한 직접행동론을 택한다. 이러한 변화에는 출옥 후 미국의 아나키스트 앨버트 존슨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1906년 6월에 귀국하기까지 러시아 혁명가들과 미국의 아나키스트들과 폭넓게 교류한 것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훗날 고토쿠는 자신이 아나키즘적 직접행동론을 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솔직히 고백한다. 사회주의 운동의 수단 방침에 관한 나의 의견은 재작년 투옥 당시부터 약간 변했고, 더욱이 작년 여행에서 크게 변하여 지금 몇 년 전을 돌아보면 나 자신도 완전히 딴사람이 된 느낌이 든다. ……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적당한 기관이 없었던 것과 병으로 집필이 어려웠기 때문에 모든 동지 여러분을 향해 대체적인 취지를 분명히 밝힐 수 없었다. 이제 기회가 왔다. 오래 침묵하는 것은 이념을 위하여 결코 충실한 것이 아니다. 그런 탓에 나는 솔직히 고백한다. “보통선거나 의회 정책으로는 도저히 진정한 사회적 혁명을 성취할 수 없다. 사회주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단결된 노동자가 직접행동(direct action)에 나서는 길밖에 없다.” 나의 현재 사상은 이와 같다. ― <내 사상의 변화> 400~401쪽에서

미국 체류 기간 동안 고토쿠는 재미 일본인 혁명가들과 함께 ‘사회혁명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사회혁명당 선언>에서 자본주의와 계급 철폐, 세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국제 연대를 통한 사회적 대혁명을 실행할 것을 강령으로 채택한다.

한 사람이 무위도식하기 위하여 백만의 민중이 항상 빈곤과 기아로 울부짖을 때 노동은 과연 무엇이 신성한가. 한 사람이 사사로운 욕심과 복을 마음껏 누리기 위하여 백만의 민중이 완전히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할 때 인생은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한 사람이 야심과 허영심을 채우기 위하여 백만의 민중이 항상 전쟁 침략의 희생이 될 때 국가는 과연 무엇이 존엄한가. 그렇다. 이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닌가. 비참한 인생이 아닌가. 참혹한 국가가 아닌가. 그리고 참으로 의롭지 못하고 부정한 사회가 아닌가. …… 현재의 불공평하고 부정한 사회를 개혁하여 선미한 자유, 행복, 평화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우리들의 조상과 동포와 자손에 대한 책임이자 의무다. 그리고 또한 우리들의 권리다. 우리들이 사회혁명당을 조직하는 것은 오로지 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이 권리를 행하기 위함일 뿐이다. 동지들이여, 주저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오라. ― <사회혁명당 선언> 391쪽에서

“조선 인민의 자유, 독립, 자치를 보장하라”
1906~1907년부터 좀 더 급진적인 아나키즘 운동으로 선회한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과 중국 등의 혁명가들에게 아나키즘을 강의하고 여러 글을 통해서 자신의 아나키즘 신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또 이 무렵부터 고토쿠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더욱 강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조선 인민의 자유, 독립, 자치를 보장하라”는 내용을 담은 선언서를 《오사카 평민신문》에 공개적으로 발표하기까지 한다(1907년 7월 21일자). 1907년은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내정 간섭을 본격화하는 등 강제 병합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였다. 누구도 한반도 문제를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토쿠의 글은 거의 유일한 반대 목소리였다.

정치가는 말하기를 우리들은 조선 독립을 위하여 예전에 청일전쟁을 감행했고, 또 러일전쟁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정치상으로 조선 구제를 실행한다고 거만하게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정치적 구제라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는 이유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들이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청일전쟁으로 중국 정부의 권력을 조선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 러일전쟁은 러시아 정부의 권력을 재차 조선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의 정치가는 이를 가리켜 정의의 전쟁이라고 한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태도가 과연 그들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정의인지 아닌지 이것은 제삼자의 비판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한번 조선 국민의 입장에서 관찰해보라. 이것은 우선 일본, 중국, 러시아 각국의 권력적 야심이 조선 반도라는 공허를 찌른 경쟁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 조선인의 눈으로 보면,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은 침략자라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 <경애하는 조선> 447~448쪽에서

한편, 고토쿠는 1909년 10월 26일에 일어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듣고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를 만들고 그의 의거를 기리는 한시를 지어 직접 엽서에 써넣었다. 처음에는 일본 국내에서 만들었으나 일본 정부가 발매를 금지하자 다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제작해 일본으로 들여왔다.
현재 전하는 안중근 초상 엽서는 고토쿠 슈스이가 대역 사건으로 체포될 당시 그의 품에서 발견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사건의 증거와 재판 과정 등 대역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면서 이 엽서 역시 은폐했다. 그 뒤로 오래도록 실물이 발견되지 않다가 1960년대 말에 메이지학원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본문 465쪽)

‘사회주의자 소탕’을 위해 조작된 ‘대역 사건’
1910년 6월 고토쿠 슈스이는 대역 사건의 주모자라는 혐의로 검거된다. 대역 사건이란, 1910년 5월 고토쿠 슈스이의 연인 간노 스가를 비롯한 몇 명의 사회주의자들이 폭탄을 이용한 천황 암살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된 사건이었다. 실행되지도 않았던 이 계획은 사회주의 탄압의 빌미가 되어 부풀려졌고 곧바로 고토쿠를 비롯해 수백 명의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가 검거되었다. 1910년 연말부터 불과 40일간 심리가 진행되었는데 재판부는 24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가 그중 12명은 종신형으로 감형하고 고토쿠 슈스이와 간노 스가 등 12명은 판결 일 주일 만에 전격적으로 처형했다. 고토쿠가 유죄라는 증거는 없었다.
고토쿠 슈스이는 사형 직전까지 감옥 안에서 의연하고 담담한 태도로 글을 썼다. 이 책에 실린 <진술서>와 <사생>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사형당하기 위해 지금 도쿄 감옥의 일실(一室)에 구금되어 있다. 아아, 사형! 세상 사람들에게 이만큼 꺼림칙하고 두려운 말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신문에서 보고 책으로 읽었어도 설마 자기가 이런 꺼림칙한 말과 눈앞에서 직접적으로 맞닥뜨릴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정말로 사형에 처해지려 하고 있다. 평소에 나를 사랑해주었던 사람들, 나를 아껴주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위를 의심하며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리고 진실을 확인했을 때 얼마나 한심하고 딱하고 슬프고 부끄러워했을까. 그중에서도 늙은 어머니는 얼마나 절망의 칼에 가슴을 찔렸을까. 그렇지만 지금의 나에게 사형은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어떻게 이러한 중죄를 저질렀는가. 공판조차 방청이 금지된 오늘날에는 본래 충분히 이런 말을 할 자유는 없다. 백 년 후에 누군가 어쩌면 나 대신 말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사형 그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다. …… 지금의 나에게 수치스럽고 꺼려지고 두려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형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악인이자 죄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내 스스로 논할 문제는 아니고, 또한 논할 자유도 없다. 다만 사형 자체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 <사생(死生)> 532, 548쪽에서

오늘날 ‘대역 사건’은 당시 일본 정부가 조작한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일제가 조선 병합에 마지막으로 박차를 가하던 때였다. (6월에 고토쿠가 체포되고 8월에 조선 병합이 공식 선언된다.) 당시 고토쿠 슈스이와 가타야마 센 등 사회주의자들이 조선 병탄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로서는 ‘대역 사건’이라는 강경 사회주의자 소탕 작전을 벌여 골치 아픈 정적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일본 정부의 노림수는 적중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인들에게 사회주의, 아나키즘은 극악하고 위험한 사상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각인되었고,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일시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천황(제)에 대한 언급 자체를 극도로 자제하게 만드는 자기 검열의 족쇄가 이 사건이 일본 사회에 준 충격의 본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역 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민족과 국경을 뛰어넘는 민중의 연대를 꿈꾸다

왜 지금 우리가 고토쿠 슈스이를 알아야 할까? 고토쿠의 《장광설》을 읽고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진 신채호 등에게 끼친 영향이라든가, 그 당시 일본에서 보기 드물었던 고토쿠의 안중근에 대한 긍정적 태도 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투쟁에 대한 의미 부여보다, ‘지금 여기’에서 고토쿠 슈스이가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토쿠 슈스이가 아시아에서 최초로 인종과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는 민중 연대의 길을 제시한 선구자였다는 점이다.

고토쿠 슈스이는 무산계급이야말로 국경과 민족과 인종을 넘는 연대를 통한 세계 평화 실현의 주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평화의 비전이 담긴 고토쿠의 사회주의 이론은 애국심과 우승열패를 강조하며 영토 확장을 꿈꾸던 제국주의에 맞서는 일본 사회의 거의 유일한 저항의 구심점이 되었다. 실제로 러일전쟁 당시 고토쿠는 반전 운동을 벌이면서 적국인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하는 놀라운 성과를 이끌어냈다.
고토쿠 슈스이는 《평민신문》을 통해 개전 초기인 1904년 3월 13일에 러시아사회민주당에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일본과 러시아의 민중이 연대하여 전쟁에 반대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목소리는 독백이 아닌 대화의 시작이었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외국 사회주의 언론에 공개한 답변을 《평민신문》이 1904년 7월 24일자에 다시 실은 것이다. 일본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공동의 계급적인 반전 전선을 구축한 이 일은 일본이나 러시아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동지들이여! 지금 러일 양국 정부는 각자 제국적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함부로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의 눈에는 인종의 구별도 없고, 지역의 구별도 없고, 국적의 구별도 없다. 그대들과 우리는 동지다. 형제다. 자매다. 결코 싸울 만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들의 적은 일본인이 아니다. 지금의 이른바 애국주의다. 군국주의다. 우리들의 적은 러시아인이 아니다. 지금의 이른바 애국주의다. 군국주의다. 그렇다. 애국주의와 군국주의는 그대들과 우리들의 공통의 적이다. 세계 만국 사회주의자의 공통의 적이다. …… 우리들은 양국 정부의 승패 여부를 예지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귀결되든, 전쟁 결과는 반드시 인민의 곤궁이다. 과중한 세금 부담이다. 도덕의 퇴폐다. 그리고 제국주의와 애국주의의 발호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우리들은 결코 어느 쪽이 이기든 지든 상관이 없다. 요점은 전쟁의 신속한 정지에 있다. 평화의 빠른 회복에 있다. 그대들과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전쟁에 항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러시아사회당에 보내는 글> 337~339쪽에서

또한 1907년에 고토쿠 슈스이가 여러 동지와 함께 참여한 ‘아주화친회’는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반제국주의, 반침략 운동의 연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고토쿠와 재일 중국 혁명가들의 직접적 교류가 시작된 것은, 그가 사상적으로 무정부주의로 전향하고 미국에서 귀국한 후부터였다. 귀국 후 고토쿠는 일본 정부의 중국, 조선 침략을 비판하면서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과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중국 혁명가들 중에서도 중국동맹회 출신의 장지, 류스페이, 허쩐 등은 고토쿠와 교류하면서 그의 아나키즘 사상을 받아들였다. 고토쿠도 그들이 1907년 여름에 조직한 ‘사회주의강습회’ 제1차 모임에 참석하여 무정부주의에 대해 연설하는 등 교류를 하며 국가, 정부, 자본가 등의 권력 계급에 맞선 아시아 민중의 계급적 연대라는 혁명적 전망을 제시하였다. 그의 바람대로 비슷한 시기에 중국동맹회의 장타이옌을 중심으로 인도, 필리핀, 일본 등 아시아 혁명가들이 결집하여 ‘아주화친회’를 결성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고토쿠 슈스이가 제국주의에 맞서 민중 연대를 꿈꾸고 그 꿈을 부분적으로나마 실현했던 일은 21세기 제국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어느 나라에나 거리로 내몰린 수많은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수년간의 자료찾기와 번역이라는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책.
nautes 2011-08-27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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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페이퍼

‘마주 보는 한일사 3‘에서 다시 만난 고토쿠 슈스이


7월 15일 화요일

눅눅



종일 빈둥대다가 오후 4시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갔다. 구매희망도서 신청한 ‘야만’ 관련 도서 다섯 권이 들어왔다. 세 권 빌렸다. 한 시간 외출에 금방 몸이 찐득찐득하다. 저녁에 감자, 당근, 표고버섯, 새우, 돼지고기를 넣은 매운 카레를 먹었다. 땀을 쭉 빼니까 김이설 소설 《나쁜 피》에 나오는 말이 기억난다. “매운 걸 먹으면 힘이 나”



지난주 건형씨가 준 《마주 보는 한일사 3》을 폈다. 고토쿠 슈스이 얘기가 짧게 나온다. 고토쿠 슈스이 이름을 처음 알게 된 《일본은 왜 평화헌법을 폐기하려 하는가》를 읽었을 때 강렬한 인상이 생각난다. 일본 사회주의 운동을 연 장본인 고토쿠 슈스이는 숙연하고 뜨거운 이름이 되었다. 그 책에 따르면 슈스이는 언론인 출신으로 사회혁명당을 결성하여 노동자 총파업 같은 직접행동주의를 실천하며 10여년 만에 일본 전역으로 사회주의를 전파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칭송하고 천황암살 모의 죄목으로 마흔 살에 비밀처형 당한 이력만 보면 슈스이는 한국인에게 어필되기 좋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일기를 쓰다말고 급기야 서평공책을 뒤적였다. 세 권을 들췄지만 찾을 수 없다. 어떻게 된 건지 《일본은 왜 평화헌법을 폐기하려 하는가》 기록이 안 보인다. 분명 꼼꼼하게 써 뒀다고 기억하는데. 책장을 훑었으나 책도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 안 보인다. 《나는 사회주의자다》,《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만화《일본인과 천황》만 따로 있다. 한 자리에 모아둔 책들인데, 혹시 강정에 보낸 꾸러미에 넣은 것일까 곰곰 따져봤자 신열만 더 난다. 그럴 리가 없어서 책장 깊이 박힌 책까지 들어내다가 팔이 아파 관뒀다. 일기 따위에 참조하려고 삼경에 뭐하는 짓인가 싶다.



하여간 《나는 사회주의자다》가 슈스이 완결판이다. 슈스이가 직접 쓴 칼럼과 격문을 엮은 이 책을 읽고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을 공부했다. 슈스이는 지유신문 기자를 하다가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한 뒤 사카이 도시히코와 함께 헤이민샤(平民社)를 창립했다. 《마주 보는 한일사 3》에 밝힌 것처럼 슈스이가 헤이민샤를 세운 이유는 러일전쟁 찬성을 부추기는 언론의 부화뇌동 때문이다. 당시 몸담고 있던 ‘요로즈초호’ 신문사는 전쟁불사론을 외치는 조중동 사촌이라도 되는 것 마냥 연일 개전론을 선동했다.



헤이민샤는 일본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양분을 공급한 뿌리 같은 곳이다. 1903년 11월 창립하여 1905년 1월에 강제 폐간되기 전까지 수많은 반전, 반제국주의 칼럼을 발표하고 사회주의 운동에 싹을 틔웠다. 자유연애와 성평등까지 주창한 오스키 사카에 같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헤이민 신문을 읽으며 ‘사상의 축대’를 쌓았다. 엄혹한 압정의 시대에 이런 사상에 의식을 눈 떴다는 사실과 그런 고난을 자처하고 실행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오늘날 일본의 정세가 민주공화정이 아닌 ‘신민’을 만드는 독재체제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안타깝다. 일본에서 반제국주의 저항이 계승되지 못한 이유를 두고 누군가는 “동전 세기 좋아하는 일본사람”이라고 조롱한다. 한국은 어떤가. 입 안이 쓰다.

《나는 사회주의자다》에는 안중근 의사 의거 소식을 듣고 쓴 슈스이 시가 실렸다.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몸을 죽이고 인을 이루었네/안중근이여, 그대의 일거에/천지가 모두 전율했소” 

그러나 내 가슴을 흔든 건 애국을 경계하는 슈스이의 무정부주의자 같은 모습이다. 애국심은 자기나라 땅에 한정되고 자기나라 사람에 한정되므로 다른 나라나 타인을 사랑하지 않고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 역시 애국심과 닮았으므로 경멸한다고 말했다. 타인을 사랑하고 아끼는 고결한 마음은 자기와의 거리(물리적, 심리적)로 정해지지 않는다고 냉정하고 냉철한 태도를 보였다. 한국에서는 국가와 이념을 막론하고 존엄과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매국노, 빨갱이 소리 듣기 쉽다.

1901년에 발표한 칼럼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는 지금 읽어봐도 한 세기 지난 글이라고 보기 어렵다. 역사는 반복되는 게 아니라 지리멸렬 변하지 않음을 확인할 뿐이다. “제국주의는 국민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켜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 국민에게 과중하게 조세를 부담시키며 국민의 생활을 궁핍하게 한다. 또한 군사력으로 타국을 지배하는 나라가 일시적으로는 번영하지만 끝내는 멸망한다.” 자위대 파견법을 관철시킨 아베 정부의 진짜 목표는 평화헌법 9조 개헌일 것이다. 이 혼세(混世)에서 한국은 교학사 교과서에 미련을 거두지 못해 신용불량 인사를 단행한다. 시나리오 작가도 아니면서 몇몇 입맛에 맞게 역사 각색하는 말종 정국이다. 단군 이래 최대 사기꾼인 이명박 때 폐지한 근·현대사 수업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에 《마주 보는 한일사 3》을 펼치자니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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