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만나는 <평양성사람들>[북한예술로 읽다] 북한 무용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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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에서 무용은 일상이다. 우리의 공동체 전통이 그러하듯 모이면 어느 곳에서나 춤이 한자리를 차지한다. 일터의 회식장소에서도, 동네잔치에서도, 결혼식 피로연에서도, 심지어 기념일에도 광장에서의 군무는 흔하게 보는 광경이다.
지도자의 생일이나 국경일 등에 평양 시내뿐만 아니라 기관들과 사업장 등에서 무도회를 개최하는데, 이때 추는 군무를 특별히 ‘군중무용’이라 부르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애민(愛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2014년에는 민요에 테크노나 디스코 리듬을 가미한 춤곡 '인민이 사랑하는 우리 령도자', '황금산 타령', '흘라리' 등을 전국적으로 보급하기도 하였다. "흥겹고 낭만적인 군중무용들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낭만을 안겨주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 군중무용의 현장은 젊은 남녀의 공개적인 교제의 장이 되고 있다.
집단주의를 키우려는 의도가 있는 군중무용뿐만 아니라 예술무용도 마찬가지다. 우리 춤의 기본이 ‘춤을 바로 세운다’는 입춤(立舞)이고 이것을 즉흥무나 허튼춤 등 광의의 정의로 본다면, 최승희의 “조선민족무용기본동작”이 근간이 된 조선무용 역시 이와 다르지가 않아, 자연스럽게 흥겨운 자리에서는 흥에 취해 춤이 나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가락과 장단을 배워온 인민들에게 춤가락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대중화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는 “통속성”의 원칙을 관철한 ‘조선춤’은 굳이 남측의 장르화에 따른다면 신무용 계열로 봐야겠지만, 주체예술의 범주 안에서 민족무용의 현대화를 추구한 북측의 문예 방침에 따라 북측만의 조선무용으로 계승 발전하였다.
재일조선인 무용수 김유열은 “조선민족무용은 독특한 팔의 움직임과 발동작을 민족음악(장단)에 맞추어 상체는 우아하고 부드럽게, 하체는 단단히 무릎을 부드럽게 굴신을 줄 수 있도록 상체를 끊임없이 끌어 올리면서 사람들의 사상 감정을 예술적으로 형상하는 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춤을 세련시키고 아름답게 추고 무대예술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 몸가짐과 자세를 바로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기초 훈련 속에서 발레 기초를 단단히 거쳐 하체를 든든히 하고 상체를 부드럽고 우아하게 온몸에 반작용의 힘을 느끼면서 추어야 합니다.” 고 조선무용을 설명하고 있다.
북측 예술의 대표적인 성과이자 남측과 비교해 우월하다고 자평하고 있는 조선무용의 최고의 교육기관은 1949년 3월1일에 설립된 현재의 평양무용대학으로, 당시에는 국립음악학교로 시작을 하였다. 1956년 8월 종합예술학교 무용과와 국립무용연구소를 통합하여 평양무용학교를 창설하였고, 이후 평양예술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72년 2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평양음악대학과 평양예술대학을 통합해 평양음악무용대학으로 발전하였다. 2006년 평양음악무용학원이 분리가 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평양무용대학은 2010년 11월 대지 면적 2만평 가까운 부지에 7개동을 리모델링하고, 5개 동을 신축하면서 현대화되었다. 운동장을 중심으로 460여 석의 객석을 가진 무용 전문극장과 강좌실, 전공실기훈련실, 남녀종합훈련실, 의상제작실 등을 갖춘 4개의 교사, 기숙사, 체육실, 교직원청사 등을 갖추었다. 학교에는 최초의 발레극장도 들어섰다. 기존의 평양음악무용대학이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으로 분리 이전하면서, 종래의 음악당 건물을 허물고 조선식건축양식으로 신축한 것이다. 조선무용학부, 발레무용학부, 창작학부 외 조선무용연구소 가 있으며, 대학 설립을 계기로 발레무용단과 관현악단, 박사원도 발족시켰다.
학제는 조선무용학부와 발레무용학부가 2년제, 무용창작학부의 안무학과, 무용표기학과는 3년제, 무용리론학과는 5년제로 했으며, 대학에는 6년제의 중학반을 병설하였다.
대학은 정규 과정 외에 ‘재교육’과 ‘통신교육’을 운영한다. 재교육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전문가를 위한 교과과정이며, 강좌는 조선무용, 발레무용, 안무, 무용표기, 반주(음악), 일반(무용이론, 조선무용사, 교양과목 등)으로 구성된다. 통신교육은 정규 과정을 수강할 수 없는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학기동안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고 시험을 통해 수료하는 제도이다.
발레극장의 건립과 발레공연의 부활은 김정일 위원장의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졌다. 2001년 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고전발레 ‘라 실피드 <La sylphide>’를 관람한 김 위원장의 구상이 러시아 발레학교의 평양 설립 기획으로 이어지면서 구체화되었다.
“민족무용은 세계적으로 우수한 다른 민족(나라)의 무용을 수용한다. 대표적인 것이 발레인데, 발레는 독특한 기교체계로 오랜 역사를 거쳐 전문가들에 의해 일반화되고 그 과정에서 대중들에게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인민의 미감에 맞는 우리식으로 발전시켜 민족무용을 보다 다양하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무용예술론’에서의 지적처럼, 평양음악무용대학교에서는 87년부터 9년 과정의 발레 강좌를 개설해 발레리나를 양성하고 있었지만 조선무용이 주류인 무용계에서는 변방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체적 조건이 강조되고, 특히 ‘몸을 깍기’(다이어트)위해 음식조절 등을 하여 연마를 하여도 큰 무대가 거의 없는 현실에서 전문 발레리나의 수는 많지 않았고, 무대 역시 발표모임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3년 5월 30일부터 6월 7일까지 평양대극장에서 피바다가극단이 장장 38년 만에 정식 발레공연을 피로하면서, 발레는 북측 무용의 한 부문으로서 다시금 전면에 서게 되었다. 러시아 발레와 유럽 발레를 학습하지만, “내용과 형상 창조에서는 우리 인민의 사상 감정과 정서에 맞게 한 우리식 발레”의 성과를 모아 발표한 것이다. 전통적인 발레복이 아니라 저고리를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고 `풍년 씨앗 뿌려 가세`와 `조국을 위하여`, `영웅의 동상에 꽃다발 드렸네` 등을 무대에 올렸다.
그러면 북측 무용계의 실세는 과연 누구일까? 단연 홍정화 조선무용가동맹위원장일 것이다. 지난 시기 조선작가동맹 기관지인 문학신문에서는 ‘선군시대를 빛내는 여성’ 5인을 선정한 바 있다. 인민배우 김정화, 대본작가 오혜영, 인민배우(성악) 조혜경, 소설가 한정아와 무용가 홍정화가 이들이다. 그리고 현 정권에서는 모란봉악단의 현송월 단장과 무용계 정점에 위치한 홍정화일 것이다.
보천보전자악단 시절 북측 최고의 애창곡 중에 하나인 <준마처녀>를 불러 유명한 현송월은 얼마 전 북경 공연에서 대표적인 송가인 <단숨에>와, 특히 미사일을 배경으로 하는 무대(영상)를 연목에서 제외해 달라는 중국 측의 요청이 있자 공연 3시간 전 전격적으로 철수를 결의해 실세로서의 면목을 보인 바 있다. 홍정화는 3대에 걸쳐 최고 권력자의 사랑을 받으며, ‘천리마 시대에서 만리마 시대’를 관통하는 주체무용의 최일선에서 활동해 왔다.
홍정화가 북측에 널리 알려진 것은 제7차 세계청년학생축전(1957년)에 참가해 작품 <환희>와 <목동과 처녀>로 금메달을 수상하고부터였다. 1939년 평북 정주의 철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국립무용학교 출신으로 15세에 무용계에 입문한 그녀는, 큰 동작과 활발하고 속도감 있으며 박력있는 춤으로 주목을 받았다. 최승희 실각 후 한 때 무대에서 퇴출된 적도 있었지만 당시 김정일 총비서의 지시로 현역에 복귀해, 만수대예술단(1971년), 국립민족예술단(1972년) 배우를 거쳐 현재까지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1999년 8월19일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환갑상을 보내기도 했다.
오랜 기간 조선인민군협주단(1976년) 안무가로 활동하면서 선군 시대의 선봉으로서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3차례의 개인 발표회를 가졌다. 2009년 6월 22일 평양연극극장에서는 70살을 기념한 네 번째 개인발표회가 열렸다. 이 공연과 관련해 조선중앙통신은 "홍정화는 50여 년간의 예술창조 과정에 주체적 문예사상과 이론을 구현한 100여 편의 무용작품들을 창작했으며 공연활동을 적극 벌여 인민군대와 인민을 조국보위와 사회주의 건설로 불러일으키고 나라의 무용예술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70년에는 공훈배우, 82년에는 인민배우 칭호를, 2001년에는 김일성상을 받았다.
무용배우 시절에는 독무 `환희' `북춤' `장고춤' 등 민족적 색채가 뚜렷한 작품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안무가로서는 '나의 초소', '사관장과 전사들', '전차병과 처녀', 경애하는 그이 품에 안긴 이 행복' `우리는 조국의 수호자, 행복의 창조자' 등으로 유명세를 이어갔다.
한편 북측에는 16세기 우리나라 최초의 무보인 ‘시용무보(時用舞譜)’ 이후 최고의 성과이자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다는 무용기록인 ‘자모식무용표기법’이 있다. 여기에 얽힌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있다.
1970년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우스개 소리가 세간에 퍼질 만큼 인기가 있었던 국내 최초의 댄스 가수인 김추자가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그녀의 현란하고 역동적인 춤동작이 북측과의 교신을 위한 암(부)호라는 이유에서였다. ‘추자의 춤에 부처님도 벌떡 일어난다’는 말이 나돌 만큼 당대의 섹시 아이콘이었던 김추자가 중앙정보부의 술자리 호출을 거부하는 등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고, 마침 북측이 무용을 부호화하는 시점이라 그녀에게 간첩 혐의가 씌워진 것이었다. 무지와 레드콤플렉스가 맞물려 벌어진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었다.
자모식무용표기법은 현재 ‘쓰기와 읽기’가 정규 교과목에 편성이 되어 있으며, 무용 지도(교)원이 제시한 무보를 짧은 시간동안 암보 후에 장구 반주에 맞추어 바로 시연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할 만큼 필수 과정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디지털화도 실현되었다.
끝으로 통일시대에 앞서 어떤 무용작품의 교류가 선행될까? 가깝게는 혁명가극 보다는 <춘향전> 등 민족가극일 것이다. 그것이 규모가 크다면 보다 작은 민속무용조곡 <평양성사람들>이 우선할 것이다. 2000년 6월 13일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이 만수대예술극장에서 관람한 작품으로, 외세와 싸우는 내용이라 이념적 부담도 없다. 남성과 여성의 군무는 북측 무용 특유의 역동성과 앙상블을 잘 보여주고 있고, 특히 승전 후 승리의 기쁨을 표현한 혼성군무인 “승전의 기쁨”은 이 작품의 백미로 꼽힌다.
북측 무용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용소품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데, 당장의 공통분모로는 최승희와 민속무용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역시 ‘사상정서적’으로 창작된 대표작품들이 이념성을 뛰어넘어 우선적으로 선보여할 것이다. 아직 국내에서 정식 초연된 바 없는 4대 명작 중에 <눈이 내린다>와 <조국의 진달래>, 그리고 독무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와 <일편단심 붉은 마음 간직합니다>, 군무 <강선의 노래>와 <단심줄>이 대표적이다.
민속적 색채가 뚜렷하고 ‘예민’한 주제(가사)가 없는 작품만을 편식적으로 소개하는 불완전한 교류를 극복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보다 다양한 무용작품들을 국내에서 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군중무용 <흘라리춤>
군중무용 행사인 경축무도회
무용 <조국의 진달래>
민속무용조곡 <평양성사람들> 공연 소개
왕재산경음악단 타프춤 <우리 손품금수 왔네>
* 무용표기부호
현장언론 민플러스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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