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說
開化期日記 解說1
國史編纂委員會가 6卷으로 刊行해온 「尹致昊日記」(Yun Chi-Ho's Diary)는 우리나라 開化期의 先覺者이며 政治家·敎育者였던 佐翁 尹致昊가 쓴 日記로서 그의 令息 尹永善氏(서울特別市 鍾路區 堅志洞)가 所藏하고 있는 尹致昊의 手筆原本을 整理하여 펴 낸 것이다.
尹致昊는 그 나이 18歲가 되는 1883年(高宗 20年)부터 시작하여 간혹 중단한 기간도 없지 않으나 1940年初에 이르기까지 약 60年間에 걸쳐 계속 日記를 썼다.
그의 日記 中 1883年 1月 1日부터 1月 16日(陰曆 1882年 壬午 11月 22日~同年 12月 8日)까지는 壬午日記라 하여 開闢 新刊 第1號(1934年)에 실려 있고, 1883年 10月 19日부터 1906年 7月 3日까지는 令息 尹永善氏가 所藏하고 있으며, 그 뒷부분은 美國 「캘리포니아」주에 살고 있는 令息 尹珽善氏가 所藏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本 委員會 刊行의 「尹致昊日記」는 1883年 1月 1日부터 1906年 7月 3日까지 약 23年 6個月間에 걸친 壬午日記와 尹永善氏 所藏의 手筆原本을 6卷에 나누어 收錄한 것이다.
「尹致昊日記」의 原本은 大學노트와 手帖類 등 모두 30餘卷에 記載되어 있으며, 1883年 1月 1日부터 1887年 11月 24日까지는 漢文, 1887年 11月 25日부터 1889年 12月 7日까지는 國文, 1889年 12月 7日 이후는 英文으로 기록되어 있다. 國文日記와 漢文日記는 날짜를 陰曆으로 表記하고 그 밑에 陽曆을 附記했으며, 英文日記는 날짜를 陽曆으로 表記하고 그 밑에 陰曆을 附記했는데, 같은 時代를 記錄한 他 日記들과 비교하여 日氣와 曜日을 明記한 것과 事實을 정확하고 소상하게 記錄한 점이 特徴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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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致昊의 號는 佐翁이며 本貫은 海平으로, 哲宗代에 武科에 及第하고 開化黨의 한 사람으로 警務使 軍部大臣 등을 역임한 아버지 尹雄烈과 어머니 全州 李氏의 長男으로 1865年(高宗 2年) 12月 26日 出生하였다. 어려서부터 聰明하고 지혜로웠던 그는 開化運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尹致昊는 1881年 正月 17歲의 어린 나이로 日本의 新文物制度를 視察하기 위하여 派遣되었던 紳士遊覽團의 一員인 魚允中의 隨員으로 渡日하였다. 그는 見學을 마친 뒤 東京의 同人舍에 入學하여 日本語와 英語를 배웠다. 그 후 美國公使 「푸우트」(Foote)의 通譯으로 귀국하여 公使館 通譯을 담당하면서 高宗과 閔妃에게 政治 外交를 諮問하였다. 이때 그는 劉大致 · 金玉均 · 朴泳孝 · 徐光範 · 洪英植 등과도 긴밀히 접촉하면서 開化黨과 美國公使館과의 연락도 맡았었다. 한편 1884年에는 甲申政變을 직접 경험한 뒤, 中國 上海로 留學하여 中西書院에서 5年間 修學하였다.
尹致昊는 다시 美國으로 건너가 1888年 11月에는 「밴더빌트」(Vanderbilt)大學에서 神學을 공부하다가 1891年 7月부터는 「에모리」(Emory)大學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美國 留學中에는 徐光範 · 徐載弼 등과도 往來하고 있었다. 그는 甲午更張 이후 內閣參書官을 거쳐 外部協辦 學部協辦 등의 要職을 歷任하였으며 1896年에는 러시아皇帝 「니콜라이」2世의 戴冠式에 閔泳煥特使의 수행원으로 參席하기도 했다.
歸國後 尹致昊는 1897年 後半부터 獨立協會에 적극 가담하여 徐載弼·李商在·李承晩 등과 더불어 獨立協會 運動을 이끌어 나갔다. 즉 그는 獨立協會 第2代 會長과 獨立新聞社 社長 그리고 萬民共同會 會長을 역임하면서 獨立協會를 중심으로 한 自主國權運動과 自由民權運動 그리고 國民參政運動 등 우리나라의 自主的 近代化運動을 主導하였다.
獨立協會運動이 실패한 뒤 그는 5年間 元山監理와 같은 地方官을 거쳐 外部協辦을 지냈으며, 張志淵 · 允孝定 등과 大韓自强會를 組織, 會長이 되어 敎育事業과 國力 배양에 힘을 기울였다. 즉 1908年 開城에 韓英書院을 設立 校長으로 있으면서, 또 平壤의 大成學校 校長을 겸임하여 교육에 전념하였다. 1910年에는 大韓基督敎靑年會를 創設하는 등 이후 敎育事業을 계속 하다가 1945年 12月 6日 82歲를 一期로 別世하였다.
尹致昊는 우리나라가 西洋諸國에 門戶를 開放하기 시작한 1880年代初 이후 長期間에 걸친 海外留學과 旅行을 通하여 歐美近代社會를 익히고, 外勢의 浸透와 內政의 㪰亂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當代의 現實에서 國權의 自主와 民權의 伸張을 통하여 民族의 自强을 꾀하려 몸부림친 近代化의 선각자이며 추진자였다.
韓末의 政治權力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살아간 그는 넓은 識見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理想과 現實의 갈등 속에서 그 調和를 추구하려 했다. 그가 지닌 苦惱는 바로 韓末 知性의 고뇌였고 韓國近代化의 陣痛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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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致昊日記」는 앞에서 言及한 바와 같이 佐翁 尹致昊가 18歲 되는 1883年 1月 1日부터 1906年 7月 3日까지 約 23年 6個月間에 걸쳐 記錄한 日記이다.
이 기간에 있어서 尹致昊의 滯留地와 그의 活動事項을 中心으로 다음과 같이 時期를 區分하여, 이 日記의 全般에 흐르는 그의 關心事와 이 日記內容의 전모를 집약적으로 파악하여 보고자 한다.
첫째 日本留學期 : 그의 日本留學은 1881年 正月부터 1883年 5月까지로 東京의 同人舍에서 修學하면서 日本語와 英語 등 外國語 學習에 열중하였으며, 明治維新 이후 日本의 發展相과 近代化過程 및 變化하는 國際情勢를 묘사하였다.
둘째 國內滯留期 : 1883年 5月부터 1884年 甲申政變 후까지로 駐韓美國公使館을 中心으로 韓國政府와의 관계 및 外國公館과의 관계를 많이 記錄하였고, 開化黨과 甲申政變에 대하여도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셋째 中國留學期 : 1884年 末부터 1888年까지의 사이로 上海 中西書院에서 修學하면서 中國人과 中國의 不良한 환경을 批判하고 在上海韓國人의 動靜을 記錄하였다.
넷째 美國留學期 : 1888年 11月부터 1893年 10月까지의 5個年間으로 美國의 「밴더빌트」大學과 「에모리」大學에서 神學공부를 하면서 大學生活과 敎會生活을 통하여 基督敎人의 정신자세 등을 論하고, 美國社會의 人種差別을 비판하면서 中國과 韓國의 비참한 現實을 悲觀的으로 기록하였다.
다섯째 中國滯留期 : 1893年 11月부터 1894年 12月까지의 1年間으로 馬婦人과의 結婚過程, 金玉均의 暗殺前後狀況, 淸日戰爭의 經過 및 韓·中·日의 경제관계를 記錄하고 있다.
여섯째 國內活動期 : 1895年 이후를 이 기간으로 설정할 수 있는데 이 기간은 官僚로 奉職한 동안과 民權運動을 主導한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前者를 보면 學部協辦 元山監理 外部協辦 등을 역임하면서 地方官吏의 부패상, 보부상의 행패, 民衆의 動態 등 地方實情을 면밀히 分析하고 있으며 日本人의 經濟浸透에 대하여도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乙未事變, 俄館播遷의 전후사정을 상세히 記錄하고 있으며, 러시아皇帝 戴冠式 參席, 그 往復 旅行 記錄도 자세하다. 또한 露日戰爭의 經過와 乙未條約체결의 경과 및 그 結果를 비판하고 있다. 다음 後者의 경우는 尹致昊生涯에 가장 빛나던 시기로서 獨立協會의 自主民權運動을 詳述했으며, 韓國의 政治現實을 냉철히 분석하고 그 打開策을 제시하여 尹致昊의 政治思想을 가장 뚜렷이 부각시킨 부분이다.
앞에서 言及한 바와 같이 「尹致昊日記」에는 그가 國內外的으로 경험한 크고 작은 歷史的 事實들이 정확하고 소상하게 記錄되어 있으며, 또 그것을 現代的 感覺으로 銳利하게 分析 批判하고 있다. 그러므로 「尹致昊日記」는 韓國近代史 硏究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貴重한 資料가 되는 것이다.
「尹致昊日記」의 刊行을 위하여 編輯 校註를 담당한 編史硏究官은 다음과 같다.
1卷 (1973) 編史硏究官 宋 炳 基
雇 傭 員 金 斗 烈
2卷 (1974) 編史硏究官 宋 炳 基
編史硏究士 柳 永 烈
臨時雇傭員 李 根 澤
3卷 (1974) 編史硏究官 宋 炳 基
編史硏究士 柳 永 烈
臨時雇傭員 李 根 澤
4卷 (1975) 編史硏究士 柳 永 烈
5卷 (1975) 編史硏究士 柳 永 烈
6卷 (1976) 編史硏究官 柳 永 烈
1976年 12月 日
國史編纂委員會
調査室長 申 芝 鉉
日帝强占期 日記 解說
國史編纂委員會는 우리나라 開化期의 선각자이며, 정치가, 민권운동가였던 佐翁 尹致昊(1865. 1. 26 ~ 1945. 12. 6)가 1883년 1월 1일에서 1906년 7월 3일 사이에 기록한 그의 開化期 日記를 6권으로 1973년에 1권을, 1974년에 2 · 3권을, 1975년에 4 · 5권을, 1976년에 6권을, 각각 간행하였으며, 1980년에는 尹致昊書翰集을 간행한 바 있다. 이제 본 위원회는 윤치호의 개화기 일기에 뒤이어, 그의 일제시대 일기를 5권으로 간행하게 되었다.
윤치호의 日帝時代 日記는 1916년 1월 1일에서 1943년 10월 7일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그의 手筆原本을 정리하여 펴낸 것이다. 그의 일제시대 일기의 原本은 國民日記 · 當用日記와 같은 당시의 규격 일기장에 기재되어 있다. 1916년 처음 4개월분은 漢文, 國漢文, 또는 英文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이후 분은 英文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人名 · 地名과 특수 용어는 漢子로 표기된 부분도 많다.
尹致昊의 일제시대 일기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윤치호의 令息 尹珽善氏에 의하여 보관되어 왔는데, 본위원회에 근무하던 柳永烈 연구관과 윤치호의 長男故 尹永善氏와 누차의 교섭을 통하여 입수, 간행하게 되었다. 처음에 遺族들은 윤치호의 일제시대 일기가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日帝時代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史料를 死藏시켜서는 안되며, 歷史의 진실은 사실대로 밝혀져야 한다는 대국적인 견지에서 결국 간행을 허락하여 『尹致昊日記』의 完刊을 보게 되었다.
윤치호는 1880~90년대에 전후 11년동안 日本의 同人社와 中國의 中西書院(The AngloChinese College), 그리고 미국의 「밴더빌트」大學과 「에모리」大學에서 근대학문을 수학한 개화기의 대표적인 근대 지식인이었다. 그는 대한제국 초기에 獨立新聞 주필, 獨立協會 회장, 萬民共同會 회장으로서 국권 · 민권 · 개혁 운동을 지도하였고, 대한제국말기에는 大韓自强會 회장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지도한 민중운동 · 민족운동의 지도자였다.
윤치호는 일제가 庚戌國恥 직후에 식민통치의 장애물로 여긴 기독교세력과 민족운동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날조했던 105人事件의 최고 인물로 지목되어, 가혹한 拷問과 3년간의 獄苦를 치루고 1915년 봄에 출감하였다. 이 후 윤치호는 일제의 한국 통치는 불가항력적이고 가까운 장래에 한국의 광복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여, 직접적인 光復運動에 나서기를 회피하고, 간접적으로 韓國人의 文化的 · 經濟的 향상을 통하여 日本人과 정치적 同等權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일제시대에 있어 윤치호의 활동은 기독교분야, 교육분야, 사회사업분야가 중심을 이루었다.
첫째로, 윤치호는 YMCA를 중심으로 하여 基督敎運動에 헌신하였다.
윤치호는 이미 미국유학 시절에 YMCA 회원으로 활동했고, 1903년 韓國 YMCA가 창설된 이후, YMCA 이사, 부회장으로서 사실상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일제시대의 윤치호는 1916년부터 1920년까지 YMCA 총무를 역임했고, 1920년부터는 YMCA 회장을, 1930년대에는 YMCA 연합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기독교서적 출판기관인 基督敎彰文社의 설립, 운영에 힘썼고, 朝鮮基督敎敎界 代表者協議會 의장 등을 역임하면서 기독교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윤치호의 일제시대 일기에는 YMCA의 일본에의 예속에서 獨立, 독립에서 예속 과정, 그리고 일제지배 하에서 YMCA의 활동 상황과 내분 문제, 기타 기독교계의 동향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둘째로, 일제시대의 윤치호는 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윤치호는 미국유학 이래로 기독교 선교와 국민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으며, 大韓帝國時代에는 자신과 감리교선교부의 노력으로 세워진 韓英書院의 교장으로서, 또 新民會가 설립한 大成學校의 교장으로서 민족주의적 근대교육의 보급에 노력하였다.
일제시대의 윤치호는 “교육이 없이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으며, 더 많은 敎育이 더 많은 獨立을 가져온다”는 생각에서 무엇보다도 敎育을 통한 韓國人의 知的인 향상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李商在가 渡美를 권고했을 때, 그는 미국에 가서 제2의 李承晩이 되는 것보다는 국내에서 敎育을 돕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105人事件으로 學校를 떠났던 윤치호는 1920년에 이르러 韓英書院의 후신인 松都高等普通學校의 교장에 취임하여 막대한 私財를 투입, 장기적인 학교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 梨花女子專門學校 · 연희전문학교의 이사, 普成專門學校 發展事業會 위원장,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학교의 시설과 교육의 발전에 기여했다. 윤치호의 일제시대 일기에는 당시 韓國의 교육 실태와 그가 관여한 학교의 운영 상황 및 교육계 인사들의 활동 등을 밝혀주고 있다.
셋째로, 일제시대의 윤치호는 先親으로부터 물려받은 遺産을 기초로 하여 社會事業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윤치호는 단체나 개인이 재정적으로 곤란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선별적으로 기꺼이 후원하였다. 牙山陰峯面 普通學校, 송도고등보통학교, 梨花女子專門學校,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했고, 기타 학교, 교회, 병원의 건축에 많은 기부금을 보냈다. 또한 장래가 촉망되는 靑年들의 연구 활동과 생활비 지원, 해외 유학의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나병환자 구제회와 고아원 등을 만들어 이들을 돕고, 在滿同胞의 구제사업과 水災民 구호사업에도 힘썼다. 윤치호는 朝鮮體育會長으로서 체육 발전에도 노력했다. 윤치호의 일제시대 일기에는 그의 사회사업에 관한 내용이 진지하게 기록되어 있고, 일제 · 총독부의 韓國農村에 대한 政策과 농촌의 실태, 地主들의 동향과 小作人들의 처지, 일제의 韓國人에 대한 정치 경제적 차별 대우 등도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끝으로 일제시대의 윤치호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사실상 政治的 인 문제에 말려들게 되었다.
윤치호는 대한제국시대의 民衆 · 民族運動의 최고 지도자였고, 일제시대에도 基督敎界 · 敎育界의 대표적 인물로 활약했던 만큼, 민족운동자들도 일제 통치자들도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3·1운동을 전 후 하여, 일부 민족운동자들은 윤치호에게 海外에 나가 光復運動에 투신할 것을 요구했고, 日帝統治輩들은 나름대로 윤치호를 이용코자 하였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總督府를 ‘繼母政府(StepmotherGovernment), 일제 통치를 ’獨逸式 軍國主義的 統治‘라 규정하고, 한국에 일본인 정착을 위한 日帝의 韓國人逐出政策과, 정치 · 경제 · 교육적인 면에서의 한국인 차별정책, 그리고 光復運動者들에 대한 日帝의 탄압정책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일제 통치에 처음에는 수동적으로 협력하다가, 일제 말기에는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일제 치하의 國內에서의 社會活動이란 일제 통치와 일정한 타협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윤치호의 일제시대 일기에는 대표적인 민족운동자의 親日協力의 농도가 점차로 짙어가는 과정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가 접촉한 수많은 民族運動者들과 친일분자들의 동태,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그들의 견해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요컨대, 윤치호의 일제시대 일기는 우리 나라 근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尹致昊 個人硏究는 물론, 일제시대의 人物硏究, 기독교 관계, 교육관계, 식민통치 관계, 韓國人의 생활실태, 그리고 民族運動 관계의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리라 믿는다.
윤치호의 일제시대 일기에 빈번히 등장하는 人物의 명단을 추려보면
具滋玉, 金東成, 金性洙, 金正植, 金麟
金弼秀, 金活蘭, 南宮檍, 閔大植, 朴勝鳳
朴榮喆, 朴泳孝, 朴煕道, 方應模, 方台榮
白寬洙, 白象圭, 邊壎, 孫貞道, 宋秉畯
宋鎭禹, 申錫雨, 申興雨, 安在鴻, 安昌浩
梁柱三, 呂運亨, 呂運弘, 吳兢善, 俞珏卿
俞星濬, 俞億兼, 尹德榮, 李寬求, 李光洙
李萬圭, 李商在, 李承晩, 李昇薰, 李完用
李軫鎬, 李春昊, 鄭春洙, 曺晩植, 趙重應
蔡弼均, 崔南善, 崔麟, 崔炳憲, 崔相浩
崔承萬, 韓相龍, 玄楯, 洪秉璇 등 대략 이와 같다.
『尹致昊日記』의 刊行을 위하여 원고의 정리 · 작성 및 원고 교열을 하여주신 인사와 편집과 간행을 주관한 담당자는 다음과 같다.
원고작성 韓神大 英文科 敎授 李鍾萬
원고교열 崇實大 史學科 敎授 柳永烈
7卷 (1986年) 敎育硏究士 方相鉉
8卷 (1987年) 敎育硏究士 金 洸
9卷 (1988年) 敎育硏究士 金炫榮
10卷 (1988年) 敎育硏究士 金炫榮
11卷 (1989年) 敎育硏究士 金 洸
1989年 6月 日
國史編纂委員會
近 · 現代史室 敎育硏究士 金 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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