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교수, 이화여대에 '통섭원' 열어 - 중앙일보
최재천 교수, 이화여대에 '통섭원' 열어
[중앙일보] 입력 2006.08.30 20:30 수정 2006.08.31 09:19 | 종합 18면 지면보기PDF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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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학문의 울타리에 전혀 개의치 않고 돌아다니는데, 우리 학자라는 사람들은 스스로 쳐 놓은 울타리 안에 평생 안주하며 잠깐 들렸다 가버리는 진리의 그림자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학문 간 장벽 허물어 지식의 '통섭(統攝)' 이룰 것
이런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인문학도가 했다면 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유명한 자연과학도의 말이기에 다시 한번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최재천(52.사진) 이화여대 생명과학과 석좌교수다.
자연과학자로는 드물게 대중적 인기도 누리는 최 교수는 올해 3월 서울대에서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겼다. 학문의 통합을 위한 새로운 실험을 하기 위해서인데, 이번 가을 학기부터 그가 이화여대로 간 이유를 본격적으로 풀어놓기 시작한다.
'통섭원'이란 낯선 이름의 연구소가 9월 2일 이화여대 내에 문을 연다. 최 교수가 초대 원장을 맡았다. '지식의 통섭을 위하여'를 주제로 한 개원 기념 심포지엄이 이날 오전 9시부터 이화여대 종합과학관 C동 B101호에서 열린다.
또 이화여대 대학원에는 '에코과학부'라는 새로운 분야가 그의 주도로 신설된다. '에코'라고 해서 기존의 생태학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전공을 망라해 총체적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학문간 통섭의 한 사례를 만들어갈 예정이다. 10월에 신입생을 모집하고, 강의는 내년 3월 시작한다.
◆ 지식의 큰 줄기 잡기=최 교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기사 서두의 알쏭달쏭한 이야기, 그리고 최 교수가 이화여대로 옮긴 배경 등 이런저런 궁금증은 '통섭'이란 용어 설명과 함께 풀려 나간다.
통섭이란 용어는 영어의 'consilience'를 최 교수가 번역하며 채택한 말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합을 지향하는 새로운 학문 방법론이다. 통섭원을 지식의 통섭의 메카로 만들어간다는 것이 그의 포부다. 영어권에선 널리 쓰이는 이 통섭 개념을 그는 하버드대 스승인 에드워드 윌슨에게서 배웠다. 지난해 윌슨의 저서를 '통섭'(사이언스북스)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하며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대개 '통합' 정도의 뜻이다. 쉬운 말 놔두고 어려운 용어를 굳이 만들어 쓴 이유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했다. 통섭은 '큰 줄기'라는 뜻의 통(統)과 '잡다'라는 뜻의 '섭(攝)'을 합친 말이다.
요컨대 그는 지식의 큰 줄기를 잡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생물학 전공자라고 생물학의 범위 안에 안주하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20세기는 그렇게 해도 됐다. 20세기는 분야를 나눌 수 있는 데까지 계속 쪼개가는 분과 학문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 통합 학문의 시대이며, 21세기를 살아갈 학생들에겐 통섭적인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최 교수의 주장이다.
◆ 파격적 규모의 연구실=이화여대가 최 교수에게 파격적인 규모의 연구공간을 제공한 점이 눈길을 끈다. 무려 250평 규모. 혼자 다 쓰는 것은 아니라해도, 최 교수가 펼쳐갈 '지식의 모험'을 이화여대가 화끈하게 지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를 떠날 무렵 당시 정운찬 총장은 최 교수의 사표를 반려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이화여대의 전례없는 지원에 맞설 대책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식의 통섭 중에서 특히 생태, 환경 분야의 통섭에 관심이 많다. '에코과학부'를 신설한 것은 그 때문이다.
2일 열리는 심포지엄은 지식의 통섭을 향한 첫 걸음이다. 심포지엄에선 철학 전공자가 물리학을 이야기하고, 경제학도가 진화론에 대해 발표하는 등 전공의 장벽을 허무는 사례를 선보인다. 서양 지성사를 빛낸 아리스토텔레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통 성리학과 서양과학의 접목을 시도한 조선 말기의 최한기같이 지식의 통섭을 선보인 이들의 역사도 아울러 살펴볼 예정이다.
배영대 기자
◆ 최재천 교수 e-메일 인터뷰
"20세기는 쪼개짐의 학문 … 21세기는 종합의 학문"
최재천 교수는 무척 바쁘게 살고 있었다. 개원이 며칠 안남은 29일에도 일본에 가 있었다. 현지에서 열리는 또 다른 학술대회에 참석 중이었다. e-메일 인터뷰를 통해 통섭원 개원의 의미에 대해 들어봤다.
-통섭원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나.
"우선 학문 간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연구자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싶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으로 각각 나뉘어온 연구 방향을 종합하는 쪽으로 돌리기 위해선 우선 다른 전공의 연구자들이 자주 만나서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원 기념 심포지엄에서 할 발표와 토론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통섭'이란 용어는 잘 쓰지 않는 말인데.
"불교와 성리학에서 사용하던 용어이고, 원효대사의 화엄사상에 대한 해설에 자주 등장한다. 나는 학자들이 전공의 울타리 안에 갇혀사는 것이 옳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영어의 'consilience'를 번역하며 이 용어를 채택했다. 통합, 합일 등을 사용하면 선입관 때문에 정확한 의미 전달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통섭은 기존의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보다 그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서로 다른 학문의 개념과 방법론들이 녹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범학문적 연구(trans-disciplinary study)를 지향한다."
-통섭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20세기의 학문은 계속 쪼개지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21세기의 학문은 결국 나눠졌던 것을 종합(통합, 통섭)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열심히 조각 내 연구한 부분을 아무리 붙여봐도 전체의 그림이 드러나지 않는 경험이 쌓이면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통섭이 추구되는 것이다."
-이화여대로 옮긴 이유는.
"좀 더 자유롭게 통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는 환경 문제에 대한 통섭적인 교육과 연구를 주관할 새로운 학부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대 대학원에 '에코과학부'를 신설할 예정이다. 생태계야말로 자연이 만들어놓은 가장 복잡한 시스템이다. 그걸 제대로 연구하려면 그야말로 통섭적인 접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이런 점을 인식하여 '생태 및 진화학과(Department of Ecology and Evolution)가 웬만한 큰 대학이면 다 있다. 이대에는 이른바 '크고 깊고 느린 생물학'의 전통이 있었다. 그 꽃을 피우고 싶다."
배영대 기자
[출처: 중앙일보] 최재천 교수, 이화여대에 '통섭원'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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