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7

[벙커1특강] 정병준 1945년 해방 직후사 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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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1특강] 정병준 1945년 해방 직후사 2강

딴지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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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출발, 현대 한국의 원형
1945년 해방 직후 역사의 미스터리를 풀다!

독보적인 한국 현대사 연구자 정병준의 [1945년 해방직후사] 출간 기념 벙커1 특강 2강

※ 2월 26일에 벙커1 현장에서 진행된 특강으로 1강과 2강으로 구성된 강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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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벙커1특강] 정병준의 1945년 해방 직후사 1강  
Transcript


네 안녕하세요네 정경준입니다 지난 시간에이어서 두 번째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1945년 해방 지구사회 두 번째 편입니다 45년 9월 8일에
미군이 진주하고 난 다음부터 12월에 모스크바 삼상 회의가 열릴 때까지 약
3개월의 얘기가 되겠습니다 굉장히 긴박하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얘기들을 다루려고 합니다 사실은 제가이 강의에서 다루는 얘기들은 어 전문적인 연구자들도 독자들도 잘
알지 못하는 얘기입니다 어 또 제가 감히 생각하자면 당대 살았던 어 정치
주역들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몰랐다고 감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드릴 얘기는 일곱 개의 챕터로 돼 있고요 지난주에 책을 받으신 분들은 읽어 보신 분들도 있을 테고요
첫 번째 챕터는 한국의 해방 한국의 분단 있니다 우리가 해방이라고 생각했던 공간이 실제로는 분단이다
하는 얘기 입니다 어 8선 분할 굉장히 유명한 얘기죠 여기 있는
지도는 8선을 그은 1945년 5월 10일 자정부터 11일 워싱턴 DC
있는 SNC
스윙크로스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명의 대령인 한국하고 관련이 깊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딘 러스 그죠 나중에 캐네디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 옆에 있는 사람 은스 스틸입니다 8군 사령관을 지낸 사람이고요이 두 명의 대령이 5천년의 역사가 있고
3천만 명의 거주하는 한국을 30분 만에 8선으로 분했습니다 나중에 디
러스가 국무장관을 지내고 난 다음에 자신의 회고게 그렇게 섰어요 되면서
30분만에 극동에 있는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했지 그래서 이거는 이제 두 사람이 38선을 그을 때
사용했다고 하는 셔널 지오그라피 B5 사이즈에 있는 유명한 지죠 거기에
있는 지도입니다 그런데 보시면 위도가 30도 40도가 있 38도 선이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그었어요
그러니까 일본하고 38 이남은 미군이 어 38 이북과 만주는 소련군이 중국
국내는 중국군이 싱가폴은 영국기 이렇게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공식적인
설명은 군사적 편리 왜 군사적 편리 일본군이 굉장히 많이 어 일본군이
어디부터 있었냐 일본 본토에 한반도에 만주의 화북의 싱가포 필리프 회복해
만 동남아까지 해서 굉장히 긴 관월형 호를 그리고 있었거든요이 일본군을
한나라 군대가 무장해제시킬 수 없었다 그러니까 연합 대국이 나눠서 미소
영중이 지역을 나눠서 일본군 무장 해제를 담당했다는게 최초의 설명입니다 이게 연합군 일반 명령 1호로
1945년 8월 15일자로 발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준비된
정책이었습니다 45년 7월 경에 포츠담선언 지음에서 군부의 엘리트들이
다양한 방안을 선기를 계획합니다 사실은 도마위의 생선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많은 계획들이 있는데 그중에 북이 40도 분할 방이죠 굉장히 간단합니다 뭐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처럼 40도 이북은 소련이 점령하고 40도 미만은
미군을 점령하는 방안입니다 또 연합 4대국 이니까 이런 방안도 있었습니다
소련은 웅기 낮진 원산을 중국은 의조 평양을 미국과 수는 서울을 미국은
인천을 영국은 군산을 그다음에 부산은 미국이 점령하는 분할 방안이었습니다
그 어떻게 보자면 38선 분할이 그나마
분할보고총회 부상했습니다 그러니까 연합국의 의도에 따라서 한반도가
어떻게 분할 될지 모르는 그런 운명에 처해져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38선이 하는 것이 이런 기획과 계획의 산물이었던 정확하게 얘기하면 38선은
물리적으로 한반도를 반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어 했느냐 인구의 2분가 남안에 있습니다 또 정시
경제의 중심인 수도 서울이 남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전략적 항구인 부산 인천 군산 목포가 남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상적으로는 반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력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은 미국 점령
지역에 들어가 있는 그런 방안이었습니다 우리가 38선으로 분단되었다 얘기합니다 38선이 어떤
건지 잘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이 자리에 경도 위도가 어떤줄 알고 계시나요 지금은 GPS 있으니까
알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후기 38도선이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관념과 공상 상상의 선입니다
그런데 그게 물리적으로 한반도에 그어졌고 강조됐습니다 시너 맥퀸이 하는 사람이 조지 맥퀸의 아들입니다
선교사의 아들이고 어 지리 학자입니다 38선으로 그어진 한반도를 옹진
황해도 예성강 개성 임진강 경기도 북한강 강원도 강원도 태백 마운튼
이렇게 갈라졌다는 거 이제 이걸 연결하니까 이제 이렇게 되는 겁니다 12개의 강 75개의 색강 얼마나
많은 마을이 잘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분단의
극명한 원시적인 모습은 이런 것입니다 한반도에 있는 많은 자연적인 수많은
간고 하천 산맥이 잘렸고 마을들이 잘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마을들이 갈렸는지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뭐
그게 사실은 어 미소간의 8선 충돌의 원인이 됐고요 또 남북간의 충돌의
원인 됐고 북한의 한국 전쟁을 기획하는데 중요한 배경이 됐습니다 우리가 해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흥분이 가라앉자 분단이라는게 드러났습니다 왜 일본 대신 식민지인
한국이 분단되고 일본은 분단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를 뺏기고 점령지를 뺏긴 것으로 끝났습니다 또 군정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 실시됐습니다 일본에는 주권 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선거로 구성된 정부가 통치를 했습니다
메가더 사령부가 있었지만 간접 통치를 했을뿐입니다 주권 부정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에는 인정할 수 있는 주권 정부가 없었습니다 총독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그러면 임시정부를 인정했을요 임시정부는 인정한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
멸망했던 대한제국을 인정할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한국은 우리가 뭐 대서양
선언으로 그 나라 어 주권을 빼앗지 않는다는게 연합국의
입니다 주인이 없는 땅이었어요 그래서 미군이 주권 정부의 일을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의 정부의 역할을 대신했고 그러니까 사실 국제법적으로 불법적인 요소가 굉장히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38선이 한 것도 그어진 이유가 뭡니까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서 그어진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일본군 무장 해제가 끝나고 난 다음에 철폐되어 될 선입니다 그렇지만
그 선이 48년 유지되었고 그 선을 기초로 남북한 의 분단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과 같은
국제법적인 우리가 법적인 관점 개념 입장을 취한다면 굉장히 불법적인
요소가 많았다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군국주의 해체 우리가 잘 아는 거죠 또 민주화 개혁
전범 재판 했습니다 전범을 추방했고 해체했습니다 토지 개혁을 했습니다
사회 개혁을 했어요 교육 분야에서도 탈 궁극의 개혁을 했습니다 같은 미군의 점령한 남한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총독 부 관리들을
유임했다 있습니다 아니 똑같은 미군인 일본의 주둔한 미군은 민주적인
해방군이 있고 남한의 주둔한 미군은 반동적인 점령군이 있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골똘이 생각해 볼 문제이죠
그렇습니다 일본과 한국에선 왜 이렇게 차이가 발생했 제가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습니다 또한 일본은 중요한 목표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동아시아의
국민 국가이고 제국이었던이 나라를 점령해서 변화시키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즉각적인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남하는 우선 순위가 굉장히 낮았습니다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개입은 했지만 관심은 없었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국무부 합참
군부와 민간 모두 다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즉각적 개혁과
현상적인 유지 주치가 취해졌습니다 게다가 한반도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소련과 접경하고 있는 냉전의 전초
기지가 됐습니다 해방 후 한국의 지위에 대한 연합국과 한국의 인식 차이입니다 저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반응이 달라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잘하는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 국민정부 총제조 루스벨트 FDR 이그 윈스턴 처치입니다
카이로선언 이렇게 쓰고 있죠 11월에 회담을 했고 12월 1일에 테란에서
스탈린의 동의를 받 난다 이렇게 발표합니다 앞에 있는 모든 조항들은 다 중국에 관한 조항입니다 카이르
선언의 핵심은 중국을 세계의 4대 열강 중에 하나로 끌어올리려는 미국의
기획의 산물입니다 스탈린도 싫어했고 첫실습 루즈벨트 그렇게 했어요 중국
주앙의 마지막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주목해서 적절한 시기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는 세 개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구성되 있습니다 첫 번째 한국인의
노예 상태라는 건 뭘 얘기하느냐 한국인이 노예 상태라는 거예요 일본 통치의 가혹성 잔인성을 얘기하지만 뭘
얘기합니까 한국인들이 주권 정부를 자취할 능력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미국에서 노예 해방할 때 노예에게
다른 권리를 줍니까 안 줍니다 남북 전쟁 때 노예방 했지만 흑인들이
권리를 찾는 건 언제입니까 1950년대 60년대 됐어야 되는 거죠 두 번째는 적절한 시기라는 건
뭐냐 한 반도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강대국의 이해가 교체하는 지역이었어요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의
이해가 교체 있어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어 한국에서 18945 년도에
청일전쟁 벌어졌습니다 중일 전쟁이죠 그다음에 19045 년도에 러일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러시아와 일본 중국과
일본의 이해가 충돌해서 대전쟁이 아시아에서 두 차례 벌어졌고 한국은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았지만 식민지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강대국의 이해가 교체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특정한 국가의 이익을 옹호한다 미국은 중국
장개석이 주장하는 한국 독립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아 중국이 한국에 대한
전후의 영토적 야심을 갖고 있다 왜 43년에 미국하고
영국하고 중국하고 소비에트가 어떻게 합의했기
처리한다 국제 신탁 통치로 처리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이해를
옹호하고 러시아의 이익을 배지한 어떻게 해 돼 지역의 이해가 충돌하게
돼 강대국들의 이해가 충돌하게 돼서 결국은 무슨 문제가 생겨 강대국간의 충돌이 발생한다 회피하려 어떻게 해야
돼 강대국들 간의 합의가 필요해 특정 강대국의 이익을 옹호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고 합의를 해야 돼 그런 프로세스가 뭐였냐 국제 신탁 통치라는
것입니다 그 즉시 동은 불가능하고 그럼 어떻게 적절한 시기에인 스라고
썼습니다 이건 처칠이 굉장히 잘 쓰는 말이었 고 해요 과정보다는 시기적인 의미가 큽니다 그니까 신탁통치를
거쳐서 독립한다 독립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정의로서 장내에 자유 동립
회복할 수 있어 그런데 언제 50년이 될지 30년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거예요 결국은 한국의 권리는 뭐야
식민지 해방으로 충분하다고 하는게 연합국의 43년 12월 일의
합의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발표가 돼요 이렇게 발표가 돼요 이걸 읽고서 이게 국제적 신통 라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한국 독립운동가 중경에 있던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불렀느냐 국제 공간론 국제적으로 공동 관리한다 국제 공론
국제적으로 공동 운영한다라고 해서 반대했습니다 또 워싱턴에 있는 한인들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인스
논쟁이라는게 벌어졌습니다 45년 12월에 신탁 통치라는게 벌어졌을 때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인 것처럼 처럼 얘기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의 카이로 선언 인식은
이제 한국은 국제 신탁 통치 후에 독립시키고 중국은 연합국의 합의로
억제하고 소련의 잠재 이익은 보장하고 식민 체제를 옹호하려는 영국은 식민
체제 해체하게 하고 미국은 전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는 거죠 미국은 사실은 43년 12월에 카이로 선언
이후에 한반더 문제에 개입하게 됩니다 미국은 한국 문제 개입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미국의
대한 정책을 뭐라고 얘기하냐 unwed 크라고 얘기합니다 원치
않는 내키지 않는 십자군이었다 그러니까 개입은 하지만 쉽게 결정은 못 하는 거죠 한국의
해방 독립은 당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건 45년 2월에 얄타에서 모인
마지막 회담 있니다 루즈벨트가 굉장히
병약하지만 하고 그다음에 2월에 크림반도의 러시아가 침략한 그 얄타
그까 대통령이 전쟁 중에 너무 힘들어요 소화마비 앓고 있고 몸도 안 좋은데 전쟁에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구함을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행을 몇 차례 하는 겁니다 번 아웃되는 거죠 당시 대서양을
횡단한다 건 그런 의미예요 1차 대전 때도 우드 윌슨이 대서양 건너서 파리
강화에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은 뇌출혈이 걸렸는데 많은 사람들은 스페인 독감 때문에 그 있을거라고
생각을 해요 FDR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45년 4월에 죽게 되는 거죠
한국의 불행이었다 생각합니다 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해방이 보장된
나라가 한국입니다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물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나라도 독립이나 해방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종전 이전에
일본이 명예롭게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중립국이 스위스 이런 데서 미국지
하고 어 딜을 하려고 합니다 평화 교섭을 해요 그중에서 일본이 내세운
마지막 조건이 뭐였냐 국채 호지 천왕재 유지예 넘버원 두 번째 우리가
아시아 태평양 전쟁 이전에 획득한 식민지 조선 타이반 필요하다 이건
침략으로 얻은게 아니야 국제 조약으로 얻은 곳이야 그러니까 천왕재 유지
조선 타이한 보유 그다음에 일본을 먹여 살리기 위한 상선대 유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마지막까지 가시려고
했던게 천왕주 유지와 조선의 보였습니다 만약에 카이로 선언이
없었다고 한다면 어떤 미래가 한국인들에게 닥쳤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카이로
선언이 가지고 있는 양가적 의미가 있는 거죠 한국 독립을 선언하고 보증한 것이 있고 한편으로는 그렇지만
그것이 신탁 통치를 거쳐야 된다라고 하는 굉장히 양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기 위한 어전에 의해서 히로히토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일본의 가장 마지막 남은 목표가 뭐였냐 천왕재 유지입니다 처음에 미국은 천왕재 폐지를 원했어
왜 아니 진주만 공격하고 그렇게 악독하게 끝까지 가미가제 하고
그랬잖아요 오키나와에서 필리핀에서 얼마나 많이 죽었어 이오지마에서 그러니까 천하 없애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미국의 대일 정책을 세우는 국무부 전쟁부 브레인들 지파가
너무 많았어요 일본을 너무 잘 알았어요 예를들어 육군장관 스팀슨
일본으로 신혼여행 갔던 사람이 1890년대 자기가 교도가 봤어요
나라가 봤어요 원폭을 떨어뜨려야 되는데 처음에는 나라가 들어 있었어요
그런데 폭격하면 안 된다 교도 나라를 그거는 일본 역사를 문화를 파괴하는
것이고 일본인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폭격하면 안 이게 전쟁부 장관의 얘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했느냐 끝까지 일본이 천지를 유지하니 포츠담 선언
마지막에 이렇게 개정됐습니다 전후 일본의 정치 체제는 일본 국민의 자유
사에 맡긴다 히로 히터가 그 대목을 짚으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연합국의
후위가 두터운 뜻이 느껴진다 천황제를 오케이 했다라는 것을 알고 수락을
하게 되는 거죠 우리 처음 듣는 얘기가 너무 많습니다 알지 못하지만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합국의
후위가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일본이 2차대전을 끝나고 천황제가 폐지 됐나요 폐지 안 됐어요 그러면 그
천왕이 바뀌었나요 안 바뀌었습니다 그 천왕은 인간 선언하고
그대로 천왕이 카이로 선언으로 이제 총론이 만들어졌습니다 근데 구체적인 이건
선언이요 어 데이션 있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한국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
하겠다는 연합국의 결 정이 있어야 됩니다 판단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아싸 45년 4월에 이런 기획의 주창자이고 주역이었던 루즈벨트가
주었습니다 부통령이 트루머니 시골 판사 출신이 대통령이
됐습니다 루즈벨트는 명했어 뉴딜 4대 대통령을 한 사람입니다
경제 대공부부의 생각했고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이 유럽 왜 중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안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네 트모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구체적인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얄타에서 회담을 하고 난 다음에 포츠담 중수 회담 런던 외무
장까지 한국 의제가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에 루즈벨트가 살아 있었다고
한다면 혹은 45년 7월에 포츠담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결의가 있었다고 한다면 한국은 어떻게 처리하겠다라고
결정되었다고 한다면 전후 한국 혼란은 회피할 수 있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 일종의 시간 지체가 있는 거죠만이 세계 외교에 대해서 국제
정사에 대해서 배우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게다가 포트에 갔는데 트루는 시골이 판사 출신이었어 외교는
루즈벨트가 다했습니다 국무장관은 몰랐습니다 루즈벨트는 국무부 믿지 않 외교가 믿지 않았습니다 왜 국무부는
약해 애들이 이거 말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 정을 못해 또 비밀이
너무 많이 세어 나가 얘들은 문서만 많이 만들지 일을 잘 못 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무장관 배제하고 모든
결정을 자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결정을 했지만 루즈벨트가 죽게 되니까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거죠 트루만이 그걸 따라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포츠담에서 처음으로 데뷔했는데 트루만도 어때요 스탈린 여기 영국도
전쟁 중이지만 애틀리 수상이 됐습니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어요
결정해야 되는데 로스 알라모해 원자 폭탄이 개발됐다는 소식이
들려졌다 이남에서는 사실은 중요한 문제를 결정했어야 됩니다 어떤 문제
한국 문제가 결정됐어요 돼요 왜 얄타에서 유럽 전쟁이 독일과 전쟁이 끝나면 소련군이 극동 전선으로 얼마
온다는데 합의했습니다 대가로 러리 때 뺏겼던 이권들을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어떤 여순 대련 철도 사할린 꿀릴 이남의 섬 이런 거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얄타 미학이라는 겁니다 중국의 이익에 관한 거죠 그런데 포츠담에서 아 소련의
도움없이 미국이 원폭으로 일본을 단독 점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외교를
지원했습니다 결정을 회피했습니다 국제 외교 사회에서는 그래서 이것을 외교의
지연이라고 부릅니다네 한국 문제가 모스크와 당까지
미결정 상태로 방치됐습니다 사실은 모스크바 회담 결과 한국이 찬탁을 했어야 되냐
반탁을 했어야 되냐 말이 많죠 사실은 뭐 둘 다 말이 안 되는 얘기죠 이미
한국은 해방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다 맛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신탁 통치 시스템으로 가라 말이 안 되는 얘기였습니다 한국에 개입은 했지만
결정은 회피한 그런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시간에 얘기한 것처럼 한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여운형과 명민한 건국 준비위원회의 결과 해방의 시간 공간을 만들었고
한국인들에게 정시 경제 사회 문화에 장이 열렸습니다 그러니까 좀
비극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한국인들에게 국제적으로 허용된 해방의 권리보다 더
많은 권리와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니까 해방의 공간에서 한국의 지위에 대해서 연합국은 어
너희는 신탁 통치 받아야 될 해방된 국가야라는게 생각이었고 한국인들은
우리는 즉시 독립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양자의 인식 차이였습니다 당연히
인식의 차이는 행동의 차이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거죠 이런 격렬한 인식의 충돌이 45년부터 48년 아지
이끄는 제일 중요한 동력이 됐습니다 이때 한국에 주둔하게 된 24군단
사람과 존 알 하지입니다 일리노이 남부 그 중에서 가장 남부에 있는
골콘다 하는 곳에 여기 옥수수밭 있는 곳이에요 옥수수 반마 평생 모고
자랐습니다 인종 차별이 마녀다는 곳에 자랐고이 사람은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아닙니다 육사 출신이 아니에요 포병
사관 후보생으로 1차대전에 참전해서 42년에 준장이 된 사람입니다 태평연
전쟁 때 군인 중에 군인이 사람 머리 짧잖아요 군인으로서 제일 중요한게 뭐냐 병사들이 머리 짧게 자르는 거
군복 잘 입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시아의 패튼 이런 이름을 받았습니다
24군단 사령관으로 주한미군 사령관 3년 했고요 그다음에 은퇴한게 아니에요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군단
사령관 했고요 한국 전쟁 때도 현역이었던 때 하지가
현역이었던 전쟁이 벌어졌는데 하지를 소환해서 한국 문제에 대한 자문을 얻거나 한국에 파견하거나 했어야 되지
않을까요 단 한 번도 한국 문제에 대해서 인터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했
군인들 가운데서 고위 장성 가운데서 한국에 대한 회고를 남긴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한국에서 근무했던 미 국무부의 정시 고문 베닝 오 랭던 뭐
이런 사람들 한국에 대한 회고 전무합니다 아시아 전문가들 남령 후보자가 두
명이 있었다고 얘기해요 첫 번째 후보자는 스틸입니다 조셉 스틸 웨이고 장개석의 무장이 미군 스타일로 정
사단을 양성한 사람이죠 군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범 전에서 별명이 뭐 비니거 조입니다 식초를 친
것처럼 찡그리고 날카로운 스틸이라는 거죠 범화 전선에서 일본군 공격해
오니까 범화 밀림을 걸어서 병사들이랑 탈출한 사람입니다 장석에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국민당 군대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니까 스틸이 식군 사령관으로
한국이 주도한다고 하니까 장석이 반되 있습니다 무산됐습니다 두 번째 캔디데이 누구였느냐 드마 앨버트
웨드마이어이 사람도 장개석의 후입니다 현주 주중
사령관이었다 아시아 사령부 근무했다가 주중 미군 사령관이었던 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선택된게 존
알 하지입니다 88월 11일에 나한 점령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니까 스틸 회에서 하지 네가가 왜 네가 제일
가까이 있어 오기 나와 있어 너 빨리 짐사 언제까지 들어가야 돼 9월 7일에 남한 상륙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하지는 동이나 아시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 그런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24군단 병사들 아고 왜 전쟁 끝났는데 우리가 빨리 집으로 가야지 병사들 고생했는데 빨리 집에 갈 날만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자기 병사들은 너무 아꼈습니다 제임스 트레이라는 사람의 글에서 나온 얘긴데요
2차대전에 미국이 점령한네 지역이 있습니다 도쿄 더글라스 메카입니다
2차대전의 영웅이죠 태평 영웅이고이 군참모총장 지냈어요 1930년대에
아시아 전문가입니다 아버지가 필리핀
총독이었던 사람이 유능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이젠하워의 부관 출신입니다 또 이탈리아 마크 클라크
우리 한국 전쟁때 마지막에 8군 사령관 유군 사령관 지낸 사람이에요이 사람도 이탈리아 전의 영웅이었고
이탈리아 전문가였다 군인으로서의 명성 자질 정무적인 능력이 뛰어난 지역
전문가를 배치했습니다 남한에는 하지입니다 외교 민사 행정 경험
전무하고 그렇다면이 사람을 지원해 줄 유능한 정치 구문이 필요합니다 국무부
본부의 국장급이 공사이 필요해요 안 보냈어요 게다가 이런 사람은 구체적인
훈령이 필요한 사람인데 훈도 보내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임스 트레이가 이렇게 씁니다 찌찌 이거 엉 진이라는
뜻이에요 하지라는 이름을 빗대서 엉망진창 하지라는 거예요 그 한국 통치가
이렇게 되는 것은 하지가 점령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예요 그렇지만 하지는 결국은 하지
개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미국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 기본적인 관점
입장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진 어땠어요 한국 점령하라 가야 된 정보가 없어요 미군이 갖고
있는 정보는 군정 계획도 없고 뭐 카이 선언처럼 뭐 정말 알 수 없는 그런 레토릭을 되어 있고요 작전
명령에는 일본 정부 기구를 활용하라고 그러고 준비는 없고 정보는 없고 국제적인 명령은 없고 하지가 미칠
법한 순간이었는데 조선주는 17 혁명군과 연락이 됐습니다 일본군 정보에
의존하게 되는 겁니다 한국은 해방된 준 우호 국가라고 얘기했는데 이렇게
되는 거죠 조선주는 일본 17 방위군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옵니다 22일에 총독부가 미군 진주 인지하게
됩니다 제가 얘기했죠 22일이 되면 이때가 김대우의 건준을 치한 협조로
바꾸려는 공작이 끝난 시점입니다 그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25일에 총독부가 희망이라는 걸 만듭니다
상주서 만들어요 연합국 들어올 때 조선인이 폭동을 우려한다 일본 경찰력
총독부 행정기구 써줬으면 좋겠다 공산주의자가 미일간 이간을 예상한다 이런 마타도어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8월 31일부터 9월 4일간에 미군 일본군 사이에 무선통신이 오고 갑니다
총 80개 정도의 전문이 이게 제 17방면군 사령관 고기 시니다 어떻게
쓰고 있느냐 평화 질서 혼란시켜 이득을 얻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 독립 선동가들이 있다
건준의 활동을 얘기하는 거죠 일본군의 핵심 정보 뭐냐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렌이 3 이남에 주둔했다 공산주의자 독립운 들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카이조의 수련은 진주 있다고 씁니다
그런데 미군은 어떻게 받아들여요 카이조 개조나 경성에 들어왔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과 상황에 대한 공포와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하게 되는 거죠 미군이 한국에 대한 정부가 아무것도 없는데 정말
공포에 차서 소련군이 한반도 이남에 이남에 주둔했을 몰라 여기 주둔하게
되면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뭐 폭동 파업 혼란이 약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오게 되는 겁니다 전문 중에 하나죠 9월 2일입니다
탄약이 도난 됐다 경찰 대항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조선은 경찰 도망가서
일본군이 조선 치한 담당하고 있다 개업을 선포하겠다 명령을 내려달라
이런 일본군의 교신을 일본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 여기 있는 오다
야스마 사람입니다 소전 안마 총독부 공식 통역이 그요 미국 유학생
출신이고 워싱턴 군축회의 때 일본 대표단 통역이 된 일에 조선에
들어와서 오랫동안 통역을 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이 사람이 기독교
신자였기 전문의 이사 총 8년 9년 연의 전문 이사였습니다 일본인으로
최장수 이사입니다 연의 전문 교수들과 친했어 YMC에서도 활동했습니다이
사람이 들어왔는데 9월 6일에 선발대로 해리스 준장이 이 도착합니다이 사람 유명한 사람이죠 왜
와서는 조선인들은 안 만나고 일본인들과 조선호텔에서 맥주 파티를 버렸다고 신문에 보도 돼서 망신을
당했어요 근데 해리스 준장이 야 내가 왔는데 소개 받으니까 오다 야스마
아고 하는 기독교 성실하고 영화 훌륭한 통역이
있어 소개해 줄 수 있어 옆에 앉은게 오다 야스마 있어요 그 오다 야스마
어떤 일이 했냐 통역을 제공했고 이목을 소개했습니다 이게 이입니다
이거는 37년에 조선 총동 미나미와 함께 담화를 갖고 있는
사진입니다 총독과 함께 다마를 가질 정도로 이름이 난 친일파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연위 전문 출신이고 보스턴대에서 학위를 했고요 수양 동호에 의해 사상 전장 했고 뭐
보통에 그렇잖아요 수양 동호회가 거의 4 5년을 기소도 안 하고 검해
가지고 괴롭히는 거예요 4년 5년을 괴롭히고 난 다음에 무혐이
처분했거나 거죠 수양 동우의 흥업 구락부가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다 어떻게 하는 겁니까 남산 신공에 가서
신공 참배하고 국방 선금 내고 친일 유세하고 언론에 나가서 그런 걸 쓰게
되는 거예 보통의 이제 우리가 얘기하는 친일 행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 중에서 영욱은 좀
독특했습니다 미나미지로 회견하고 연전에 가기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아마 이게 이효일 거라고 봐요 옆에
있는 둘은 일본인이고 이묵이 그래서 오다 야스의 소개를 받아서 처음으로
한게 뭐냐면 코리아 타라고 하는 영자신문을 만들었 이게 코리아 타임입니다 전단으로 보이죠 제목이
웰컴입니다 45년 9월 10월에 2회 3회 정도 내고 말았습니다 신문이
아니에요 왜 만들었느냐 미군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전 생각을 합니다 영 만든 사람인데 김영이 예일
하버드 프린스턴 보스턴 컬럼비아 어때요 지금 봐도 지하는 아이리그
나온 사람들입니다 코리아 타임스 만들었고요 미국 유학 기독교 연 출신들이고 일제 말에 동호회 사건
등으로 다 전향하고 친일 있던 경력들이 있는 분들입니다 왜 접근해야 되니까 언론인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신분 만들어서 9월 12일에 명관 연 환영회를 했는데 신문 기자들이 만든
환영입니다 그렇잖아요 언론인들 환영회를 했는데 유목이이 자리에 나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운영
친일파 공산주의 친일파 공산주의자가 한 몸에 있는 겁니다 게다가 총독부
돈 먹고 친일 정부를 수립했다고 연설했습니다 미군이 믿었습니다 하지의
공식 통역이 대해서 문꼬리 권력을 장악했고 여기 있는 코리아 타임스의 인물들이 미군정의 핵심 요직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여복은 어떤 사람이었느냐 제가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일자에서 다수의 친 연설을
했습니다 귀축 미형 반미 반영 운동했습니다 보통의 활동이었어요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친일 활동자로 행위자로 규정된 사람입니다 한국
정부가 그런데 여운형을 친일파 공산주의자 친일 정부 수립했다고 무고하고 미군정의 문꼬리 권력을
장악했고 그리고 미군정 통역이 되어서 나가사키 유저로부터 법무국장 석방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고 석방시켜 주고 그리고 나서 무슨 짓을 했느냐 나가사키를 찾아가서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일본에 협력했던 조선인 숙청되고 때문에 역수 야마토 주에
있는 우리 신상기록 태워 버렸으면 친일 활동 기록을 태워 버렸으면 좋겠다고 해서 나가사키 유조가 그걸
태웠다는 얘기입니다 끔찍한 일이죠 이게 이제 나가사키 유조의 어
목과 기념과 어 시계라고 하는 록의 나가사키가이었을 때 아주 뭐 고소
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 한국에서 2차 대전에 벌어진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르지 내가 얘기를 해 줄게 알아볼까
이런 생각으로 썼다고 생각합니다네 해방 한국의 비극성은 이런 거죠 친일파 귀축 선봉장이었던 이영욱이
하루 아침에 미군정 문꼬리 권력입니다 하지는 명백한 친일 이거는 무고
역고소 만한다는 이유로 미군 정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시했습니다
미군정 친 중요한게 아니죠 친미가 더 중요한 거죠 미군 얼마나 성하
심지어는 이욱의 보스턴 대학 박사 학기 논문을 말이죠 미군정의 한국 알기 시간에 쓰라고 이걸 프린트해서
배포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게 미군정 문서에 나와 있는 보스턴 대학 명욱의
학위 1800 몇 년대 외교 관계를 다룬 190페이지 정도 된 논문인데
이걸 배포할 정도였어요 임명국 태도가 어때요 여러분 당당하지 지하고 허버트
후버가 대책위원 방문했을 때 임영욱 이고요 이거는 차미스 동원회 때 허헌
슈티프 말릭 임영욱 어때요 임영욱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죠 김규식 여운영
이거는 하지가 45년 5월 30일에 재원 국회 첫 페이에서 연설할 때
영국입니다 두 번째는 윌리엄스는 장교의 얘기입니다 뭐 제가 지금 오늘 하는 얘기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얘기들 그리고 누구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 수 없었던 얘기들이
고 감히 생각을 합니다 윌리엄스는 누구냐 제물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뭐였냐 공주 영명학교 만든
사람 지금도 남아 있어요 영명 학교에서 프랭크 윌리엄스는 뭐이 학교의 은인입니다 태평 현증 벌어지기
전 후에 일본에서 추방되어서 인도에 가서 인도 가자바 광복군 인면 전구
공작대 테 영어를 가르킨 사람입니다 전후에 한국에 다시 들어와서 선교사를
했고요 윌리엄스는 미국에 의과대학 버지니아 의과 대학입니다 2차대전
기회는 호주에 있는 병원 연구 소장을 했고요 한국 파견해 달라고 했지만 암대 사령관 킹 케이드가 너 보내줄
수 없어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함대가 하지를 에스코트 하게 됐어요 제물포에 도착해서 건준이 보낸 여운홍
조한용 백상규 이런 건준 대표들이 다가와서 얘기를 하는데 영어가 안 통하는 거예요 쟤네들 무슨 말을 해
그런데 윌리엄스가 한국말로 얘기를 하는 거예요 미군 정에서 유일하게
한국말을 구사할 출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가 피가 에서 개인 정치 고문으로 삼았습니다 45년
9월부터 12월까지였습니다 그런데 윌리스
본인도 본인의 회고 관련 억 어디에도 한국 관련 기가 없습니다
한국 관련 얘기는 내가 한국에서 유튜브에 와 가지고 무슨 태평양에서 대서 한 바퀴 돌았어 이런 얘기 뿐이
없습니다 내가 한국에서 한 일에 대해서 언급이 없습니다 본인도 어떤
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미국에서 윌리암스가 대한 정책과 관련해서 어떤 위치를 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일개 해군 소령이 의무관이 아무도 아닌 자였습니다
그런데이 사람이 미군정 초기에 많은 것을 결정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 저도 궁금했습니다 윌리엄스와 한국입니다 왼쪽에 있는 분
현봉학 있니다 들어봤죠 흥남 철수의 한국의 신들니다이 사람이 한국 전쟁
때 활약하게 된 것도 윌리엄스 때문에 어머니 앨리스가 이화 예전에서 가르쳤는데 봉하이 영어를 배웠어요 언
똘똘 하니까 우리 아들이 버지니아 의대 교수니 거기 가서 공부해 버지니아 의대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1980년대 찍은 사진이고요 아버지는 한국명인 우리이고 윌리엄스는
우광복이고 동생은 흥복이이 지금 공주영명 학교의 비석이 쓰여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묘지가
있습니다 관련이 깊죠 이게 보면 이제 9월 9일에 한복 조인 식의 지고요
옆에는 킹 케이드 7함대 사령관이 밑에는 아베노 6이고 육군 사령관
해군 사령관 그렇습니다 이거는 연합국 환영하는 보면 웰컴 the US
아라고 써 있고요 밑에는 미군 소련 환영한다는 얘기예요 둘 사이에 있는게
이명인 거죠 하지 아놀드 욱입니다 이거는 노기남 대주교이 옆에 있는
사람 누구냐 장면입니다 존 창입니다 세례명이 요한이서 존이 썼다 그래요
다이 정도 이름은 있어야지 미군정에서 출세하는 거죠 이대 외무장관 벤스
이름입니다 벤스 림 림브입니다 병증입니다
장면 미국 유학 갔다 와서 천주교 학교인 동성 상업 개성학교 교장
지냈습니다 어 킹 케이와 함께 스만 주교가 왔기 때문에 미사를
집전했다 제출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통했죠 그 공로로 경기도 국장이
됐습니다 미군정이 좋게 봤어요 그래서 46년에 과도 위법 의원 관선 의원의
카톨릭 대표로 선임됐습니다 그리고 48년에 윌리엄스의 기록이이 사람은
감리교 선교사의 아들인데 장로교 역사 협회에 소장돼 있어요 그래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쪽 분량의 질의 응답이고 미군정 초기에 어떤 일이 벌 제 알게
됐습니다 하지의 정치 고문이었던 일을 하지가 요구했 첫 번째 정치 고문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어떤 한국인과 접촉 창구였다 세 번째 인사 문제를
결정했다이 세 가지 모든 일을 하지가 한 사람한테 맡겼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윌리엄스가 미군정 초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거죠 유일하게 한국
사정에 정통하고 한국인들과 접촉 창구가 있고 한국에 유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근데이 사람은 의사 있을 뿐이지 훈련 받거나 박식한 정치 구문이 아니었어요
노련한 한국인들의 책략에 취약했고 기독교 엘리트 선교사 결국 한국의
우기나 기독교 그룹을 따라가게 되는 거죠 이건 이제 미군정의 남아 있는 유일한 내셔널 이슈 메이저 윌리엄스
하는 몇 장 안 되는 탑스 돼 있는 문서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저는 이거 보고서 도대체 이게 윌리스가
누구지 생각했는데 윌리스의 연설을 보고 알게 됐습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첫 번째는 양가적인 양면적인 한국 인식입니다 한국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아 나 한국말 잘해
한국인 잘 이해해 한국문화 좋아해 나 한국 청국장도 먹어 그렇지만
오리엔탈리즘 강합니다 한국 애들은 안 돼 게다가 한국 사람들 분열돼서 자치
능력이 없어 우리가 많이 보는 얘기들이 나 한국 잘 알지만 너희는 안 돼 그런 거죠 한국 지배층에게
호감과 공감을 반제 반기독교 사회 주 민중 군동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민당 보수적이고 평화적이고
심리적이고 임정을 지지해 인민 공화군 총독부의 후원을 받은 파괴적 공산주의자 한민당 주장을 그대로
전달하는 거죠 친일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한국인 충분히 친일적이고 충분히 친 생존적이었다
친일파 아닌 한국인이 없었어 일본의 강압적인 총동원 정책으로 모든
한국인이 친일해야 됐어 국민 공범론 정론 이런 거죠 해방후에 친일파들이
했던 그 주장을 윌리엄스가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프로제이 아니라 프로
잡이어선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거죠 게다가 더 놀라운 건 하지가
무능해 아무것도 모르는 장군들이 있어 그 어떻게 해야 돼 한국인 자원들을
이용하면 돼 매일매일 매일의 기초위에서 필요하면 농업 문제 필요하면 한국
농업 전문가를 들여다가 금융이 필요하면 금융문제 전문가를 들여다가 땜질 하면 대 기독교 선교사와 교회를
활용해 김구 이승만 높게 평가해요 심지어는 여운형이 송진우 암살에
개입했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믿기 힘들 정도로 한민당의 허위 정보들을
그대로 옮기고 있습니다 윌리엄스 세도 이런 거죠 한국인은 나 윌리엄스와 미군정의 결정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우리는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선유와 좋은 뜻을 가지고 있어 우리 결정을 반드시 따라야 돼 우리는 한국
한국인을 위해서 최선을 다의 좋은 일을 해 준다 그래서 하지는 윌리엄스의 반소 반공 친미 기독교적
가치관을 쉽게 동의합니다 한국인들의 중요한 문제 친일 사회 개혁보다는 육적 가치가 중요하다 윌리엄스가
신뢰한 심미적이고 보수적이고 민주적이고 교육받은 한민당은 신뢰하게
됩니다 그런데 국무부가 파견한 정치 고문도 여기에 동조하게 돼요 이게 베닝 오프라는 사람이에요이 사람도
회고로 같은 거 남기지 않았습니다 내교 선교사 아들이에요 하 관리입니다 국무부에서 아무런 발언권이 없어요
하지도 군부에서 발언권이 없는 사람이고요 베닝 오프도 발언권이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 그렇지만
결정권이 있거나 발언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윌리엄스와 베니오프는 선교사의 아들입니다 선교사들의 업정
인적 네트워크 활용하고 한국인들 자치 능력 정치 역량 불신하고 반면에
미군정에서 우리가 이렇게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걸 자각했습니다네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신했고 그래서 반소 반궁 기독교식 민주주의 미군정
순회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미국적 사유체계를 가졌습니다 랭던이
하는 정치 고문이 좀 고위급이 있는데요이 사람도 한국 전문가입니다 한국에 근무했어요 경성 총사 했고요이
사람이 42년에 국무부에서 한국 신탁통치 구상의 기획자입니다 한국
자치 능력 없다 자율 정부 못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 신탁통치
필요하다고 하는 첫 번째 기획자가 윌리엄 랭던 있니다이 사람이 45년
10월에 한국에 와서는 이걸 번복하게 됩니다 왜 이랬을까 첫 번째는 하지가
너무 나가서 그랬을 것이다 두 번째는 아니다 한국 상황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둘 다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이 사람 뭐라고 얘기하느냐 도덕적 세상에 외교관이
도덕적 현실적 관점에서 신탁에 기각하고 그 대안으로 임시정부 중심에
정원 과도정부 수립해야 된다 공부에서 좋아했을까요 승진하지 못합니다 공사
대사로 승진하지 못했고요 국장이 되지도 못했고요 총영사로 경력을 마감하게 됩니다 한국에 대해서 어떠한
증언도 회고도 짧은 인터뷰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근무했던 많은
사람들은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유독 한국에 근무했던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미군정 시대
인물들이 그렇습니다 미군정이 일주일만에 총독부 민공화국 중경 임시
정부라는 세계 정부에 대해서 독특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총독부는 어떻게 해요 유지했다가 총독부 관리를 그대로
임한다고 했다가 한국인들이 반하 폐기했습니다 그런데 총독부 관리를 사용한다는 것은 하지의 정책이
아니었어요 본국의 정책이었습니다 트루만 비난
어떻게 그렇게 해 그래서 미군이 총 관직을 했고요 그 미군정이 되는 거죠
공화국은 공산주의 조직이라는 얘기를 듣고 인공을 부정하게 됩니다 나중에
이제 크로프츠 공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공산주의 조직은 아니었다 3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민족주의적 정부였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한민당의 중경 임시 정구를 절대 지지한다 한국인들이 100%
지지한다 그걸 따라갔습니다 놀랍게도 10일 만에 결정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임시정부 귀국하게 하고 이승만 귀국하게 해서
반탁 정무위원 아 복잡해요이 뭐 결국 핵심은 뭐냐 해서는 안 될 일들을
결정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은 임시정부를 미군정이 대했다고 알려져 있죠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굉장히
우대했다 전에 크로프츠 아고 하는 경성 제대에서 서울대로 넘어가기 전에
경성 대학입니다 초대 총장인 알프레드 크로프츠 공화국 인민공화국 온건
좌익이 있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탈식민 정권 정도였다 미 국무부 보고서 미국이 우파 부자 정시 그룹에서 군정
충원했다 해외에서 교육한 우파 정객들이 한국 정치 지배하도록 촉진했다 49년 5월 23일에
보고서입니다 그 인공을 활용할 가능성이 있었다라고 나중에 판단을 하게 된 거죠 미군 초기 한국인들 한
민남 계열입니다 진주 직전에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임정 연합군 환영에
만들어서 임정은 국제적 인정받았고 인공은 일본 제국주의 위에 주다 임정을 지지할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거죠 조병옥 윤보선 윤치영 9월 12일에 미군에 나타나서 인공은 친일 협력자
한국인들을 조작된 집단이다 여운영 잘 알려진 오래된 친일 협력자의 정치 명월관에서 이용욱 안재용 여운영
친일파다 인공 민중의 배반자 국민대의 준비의 서상일 서리시 김도현 현동환
김영무 장자이 g 2를 방문했는데 좋은 교육 유능한 신사다 부민관 하지
회견에서 명옥이 통해 있고 조병옥은 인공을 공산주의자라고 욕합니다 오금선
세브란스 학장이 한민당의 한국 민중의 대표다 노기남 주교 정치계 핵심 인물
50명을 추천 배척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정보에 따라서 미군 진주 첫 10일에
한민당은 미군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를 들려줬고 여은영 안재용 건준 인공은
모략하는 이승만 김구는 절대 지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민당의
사실은 이승만 임정 절대지지 주장한 건 정치공학적 책이지요 45년 만에
벌어진 일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미군정 신임을 얻어서 고위직을 차지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45년 9월 19일에
미군정 정보 책임자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한민당 대다수 한국인 대표에는 유일한 민주적 정당이다
한국인 대다수 아니고요 유일한도 아니고요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평가하는 거예요 미군정 결정은 뭐냐 인공 반대 임정지지 한민당 중요합니다
데 한민당의 주장을 수용한 건 어떻게 하게 됩니까 100% 지지한다고 하니까 임정을 끌어들이면 판을 잘
수가 있겠어라고 결정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승만이 들어오니까 그
계획에 따라서 임정을 간판으로 내건 과도 정부 같은 걸 꾸미게 됩니다 하
반탁 정무위원회 기획입니다 이게 한국에서는 독촉 중력으로 알려진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실현 불가능한
무지와 만용 왜 그런지는 설명하 겠습니다 권력의 불입니다 하지가
윌리엄스에게 고문 회의를 조직하라 했다는 거예요 고문 회의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물건인지 몰랐는데
윌리암스의 발언에 나와 있습니다 친일파인 법률과 은행과 뭐 블라블라 해 15명 구성하라고
했다 깜짝 놀랐어요 여긴 정당이 안 들어가 있어요 사실은 모두다 다 한민
당원입니다 여영 조만식 빼고는 정당과 정치 의견을 최소한으로 반영하고
법률과 은행과 사과를 에서 결국은 성공하고 보수적이고 친일파를
압도적으로 보장하는 현실 정치와 역전되어 있는 고문 회를 만들게 되는
거죠 특히 평남 건준 출신이 조만식 들어가 있습니다 또 김동원 소설과
김동인의 형이죠 평남 건준 둘 들어가 있는데 서울 건준 한 명 들어가
있어요 나머지는 모두 다 한민당 한민당은 포섭하고 인공은 배제했습니다
종교가 전 1입니다 친일 전력 없는 신교 목사 둘 발견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머지 종교인들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다 기독교 도였어 고문회의
별명이 기독교 전국 구문회 언더우드는 뭐라고 얘기했냐 현재의 정부를 연의
전문 정부라고 부릅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고문 회의가 조직됐고 뭘 했느냐 인력 충원의 통로가 됐습니다
한민당 중심이 됐고 일제 시대 중추원의 재판입니다 여이
암살되고 는 한국 사정사 김용한 쓴 편지입니다 미군 진주 한 달 뒤에
하시 처음 만났다 하지가 처음 만나자마자 천마디가 테 얼마나 받았지 왜놈고 무슨 관계가 있어
스라고 썼으니까 왜놈이 모멸 느꼈다 하지가 정치 구분 해달라고 해서
옆방에 갔더니 이미 다 앉아 있었다 표결하는 의장을 뽑는데 9대 1이었다
나는 윤기 찍었는데 김성수는 자기 이름 찍었더라 9대 1로 완벽한 진영이 구축돼 있어서 그만두었다 여형
사임했다는 얘기입니다 벼락 권력의 시대인 거죠 우리가 벼락 부자는 알잖아요 벼락 권력입니다 어떻게
됐느냐 해방전에 한국인 관리가 총독부에 29550 남북한이 그런데
12월까지 7만 5,000명의 한국인 관리를 임명합니다 남북한에 있는 모든
관리를 더해도 얼마가 더 많은 거죠네 4만 5천명 정도 더 뽑은
겁니다 이명은 어떻게 했느냐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어떻게 됐는지 누구도 알지 합니다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고문 회의가 추천하고 고문 회의가 결정하고 미군정이 임명하면 되는 겁니다 즉 한민당의 추천하고 한민당의
결정하고 미군정이 공포하는 것입니다 경찰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해방전에 한국인 경찰이 남북한의 만
명이었습니다 여기 보시면 알죠 조선인이 10 619명 있니다 경찰이
27,000 명이었는데 45년 11월에 남한만 15명입니다 그 북한에 있던 경찰까지 다 포함해서도
15 명 넘어가는 거죠 46년 말이 되면 2 5천네 45년 8월 해방전에
전체 경찰 병력을 뛰어넘는 거죠 48년에 4 5천명으로 수직 상승하는
거죠 경찰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뭐 이제 해석하는 방법이 많지만 미군정의 유산이고 굉장히
군사적이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이고 친일적이고 간부에 대부분이 친합니다
간부의 82% 친일파에 친일파 청산 식민지 재청
반대하는 거죠 이게 경찰의 모습입니다 그 48년에 반민 특기가
만들어져서 뭘 청산한다 역사에서 청산이 사실 가능한 건가요네 생각을 해보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미 공적 시스템은 모두 다 차지했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겁니까 사다리를 걷어차는 거죠 그리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말 생존권 인정 투쟁을 하게 되는 거죠
최선을 다 하는 거죠 한민당의 세상입니다네 다 한민당 핵심이 찾아 있 경찰 조경입니다 공주 영명학교
출신 미국 유학 기독교 미군정 반인 반공 독립운동 영역 한민당 총입니다
미군정이 요구하는 다중에 자격 요건을 갖췄습니다 46년 10월 폭동 때
친일 경찰 때문에이 추소 봉기가 났다고 조미 합동 공동위원회가 만들어서 여영 김규식 등이 경찰
바꿔야 된다 특히 조병욱 장택성 바꿔야 된다 했지만 하지와 미군정 수부가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네 법원 김명로 검찰 이인이
사실은 우리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자격 요건이 있습니다 고등문관 사법과 변호사 시험 재판소 석기 일제의
법률체계 시스템에 봉사하던 사람들이 해방후에 해방된 한국의 법조계를
장악하게 됩니다 이참 생각을 하게 되죠 아니 해방 한국 법조를 법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지금 우리나라의 법체계에서 제일 많이 거슬러 올라가는 법령이 언제일 것
같아요 우리가 조선 총독부의 사법 체계를 그대로 계승해서이 시스템을 지금까지
굴려 가게 된다는 것이 정당한 것이냐 일제에 복무했던 사람들이 미군정에서
복무하게 된 그중에 김병로 2인 같은 사람들은 항일 변호사이기 때문에이 사람들이
위에서 뭐라고 하는 거죠 간판을 하는 거죠 그렇지만 시스템은 일본에
봉사했던 사람들이 시스템을 장악하게 되는 거죠 신뢰성은 반공 치입니다
3대 변호사 중에 허은 비토 됐습니다 미군정기 사법 권력은 한민당 이너서클의 몫입니다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인사행정 정의령이라는 사람입니다 명무의 절친입니다
동양이 미국 유학을 같이 했고요 연의 전문에서 같이 했고요 결혼식 들러리를
섰습니다 미군정에서 선택되어서 인사행정 차장이 됐는데 전투적
민족주의자 안재홍이 민정 장관이 됐습니다 어 흥사단 서북 기을
중요하니까 바꿔야 된다라고 안재홍이 했는데 안재용 이겼어요 47년에 민정
장관이랑 인사행정 차장이었다 반령 냈는데 미군정에 얘기해서 다시
중앙으로 롤백 했어요 미군정의 권력 서열에서 항일운동 민정장관 안재영 다 인사행정
처장이 정령이 훨씬 더 파워 했습니다 도지사 고문의 한민당의 몫이었습니다
게다가 미군 정기에 정당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공직을 맡으면 돼요 안 되죠
한민당 당집을 다 가지고 있었어요 한민당 간부 출신이에요 탈당하지 않았고 미군정 문제삼자 않았습니다
최소한의 형식적인 논리나 객관성이 없습니다 미군 정기 권력 특징이 뭐냐
사회 구조 시대정신 대중 염양 반영 못했다 법적 제도적 절차 정당하게
거치지 않았다 합법적으로 그 권력을 그 자리를 획득할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있는지 검토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 벼락 권력으로 권력을 차지했다
불하받은 권력이고 현대한국의 기본 질서입니다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자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 압력을 전혀 반영하지 않습니다 일방성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봉사 합니까 권력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있을때 처음 한 일이 뭐냐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은 권력을 회수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는 겁니까 조각이라 그러죠 초대 내가 구성할 때
한민당은 국무총리 내무 장관 외무 장관 하고 싶었습니다 한민당은 아무도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진창원 반탁 운동입니다 오늘 얘기 핵심인데 연합국 대한 정책은 카이로
선언이 있지만 방치됐고 하지는 본국의 입장이 없는 상태에 자유방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윌리엄스 등의 정치 고문의 말을 믿었습니다 한민당의 말을 믿었습니다 습니다 그래서 반인
친 임정이 정책을 선택했습니다이 하지는 정책 결정자는 아니에요 하지도
인식이 이렇습니다 동양인 미스 메가도 그랬다는 거죠 일본인 어 미성숙한
청소년이 아 최소한 미국인들 독일인들은 중년에 원숙한 40대야
그러니까 우리가 교도 돼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이끌어야 되라고 했다는 거죠 보통 한국인들 충동적인 어린애와
같다 반공주의 식민지 식민지 모르는 거죠 여기서 민족 혁명적 요구가 뭔지 식민지를 왜
겪었는지이 사람들의 요구가 왜 이런지 이해할 마음도 없고 이해할 생각도 없는 겁니다 그건 위험해 하지가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보수주의자가 아닌 한국인은 모두 뭐다
공산주의자다 하지와 미군정의 결정은 한국인들에게 최상이다 48년 유 한국
임시 위원단 왔을 때 그 유명한 매논 이죠 인도 나중 외모 장관 제는 매논
이고요 이건 중국 대표부 호세 테이라 사람입니다 입니다 한국을 위해서 우리가 결정해서 실행한다 정책 결정자
하지인 거죠 미국은 합의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원했는데 국무부는 특정 정치 력하고 연결되지 말라고
늘상 얘기했는데 하지는 본국이 지시가 없고 한민당은 믿은 결과 미국의 공식
대한 정책인 카이로 선언을 부정하게 되는 거죠 미국의 고위 정책 연합국의
합의를 미국의 대통령 영국의 수상 중국의 총통 스탈린 이런 사람들이
합의한 국제적 합의를 누가 깨뜨려 별 세개짜리 한반도의 주둔한 24군단
사령관이이 사람은 누구예요 메가도
부하예측 폰과 같은 졸과 같은 하지가 결정했습니다 하지에 대한은 뭐야
한국인들이 임정을 절대지지 하니까 임정 중심으로 과도 정부를 만들는 문데 정말 믿기 힘든 얘기들이 그래서
이승만이 귀국한 후에 정무위원회를 만들어 그리고 삼상 모스크와 회담 이전에 이거를 대안으로 제시해 제가
이런 진실을 깨닫고 나서 깜짝 놀라서 이런 이런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그게
한국이었다 제일 큰 문제는 뭐냐 일본이나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는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 한국에선
버젓이 벌어 그것도 비밀리에 국무부와 합의하지도 않고 본국과 합의하지도
않고 일본에서 만약에
메가더가격 국제적인 파란을 일으켜서 해임되고 쫓겨나고 대파을 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이승만이 교하게 되는 거죠 사실은 태평양
전쟁기 이승환이 1875년 생입니다 45년 몇 살입니까 만 70입니다
태평양 전쟁기에 한반도에서 노무자 군인이나 군속으로 나왔던 포로들
신문했다 이름 등장하지 않습니다 한반도에서 잊혀졌어요 그런데 10월
16일에 해외 지도자 중에서 처음으로 귀국하게 정말 드라마틱합니다 워싱턴
출발해 경유에서 일본 도착해서 하지에 지습 만나고 메가도 만나고 메가도
만나고 서울도 처합니다 본인의 노력 메가도 도움 하지의 도움 부 출국지
실패 아 정말 굉장히 힘들었어요 나오려면 국무부가 엑 퍼미션을 줘야
돼요 출국 화가를 줘야돼 또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이승만이 노동부의 제 2국 허를
받았습니다 이미그레이션 어디에 속해 있어요 디파트먼트 오 레이버 속해
있어요 노동부에서 리엔트리 퍼밋을 받아왔어요 이승만이 동참 무부가 허가
있고요 태평양 해군 메가더 관할지역 통과 허가 군용기 사용 허가 굉장히
복잡하죠 그런데 이승만이 그걸 해냈습니다 그래서 메가더 환대를
받으면서 들어왔어요 좌익이 인공 주석으로 추대했고 우익 한민당의
추대했고 미군정이 환대합니다
메가더가격 노포에 있는데요 제가 거기 가서 봤습니다 메가
에 보면은 한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구미위원부 위원장이었던 이승만을 두 차례 만났습니다 어떤
얘기 나눴는지 모릅니다 하지도 이때 도쿄에 가서 이승만과 만났습니다
메가도 하지 이승만이 만났습니다 유일 무의니다 상상할 수 없는 최상의
환경이 조성되어 왔죠 하지가 기자에서 이승만을 조선의 진정한 애국자라고 소개하고 부동 자세를 하는
거죠여에게는 한 달 뒤에 너 일본놈한테 돈 얼마나 받았어 너 일본 놈하고 무슨 관계야 라던 그 하지가
이승만이 귀국하자 전 생애를 한국 독립에서 바친 애국자다 소개하고
이승만 연설하는 동안 부동자세로서 있었다고 그래요네 민족 지도자로서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게 되는 거죠 덕수궁의 숙소를 제공하고 순종의 리무진을 제공하고 하지의 헌병 분대의
경호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46년 이승만의 명성 조식 자금 활동에
끊이지 않는 화수분이 사실은 하지 있습니다 그래서 미군정 세우는게 이런
계획을세요 임정 중심의 군정 내의 과도 정부를 세우는 이상한 계획을
세웁니다 여기서만 세웠어요 한민당의 주장으로부터 비롯되어 이걸 랭던이
만들어서 메가더 뭐 메가더 바빴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네가 알아서 해라고 얘기했다고
생각합니다 38 이북을 포함하는 38 2만도 가능한 일종의 미국식 과도
정보를 세워서 북한까지 확장한다고 하는 북한의 민주 기지 노선이라고 하는 걸 들어보셨을 거라고 보입니다
그것과 대비되는 남한판 자유 기지 노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핵심은 뭐였냐 미국의 공식
대한 정책인 신탁통치 기획을 반대합니다 대안이 뭐냐 정무위원회를 한다 그 임정은 사실은 한국에
귀국하기 전에 상종가를 치고 있었어요 우리는 임정이 홀대 당했다 뭐 군산
비행장에 왔고 뭐 환영도 안했다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귀국하기 전에 임정이 이미네 저 세상에 있었습니다
하지가 그니까 세지를 하는 거죠 한민당과 이승만이 다 임정의 간판으로
이런 걸 추진했습니다 국무부 공식 정책을 반대하는 거고요 대안으로 결국은 좌익
중도 우익 연합하는 정당 통합 운동이죠이 가능한가요 여러분 주체들의 욕망과
지향이 다른데 그리고 비밀리 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이런 대안을 미 국무부가
낼 수 없고 그걸 소비에트가 영국이 동의할 일도 없어요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좌익 중도
우익을 합할 수가 없어요 제일 중요한게 누굽니까 임정에 임정이 들어와서 보니까 자기 이름 팔아서
독촉 중면 만들었는데 거기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임정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나
임정인 26년 동안 임시 정보를 지킨 노인들은 그런 분들이
아닙니다 권력 정치의 핵심에 자기가 주어가 아 아닌 정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호락호락 임시정부의 명의를 판 이런 조직에 조직을 넘겨 줄 사람들이
아니죠 당연히 참가하지 않습니다 박헌영 좌익도 떨어집니다 중도 좌파도
떨어집니다 임정도 떨어져요 결국은 뭐가 됐어요 한민내과 이승만 블록이 돼 버렸어요 그리고이 물건을 통합을
시켜서 모스크바 회담 이전에 국무부에 제출하려고 했어 사실은 생각을 해
보면이 뭐 말도 안 되는 사무관 급에 혹은 주사 죄송합니다 주사나 사무관을
모욕하려는 뜻은 없어요 그렇지만 정말 유치원생 수준의 정치 공학적
플랜입니다 이런 걸 만들어서 정당 통합을 하고 이걸 대안으로 만들어서
국제회담 테이블에 내놓겠다라는게 하지의 플랜이 무지만의 대실패
그이라고 극이라고 하는 건 그렇습니다 제가 이것을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반탁 운동은 45년 12월 27일에 보도로 시작된 반타 운동
임시정부가 중심이 된 반타 운동을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미군정과
하지와 이승만의 중심이 해서 벌어졌던 진정한 의미의 반타 운동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기억되지도 않고 기록되지도 않았죠네 처음 들어보시죠 사실은 이런
얘기를 왜 처음하게 될까요 왜 처음 듣게 될까요 독 중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이승만이 들어와서 결국은
50개 정당 사회단체 통일하겠다는 정당도 아니에요 프런트에
일종의 위원회에 그런데 박한영 여영 탈퇴하고 결국은 전형위원 모두가
한민당이고 귀국한 임정도 참여를 거부하고 12월 16일에 모스크바 삼성 회담이 개최되니 이거는 끝나
버렸어요 미군정이 한민당의 말을 믿고 이승만의 말을 믿고 전폭적으로 지지를
했는데 결국은 바보들의 행진이 된 거죠 12월 26일에 만 아주 강력한
반탁 성명을냅니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하느냐 모스크바 회담 결정이 나기 전에 누가 알고 있었다 미군정이 알고
있었습니다 이게 누구의 게임이다 미국의 플래닝이 국제 신탁이라는게 이승만이
알았습니다 한민당의 알았습니다 핵심적인 사람들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다음날 동아일보가 신탁통치 보도하지네 유명한
오보 동화일 오보는 아니라는 얘기예요 왜 합동 통신을 전제한 거라는 거예요
미국에서 보도됐고 한국에서도 신 조선보다 조선일보가 보도 있어 그런데 일면 탑으로 거기에 좀 마사지를
했죠이 동화일보이 보도에는 팩트라고 하는 건 지명하고 임명 뿐이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 허위 사실입니다 왜곡입니다 예를 들어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한국인들의 투표로 결정 기로 했다
그런 사실이 있습니까 국민 투표로 없습니다 모스크와 회담에서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했는데 소련은 어 소련
일국 신탁통치 주장했다 사실인가요 그런 일 없습니다 소련 주장이
계속되는 날 38선 분할이 지속된다고 한다 여기에는 팩트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 이름 미 미국무장관 번스 뭐 모스크바 이런 거 빼고는 사실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스크 회당 결정이 45년 12월 27일 싱 시각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 시각으로 28일입니다 24군단 사령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가 모스크바 회담 결정문을 언제 손해 주었을까요 12월 29일 오후에
손해 주였습니다 근데 한국에서는 이미 원문도 보지 않고
28일부터 반탁 운동이 벌어져서 격렬한 민족주의의 에너지가 폭발해서
초신성으로 빛났습니다 네도 정이 있었는지는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지만 반대 운동이 벌어지게 된
거죠 모든 블랙홀처럼 끌어들였습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임정 지지를
내세우고 독촉 주을 추진했지만 손에 들어온 권력을 임정과 나눌 생각은
없었습니다 임정을 세일 지에서 권력을 줬습니다네 이승만 그립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죠 임정을 팔았지만 임정은 국제적으로 공인 못됐어 그러니까
어떻게 임정 해체하고 개인으로 들어와야 돼 손에 들어온 권력을 나눌 생각은 없었습니다 임정을 해체하고
개인으로 흑설 구성이었습니다 45년 12월 15일 회의인데 모스크바 결정을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장덕수
군정 생각은 임정 그대로 두고 독축 중역을 한국 정부로 할 것이다 허정
있니다 419 때 과도 정부 수반으로 이승만을 하와이 망명시 사람이죠
이승만의 권입니다 대외 관계로 임정 부인하기 때문에 독촉 중을 조직한 것이고 군종의
요구인 가장 빠른 방법의 결정체다 행정권을 위한다 내력이다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들 알고 너무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하지 않는게 좋을 거야 나는 다 알지만 너희는 몰라도
돼 그건 최고 밀이야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송진우 일체를이 박사에게
위임 시켜서 대사의 유감이 없도록 하자 하지의 말에 따르면 내년 1 2월이 가장
긴박하다 그니까 사실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핵심들은 모스크바 회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서 독적 중을 만들었고 그것을
모스크와 회담에 대안으로 제시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엉망진창 하지라는
말을 이제 제임스 메트레이가 했는데요 미군정이 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임시정부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내세워서 독촉 중용이라는 걸 만들어
정당 통일 운동으로 과도 정보를 만들었고 미국 기록에는 정무위원회 이승만 기록에는 국무회의 국정
회의입니다 뭐 구성으로는 정말 좌파 중도좌파 임정이 참여를
거부했고 시기적으로도 모스크바 삼성가 개막해서 이미 때가 늦어졌습니다
그런데이 실패는 잊혀졌습니다 왜 뭐 그다음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거대한 반탁 운동의 폭풍우가 토네이더 몰려와서 다 휩쓸고 지나갔죠
미군정 한민당 이승만이 맹렬하게 전개한 알려지지 않는 진정한 반타 운동이었고 역사에서 기억되지 않은
반타 운동이었고 그렇지만 46년 후에 미군정은 당연히 관성을 따라가게 되는
거죠 정책을 결정하게 되면 따라가게 되는 거죠 운동 에너지가 있는 거죠 한민당 이승만 미군정이 기축 동맹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유지되었지만 이승만이 도미 외교 하러
갑니다 파지가 이승만을 위해서 전력을 기울여서 이승만을 만들었는데 이승만은
좌부 합자 운동으로 자기가 밀려난다고 생각했어요 이승만 미국에 도착하자 일성이
뭐였냐 아니 보수주의자가 아닌 한국인 공 한국인은 공산주의자라고 신봉하던
하지를 보고 하지는 빨갱이에 해임시켜야 돼요가 이승만의
성이었습니다네 돌 보지 않았습니다 결국은이 시기가 되면 미군정이 남한을
중심으로 자유 귀지 노선을 추구하고 소련 군정이 북한에서 민주 기지 노선
이건 인민민주주의 혁명 기간에 북한을 혁명의 기지로 쓴다는 얘기죠 북한 중심에 이런 노선이 대결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얘기는 이상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 저번에 강의를 듣고 국정 교과서 역사 내용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교수님 책을 읽고 비교해 봤는데 교수님 입장에서 지금 교과
상으로 알 수 있는 지식과 교수님이 연구하신 거의 차이점이 지금 극명하게 마지막에
보여주지 않습니까 교수님께서는 이러한 그 교과서의 내용과 교수님의 차이점 또 하나는
이승만이 분단의 원흉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데 교수님 기면서 저는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이승만은 그걸 다 뒤집어 쓰기 좀 어한 명이 있다이 두 가지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뭐 이건 연구자들이나 당대에 살던 사람들은 모르는 얘기니까 당연히 교과서에 쉴 수가 없는 것이고요
하지는 사실은 반탁운동을 고무하는게 사실이고 반탁운동을 고무하다 이제 임정의 뜨거운 군정을 붕괴시킬 정도의
반탁 운동의 에너지 때문에 미군정을 접수하려고 해서 큰일 할 뻔했죠 반타
운동을 고무하다 그렇게 된 건 사실이고요 제책을 읽고 이승만을 그렇게 생각하신다는 건 뭐 독자의 자유라고
생각을 하고요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보신다면 몇 시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뭐 오늘 주제는 아닌 거 같고요 제 책을 그렇게 읽으셨다니 뭐 저로서는 고맙습니다 지금 그 미군정
시기가 미국으로 따지면 그 민주당 집권기인 당시에 미국 공화당에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입장이 어땠는지 궁금하고요 두 번째로는 여운이나 박헌영 씨 같은 경우에 당시이 전국에
에서 소련이나 중국 쪽 하고는 접촉이 없었는지 공화당으로는 이제
루즈벨트의 정말 연구 직권이 있잖아요 4선까지 했고 그 루즈벨트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제 트루만 그부 권력을 되찾 될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점차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메가티어 같은 그런
냉전의 전초전이 벌어지게 되는 거죠 우리가 아는 것처럼 47년이 이제 분수령 있니다 트루만 독트린이 있고요
그전에 처치의 철해 장막 선언이 있고 조지의 198 4라고 하는 것도
1948년이아요이 사람이 제 병들어서 세계 핵전쟁으로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미소의 충돌로 그런 우려를 갖고 있던 시대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었고요 박헌영은 당연히 소련
영사관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하고요 소련 영사관이 일소 불가침 조약 때문에 어 도쿄에도 서울에도 양국의
영사관이 있었습니다 한반도가 독립된 교주 가 아니기 때문에 소련 영사관이 있었고 여기 신이라고 하는 총영사가
있었고 해방 후에 박한용 조선 공산당에 대한 여러 뭐 정보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북한을 관리하던 것은
제 어 외무성 그다음에 국방성 그다음에 KGB 여러 라인이 있었고요
그중에 외무성 라인을 통해서 박헌영이 이제 소련에 소개되고 어 홍보되고
생각을 합니다 여운형은 사실은 한반도에 있는 정치인 가운데서 유일하게 미군정에 드나들면서 소련
군정의 공개적으로 드나 유일한 사람입니다 미군정이 드나들기 때문에 박헌영은 미국의 게임에 놀아나는 신미
주의자라고 비판을 했고요 반면 우파들은 북한에 가서 공개적으로
소련군의 뭐 고위 간부들을 만나고 뭐 김일성 김두봉 만나고 오니까 북한하고
거래하는 친 공산주의자라고 비판을 하게 되는 거죠 여영은 그런 입장이었고 그렇지만 여영은 뭐 그런게
굉장히 꺼리낌이 없이 한 사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38선 단이라고 하는게 연합군 일반명령 1로로
38선으로 그어졌고 없기 때문에 미군정하의
한국인의 자유로 왕래를 통행을 금지할 수 있는 법령이 없습니다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에 있는 당대의 정치 지도자들이 북한에 있는
조만식이나 김일성이 서울에 와서 서울에 있는 이승만과 박헌영과 뭐
정치인들이 북한에 가서 자유롭게 한반 의 미래를 통일 독립을 논의하기 위한
주체적인 자주적인 협상 왜 못했느냐 저는 따져봐야 된다고 생각합 지금
21세기에 지금 우리가 그런 걸 생각해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48년에 남북협상 이미 모든게 셋업
되고 끝나 있는 상태였습니다 김구나 뭐 김규식 다 알았습니다 가서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갈 수밖에 없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갔습니다 누군가에게 편승해서
반쪽을 굳히려 하는 생각들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통일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예
교수님 강의와 책을 통해 가지고 상당히 새로운 방향을 볼 수 있었던 거 같은데 이제 46년에 가서 미소
공유가 1차 결렬되고 이승만이 정업 발언을 통해 가지고 단독 정부 수립을
얘기한 이후에 좌우 합자 위원회가 만들어지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시점에 운영이나 김규식을 대하는 태도가 혹시 미군정 입장에서 그
시점부터 달라진 건 아닌지

네 사실은 이승만의 정업 발언이 46년 6월인데
그 이전에 46년 1월에 이미 남한만의 분단 정부를 수입해야 된다
자율 정부라고 얘기하죠 그런 말을 지속 반복적으로 했습니다 그게 이제 46년 6월에
공공이 무기 휴회 함께 폭발을 했고요 사실은 어 하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좌우합작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중도 좌파를 좌파로 떼어내서 중도 우파와
합해서 우파에 갖다 붙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미군정이 독 중해 봤
정무위원 해봤습니다 실패했습니다 46년 2월에 민주의원 해봤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는 뭐가 문제였다고
생각했느냐 한국인들이 추천을 받지 않은 대성이 없는 미군정이 임명하는 조직은 문제가 있다 그
한국인들이 최소한 중도 좌우파가 지지하고 대표하는 그런 조직에 의해서
뭔가를입니다이 면 어디에 도움이 되느냐 일단 미스 공동 위원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미군정의지지 기반을
넓힐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입법 기구에도 쓸모가 있는 거죠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조합적 운동을 지지했지만 전심 전력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왜 46년
5월이 제가 인제 매진 말에서 45년 6월의대 분기하고 썼는데요 그런데
미군정의 정책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정치 자금에서 그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46년 5월에 이승만은 미군정으로부터 조선은행 발권력을 통해서 조선은행
은행부터 2천만 원 대부를 받아서 그중에 1천만 원을 받습니다 조선 공산당은 같은 조선 은행의 발권력을
위조했다고 유조 집회 사건으로 걸려서 공산당이 불법화 되고 다 체포가 되는 거죠 패망 후에 조선내 화폐를 여러
군데서 찍었습니다 원래는 일본에서 찍어서 들어왔는데 조선 인쇄 주식 회사와 정판사 이런 데서 찍었습니다
근데 나중에는 수수가 260만 원에서 공판 과정에서는 1,300만 원까지 갔습니다 굉장히 큰 금액이죠 근데
조선 공산당 주장에 따르자면 위패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13만 장 중에서 위패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또 중요한 증인들이 다 고문에 의한 허위 자격이라고 번복했지만 그 사람을 재판에서
배제시켜 거짓말로 어 처벌했습니다 미군 정으로서 46년 5월 이후에
조선 공산당에게 마이너스 260만 원 내지 1300만 원과 어 정치적인 압력을
가한 것이고요 좌우 합적 운동을 하는 김주식에는 약간의 장치장 2 300만
원을 제공했습니다 하지와 중국 원세훈과 김규식의 이름을 단
하춘식이란 이름으로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립서비스로 좌업 운동 지지한다고 했고요 여운영 게는
끊임없이 공작을 하는 거죠 미군정에 가진 수환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치자금 지원이지 선전이 조직이죠 정치적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죠 이건 우호적인 사람들한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편에 뭐랍니까
정치적인 기소 탄압을 하는 것이고요 김구한는 냉담 여하는 공자 상대에
따라서 다양한 수을 쓰게 된 거죠 그니까 46년 5월에 미군정의 본심이
뭐였냐 사실은 미군정의 본심은 우파는 아껴두고 중도 좌파를 중도 우파로
끌어당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운형은 반면에 중도 우파를 중도 좌파로
끌어들여서 그걸 자신의 정치 기반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고요 사실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서 노력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한국에서 가장 용몽게 뭡니까 정치적이다 아니 정치인이
정치적인게 욕 먹는게이 나라예요 학생 보고 학생 다워 욕입니다
기업가 보고 기업과 다워 근데 정치 뭐 정치적이 욕입니다 한국에서
끊임없이 정치를 시키고 정치를 악마화 시키고 정치로부터 스스로를 소회 뭐여
같은 경에 그렇습니다 여도 정치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하냐 좌우합작 남북
연합 미소 연합 이런 길입니다 그게 대의에 맞고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에
맞으니까 그런 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김규식은 어떤 입장입니까 중도파를
확장해서 중도파를 기반으로 남한의 정치적 기반을 갖겠다 혹은
김규도 북한과 협력 필요하다고 믿던 정치인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남북 협상에 가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개인적인 플랜 정치적인 기획과 당시
상황 조건에서 주어지고 있는 정치 현상에 맞게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거죠 그래서 중요한 정치 지도자들의 특징이 뭡니까 시대 여망 시대 정신과 자신의
개인적인 정치적인 플랜을 일치시킬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민족 지도자가 되는 거죠 대부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욕망만 있는 거죠 뭐 제 생각은 그래서 46년 이후에
일은 역시 미군정의 관성에 따라서 갔고 한민당과 이승만의 기축이 동맹
하에서 일은 추진되었고 나머지 세력들은 좀 들러리와 같았다는게 뭐 저의 생각입니다 그 임시정부 관련해서
원래 임정이 중국에서 이제 활동을 하면서 미군에 있던 OSS 지원도 받고 그리고 뭐 한반도 진공 작전까지
같이 펼칠 정도로 임정이 미군이 가까웠던 거 같은데 그럼 왜 미군이 정작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인정을 하지
않고 왜 개인 자격으로 시켰고 왜 굳이 그걸 안 했는지 좀 궁금하고요는 전략
첩보국이어서 유럽에서 전쟁에 승리에 기여하는 거였어요 근데 승리 기어 못했습니다 그럼 마지막 나은게
동이에요 극동에서 중요한게 일본이고 일본에 직접 들어가지 못하니까 한반도로 침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에서 중국은 인제 OS 이을 독수리 작전으로 낙산 타고 들어오는
학병 탈취했던 장주나 이런 사람들이고요 그다음에 OS 워싱턴은 잠수타고
한반도 남부로 침투하는 OSS 내코를 기획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그냥 특수 공작 기관이니 하는 거고요 미국은 공식 정책으로 망명 정부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이 사람들이
본국 인민들의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라고 확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또 전후에 미국의 대회 정책을 그 나라에 대한 정책의 발목을 잡는 일을
미리 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심지어는 드골의 자유 프랑스 정부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니까 한국 임시 정부가 폴란드 럼 뭐 10만 정도 독립군이
대일 전에 참가했다고 하더라도 인정하지 않았을게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고 생각이 들고요 

항상 궁금했던 건데 우리 미국의 역할이 굉장히 아쉽잖아요 해방후 3년 간에서
근데 항상 나오는 말이 교수님께서도 말씀해 주셨듯이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갖고 있는 정보나 인식이 굉장히 별로 없었다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1882년에 조미소 통상조약 처음으로 이제 발을 디디고 청일 전쟁 러일 전쟁 각종 일을 겪었을 텐데도 왜
이렇게 한국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까는게 늘 궁금했고 왜 하지 같은 사람한테 그냥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했을 거라 생각이 들 정도로 왜 이렇게 무지했을라는 의문이 항상 있었는데요 교수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네 한국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순위에서 배제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식민지가 될 때도 을사 조약이나 을사 약이나
병합 때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관심이 있던 것은 미국의 권인데 그것은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교회 학교 병원 뭐 문화단체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운산 금광이 동양
최대의 그런 사업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요 한국은 이미 1905년
이후에 일본의 국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47년에 미 부는 한국에 계속 주둔해야 된다는 입장이었고요
반면에 군부는 철군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철군 논쟁이 왜 한국은 반동기 때문에 여기는 방어하기 어려워
만약에 미군이 두 개 사단 있는데 북한 군이나 소련이 공격해 오면 포로가 돼 많은 위험이 있어 철수해야
된다는게 군부의 입장이었습니다 국무부는 미국에 개입했다 발을 빼면 안 돼 양자의 타협에 걸고 그럼
어떻게 해 생존 가능한 정부를 수립하고 철수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48년에 정부 수립하고
49년 년에 철근 했고요 미국이 한국을 지켜야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미국의 위신 일본을 지킨다 그다음에 한국을 지킨다라고 하는음 생각이 있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얘기는 

일부에서는 48년에 건국이라는 데 
48년에 이 정부를 만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재언 헌법을 읽어봐야 됩니다 
제언 헌법은 이 정부가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계승해서 만들어진,
 임시정부가 지금 정식 정부로 재건되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48년에 국가로 수립하는게 아니라 
19년에 만들었고 임시 정부를 재건한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니까 사실은 제가 너무 안타까운 것은 

건국절 얘기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이승만의 핵심적인 가치가 임정법통론 법통노회 창한자 이승만입니다 
왜 내가 19년 임시정부 대통령이었고 한성 정부라고 생각하지만 
그 대통령이었고 독립정신의 정통성을 이어받아서 지금
정식 정부를 만드는 거야 

그 48년에 이 정부 수립에 동참한 사람도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 제원 헌법을 읽어 보세요 
자유민주주의 같은 것 없습니다 
민주적 제 질서입니다 
제언 헌법의 경제 조항은 어떻게 돼어 있느냐 
국유 공유 협동적 소유입니다 

왜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을 어떻게 합니까 
누가 불화 받아서 공장 기업 광산을 갔습니까 
전 조선인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결정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되느냐?
 당연히 국유를 해야 된다 
그리고 예외적으로 사적 소유를 인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농직 개요 제법에 들어가 있습니다

친일파 청산면 민이 헌법 부칙으로 10조에 들어가 있습니다 
헌법의 정신은 뭐냐?
 독립 운동을 계승해서 이 정부를 만든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임정법통론이라고 하는게 
마치 김구의 임정법통론 있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우리가 기념하는 임정법통론이라는 것에 출발은 뭐냐?
재원 헌법에 임정법통론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누가 내세웠나?
이승만의 핵심적인 정통성이 그겁니다 
독립운동의 자긍심이 거죠 
사실은 이승만이 가졌던 핵심적인 가치들을 부정하면서 이승만을 찬양해야 되는 시대가 굉장히 그로테스크 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승만 연구자로서 이승만의 핵심적 가치들이 이렇게 부정될 수 있느냐 
뭐 반일 종족주의 위안부 매춘 식민지 근대화론?
이승만이 살아 있으면 무덤에서 벌떡 차고 일어날 얘기 
이승만은 자신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고 그 정통성을 대한민국이 승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강의 무슨 반일 뭐 이런게 있다?
이런게 아닙니다

이 국가의 정통성이 임시 정부터 발언 된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내가 난대 
그게 이승만의 생각입니다 그니까 사실은 이승만 비롯된 임정 보통을 둘러싸고
지금네 혼란스럽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뭡니까 성공하지 못한 실패했지만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에 대해서 우리가 뒤돌아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 로마신 에 나오는 키메라 머리는 사자고 몸은 염소나 양이고 꼬리는 용
혹은 뱀입니다 모든게 붙어 있습니다 
이거는 사자니까 뱀입니다 양입니까 염소가 그 몸에 두 가지가 같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만을 그의 실체라고 얘기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용납될 수가 없는 거죠 [음악]
감사합니다네네 어 다시 한번 2주간 일정적인 강의해
주신 정민 선생께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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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lim6860
3 months ago
정병준 교수의 책과 강의는 해방 직후 초반만 다루고 있어 결론이 없습니다. 여운형 건준운동과 총독부의 농단, 하지의 바보짓 까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언급이 없는데... 아마도 이승만의 건국정신 승리쪽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역사는 해석하는 것인데, 정병준교수의 이후 해석은 이승만 지지 쪽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2부 강의 마지막 부분 독자와의 대화를 들어보면 그게 드러납니다. 정병준 교수는 이승만 지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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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sn7mj6wx9s
1 month ago
임정법통론ᆢ을 주창한
이승만은 양심적이고 인간적이고 훌륭한
국부지요ᆢ

여운형은 환상적이고 낭만주의자 이올씨다
이승만은 예언자ㅡ이며
불세출의 외교가요
실용주의적인
영웅이올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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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nf7vd7mq3h
6 months ago
하지고 나발이고 그런거 얘기하는것도 필요하겠지만 쏘련은 이미 각본이 있었고 김일성 내세워 북한 공산위성국가로 만들기로 했다는 것이다 북쪽 얘기안하고 남쪽 어수선한거 얘기해봤자 소용없는짓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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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ts8vg9cr2y
5 months ago
이승만이  키메라다 라고는 말씀 못하시네요. 아직도 이승만에 대한 판단을 중립적으로 하시는듯. 실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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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sw8uu8jl1e
5 months ago
이승만,,,,건국 대통령을,,,,말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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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vu2hl6tz4g
6 months ago
이 중요한 강의를 왜 정치색이 짙은 김어준 방송에서 하실까요?  색안경끼고  볼 확율이 높은데...책 판매때문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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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yeonlee3013
5 months ago
팬앤드에서 안부르는데 뭔 개소리에요??
JTBC 채널A 티비조선 심지어 벌거벗은한국사에서도 안부르셨는데 뭔 개소리에요???

@user-gu7ew4eb2g
3 months ago
우리의 역시를 알리는 방송이 흔하지 않죠  지금 현실이 이케라도 알면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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