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31

한국 vs 일본 디아스포라 인구 비교



한국 vs 일본 디아스포라 인구 비교표 보기 

Country Korean Diaspora Japanese Diaspora
=========================================
USA             2,630,000           1,550,000
China             2,350,000           102,000
Japan             819,000                 
Canada     237,000                 129,000
Uzbekistan     176,000                 
Russia             169,000                 
Australia     158,000                 95,000
Vietnam     *156,000      베트남에 한국인이 많은 이유는            22,000
Kazakhstan 109,000             
Germany       47,000                 42,000
UK                 37,000                 65,000
Brazil             36,000                 2,000,000
New Zealand 34,000                 
Philippines     33,000                 *120,000
France             25,000                 36,000
Argentina     23,000                 76,000
Singapore     21,000                 33,000
Thailand     18,000                 *78,000
Kyrgyzstan     18,000                   
Indonesia     17,000                 
Malaysia     14,000                   25,000
Sweden     13,000                    
Mexico             11,000                 86,000
India             11,000                 
South Korea                         42,000
Micronesia                                  20,000
Peru                                      103,000
Taiwan                                      20,000
===================================
1] 중남미에 일본인이 많은 것은 옛날 이민의 역사 때문인 것 같은데,
2] 동남아에서는 베트남은 빼고, 필리핀, 타이랜드에 일본인이 많은 이유는 비지네스 때문인가요?
3] 베트남에 한국인이 많은 것은 비지네스 이상으로 은퇴하는 인구인가요?
===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세 가지 모두 디아스포라 연구와 이민사, 현대 국제비즈니스의 흐름을 연결짓는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아래에 각각 상세히 설명드릴게요.


1️⃣ 중남미에 일본인이 많은 이유: “역사적 이민” 때문인가?

→ 그렇습니다.

  • 브라질 (2,000,000명), 페루 (103,000명), 아르헨티나 (76,000명) 등에서 일본계 인구가 많은 것은 20세기 초 일본 정부 주도의 공식 이민 정책에 뿌리를 둡니다.

  • 🔹 첫 대규모 이민:

    • 1908년, 일본 이민선 ‘카스토르号’를 통해 첫 일본 이민자들이 브라질에 도착.

    • 사탕수수·커피 농장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양국 정부의 협력.

  • 🔹 이후 정착과 확대:

    • 일본인 이민자들은 차차 도시로 이동해 상업·교육·농업 등으로 진출.

    • 페루의 전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도 일본계 2세.

  • 🔹 일제 강점기 중·후반에도 일본은 남미 이민을 계속 독려, 이유는 국내 인구 증가와 빈곤 해소, 식민 이데올로기의 확장 목적 등이 포함됨.


2️⃣ 동남아 (특히 필리핀, 태국)에 일본인이 많은 이유는 비즈니스 때문인가?

→ 예, 주로 비즈니스 목적의 체류가 핵심입니다.

  • **필리핀 (120,000명), 태국 (78,000명)**에서의 일본 디아스포라는 과거보다는 현대적 투자 및 기업 진출의 흐름을 반영합니다.

  • 🔹 80~90년대 이후 일본 제조업의 해외 진출:

    • 태국: 도요타, 닛산 등 자동차 산업 진출.

    • 필리핀: 전자, 조립, 부품 생산 등 일본 기업 다수 진출.

  • 🔹 현지 거주자 유형:

    • 장기 주재원과 그 가족들

    • 현지 법인 설립 또는 무역 사절단

    • 퇴직 후 저렴한 생활비와 따뜻한 기후를 찾아 이주한 퇴직자 일부

  • 🔹 문화적 이유도 부가적으로 작용:

    • 일본과 가까운 지리, 편한 언어 습득, 유사한 음식문화, 그리고 동남아 관광의 인기로 장기 체류 전환


3️⃣ 베트남에 한국인이 많은 이유는 비즈니스 이상의 은퇴 인구 때문인가?

→ 비즈니스가 주축이지만, 최근 은퇴 이주도 늘고 있습니다.

  • 한국인 디아스포라 인구: 약 156,000명 (베트남 기준)
    이는 **일본의 베트남 인구(22,000명)**을 훨씬 초과합니다.

  • 🔹 주요 요인 1: 비즈니스 중심의 한-베 경제협력

    •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의 생산 기지.

    • 한국의 중소기업, 외식업, 미용업, 교육업 등 진출 활발.

    • 한류(한국 드라마, K팝) 확산으로 문화적 친밀감도 증가.

  • 🔹 주요 요인 2: 은퇴자와 장기 체류자 증가

    • 베트남 특히 다낭, 나트랑, 호치민 등에 은퇴 이주자 커뮤니티 형성 중.

    • 한국보다 저렴한 생활비, 따뜻한 기후, 한국어 가능한 서비스와 병원 등 인프라가 매력.

  • 🔹 주요 요인 3: 국제 결혼 및 혼혈 2세

    • 2000년대 농촌 총각의 국제결혼 붐 시절 많은 한국 남성들이 베트남 여성과 결혼.

    • 이로 인한 양국 간 인구 이동과 정주형 이민도 꾸준히 존재.


📌 정리 요약 (요청하시면 표로도 제공 가능)

질문요약 답변
중남미에 일본인이 많은 이유20세기 초부터의 역사적 이민 정책 때문 (특히 브라질, 페루)
필리핀·태국에 일본인이 많은 이유현대적 비즈니스 진출 + 일부 퇴직 이민 때문
베트남에 한국인이 많은 이유기업 투자 + 은퇴 이주 + 국제결혼 등 복합적 요인

필요하시면 시기별 인구 변화 그래프, 일본과 한국의 공식 이민정책 변천사도 추가로 정리해드릴 수 있습니다.



===

경계 허무는 K·J팝… 상대국 공연 넘어 ‘콜라보’ 시대로 [방구석 도쿄통신]

경계 허무는 K·J팝… 상대국 공연 넘어 ‘콜라보’ 시대로 [방구석 도쿄통신]



경계 허무는 K·J팝… 상대국 공연 넘어 '콜라보' 시대로 [방구석 도쿄통신]

[95]
韓日 수교 60년, 가수들 협업으로 쓰는 새 역사
K팝 간판 아이돌 신곡을 일본 국민가수가 작사·작곡
일본 힙합그룹 데뷔 25주년 기념곡에 한국 래퍼가 참여
"민간 교류, 정치 악재 덮쳐도 안 무너질 듯"
김동현 기자
입력 2025.06.18.


K팝 걸그룹 르세라핌 단체 사진(왼쪽)과 이들이 주제가를 부른 일본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마이 멜로디와 쿠로미’ 포스터/유튜브

K팝 간판 5인조 걸그룹 르세라핌이 내달 공개되는 일본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마이 멜로디와 쿠로미’ 주제곡 가수로 낙점됐습니다. 일본 엔터테인먼트사 산리오의 대표 캐릭터 ‘마이 멜로디’와 ‘쿠로미’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입니다. 한국어로 ‘귀엽다’는 뜻인 ‘카와이(可愛い)’란 제목의 이번 신곡은 일본 국민 가수 겸 배우인 호시노 겐(44)이 작사·작곡·편곡을 도맡았습니다.

르세라핌은 2022년 5월 데뷔한 하이브 소속 걸그룹으로 멤버 중 2명이 일본 국적입니다. 일본의 연말을 대표하는 가요 특집 프로그램 NHK 홍백가합전에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출연할 정도로 현지 인지도가 높습니다.

일본 가수 겸 배우 호시노 겐/hmv.co.jp

호시노는 2001년 연극배우로 데뷔해 가수, 예능 MC로까지 왕성히 활동 중인 톱스타입니다. 한국인들에겐 2016년 방영한 일본 TBS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의 주인공역으로 익숙합니다.


일본 오리콘뉴스는 “호시노가 분석한 (산리오) 세계관과 르세라핌의 매력이 결합돼 캐릭터들의 귀여운 모습뿐 아닌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라’라는 작품 메시지를 담아냈다”고 지난 12일 전했습니다.

일본 국민 가수 호시노 겐이 지난달 14일 발매한 6집 앨범 '겐' 수록곡 목록. 6번 트랙에 한국 여성 래퍼 이영지가 참여했다./X

앞서 호시노는 지난달 14일 정규 6집 앨범 ‘겐(Gen)’을 발매하며 수록곡 피처링 가수로 한국 여성 래퍼 이영지(23)를 깜짝 발표했습니다. 두 가수는 호시노가 자신의 대표곡 ‘코이(恋·사랑)’ 안무를 추는 이영지의 영상을 소셜미디어에서 본 것을 계기로 친목을 쌓아 왔다고 알려졌습니다.

최근 일본 국민 가수 호시노를 비롯해 K팝과 J팝 간판 아티스트들이 서로 ‘콜라보(협업)’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양국 가수가 상대국을 오가며 공연 활동을 하는 건 과거부터 적잖았지만, 이를 넘어 서로 친목을 다지고 협업까지 하는 일이 늘면서 양국 민간 교류의 장이 다각적으로 넓어지는 양상입니다.

한국 음악 프로듀서 이오공(왼쪽)과 일본 싱어송라이터 후지이 카제/daebak.tokyo

유튜브 구독자 470만명을 보유한 J팝 싱어송라이터 후지이 카제(28)는 오는 9월 발매하는 3집 앨범 ‘프리마(Prema)’에서 한국 작곡가 이오공(43)과 협업했습니다. 이오공은 K팝 걸그룹 뉴진스의 곡들을 제작한 프로듀서로 유명합니다.

후지이는 지난해 내한 콘서트 당시 2만석 규모의 서울 고척스카이돔을 전석(全席) 매진시켰습니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인기를 입증한 후지이와 국내 음원 차트를 ‘올킬’했던 이오공이 합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팬들의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방탄소년단(BTS)과 백넘버가 2021년 합작곡 발표 당시 찍었던 단체 사진

과거는 어땠을까요. 불과 4년 전인 2021년엔 K팝 대표 아이돌인 방탄소년단(BTS)이 일본 록밴드 백넘버와 콜라보해 신곡 ‘필름 아웃’을 냈지만 국내에서 별다른 화제를 모으지 못했습니다. 발매 직후 일본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한 반면 한국 주요 음원 차트엔 이름도 올리지 못했어요. 한국 대중음악 시장은 정치·외교·과거사 등의 문제로 ‘J팝의 금역(禁域)’이라 불릴 정도로 일본 음악에 보수적이었던 탓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끝나고 2022년 무렵부터 양국 외교 관계가 눈에 띄게 진전되며 민간 교류도 덩달아 확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매해 수십 팀의 일본 가수들이 내한 공연을 와 만석 행렬을 이어갈 정도로 J팝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대중음악 전문가들은 한일 양국이 거리가 가까워 스케줄 강도가 높은 톱스타도 비교적 부담 없이 오가기 쉬운데다, 민간 교류 확장으로 상대국에서의 활동이 ‘돈’이 되기까지 시작해 콜라보 사례가 늘게 됐다고 분석합니다.

한국 가수 겸 프로듀서 지코(왼쪽 아래)가 일본 혼성 힙합 그룹 엠플로와 18일 합작곡을 발표했다./KOZ엔터테인먼트

방구석 레터 게재일인 오늘(18일)엔 K팝 아이돌 출신 가수 겸 프로듀서 지코(33)와 일본 혼성 힙합 그룹 엠플로(m-flo)가 협업한 곡(‘에코 에코’)이 발매됐습니다. 엠플로 데뷔 25주년을 기념한 합작곡이라고 합니다.

한일 혼혈 J팝 래퍼 찬미나(27·한국 이름 전미나)는 2022년 협업했던 국내 래퍼 애시아일랜드(26)와 지난해 7월 결혼을 발표했고요. 일본 가수들의 ‘꿈의 무대’라고 불리는 도쿄 부도칸(武道館·무도관)에서 공연했던 싱어송라이터 마유무라 치아키(29)는 최근 한국 래퍼 미누에 이어 아이돌 펜타곤 소속 정우석과 합작한 신곡을 연달아 발표했습니다.

지난 1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일 수교 60주년 기념 리셉션. 수많은 인파가 참석했다./방구석=김동현 기자

최근 서울에서 만난 일본 유력 매체 정치부 기자는 “한일 민간 교류가 정치 영향권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거대해졌다”고 하더군요. 기록적으로 늘어난 K팝과 J팝의 교류를 보고 있자면 과거 ‘노 재팬(일본산 불매 운동)’ 등 정치권 이슈로 불거진 양국 관계 악재가 다시 덮쳐도 민간 교류만큼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는 얘기였습니다. 방구석에서 지켜보는 양국 관계 전망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음 주 다시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현해탄 건너 당신이 궁금해 할 일본 이야기.

Arab World Tells Hamas to End Gaza Rule, Lay Down Weapons - Newsweek

Arab World Tells Hamas to End Gaza Rule, Lay Down Weapons - Newsweek

Arab World Tells Hamas to End Gaza Rule, Lay Down Weapons
Published Jul 30, 2025 at 12:51 PM EDT

The Arab world has condemned Hamas, telling the group to end its rule in Gaza and hand over its weapons to the Palestinian Authority.

Qatar, Saudi Arabia and Egypt joined 14 other countries in signing a declaration at a U.N. conference that condemned the Oct. 7 attacks on Israel and gave "unwavering support" to a two-state solution.

"In the context of ending the war in Gaza, Hamas must end its rule in Gaza and hand over its weapons to the Palestinian Authority," the declaration said. "In line with the objective of a sovereign and independent Palestinian State."
Why It Matters

The declaration marks the first condemnation of Hamas by Arab nations.


Hamas launched an attack on Israel on Oct. 7, 2023 that killed about 1,200, mainly Israeli civilians. Militants took about 250 people hostage, around 50 of whom are still being held.

The declaration also condemns Israel's attacks on civilians and civilian infrastructure in Gaza, citing Israel's "siege and starvation, which have produced a devastating humanitarian catastrophe and protection crisis."

Israel's offensive against Hamas has killed over 60,000 Palestinians, according to the Gaza Health Ministry, which doesn't distinguish between civilians and combatants.


What to Know

Read more Hamas
Iran-Backed Fighters Parade Hostages as Trump Faces New Crisis

Iran Ally Issues New Global Threat

Hamas Hits Back at Donald Trump: 'Propaganda and Lies'

US Must Recognize Palestine Amid Gaza Starvation Horror, Says Jill Stein

The "New York Declaration" has laid out a phased strategy to resolve the nearly eight-decade-old Israeli-Palestinian conflict and the ongoing war in Gaza.

The plan envisions the creation of an independent, demilitarized Palestine, coexisting peacefully alongside Israel.

The declaration called for all hostages to be released: "Only by ending the war in Gaza, releasing all hostages, ending occupation, rejecting violence and terror, realizing an independent, sovereign, and democratic Palestinian State, ending the occupation of all Arab territories and providing solid security guarantees for Israel and Palestine, can normal relations and coexistence among the region's peoples and States be achieved."

The declaration comes amid reports of widespread starvation and famine in Gaza, fueling global outrage over Israeli policies that have limited food access to Palestinians. Israel has denied these allegations and says it has begun a series of measures to address the humanitarian crisis.

Hidaya, a 31-year-old Palestinian mother, carries her sick 18-month-old son Mohammed al-Mutawaq, who is also displaying signs of malnutrition, inside their tent at the Al-Shati refugee camp, west of Gaza City, on July 24, 2025.... More OMAR AL-QATTAA/AFP via Getty Images

Initially scheduled for two days, the meeting has been extended into Wednesday as representatives from around 50 nations have yet to deliver their statements.

Israeli Prime Minister Benjamin Netanyahu opposes a two-state solution. He rejected the U.N. meeting on both nationalistic and security grounds.
What People Are Saying

Jean-Noel Barrot, France's foreign minister, praised what he described was a "historic and unprecedented" declaration.


"For the first time, Arab countries and those in the Middle East condemn Hamas, condemn Oct. 7, call for the disarmament of Hamas, call for its exclusion from Palestinian governance, and clearly express their intention to normalize relations with Israel in the future," he said.

Tammy Bruce, the U.S. State Department spokesperson, said: "This week, the U.N. will serve as host to an unproductive and ill-timed conference on the two-state solution in New York City. This is a publicity stunt that comes in the middle of delicate diplomatic efforts to end the conflict. Far from promoting peace, the conference will prolong the war, embolden Hamas, and reward its obstruction and undermine real-world efforts to achieve peace."

Israel's U.N. Ambassador Danny Danon criticized the some 125 countries participating in the conference, saying: "There are those in the world who fight terrorists and extremist forces and then there are those who turn a blind eye to them or resort to appeasement."

This article includes reporting from The Associated Press.



Qatar, Saudi Arabia, Egypt sign declaration calling for Hamas to disarm, end rule of Gaza at UN 2-state confab | The Times of Israel

Qatar, Saudi Arabia, Egypt sign declaration calling for Hamas to disarm, end rule of Gaza at UN 2-state confab | The Times of Israel

Live Update From the Liveblog of Tuesday, July 29, 2025
Qatar, Saudi Arabia, Egypt sign declaration calling for Hamas to disarm, end rule of Gaza at UN 2-state confab

By AFP and Jacob Magid
Follow
29 July 2025


Arab countries, including Qatar, Saudi Arabia and Egypt, have signed onto a statement calling for Hamas to disarm and end its rule of Gaza, in a bid to end the devastating war in the Palestinian territory.

Seventeen countries, plus the European Union and Arab League, are throwing their weight behind a seven-page text — obtained by The Times of Israel — agreed at a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reviving the two-state solution for Israel and the Palestinians.

“In the context of ending the war in Gaza, Hamas must end its rule in Gaza and hand over its weapons to the Palestinian Authority, with international engagement and support, in line with the objective of a sovereign and independent Palestinian State,” says the declaration.
Promoted: Sheba, Rising LionKeep Watching


The text also condemns the deadly Hamas attacks against Israel on October 7, 2023, which launched the war.

France, which is co-chairing the conference with Saudi Arabia, calls the declaration “both historic and unprecedented.”

“For the first time, Arab countries and those in the Middle East condemn Hamas, condemn October 7, call for the disarmament of Hamas, call for its exclusion from Palestinian governance, and clearly express their intention to normalize relations with Israel in the future,” says French Foreign Minister Jean-Noel Barrot.

The text, co-signed by France, Britain, and Canada among other Western nations, also calls for the possible deployment of foreign forces to stabilize Gaza after the end of hostilities.

Israel and its ally, the United States, did not take part in the meeting.

“We supported the deployment of a temporary international stabilization mission upon invitation by the Palestinian Authority and under the aegis of the United Nations and in line with UN principles, building on existing UN capacities, to be mandated by the UN Security Council, with appropriate regional and international support,” says the declaration.




Arab states call on Hamas to disarm and relinquish power in unprecedented move | CNN

Arab states call on Hamas to disarm and relinquish power in unprecedented move | CNN

Arab states call on Hamas to disarm and relinquish power in unprecedented move
By
Nadeen Ebrahim
Updated 9 hr ago


Palestinian Hamas militants gather at the site of the handing over of the bodies of four Israeli hostages in Khan Younis in the southern Gaza on February 20, 2025. Eyad Baba/AFP via Getty Images





Arab and Muslim states including Qatar, Saudi Arabia and Egypt have for the first time issued a joint call for Hamas to disarm and relinquish power in the Gaza Strip as part of efforts to end the war in the territory.

The 22-member Arab League, the entire European Union and another 17 countries backed a declaration signed at a United Nations conference co-hosted by Saudi Arabia and France on Tuesday.

The meeting in New York aimed to address “the peaceful settlement of the question of Palestine and the implementation of the Two-State Solution,” and the declaration lays out what steps the signatories think should be taken next.

“Governance, law enforcement and security across all Palestinian territory must lie solely with the Palestinian Authority, with appropriate international support,” the joint document read, adding that “in the context of ending the war in Gaza, Hamas must end its rule in Gaza and hand over its weapons to the Palestinian Authority, with international engagement and support, in line with the objective of a sovereign and independent Palestinian State.”

The text also condemned the deadly October 7, 2023 attack by Hamas on Israel, and proposed the deployment of “a temporary international stabilization mission” upon invitation by the PA and “under the aegis of the United Nations.”

“We welcomed the readiness expressed by some Member States to contribute in troops,” it said.
Related article



Britain to recognize Palestinian state unless Israel agrees to Gaza ceasefire


France, who co-chaired the conference, called the declaration “unprecedented.”


Speaking at the UN Tuesday, Jean-Noël Barrot, the French foreign minister, said that “on the part of Saudi Arabia and the Arab and Muslim countries who for the first time will condemn terrorism, the acts of terror on the 7th of October, a call for the disarmament of Hamas and expressed their hope to have a normalized relationship with Israel in due time.”

The Hostages and Missing Families Forum commended the declaration, saying: “We welcome this important progress and the Arab League’s recognition that Hamas must end its rule in Gaza. Kidnapping innocent men, women, and children is a blatant violation of international law and must be unequivocally condemned.”


Both mediators in ceasefire negotiations, Qatar and Egypt have maintained ties with Hamas and Israel throughout the war.


In March, a plan for Gaza formulated by Egypt excluded Hamas from governance of the enclave once the war ends, a draft of the plan obtained by CNN showed.

The plan was discussed by Arab leaders meeting in Cairo in an emergency summit, with Egypt’s president proposing a Palestinian committee to temporarily govern Gaza – taking over from Hamas and eventually handing power to the Palestinian Authority (PA).

Saudi Arabia has repeatedly pushed for a revival of the two-state solution.

France has said it will vote to recognize a Palestinian state in September, to Israel’s dismay. The United Kingdom also said it will recognize a Palestinian state in September unless Israel agrees to a ceasefire in Gaza. Both Israel and the United States condemned France and Britain’s statements.


Hamas has, however, shown no signs of relinquishing power in the enclave, yet officials within the militant group have in the past given contradictory statements about the movement’s role in a post-war Gaza.

Israel’s Prime Minister, Benjamin Netanyahu, vehemently opposes the two-state solution, arguing that it is incompatible with his country’s security.

This story has been updated with additional developments.

CNN’s Becky Anderson contributed reporting.




Last soldiers of Imperial Japanese Army have a warning for younger generations - The Japan Times

Last soldiers of Imperial Japanese Army have a warning for younger generations - The Japan Times



Last soldiers of Imperial Japanese Army have a warning for younger generations

Kunshiro Kiyozumi, 97, who was the youngest crew member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submarine I-58 in World War II, on his way to a restaurant to have lunch in Matsuyama, Japan, on April 29. | Ko Sasaki / The New York Times

By Martin Fackler
The New York Times
SHARE/SAVE
Jul 29, 2025


기사를 들어보세요.
11 분



Kunshiro Kiyozumi is a small man with gray hair and a stooped back who lives alone and still pedals his bicycle to the supermarket. At 97, he cuts an unprepossessing figure to the younger shoppers busy texting while filling their carts, unaware that his life contains a dramatic story shaped by history’s deadliest war.

At age 15, Kiyozumi became the youngest sailor aboard the I-58, an attack submarine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In the closing days of World War II, it prowled the Pacific Ocean, torpedoing six Allied ships, including the heavy cruiser USS Indianapolis, which it sank.




He served in a military that committed atrocities in a march across Asia, as Japan fought in a brutal global conflict that was brought to an end with the atomic bombings of two of its cities. All told, World War II killed at least 60 million people worldwide.

But the living veterans such as Kiyozumi were not the admirals or generals who directed Japan’s imperial plans. They were young sailors and foot soldiers in a war that was not of their making. Most were still in their midteens when they were sent to far-flung battlefields from India to the South Pacific, where some were abandoned in jungles to starve or left bearing dark secrets when the empire fell.



A photograph of Kenichi Ozaki when he enlisted in the Imperial Japanese Army at age 15 during World War II, at his home in Kyoto, on April 27. | Ko Sasaki / The New York Times



After Japan surrendered on Aug. 15, 1945, they returned to a defeated nation that showed little interest in their sacrifices, eager to put aside both painful memories and uncomfortable questions about its wartime aggression. Kiyozumi lived a quiet life, working at a utility company installing the electrical wires that helped power Japan’s reconstruction. Over time, his former crewmates died, but he rarely spoke about his wartime experiences.

"I am the last one left,” Kiyozumi said in his home, showing fading photographs of the sub and himself as a young sailor.

As the 80th anniversary of the war’s end approaches, the number of veterans still alive is rapidly dwindling. There were only 792 Japanese war veterans still collecting government pensions as of March, half the number of a year earlier.

Now in their upper 90s and 100s, they will take with them the last living memories of horrors and ordeals, but also of bravery and sacrifice — powerful accounts that hold extra meaning now, as Japan builds up its military after decades of pacifism. Here are some of their stories.
Starved in the jungle

Kenichi Ozaki was 15 when he enlisted in 1943, as most young men were expected to do as the tide of war turned against Japan. Told that it was a righteous cause, he joined the Imperial Japanese Army out of middle school in rural western Japan over his parents’ objections.

Less than halfway through his training to become a radio operator, Ozaki was rushed to the Philippines, where the Americans had arrived to try to reclaim their former colony from the Japanese. Poorly equipped and ill-prepared, the Japanese force was quickly routed.



Ozaki, 97, who, after joining the Imperial Japanese Army out of middle school, was deployed to the Philippines, where he stayed until the end of World War II, at his home computer, on which he now does day trading, in Kyoto on April 27. | Ko Sasaki / The New York Times



The demoralized survivors fled into the jungle, where they wandered for months. Ozaki watched those around him fall from attacks by Philippine guerrillas or starvation. While he survived on leaves and stolen crops, Ozaki saw soldiers eat what appeared to be the bodies of dead comrades.

After the war, he returned to Japan, where he made a career at a company making electrical parts, rising to executive. For a half-century, he didn’t speak of the war. He broke his silence when he realized how few people knew what his fallen comrades had endured.

Now 97, Ozaki still dreams of those left behind, told they were dying for the glory of the empire, but sent into combat with no hope of victory.

"In their last breaths, no one shouted for the long life of the emperor,” said Ozaki, who lives in Kyoto with his son, also retired. "They called out for their mothers, whom they would never see again.”
Kept a dark secret

For more than 70 years, Hideo Shimizu kept silent about the horrors that he experienced.

Born in the village of Miyata in mountainous central Japan, he didn’t know much about the war when he was forced to enlist in a youth brigade in 1945 at the age of 14. Because he was dexterous, a teacher recommended him for a special assignment.



Hideo Shimizu, 95, who was part of the secretive Unit 731 developing new weapons for the Imperial Japanese Army, which he was told never to speak about after World War II, at his home in Miyata, Japan, May 15 | Ko Sasaki / The New York Times



After days of travel by ship and train, Shimizu arrived in Harbin in Japanese-controlled Manchuria, where he learned he would be joining Unit 731, a secretive group developing new weapons.

At first, Shimizu dissected rats. Then, he was taken to see the unit’s real experiments. He never forgot the sight: Chinese civilians and captured Allied soldiers preserved in formaldehyde, their bodies flayed open or cut into pieces. They had been infected with bacteria and dissected alive to see the effects on living tissue.

When the war ended, his unit escaped the advancing Soviets by rushing back to Japan, where he was told never to speak again about their work. Despite constant nightmares, Shimizu obeyed as he started a new life running a small construction company.

In 2015, he accompanied a relative to a museum where a photograph of Unit 731’s base was displayed. When he started explaining the buildings in detail, the museum’s curator happened to overhear and persuaded him to speak in public.

Now 95, Shimizu tries to combat the denials proliferating online about atrocities committed by Unit 731.

"Only the very youngest of us are left,” Shimizu said. "When we are gone, will people forget the terrible things that happened?”
Marched into a trap

Sitting in the living room of his wooden home in the rice-growing village of Osonogo in mountainous Niigata Prefecture, Tetsuo Sato, 105, still seethes with anger over a battle fought long ago.

After growing up as one of 12 children who didn’t always have enough to eat, Sato left this village in 1940 to join the army. He ended up in Japanese-occupied Burma (now Myanmar) just as Japan was planning an offensive against the city of Imphal, across a mountain range in British-ruled India.



Tetsuo Sato, 105, who belonged to the 58th Infantry Regiment of the 31st Division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 in World War II, outside his home with his daughter-in-law, Kuniko Sato, and his dog in Osonogo, a village in Niigata Prefecture, on June 10. | Ko Sasaki / The New York Times



Proclaiming that their soldiers’ fighting spirit would prevail, the Japanese generals sent them without adequate weapons or supply lines, ordering them never to retreat. At first, the enemy troops appeared to flee, but it was a trap. When the British surrounded them, Sato escaped only because his commander disobeyed the orders and pulled back.

Even then, many died from starvation and disease as they fled back to Burma.

"They wasted our lives like pieces of scrap paper,” Sato said. "Never die for emperor or country.”
Enlisted at 14

Tadanori Suzuki was also keen to help his country when he enlisted in the Imperial Japanese Navy at age 14. He regretted it right away when the officers regularly struck the new recruits. The beatings stopped only when he was sent to the tropical island of Sulawesi, now in Indonesia, which the Japanese had seized from the Dutch.



Tadanori Suzuki, 96, who enlisted in the Imperial Japanese Navy at age 14 during World War II and was deployed to what is now Indonesia, holds a photograph of himself at age 16 before his deployment, at his home in Tokyo on April 17. | Ko Sasaki / The New York Times



There, he trained on a small torpedo boat, spending sleepy weeks in the heat and tasting bananas for the first time. The idyll ended when a U.S. destroyer was spotted.

His boat was one of eight sent to intercept it. As they sped toward the gray enemy vessel, Suzuki heard the "bam-bam-bam” of its guns. When he pulled a lever to launch a torpedo, he saw a pillar of flame rise from the U.S. ship. "A hit! A hit!” he yelled. But three of the Japanese boats never returned.

Lacking fuel and ammunition, his squadron never forayed out again. Captured at the war’s end, it took him six months to get home. When he knocked on his door, his mother burst into tears. "I thought you were dead,” she said, then prepared him a bath.

After retiring from his job as a carpenter, he started speaking to elementary schools near his home in Tokyo, warning them that there is no romanticism in war.

"I tell the younger generations, ‘A long time ago, we did something really stupid,’” says Suzuki, 96. "Don’t go to war. Stay home with your parents and families.”
Fought for the empire

One sunny April day, Masao Go, 97, was at a Buddhist temple near his home in Yokohama to watch the placement of a stone with calligraphy etched into its face: "Taiwan our fatherland, Japan our motherland.”

Go was born in Taiwan when it was a Japanese colony. His parents sent him to school in Tokyo, where he learned to be a proud citizen of the Japanese empire. In 1944, he joined the Imperial Japanese Army, eager to fight for a cause that he embraced as his own.

Trained as a radio operator on a bomber, he was assigned to an air base in Japanese-occupied Korea. His unit was told to prepare for a final attack against U.S. forces on Okinawa, but Japan surrendered before the order came. Captured by Soviet troops, he was sent to a prison camp in Kazakhstan.

By the time of his release two years later, Taiwan was part of China. Go went instead to Japan, where he became a banker in Yokohama’s vibrant Chinatown.

After hiding his military service for years, he now talks about it, concerned that Japan and Taiwan face a new threat, this time from China seeking to expand its dominance in Asia. He erected the stone, which honors the 30,000 Taiwanese who died fighting for Japan in World War II, to remind Japan of its connection to Taiwan, now a self-governing island that China vows to reclaim by force.

"A threat to Taiwan is a threat to Japan,” Go said. "We are bound by history.”
Forgotten by his nation

Kiyozumi, the youngest sailor aboard the I-58, still vividly remembers the day in July 1945 when the I-58’s lookouts spotted an approaching U.S. warship. The submarine dived to fire its torpedoes. The captain watched through the periscope as the enemy vessel capsized and sank.



Kiyozumi at a restaurant in Matsuyama, Japan, on April 29 | Ko Sasaki / The New York Times
===


Years later, Kiyozumi learned that their target had been the USS Indianapolis, which had just delivered parts of the atomic bombs to the island of Tinian for use against Japanese cities to end the war. Of the U.S. ship’s 1,200 sailors, only 300 survived.

"It was war,” Kiyozumi said, expressing sorrow but not regret. "We killed hundreds of theirs, but they had just transported the atomic bomb.”

Although Kiyozumi once corresponded with a survivor of the U.S. warship, he feels forgotten and alone. His wife died three decades ago; his best friend on the I-58 died in 2020. No one in his town asks about the war.

"Young people don’t know what we went through,” he said. "They are more interested in their smartphones.”

This article originally appeared in The New York Times ©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재)[월간 정세현] 남북 평화 이재명 대통령의 결정적 한 방 있다!


(재)[월간 정세현] 남북 평화 이재명 대통령의 결정적 한 방 있다!

Transcript


예. 월관 정세현 7호로 생방송으로 발행하겠습니다. 자, 지금 제 앞에
두 분 나와 계십니다. 경남대 국동문제 연구소 이병철 교수님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니다.네
여러분 반갑습니다.이 더위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래도 요즘 살 만나요. 맛신 더우도
왜요? 좋은 뉴스가 많으니까. 네. 많은 분들이 지금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네. 예전에 막 윤성열 내란 나고 탄핵 되냐마냐 구속되냐마냐 하던 시기를
벗어나니까 많은 분들이 굉장히 마음이 편하다. 이렇게 교수님도 마찬가지죠. 100%.
자 그리고 그 옆에는 정세현 전통일부 장관님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네. 벌써 한 달 됐네요. 10월에
빠르구만. 예. 근데 이제 2월 3일 날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어 그뒤부터는 시간이 빨리 가는 거 같아요. 지난 그까 작년 12월 13일 이후
6월 4일까지는 아 시간이 안 가는 거야.
조마조마 해 가지고 그 조마조마하는 생각이 들면은 시간이 안 갑다. 근데 요즘은 이제 대통령이
그야말로 뭐 안 가는 데가 없이 산청 수제 현장까지 가는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면서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하루가 한
뭐 30시간 되는 거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소화하는 나는
느낌이 들면서 벌써 지금 어 한 달이 됐네요. 여기도 예예.
음. 자, 저는 매달 우리 아버지를 건강하게 뵐 수 있다는게 굉장히
만족합니다. 예. 이따가 오늘도 뭐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 해 주시겠지만
사진 하나 보고 갈게요. 저 사진이 지금 1988년이라고 해요. 정세현 세종 연구소 연구위원.
그러니까 지금 저때가 88년이니까 연세로만 따지면 40대 초중반.
아니야. 그러니까 43세. 43세. 음.
저보다 한 차버리셨네요. 아, 그럼 야, 87년입니다. 그죠? 88년.
88년 포스가 88년. 예. 아니, 그러니까 그 학생이
칠사 공동성명을 앞으로 7년만 잘 끌고 나가면은 동의이 될 것 같다.
그니까 해방 후 50, 90, 50년이 되는 95년에 통일될 것 같다는 얘기를 한 걸 보면은 88년
얘기예요. 야, 올림픽하던 그때 올림픽 때 예, 세종 연구소 계셨어요, 그때.
예. 그때 공무원하기 싫어 가지고. 공무원하기 싫어 가지고. 아, 진짜 도망갔는데 다시 재혀왔지. 근데
포스가 장난이 아니시네요. 보니까 저 잠자리 한 거 있으시고 43살에 지금 생각해 보면은 정말
43살은 지금 태어나지도 않은 정도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예. 예. 예.
그래도 그 머리 숱도 많잖아. 아니요. 아버지 색깔만 면하서 지금
머리숱은 별 차이 없어 보여요. 예. 음. 저때는 저런 안경 유행이었습니까?이 잠자리
무슨 잠자리야? 아니 안경 안이 크지 않습니까? 그렇지. 어. 아 내가 내가 저 키가
작아서 그렇지 유행은 어 잘 챙겼어요. 아버지 연세 뭐 그렇게 작으신기도
아니에요. 그냥 보통 보통 거냐 못 먹었는데 잘 못 먹으면 키가 안 커요.
그 당시에 뭐 얼마나 드셨겠죠. 그렇지. 어 [음악] 해방이 두 달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예 그거는 가난하고 식민 식민지 착취당 시절에 네
뭘 얼마나 먹었겠어요. 그러니까 뭐 이재명 정부 들어서고 나니까 이런 이야기도 재밌게 하네요.
아 그 윤성 내란 상황에 저런 이야기 못 하죠. 지금 너들이 그러고 있을 때냐. 아 그러나 저는 아까 그 88년
초여름에 그 어 KBS 심야 토론 사진은 어디서 누가 찾은 거예요?
뭐 우리는 모르는게 없고요. 다 알고 있어요. 지금 막 이제 뒤쫓사해 가지고 지금 어
조심하겠네. 야 진짜 야 근데 벌써 지금 아버지야
40 37년 37년지나 거예요? 와 37년이 지났습니다. 37년이면 강산이 세
번네 번 거의 네번 예예 아 자 근데 지금 세월이 잘 안 가셨다고 해서 제가 보여 드렸어요.
세월이 굉장히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네.음 음. 자, 두 분과 함께 출발하겠습니다.
자, 일단 이야기부터 한번 해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 대북 방송, 대남 방송 규전선에서 막 귀신
소리 나오고 했던 거는 중단이 됐고 그런데 지금 보니까 이게 전파로 하는
방송 있잖아요. 예. 국정의원 등이 하는 방송들이 지금 중단됐다. 이런 보도 나오고 있거든요.
52년 만에 대북 TV 라디오 전면 중단. 저게 이제 저게 심리전의 대표적인 거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예. 음. 그니까 저렇게 해 가지고 그
북한에다가 막 라디오도 보내고 그러면서 한번 들어봐라. 대한민국은
이렇게 발전했다. 그게 지금 52년 만에 중단했다는 거죠. 음. 그거는
전 그 계산이 좀 잘못됐네요. 왜냐면 2004년
6월 초에 뭐 금강산에 아 금강산 우리 설악산에 있는 캠핑 스케 호텔에서
어 남북 장성급 회담을 했어요. 그때 나는 현재는 안 같지만은 그 삼청동
있는 회담 본부에서 모니터링을 하면서 정석 회담 대표들한테 지시를 내리고
그랬었는데 그때 북쪽에서 어 뭐를 호소를 하냐면 확성기 방송
좀 끊어 달라. 또 하나 그 KBS가
그 대북 방송을 대북 방송이라게 뭐 해외 동포를 상대로 하는 방송이지만은
딱 자기네 그이 조선 중앙 텔레비 채널에다 맞춰 가지고 그게 끝나는 시간에 그
들어온다는 거야. 음. 어. 북쪽 대표 얘기야. 그런 법이
어디습니까? 그 사람들 전기가 부족하니까 10시에는
방송을 다 끝 끝내요. 그러면 끝나고 나면은 바로 그 조선 중앙 TV 채널
통해서 남쪽 방송이 나온다는 거야. 아이고 이런지 좀 하지 마십시오. 음.
그래서 이제 좋다. 그걸 우리가 받아들이려면은 당신도
우리한테 뭘 해야지 그때 요거 서회상에서 NL 선상에서 그 어선내전
남북 감정간의에 오발적인 충돌를 방지하기 위한 남북
그 함정간에 무선 교신에 동의를 하라. 무선 교신과 그다음에
대복 방송 중지 이걸 맛바꾸자. 그 그렇게 허기를 했어요. 근데
그때 이제 국방부를 불러 가지고 그걸 이제 그
중단하란 말이야. 어 그래야만 된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뭐 국방부도
그렇고 뭐 국정원도 그렇고 대북 심리지단 이런 데서는 아니 지금 예산이 있고 인원이 있는데 어떻게
갑자기 중 그만둡니까? 장당히 저항이 심하더라고. 그래서 이제 그때 청와대 신무자로 그때
이종석 그럴 거 그렇지 NSC 사무차장일 거야. 가지고 대통령의
뜻이 어딘지이 사람들한테 얘기하라. 그러니까 사무차장원 대통령도 그런 식으로 어서
확성기 방송 충전하는 대신 NL 선상에서 무선 교신을 하면 그 좋지
않느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니까 이제 국방부고 국정원이 조용해졌어요. 그러니까 이번에 그
박성기 방송 충조하는 것도 대통령이 결심을 했기 때문에 되는 거지 그냥 부채관의 협의식으로는 안 됩니다.
아 그렇군요. 그리고 그때 그리고 그때 확성기 방송 중단하고 대북 방송도 중단했었어요.
그러니까이 사람들은 지금 50 52년만이라는 얘기는 73년 이후에
그러니까 어 73년부터 그 대북 방송을 시작했는데 한 번도 그치지 않았던 걸로 지금
계산한 거 같은데 중간에 한번 끊어졌었습니다. 음. 자, 그러니까 이게 지금
사실 이런 측면이 있어 보여요. 심리전 하는 이유가 야, 나만 이렇게
잘 살아. 그거 보여주고 싶은 거잖아요. 맥락은. 근데 북한 사람들은 그거 안 주여 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잘사들이 뭐해? 너들이 미재 앞잡이 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우리
잘 살아라고 약 걸리면 이게 심리전이 되겠냐? 저는 아니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달북작들 얘기 들어보면
결국 그걸 통해 가지고 계속 듣다 보니까 그런가? 아 된다고
그렇지. 김가민가 하다가 중국을 한번 갔다 오면 뭐 그 암록강
도망 건너서 중국 가서 얘기 들어보면 중국이 북한보다 엄청나게 잘 사는데
남조선는 여배에서 열배 20배다 하는 얘기를 듣고는 아 그러면 그 방송에
나오는 얘기가 거짓말은 아니구만 하는 식으로 믿음이 생기면서 넘어왔다는 거예요. 아 실제로 제가 뭐 탈북자들
만나 봐도 이게 몰래몰래 이게 들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이게 남쪽 이야기가 진짜 와서 자기들 보고서 아 내가 느꼈던게 뭐
뭐과의 틀린 건 아니었다고 증언하는 탈포 있 그러니까 3인 성호라는 고사 성어가 있잖아요.
거짓말도 세 사람이 계속 하면은 믿게 돼 있는데 진짜를 세 사람 세 번네
번 방송을 해야 되면은 사람들이 흔들리죠. 그러면 이런 거네요. 저 방송을 해서
얻는 이득보다 방송을 안 해서 얻는 이득이 더 크다고 판단한 거네요.
그렇죠. 정부는 예. 게다가 이재민 정부대 당원님께 말씀하신 대로 이제 대통령의 결심이
워낙 컸기 때문에 일단 확성기도 줄이고 라디오 줄이고 이제 TV까지
송출을 이제 꺾기 때문에 제가 볼 때는 뭐 이재명 대통령의 남북 관계 개설을 바라는 그 측면이 굉장히
앞으로 더 이제 강하게 작동될 걸로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확기 방송 중단시켰고 미라살포 중단시켰고
그다음에 표류해온 여섯 사람 조용욱의 북한 체면 선상시키지 않고
동해 선상에서 저 보내 줬고 뭐 이런 것도 그 확
저이 대북 방송 텔레비 방송 그러니까 조선 중앙 텔레비 그 채널에다 쏘아
된다는 거야 그게 미치겠다 오더라고 같은 주파으로 그렇지
아 그러면 저번에 저 북한으로 성호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어 그 경우에는 한 라인이 작동을
했을까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데. 아 저기 그 결국은 어 유연사 라인으로 얘기를 한 거예요.
아 버릴 거니까 나와서 데려가라 이렇게. 자 어쨌건 지금 이렇게렇게 해서 얻는
이득은 뭐냐?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고 있다. 그렇 예. 예. 그걸 그걸 불러오기
위해서 지금 그 방송도 중단한 겁니다. 근데 사실은 작년 초부터
그러니까 작년 초라 하면 이제 2024년 초인데 23년 연말에
김정은이가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두국 국가 관계 또는 적대적인 두국가 관계라고
이제 성격 규정을 한 뒤에 통일 민족 조국이 이런 단어 쓰지 말라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대남 심리전 방송도 그들 중단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도 조선 중앙 텔레비 평양 평양 방송 평양
텔레비로 뭘 뭔가 얘기를 해었는데 그걸 중단해 버렸어요. 막히지도 않는다해요. 이제
그렇습니다. 어 그러니까 북한이 먼저 끊었습니다. 근데 우리 윤성열 정부에서는 북한이
그런 걸 고만뒀다는 얘기를 안 오고 있었지. 음. 그렇구나.
자, 그런데 윤성열이 음, 사실은 내란의 시작점에는
북한을 자극해서 최소 국지이라도 해 보려고 했던 바로 외한 유치체에
관련한 것들이 우리가 방송으로 계속 말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거 한번 짚어 볼게요. 예. 첫
번째가 뭐였냐면은 그 정보 사령관이
몽골에 가서 주몽골 북한 대사관을 접촉을 했다.
사실 이게 그 이회창 때 총풍 사건하고 비슷한 거죠. 그렇죠. 예. 정부 살인관이 간 거는 아니죠.
아니요. 아, 직접 갔습니다. 직접 갔어요. 직접 간 겁니까? 그 부대원을 보낸게 아니고. 왜냐면 그 저 블랙이 재혀 버리니까
가서 데려오려면은 높은 사람을 가야죠. 음. 정부사령관이가 가지고 북한과 접촉을
하려고 했는데 북한이 일단 거기서 노한 거잖아요. 너들하고 안 해.
그러니까 이건 사실상 실패한 거고 이거 말고 저 정보 사령관이 대만도 가요.
음. 대만도가 가지고 한국의 내란에 대해서 지지해라 이렇게 실제로 지지하는
메시지까지 나왔다. 4일 날 나왔다면서. 네. 네. 근데 이제 지금 그 무인기 보내는 거
있지 않습니까?이 이 부인기는 지금 들어가려면 드러날수록 그냥 전쟁하고 싶어서 거의
뭐 속대기 변화 환장한 느낌 그렇습니다. 예. 여러 뭐 지금 한두 번이 아니고
지금네 차례 보내고 총 뭐 일곱 번이다 11 번이다. 그래요. 예. 그런데 하나는 미 무려 이제 뭐
자기들의 숫자를 감추기 위해서 하나 이제 뭐 실종됐다라는 거짓 이제 후위
보고서도 이제 작성하고 해 가지고 이제 드러나는데 이건 굉장히 중한 범죄에 해당한다고 좀 봅니다. 우리
특검이 진짜 면밀하게 밝혀야 될 걸로 생각니다. 그 북한의 무인기가 하나 떨어졌을 때 저거를 조선 중앙 통신이
공개를 했고 그러니까 저 무인기가 떨어졌을 때 북한이 저걸
반응하니까 윤성열과 김용현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는 보도 있었습니다.
잘났다. 야이 지금 뭔가 지금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
예 불집을 터트릴 거다. 음. 그러면 그걸 핑계되고 예.
개엄 때린다. 개험을 때린다. 그러니까 이게 박수가 나오. 심지어 국군날 행사에서 저 무인기를
공개를 하잖아요. 이거 한국 거야. 그래놓고 평양에 떨어뜨리는 그리고 돌아오지 못하게 뭐 성능이 좀
불량한 것들이 일부러 떨어뜨리게 만드는 상황. 야 북한이 그렇고요. 여러분.
그다음에 자 어쨌건 지금 저군다는 이제 안 걸리게 하기 위해서 드론을 평양
침트를 숨기려고 국내 출약했다고 거짓 보고를 잡고 그면 응 뭐
국내 추락했다고 예예 거짓으로 이제 보고서를 작성한 거 이거는 진짜 굉장히 중한
어 범죄에 해당되는 엔이
이제 밝혀 되겠지만은 어 우리가 정부사에서 몽골 대만 개엄
내 외한을 이제 유치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무인기를 이제 보내고 했던 거는 냥 중한 사고지 않습니까? 우리
특검이 앞으로 굉장히 좀 면밀하게 조사를 해서 이게 윤성열 정부 때
일으켰던 일종에 이제 뭐 북품 공작을 철저하게 전는 조사해야 될더라고
봅니다. 외환 일종의 외환 요치 문제인데 유치제인데 예
근데 그 우리 법에 그게 통모 그러니까 북한하고 짜 짜고 해야 된다는 얘긴데 바로 짜라고 했던 것이
몽골 그 몽골에서 몽골 사람들 몽골에 있는
몽골에 나와 있는 북한 대사관 사람들을 만나서 우리가 이런 일을 하면 너희들이 좀 발걸 과를 해주라
그러면 나중에 우리가 뭐 너희들한테 뭘 해 줄 수 있다는 식으로 흘려다가이 북한에서 잡아버리 그런 거지. 그러니까 그걸
속방시키기 위해서 사령관이 사령관이 직접 날라가고 나가서 했다는 얘긴데 북한이 개입하면 북한이 우리를 뭐
침범 침략 도발한 걸로 간주하고 그걸 핑계로 개엄을 때리려고 했다는
와 그리고 그다음에 이런 것도 있죠. 지금 윤성열의 지시로 무인기 북파
TF가 꾸려졌는데 우리나라 군이 만들지 않은 것처럼 보고서 양식 등을
바꿔라 비밀리에 뭔가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게 그 지금 제가 봤을 때는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김영대 드론
사령론과 뭐 영창이 기각됐다고 하는데 굉장히 큰 사건인 거죠. 지금 저는이 드론 살인관이 왜 영창이
기각됐다는게 저는 거의 좀 납득하기가 어려워요. 예.이 이 중일을 왜
판사하는 역장을 기각했을까? 그 부분은 지금 보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판사도 김영대 혐의를
인정해요. 그런데 김영대가 좀 자살를 하려고 해서 안전 차원에서 인신을
구속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런 영장을 꾸려 꾸렸는데 가족들을 만나고 등등을 하면서
김영대의 심리적 상태가 안정됐기 때문에 방어권 보장하라고 풀어줬다고 하는데 그다체도 말이 안 되는 게
그 말이 안 되지. 요거는 좀 판사가 너무 사한 아니라게 생각한 측면이 분명히 있는 거예요. 야, 이런이
이런 상황이었단 말이에요. 근데 저번에 우리가 계속 말씀드립니다만
북한은 전쟁할 여력이 없다. 그래서 제가 전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 한번 보세요.
지금 국방 예산에 관련된 부분인데 소위 한국에 이제 그구들은 적은 거죠. 현역 병력과 예비근 숫자만
갖고 이야기하는데 현역 병력이 지금 대한민국이 52만 명. 북한이 120만 명, 예비군이 한국이
280만 명, 북한이 600만 명이기 때문에 마치 북한이 엄청 뭔가
군사력이 강한 거 같지만 국방 예산 보시면요. 올해 기준입니다. 60조가 넘어요.
61, 2조 정도 하잖아요. 그리고 북한은 1.3조원이니까 GDP 대비 군사비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가 60조지만 GDP 대비는 2.5% 5% 북한 같은 경우는 GDP 대비한 최대
30% 그 북한은 사실상 돈 생기는 것 중에 30%는 군사에 수다 붙고
있는 거지 않습니까? 그 그러면 이상황에서 전쟁이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어느 정도 비슷해야지
그러니까 전쟁이라는 것을 불집을 터트리는 것은 뭐판에서도 할 수 있지만
저희 국가 차원에서 그 그런 일을 버리는 사람들은 전쟁 지속 역량을 먼저 봅니다. 그렇
얼마나 며칠이나 버틸 수 있는가. 예. 근데 경제가 저 지속경회라는 걸 결국 경제로 얘기야. 그
경제가 저런데 어떻게 전쟁을 일으켜요? 군량민은 어디서 나오며? 예. 기름은 또 어디서 나옵니까?
그럼 무기는 전부 다 기름으로 움직 예 아니 황산벌 전투가 아니잖아.
그렇습니다. 예. 포탄 생산 능력, 기름, 식량 모전력
모든게 부족한 상황에서 북한이 전쟁이 일으킨다. 그러니까 이쪽에서 그렇게 드론을
보내고 제발 좀 반응 좀 보여 줘 하는데도 불구하고 저게 코가이면은
우리 이런 저렇게 그 군사력도 약하지만은 경제력 자체가 적기 때문에
맨날 못 버티고 며칠 못 버티고 결국은 경제고 그 국방이고 다 망한다.
네. 그래서 도망간 거라고. 근데도 계속 자극을 하니까 나중에
땅을 도로를 파헤쳐 버렸잖요. 탱크 올라갈까 봐서
계속해서 건드리고 건드리고 건드리고깐 거려도 싸울 여력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니까 계속 그러니까 건드리니까
나중에는 10월 달에 그 경희선 동해선 전부 다 도로를 10m 폭
5m 깊이 160m씩 잘라냈는데 그리고도 또 뭐 일을 벌리니까 그
MDL 선상에 장벽을 3중으로 세우잖아. 3중으로. 그거는 지금 탱크가 밀고 올라올 거를
대비한 거란 말이야. 그니까 그쪽에서는 윤선열 정부는 탱크를 밀고 올라올 가능성이 있고 야들 임기가
아직은 2027년 5월 9일까지 말이야.
그 안에 무슨 일을 벌심 없는데 지금까지 취임 후부터 자기네들 북쪽을 상대로서 벌린 일을
생각하면은 우리가 지금대 북쪽이 대남 방송을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대북 확성기 방송 그다음에 아까 얘기한 그 저기 개 사회교육 방송
이런 계속하는 거 보고 그다음에 툭하 미국 불러드려 가지고 1년에 두 번씩 밖에 안 오던 아미연합 훈련을네 번
여섯 번까지 해야 되니까 음 죽을 지경이죠. 그래서 그래서도 땅을
도로를 잘랐는데 그 정도 되면은 아 이거 건드려도 반응 안 보이겠구나 하고 포기를 해야
되는데 그런데도 계속 자극을 하면서 또 무슨 뭐 북파를 하느니 HID를
북파하느니 뭐 하더니 12월 3일 날 드디어 국회의 국회 의원 회관의 보좌관과
국회의원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그 시간대 개엄을 터트려 가지고 결국 자살한 거예요. 거기서 등장하는 아까
이야기했던 정보사가 북한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조작까지 시도했던 바로
그 업무 자체는 엄청난 업모들이었던 거예요. 그죠. 그렇죠. 심지어 뭐 미군 군복까지 뭐 입히고 뭐 그런 이야기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볼 때는 뭐 북한이 뭐 전쟁을 수행할 뭐 능력은 차취하고서라도
저는 뭐 김정은 북한지도 체제가 전쟁을 뭐 할 뭐
의지도 저는 뭐 없다고 봅니다. 그 사실상 보면은 경제력으로 보면은 권사력으로 보면은 50대
1싸움이잖아요. 60조대 1.3조 정도면 한 50대 1 정도. 그렇죠. 50대 1은 어떻게 싸워요? 50대
1 못 싸우지. 못 삽니다. 예. 북한을 몰랐을까요? 아니면은 처음에는
저렇게 한 북한이 이렇게 뭔가 휴전선에서라도 뭔가 도발 할 줄을 알고 계속 기다렸던 거 아니에요?
우리 쪽에서 어 윤성 정부가 그렇죠. 이렇게까지 하면은
아무리 아무리 그야말로 참이
가진 것이 없어도 이렇게까지 하면은 피더라도 한번 낼 텐데 하고 기다리는데 안 해 준단 말이야.
그 북한 내부 사정을 모르니까 그런 거예요. 후보 때부터 그랬잖아요. 진짜 진짜 나쁜 자인게 후보 때 북한을 선대
타격한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 이게 그런 거 아니에요. 문재인 정부 때까지만 해도 만약에 일본이나 미국이
한국 북한을 공격하려면 대한민국 정부와 뭔가 협의가 돼야 되는 상황이었잖아요.
근데 본인들이 북한이 핵무기나 이런 거를 도발하려고 하면 먼저 타격을
하겠다 하는 건 사실 굉장히 애매한 부분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뭘 이동한다고 만 해도 타격해 버리면
전쟁 아닙니까? 그렇죠. 예. 그 제 생각에는 이제 윤성열 대통령이
이제 취임 때부터 어떤 북한을 자기해서 뭔가 저는 확대해서 가면은
오랫동안 어떤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그런 플랜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 봅니다. 뭐
조심스럽게 그래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개엄을
개엄 일으켜 가지고 제가 대통령 몇 번 몇 년 더 하고 후계자는 김건희로 만들려고 그랬던
것이 그이이 비상 개엄의 시작이었는데
출발점이었는데 참 이상한 근데 아니 꿈은 컸는데
너무 엉성하게 기억을 세웠던 거야. 예. 자, 어쨌든 북한이 그래서
이재명 대통령이 아마 취임처에 그런 얘기 하지 않았어요. 저 전방가 가지고 북한이 잘 참았다고.
저는 국가적으로 보면은 굉장히 저는 뭐 예 진짜 북한이 잘
인내심 있게 견됐던 것 같습니다. 지금 그 검사만 60명인 내란 특검이
이제 본격적으로 외한제 수세 외한제 수사에 지금 박찰를 가한다고
하거든요.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은 이제 저게
북한이 많은 걸 안 했기 때문에 외한죄가 성립이 안 될 수도 있다. 네.
이게 이게 통모 그러니까 서로 모의를 해야 짝짝 공이 맞아 가지고 일종에
협조를 해 줘야 되는데 그 협조를 구려다가 몽고에서 재혔던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 이게 이적제를 적용할
가능성도 있다고. 근데 이적제도 지금 보니까 최고가 무기진영이더라고요.
야 그니까이 이게 이런 거예요라고 생각해. 윤성열이하고 김용현이하고 둘이 김용현이가 원래
경호초장할 때부터 이제 국방부 장관을 세우려고 했던 거 같아요. 경호초장
하면서 윤성열에게 계속해서 가능하다. 성공할 수 있다. 요런 걸 계속해서
지금 간신처럼 이야기를 했던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2013 23년 11월 22일 날 어 국무회의에서
국무회에서 919 군사분장 합의사의 1조 3망의
일 효력을 정지한다는 결의를 했어요. 예. 그때는
어 신원식은 국방 장관이 되기 전인가? 아 국방
장관이었나? 국방장관이었어. 아니 그때는 이종섭 아니요? 2020
23년 11월 23일 날 아 그 NSC를 맡고 있었겠네.
신원식 씨가 그 아 뒤요 이종섭 신원식 김용현 이순서죠.
예 그렇죠. 그러니까 어 그러면 그때는 하여튼 경호실장으로 김용현이
있을 때인 거 같은데 경호실장이 됐건 뭐가 됐건 일정이 군인이기 때문에
계속 그 윤성열 대통령한테 그 입력을 시켜 가지고 그리고 군사분야 합의
일부 효력 정지부터 해 놓아야 우리가 비무장 지대 이북 지역에 군사 정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이 움직이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감시해야 되지만 그 과정에서
북한이 자극을 받아 가지고 도발하면 불감청이지만 고소원입니다. 그걸
계기로서 일을 벌릴 수 있습니다. 하는 식으로 입력을 시켜 주니까 그러니까 나중에이
저 뭐야 드론이 넘어가서 무인기가 넘어가서 그 북한의 주요 부분에
떨어졌다고 북한이 말근해서 나오니까 잘됐다. 드디어 이제 저놈들 코가했구나 했는데
북한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은 것은 국가적으로 뭐 천만 당입니다. 글쎄 그들이 영리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끌려 들어갔다가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을 그나마 깨달았기
때문에 해요. 근데 무인기 이전의 사건들이 있었죠. 대한민국에서 대북 비방 전담 보내고음
비방 보냈죠. 오물풍선 날라오고 오물풍선만 갖고 전쟁이라고 하기 좀 부족했던
거잖아요. 그니까 무인기를 통해서 자극을 하는 거잖아요. 아 김정은 숙소를 일부러 다게 달려
관제라고 그러니까 그 거기다 떨어뜨렸는데 평양의 중구역이라고 우리 그 우리는
이제 뭐 종로고 중구 그러지만 그쪽에다 역자를 하나 더 붙입니다. 중구역 무슨 낭구역 여포 구역 뭐 뭐
대성산 구역 그러는데 그 중구역에 떨어졌다는 얘기는 중국에 보면 말자면
우리 식으로 그런다면 중중앙 부처들이 다 모여 있고 노동당 노동당 중앙위원회 당사도 거기
있고 김정은 관저도 그 안에 있고 양 병양친 한가운데
참 그러니까 아주 작심을 하고 너 화내 빨리 빨리 화내 줘 그리고
행동을 옮겨 그래하면 내가 어떻게 정권을 연장하는 거 아니야 했는데 북한이 속점을 다
읽어 버린 거야. 야 진짜 악랄하잖아. 악날하죠. 예. 위험한 그니까 본인이 갖고 있는 또는 본인
부인이 갖고 있는 비리를 덮기 위해 이용한 거였거든요. 어차피 정권을
내놓으면은 수사를 받아야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예 연구 접근해 버리자. 북한을
이용해서. 정말 민족의 반역차 아닙니까? 이런 아니 젤렌스키를 보면서 그 생각을 더
했을 거예요. 젤렌스키가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은 지금 임기는 이미 끝났어요.
젤리스키 임기는 끝났는데 대선 선거를 못 하는 거야. 그러면서 계속 그냥 대통령으로 가고 있잖아요.
네. 그 젤란스키가 쉽게 말면 푸틴의 휴전제의 쉽게 받아들지 않고 계속 시간을 끓은
이유는 그만큼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은 자기 국민들은
뭐 수십만이 죽어 나갈지라도 내 권력은 유지된다는 계산이었거든. 바로 지금
그거를 일종에 그이 성공 사례로 보고 따라가려고 그랬던 거죠. 그렇네요.
자, 알겠습니다. 자, 북한을 너무 몰랐던 윤성열 이거를 예전에 북맹 그리고 문맹처럼
북맹 북을 잘 모르니까 문맹 콧맹 북맹 어 자, 그다음 이야기는요. 지금 통일부
장관 인사 청문의 이야기 한번 해 볼 텐데요. 음. 지금 현재 국방부 장관과 통일부
장관은 임명이 안 되고 있습니다. 뭔가 저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긴 한데 정동용 장관이 노무현
정부 때 정세현 장관 후임이었죠. 바로 후임. 예. 그 정세현 장관은 그 김대중 정부 때
통일부 장관 하시다가 쉽게 편하면 위임되신 거 아니에요. 그렇죠. 정권이 바뀌고 유임되고 나서
정세현 장관 다음에 정동용 장관을 세웠던 거고 그게 벌써 한 20년 된 거 아니에요?
어. 어 내가 2004년 6월 30일 날 그 통일부 장관에서 물러나고 7월
1일로 정동영정 장관이 취임을 했으니까 2004년 어 장관 된 날로부터 치 치면은 지금
21년이이 다 됐죠. 21년이 조금 지났죠. 야 20년 전이라고 하면 또 그 어떤
모습이실지가 되게 궁금하긴 한데 오늘 정동 장관 만나고 오셨죠?
만났어요. 예. 거기는 늦지를 않아. 장관님도 뭐 뭐
아니야. 그게 아버지 비하면 어리잖아요. 아 뭐 8년 후배인데 중학교 예
중학교 8년 후배인데 장관은 1대 후배밖에 안 되지만은 머리 염색을 해서 그런가 하여튼 그 머리 수은
그대로요. 그리고 목소리도 MBC 기자 시절의 목소리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근데
정문회를 보니까 음 관록은 못 숨기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어지 않게 남북관계 잘 모르는 국민의
때리잖아요. 음. 단호하게 딱 끊고 할 말 딱 하고 하는데 와 정동용
장반이 다 시보이더라고요. 아니 김기헌 의원이 박살이 나도막. 예. 아버지 저렇게 건강하실 줄
알았으면 장관하실 거 그랬어. 어
아니 왜 박지원 의원도 의원하는데 아버지도 장관시킬 수 있는 거잖아요. 저렇게
공동하신데. 아 나는 나는 그렇게 지역구 돌아다니기면서 한표 줍시 하는
그걸 잘 못 해요. 자 보면 나온 메시지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런 야기가 있어요. 천안남사
연평도의 이런 사건들이 있잖아요. 음 이명박의 강경체이 원인을 제공한
거다. 그러니까 국민의 힘에서는 북한을 악마워만 하잖아요. 민족으로서의 어떤 그
동질감이랄까 평화에 관심도 없고 그리고 통일부 명칭 변경 필요하다.
그래서 뭐 한반도부 뭐 평화부 이런 이야기도 했고요. 그다음에 북한은 주적이 아니고
위협이다. 위협. 미사일 쏠 필요 없게 할 수 있다. 저쪽에서 지금 주적이라고 자꾸 이렇게
선동을 하는데 이런 이야기도 했고 또 지금 이제이 다음에 이제 중점적으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한미
연합훈련은 너무 공격적이다. 음 축소나 연기를 충분히 검토해입을
만하다 했고 국방부 장관 같은 경우는 이제이 전시 작정권 우리가 환수해야 된다는
이야기까지 물론 대통령실에서는 뭐 개인 의견일 뿐이다 했는데 실제로는 이제 아마
장관님 입장에서도 정동용 장관의 메시지가 사실은 종상적 메시지인 거
아니에요? 네. 통일부 장관으로서 예. 예. 그니까 국방부 장관과 여유부 장관과 통일부 장관의 메시지는 달라야
되는 거잖아. 그렇죠. 다를 수가 없지. 역할 분담해야 되니까. 예. 자, 어쨌건 지금 한미 연합 훈련
이야기를 좀 중점적으로 한번 해 볼게요. 그 함의 연합 훈련이라고 하는게 지금 곧 있죠.
8월 8일 8일 행사 광복지 행사가 끝나오나면 8월 18일부터가 그게
프리디엄 뭐 요즘 이제 쉴드라고 이름을 바꿨대. 이을 자주 바뀌는데
어 발로 그 기념식이 끝나고 난는데 한 2, 3일 후에 시작돼서 한 보름 정도 하나요? 그게 상당히 셉니다.
그다음에 또 9월부터 열리는 또 프리덤 엣지가 하는게 또 있어요. 그것은 뭐 일본도 거기 들어오지.
그러니까 그전에는 그전에는 그러니까 1년에 그 두 번 춘계 훈련 추계
훈련밖에 없었는데 윤성열 정부 들었으면서부터는 춘추를
그는 기본이고 거기다가 다시 또 미국하고 일본까지 불러드려 가지고 막
그냥 공중 훈련 해상 훈련을 해서 1년에 한 대여섯 번씩 군사훈련을 했단 말이야. 근데 군사훈련 관련해서
북쪽 사람들이 회담 중에 했던 참 지금은 지나간 일도 했지만 너두리
같은 얘기를 내가 소개를 할게요. 먼저 남북 그이
군사적 군사 훈련이 계속되면은 죽었다 깨놔도 북한은 대화에 안 나옵니다.
그니까 군사 훈련이 중단되는 기간 동안에만 대화는 성사가 돼요. 그거는
정확합니다. 그런데 그 권사 훈련을 앞으로 좀
영원히 중단하면 좋겠고 최소한도 좀 규모라도 줄이면 우리는
좀 살 것 같습니다. 왜 그러시오? 그랬더니 아니 생각해 보시오. 입장 바꿔서.
자, 부산에 지금 미항공마이 들어오고 그다음에 뭐 그 과에서 뭐 뭐
핵폭탄을 실은 뭐 B1 B인지 B2 뭐 이런 것들이 막 와 하면서 한마도 상공을 그 떠돌 때 그 오금이 절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습니까? 그건데다가 그런 훈련이 일어나면은
어찌됐건 없는 살림이는 탱크를 움직여야 되고 그다음에 뭐 트럭이 왔다 갔다 해야 되고 병력 이동시켜야
되니까 그거 훈련 규모 줄여주면 우리가 그 안 해도 되는 거고
그러면 거기서 남는 기름을 인민경제 쪽에 돌려쓸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 제발 좀 중단을 못 하겠으면은
규모라도 줄여해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하는 얘기를 여러분 난 들었어요. 왜냐면 80년대부터
남북대와 1선에서 주일을 하다 보니까 어 뭐 장관국 회담도 나중에는
장관돼서 여덟 번이나 하고 그랬는데 그때마다 쉬는 시간에
너돌이 같은 얘기를 많이 했어. 바로 그런 얘기예요. 군사 훈련이 장애자들 경제 주는 타격이 너무 크다
이거야. 군사적 위협을 떠나서 그러니까 그거 좀 규모라도 줄여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소일 것 같아요. 한국만으로도 아까 한 50대 1
차이가 나는데 미국까지 같이 해 가지고 비온비 같은 거 상공이 뜨면
살벌하겠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결국에는 경제력으로 안 되니까 행무이 만든 거 아니에요.
너희들한테 침범 당하지 않겠다라고 딱 이렇게 울타리 쳐 놓고 그런 상황에서
남북 관계가 좋아지려면 실제로 그 남북 관계라는게 지금 목표는
통일이 아닐테니까 한반도의 평화만 좀 가져오자고 하면 지금 통일부 장관이나
국방부 장관 메시지도 대충 비슷한 거 아니에요. 실제로 한미 연합 훈련을
뭐 연기를 하든가 축소를 하든가 해서 북한도 김정은 입장에서 자기 인민들한테
명분을 줘야 될 거 아니에요. 그렇죠. 예. 아 나만 이렇게 성이 보이고 있는데 근데 그거 없는 상
북한에도 보면 강경파들이 엄청 많다면서요. 당연히 아 그럼요. 예를 들면 김정은이 저 트럼프가 만나
가지고 해협상한다 그러면 반대하는 사람들은 엄청 많다. 아니 아니 그러니까 남북때 우리가 이제 아니까 우리 여론이 이걸이 그
허용을 안 한다라고 얘기하면 우리도 여론이 있습니다. 우리 내부에도 여론
많아요. 아데 남쪽과 대화하는 거 무조건 반대 남쪽과 대화하는 거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러다가
아유 그거는 뭐 그냥 마음대로 얘기할 수 있는 우리 쪽 건 다루지 거기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그런데 아닌가 그랬 아닙니다. 일단 군부는 뭐든지 반대합니다. 뭐
그런 얘긴데 지금 군사훈련 관련해 가지고 지금 북쪽에서 이거는 뭐
공식적인 얘기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좀 더 지켜보고 검 검증을 해 봐야
될 얘기지만 오늘 점심때 의원이 그 무슨 행사에서 명진 스님을 만났어요.
오랜간만에 네 명진이 남북 협관계 관심이 많습니다.
침 쪽에서 장인가 들었는데 스님들 아무데나 가잖아요. 심양에 가면 북쪽
사람들이 나와 있거든. 심양 베이징상하에 다 종사람도 있어요. 특히 심양은 어 남북 접촉의 비밀
접촉의 창구입니다. 거기가 음 치명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남쪽에서
좀 성이 있는 자세로 남북 대화를 제의해 준다면은 뭐 뭐 우리 쪽에서도
홍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그래서 이제 그러면 성이 있는 자세한게 뭐 무엇을 말하느냐 그랬더니 아 그거야
군사훈련 안 해 주는게 절 좋지 뭐가 있겠어 우리가 바라는게 어
갑자기 뭐 돈 달라고 하겠어 그런 얘기를 하더라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 바로 아까 아까 얘기했지만 8월
18일부터 예정도에 있는 프리덤 쉴드. 네. 그다음에 9월 달에 또 있는 프리덤
매치. 프리덤 매치는 8월 달 프리덤 쉴드보다 훨씬 더 커요. 무섭고.
거기에 그냥 항공 모암 못 오게 하고 안 오게 하고 결국 우리가 돈 내야
되는 거예요. 비안비 같은 거 안 뜨게 하고 그다음에 그 CPX로만 하면은 그러면 북한은 아
확실히 이재명 정부는 다르다. 어 성의가 있구만 그러면서 동시에
남북대화를 해야 된다는 얘기를 어 뭐 당유성 차원에서라도 제기를 하면은
북쪽에서 반대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지금 대북 방송 중단 이것도 보면 우리가 성일
보이면 저쪽에 성의일 보이잖아요. 그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이미 사실상
확인된 거 아니 그니까 그 사람들 대한 방송 작년 초부터 끊었다니까. 음. 우리가 늦게 반응을 한온 거예요.
윤성열 정부 때는 대남 방송 끊었다는 것도 얘기를 안 하니까 몰랐지 우리는. 어 당국장 아니기 때문에.
근데 이번에 지금 우리가 방송 중단하면서 드디어 사실은 북쪽이 작년
초부터 대남 방송을 끊었었다. 평양 방송 뭐 이런 것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자기네들이 방송을 중단하니까 남쪽에서도 세정보 들어서서 대북 방송을 중단했다. 확성규 방송 말고
그러면은 그런데다가 이제 군사 훈련까지 규모를 축소 안 할 수 없으니까 이미 합의가 된 걸. 그
내년 거는 내년 봄은 금년 10월 달에 어차피 한미 국방장관이 또 만나서 할 것인가 뭐 말할 것인가
규모를 어떻게 할 것인 어느 정도 할 것인가는 또 협의를 해야 되잖아요. 그럼 하여튼 그러기 전에에 대통령
차원에서 어 우리 국방부 장관한테 안규백 장관한테 지시를 해 가지고 이건
대통령의 뜻이니까 국방장관도 어 그 진진 지역에 검토를 해서 미국 협의를
하시오. 규모는 줄입시다. 북쪽이 자극받지 않을 받지 않을 정도로이
분사 훈련을 하고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제서 그 시뮬레이션
이런 이런 식으로 CPX 훈련이죠. 네. 그런 식으로 좀 하는 식으로
해서 어 계획을 이행하지만은 북한을 자극하지 않는 그런 식으로 어 먼저
조치를 취하고 나서 가령 제3국을 통해서 그 접촉을 제한한다든지 하면은
아마 못는 적 나올 거예요. 그럼 이런 분위기라면 음 한미 연합 훈련도 축소하거나 연기하고
그다음 순서는 919 군사비 복원이겠네요. 아니 그 전에 할 수 있죠.
그게 이제 국무회에서 아까도했지만 2023년 11월 22일 날 국무회에서 그 1조 이항의 효력
정지시켰더니 어 북한에서 바로 그 이두면과 더 세게
더 세게 전면 파기를 선언해 버렸는데 다시 그러니까
우리 우리는 그게 1조 사망의 효력 정지를 취소한다.
음 그런 식으로 조치를 치우고 북쪽도 북측도 여기에에 말하자면 긍정적인
호응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는 식으로 던져 놓고 나중에 이제 그 군사 훈련
같은 것을 중단하는 어 규모를 축소하는 그런 조치를 취우면서 만나자고 보면은
그 모기를 치고 나와서 어 군사부장 앞에서는 사실은 사실상
작은 불가침 합의예요. 예. 그걸 깼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거죠. 그 정동용
후보자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요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게 음 핵실험했던 건 다 보수 정권 때였다.
그러니까 얘가 우리 핵무기 갖고 있으니까 우리한테 덤비지 마. 과시하는 거잖아요. 더 이상 들어오지 마.
이 상황에서 북한이 뭐 핵을 감축하거나 뭐 폐기는 못하더라도
핵무기를 쓸 수 있는 명분을 우리가 줄여주는 건 아주 고도 전략이라고 보거든요. 그렇죠. 중요하죠. 근데 실제로 그이
전술핵을 쓸 수 있다라고 하는 그 뭐 그 말은 북한이 윤성열 정권 때
처음으로 나온 거 아니에요. 작은 핵으로 우리나라를 타격할 수 있다. 그 전까지는 그 목표가 미국이었던
거에 비하면 여성열이 남북 관계는 진짜 민족의 반역자라 생각. 반역자죠. 예.
게다가 윤승 대통령 뭐 스스로 우리가 핵무장해야 된다는 이야기까지도
공개적으로 택도 없는 했으니까 뭐 저는 도 한미동맹 그 청문에 관는 그 얘기도
나왔대요. 그러니까 정동 장관이 한미동맹 깰 겁니까 하고 반문하니까 김기헌 씨는 직소리 못 하던데
바로 그 북한의 1차 핵실험은 2006년 10월 9일 날입니다. 네 그다음에 6차 핵실험은 어 2017년
9월 9일 날이에요. 그러니까 일차핵학 실험은 노무현 정부 때인 건 맞아요. 근데 그것은 북한 미국이
919 공동성명을 만들어 놓고 그다음날 BDA 대북 제재 조치를 하니까
북한이 반발해 핵실험을 해 버린 건데 1년 후에 보통 핵실험은 다섯 번까지 되면은
그다부터는 사실상 사실상 핵 폭탄을 만들 수 있는 고도 기술을 가졌다고
평가를 받는다는 건데 바로 그 2차부터 5차까지가 언제 일어났느냐?
우리는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시간이고 미국에서는 오바마 정부 8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는 보수 정권이지만 미국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그런 오바마 정부 때 전략적인 대북 정책이 그 표방되면서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근데 안쪽에서 우리 쪽에서는 이제 비핵개방 3천만도
뭐 신뢰본 프로세스 이런 헛소리 하면서 아무것도 조치를 추우지 않고
오히려 북한 압박밖에 들어가니까 북한이 마음 놓고 2차 3차 4차 5차 회담을 아니 핵신험을 해 버린
거란 말이야.이 5차 확실까지 허게 만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물릴 수가 없게 됐고 6차 실험은 그들이 표현한 대로 발표한 대로 소위 수소폭탄 원리를
뭐 실험했다 그런 건데 그건 뭐 사실 관계는 확인해 봐야 되겠지만 어쨌건 북한이 사실상 핵보의국을 올라서게
만든 것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9년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이거야. 예. 그는 맞습니다. 예. 자, 그럼
대통령의 결단만 있으면 뭐 상당한 변화가 있겠네요. 그렇죠. 그
그 대북 학성기 중단한 것은 본인의 공략이기도 했고 음. 여기 굉장히 빠르게 갈 가능성이 저
있어 보이거든요. 919 군사번 합의서의 효력 정지를
취소하는 조치를 취하고 북한의 긍정적인 호응이 길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8월 달 한 뭐 지금 한 달도 안 남았어요. 음. 월지 프리덤 쉴드 훈련이 한
달도 안 남았다. 8월 18일이면. 그러면 그거에 대해서 한미간에 김민은
저희 그 국방복끼리 협의를 해 가지고 이거 세정부가 지금 남북 관계를 풀어 나가려고 그러는데 전략 자산 오지
마라. 그다음에 기동 훈련도 하지 말자. CPX로 끝내자.
시뮬레이션으로. 그 정도 그걸 공개하면은 오 이재명 정보 확실히
윤성화는 다르구나. 그런데 이제 9월 달을지 프리덤 엣지까지도 규모가 대폭
축소될 것 같다는 전망이 나오면은음 바로 그게 성 있는 자세로 대화
제의를 하면은 우리가 못 나갈 것 없다는 얘기의 맥그라운드입니다. 달리 달리 보면 조중동 입장에서는 뭐
안보를 포기했나 마나 이런 이야기 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전쟁보다는 평화를 먼저
생각할 거라고 보고 아까 보셨지만 북한의 올해 국방비 추정치가
1.3초밖에 안 됩니다. 저 사람들 핵으면 그냥 완전히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나라이 나라를 우리가 뭔가 좀 성일을 보여주면 우리가 얻는 이득이 더
크다는 거죠. 그렇죠. 예. 주식 시장도 그렇지만 뭐 지정학적 리스크 뭐 이런 거 없어지는 상황에서 그니까 큰 트레스
보지 못하면 그구 같은 생각 하는 거죠. 우리도 뭐 핵무이 만들어야 된다 이런 소리.
아니 이미 한국은 안보를 포기한다는 소리가 뭐 나오는 거 자체가 참
천지분간 못한 소리인 것이 지금 군산혁 면에서 미국 다음에
러시아고 러시아 다음에 중국 다음에 인도 그리고 그리고 한국입니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가 그 밑에 있단
말이야. 북한은 지금 한 180
뭐 180 194 사이 어디 끼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정도 세계 5대 군사
대국이 되 있는 나라가 무슨 안보를 포기하느니 마느냐 하는 소리를 음자 이
게다가 또 최근에 이제 중국을 이제 여행하면서 북한 식당을 다녀온 지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방금 이제 우리 정부는 이제 북한에 대해서 뭐 대화로
하고 뭐 많은 놀이가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상 밑바닥 증서는 꼭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왜냐니까 제가 지인 이제 북한 식당을 아마 들렀는데
최근에 중국에 있는가 보니까 뭐 굉장히 반가운 마음에 북한
종업원들한테 이제 인사를 건내니까 일체 대응을 안 하고 일체 말을 하지
않더랍니다. 그냥 손가락으로 물어보면은 손가락으로만 가르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화를 나누기 싫다는 의도가 굉장히 명백히 이제 드러난 그거는 뭐 종후원이 뭐 자유주
했다기보다는 상정부로부터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겠지만은 어쨌든 정대적 두 국과를 내세 북한의
했던 그 지침이 하부 단계에 좀 전달돼 가지고 아직까지는 분위기 좀 냉랭한 그런
느낌이 있었다라는게 제 지인의 그래도 그래도 북한에서 그 나와 있는
종업원들 북쪽에서 이제 본무원이라고 그러는데 어 그런 사람들이 있는 식당에
들어갔을 때 아 우리 손님 안 봤습니다 하는 얘기 하지 않고 와서
뭐 싶어서이이 음식 달라고 하면 갖다 주고 돈 받고 하는 정도까지 됐으면은
예 그러면은 뭐 상부 지시 때문에 말은 속지 않지만은 남쪽이 주는 돈은 뭐
받는다. 네. 아 그 정도까지 왔으면 음.음 음. 이제 이재명 정부에 대한
소위 그 김정은 정권의 이재명 정부에 대한 기대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고
그걸 잘 활용해서 올라타면은 그냥
고개를 넘으면서 남는 뭐 협력적인이 국가 관계로 지금
적대적인이 국가라고 북한이 성격 규정을 했지만은 북한이 적대적인이
국가라고 남북 관계를 이 적대적이 국가 관계라고 성격 규정한 것이 지금
2024년 말 23년 말 3년 말 했으니까 24년 5년 1년 만 조금
됐어요. 네. 91년 남북 기본합에서 체결 이후에
2023년 말까지 4년 말까지 4년 말까지 30년 3년 말까지 거의 32, 3년을 저희
그 협력적 이국과 관계로 그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비해서 지금 적대적 이국과는
북한이 혼자 그렇게 성격 규정 했을 망정 우리가 다시 협력적인이 국가 관계로 보개를 보건하자는 그런
움직임을 취우면은 북한이 그걸 도망갈 예. 그런데 구멍이 없어요. 음. 그 북한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의
신뢰를 갖기 어려운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바뀌어 버리니까이 국회 차원에서
정권이 혹시나 바뀌더라도 어떤 그런 대북 관계에 대해서는 뭔가 일관성께
가는 뭔가 좀 그런게 좀 생겼으면 좋겠어요. 근데 나는 그이에
내가 어떻게 보면 평생을 동일 문제를 다룬 사람인데 77년부터 동일원에서 일을 했으니까
그건 멋진 말이에요.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그
남북 관계만큼은 기존의 방침대로 그대로 갈 수 있도록 법적으로 뭐
규정을 하자.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은이
여당이 다수인 경우에 그 법을 또 바꾸면 되는 거예요. 아이고, 참 그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남북 관계는 이게 통일 문제가 민족 지상 과제이고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명분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특수성 때문에 육의 전쟁 이후에 서로가 적대했던 그
역사가 길기 때문에 굉장히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이게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자 북한을 너무 몰랐던 윤성열에 결국에는 감옥에 갇치는
상황이 벌어졌고요. 그렇게 감옥에 놀려고 했던 이재명 대통령은 대통령이 돼서 지금 고공 공중을 알고
있습니다. 자, 다음 달에는 어떤 깊은 소식이 있을지 우리가 윤성열 정권 내 한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내일한 포함해 가지고 얼마나이 방송이 고통스러웠던지 이슈 즐거운게 하나도 안 나오는
상황에 매우 즐겁다. 다음 달에는 한미 연합 훈련이 주요 이슈가
되겠습니다. 그렇죠. 예. 두 분 고생하셨고요. 다음 달에 건강하게 만나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




[전자책]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 알라딘

[전자책]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 알라딘


[eBook]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 산업도시 거제, 빛과 그림자  | 질문의 책 22
양승훈 (지은이)오월의봄2019-01-24 

다음



종이책의
미리보기
입니다.
























책소개
2016년 화제의 영화 <땐뽀걸즈>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거제도 ‘중공업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 최초의 책.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조선산업 전반의 문제에 대해 활발히 글을 써온 저자가 조선소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산업, 그리고 그 근거지인 거제도와 조선소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20년 가까이 호황을 구가하던 한국 조선업계는 지난 2015년 대우조선의 경영난을 기점으로 고초를 겪은 바 있다. 조선업이 지금의 위기를 계기 삼아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다는 관점하에, 조선소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삶과 문화를 상세히 조명했다.

위기의 원인을 1960년대부터 시작된 조선산업의 역사 속에서 상세히 분석하면서도, 조선소 근무 경험을 살려 실제 현장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위기를 체감하고 있는지를 생생히 전달하고자 했다. 조선소의 상징과도 같은 ‘귀족 노조’ 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중공업 가족’ 이외에도 하청업체 노동자, 사무보조직 여성, 조선소 취업을 앞둔 여고생, 조선소의 오랜 관습에 반기를 든 젊은 엔지니어, 여성 엔지니어 등 그간 주목받지 못한 여러 사람들의 입장을 두루 살핌으로써 위기의 본질을 고민한다. 위기 이후 거제도와 조선산업이 추구할 만한 방향에 대해서도 몇 가지 선택지를 제안했다. <땐뽀걸즈>의 곳곳에 드리운 ‘가족의 위기’가 궁금한 독자들, 나아가 ‘땐뽀걸즈’들의 그다음 이야기를 상상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프롤로그 조선소로 가는 길 7

1부 조선소, 가족을 만들어내다 37
1. 옥포만의 기적 39
2. ‘중공업 가족’의 탄생 55

2부 오래된 습관, 복잡해진 세계 115
1. 중공업 엔지니어의 배움과 성장 117
2. ‘하면 된다’ 시절의 딜레마 167

3부 떠나는 사람들 217
1. 옥포만의 눈물 219
2. 갈림길에서 278

에필로그 산업도시 거제의 ‘그다음’을 그리며 311

감사의 말 323


책속에서


첫문장
거제도는 한국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P. 26 그러나 2010년대를 거치며 산업도시 사람들은 ‘상위 10% 귀족노조’로 표상되었다. 부러움은 곧바로 지탄으로 변했다. ‘돈도 많이 버는데 고용도 보장받으려 하고, 심지어 자식들에게까지 일자리를 세습하려는 사람들’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적자금을 받거나, 법정관리에 들어가서 회사가 도산할 지경이 됐는데도 양보하지 않는 노동조... 더보기
P. 27 이제 조선산업이 예전 같지 않고, 바깥의 시선도 부드럽지 않은 상황이다. 조선산업과 결속되어 있는 산업도시 거제의 사람들은 고된 시간 끝에 지금까지 익숙했던 모든 것을 다시 질문해야 하는 시기에 직면했다. 조선소의 건실했던 노동자들 중 상당수는 희망퇴직을 하거나 해고당한 후 다음 진로를 찾아야 할 상황에 놓였다. 가족의 벌이는 줄었고 ‘집사람’이었던 아내들은 지금까지 누렸던 소비를 줄이고 조금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 일터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조선산업의 위기가 산업도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셈이다. 접기
P. 58 거제의 중공업 가족은 오랜 시간에 걸쳐 끊임없이 변해왔다. 사무직 위주로 정규직을 공개 채용해왔던 2000년대 이후부터는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도전받기 시작했다. 다수의 가족들이 4~5인 내외의 핵가족 형태를 이루고 살아가지만 최근에는 주말 부부는 물론 조직문화와 지역문화 모두에 편입되지 않으려고 하는 청년들이 대거 등장했다. 주말에는 ‘서울 사람’으로 지내면서 학원에 다니거나 스터디 모임에 참여하는 청년, 또는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과 소개팅 등을 통해 끊임없이 결혼을 타진하면서도 거제에서의 ‘외벌이’는 기피하는 사무직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접기
P. 72~73 남성과 여성의 일이 칼같이 분리되고, 노동자 공동체가 조직되고, 회사가 직원들을 결속력 있게 엮어내는 일련의 과정은 어쩌면 산업도시 거제의 중공업 가족이 나름의 생태계를 구축하고 하나의 정체성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산업이 호황을 누려 대다수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고, 질적으로 향상된 소비 생활을 향유하면서 겪게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세계는 수도권이나 다른 지역 사람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거제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세계가 다른 지역으로 나가는 사람과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점차 ‘낯설게’ 드러나고 있다. 지속적인 호황으로 덮여 있던 문화적인 ‘낯섦’이라는 모순은 경기가 하강하기 시작하자 그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모순은 사실 내부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다. 접기
P. 113 ‘중공업 가족 프로젝트’는 애초에 배제와 포섭을 전제로 한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는 거제로 이주한 정규직들이 회사 공동체의 이름으로 가족을 형성함으로써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극복하고, 결혼과 출산을 통해 직계가족을 구성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공업 가족은 하청 노동자들을 배제했고, 여성들과 딸들의 공간을 결혼 생활의 영역에 한정 지었다. 무엇보다도 중공업 가족은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젊은 세대들에게 그 약점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접기
P. 114 딸들은 거제를 떠나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아빠들의 믿음을 저버렸다. 노동자들의 ‘단순한 삶’은 나름대로 예찬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나, 가족 안에 머무르기를 꺼리는 이들에게 그것은 한낱 보수적인 삶의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중공업 가족은 빈축을 샀다. 조선산업의 경기가 위축되면서 중공업 가족 내부의 모순과 긴장들이 본... 더보기
P. 125~126 주니어 엔지니어들이 시니어 엔지니어들에게 이따금 듣게 되는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종이배를 지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작업장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놓은 ‘현장 중심의 기풍’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곧 작업장 엔지니어들이 현장 관리자와 현장 노동자들의 눈을 통해 자신의 도면을 바라본다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좀 더... 더보기
P. 129 작업장 엔지니어들이 제도 용구를 가지고 도면을 그렸다면, 이 새로운 세대는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우스와 키보드 사용에 익숙해지면 3D 화면 구현이 가능하기에 선체 곳곳을 탐색하면서 입체적으로 도면을 그릴 수 있었다. 이런 작업 방식은 ‘컴맹’으로 살던 작업장 엔지니어들의 방식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엔지니어링의 주도권이 맥가이버 세대에서 빌게이츠의 세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접기
P. 152 이제는 배움과 성장의 양식이 달라졌다. 산업 보국을 위해 뛰었던 작업장 엔지니어들의 방식이 ‘현장 중심’ 기풍과 이른바 ‘쟁이 근성’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우수한 랩실 엔지니어들은 오픈소스판에서 뛰노는 해커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 일을 해내려고 한다. 분산화된 방식으로 자기 구역을 온라인상에서 코딩하듯 해결하려 하고, 실시간 온라인 피드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접기
P. 206 고되고 정신 없는 노동에 지친 사람들은 담배에 불을 붙이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간식을 먹거나, 의자든 바닥이든 어디든 누워서 쉬고 싶어 한다. 사무직들은 자기 자리가 있어 점심을 먹고 나면 한숨을 돌릴 여유가 있지만, 많은 인원이 밀집된 해양플랜트 공정 현장에는 휴게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양승훈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정치학, 문화인류학, 과학기술학을 공부했다. 현재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사회조사방법론, 사회조사통계, 과학기술학을 강의한다. 청년 노동시장에 미칠 영향에 관심을 갖고, 제조업, 혁신, 비수도권 산업도시, 여성 공학 인력 등을 연구해왔다. 지은 책으로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등이 있다.

최근작 : <[북토크] <광장 이후> 출간 기념 저자 북토크>,<광장 이후>,<[북토크] <자살하는 대한민국> x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저자 북토크> … 총 2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찬란한 황금기를 뒤로한 채 저물어가는 거제 중공업,
누가 떠나고 누가 남았나?

<땐뽀걸즈>에 미처 담기지 못한‘중공업 가족’의 진짜 이야기!

? ‘땐뽀걸즈’의 가족은 왜 뿔뿔이 흩어졌을까?
? 조선소의 젊은 사무직과 엔지니어는 왜 거제를 떠나 서울로 향할까?
? 산업도시 거제의 ‘그다음’은 가능할까?


2016년 화제의 영화 <땐뽀걸즈>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거제도 ‘중공업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 최초의 책.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조선산업 전반의 문제에 대해 활발히 글을 써온 저자가 조선소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산업, 그리고 그 근거지인 거제도와 조선소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20년 가까이 호황을 구가하던 한국 조선업계는 지난 2015년 대우조선의 경영난을 기점으로 고초를 겪은 바 있다. 조선업이 지금의 위기를 계기 삼아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다는 관점하에, 조선소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삶과 문화를 상세히 조명했다.
위기의 원인을 1960년대부터 시작된 조선산업의 역사 속에서 상세히 분석하면서도, 조선소 근무 경험을 살려 실제 현장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위기를 체감하고 있는지를 생생히 전달하고자 했다. 조선소의 상징과도 같은 ‘귀족 노조’ 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중공업 가족’ 이외에도 하청업체 노동자, 사무보조직 여성, 조선소 취업을 앞둔 여고생, 조선소의 오랜 관습에 반기를 든 젊은 엔지니어, 여성 엔지니어 등 그간 주목받지 못한 여러 사람들의 입장을 두루 살핌으로써 위기의 본질을 고민한다. 위기 이후 거제도와 조선산업이 추구할 만한 방향에 대해서도 몇 가지 선택지를 제안했다. <땐뽀걸즈>의 곳곳에 드리운 ‘가족의 위기’가 궁금한 독자들, 나아가 ‘땐뽀걸즈’들의 그다음 이야기를 상상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공업 가족’의 안과 밖: 아빠, 엄마, 딸 그리고……
영화 <땐뽀걸즈>를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중공업 가족’은 바로 그 황금기의 산물이다. 물론 거제 조선업이 처음부터 전성기를 누렸던 것은 아니다. 세계를 제패하고 눈부신 활약을 만들어내기까지 조선업 내부에는 여러 부침들이 있었다. 초창기 조선소의 노동자들은 그 부침을 온몸으로 겪은 이들이다.
거제는 토박이들의 도시가 아니라 이주자들의 도시이다. 옥포조선소를 비롯해 여러 조선소들이 거제에 세워지고 일감이 늘자,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거제로 몰려들어 터를 잡았다. 조선소에 노동자들이 모여들자 주택과 위락 시설들이 생겨났고, 그 후 노동자들이 결혼해 가족을 꾸리기 시작하자 이주가 다양한 문화 시설과 교육기관이 활성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중공업 가족’이다. 그러나 ‘중공업 가족’에서 ‘가족’이란 단순히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만을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 ‘가족’이란 노동자의 진짜 가족보다 노동자 공동체와 직원 공동체를 더 강하게 지시한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지속된 노동조합의 전통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가 직원들을 하나로 엮기 위해 ‘기업문화’ 차원에서 사용한 가족이라는 이름을 통해 노동자들끼리의 ‘회사-가족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실제로 회사는 ‘대우 가족’ 또는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이라는 말로 직원들을 부르곤 했다.
‘중공업 가족’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는 것은 결국 남성이 임금노동을 전담하고 여성이 가사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리는 가정, 즉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이다. 이 가족 혹은 공동체는 여성들의 영역을 ‘집안’, 즉 ‘중공업 가족의 재생산’에 한정지음으로써 성립되었다. 아빠의 요구에 따라 괜찮은 조선소의 사무보조직으로 취직해 그럭저럭 일하다가 아빠가 소개해주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 결혼 후에는 남편과 아이들을 ‘케어’하며 적당히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거제도에 사는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소위 가장 ‘괜찮은’ 선택지이다. 거제도를 벗어나 외지인이 되지 않는 한, ‘땐뽀걸즈’와 같은 미혼 여성들이 취할 수 있는 진로는 많지 않다. 상당수의 여성들이 직업을 중심으로 커리어를 쌓아가는 서울 및 수도권과는 괴리가 큰 삶이다. 이런 남성 노동자들 중심의 가족문화는 거제도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의 원천이자 자랑거리이지만, 외부인들에게는 그저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
‘가부장 질서’를 고집한 ‘중공업 가족’의 문화는 여성뿐 아니라 중공업의 또 다른 구성원들을 배제했다. 하청업체 노동자, 이주 노동자 같은 이방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조선업의 산업 경쟁력이 비약적으로 향상하기 전, 초창기 조선소의 노동자들 역시 모두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씁쓸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안정적인 임금으로 가족의 풍요로운 ‘소비 생활’을 뒷받침하는 가부장이 될 수 없다. 하청 노동자가 결혼을 해서 가족을 꾸리는 것 자체가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선이나 미팅 자리에서 ‘하청 노동자’의 신분이 탄로나면, 분위기는 곧바로 냉랭해진다. 미리 밝힐 경우 진즉에 거절당하기 일쑤다. 일터에서도 눈에 띄는 차별 대우를 받는다. 2000년대 조선업의 강력한 먹거리로 등장한 해양플랜트 작업의 상당 부분을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지만, 이들은 언제나 조선소 내 ‘카스트’의 맨 밑자리를 차지한다. 조선소에 자기 자리를 갖고 있지 못한 이 하청 노동자들은 식사조차 바닥에서 해결할 때가 많고, 작업에 필요한 기본적인 공구조차 마음 편히 쓰지 못한다. 조선소 현장은 언제나 직영 정규직 노동자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노동조합조차 하청 노동자들의 문제를 ‘메인 이슈’로 다뤄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개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 시절
2015년의 위기가 터져나오기 전만 해도, 거제도를 중심으로 한 조선업은 명백히 최고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랬다. 중화학공업 육성을 통해 수출을 장려한 박정희 정권기, 대우조선 옥포조선소가 완공된 이래로 거제는 용접빛으로 뜨겁게 달궈졌다. 조선소들이 들어선 이후 거제는 별반 존재감 없는 도시에서 조선업(중공업)을 위시한 국내 최고의 조선업 도시로 탈바꿈했다. ‘맨 땅에 헤딩’하던 시절을 지나 한국 조선업을 세계 1위 수준으로 일궈낸 것이다. 그렇게 거제도 사람들은 소위 ‘옥포만의 기적’ ‘조선소 드림’을 이룩해냈다. 초고속 성장의 쾌거를 달성하며 1990년대 후반에는 세계 1위의 자리에 등극하고, 그 힘을 이어받아 2000년대에는 그야말로 황금기가 맞이하게 된다.
거제 조선업이 1990년대 세계시장의 패권을 획득하기 전, 조선산업의 패권국은 유럽과 일본이었다. 영국이 세계 경영을 하던 빅토리아 시대의 인프라를 토대로 강선 건조로 1950년까지 조선산업을 주도하고, 북유럽의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스칸디나비아 3국)가 저임금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일본이 ‘용접’을 통해 강판을 조립하는 방식과 크레인을 활용한 탑재 방식 등 혁신을 이뤄내면서, 조선산업의 패권이 아시아로 넘어왔다.
거제도를 필두로 한 한국 조선업이 일본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 당시 한국은 일본의 공법을 향상해 블록의 대형화와 모듈화는 물론 여러 공정들에서 자동화와 기계화를 달성했고, 옥외 작업장에서 이루어지던 선행 작업들을 실내 공장으로 옮겨왔다. 야드를 많이 잡아먹는 블록들을 외부 블록 공장에서 조립을 마쳐 운송해 최종 공정을 수행할 수 있게 함으로써 생산 효율을 극대화한 것이다. 마침 일본에서는 지방 근무를 기피하는 대학생들이 조선소를 기피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인력난으로 인해 선박 설계가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이렇듯 기술 혁신, 일본 조선업의 쇠퇴라는 결정적인 기회들을 손에 넣으면서 한국 조선업과 거제의 노동자들은 “개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니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을 실직과 죽음으로 몰아넣은 IMF 시기에.

위기 속 뿔뿔이 흩어진 ‘중공업 가족’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도 조선소에 찾아온 위기와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 1990년대에 일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LNG 운반선 기술을 독점해 ‘고부가가치선’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빅 3’(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조선소들의 행보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2008년 경제 위기로 인해 해운 물동량이 줄고 수주량이 급감하자 조선소들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일본의 기술력’과 ‘중국의 인건비’ 사이에 끼어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 대형 조선소들은 찾은 ‘해양플랜트라는 기회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으나, 이 새로운 사업은 만만치 않았다. 결국 해양플랜트는 더 큰 위기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 책은 조선업을 휩쓴 침체와 위기를 직면하면서, 성장의 국면에서 견고하게 구축된 ‘중공업 가족’이라는 공동체 형식을 의심하고 질문할 것을 제안한다. 보장된 정년과 높은 연봉으로 대표되던 정규직 노동자들은 유연성과 저성장의 세계에서 화석 같은 존재가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성장가도를 달릴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균열들을 수면 위로 끌어내 조선업과 산업도시 거제의 도약과 성장을 돌이켜보는 작업이 절실한 시점이다.
몇 차례에 걸친 위기 속에서 조선산업 내부에서 들끓던 모순들이 터져나오는 중이다. ‘중공업 가족’에 합류하지 못한 존재들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하청 노동자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 현장’ ‘여성 엔지니어들을 잘 기용하지 않는 업계’, 나아가 ‘여성들의 일을 가사 노동 혹은 사무직 보조의 영역에 국한하는 ‘남초’ 지역’이라는 혹독한 현실은 이른바 ‘황금기’에는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것들이다. ‘조선소 드림’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특정한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 모든 현실이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땐뽀걸즈>에 언뜻 언뜻 출몰하는 ‘위기에 빠진 가족’은 어쩌면 ‘조선소 드림’이 풀지 못한 중대한 숙제를 암시하는지도 모르겠다.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중공업 가족에게서 우리는 거제 조선업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게 된다. 부재하는 엄마, 불안정 노동과 자영업으로 내몰린 아빠, 진로를 고민할 시기에 직접 생계 전선에 나선 딸…… 이 모든 광경이 위기를 암시하고 있다.

또 다른 이방인: 서울로 향하는 엔지니어들
다른 한편, ‘중공업 가족’에 편입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이들도 있다. 한국 조선업의 주춧돌을 세운 ‘작업장 엔지니어’의 방식에 반기를 든 ‘랩실 엔지니어’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중공업 가족’과 ‘사내 공동체’의 보수적인 문화에 반감을 표하며 대도시에서의 자유분방한 네트워크를 찾아 떠나고 있다. 위기 국면에서 회사를 가장 먼저 떠난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조선소의 설계 엔지니어를 세대별로 추적하며 현장 중심의 기풍을 중시한 1960~1970년대의 공고 출신 ‘작업장 엔지니어’와 최첨단의 공학 지식으로 무장한 공대 출신의 젊은 ‘랩실 엔지니어’의 갈등을 들여다본다. ‘작업장 엔지니어’는 대략 1960년대 후반에 조선소에 입사해 현장 노동자들과 몸으로 부딫히며 설계를 익힌 맥가이버 세대라면, 뉴페이스인 ‘랩실 엔지니어’는 학교 랩실에서 수많은 공학 실험들을 경험하고 각종 프로그램을 활용해 도면을 그리는 빌 게이츠 세대에 해당한다. 회사 내 직급으로 따지면 선후배 혹은 사수-부사수 관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너무도 다른 관점으로 설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갈등은 해양플랜트 작업이 조선산업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 2000년대부터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랩실 엔지니어들이 자재 구매 요청부터 도면 그리기까지 모든 것을 자리에 앉아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데 비해, 선배인 작업장 엔지니어들은 모든 피드백을 ‘오프라인’의 면 대 면으로, 즉 ‘페이퍼워크’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배만 제대로 설계하면 열 척이 넘는 배들도 순탄하게 제작할 수 있는 선박 건조와 달리 해양플랜트는 플랜트가 놓이게 될 바다의 상황에 맞는 딱 한 기만을 제작해야 한다. 말하자면 모든 해양플랜트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북해에 놓이는 원유 시추 설비와 멕시코만에 놓이는 원유 정제 설비 간에는 해양플랜트라는 이름 말고는 특별한 공통점이 없다. 이처럼 대량생산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 탓에 해양플랜트에서는 작업 과정의 모든 시행착오가 순수하게 비용이 된다. 랩실 엔지니어들은 맨 땅에 헤딩하는 방법으로 해양플랜트 설계를 익히면서도, 하나의 프로젝트를 마칠 때 획득한 ‘공학 지식’을 하나의 ‘히스토리’로 구축하고 싶어 했지만, 실제 작업은 녹록치 않았다. 대표하는 현장 중심의 문화, 즉 ‘오프라인’과 ‘페이퍼워크’로 주도되는 작업장 엔지니어들의 문화가 끝내 이 새로운 방식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욕구가 강한 젊은 랩실 엔지니어들이 ‘중공업 가족’이 되기를 거부하고 서울로 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이들은 거제도에 평생 주저앉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주말마다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들이 서울로 향한 이유는 다양한 배움과 네트워크 때문이다. 초창기의 작업장 엔지니어들이 현장에서의 체험과 ‘쟁이 근성’을 성장과 배움의 양식으로 삼았지만, 지금의 랩실 엔지니어들은 전혀 다른 자양분을 필요로 한다. 이들은 첨단 기술을 경험할 수 있는 외부 세미나나 밋업, 온라인 커뮤니티, 벤처 프로젝트 같은 훨씬 더 캐주얼하고 열린 활동들을 지향한다. 이처럼 다양한 원천들을 통해 최신 지식을 획득하고 설계 능력을 보강하면서 점차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회사 차원에서도 이들은 핵심 인력이다.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대우조선으로 대표되는 조선 3사 모두가 젊고 똑똑한 엔지니어들을 영입하기 위해 직접 나서 서울 및 수도권에 연구개발 센터를 짓고 설계 엔지니어들을 서울로 대거 발령했을 정도다.

거제의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거제의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을까? 2015~2017년을 들쑤신 위기가 잦아든 지금, 조선업은 그간 해결하지 못한 숙제들을 얼마나 풀어냈을까? 절박한 위기는 넘겼지만, 풀어야 할 숙제는 여전히 많다는 게 이 책의 진단이다. 7년만에 ‘선박 수주 1위’ 타이틀을 중국으로부터 탈환하고, 거제의 양대 조선소(대우조선, 삼성중공업)가 2017~2018년에 대부분 흑자를 기록하는 등 고무적인 성과들이 있었지만, 시장 상황은 결코 녹록치 않다. 늘어난 선박 수주로 일감을 확보한다고 해도 그 선박들이 예전처럼 10%에 달하는 수익률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매출 관점에서 보더라도 매년 10조 원 이상의 선박을 수주하고 건조하는 일은 거대 호황이 찾아오지 않는 한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어떻게 더 성장할 수 있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잘 유지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더 이상 ‘위기가 곧 기회’이던 시절은 기대하기 어려워졌지만, 적어도 위기를 ‘계기’ 삼아 실현 가능한 대안을 모색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현대자동차가 고안해낸 ‘기민한 생산 방식’, 즉 생산기술 혁신을 통해 작은 부품들을 표준화된 모듈로 만들어 외주로 생산하고 최종 완성 공정을 단순화해 비숙련 노동자들도 작업할 수 있게 만든 방식 등을 참조해볼 만하다. 현대자동차는 이를 통해 생산성과 수익률의 문제를 해결한 바 있다. 물론 용접 노동자의 숙련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품질과 생산성 차이를 내는 조선산업에 이를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하청 노동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비전을 갖고 작업에 임하게 할 것인지를 숙고하지 않는 한, 산업을 잘 지탱하기는 어렵다.
이렇듯 중공업 내부의 다양한 인력들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고려해야만 산업도시 거제와 조선업이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거제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발전하려면,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다른 삶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고 싶은 도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실직하거나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난 아빠를 보면서 댄스 스포츠 경연을 학창 시절 마지막 추억으로 간직하려 한 ‘땐뽀걸즈’가 조선소의 사무보조직 외에도 다양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도시 혹은 좀 더 높은 연봉과 수도권 삶을 찾아 떠났던 젊은 엔지니어들과 사무직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도시 말이다. 접기


평점
분포

8.9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 산업의 발전과 흥망 그리고 그 산업이 엮여 있는 도시의 이야기.
로리! 2019-02-16 공감 (2) 댓글 (0)
Thanks to
공감




중공업, 제조업만의 문제일까. 여러 문제를 생각해보게 한다.
중공업에 대해 몰라도 거제도에 대해 몰라도 흥미진진.
참 좋은 사회과학 서적이다.
푸른 2022-05-14 공감 (2) 댓글 (0)
Thanks to
공감




일반인을 위한 사회과학 서적의 모범.
미송구 2024-08-04 공감 (0) 댓글 (0)
Thanks to
공감





마이리뷰
구매자 (2)
전체 (5)
리뷰쓰기
공감순




대한민국 경제의 등뼈를 조명하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제목에서 풍기는 무거움과는 다르게 대단히 재미있는 책이다. 사회학 학술서처럼 보이고 내용도 그게 맞기는 하지만 서술 방식이 에세이같아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제공하는 통계들은 저자가 자신의 주장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일뿐 반드시 독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토록 술술 읽히는 사회학 책이 언제 또 있었는가를 돌이켜보면, 글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거의 독보적인 책이다.




저자는 대우조선해양이라는 회사에 5년간 근무하며 경험한 일들을 토대로 산업도시 거제와 대한민국의 조선업을 분석하고 그 미래를 조망한다. 나는 이 시도가 사실상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돌아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조선업의 시작과 함께 탄생한 거제의 중산층이, 조선업의 몰락으로 인해 해체될 위기를 그리지만 이를 산업도시 거제와 조선업 종사자들로만 한정해 해석할 이유는 없다. 현재 대한민국이 누리는 부의 대부분은 제조업으로부터 축적된 것이며 우리가 중산층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이 산업의 절정과 함께 탄생했기 때문이다. 제조업이 차지하는 경제 비중은 매년 감소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30%에 달한다. 이는 OECD 가입국 중 최고이며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보다도(29%) 높은 수치이다. 혹자는 이것이 한국 경제의 문제라 지목하며 여타의 선진국들과 달리 제때에 서비스업으로 방향 전환을 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람들은 자기가 익숙히 접하는 현상과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기 때문에 그 현상을 지탱하는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둔감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마트나 롯데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사지 그 제품을 생산한 공장에서 사지 않는다. 미디어는 연일 4차 산업 혁명을 부르짖고 AI, IoT, 스마트 산업 혁명을 쏟아내며 새롭게 탄생한 유니콘을 조명할뿐 어느 시골 구석에 쳐박힌 알짜 중소기업의 공장에 눈을 돌리진 않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가장 강한 건 아니다. 세상은 마치 이들의 주도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조업이 탄생시킨 중산층과 높은 그들의 소득으로 인한 욕망의 발전이 없었다면 그들이 설 무대는 결코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느 대학을 나오든, 무슨 전공을 했든, 근면과 성실만 있으면 누구나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시절 말이다. 이제 그런 유토피아는 사라져갈 위기에 처해 있다. 가장 흔한 분석은 이렇다. 기술로는 선진국을 따라가지 못하고 가격으로는 개발도상국과 경쟁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은 어땠을까? 세계 조선업의 패권은 영국에서 스웨덴, 스웨덴에서 일본 그리고 한국으로 넘어왔다. 이들은 단물이 빠진 제조업을 버리고 제때에 방향을 전환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부자 나라가 된걸까? 그 말이 맞다면 제조업은 단순히 미래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할 것이다.




공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 머리 속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생각해보자. 쉼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 먼지, 재해, 기름에 쩐 작업복,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 산업과 직군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기업 제조 공장을 한번이라도 찾아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큰 편견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제조업이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부의 평등'을 고려하는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제조업에서 눈을 돌려선 안된다. 1980년대, 대한민국의 구석에서 시작한 조선업은 수십만 명의 사무직과 생산직을 고용하며 그들에게 크고 안정적인 소득을 안겨줬다. 그들은 용접 기술이나, 지게차 운전 면허증이나, 도색 기술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그런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5조 5천억이 넘는 매출에 20%에 육박하는 영업이익을 내는 우리나라 최고의 IT 기업 네이버는 9천 명 정도의 인원을 고용하지만 고작 2~3%의 영업이익을 내는 한심한 LG전자는 7만 명이 넘는 사람을 고용한다. 최저시급이나 받는 생산직들이 많은 탓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인터넷에 대기업 생산직 평균 연봉을 검색해 보기 바란다. 앞으로 대한민국에 수백개의 IT 유니콘 기업이 탄생한다 하더라도 제조업 절정기만큼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고용 창출 능력과 다양성 측면에서 제조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한민국도 올라올 만큼 올라왔으니 이제 공단으로 대표되는 제조업은 전부 개발도상국에 맡기고 제약, 반도체 같은 최첨단 공장과 금융, 관광, IT 서비스를 중심으로 경제를 재편해야 할까? 아니. 문제가 있으면 고치면 되지 버릴 필요는 없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정확히 이런 의견을 견지하며 세계 1등의 조선업을 해부한다.
- 접기
한깨짱 2019-05-26 공감(12) 댓글(0)
Thanks to
공감



‘조선소 3부작’을 통해 본 갈림길에 선 조선산업




출처 : 창원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통권51호(2019년3월)



책담(冊談)



‘조선소 3부작’을 통해 본 갈림길에 선 조선산업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양승훈/오월의봄/2019년1월/16,900원

《현대조선 잔혹사》/허환주/후마니타스/2016년5월/15,000원



《누운 배》/이혁진/한겨레출판/2016년7월/13,000원



















양솔규(편집위원장)










조선산업의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2018년 3분기 조선업 일자리는 2017년과 비교해 1만5천개나 감소했다. 경남 지역으로 보면, 성동조선은 860여명 중 700명이 무급휴직을 진행 중이며, STX조선은 500명이 무급휴직 중이다. 또한 RG(선수금지급보증·Refund Guarantee) 발급이 미뤄지고 있다. 이에 더해 대우조선해양을 현대중공업이 인수하기로 결정하면서 지역경제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










조선산업은 IMF 구제금융 당시 수출에 있어 일익을 담당하면서 경제위기의 충격을 극복하게 해준 효자산업이었다. 더군다나 조선산업은 고용지수가 매우 높은 조립산업으로서 실업에 빠진 국민경제의 충격을 완충지대가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에 힘입어 최대 호황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호시절은 지나갔고 침체는 지속되고 있다.


조선산업 위기는 한국 제조업, 더 나아가 한국 경제의 위기이기도 하다. 보수언론, 그리고 수도권의 젊은 연령대를 중심으로 조선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산업은 동남권 경제, 더 나아가 수출의존적인 한국 경제에 여전히 중요한 산업이다.

어떤 산업이든 좋은 날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예측이 가능해야 하고, 먹고 살 수는 있어야 한다. 사람의 생사가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걸 잘 하라고 경영진이 있는 것이고,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조선업 구조조정은 반대의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사람을 산업폐기물 취급”하며 공장에서, 시장에서, 지역에서 내몰고 있다.



통계청이 2018년 8월에 발표한 2018년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특별시, 광역시 제외조사) 결과를 보면 경남 거제가 7%로 가장 높고, 경남 통영이 6.2%(2013년 하반기엔 1.2%였다.)로 2위를 기록했다. 군산도 4.1%에 달했다. 2018년 4월 울산의 실업률은 5.9%로 전년 동월에 비해 2.3% 증가했다. 고용위기가 닥치면서 지역을 떠난 인구를 감안한다면 조사된 실업률도 현실에 비해선 그나마 양호한 결과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고용위기, 산업위기가 가져온 고통을 노동자들에게만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수많은 사무관리직 노동자들이 회사를 떠났고, 생산직의 경우 주로 공정 지연 일정을 만회하기 위해 투입되는 ‘돌관 작업’(돌파해 관철)을 맡았던 이른바 ‘물량팀’이 제일 먼저 제거되고, 본공(사내하청 정규직)이 그 다음이다. 원청은 일종의 공사대금인 일명 ‘기성금’을 후려치기 하고, 적자에 시달리는 하청업체 사장은 야반도주하기도 하고, 체불임금으로 줄소송 당하기도 한다. 중소조선소의 경우 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급휴직의 터널 속에 놓여 있다. 중소조선소의 몰락은 하청업체, 선박설계업체, 선박기자재 업체 등 조선업 생태계의 동반몰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빅3 더 나아가 빅2(현대, 삼성)로의 집중이 정답인 양 몰아가고 있지만, 지역경제와 조선산업의 다변화를 생각한다면 강도 높은 구조조정만이 유일한 정답은 아니다. ‘연착륙’과 생태계를 보전하는 입체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2016년에 나온 《현대조선 잔혹사》(허환주)와 2019년에 발간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양승훈)은 조선산업에 대한 냉철한 관찰기이다. 그런데 관찰대상과 방향성이 약간 다르다. 프레시안 기자인 허환주는 2012년 창원의 작은 조선소에 위장 취업해 12일을 버텼다. 노가다와는 차원이 다른, ‘생명을 위협’하는 조선소를 경험한 기자는 6년여 간의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조선산업 노동자들에 대한 취재의 결과를 자신의 경험과 버무려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조선소의 위험한 작업환경, 산재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과 가족의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깨지는 하청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또다른 책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쓴 양승훈은 대우조선에서 5년간 사무관리직으로 근무하고 지금은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산업에 대한 거시적 관찰과 전망, 조선산업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중공업 가족’의 형성과 해체, ‘중공업 가족’의 외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2001년 사상 최초 수주량 세계 1위를 차지했던 한국 조선산업. 2008년에는 전 세계 상위 10대 조선소 중 7개가 한국 회사였다. 호시절은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끝이 났다. 무역물동량이 줄어들었고, 수주량이 급감했다. 더군다나 2000년대는 한국 조선소들이 호황기를 맞아 대거 설비를 늘려갔고, 중국 조선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 조선소들도 조선산업에 대한 기존의 회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재생을 추진하고 있었다. 경쟁이 격화되는 것은 당연했다. 조선산업 설비투자 과잉은 선박공급 과잉을 낳았다. 중국경제 등으로 인한 선박 수요와 물동량의 증가보다 더 많은 생산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신원철, 2017)











2010년대 조선소들은 해양플랜트를 새로운 먹거리로 삼고자 했다. 유가가 상승하면서 엑슨 모빌 등 초국적 에너지 회사들이 심해유전을 개발하기 위해 시추선 등 해양플랜트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현대, 대우, 삼성 Big 3는 무작정 해양플랜트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조선과는 다르게 해양플랜트의 80%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자연히 사내하청 비율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원청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숙련도가 떨어지는 사내하청 노동자, 그리고 일천한 경험, 높은 외국자재 비중, 낮은 마진의 조건 속에 도전한 해양플랜트 제조는 쉽지 않았다. 내부를 ‘잘 비우는’ 것이 중요한 조선과 내부를 ‘잘 채우는’ 해양플랜트는 성격이 매우 다른 공정이었다. 공기는 길어지고, 그만큼 부담해야 할 추가비용은 늘어났다. 계약금 20%를 먼저 받고, 나머지 80%를 마지막 인도 시에 한꺼번에 받는 해양플랜트의 헤비테일(heavytail) 결제 방식과 럼섬-턴키(Lump sum-turn key, 일괄도급 계약) 방식도 위기를 부추겼다. 유가의 급락으로 인한 고객사들의 인수 연기는 엎질러진 기름에 불을 댕기는 격이었다. ‘배움’과 ‘성장’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해양플랜트의 실패는 조선업 전체의 구조조정의 도화선이 되었고, 크나큰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업의 실패에는 노사의 암묵적인 담합이 존재한다. 두 책 모두 언급하듯이, 2000년대 이후 원청 정규직들의 암묵적인 또는 공식적인 묵인 하에 사내하청과 물량팀은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현장 대의원들과 현장 생산관리팀 사이에서…(이루어진) 사내하청의 확대는 정규직 노조에서 나타난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노사담합’이 만들어 낸 결과”라는 것이다. 조선산업을 이끌었던 직접생산을 담당하던 정규직들은 생산 지원 업무로 많이 빠지기를 원했다. 산재 이후 현장복귀 시 조합원은 생산 지원 업무를 택했고, 노조는 이를 도왔다. 자연히 위험하고 힘든 일은 하청 노동자들이 맡게 되었다. 회사 역시 노무관리상의 이유로 쉽게 통제하고 쉽게 수량을 조절할 수 있는 사내하청을 활용하고자 했다. 한진중공업을 보자면, 2008년 정규직 노동자 1,385명, 사내하청 노동자 3,652명 이었다. 2010년 정규직 1,093명, 사내하청 2036명으로 –1,616명이 사라졌다. 2011년 말 정규직 770명, 비정규직 501명, 2012년 말 비정규직 0명이 된다. 희망버스운동이 벌어졌던 2011년 전후로 비정규직 규모는 계속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읽다보면 저자의 의견에 갸우뚱 하는 부분도 있다. 저자는 “만약 생산직과 엔지니어 둘 중 한쪽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질문하는데 후자에 기울어진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동의의 정도는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사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대우조선노조가 금속노조와 전노협 창립을 주도했다는 언급 등)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조선산업의 위기를 입체적으로 살핀다는 데 있다. 노동자 숙련문제와 인력배치의 문제, 임금체계의 문제, 기자재업체, 설계 업체 등 조선업종 생태계 전반에 대한 관찰이 녹아 있다. 무엇보다 조선산업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새겨들어야 할 거 같다. 근거없는 낙관주의는 결국 위기를 반복하게 할 뿐이다. 해양플랜트 수주 과정에서 드러난 실책들은 한국 조선산업이 반복해서 곱씹어야 할 반면교사가 되어야 한다.



《현대조선 잔혹사》는 2016년에 나온 책이다. 더구나 2012년에 저자가 12일간 위장취업을 한 경험을 생각한다면 꽤 시간이 지난 책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조선산업 노동자들이 마주했던 암울한 현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비인간적 처우와 폭력적인 갑질을 보다 보면 매일매일 ‘PD수첩’을 찍고 있는 조선노동자들의 현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전체 산업의 미래를 보더라도 이러한 ‘아래로의 경주’가 조선산업의 토대를 갉아먹고 있다. 물량팀과 사내하청의 활용은 결국 노동자 숙련의 결핍을 가져왔고, 체질을 허약하게 만들었다.



조선산업의 위기는 당장 ‘인력 유출’을 야기하고 있다. 지금 현재는 LNG 선박 제조에 있어 한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가 있다고 하지만, 중소조선소가 대거 정리되면서 설계 등을 담당했던 핵심 엔지니어들의 중국 기업으로의 취업이 가속화되고 있다. 또한 2015년 이후 가장 먼저 이탈한 사람들은 “구조조정이 목표물로 삼은 근속 20년 이상의 사무직 시니어들이 아니라, 근속 10년 이내의 대리, 과장 이하 직급의 사무직 주니어층”이었다. 특히 수도권 출신 직원들이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이직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조선산업의 ‘핵심인력’을 잘 지켜내고, 새로운 인력을 어떻게 육성할 것인지 숙고하지 않으면 설사 호황기가 오더라도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누운 배》는 이혁진 작가가 써서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중국으로 이전한 한국의 중형조선소이다. 소설의 도입은 진수식을 마친 배가 누우면서 시작한다. 이후 회사는 원칙이 무너지고, 편법과 무사안일이 지배한다. 그러다 신임 황철주 사장이 부임하면서 조선소의 분위기는 180도 바귄다. 나머지는 스포일러가 될까봐 생략한다.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희망을 잃었다고 해서 반드시 절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근거없는 낙관주의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삶이 지속되는 한 자포자기할 수만은 없다. 최근 빅3의 수주량이 조금 늘어난다고 해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만은 없다. 양승훈 저자의 논지를 빌리자면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깨져 버렸다. ‘대우가족’, ‘또하나의 가족’에서 배제된 생산직 노동자들, 사냥이 끝나자 버려진 사냥개가 되어버린 사무관리직 노동자들, 호황이 끝나자 끊어진 원하청 관계는 조선산업 내 ‘신뢰’를 무너뜨렸다. 결국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조선산업 내 사회적 주체 간에 새로운 규율과 신뢰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작업장, 일방적으로 한쪽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공평하게 분담하는 관행, 장기적 전망을 담보할 수 있는 당사자들간의 진지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함께 보면 좋은 자료>

-KBS 추적60분 1236회 <무너지는 조선업, 한국판 러스트벨트의 경고>(2017년2월15일)

-다큐멘터리 <땐뽀걸즈>, 2017년, 이승문 감독

-“해운 및 조선산업의 금융화와 과잉투자”, 신원철,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2017년 상반기(통권 31호)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흥청망청‘ 서사는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도시를 섬세하게 들여다보기도 전에 비하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선은 도시와 시민들을 살아 있지도 죽지도 않은 ‘좀비‘로 만들 따름이다. - P320


- 접기
도화선 2019-03-25 공감(11) 댓글(0)
Thanks to
공감



거제도 사회와 조선산업에 대한 기록과 고민



세계 1위 조선산업은 한국의 자랑거리다. 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으로 과감한 투자가 있었다.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성과다. 특히 2000년대 중반에 중국이 고속성장하면서 전세계 원자재를 빨아들이고, 또 세계의 공장으로써 물건들을 쏟아내고 세계화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에 한국의 조선산업은 엄청난 호황을 맞었다.



조선산업은 귀한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했다. 거제도에는 특히 조선소가 밀집해 있는데, 평균적으로 서울보다 소득수준이 높았다.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정규직 제조업 노동자로서 중산층을 이루며 살 수 있는 시기였다.



책의 초반부에는 사회학자로서 거제라는 특수한 사회환경에 대한 조사가 돋보인다. 거제도에서는 퇴근 전후에도 부서와 이름이 쓰여진 작업복을 입고 다니고, 심지어 소개팅 같은 자리에도 입고 나간다고 한다. 자부심도 있었고 고소득을 올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공장옆에서 식당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종도 활기가 남쳤고 아파트나 원룸으로 세를 받는 사람들도 고수익을 만끽했다.



남자와 여자의 일이 칼같이 구별되는 상황에서 딸같은 젊은 여성들은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로 유출되기 일쑤였다. 거제에서 사무직이나 간단한 일을 비정규직으로 하면서 아버지와 같은 남성과 결혼으로 안정적인 '중공업 가족'을 만드는 걸 기대받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게 계속 좋기는 어렵다. 한국이 영국과 일본으로 부터 조선산업의 왕좌를 물려받았던 것처럼 환경이 바뀌면서 순풍은 사리지고 역풍들이 생겨난다. 생산성 향상이 더뎌지고, 적절한 투자를 하지 못하게 되고, 인건비는 높아진다. 유럽은 설계쪽으로 집중하고 엔지니어링을 극대화한다. 고부가가치 선박만 만드는 쪽으로 옮겨간다. 기자재업체들을 끌어올려 수많은 강소기업들을 만들어냈다.



현재 한국 조선산업 모습으로는 중국이나 동남아 조선사와 경쟁하기 힘들어보인다. 조선산업 전체를 포기하지 않고 변신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쉬운 문제는 아니다. 직간접적으로 엄청난 고용이 걸려있있고 정치쟁점화 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 자생적이고 경제적인 해결방안이 도출될 수 있을까 좀 걱정스럽긴하다. 이 책에서도 뚜렷한 대안제시는 없다.



조직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대졸이상의 설계인력을 많이 뽑았다고 한다. 그들이 기존 거제도 생활문화나 현장과 암묵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에 녹아들기 어려워 하는 모습을 보면 조직이 어떤 방향으로 굳어질때 이를 변화시키기 얼마나 어려운가 생각하게 한다.



또하나 중요하게 언급되는 건 하청 문제다. 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과 거제도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일종의 계급문제가 발생한다. 이것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을거다. 기업에서는 해고가 어려운 마당에 고정비를 줄이고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긴 하다. 그런데 새로운 해양플랜트같은 고난이도 작업에 하청이 대거 투입되면서 작업은 진흙탕을 전진하는 듯한 모양새가 나타난다.



책은 크게 보면 3가지 주제를 다룬다. 거제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조직원들의 상호작용에 대한 분석과 조선산업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고찰이다. 작은 분량이지만 다양한 관점의 내용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고 있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내부자로서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관점에서 드문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소중하게 읽었다.



교훈이라고 한다면 좋을 때 좋은것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대체로 좋을때 나빠질 걸 생각하지 않고 엉뚱한 투자를 하고 굳어진걸 풀어줄 생각은 못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그래서 대부분 좋을때 굳어진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짐으로 작용한다. 오래가는 산업과 기업은 변화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계속 구성원들과 이런 변화를 만들어나간다는 건 얼마나 어렵고 지난한가 생각해보게 된다.
- 접기
belazy 2019-04-07 공감(3) 댓글(0)
Thanks to
공감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양승훈, 오월의봄, 2019)


#1.
책 내용과 크게 유기적 연관은 없지만 우선 내 경험을 떠올려보는 것으로 시작을. 내가 중학생 때 진학 관련 체험 행사로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舊 북공고, 서태지가 다녔던 그 학교)에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전반적으로는 특성화고(실업계) 고등학교에서는 어떤 걸 하는지 알기 위해서 당시 담임 선생님이 기획했던 행사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교실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가 끝에는 고등학교 교장이 학생 유치를 위해 잠시 동영상과 같이 홍보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용인즉슨 북공고가 이제 쇄신하여 이름도 바꾸었고 주목받는 신진 산업인 해양플랜트 특성화 고등학교로 방향을 정하기로 했다, 운운. 나는 플랜트라 하면 게임 플랜트 vs. 좀비밖에 몰랐었고, 그리고 이것은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해양플랜트가 뭔지에 대한 설명도 뒤따라왔다. 들으면서 음 이런 산업도 있구나. 그때는 신문도 안 보고 그랬으니까 뭐 누군가는 바다에서 원유 시추하는 그런 기계를 만들어야 하겠지 그런데 왜 이름이 플랜트일까 심는다고 해서 플랜트인가… 하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 이 고등학교는 해양플랜트 전문 마이스터고등학교로 지정된다.


이번에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양승훈, 오월의봄, 2019)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해양플랜트’라는 단어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해양플랜트 산업은 책의 전반적 내용을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2008 세계 금융위기 이후 선박 수주가 감소하고 한국의 조선업 기업들은 위기를 타개할 해결책으로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해양플랜트 수주를 시도했다(168-9쪽).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우선 아주 미시적으로는 현장 노동자들이 그동안 축적해온 지식이 어느 정도 쓸모없어지게 되는 문제를 낳았고(145-6쪽), 그 이외에도 생산관리, 엔지니어-현장의 관계 문제, 그리고 세계 경제의 구조 변동과 긴밀하게 엮여 있는 비정규직·하청 문제와 유럽 업체들과의 기술력 격차(3부 참고)까지 조선소 안과 밖의 맥락을 모두 아우르게 되는 복잡한 문제를 낳게 된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조선업의 위기에 대해서는 자주 듣고는 했지만, 이상하게 플랜트에 대해서는 듣거나 신문에서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읽고 나니, 그저 신문 헤드라인으로만 접했던 조선소 위기에 대해 이런 역사가 있었구나 하고 이제야. 그리고 중학생 때의 잊었던 기억이 소환되며, 사실 친구들 중에 도시과학기술고 간 친구는 없지만, 그때 학생들에게는 생소한 해양플랜트산업의 미래를 홍보했던 그 학교 교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2.
책의 프롤로그를 읽고 조금은 반가웠다. 저자 양승훈은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는데, 대학원 다니는 중에 우석훈의 『조직의 재발견』을 읽으며 전통적인 사회과학에서는 잘 다루지 않지만 “기업의 이런저런 ‘실무’를 담당하는 사무직”과 “자본주의의 주요 배역 중 하나인 기업”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28쪽).(그리고 또 조주은의 『현대 가족 이야기』를 읽으며 산업 도시 가족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고 했는데, 조주은의 같은 책은 아니지만 『기획된 가족』을 읽으며 중산층 가족들의 생존 전략이랄지 그런 ‘실제적인’, 꼼꼼한 인터뷰와 민속지로 드러날 수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 관심이 생겼던 사람으로서도 반가웠다.) 나는 정치학도 문화인류학도 전공하지 않았지만 경제학이나 경영학이 아닌 이상 비슷한가 보다.(경제학도 그런가?) 어쨌든 적어도 학부 수준에서 가르쳐지는 사회학은 기업이나 산업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다. 뭐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고 조직, 산업 얘기를 꼭 사회학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급되어야 할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인상은 있었다. 조직사회학이나 복지사회학 수업이 갈증을 좀 채워주기는 했는데… 현대 사회의 주요 행위자인 ‘기업’의 행태와 영향을 이해할 수 있는 테마를 다루는 수업은 별로 없었고 그리고 사실 주변에 정치경제학에 관심이 있다는 사람들도 좌파 이론 같은 거나 공부하고 그랬다.(불평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산업의 흥망성쇠를 세계적 맥락과 한국 내부의 특수했던 역사적 맥락과 함께 포괄적으로 다루고 그에 덧붙여 기업 내부의 조직 문화와 숙련의 문제, 산업 도시의 가족들의 생활세계 등의 미시적인 측면까지 조망한 이 책은 참 반가웠고 도움이 많이 됐다. 아쉬운 점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인사이트가 참 많은 책이었다. 트위터에서 약간 화제가 되어 읽었는데 읽기 참 잘한 것 같다.


#3.
아쉬운 점. 저자 분도 자주 지적받았겠지 싶지만 사실 책에서 ‘가족’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부분이 많지는 않다. 가족 이야기는 1부 2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그런데 95쪽에서 107쪽까지의 절 ‘직영과 외주: 외주 도입의 계보’는 조금 뜬금없다고 생각될 듯하게 조선소의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다룬다. 이는 2부 2장 193쪽 이후 ‘벼랑으로 내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부분과 내용상의 연속이 있다. 아쉬운 것은 “‘중공업 가족 프로젝트’”가 “배제와 포섭을 전제로 한 프로젝트”인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중공업 가족들이 어떻게 “하청 노동자들을 배제”했을까 그 구체적 과정에 대한 내용의 부족이다(113쪽). 단순히 젊은 노동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이 거제에 뿌리내린 삶보다는 보다 유동적인 삶을 선호한다는 묘사로만은 부족해 보인다. 숙련 없이 하청의 신분으로 거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기존의 중산층 가족을 전제로 짜여진 거제의 생활양식과 도시 인프라에 어떻게 적응하거나 불화할까? 결혼은 어떻고? 등등의 의문이 남는다. 물론 이것에 대해 말하려면 분량 상으로는 책 하나가 더 필요할 것이고 거제 뿐만이 아닌 다른 도시의, 또 다른 산업의 청년 노동자들에 대한 비교도 필요할 것이다. 사실 연구자 한 사람의 역량으로 모두 다루기는 부족한, 거대한 주제긴 하다. 거제를 비롯해 울산 등 도시의 청년·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사회적 차원에서 더 많은 관심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


#4.
책에서 다뤄지는 중요한 테마 중 하나가 재교육, 성장의 문제. “하지만 이제는 배움과 성장의 양식이 달라졌다. 산업 보국을 위해 뛰었던 작업장 엔지니어들의 방식이 ‘현장 중심’ 기풍과 이른바 ‘쟁이 근성’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우수한 랩실 엔지니어들은 오픈소스판에서 뛰노는 해커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 일을 해내려고 한다”(152쪽; 이러한 맥락에서 해커 문화도 다뤄진다). 엔지니어들이 꾸준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적 뒷받침과 문화의 변화가 필요할까? 조선업의 문제는 단순히 구세대의 학습 문화와 신세대의 학습 문화가 충돌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지리적 문제, 서울-지방의 격차까지 포괄한다(153-5쪽). 뿐만 아니라 IT 산업은 ‘현장’이 필요하지 않은데(160쪽) 제조업 분야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점도 있다.


이런 설명을 읽어 보고 의문 두 가지.
(1) 조선소 이외 산업—특히 제조업—에서는 엔지니어의 교육을 어떻게 도모할까? “사실 젊은 엔지니어들은 자비를 들여서라도 외부 세미나나 밋업 등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154쪽). 다른 산업에서라고 해봤자 문제가 해결될까, 하는 질문은 아니고, 내가 너무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라 그저 궁금하다. 자기들끼리 깃헙(github) 같은 플랫폼이나 세미나 등의 오프라인 미팅을 통해 지식을 공유하고 네트워크를 쌓는 IT 분야의 문화는 익숙하다. 그런데 그런 문화의 전형이 IT 산업에 국한되어 있으니 그것은 IT 쪽에만 특유한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좀 있게 되는 것 같은데… 다른 제조업 부문에서는 어떨지 궁금하다는 지극히 순수한 궁금증.
(2) 앞의 것과 연결되는 의문? 지금은 안 하지만 중학생 때 프로그래밍도 배우며 서울 지역에서 이른바 ‘코딩’하고 ‘개발’한다는 동년배 친구들(90년대 후반생)과 짧게나마 교류했던 적이 있었다. 신기했던 것은 다들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로든 연결이 되어 있었고 스타트업 창업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고등학교 생활이 바빠도 많은 이들은 자기가 짜 놓은 코드도 종종 공유하고(내가 중고등학생 때는 github이 대중화가 안 되어 있어서 알아서 페북 그룹이나 개인 웹사이트에 올려 놓았던 기억) 뭐 그랬다. 그러다가 Seoul Bus 같은 앱 만들면 언론에도 나와서 대박 치고… 뭐 그런 것이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중고등학생 나이대 청소년들이 (물질적 보수 없이) 직접 기술을 배우고 커뮤니티도 이루고 직접 시장에서도 경쟁력이 있을 만한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참 별난 것이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코딩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것도 아니다. 이 원동력은 대체 어디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새삼스레 궁금해진다.


이런 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Kevin F. Steinmetz, Hacked: A Radical Approach to Hacker Culture and Crime. https://www.amazon.com/Hacked-Radical-Approach-Alternative-Criminology/dp/1479869716



- 접기
karenin 2019-03-31 공감(2) 댓글(2)
Thanks to
공감



[마이리뷰]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거제의 미래에도조선업의 미래에도여성 노동력의 가치를 일깨워야 한다고힘줘 강조하는 저자의 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글 곳곳에 배인거제에 대한, 조선업에 대한 애정은 덤이다.
토끼자 2022-11-13 공감(1) 댓글(0)
Thanks to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