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갑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바뀔 수 있는 -주한미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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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군대가 자국 영토에 주둔하는 상황이 달가운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 달갑잖음을 넘어서는 이익과 외부의 위협 때문에 적극적이든 수동적이든 수용할 따름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역사만 해도 외국 군대를 끌어들인 예는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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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왜의 모진 공세에 시달리던 신라는 고구려군 주둔을 허용했지만 국력이 커지면서 고구려 군을 쓸어버리고 나제동맹을 맺는다.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에 국가의 존망을 위협받던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였고 백제 부흥군들은 왜군 응원군을 대거 불러들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 군을 요청해 일본군과 맞섰지만 조선 말기에는 자기네 백성 밟아 달라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는 참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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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미군이 진주했고,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했다. 그들이 그은 38선은 군사적 점령지의 경계가 아니라 남과 북의 두 나라의 국경이 됐고, 결국 전면전이 터졌다. 한때 철수했던 미군은 이 전쟁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왔고, 휴전 후 내내 주둔하고 있다. 전쟁이 발발하면 한미연합사령관, 즉 미군 장성이 작전권을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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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부대의 주둔과 '전시작전권' 보유를 '식민지의 증거'로 우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과거 치명적인 오해 가운데 "한국군은 미국의 명령 없이는 자동차 하나 못움직이는 군대"라는 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미군의 명령 없이 독자적으로 깽판을 치고 나라를 둘러엎은 5.16과 5.18의 예에서 보듯, 한국군의 독자 행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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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군 작전권을 통째로 넘긴 이승만조차 툭하면 "한국군을 UN군에서 빼내겠다."는 협박을 수시로 했다. 즉 전시작전권 미국 보유와 한국의 주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물론 그렇게 달가운 일은 아닐 뿐이다. "중국이 대만 침공할 경우 우리가 총알받이가 된다."는 걱정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한미연합사령관이 우리 군대를 대만에 투입할 여지는 없다. 윤석열 같은 놈이 대통령으로 있지 않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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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나는 "윤석열 같은 놈"이 대통령으로 돌아오는 상황에서 그가 우리 군의 '작전 지휘권'을, 미국의 견제나 한미연합사령부의 통제를 거치지 않고 행사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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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주한미군을 두고 북한을 위협하는 만악의 근원쯤으로 묘사하지만 사실만 따지고 보자면 미군은 제 2의 6.25를 막는데 큰 기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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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포격 만행 당시 미군 장성 하나가 한국 국방부에 대래 짜증을 낸 적이 있다. 연평도 포격 당시 한국 국방부가 "어떻게 할까요?"를 집요하게 물어오자 "공격 받고 반격하는 건 주권 국가의 권리고, 신생 이라크 군도 그렇게 한다. 한국군이 이라크군보다 못한가." 버럭했던 것이 언론에 공개됐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가공할 보복 계획을 수립하자 오바마 대통령, 힐러리 국무장관까지 총동원돼 이명박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한다. 이때 윤석열이 대통령이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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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태를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격노'하여 미국 대사를 불러 쳐올라가겠다고 했을 때 미국 대사의 대답은 "혼자 하십시오"였다. 아웅산 폭발 테러 후 육사 12기 중심으로 보복 계획이 수립되고 특수부대의 평양침투 및 주제사상탑 폭파를 위해 남산 타워를 기어오르는 훈련이 단행됐을 때 (중앙일보 2021.11.23) 전두환을 달랜 것도 미국이었다. 전두환은 휘하 장성들에게 "내 명령 없이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반역"이라고 단속하며 보복을 막았다.
미국의 브레이크가 없는 윤석열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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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풀이 말하지만 자국 영토에 남의 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작전지휘권까지 가지고 있는 상황은 결코 달가운 상황은 아니디. 하지만 그게 절대악인 것도, 그게 식민지의 상징인 것도, 그 동맹의 적인 북한이 평화로운 피해자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주한미군은 '전쟁 위협의 원흉'보다는 '전쟁 발발의 브레이크' 역할을 한 적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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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의 담화를 읽어 보면 핵심은 "너희들이랑 말 안해"가 아니라 "한미연합군사훈련"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이 한미연합훈련에 신경을 곤두세우 는만큼 남한 사람들이 북한 핵에 공포를 느끼는 것도 상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들이 '연합훈련'을 걱정하는만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에 군대를 파견하고 그 댓가로 무엇을 받을지 신경이 쓰이는 것 또한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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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와 평화는 결코 따로 가지 않는다. 주한미군 철수하면 만사가 형통하고 평화가 온다고 노래하는 이들의 환상은 존중하지만 수용하기 어렵다. 아울러 나는 윤석열 같은 위인이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는 남한 정부만큼이나, 쥐뿔도 없이 잘 태어난 이유로 왕 노릇하고 있는 김정은의 북한 정부를 믿지 못한다. 주한민군 철수, 작전 지휘권 환수에 원칙적으로야 찬성하지만 그걸 '즉시'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달갑지 않으나 어쩔 수 없는 일들은 세상에 너무나 많기 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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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요즘의 트럼프처럼 이성을 잃은 미국의 행보가 계속된다면 '어쩔 수 없음'의 크기는 점차 줄어들 것이다. 얘나 지금이나 미국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위해 있는 것이고, 그 이익이 우리와 상당 부분 겹치기에 용인했던 것일 뿐이기에. 이렇듯 세상에는 영원불변한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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