万宝山事件

万宝山事件(まんぽうざんじけん)とは、1931年(昭和6年)7月2日に中国の長春北西に位置する万宝山で起こった、入植中の朝鮮人とそれに反発する現地中国人農民との水路に関する小競り合いが中国の警察を動かし、それに対抗して動いた日本の警察と中国人農民が衝突した事件。死者なく収まったが、この事件をきっかけに朝鮮半島で中国人への感情が悪化して排斥運動が起こり、朝鮮人による中国人襲撃事件が起こり、多くの死者重軽傷者がでた[1][2]。事件に続けて起きた朝鮮排華事件を包含して万宝山事件と呼称されることもある[3]。中村大尉事件とともに、関東軍による満洲問題の武力解決の口実にも使われ、後の満洲事変につながった[4]。
概要
満洲の権益を持っていた日本政府は、1930年5月の間島共産党暴動で追われた朝鮮人200人を万宝山に入植させた。朝鮮の親日派団体である朝鮮人居留民会の関係者らが多数の中国人地主らと租借・売買契約を結び、朝鮮人は早速水路を引く [注釈 1]工事を始めたが、地主の了解を取っていなかった。中には、もともと地主との租借や売買等の契約が未だ締結されていないもの、当局の認可をとる必要がありながらそれを得ていないものもあったという。そのため、地主の要請で中国の警察は朝鮮人を10人逮捕して工事の中止を求めた。これに対して日本の長春領事館は警官を送り、朝鮮人側の後押しに動いた[5][1][2]。
1931年7月2日に現地中国人農民数百名が工事中止を求めて銃を持って実力行使に出たため、武装した日本の警官50人が対峙したが、中国警察の呼びかけでその場は収まった。その後、日本の警察や朝鮮人居留民会は農期が迫っている事を理由として、工事を強行させ、7月11日に水路は完成した。
朝鮮人による報復
朝鮮語の大手新聞であった「朝鮮日報」は“2日の衝突で多数の朝鮮人が亡くなった”と報じたが、この記事をきっかけに朝鮮半島での中国人への感情は悪化し、主に都市部で中国人排斥運動が起こった(朝鮮排華事件参照)。朝鮮半島のみならず、日本でも在日朝鮮人が在日中国人を襲撃する事件が相次ぎ、この排斥運動による中国人の死者は109人、負傷者は160人であった。運動のきっかけとなった記事を書いた朝鮮日報満洲長春支局長金利三(本名:金永錫)は14日の朝鮮日報に、「中国語が出来ず、日本各機関の宣伝史料に基づいて記事を書いたが誤報だった」とする謝罪文を掲載、さらに、「(朝鮮人、中国人を分断する目的で)日本人、親日朝鮮人による事件を誘発するための陰謀である」としたが、翌日同じ朝鮮人によって銃で殺害された[1][2]。金殺害の犯人である朴昌廈は中国警察に逮捕された。『華北日報』によれば、金利三を射殺した朴昌廈は巡捕(日本軍憲兵等の補助員、ここでは領事館警察の補助員の意か?)で、金利三が陰謀を暴露したため、日本側の怒りをかって暗殺されたとし、日本政府は中国政府に朴昌廈の引渡しを要求したとする[5]。その後のことは、この2か月後に満洲事変が始まったこともあって判然としないが、同一人物かどうかは不明であるものの、1936年朴昌廈なる男が部長(領事館警察?)として満洲里に着任したとする記録があるという[5]。朴昌廈個人の単独犯行か、真相は今日なお不明という。
メモ
- 中国人地主郝永徳が、現地朝鮮人会の斡旋により、朝鮮人に荒地500天地を10年間(1931年<民国20年>陰暦3月から1941年<民国30年>陰暦3月まで)貸与する契約を長春県長の承認を得て締結した[6]。
- 契約を結んだ朝鮮人が、取水口から20里にわたる用水路を作り始めた。用水路は貸与契約外の土地を通り、中国農民の既存農地を分断するものであり、地主の諒解を得ていなかった[7][8]。
- 5月25日、中国公安局巡警に水路開墾中の朝鮮人監督が拘禁され、殴打された朝鮮人農民に重傷者が出たとする連絡が駐長春日本領事館に入る[9]。
- 5月26日、日本領事館から職員と領事館警察が派遣され調査が行われ、中国官憲によって中国人地主が拘禁され朝鮮人を退去させるよう策動していることが発覚[9]。
- 日中間の話し合いでは、中国側は所有権の侵害、水路開設に伴なう農地分断や浸水の被害等を主張し、水路の撤廃を要求。日本側は所有権侵害は朝鮮農民は地主の諒解を得ているものと考えていて故意ではないとし、農地分断に対しては橋梁の設置や十分な地代を払うので多少の不便は致し方なし、浸水についても被害地は僅少であり補填するとし、すでに工事が進んでいるため、地代等の補償はするので、そのまま認めるべきと主張して纏まらなかった[8]。
- 7月1日、中国人農民約400人によって水路破壊作業が始められたので、現地に派遣された日本警察によって朝鮮人に絶対無抵抗とするよう指示がなされた[10]。
- 7月2日、長銃20丁拳銃10丁を携行した中国人暴民約500人(1000余人とも)によって水路埋没作業が始められたので、日本騎馬警官3名が急派され、中川警部より警察官増派要請がなされたため、さらに10名が派遣された[11][12]。午前8時頃に衝突が発生し暴民が発砲したため警察官も発砲したが、双方に死傷者が出ることはなく、午前10時には暴民は引き揚げた[12]。その間、現地に到着した中国巡警7名も事態を鎮めようとしたが、暴民の暴行を受けた[11]。
- 中華民国資料 死者0。
- 7月5日 朝鮮平壌在住中国人が数千人の朝鮮人に襲われ、中国人死者88名、重軽傷者102名。[13] リットン調査団は127人の中国人が殺害されたとしている。[3]
- 7月12日 朝鮮日報長春支局記者金利三が3人の朝鮮人に連行され暴行を受け、日本人の唆しを受け万宝山事件の虚報を流したとする文面に署名捺印させられる[14]。
- 7月14日 吉長日報に金利三が署名捺印させられた文面が掲載される[14]。
- 7月15日 金利三が12日の連行実行犯の一人に射殺される[14]。
- その後、破壊水路の復旧工事は何の妨害もなく進捗し、7月11日に完成して通水され、堰堤手直し工事も進められた。田代重徳領事は「鮮農50余名は歓喜して万歳を連呼し"我等は永久にこの地を死守すべし"と絶叫するものあり」と報告した[15]。
その後
その後も在満朝鮮人は襲撃を受けるようになり、一斉に満洲鉄道沿線に避難した[16]。その後、秩序の回復に伴って戻っていったが完全には回復せず、北満の水害もあって、多くの避難民が残ることになった[16]。1932年に上海天長節爆弾事件が発生すると、中国人の朝鮮人に対する悪感情は好転し、両者の蟠りは解消した。
避難民概数
1932年(昭和7年)11月の朝鮮総督府派遣員推定によるもの[16]。
| 地域 | 避難民概数 |
|---|---|
| 哈爾浜 (水害) | 4,000 |
| 哈爾浜 (匪害) | 2,000 |
| 鉄嶺 (匪害) | 600 |
| 開原 (匪害) | 1,200 |
| 四平街 (匪害) | 800 |
| 新京 (匪害) | 800 |
| 安東 (匪害) | 1,600 |
| 吉林 (匪害) | 2,200 |
| 盤石 (匪害) | 1,200 |
| 蛟河 (匪害) | 1,300 |
| 敦化 (匪害) | 1,500 |
| 奉天 (匪害) | 4,000 |
| 撫順 (匪害) | 3,000 |
| 山城鎮 (匪害) | 9,000 |
関連項目
- 高麗棒子
- 間島問題
- 間島共産党暴動
- 朝鮮排華事件 万宝山事件を受けて朝鮮各地で中国人への襲撃がなされ100名を超える中国人が犠牲となった。
- 中村大尉事件 陸軍参謀中村震太郎大尉一行が大興安嶺で張学良配下の屯墾軍に拘束され殺害された事件。日本ではこちらの方が満洲事変のきっかけとなったという指摘[17]がある。
- 日支条約 1915年(大正4年)締結。南満洲における日本の商租権を認める条約。
- 懲弁国賊条例
- 袁世凱による言論の自由の剥奪[18]
- 朝鮮人に対する圧迫事件・法令
- 小澤開作 - 小澤征爾の父。事件で被害にあった朝鮮人に援助した。
脚注
注釈
- ^ 1930年5月頃から工事
出典
- ^ a b c 岡田秀樹 2011, pp. 77–78.
- ^ a b c 大内力 2006, pp. 353–355.
- ^ a b 世界史のなかの満洲帝国 宮脇淳子 PHP研究所
- ^ 小林英夫「関東軍の歴史」『アジア太平洋討究』第23巻、早稲田大学アジア太平洋研究センター、2014年6月、79-136頁、hdl:2065/44156、ISSN 1347-149X。
- ^ a b c 菊池一隆「万宝山・朝鮮事件における日本側報道とその特色」『愛知学院大学論叢』第44号、愛知学院大学文学会、2014年、348,346,326、ISSN 02858940。
- ^ p177 日本外交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昭和期I第1部 第5巻
- ^ p180 日本外交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昭和期I第1部 第5巻
- ^ a b p200 日本外交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昭和期I第1部 第5巻
- ^ a b p179 日本外交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昭和期I第1部 第5巻
- ^ p207 日本外交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昭和期I第1部 第5巻
- ^ a b pp208-209 日本外交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昭和期I第1部 第5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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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鹿島平和研究所『日本外交18 満州事変』
- ^ a b c 欧州旅行の最短距離 シベリア急行鉄道 一三三頁 ソヴェート国営旅行案内局
- ^ 太平洋戦争研究会編『満州帝国』河出書房新社、1996年、58頁
- ^ 袁世凱剝奪人民言論自由 辛亥革命网 2010年07月29日
- ^ a b c d e f 満洲事変前に於ける我が権益侵害事例 大連商工会議所 篠崎嘉朗 1932年5月25日
参考文献
- 日本外交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昭和期I第1部 第5巻 外務省
- 日本国際政治学会太平洋戦争原因研究部 『太平洋戦争への道』 朝日新聞社、1987年
- 岡田英樹「李輝英「万宝山」:事実と虚構のはざま」(PDF)『立命館文學』第620号、立命館大学、2011年2月、939-932頁、ISSN 02877015、CRID 1520009407079285632。
- 大内力『ファシズムへの道』(改版2刷)中央公論新社、2006年。ISBN 4122047293。
外部リンク
만보산 사건

만보산 사건 (만포잔지켄)이란, 1931년 ( 쇼 와 6년) 7월 2일 중국 장춘 북서에 위치한 만보산에서 일어난, 이식중인 조선인과 거기에 반발하는 현지 중국인 농민과의 수로에 관한 소경쟁이 중국 경찰을 움직여 그에 맞서 움직인 일본 경찰과 중 국인 농민이 충돌한 사건. 죽은 자 없이 들어갔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중국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배척 운동이 일어나, 조선인에 의한 중국인 습격 사건이 일어나, 많은 사망자 중경상자가 나왔다 [ 1 ] [ 2 ] 사건에 이어 일어난 조선 배화사건을 포괄 하여 만보 산 사건 이라고 불리기 도 한다 [ 3 ] .
개요
만주의 권익을 갖고 있던 일본 정부는 1930년 5월 간도 공산당 폭동 으로 쫓겨난 조선인 200 명 을 만보산에 입식시켰다 . ] 공사를 시작했지만, 지주의 양해를 취하지 않았다.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지주의 요청으로 중국 경찰은 조선인을 10명 체포해 공사 중지를 요구했다 . 5 ] [ 1 ] [ 2 ] .
1931년 7월 2일에 현지 중국인 농민 수백명이 공사 중지를 요구해 총을 들고 실력 행사에 나섰기 때문에 무장한 일본 경관 50명이 대치했지만 중국 경찰의 호소로 그 자리는 들어갔다. 그 후 일본 경찰과 조선인 거류민회는 농기가 다가오는 것을 이유로 공사를 강행시켜 7월 11일 수로는 완성했다.
조선인에 의한 보복
조선어의 주요 신문이었던 ' 조선일보' 는 “2일 충돌로 다수의 조선인이 사망했다”고 보도했지만, 이 기사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중국인에 대한 감정은 악화되어 주로 도시부에서 중국인 배척운동 가 일어났다(조선 배화 사건 참조).한반도 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재일 조선인이 재일 중국인을 습격하는 사건이 잇따라, 이 배척 운동에 의한 중국인의 사망자는 109명, 부상자는 160명이었다 운동의 계기가 된 기사를 쓴 조선일보 만주장춘지국장금리 삼 (본명:김영석)은 14일의 조선일보에, 「중국어를 할 수 없고, 일본 각 기관의 선전사료에 근거해 기사를 썼지만 오보였다 '라고 하는 사과문을 게재, 또한, 「(조선인, 중국인을 분단할 목적으로) 일본인, 친일조선인에 의한 사건을 유발하기 위한 음모이다」라고 했지만, 다음날 같은 조선인에 의해 총으로 살해되었다 [ 1 ] [ 2 ] 김살해의 범인인 박창광은 중국 경찰에 체포됐다. 찰의 보조원의 의인가 ? 5 ] . 그 후는 이 2개월 후에 만주사변이 시작된 적도 있어 판연으로 하지 않지만, 동일 인물인지는 불명하지만, 1936년 박창회되는 남자가 부장(영사관 경찰?)으로 만주리에 착임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 박창회 개인의 단독범행인가, 진상은 오늘도 불명이라고 한다.
메모
- 중국인지주진영덕이 현지조선인회 알선에 따라 조선인에게 황무지 500천지를 10년간(1931년 <민국 20년> 음력 3월부터 1941년 <민국 30년> 음력 3월까지) 대여하는 계약을 장춘 현장의 승인을 얻어 체결 했다 .
- 계약을 맺은 조선인이 취수구에서 20리에 걸친 용수로 를 만들기 시작 했다 .
- 5월 25일 중국 공안국 순경에 수로 개간 중인 조선인 감독이 구금되어 구타당한 조선인 농민에게 중상자가 나왔다는 연락이 주장춘 일본 영사관에 들어간다 [ 9 ] .
- 5월 26일,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직원과 영사관 경찰이 파견되어 조사가 이루어지고, 중국 관헌에 의해 중국 인지주가 구금되어 조선인을 퇴거시키도록 책동하고 있는 것이 발각 [ 9 ] .
- 일중의 논의에서는, 중국측은 소유권의 침해, 수로 개설에 수반하는 농지 분단이나 침수의 피해등을 주장해, 수로의 철폐를 요구. 일본 측은 소유권 침해는 조선 농민은 지주의 포해를 얻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고의가 아니라고 하고, 농지 분단에 대해서는 교량의 설치나 충분한 지대를 지불하기 때문에 다소의 불편은 하고 방법 없음, 침수에 대해서도 피해지는 조금 있어 보전한다고 하고, 이미 공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지대등의 보상은 하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두지 않았다 [ 8 ] .
- 7월 1일, 중국인 농민 약 400명에 의해 수로 파괴 작업이 시작되었으므로, 현지에 파견된 일본 경찰에 의해 조선인에게 절대 무저항으로 하도록 지시가 되었다 [ 10 ] .
- 7월 2일, 장총 20 정 권총 10정 을 휴대한 중국인 폭민 약 500명(1000여 명 모두)에 의해 수로 매몰 작업 이 시작 되었으므로, 일본 기마 경관 3명이 급파되고, 나카가와 경부로부터 경찰관 증파 요청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추가로 10 명이 파견되었다 [ 11 ] 오전 8시경에 충돌이 발생해 폭민이 발포했기 때문에 경찰관도 발포했지만, 쌍방에 사상자가 나오는 것은 없고, 오전 10시에는 폭민은 인양했다 [ 12 ] 그동안 , 현지 에 도착한 중국 순경 7명도 사태를 받으려고 했지만, 폭민 의 폭행
- 중화민국 자료 사망자 0.
- 7월 5일 조선평양 거주 중국인이 수천명의 조선인에게 습격당해 중국인 사망자 88명, 중경 상자 102 명 . [ 13 ]
- 7월 12일 조선 일보 장춘지국 기자 김리삼이 3명의 조선인에게 연행되어 폭행을 받고 일본인의 제안을 받아 만보산 사건의 허보를 흘렸다고 하는 문면에 서명날인된다 [ 14 ] .
- 7월 14일 요시나가 일보 에 김리삼이 서명날인된 문면이 게재된다 [ 14 ] .
- 7월 15일 김리삼이 12일 연행 실행범 중 한 명에게 사살된다 [ 14 ] .
- 그 후 파괴수로의 복구공사는 아무런 방해 없이 진행되었고, 7 월 11일 에 완성 되어 통수 되고, 제방수선공사도 진행 됐다 .
그 후
그 후에도 재만조선인은 습격을 받게 되어 일제히 만주철도 연선 으로 피난 했다 [ 16 ] . 1932년에 상하이 천장절 폭탄 사건이 발생하자 중국인의 조선인에 대한 악감정은 호전해 양자의 망치는 해소했다.
피난민 개수
1932년(쇼와 7년) 11월 조선총독부 파견원 추정에 의한 것 [ 16 ] .
| 지역 | 피난민 개수 |
|---|---|
| 하야하마 (수해) | 4,000 |
| 하야하마 (손해) | 2,000 |
| 철령(匪害) | 600 |
| 개원 (손해) | 1,200 |
| 사평가 (손해) | 800 |
| 신쿄 (손해) | 800 |
| 안동 (손해) | 1,600 |
| 길림 (손해) | 2,200 |
| 반석 (손해) | 1,200 |
| 나가하 (손해) | 1,300 |
| 둔화 (손해) | 1,500 |
| 봉천 (손해) | 4,000 |
| 쓰다듬어 | 3,000 |
| 야마시로 진 (손해) | 9,000 |
관련 항목
- 고려봉자
- 간도 문제
- 간도 공산당 폭동
- 조선 배화 사건 만보산 사건을 받고 조선 각지에서 중국인에 대한 습격이 이루어져 100명이 넘는 중국인이 희생됐다.
- 나카무라 대위 사건 육군 참모 나카무라 진타로 대위 일행이 대흥 안령 에서 장학 양배 하의 추후 군에 구속되어 살해된 사건. 일본에서는 이쪽이 만주 사변의 계기가 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
- 닛지 조약 1915년(다이쇼 4년) 체결.
- 징벌국적 조례
- 袁世凱에 의한 언론의 자유의 박탈 [ 18 ]
- 조선인에 대한 압박사건·법령
- 오자와 개작 - 오자와 정치의 아버지.사건으로 피해에 있던 조선인에게 원조했다.
각주
주석
- ↑ 1930년 5월경부터 공사
출처
- ↑ a b c 오카다 히데키 2011 , pp. 77–78.
- ^ a b c 대내력 2006 , pp. 353-355.
- ↑ a b 세계사 속의 만주제국 미야와키 준코 PHP 연구소
- ↑ 고바야시 히데오 「관동군의 역사」 「아시아 태평양 토구」 제23권, 와세다대학 아시아 태평양 연구 센터, 2014년 6월, 79-136페이지, hdl : 2065/44156 , ISSN 1347-149X .
- ^ a b c 기쿠치 이치타카 “ 만보산·조선사건에 있어서의 일본측 보도와 그 특색” “아이치 학원 대학 논총” 제44호, 아이치 학원 대학 문학회, 2014년, 348,346,326, ISSN 02858940 .
- ↑ p177 일본 외교 문서 디지털 아카이브 쇼와기 I 제1부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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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시 마 평화 연구소 「일본 외교 18 만주 사변」
- ↑ a b c 유럽 여행의 최단 거리 시베리아 급행 철도 133 페이지 소베트 국영 여행 안내국
- ↑ 태평양전쟁연구회편 『만주제국』 하출서방신사 , 1996년, 58페이지
- ^ 袁世凱剝奪人民言論自由辛亥革命网 2010년07月29日
- ↑ a b c d e f 만주사변전에 있는 우리 권익 침해 사례 대련 상공회의소 시노자키 카로 1932년 5월 25일
참고문헌
- 일본 외교 문서 디지털 아카이브 쇼와기 I 제1부 제5권 외무성
- 일본국제정치학회 태평양전쟁 원인연구부 『태평양전쟁으로의 길』 아사히신문사, 1987년
- 오카다 히데키「이휘영 「만보산」:사실과 허구의 하자마」(PDF) 『립명관 문학』 제620호, 리츠메이칸 대학, 2011년 2월, 939-932페이지, ISSN 02877015 , CRID 152000940707
- 오우 치 힘 「파시즘에의 길」(개판 2쇄) 중앙 공론 신사, 20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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