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8

단비뉴스


호주제 없앤 ‘꼴통 페미’ 동학에 꽂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그곳에 산다] ⑥ 옥천의 한의사 고은광순


2014년 07월 14일 (월) 09:44:18 황상호 기자 uq2616@gmail.com




부모의 성(姓)을 둘 다 받아 이름이 네 글자인 사람은 종종 편견어린 시선을 받는다. 혹시 동성애자가 아닐까. 과격한 페미니스트(남녀평등주의자)는 아닐까. 90년대 이후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을 펼치고 호주제 폐지에도 앞장섰던 한의사 고은광순(59)의 경우 전자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의 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수많은 ‘안티(반) 페미니스트’ 남성들로부터 ‘꼴통(외곬) 페미’라는 공격을 받았던 ‘싸움닭’ 출신이다. 그녀가 3년 전 충북 옥천군 청산면에 한의원을 내고 정착했다. 남편과 두 아들은 서울에 놔두고 단신으로. 지난 4월 14일 오후 ‘왜’라는 질문을 비수처럼 품고 그가 운영하는 청산면 솔빛 한의원을 찾았다.

정확한 번지수도 없이 ‘삼방리 저수지 위 하얀 집’이라는 문자 메시지만으로 어찌어찌 찾아간 집은 양지바른 자드락, 즉 나지막한 산기슭 비탈진 땅에 있었다. 높지 않은 산들이 사방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고, 집 앞 수로에는 올챙이 무리가 재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뜰에 핀 노란 수선화가 고왔다. 고은씨는 2011년 10월 이곳에 내려 온 뒤 직접 도면을 그려 한의원과 살림집, 명상방을 합한 40평 남짓의 다목적 나무집을 이듬해 완공했다고 한다. 집안에는 큰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과 마른 약재향이 가득했다. 인터뷰 내내 창밖으로 산벚꽃 잎이 흩날렸다.

▲ 옥천군 삼방 저수지 위에 자리한 고은광순 씨의 한의원. 종이 위에 수채 색연필로 그렸다. ⓒ 유순상


운동권 출신 한의사가 '배낭투쟁'에 나선 사연

고광순씨가 고은광순으로 이름을 바꾼 과정에는 파란만장한 우리 현대사가 압축돼 있다.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던 고은씨는 박정희와 전두환 두 군부정권을 통과하면서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2번 구속되고 2번 제적당했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에 ‘요시찰’로 찍혀 복학도 못했고, 여권을 만들 수 없어 유학도 못 갔다. 그러다 ‘탈 난 허리도 고치고 쓸 만한 전문면허나 따보자’는 심산으로 서른 살에 대전대학교 한의예과에 진학했다. 1992년 한의원을 개원했는데 의료계의 산적한 부조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약사가 아무렇게나 한약을 제조하고, 한의사들은 태아 성감별에 ‘아들 낳는 약’ 따위를 만들어 돈 버는 데 혈안이었다. 보건복지부에는 한의학을 다루는 부서도 없었다. 누적된 문제들은 1995년 ‘한의약 분쟁’으로 터졌고 당시 김영삼 정부는 거리로 나온 한의사들에게 최루탄을 쏘았다. 그 중심에 고은씨가 있었다.

▲ 옥천군으로 귀촌한 고은광순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운동가이자 한의사다. ⓒ 유순상


여성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996년 대한여한의사회보를 만들면서부터다. 고은씨는 당시 글에서 한의사들의 아들 낳는 처방을 비판했고 남아선호와 여아낙태 등을 막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단체연합과 남녀 출생성비 불균형 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을 하다가 ‘호주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호주제는 남성중심 가족문화의 상징적인 제도로, 자녀는 아버지의 성만 따를 수 있고 부부가 이혼할 경우 부인의 호적에 자녀의 이름을 올릴 수 없게 막았다. 또 남편이 사망할 경우 아들이 호주 지위를 승계해 아내가 유산상속에서 불리해지기도 했다.

고은씨는 ‘호주제폐지 시민모임’의 대표를 맡아 300명 가까운 국회의원을 찾아다니며 설득작전을 폈다. 가방에는 호주제 폐지 주장을 담은 유인물이 가득해, ‘배낭투쟁’이라고 불렀다. 남성 우월주의자들은 고은씨를 향해 ‘꼴페(꼴통 페미니스트)’라고 비난했지만 우군도 나타났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고은씨 편에서 호주제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이석태 변호사와 진선미 변호사(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이정희 변호사(현 통합진보당 대표) 등이 소송단을 이끌었다. 사회각계 인사들도 재혼가정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는 이 제도에 대해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내 2005년 대법원이 호주제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같은 해 민법이 개정됐다. 이어 2008년 이를 반영한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부 제도가 도입됐다. 고은씨 개인적으로는 1999년부터 스스로 고은광순으로 바꿔 쓰던 이름을 2003년에 정식 절차를 밟아 개명했다.

“당시 사람들이 ‘호주제가 폐지될 가능성이 몇 퍼센트나 되겠냐’고 물었어요.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옳은 일이라면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한다는 각오였거든요. 중국 당나라 때는 여성들의 발을 묶어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족이 천 년간 세습됐지만, 이제는 그것을 전통이니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호주제도 마찬가지였어요.”

‘부당한 제도’와의 투쟁은 호주제로 끝이 아니었다. 고은씨는 2007년 종교법인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종교법인법 운동, 2008년에는 배우 최진실 사망으로 불거졌던 친권 자동부활 반대 운동을 펼쳤다. 2009년부터는 사회 오피니언리더 모임인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여는 여성모임’을 함께 하면서 ‘내 제사 거부 운동’을 하고 있다. 고부간 갈등 등 가족 간 불화를 일으키고 심지어 살인 같은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제사를 ‘자신의 대’부터 끊자는 것이다.

▲ 고은광순씨와 어머니가 함께 찍은 흑백사진을 연필로 그렸다. 고은씨는 노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함께 했던 시간을 책 <시골한의사 고은광순의 힐링>으로 출간했다. ⓒ 유순상


“소설가 이문열은 책 <선택>에서 제사상에 올릴 떡시루에 김이 안 올라 와 목을 맨 며느리에게 ‘섬뜩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고 썼어요. 이 문구에 찬성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제사라는 것도 3300년 전 중국이 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예요. 이제는 죽음이 아닌 삶에 초점을 맞춰야죠. 살아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요.”

고은씨는 1977년 후배들에게 4.19혁명 기념으로 검은리본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일이 있다. 이 긴급조치 9호가 지난해 3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면서 고은씨의 검은리본 사건에 대해서도 무죄선고가 났다. 무려 36년 만이다. 40년 가까이 매번 주제를 바꾸며 싸우는 데 지치지는 않을까.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 내가 하는 일이 옳으니까요. 또 그렇게 해야 내가 편하잖아요. 독재가 사라져야 내가 편하고 호주제가 없어져야 내가 편하죠. 근데 그 일이 결국 (사회구성원들과) 더불어 좋으니까 그게 진짜 좋은 거죠.”

'잔 다르크'의 눈물 닦아 준 명상

1999년 고은씨가 쓴 담시집 <어느 안티미스코리아의 반란>을 보면 초창기 하이텔과 천리안 등 피시(PC)통신 1세대 논객으로 유명했던 고은씨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댓글을 도배한 ‘안티 페미니스트’ 얘기가 나온다. 악성 프로그램을 이용해 인터넷 카페에 비난 글을 도배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은씨는 인터넷 사이트들을 옮겨 다니며 정치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사람들은 ‘잔 다르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녀에게도 힘든 순간들은 있었다. 갑작스레 울컥 눈물이 났다. 마음의 평화가 필요했다. 불교신자였던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 기도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템플 스테이에 참가했다. 묵언 수행도 했다. 두 세 시간 꼼짝 않고 앉아 죽비를 맞아가며 수련하다 보니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심(歡喜心,배품과 용서, 너그러움이 조화된 아름다운 마음의 상태)이 생겼다. 하지만 한 절에서 승려가 “계를 어기면 여자로 태어나거나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돌아섰다.

“확 깼어요. 빈부는 사회개혁으로 없애야 하고 장애는 사회제도를 개선해 그들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다른 사찰에서는 정월 초하루에 여자들의 출입을 막기도 했어요. 여자는 ‘음의 수’라서 마를 끼고 들어올 수 있다나. 부처님 도력으로 그걸 못 깨나요.”

차별에 실망한 고은 씨는 마음 둘 곳을 찾다 2008년 지인의 소개로 충남 공주시 계룡면 갑사의 명상동호회를 알게 됐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그곳에서 마음의 평화와 긍정의 에너지를 얻었다. 2010년에는 치매를 앓던 86세 노모를 갑사에서 임종 때까지 6개월간 부양하며 마음공부를 했고, 이 내용 등으로 2년 전 책 <시골한의사 고은광순의 힐링>을 펴냈다. 요즘은 전국 각지를 다니며 마음 치유 강의도 한다.

▲ 고은광순씨가 운영하는 한의원의 약봉지에는 특이하게 '의식의 지도'가 적혀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가 만든 구분법인데 고은 씨는 명상을 통해 인간은 더 높은 의식 세계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 유순상


사회운동가가 지역으로 귀촌했을 때, 사람들은 현실 도피가 아닌지 묻는다고 한다. 고은씨는 “저항이 급선무였던 70, 80년대와 오늘은 다르다”며 “다변화된 시대에는 화염병대신 장미꽃을 드는 시위, 폭력이 아닌 노래가 있는 시위가 더 끈질기고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제는 시민들의 내면의 에너지를 높여야 사회가 한 단계 더 진보하다고 주장했다.

“70년대는 학생 운동, 90년대는 여성 운동을 했어요. 그동안의 투쟁도 어떻게 보면 모두 ‘힐링(치유)’이에요. 사회의 부조리를 바꾸는 ‘사회적 힐링’이죠. 그런데 이제는 개인의 내공이 높아지지 않으면 안 돼요.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해서 모든 게 바뀌지 않죠. 결국 사람 각자의 내공과 지혜가 높아지면 올바른 시스템이 정착되죠.”

여성운동과 통하는 동학, 자립공동체 꾸리며 연구할 계획

요즘 고은씨가 집중하는 주제는 동학이다. 고은씨가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일면식도 없던 도종환 시인이 자신의 책 <정순철 평전>을 보내왔다고 한다. 1901년 옥천에서 태어난 정순철은 ‘엄마 앞에서 짝짜꿍’,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등을 지은 동요작곡가로 소파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 문화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그런데 정순철 평전 내용의 대부분이 동학농민운동이었다. 알고 보니 정순철은 동학 2대 교주였던 최시형의 외손자였고, 옥천군 청산면은 우리 민족 최초, 최대의 민중운동이라 평가받는 동학농민운동의 총 본산지였던 것이다.

“충청도를 ‘멍청도’라고 하잖아요. 아니에요. 뛰어난 사람들이 다 충청도 사람이었어요. 손병희, 손천민, 황하일, 성두한 등 뛰어난 동학 접주들이 많았어요. 충청도는 특히 교통도 좋고 속리산을 통해 강원도로 연결돼 도망가기도 좋았죠. 혁명을 일으키기 유리한 조건이죠.”

▲ 고은광순씨는 충북 지역에서 활발히 움직였던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책상 위 스케줄표에는 그간 모은 자료들이 연대기별로 정리돼 있다. ⓒ 유순상


동학은 고은씨가 청춘을 바쳐온 여성운동의 가치와도 통했다. 양반과 평민, 남자와 여자 모두 다 같은 ‘하늘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 여종을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았던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급진적 행동이 모두가 고은씨가 꿈꾸던 세상과 가까웠다. 고은씨는 요즘 충청도 땅에서 펼쳐졌던 동학운동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호주제 폐지 운동을 하면서 부딪친 게 ‘가문' ‘혈통' ‘미풍양속'과 같은 것들이에요. 그런데 가문이라는 것이 대부분 일제시기 만들어진 가짜 족보들을 바탕으로 해요. 대한민국에는 그렇게 찌질한 남자들 밖에 없나 푸념하다가 동학을 만난 거예요. ‘하늘과 땅이 모두 부모다’, 조상이 아닌 나를 위해 위패를 설치하라는 ‘향아설위(向我設位)’ 처럼 동학에는 위대한 생각들이 있죠.”

고은씨는 갑사 명상공동체 식구 40명과 함께 솔빛 한의원 근처에 ‘명상하는 마을’을 꾸리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다. 두 아들은 군대도 다녀오고 장성했기 때문에 혼자 옥천에서 일하는 게 부담은 없다고 한다. 명상공동체 식구들은 이곳에서 제각각 집을 짓고 적당한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소박한 마을을 일굴 계획이다. 여성과 동학, 명상이 어우러진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증을 남기고 고은씨는 마을 노인들을 왕진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리거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에는 유독 사연 많고 소신 있는 예술인과 공동체운동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단비뉴스>는 이렇게 충북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문화인과 활동가들을 찾아 나섰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인 CJB청주방송 황상호 기자가 글을 쓰고 서양화가 유순상 씨가 사진기와 붓을 들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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