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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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일본인
세월의 흐름 탓일까? 요사이는 자주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되고 고마웠던 사람들을 생각 하게 된다. 특히 일본을 공부하면서 맺은 일본인과의 인연도 고마운 마음으로 되새겨보곤 한다.
두 번 일본에 장기간 체류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한번은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 서 도쿄대학(東京大学) 국제관계론과의 연구생 자격으로 1972년 후반부터 약 1년 반 가 까이 도쿄(東京)에 머물렀다. 두 번째는 1988년 초부터 약 10여 개월간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学)의 연구교수 직분으로 교토(京都)에 체류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공부와 일본을 좀 더 잘 알 수 있도록 따뜻한 가르침을 준 일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에토 신키치와 『33년의 꿈』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체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준 사람은 도쿄대학 국제관계론과의 에토 신키치(衛藤瀋吉) 교수였다. 물론 그가 나의 논문 주제인 대륙낭인과 현양사-흑룡회 계통의 우익활동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고, 또한 나의 지도교수인 피터 듀스 교수의 당부가 있어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내가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연구는 물론 전반적인 내 일본 생활의 후견인이었다.
중국 선양(瀋陽)에서 태어난 에토 교수는 당시 일본 제1의 중국 전문가로서 학계는 물론 정부의 중국 정책 결정에도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구마모토(熊本)가 고향인 그 는 정계나 관계는 물론 우익들 가운데 대륙낭인의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과도 끈끈한 감 정적 교류를 맺고 있었다. 그의 관심과 배려로 일본에 있는 동안 대륙낭인 계통의 일본인들 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01
에토 교수를 생각할 때 잊을 수 없는 기억은 그와 함께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의 『三十三年の夢』 (33년의 꿈)을 읽었던 일이다. 그는 내가 체류하는 동안 한 학기 『33년의 꿈』을 교재로 세미나를 이끌었고, 이는 나에게 크게 도움이 됐다. ‘낭만적’ 대륙낭인으로 알 려진 도텐이 손문과 함께 ‘멸청흥한(滅淸興漢)’을 위한 혁명과 좌절을 기록한 『33년의 꿈』 은 문학적으로도 평가받는 고전과 같은 책이다. 훗날 손문이 “도텐이 없었으면 신해혁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1911년 혁명의 숨은 공로자였다. 짧은 내용이지만 도텐이 조선의 망명객 김옥균과 낚싯배 위에서 나눈 ‘동양정세론’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구마모토라는 동향과 중국이라는 관심 영역의 공통점이 있었지만, 에토 교수는 도텐에게 애정과 연민의 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았다. 도텐의 이미지를 “로맨티시즘과 정의감이 합 성된 메이지 청년이고 대륙낭인”이라고 높이 평가한 그는 『33년의 꿈』을 현대문으로 번역 하고 자세한 해설과 교주(校註)를 붙여 1962년 출판했고, 1982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의 마리우스 잰슨과 함께 영어로도 출간했다. 청조(淸朝) 말기의 중국정치와 외교를 전공한 그의 폭넓은 역사해석과 상황설명은 대륙낭인과 아시아주의와 중국혁명의 관계를 이해하 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러면서 가끔 그에게도 대륙낭인적 성향이 짙게 배어있다는 느낌 을 받곤 했다.
에토 교수가 2007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교류했다. 논문에 기 초한 내 책이 일본어로 번역돼 일본에서 출판될 때, 그는 “세계 속의 메이지 유신”이라는 발 문을 써 주었고, 나는 그의 고희기념집에 “서구의 충격과 위기의식”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아시즈 우즈히코와 대륙낭인
일본 우익의 대부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의 지도를 받았고, 전전에 현양사-흑룡회 계통 의 우익들과 함께 활동했던 아시즈 우즈히코(葦津珍彦) 씨와의 만남도 행운이었다.
후쿠오카(福岡) 태생인 아시즈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국학원대학, 도쿄외국어대학 등 몇 몇 대학을 전전했으나 어느 곳에서도 졸업하지 않고 독학으로 자신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 했다. 한때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시기도 있었으나, 그는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천황국 일 본 실현을 이상으로 삼는 존황신도(尊皇神道)를 주창하는 전통 우익으로 정착했다. 그러면 서도 “제국(帝國)과 함께 크게 참패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전후 우익은 철저하고도 진지한 자기비판 위에서 재출발하지 않으면 장래가 없다”라고 할 정도로 합리적 보수주의자였다. 아시즈 씨가 대륙낭인적 전통을 고집하고 있었음에도, 전후 대표적 진보지식인 쓰루미 슌 스케(鶴見俊輔)가 “동료들 가운데 누구도 신뢰할 수 있는 우익 논객”이라고 높이 평가할 정 도로 균형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내가 에토 교수의 소개장을 들고 가마쿠라(鎌倉)로 아시즈 씨를 처음으로 찾아갔던 것은 1972년 늦여름으로 기억된다. 그는 당시 자신이 창간하고 경영하던 <神社新報>에서 물 러나 자유롭게 보수 논객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연구 주제와 방향을 설명했고, 그는 일본인들도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야라 파고들면 좋은 결과를 맺을 것이라고 격 려했다. 그리고 별채의 서고(書庫)로 안내해서 내 연구와 연관된 이런저런 자료들을 설명 했다. 그는 식민지 시대에 많은 한국인과 교류했으나, 1945년 이후 만난 한국인은 내가 최 초라고 하면서 몽양 여운형이 자신에게 써준 휘호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 후 일본을 떠나 기 전까지 거의 두세 주에 한 번꼴로 가마쿠라의 그의 서재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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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대륙낭인의 마지막 세대임을 자처하는 그의 대륙낭인에 대한 신념은 투철했다. 우 리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는 대륙낭인이 품었던 근본이념은 ‘대(大)아시아주의,’ 즉 아 시아 연대라는 것, 아시아 연대는 침략이나 팽창이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가 각자 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 연대의 순수한 이념이 정치화하고, 정치인들에 이용당하면서 ‘연대’가 ‘간섭’으로, 그리고 ‘간섭’이 다시 ‘침략’으로 변질되면서 그 순수성이 퇴색했고 대륙낭인의 역사적 평가도 추락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대아시아주의’를 이끌었던 대륙낭인이야말로 “메이지유신 이 래 일본민족의 이상을 가장 순수하게 계승”한 집단이고, 그 전통과 정신을 “일본 민족사에 서 영원히 명예롭게 이어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서고에는 내가 필요로 하는 많은 자료가 있었다. 흑룡회의 성격을 올바로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인 기관지 『黑龍會會報』나 『黑龍』과 같은 희귀한 자료도 창간호부터 소장 하고 있었다. 특히 창립과 함께 발간되고 제2호로 폐간된 『黑龍會會報』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자료다. 이러한 자료들이 제공하는 흑룡회 회원의 배경을 찾아가 보면 이 집 단이 기존의 해석처럼 조직폭력집단 유형의 단체가 아니라, 일본의 대륙진출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활동한 높은 교육수준의 배경을 가진 우익집단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제공해 준 자료들은 내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됐다.
그 후 상당 기간 내가 일본을 방문할 때면 가마쿠라로 그를 찾아가 만나곤 했다. 그는 언 제나 나를 따뜻하게 맞아 준 고마운 일본인이었다.
다케나카 마사오와 교토
서울에서 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 나는 교토에서 보냈다. 도시샤 대학에서 연구실을 받 았다. 논문에 뒤쫓기던 학생 시절과 달리 정신적으로나 시간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이었다. 도쿄가 아니라 교토를 택한 것은 일본의 전통적 문화를 체험하기에는 교토가 제일이라는 도시샤 대학의 다케나카 마사오(竹中正夫) 교수의 권유 때문이었다.
중국 베이징 태생의 다케나카 교수는 교토제국대학과 도시샤를 거쳐 예일대학에서 신학 박사를 받은 후 평생을 도시샤에서 신학, 기독교 윤리, 기독교 문화 등을 강의했다. 역사와 미술, 특히 기독교 미술에는 전문가 못지않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으로서 는 보기 드물게 영어 발음이 부드러운 분이었다.
15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개방적이고 부드러우면서도 직선적인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 니겠지만 일반적으로 교토인들은 타지 사람에게 폐쇄적 경향이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축적된 일종의 ‘양반의식’과 같은 것이다. 기독교 라는 공통분모가 있기도 하지만 다케나카에게서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없었다.
그는 교토 주변에 찾아가 볼 곳을 많이 소개해 주었고, 점심 후 대학 옆의 황거(皇居)를 함 께 거닐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때로 나를 가모가와(鴨川) 강변의 전통적 식당과 주점으 로 안내하기도 했다. 1988년 가을 히에이잔(比叡山)이 타는 듯 붉게 물든 단풍으로 뒤덮였 을 때 산 중턱에 일주일 동안 머무를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 준 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03
그는 ‘쌀(米)의 문화와 화(和)’를 강조하며, 쌀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 한중일은 평화로운 미래를 건설해야만 한다고 늘 주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참여했던 그는 한국 기독교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기독교 미술사를 강의할 정도로 미술 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아시아 기독교 미술협회를 조직하고 오랫동안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에도 자주 내왕했다.
어느 해인가 헤이안(平安)시대의 시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이 담긴 크리스마 스 카드를 받았다. “春の夜の闇はあやなし梅の花色こそ見えぬ香やは隱るる.” 내 나름 대로 “봄밤의 어둠은 모든 것을 덮고 있어 매화꽃의 색깔도 볼 수 없지만, 향기만은 가득하 다.”라고 해석하면서, 어디서나 향기를 뿜는 인격과 품성 도야에 힘쓰라는 경구로 받아들였
다. 일본 연구와 무관하게 일본과 한국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눈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이다.
지금은 세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었던 정성과 배려와 예의는 내 가슴에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세월과 함께 고마운 마음이 더욱 진해진다.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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