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성 관서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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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seung 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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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잊은민족 #미래는없다 #제주43 #최초의계엄령 #진짜내란 #계엄령은언제필요한가 #처단은언제필요한가
(칼럼 링크는 댓글에)
지난 번 칼럼은 제주 4.3에 대해 썼었습니다. 사실 이 주제는 언제가 한 번 꼭 써야 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습니다. 오사카에는 제주도 출신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특히 노인 분들이 많은데요. 이 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저는 책에서는 보지 못했던 제주 4.3에 대한 여러 진실들을 접할 수 있었고, 이것을 꼭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제주4.3에 대해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부분을 재조명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칼럼 쓰기 일주일 쯤 전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4.3에 대해서 “최초의 계엄령, 국가폭력 단죄가 안 돼서 반복된다” 등 발언을 했습니다. 사실 이런 식의 발언은 이재명 대표만 하는 게 아닙니다. 매년 4월만 되면 제주4.3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면서 ‘국가폭력’ 문제를 제기하곤 합니다. 이미 2003년에 제주4.3 진압과정에서의 국가 폭력에 대해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사과도 했지요.
제주4.3 진압 과정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재명 대표의 제주 4.3에 대한 발언이라든가 최근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다큐멘터리에서 거론되는 제주4.3은 맥락이 제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국가 폭력’ 얘기만 하지요.
도대체 4.3이 뭔가요? 4.3은 날짜입니다. 1948년 4월 3일. 그 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날이 국가폭력이 자행된 날인가요?
그 날은 김달삼을 우두머리로 하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새벽 야심한 시각에 제주 지역 경찰 관서 24개 중 무려 12개를 동시 공격한 날입니다. 그 날 하루에만 많은 경찰, 공무원, 그 가족들이 학살당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맥락이 있었습니다. 그 전 해인 1947년 3월 1일 시위 중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경찰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측면이 있죠.
하지만 이듬해 4월 3일에 벌어진 일은 단지 경찰의 폭력적 시위 진압에 대한 불만이나 항의 표시 정도의 수준을 뛰어 넘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습니다.
12개의 경찰 지서를 동시 습격하고, 경찰과 공무원, 그 가족을 단지 경찰, 공무원,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한 것입니다. 제 칼럼의 모두에 나오는 할머니들 이야기는 바로 이 날의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4월3일은 대한민국 제헌의회 선거였던 5.10 총선을 불과 한달여 앞두고 있던 시점입니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이 제헌의회 선거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남로당과 그에 동조하는 제주도 무장세력들은 4월 3일 이후에도 선거 방해를 광범위하게 집중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선거를 못하도록 주민들을 중산간 지대로 끌고 가거나 선거에 참여하러 가는 길목을 막고 선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살해했습니다. 선거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도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 공산주의자들은 북한의 사주를 받아 ‘인민대표대회 선거’라는 것을 실시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코메디 같은 일인데, 제주도민들의 이름을 적거나 손도장을 받아가서 이들이 북한이 실시하는 선거에 참여했다고 주장한 겁니다. 이들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은 북한이 정통성있는 정부라 생각하고 북한이 실시하는 선거를 제주도에서 실행한다고 주장한 거죠.
실제로 김달삼과 그 동료들은 나중에 제주도를 탈출해 황해도 해주에 가서 북한이 주최한 인민대표자대회에 제주도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고, 주석단에 올라서 북한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김달삼이 떠나고 나서 북한 무장공비의 제2대 지휘관이 된 이덕구는 대한민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실시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북한이 ‘우리’이고 대한민국은 ‘적’인 것입니다.
이들 공산당의 선거 방해 공작과 치안 질서 파괴, 군인, 경찰, 공무원 및 그 가족들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 제주도민들에 대한 일방적인 무단 소개, 납치 등 행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 댓글에 전봉관 교수님 칼럼을 달아 드릴 테니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재명 대표는 제주4.3 관련 계엄령이 ‘최초의 계엄령’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국가폭력이었다고 주장하고, 당시 국가폭력에 대한 단죄가 안되어서 이번에 윤석열 전 대통령이 또 다시 계엄을 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재명 대표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이재명 대표가 대통령이 됐을 때, 어떤 무장세력들이 수십개의 경찰서를 동시 습격하고, 민가에 불을 지르고, 경찰, 군인, 공무원을 단지 경찰, 군인,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대량 학살하고, 심지어 그 가족들까지 잔인하게 공개처형한다면 대통령으로서 당신은 계엄령을 선포할 겁니까? 아니면 그냥 말로만 살살 달래고 협상하자고 할 겁니까? 게다가 이들이 선거에 참여하겠다는 국민들을 겁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고, 북한의 사주를 받아 자기들 나름대로의 선거를 별도로 실시하겠다고 한다면요?
제가 오사카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자기 아버지와 가족들이 공산당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실제로 봤습니다. 오빠들이 군인이라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네 집을 다 태워버리는 것도 봐야 했습니다. 친척 중에 경찰이 있다는 이유로 죽을까봐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이재명 대표에게 묻겠습니다. 이들도 ‘국가폭력’의 희생자입니까?
이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가한 것은 당시 제주도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이며, 이들의 배후에는 소련 공산당과 그 지시를 받는 김일성을 우두머리로 하던 조선노동당 세력이 있었습니다. 김달삼과 그 동료들이 소련이나 김일성, 노동당과 아무런 관계없이 그저 개인 자격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리고 그게 그냥 개인적으로 경찰에 대한 원한에서 저지른 일이라면 그들은 왜 해주까지 가서 북한이 개최한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고 북한에 충성을 맹세합니까?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근본적 양대 기둥은 하나가 치안, 또 하나가 선거입니다. 치안과 질서가 사라진 나라는 그 순간 멸망합니다. 선거를 실시하지 못하는 나라는 얼마 못 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간판을 내리게 됩니다.
1948년 4월 3일 그리고 그 이후 김달삼을 비롯한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이 보여준 잔인한 폭력은 바로 근대 민주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양대 기둥을 겨냥하고 있던 것입니다. 경찰과 군인, 그 가족들에 대한 대규모 조직적 폭력, 선거 방해를 위한 살인, 방화, 일방적 납치, 소개 등은 근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스스로의 생존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좌시할 수 없는 내란 행위이며, 국가폭력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폭력이자 국가 전복 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 칼럼에 나오는 할머니들은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아니라 공산주의 내란 폭동 세력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에서 이 공산주의 내란 폭동 세력은 사라졌나요?
소련의 지명을 받아 북한에서 집권한 김일성은 북한 공산주의 체제를 만들고 수령 체제라는 것을 만들어서 죽을 때까지 영구 집권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 아들, 손자까지 ‘백두 혈통’이라 이름 붙이고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과 그 주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던 세력과 그 후예들이 시퍼렇게 살아서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고, 사과는 커녕 모든 잘못이 오히려 남한과 일제, 미제에게 있다며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있지 않나요?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과 폭력에 대해 김정은이 사과한 적 있습니까?
이재명 대표가 제주도민들의 아픔에 그렇게 공감을 하신다면 북한에 대해서 과거의 잔인한 폭력에 대해 사과하라고 말이라도 한 마디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공산당의 폭력에 희생당한 제주도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가요? 이재명 대표는 왜 ‘국가폭력’만 이야기하고 공산주의 내란 폭동 세력의 폭력에 대해서는 찍소리도 못합니까?
제주4.3 당시 공산당이 저지른 폭력이 사실인지 아닌지 못 믿겠다는 분들은 제주4.3 평화재단 홈페이지에 가서 자료들을 찾아 보십시오. 참고로 이 재단은 과거 좌파 정권 때 만들어진 재단입니다.
이 자료를 만든 사람들도 차마 있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제주4.3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폭력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 두었습니다. 제가 제주4.3에 대해 참고한 자료도 상당 부분이 이 제주 4.3평화재단 홈페이지에서 얻은 것입니다.
물론 제주4.3의 진정한 교훈을 되새겨야 하는 것은 이재명 대표 뿐이 아닙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제주4.3은 우리 정부 수립 이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공산당의 폭동 행위에 대해 군대를 투입하여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저는 제 칼럼에서 당시 미 군정의 제주 도령 선포와 당시 제주도에 주둔 중이던 제 9연대의 진압 업무 투입이 ‘최초의 계엄령’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계엄이라고 하는 것은 제주 4.3 정도의 심각한 사태가 아니면 함부로 선포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주도 소재 경찰 지서의 절반이 한밤중에 동시 습격 당하고 공무원과 그 가족들이 무차별 학살당하고 그들의 집이 방화당하는 상황. 선거 방해를 위해 양민을 납치하고, 투표하겠다는 사람들, 투표 관리하는 공무원들마저 죽이는 상황. 이 정도가 되면 계엄령은 불가피합니다. 좌파 쪽에서 당선된 그 어떤 대통령, 김대중이든 노무현, 문재인, 아니 이재명이라 해도 자신이 대통령일 때 이런 정도의 폭동이나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면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대 투입은 불가피했을 겁니다.
그런데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12월 계엄을 선포한 이유는 뭔가요? 제주4.3에 버금가는 수준의 질서 파괴나 선거 방해 공작이 있었습니까? 도저히 군대를 투입하지 않고는 기존의 경찰이나 검찰의 힘만으로는 질서를 회복할 수 없을 만큼의 심각한 위기가 작년 12월 3일 전후하여 대한민국에 있었나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위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야당이 탄핵을 계속하고 예산을 삭감하고 하는 등의 투쟁이 지나치다고 할 수는 있죠. 하지만 그것이 과연 1948년 4월 3일 그리고 그 이후에 제주도에서 벌어진 일과 그 심각성에 있어서 과연 비교라도 되나요?
‘처단’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단’이라는 표현은 선거방해와 경찰에 대한 대규모 습격을 조직하고 북한에 충성을 맹세한 김달삼, 김달삼을 이어 받아 대한민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양민 학살을 서슴지 않은 제주도 빨치산 2대 사령관 이덕구 같은 인간들에게나 써야 할 말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모두 우리 군경에 의해 ‘처단’되었습니다. 정부 정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우리 국민인 의사를 향해서 ‘처단’ 운운하면서 국방장관이랑 같이 희희덕대고 앉아 있는 것이 대통령이라는 사람으로서 할 짓입니까?
군대를 민간 지역에 투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제주4.3 진압과정에서 많은 양민이 희생된 것을 보십시오. 물론 공산당의 내란 폭동이라는 맥락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간 지역에 군대를 투입하고자 할 때는 고도의 신중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작년에 선포했던 계엄령에는 국가 존망의 위기라는 계엄의 조건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민간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도시 한복판에 무장한 전투부대를 투입하는 행위의 무게에 대한 대통령으로서의 신중함도 보이지 않습니다. ‘경고성’이라니요? ‘아무 일 없었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구요? 군대가 장난입니까? 의사를 ‘처단’하겠다고요? 국정이 농담입니까?
저는 제주4.3의 아픈 역사에서 여야, 좌우가 모두 올바른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공산주의 내란 폭동이라는 맥락을 제거한 채 ‘국가폭력’만 강조하는 좌파는 오히려 수많은 제주도민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25한국전쟁 발발시 수많은 제주도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 군대에 입대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계엄령은 대통령 권한이니 대통령 마음대로 선포 좀 하면 어떠냐는 ‘똥보수’들은 이제 그 소아병적 광기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나이만 먹었다고 저절로 철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똥보수’들은 철 좀 드십시오. 제발.
대한민국 군대는 대통령이 아무 때나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이 꺼내쓰는 대통령의 장난감이 아닙니다. 아무리 군통수권자라 해도 중무장한 군사력이 갖는 무게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함부로 군대를 동원한다면 결국 그 칼은 대통령 본인을 찌르게 될 겁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들 하지요. 제주4.3의 교훈도 우리가 잊어선 안됩니다. 자신들의 아픈 과거를 담담한 어조로 저에게 풀어 주었던 할머니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항상 올바른 교훈을 되새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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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seung 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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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재일동포 할머니들 모시고 들은 옛날 이야기: 제주4.3 그리고 일본에 오게 된 사연
3분 모두 제주 출신. 1930년생, 1935년생, 1939년생. 이 중 35년생, 39년생 두 분은 같은 마을 출신(조천면 조천리). (편의상 경칭 주로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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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생) 4.3이라고 들어봤나?
—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언론이나 지면을 통해서는 들어본 적이 많다. 당시 제주도 주민의 4분의 1 가까이가 희생당했죠.
(39년생) 많이 죽은 정도가 아니다. 4.3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죽었다. 그때 참 많이도 죽었다.
— 누가 죽였나?
(35년생) 이북 사람들이 죽인 거지.
— 이북? 이북이라 하면 북한에서 사람이 왔다는 것인가?
(39년생) 이북에서 사람이 왔다는 것이 아니라 이북 사람들한테 명령을 받았다는 거다. 그때는 낮밤이 바뀌었다. 낮에는 남쪽 세상이고 밤에는 이북 사람들 지령을 받는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왔다.
— 왜 죽인 건가?
(39년생) 그때 우리 아버지가 면사무소 계장이었다.
(35년생) 아주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멋쟁이였었어. 난 아직도 기억이 나.
— 어떻게 죽였나? 총으로, 아니면 교수형? 인민재판을 한다든가…
(39년생) 그런 거 없었다. 그냥 죽였다.
— 그냥이라는 것이 어떻게?
(39년생) 그냥 막 찔러 죽였다.
— 죽창으로?
(39년생) 아니 죽창이 아니고.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다. 그때는 쇠꼬챙이인데, 그걸 길고 날카롭게 갈아서 들고 다녔다. 그걸로 그냥 사람들 몸을 막 찔렀다. 그때 내가 9살이었는데, 아직도 기억이 난다.
— 살아남은 가족은?
(39년생) 그때 우리 엄마는 살았다. 그런데 나중에 엄마도 병으로 죽었다. 그때 참 힘들었다. 형제들이 많이 도움이 됐다.
— 다른 분들도 4.3때 가족들이 희생당했나?
(35년생) 우리 가족에선 죽은 사람은 없었다. (놈들이 온다는 걸) 미리 알고 도망갔다.
— 그러면 피해가 없었나?
(35년생) 그 놈들이 우리 집을 홀랑 태워버렸다.
— 왜 그런 짓을 한 건가?
(35년생) 내가 오빠가 셋인데, 그때 다들 군대에 가 있었다. 군인(가족)이라고 그렇게 한 거다.
— (30년생 할머니를 향해) 할머니는 그때 괜찮으셨나?
(30년생) 그때는 우리 사촌집에서 우리를 지켜 줬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일본에서 기름 장사를 했다. 다행히 우리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다.
— 기름 장사라면?
(30년생) 정유소를 했다. 그때 우리 사촌집이 (아버지의 형제를 말하는 듯) 경찰서장이었다. 우리는 그때 그래도 괜찮았다.
(35년생) 이 언니네는 애들 공부를 많이 시켰어.
(30년생) 우리 형제가 딸이 다섯이고 아들이 하나다. 지금 다 살아 있다. 우리는 그때 우리 어머니가 학교를 다 보내줬다. 딸들이 다 여학교를 나왔다.
— 여학교라면 여고를 말하는 것인가?
(30년생) 아니 그게 아니라 그때는 다들 여학교라고 불렀는데, 요즘으로 치면 전문대 같은 거다. 그때랑 지금이랑 학교 체제가 좀 다르다.
(35년생) 그때는 여자는 소학교도 못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30년생) 우리 남동생은 서울대 약대 나와서 평생 약사했다. 지금도 서울에서 약사하는데, 이제 나이가 많아서 약국만 차려 놓고 실제로 일은 안 한다. 나머지들 중에 둘은 미국으로 이민 갔고, 일부는 일본에 산다.
— 일본에는 언제 온건가?
(30년생) 나중에 엄마가 아빠 따라서 일본으로 갔다. 한국에는 무서워서 못 살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보고도 계속 일본으로 오라고 했다.
— 그럼 처녀 때 일본으로 온 건가?
(30년생) 아니 그때는 이미 결혼하고. 내가 학교 졸업하고 제주도 세관에 근무했었다.
— 거기서 남편 분을 만난 건가?
(30년생) 그렇다. 그때는 여자가 별로 없을 때다. 내가 점심을 먹고 와서 책상 서랍을 열어 보면 쪽지가 여러 개 들어 있곤 했다.
— 무슨 쪽지?
(30년생) 뭐 그런 거지. 좋아한다 그러고. 차 한 잔 하자고 그러고.
— 그러면 남편 분도 그렇게 쪽지를 넣은 분 중 한 분 이었나?
(30년생)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때 우리 옆 과 과장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소개를 시켜 줬다. 이 사람이 아주 사람이 좋다고. 나보다 (남편이) 두 살 위였는데. 과장님이 그 남자가 좋다고 결혼하라고 해서 (그 말 믿고) 결혼을 했다.
— 결혼을 언제 한 건가?
(30년생) 1951년에 했다.
— 그러면 전쟁중에.
(30년생) 그렇다. 전쟁중에. 제주도에서 했다.
— 그러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나중에?
(30년생) (끄덕끄덕) 그런데, 남편이 얼마 있다 죽었다.
— 죽었다고요? 왜?
(30년생) 병으로. 그때가 49살이었으니까.
— 1977년? 그러면 그 이후로 쭈욱 혼자 살았나?
(30년생) (끄덕끄덕)
— 생활비 같은 것은 어떻게 충당했나?
(30년생) 우리 여동생이 그때 일본에서 사업을 했다. 그거 도와주고 같이 했다.
— 자녀분들은 어떻게 되나?
(30년생) 내가 애가 넷인데.
(35년생) 이 언니는 손자손녀만 12명이나 돼.
(30년생) 우리 딸 애는 (몇째 자녀인지 말을 안 함) 대만에서 대학을 나오고, 그 다음에 서울대에서도 공부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일본어가 좀 부족한 것 같다고 해서 다시 일본에 와서도 공부를 했고, 지금은 여기 오사카에서 일하고 있다. 근데 아직 시집을 안 갔다.
— (35년생 할머니를 향해) 할머니는 자녀분이?
(35년생) 난 둘. 그리고 손자도 둘이고. 증손자도 있다.
— 일본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건지?
(35년생) 난 완전히 건너온 건 나중이다. 내가 51일 때 왔으니까?
— 80년대?
(35년생) 그렇다. 그때 내가 침도 놓고 뜸도 뜨고 했었는데. 일본 오사카에 살던 어떤 일본인 사장님이 제주도에 와서 나한테 치료를 받더니 너무 좋다고 일본에 와서도 꼭 해보라는 거다. 그래서 넘어 왔는데, 장사가 잘 됐다. 그때 돈 많이 벌었지. 땅도 한 1천평 정도 샀었다.
— 그 재산 지금도 있나?
(35년생) 하나도 없지. 사위가 사업을 했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그 빚 다 갚아 줬다. 땅도 다 팔고.
— 사위가 실패한 것을 왜 장모가 다 갚아주나?
(35년생) 사실은 나한테 침구 기술 가르쳐 준 것이 사위다. 일본 가서 침구 해보라고 한 것도 사위이고.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가게 여는 것부터 시작해서 많이 도와줬다. 그러니 …
*********
얘기가 엄청 긴데. 정리하는 것이 만만치 않네요. 할머니들 말씀이 워낙 두서가 없고, 중구난방이라서. 딸 얘기 하다가 갑자기 옛날 제주도 얘기 하시고. 게다가 또 귀도 잘 안 들리시는데, 제가 안 여쭤본 것도 갑자기 길게 얘기를 하시고, 여쭤본 것과 무관한 얘기도 길게 하시고 해서. 한 마디로 삼천포로 엄청 빠집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세대, 즉 1940년대를 전후한 세대들의 일본 도항기는 그 이전 세대, 즉 식민지 시대에 일본으로 넘어온 세대의 일본 정착 스토리나 혹은 최근 들어 일본으로 건너오는 비교적 젊은 세대들의 스토리와는 다르다는 겁니다.
첫째 대부분이 4.3이라든가 한국전쟁 같은 1940년대와 50년대의 한국 사회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을 또렷이 하고 있으며, 그것이 이들 세대들에게 공포감 내지 가난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수많은 살육, 빈곤과 굶주림에 대한 공포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으로 온 것은 바로 그런 공포와 빈곤을 피해서 오게 되는 거죠.
둘째, 그 이전 세대와 달리 한일간 왕래가 잦은 편입니다. 일본으로 건너올 때도 한번에 날 잡아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연고가 있다 보니 왔다 갔다 자주 하다가 자연스레 일본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마 제주도라고 하는 지리적 특수성도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주도는 당시 한국로서는 일본의 오키나와나 홋카이도 같은 변경인 동시에 일본과의 접경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조선과 고려 시대에 함경도 지방에서 만주와 조선반도 간의 수많은 인적 물적 교류가 중앙정부의 간섭 없이 자발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듯이, 1940년대, 50년대의 제주도에서는 한일간 국교 단절과 일본의 미국 군정통치라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활발히 한일간 인적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식적으로 국교는 없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 하나의 교통망과 인적 교류의 망 속에 포섭되어 있었고, 언어 장벽도 낮았기 때문에 실제로 배 탈 정도의 돈만 있으면 제주도에서 큐슈나 오사카에 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셋째, 오늘 말씀 나눈 세 분의 할머니가 모두 공교롭게도 4.3 당시 공산측에 의해 피해를 받았던 분들이고, 공산측에 대해 강한 공포감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우연이겠지만, 이 증언들은 4.3이 어느 한 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학살한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브루스 커밍스가 이미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주장했던 내용인데, 사실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조선민족이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데, 외세의 강압에 의해 내전이 벌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이미 식민지 시절부터 있었고, 그리고 해방 이후에 점점 커져 가던 당시의 이념 대립과 계급 갈등이 외부적 조건에 의해 불이 당겨진 측면이 강하다는 거죠.
1948년 4.3사건 당시에 이미 단지 가족중에 군인이 있다거나 혹은 아버지가 면사무소 계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일 정도로 이념 대립과 계급 갈등으로 인한 증오와 분노가 고조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이 점점 증폭되어 외부세력의 이해관계라든가 김일성의 개인적 야심과 맞아 떨어지면서 결국 6.25로 폭발한 것이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틈틈이 어르신들 모시고 옛날 얘기 되새김질을 해보려고 합니다. 하여간 옛날 얘기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네요.
#오사카사는제주도할머니들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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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seung 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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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을살아넘긴할머니들 #내외할머니 #버섯구름을보며조롱하는사람들보면한대때려주고싶어 #썩어가는시체로발견된사람들은자업자득이라고 #인간이기를포기하지마라 #공감할줄모르면짐승 #측은지심없이인간못된다 #공감하지못하는사람들로세상안바뀌어
한정O. 1939년생. 제주 출신입니다. 처음에 뵜을 때 할머니는 저를 어색해 하셨습니다. 손자 뻘인 제가 어색하셨겠죠. 게다가 한국말도 서투르셨습니다. 하도 오랫동안 쓰질 않으셔서 어휘도 많이 부족하셨죠.
그래서 먼저 다가가서 인사도 드리고 우스개소리도 하고 제 소개도 하고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질문도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할머니께서 어디서 오셨는지, 여기는 어떻게 오시게 됐는지 여쭤보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제주도 4.3 생존자이십니다. 생존자라는 말을 쓰는 것은 다른 가족들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4.3의 이데올로기 투쟁 속에 좌익들에 의해 쇠꼬챙이 창에 찔려 돌아가셨습니다. 현장에 있던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간신히 형제들과 어머니가 살아남았지만 엄마는 그 후 얼마 있다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4.3 당시 9살이었던 할머니는 형제들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그냥 할머니를 꼭 껴안고 펑펑 울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너무도 담담했습니다. 그저 “그때 일이 지금도 다 기억나. 너무 무서웠어. 우리 엄마 죽고 나서 참 힘들었다”라고만 하셨습니다.
저는 그 할머니를, 아니 그 할머니 안에 있는 9살 소녀를 꼭 안아 주고 같이 울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는 결국 할머니 앞에서 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웃었습니다. 농담도 하고 해서 할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할머니 참 큰일하셨습니다. 여기 일본에 와서 이렇게 번듯하게 일가를 이루시고, 자식 손자들도 잘 키워 놓으시고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할머니는 겸연쩍은 듯이 그저 “대단하기는 뭘 대단해”라고만 하셨습니다.
김옥O. 1935년생. 역시 제주 출신. 할머니 역시 4.3 생존자이십니다. 잽싸게 낌새를 알아채고 피신한 덕분에 가족들 중에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살던 집이 홀랑 타버렸습니다. 도망갔다가 돌아와서 잿더미가 되어 버린 집을 보고 멍했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공부를 많이 못하셨습니다. 글도 서투르고 일본에 그렇게 오래 사셨는데 일본어도 부족하십니다. 저를 처음 만나고 매번 뵐 때마다 제 이름을 말씀드렸는데 제 이름을 외우는데만 몇 달이 걸리셨습니다. 종종 말씀도 횡설수설하십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는 기막힌 뜸과 침 솜씨가 있으세요. 그 솜씨로 한 때 돈도 많이 버셨답니다.
“내가 옛날에 집도 2채고, 그때 땅도 여기저기 꽤 있었어. 일본 처음 와서는 진짜 손님이 많았었다고.”
그런데 지금 할머니는 형편이 어려우십니다. 몸도 안 좋습니다. 사위가 사업실패를 해서 재산을 모두 날렸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사위 야속하지 않으세요?”라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아니, 하나도. 내가 갚아 줘야지. 사위가 옛날에 날 많이 도와줬거든. 그러니 거기 힘들 때 나도 도와줘야지.”
“할머니, 할머니가 부처님이십니다. 생불이십니다”라고 하니,
“부처는 무슨”하며 피식 웃으십니다.
할머니들을 보면 돌아가신 저희 외할머니가 떠오릅니다.
정이O. 1915년생이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외할머니는 저랑 놀아주는 걸 좋아하셨습니다. 외할머니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으면 할머니는 항상 벼라별 흥미진진한 얘기들을 해주셨습니다. 공부를 거의 못하셔서 한글이나 간신히 쓰시던 분이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어떻게 외우고 계셨는지 지금도 신기합니다.
외할머니는 누구를 욕하지도 않았고, 화를 내시는 모습도 본 적이 없습니다. 충청도 사람 특유의 느린 말투로 말씀을 하셨고 행동도 느리신 편이셨습니다. 다만 자식새끼들과 손자 손녀들을 챙기는 일이라면 거의 동물적인 본능을 보이셨던 것 같습니다. 들창코에 눈이 작았고, 항상 한복에 쪽진 머리를 하고 계셨는데, 저를 보면 항상 조그만 사탕을 하나씩 주시곤 했었죠.
외할머니는 제가 중학교 때 돌아가셨는데, 큰외삼촌 댁에서 돌아가셔서 임종을 하지 못했습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외할머니가 행상을 해서 7남매를 키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직후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떠나시면서 외할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씀만 계속하셨다고 하더군요.
7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할머니가 선택한 직업이 행상이었습니다. 커다란 광주리에 바늘, 성냥, 간단한 과자, 사탕, 떡, 옷감, 구리무 같은 생활 비품 같은 것들을 넣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방판 내지는 배달업이라고 할까요.
희한하게도 생각보다 장사가 훨씬 잘됐다고 합니다. 덕분에 칠남매를 먹여 살릴 수 있었고, 먼저 장성하여 돈을 번 형제들이 돈을 모아서 아래 2명은 대학도 보냈습니다.
행상으로 꽤 저축을 했지만 외할머니의 말년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아들 중 한 명이 사업에 실패하여 모아 두었던 돈을 털어 아들을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그 아들을 더 도와주고 싶어하셨습니다.
외할머니가 말년에 남겨주신 여러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전쟁에 대한 얘기입니다. 돌아가시기 몇 년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씀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전쟁은 안된다. 안돼. 요즘 젊은 사람들이 전쟁 무서운 걸 모르지. 대동아 전쟁에 6.25까지. 전쟁 나면 백성들이 힘들어”
오늘 오사카 시내에서 오랜만에 한정O 할머니와 김옥O 할머니를 뵜습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하고 큰 소리로 밝게 인사를 드리니, 할머니들도 “어 장선생” 하면서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할머니, 손 좀 줘보세요. 아유, 어쩌면 손이 이리 고우세요. 손 좀 계속 만져 보고 싶어요.”하면서 할머니들의 거친 손을 오래도록 조물락 조물락했습니다.
이유를 뭐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데 저는 이 할머니들을 뵈면 그냥 막 미안합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 신산한 삶을 살아왔는데도 누구를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죄송스러워서 그런 걸까요? 그냥 할머니들을 보면 계속 우스개소리를 해서 즐겁게 해드리고 싶고 꼭 안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앞 세대가 겪었던 고통을 잊어 버리고, 우리 앞 세대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 버리곤 합니다.
물론 지금 세대들에게는 옛날 사람들이 전혀 모르던 새로운 고통과 아픔이 있지요.
하지만 뭔가 세상을 바꾸고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계기는 불평, 불만과 비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감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제가 지난 번 방탄소년단과 원자폭탄 문제를 다룬 내일신문 칼럼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이긴 한데… 사실 저는 원자폭탄이 만든 버섯구름을 보면서 일본에 대한 여러 가지 욕설과 조롱을 늘어 놓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낍니다.
영문도 모르는 노약자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이 피부가 녹아 내리고 눈알이 빠지고 내장이 터져 죽었는데, 그래 그것이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거기에 박수를 치고 싶어? 너 인간이야?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야?
최근에 페북을 보다가 어느 담벼락 댓글에 한국 저소득층 남성이 처한 어려운 현실에 대해 몇 자 적었는데, 어떤 다른 분이 그들은 그렇게 되도 싸다, 자업자득이다라는 취지로 댓글을 다셨더군요.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하루에 자살로만 40명이 죽고, 자살 통계에 조차 포함되지 않은 채 고독사로 사후에 발견되는 사람만 매일 6명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50대 이상 저소득층 남성이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자업자득이다, 여성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기 잘못이 있으니 그렇게 됐을 것이다 라는 답이 돌아오더군요.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원자폭탄의 증기 속에 사라져간 수많은 민간인들의 고통과 죽음에 무감각해진 그들. 그쯤은 우리가 겪은 식민지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 오히려 희생자들을 조롱하고 박수를 쳐대는 그들.
좌절과 소외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채 다 썩어들어가는 시체로 발견된 남성들의 처절한 최후에 대해 아무런 연민조차 느끼지 못한 채 “내가 애 낳을 때, 애 키울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내가 힘들 때 너희들은 뭘 얼마나 도와줬냐”고 울부짖으면서 자기 아픔에 좀 더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하는 그녀들.
어쩌다 이리 된 걸까요?
정말 커다란 좌절감과 실망을 느낍니다.
그 무슨 논리를 들이대고 이유를 갖다 붙이고 아무리 멋진 청사진을 내세운다 한들 이 단순한 인생의 비극 앞에서 한 방울의 공감 하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갈 미래가 끔찍합니다.
맹자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심성인 4단의 첫째로 측은지심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예로 우물가를 기어 다니는 갓난 아기의 예를 들었습니다.
우물가를 지나가다가 갓난아기가 우물 입구 주위를 위험천만하게 기어 다니는 것을 보면,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의 적의 아이인지, 친구의 아이인지를 따져야 합니까? 그냥 즉시 달려가서 갓난 아기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 순서이죠. 이것이 바로 측은지심입니다.
일본인이면 원자폭탄을 맞아 죽어도 싸다고 하시는 분들. 남자들은 자살 많이 해도 다 자업자득이고 썩어 들어가는 시체로 인생을 마무리지어도 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제발 지금이라도 스스로가 괴물이 되었음을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공감을 상실하고 인간이기를 거부해서는 세상 못 바꿉니다.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부터 분명히 하고 들어가자고요? 그래요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부터 하세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측은지심을 잃지는 마십시오. 어른스러움을 잃지는 마세요. 인간이어야 합니다. 내 고통만 알아달라고 하면 그건 어린아이에요.
제 주변에서 세상 살기 힘들다 어렵다 울분과 불만을 터뜨리시는 분들 중에 제가 오늘 뵈었던 두 분 4.3 생존자 할머니들 그리고 저희 외할머니 만큼 힘들게 사셨던 분들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은 그냥 옛날 분들이라고요? 그때는 다들 그랬다고?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분들이 그렇게 고생하시면서도 분노와 원망에만 빠져 들지 않고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 잃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전 그렇게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갈등의 극을 달리고 있는 한일관계나 대한민국의 남녀관계를 앞으로 다음 세대에서 조금이라도 더 개선시켜 나가려 한다면, 우리 할머니 세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로 지금의 우리 세대가 조금 더 참고 오히려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더 공감하는 마음가짐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공감에 근거해야만이 비로소 세상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꿔 나가는 힘이 나올 것이다 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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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seung 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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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반민특위70주년 #프랑스의교훈에서무엇을배울까 #우리에게는플라톤이아니라마키아벨리가필요했다
아래 제가 올린 내일신문 칼럼 읽어 주신 페친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프랑스 과거사 청산 문제는 한 번 꼭 다루어 보고자 했던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알고 있는 프랑스 과거사 청산에 대한 시각과 국내에서 프랑스 과거사 청산을 거론하는 시각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전후 대독협력자 청산의 역사를 별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 얘기하는 것을 상당히 꺼려 합니다.
특히 청산 작업을 주도했던 레지스탕스 세력들은 1950년대 이후 사실상 상당수가 침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끝난 일이니 더 거론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청산’이라는 이름하에 희생당했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약 1만명이 즉결처분됐고, 약 2만명의 여성이 삭발식을 당했습니다.
당시에는 해방의 환희와 격정 속에 그것이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년만 지나 놓고 보니 자기 부모, 아내, 아들, 딸 앞에서 자기가 동족을 상대로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을 내놓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제주 4.3에 대한 서사를 들어보면 좌파 우파 모두 희생자의 서사만 있지요. 가해자는 그냥 군경이라고만 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수집한 증언만 보아도 민간인들끼리도 서로 무수히 죽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느 누구도 공개 장소에 나와서 “내가 이승만 정권 부역자들을 처단했다” 혹은 “빨갱이들을 이렇게 처단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산’이 없었는데 프랑스는 ‘청산’이 있었고 더욱이 매우 잘했다고 믿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도 처절한 부역자 청산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조선반도 전역에 걸쳐 해도 해도 너무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청산이 밤낮을 바꿔 가면서 몇 년동안 계속됐습니다. 이 잔인한 ‘청산’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프랑스의 전후 대독협력자 청산은 우리에 비해 환경이 훨씬 좋았습니다.
통일 정부가 있었고, 이 정부가 연합국의 승인을 받았으며, 더욱이 비교적 강력한 군대 조직이 이미 프랑스 전역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분열했고, 연합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우리의 군대는 미약했습니다.
누구 탓을 하자 라든가 우리가 못났었다 라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차이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조건이 좋았던 프랑스마저도 실제 청산을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무질서와 증오를 경계하고 질서와 관용, 통합을 강조했습니다.
드골은 ‘야만적 청산’ 단계를 조속 종결하고 재판을 통한 법률적 청산을 개시하고자 했습니다.
소급입법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전에 이미 있던 반역죄 조항들을 그대로 갖다 썼습니다. ‘청산’의 개념이나 ‘대독일협력’의 개념이 과도하게 확대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판사들도 전쟁 전에 판사 생활을 이미 하던 법률 전문가들을 그대로 등용했고, 형사소송법상의 피고인 권리 보호를 부역혐의자들에게도 그대로 다 인정해 줬습니다.
특히 놀라운 점은 비밀리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협력했다는 증거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게 해줬습니다.
요즘 조선일보 계초 방응모나 동아일보 인촌 김성수가 친일파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만해 한용운의 생활비를 댔었고, 도산 안창호가 투옥되었을 때 그를 위해 탄원서를 썼던 계초 방응모가 만약 프랑스의 청산 법정에 피고로 섰었다면 그에게는 어떤 판결이 났을까요.
인촌 김성수와 몽양 여운형 모두 일제 말기에 지금으로 보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친일적인 행위와 말을 했습니다. 기록이 다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일제와의 접촉을 유지하는 다른 한편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거나 독립을 도모하는 활동도 했습니다.
인촌과 몽양이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법정에 섰었다면 무슨 판결을 받았을까요?
기실, 계초든, 인촌이든 몽양이든 누구도 1949년 당시 독립운동가 출신 김상덕 의원이 주도하던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는 커녕 조사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대독일 부역의 역사를 청산하려 하면서도 ’청산’의 범위에 대한 국민적 논란을 최소화하고, 후대에 누가 봐도 이건 정말 처벌을 했어야 했다는 범위로만 ‘청산’을 국한하고자 했던 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처벌을 받은 사람들도 거의 모두가 몇 년 내로 다 사면됐습니다.
당시 드골은 그것이 전후 프랑스의 재건과 통합을 위한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 결과 상당수의 악질적, 핵심적 부역자들을 분명히 처단할 수 있었고, 국민적 단결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비하면 청산 측면에서 커다란 성과가 있었던 거죠.
하지만 이렇게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청산 과정은 전후 프랑스 사회에 엄청난 후유증을 낳았습니다.
즉결 처분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나중에 진지하게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부역행위를 한 적이 없었다거나 혹은 사형을 받을만한 짓을 한 적이 없었는데, 즉결처분한 것은 지나친 행위였다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가족들은 피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당시 즉결 처분 과정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찾기도 어려웠습니다. 아니면 침묵했습니다. 전시 즉결처분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해도 법적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즉결 처분이 “다소 무리”였던 것이라고 하는 설명을 들을 때 그 아들, 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삭발식을 당했던 여성들의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났고, 그들은 자기들을 삭발시키고 옷을 벗기고 린치를 가했던 사람들과 다시 한 마을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 반목과 어색함은 계속됐습니다.
주세페 또르나또레 감독의 영화 말레나를 보면 말레나가 삭발식을 당하고 나서 얼마 후 죽은 줄 알았던 그녀의 남편이 살아 돌아옵니다. 한 팔을 잃은 채로.
이탈리아 군복을 입은 남편의 팔짱을 끼고 시장통을 걸어 가는 말레나에게, 바로 얼마 전 그 말레나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하던 한 시장 상인 아주머니가 존대말을 쓰며 말을 겁니다. 어색하게. 물건을 팔려고 한 것이죠.
재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산”이나 “부역”의 법적 정의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었고 토론을 아무리 해도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로 레지스탕스 출신들간에 제비뽑기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표결로 최종판결을 내리는 형식을 취했는데 여기서 나오는 판결이 들쭉 날쭉이었습니다. 비슷한 행위를 했는데도 어느 기업인은 무죄가 나오고 다른 기업인은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처벌을 받은 사람들 중에도 자기들이 사실은 레지스탕스를 지원했다, 애국을 했다고 하면서 항변하는 사람들도 나왔습니다.
공무원들 중에도 주로 하급공무원들이 많은 처벌을 받게 되자 부역자 청산 재판에 대한 냉소와 저항이 확산되었고, 일부 구 레지스탕스 요원들은 청산 과정의 불명확성과 불평등성에 대해 환멸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처벌되어야 할 거악이라든가 대기업 소유자, 고위 공직자들의 경우 대부분 법망을 피해 나갔습니다. 레지스탕스들의 좌절과 환멸은 더 깊어 갔고, 전후 많은 레지스탕스 요원들이 청산 과정에 대해 더욱 침묵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셋째, 흔히들 우리의 일제 청산 과정이 좌절된 이유로 미국의 개입을 듭니다. 혹은 공산주의와의 이념 대결로 인해 친일파들이 ‘반공’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전선이 흐려진 탓을 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당시의 국제정세가 우리 국내적 청산 과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죠.
그런데 이런 부정적 영향은 프랑스에도 있었습니다.
해방 정국의 드골 정부는 여전히 물적 기반이 취약했습니다. 드골의 힘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국내의 지지라기보다는 연합국의 승인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재건보다 청산에 집중할 경우, 자칫 연합국의 우려를 불러올 위험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동유럽 전체가 소련군의 장악하에 있었습니다. 이제 동유럽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은 명약관화했고, 더욱이 프랑스 공산당은 당시에 소련에 우호적이었습니다.
드골 정부로서는 미국과 영국이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 공산당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청산 과정을 더욱 확대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동유럽 전체가 소련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고 서유럽 내부적으로도 공산당의 세력이 확대되어 가고 있는데, 여기서 재건과 통합보다 청산에 집중하다가는 자칫 드골 정부가 붕괴할 수도 있다고 본 겁니다.
드골이 질서 잡힌 청산을 강조하고, 법적인 절차를 부르짖고 사면을 통한 통합과 관용을 목놓아 외친 것에는 이러한 고민이 있는 겁니다. 마치 드골 정부는 청산 한 가지에 집중하여 철저한 독일부역자 청산을 강조한 것처럼 알고 계신 분은 역사를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역사는 진공 상태 속에서 전개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이상주의적 진전을 가로막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습니다.
아래 제 글에 댓글 다신 분 중에 한 분이 “한국은 정의 또는 국민의 다수, 대의가 성공해 본 경험이 한번도 없는 나라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정의 또는 국민의 다수, 대의가 성공해 본 경험이 있는 나라”는 어느 시기, 어느 나라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프랑스 혁명 직후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대의와 순수성을 외치며 약 1만7천명을 단두대로 보냈습니다. 수많은 혁명 동지들을 죽였고, 그 자신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에서 “정의 또는 국민의 다수, 대의”가 성공한 것인가요?
오히려 그로 인한 무질서 속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사쿠데타를 통해 프랑스 국민정부는 붕괴했고 나폴레옹 장군이 독재자로 나중에는 황제가 되어 프랑스를 통치하게 됩니다.
우리보다 훨씬 좋은 조건 하에서 전후 청산 작업을 수행했던 프랑스에서도 커다란 후유증이 남았고, 그 후 수십년동안 프랑스인들에게 ‘청산’은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물론 우리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를 낳았죠. 조건 자체가 훨씬 좋았으니까요.
하지만 자기 아버지가 독일인들에게 빵과 고기를 팔았다는 이유로 즉결처분된 것을 알았을 때, 자기 어머니가 독일군과의 사이에서 자기를 낳은 대가로 저잣거리에서 삭발식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아들과 딸은 그 즉결처분과 그 삭발식을 “정의 또는 국민의 다수, 대의”라고 여길까요?
청산이 불필요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제 청산 과정이 미약했고 모호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제대로, 온전히 보고 올바른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프랑스의 경험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우리는 단결해야 했습니다. 이념 대결 핑계를 대며 단결하지 못한 것을 변명하는 것도 비겁한 짓입니다. 우리가 일본 패전 이전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드골 정부처럼 단일 대오를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 우리 스스로 철저히 반성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의 강력한 군대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물론 프랑스는 독일 점령 이전에 조선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였죠. 점령기간도 짧았습니다. 또 독일 점령지 이외에 비시 정부 통치 구역에서 레지스탕스의 활동 영역이 훨씬 넓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물리적 힘을 키우지 못한 것은 처절히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리고 군대의 힘은 단순히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우리 스스로의 강력한 군대를 만들지 못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셋째, 위의 두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해도 청산 과정은 질서와 단결과 통합과 공정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어야 합니다.
우리보다 좋은 조건을 갖고 있던 드골 정부도 질서잡힌 청산과 단결, 통합, 공정성을 강조했습니다. 세상 그 어느 정부도 ‘청산’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정부가 없습니다.
전후의 엄혹한 상황은 프랑스나 조선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재건을 위해서는 국민적 단결과 통합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고려는 불가피했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조건이 좋았던 드골정부도 연합국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우리는 통일정부도 없었고, 군대도 없고, 경제력은 더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우리가 마치 미국이나 당시 국제정세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청산 과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 라든가 혹은 그랬어야 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칫 과도한 이상주의에 근거한 탁상공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당시 미국에게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땅에서의 일제 청산이 자기들의 최우선 과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최우선 과제는 소련과의 대결이었습니다.
일본 패전후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들은 당시 조선의 정세를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49년 당시에 남한에서 ‘과거 청산’을 추진하는 주체 세력은 미국에게 이 청산 과정이 절대 혼란이나 무질서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반공의 대오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명확한 시그널을 보내주는 전술적 고려가 필요했습니다.
궁극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마키아벨리가 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진정 일제 청산의 성공을 원했다면 말이죠.
물론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전술적 고려는 분명 청산 범위의 축소를 가져왔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축소와 그에 따르는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반민특위로 시작된 청산 과정을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이 더 낫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것은 정말 천추의 한입니다.
그러나 당시 반민특위의 관점에 서서, 당시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 진행되고 있던 부역 청산 과정의 교훈을 감안하여, 1949년의 정세를 돌아본다면 여러 아쉬움이 남습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는 정녕 불가능한 것이었나? 반민특위 70주년을 맞이하여 곱씹어 보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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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seung Chang is
feeling OK.srpoSontde71i38102676410b e5mfui6c2o m03c6ghcfr776l1c4O3ht8c ·
#도쿄지진 #진도5강 #매그니튜드6 #東京地震 #震度5強 #マグニチュード6
난리네요. 아사히TV 저녁 뉴스 프로그램, [보도스테이션] 보다가 화면이 하도 흔들려서 순간 여기 오사카에 지진이 온 줄 착각. 그런데 보니까 화면 안에만 흔들리네요. 참고로 [보도스테이션] 스튜디오는 도쿄 롯뽕기에 있습니다.
3년전, 2018년 6월에도 제가 사는 동네 밑을 진원지로 하는 진도6 정도의 지진이 있었습니다. 지금 보도 나오는 걸 보니 아마 방금 도쿄에서 발생한 지진이 3년전 저희 동네에서 발생한 지진과 비슷한 규모인 것 같습니다. 당시 제 연구실 천정이며 벽이며 마치 물결처럼 출렁이는 걸 보면서 충격과 공포를 경험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오늘 도쿄 지진이 규모는 3년전 이 동네 지진과 비슷하다 해도 여기 같은 시골 동네보다는 도쿄가 건물이 훨씬 많을테니 아마 체감 진도는 더 높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일본에서는 지진이 오면 일단 철도가 다 멈추고, 가스도 자동으로 다 끊깁니다.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다 멈추고요.
지금 동경대 지진학 전문 교수님이 화면에 나와서 설명하시는데, 아마 앞으로 한 일주일 정도는 비슷한 규모로 여진이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시네요.
지금 [보도스테이션]은 지진이 나자마자 모든 정규 방송 중단하고 앵커들이 모두 화이바 쓰더니 지진 비상 방송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시다 총리를 비롯해 각료들도 모두 관저로 튀어 나와서 비상 대책에 나서는 것 같습니다. 관저에서 기자단의 질문에 바로 즉답을 하고 있네요.
도쿄에 계신 분들 안전하시길 기원드립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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