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이쿠노쿠 지역의 지그 마한 연립주택,
재일 동포 이철의 가족에 이곳에 살고 있다.
50대의 부부와 아직 어린 남매,
네 식구의 가장 이철은 올해 53의 나이지만 아이는 큰 놈이 겨우 열두 살이다.
그들의 가정이 꼭 그만한 연령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그의 결혼식은 13년 간이나 지각을 했다.
88년 가을, 결혼식 당시 신랑은 이미 마흔 살의 중년이었다.
그 세월 동안 이철은 한국의 감옥에 있었다.
1975년 고려대 대학원에 유학 중이던 이철은 그해 12월, 영문도 모른 채 중앙정보부에 연행됐
던 것이다.
북한의 공작지도원에게 포섭돼 두 번에 걸쳐 북한에 들어갔으며 지령에 따라 간첩행위를 해왔
다는 것이 이철의 죄목이었다.
따라서 이철과 약혼녀 민향숙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에 의해 간첩, 간첩 방조죄로 각각 인정됐다.
재판부는 이철에게 사형을, 민향숙에게는 징역 6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 감형 집행이 내려졌고 그는 88년 13년 만에 특사로 출소됐다.
이철은 현재 한국 양심수 동호회를 이끌고 있다.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내 인권 상황과 민주화 발전을 위해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자
하는 모임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법정에서 간첩으로 인정받고 실형을 살고 나온 재일 동포는 약 120명,
이들 대부분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공안기관에 연행됐다.
학생 데모 진압이 좀 심한 것 같다는 말 한마디가 빌미가 되기도 했다.
재일 동포 사회는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 사람들과 남한을 지지하는 민단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살고 있는 사회다.
개인적인 접촉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상으로는 바로 그 점이 강력한 혐의점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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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것은 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관련 간첩단 사건이 대폭 늘어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국내 인사가 방일하거나 재일 동포가 한국에 건너오면서 성립되는 사건들로 5~60년대에는 그
발생 건수가 지극히 미미했다.
이것이 70~80년대 이르러 급증하게 되는 것이다.
그중 재일 동포 간첩단 사건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들은 어떻게 간첩이 됐는가?
이종수는 검사 측 증인으로 나온 재일 동포를 오래 이를 갈며 미워했다.
그가 당시 10년 형을 받은 것이 그 증인의 불리한 증언 때문이었다.
그 시절 재일 동포의 신분으로 그렇게 한국의 공안기관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전력으로 오늘날까지 동포사회의 외면을 받고 있는 이들...
그중에 한 사람이 김경진이다.
그는 84년부터 86년까지 보안사에 근무했다.
그러나 갓 결혼하고 한국 유학 중이던 그가 보안사에 처음 끌려 간 것은 간첩 혐의 때문이었다.
뜻밖의 공소보류 처분을 받았지만 그 대신 요구된 것이 보안사 근무였다.
그는 86년 일본으로 건너와 2년간 그가 보고 들은 사실들을 토대로 한 권의 책을 펴낸다.
이 책 '보안사'는 재일 동포 간첩단 사건이 어떻게 조작되는지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그는 보안사 근무가 결코 그의 뜻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 역시 보안사의 희생자일 뿐이었다.
분명한 것은 재일 동포끼리, 희생자들끼리 증오해 왔다는 사실이다.
지금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그들을 나눠놓고 있는 세월, 그것은 무엇이었던가?
해방된 그날, 재일 동포는 민족이란 이름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후 재일 동포의 역사는 분열과 대립으로 점철되게 된다.
1945년 10월 15일 결성된 재일 조선인 연맹, 즉 조련은 좌파가 이끄는 단체였다.
그러나 최초로 결성된 민족 단체로써 동포사회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이듬해 10월, 조련에 대립하는 우익 단체로써 재일 조선인 거류민단이 생겨났으나 그 세력은
극히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조련이 이미 재일 동포 사회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8년 10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다.
그러나 그는 신변의 안전을 이유로 민단이 마련한 대대적인 환영행사에는 참석하지도 않았다.
근본적으로 그는 재일 동포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주일 대표부 초대 대사 정한경이 부임시 받은 훈령은 맥아더 사령부의 힘을 빌려 조련을 해산
시키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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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내고향 아미(峨嵋)
22. 2. 16. 오후 1:07 또 하나의 분단 재일동포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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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는 주일 연합군 총사령부에 대해 조련에 대해 배급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대표
부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재일 조선인 사회에 공산주의 활동을 저지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
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재일 동포들의 최대 관심사였던 민족교육 문제에도 무관심했다.
반면 김일성은 이들의 교육에 적극 지원했다.
1957년 1억 엔이라는 막대한 교육원조 계획을 시작으로 지속적인 송금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재일 동포 사회가 전반적으로 북에 기울게 되는 큰 원인이 됐다.
1965년 한일 양국 사이에 체결된 한일 협정은 재일 동포들에게 한국 정부에 대한 더 큰 실망을 안겨줬다. 일본인 등록 법과 지문날인 제도 등으로 차별을 받아오던 재일 동포들은 법적 지위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체결된 협정은 재일 동포에 대한 차별 철폐나 권리 확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더욱이 재일 동포 2세까지만 영주권을 보장함으로써 한국 정부가 재일 동포의 미래를 포기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경제 협력금 5억 달러에 동포를 팔았다는 것이다.
81년 일본 '제군'지에 실린 김종필의 인터뷰는 당시 한국 정부의 생각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3세가 태어날 때쯤 대부분의 재일 동포들이 일본에 귀화할 것으로 보았고 그러한 방향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재일 동포들에게 그것은 국민을 버리는 정책이었다.
협정 영주권 신청을 둘러싸고 보다 적극적인 체제 경쟁이 시작됐다.
영주권 취득은 한국적 취득을 전제로 하고 있었고 정부는 이 문제를 일본 내 남북대결의 차원
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조련의 후신 조총련은 영주권 반대 운동을 펼쳤고 한국적 대신 기존의 조선적을 그냥 유지하기를 권장했다.
이 시기부터 재일 동포 사회는 조선적과 한국적, 즉 두 개의 국적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적 세대의 70%는 단순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당시까지 민단은 조총련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 이것은 국가 안보상에 위협이었다.
따라서 그가 민단에 요구한 것은 철저한 반공주의와 본국 정부에 대한 100% 순종이었다.
중앙정보부 7국장 김재권, 주일공사로 부임한 그는 71년 민단 단장 선거에 개입함으로써 이 무렵부터 재일 동포 사회에 공작정치가 대두됐음을 알려준다.
김재권의 바램은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우세하던 유석준 후보가 떨어지고 공작시켰던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당선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녹음 날조 사건이다.
그러나 공개한다던 녹음 테이프가 끝내 공개되지 않자, 중앙정보부의 공작적 행태에 대해 반발
이 들끓게 된다.
중앙정보부의 작용은 결국 일파만파가 돼 민단 내부에 반목과 대립만 불러왔다.
민단 내에서 빨갱이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한국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세력까지 몰아낸 결과
였다.
당시 민단 중앙과 동경지부와의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일본 내 중앙정보부 조직의 내역은 다음
과 같다.
정직원이 50명 정도였고, 그 밖에 수당을 받고 일하는 부하가 100~200명 정도 있으며 대사관
및 일본 각지 영사관도 약 20명 정도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 국내에서 한국인이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는지 유리창을 통해 보듯 훤하게 파악하
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곧 재일 동포 사회의 감시자였으며 대립을 격화시킨 장본인들이었다.
많은 인간관계가 중앙정보부의 위협과 고문과 회유 앞에 파괴됐다.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70년대 오사카 총영사를 지냈던 조일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지금 60만의 재일 동포 중에서 북에 연고가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민단계에 속한 사람 중에서도 먼 인척에 있는 사람들이 한두 명은 반드시 얽혀져 있다.
그래서 당시 한국 공안기관에서는 재일 동포라는 존재가 보안적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상
이었다."
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남북공동성명은 감격 그 자체였다.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양 한반도는 온통 환호로 뒤덮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만은 안보 논리가 우선이었다.
몇몇 청년 단체는 7.4공동 성명 지지 행사를 총련과 함께했다.
그리고 그 이유만으로 민단에서 제명 당했다.
민단 내부에서 그러한 공동행사를 중지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5년부터 시작된 조총련 동포 모국 방문단 사업은 재일 동포 역사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는
듯했다.
공개리에 조선적 동포들을 초대하는 이 행사는 놀라운 호응을 얻는다.
조선적 조직 전체가 호응을 일으킬 만큼 그 반향이 컸던 것이다.
참가자들의 민단 전향으로 민단은 대대적으로 확장된다.
재일 동포의 1/3에 지나지 않던 민단 세력이 4/5라는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민단 소속의 많은 수가 결국은 전향자라는 사실을 뜻한다.
전형자...
그들을 주목하자.
민단의 재일 우위가 확실해진 70년대 후반과 80년대에 재일 동포 간첩단 사건은 오히려 더욱
늘어났다는 사실이 그들과 과연 무관할 수 있을까?
재일 동포 모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중앙정보부의 시각은 재일 동포 사회를 분열시켰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간첩들을 양성해 왔다.
'보안사'의 저자 김경진은 그들을 간첩으로 확정 짓기 위한 공소 사실은 대부분 고문으로 만들
어졌다고 폭로하고 있다.
재일 동포는 누구나 조총련계 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거나 가족 중에, 또는 선후배나 친구 중에
총련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역사를 살았다.
고문은 그러한 역사를 간첩의 조건으로 만들어 낸다.
그들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배후에 공작지도원의 존재가 있어야 했다.
일단 반국가단체 구성원이라는 조건이 성립되면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것이라면 모두 다 간첩
으로서의 활동상황이 된다.
입국, 출국은 잠입, 탈출이 되고 친척에게 받은 용돈은 공작금으로 바뀌는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간첩을 만들었는가?
'보안사'에서 그 이유는 너무나 기막힌 것이었다.
그중에는 진짜 간첩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대규모 간첩단 사건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졌고 누군가의 훈장으로 바꾸
어졌다.
이철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이철을 구하는 모임은 동경 변호사협회에 의해 공소장에 대한 알리바이를 확보했으나 재
판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편지에 남아있는 우체국 소인은 그 시기 그가 동경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그의 존재 증명이었
다.
두 번째 입국 날짜로 기록된 73년 8월 2일 그는 구마모토에 있었다.
당시 이철은 가옥이었던 부양 건설의 공사현장에서 이틀간 작업 책임자로 일했고 자신의 필적
으로 직접 현장 일지를 작성했다.
첫 번째 입국 시기로 꼽히는 69년 9월 말부터 두 달 간 그는 오사카 형의 집에서 전기공사를 돕
고 있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증명됐다.
그러나 스물한 가지의 물증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재심 청구는 기각됐고 그가 옥중에 있는 동안 부모님은 차례로 세상을 떴다.
간첩이라 불렸던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실,
당시의 법정은 그 진실을 제대로 살피지 못 했다.
판결문은 공안기관의 자술서를 자구하나 틀림없이 베껴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재일 동포를 분단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은 대한민국 만이 아니었다.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한 그러했다.
김민주의 두 동생은 62년과 66년 각각 북송선을 탔다.
태원은 원하는 대로 김일성 대학에 진학했고 그 근황은 노동 신문에도 실렸다.
둘째 동생의 편지를 통해 마침내 태원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82년이었다.
태원은 78년 7월, 정치범 수용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를 수용소로 보낸 죄목은 간첩 혐의였다.
태원은 심문을 끝까지 버텨내지 못하고 허위 자백을 함으로써 스스로 간첩의 누명을 쓰고 말았
다.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나 간 귀국길이 죽음의 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총련계에 있던 김민주는 이후 국적을 바꾸고 북조선 귀국자 생명과 인권을 수호하는 모임에
앞장서고 있다.
그의 추산으로는 북송선을 탄 후 이렇게 희생된 사람이 10만여 명 중 2만여 명,
남도 북도 서로의 존재를 볼모로 무고한 젊은 청년들을 희생해 왔던 것이다.
일본 땅에는 분단이 없다.
그러나 재일 동포 사회 속에 분단은 있다.
한반도의 분단은 강대국에 의해 강요됐으나 재일 동포들의 분단은 그들의 조국이 강요한 것이
었다.
남의 조국도, 북의 조국도 결국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조국이 그들에게 분열과 대립과 증오를 가르쳤고 아직도 그들은 그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
다.
어떤 눈물이 어떤 참회가 그 어두운 상처를 씻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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