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3

서구의 뿌리 깊은 러시아 혐오 '루소포비아', 그 이유는?

서구의 뿌리 깊은 러시아 혐오 '루소포비아', 그 이유는?

서구의 뿌리 깊은 러시아 혐오 '루소포비아', 그 이유는?

[프레시안 books] 루소포비아: 러시아 혐오의 국제정치와 서구의 위선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  2022-01-25 09:08:00

 
2021년 12월부터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임박" 관련 기사들이 연일 국내외 언론의 국제면을 장식하고 있다. 올들어 우크라이나 사태가 격화되는 와중에 1월 중순 열린 서방측과 러시아 간 일련의 회담도 서로 양측 주장만을 확인하고 성과 없이 끝났다. 그런데 바로 그 직후, 전혀 뉘앙스가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의 핵심 동맹국 독일의 해군 최고지휘관이 "푸틴은 존중을 원하고, 그는 존중받을 만하다, 우크라이나에게 크림반도 반환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측은 난센스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현명하지 못하다"라고 발언했고, 그 발언 뒤 여론의 뭇매를 맞고 즉각 사퇴했다는 것이다.

모든 책임은 러시아가 져야 한다?

독일의 해군 최고지휘관이 얼떨결에 '실언'을 한 것일까? 아니면, 러시아를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미국의 압력을 대놓고 거부하지 못하는 독일 지도부의 속내를 드러낸 것일까? 이 에피소드가 확인해주는 분명한 사실은 국제문제에서 러시아를 비난하는 서방측의 공식 입장이나 주류 언론의 논조와 다른 견해는 서구의 '민주주의국가'에서도 공적으로, 정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런 발언이 실제 근거가 있는가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푸틴은 독재자'이고 '러시아는 팽창주의 국가'이며, 따라서 러시아는 국제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법자'이기 때문에 무슨 사건이든, 어떤 배경을 가졌든, 직접적 원인 제공자가 누구이든 "모든 책임은 러시아가 져야 한다"는 공식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즈음의 우크라이나 긴장 사태를 비롯해 서구와 러시아의 상호관계를 역사적으로, 국제정치적으로, 사회심리적으로 깊이 있게 파헤친 역저가 나왔다. <루소포비아: 러시아 혐오의 국제정치와 서구의 위선>(기 메탕 지음, 김창진·강성희 옮김)이라는 책 이름에서 짐작되듯이, 루소포비아(russophobia)라는 편견의 프리즘을 통해 중세 서방교회(로마 가톨릭)와 동방교회(동방 정교)의 분열 이후 최근까지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천 년의 전쟁'을 수많은 사료와 학술연구 문헌, 그리고 언론 기사 등을 근거로 이른바 '러시아 혐오'라는 주제를 깊이 다루고 있다.

저자는 '서구'에 속하는 스위스 언론인 출신이지만, 서방측에서 일반화된 관점을 과감하게 벗어나 있다. 그가 중세 이후 서구 문명사의 전개와 서구-러시아 관계를 바라볼 때 관심의 초점은 중요한 국제적 사건의 고비마다 서구 지식인과 종교인, 정치가들의 발언과 정책, 보도 등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서구의 이중성과 위선'에 맞추고 있다.

우리는 같은 조건반사를 본다. 러시아를 믿지 않고, 꾸짖고, 비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는 역사가 있고, 객관적인 이유가 있고 특정한 메커니즘과 그것들을 강화하는 요인이 있다. 이것은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고, 끊임없이 유지되며,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나타난다. 언론인들도 본인이 무엇을 하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로 이 행동의 스테레 오타입이 행해진다. 전체적으로 루소포비아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되고 견고해져서 유럽인들의 집단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pp. 143-144)


▲루소포비아: 러시아 혐오의 국제정치와 서구의 위선, 기 메탕 지음, 김창진·강성희 옮김 ⓒ가을의 아침
서구중심주의의 왜곡된 러시아관

저자는 서구 국가들이 러시아를 비난하면서 끌어대는 기준과 자신들에게 비슷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 적용하는 기준이 전연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뉴욕이나 런던, 파리에서 발생하면 해당 테러리스트들은 '극악무도한 야만적 범죄자'로 비난받고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지만, 유사한 사건이 모스크바에서 발생하면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자유의 전사들'로 칭송받고, 비난의 대상은 "그들과 협상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인명피해를 늘린 책임자"로서 푸틴과 러시아 정부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동계올림픽이 열린 캐나다의 밴쿠버에서는 아무리 낡은 전차가 시내를 운행해도 가십거리도 되지 않지만, 러시아의 소치에서 서구 매체들은 심지어 조작된 사진을 인용하면서까지 러시아 당국에 대한 비난거리를 찾기에 혈안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개인의 자유와 인권 신장,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근대 서구 문명의 성취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또 농노제를 유지하면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던 러시아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저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경우 일반인들은 물론 지식인들까지 '정설'로 믿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서구중심주의 관점에서 왜곡되고 편집된 것인지, 얼마나 사실과 진실로부터 거리가 먼 '조작'에 불과한 것인지를 낱낱이 까발린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국제관계사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거나, 또는 잘못 알고 있던 서구 역사를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되는, 매우 흥미롭고도 충격적인 독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이자 저자의 분석 도구인 '루소포비아'란 무엇인가? 번역자인 김창진 교수(성공회대 정치학)의 요약을 옮겨본다.

루소포비아란 '러시아 혐오증 또는 공포증'으로서, 러시아라는 국가와 러시아인 일반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가리킨다. 이는 러시아라는 국가 체제와 대외정책의 어떤 특성을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그것들이 러시아인들의 열등한 민족성으로부터 연원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또 다른 버전의 '오리엔탈리즘'이다.

루소포비아는 서구가 러시아라는 강력한 상대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묶어 놓고 그 행동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프로프간다의 기본틀로 이용된다. 러시아의 평판을 깎아내림으로써 서구인들이 얻게 되는 이념적·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익이 적지 않기 때문에 루소포비아는, 그 사실 근거의 존재나 타당성과 상관없이,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외전략의 메뉴로 자주 등장한다.(옮긴이 서문)

루소포비아는 서구의 차별적 사고방식

이 책은 서문과 결론을 제외하고 전체 3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루소포비아의 성격과 실제 그것이 적용된 최근 사례들을 보여주고, 2부는 루소포비아의 간략한 역사를 중세 종교전쟁, 프랑스와 영국, 독일, 미국 등 서구의 주요 4개국에서 루소포비아 현상의 발생과 전개, 그 특성을 논하고 있다. 3부에서는 서구의 언론과 지식인, 정치가들이 어떻게 교묘한 언어 조작을 통해 루소포비아를 정당화하고, 확산시키는가를 보여주면서 그 대응 방법을 논하고 있다.

500쪽 분량이 넘는 이 책 곳곳에서 저자는 루소포비아는 단순한 책략이 아니라 서구인들의 차별적 사고방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중세 교회의 분열은 서방의 잘못이지 동방의 잘못이 아니다. 비잔티움 제국과 러시아가 서구 문명을 침략자들로부터 구원하는 역할을 했으나 서구는 배은망덕으로 보답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1815년 러시아가 나폴레옹을 꺾고 유럽의 강대국으로 떠오르자, 유라시아 패권 쟁취에 위협을 느낀 영국이 러시아의 팽창주의 신화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2차 세계대전 기간 파시즘에 대한 승리에서 소비에트 인민이 수행한 역할을 서구가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세계 정복을 위해 유라시아 심장부(러시아)를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미국은 '소련 공산주의'라는 적이 사라지자 '러시아'라는 적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합법적인 기존 정부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친서방 정부가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계 주민들에게 러시아어 사용을 금지함으로써 발생했다.

위와 같은 저자의 논점들은 이 책 맨 앞부분의 <차례>만 살펴봐도 그 맥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작게는 최근의 우크라이나 사태, 좀 더 크게는 서구 문명사와 러시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더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란 생각으로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kimsphoto@hanmail.net

김재명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지난 10여 년간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하며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에서 십수년간 기자로 활동했으며,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이후 국민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아 현재 성공회대학교의 겸임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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