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키아게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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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히키아게샤(引揚者 / ひきあげしゃ)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까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만주, 대만 등에서 거주했다가 귀국한 일본인을 이르는 표현이다. 이들 중의 일부분은 해당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녀들이다.
한국어 독음으론 인양자라고 읽는데, 한국어에서 인양이라는 표현은 침몰한 배 등을 끌어올릴 때로 한정해서 쓰는 말이다. 의미를 살려서 번역하자면 귀향자, 귀국자. 직설적으로 번역하자면 (몸을)빼 낸 사람 정도가 된다. 관동군이나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온 일본인들은 엄밀히는 히키아게샤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들은 재향군인으로 분류되는데, 정작 관동군 중 상당수는 일본군이 해체되는 바람에 민간인 자격으로 귀국한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아니면 소련군한테 잡히지 않으려고 민간인 행세를 했거나. 그리고 관동군이나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한 일본인 남성이 현지의 일본계 이주민 여성이나 비일본인(주로 식민지 토착민) 여성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가 일본 제국 패망 후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간 경우는 아버지와 달리 히키아게샤로 분류된다. 관동군이나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온 이들 중에서도 출신지가 일본 본토가 아니라 일본 제국 식민지였던 경우에는 히키아게샤로 분류된다.
한국어 독음으론 인양자라고 읽는데, 한국어에서 인양이라는 표현은 침몰한 배 등을 끌어올릴 때로 한정해서 쓰는 말이다. 의미를 살려서 번역하자면 귀향자, 귀국자. 직설적으로 번역하자면 (몸을)빼 낸 사람 정도가 된다. 관동군이나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온 일본인들은 엄밀히는 히키아게샤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들은 재향군인으로 분류되는데, 정작 관동군 중 상당수는 일본군이 해체되는 바람에 민간인 자격으로 귀국한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아니면 소련군한테 잡히지 않으려고 민간인 행세를 했거나. 그리고 관동군이나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한 일본인 남성이 현지의 일본계 이주민 여성이나 비일본인(주로 식민지 토착민) 여성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가 일본 제국 패망 후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간 경우는 아버지와 달리 히키아게샤로 분류된다. 관동군이나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온 이들 중에서도 출신지가 일본 본토가 아니라 일본 제국 식민지였던 경우에는 히키아게샤로 분류된다.
2. 숫자[편집]
3. 등장 배경[편집]
이들은 한탕 해보자는 생각이나 본토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식민지로 넘어온 사람들이나 당시 제국주의에 협조하던 일본 대기업들의 회사원이나 그 가족들로 구성됐다. 군인의 가족으로 넘어온 사람도 많았다.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 속 부관연락선[2]에 탑승한 일본인들도 바로 이런 자들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한반도의 경우는 1910년대까지는 거의 상인들과 주재원[3]의 가족 위주였으나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반 농민, 노동자와 식솔들도 많이 넘어온다. 특히 일본의 만주 침공이 가속화되면서는 식민지 정착민이 일종의 붐이 될 정도였는데, 일제가 정착민들에게 땅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땅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 및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을 통해 조선인들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한반도의 경우는 1910년대까지는 거의 상인들과 주재원[3]의 가족 위주였으나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반 농민, 노동자와 식솔들도 많이 넘어온다. 특히 일본의 만주 침공이 가속화되면서는 식민지 정착민이 일종의 붐이 될 정도였는데, 일제가 정착민들에게 땅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땅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 및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을 통해 조선인들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었다.
"자네가 가겠다면 나도 가겠네. 흔들리는 일본에선 그만 살겠네..."
이들 중 초기에 넘어온 일부는 조선에서 큰 상인이나 지주가 되어 소득을 누렸지만 1930년대에 넘어온 계층은 그렇지 못했다. 식민지도 이미 선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끼리 경쟁하고 있던 상황이라 이들은 소상공인 등이 되어 일본인이 많은 도시에 거주했다.
문제는 당시 일본제국은 서양을 본따 식민지를 만들 생각만 했지, 그 식민지의 일본인들에 대한 정책을 전혀 갖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사점령한 이후에도 식민지와 본토의 통치에 대한 개념,질서 정리도 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단절되었고, 본토에서 이주민을 보내놓고도 기본적인 국적관리조차 제대로 시키지 않은채[4]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들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불법점거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문제는 당시 일본제국은 서양을 본따 식민지를 만들 생각만 했지, 그 식민지의 일본인들에 대한 정책을 전혀 갖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사점령한 이후에도 식민지와 본토의 통치에 대한 개념,질서 정리도 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단절되었고, 본토에서 이주민을 보내놓고도 기본적인 국적관리조차 제대로 시키지 않은채[4]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들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불법점거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4. 사례[편집]
4.1. 한국의 히키아게샤[편집]
한국에서는 이때 남은 일본인들의 땅이나 거주지(적산가옥)나 재산(적산)등은 전부 몰수되어 신한공사 등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불하되었다. 1950~60년대 일본에서는 이 때 몰수된 재산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정치인들의 발언이 몇 번 있었고, 반대로 한국에서는 일제 식민지배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기에 후일 이런 것을 다 퉁치기로 하고 한일기본조약을 맺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그 외에 일본인들이 급하게 떠나느라 남겼지만 재산이 되지 못할만한 것들은 그냥 방치되거나 6.25 전쟁통에 대부분 훼손되었다. 가령 부산광역시의 아미동 비석마을은 바로 일본인 공동묘지 자리 위에 6.25 전쟁 피난민촌이 형성되어, 일본인들의 비석을 마을 계단, 건물 부재 등으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비석마을에 가면 쇼와 몇 년에 누가 죽었다 같은 일본어가 쓰인 비석이 계단으로 쓰이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히키아게샤들은 당연히 일본으로 귀환해야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1945년 일본 정부는 항복하여 실질적으로 GHQ의 하부 기관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이들 히키아게샤들의 귀환에서 일본 정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5]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자력으로 일본으로 복귀해야 했다. 그나마 미군이 제공하는 송환선에 타면 미군이 귀환과정을 안전하게 지켜줬지만, 미군 송환선 탑승시에는 현금을 1000엔이상 소지할 수 없었고 수하물 무게도 엄격하게 제한했기 때문에 한푼이라도 더 챙기고자 밀선을 타고 귀환하는 사람이 많았다.[6] 그 과정에서 식민지배를 받던 피식민지 사람들의 린치나 약탈, 강간이 일부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원래 북한에 거주하던 이들이나 중국/만주에서 피난하다 북한에서 발이 묶인 히키아게샤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미군정 아래에서 안전히 철수한 남한 지역[7]과는 달리 이들은 소군정의 송환이 지연되고 소련군의 만행에 시달리면서 집단거주지에서 영양실조, 감염병 등으로 수천명이 사망했으며,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력으로 38선을 넘어 탈출한 이들 가운데서도 귀환 과정의 굶주림, 피로, 추위를 견디지 못한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
한편 38선 이남에 체류했던 히키아게샤들은 거의 대부분 무사히 철수했다. 한국이 일제강점기 와중에 겪은 일들을 감안하면, 이들이 집결한 곳이 부산 용두산공원 등 치안력이 유지되는 도시나 행정 소재지였기에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태평양전쟁 말미에 패전이 가까워 보이자 건국연맹 등과 조선총독부의 밀교섭으로 다수의 일본군과 히키아게샤가 안전히 철수할 수 있었다는 야사가 있다. 시골일 경우 히키아게샤 대다수가 지주와 그 하수인들이었기 때문에 보복 행위가 심했다고 하고,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 지방의 보복이 가장 심했다고 전해진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들도 많았고, 아예 일본인 이주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이루고 본적을 한국으로 둔 사람들도 있었는데, 패전 후 철수하게 되면서 그 마을은 사라졌고, 그들의 본적은 문서상에만 존재하는 곳이 되었다. 관련된 다큐멘터리도 국내에서 방송된 적이 있으며, 그 마을 출신자들도 고령이지만 아직 일본에 있다. 불이촌(不二村)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곳이었다. 일본어 독음으로는 후지촌이었다고 한다.
인터뷰에 출연한 그 마을 출신 노인이 말하길, 자신들은 그곳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일본으로 강제로 귀국할 때 자신들의 고향을 빼앗긴 마음이었고 억울한 생각도 있었지만, 후에 자신들의 고향인 그 마을 또한 조선인에게 부당하게 빼앗은 땅과 재산으로 이루어진 침탈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고 나온다.
그 외에도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이, 수십 년이 지난 현재 동창회가 열리면 일본에서부터 한국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역사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학교들을 보면 동창회 관련해서 가끔 목격담이 나오기도 하고, 일제강점기부터 쓰던 본관 건물을 새로 짓기로 하자 웬 양복 입은 구부정한 할아버지들이 찾아와서 쳐다보니 일본인이었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 일본인 졸업생들이 귀국 당시라며 보여준 사진을 보면,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이 양쪽으로 도열해서 서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사례는 마산고등학교 이야기이다.
물론 일본 본국으로 철수하지 않고 그대로 한국에 남아서 귀화해 한국 국적을 가지게 된 일본계 한국인도 소수 있다. 실제로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깡통시장[8]에는 "일본영감"이라는 유명한(?) 히키아게샤가 1970년대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핏줄이나 본래 국적은 일본이지만 태어난 곳도 조선의 마산이고 일본에 연고도 없는 날품팔이 노동자라서 그냥 그대로 눌러앉았다고 한다. 또한 1960년대 한국에서 근무한 일본인 외교관의 수기에 따르면, 한일수교 후 한국인과 결혼했다가 사별한 일본인 여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다고 나온다. 주한일본대사관에서는 그런 여성들을 찾아내서 귀국시키곤 했는데, 그들 중 몇몇은 오히려 일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 마을에서 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재한일본인 처들이 결성한 모임이 바로 부용회(芙蓉會)이다. 한때는 이 모임의 사람들이 약 4,000 ~ 5,000명에 달했다고 하나 지금은 90대 노인 분들만 남아 계시고 그들 대부분이 경주시의 나자레원에서 돌봄을 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재한일본인 항목과 링크를 참조.
특히 조선(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히키아게샤 자녀들은 한국인 입장에서 복잡미묘한 주제이다. 정작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서 조선에서 왔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했다고 한다.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만 17살에 일본으로 귀국한 일본인 여성은 수기에서 밝히길 자신이 노인이 될 때까지 일본에서 살아도 자신을 키워준 조선인 유모들과 대구의 풍경을 평생 잊지 못하고 실향민[9]이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으며, 자신의 남동생은 일본으로 이주한 이후 낯선 일본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했다고 하였다.
1983년 KBS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에서도 해방 후에도 조선에 남아 고생하며 살아온 삼남매#가 등장하였는데, 여동생이 명확하게 "일본인이라고 쫓겨다니면서 굴에서 피신했다"는 얘기를 했음에도 MC들은 "일본 이름을 아직도 쓰고 있을 정도로 아픈 과거의 산 증인이다"라고 정리하고 넘어갔다. 사실 이 방송에서 일본식 이름으로 가족을 찾던 출연자들 상당수가 히키아게샤로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 후 귀환한 사람들이었다. MC는 일본인 후손이 조선에 남아 살고 있으리라 짐작조차 못해서 여동생의 발언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그리고 이 남매의 부모가 모두 일본인인지는 이 영상만으론 확실하지 않다. 외삼촌이 대한민국군 중령이었다고 언급했으므로 어머니는 한국인이고 아버지가 일본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 추측이 맞다면 남매의 국적은 일본이다.[10]
그런 인식이 이들의 문학이나 미디어에서도 드러나고 있어 동정심이 들기는 하지만, 한편 이들이 식민지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식민자(colonizer)들임을 고려하면 마냥 동정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이들에 대해 다룬 책으로는 《조선을 떠나며》가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연식은 이후 학술대회에서 재조일본인은 '조선반도는 원래 일본 땅'인 줄 아는 등, 자신들이 식민자라는 자각조차 없었기 때문에[11] 일본에서 히키아게샤 귀환담의 수용이 피해자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발표했다.(기사1, 기사2, 기사3, 기사4)
그 외에 일본인들이 급하게 떠나느라 남겼지만 재산이 되지 못할만한 것들은 그냥 방치되거나 6.25 전쟁통에 대부분 훼손되었다. 가령 부산광역시의 아미동 비석마을은 바로 일본인 공동묘지 자리 위에 6.25 전쟁 피난민촌이 형성되어, 일본인들의 비석을 마을 계단, 건물 부재 등으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비석마을에 가면 쇼와 몇 년에 누가 죽었다 같은 일본어가 쓰인 비석이 계단으로 쓰이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히키아게샤들은 당연히 일본으로 귀환해야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1945년 일본 정부는 항복하여 실질적으로 GHQ의 하부 기관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이들 히키아게샤들의 귀환에서 일본 정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5]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자력으로 일본으로 복귀해야 했다. 그나마 미군이 제공하는 송환선에 타면 미군이 귀환과정을 안전하게 지켜줬지만, 미군 송환선 탑승시에는 현금을 1000엔이상 소지할 수 없었고 수하물 무게도 엄격하게 제한했기 때문에 한푼이라도 더 챙기고자 밀선을 타고 귀환하는 사람이 많았다.[6] 그 과정에서 식민지배를 받던 피식민지 사람들의 린치나 약탈, 강간이 일부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원래 북한에 거주하던 이들이나 중국/만주에서 피난하다 북한에서 발이 묶인 히키아게샤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미군정 아래에서 안전히 철수한 남한 지역[7]과는 달리 이들은 소군정의 송환이 지연되고 소련군의 만행에 시달리면서 집단거주지에서 영양실조, 감염병 등으로 수천명이 사망했으며,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력으로 38선을 넘어 탈출한 이들 가운데서도 귀환 과정의 굶주림, 피로, 추위를 견디지 못한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
한편 38선 이남에 체류했던 히키아게샤들은 거의 대부분 무사히 철수했다. 한국이 일제강점기 와중에 겪은 일들을 감안하면, 이들이 집결한 곳이 부산 용두산공원 등 치안력이 유지되는 도시나 행정 소재지였기에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태평양전쟁 말미에 패전이 가까워 보이자 건국연맹 등과 조선총독부의 밀교섭으로 다수의 일본군과 히키아게샤가 안전히 철수할 수 있었다는 야사가 있다. 시골일 경우 히키아게샤 대다수가 지주와 그 하수인들이었기 때문에 보복 행위가 심했다고 하고,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 지방의 보복이 가장 심했다고 전해진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들도 많았고, 아예 일본인 이주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이루고 본적을 한국으로 둔 사람들도 있었는데, 패전 후 철수하게 되면서 그 마을은 사라졌고, 그들의 본적은 문서상에만 존재하는 곳이 되었다. 관련된 다큐멘터리도 국내에서 방송된 적이 있으며, 그 마을 출신자들도 고령이지만 아직 일본에 있다. 불이촌(不二村)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곳이었다. 일본어 독음으로는 후지촌이었다고 한다.
인터뷰에 출연한 그 마을 출신 노인이 말하길, 자신들은 그곳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일본으로 강제로 귀국할 때 자신들의 고향을 빼앗긴 마음이었고 억울한 생각도 있었지만, 후에 자신들의 고향인 그 마을 또한 조선인에게 부당하게 빼앗은 땅과 재산으로 이루어진 침탈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고 나온다.
그 외에도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이, 수십 년이 지난 현재 동창회가 열리면 일본에서부터 한국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역사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학교들을 보면 동창회 관련해서 가끔 목격담이 나오기도 하고, 일제강점기부터 쓰던 본관 건물을 새로 짓기로 하자 웬 양복 입은 구부정한 할아버지들이 찾아와서 쳐다보니 일본인이었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 일본인 졸업생들이 귀국 당시라며 보여준 사진을 보면,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이 양쪽으로 도열해서 서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사례는 마산고등학교 이야기이다.
물론 일본 본국으로 철수하지 않고 그대로 한국에 남아서 귀화해 한국 국적을 가지게 된 일본계 한국인도 소수 있다. 실제로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깡통시장[8]에는 "일본영감"이라는 유명한(?) 히키아게샤가 1970년대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핏줄이나 본래 국적은 일본이지만 태어난 곳도 조선의 마산이고 일본에 연고도 없는 날품팔이 노동자라서 그냥 그대로 눌러앉았다고 한다. 또한 1960년대 한국에서 근무한 일본인 외교관의 수기에 따르면, 한일수교 후 한국인과 결혼했다가 사별한 일본인 여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다고 나온다. 주한일본대사관에서는 그런 여성들을 찾아내서 귀국시키곤 했는데, 그들 중 몇몇은 오히려 일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 마을에서 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재한일본인 처들이 결성한 모임이 바로 부용회(芙蓉會)이다. 한때는 이 모임의 사람들이 약 4,000 ~ 5,000명에 달했다고 하나 지금은 90대 노인 분들만 남아 계시고 그들 대부분이 경주시의 나자레원에서 돌봄을 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재한일본인 항목과 링크를 참조.
특히 조선(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히키아게샤 자녀들은 한국인 입장에서 복잡미묘한 주제이다. 정작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서 조선에서 왔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했다고 한다.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만 17살에 일본으로 귀국한 일본인 여성은 수기에서 밝히길 자신이 노인이 될 때까지 일본에서 살아도 자신을 키워준 조선인 유모들과 대구의 풍경을 평생 잊지 못하고 실향민[9]이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으며, 자신의 남동생은 일본으로 이주한 이후 낯선 일본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했다고 하였다.
1983년 KBS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에서도 해방 후에도 조선에 남아 고생하며 살아온 삼남매#가 등장하였는데, 여동생이 명확하게 "일본인이라고 쫓겨다니면서 굴에서 피신했다"는 얘기를 했음에도 MC들은 "일본 이름을 아직도 쓰고 있을 정도로 아픈 과거의 산 증인이다"라고 정리하고 넘어갔다. 사실 이 방송에서 일본식 이름으로 가족을 찾던 출연자들 상당수가 히키아게샤로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 후 귀환한 사람들이었다. MC는 일본인 후손이 조선에 남아 살고 있으리라 짐작조차 못해서 여동생의 발언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그리고 이 남매의 부모가 모두 일본인인지는 이 영상만으론 확실하지 않다. 외삼촌이 대한민국군 중령이었다고 언급했으므로 어머니는 한국인이고 아버지가 일본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 추측이 맞다면 남매의 국적은 일본이다.[10]
그런 인식이 이들의 문학이나 미디어에서도 드러나고 있어 동정심이 들기는 하지만, 한편 이들이 식민지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식민자(colonizer)들임을 고려하면 마냥 동정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이들에 대해 다룬 책으로는 《조선을 떠나며》가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연식은 이후 학술대회에서 재조일본인은 '조선반도는 원래 일본 땅'인 줄 아는 등, 자신들이 식민자라는 자각조차 없었기 때문에[11] 일본에서 히키아게샤 귀환담의 수용이 피해자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발표했다.(기사1, 기사2, 기사3, 기사4)
4.2. 중국의 히키아게샤[편집]
중국 쪽에선 그냥 중국인 행세를 하며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알던 중국인에게 맡기고 나중에 데리러 돌아오겠다고 했다고도 한다. 이런 식으로 중국에 잔류한 일본인 고아가 2,700명에 이를 정도였고, 중국인과 결혼한 일본인들도 그냥 남았다. 그 숫자도 4,000명 정도 됐다고 한다. 그 외에 그냥 중국인 행세하고 남은 일본인은 더 있을 걸로 보인다. 남은 일본인들 중 일부는 홍위병들에게 문화대혁명 때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중일수교가 복구되면서 일본 정부는 이들을 일본으로 귀국하도록 시도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자기가 일본인인지도 몰랐고 90% 정도는 일본어도 몰랐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과 혈연 관계가 있으면 영주권을 주는 법률에 의해 한 사람의 일본인과 친척 관계를 맺은 수십 명의 중국인들이 넘어오는 일도 있었다. 짐작한 대로 이들은 차별당했고 일부는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일본어판 위키에 따르면 이들의 2세, 3세가 일본에서 야쿠자가 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는 걸 보면 가이진(外人) 인식은 완전히 불식되지 않은 듯하다.
일본인 3,000명이 국부군 및 홍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도 있었다. 여기에 조선인민의용군이 개입되어 있다는 의혹도 있다.근데 출처가 그런데 이 통화사건은 잔류했던 일본 관동군이 먼저 공격을 한 것이었다. 학살되었다고 하는 일본인들은 중국군의 진압과정과 그 후에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인 3,000명이 국부군 및 홍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도 있었다. 여기에 조선인민의용군이 개입되어 있다는 의혹도 있다.
4.3. 대만의 히키아게샤[편집]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도 꽤 많은 일본인들이 대만으로 이민왔는데, 일본의 2차대전 패전으로 인해 수많은 히키아게샤가 발생했다.
1945년 패전 당시 대만에는 군인과 군속을 제외하고 약 28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거주 역사가 약 50년 가까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대만에서 태어난 일본인도 있었다. 이들을 일본어로 완세이(湾生), 중국어로 완성(灣生)이라 한다.
패전 이후 국민정부는 1945년에서 1949년에 걸쳐 약 48만 명(군인, 군속 포함)의 일본인을 일본 본토로 귀환시켰다. 이들 중 일부는 미처 귀환하지 못하던 사이에 2.28 사건에 휘말려 희생되거나 본성인에 동화되었다.
현대 대만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비교적 호의적인 대일관과 맞물려 이들에 대한 인식이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다.[12] 특히 대만 동부에 정착했던 일본인들은 동부에 이미 거주하고 있었던 일부 대만 원주민 민족을 빼면 한족 대만인과의 갈등 요소가 적었고, 환경이 열악했던 당시 대만 동부에서 고생해가며 자신들의 농장과 마을을 구축해왔던 것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편으로 이 때 대만에서 태어난, 현재 80대를 넘은 일본인들은 많은 수가 자신의 고향을 대만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현재 대만에서는 이들의 고향 방문 사업을 돕는 시민단체도 있다.
2015년에는 식민지 대만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의 고향 방문 스토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인 완성후이자(灣生回家)가 개봉된 바 있다.
1945년 패전 당시 대만에는 군인과 군속을 제외하고 약 28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거주 역사가 약 50년 가까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대만에서 태어난 일본인도 있었다. 이들을 일본어로 완세이(湾生), 중국어로 완성(灣生)이라 한다.
패전 이후 국민정부는 1945년에서 1949년에 걸쳐 약 48만 명(군인, 군속 포함)의 일본인을 일본 본토로 귀환시켰다. 이들 중 일부는 미처 귀환하지 못하던 사이에 2.28 사건에 휘말려 희생되거나 본성인에 동화되었다.
현대 대만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비교적 호의적인 대일관과 맞물려 이들에 대한 인식이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다.[12] 특히 대만 동부에 정착했던 일본인들은 동부에 이미 거주하고 있었던 일부 대만 원주민 민족을 빼면 한족 대만인과의 갈등 요소가 적었고, 환경이 열악했던 당시 대만 동부에서 고생해가며 자신들의 농장과 마을을 구축해왔던 것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편으로 이 때 대만에서 태어난, 현재 80대를 넘은 일본인들은 많은 수가 자신의 고향을 대만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현재 대만에서는 이들의 고향 방문 사업을 돕는 시민단체도 있다.
2015년에는 식민지 대만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의 고향 방문 스토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인 완성후이자(灣生回家)가 개봉된 바 있다.
4.4. 러시아의 히키아게샤[편집]
4.5. 남양 군도의 히키아게샤[편집]
4.6. 동남아시아의 히키아게샤[편집]
동남아시아의 구 일본 제국령 지역들이 동아시아의 구 일본 제국령 지역에 비해 일본 제국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짧다 보니 일본의 민간인이 이주한 경우보다는 일본군 병사들이 현지 원주민 여성과의 사이에서 얻은 혼혈아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4.7. 혼혈 히키아게샤[편집]
4.8. 류큐인 히키아게샤[편집]
일본 제국 시절 현대 일본국 영토를 제외한 구 일본 제국령 지역에서 살다가 일본 제국 패망 이후 오키나와 본토로 돌아가거나 일본 본토로 다시 이주한 류큐인들이다. 오늘날 류큐인들이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쪽도 넓은 의미에서는 히키아게샤로 불린다. 특히 오키나와와 기후가 유사한 제주도, 대만, 구 남양 군도 지역에 류큐인 이주민들이 많았다. 류큐인 히키아게샤 중 대표적인 인물로 위의 구 남양 군도 출신 문단에 나온 데루야 간토쿠가 있다.
5. 일본으로 돌아간 히키아게샤[편집]
식민 지배에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 입장에선 가해자였지만, 정작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서 식민지에서 살다 왔고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서투르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했다. 패전 직후에 일본에선 일본 제국주의를 연상시키는 히키아게샤에 대한 언급을 영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차별에는 히키아게샤들의 출신이 하류층이었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제는 자국 내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빈농, 부락민들을 모아 집단 이민단을 내보내곤 했다. 그러니까 히키아게샤들은 이미 당시 일본에 있을 때부터 하층민이었으므로, 귀국 후라고 해서 그 대우가 특별히 달라질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당장 조선을 떠나며란 책에서도 이들이 귀국한 뒤 겪어야 했던 실상들이 상세히 적혀 있다. 이들의 경험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수기문학이 한동안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한 어릴 때부터 장기간 식민지에 체류하며 성장한 경우에는 그 나라에 문화적으로 동화된 상태라서 귀국 후에도 문화적 차이 등으로 인해 차별 대우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문에 몇몇 가난한 히키아게샤들은 야쿠자같이 범죄로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현재까지도 일본 대학에서는 입시 때 히키아게샤와 그 자손에 대한 특별전형을 실시한다.
일본 현지에서도 한동안 언급을 영 기피해왔고, 해외에서 이들을 다룬 문헌이나 연구는 극히 드물다. 그나마 대만에서는 좀 언급이 되는 편.
이러한 차별에는 히키아게샤들의 출신이 하류층이었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제는 자국 내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빈농, 부락민들을 모아 집단 이민단을 내보내곤 했다. 그러니까 히키아게샤들은 이미 당시 일본에 있을 때부터 하층민이었으므로, 귀국 후라고 해서 그 대우가 특별히 달라질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당장 조선을 떠나며란 책에서도 이들이 귀국한 뒤 겪어야 했던 실상들이 상세히 적혀 있다. 이들의 경험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수기문학이 한동안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한 어릴 때부터 장기간 식민지에 체류하며 성장한 경우에는 그 나라에 문화적으로 동화된 상태라서 귀국 후에도 문화적 차이 등으로 인해 차별 대우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문에 몇몇 가난한 히키아게샤들은 야쿠자같이 범죄로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현재까지도 일본 대학에서는 입시 때 히키아게샤와 그 자손에 대한 특별전형을 실시한다.
일본 현지에서도 한동안 언급을 영 기피해왔고, 해외에서 이들을 다룬 문헌이나 연구는 극히 드물다. 그나마 대만에서는 좀 언급이 되는 편.
6. 기타[편집]
군만두가 만주계 히키아게샤들이 가지고 들어온 문화라는 설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군만두는 일본 음식치고 별나게 마늘이 들어가서 '군만두를 먹으면 입에서 마늘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인식이 강한데, 정작 중국 쪽 만두 문화에는 마늘을 안 넣는다(...). 일본에서 군만두에 마늘을 넣게 된 것은 돼지 키우기 힘든 기후인 만주/북경 지역[13]에서는 만두에 양고기를 많이 썼는데 질 떨어지는 늙은 양의 고기를 만두에 넣으면서 양고기 냄새에 익숙하지 않던 일본인들이 그 누린내를 감추기 위해 마늘을 듬뿍 넣기 시작한 게 시초이기 때문. 찐만두를 재차 기름에 튀기듯 굽는 방식이나(중국 본토에서 딤섬을 제외한 식사용 만두는 거의 대부분 물만두로 먹는다.) 마늘을 넣는 방식이나 만주계 히키아게샤들을 가교 삼아 일본에 정착하게 된 스타일.
명란젓도 부산에 살던 일본인이 일본에 돌아가서 전파한 음식 중 하나이다.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과도 관련되어 있다. 알박기 문서와 나리타 국제공항/건설 역사 문서 참고.
명란젓도 부산에 살던 일본인이 일본에 돌아가서 전파한 음식 중 하나이다.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과도 관련되어 있다. 알박기 문서와 나리타 국제공항/건설 역사 문서 참고.
7. 실존 인물[편집]
7.1. 한국 출신[편집]
- 망절일랑(網切一郞, 1942-2012) - 도간 망절씨의 시조. 일본식 이름은 아미키리 이치로. 경상남도 진해에서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세한 건 망절 문서 참고.
- 즙간부(辻幹夫) - 성진 즙씨의 시조. 일본식 이름은 츠지 미키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낳았다. 상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 코바야시 치토세 (小林千登勢, 1937-2003) - 배우로 경성 출생. 자전소설인 별님의 레일이 1993년에 애니화되었다.
- 후지이 히데토(藤井秀人(가명) 1930?-?)[16] - 1945년 해방 당시 가족과 함께 춘천에 살고 있던 일본인으로, 일본으로 돌아갈 길이 끊겨서 '일본에서 막 귀국한 한국인' 행세를 하면서 연명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6.25 전쟁 때 인민군으로 징집되었다가 전투에서 낙오되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일본인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신 1953년 6월에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수용소에서 풀려나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역으로 가는 도중에 병역기피자들을 색출하는 체포조에게 체포되어 다시 국군에 강제입영되었다. 이 전후 사정을 받아들인 당시 대한민국 외무부에서 귀국허가를 함으로써 그를 근거로 1955년 10월에 제대하여 1956년 2월에야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히키아게샤가 한군두까지.
7.2. 중국 출신[편집]
- 미야우치 히로시(宮内洋, 1945-) - 일본의 유명 배우. 만주 봉천성 출생.
- 아라키 토요히사(荒木豊久, 1943-) - 일본의 가수 겸 작사가. 만주 다롄 출생. めだかの兄妹의 작사가로 유명하다.
- 야나미 조지(八奈見乗児, 1931-2021) - 일본의 성우. 랴오닝성 푸순시 출생.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 오자와 세이지(小澤征爾, 1935-) - 일본의 유명 지휘자, 만주 펑텐(선양) 출생.
- 카리야 테츠(雁屋哲, 1941-) - 일본의 만화가. 중국 베이징 출생.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 하마 케이스케(浜圭介, 1946-) - 일본의 가수 겸 작사가. 만주 출생. 오쿠무라 치요의 남편이다.
7.3. 러시아 출신[편집]
- 호리 타츠야
- 후쿠토미 세츠오
7.4. 구 남양 군도 출신[편집]
8. 가상 인물 및 관련 작품[편집]
- 허준의 소설 잔등 - 2016학년도 9월 모의평가 A형에 해당 부분이 출제 되었으며 작품 전체에서는 주인공이 히키아게샤들을 증오하는 소년과 동정하는 국밥집 할머니를 만나지만 해당 지문에서는 할머니가 젊은 시절 남편을 잃고 독립운동하는 아들까지 잃은 불행한 인물이지만 거지가 되버린 잔류 일본인들은 동정하고 관대하게 여기는 시각이 드러난 장면이 나왔다.
- 명가의 술 2부 - 가난한 소작농에게 만주국의 토지를 준다며 만주로 이주시키는 상황이 나온다.
- 요코 이야기 - 재조선 일본인을 다루긴 하지만, 일본인의 입장에 치우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어 주의가 필요한 책이다.
- 조선을 떠나며 - 재조선 일본인들의 회고록.
- 흐르는 별은 살아있다 - 남편이 징병당해 소식이 끊긴 만주국 히키아게샤가 자녀들을 데리고 만주 장춘에서 도보로 남하, 선천과 부산을 거쳐 1년만에 일본으로 귀환하는 여정을 다룬 회고.
- 고바야시 마사키의 1962년작 영화인 인간의 조건 3부는 관동군으로 참전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주인공 카지의 관점에서 히키아게샤 이야기도 일부 다루고 있다.
- 게임 용과 같이 제로: 맹세의 장소의 핵심 조연인 타치바나 테츠와 마키무라 마코토(본명은 샤오헤이) 남매 역시 히키아게샤 출신.[20] 타치바나는 집안 출신이 출신이라 사회적 냉대 속에 15세 때부터 삼합회에 들어갔다는 언급이 있고, 중국인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걸 참다 못해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왔지만 일본에선 되려 중국인 취급 받았다는 등 여간 고생이 심한 게 아니었다는 언급이 있다. 마코토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빠를 찾으러 왔다가 그 오빠의 오른팔인 오다 준[21]에게 실명+인신매매 크리로 인생 막장 테크를 타나 싶다가 때마침 팔려간 조직과 세력권 전쟁을 벌이던 본토 삼합회 청부업자였던 리웬하이에게 우연히 발견되어서 거두어졌다.[22] 이 남매의 사연들을 듣고 있자면 4편의 불행 남매였던 사에지마 타이가·사에지마 야스코 남매 이상으로 안구에 습기가 찬다.[23] 거기다 타치바나는 친동생과 해후하지도 못한 채 결국...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초신성 플래시맨 - 1980년대 당시 중국에서 일본으로 귀국한 히키아게샤 고아를 모티브로 한 작품.
- 이세계 식당에서 현 점주의 할아버지, 즉 선대 점주가 대륙에서 일본으로 귀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현길언의 <전쟁놀이>, <그때 나는 열한살이었다>, <못자국> 3부작 - 제주도 출신 소년 세철의 유년시절을 다룬 소설로 전쟁놀이는 일제 패망 직전의 시점을, 그때 나는 열한살이었다는 4.3 사건을, 못자국은 6.25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중 그때 나는 열한살이었다에서 일본인 교장 일가를 숨겨주는 내용이 나온다.
- 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 - 츈 메이유이는 일제 치하의 중국에서 살던 일본인의 후손이다.
- 고바야시 마사루의 <포드 1972>, <쪽발이> - 작가부터가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히키아게샤이다. <포드 1972>는 패전 후 폐병에 걸린 채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는 한 일본군의 회상이 주 내용이다. 어린 시절 조선인들과 함께 살던 마을에 한 터키인이 세련된 포드 자동차를 타고 등장했으나 그의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기에는 그들이 조선인들과 친하게 지냈기에 위계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생각에 친해질 수 없었다. 몇몇 사건을 겪으며 터키인을 얕보려고도, 그의 딸에게 다가가보려고도 하지만 결국 소외감으로 그의 딸을 상처입힌다. 터키인이 바로 용서(터키인은 선교사였으므로 기독교적 구원에 해당)하였음에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후 참전을 하기 위한 겸 잠시 들른 고향(물론 어린시절을 보낸 한반도의 한 마을)에서 전에 식모살이를 하던 조선인 아낙을 만났을 때 터키인은 항일세력의 스파이로 의심받아 자동차를 타고 떠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회상 끝) 그 모든 이야기를 병이 걸린 자신을 돌봐주던 위생병에게 털어놓고 "터키인이든 일본인이든 다 떠나가도 남은 사람들은 잘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며 멀어져가는 포드 자동차를 망상, 죽음을 예감한다는 내용.
9. 비슷한 경우[편집]
히키아게샤와 유사한 사례는 20세기 전반까지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던 식민제국 대다수가 겪은 문제들이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피에 누아르(Pied-Noir)가 있다. '검은 발'이라는 뜻을 가진 이들은 식민지 알제리에 살던 프랑스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1960년 당시 100만명 이상이 살고 있었으나 알제리 전쟁 여파로 모조리 프랑스로 내쫓겨났다. 피에 누아르로 유명한 인물이라면 알베르 카뮈와 이브 생 로랑이 있다.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의 경우 식민지로 두고 있던 불가리아를 비롯 발칸 반도 각국에 많은 터키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는데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고 1908년 불가리아와 발칸 국가들이 완전히 독립하면서 터키인들은 대부분 본토로 돌아갔으나 미처 귀국하지 못하고 발칸 현지에 남은 터키인들은 이후 발칸 각국 정부에 의해 차별과 탄압, 강제동화를 받았다.
네덜란드의 경우 자국 치하의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여 살던 네덜란드인들이 태평양 전쟁 때 인도네시아가 일본의 식민지로 바뀌자 일본군을 피해 네덜란드 본토로 도망친 사례가 있다.[25]
인도네시아의 경우 동티모르가 자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남에 따라 동티모르의 잔류 인도네시아인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령 시절에 지배민족 노릇을 했던 동티모르 내 인도네시아계 이주민들은 동티모르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본토로 도망치거나 동티모르에 잔류하더라도 토착 동티모르인들에 의해 엄청난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포르투갈의 경우 살라자르 정권 시기까지 수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앙골라, 모잠비크 같은 식민지에 옮겨 살기도 했는데, 카네이션 혁명 이후 모두 본토로 귀국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생긴 문제들 역시 히키아게샤, 피에 누아르와 유사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령 폴란드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점령당했을 때도 러시아령 폴란드에 거주하던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들이 러시아 제국 본토로 도망치는 일이 많았으며,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들은 토착 폴란드인들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명목으로(말 그대로 명목에 불과했지만[26]) 엄청난 탄압의 희생양이 되었다.[27]
일본과 같은 추축국인 독일에서는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오랜 기간 독일의 일시적 영토였었고 인구 면에서도 독일인이 절대다수였던 지역에서 주민들이 추방되었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의 경우 식민지로 두고 있던 불가리아를 비롯 발칸 반도 각국에 많은 터키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는데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고 1908년 불가리아와 발칸 국가들이 완전히 독립하면서 터키인들은 대부분 본토로 돌아갔으나 미처 귀국하지 못하고 발칸 현지에 남은 터키인들은 이후 발칸 각국 정부에 의해 차별과 탄압, 강제동화를 받았다.
네덜란드의 경우 자국 치하의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여 살던 네덜란드인들이 태평양 전쟁 때 인도네시아가 일본의 식민지로 바뀌자 일본군을 피해 네덜란드 본토로 도망친 사례가 있다.[25]
인도네시아의 경우 동티모르가 자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남에 따라 동티모르의 잔류 인도네시아인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령 시절에 지배민족 노릇을 했던 동티모르 내 인도네시아계 이주민들은 동티모르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본토로 도망치거나 동티모르에 잔류하더라도 토착 동티모르인들에 의해 엄청난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포르투갈의 경우 살라자르 정권 시기까지 수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앙골라, 모잠비크 같은 식민지에 옮겨 살기도 했는데, 카네이션 혁명 이후 모두 본토로 귀국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생긴 문제들 역시 히키아게샤, 피에 누아르와 유사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령 폴란드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점령당했을 때도 러시아령 폴란드에 거주하던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들이 러시아 제국 본토로 도망치는 일이 많았으며,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들은 토착 폴란드인들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명목으로(말 그대로 명목에 불과했지만[26]) 엄청난 탄압의 희생양이 되었다.[27]
일본과 같은 추축국인 독일에서는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오랜 기간 독일의 일시적 영토였었고 인구 면에서도 독일인이 절대다수였던 지역에서 주민들이 추방되었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10. 번외[편집]
히키아게샤에 해당하지 않거나 히키아게샤로 분류해야 할지 애매한 경우이지만 일단 히키아게샤와 유사한 근현대 일본의 사례라서 추가한 내용이다.
10.1.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로 돌아간 야마토 민족[편집]
메이지 유신으로 사무라이가 몰락하면서 류큐 왕국의 구 사쓰마 사무라이 세력들이 사쓰마(가고시마현) 본토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으며,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고 오키나와가 잠시 일본령이 아니게 되었을 때 오키나와의 일본 본토계 이주민들이 일본 본토로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일본 본토에서 전자는 봉건시대의 잔재로 취급당했으며 후자는 히키아게샤들과 다를 바 없는 차별을 받았다. 후자의 경우 오키나와가 다시 일본령이 되면서 오키나와로 돌아간 경우가 많았지만 그대로 조상의 고향인 일본 본토에 남기도 했다. 만약 오키나와가 독립에 성공했다면 후자 또한 히키아게샤에 해당하는 사례가 되었겠지만 오키나와가 독립에 실패한 후 현재까지 계속 일본령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히키아게샤와는 다른 케이스라고 봐야 할 것이다.
10.2. 쿠릴 아이누, 사할린 아이누[편집]
10.3. 일본 제국 패망 이후 일본 본토로 망명한 친일 성향 식민지 토착민들[편집]
11. 관련 문서[편집]
[1] 남한에 약 50만 명, 북한에 약 20만 명이 거주했다.[2]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배를 말한다. 가수 조용필의 데뷔곡으로 유명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에서 언급되는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매어 불러봐도 대답없는 내 형제여."의 연락선이 바로 이것이다.[3] 상술한 대기업 사원, 조선 주둔군, 일본 공무원 등을 말한다.[4] 대표적으로 만주국은 국적법 자체가 없었다.[5]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당시 김일성은 북한에 필요한 일본인 기술자들과 그 일가를 억류해, 한반도 북부에 집중건설된 구 일본의 공업 시설과 발전소를 움직이고, 자체 기술인력을 가르치도록 했다. 이런 특성으로 전후까지 북한 공업은 전화의 피해를 복구하는 재생력과 시설복제에 있어서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으로 이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것저것 해 보면 경험이 쌓이고 체제 특성상 인재와 재원의 집중투입은 잘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모여 북한이 전후 꽤 오래 중공업과 군수공업에서 앞서가는 바탕이 되었다. 김정일의 실책으로 다 옛날의 일이 되었지만 말이다.[6] 단, 밀선 이용시 귀환까지의 안전은 보장하지 못했다. 밀선에서 재산을 갈취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해적을 만나 탈탈 털리는 일도 빈번했다.[7] 특히 남한 거주 일본인과 주둔 일본군의 철수의 매 행렬마다 미군이 호위로 붙어서 부산까지 호송했는데 심지어, 매 행렬에 있던 소수의 일본군에겐 소총 휴대를 허용하여 남한인들의 린치를 저지하게끔 하기도 했다. 이런 경무장은 부산항에서 대부분 해제되었다.[8] 현재는 없어지고 두월동 통술거리, 반월동 시장 등으로 흔적이 남아있다. 현 월영마을 자리에 있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자를 사고파는 곳이었으며 그래서 이름도 유래도 부산의 깡통시장과 똑같다.[9] 일본으로 이주한 이후 자신에게는 조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의 역사문제로 인해 한국을 감히 고향이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이 여성은 자신의 집(Home)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바다라고 표현했으며, 대구에서 조선인 유모들이 자신을 정성을 다해 키워주셨으므로 대구는 자신에게 '어머니의 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0] 과거에는 부계주의 국적법을 택하여 1998년 6월 14일 이전 출생자까지는 아버지가 한국 국적인 경우에만 자녀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했다.[11] 패전 후 자신들이 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재조일본인들이 이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12] 또 대만정치의 특성상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이 중요한데, 히키아게샤들은 본성인들과 똑같이 취급당했기 때문에 동질감이 있는 것이다.[13] 지금이야 해당 지역들은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돼지 키우기가 화남 지역만큼은 아니어도 상대적으로 편해진 편이지만 만주국 시절의 만주와 왕징웨이 정권 시절의 북경은 21세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춥고 건조한 기후였다.[14] 광복 이후 경성중 건물을 미군정이 인수해 오늘날의 서울고등학교가 되었다.[15] 이계진 당시 아나운서가 쓴 책인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딸꾹!'에서도 나온다. 이름이 도시가스처럼 들릴 수 있어서, 이 사람이 나오는 뉴스에서는 '마에다 (주한일본)대사'라고 하면 그만인데도 장난삼아 일부러 이름까지 넣는 일도 있었다.[16] 일본 미야기 현 출생으로, 1945년 해방 당시 15살이라고 했으니 출생년도는 1930년도로 추정. 이후 행적은 미상. 1992년 경향신문 보도 당시 62세로 표기됨. 사망하지 않고 생존해 있을 경우 2021년 기준 만 91세로 추정된다.[17] 개인 문서가 따로 없지만 그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에 간략하게나마 약력이 기재되어 있어서 서술함. 한국에서 잠깐이나마 기억해 줬다.[18] 본명은 사고야마 도메오.[19] 단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인 사고야 도메오는 중국 지린성 허륭현(현재의 허룽시) 출신이다.[20] 대놓고 히키아게샤라고 불리지는 않고 "중국 잔류 일본인 출신", "잔류 고아"라는 식으로 간접 언급된다.[21] 물론 오다도 타치바나도 전혀 몰랐다. 이 무렵 오다는 그냥 양아치였고, 마코토가 인신매매로 팔려가고 얼마 후에 타치바나와 만나 그의 부하가 됐다.[22] 리는 자신을 은인이라 철썩같이 믿던 마코토를 보자 병으로 세상을 떠난 딸이 생각나 살인청부업자를 관두고 의원을 열어 마코토를 지키기로 결심한다.[23] 남매끼리 극장에 갔는데 어둠 속에서 주변 중국인들에게 온갖 위협을 당했다거나, 여동생 마코토는 기껏 혈육이라고 해서 어머니랑 일본에 있는 할아버지를 찾아 왔더니 처음에만 환대하고 말이 안 통해서 다시 냉대, 그래서 기껏 중국어를 까먹을 정도로 일본어를 배웠더니 막상 어머니가 적응 못하고 자살. 더 골때리게도 그 할아버지는 "한 평의 땅"을 알박기 해놓고 킬러 라오구이에게 살해당하는 바람에 난데없이 상속권자가 된 마코토는 순식간에 땅을 노리던 도지마구미의 타겟이 된다.[24] 작중에서는 중국 잔류 고아로 표현되었다.[25] 이 때 미처 인도네시아를 탈출하지 못한 네덜란드인들은 일본군에 의해 잔혹한 탄압을 받았는데,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전락한 게 대표적이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네덜란드는 서방 국가들 중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만행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라가 되었다.[26] 당시 독일 제국이 명목상 토착 폴란드인들의 문화를 존중한 것도 그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만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이 승리했다면 독일 제국은 이전부터 지배해왔던 포젠과 단치히의 폴란드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구 러시아령 폴란드의 토착 폴란드인들을 독일화시키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27] 토착 폴란드인들 중에서도 조상 대에 완전히 정교회로 개종하여 러시아의 지배에 순응한 것 때문에 태생이 정교회 신자였던 이들은 마찬가지로 독일 제국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러시아의 탄압을 피해 정교회 신자 행세를 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몰래 지켜낸 이들은 훗날 독일 제국 치하에서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고백했기 때문에 독일 제국의 탄압은 받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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