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9

日本 스님 엔닌의「入唐求法巡禮行記」에 나타난 9세기 신라인의 海外·海上 활동 : 월간조선

日本 스님 엔닌의「入唐求法巡禮行記」에 나타난 9세기 신라인의 海外·海上 활동 : 월간조선

日本 스님 엔닌의「入唐求法巡禮行記」에 나타난 9세기 신라인의 海外·海上 활동

「신라坊(방)은 고대적 의미의 식민지…張保皐(장보고)는 해상무역王國의 君主」(라이샤워의 註釋)

신복용

● 청해진과 張保皐에 관한 유일한 현장기록
● 新羅語, 吏讀 묻어 나와 국문학계에서도 주목


申福龍
1942년 충북 괴산 출생. 건국大 정치외교학과 졸업. 同대학원 정치학 박사. 건국대 교수. 美조지타운大 객원교수. 건국大 정치대학장·同언론홍보대학원장·대학원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역임. 저서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한말개화사상연구」, 「한국정치사상사」, 「한국분단사연구」, 「입당구법순례행기」(번역) 등.

세계 3大 여행기

일본 天台宗(천태종)의 제3祖 엔닌(圓仁)의 中國 여행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唐人이 아니라 新羅人이었다. 엔닌은 신라의 張保皐(장보고)에게 보내는 일본 규슈지방 太守(태수)의 소개장을 휴대하고 唐나라에 들어가 근 10년간 체류하는 동안 張保皐 휘하 신라인들의 보호를 받았다.

엔닌이 쓴 「入唐求法巡禮行記(입당구법순례행기: 以下 순례행기)」는 9세기 東아시아의 국제관계와 韓·中·日 3國 해상무역을 주도한 張保皐 등 신라인의 활약상을 가장 리얼하게 전하는 제1급 史料(사료)이다.

현재, 국내 TV 방송에서 작가 崔仁浩(최인호)씨의 소설을 原作으로 한 大河 드라마 「海神(해신)」이 방영되고 있지만, 만약 「순례행기」가 없었다면 그와 같은 시도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찍이 駐日 미국대사를 역임한 하버드대학의 碩學(석학) 라이샤워(Edwin O. Reishauer)는 「순례행기」를 「극동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행문」이라는 자리매김과 함께 1600개의 註釋(주석)을 붙여 영어로 번역했다. 특히 라이샤워는 신라인 張保皐를 「해상무역왕국의 君主」라고 찬양했다.

10년 中國 체류의 기록

일본 학자 아다치 기로쿠(足立喜六)와 시모이리 료토(鹽入良道)도 「순례행기」를 마르코폴로의 「東方見聞錄(동방견문록)」, 玄裝(현장)의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와 더불어 「세계 3대 여행기 중의 하나」라는 평가와 함께 1200여 개의 주석을 붙여 일어로 번역했다.

이같은 「순례행기」는 그 사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사학계에는 오랫동안 외면했다(편집자 注: 이 기사의 필자인 申福龍 교수는 「순례행기」를 국내 최초로 한글로 번역했다). 엔닌이 10년에 걸쳐 중국과 新羅를 여행하면서 쓴 8만 字에 이르는 이 여행기는 당시 唐에 살고 있던 신라인과 신라의 경내를 직접 목격한 유일한 외국인의 기록일 것이다.


시모스케국(下野國)의 쓰가군(都賀郡) 출신인 엔닌(794~864)은 15세에 출가하여 히에이(比睿) 산의 사이초(最澄)의 제자가 되어 21세에 삭발하고 승적에 들어가 天台宗의 교리를 공부한다. 당시 전국적으로 3700개의 사원이 있었던 불교성국 일본은 더 높은 교리의 터득을 위해 天台宗의 본산인 唐에 구법승을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엔닌은 구법을 위해 입당하라는 詔命(조명)을 받는다.

서기 838년, 엔닌은 제자인 이쇼(唯正)·이교(唯曉), 그리고 下從(하종)인 테이유만(丁雄萬)과 함께 9척의 조공선을 타고 唐으로 떠난다. 당초 이쇼와 이교는 唐에 장기간 체류할 예정이었고, 엔닌은 잠시 불교 유적을 순례할 계획이었다.

838년 6월 하카타(博多)에서 출항할 때, 그 배에는 신라의 譯員(역원: 통역)인 金正南(김정남)과 朴正長(박정장)이 타고 있었다. 10여 일 동안 황해에서 표류하던 일행은 겨우 대륙에 상륙하여 구도의 길을 떠난다. 그들은 육로와 해로로 북상하여 이듬해인 839년 6월에 山東半島(산동반도)의 동쪽 끝에 있는 新羅坊(신라방)에 도착한다. 그들은 그곳에 있는 신라 사원인 赤山院(적산원)에서 840년 2월까지 머물면서 佛法(불법)을 배운다.

이들은 거기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五臺山(오대산)을 거쳐 도성인 長安(장안)에 이르러 6년(840~845)의 세월을 보내고, 다시 동해안으로 돌아와 揚州(양주)·楚州(초주)를 거쳐 赤山院에 이른다. 당시 唐에서는 불교를 금지했으므로 온갖 박해를 피해 다시 신라방을 찾아온 것이다.

중국의 불교 박해를 피해 다시 신라방 찾아

중국 동해안 일대를 순례하면서 엔닌 일행은 신라방의 ?管(총관)인 薛詮(설전)과 역원인 劉愼言(유신언)의 도움을 받는다. 그들은 불교 聖物(성물)과 일기 등의 압수를 두려워하여 이들을 劉愼言에게 맡겨 후일에 전해줄 것을 부탁한 다음 남하한다. 그들은 楚州까지 내려왔으나 일본으로 가는 배편을 얻지 못해 세 번째로 赤山院을 찾아온다.

그 동안 일행은 劉愼言, 金珍(김진), 金子白(김자백), 欽良暉(흠양휘), 그리고 勾當新羅所(구당신라소: 조차지의 행정기관)의 押衙(압아: 책임자)인 張泳(장영)의 도움을 받는다. 그들은 張泳이 마련해 준 해상 식량을 金珍의 배에 싣고 赤山浦(적산포)를 출발한다. 그들은 황해를 건너 신라의 熊州(웅주: 公州) 서쪽을 지나 武州(무주: 光州) 고이도(高移島)에서 1박한 다음 무주 남쪽 黃茅島(황모도: 丘草島)와 신라의 남쪽 雁島(안도)를 거쳐 9년 4개월 만에 히젠(肥前: 규슈 西岸의 항구)에 도착한다.

엔닌은 金珍 등 일행 44명이 마련해 준 배편으로 귀국하는데 이때 그는 각지 大刹(대찰)에서 모은 불경, 章疏(장소), 傳記(전기), 만다라 등 580부, 794권의 자료를 가지고 온다. 그 후 엔닌은 엔랴쿠지(延層寺) 3代 座主(좌주)가 되어 天台宗을 일으키고 71세를 일기로 타계하니, 세이와(淸和) 천황은 그에게 慈覺大師(자각대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일기를 통해 엔닌이 만나고 기록한 신라인이 唐나라 사람보다 많았다고 하는 사실은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일이다. 우선 우리는 이들의 생활상을 통해 한국 사료에서 비교적 소략하게 취급되어 있는 신라방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첫째로, 당시 신라방의 신라인들은 국제법상 일정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고대의 어느 사회나 그러했듯이 당시 唐에도 외국인에 대한 忌諱感(기휘감)이 있었다. 이러한 체제 아래에서 외국인은 일차적으로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게 규제받게 되며 거주·여행의 자유가 없었다.

그러나 신라인들의 在唐 활동은 활발했다. 중국 내륙지방에는 新羅館(신라관)이라고 하는 객사가 있었다. 신라인들은 그들의 경내를 떠나 지방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에 傳信人(전신인)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멀리 長安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면책특권 누린 新羅人들

이와 같이 在唐 신라인들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在唐 일본인들의 입장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우선 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육지에 오를 수조차 없었으며, 설령 그들이 신라인의 보증을 얻어 신라방에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머물고 떠남을 항상 관청에 알려야 하고 이를 이행치 않으면 중벌을 받았다.

엔닌의 경우에도 신라방을 벗어나 唐의 경내를 구경하고자 할 경우에는 赤山院의 승려인 常寂(상적)의 안내를 받았다. 赤山院을 벗어날 일이 있으면 赤山院 鋼維(강유: 사원의 법도를 주장하는 승려)의 허가증을 받아 15일씩 외출할 수 있었으며, 허가증 없이 출타했다가는 즉시 소환되었다. 신라인이 초청할 경우에만 일본인들은 외식을 할 수 있었다.

둘째로, 在唐 신라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었다. 당시 唐나라는 서기 828년 이래 백성들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것을 막았으며, 다만 五臺山과 長安의 終南山(종남산)에서만 수계가 허락되었다. 이 무렵 唐에서 불교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자는 엔닌 일행이 구법 순례 중 머리를 깎지 못하고 가사를 입을 수 없다가 귀국 무렵에야 겨우 삭발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셋째로, 신라방에 있었던 신라인의 직업별 분포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엔닌의 기록에 성명이 명기된 신라인은 모두 50명이다. 이들 가운데 승려가 29명으로서 가장 많은데, 주로 赤山院에서 수도하던 사람들이다.

그 다음으로 많은 사람은 관리로서 주로 對唐 무역에 종사하거나 신라방에서 근무하던 7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張保皐는 對唐 무역의 총책임자로서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林大使(임대사)는 遣唐(견당)대사였으며, 南判官(남판관)은 신라방을 관할했고, 張泳은 구당신라소의 책임자였으며, 薛詮(설전)은 신라방의 총관이었다.

이들 가운데 崔暈(최훈)은 본시 淸海鎭(청해진)의 병마사였으나 본국으로 귀국했을 때 정치적인 어려움을 만나 신라방으로 돌아와 崔暈十二郞(최훈십이랑)이라고 고치고, 이곳에 영주한 정치적 망명자였다. 劉愼言은 통역이었다.

그 다음으로 많은 사람은 譯人(역인)으로서 김정남·박정장·王淸(왕청)·劉愼言·道玄(도현) 등 5명이 있다. 이들 중 김정남과 박정장은 엔닌 일행이 하카타를 출발할 당시부터 동행하여 대륙에 상륙한 때부터 뭍과 해상으로 北行할 때의 수속과 통역을 맡았고, 내륙에서는 道玄이 이들과 동행했으며, 귀국 무렵에 다시 만난 劉愼言은 단순한 통역이 아니라 엔닌의 귀국을 위한 배편과 식량을 마련해 준 은인이었다.

위의 인물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唐으로 건너간 사람이지만, 王淸과 같은 경우에는 교역을 하다가 표착하여 능숙한 일본어를 수단 삼아 唐에 정착한 경우이다. 당시의 신라 譯人들은 단순히 통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준외교관의 신분을 가진 여행업자였다.

이 밖에도 엔닌의 귀국을 도와 일본까지 건너간 金珍, 李隣德(이인덕), 王可昌(왕가창) 등의 선주들, 鄭客(정객)·김자백·金良暈(김양훈) 등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인물, 王宗(왕종)·李國遇(이국우) 등 여행자, 그리고 王長文(왕장문)·李元佐(이원좌) 등 귀화인의 이름이 나온다. 이 귀화인들은 唐에서도 비교적 성공한 사람들로서, 王長文은 신라나 일본으로부터 오는 외국인들을 초대하여 접대할 정도였고 李元佐는 唐에 귀화하여 左神策軍(좌신책군) 압아(책임자)에까지 올랐다.

이와 같이 山東에 신라인들이 군집하여 독자적인 생활을 하게 되자, 唐에서는 이들과의 정치적·상업적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구당신라소를 설치하여 張泳이라는 귀화인을 압아로 삼아 전임케 하였다.





治外法權 누린 張保皐의 원찰 赤山院

이러한 여러 가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신라방은 『고대적 개념으로서의 식민지였다』는 라이샤워의 지적은 조심스럽게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적어도 신라방이 그 인구의 규모나 독자적 생활상, 그리고 치외법권적 자치를 향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신라방은 식민지였다는 논리에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赤山院은 登州 文登縣 赤山村(등주 문등현 적산촌), 즉 지금의 山東省 榮成市에 있던 신라의 사원으로서 張保皐가 건립한 願刹(원찰)이었다. 張保皐가 이 절을 세운 의도는 명확하지 않다. 이 절을 창건한 시주가 張保皐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의 佛心의 발원에 따라서 창건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신라방 일대의 승려들을 위한 보시와 신라방의 국제적 위광을 보여 주고 싶은 충동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사원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연간 소출 500石의 寺田(사전)을 가지고 있었고, 법회가 있을 때에는 40명의 승려와 200~250명의 신도가 모여 기거할 수 있었다는 대목으로 미루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이 9세기경의 古代사회의 이민 집단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집회 규모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張保皐가 이 사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곳이 무역지로서 요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交關船(교관선)이 이곳을 왕래했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다. 赤山院에서는 연례 행사로 11월 보름에 시작하여 이듬해 정월 보름에 마치는 2개월 과정의 불법 강좌가 있었다. 그 법회는 꽤 오랜 세월 지속되었다. 강의 내용은 주로 「法華經(법화경)」과 「金光明經(금광명경)」을 해설·토론하는 것이었다. 언어는 신라어를 사용했다.

이곳의 住持(주지)는 法淸(법청)이었는데, 그는 장안 章敬寺(장경사)의 주승을 겸하고 있었다. 승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신라의 중이 주지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在唐 신라인이나 신라 불교의 지위를 이해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赤山院의 對外 관계를 살펴보면, 對唐 관계에서는 주로 구당신라소의 압아인 張泳을 상대했고, 對신라 관계에서는 林대사와 왕훈 등이 일을 처리했으며, 이 밖에 몇 명의 역원이 업무를 보조했다. 이들은 唐의 관청을 상대로 엔닌 일행의 출행 업무를 대행해 주는 등의 영사 업무를 대행하였다.

의도적으로 赤山院에 남은 엔닌

당시의 신라 사원이 신라와 唐의 관계에서 어떠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唐의 불교 정책이 어떠했는지는 唐의 승려 지망생들이 불자가 되기 위해 赤山院으로 숨어 들어왔다는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赤山院은 일종의 蘇塗(소도)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소도는 범죄인이 숨어들어도 관헌이 체포할 수 없는 遁避所(둔피소)이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엔닌은 赤山院에 머물면서 唐에서의 생활 습속을 익힐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불법을 배우고 싶었다. 839년 6월에 赤山에 도착한 엔닌은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으나, 잠시 외출했다 돌아오니 우리들이 타고 온 배가 떠나고 없어 어쩔 수 없이 赤山院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뱃사람이나 梢工(초공·舵手)이 뒤쳐져도 배가 떠나지 않고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던 전례도 있었다. 하물며 3명의 승려와 1명의 종자가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떠날 리 없는 것이고, 첫 번째 배를 놓쳤다가 뒤따라온 두 번째 배마저 놓칠 만큼 그들이 조심성이 없었으리라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엔닌이 대륙에 상륙했을 때 「나는 신라의 역원인 김정남과 함께 계획하기를 密州(밀주)에 도착하면 인가에 뒤떨어져 머물다가 우리들이 타고 온 조공선이 떠나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天台로 가서 다시 長安으로 가기로 작정했다」는 기록과, 「귀국할 무렵에 잔류하는 방법을 어렵게 꾸며 보았지만 이 일 또한 이루지 못하고 저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여러 가지 방도를 꾸려 보았지만 잔류할 수 없었다. 관청에서 너무도 엄하게 감시를 하기 때문에 하나도 어길 수 없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엔닌은 의도적으로 赤山院에 남은 것이 틀림없다.


日本 관리의 소개장을 휴대하고 入唐


엔닌 일행이 하카타를 출발할 때부터 신라의 역원인 김정남·박정장이 함께 승선하고 있었다. 엔닌은 일단 대륙에 상륙한 이후에도 뭍으로 갈 때에는 신라인의 나귀를 이용했고, 해로로 갈 때에는 신라의 배를 이용했다. 楚州에서 뱃길로 赤山까지 올라갈 때는 뱃길을 잘 아는 신라인 60명을 고용하여 9척의 배에 각기 5~7명씩을 태웠다는 사실은 당시 在唐 신라인 수가 적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고용된 신라인들은 단순히 사공의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길안내는 물론이고, 선편의 알선과 唐에서의 체류와 여행의 주선까지 맡아서 처리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遣唐使(견당사)는 신라의 배를 이용했는데, 그 수가 많을 때에는 5척이나 되었다.

이와 같이 신라가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것은 張保皐의 시대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張保皐는 본시 미천한 家門에서 태어나 그 조부를 알 수 없다. 젊어서는 가난과 박해 속에 살다가 王侯將相(왕후장상)의 家系가 아니고서는 입신할 수 없는 신라를 떠나 능력에 따라 큰 공을 이룰 수 있는 唐으로 건너갔다. 그곳 徐州(서주)에서 武士(무사)로 출발한 張保皐는 武寧軍(무령군: 徐州 지역의 정예군단)의 少將에 올라 부귀와 공명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唐에 머무는 동안 그곳 해적들에게 잡혀 와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족들을 보고 이를 근절시키기 위해 귀국했다. 신라에 돌아온 張保皐는 興德王(흥덕왕)의 허락을 얻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淸海鎭을 거점으로 하여 황해와 남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이곳의 해상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황해를 制海(제해)하게 된 張保皐는 唐과 일본에 대한 무역에도 개입하여 국가의 이익을 증진하는 데 공을 세운다.

張保皐가 황해를 制海했을 때, 엔닌은 그의 도움을 받는 것이 구법의 지름길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엔닌은 일본을 떠날 때 치쿠젠(筑前)의 太守로부터 張保皐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왔다. 그는 赤山院에 머물면서 張保皐의 정변 소식을 들었으며, 그가 정변에 성공했다는 사실과, 唐에서 그의 위명을 확인하자 엔닌은 張保皐에게 도움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엔닌은 張保皐를 만난 적이 없으나 張保皐는 이 일행들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의 賣物使(매물사)인 병마사 최훈십이랑은 상사의 뜻에 따라 엔닌 일행을 각별히 돌보아 주었다. 서기 846년에 이르러 귀국의 길이 막히고 불교 박해가 더욱 가혹해지자 엔닌 일행은 다시 張保皐에게 귀국 선편을 부탁했고 張保皐는 그해 연말부터 造船(조선)에 착수한다.

이러던 시기에 納妃(납비)의 문제로 張保皐가 암살당하고 병마사 최훈은 신라방에 망명하게 된다. 張保皐는 문성왕 7년(845) 자신의 딸을 왕의 次妃(차비)로 넣으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조정에서 파견한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엔닌은 당시 唐의 국법이 외국인의 借船送客(차선송객)을 금했기 때문에 자신이 張保皐의 배를 이용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전적으로 張保皐가 처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張保皐의 실각에도 불구하고 엔닌에 대한 在唐 신라인들의 후원은 단절되지 않았다.

엔닌은 신라인 鄭客(정객)의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다시 신라방에서 왕가창의 배로 갈아탔으며 끝내는 金珍의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된다. 당시 신라는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일본의 대륙 무역이나 문화 교류는 상당한 부분이 신라인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사에서 張保皐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그가 한국 해양정신사의 시원이라는 점이다. 신라가 唐에 종속되고, 고려가 宋의 문화에 압도되고, 조선조가 小中華(소중화) 사상에 몰입되는 동안에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면서 상대적으로 바다로의 진출에 소홀했던 것이 그 훗날의 국운 쇠퇴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張保皐가 남긴 해양정신사의 연구는 한국 사학이 안고 있는 하나의 과제이다. 宋代의 문인 宋祁(송기)는 張保皐의 행적을 기려 칭송하기를 『누가 東夷(동이)에 인물이 없다고 말할 것인가?(「新唐書」 新羅條)」라고 했다.

9세기 東아시아 3국의 관계

엔닌의 일기는 唐·신라·일본을 무대로 하여 쓴 것이기 때문에 極東(극동) 3國의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이들 3國人의 상호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는 사료들이 많이 있다. 우선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신라와 일본의 상호 인식이다. 이들의 상호 인식 중에서도 일본의 對신라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당시의 일본인들이 唐에서 신라인을 敵(적)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신라 경내에의 표착을 재난으로 표현했다든지, 점쟁이가 『앞길에 설령 신라의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크게 놀라지 말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일본과 신라의 관계는 매우 적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엔닌이 신라의 황모도 泥浦(이포)에 도착했을 때, 그곳 守島(수도)와 武州(무주) 태수의 매 사냥꾼이 배에 올라와 『금년 4월에 對馬島人(대마도인) 6명이 고기를 잡다가 표착하여 무주에 감금된 채 어명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가운데 1명은 병사했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이는 일본인의 신라 상륙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이를 어길 경우에 그들에 대한 제재도 엄혹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에 대한 신라인의 기휘감은 倭寇(왜구)의 犯境(범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현상은 이미 신라의 개국 시대부터 비롯하여 3세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對日 인식은 9세기경에도 변함이 없었는데, 백제가 멸망한 뒤 그 부흥 운동을 일본이 지원한 것이 그와 같은 敵意(적의)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엔닌의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엔닌이 황해를 북상할 때 신라의 배 한 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작은 배를 보내어 자기들의 일행에 관해 물어보고자 했으나 신라선은 이들이 일본선인 것을 알고 도주했다는 기록이라든가, 엔닌이 귀국 길에 무주 남쪽 황모도에 이르러 뭍에 올랐더니, 섬 주민 4~5명이 무조건 도망했다는 기록 등이 보인다. 이와 같은 기휘감은 신라의 해상권이 강해질수록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唐나라에 살던 일본인들, 신라인으로 위장

그렇다면 이러한 양국 관계에서 일본인들은 신라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은 唐나라에 살던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신라인으로 위장하고 살았다는 기록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몇 가지 미심쩍은 사실이 있다. 우선 일본인들이 어떻게 제3國人도 아닌 신라인들에게 신라인의 행세를 할 수 있었으며, 그들을 속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엔닌 일행 4명은 신라어는 물론 중국어도 몰랐기 때문에, 통상 중국인들을 만났을 때처럼 漢文으로 필담을 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우리는 본래 신라인이었으나…』라는 말로 자신들이 신라어를 모르는 사실을 변명했을 것이고, 신라인들도 중국어에 능숙하지 못했고 또 상대가 중국어를 모르는 터이니 漢文 필담만이 가능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신라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로서는 金珍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엔닌에게 귀국선을 마련해 주고 일본까지 동행한 金珍은 분명히 신라인이었고, 엔닌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엔닌이 일본에 도착한 이후의 기록에는 金珍이 「唐人」 또는 「唐客」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이 엔닌의 사사로운 기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唐人으로 기록한 것은, 그들이 일본에 도착한 이후에는 金珍을 비롯한 일행 44명이 신라인이 아니라 唐人으로 행세하기로 배 안에서 서로 약조했음이 틀림없다. 또 이렇게 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金珍이 신라인보다는 唐人으로 행세하는 것이 일본에서 운신하기에 편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金珍의 일행이 唐人의 자격으로 太政官(태정관)으로부터 엔닌을 귀국시킨 代價로 은급을 받았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고구려·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것으로서는 王行則(왕행칙)에 관한 기록이 있다. 王行則은 본시 唐人으로서 동쪽 오랑캐 東藩(동번)을 정벌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넘겨진다. 여기에서 東藩이라 함은 발해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라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는 전쟁 포로인 王行則을 왜 일본으로 보냈을까? 이는 일본과 唐의 관계가 적대적임을 이용하여 고구려나 백제가 이들에게 복수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과 唐의 관계가 우호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엔닌이 唐에 상륙한 초기에는 신라인으로 행세하며 자신들이 일본인임을 숨겼고, 그러다가 그것이 발각되어 관가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羅唐관계는 봉신적 우호관계

이 당시의 羅唐(나당) 관계는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킬 당시 신라가 唐에 진 부채로 인해 冊封(책봉) 관계로 굳어졌다. 신라가 唐의 藩國(번국)이 된 것은 서기 650년경이었으며, 엔닌의 시대에는 唐의 칙사가 신라 왕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한 예로서 서기 839년 4월에 張保皐가 祐徵(우징)을 도와 閔哀王(민애왕)을 죽이고 神武王(신무왕)을 즉위시켰을 때, 唐에서는 靑州병마사 吳子陳(오자진)과 崔부사, 그리고 王판관 등을 보내어 왕위를 내렸으며, 이들은 신라를 다녀온 뒤 30여 명의 일행과 함께 신라방을 방문했고 최훈 병마사가 이들을 위로했다는 기록 등이 「순례행기」에 나타나 있다.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관계가 대등했다거나 영예스러웠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호적이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당시의 運槽(운조)로 볼 때 신라에 파견된 唐의 사절이 500여 명이었다는 사실 등은 이와 같은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羅唐 관계는 封臣的(봉신적) 우호 관계였다. 唐과 일본의 관계를 보면, 일본은 唐에 우호적이었으나 唐은 일본을 기피했다. 일본과 신라의 관계는 민간인 차원에서는 서로 기피한 것은 사실이나 교역의 문제에서만 일본이 신라의 교역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멸망하기 이전의 고구려는 唐과 일본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백제는 唐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라의 정치·사회·외교·무역에 관한 일차적인 문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金石文(금석문)을 제외한다면 당시의 기록들은 거의 인멸되었다. 특히 엔닌의 일기는 신라를 직접 목격한 외국인의 유일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그가 외국인의 입장에서 일기를 썼기 때문에 오해와 과오가 있지만, 그가 견문한 사실들의 정확성을 오늘에 비추어 보면 참으로 놀라운 데가 있다.

엔닌의 일기가 가지는 이와 같은 사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 일기의 인용이나 이용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남는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료의 해석이다. 한 역사가가 史學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료를 발굴하거나, 아니면 사료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엔닌의 일기가 가지는 첫 번째의 문제점은, 거기에 실려 있는 신라 관계 기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해석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글의 논지 중에는 쟁점의 요소들이 있다. 예컨대 신라방을 원시적 개념으로서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러한 논지에 대하여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7세기 이후의 신라가 唐의 封臣國(봉신국)이었다는 논리에 오류가 없다면, 어떻게 봉신국이 종주국의 영토에 식민지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자기의 해석에 맞추어서 사실을 형성하고, 사실에 맞추어서 해석을 형성하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는 것이지만, 해석과 사실의 그 어느 한쪽을 선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라방의 식민지적 성격에 관한 본 논문의 논지는 해석 쪽에 편향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교우위만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사실의 묘사가 빗나갔을 때, 해석은 의미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의견은 제각기 다를 수 있지만 사실은 신성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와 관련하여 엔닌이 신라의 추석을 설명하면서 「신라가 옛날 渤海(발해)와 더불어 전쟁할 때 이날 승리했으므로, 이날을 명절로 정하고 음악과 즐거운 춤을 즐기던 것이 오래도록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엔닌의 여행기에는 신라 吏讀가 묻어 있어

8월 보름이라고 하는 신라의 민간 전승 놀이는 이미 3代 왕인 儒理王(유리왕)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서, 부족을 6부로 정하고 이들을 두 패로 나눈 다음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이들을 거느리고 길쌈놀이를 하게 했다. 7월 보름부터 8월 보름까지 계속된 이 놀이는 매일 밤 二更(이경)까지 치러졌다. 이 행사 기간 중에 부락민들은 음식을 장만하고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했으며, 길쌈내기가 끝나면 진 편에서는 會蘇曲(회소곡)을 불렀는데, 이 놀이를 가위[嘉俳·가배]라 했다.

이상과 같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엔닌의 일기가 가지고 있는 사료적 가치가 깎이는 것은 아니다. 거듭 지적하거니와 이 일기는 신라방, 신라·唐·일본의 불교와 3國의 상호 인식 및 관계, 신라의 해상 활동, 특히 청해진과 張保皐에 관한 유일한 현장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국문학계에서는 엔닌의 일기에서 신라어 또는 吏讀(이두)가 묻어 나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한 나라의 역사는 일차적으로 그 나라의 사료에 의해서 쓰이는 것이 상례이고 정도이다. 그러나 주변 국가의 사료는 당사국이 안고 있는 사료의 빈곤과 객관성을 보완해 준다는 점에서 볼 때, 엔닌의 일기는 신라史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再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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