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3

손민석 - 3대에 걸쳐서 여성의 해방의 계기를 탐색하는 게 주요 서사

손민석 - 폭싹속았수다에 관한 평들을 보니 키워드에 너무 꽂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금명이가 '서울대'에 갔다는... | Facebook

폭싹속았수다에 관한 평들을 보니 키워드에 너무 꽂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금명이가 '서울대'에 갔다는 걸 갖고 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거나 아니면 전체 서사가 가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해서 문제라는 식의 비판들이 많이 보인다. 

내가 볼 때 이 드라마는 3대에 걸쳐서 여성의 해방의 계기를 탐색하는 게 주요 서사다. 
할머니에서부터 엄마를 거쳐 딸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서 진행되는 가부장제로부터의 해방이 얼마나 지난한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홀로 고립되어 죽어갔던 애순의 엄마와 달리, 
애순은 나름대로의 근대성도 체현하고 있고 가부장제를 '반역'한 남편 관식에 제주 해녀들간의 연대, 여성들간의 연대를 종합해서 나름의 안정적인 남녀관계, 가족관계를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아들'이라는 가부장제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면서도 적절하게 그로부터 벗어나 계장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애순에게는 어릴 때 잠깐 맛보았던 근대성에 대한 꿈이, 욕망이 있다. 

관식은 가부장제를 반역함으로써 애순과 함께 할 수 있었지만, 관식과 애순 모두 꿈꿔오던 근대성으로부터, 육지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들이 만들어낸 안정적인 가족관계란 실상 전근대적인 가부장제의 '근대적'인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적 가족 자체에는 미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애순은 자신의 딸(아들이 아니라!)인 금명이 근대적인 가족, 여성해방이 이뤄져 있으며 안정적인 남녀관계를 형성한 그런 가족에 속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금명의 연애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버지 관식과 똑같은 놈을 어디서 주워 왔어도 금명은 근대적인 가족을 형성하는데 실패한다. 
금명의 결혼 좌절이 보여주는 건 가부장제란 단순히 '전근대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근대적"인 형태로 보다 강력하게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대에 가고 일본 유학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근대성을 그야말로 체현하여 어머니가 못 이룬 근대성 체현의 꿈을 이뤄낸 금명이지만 서울에서 그정도는 그저 '촌녀'에 지나지 않는다. 
관식과 애순이 애써 가꾼 가족관계는 서울 사람들이 볼 때는 그저 '노가다'하는 하층계급의 촌스러움정도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걸 개별화시키고 원자화시키는 근대성의 특질이 작용하고 있다. 관식이 가부장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애순이 속해 있는 마을 여성들의 연대가, 전통적인 연대관계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금명에게는 그런 여성간의 연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원자화되고 개별화된 근대적 세계 속에서 금명이는 관식이를 꼭 닮은 영범이와 끝내 결혼하지 못한다. 영범이가 못나서라기보다는, 영범이를 뒷받침해줄, 영범이의 어머니를 막아줄 수 있는 생활세계, 여성연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느며느리가 나며느리보다 낫다고 말해줄 사람이 금명과 영범에게는 없다.

 여성해방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먼저 가부장제로부터 어느정도 독립되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이 드라마의 남성들은 상당수가 수동적이다. '능동적'으로 돌아다니는 학씨 아저씨는 그래서 외롭다. 여성연대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마을의 여성들은 학씨 아저씨 밥 얻어먹으면서도 학씨 아저씨 가족이 창씨개명 1등으로 했다고 조롱할 정도로 핫바지다. 
엄마한테 수동적일거냐, 와이프한테 수동적일거냐의 차이만 있을뿐 이 드라마의 남성들은 대체로 수동적이거나 여미새적인 능동성만 갖고 있다. 

 그래서 금명과 충섭이 어떤 관계를 맺을지가 핵심이 된다. 금명이 근대적 세계 속에서 애순이 이뤘던 것과 같은 남녀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창출해낼 수 있는가. 그것을 가족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인 형태의, 가부장적인 가족주의는 아닐 것이다. 
충섭도, 금명도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돈, 계급 등의 문제로 결혼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게 있다. 
이 지점에서 어떻게 보면 드라마가 힘이 좀 빠지는데, 상처받은 둘이 모든 차이, 격차 등을 다 떠나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조화로운 관계를 수립한다는 식의 서사로 흐를 개연성이 커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근대성의 체현의 의미가 무화(無化)되어버린다. 

이 드라마의 실패 지점은 거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면 아직 우리의 현실이 가부장제로부터의 여성 해방이 완료되지 않았기에 드라마적 묘사에서 그 구체적인 해방 형태를 주조해내는데 실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서울대, 가족주의 등의 키워드에 꽂혀서 비판하는 건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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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joo Lee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근대와 여성서사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겠네요..



Young Chul Han
가장 공감가는 평이네요^^


Ghawon Kim
저도 공감.
드라마가 김이 빠진 느낌은 어쩔 수 없지만 진짜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에 대한 건 살아있다고 생각했어요



한문정
저도 이 드라마의 어떤 부분이 좀 불편헌 반면, 결국 여성주의에 관한 드라마라고 보았는데 그 지점에 댜한 가장 명확한 분석인것 같아요.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SeungHyun Yang
뭐 그딴 소리를.. 골때리네요 ㅋㅋㅋㅋ 한국 드라마 중에 여성서사에 제일 진심같은데..

6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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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jin Park
금명이가 68년생,
즉 아마도 지금 50대 후반의 사람이자
지금 대학생이나 취준생/직장초년생의 엄마 세대라는 것을 까먹는 것 같아요.
5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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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e Sunghyun
ㅋㅋ드라마안봤는데도 어떤 평들일지 짐작갑니다. 뻔한 시선으로 드라마나 소설 평하는걸 자주 보게되더군요
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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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Bae Sunghyun 덧붙여서 말을 해줘도 못 알아듣는 사람 천지삐까리입니다ㅠㅜ
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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