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직 “통혁당, 자생아닌 북한 지령 따라 결성”
입력 2011.05.26 09:42 수정 동성혜 기자 (jungtun@dailian.co.kr)
보수와 진보 대결 ´민주 대 반민주´로 몰았지만 진보, 민주주의 모델 없어
좌파, 민주화 기여한 부분 있지만 인민혁명 꿈 꿨던 과오 반성해야
“진보진영과의 대화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진보진영이 실현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의 모델이 어떠한 것인가를 꾸준히 질문하여 왔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26일 출간한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시대정신)의 서문에서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시국사건이 용공조작이 아닌 실제 공산혁명운동임을 밝히게 된 배경을 이같이 밝혔다.
진보진영에서는 지금까지 보수와 진보의 대결을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몰아 왔지만 사실상 그들의 민주주의 모델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 출발의 시점은 바로 거기다.
그렇기에 안 교수는 “과거의 민주화운동이,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운동이었던가를 재검토해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 1960~70년대의 민주화 운동 초기를 돌아보았다. 그 결과 민주화운동은 ‘민주 회복’, 즉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따라 순수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라는 요구와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인민민주주의’ 실현, 즉 공산혁명 두 가지를 목표로 했을 수 있다고 가정했다.
안 교수는 민주화운동의 목표가 ‘민주 회복’이라면 “87년의 민주화로 민주화운동의 목표는 이미 달성된 것”이라며 “그렇기에 진보진영 10년간의 집권하에서도 현행의 헌법으로서 만족했던 것이 아닌가”고 되물었다.
그럼에도 진보진영의 다른 한편에서 ‘제대로 된 민주화가 달성되지 않았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는 것은 “분명 좌익적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라고 해석했다. 세계사적으로 좌익적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안 교수는 “1960, 70년대 민주화운동기에는 전혀 관계없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도 있었고, 겉으로는 민주화운동을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민주화운동을 수단으로 이용하여 인민혁명과 통일혁명을 지향하는 운동도 있었다”며 “민주화운동기의 좌익운동은 민주화운동의 공로도 인정되어야 하지만 인민민주주의운동의 과오도 반성해야 한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는 우파가 이끌어온 한국근현대화의 공로를 폄하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나 정당성이 거부당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구체적인 예로 건국기의 백범은 김일성의 해방 직후부터 소련의 지령으로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인민위원회를 결성함으로써 단독정부를 건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호도, 통일을 지향한다는 명분으로 대한민국의 탄생을 부정하는 데만 급급하다는 것이다. 백범을 숭앙하면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폄하하는 이유기도 하다는 비판이다.
안 교수는 “현실정치에서 진보쪽이 실현하고자 하는 민주주의가 불투명하면 보수 쪽의 민주주의도 그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다”며 “한국의 정치 발전을 위해서는 진보쪽이 추구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상이 하루빨리 정립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진보진영이 제시할 수 있는 민주주의 모델은 사회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며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한국 정치의 중심축이 되어서 경쟁하고 협력할 때, 한국의 정치적 선진화는 이룩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안 교수는 이러한 인식의 바탕하에 1960~70년대 주요 시국사건으로 꼽히는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 등의 일부의 주장처럼 정부에 의한 용공조작사건이 아니라 대부분 실체가 있는 공산혁명운동 사건이었음을 증언했다.

4.19 이후 최초의 좌익운동, 인혁당
안 교수는 “4.19학생의거 이후 시작된 최초의 좌익운동이, 수사기관이 62년1월부터 결성되었다고 64년 8월경에 발표한, 인민혁명당의 발족과 활동”이라고 평했다.
안 교수는 “인혁당의 내용을 소상히 알 수 있었던 것은 1962년 대학원에 진학하여 만난 박현채 선생(전 조선대 교수)이 출옥한 이후”이며 “보다 소상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인혁당의 넘버 투 맨인 정도영 선생(전 합동통신 조사부장)과의 관계”라고 밝혔다.
인혁당의 조직목적은 당시에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것이었으나 북한과의 관계가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인혁당이 학생운동 지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고 당시 학생운동은 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다양한 운동서클은 대부분 자생적인 운동단체들이었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지난해 박범진 전 의원이 인혁당의 실재에 대해 증언한 것을 상기시키며 인혁당은 남한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공산혁명을 위한 조직이었다고 증언했다. 박 전 의원은 지난해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가 출간한 ‘박정희 시대를 회고한다’에 수록된 증언록에서 “(1960년대 초) 나 자신이 인혁당에 입당해서 활동했다”며 “인혁당은 (중앙정보부의)조작이 아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안 교수도 자생적 공산혁명 조직이었음을 재확인한 셈이다.
또한 안 교수는 수많은 사람이 수사망에 올랐고, 구속된 사람만 하더라도 거의 50여명에 가까웠지만 재판과정에서 처벌을 받은 사람은 소수로 형량도 2, 3년 이하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북한 지령으로 결성한 혁명조직, 통혁당
안 교수는 인혁당과 달리 통혁당은 자생적 조직이 아니라 북한의 지령에 따라 한국에서 결성된 혁명조직이라며 “창당이 언제 되었는가는 특별한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북한에 혁명기지를 두고 북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상당한 규모를 갖고 출발할 수 있었고 ‘청맥’이라는 기관지 발행이 그 증거라고 했다.
또한 통혁당의 하부운동은 자신이 근무하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가장 활발했다고 밝혔다. 학생운동그룹 중에 기독교학생운동도 있었는데 그 리더가 박성준 전 교수(성공회대 전 겸임교수)라는 것. 박 교수는 처음에 순수한 기독교신앙운동을 펼쳤는데 후에 ‘경제복지회’란 기독교학생단체를 이끌었고 신영복 교수(현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박 교수를 통해 경제복지회를 지도하기 시작했고 김질락(김종태가 포섭)의 지도를 받았다고 전했다. 안 교수는 “자연히 상과대학은 통혁당 학생운동의 본마당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통혁당 사건이 터진 후 제일 먼저 안 교수를 찾은 사람은 박성준 전 교수였고 자수를 하던지 종적을 끊고 최소한 10년 이상 지방도시에 가서 숨어서 지내라고 충고했으나 안 교수도 남산으로 끌려갔다는 것. 안 교수는 “신영복이 김질락에게 소상히 보고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통혁당은 넘버 투 맨인 김질락의 고백에 의해 탄로됐다고 증언했다. 아울러 통혁당 내부조직으로서는 김질락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해방전선’과 이문규를 중심으로 하는 ‘조국해방전선’이 있었다고 했다. 수사기관은 김질락과 이문규를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역공작으로 북한간첩선의 파견을 유인하기 위해 타전했고, 북한이 여기에 넘어가 통혁당 멤버들을 구조하기 위해 공작선을 제주도의 서귀포로 파견했다가 일망타진된 일도 있다고 회고했다.
안 교수는 “통혁당 사건 때 가혹한 수사가 있었다”며 “눈의 가시인 사람들을 옭아 넣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라고 증언했다. 인혁당 사건과 관련, 안 교수는 “우리나라 수사당국의 수사는 대체로 준법적이었다”고 밝혔지만 통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모든 수사가 공정했다거나 합법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74년 4월 25일 발표된 제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해 안 교수는 “3월의 민청학련운동의 고조 및 4월3일의 긴급조치령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명백하다”며 “인혁당은 민청학련운동을 제대로 지도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왜냐면 당시 학생운동은 스스로 운동의 목표를 정확하게 이해할 만큼 충분히 성장해 있었고, 운동을 이끌던 리더들은 개별적으로 선배들의 지도를 받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라는 것.
이 사건의 재판 결과 인혁당은 사형 7명과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 등으로 관련자의 대부분이 중형을 선고받았고, 민청학련의 학생리더에게도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15년 18명으로 중형이 선고됐다. 이와 관련, 안 교수는 “사법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정치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한국의 중화학공업화는 인혁당의 희생뿐만이 아니라 80년의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을 딛고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고 평했다. 인혁당의 희생이 당시의 근대화과정에서 조성된 정치적 긴장의 희생물이라고 바라봤다.
다만 안 교수는 “제2차 인혁당이 결성되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은 개인의 경험으로 보아서도 분명하다”고 했다.
북한과 연합전선 구축하려한 남민전, 민주화운동 공로자로 인정받아
1976년 2월에 결성돼 79년 10월에 발각됐다고 발표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과 관련, 안 교수는 중심인물인 이재문에 대해 “기이한 행동이 많았다”고 증언했다.
안 교수는 “이들은 한국사회를 순수한 ‘미제의 신식민지로 인식하고 무력투쟁으로써 해방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것 같다”며 “남민전과 북한과의 연합전선은 그 이후 순조롭게 진행된 것 같지 않았다”고 밝혔다. 남민전은 심각한 자금난을 극복하기 위해 강도 행각을 벌였고, 이재문은 조직과 강령 등에 관한 기록 등을 소상히 정리해 타임캡슐처럼 지하에 묻어뒀다가 수사과정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안 교수가 ‘기이한 행동’이라 했던 것이다.
당시의 좌익운동단체는 상황이 위험한 조건에서 자기 조직에 관한 기록을 최소화하던지 가능하면 문건을 만들지 않고 필요한 사항을 암기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특히 안 교수는 “그럼에도 2006년 3월에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전기의 강도 행적까지도 민주화운동으로 간주하여 남민전 관련자 29명에 대해 민주화운동 공로자로 인정했다”고 꼬집었다.
안 교수는 이 밖에도 1970년대 주요 좌익 지하조직 ‘김정강그룹’의 경우 경찰 수사 과정에서 실상이 거의 파악되었는데도 2명만 금고형을 받은 데 그친 것은 물증이 나오지 않았고 10·26사태 등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의 영향도 겹쳤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한편, 안 교수가 공저자에 포함된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는 안 교수의 글 외에 △민주주의 기원과 전개 △신정치질서의 구상 △민주주의의 미래 등으로 분류해 11편의 논문이 실렸다. 출판기념회는 26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데일리안 = 동성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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