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1

386세대 학생운동 리더들의 현주소 : 월간조선 2001

386세대 학생운동 리더들의 현주소 : 월간조선  06 2001 

386세대 학생운동 리더들의 현주소
政界에 많이 진출… 형사 아닌 빚쟁이에 쫓기기도



崔 昺 一 자유기고가

全大協 출신들의 체육대회

지난 5월6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위치한 뚝섬 체육공원(舊 경마장)에는 1980년대 대학가에서 운동권을 지도했던 全大協(전대협) 출신 동우회원 500여 명이 체육대회를 치르고 있었다. 머리띠를 질끈 동여 매고 군사정권에 反對(반대)하며 구호를 외치던 성마른 모습들이 10여 년의 세월을 겪으면서 어느 새 30代 평범한 家長(가장)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보듬고 축구를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화염병을 던지며 거리에서 鬪爭(투쟁)하던 전투적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운동장 외곽에 걸어놓은 조국통일을 염원한다는 플래카드 하나가 지난 시절 그들이 추구했던 理念(이념)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에 獻身(헌신)했던 ㄱ씨는 현재 늙은(?) 대학원생이다. 약국을 하는 아내가 벌어 주는 수입에 기대어, 학업을 연장하고 있지만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화려했던 운동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家長으로서 생활을 책임지지 못한다는 自愧感(자괴감)과 함께 앞으로의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설혹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더라도 대학의 교수자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지난 시절의 이념과 현재의 삶을 되돌아 볼 때 허송세월을 보낸 것만 같아 괴롭다는 심정의 일단을 주변에 표하기도 한다.

ㄴ씨는 학생운동권의 主役(주역)으로 활동했던 사람 중의 하나다. 학생회장 출신인 그는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졸업 이후 시작한 사업들이 모두 실패로 끝나자 한동안 깊은 좌절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386세대(30代, 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출생) 학생회장 출신 중 몇 명은 국회의원이 되어 制度圈(제도권)에 진입했고, 또 벤처사업가로 이름을 날리는 이들도 있으나 이들 모두가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은 아니다.

희망과 좌절이 엇갈리는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1984년의 운동권

아시아 비전의 이사 李政祐


386세대에서 가장 先頭(선두)에 선 인물은 1984년 直選制(직선제) 총학생회장이었던 李政祐(이정우·39), 宋永吉(송영길·38), 金榮春(김영춘·39)씨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李政祐(81학번)씨는 골수 운동권 출신이면서도 行試(행시), 司試(사시), 外試(외시)를 모두 합격한 고시 3관왕이다. 이 때문에 매번 선거가 있을 때마다 각 정당에서 迎入(영입) 1순위로 꼽혔다.

대학 졸업 후 민청련, 한겨레 민주당 등에 참여하면서 진보정당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그는 기존 운동의 한계를 느꼈다며 「운동권 출신들이 책임 있는 위치에서 大衆(대중)과 만나야 信賴(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는 지론으로 考試에 도전, 1990년 외무고시, 1991년 행정고시와 사법고시를 모두 통과했다.

3金의 영향력을 넘어선 새로운 개혁정당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한국의 미래 제3의 힘」이라는 청년조직을 건설하는 데 중추가 되었던 그는 현재 아시아권을 인터넷 비즈니스로 묶어내고자 하는 「아시아 비전」의 이사이다.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민주당 국회의원인 宋永吉(인천 계양-강화 갑구·82학번)씨. 선 굵은 인상의 그는 1985년 집시법 위반으로 제적당하고 4개월 복역 후 일당 4200원짜리 대우자동차 배관용접 공사현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빈민운동권의 許炳燮(허병섭) 목사 등과 함께 인천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를 설립하고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인천시지부 사무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1987년 6월 사태 후 운수노보 편집실장을 하던 그는 1992년에 붕괴된 舊 소련 여행을 마치고 이념의 限界를 체험, 다른 길을 찾았다. 사실 그는 학생운동권 출신이면서도 당시 학생운동의 이념적 지표로 여겼던 主體思想(주체사상)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갖고 있었다.

『그 당시 저는 제 발로 서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조직이나 흐름에 의존하는 남의 장단이 아니라 내 장단에 춤을 춰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主體思想을 신봉하는 사람들과 같이 討論하고 공부도 하여 보았지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理性의 포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개월 정도의 방황 끝에 「主體思想은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적개심과 분노에 기초한 운동은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확실히 든 것이죠』


宋永吉 의원의 경우


이후 그는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인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활동하다 국회의원에 출마, 16代 국회의원(법사위원회, 예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국회에 들어와서 사실과 교범적인 것과의 괴리에서 오는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이 옳은가, 혹은 그른가가 고민입니다. 정책적인 부분에서 실제의 법안을 만들고 노력하고 있지만 동기와 상관 없는 결과가 나올 때 고민스럽습니다』

서울 광진갑구 국회의원 金榮春씨(고려대 81학번)는 386세대 운동가들이 대개 민주당으로 진입한 것과는 달리 한나라당에 들어간 경우. 1984년 민정당 당사 점거농성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그는 金大中 대통령과 金泳三 前 대통령이 민추협 공동의장로 있었을 때 정치에 입문했다.

자전거로 쌀 배달을 하며 어려운 시절을 보낸 그는 고려대 문과대에 수석 입학, 4년 간 장학금을 받는 장학생에 뽑혔다. 그의 꿈은 詩人(시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의 대학가는 그를 운동권 학생이 되게 했다. 그는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운동권 학생이 된 배경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온 나라가 군사정권의 강권적 통치하에 숨죽이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강의실에서 개처럼 끌려가는 학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분노를 안으로 삼켜야만 했습니다. 고생하는 부모님의 얼굴, 잡혀서 당해야 할 폭력, 빨간 줄이 쳐질 인생의 미래, 이런 두려움이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많은 번민과 고뇌의 시간을 거친 후, 참 지식인은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는 참여 속에서 나온다고 판단하고 학생운동에 몸을 담았습니다』

1984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이 된 그는 언론 자유, 노동 3권 보장, 학원탄압 중지 등을 요구하며 민정당사 점거 농성을 벌인 혐의로 구속됐다. 출옥 후엔 인천의 조그만 공장에 취업해 매달 9만4000원을 받는 근로자 생활을 1년 동안 했다.

그가 좌파 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 것은 급진적 變革論(변혁론)에 대한 회의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운동 시절 자신이 가졌던 신념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예전의 신념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고 바른 정치를 통해 현실개혁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이 金榮春씨의 생각이다. 金씨는 15代 선거에서 국민회의 후보인 金翔宇(김상우)씨에게 1327표차이로 낙선했으나 16代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로 再도전하여 국회의원이 됐다.



1985년의 운동권

金民錫·鄭泰根 등



1985년 운동권의 중추였던 82학번 총학생회장 출신의 운동가들은 대부분 정치활동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미 민주당 영등포을 지역구에서 재선을 하며 탄탄한 입지를 다진 金民錫(김민석·38·前 서울대 총학생회장)씨를 비롯하여 한나라당 성북갑 지구당 위원장으로 있는 鄭泰根(정태근·38·前 연세대 총학생회장), 민주당 동대문을 지구당 위원장 許仁會(허인회·38·前 고려대 총학생회장), 한나라당 영등포갑 지구당 高鎭和(고진화·38·前 성균관대 총학생회장), 서울시 의원 李海植(이해식·38·前 서강대 총학생회장) 등이 그들이다.

82학번 출신의 운동가 중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은 고려대 三民鬪(삼민투) 위원장이었던 許仁會씨일 것이다. 고려대학에 입학한 이후 잦은 手配(수배)와 도망자의 삶을 살았던 그는 형사와 줄타기를 하며 도망을 다녔던 횟수며 유치장에 끌려갔던 일, 구속되었던 일들을 모두 합해보면 120번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굴곡 많은 학창시절을 보냈다.

마지막 수배가 해제되면서 그는 生存(생존)의 문제에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영등포 상가에서 사무기기를 파는 후배를 통해 장사하는 법을 배운 그는 부모와 친지에게 자본금을 모아 창업자금 1500만원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시작 1년 만에 사업은 의외로 번창하여 월 평균 매출이 1억원을 넘기 시작했다.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그는 운동권 선후배들과 連帶(연대)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그린 컴퓨터」 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주문이 마구 밀려들고,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쇄도해서 사업을 하는 건지, 인터뷰를 하려고 사업을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이러한 행복도 잠시 한동안 호황을 누리던 조합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매출이 줄고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단시일에 급성장한 만큼 경험도 부족하고 자본력이 취약해 부채가 늘면서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 許仁會씨가 떠안아야 되었던 빚이 무려 4억원이나 되었다.

『말이 4억이지 도대체 그 빚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뜨거운 한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간 계절까지 저는 집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부도를 내지 않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내 모습은 이전의 학생운동을 하던 許仁會가 아니었습니다』

고통스럽게 빚과의 전쟁을 치르던 그가 새롭게 시작한 사업은 컴퓨터 가정교사였다. 아이들이 컴퓨터를 제대로 배우고 유익하게 쓸 수 있도록 도와 주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사업은 나날이 확장되었고 가정을 방문하는 교사들도 60여 명 가까이 늘어났다. 그리고 「컴퓨터 가정교사」라는 책까지 출간했다. 이 사업을 시작하던 초기에 은행 빚도 절반 이상 갚게 되었고, 어느 정도 생활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형사 아닌 빚쟁이에 쫓기기도


그러나 1995년 간첩 不告知罪(불고지죄)로 기소되어 3개월 만에 보석으로 출감하면서 그의 꿈은 산산조각났다. 촉망받는 운동권 출신 중소기업인으로서 각 黨의 영입 유혹까지 받던 시기였다. 하지만 출감 이후 정치인으로의 활동은 고사하고 사업체는 완전히 비탈길로 곤두박질쳤다.

학생 시절 형사들에게 쫓겨다녔던 그는 30代 중반의 나이에 채권자, 은행 등 빚쟁이들에게 쫓겨다녀야 했다. 당시의 생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제 스스로 비참하게 허물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로지 돈을 구하기 위해 선배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어둑어둑해져오면 저는 강남으로 출근했습니다. 제 바지 주머니에는 집으로 돌아올 차비 2000원만 달랑 들어있던 때도 허다했습니다. 색색의 네온이 대낮처럼 밝게 켜지는 강남의 룸살롱으로 들어가서 저는 술시중을 들었습니다』

하루 평균 500만원의 빚을 갚아 나가야 했고 어느 정도 삶을 추스리기까지 무려 2년여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지난 16代 선거에서는 민주당 공천을 받아 서울 동대문구을에 출마하여 11표 차로 낙선했다. 再검표 결과 차이가 3표차로 줄어 들어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현재 그는 200년 前 좌절된 실학파들의 근대화 운동을 계승하여 21세기 비전을 창조한다는 기치 아래 인터넷 전자도서관의 일종인 新 규장각 운동으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許씨는 『지역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며 지난 시절을 거울삼아 보다 생활에 밀착한 운동을 해나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서울대학교 三民鬪 위원장이었던 咸雲炅(함운경)씨는 기성 정치판에 도전해 두 번의 실패를 맛보았다. 1996년 총선에서 전국연합 후보로 서울 관악구에 출마했지만 1만여 표를 얻는 데 그쳐 1998년에는 그의 고향인 群山(군산)으로 귀향했다. 이후 金大中 대통령의 속칭 「젊은피 수혈론」으로 株價(주가)를 올리기는 했지만 16代 선거에서 민주당이 아닌 무소속으로 출마, 재차 고배를 마셨다. 현재는 群山 미래발전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全大協 시절-1987~1992년

정치와 돈 문제


1987년 8월19일 충남대학에서 전국대학생들의 결집체인 全大協이 결성되었다. 전대협의 주축멤버는 당시 고려대학 총학생회장이었던 李仁榮(이인영·36)씨. 1987년 6월 사태 때, 시민운동의 선봉에 섰던 그는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정권 퇴진을 촉구하는 연설을 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지지 않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그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金大中 후보를 지지하는 이른바 「비판적 지지」 노선을 채택, 운동권 내부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졸업 후 그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조직국장, 全大協 동우회 회장 등을 맡았다.

『학생운동 시절의 모든 명망을 버리고 밑바닥부터 시민운동을 10년을 하겠다』는 것이 당시 李仁榮씨의 각오였다. 교통비 조차 되지 않는 常勤費(상근비)를 받으며 시민운동을 10년 동안이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1989년 전민련 준비위원회 정책실 간사로 시작해 국민회의 신당 창당 발기인으로 제도 정치권에 들어가기까지 10년 동안 시민운동에 투신했다. 지금은 민주당 서울 구로갑 지구당 위원장이다.

기성 정치권에 들어서면서 李仁榮씨가 고민했던 부분 중의 하나도 돈 문제였다. 교사를 아버지로 둔 가정의 막내로 자라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를 했기에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적이 없었고, 시민운동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없었기에 정치권 투신 초반에 그는 돈 문제로 인해 적지 않게 속을 썩여야 했다고 한다.

다행히 知人(지인)들이 후원을 해 주어 생활의 間隙(간극)을 메우고 있지만 그는 정치인들이 올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돈 문제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창한다. 빈민운동가인 이해학 목사의 딸 도레씨와 全民聯 활동을 하다 맺어져 여섯 살 난 아들을 두고 있다.

李仁榮씨와 함께 全大協 부의장으로 전대협을 이끌어 나갔던 연세대 총학생회장 禹相虎(우상호·39)씨는 현재 민주당 서울 서대문갑 지구당 위원장으로 있다. 다른 운동권 출신들과는 달리 군대에 입대하면서 사회에 대한 구조적인 모순을 느꼈다는 禹씨는 제대 후에 본격적으로 운동권에 뛰어들었다.

禹相虎씨는 당시 경직된 운동권 풍토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학생회장 선거 당시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면 예외 없이 교문진출 시위를 하던 전통을 깨고 모든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언론에서조차 그가 불러온 참신한 면모에 대해 『기성 정치인은 학생에게서 민주주의를 배우라』고 할 정도였다. 1987년 6월 연세대생 이한열씨의 죽음으로 인해 연세대학이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浮上함에 따라 禹씨도 자연스럽게 운동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지금 돈을 벌고 있나?』


졸업 후 禹씨는 제도권에 진입하기 전까지 이한열 추모사업회, 연세대동문회 사무총장, 나라사랑청년회 운영위원,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부대변인 등 재야활동에 몰입했다. 대다수 운동권 출신자들이 그렇듯이 그도 결혼할 즈음 경제적 문제로 인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부인 이현주씨(서울여대 국문과 졸업) 또한 운동권 출신이었지만 그의 이력을 안 李씨의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며 결혼을 반대했다. 李씨의 아버지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던 날, 그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李씨의 아버지가 계속 아픈데만 물어보는 것이었다.

『데모하다가 감옥에 끌려갔다며?』

『예』

『지금 돈은 벌고 있나?』

『아닙니다』

『그럼 그냥 굶고 살려고 하나?』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부모님이 고생 많이 하셨겠군』

『예』

『앞으로도 고생시켜 드릴 텐가?』

『…』

李씨의 부모는 禹相虎씨의 진실한 태도와 장래성을 보고 결혼을 승낙했다고 한다. 결혼 이후 청년정보문화센터를 설립하고 도서출판 두리의 대표와 월간 「말」지의 기획위원, (주)비디오 그래픽스의 전무이사로 활동했지만 사회운동에서 발을 뗀 적이 없었기에 늘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내에게 참 미안한 일이 많습니다. 결혼 이후에도 두 번이나 경찰에 연행되어 구속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고 지방순방이다 해서 집을 비우는 날도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헤어지자고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아내는 아이를 낳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묵묵하게 지금까지 함께 했습니다』

禹相虎씨는 지난 16代 총선에서 출마해서 같은 학교 선배인 李性憲(이성헌·한나라당)씨와 붙어 1000여 표 차이로 낙선했다.

이외에도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李南周(이남주·82학번)씨는 졸업 후 중국으로 유학하여 北京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있다.



全大協 2기

영화배우로 변신


全大協 2기를 이끌었던 인물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吳泳食(오영식 36)씨였다.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 청년위원장과 全大協 동우회 회장, 한국청년연합회 공동준비위원장을 지내고 지난해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청년위원장을 맡아 제도 정치권에 진입했다. 현재 민주당 전국구 후보 24번이다.

재야 활동 외에는 지역구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렇다 할 활동을 보여 주지 못하지만 향후 정계에 진입하면 특유의 조직력을 발휘할 것으로 주변에서는 기대하고 있다. 1998년 고려대 경영대학원 금융경제 석사과정에 입학했으며 단기 유학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기 全大協에서 웬만한 총학생회장보다 더 유명했던 사람은 金重基(김중기·35)씨였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조국통일추진위원장으로 남북청년학생회담 남쪽 대표를 맡아 판문점으로 북쪽 학생 대표를 만나러 가겠다고 싸우면서 대중에게 크게 어필했다. 지금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잘 몰라도 金重基씨만큼은 잘 안다고 할 만큼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가 다시 대중에게 모습을 보인 것도 또한 극적인 것이었다. 다른 운동권 출신과는 달리 그는 영화배우가 되어서 돌아왔다. 1992년 말, 모 극단의 워크숍 단원으로 들어가 연극을 시작한 후 199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28세의 나이로 입학해 본격적인 연기수업을 받았다. 이후 그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라는 영화에 출연, 연기자로서 선을 보였다.

이 영화에서 金重基씨는 운동권 출신의 방황과 고민을 담아내는 역을 맡아 마치 자신의 문제를 드러낸 것 같은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이후 영화 「북경반점」에서 철가방 역을 맡기도 했다. 현재 金씨는 영화전문지인 필름2.0 인터넷 영화미디어의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鄭明守(정명수·36)씨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세종정보기술」이라는 벤처기업의 사장이다. 세종정보기술은 직원 18명에 연간 매출액 22억이 넘는 탄탄한 중소기업이다. 사업과 함께 全大協 동우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그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청년의 역할에 대해 힘 주어 말했다.

『앞으로 우리 운동은 통일운동이 중요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민주와 反민주의 戰線(전선)이 구축되었다면 앞으로는 통일 對 反통일의 戰線이 형성될 것이며 우리 사회 청년들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386세대의 저력에 대해 대한민국의 현실을 온몸으로 겪었고 승리감을 맛보았던 세대이기에 희망이 있다고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도 그는 운동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全大協 2기에서 또다른 명망가였던 외국어대학교 총학생회장 咸칠성씨는 대학 졸업 후 웨딩사업과 컴퓨터 사업 등 4~5가지 사업을 벌였지만 결과가 신통치 못했다.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깊은 좌절감을 맛본 그의 현재 소식은 全大協 동우회원들 간에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全大協 3기

임종석·임수경


全大協이 낳은 가장 걸출한 스타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국회의원 任鍾晳(임종석·36)씨가 의장으로 있었던 全大協 3기는 대중적인 스타가 많이 배출된 시기이기도 했다. 16代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화제가 되었던 任씨는 대내외적으로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제도권 정치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실험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 비교적 투명하게 지역구를 관리하고 참신한 정책을 입안하고 있지만 당내 민주화를 위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예상보다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任鍾晳씨와 함께 잊혀지지 않는 인물은 임수경씨. 그녀는 단신으로 북한을 방문해 남한 사회에 충격을 던져 주었다. 「통일운동의 물꼬를 트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는 임수경씨는 졸업 후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회 등에서 활동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기도 했으나 미국에서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귀국했다. 386 국회의원들의 술자리 추문을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던 임수경씨는 예전의 명성에 비해 이렇다 할 활동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任鍾晳씨와 함께 임수경씨를 북한으로 보낸 全大協 조통위 위원장 全文煥(전문환·35·前 서강대 총학생회장)씨는 현재 청산학원의 부원장으로 있다.

1989년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이자 수원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이던 李基宇(이기우·35)씨는 지방의회를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중이다. 경기남부연합 조직부장을 거친 그는 수원 지역의 재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다 경기도 의원에 출마, 전국 최연소 광역의원이라는 기록과 함께 당선됐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말했다.

『가두투쟁 위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는 지나간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기성정치권에게 모든 걸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지역 주민들의 생활 속의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지방 의회는 대안적인 정치를 이룰 수 있는 곳입니다. 젊은이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시도하겠습니까』



全大協 4기

무소속 宋甲錫 후보


全大協 의장 중 유일하게 지방 대학 출신이었던 宋甲錫(송갑석)씨는 光州市 남구에서 지역구를 관리하고 있다. 졸업 후 미디어메써드 대표이사로 기업을 꾸리기도 했던 그는 광주 YMCA 등의 청년단체에서 활동하다 지난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한 후 기성정치의 벽을 실감했다고 한다.

宋씨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은 光州는 민주당의 텃밭이라는 기존의 그릇된 관념을 깨트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진세력을 통한 세대교체는 기존 정치권에 요구해서는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새로운 정치를 위해서는 개인의 힘으로라도 부딪쳐 봐야 한다는 결론으로 선거에 나섰지만 현실 정치의 벽을 실감해야 했습니다』

현재 그는 새 정치를 꾸려나갈 지역인물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정치 진출을 돕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全大協 5기

200억원대 재산가


全大協 5기 의장은 한양대 총학생회장 출신이었던 金種植(김종식·34)씨다. 4기 의장까지 예외 없이 정치권에 진입한 것과는 달리 그는 평범한 사회인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한때 인터넷 쇼핑몰 회사에 다니다가 외국어학원에서 직장생활을 하기도 한 金씨는 인터뷰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그는 『長江(장강)의 뒷물이 되고 싶다』는 말로 멀리 보고 살고 싶다는 의지를 조심스럽게 비추었다.

全大協 5기 시절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李澈相(이철상·33)씨는 현재 잘 나가는 벤처기업의 사장이다. 全大協 임시의장을 지내기도 한 李씨의 변신은 한동안 언론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바이어블 코리아라는 이름의 李씨 회사는 벤처하면 대개 인터넷과 관련된 사업을 하는 것과는 달리 철저한 제조업 벤처회사다.

李澈相씨가 바이어블 코리아를 설립한 것은 1997년. 대학졸업 후 재야 운동단체인 전국연합에서 활동하다 결혼과 함께 다가온 생계문제로 고민하던 중 우연하게 휴대폰 배터리가 무한한 시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적은 자본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의 사업엔 행운이 겹쳤다. 서울대 응용화학부 吳承模(오승모) 교수의 도움으로 일본 소니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기존의 리튬이온 전지를 채용한 배터리에 비해 폭발위험이 적고 성능도 우수한 리튬폴리머 전지를 개발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리튬폴리머 전지는 삼성전자에 공급계약을 따내며 월 15만개 이상 판매되고 있다.

지난해 코스닥에 진출했으며 등록 당시보다 株價가 떨어졌지만 최근의 주가기준으로도 그는 200억원대의 재산가가 되었다.



全大協 6기

민주노동당 평당원


全大協 6기 의장이었던 태재준씨(서울대)는 기성 정당에 진입했던 선배들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 화제가 되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기도 했던 그는 民主勞動黨(민주노동당) 평당원으로 입당해 나름대로의 이념 색깔을 유지하려 했다.

태씨는 『386세대들이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 그 정당의 정강정책을 한 번 따져보고 입당했는지 모르겠다』며 『역사발전에서 중대한 구실을 한 386들이 정치를 하려면 진보의 씨앗을 기르는 쪽으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질타했다고 한다. 현재 태재준씨는 시카고 주립대학에서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韓總聯 시절-1993~2001년

수감중이거나 막 출소 상태


全大協을 계승 발전한 단체가 韓總聯(한총련·한국대학 총학생회연합)이다. 韓總聯은 1993년 5월 발족되었다. 韓總聯 1기 의장이었던 金宰用(김재용·한양대)씨는 졸업 후 청년단체에서 활동했지만 지난해 온몸에 염증이 생기는 클린씨병에 걸려 투병중이라고 한다.

2기 의장인 金鉉俊(김현준·부산대)씨는 부산에 있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이렇다 할 소식을 아는 이가 없다. 韓總聯 3기 이후의 의장들은 아직도 감옥에 수감중이거나 막 출소한 상태여서 별다른 사회활동을 못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386 출신 운동권 리더들의 오늘의 삶은 대개 정치권과 연관되어 있었다. 국회의원이 되었거나 지역구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제3의 힘 李揆熙(이규희·39) 조직위원장은 『누군가 이 사회를 청소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 全大協 의장 출신들이 거의 정치권에 들어갔다고 백안시하기보다는 정치권에 새로운 활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에 편중되어 있는 現 상황에 대해 못 마땅해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중 앞에서 화려한 면모만을 보였던 총학생회장 출신들이 정계에서도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운동권의 소위 언더그룹들은 비판적이다.

1986년 언더그룹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학생회장들이 옥고를 치르고 고생을 했다고는 하지만 언더그룹에서 고생했던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더 고생했으니 더 대접을 받아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회에 적응을 잘 못하는 후배들이 옛 全大協 의장들의 오늘의 모습을 보고 좌절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지적했다.

1987년 연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던 崔榕眞(최용진·35·보험중개인)씨는 『기성정치에 진입한 이들이 참신한 정치와 개혁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면서도 『제도 정치권의 장벽이 두터워 오히려 기성 정치권에 흡수되거나 이용되는 사례가 있었던 점을 386 정치인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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