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5 / 안병직 / 2025.130 / “대한민국 정통성과 국민통합” / 펜앤마이크 기고문
-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은
- 세계사적 이성인 UN의 결의에 의하여 건국되고,
- 역설적으로 6.25 사변 중에 형성된 60만 대군을 배경으로 산업화에 성공했으며
- 민주화운동과 산업화를 기반으로 민주화를 달성함으로써”라 정리하고 있다.
- 건국에 대해 / 좌파라면 UN이 아니라 상해임정과 독립운동에서 건국의 근거를 찾았을 것이다. / 당시 UN은 진보적 성향과 사조의 산물로 안병직에 따르면 “세계사적인 이성”
- 산업화에 대해 / 좌파라면 산업화에 대해 말하지 않거나 박정희와 군부가 아니더라도 산업화가 가능했다고 말할 것이다.
- 민주화에 대해 / 민주화운동이 박정희 산업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 / 좌파라면 민주화운동은 독립운동의 숭고한 저항,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의 고귀한 희생으로 이뤄졌다고 말할 것이다.
- 불과 3줄 정도로 대한민국 역사를 간결히 요약하고 있다. 나를 포함해 한 세대 전체가 무려 40년 동안 해방전후사의인식 프레임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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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특별기고]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국민통합
김용삼 대기자//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입력 2025.01.30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93852
12·3 계엄 사태로 나라가 어수선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세계사적 이성(理性)인 UN의 결의에 의하여 건국되고, 역설적(逆說的)으로 6·25사변 중에 형성된 60만 대군을 배경으로 산업화에 성공했으며, 민주화운동과 산업화를 기반으로 민주화를 달성함으로써, G7의 옵서버로 되었다. 이러한 대한민국은, 아직도 세계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저개발제국이 따라야 할 발전 모형임과 동시에 이 국가들에 대하여 원조와 지도를 행함으로써, 현대 세계사를 선도할 위치에 있다.
이러한 국가를 분단국가의 일부로서 결손(缺損) 국가에 불과하다고 보는 일부 좌파의 견해도 있으나, 이러한 견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북한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빚어진 오해에 불과하다. 현재 북한은, 3대 세습의 전제폭군(專制暴君)이 인민을 노예로 만든 결과 발전 동력을 상실함으로써 붕괴의 위기로 몰려, 조만간 대한민국에 흡수될 운명에 놓여 있다. 따라서 12·3 계엄은 북한이 위기에 몰리고 대한민국이 워낙 튼튼한 정치경제적 체질과 높은 국민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시적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1. 건국
대한민국이 UN의 결의에 의하여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UN의 결의는 신생 독립국의 출현을 뒷받침하는 20세기 후반의 세계사적 이성이었다. 대한민국 건국은 독립운동 세력이 주도했으나, 그 배후에는 대한민국을 근대국가로 경영할 수 있는 일제치하에서 양성된 지식인과 기술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제가 마련해 놓은 법률적 제도와 산업적 기반도 있었던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을 1919년 상해 임정의 결성으로 잡고자 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해 임정은 일개의 독립운동단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보더라도 상해 임정은 국가 성립의 기본 요건인 주권·국민·국토 중의 어느 하나도 갖춘 것이 없었다.
최근에 민주당의 일각에서 일제시대 조선인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리고, 정부도 그러한 헛소리에 맞장구를 쳤다. 일제시대에 과연 한국이 있었던가. 사실의 왜곡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헛소리를 낳는 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이다.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당시 회의장.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당시 회의장.
제헌국회에서 제정된 헌법은 진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 헌법에는 당시의 시대적 사정을 반영하여 사회주의적 요소도 가미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기본적 골격으로는 정치체제로서의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체제로서의 시장경제가 구현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 이전에 국가도 없었던 나라에서 어떻게 갑자기 그러한 선진적 헌법이 갖추어질 수 있었던가.
그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대한민국은 현대 세계사적 이성을 바탕으로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선진제국의 국가체제를 뒷받침하는 제도들을 도입하여 건설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40여 년에 걸쳐 미국에서 흡수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경성제국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헌법학자 유진오의 조력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헌법의 시행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식민지하에서 제정되었으나 독립국가에 알맞게 수정된, 민법과 형법 등 근대적 법률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는 어디까지나 제도일 뿐이다. 이러한 제도가 시행되려면,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두 가지 기본 조건은 국민군의 형성과 재정자립이다. 우연하게도, 정말로 우연하게도 한국에서는 6·25 사변을 통하여 저개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60만 대군이 형성되었다.
식민지 체제의 붕괴로 인한 일본의 자본과 기술의 철수와 남북의 분단으로 국민경제는 극심한 불균형에 빠졌으나, 귀속재산의 불하와 미국의 원조로 기존의 산업이 부분적으로 가동되고 또 추가적으로 새로운 산업이 건설됨으로써 겨우 유지될 수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국민의식의 고양과 기술개발에 불가결한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고등교육을 강화했다. 더 나아가 1953년에 체결된 한미동맹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보장하는 기둥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는 건국은 되었으나, 국민경제는 미국의 원조로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2. 산업화
5·16 군사정변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세력이 정권을 잡는 일종의 정치적 변혁이었다. 한국군은 미군에 의하여 양성되고 당시에 민간의 미국 유학생보다 적지 않은 장교들이 미국에 유학했다. 5·16 군사정변은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고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의 해결’을 정치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처음에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경제정책의 기본방향을 수입대체공업화로 잡았으나, 이러한 정책은 한국 근대경제가 자립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세계경제의 일환으로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 뚜렷한 징후 중의 하나가 자유당 시절부터 시달려오던 외화 부족으로 나타났다.
이론학습보다 사물(私物) 관리에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서 차석(次席)으로 졸업했다는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수출산업부터 챙기기 시작하고, 무역업에 종사하던 기업가들도 인력자원 이외에는 변변한 자원이 없는 한국에서는 수출가공산업의 진흥이 경제발전과 외화 획득의 첩경이라는 것을 건의하기 시작했다. 이미 제1차 5개년계획 중에 경제정책의 기본방향이 수출지향 공업화 정책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권의 명운(命運)을 걸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던 것이다.
수출지향 공업화 정책은 단순하게 저개발국의 외화 부족을 해소하는 수단만은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자생적 발전의 길이 아니라 선진국에의 캐치 업(catch up) 과정을 통하여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나라에서는 자본·기술·시장·관리능력 등의 모든 면에서 처음부터 자립적 경제발전을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나라의 경제발전의 기본방향은 개혁·개방일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 NICs의 경제발전방향을 개혁·개방으로 요약한 중국의 등소평(鄧小平)은 중국 역사에서 잊힐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또 개혁·개방정책은 고도성장이라는 특징이 있었다. 인류사에서 고대와 중세에는 경제 성장률이 제로에 가깝거나 마이너스인 경우가 많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선진제국의 그것도 미국 및 일본과 같은 특수한 나라를 예외로 하면 1% 미만이거나 높아야 2%에 불과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의 NICs 제국에서는 그것이 5~10%에 이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들 나라들의 경제성장률이 이와 같이 높을 수 있었던 것은 선진제국에서 4백년에 걸쳐서 축적되어온 경제발전의 기본적 요인인 제도와 기술을 짧은 시일 내에 자유롭게 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발성(後發性)의 이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의 세계 모든 저개발국은, 선진국의 지도와 원조를 받으면, 압축 성장(壓縮成長)을 통하여 한 두 세기 내에 선진국이 될 수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은 계획경제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시장 친화적(市場親和的)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 이후의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계획 경제적 요소가 강했다. 특히 그는 북한과의 첨예한 군사적 대결상황 하에서 자주국방을 추구하려고 했기 때문에 당시의 시장적 조건과는 어울리지 않는 중화학공업의 건설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즉,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정부가 위로부터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제순환이 균형을 잃고 정치가 불안정에 빠진 결과, 1979년의 10·26 사태를 자초하고 말았다. 전두환 정권은 노골적인 군사적 폭압으로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고 김재익의 경제자유화 정책을 받아들여 물가폭등을 잡는 동시에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함으로써 1876년 개항 이래의 만성적 무역적자 체질을 일거에 해소했다. 이러한 경제적 선진화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1987년에는 6·29 민주화 선언을 했던 것이다. 6·29 선언은, 한국사에서 이룩한 찬란한 역사적 업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나, 1980년의 5·18 광주사태 때문에 드러내놓고 자랑할 수 없는 상황이다.
3. 민주화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민주화를 추동(推動)한 세계사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특별한 운동이었다. 민주화운동은 처음에는 1960년의 3·15 부정선거를 반대하는 ‘4·19 혁명’ 및 1964년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등 학생 등 지식인이 주도하는 순수한 자유민주주의 및 민족주의 운동으로 출발했으나,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배후에는 인혁당 및 통혁당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노당의 잔재(殘滓)인 사회주의 운동도 있었다.
한국은 1960년대 이래 급속한 산업화로 학생과 노동자들이 급속하게 증가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은 학생운동을 중핵(中核)으로 하는 노동운동 및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민주화운동은 대중운동으로 발전함에 따라 사회주의 혁명운동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띠기 시작했는데, 전대협(1987~93) 및 한총련(1993~)의 학생운동은 폭압적 군사정권의 후유증으로 종북적(從北的) 인민민주주의 혁명운동의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
민주화 시위의 한 장면.
민주화 시위의 한 장면.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학생운동이 급속하게 쇠퇴하고 노동자, 농민 및 지식인의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단순한 정치적 이념운동으로부터 생활상의 요구를 바탕으로 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대의 중엽으로 들어와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좌파의 ‘촛불혁명’으로 발전했는데, 2020년대에 들어와 종북적 인민민주주의혁명운동에 위기를 느낀 우파는 ‘광화문운동’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어떻게 반세기도 넘게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가. 거기에는 몇 가지의 배경이 있었다. 첫째, 한국 정치는 6·29의 민주화 선언에 이르기까지 권위주의 체제하에 있었으나, 헌법은 제헌헌법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현하고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72년의 유신체제와 1981년의 제5공화국 하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이 간선(間選)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이 선출되는 등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체계가 심각하게 훼손(毁損)되는 일도 있기는 했으나, 자유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기타의 여러 제도들은 건재했다. 이러한 한국의 정치체제는 일당독재와 계엄령 하에 있었던 장개석 지배 하의 대만 정치체제와는 뚜렷이 달랐다.
둘째,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야당의 민주회복운동과 상호 협력 하에서 진행되었다.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이 김영삼·김대중이 이끄는 야당의 지도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셋째,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동맹국인 미국 정부로부터 응원을 받았다. 정부가 지나치게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경우, 미국 정부가 그것을 견제함으로써 민주화운동은 든든한 우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상적으로 보면, 민주화운동은 자유민주주의운동이 주류였으나 그 배후에는 민족주의운동, 통일운동 및 사회주의운동도 있었다. 그러한 다양한 사상운동이 서로 얽혀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나라가 분단된 저개발국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민주화, 자립, 통일 및 근대화·선진화 등의 과제들을 동시에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의 6·29 선언에 이르기까지는 위의 여러 운동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명목 하에서 동시·병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6·29 선언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회복되고 경제적 자립이 일단 달성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민주화운동은 전대협 및 민노총의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주의운동과 통일운동이라는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었다. 특히 전대협과 한총련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운동은 종북적 인민민주주의 색채가 강했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민노총 운동은 사회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면서도 동시에 생활상의 운동이라는 성격도 띠고 있었다.
2010년대의 중반으로 들어오면서 민주화운동이 주로 민노총을 배경으로 하는 ‘촛불혁명’으로 발전했는데, 이에 대항해서 2020년대에 들어와 전광훈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광화문운동’이 급속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은 ‘촛불혁명’의 사회주의운동과 ‘광화문운동’의 자유민주주의운동으로 선명하게 분화되었다.
4. 국민통합
지난해 제야(除夜)에 백낙청 교수는 백낙청TV를 통하여(「창비 주간 논평」에도 게재되었다 한다) 신년의 좌익진보진영의 운동방향으로서 「변혁적 중도」주의를 제시했다. 이 「변혁적 중도」주의는, 6·29 선언으로 성립한 한국의 정치체제가 2016·7년의 ‘촛불혁명’으로 그 수명(壽命)을 다했기 때문에, 이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을 위한 대중운동의 방향으로 제시된 것이라 한다.
여기에서의 변혁이란 자유민주주의, 민족해방, 남북통일 및 민중혁명 등의 변혁적 사상을 가리키며, 중도란 좌익진보세력을 중심으로 하고 중도층까지도 포괄하는 대중운동노선을 가리킨다. 그런데 백 교수는, 자유민주주의혁명과 민족해방은 6·29 선언을 계기로 이미 달성되었으며, 민중혁명도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의 정치체제로서 자유민주주의에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가미시킴으로써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남북한의 국가연합을 그 내용으로 하는 통일혁명의 과제는 그대로 남아있다고 보는 것 같다.
'변혁적 중도'를 주장하고 나선 백낙청.
'변혁적 중도'를 주장하고 나선 백낙청.
그는 중도주의적 대중운동을 ‘촛불혁명’에서 발견하며, 또 이 ‘촛불혁명’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결사체가 ‘이재명 대표가 바꾸어 놓은 민주당’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변혁적 중도」주의는 당면의 정치운동과제로서 이재명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남북의 국가연합을 이루기 위하여 발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변혁적 중도」주의에서는 그간의 백 교수의 사상적 진전(進展)과 지체(遲滯)가 동시에 읽힌다. 사상적 진전은, 첫째는 6·29 선언을 계기로 달성된 자유민주주의혁명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백 교수가 종래에 NL론자로서 변혁의 과제로서 민족해방을 강조했으나, 이번의 글에서는 민족해방이 변혁의 과제로서 적극적으로 제시되고 있지 않다. 종래의 세계체제론을 포기한 것인가.
셋째는, 민중혁명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인 데 대하여, 김대중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체제에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점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점은 그가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 같은 나라도 세계 민중에게 사상적인 지표가 되기 힘든 형국입니다‘라는 발언에서 거듭 확인된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지체는 여전하다. 첫째 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당과 인민의 빈틈없는 일치를 신봉하는 체제’라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수령이 두뇌이고 인민들이 손발이라고 보는 것-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총체적 노예제’-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백 교수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가.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의 남북회담이 하나같이 실패로 끝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두 북한의 이러한 정치체제를 애써 외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둘째 백 교수는 변혁적 과업으로서 남북 간의 국가연합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데, 김정은이 남북통일을 부정하고 남북한의 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규정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과연 남북 간의 국가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국가연합의 최소한도의 조건인 통신(通信)·통행(通行)·통상(通商)의 3통 중에서 어느 하나도 이루어질 것이 없는 상황이 아닌가.
종래에 남북 간의 지도자나 예술인들의 교류가 가능했던 것은 조공(朝貢)인지 뇌물(賂物)인지도 모를 비자금 헌납(秘資金 獻納)의 성과(?)가 아니었던가. 이재명이 농장 개설이라는 명목으로 그 지인들을 통하여 북한에 헌납했다는 8백만 달러의 비자금도 북한과의 교섭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지불해야 하는 비자금이 아니었던가. 언제까지 우리가 김정은의 노예로서 남북교류라는 원숭이 놀음이나 해야 하는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 교수가 「변혁적 중도」 주의로써 이룩하고자 하는 남북의 국가연합은 과거의 남북교류 경험이나 남북한의 관계를 ‘적대적 국가’로 규정하는 김정은의 국책방향으로 보아 실현 불가능한 것이 명백하다. 지금까지의 남북 교섭의 경험으로 보아 아무리 비자금을 많이 주더라도, 비자금을 헌납하는 데 불과할 뿐, 개성공단의 폐쇄와 금강산관광사업의 취소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성과(?)는 제로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
좌파 진보 진영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공상적(空想的) 변혁과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한국은 현재 여야 간의 정쟁으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다. 왜 국민들이 좌파 진보 진영의 공상적 변혁 과제 때문에 말로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시달려야하는가. 만약 좌파진보진영이 이러한 공상적 변혁과제를 포기한다면, 대한민국의 장래는 아주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백 교수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한국은 이미 자유민주주의혁명과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고, 정치 체제로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백 교수가 ‘촛불혁명’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는, 실제로는 자유민주주의의 산물인, ‘K팝과 K문학, K민주주의’가 창조적 문화현상으로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20세기 세계 이성의 일환으로서 출발하고, 70여 년에 걸쳐서 건국, 산업화 및 민주화의 과제를 달성함으로써 선진국의 일원으로 비약했다. 대한민국의 선진화는, 캐치 업 과정을 통하여 달성되었기 때문에,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선진제국의 장점들을 흡수하여 선진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생동감이 있는 국가로 발전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대한민국의 정치·경제·문화는, 백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K정치·K경제·K문화로써, 현대 세계사를 앞장서서 끌고 가는 모범적인 사례로 칭송되고 있다. 이러한 국가가 왜 여야의 탄핵과 계엄이라는 당쟁(黨爭) 때문에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되어야 하는가.
문제의 본질은 아무런 현실성이 없는 국정과제를 공상 속에서 조작(造作)하는 데 있다. 여야는, 억지로 정치를 하려고 하지 말고, 현실성이 있는 국정과제를 찾아내는 데 매진하고 국민통합을 이룸으로써 정쟁을 끝내야 할 것이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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