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3

<포럼>안병직과 박현채

<포럼>안병직과 박현채



<포럼>안병직과 박현채
기자2011. 5. 27. 문화일보



남시욱 / 언론인, 세종대 석좌교수

서울대 안병직 명예교수를 비롯한 뉴라이트 운동가들이 펴낸 한 권의 책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라는 제목의 이 책은 이름 그대로 6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건국과 산업화에 이어 민주화까지 이룩한 보수 세력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바람직한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의 두번째 10년에 접어들어 선진화라는 새로운 국가적 과제를 앞에 두고 나라가 방향감각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 책이 담론의 소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책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안 교수가 자세히 쓴 1960~70년대의 친북 세력 실상이 주목 대상이 되고 있다. 안 교수는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 사건은 예외없이 당국의 용공 조작이 아닌, 실제로 국가 전복을 위한 인민민주주의 혁명운동이었다고 밝혔다. 이들 사건은 모두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계속 의혹의 대상이 돼왔다.

안 교수의 글 중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대목은 자신의 대학 시절 그의 대학 선배인 좌파 경제학자 박현채의 가르침을 받은 사실을 증언한 점이다. 박현채는 소년 빨치산 출신으로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위대한 전사 조원제'의 모델이기도 하다. 중학교 재학 때 남로당의 비밀 외곽조직인 민애청(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의 세포 총책을 맡아 활동을 벌인 그는 6·25동란 때 북한 인민군이 패퇴하자 16세의 나이로 입산, 약 2년간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그는 처음에는 전남 무등산과 백아산에서 연락병 노릇을 하다가 20세 미만의 소년들로 편성된 소년돌격부대의 문화부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빨치산 활동 중 복부관통상을 입은 박현채는 하산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다음 풀려나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과대 경제학과에 안병직의 선배로 입학했다.

박현채는 대학원을 졸업한 다음 모교 강사가 돼 인혁당 사건으로 퇴직할 때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현채는 당시 박정희 정부의 외자의존·수출주도형 경제정책에 비판적인 민족경제론으로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박현채는 그의 민족경제이론뿐 아니라 사회구성체 이론으로 남한 좌파운동 이론의 사령탑 역할을 했으며, 월남식 반미 민족해방투쟁을 위해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됐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상당 기간 남한에서의 유격투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한다. 박현채가 61세의 나이에 타계한 다음에도 진보 진영 학자들은 그를 기리는 학술회의를 여는 등 그는 여전히 신화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박현채의 가르침을 받은 안병직 역시 학생 시절에는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의 저술을 탐독하고 한용운과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에 매료돼 좌파경제학자가 됐다. 그러나 안병직은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1980년대에도 한국경제가 계속 고속 행진을 하는 사실을 보고 그의 좌파경제이론을 청산했다. 안병직은 치열한 사상적 방황 끝에 자신의 사상을 바꾸게 되자 대학 강단에서 그로부터 경제학을 배운 애제자들을 불러 자신의 좌파이론이 잘못됐음을 깨우쳐 주었다. 안병직은 그 후 좌파 정권이 출현하자 뉴라이트운동의 지도자로 좌파 세력과 싸워 10년 만에 보수 정권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안병직과 박현채, 이 두 사람의 존재는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안병직은 박현채의 좌파사상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했지만, 지금도 대학을 비롯해서 학교교육 현장에는 좌파이념을 가르치는 스승이 많은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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