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1

386 - ‘제3의 힘’ collection

신당, 孫 주창 ‘제3의 길’ 논쟁 불붙나 - 경향신문

신당, 孫 주창 ‘제3의 길’ 논쟁 불붙나
입력 : 2008.01.13 



대통합민주신당에서 ‘제3의 길’ 논쟁이 촉발할 조짐이다. 손학규 신임 대표는 ‘제3의 길’ ‘신 진보’라는 화두를 제시했다. 실용주의에 인간·생명 존중이라는 진보적 가치를 버무린 것이다.

 당 내에서는 “노선을 ‘우향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반대론이 제기되고 있다. 손대표는 11일 취임 당시 당이 나아갈 좌표로 ‘신 진보’를 주창하며 “낡은 진보에 대한 대항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대표가 13일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전직 지도부와 고문 등 중진·원로들과 만나 당 화합을 위한 건배를 하고 있다. /김정근기자

그는 “낡은 진보가 이념 대결을 앞세우고 국민의 실질 생활보다는 이데올로기가 위주가 되는 정치를 폈다면 새로운 진보는 민주적 가치, 사람이 중심이 되는 21세기형 진보적인 가치여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영국 노동당이 자기 혁신을 통해 추구했던 제3의 길”을 적시했다.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은 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되, 사회적 평등을 부각하는 중도 통합적 노선이다.


손대표는 13일 취임 후 가진 첫 공식 행보도 민생 보듬기에 맞췄다. 그는 충남 태안의 기름 유출사고로 음독자살한 어민을 조문하고, 이천 화재 현장에서 부상을 입은 소방관 가족을 위로했다. 우상호 신임 대변인은 “민생 현장을 방문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돌보겠다는 취지”라며 “2월 국회에서도 민생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밝혔다.


손대표는 차별화되는, 구체적 정책도 제시했다. 부동산 취득·등록세 1% 인하 및 1가구 1주택 양도소득세 완화를 바로 실시하자는 것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조차도 부동산 시장에 대한 충격을 우려해 조기 실시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사안이다. 다만 손대표는 본고사 부활 및 특목고 확대, 한반도 대운하 추진, 재벌 위주 정책은 견제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이는 참여정부와 기존 대통합신당의 지향점을 좀더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개발 위주, 재벌 위주의 정책에는 반대하는 데서 차별점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손대표가 내세운 ‘제3의 길’식 실용주의의 탄착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목표는 대선에서 신당을 철저하게 외면한 중도적 성향 유권자 눈길을 잡겠다는 포석이다. 중도우파의 한나라당, 좌파의 민주노동당 사이 공간을 겨냥하는 틈새시장 공략법인 셈이다.


일단 당 내에서는 상당한 공감대를 모으고 있다. 수도권 386 의원, 호남 의원 등이 손대표를 지지한 것도 ‘제3의 길’에 동의해서다.

반면 ‘제3의 길’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친노 그룹과 김근태 의원 계열 일부는 “그러면 한나라당과 다를 게 뭐냐”고 반박하고 있다. 
한 의원은 “참여정부와 신당이 심판받은 것은 ‘좌향좌’를 해서가 아니라 실천은 않고 논란만 벌여서”라면서 “지금 ‘우향우’한다면 한나라당과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은 “지금은 더욱 선명한 노선을 보여줘야 총선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향후 지도부 구성과 총선 공천을 앞두고 재점화할 수 있다. 

손대표가 쇄신이라는 이름으로 ‘낡은 진보’파를 쳐내고, 실용을 내세워 중도적 인사를 내세우려 할 때 폭발할 수 있다. 

우상호 대변인은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려면 내부 인사들의 재배치가 아니라 외부에서 참신하고 경쟁력 있는 이들을 모셔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나라당도 ‘제3의 길’에 경계를 보내고 있다. 나경원 대변인은 13일 “부동산 관련세 인하 추진은 우리 주장과 다를 것이 없다”면서도 “그 인물이 그 인물인 신당이 변할 수 있겠는가. 국민 눈 속임에 불과하다”고 논평했다.

〈최우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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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6913.html

386의 무용담은 사양합니다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2013

이진순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수정 2013-05-10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이진순의 인생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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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야 망라한 정치권 386이 세대교체의 기치를 내걸고 99년 만든 ‘제3의 힘’ 참여
  • 2000년 룸살롱 사건으로 해체
  • 친구도 잃고 동지도 잃고 보따리 싸서 미국에 가다
  • “일단 살아남아 힘을 갖자”고 미친듯이 달려오기만 한 386들
  • 옛날에 뭐 했는지 뭐가 중요해요,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죠

<한겨레> 토요판에 ‘엄마의 콤플렉스’를 연재하는 이진순 올드도미니언대 교수는 
한때 ‘한국의 미래, 제3의 힘’의 실무위원으로 인터넷 홍보를 책임졌던 사람입니다. 

‘제3의 힘’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첫 번째 서울대 직선 총학생회장을 지낸 이정우 변호사를 중심으로 김영춘, 송영길, 정태근, 우상호, 이인영, 고진화, 천호선, 김서용 등 여야를 망라한 이른바 ‘386세대’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세대교체의 기치를 내걸고 1999년 창립한 정치운동 단체입니다. 

“썩어빠진 구정치”를 대체할 주역임을 자부했던 이 단체는 “독자적인 정당 건설을 몇 년 뒤로 미루되, 2000년 총선에서 국회 진출을 원하는 회원의 경우 나중에 ‘제3의 힘’으로 원대복귀하는 것을 조건으로 출마를 허용한다”는 구체적인 지침까지 마련했을 정도로 현실 정치 참여를 자신들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 5·18 전야제 후 일부 젊은 정치인들이 벌인 술자리가 임수경씨에 의해 ‘제3의 힘’ 게시판에 폭로된 데 이어
이정우 총무와 실무위원 전원이 게시판 글 삭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이 조직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허무한 결말이었습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이 코너에 유난히 자주 등장했던 그 세대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 저는 마침 이진순 교수가 한국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릎을 쳤습니다. 몇 년 전 어느 학술발표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제대로 공감하지도 못하면서 뭘 안다고 감히 해결책을 마련해줍네 마네 끊임없이 계몽하려고만 했다”며 자신의 20대를 눈물로 고백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 까닭이었습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겨우 인터뷰에 응한 그는 “지난 시절의 무용담은 늘어놓고 싶지 않다”며 미리 선부터 그었습니다. 일단 근황부터 물었습니다.

“매주 월수금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서울숲에 가서 건강달리기 모임에 참석해요. 
주로 성동구 아줌마들이 모여서 아무런 연고 없이, 회비도 없이, 하다못해 회원 명단도 없이 그저 함께 걷는 모임이에요. 
만나서 온갖 이야기를 다 나누지만 사실은 서로 연락처도 모르는 탈근대적인 모임이죠(웃음). 처음에 ‘무슨 아파트 사는 누구 엄마예요’라고 제 소개를 하니, ‘우리는 누구 엄마라고 안 하고 이름을 말하는데?’라고 하시더라고요. 

운동 끝나면 함께 김밥도 먹고 회식도 하고 응봉산으로 개나리 구경도 가면서 진짜 힐링이 돼요. ‘학부형 모임에서 상처받았다’고 일단 운만 떼면 앞뒤 맥락 없이도 아줌마 특유의 통찰력 있는 조언, 격려, 위로를 주시는데 그게 아주 적확하거든요.

”점거농성…장학퀴즈…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국 주립대 교수 신분을 아줌마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나요?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미국 살다가 11년 만에 왔다고 소개는 했지만, 그걸로 끝!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더 묻지도 않아요.”

-아줌마들끼리 모이면 가십이 많지 않나요?

“그게 아줌마 모임이나 취향에 대한 고정관념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저는 신입이라 주로 듣기만 하는데, 오늘이 6자회담 한·중 대표 만나는 날이라든지, 오세훈이 한양대 특임교수로 왔다든지 하는 시사적인 얘기는 다 그분들에게 들었어요.”

-학교는 휴직하신 상태죠?

“미국 생활이 재미없고 몸도 안 좋아서 작년에 재임용 통과하고 병가를 냈어요. 올해 7월에는 돌아가야 하는데 조심스럽게 사직 의사를 표명한 상태예요.”

-교수를 그만두신다고요? 왜죠?

“원래부터 교수가 되고 싶어 시작한 공부가 아니었어요. 
말하자면 긴데…. 99년에 386세대가 뭉쳐서 뭘 해보자고 시도하는 모임(제3의 힘)에 참여했어요. 
방송작가로 일하며 꼴딱 밤을 새우고 나서도 새벽이면 모임에 가서 회의를 준비할 만큼 열심히 했어요. 결과는 참패였죠. 이번 대선 때 사람들이 겪은 것 이상의 상실감을 저는 이미 그때 경험했어요. 
친구도 잃고 동지도 잃고, 제가 끌어들인 사람들에게도 미안하고, 되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정말 산속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보따리 싸서 미국에 갔어요. 

대학원 원서에 왜 공부하고자 하는지를 써야 하는데 정말 한 페이지도 못 쓰겠더군요. 뭘 쓰려고만 하면 눈물이 나는 거예요. 제게 영작을 가르치던 분이 일단 말로 해보라고 하기에, 제가 한참 망설이다가 ‘나는 다시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데 빈손으로는 갈 수가 없다. 

우리가 잘 안됐다면 왜 안 됐을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해결 못 하고 미국에 왔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어쨌든 뭔가 들고 가야 한다’고 콩글리시로 말했어요. 

반전 세대에 속한 선생님이었는데 제 얘기를 알아듣고 같이 눈물을 흘려주더라고요. 박사를 따고 2009년에 교수가 됐지만 늘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느꼈어요. 점점 그 생각이 강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됐죠. 몸도 여기저기 정말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돌아왔어요.”

-한국에 자리 잡으려는 사전 준비도 없이 그냥 돌아오신 건가요?


“뭔가를 하려고 노력은 하죠(웃음). 그러나 교수로 수평 이동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꿈꾸는 일을 이루기 위해 꼭 교수여야 할 필요는 없거든요.”

어떤 꿈인지를 묻자 ‘지식공유 운동’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시민들이 다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질 좋은 자료들을 갖춘 인터넷 기반의 시민 아카이브를 만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식순환협동조합과 소셜 벤처라는 두 흐름을 묶어내는 네트워크 코디네이터 노릇을 해보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그의 과거를 안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발상이었습니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2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 1985년 총여학생회장을 지낸 이진순은 같은 해 11월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고 1991년까지 노동 현장에서 치열한 운동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문화방송 장학퀴즈 출제자로 방송 일을 시작한 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의 방송작가로 이름을 날리며 2000년 연말 문화방송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미국 유학을 떠나 2009년 럿거스대학에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지금까지 미국 대학생들에게 시민저널리즘, 뉴미디어, 국제커뮤니케이션 등을 가르쳤습니다.

고2 때 진황운 선생님을 기억하는 이유


-어려서는 어떤 아이였나요?


“부모님이 헤어진 초등학교 3학년 이후에는 엄마랑 살면서 이사를 많이 다니고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집안이 풍비박산나면서 확 조숙해진 것 같고요. 말없고, 소심하고, 겁 많고, 그런데 속으로는 생각이 많았어요. ‘어른들이 나를 어린애로 대하니 그 기대에 맞게 어린애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야겠다’고 일부러 생각했을 정도로요.”

-얼짱으로 유명한 부잣집 딸인 줄 알았는데요.

“전혀. 초등학교 때 신문기사에서 우연히 ‘결손가정’이란 표현을 읽고, 그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느꼈어요. 동정의 눈길을 받는 게 너무 싫었거든요. 조숙하고 병적이고 친구도 없었죠.”

-그런데도 공부는 잘했군요.

“부침이 심했는데, 고2 때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면서 잘하게 됐어요. 진황운 선생님이라고 제가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첫 번째 친구였죠.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저희 반 60명이 모두 안 친한 척하면서 선생님과 개별적인 대화 통로를 가지고 있었어요(웃음). 공부하라고 들볶지 않으셨지만 뭐든지 우리 반이 1등을 했죠. 공부를 잘하면 책을 사주셨는데, 10명이면 10명 각자의 특성에 맞춰 꼭 필요한 책을 골라주셨어요. 제 가정통신문에 ‘바람이 분다 해도 깊은 바닷물 속의 물고기는 즐거이 유영할 수 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학생에게’라고 적어주셨던 기억이 나요. 만나 뵌 지 오래됐는데, 기사에 선생님 성함을 꼭 적어주세요(웃음).”

-서울대 총여학생회장 시절은 어땠나요?

“직장은 힘들면 사표 내고 나오면 되잖아요. 그런데 총여학생회장은 감옥 가는 순서 대기표와 같아서 사표를 낼 수가 없었어요. 운동권 내부의 비밀주의를 비롯한 여러 가지 불합리성 때문에 힘들었던 시기이기도 하고요.”

-학생운동 시절에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제가 잘못한 것만 열거해도 엄청나죠. 예를 들면 지금 사는 성수동은 제가 야학 했던 동네예요. 야학에는 두 종류가 있었어요. 교회 같은 데서 하는 검정고시 야학과 우리가 하던 노동 야학. 노동자들은 주로 검정고시를 위해 야학에 왔어요. 그런데 거기다 대고 검정고시 꼭 봐야 하냐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만 했죠. 그때 그냥 검정고시나 제대로 가르칠걸 하는 후회가 돼요. 흔히 386들은 자기 잘못한 거는 말 안 하고 고생한 무용담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옛날에 뭐 했는지가 뭐가 중요해요,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죠.”

-그래도 저는 우리 세대의 정통성이 1980년대 고시, 유학, 취업 준비한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김 교수도 이제 옛날 일은 잊어버리고, 지금 어떻게 사는지를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좋겠어요.”

나에게 힐링을 주는 건 동네 아줌마들

-‘제3의 힘’ 또는 386세대가 정치 분야에서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뭘까요?


“룸살롱에 왜 갔냐 같은 건 화두가 아니고요. 기성정당의 논리와 자기를 구별하는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실패한 거예요. 5·18을 맞아 광주에 내려갔으면 선배 정치인이 끌고 간다고 해도 ‘저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얘기하는 치기라도 보였어야죠. 

재수 없어 터진 사건이 아니에요. 정치인뿐 아니라 우리 세대 중장년층, 60~70년대에 태어난 박정희의 아들딸들이 갖는 일반적인 성취지향성의 문제예요. ‘일단 내가 살아남아야 하고 힘을 가져야 해. 일정한 직급에 올라가면, 그때 가서 우리 회사를 이렇게 바꿀 거야’ 하고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가 변하는 건 생각하지 못한 거죠. 제가 요즘 이런저런 운동을 하고 싶다고 하면, 정말 도와줄 줄 알았던 선배 중에 ‘네가 대학교수 정도는 돼야 어디 얼굴이라도 나오지’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렇게 기존 문법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모두들 상상력을 잃어버렸어요. 끊임없이 자기 상상력을 반납하면서 기존 페이스를 따라간 거죠.”

-고지부터 점령하라는 ‘고지론’의 노예가 된 셈이네요.

“그래서인지 옛날 똑똑하고 명민했던 선후배나 친구들을 다시 만나보면 
다들 너무 삶에 지치고 부대끼고 닳아서 멍해져 있어요. 
저 혼자만 10년간 어디 피난을 다녀왔나 싶을 정도예요. 
그런 와중에 저에게 힐링을 주는 게 동네 아줌마들이죠.”

언젠가 미국 출장길에 며칠 그의 집 신세를 진 적이 있습니다. 밤새 함께 떠들고 아쉽게 헤어지는 기차역에서 그는 제 손에 작은 봉지를 쥐여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김밥, 삶은 달걀, 사이다가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그가 친누나처럼 준비한 선물이었습니다. 
그 봉지가 남긴 묘한 한국적 정서에 울컥하면서 
‘이분은 결국 돌아오겠구나’ 확신했던 기억이 납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귀국한 그의 손에는 과연 한국 사회를 위한 어떤 선물이 준비되어 있을지, 기대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저의 마지막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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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egeyouri/222927232858
오늘의 패랭이

임수경 "나는 절대 주사파, 종북 아니다" 
새천년NHK "통일의 꽃은 나의 원죄" 5·18술판 원문 
송영길 김민석 박노해 우상호 탈북자 변절자 논란 ft. 친절한금자씨 카메오 출연

에서

2022. 11. 13. 

저는 단순히 술취한 우상호에게 욕먹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글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386, 사람들은 386이 어쩌구 하며 회의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저는 386이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갖고있습니다.

그 386의 기반은 바로 5월의 광주입니다
. 80년대의 학생운동은 그것으로 부터 시작되었고, 지속되었습니다. 광주를 떠나서는 386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저는 선배들이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5월의 광주에서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광주의 라디오방송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지도 않습니다. 그 커다란 가라오케에 그들이 유일한 취객이었다는 것이 말 해주듯이 광주 사람들은 5.18이 되면 먹고 노는 일을 자제합니다.

그런데 다른 일도 아니고 망월동 참배를 위해 광주에 내려왔다 는 사람들이, 386을 내세워 국회의원 선거전에 나와 그것을 기반으로 당선되었다는 사람들이, 낮에는 망월동에서 광주의 영령을 추모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광주의 정신을 밟아버렸습니다.

저는 감히 주문합니다. 386의 이름을 더이상 들먹이지 말던가, 망월동 참배가 아닌 놀러왔다고 하던가, 한때나마 그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음을 자랑스러워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1989년 7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한국외대 재학생 임수경이 북한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임수경 현상'이 생겼을 정도로 북한 주민들에게 문화 충격을 줬다. [중앙포토]




▲ 임수경은 방북 중에 평양에서 직접 만든 태극기를 목에 두르고 1989년 7월 27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문규현 신부(오른쪽)와 함께 광복절인 8월 15일 오후 2시 22분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다. 분단 이후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최초의 민간인이 됐다.


▲ "'저는 북한 체제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을 동경해서 온 게 아닙니다'라고 했더니 북측 인사들이 놀라더라.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당당히 말했고 판문점에서 몸에 태극기를 걸쳤다."


▲ 북한은 임 전 의원을 ‘통일의 꽃’이라 불렀다. 그가 북한 체류 중 가는 곳에 수십만의 인파가 몰리고 젊은이들 사이에 그가 입은 청바지와 티셔츠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임 전 의원은 같은 해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국, 체포됐고 3년 5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 출소한 임 의원은 결혼 후 미국에 건너가 살았다. 임 전 의원의 이름이 다시 거론된 것은 2000년 5월 이른바 ‘386 술파티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일시 귀국한 임 전 의원은 5·18 기념행사 전날 운동권 출신의 당시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과 총선 당선자들이 여성 종업원이 있는 단란주점에서 술을 마신 것을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 나의 일종의 원죄 '통일의 꽃'에서 벗어나려고 했어요

“저는 자꾸 벗어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나의 일종의 원죄(原罪), 통일의 꽃, 거기서 벗어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절대로 안 돼요. 20대, 30대 때까지만 해도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게 안 되는 걸 알아요. 저는 오히려 북한에는 관심이 없어요. 북한은 제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대한민국에 사는 북한에서 오신 분들에게 관심이 있어요.”

2014년 캄보디아 북한식당에서 ‘통일의 꽃’ 임수경 전 의원에게 무슨 일이?

“저는 오히려 북한에는 관심이 없어요. 북한은 제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

monthly.chosun.com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의 모습. 김여정은 최근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등 대남 공세를 주도해왔다. [연합뉴스]



▲ "30년 통일운동 조롱거리로" 임수경 속터지게 한 '평양 남매'

임수경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에게 연락이 닿았다.


-최근 남북 관계가 험악하다.


"연락사무소를 폭파한 '평양 남매'의 행동이 우려스럽다. 나를 포함해 통일 운동 세력은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기 위해 발버둥 치며 부단히 노력해왔다.

30년 이상 어렵게 뚫은 통일의 길이 이번 일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됐다. 답답해 속이 터질 지경이다."

-장관 후보 중 주사파로 분류되는 인사가 있어 우려스럽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나는 절대 주사파가 아니다. 주체사상을 제대로 접한 적도 없는데 평양 다녀오니 그렇게 몰고 갔다.

당연히 종북(從北)도 아니다. 분단국가에서 종북이란 단어는 멀쩡한 사람 한 명 쉽게 죽일 수 있다."


-'탈북자=변절자' 발언이 논란이었다.

"술자리에서 (탈북 청년이 운동권에서 보수로 전향한) 하태경 의원을 존경한다고 하길래 내가 하 의원을 비판한 발언이 와전됐다.

여대생 임수경의 영향을 받아 내려온 탈북자들을 좋아한다. 대체로 형편이 어려운 탈북자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좌파는 통일보다 평화를 강조하던데.

"나는 시베리아 벌판을 맨발로 걸어왔다. 분단이 정말 지긋지긋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10·4선언대로 하면 된다. 여권 들고 남북 자유 왕래부터 실현해야 한다."

"30년 통일운동 조롱거리로" 임수경 속터지게 한 '평양 남매' | 중앙일보

"30년 이상 어렵게 뚫은 통일의 길이 이번 일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됐다"

www.joongang.co.kr



(다음은 2000년도 오마이뉴스 기사입니다)



제3의힘 게시판 임수경씨

"5.18 술판" 글 원문 떠
임수경씨 "원문과 동일",
오마이뉴스에 확인


임수경씨의 5.18술판 고발 원문이 공개됐다.

민주당 젊은 의원들의 광주 5.18술판과 관련해 임수경 씨가 지난(2000년) 5월 24일 "제3의힘" 홈페이지에 올렸다.

삭제된 원문이 오늘(6월 2일) 오전 9시 55분 "제3의힘" 게시판에 올랐다. 작성자는 이름을 <...>이라고만 적었다...

임수경 씨는 오전 11시 30분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를 통해 "그게 원문이다"고 확인했다...

"제3의힘"의 박재구 팀장은 "그러나 000의원이 여자를 끼고 있었다는 원문 내용은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부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0/06/02 오후 1:50:36ⓒ 200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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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 씨 원문입니다. 그 날 한밤중에 우연히 제3의 힘에 들어왔다가 이 글을 프린트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임수경 씨 보호를 위해 공개를 회피하는 제3의 힘 입장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원문이 공개되지 않음으로 인해 쓸데없는 추측만 늘어나는 것 같아 그냥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여러가지 일로 잠시 서울에 온지가 벌써 한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오자마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많이 아팠고 - 거의 병원에 입원하 기 직전의 상황까지 - 개인적인 일들이 많아 많은 분들게 연락도 못드리고 한달을 보냈습니다.

혹시 저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연락도 안하고 괘씸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귀국을 한 가장 큰 이유는 5.18 전야제의 사회자로 행사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저는 그날, 5월 17일에 있었던 일에 대해 여러분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5월 17일 아침, 저를 포함한 전야제 관계자들은 아침 9시에 망월동 묘역에 가서 참배를 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가서보니 오후 1시에 여야 386 당선자들이 참배를 온다고 하더 군요.

저는 광주에 온 김에 저와 절친한 임종석씨와 만날 수 있을까 해서 그의 휴대폰으로전화를 걸었습니다. 광주에 내려오는 중이라며 1시에 꼭 만나자고 하더군요.

저는 이미 참배를 한 상황이고 오후에는 전야제 리허설이 있어서 사실 망월동에 다시 오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여러 선배들에게 이 기회에 한번에 인사를 하면 좋겠다 싶어서 다소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일부러 다시 망월동으로 가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당선자들 뿐만아니라 낙선한 분들도 같이 오셔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저는 그 선배들을 보며 든든하고 흐뭇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은 광주에서 하루 머물 예정이라며 저녁에 시간이 나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5.18 전야제 행사에 참가했구요. 다소 서언이 길었는데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전야제가 다 끝나갈 무렵 정범구 박사가 제가 있는 무대 앞으로 오셨습니다.

정 박사님과는 기독교방송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어서 상당히 친한 관계입니다. 휴대폰 번호를 적어주시며 행사가 끝나면 꼭 한번 보자고 하시더군요.

저는 오후 6시부터 밤 11시까지 전야제 사회를 보며 저녁밥도 쫄쫄이 굶어가며 내내 서있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뒷풀이 장소에서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지요.

그때 정박사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일행이 있으니 저보고 오라고 하시더라구요. 대부분 낮에 망월동에서 만난 분들이었지요.

저는 여러 사람들 모인 곳에 가기가 뭐해서 처음엔 안 가겠다고 했는데 대여섯 차례의 전화를 계속 받고보니 그곳에 안가는 것이 참 결례인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장소가 어디인지를 물으니 새천년이 어쩌구 NHK가 어쩌구 하시대요. 저는 새천년 민주당 사람들이 NHK 하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그곳은 새천년 NHK 라는 가라오케였습니다. 어쨌든 그곳으로 가서 그분들이 계신 룸으로 들어갔습니다.

찾을 것도 없이 적어도 7-8개의 룸이 있는 그 술집의 손님이 있는 방은 그 방이 유일했습니다.

문을 열자 송영길 선배가 아가씨와 어깨를 붙잡고 노래를 부르고 계시더군요.

박노해 시인은 아가씨와 부르스를 추고 있었고 김민석 선배는 양쪽에 아가씨를 앉혀두고 웃고 이야기하느라 제가 들어선 것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마이크를 잡고있던 송영길 선배님은 저를 보고 같이 노래를 부르자는 듯이 손짓을 하셨고 얼핏 보기에

정범구 박사를 포함하여 김성호, 장성민, 이종걸, 김태홍, 이상수 의원 등이 있더군요.

저는 아가씨들이 있건 말건 선배들에게 인사나 하고 가려고 다가서는 순간 누군가 제 목덜미를 뒤에서 잡아끌며 욕을 하더군요.

야 이년아, 니가 여기 왜 들어와, 나가...

믿고 싶진 않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우상호씨였습니다. 술집 아가씨들은 놀라서 모두 저를 쳐다보았고, 저는 매우 당황 했습니다.

​우상호는 -미안합니다. 저는 이 사람에게 더 이상 존칭을 붙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금 말했습니다.

​이놈의 기집애, 니가 뭔데 이 자리에 낄려고 그래? 미친년...

​저는 일단 방을 나와 저와 함께 온 전야제팀이 앉아 있는 방으로 갔습니다.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참외를 하나 집어들었는데 우상호가 들어와 앉더군요. 그는 다시 말했습니다.​​

아 그 기집애, 이상한 년이네. 아니 지가 뭔데 거길 들어와, 웃기는 기집애 같으니라고...

한두 번도 아니고 저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참외를 테이블에 던지며 저도 욕을 한마디 했지요.

​이런 씨*, 어따대고 이년 저년이야. 나두 나이가 30이 넘었고 애기엄만데 어디서 욕을 해...라고요.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시정 잡배들의 오고가는 대화도 아니고 참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어쨌든 계속 하겠습니다.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우상호에게 사과를 하라고 했지만 그는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술이 꽤 취해있긴 하더군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우상호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의 불만은 이것이더군요.

서울에 온지 3주가 지났는데 제가 연락을 안 했다는 것, 5.18 전야제 사회를 본다는 소리를 듣고 임수경 이름 또 팔아먹는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발언 중간 중간 이놈의 기집애, 저놈의 기집애, 이년, 저년 소리는 계속 되었구요.



그러더니 마무리를 하면서 자리에 있던 광주의 김태홍 당선자에게 선배님, 죄송합니다...하더라구요.



저는 그랬죠. 국회의원이라고 선배님이고 죄송하냐고... 나는 내가 존경하던 선배에게는 술집 아가씨들 앞에서 이년 저년 소리 듣고 끌려나와야 하고,



같이 고생하던 후배에게는 사과 한마디 없이 국회의원한테만 미안하냐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가씨들 나오는 술집에서 양주마실 팔자가 안되니



나가서 소주나 먹자고... 그리고 나왔습니다. 모두 일어서는 순간 우상호가 테이불에 있던 양주의 병을 새로 따더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왔 습니다. ​​





저는 그 자리에서 술을 한잔도 마시지 않았지만 계산대로 갔습니다. 이미 정범구 박사가 계산을 했다고 하더군요.


저는 명세서를 조목조목 써달라고 했습니다. 양주 두병에 음료수, 안주가 서너 가지로 22만 7천원이 나왔고, 양주 한병과 안주 한접시는 서비스였답니다.



저는 술집 아저씨한테 물었죠. 난 이집에 처음으로 오는데 이집은 처음 오는 사람한테도 서비스를 주느냐, 우리는 서비스 받을 일이 없으니 모두 계산서에 넣으라고 말이죠.



그 아저씨는 그냥 서비스로 드시라고 했고, 저는 계산을 하겠다고 부득불 우겼습니다. 그 아저씨는 좀 황당했겠지요. 서비스 주고 욕먹고...



아무튼 계산은 하되 다는 못 내겠다, 양주 한 병은 우상호가 땄으니 저 사람에게 꼭 받아라, 이미 계산한 돈은 정박사에게 꼭 돌려줘라 당부를 한 후



20만원을 저와 함께 전야제 사회를 본 송선태 선배님의 카드로 계산을 했습니다. 계산대에서 실랑이를 하며 저는 그랬습니다.



낮에는 검은 넥타이 매고 망월동 참배하러 온 사람들이 밤에는 아가씨 끼고 술먹고 잘들 한다 등등...



술마시고 노래부르며 떠들던 그 방에서는 아주 조용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한 말을 다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아무 반응이 없더군요.



가라오케 술집을 나서며 송선태 선배님에게 술값은 나중에라도 꼭 갚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지갑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송선배님은 물론 괜찮다고 하셨지만 저는 정말 갚을 생각입니다.​​





그때 우상호가 따라오더군요. 수경아, 이놈의 기집애야, 너 거기 안 설래? 아, 이 구제불능의 인간을 어쩌면 좋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우상호, 당신하고는 이제부터 끝이야, 우리 서로 아는 척 하지 맙시다. 나 정말 당신하고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저는 돌아섰습니다. 돌아서는데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요. 제 친구들은 다 압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세 사람을 대라면 그중에는 항상 우상호 형이 있었다는 것을...



저는 단순히 술취한 우상호에게 욕먹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글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386, 사람들은 386이 어쩌구 하며 회의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저는 386이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갖고있습니다.



그 386의 기반은 바로 5월의 광주입니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은 그것으로 부터 시작되었고, 지속되었습니다. 광주를 떠나서는 386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저는 선배들이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5월의 광주에서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광주의 라디오방송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지도 않습니다.



그 커다란 가라오케에 그들이 유일한 취객이었다는 것이 말 해주듯이 광주 사람들은 5.18이 되면 먹고 노는 일을 자제합니다.



그런데 다른 일도 아니고 망월동 참배를 위해 광주에 내려왔다 는 사람들이, 386을 내세워 국회의원 선거전에 나와 그것을 기반으로 당선되었다는 사람들이,



낮에는 망월동에서 광주의 영령을 추모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광주의 정신을 밟아버렸습니다.​​





만약 5.18 유족이 이 사실을 안다면, 386의 순수성과 역사성으로 그들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그들과 거리에서 어깨를 겨누며 민주주의를 외치던 동지들이,


5월 17일 하루종일 아들의 무덤 곁에서 참배객을 맞고 계시던 이한열 열사의 어머님이 이 사실을 아신다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감히 주문합니다. 386의 이름을 더이상 들먹이지 말던가, 망월동 참배가 아닌 놀러왔다고 하던가,



한때나마 그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음을 자랑스러워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더이상 믿음도 희망도 걸 곳이 없음에 앞이 캄캄합니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는 386 당선자가 망월동 묘역을 참배했다는 기사가 신문마다에 났더군요.



술에 취했던 그들은 다음날인 5.18 아침에 대통령이 참석한 기념식에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밤새 광주 영령을 진심으로 추모했다는 듯이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요.



제가 밥도 굶어가며 다섯시간씩 서서 전야제 사회를 보던 그 시간에 내가 존경하던 선배들은 아가씨와 술마시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면서,



오히려 나보고 5.18에 이름을 팔아먹었다고 말한 사실 역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아침 10시경, 제 휴대폰 벨이 울리더군요. 저는 그들 중의 한 명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화를 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우상호와의 선거전에서 승리한 이성헌 선배였습니다.



망월동에서 만났는데 반가왔다는, 서울에 올라오면 꼭 한번 만나자는 전화였습니다.



이성헌 선배는 제가 미국에 있는 동안 두 차례 만난 것이 전부인데도 우리나라로 귀국하실 때, 또 귀국을 해서도 저에게 미국까지 수시로 전화를 하던 분입니다.​​





전화를 끊으며 생각했습니다. 왜 이성헌이 당선되고 우상호는 선거에서 떨어졌는가를...


그후 며칠 동안 저는 그들로부터 단 한 통의 전화도, 제3자를 통한 메시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느닷없이 그 자리에 있었던 김성호 당선자가 전화가 와서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더군요.



통화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그날의 사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우상호와 아는 척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이죠.



그런데 다음 날인 오늘, 우상호가 전화를 했더군요. 아마 김성호 씨가 무슨 말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여보세요, 임수경씨 부탁합니다. 전데요. 수경아, 나 상호야. 누구시죠? 나 ;야, 우상호. 저는 우상호라는 사람을 모르는데요... 수경아, 미안하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저는 이렇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새천년NHK 라는 가라오케를 나설 때처럼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요...



한낮 버스정류장에서 땡볕을 받으며 버스를 기다리다가 받은 전화 한 통, 그것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저를 심란하게 만듭니다.



제 어머니는 우상호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하셨고, 저와 친한 선배언니는 아주 잘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잘 한걸까요, 잘못한걸까요...



긴 글을 마칩니다. 결국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셈이 되어버리긴 했는데, 제 개인적인 이야기라기 보다는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임수경 올림​​






2005년에 개봉한 <친절한 금자씨>에서 카메오로 출연한 임수경(37). 교도관 역할을 맡았다. 최민식·유지태·강혜정·송강호·신하균·류승완 등의 쟁쟁한 카메오들이다.


‘친절한 금자씨’의 카메오 임수경

임수경씨는 한국외국어대 재학 시절인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평양을 방문해 세상을 놀라게 했고, 그 때문에 3년4개월간 복역했다.



영화 제작진은 여성 교도소 풍경을 생생하게 재연하기 위해 배우 김부선 씨를 섭외했는데, 김씨가 임수경씨를 대신 소개했다.



임씨는 옥중 생활과 은어 등을 제작진에게 ‘친절히’ 설명했고, 그것을 계기로 교도관 역으로 출연했다.하지만 임수경씨는 개봉 영화를 편하게 볼 수 없다.



임씨는 지난 7월21일 필리핀 수영장에서 외아들을 사고로 잃었기 때문이다.

‘친절한 수경씨’의 가혹한 운명 - 시사저널

영화 에는 초호화 카메오가 등장한다. 최민식·유지태·강혜정·송강호·신하균·류승완 등 쟁쟁한 카메오 대열에 ‘통일의 꽃’ 임수경씨(37)도 있다 임수경씨는 한국외국어대 재학 시절인 1989년 전국대학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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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irenzedt.com/news/articleView.html?idxno=3305

[금요집담회] 다음 대통령 386에서 나올 수 있을까?
입력 2019.04.05 00:01
수정 2019.04.12 00:00

피렌체의 식탁 다른기사 보기


#포률리즘
#포퓰리스트
#86세대
#세대교체



1990년대, 총학생회장 출신 '스타'들 정치권 진출하며 '386' 형성
안희정-이광재 '중간 레벨' 386, 2002년 노무현 바람 일으키며 당청 주류 장악
이념 무장 핵심 조직 간부들은 오히려 '386'에서 이탈
80년대 중후반 '3저 호황', 2000년 벤처 붐, 2004년 중국 경기 타고 경제적으로도 고속성장
1997 외환위기: 아버지 세대 퇴출되며 386에게는 기회로 작용
58~74년생 급증하며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 입시 제도 계속 변화
다음 대선에는 386 출신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까?
비 운동권 386들, 2년 전 촛불을 끝으로 '민주화' 마음의 빚 덜었다.
지금은 386의 '민주화 동맹' 해체 과정
세대 갈등과 소득 계층 갈등이 중첩돼, 앞으로 소득 양극화 갈등이 더 심해질 것
386의 '욕망을 죄악시'하던 네거티브 정치가 지금은 스스로의 발목을 잡아
저성장 시대 서구 사회의 포퓰리즘 유행, 한국은?
'파천황'적 리더 없어 신생 포퓰리스트 정당은 등장 가능성 낮아
386의 기득권 분배할 제도적 방안 모색해야
정체된 사회에서 40대 리더십 등장, 한국은?
새로운 시대 적응 못하는 세대는 도태될 것
세대 교체는 무조건 희망적인가? 일본은 '아베 포퓰리즘'으로 퇴행<피렌체의 식탁>이 만든 새로운 코너 [금요집담회] 두 번째 주제는 이른바 '86세대'에 대한 이야기다.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세대, 계급, 위계: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라는 논문이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곧 이어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투기 논란'이 불거지며 '86세대'가 다시 사회 담론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이들은 현재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 언론, 사법, 시민사회 등의 영역에서 주류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정국 전망은 물론 한국 사회의 나아갈 길을 파악하기 위한 주요 변수이다. 이와 같은 '세대 담론'이 옳은 것인지 부터 시작해, 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사회경제적 맥락을 <피렌체의 식탁> 기획위원들이 짚어봤다. 외부 기획위원으로 홍성국 혜안리서치 대표와 고한석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참여해 김현종 발행인, 한승동 편집인, 김하영 편집장과 함께 만든다. 격주로 발행 되며, 자유롭고 거침없는 의견 제시를 위해 발언자는 익명으로 게시한다. [편집자]



80년대 민주화 운동, 90년대 정치권 진출

허생일단 용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586’은 원래 ‘386’이라 불리는 세대였다. 1960년대 태생으로 80년대 학번의 30대. 지금은 이들이 대부분 50대가 돼서 ‘586’이라고 하는 건데, 60년대 생이 성인이 됐을 때 대학 진학률이 50%가 안 됐다. 60년대 생을 모두 386, 혹은 586이라고 부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가오리1970년대 말 4년제 대학 진학률이 10%, 2년제 대학 진학률이 10% 정도였다. 1981년도에 졸업정원제를 실시하면서 사실상 정원이 30% 이상 늘어났다. 4년제 대학 진학률이 1982년부터 25% 정도였고, 80년대 마지막에는 40% 정도 됐다. 사실 60년대 생 과반 이상이 정규대학 교육 혜택을 못 받았고.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도 이른바 서울의 메이저 캠퍼스에 한정된다. 과연 ‘386’이라는 표현이 세대적 대표성을 갖고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다만 그들이 숫자적으로 많지 않았지만 그 당시 1985년 총선부터 1987년 6월 항쟁까지 사회를 움직여 왔다. 수적으로는 소수이지만 세대적 대표성이랄까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인정해줄 수밖에 없다.

양자‘386 세대’를 시대적 상징기호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실제 사회 권력구조는 이른바 ‘SKY’, 그 중에서도 서울대학교 동문 내에서 권력 서열이 정해졌지, 언제 연도별로 정해진 적 있나. 이런 세대 구분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이런 구분은 그 세대 스스로 하는 건가, 언론이 부여하는 건가.

세일러그렇게 얘기하면 어느 세대도 세대를 정의할 수 없다.

허생세대가 너무 광범위하고 모호한 개념이라면 ‘집단’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이들을 대표하는 정체성은 뭘까.

가오리왜 ‘386’이었냐. 이들이 30대가 되던 1990년대 중후반에 정치권에 들어갔다. 사실 기업체에 들어간 사람들이 30대의 나이에 주목을 받았겠나. 정치권에 가서, 야당의 이른바 ‘젊은 피’로 주목을 받은 것이다. 1992년 김민석을 시작으로 1996년 총선에서도 몇 명이 출마를 했었다. YS의 신한국당과 총선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386이 정치권으로 많이 들어간 때는 2000년이었다. 동교동계의 모 가신이 젊은 학생운동권 출신 인사들 공천에 적극 개입하고 후견인을 자처했었다. 정치권에 진출한 386들은 그때까지 학교 다닐 때 학생회장 했던 게 유일한 직업이었다. 2000년 16대 국회에 대거 진출한 이후에는 후견인 역할을 한 사람은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그들이 국회에 들어와 교두보를 확보한 뒤에 후배들을 계속 불러들였다.

세일러2004년 탄핵 때 대거 국회에 진출했다.

노무현 바람 이끈 중간 레벨 386이 당청 장악

가오리처음에는 당 이미지 쇄신을 위한 깨끗한 이미지의 ‘젊은 피’로 들어왔는데, 이들은 학생운동을 통해 조직논리와 역학관계에 밝으니까 어느 사이 당의 핵심세력이 됐다.

세일러제일 큰 건 2000년도였다. 그 전에 ‘제3의 힘’이라고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독자적으로 뭔가를 해보려는 모임도 있었는데, 2000년 선거에서 대거 공천되면서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 도생하게 됐다. 이후 분당해 열린우리당이 생기면서 결정적으로 ‘86정당’이 됐다.

가오리DJ가 야당 대표이던 1995~1997년 시절에 “30대랑 얘기할 때 가장 잘 통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광주항쟁의 비극을 대학 시절에 학습하고 그래서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똘똘 뭉친 세대니까. DJ가 느끼기에는 그 때 30대들은 의식이 확 전진된 세대다. 1992년에서 2000년 사이에 공천을 받은 사람들은 김민석, 임종석, 우상호, 이인영, 오영식 등 서울 메이저 캠퍼스 총학생회장 출신들이었다. 국회의원 되기 전부터 각종 투쟁, 수배 경력으로 이름이 났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2002년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 때부터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안희정과 이광재는 이전에 국회에 진출한 사람들에 비해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안희정과 이광재를 계기로 중간 레벨의 386 인사들이 대거 노무현 캠프에 합류했고, 노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는 당과 청와대에 대거 진출했다. 노무현 정권은 안희정과 이광재가 젊은 학생운동권 출신들을 대거 포진시켜 손발이 돼 움직인 정권이었다.

세일러학생운동권의 세력을 세 가지로 분류해서 볼 수 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학생회장들이 있었고, 그 밑에 ‘언더’라고 불리는 조직운동을 치열하게 했던 그룹이 있다. 이들은 맑스-레닌주의나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철저히 이념적인 인물들이었다. 이 그룹의 친구들이 사회에 진출한 뒤에는 공산권 몰락 등 현실에서 자신의 이념에 반하는 실패를 많이 경험했고, ‘이건 아닌 것 같다’며 오히려 반정치 내지는 중도보수화 된 경우가 많다. IT나 일반 기업에 간 친구들도 많다. 흥미로운 점은 과, 학회 등 운동권 외곽에 있으면서 조직운동까지 가지 않았던 친구들이 지금도 그 당시 사고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양적으로는 이런 친구들이 다수인데, 이들은 반독재‧반재벌(경제민주화) 정도 인식을 갖고 있지만 철저하게 이념적이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레닌주의로 무장한 조직 활동가들이 좌절을 겪을 때 일들은 좌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 수준에서는 오히려 승리의 경험이 많았다. 지금도 과거 투철했던 조직 활동가들은 어떤 이슈에 대해 심사숙고하거나 시장주의적인 경우도 있는데, 이들은 기업에 다니거나 투자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조차도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 친구들이 노무현 바람의 핵심이었다. 노사모 조직은 지방부터 바람이 불어왔는데, 노사모에 참여했던 386들은 학생운동 관점에서 보면 거의 핵심인 적이 없었던 친구들이다.

3저 호황, 벤처 붐, 중국 경기 타고 경제적으로도 천운 타

조율사386세대가 잘 나갈 수 있는 경제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80년대 말은 ‘3저 효과’를 누리던 시기이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를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한다. 취직이 다 잘 됐다. 학생운동 했어도 어디든 들어가서 뭘 하든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정치적 기득권이 바뀌었다고 했는데, 경제계도 마찬가지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기득권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버지 30년대 생들이 거의 직장에서 쫓겨났다. 30~40대 아들들이 부장, 차장 정도에 있다가 2000년대 초반에 빠르게 주류로 올라설 수 있었다. 게다가 2000년대 초반에 ‘벤처 붐’이 생기면서 벤처업을 하던 많은 586들이 수혜를 누렸고, 2002년부터 2008년에는 연평균 4% 이상 성장하는 세계적인 호황이 지속되면서 승승장구 했다. 특히 이 시기 노무현 정부 때 대 중국 수출 호황을 누렸다. 이 세대가 직접 학생운동을 안 했어도 민주화 세력의 지원자였다. 미안하니까. 그런데 2년 전 탄핵 때까지는 든든한 지원자였지만 급격히 보수화 돼 가고 있다. 점점 은퇴할 나이는 다가오는데 경제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이들 기억에 ‘3저 효과’와 같은 호황을 다시 누리려면 강한 정치 세력이 나와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386세대를 좀 더 확장해서 볼 필요도 있다. 1958년생부터 1974년생까지 16년동안 태어난 사람이 지금 각 나이 별로 80만 명 이상 살고 있다. 역사상 인구가 가장 급격하게 늘어났던 시기를 겪었고, 역사상 인구가 가장 급격하게 고령화 되는 시기를 겪게 될 것이다. 세대 내 소득 양극화가 놀랄 만큼 심해지면서 빠르게 보수화가 진행될 것이다.

세일러‘동맹의 해체’ 관점에서 세대를 볼 수도 있다. 30년대 생 중심의 산업화-반공 동맹은 1980년대 들어 해체되기 시작했다. 특정 목적이 완성 되면 동맹이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 지금은 민주화 동맹의 해체 과정이라고 본다.

허생‘승리의 경험’ 관점에서 세대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른바 ‘긴급조치 세대’는 사실상 승리하지 못했다. 박정희는 심복의 총탄에 죽었으니까. 또한 1970년대 말에는 오일쇼크 등 경제 상황 안 좋았고 1980년대 초반 우리 경제는 긴축 기조였다. 반면 1980년대 학생들은 1987년 직선제 개헌 등 승리의 경험을 했다. 경제적으로도 ‘3저 호황’ 덕분에 취직도 잘 됐다. 그 다음 세대부터는 또 다르다. 1992년 소련 붕괴 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는 등 혼돈의 시기였다. 혼란스럽게 대학 생활 시작해서 졸업할 때 외환위기라는 더 큰 혼란을 경험했다. 현재 살아 있는 세대를 보면 ‘승리의 경험’을 가장 많이 한 세대가 86세대 아닌가.

세일러중국 같은 경우에도 사회 기득권을 1960년대 생이 다 잡고 있다. 문화대혁명‧대약진 세대가 싸그리 망해 위에 아무도 없다. 60년대 생이 80년대 후반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사회에 진출했다.

조율사1962년생부터 중국 베이비부머인데. 인구구조가 정삼각형이 아니고 소위 계급장처럼 울룩불룩하다. 중국도 인구가 확 줄었다가 1960년대 확 늘었다가 그랬다. 인구가 급증하는 시기가 있다. 급증한 인구의 요구에 맞춰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다. 우리나라도 1958년 개띠부터 베이비부머인데,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니 딱 이 세대가 중학교에 진학할 때 무시험 제도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 연합고사가 생겼다. 그리고 몇 년 있다가 대학 졸업정원제 생기고, 또 몇 년 더 있다가 입학정원을 확 늘린 것이다. 인구 구조에서 불룩하게 부풀어 있는 세대가 586이다.

386이 세상을 바꿨나, 바뀐 세상이 386을 만들었나

양자냉전 붕괴, 3저 호황은 전 세계적 현상 이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에 따른 엔고 현상의 덕을 우리가 제일 많이 봤고. 세계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격변의 시대였는데,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어느 특정 세대가 주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가 어떤 세대의 특징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세일러세대를 형성하는데 주관적 공감대가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특정 세대가 공유한 사회적 경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폭넓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6.25를 경험한 세대에게는 6.25가 가장 중요한 공감대일 것이고, 80년대 학생운동 세대에게는 광주를 포함해 민주화 항쟁 경험이 아주 중요했다고 본다.

양자1980년대의 학생운동권을 보면 매우 놀라웠다. 맑스-레닌주의를 달달 외다 시피 하고, 필독서들을 다 읽었고, 전체적으로 통일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전 세대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는 그런 류의 학생운동을 요구했던 것 같다. 그 시절에 ‘우리’라는 의식이 있었을까.

허생386들이 당 주류가 됐을 때 한 가지 특징이 자기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강하게 공유하는 집단이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전대협 계보를 모르면 대화에 낄 수도 없고, 자기들끼리는 다 친구, 누나, 선배, 후배였다. 다른 세대,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이들은 다 소외됐다.

가오리평범한 대학생활을 한 386세대의 민주당 국회의원이 이런 토로를 한 적이 있다. 당 회의와 같은 공식 석상에서 하는 이야기, 저녁 먹으면서 하는 이야기, 술집에 가서 하는 이야기가 다 다르다고 한다. 문제는 실질적 의사 결정은 술자리에서 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넌 그 때 도망갔잖아’와 같은 학생운동 시절 이야기 하면서 대학 때 행적으로 서열화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는 술자리에 따라가도 할 얘기도 없고 ‘나는 영원히 이들 사이에서는 주류가 될 수 없겠다’는 벽을 느꼈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이 현재 한국 사회 권력층의 정점에 다가가 있는데 이들이 조만간 대통령에 직접 도전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반공-산업화 동맹 해체 이어 ‘민주화 동맹’도 해체 수순


조율사‘민주화 동맹 해체’가 굉장히 좋은 개념인 것 같다.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이끌어 온 586 인사들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사라졌다. 그리고 이들이 30대 때 회사와 같은 조직 생활을 안 해본 것에 따른 무능함에 대한 불신이 크다.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적응 측면에서도 전망이 밝지 않다. 가장 중요한 디지털 적응 능력이 떨어진다. 세대론도 많이 약화될 것이다. 세대적 공감대 보다는 계층적 유대감이 강화될 것이다.

세일러지금은 묘하게 세대 갈등과 계층 갈등이 중복돼 있다. 86세대가 자산과 소득에서 우위에 있다. 세대와 소득 계층의 갈등이 중첩돼 나타날 수 있다. 문제는 권력 공백이다. 586세대를 이어 받을 대안 세력이 안 보인다. 10년 정도 지나야 개혁 공천이 이뤄지고 세대교체가 일어날 것 같다. 지금은 남 탓들을 하고 있다. 다음 총선 쯤 보수 진영에서 먼저 개혁 공천을 해 경제 쪽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할 거고, 진보 쪽에서는 그 다음 총선 쯤에서 개혁 공천이 될 것 같다. 그 전 까지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동기도 자원도 없다. 당분간 세대 간 불화의 시대가 지속될 것 같다.

조율사586세대도 인구가 많다 보니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민주화라는 공감대가 약화되면서 다양한 욕구가 분출될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다양성이 엮어지지 않는 것이다.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586이든 그 윗 세대이든 아랫 세대이든 꽤 있다.

허생586이 지금 권력의 쟁점에 있는 거 맞는 것 같다. 그럴 나이이니까. 문제는 1990년대 ‘386’일 때부터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장기집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 아래 세대가 공통의 승리 경험이 없고 다 분산돼 있다는 것이다. 586세대가 갑자기 퇴장했을 때 권력을 이어 받을 세력이 보이지 않는다.

가오리86세대의 현재 기득권층은 뿌리가 깊고 광범위하다.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단체장과 청와대 등 정치권에 몇 백 명이 있고. 언론계에서도 매체의 성향을 떠나 주류가 돼 있고, 시민사회단체의 주축도 이들이다. 대학 교수들까지 더하면 몇 천, 몇 만 명의 파워 엘리트 그룹이 동일한 사회적 의식 갖고 있다. 이에 비해 그 아래 세대들은 다 객체화 돼 있는 것 같다.

다음 세대가 안 보인다

조율사1974년생 이후의 세대는 민주화된 이후 대학에 들어왔거나 고등학교 때 외환위기를 목격해 성인이 돼서는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었다. 조직화될 기회가 없었다.

가오리문제는 이번 김의겸 대변인 사태도 그렇고, 86세대가 특별히 나쁜 자들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사회적 인식이나 행동 양태가 2019년 한국사회의 주된 도덕 기준이나 윤리 규범과 거리가 안 맞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은 아닐까.

세일러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에 어느 정도 인정된 윤리도덕과 괴리돼 욕 먹는 게 아니라, 자기주장에 위반됐기 때문이다. 보수가 안보를 주장하는데 비밀을 북한에 넘기면 죽일 놈이지만, 보수가 투기를 하면 별로 신경을 안 쓴다. 문제가 뭐냐면 네거티브 정치를 너무 오래 했다는 것이다. 학생운동 때부터 네거티브로 상대방을 거꾸러트리는데 도가 튼 사람들이다. 네거티브가 과거에는 정치적인 거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욕망을 억누르는 네거티브 정치를 해왔다. 욕망은 누구나 갖고 있어서 이와 같은 네거티브는 위험성이 크다. 재벌 욕하고 강남 부동산 욕하고 이러지만, 문제는 모든 사람에게 내재해 있는 욕망을 절제하라는 식의 정치 노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포지티브하게 했으면 실패하더라도 실패했다고 하지 배신했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오리지난 번 평창 동계올림픽 때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면서 젊은 친구들의 ‘공정성’에 대한 감수성을 건드렸다. 지금 젊은 친구들이 주창하며 사회적 공감대로 넓혀가는 도덕기준과 50대의 도덕기준에 차이 있는 게 사실이다. 젠더의 문제도 그렇고. 부동산 포함해서 재테크도 그렇고. 지금 젊은 친구들이 바라는 것은 불법이 아니더라도 공인이 그렇게 하면 안 된 다는 거다. 지금의 50대가 공인으로서의 엄격함에 대한 인식이 지금 시대의 기준을 못 맞추고 있는 것도 있다고 본다.

조율사이중적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86세대는 권위주의적 문화에서 자라면서 자유와 탈권위를 원했지만, 정작 그 시대가 됐을 때 자기 스스로는 못 바꿨다. 반면 아이들은 더 자유화되고 개인화 되고 원자화 돼 있다. 그런 아이들을 비난 한다. “요즘 것들 싸가지 없다”고.

가오리이런 문제가 생길 줄 알았으면 했을까? 이 정도는 용인될 수 있을 거다 한 건 아닐까.

세일러본인은 공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다. 앞으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중요할 것 같다.

저성장 시대 한국, 포퓰리즘 득세 가능성은?


허생유럽 등 서구 사회의 젊은 층도 불만이 크다. 부모 세대들 좋을 때 살아서 나이 들어서는 연금 받으면서 행복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데, 자기들은 저성장 시대에 일자리도 별로 없고, 부모 세대 부양하느라 너무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포퓰리스트 성향 나타나는 것 아닌가. 소외된 중하층 백인들이 ‘트럼프 현상’을 만들었다. 지금은 계층 갈등이 세대 갈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 같다. 지금 여당의 주류 근간은 586세대인데, 소득 계층 갈등이 세대 갈등으로 번지면 우리나라에서도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배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율사포퓰리즘이 최근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포퓰리즘 강화는 갈등이 세대에서 소득 양극화로 넘어간다는 신호다. 지난 20년 간 신자유주의에 따른 양극화를 눈앞에 보이는 단기 정책으로만 대응해왔다. 사실 지금도 현 정부가 복지 관련 정책 등에서 포퓰리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도 전반적으로 포퓰리즘 심화될 것이고 정치세력들은 이용하려 들 거다. 중도로 보이던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미 훨씬 더 오른쪽으로 가 있지 않나.

가오리정당은 지지기반과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데 지도자가 안 보인다.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 때도 한국만 안 움직였다. 지지기반은 분명히 있는데 혐오와 냉소로 일관하고 있다. 포퓰리즘을 일으키려면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데 지도자가 없어 신생 포퓰리즘 당이 나오기는 힘들어 보인다. 젊은 친구들도 기본적으로 범생이여서 강한 지도자가 안 나온다. 파천황의 사고를 가져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정말 없다.

세대 간 갈등과 소득 계층 간 갈등이 중첩되고 있다


세일러정치적 포퓰리즘, 경제적 포퓰리즘으로 나눠 보면, 정치적 포퓰리즘 배경은 배타와 혐오인데, 남혐‧여혐 있지만 정치적으로 드러나기에는 유권자 기반의 폭이 넓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다시 한 번 북한 문제가 포퓰리즘과 결합이 될 거라고 본다. 통일이 안 되더라도 경제 교류가 심화되면 온갖 사건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술 먹고 싸운 정도의 사건도 남북 간에 일어나면 정치 외교 대결이 될 수 있다. 언론도 이런 사건사고를 십분 활용할 것이다. 경제적 불만은 토대에 계속 쌓여 가겠지만 휘발유처럼 젖어들겠지만 쉽게 터지지는 않을 것 같다. 휘발유도 점화를 위해서는 시너 같은 발화체가 필요하다. 오히려 일본이나 북한 문제 같은 대외적인 문제가 발화체가 될 가능성이 있다.

조율사세대 간의 갈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잠재된 아주 큰 문제가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문제이다. 엄청난 세대 간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슈이다. 구조개혁 등 제 때 대응하지 않으면 포퓰리스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휘발유가 될 것이다.

세일러자기에게 주어진 권력 혹은 이익을 스스로 포기하는 인간은 없다. 착해져라 착해져라, 내려놔라 내려놔라 요구하는 건 아무 소용없다. 결국 제도화의 문제다. 소득 계층 간 갈등을 완화 하려면 연금과 세금의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연금의 취지는 원래 저소득층의 소득 안정을 위한 것인데, 지금은 고소득층의 재태크 수단처럼 돼 있다. 교정할 필요가 있다. 임금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는 전국적인 노사 합의를 통해 대기업의 임금은 억제하고 중소기업의 임금을 올려주는 연대 임금 제도로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불가능한 것 같다. 결국은 우회된 연대임금으로 해결해야 한다. 누진적 소득세를 강화해서 소득 상위 20%까지는 소득세를 많이 올려서 소득 하위 층에 전이되게 하는 것이 서구의 연대임금제를 한국적 조건에서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것조차 굉장히 힘든 과제이긴 한데. 제도적으로 설정 가능한 목표다. 소득 상위 20%가 사실 586 세대에 다수 포진돼 있을 것이다.

가오리586이 현재 힘의 정점에 있기 때문에 이런 사회적 변화 욕구를 자발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것이고 변화에 대한 저항 세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세대 간 갈등이 더 첨예해질 것이다. 수축기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지키려는 자의 대표가 586세대가 될 수도 있다. 보수 언론에 포진한 586세대가 “강남에 아파트 하나 있는 게 뭐가 죄냐”는 식의 논리를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유효한 변화를 위해서는 586세대에게 넘어 갈 대통령 자리를 건너뛰어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도 하게 된다. 미국이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에 43세의 케네디가 등장했고, 영국이 위기에 빠지자 47세의 토니 블레어가 등장했다. 이들의 성공 여부를 떠나 사회의 발전이 지체되면 젊은 지도자 출현을 통해 해소됐다.

조율사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건너뛰는 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숙명이다. 586세대가 한국 사회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인구와 가장 많은 변혁을 겪은 세대다. 또한 윗 세대와 달리 무지하게 건강하다. 문제가 20년은 더 갈 것이다. 낡은 세대적 관점을 버려야 한다.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세대 될 것이다. 사전투표가 실시됐듯이 10년 안에 온라인 투표도 가능해질 거라 보는데, 전혀 다른 세상이 올 것이다. 선거운동도 길거리 유세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온라인 선거 운동이 일반화 될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형태의 정치구조가 될 것이고, 여기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퇴출될 것이다.

양자그런데 586세대가 물러나면 뭐가 달라지나.

세일러바뀌리라 본다. 왜냐면, 이 세대는 지금 시대와 잘 안 맞는다.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 시대에, 집단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세대는 잘 안 맞는다.

가오리문제는 도전과 응전 속에 세대교체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안 보인다.

일본의 아베 포퓰리즘 현상, 한국은 자유로운가

양자586 기성세대 뒤에 올 세대는 훨씬 희망적인가.

세일러다음 세대들은 이미 우리와는 다른 플랫폼에서 살고 있다. 이 플랫폼을 우리가 막고 있는 거다. 다만 자연스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고 외부적 충격이 있을 거라고 본다. 경제적 충격일 수도 있고. 충격이 왔을 때 제대로 해쳐나가지 못하면 일정 기간 혼돈기는 있겠지만.

양자일본을 보면 세대교체가 더 절망적일 수도 있다. 일본이 그렇게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안달복달 하다가 1980년대에 미국에게 깨지고 난 뒤에는 잃어버린 30년을 맞이했다. 일본 보수층들은 “자기들은 목표를 상실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풍요로워 졌지만 지향점은 사라졌다. 일본 정치도 2세, 3세로 세습되며 퇴행하고 있다. 지금의 일본은 희망적인 사회라 볼 수 없다. 우리와 동일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세대가 바뀐다고 무조건 나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율사일본이 90년대 이후 ‘R의 공포’ 속에 장치 침체에 빠졌다. 그 사이 세대가 한 번 바뀌었다. 전쟁을 치른 세대들은 1990년대 상반기 모두 은퇴했고 이후 다양한 세력이 등장했는데, 정치적으로는 무라야마, 간 나오토, 고이즈미까지는 양호했다. 그런데 결국 안 되니까 포퓰리스트인 아베가 선택된 것이다. 일본이 지나온 과정도 우리가 참고해볼만한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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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18 전야제 술파티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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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전야제 술파티 파문 또는 5·18 기념일 주점 파문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 전야에 정범구송영길김민석 등 이른바 대한민국의 386세대 유력 정치인들이 광주광역시내 유흥업소 새천년NHK 가라오케의 술좌석에 참석하여 논란이 된 사건이다.[1]

임수경이 386운동권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지웠던 글에 따르면, 현장에는 정치인 김성호장성민이종걸김태홍이상수 등이 참여하였으며 현장에 있던 우상호가 임수경에게 욕설을 하였다고 한다.[1] 해당글이 논란이 되자 임수경은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사건을 악의적으로 왜곡.과장하고 정치 쟁점화해 젊은 세대의 몰락을 즐기려는 세력이 있다"면서 구체적인 상황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얼버무리며 상황 수습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2]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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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17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사회자로 행사준비차 광주광역시에 내려간 임수경은 동료 386 세대 정치인들과 망월동 묘역에 가서 참배를 하고 전야제 행사를 진행하였다.[1] 전야제 행사가 종료될 무렵 정범구는 임수경에게 저녁회식차 장소인 새천년 가라오케의 장소를 알려주었다.[1] 이들은 17일 오후 광주 망월동 묘역의 광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한 뒤 전야제가 열리고 있던 심야에 그랜드호텔 근처의 한 단란주점으로 자리를 옮겨 술판을 벌였던 것으로 확인됐다.[3] 전야제 행사를 마치고 새천년 NHK가라오케에 도착하였다.

임수경은 항의문을 인터넷에 올렸으며 언론에도 보도될 정도로 이슈가 되었다.[4] 이에 임수경은 기자회견을 통해 본래 글의 취지와 달리, 욕설 등이 포함되는 글로 변질되었다고 밝혔으나 글에 묘사된게 실제 상황이 맞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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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합석했다 뛰쳐나간 임수경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해 인터넷신문 동아닷컴, 오마이뉴스 등에 5월 24일부터 소개됐고 이 소식을 들은 네티즌과 일반시민들은 해당 국회의원 및 당선자들에게 E메일과 전화 등으로 격렬하게 항의하는 사태를 빚었다.[3] 진보 진영과 단체에서는 사태 수습과 관련 글 삭제조치 등을 시도하였으나,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이 글의 내용을 퍼나르고 확산시키는 것으로 맞대응하였다. 2000년 5월 24일과 5월 25일 사건은 결국 지면신문에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 술파티 파문은 광주 항쟁 기간 중 각 언론에 화제, 이슈가 되었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도덕적 청렴함을 무기 삼았던 386세대 및 진보진영 정치인들에 대한 맹공격으로 이어졌다. 당사자들을 대신해서 한 386세대는 사죄의 글을 보내오기도 했다.[5]

386세대 절대다수는 살아 남았다라는 부끄러움으로 단지 역사 속에서 내 몫의 호흡만을 치열하게 더하여 왔을 뿐이다. 다만 어제까지 보여준 제도권 정당과 언론에게만 있던 386의 젊음과 희망 그리고 개혁조차 한판 술자리로 끝장나고, 앞서서 나갔던 이름 없는 많은 님들의 고단한 역사가 묻혀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 386 지도급 인사들의 반역사적, 몰가치적 행태에 국민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쳐드린 점 머리 숙여 깊이 사죄드린다.[5]

논란이 된 임수경의 글은 보수주의 진영 언론 및 사이트 게시판에 확산되었다. 보수주의 진영이 언론 및 사이트에 확산하는 도중 글의 내용을 왜곡하여 글쓴이의 취지를 변질시켰다.

사태가 커지자 80년대 운동권에 몸담았던 '386세대'들의 모임인`한국의 미래 제3의 힘'은 2000년 5월 30일 오후 숭실대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지난 17일 있었던 386세대 젊은 정치인들의 '5.18 전야제 술자리 파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6]

당시 문제의 술자리에 참석했던 회원들의 제명 결정과 총회에서는 당시 술자리에 잠시 동석했던 임수경씨가 이 모임 홈페이지에 '술자리 사건'을 고발 비판하는 글을 실었던 것을 삭제한데 대한 책임을 지고 모임을 주도해 온 이 정우 총무 등 실무위원회 15인 위원 전원이 사퇴[6] 하였다. 임수경에 따르면 '제3의 힘' 사이트에서 파장을 우려, "사후에 삭제해도 좋냐"며 동의를 구해왔다. 임수경은 그들의 이미지나 입장을 흐릴 우려가 있다고 판단, 삭제에 동의했다고 한다.[7]

임수경의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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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은 2000년 5월 26일 기자회견을 갖고, "인터넷상에 유포되는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당초 내가 올린 글과는 다르고 취지나 의미들이 변질,각색되고 있어 안타깝고 서글프다"면서 "당초 취지는 존경하던 선배들이 5월 17일 광주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워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를 공유하고 비판하려던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임수경은 '단란주점이나 욕설 등 구체적 상황'을 묻는 질문에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왜곡되는 현실이 화가 난다"고 대답하였다.[7]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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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겸 칼럼니스트 유시민은 5월 26일 동아일보에 논평을 내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남의 아버지 제삿날이라며 무관심한 시각을 비판하던 것을 주지시키고 이어[8] ''386 당선자'들은 이제 대학생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일각을 차지한 국민의 대표들이다. 과거 독재정권과의 싸움에서는 강철같은 이념적 확신과 불퇴전의 용기가 필요했겠지만, 갖가지 검은 유혹을 이겨내야 할 지금의 그대들에게는 민의를 받드는 겸허함과 공인으로서의 엄격한 자기관리가 필요하다.
만약 그대들이 그날의 술자리가 알려질 경우 어떤 파문이 일어날 것인지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느슨한 자세를 가졌다면 유권자들에게 약속했던 정치개혁의 꿈은 아예 지금 접는 것이 좋겠다.[8]', '회복하기 어려운 도덕적 상처를 입었다. 특히 초선들은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에 넘어진 셈이다. 국민의 가슴에도 냉소와 환멸의 상처가 깊이 그어졌다. 이것을 치유하려면 ‘부적절한 술자리’에 있었던 그대들은 지난 80년대에 치렀던 것 못지 않은 희생과 헌신을 다해야 할 것이다.[8]'며 술파티 사건을 비판하였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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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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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이동:    독자가 올린 임수경씨의 '386술파티' 원문 동아일보 2000년 6월 3일자
  2.  "386당선자 5.18전야 술자리" 인터넷에서 왜곡돼...임수경씨 한국일보 2000년 5월 27일
  3. ↑ 이동:  [與 386당선자 도덕성 논란]5·18기념식후 한밤 술판 동아일보 2000년 5월 25일자
  4.  [횡설수설] 인터넷 안티사이트 동아일보 2000년 10월 6일자
  5. ↑ 이동:  '광주술판' 동아닷컴서 열띤 공방…1천2백여건 쇄도 동아일보 2000년 5월 31일자
  6. ↑ 이동:  “386모임 '광주술판'참석회원 제명 논의”. 동아일보. 2000년 5월 30일. 2022년 7월 2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7월 23일에 확인함.
  7. ↑ 이동:  “광주 술판 인터넷서 변질 각색돼-임수경씨”. 연합뉴스. 2000년 5월 26일. 2022년 7월 23일에 확인함.
  8. ↑ 이동:   [기고] '부적절한 술판'벌인 386에게 동아일보 2000년 5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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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NHK 사건 요약. 
관련인물, 송영길, 김 민석, 임수경, 우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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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관련인물, 송영길, 김민석, 임수경, 우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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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86세대 정치인들이 새로 운 정치의 희망으로 부상하던 시점에서 그들의 도덕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며, 이후 한국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건의 배경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전야제와 386세 대 분류 전체보기 맛집 여행 음식 패션과 뷰티 생활정보 Flat Rate Shipping Per Order Booktopia.com.au -9% -35% -16% -29% 아래에서 사건의 전개와 파문, 그리고 그 후 의 영향을 다루고자 합니다. 25. 3. 21. 오후 3:45 새천년NHK 사건 요약. 관련인물, 송영길, 김민석, 임수경, 우상호. https://patriotkr.tistory.com/412 2/12 2000년 5월 17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전야제를 기 념하기 위해 광주에 모인 386세대 정치인들과 인사들은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김민석, 송영길, 우상호, 정범구, 김태홍 등 86세 대 정치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새천년민주 당 소속으로, 새 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하던 시기였습니 다. 전야제 이후의 술자리 전야제가 끝난 후, 이들은 숙소에서 세미나를 열 계획이 었으나, 실제로는 '새천년 NHK'라는 유흥주점으로 향했 습니다. 이곳에서 정치인들은 다수의 여성 종업원과 함 께 술을 마셨고, 일부는 술자리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했 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특히, 우상호가 임수경에게 폭 언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도덕성 논란이 불거졌습니 다. 반려동물 IT 인터넷 IT 제품리뷰 과학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법률 정보 자동차 건강 Over 40? Welcome To DC: Dark Legion! Build multiverse strategies anywhere. PC/Mobile crossplay launches Now. Sponsored by: DC: Dark Legion PLAY NOW 25. 3. 21. 오후 3:45 새천년NHK 사건 요약. 관련인물, 송영길, 김민석, 임수경, 우상호. https://patriotkr.tistory.com/412 3/12 관련 인물 ▪️ 임수경 우상호 김민석 송영길 이종걸 정범구 김태홍 이상수 김성호 장성민 박노해 문용린 한상진 노성만 오수성 천득염 박종율 김민석 프로필👇👇 25. 3. 21. 오후 3:45 새천년NHK 사건 요약. 관련인물, 송영길, 김민석, 임수경, 우상호. https://patriotkr.tistory.com/412 4/12 사건의 폭로와 확산 임수경의 폭로 이 사건은 임수경이 386 커뮤니티인 '제3의 힘'에 올린 글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녀의 글은 삭제되었 으나, 같은 날 다른 사용자가 이를 복사하여 인터넷에 퍼 뜨리면서 파문이 확산되었습니다. 임수경은 이후 글이 왜곡되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고 주장했지만, 원문이 공 개되며 그녀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언론 보도와 사회적 파문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회적 파문은 더욱 커졌습니 다. 언론들은 '5·18 전야제 술파티 사건'으로 사건을 보 도하며 정치인들의 도덕적 해이를 비판했습니다. 특히 86세대의 도덕성과 위선에 대한 비판이 집중되었으며, 김민석 프로필 보러가기 Over 40? Welcome To DC: Dark Legion! Sponsored by: DC: Dark Legion PLAY NOW 25. 3. 21. 오후 3:45 새천년NHK 사건 요약. 관련인물, 송영길, 김민석, 임수경, 우상호. https://patriotkr.tistory.com/412 5/12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들은 대중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습 니다. 정치적 영향과 후속 조치 정치인들의 반응과 해명 사건 이후, 정치인들은 '광주를 방문했던 젊은 위원장 들'이라는 이름으로 공동 해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들 은 술자리에서 여성 종업원이 동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 지 않고, 사건을 축소하려는 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정치인은 접대부가 동석했음을 인정하며, 그들의 도덕성에 대한 의문이 계속되었습니다. 사회적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 사건은 정치권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 다. 시민 단체들은 사건을 강력히 비판하며, 정치인의 책 Over 40? Welcome To DC: Dark Legion! Build multiverse strategies anywhere. PC/Mobile crossplay launches Now. Sponsored by: DC: Dark Legion PLAY NOW 25. 3. 21. 오후 3:45 새천년NHK 사건 요약. 관련인물, 송영길, 김민석, 임수경, 우상호. https://patriotkr.tistory.com/412 6/12 임 있는 행동을 요구했습니다. 특히 정치개혁시민연대는 사건을 국민과 광주 영령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 로 규정하고, 당사자들의 의원직 사퇴까지 고려해야 한 다고 주장했습니다. 사건의 여파와 재조명 정치인들의 영향력과 사건의 재조명 새천년 NHK 사건은 이후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들이 대거 거물급으로 성장하면서 2010년 대 후반 다시 조명되었습니다. 특히 송영길, 우상호 등은 이후 주요 정치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사건이 재조명되었 습니다. 사회적 교훈과 반성 이 사건은 386세대의 도덕성과 정치적 책임에 대한 심각 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사건은 단순한 정치 스캔들을 넘어,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들이 과거의 부패와 무능을 답습하지 않기를 바라는 국민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Over 40? Welcome To DC: Dark Legion! Sponsored by: DC: Dark Legion PLAY NOW 25. 3. 21. 오후 3:45 새천년NHK 사건 요약. 관련인물, 송영길, 김민석, 임수경, 우상호. https://patriotkr.tistory.com/412 7/12 정치인들의 도덕적 자각과 책임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긴 사건이었습니다. 맺음말 새천년 NHK 사건은 386세대 정치인들의 도덕성에 심각 한 의문을 제기한 사건으로, 이후 한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건은 정치인의 도덕성과 책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며, 앞으로의 정치가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국민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 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정치적 책임과 도덕성의 중요 성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사건을 되돌아 보며 정치의 본질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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