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5

[전문공개/특집Focus on] 세월호로 가는 길 : 미리보기 : 평화저널 플랜P

[전문공개/특집Focus on] 세월호로 가는 길 : 미리보기 : 평화저널 플랜P
[3호/ 2021.03][전문공개/특집Focus on] 세월호로 가는 길
플랜P
1일전




_세월호로 가는 길

김은호 안산 돌봄과성장이웃대화모임 대표

박은희 2학년 3반, 유예은 어머님

정부자 2학년 6반 신호성 어머님, 4·16 가족협의회 추모분과장

인터뷰 및 정리 김복기



P 먼저, 귀한 시간 내주시고, 온라인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은호 안녕하세요? 저는 4·16과 관련하여 지역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은호입니다. 4·16가족들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한다기보다는, 함께하는 길이 나를 성찰하며 돌보고, 사회를 돌보며 돌아보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체를 만들려고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4·16 참사 이후 지역사회를 돌보기 위한 일을 하다가 ‘안산 돌봄과성장이웃대화모임’을 만들게 되었고, 대표를맡고 있습니다. 

정부자 저는 2학년 6반 신호성 엄마입니다. 요즘 들어 눈물이 많이 납니다. TV를 보고 있어도 눈물이 나고, 밥을 먹어도 눈물이 납니다. 서럽고 한편으로 짜증도 나고, 분노도 일어나고, 우울감에 젖어 있는 게 저의 현재 모습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7년이 되어가고, 조금 있으면 7주기를 맞게 되어 그런지 요즘 마음이 복잡합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진상 규명을 위해 함께해주신 분들에게 미안하면서도 감사한 마음, 복합적이고 복잡한 마음을 갖고 오늘 만남에 나왔습니다.

박은희 2학년 3반 유예은 엄마입니다. 4·16 참사 전에는 교회 전도사로, 지역 도서관 활동가로 생활해 왔습니다. 사건 이전에는 정말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일을 겪고 보니 ‘너무 좁게 살아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와 같은 삶의 태도가 세월호 참사의 한 일부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존 삶의 방식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사람들이 저희를 위로한다고 찾아와서 설명을 할 때, 화가 났습니다. 사실 위로보다는 저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랐습니다. 뭐가 문제인지, 왜 아픈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주었으면 했던 시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세월호는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일반 사람들 중에는 4·16을 마음속에서 지우려는 사람도 있지만, 저희 가족들이나 시민들 모두에게 세월호는 가슴 속 깊이 화인으로 남아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그냥 두고 가는 것은 종교인이나 국가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마땅히 치유의 과정을 넘어서야 한다고 봅니다. 

저와 세월호 가족이 말하는 치유는 ‘진상 규명’입니다.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름답게 포장하고 없었던 일로 하고 넘어가라고 하는 것은 상처를 곪아 터지도록 그냥 놔두는 일이거든요. 가족들은 너무 아픕니다. 최근 저희들이 한 달에 한 번 만나 드리는 예배모임에서, 창연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난 주 제가 다른 장소에서 했던 말과 너무 똑같아 놀랐습니다. ‘가족들은 지금 겨우 버티고 있구나! 낭떠러지 끝에서 더는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구나!’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에게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P 이번 3호를 기획할 때, 편집위원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3월호에서는 당연히 세월호를 다루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4·16은 단순히 7년 전에 있었던 어떤 사고가 아니라, 우리 한국 사회가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사회적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14년 4월 16일, 부모님들이 안산 단원고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332.7km를 정신없이 달려갔던 이야기를 반복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 뒤로도 숱하게 그 길을 오가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안산과 진도를 오가는 그 길, 그리고 전국을 다니면서 세월호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그 길이 여러분께 어떤 길이었는지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울러, 특별히 생각나는 날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정부자 일단은 (긴 침묵) 그 길은 저에게는 못난 엄마라는 느낌을 주는 길이었습니다. 매번 그런 느낌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당시 저는 회사 식당에서 몇 시간 아르바이트하는 엄마였습니다. 회사에 출근한 뒤 아이 아빠의 회사 동료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호성이가 수학여행을 갔는지 물어왔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단원고로 달려갔고, 거기서 아이들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소식에 바보같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못난 엄마였습니다. 그 순간 ‘아이들이 추웠겠구나!’ 생각하며 옷가지를 챙겨 호성이를 데리러 진도로 갔습니다. 그런데 진도 체육관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의 명단을 보았는데, ‘호성’이의 이름이 없어서 오열했습니다. 내려가는 순간 내내 가슴을 얼마나 졸였는지, 힘겨웠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를 만나러 진도로 내려가는 길에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는 가는데 전화는 안 받고... 팽목항으로, 섬마을로 가면서 아이가 제발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일한 바람은 ‘아이가 살아있으면 좋겠다’였고, 배가 가라앉아 에어포켓이 남아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저는 어리석게도 아이가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모든 신의 이름을 다 부르면서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 아이들이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음 날도 ‘아이가 살아있겠거니’ 하면서 새벽 3시에 보트를 구해 세월호로 갔습니다. 그때 사람들에게 아이들 구조 신호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뭔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이러고 있지’ 하면서, 아이들이 떠났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박근혜가 방문하고, 사태를 바라보면서 점점 더 믿음이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엄마라는 사람이... 전원 구조라는 말을 의심 없이 믿고, 대한민국 정부의 말만 믿고 이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그 기억을 찔러 없앴으면 좋겠습니다. 정부는 흔적 지우기를 하지만, 저희는 기억과의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싸움은 ‘세월호 참사가 이랬다’는 기억 공간에서의 싸움이었습니다. 팽목항도 가고, 목포 신항도 갔을 때, 저 스스로를 비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네가 사람이냐!’라는 말이 들릴 때마다 움찔할 때가 많습니다. 감옥에 갇히지만 않았지, 자식을 지키지 못한 엄마라는 생각에 세상이 감옥이 되었습니다. 자식을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또 삶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지난 7년 동안 아픔을 견뎌내며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박은희 저는 2014년 4월 16일 9시에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도서관 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날 아침에 도서관학교를 위해 초청한 강사가 강의를 할 수 없다는 이유를 길게 설명하는 전화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은이가 전화를 걸어왔고, ‘얼른 전화를 끊고 걸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단 예은이의 전화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사방에서 전화가 걸려왔고, 평소에 전화를 하지 않던 사람들까지 전화를 해 왔습니다. 너무 전화가 많이 걸려 와서 예은이 전화를 거절하는 순간에 다른 사람들과 전화가 계속 연결되어서, 정작 받아야 할 예은이의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끝내 예은이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고 그 사이에 아이가 남긴 전화 메시지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무섭다’는 아이의 메시지를 받고 기껏 제가 아이에게 보낸 문자가 “침착해,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보같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그렇게 되었지요.

그리고 9시 55분에 해군이 구하러 왔다는 문자가 들어왔습니다. 배 안에 4백 명이 넘는 사람이 있는데, 겨우 4~5명 태우는 헬기가 구조를 왔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아이들이 죽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차라리 헬기 소리, 구조한다는 소식이 없었더라면 아이들이 위기의식을 갖고 탈출을 시도했을 텐데, 결국은 구조를 기다리다가 죽은 셈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10시 15분에 예은이로부터 마지막으로 문자가 왔는데, ‘아직 객실’이라는 네 글자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단원고를 갔는데, 그냥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그 사이, 예은이 아빠는 진도로 내려가고, 저는 예은이의 쌍둥이 언니가 있어 진도로 내려가지 못하고 안산에 있었습니다. 남편이 내려가는 동안 가능한 한 전화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전화했습니다. 진도군에도, 해경에도 전화하고, 소방서에도 전화하고, 할 수 있는 데는 다 했는데 모두가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답만 들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생각한 것은, ‘아이들이 구조되어 가 있는 지역에도 교회가 있으니 그곳으로 전화를 하면 연결되지 않을까’ 하고 진도 서거차도에 있는 교회를 검색해서 연락을 했는데 한 교회 목사님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남편이 진도로 내려가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 전화를 했다고 말씀드리고, 상황을 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여기 어민들이 많이 나갔는데, 어머님, 이상합니다. 너무 이상해요.”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서거차도에 아이들이 다 있나요?” 물었더니 “여기 몇 명밖에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수백 명이나 되는 우리 아이들이 어디 있나요?” 하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다 배 안에 있다’면서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이미 그때는 배가 많이 기울어지고 잠긴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아,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진도로 내려가려 했는데, 예은 아빠가 내려오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그 당시 예은이 쌍둥이 언니가 오열하고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서 참사 후 3일 뒤인 20일에 형부 차로 언니와 함께 진도 팽목항에 저녁쯤 도착했는데, 정말 날씨가 너무 추웠습니다. 그 당시 저뿐 아니라 모든 부모가 ‘이렇게 추운데, 물속에서 아이들은 얼마나 추웠을까?’ 하는 생각에 차마 따뜻한 물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바닷물 보는 것도 힘들고, 바닷물이 발에라도 닿으면 온 몸에 가시가 박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추위가 너무 싫은데, 추위가 느껴질 때마다 아이들이 추워하는 모습이 온몸으로 전해져 옵니다. 그 차가운 느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100일이 되었을 때 진도를 갔는데, 희한하게 안산을 떠날 때는 맑은데 진도에만 가면 날씨가 흐렸습니다. 안산에서 ‘1주기’ 할 때도 비가 내렸는데, 흙비가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영혼과 우주가 모두 연결되어 우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튼 그 차가운 느낌은 잊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깜깜했을까? 촉감으로 차가운 것을 느낄 때마다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차가운 느낌, 너무 추운 느낌이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



P 당시의 아픔을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의 마음에 어떻게 공감을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뒤돌아보면 진상 규명을 위해 유가족들이 ‘물리적으로’ 걸어야만 했던 길이 엄청났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4년 세월호 100일이 되던 7월 23~24일에는 장맛비를 맞으시면서 안산에서 서울 광장까지 ‘100일 100리 행진’을 하셨습니다. 2015년 1월 26일 안산을 출발해서 2월 14일까지 진도 팽목항을 향해 19박 20일 동안 걸었습니다. 같은 해 4월에는 상복을 입고 여의도에서 광화문까지 걸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6년 12월에는 청와대 100M 앞까지 가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던 청와대 앞에서 여전히 농성을 하고 계신 상황이 답답합니다. 또 작년 2020년에는 진실버스를 타고 전국을 다니며 10만 청원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7주기가 되기까지 여전히 애를 쓰고 계신데, 시간을 되돌려서, 왜 그렇게 걷고 또 걸어야 했는지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은호 그날 기억을 떠올려보면, 인천에 볼일 보러 갔다가 ‘무사귀환’이라는 말을 듣고 안산으로 돌아왔더니, 오보라는 소식이 떴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단원고등학교에서 ‘기도회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따라 4월  16일 밤 10시에, 지역 활동가들과 염려하던 시민들과 함께 단원고등학교에 모여 ‘무사귀환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렇게 3일 동안 단원고등학교에서 기도회를 진행했습니다. 이후 아이들은 살아오지 못했고, 촛불집회로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와동에 살고 있는데, 와동은 69명의 아이들이 별이 된 동네입니다. 여기 와보니 가족은 물론 마을 전체가 다른 차원의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과 무엇을 함께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웃대화모임’을 열어 주민들을 돌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2015년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걸을 때, 20일 중 11일 동안 걷기에 참여했습니다. 아마 전주에서부터 팽목항까지 걸었는데, 그때 그 마음이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제가 걷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한국 사회가 변화되면 좋겠다는 마음과 다짐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진도 팽목항까지 11일 동안 걸었던 것 같습니다.

정부자 초창기에는 제가 이 사회를 너무 몰랐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억울함이 앞섰고, 너무 몰랐던 거지요. 일단 진도체육관에 있을 때, 일이 진행이 안 되어 대통령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경찰이 막아섰고, 사람들이 아비규환이 되었는데,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성이의 시신이 5월 2일 수습이 되었는데, 그때까지는 아이를 못 찾을까 하는 두려움과 내 인생에 찾아 든 무서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아이를 수습해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다는 생각만 했고, 아이를 데리고 오면 일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보니 아이가 계속 제게 말을 걸어와 힘들었습니다.길을 걸으면 아이가 말을 걸어오고, 밤에는 잠이 안 오고, 아이가 다녔던 곳을 갈 때마다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일단 잠을 자야 하는데 잠을 자지 못해 온몸이 아프고 그리움에 사무쳤습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정신과 의사선생님을 찾아갔는데, 119 옆의 보건소도 가고 거기에서 상담을 받았는데, 선생님들이 세 번이나 바뀌면서 계속 반복되는 질문만 받았습니다. 아픔을 해결하고자 갔는데, 선생님들이 자꾸 과거 아픔에 대해 같은 질문을 반복해 묻는 모습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장소가 없어서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상담을 받다 보니, 상담을 받는 것이 너무 힘들어 결국 포기했습니다. 그 후, 집에 있으면 아픔이 너무 크니까 가족들 모임에 나가 지금까지 모임을 이어왔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저 자신에 대해 납득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호성이가 제게 “엄마, 나는 어떤 존재야?” 하고 물었을 때, “호성이는 나의 공기지, 네가 없으면 살 수 없지!”라고 대답했는데, 그런 아들을 보낸 엄마로서 스스로를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공기 같은 존재가 사라졌는데, 엄마는 먹고 싶은 것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있는 제 모습이 이해가 안 되고 죄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도 죄스러운 마음 때문에 이렇게 먼 길을 걷고 또 걷는 것 같습니다. 결국 아들이 끊임없이 이 엄마를 돌아다니게 만드는 것 같고, 지금은 ‘아이가 나를 살리고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길을 걷는 것은 제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정부의 태도, 자식을 잃은 부모를 공감해주지 못한 정부, ‘증거가 있는데도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없는 존재로 대하는 것일까?’ 하는 분노에 맞서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나니 ‘304명의 죽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3이라든가 5·18이라는 20세기의 사건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21세기의 4·16도 그렇게 놔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볼 때 정말 무섭고 두렵습니다. ‘이게 뭐지? 정말 나의 세계가 다 망가져 버렸는데, 죽은 자식을 위로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엄마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지?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엄마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지?’라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박은희 가족들이 처음에 걷기 시작한 것은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2014년 진도에서 처음으로 가족들이 걸은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리 물어도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하니 윗선의 윗선 또 그 윗선의 윗선을 따져 묻다가 결국 대통령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지요. 진도체육관을 나선 가족들은 그때 경찰들의 저지로 결국 진도대교조차 건너지 못했지요. 2014년 5월 영정사진을 들고 청와대로 간 것도 언론의 행태를 시정해 달라고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걸으면서 ‘아이들과 함께 걷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가장 큰 것은 아이들에게 미안하기 때문에 걷는 거지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말도 안 되는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왜 아이를 낳았을까?’ ‘왜 안산으로 이사를 했을까?’ ‘왜 그 학교에 보냈을까?’ ‘아이들을 수학여행을 왜 보냈을까?’ 등등의 질문들이 저희들을 짓눌렀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걷기 위해, 우리가 뭔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걷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걷다 보면, 그 끝에 우리 아이들이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걷는다는 게, 보통 뒤로 걷지는 않잖아요. 부모들이 어떻게 하든지 앞을 향해, 아이들과 함께 끝까지 갈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고도 싶었습니다. 또한 거리에서 걷다 보면 시민들의 연대를 느꼈습니다. 사실 그때 가족들이 가장 힘들어 한 것이 ‘고립’이었는데, 진도에서는 외부로 제대로 상황이 전달되지 않아 고립되었고, 청와대 앞에서는 경찰에 싸여 고립되었습니다. 그런데 걸으면서 시민들이 연대해주실 때 고립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생각에 걷고 있고 끝까지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걷고 나면 아이들과 함께하는 느낌이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의 호성이와 예은이를 위해서 걷는 것이기도 합니다.





P 저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일어난 일을 그냥 사실 그대로 발표하면 되는데 ‘무엇이 있길래, 무엇을 감추고 싶길래 그것을 말하지 못할까?’ 하는 질문이 듭니다. 진실과 정의 없이는 평화가 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7년이 지나도록 침몰에 대한 진실규명도, 책임자에 대한 정의도 실현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가족들은 평화로울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걸어오신 그 길 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셨을 것 같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 중 누가 기억에 남습니까? 또한 (다른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 연대의 경험 등) 우리 사회가 이 정도는 아니리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이 정도라는 상황에서 아파하는 이들의 평화를 위해 힘써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정부자 저는 ‘높은 사람’을 만나면 다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높은 사람들을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 저도 생명안전공원 부서에서 활동하면서 정부 담당자를 만나왔는데, 사람들은 본인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고 일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뭔가 해결해주리라는 생각이 점점 사라졌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나중에는 욕이 나왔습니다. 나는 미쳐 날뛰고 돌아다니는데, 그리고 뭐라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전국을 다녔는데, 정작 담당자들로부터는 아무런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기억나는 것은, 충북인가 전라도인가 어떤 지역에서 열린 북 콘서트에서 이야기할 때, 아이들이 많이 왔습니다. 무대에서 꺼억 꺼억 우는 청중 속의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저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 북 콘서트가 끝났을 때, 아이들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우리 대신 싸워주세요. 우리가 클 때까지 싸워주세요!” 했을 때, 그들에게 “그래. 싸울게.” 하고 약속을 해버렸습니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시민들이 함께 울어주고 나누어주신 마음의 위로를 받으며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른으로서 세월호 참사와 같은 것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우리 부모들이 바꾸어야 하지 않겠어? 우리가 먼저 똑바로 살아야 하지 않겠어?’라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지요.

“대통령이요? 정치인들이요? 그들은 국민이 국민을 위해 일하라고 뽑아놨는데, 선거 때만 찾아오지 일하지 않잖아요. 교황도 방문했을 때 손 한번 잡아주고 미소 한 번 짓고 가셨어요. 저는 국민밖에 믿을 대상이 없습니다. 평범한 국민 외에는 사회를 바꿀 사람들이 없습니다.”라고 저는 말해요. 시민들 때문에 힘을 얻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호성이와 같은 아이들이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 들으러 왔을 때 약속을 해버렸는데, 어떻게 이 길을 멈출 수 있겠어요!

박은희 길에서 많은 분을 만났는데, 저는 저희 친정 언니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언니는 집과 교회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그 언니가 저에게 “이제 그만, 남은 아이들 좀 돌봐야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특별법을 만들기 위해 국민에게 서명을 받기 시작할 때 “그러면 그것이라도 도와줄게.” 하면서 숫기 없는 언니가 동네의 놀이터, 학교, 상가를 돌아다니며 500명 서명을 받아왔고, 본인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나중에 받은 온 서명을 국회에 제출하러 가는 날이 있었습니다. 여의도 공원에 모여 줄을 맞추어 국회에 들어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행사였고, 언니와 형부도 참석했습니다. 그날 국회에 들어간 언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청난 기자단들을 보았습니다. 이 정도면 곧 해결될 거라며 뿌듯한 마음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서명지 전달 관련 뉴스가 어느 방송에서도 안 나왔습니다. 그게, 안 나왔어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언니가 제게 “이거 너무 이상하다... 은희야, 너 그냥 이거 해. 원 없이 그거 해.”라고 말하고서는 리멤버 0416에서 피켓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언니는 저보다 더 많이 전국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고속버스 타고, 기차 타고 전국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형부 눈치도 보이고, 자식들 다 키우고 이제는 형부와 좋은 시간을 보낼 때인데,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언니에게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언니가 “은희야, 미안한데... 나 이거 예은이 때문만은 아니야. 또 내 동생만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가장 첫 번째 이유는 나 때문에 하는 일이야. 이런 나라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 화가 나서 하는 것이니 미안해하지도 말고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언니는 자신은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언니는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 언니가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이런 마음으로 임했다면 이런 일은 진즉 해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람들이 그냥 봐도 이상한 사건인데, ‘왜 그러지?’라는 마음을 갖기만 했어도 이 사건은 해결될 사건이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언니와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인데, 신기하게도 여론과 시간이라는 것은 국민들을 자꾸 이 문제로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같아 아픕니다. 이 문제에 대해 심각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해, 이상해’ 하고 말만 하는 게 아니라, 거리로 나와서 외쳐야 하지 않을까?

세례요한이나 예수도 거리를 걸었던 사람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만 외친다고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지금 현재 느낌입니다. 지난 주 토요일 집회 때 제 촛불이 꺼질 때마다 활동가인 조미선 선생님이 달려와서 촛불을 다시 켜주시고는 했는데, 그 촛불처럼 가족들이 힘들 때 다시 힘을 주는 시민들이 저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분들이 계셔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분들이 계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김은호 거리에서 만났던 가족들이 생각납니다. 가족들을 통해 많이 배우기도 하고, 알아차리기도 하고, 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책에서 봤던 개념을 삶에서 만나게 해준 사건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거기서 그분들이 집단지성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답이 없던 곳에서 생각도 다르고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임에도 함께 모여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집단지성이란 것이 존재하는구나. 집단지성이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변화 지점에 대한 발견이 있었습니다. 호성이 엄마를 가까이에서 보면서, 호성이 어머님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소위 말해, 자기 초월을 이뤄가는 활동가를 만나게 되어 놀라곤 합니다. 

한번은 번화가에서 지지 서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영석이 엄마는 독자를 잃으셨습니다. 유일한 자녀인 아들이 없어진 거지요. 그런데 번화가에서 서명을 받는 영석이 어머니를 보면서, “영석이 어머니는 외아들을 잃었지만 수많은 자녀들을 얻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길에서 세월호 가족들을 돕는다는 생각은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많이 복잡하고 어렵지만, 여전히 나를 성장하게 하고, 성찰하게 하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 이 세월호였고, 그렇게 함께 가는 것 같습니다.



P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아이들은 즐겁고 아름답게 돌아와야 할 길 위에서 별이 되어야 했습니다. 먼저 간 아이들이 우리에게 남겨 둔 길,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무엇일까요? 그 길이 우리를 어떤 사회, 세상으로 이끌어주길 바라시는지요? 

정부자 계속 그래왔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드는 생각은 ‘그게 과연 될까?’라는 갸우뚱거림이 생깁니다. ‘되겠지’ 하고 희망을 갖다가도, ‘과연 그게 될까?’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너무 억울해서 한에 사무쳐서 먼 길을 돌아와, 지치고, 몸이 망가지고 있는데, ‘이러다 그냥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7년 동안 걸어와 지치고 힘든데, 어떻게 현명하게 이 여정을 계속할 수 있을까?’ ‘상처와 좌절이 아니라, 어떻게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이렇게 백날 천날 열심히 했는데 안 되잖아 하고 집으로 들어가면 어쩌지?’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어떻게하면 가족들, 부모들과 함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요즘에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보니 4·16에서 희생된 아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모습이 전혀 없었습니다. 소위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떤 공식 모임에서 다치거나 하면 직장에서 진상도 규명하고 책임도 지는데, ‘죽은 학생들의 명예를 존중해주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놀러간 것이 아니라, 수학여행이라는 수업을 받는 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이렇게 처리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떠날 때 무섭고 외롭게 떠났지만, 아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던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진상규명은 아이들을 잃은 부모를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사회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국가 권력이 힘없는 우리가 이렇게 나서도록 만드는 것이 아픕니다. 이러한 일에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로서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비단 장소가 크지 않더라도 아이들을 마음껏 편하게 기억할 수 있는 기억공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은 일을 도외시하고, 힘없는 우리가 애써야 하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더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인터뷰가 또 한 번 정리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입니다. 정리하고 또 앞으로 나갈 힘을 얻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P 아이들의 명예회복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는데, 언제든지 아이들을 추억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장소, 아이들을 추모하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억의 장소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박은희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삶과 죽음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었던 같습니다. 처음 참사 직후 아이들을 조문하기 위해 오신 교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아이는 좋은 곳에 갔다”라며 위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에 드는 생각은 ‘그렇다면 네가 가라’는 말이 마음속에 맴돌곤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가 혹은 사회가 그렇게 위로하라고 가르쳐 온 것 같습니다. 동시에 한국 문화가 죽음을 멀리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화가 났습니다. 

2018년 4월 합동 분향소가 사라진 후 4·16생명안전공원 예배를 안전공원 부지인 야외에서 드리고 있는데, 예배를 드릴 때마다 아이들이 와 있는 것 같고, 정말 옆에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사가 이상한 말을 한다고 하겠지만, 저는 전도사이기 전에 아이 엄마잖아요.”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삶과 죽음이 분명히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공존하는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대학교 때 불렀던 “산자여 따르라”는 노래 가사가, 참사를 겪고 나니 더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죽어 간 사람들의 숙제를 잘 풀어주는 것이 산자의 몫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외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족들은 아이들만 생각하면 너무 힘듭니다. 가족들은 7년 동안 인생의 모든 것을 다 토해냈습니다. 모든 진액을 다 짜냈고 쓸 만큼 썼습니다. 아마도 먼저 간 아이들은 우리 엄마 아빠들의 현 상황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이제는 그냥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아이들의 마음을 신이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 지금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처럼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 400미터 아래에 내려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진실이 인양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가 잘못된 이해로 먼저 간 이들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고 공원으로 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을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는데, 오히려 먼저 간 이들과 함께할 때 우리 삶은 더 풍성하게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고 말하지만 그건 우리 생각이고, 아직 학계나, 문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참사 직후, 유명한 학자나 문학들이 대대적으로 이 참사에 대해 다룰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조용해서 충격이었습니다. 언젠가 감신대의 기독교 교육학을 전공하신 분이 “지금은 펜을 들 수 없다”는 말씀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몸으로 반응하는 것은 바로 반응하지만, 문학과 학문은 숙성의 기간이 필요한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백기완 선생님께서 싸우다 지치면 노래를 부르라고 목 놓아 풀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구석구석 찾아보면 아직 시도하지 못한 분야에서 4·16을 새로이 풀어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특별히 이번 7주기를 앞두고 담론을 더 이끌어 내고,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이 손잡고 살길을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P 문화적으로도 풀고, 학술적으로도 풀어내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요즘 슬픔, 분노에 대한 것이 학문의 주제이고, 과학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기록을 문학으로, 학문으로 풀어내는 것이 별로 없었다는 말씀에 공감이 됩니다. 이 사회가 아이들과 부모들을 구조해 냈는가? 수많은 사람들을 구조해 냈는가? 구조하고 있는가?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이러한 사건, 아픔들을 일상에서 문화적으로 끌어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은호 4·16 참사가 일어나고 돌아보고 성찰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4·16이 일어나기 전에 지역사회에서 삼성반도체 관련 이야기를 다룬 영화 <탐욕의 제국>을 같이 봤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자본의 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았습니다. 정말 힘없는 사람들은 사회 시스템에서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송국현이라는 장애인이 장애 등급제로 인해 장애인이 받아야 할 활동 보조를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4월 10일에 장애등급센터에서 장애 등급제에 대한 문제 제기 기자회견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13일, 집에 자그마한 화재가 났습니다. 활동 보조인만 있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화재였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송국현 님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인 4월 17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자본이라는 거대한 힘이 만들어내는 탐욕의 제국, 인간에게 등급을 매기고 평가하는 장애인 등급제, 그리고 4·16 참사가 서로 연결되어 동일 선상에 놓여있는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4·16 참사는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이면서 모든 사람들이 가해자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일어납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항쟁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 4.19 혁명, 전태일 분신, 광주 5·18 민중항쟁, 87년 6월 항쟁, 4·16 참사, 촛불혁명의 사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4·16 참사 이후의 가족들의 진실을 위한 싸움, 촛불혁명까지 이 모든 것이 한 길에 서 있고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 모든 것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지금 너희들이 사는 세상은 틀린 세상이야, 잘못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야’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한 사회 시스템, 체제, 국가주의 자본주의 등 무엇이든 간에 체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도전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그 정점에 4·16 참사가 있다고 봅니다. 결국에는 이 사회 체제와 시스템이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해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세월호 이후,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위로해야할지 모를 때, 정혜신 박사는 “사람들을 절대 위로하려 들지 마라. 대신에 가족들에게 ‘예은이는 어떤 아이였어요?’ ‘호성이의 꿈은 뭐였어요?’라고 물어보라”며,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갖도록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내가 어떤 존재고 어떤 꿈을 갖고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의 꿈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존재와 꿈도 중요하고, 그렇게 연결되어 세상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세상, 평화에 대한 가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월호는 우리 모두의 존재에 대해 들여다보게 눈을 열어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P 역사에서 짚어야 할 것은 너무나 많고, 정리된 것은 많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워야 하는 역사적 순간들이 존재합니다. 지금은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잘 들리지 않겠지만, 어떤 일로 진실과 정의가 묻혀 누군가가 밝혀내야 하는 험난한 길을 걷게 될 때, 그러한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픈 말이 있다면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김은호 이 사회에, 그리고 앞으로 비슷한 일들을 경험하게 될지 모를 분들에게 꼭 이야기해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집단 지성에 대한 신뢰, 뭔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는 마음, 결국 자기 당사자성을 극복한 철저한 연대에 대한 마인드, 그리고 결국 우리는 더불어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 이것들은 어떤 참사를 만나든지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부자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아파보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아픔을 겪은 분들에게 말하라고 하면 조심스럽기도 하고 힘들더라고요. 무엇보다 혼자 계시지 마시고, 홀로 고립된 채 외롭게 싸우지 마시고,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원숭이 쳐다보듯 하는 느낌이 들지만, 절대로 혼자 계시지 마시고, 다른 사람과 연결하고 연대해야 자신을 발견하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저는 함께 연대해서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세계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아픔의 위를 걸으며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으니, 활동이 어떤 때는 아프지만 포기하지 말고 다시 새로운 희망에 길을 열어주면 좋겠습니다. 절대 혼자 계시지 마시고, 듣기 싫지만 자기를 다시세우고 살아가시라는 ‘부메랑 같은 메시지’를 드리고 싶습니다.

박은희 참사를 겪고 나서 느꼈던 것은, 이런 참사들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고 사회적인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개인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회 구성원이 함께 책임지도록 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이 도와야 하고, 정치인들이 도와야 하고, 사회 구성원이 같이 일해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조적, 사회적 희생은 자신들이 선택한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당해야 한 것을 그들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는 우리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일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요. 사회 소수자, 난민, 등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겪는 일은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여야 합니다. 4·16문제가 터진 후 드러난 것 중 하나가, 비정규직은 자신들의 생명을 스스로 보호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회에는 드러나지 않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 공동체 전체가 사회적 재해, 참사로 드러난 약한 고리를 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사회 공동체 전체가 약한 고리로 인해 더 큰 치명타를 맞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니 사회적 희생을 혼자 감당하려 들지 말고, 다 같이 풀어야 할 문제로 바라보시면 좋겠습니다.



P 긴 시간 동안 힘든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회적 안전과 평화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문제입니다. 평화는 안녕입니다. 개인적인 안녕부터 시작하여 국가적인 안녕도 모두 평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4·16은 그런 의미에서 개인, 가족은 물론 국가의 평화로 가기 위해 함께 아파해야 하고,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인터뷰를 마무리 하면서 <평화저널 플랜P> 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나, 잡지를 통해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김은호 계간지 이름처럼, ‘플랜 P’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통되는 잡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담론, 작은 이야기들을 이야기할 때, “<평화저널 플랜P>를 보면 거기에 다 들어 있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잡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정부자 일이 더 많아질까 봐 말이 조심이 됩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 말하면,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잘 안 실어줍니다. 약한 사람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면 좋겠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이런 소식을 들려주세요.” 하면 지지해주고 독자들에게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은희 오늘 주신 질문 중에 가장 어려운 질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일이 있기 전에는 예수님 탄생을 예고하면서 천사들이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고 한 것이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겪고 나서 달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상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평화롭지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교는 이 세상을 ‘고해’라고 하잖아요. 저는 그 말도 맘에 들지 않았는데, 그런데 사실은 이 세상의 고(苦)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었기에 고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보고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기에 고해라는 말을 쓸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평화롭지 않은 것에 눈이 가고 귀를 열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평화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아픈 사람을 봐야 아픔을 치료하고 치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진짜 아픈 사람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평화를 여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답게 살고 진정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P 4·16로 인해 희생된 아이들이 불교와 기독교를 만나게 했고, 한국 사회의 아픈 곳, 약한 고리를 보게 도와주었습니다. 이 특집 글이 한국 사회에 평화를 선물해주는 통찰과 깨달음을 주길 바랍니다.



계간 평화저널 플랜P 에서 글 전문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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