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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5

시대를 지킨 양심 - 한국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나선 월요모임 선교사들의 이야기 짐 스텐츨 200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를 지킨 양심 - 한국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나선 월요모임 선교사들의 이야기
짐 스텐츨 2007


시대를 지킨 양심 - 한국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나선 월요모임 선교사들의 이야기



『시대를 지킨 양심』은 지난 세월 동안 각종 탄압 속에서도 양심을 지키며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지 E. 오글, 루이즈 모리스, 진 매튜스, 프랜 넬슨 등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 사람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관련 사진도 함께 제공된다.



목차



감사의 글 짐 스텐츨 5

발간사 선교사의 삶, 마음의 거울 - 함세웅 11

서문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 짐 스텐츨 15



제1장 우리의 마음도 여러분들과 함께 울고 있습니다

- 조지 E. 오글 37

제2장 고립에서 연대로 - 랜디 라이스 71

제3장 한국이 나에게 내 조국과 신앙에 대해 가르쳐 준 것

- 루이즈 모리스 84

제4장 아직도 남아 있는 마음의 상처

- 페이 문 120

제5장 그들이 농장에서 우리에게 결코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들

- 진 매튜스 154

제6장 모든 경계를 넘어, 하나의 공동체 - 메리언 킴 195

제7장 방관자로 남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 윌라 커넌 211



월요모임 관련 사진 모음 241



제8장 선교사, 소떼 그리고 월요모임 - 월터 “버치” 더스트 253

제9장 신념으로 실천하다 - 수 라이스 282

제10장 한번 경험해 보자 - 진 베이싱어 300

제11장 생활 지침으로 삼는 것보다 우리는 성서를 더 많이 알고 있다

- 프랜 넬슨 321

제12장 새날이 밝았다 - 메리언 커런트 330

제13장 신부님 이제 마음껏 이야기하십시오 - 짐 시노트 신부 347

제14장 봉사에서 연대로 - 린다 존스 383

제15장 1979~80:폭력이 극에 달하고 독재정권이 약화되기 시작할 때

- 편집자들 412



부록 433

공저자들의 근황 435

사실 보고서에 붙여 439

사실보고서#1:탄압은 대응을 낳는다. <박형규 목사의 사례> 441

사실보고서#5:남한의 유신헌법과 그 파급력 446

사실보고서#12:포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한국 정치범의 어머니들로부터> 451

사실보고서#18:투쟁은 계속된다 457

긴급조치 9호 466

우리 시대의 소명 470

역자후기 482





관련기사
기사제목 글쓴이



 
1 시대를 지킨 양심 - 한국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나선 월요모임 선교사들의 이야기 짐 스텐츨

===

 
시대를지킨양심 
옮긴이 최명희
 
강원대학교 어강사
감 수 진 종
 
성공회대학교 어학과교수
시대를지킨양심
한국민주화와인권을위해나선월요모임선교사들의이야기
 
엮은이 짐 스텐츨
편집팀 헨리 임, 린다 존스, 진 매튜스, 루이즈 모리스, 패트 패터슨
펴낸곳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펴낸일 2 0 0 7년 5월 1일
주주소 (100-785) 서울시 중구 정동 34-5 배재정동빌딩 B동 1 ~ 3층
전주화 ( 0 2 ) 3 7 0 9 - 7 5 0 0 팩주스 ( 0 2 ) 3 7 0 9 - 7 5 3 0 전주화 ht tp :/ / w w w . kde m o cr ac y. o r . k r 유주통 도서출판오름 ( 0 2 ) 5 8 5 - 9 1 2 2 ~ 3 시대를지킨양심
 
한국민주화와인권을위해나선
월요모임선교사들의이야기 엮은이짐스텐츨
편집팀(함께 엮은이들) 헨리임
린다존스 진매튜스
루이즈모리스 패트패터슨
ISBN 978-89-91057-25-8  03300
* 잘못된책은교환해드립니다.
=====
5
감사의
20 0 4 년탁월하고헌신적인 다섯사람이 월요모임회고록편집팀원으로나 를 돕고자 자원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많 은 빚을졌으며, 너무나 많아서 여기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의 을읽으면서세 명의 편집자인 린다존스, 진 매튜스, 그리고루이즈모리스를알게될것입니다. 다른두명의편집자들은배후에 서 노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미시간대학교한국사 조교수인 헨리 임과 19 7 0 년대와80 년대의중요한시기에월요모임회원들을직· 간접적으 로 후원했던미국연합감리교선교단위원 패트패터슨입니다. 헨리와패트 가이책의내용과구성에독특하고중요한의견을주었습니다. 우리는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깊이감사드리며, 특히현이사장인 함세 웅 신부와전 이사장박형규목사에게깊이감사드립니다. 월요모임회원들 이 겸손해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주저할 때, 민주화운동기념사업 회는그 이야기들이너무나중요해서말해야만한다고주장했습니다. 책출 판에대한일은버몬트주 링컨시에서있었던20 0 4 년 7월 월요모임의재회 기간동안에본격적으로시작했으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곧 그계획을 지원하고 책을출판하기로했습니다. 우리는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모든
 
6 7
후원과지원에깊이감사드립니다.
저는특별한도움을준 몇몇사람들에게개인적인고마움을전합니다. 편 집 장소로콜로라도집을제공해준존 풀러톤씨에게감사합니다. 오하이오 자택에서사무공간을제공하고인터넷을사용할수 있게해준로저와재키 탈보트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플로리다 자택에서 고속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해준진 쏜튼에게도감사합니다. 그리고기쁜마음으로꼼꼼하게교정 을 보아준캐시 스텐츨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제가 세세한수정 작업과 편집 작업 중 수 에 빠질 때마다, 그녀의 노고가 제 정신을일깨워주었습 니다. 
편집 과정 중에 저는 여행 중일 때가 많았기 때문에 작가들과 편집자들, 그리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직원들과저 사이에서중요한 의사소통의연 결고리역할을 해준루이즈모리스에게감사를전합니다. 또한편집에대한 의견과컴퓨터 지원을위해“ 각고의노력을아끼지않은”진 매튜스에게감 사를전합니다.
페이문과짐 시노트신부의은이전에한국에서출판된책에서각색한 부분을포함하고있습니다. 조지오 의들은아직출판되지않은자서전 에서각색했습니다. 이책에 들을게재하도록허락해준 그분들께감사드 립니다.
짐스텐츨
9

====
차례
감사의 짐스텐츨 ● 5
발간사 선교사의삶, 마음의거울- 함세웅● 11 서문 무언가를해야만했다- 짐 스텐츨● 15 
제1장 우리의마음도여러분들과함께울고있습니다
- 조지E. 오 ● 37 
제2장 고립에서연대로- 랜디라이스● 71 제3장 한국이나에게내조국과신앙에대해가르쳐준것
- 루이즈모리스 ● 84 
제4장 아직도남아있는마음의상처
- 페이문 ● 12 0 
제5장 그들이농장에서우리에게결코가르쳐주지않았던것들
- 진매튜스 ● 15 4 
제6장 모든경계를넘어, 하나의공동체- 메리언킴 ● 19 5 제7장 방관자로남는것은가능하지않았다 - 윌라커넌 ● 21 1 
월요모임관련사진모음● 24 1 
 
10 
제8장 선교사, 소떼그리고월요모임- 월터“ 버치” 더스트● 25 3 
제9장 신념으로실천하다- 수 라이스● 28 2 
제10 장 한번경험해보자 - 진베이싱어● 30 0 
제11 장 생활지침으로삼는것보다우리는성서를더많이알고있다
- 프랜넬슨 ● 32 1 
제12 장 새날이밝았다- 메리언커런트 ● 33 0 
제13 장 신부님이제마음껏이야기하십시오- 짐시노트 신부● 34 7 
제14 장 봉사에서연대로- 린다존스● 38 3 
제15장 19 7 9 ~80 :폭력이 극에달하고 독재정권이 약화되기 시작할 때

- 편집자들● 41 2 
부록● 43 3 
공저자들의근황● 43 5 사실보고서에붙여● 43 9 
사실보고서#1:탄압은대응을낳는다. <박형규목사의사례>● 44 1 사실보고서#5:남한의유신헌법과그파급력● 44 6 사실보고서#12 :포드대통령에게보내는편지.
<한국정치범의어머니들로부터>● 45 1 사실보고서#18 :투쟁은계속된다● 45 7 긴급조치9호● 46 6 우리시대의소명● 47 0 역자후기● 48 2 
11 

발간사 선교사의삶, 마음의거울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기억과전승을통해인간의 존엄과아름다 운공동체삶을지향하고있습니다. 우리는지난5년동안세차례한국의민 주화와인권실현을위해애쓰신 해외인사들과선교사들을초청하여감사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이분들의 삶과 증언을 책으로 출간하고 기리게 되어매우기쁩니다. 
꼭 31 년전인 19 7 5 년 4월 9일한국에서는독재자박정희시절에이른바인 혁당사건으로여덟분이억울하게 사형당했습니다. 때문에국제사회에서는 이사건을‘ 사법살인’이라부르며한국의군부독재를무섭게꾸짖은바있습 니다. 
그런데20 0 6 년 4월 9일오늘은묘하게도 주님수난성지주일(Passion & Pal m Sun d a y )과 겹쳤습니다. 이날 그리스도인들은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기억 하며 그의죽음을 묵상하고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모든불의한 재판이 종 식되도록기도를올렸습니다. 
마침지난 3월하순한국에서는박정희독재정부가조작한인혁당사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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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재심이 열렸습니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었습니다. 재심도중 인혁 당 관계자들의부인들은내내눈물을흘리며이 사건의진실규명을위해도 와준모든분들께, 특히월요모임선교사들의보편적사랑과깊은인간애를 생각하며감사했습니다. 월요모임회원들은참으로한국을한국인인우리보 다 더 사랑하고 생각하고 아끼고 껴안았던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들의삶과증언을우리는다섯번째복음또는사도행전의속편이라부르고 싶습니다. 
이 증언에는 바로 하느님께서 이들을 어떻게 부르시어 억압받고 가난한 땅 한국으로 인도하셨는지, 그리고 이들이 한국인들의 정치사회적 삶에 개 입하게된 구체적동기가실려있습니다. 이것은바로예언자들의소명사화 와도같습니다.
이들은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독일출신의선교사들로서자신의 나라에서의보장된신분을버리고모든면에서아주열악했던한국땅을스 스로찾아왔던우리의벗들입니다. 이와같이이들은좋은환경을떠나 그리 스도와같이스스로낮은데를찾아온비움(ke n o s i s )의사람들입니다.
선교사들은선구자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에가면로마법을따르라”는 생 활의지혜를몸소실천하면서한국인보다더욱한국인으로살았던분들입니 다. 이점이더욱존경스럽습니다.
이들은또한한국이 19 5 0 년 6· 25 동족상잔의비극후 비참하고가난했을 때한국의가난한상황을 있는그대로껴안으며자원적가난, 성적가난을 살았던 실천적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실천이 가장훌륭한 설교이며 가장 훌 륭한선교입니다. 
7· 80 년대 참으로 혹독한 한국의 정치상황 속에서 외국인으로서의 특권 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자청하면서 시대의 징표를 읽으며 현장에 뛰어들 었던이들은참으로신념과소명의주역들입니다. 독재권력에맞서인간의 자유와존엄그리고한국의민주화를외치며고문과핍박을받고감옥에갇
발간사 13 
혀 있던청년학생들과노동자, 지성인들의소식을듣고이들은제일 먼저아 파하며 모여기도하고 구속된 청년학생들의안부를 걱정하고 옷과책 그리 고 치금을 모아 감옥에 있는이들에게 전달한 착한사마리아 사람이었습 니다. 
또한 한국의 인권소식을 국제사회에 알리며 구원자의 역할을 다 했습니 다. 무엇보다도그리스도교의본질이인간해방에있음을깨달은 이들은, 억 울한 죄목으로 목숨을 잃은 인혁당의 여덟분의 죽음에서 십자가상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실존의 체험자들이었습니다. 역사와현실의 사건 속에서 하 느님의구원의손길을감지한이들은참으로창조적신앙인들입니다. 
19 7 0 년대는박정희독재자가남자를여자로, 여자를남자로바꿀수만없 었을뿐, 그의말 한 마디가 절대법이었던 참으로 살벌한 암흑의 때 습니 다. 모두가침묵하고괴로워할때, 뜻있는청년, 학생, 민주인사들만이그독 재자에맞서‘ 아니오’를 외쳤던시절에 참으로큰 힘이되어준분들이 바로 월요모임의선교사들이었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것은 한국인의 의무이지만, 외국 선 교사들이자신의불이익과모욕을감수하면서한국인보다더한국인이 되어 이땅의자유와민주화를위해헌신한삶은참으로감동적입니다. 박정희, 전두환등불의한군부독재자들의흔적이아직도곳곳에 남아스 며 있는지금, 한국의젊은이들은불과 2· 30 년 전의과거를잊고역사의식 과 인간애를망각한채모두개인주의와이기적인삶으로치닫고있으니, 이 것은너무도부끄러운일입니다. 이러한우리에게이삶과 증언은바로우리 모두의삶을진지하게성찰케하는마음의거울입니다. 오늘의 자유민주 한국이있기까지 참으로드러내지 않고 도와주신 모든 선교사들과은인들께, 인간의이름으로그리고동지적결속속에서깊이감 사드립니다. 
희생과헌신, 관심과사랑이라는인간적끈끈한삶은언제나모두에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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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을줍니다. 그 감동의 원천을 함께확인하며더욱끈끈한 일치와 연대속 에서아름다운인간애를노래합시다. 감사합니다.
20 0 7 년 5월 1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함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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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해야만했다
짐 스텐츨(Jim Ste n t z el ) 

사람들은 학업을 마치고 나면 자신의 의도에 따라진로를 결정하고 직장
생활을시작한다. 그러나삶이란우여곡절과반전으로가득하다.
나는해외특파원이될 생각이없었다. 당시나는콜럼비아대학교언론대 학원으로부터퓰리쳐장학금을받았고, 이장학금덕분에나는일본 지사해 외 특파원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와미국의 세계 감리교목회자위원회에서활짝열린기회를제공하기전까지, 나는일본에 서 선교사-언론인이될생각이전혀 없었다. 도쿄에살면서, 남한에대한 을 주로쓰게되리라고는생각지못했다. 하지만몇차례흥미로운우여곡절 과극적인전환을맞은뒤, 나는한국에대해 을쓰게되었다. 첫 번째‘ 곡절’이란 19 7 3 년 도쿄에있는한 호텔에서가진김대중과의인 터뷰 다. 김대중은19 7 1 년 대통령선거에서박정희와간발의차이로낙선했 다. 그선거는부정선거라는오명을쓴선거다. 내가김대중과인터뷰를했을 때그는서울에서벌어졌던암살사건의충격에서벗어나고있는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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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터뷰는특기할만한것은아니었다. 하지만인터뷰가 있은지 몇 주 뒤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와 인터뷰를 가졌던 긴자 다이 이치 호텔의 그 방에서김대중이납치된것이다. 한국중앙정보부요원들이일본에서그 를 강제로 끌어내어 작은 선박에 싣고 동해로 향했다. 훗날 김대중이 내게 말하기를동해바다에떠 있는선상위에서바다로던져져다시는아무도모 르도록자신이“ 사라져버릴것”이라는사실을알았다고했다. 이일이 벌어지기전, 비행기한대가배 위로저공비행을하고 있었다. 미
국의군용기인가하고그는의아해했으며, 그는목숨을건졌다. 그날은 언론인으로서 내 인생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여전히 도쿄 에 살며, 일본 외신기자 클럽의 회원이었지만, 한국은『네이션(Nat i o n )』지,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Far Eas t e r n Economic Rev i e w )』,『 퍼시픽뉴스서비스
(Pacific News Se rv i c e)』,『 뉴 아시아 뉴스(New Asia Ne w s)』,『 서져너스 (So j o u r ne r s )』,『 크리스천 센츄리(Chiristian Cen t u r y)』와 미국과 일본의 다양한 교회관련 간행물,『 세카이』를 포함한일본의 많은월간지에앞으로 내가발 표할수백편의기사들의초점이되었다.
19 7 3 년부터19 7 6 년까지김대중은대부분의기간을가택연금상태에있었 기때문에, 나는집으로그를정기적으로방문했다. 한국인대부분과단절된 채 가택연금하에있다는 것은김대중이 나와 같은외국인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많았다는것을뜻했다. 그는끈기있는선생님이었으며, 나는정치적, 경제적, 그리고적(김대중은가톨릭 신자이다)으로한국에 대하여 훌륭한 가르침을받았다. 평생동안우여곡절을겪은뒤, 19 9 7 년 12 월김대중은한국의대통령에당 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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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내가한국의 문화, 역사, 정치지형와경제상황을 이해할 수 있 도록도와준 많은한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내가한국에 대해배운 대부분은자칭월요모임이라고부른한국에 거주했던 소수의 서양사람들에 게서 다. 이들은나를도와줄수 있는한국인들을내게소개해주었고, 통역 도해주었다. 
월요모임회원들은아이오와 주 와펠로, 펜실베이니아주 핏케언, 서스캐 쳐원주의사스카툰과같은작은도시에서온 선량한기독교인들이었다. 학 교를졸업한후 그들은자신의의지대로한국의선교사로봉사하기위해자 원한사람들이었다. 그들중 젊은사람들은 본인들도 인정하듯 천진난만하고이상주의적이었 다. 그들은 많은것이부족한 상태로 한국에 도착했다. 그들은한국처럼 완 전히낯선문화속에서개인적으로나선교사로서그들에게어떤일이벌어질 지전혀모르고있었다. 
월요모임회원들에게서부족하지않았던것은신앙이었다. 그들은하느님 께서는 담대하고 예기치 못할 방법으로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사랑도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자신의 가슴이 찢어질지라도 사 랑으로 흔쾌히 나설수 있었다. 그들은 용기도 부족함이 없었다. 신념과사 랑속에서그들이나아갈때위험을생각하지않는용기가있었다. 그러나그들의신앙, 사랑, 용기는삶의우여곡절속에서아직시험받지않 은 겨자씨와같은것이었다. 이겨자씨는19 7 0 년대남한이 겪은정치경제적 소용돌이라는커다란텃밭에서놀랍게자라날것이다.
 
19 7 0 년대는한국과그주요동맹국인미국에게있어 30 년간의소용돌이의 가장중심이었다. 미국은베트남에서길고잔인한전쟁의수 에빠져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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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동남아시아에서일어난반란이동북아시아에서극단적인안보수단을강 구하는 구실이 되었다. 19 7 5 년 4월 사이공의 미 대사관 옥상에서 헬리콥터 가 마지막 미국직원을 철수시킬 때, 한국정부가 모든 형태의 반정부활동에 대한단속을강화한것이결코우연의일치는아니다.
미국정부는 반대하지 않았다. 소련, 중국, 일본과 아주 가까이에 위치한 한반도는 미국의 냉전전략의 중심지 다. 미국은한국의 민주주의보다“ 안 정”을더원했다.
한국대통령박정희는이 상황을최대한활용했다. 그는자신에게독재권 력을부여했다. 반정부 인사들을 투옥했고, 시민의자유를 말살했고, 언론, 집회, 표현의자유를 부정했으며노동자의권리를묵살했다. 사회구석구석 까지 중앙정보부 요원을 파견했으며, 이러한 조치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 산주의자의음모를조작했다.
미국정부는군사독재의아주야만적인몇몇조치들에반대하는성명을발 표했지만대부분그것은정치쇼에불과했다. 근본적으로미국과미국의주 요 아시아동맹국인일본은박정희가자행하는억압통치의대가보다지역안 보의이익을더욱중시했다.
미국의 정치, 군사, 경제적지원에의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 에 박정희는국내에서의지지를선동하기위하여신속하면서공격적으로움 직 다. 기름칠이잘된선전기계는북한의침략이 임박했다는“ 뉴스”와 공 산주의자들이남한의 학교, 공장, 교회에침투했다는“ 보도”를 대량으로유 포시켰다. 
이런 술책이 갖고 있는 한 가지 장애물은 수십 명의외국 선교사가 이런 학교, 공장, 교회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인동료, 학생, 친구및이웃들이고초를당했고, 체포되었고, 심문과고 문을당했고, 투옥되었고, 블랙리스트에올라가거나그로인해직장에서쫓 겨났다는사실을들어서알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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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선교사들은침묵하고있었다. 자신의일, 가족과그들이누리는 풍요로움이없어질까 두려워하면서선교사들은한국정부의손님으로서“ 국 내정치에개입”하는일을자제해야한다고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몇몇 외국 선교사들은 선악의 구분이갈수록 분명해짐을 깨달았 다. 선교사들은그냥방관자로남아있을수가없었다. 성경이나그 어떤근 거로도중립적입장을정당화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그들은무언가를해야 만했다. 선교사들은정의를위해싸우는사람편에설수밖에없었다. 하지만, 무엇을해야할것인가?
처음에는 개신교, 가톨릭선교사들이 함께모여한국인 동료, 학생, 이웃
들에게무슨일이벌어지는지소식을공유하기로합의했다. “ 월요일밤이어때? 좋다. 매주선교사집을 돌아가면서만나는것이어떤 가? 오케이. 현재발생하고있는일들에대응할방법에대해논의해보면어 떨까? 좋은생각이야.”
이렇게 월요모임(Monday Night Grou p )이 만들어졌다. (랜디 라이스가 쓴 을 참조하시오.) 19 6 0 년대 이와 유사했지만 더 큰 모임을 본보기로 하여 모임이 생긴 것이다. 월요모임은 소규모 다. 보통8~10 명이모 고, 어떨 때는 20 명까지 모 다. 선교사들은미국, 캐나다, 호주 독일에서 온 사람들 이었다. 선교사들은장로교, 감리교, 가톨릭, 캐나다연합교회및 기타다른 교회에소속된사람들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철저히 무력감을 느꼈다. 그들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한국 인들은정부의손아귀안에서엄청난굴욕을당하고있었고, 선교사들이할 수 있는일이라곤 매주 월요일 자신들의 거실에서 둥 게 모여앉아 이러한 굴욕에대하여이야기하고, 그것을고향에편지로보내는것이전부 다. 이러한 무력감은 의도했다기보다는우연한 계기로 사라졌다. 첫째, 월요 모임은한국에들어오고나가는정보의공백을메우기시작했다. 당시99 퍼 센트의한국인들은 국내외의 전자통신을 사용할 수 없거나 사용할 금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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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없었다. 국내외언론매체도 엄격한검열을받았다. <타임지>와<뉴 스위크>지에게재된한국관련기사도정부검열관이꼼꼼하게시커멓게칠해 버렸다.
실제로무슨일이벌어지고있는지알고있는한국인들도적었고, 해외에 서한국의현실이얼마나 끔찍한지아는사람은더욱적었다. 대부분의해외 언론사들은 도쿄에 있는 뉴스국에서 받은 소식을 보도했다. 외신기자들이 한국에 올 때는서울에만 왔고, 그것도 긴급한상황이있을때 와서단기간 체류할 뿐이었다. 한국에 있을때 외신기자들은정부와 대사관의 소식통에 크게의존하는경향이있었다. 그러나외신기자들이월요모임회원들을만나게되면서상황은바뀌었다. 선교사들은대사관직원이모르거나알려주지않으려는소식을알려주었다. 곧 외신 기자, 국제교회조직의대표와 인권단체 사람들이 매주월요모임에 서공유했던방대한정보를활용하기시작했다. 
19 7 0 년대중반경월요모임은핵심적인국제적통로가되었다. 월요모임은 한국에서는금지된외국언론기사를해외로부터받아서한국내에적절히배 포했다. 더 중요한 것으로 월요모임은 정치범 목록, 고문에 관한보고서 및 민주화선언문등과같은편지와자료를수집, 정리하여한국밖으로반출 했다. 이들은자료를몸소들고도쿄나더먼곳까지직접운반하곤했다. 나는월요모임의 지식과 감을 잘 활용했던 일본 외신기자 클럽에 소속 된몇몇회원의 한 명에불과했다. 우리외신기자들은월요모임에서제공하 는 정보와한국과의연계, 그리고한국의문화적감수성과정치적뉘앙스에 대해그들이알려준배경지식에서도많은도움을받았다. 월요모임의도움을받았던도쿄주재미국기자가운데저명한이로는<워 싱턴포스트>지의돈오버도르퍼, <뉴욕타임즈>의리처드핼로란과폭스버 터필드,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의엘리자베스폰드가있었다. 박정희정권은오직중앙정보부와한 줌도되지않는한국인들만알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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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여겼던체포와고문 사실을일본과미국의언론이 어떻게24 시간내에 보 도할수 있는지이해할수가없었다. 월요모임회원들은자신들이종종그러 한정보를주었다고이제는말할수있다. 
월요모임의국제적네트워크가형성되면서,‘ 한국지원네트워크’와‘ 한국
인권을위한북미연합(Nor 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 ea )’과 같은일본과미국내의연대조직의중요성도커져갔다. 인터넷이통용되는 오늘날에는월요모임의국제적인 통신수단이매우이 상하게보일수 있다. 그렇게 많은서류를 전 세계에전할필요성과그것의 어려움을이해하기란쉽지않다.
 
한국인들은30 여 년간의민주주의와인권을위한 투쟁의상처를간직하고 있다. 그러나한국인의벗이었던외국인선교사들도상처입는일을피할수 는 없었다. 월요모임 회원 중 두 명이 추방당했으며 다른 회원들은 추방의 위협에시달렸다. 또 회원중 세 명은자신들의한국인남편이고문과 투옥 을 당함으로써 고통을 받았으며, 모든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정부감시를받았다. 이것이겨자씨가자라난텃밭인것이다. 
월요모임회원들은대부분이한국인의 삶을바꾸기위하여한국에파견된 선교사 다. 마지막으로본국에돌아갔을때, 선교사들은타인의삶을변화 시킨것만큼, 자신들의삶에도변화를겪었다. 
 
이러한변화는정치적, 경제적일뿐만아니라적인변화 다. 월요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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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들은충격을겪으면서자신들이한국에품고왔던정치적 천진난만함에 서 깨어났다. 선교사들은박정희정권이한국의가장훌륭한기독교인과가 장 참된애국자에게 가한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그들은 그런학 대에대한미국의용인과합리화로인해또한번충격을받았다. 월요모임 회원들은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접하기도 했다. 국제 언론사 들은 남한의“ 경제 기적”을 보도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많은노동자들은경제사다리의밑바닥에서“ 기적”의대가를혹독히치 르고있었다. 그것은하루 12 ~18 시간, 일주일에6~7일 노동이었다. 노동자 들은 빈곤임금과 견디기 힘든 노동조건에 시달렸고, 작업장에서시력을 잃 거나손발을잘리거나 심지어목숨을 잃기도했다. 소위“ 노동조합”은 정부 와사측이통제하고있었고, 노동운동가는구타당하고연행되었다. 나는월요모임회원들이경험한모든 변화와발전중 가장중요한것이그 들의 적인변화라고믿는다. 적인변화의모범이될만한 한국인들이많 았기때문이다. 
하느님은대부분의경우많은이들에게불가사의한신비일수 있지만, 한 국의민주주의와인권을위한투쟁의최전선에서움직 던한국기독교인들 에게 하느님의 역사는 확실하고 분명했다. 하느님은 이들에게 끊임없이 놀 라운지혜, 용기, 희망, 결단력과인내심을주셨다. 
여러분도알게되겠지만, 이러한한국기독교인의자질에향을받아이 책에 을쓴 선교사들은, 신앙을 깊게하고, 마음을 확장시키고, 자신들을 원히변화시키게되었다. 
단지외국에나가, 새로운문화속에서사는것만으로도선교사들은세계 어디에서나 세상이 자신이 알거나 상상했던 것보다 더 넓다는 것을 깨닫는 다. 혼이인도하는민주주의와인권을위한투쟁속에서한국인들과연대 하여일하면서, 월요모임회원들은하느님께서는자신들이알거나상상했던 것보다훨씬더크시다는것을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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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깨달음에는 하느님이 유머감각을 지녔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이 책에기록된고통과비애속에는재미있는사건들도있다. 이러한재미있는 사건은종종 월요모임 회원들을 포함하여 수상한 사람을 미행하고 그들의 행동을보고하는일을하는중앙정보부 요원과의만남이나그들을피하려는 시도들이포함되어있다. 
 
월요모임회원들은“ 한국의국내문제에개입을 중단”하라는 끊임없는 압 력을받아왔다. 압력은다양한 곳에서 왔다. 한국 내의동료선교사부터 시 작하여멀리는미국의원들에게서까지압력이있었다. 예를들어, 미하원의 원 오토 E. 패스맨(민주당, 루이지애나주)은19 7 5 년 여름에다음과같은말 을했다. 
“ 현재 남한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정부가 없다면, 남한 국민들은 북한정책의 지배를 받게될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사들께서개혁이 아니라 종교를가르치고,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정부를운 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이와관련된 모든사람들이더 잘 살게될 것입니다. 선교사가본연의 임무 인종교를가르치지않는다면본국으로돌아가야만합니다.”
이런 비판을 한 미국 의원은 패스맨 혼자가 아니었다. 한국내 일부 미국 선교사들도월요모임같은유형의“ 정치적인개입”에 대해항의하는강력한 편지를 미국의 선교위원회 임원들에게 보냈다. 그들은 이러한 개입이 어떻 게 모든선교사와선교활동을위험에빠뜨렸는지를상세히보고했으며그러 한활동에제재를가할것을선교위원회에간청했다.
한국선교사들은 선교위원회에편지를 보내나를“ 용공주의자”라고 공격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자신의 경우를 포함하여 모든 경우에, 선교위원회 임원들은월요모임의증언(과내가쓴기사들)이기독교의임무와성서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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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 이러한 지지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안된다. 모임회원들은종종반대자들에게둘러쌓이고, 비 판자들에게비난을받고, 정부요원의미행을당했지만, 자신들이국내의벗 들로부터(한국기독교인) 혹은해외의동맹자들로부터(선교위원회와한국과 연대하는단체들) 버림받았다고는결코생각하지않았다. 그들은 많은 동료 선교사들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고 느꼈다. 월요모임의 활동에대한선교사들의반대는19 7 5 년 극에달했다. 월요모임은한국에있 는모든선교사들에게편지를보내어대응했다. 그들은 편지를통해왜 기독 교인으로서 그들이 악에 대항하여 용기를 내어 발언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 지를설명했다. 또한무엇이“ 종교적으로적절한 활동”인지를왜 정부가결 정하도록 허용해야 하는지물었다. 그리고 복음과 사회활동은 신약성서에 명시되었듯이 분리될 수 없는것을 일부 기독교인들이 분리하고자 하는것 이유감이라고표명했다. 진 매튜스가 뉴욕시의 선교위원회 임원들에게 그 편지의 사본을 보냈다. 그들은 이 편지가 시의적절하며 중요하다고 여기고선“ 우리시대의 소명(A
Tract for our Tim e s )”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으로 출간했다. 이 팸플릿 전문은 첨부자료에포함되어있다. 
첨부자료에는 또 민주주의와 인권을위한 투쟁과 관련된다양한 주제에 관한 1~3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인“ 사실보고서(Fact She e t s )”도 포함되어 있 다. 월요모인회원들은60 편 이상의사실보고서를 만들었으며, 이보고서들 이한국을빠져나가복사되어전세계로배포되었다. 
 
월요모임 회원들은간단하고실천적인이유에서한국인의투쟁에 가담하 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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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인간적이었다. 피흘리는 학생이나 수감자의 배우자가 자기 집 문앞에나타나면당연히맞아들인다. 
* 그들은독실했다. 하느님에대한경애와성서에대한이해로인해그들 은 고통받는사람을받아들이고, 수감자를돕고, 억압받는자를보호해 야만했다. 
* 그들에게는모범사례가있었다. 투쟁의최전선에있는한국기독교인들 의사랑과희생에서 감을받지않을수가없었다. 
* 그리고 작지만 강력한 조직들이 다양한 차원에서 그들을 지원했다. 한 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같은교회단체, 목요기도회나갈릴리교회와같 은신앙 공동체, 그리고해외의선교위원회, 교회기관및 연대단체등이 지원을보냈다.
월요모임의 회원수는 적었으나, 그 향력은 지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국인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설령체포되 더라도, 똑같은일로인해한국인들이받을혹독한처벌에비해선교사들은 훨씬약한처벌을받았다. 
월요모임은몇 가지방어막을 가지고있었다. 우선그들은외국인이었고, 대다수가미국이나캐나다인이었다. 그들은기독교인이자선교사 다. 이것 은 그들이 재빠르고 손쉽게 전 세계적인 교회조직과 언론 네트워크와 접촉 할 수 있다는 것을뜻했다. 박정희정부는 다른경우에는 대담한 행동을 했 지만미국인, 기독교인또 선교사를처벌했다는외국언론의비난은피하길 원했다. 
같은 이유로 박정희 정권은 한국 기독교인을 처벌하는 일에도 민감한 듯 했다. 이로인해기독교인들은상대적으로덜한처벌을받았는데, 이는정부 내강경파들을격분시켰다. 

강경파의반발은 19 7 6 년 3월 1일 서울명동성당에서있었던 한국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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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들의구국선언에대한정부의대응에서분명해졌다. “ 이들(선언에서명한사람이나이를지지하는사람)은종교탄압이라는잘 못된 인상을 주려고 종교의식을 의도적으로 이용했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 로 종교적인양심이전혀없다는것을드러냈다. 우리는이것이무책임하고 비겁한행동이란사실에개탄한다.”
 
한국인은 자존심이 강한민족이다. 반미감정은 이러한 자존심의 한 측면 이다. 그것은 애증관계로훨씬더 잘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인들은 한국전에서미국이 보여준 희생(5만 명 이상의미군이죽었다) 때문에미국 을사랑한다. 그러나한국인들은또한국의미군기지근처에서자행되는“ 추 악한미국인”의행위를 증오한다. 한국인은미군기지가보장하는안보에감 사하지만“ 점령된국가”라는느낌은싫어한다. 미국 화와문화를즐기지만 미국인들도한국문화를똑같이존중해주길바란다. 미국의정치, 외교적권 력을중시하지만, 미국인들이무수히많은방식으로그 권력을오용내지남 용하는것을거부한다. 
19 6 0 년대한국내 대학캠퍼스에서시작된 반미감정이, 19 7 0 년대와 80 년 대에급속히번져나가대학생을넘어더 많은국민들에게퍼져나갔다. 반미 감정의 주된원인은 미국의 군사독재에 대한지원이었다. 인권을 발판으로 지미카터가대통령에당선되었지만, 카터정권하의미 국무부는닉슨및포 드 행정부의 정책 우선순위를 그대로 받아들 다. 한국에서는 궁극적으로 지정학적문제가인권문제를압도했다. 주한미군기지와한국에주둔한4만 명이상의미군이이 지역이전략적으로중요하다는것을잘보여준다. 워싱 턴에있는 그 누구도 동북아시아에서현 상태의 미국의 헤게모니가 방해받 길원하지않는다. 그결과많은 한국인들은한국의인권과민주주의를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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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에대해서미국이눈멀고귀먹었다고생각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미국이한국의민주주의에관심이 없다는 인식이 한국 에서민주주의를가져오는데도움이되었다. 눈에보이는미국의지원이없 다는것은모든많은것들을 한국인 스스로 해야만 한다는 것을뜻했다. 그 들은조직했고, 싸웠고, 전단을만들었고, 탄원했으며, 감옥에도갔고, 일어 서서외쳤고, 경우에따라목숨을바쳤다. 모든것을스스로한것이다. 그리고한국은살아숨쉬는민주주의국가가되었다. 위에서강요된힘이 아니라아래 풀뿌리로부터의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만일 미국이 군사력으로 민주주의를 강요하려 했다면, 오직 유혈사태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계속되풀이되는주제는한국여성의강인함과용기이다. 여러 분은 놀라운 일을 한 보통 여성과 이를 훨씬 뛰어넘는 몇몇 비범한 여성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여성들이 종종 투쟁의 전선으로 나아갔다. 전선에 있는 남성들이감옥에있을 때만그랬던것은아니다. 그들스스로지도력을발휘 했고, 외쳤으며, 선언문에서명하고, 기도모임을이끌고, 항의집회를주도하 고, 다른사람들이동참하도록용기를주었다. 
그러나여성들은이것이상을했다. 한국인들의민주주의와인권을위한투 쟁은정치적인만큼 적인성격을가진다고나는믿는다. 그리고이두가지 를가장심오하게연결시킨사람이종종여성들이었다. 여성들은남녀모두가 깊은 혼의저수지를접하고거기에서힘을끌어올릴수있도록도왔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운동의역사에서 여성의 이야기는 아마도 가장
논의가덜된분야일것이다. 
박정희 군사독재는 젊은 남자를 군대로 끌고가고, 남학생들을 침묵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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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남성노동자를 위협하는 데 있어능란했으며 무자비했다. 그러나이 정 권의중대한 계산착오 중 하나는 정치범의 부인을 포함하여 여성들을 심각 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정부는“ 인혁당” 부인들이 공개적으로 발언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은한목소리로외쳤다. (오 목사와시노트신부의 을참조하시오.) 
25 년정도가지난 뒤, 정부는“ 인혁당”은조작이며박정희정부가여덟 명 의 무고한사람을죽 다고드디어인정했다. 그러나정부는30 년간실질적 으로블랙리스트에올라 있던그 부인들에게 아직까지 위로의 말이나 물질 적보상을해주지않았다.*
 
20 세기의지난 30 여 년간한국에서서서히진행된민주혁명에관해흥미 로운점 가운데하나가민주혁명과정에서그렇게중심적인역할을했던한 국 기독교인들은 한국기독교사회내에서소수파 다는것이다. 당시에는 기독교사회도한국사회에서는소수다. 
왜 이 사실이중요한가? 왜냐하면오늘날한국에서뿐만아니라미국내에 서도소위자칭“ 주류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도덕적으로 보수주의 국가권력의버팀목이라고주장하기때문이다. 
19 7 0 년대소수 던기독교사회 내에서도소수 던한국기독교애국자들 은결코저렇게 오만하지않았다. 종교적정치적의도를내세우고자하는은 한야망은가당찮은것이었다. 한국기독교애국자들은권력의기반이아
 
* 20 0 7 년 1월 23 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했으며, 4월 9일의 추모제에서 정부는 법무부장관을 통해 유감과 유가족에 대한 위로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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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민족의 양심이었다. 그들스스로 권력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타인들, 특히억압받고착취당하는사람들의권력을추구했다. 아마이들만큼의진정성을가지고증언할 수 있는사람은소수 중의소수 뿐일것이다. 
19 7 0 년대에 항변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어떤“ 숨은 의도”를 가질 만큼 체제내에서자리잡지못한상태 다. 다만그들은명확한비전을갖고있었 다. 모든국민의권리가 존중되는조국과국민의의지를반 하는정부가그 것이었다. 
 
다른선교사들은가만히있는데일부선교사들이위험을무릅쓰고동참하 게 된 이유는무엇인가? 똑같은질문을수백만의한국기독교인들에게던질 수 있을것이다. 왜대다수의기독교인들은정부를지지했고, 오직소수만이 정부에맞서싸웠던가?
해답의일부를세대적인것에서찾을수 있다. 나이많은선교사들과한국 인들의의식속에서전면에있는것은바로한국전쟁과반공주의 다. 그러 나 이 책의저자들을비롯하여신세대한국인들, 더넓은교계및 세계를경 험한 사람들이 등장한 19 7 0 년대에 이르러, 그러한 의식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시작했다. 더큰비전을 가진그들은새로운한국에대한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정부에대한희망을품기시작했다. 
그러나 세대간의 격차 외에도 신학적인 격차가 존재했다. 당시에도그랬 고 지금도한국기독교인들대다수는미국기독교인들과마찬가지로기독교 를 성공, 부, 권력, 군사, 국가또는민족과쉽게연관시킨다. 이러한사람들 은박정희와같은강력한민족적지도자에대해쉽게복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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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칭송되는한국기독교인들은다른신학을가지고있었다. 그것 은 가난하고, 고통받고, 버려지거나감옥에갇힌사람들사이에서목회하는 예수를기초한신학이었다. 이러한윤리에대한순종이국가에대한복종을 뛰어넘었다. 어떻게이렇게적은수의한국기독교인들이그렇게큰 향을끼쳤는가? 그들은정부에대한복종 대신조국에대한사랑으로충만했다. 그들의애국 심을의심하는사람은거의없었으며, 그애국심에는역사적인요인이있었 다. 19 0 5 년부터19 4 5 년까지한국은일본제국주의의지배를받았으며, 때때 로 교회는조선인들이함께모여억압과지배에서해방된민족에대한꿈을 토로할수있는유일한장소가되었다. 
 
신학교 교육을 받은탓에 나는한국 기독교인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월요 모임회원들의 적여정을이해할수있었다. 그러나언론학교육도받은탓 에 처음에나는월요모임회원들의주장에대해약간회의적이었다. 나는미 국이지원하는정부가실제로고문을저질 다는것을믿기전에두세명의 증인을만나길원했다. 그래서월요모임회원들은서둘러서나를서울의아 주 변두리동네의다방으로데리고가서, 고문희생자들을소개해주고그들 의 상처도 보여주었다. 이믿을만한증인들이나에게믿을수 없는이야기 를해주었다. 어떤때는내마음이견딜수없을정도 다. 당시내가정말놀랐던또 지금까지도놀라운것은고문당한인간의마음 은얼마나많은 것을참고 견딜수있는가 하는것이었다. 놀라운일은, 고문 당한사람이 일단육체적 상처가 치유되고 나면더 깊은신념과 헌신, 새로 운자기중심과결단력을갖고다시운동에동참하게된다는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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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관적인기자”가 되고자하는과정에서, 나는박정희 독재에맞선사람 들을적절하게묘사할말들을찾아내지못했다는것을고백한다. 서구의세 속 언론에서 그들을 지칭하는 가장 흔한 단어는 형용사“ 반정부(a n t i go ver n m e n t )”나 명사“ 재야(di s s i d e n t s )” 다. 두 가지표현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둘다 부정적이며무엇에반대한다는표현이다.“ 재야”라는말은불 평불만이많은, 내지화합할수없는사람들이라는의미를지니는것으로느 껴진다. 그러나내가알던한국 기독교인들은결코이런사람들이아니었다. 그들은인생, 신앙, 민족, 변화에대한전망과민주주의의승리에대해항상 놀랄정도로긍정적이었다. 그들이 맞서서 싸운 것으로 그들을 설명하는 것은핵심을 벗어나는 일이 다. 그들이 원했던 바를가지고 그들을 묘사하는 것이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자면, 모든한국인들을위한정치경제적정의의실현등이 그것이다. 그들 은인권의주창자들이었다.
“ 재야”보다는“ 애국자(pa t r i o t s )”라는표현이더정확하다. 왜냐하면그들은 조국을사랑했기때문이다. 또“ 기독교인(ch r i s t i a n s )”이라는표현이”재야“ 라 는 표현보다는더 적절하다. 왜냐하면정부에맞선지도자들은예수가그들 에게명한일을했을뿐이라는것을이해했기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깨지기 쉽다. 박정희 통치하에 한국에서 일어났던 일은세계 어느민주주의국가에서도일어날수 있다. 심지어한국에서도다시일어날 수 있는것이다. 이를위해필요한것은대통령의결단, 입법부의순종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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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부의 협조, 언론통제, 그리고강력한 군대와 경찰이다. 또한“ 저기바깥” 의적(공산주의나테러)이“ 여기안”에이미침투해있고언제든지공격할수 있다는공포심과이 공포심을조작하는언론, 체포와연금의권한을확대시 킨 자의적“ 긴급조치,”애국주의와“ 우리식의삶을보호하자”는 호소, 전자 통신에 대한무제한적감시와 기타감시, 헌법의 효력정지 또한개헌, 시민 단체및 종교단체와 그 지도자의 임의적인 선출, 법적권리와인권및 노동 권의억압, 그리고 고문등도필요하다. 민주주의를세우는 데는수 세대가 걸리지만, 그것을무너뜨리는데는몇달밖에걸리지않을수도있다. 
 
19 7 3 년 이래중앙정보부요원들은 한국에서 내가가는거의모든곳으로 따라오면서나를미행했다. 서울YM C A 식당에는매일내가아침을먹는동 안 한요원이앉아 있었다. 가끔나는이“ 꼬리”를떼어내는 일을즐겼다. 저 명한반정부인사와의인터뷰가미행당한후, 나는요원들의일지에뜻밖의 상황이더해지기를기대하면서가끔미대사관을잠깐씩들리곤했다. 오늘날까지나는 중앙정보부가내가쓴 기사와 나의 관계를 알았는지 알 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프랭크 라니치, 하세가와카즈토, 브라이언 우드 워드, 김송진, 말콤플레밍등 다양한가명으로기사를썼기때문이다. 내가 쓴 한국 관련기사 중 상당수는 일본 기독교교회협의회소식지에도 일정한 형식으로 게재되었다. 어떤 것도 필자명을 표기하지 않았다. 단지, 소식지 첫장에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사무총장죤 나카지마목사라는이름만표기 되었다. 
한국정부가“ 한국의적”이라는 명단을 작성했을 때, 나카지마 목사는 명 단에포함되었지만내이름은없었다. 그는 이것을자랑스러워했고, 나는이 것이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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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단에는도쿄외신기자클럽 회원다수가포함되어있었다. 그리고내 기억으로 이 명단에는1급(골수, 구제불능)에서5급(설득가능한, 청와대 초 청)까지급수가구분되어있었다. 어느날 밤, 외신기자클럽에서일을하고 있을때, 한 기자는자신이 3급으로 분류되었다고당혹해하고, 다른기자는 5급으로분류되어부끄럽다고하는것을 들었다. 그들모두“ 우리는더 높은 등급을받을자격이있어”라고말했다. 
19 7 6 년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 나는박형규 목사와 저녁식사를한 기억이 있다. 우리는한국과미국의기독교에대해 이야기하게되었다. 박목사께서 는“ 오늘날한국보다는미국에선교사들이훨씬더필요한것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소명의식에입각하여나는19 7 7 년워싱턴 D. C . 에서서져너스공동
체에참여하고<서져너스> 지에서일하게되었다. 
나는19 7 9 년 지미카터미국 대통령의한국방문에대해보도를 하 으며, 이때믿지않는백악관기자단에게한국의정치범명단을배포하 다. 이것 이 한국정부의심기를불편하게했으며, 이때문에나를먼저추방시키려했 으나, 카터대통령의 비행기가서울을떠날때까지나를“ 호텔방에구금”하 는것으로일단락지었다. 
19 8 0 년대중반나는워싱턴D. C . 의 문동환목사집에서모 던또다른월 요모임의 회원이었다. 이 모임은 서울 월요모임“ 동창회원”들과한국의 민 주주의와인권을후원하는워싱턴 D. C . 지역거주자들로구성되었다.
19 8 8 년 나는서울올림픽에관한 13 3 페이지에달하는언론보도자료의책 임연구원겸 집필자로서울에있었다. 이자료는한국인권을위한북미연합 에서만든것이었다. 이보도자료는외신기자들이한국정부보도자료의한 계를넘어서한국의열악한정치적경제적현실을이해할수 있도록돕기위 해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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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모임에관해책을내자는생각은거의20 년 전에시작되었다. 19 9 0 년 대에가끔있었던월요모임재회자리에서“ 우리가책을한 권 써야만한다” 는 말이나오곤 했다. 그러나 결코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월요모임회원 들이스스로 관심 끌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도이유의 하나라 고나는생각한다. 그들의관심사는항상한국인친구와동료들이었으며, 그 들이더중요하며그들의이야기가우선한다고생각했다. 그래도책을쓴다는생각이사라지지는않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그생각을추진시켰다. 20 0 3 년 10 월월요모임회 원들도 한국민주화운동을지원했던광되고고마운사람들로서울에 초청 된 인사에 포함되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측은 단체인터뷰를주선하면서, 이책의공저자가된이들을포함한많은 참석자 들에게한국에서의경험담을공유하자고제의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독려로 20 0 4 년 7월 버몬트주의링컨시에서라 이스부부가 주최한 월요모임 재회모임에서 이 책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
다. 헨리임, 린다존스, 진매튜스, 루이즈모리스, 패트패터슨과내가편집 위원으로선출되었다. 책의내용을어떻게나누어쓸 것인지가정해졌고, 책 출판제안서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보내서20 0 5 년승인을받았다. 수 개월동안쓰고, 편집하고, 다시쓰고, 재조정한결과가현재여러분의
손에있는공동집필의결과물이다. 
 
역사에는많은우여곡절과반전이있다. 19 7 0 년대고문당하고투옥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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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법자”들이이제는한국에서민주주의와인권을위한투쟁의웅으로인 정되고있다.
그러나한쪽으로흔들린역사는 반대쪽으로흔들릴수가있다. 박정희정 권의가혹한야만행위를개인적으로경험하지못한새로운세대가한국에서 부상하고있다. 그리고과거를망각하면그것을되풀이할위험이있다는옛 말은여전히진리로남아있다.
20 0 4 년후반 내가서울에있을때, 많은한국인들이 박정희의딸박근혜의 정치적 급성장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자체는 내게문제되지 않았 다. 나는아버지의죄가 그들자식들에게서재현된다고생각지는않는다. 그 러나나는박정희에대한평가가윤색되고있다는더 거북한이야기를들었 다. 박정희는 한국경제기적의 웅으로 점점빛을발하고 있다. 그가 인권 을 짓밟고반대자들에게야만적인짓을저질 더라도사고방식이다른신세 대는 이것이 필요한희생이었다고 받아들인다. 이것이 경제기적을 가능케 한정치적안정을가져왔다고말한다.
이런수정주의적역사관을보면서, 우리는정의와진리를위한투쟁은결 코 끝이없음을 상기해야만한다. 이러한 투쟁은 항상계속되고 있다. 군사 독재, 고문, 투옥, 인권탄압, 시민의자유의부정, 언론출판의자유의부정, 무고한사람의처형, 반대자들의처벌, 모든국민에대한감시 등등. 이모든 것들이결코“ 사업을위한비용”으로치부되거나, 요사이유행어로“ 부수적 피해”정도로여겨질수는없다.
민주주의는 성취되었다고 해서 그냥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계속 해서민주주의를수호하고이를위해투쟁해야한다. 오늘날의민주적인자 유를위해자신의목숨과인생을희생한사람들을결코잊지 않는것이중요 하다. 이들이한국의진정한민족 웅들이다. 이들이야말로이 책에서광 스럽게기억될한국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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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3 년 김대중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기 25 년 전, 그는 나에게“ 한국에서 의민주화는그누구도막을수없다”고말했다.
나는그가한 말을보도는했지만믿지는않았다. 내가알 수 있는것이라 곤 1년, 3년, 5년, 세월이지날수록더심한억압이 있을것이라는사실밖에 없었다. 
당시김대중이 10 년, 30 년, 심지어50 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음을 나는훨씬뒤에야깨달았다. 그것은비전을현실로만들기위해필요한 시간 이었다.
20 0 5 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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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우리의마음도여러분들과함께 울고있습니다*
 
조지 E. 오 (G eorge E. Ogl e ) 
사태가악화된것은내가 한국에감리교선교사로온지 20 년 이상이지난
19 7 4 년 12 월이었다.
수년동안박정희정부는노동자들에대한목회활동때문에우리를“ 공산 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의꼭두각시”라고 비난하면서 도시산업선교회를 괴롭혀왔다. 이제정부의분노는8명의무고한사람들을공개적으로옹호하 는 나에게집중되었다. 정부는이 여덟사람이“ 공산주의혁명”을 모의했다 며처형할준비를하고있었다. 
서울에 있는 미 대사관에서 내가 저지른“ 잘못”을 사과하고 한국에서의 앞으로활동에 대한내 의도를밝히라는한국외무부장관의메시지를전해
 
*저작권은 조지 E. 오 , 20 0 5 년에 있으며, 허락하에 인용 및 사용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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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나는그렇게많은 사람들이내게보낸신뢰를 배신하고사과할수없었다. 나는내신앙과 신념의초석들을배신하면서사과할수 없었다. 그러나나는 한국에살고있는한 명의기독교선교사로서내 앞으로의계획에대해서는 한국정부에말할수가있었다. 그래서나는다음과같은결론을내리는 편지 를써서서명했다.
예수님은가난한사람이었다. 그는인류의혼과사회의구원을위해살 다 가셨다. 나는 한국에서 선교사로서의 내 활동이 그 길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나는 어떤정치적 또는사회적 야망도 없으며 어떤정당도 지 지하지않는다. 그러나구원, 자유그리고정의라는예수님의가르침을실천 하고고통받는사람들에게봉사하려고한다.
외무부장관은나의진술서가부적절하다고생각했다. 이틀뒤 아침7시에 검은색 지프가우리 집 앞에 멈췄다. 나에 대한 추방 절차가 시작되고 있 었다.
 
나는 주식시장이 붕괴된 19 2 9 년 펜실베이니아 서쪽 탄광지대 작은 철도 마을인핏케언에서태어났다. 아버지는운 좋게도우체국에서계속일을할 수 있었다. 내귀와내 마음은경제난국의시기동안생존을위한가족과이 웃들의몸부림에열려있었다. 우리마을의교회들은우리들의가치관에강 한 향을끼쳤다. 형들중 두 명은 2차 세계대전동안군에복무했다. 어머 니는 웨스팅하우스 에어브레이크 공장에서 일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나에게주어진가능성이란다른많은급우들처럼지역의공장노동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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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거나, 형스튜어트처럼군인이되어한국으로가는것이었다. 나의고등학교교장선생님께서내 인생을바꿔놓았다. 그는내가대학에 가도록격려했으며특별장학금을알선해주었다. 그래서나는테네시에있 는 메리빌대학에다닐수 있었다. 대학에서나는루즈벨트대통령재임기간 동안 워싱턴 D. C . 에서일했던 버튼퀴너박사의 지도하에 공부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나는 그로부터 경제정책들이어떻게 노동자에 대한정의와 불의에 향을주는가를배웠다. 이를통해나는어린시절보았던상황들을 이해할수 있게되었고, 어떻게하면보다긍정적인 미래를 가져올 수 있는 지에대해어느정도통찰할수있게되었다.
메리빌대학을 졸업하고 나는듀크대학 신학교를 다녔다. 어느 교수님 덕 분에학생들은노스캐롤라이나주의노동운동을접할수 있었다. 또한나는 천주교노동자-신부운동도접하게되었다. 천주교신부들은 노동자들의작 업복과 사제복을 바꿔 입었다. 노동자로서의그들의 삶이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에서예수를체현하는것을완성하는데도움이된다고믿었다. 내 대학시절과 신학교시절 동안에는 한국전쟁이 가장 중요한 뉴스 다. 형 스튜어트가한국에서복무하고있었기때문에나는특히관심이많았다. 신학교 3학년 때 한국에서 온 새로운 학우인 마경일 목사가 나에게 한국에 대해 많은 것을가르쳐 주었다. 감리교의 선교위원회가 선교사들을 모집하 기위해듀크대학신학교에왔을때, 내가한국의 3년제선교프로그램에합 류하는것을보고아무도놀라지않았다.
남북한사이에휴전협정이조인된지불과일년뒤인 19 5 4 년 9월나는한
국 사람들과함께하게될 여정을시작했다. 미혼의선교사 기에나는한국 어 교사와 함께 한국 가정에 입주할 수 있었다. 나는 한국어에 몰두했으며 한국적인생활에가능한모두참여했다. 내게주어진일은대전에있는감리 교 신학교와 공주의 명 고등학교에서 어를가르치고 교회의청년부와 함께일하는것이었다. 나는아주좋은 어선생님은아니었지만이기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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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경험들이장래의목회활동에대한전망을세우는데도움이되었다. 
 
전후한국은사람들이생존과재건에역점을두고있었다. 반공주의와전 쟁에대한공포가모든 것을지배했다. 수백만의사람들이북한에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는현실에 익숙해져가고있었 다. 동시에사람들은한국을농업사회에서산업사회로빠르게변화시키는 산업혁명의시작을목격할수 있었다. 공장의재건과소규모제조업의발전 을지켜보면서, 나는노동자목회활동이필요하게될것임을알았다. 한국에서3년의선교사생활을 마치고, 나는시카고로가서여러교파간 의도심목회 구역인웨스트사이드교구에있는작은 교회의목사로봉직했 다. 그 기간동안 나는 3개의대학교를다니면서한국에서노동목회활동을 펴는데 도움이 될 과정들을 이수했다. 또한이때아내도로시를 만났으며, 그녀는내가한국으로돌아갈것을알았고나와결혼하는것에동의해주었다.
 
19 6 0 년 2월 도로시와함께한국에돌아왔을때, 우리는서울한복판의배 재고등학교와이화여자고등학교사이에자리잡은2층짜리선교사아파트에 살았다. 우리가연세대학교에서정식으로한국어공부를시작했을때, 우리 는 한편으로는 한국어를 배우는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하 으며, 다른 한편 으로는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던정치적 혼란을 이해하려고애쓰고 있 었다.
우리가 도착한 주에, 대구에서는 학생들이 정부의 부패와 경제적 혼란에 항의하면서시위를하고있었다. 3월에는19 4 8 년 이후한국의대통령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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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부정선거로재선출되었다. 전국의학생들이항의시위를벌 다. 4 월 초에김주열군의시신이마산 앞바다에서발견되었다. 김주열군은최루 탄에맞아죽었으며경찰이그의시신을바다에던진것이다. 서울의고려대학교에서있었던비폭력항의집회에서, 군대와학생이충돌 하여 18 6 명의 학생들이 사망했고6,00 0 명이넘는 학생들이 부상당했다. 불 과 며칠사이에대립이전국적으로확산되었고, 이승만대통령이하야할때 까지혁명은계속되었다. 학생들은또 국회의해산과대학에서이승만정권 을 지지한교직원을쫓아낼것을요구했다. 그학생들은민족의웅으로여 겨졌다.
『한국의 소리(Voice of Kor ea )』는“ 자유의정신이 독재에 대한승리를 거두 었다.... 12 년의독재정치는마침내국민의분노앞에무너졌다”라고19 6 0 년 5월 판에서보도했다. 4월 19 일(4· 19 )이 국경일로 선포되었으며, 오늘까지 이날을기리고있다.
장면국무총리와윤보선대통령이이끄는의원내각제정부가수립되었고, 이들의권력은개정된헌법에따라상당히약화되었다. 새로운정부는수년 동안의정치적억압의여파와어려운경제에직면하게되었다. 당내분열로 인하여장면은안정된다수당을 확보하는것이불가능했다. 게다가장면정 부는아주인기없는일련의 조치들을 취했다. 경찰은 전혀신뢰를 받지못 했기때문에질서를유지할수없었다. 이런상황에서학생들은통제불능상 태가되었다. 국가를통치할계획도없으면서, 학생들은종종거리로뛰쳐나 와 항의시위를벌 다. 총과무기를소지하지는않았으나, 그들의행동은점 점폭력적으로변했다.
우리는신문에서이런일들에대해읽었으나, 직접목격한것은오랜선교 사 생활을한우리 이웃찰스소어 박사의집이파괴될 때 다. 어떤한국사 람도 막으려 하지 않아서 그는연세대학교 이사회 임시이사장직을 자원했 다. 학생들은 외국인이 그런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반대했다. 경고를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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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어박사부부가간신히사택을떠나자마자사택문을부수고들어간학생 들은한시간 남짓모든가구들을부수고, 실내장식품들을난도질했으며, 심 지어 벽에서 목욕통을 뜯어내 물이파이프에서 쏟아지도록 했다. 쓰러지지 않고남았던 유일한 것은마루 아래까지 우아하게 나부끼던 아름다운 국화 꽃이었다.
19 6 1 년초 통일에찬성하는서명운동이있었고, 4월에학생들은북한과의 우편물교류및경제문화교류를요구했다. 
19 6 1 년 5월 16 일아침 여섯시경, 총소리에놀라우리는잠에서깨어났다. 그 소리는우리현관창문바로아래에있는배재고등학교운동장에서들려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기어갔으며 창틀 위로 밖을 몰래살펴보았다. 총성은계속되었으나아무것도보이지않았다. 머리에 처음떠오른 생각은 공산주의자들이 왔구나 하는것이었다. 한국
전쟁이다시발발했나? 학생들일리는없었다. 그들은총이없었다.
 
도로시와 나는막 울음을 터뜨린열 달 된 우리아들을 위해침착하게행 동하려고애썼다. 라디오를틀었으나, 미군라디오방송은무슨일이 벌어지 고 있는지 전혀언급하지 않았다. 현관 벨이 울렸다. 우리에게철수를 알리 려고누가온 것일까? 아니었다. 그것은우리처럼 총소리에놀라잠에서깬 후, 일찌감치 구걸을 시작한 거지 다. 우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빨갱이들이왔다”고 말했지만, 그도우리만큼 모르는 것이분명했다.
다른많은사람들처럼, 무혈쿠데타가발발했다는것을알았을때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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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의한숨을쉬었다. 그러나당시선교활동을막 시작할참이었던우리는 앞으로26 년간군부통치하에서우리가알게될노동자들이얼마나많은고통 을겪게될지상상도하지못했다.
미국의 쿠데타에 대한 논평은 뒤늦게 나왔다. 한미연합사사령관은 미국 인이었으나 이 쿠데타는 그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었다. 미국인들은겉으 로 드러난쿠데타의주동자인장도 장군은좋아했으나, 그의배후에실질 적 권력자인박정희장군이있다는것을알았을때 걱정하기시작했다. 박정 희와그의임시군사정부는 2년동안한국을통치했다. 쿠데타가있던해여 름에 그들은 한국 중앙정보부를창설했다. 미국은 마지못해 쿠데타를 인정 했고민간인들에의한선거가 19 6 3 년에치뤄지도록압력을가했다. 박정희는예편하여민간인자격으로대통령에출마할수 있었다. 그는근 소한차이로승리했다. 표면적으로는인정받을정도의정치적자유와민주 주의가있었으나, 19 6 1 년 3,00 0 명의직원으로 시작한중앙정보부는19 6 4 년
37 만 명 이상의요원과정보원을지닌전국적인조직망으로성장했다. 마침 내중앙정보부가사회의모든분야에침투했다. 
권력에대한갈망은지지하는동맹자가있어야만충족될수 있다. 물론한 국 군대는 박정희의 가장 직접적 지지의 원천이었다. 약60 만 명에 달하는 군은미제군장비로잘 정비되어있었다. 군은또경찰, 전투경찰 그리고중 앙정보부와 다른비 정보기관들을 통제했다. 이러한 모든통제 기관들이 없었다면, 박정희는권력을가질수없었을 것이다. 군인들은박정희에대한 내외의반대를진압하겠다고맹세했다.
박 정권의두 번째힘의원천은일본과의정치, 경제적유대에서비롯되었 다. 한일관계는19 6 5 년에정상화되었다. 일본 자본이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일본은한국에서지배적인경제적인 향력을행사했다. 박 정권의세 번째지지자는미국이었다. 안보가인권보다우선이라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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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미국정부는박 정권을전폭적으로지지했다. 한국정부의노동탄압에 서 혜택을 받은 미국 기업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 국가(미국)에 적을 두고 있다는사실과군사독재정권(한국)에공헌하고있는행위사이에 어떤모순 도발견하지못했다. 
 
내가서울에서어학 과정을마쳤을때, 한국감리교의주교는도로시와내 가 서울 인근의 산업도시 인천에서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 하도록 배정했다. 19 6 1 년 9월에 도로시, 아들 마틴그리고 나는인천시내 의 한옥으로 이사했다. 노동목회활동을계획하기 위해지역목사몇 분을 우리집에초대했다. 한국전이후에한국목사들은외국선교사들이교회재 건 비용을 제공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이 노동목회활동이 한국교회가 해야할 일이라고 제안하자 그들은 다소놀랐다. 그들은그 일을지원할 지 역 자금을 모우는 일을돕는데 동의했다. 우리는적은예산으로 운 을 했 다. 몇년동안우리의작은집이유일한사무실이었다.
인천에있는한 공장을방문했던첫 날은유익했다. 50 갤런짜리드럼통을 잘라서 만든단 한 개의난로로난방을 하는크고몹시추운창고를 상상해 보라. 계속 톱밥을 집어넣어 불은벌겋게 타고있었다. 드럼통의쇠는녹아 내릴듯한분홍색이었다.
난로주변에모여있던사람들의앞은뜨거웠으나, 황폐한공장을휘감는 차가운 바람으로 등쪽은 계속 덜덜 떨렸다. 지붕과 벽의 일부가 전쟁 통에 날아가 버렸다. 남아 있는 모든 것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의 뼈대
다. 건물의뼈대안에서일했던사람들은계속적으로바깥바람에노출되어 있었다. 기계들은낡았고종종한국노동자들의절묘한솜씨에의해서만유 지되어졌다. 부상과 사고의 흔적이 사방에 있었다. 20 여 명의 일꾼들이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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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모 으며그들중 일곱사람은엄지손가락이없었다. 수류탄을작은 금속 조각과함께 우연히삽으로퍼 넣었기때문에화로가이따금씩 폭발 했다.
노동자들이점심을먹기시작했을때 우리는화로주변에앉았다. 그공장 의 반장이며내리감리교회신자인박용희가이야기를시작했다.“ 우리는외 국인손님을맞았습니다. 미국에서온선교사입니다. 이분은기독교신앙에 대해우리와함께이야기하고싶어합니다. 제가그를우리와한자리에하도 록초대했습니다. 오명걸이라는한국이름도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그 모임을 나에게 넘겼다.“ 오늘 저의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광입니다.” 라고나는시작했다.“ 여러분들이제 한국어를알아들 을 수 있길바랍니다. 저는 여전히 공부하고 있는중입니다. 박 선생님께서 말 하신것처럼, 저는신앙과우리일상의 관계에대해여러분과함께이야 기를나누고 싶을뿐, 설교를 하고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신앙에 대해 듣고 싶고 또한 제 신앙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매주수요일점심시간에제가오겠습니다. 우리는화로근처바 로 이곳에서만나따뜻하게있을수 있습니다. 한번의논해보시고, 만일여 러분이원한다면다음주수요일에시작할것입니다.”
곧바로질문이터져나왔다.“ 당신은누구요? 왜우리와함께이야기를하 고 싶어하는거요? 설교를하고우리를개종시키려고하는거요? 미국노동 자들은 잘 삽니까? 그들은 조직화되어 있나요? 당신 미국 정보국 요원이
요?”
나는 마지막 질문에 웃으며 내가 정보국과 아무관계가 없다고 확신시켰 다. 내가연관된유일한미국조직은교회 다.“ 오늘은이야기할시간이많 지않군요. 그러나다음주에다시와서더많은이야기를하고싶습니다.” 대체적으로동의하는것처럼보 으며그래서그후두 달 동안매주수요 일 나는 낡은톱밥 화로 주변에서20 여 명의 노동자들과 함께점심을 먹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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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는기독교신앙과실천, 불교, 무속신앙, 한국전쟁, 한국과미국에서 의노동행위들그리고미국내의인종문제들에대해이야기했다. 어느수요일 공장으로갈준비를 하고있을때,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박 선생님이었다.“ 오목사님, 공장에서또 사고가났어요. 아홉사람이다쳤는 데그들 중두 명이심하게다쳤어요. 지금인천기독 병원에있는데요. 병원 에저와함께가지않으시겠어요?”
“ 물론제가함께가죠. 30 분에뒤에병원앞에서만납시다.” 그들중 한 명은의식이없었고위험한상태 다. 다른한 명은의식은있 었으나, 그의얼굴은완전히붕대로감겨져있었다. 가족들이둘러서있었으 며, 일부는 울고다른사람들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박 선생님과 나는 모두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나는 부인들에게 기도를 드려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둘다기독교인이아니었지만모두괜찮다고말했다. 나는짧게기도를드렸다.“ 하늘과땅의주님이시여, 당신의종들을자비로 보살펴주십시오. 그들이힘들게 일했기에 그들의 가족들이 살 수 있었습니 다. 그들이일했기에그들의나라가성장할수있었습니다. 이제당신의치유 하는힘으로그들을어루만져주소서. 그들의아내, 가족그리고동료노동자 들에게용기와위안을주소서. 예수님의이름으로기도드립니다. 아멘.” 다음수요일내가공장에들어섰을때, 감독관이자신을소개했으며내게 부상당한사람들을병문안한것에대해감사한다고했다. 그일이있고나서 나는 공장 전체에 다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목회를 위해 방문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우리가 공장의 한 부서에서 두 달간의 토론을 마쳤을 때 다른부서들에서도토론할수있는기회가왔다. 도시산업선교회가인천에서탄생했다.
조승혁은 자원해서 인천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기 전에 한국해병 군목이 었다. 그는해병에서전역한바로다음주에 대성제재소에서일일노동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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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했다. 무거운 나무를 나르고 짐을트럭과 유개차에 실었다. 조 목사도 우 리처럼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 예수님이 있다는 신학을 갖고 있었 다. 그는그믿음을시험하기위해 공장에간것이다. 일은힘들고 공장은더 럽고경 은아주취약하다는것을알았다. 노동자들은서로계속해서대립 하고있었다. 회사 간부가 조종하는 노조도 이러한 갈등에 일조를 했다. 처 음 며칠과몇달 동안은너무나피곤해서, 조목사는자신이 견딜수 없을것 이라고생각했다. 몸도마음도현재그가 경험하고있는것을받아들일준비 가 되어있지않았다. 그는 기도와 의지력으로계속견뎌나갔다. 새로운상 황이주는충격에서벗어나면서, 그는이상황을어떻게개선할것인가를궁 리하기시작했다.
그의 첫 실험은 목사로서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때론 공장에서 때론 그들의집에서조승혁은기독교 노동자들과함께성경공부를시작했다. 하 지만 그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내세 지향적이라는 사실을재빨리 알아 차렸다. 이 세상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공장에서의 억압은 맞서야 하는 것이아니라견디어내야하는것이었다.
목격한 것에 대해 좌절하고 있을 때, 그에게 아주 세속적인 일이 일어났 다. 한트럭의합판을내리는일을돕고있었다. 트럭운전사는짐 꼭대기에 서서합판을 아래로 내렸고, 조 목사를 비롯한 노동자 몇 명은밑에서 합판 을받았다. 밑에있던사람한명과합판위에서있는사람사이에다툼이벌 어졌다. 트럭운전사는합판을너무빨리아래로던지기시작했으며아래에 있는사람들을위험에처하게했다. 조목사가머리를맞아쓰러졌다. 화가나, 조목사가운전사에게소리질 다,“ 만약한번만더그런식으로 던지면, 거기로올라가서당신을개패듯패줄줄 알아.”조 목사의목소리가 무언가설득력이있었음에틀림없었다. 트럭운전사가진정했다. 그 사건은조 목사에게는하나의계시와같았다. 날이면날마다그의동료 들은 트럭 운전사와 같은 패거리들에게무시당하고 있었다. 종교와 구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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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억압으로부터의해방으로이해되어야했다. 각종작업수칙들, 회사간 부들의 태도, 심지어 노동조합까지 모두가 노동자들을 통제하에 두는 수단 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세상에서 종교가 반드시 내세적인 것만은 아니라 면, 그것은 해방의 종교가 되어야만 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의 육화란, 현재조목사와 함께살고있는동료들처럼억압받는자들에대한정의와자 유를뜻했다.
조화순목사의동일방직에서의경험은그녀의동료노동자들이시골출신 의 젊은여성이라는점을제외하고는조승혁목사의경험과유사했다. 한국 의산업노동자들의 3/1 정도는16 세에서25 세사이의여성이었다. 조화순은 공장에서보낸자신의첫날을다음과같이서술했다:
“ 나더러아침 8시에사무실에와서보고하라고했다. 안내원에게내가누 군지를말했다. 그녀는잠깐사라졌다가돌아와서몇 분내에 감독관이나를 만날 것이라고 전했다. 시시각각 화가 나면서 거기에 나는 2시간 동안이나 앉아있었다. 한남자가마침내나타나서는아주경멸적으로나를쏘아보며 술집종업원에게나적합한모욕적인어투로말했다.‘ 당신오늘은식당일이 나 도와. 다음주엔작업장으로가고.’ 그는떠났다. 그는식당이 어디에있 다는것조차 알려주지않았다. 마침내나는 식당을 찾았다. 식당안으로들 어갔을때, 나보다훨씬어린소녀가불쾌하고저급한 말투로명령을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내가계속입을다물고있었는지확실치않다. 그때까지 나는 항상 존칭을 쓰며 고상한 말만 했었다. 어린 소녀가 내게 저질스럽게말하는것을듣고있자니내 안에서분노가치솟았다. 그러나나 는 조용히소녀의명령대로했다. 분노가치 었을때, 나는이 어린소녀가 평생까지는아니더라도대부분의생활을오로지자신을경멸하는일터와사 회에서보냈을것이라는사실을깨닫게되었다. 그녀는매일자신이감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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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는분노를나에게투 시키고있었다. 내가복종하는것이그녀를기분 좋게만들었다. 그일뒤나의분노는수그러들었고나는소녀가명령하는대 로식당일을했다.”
다음주, 조화순목사는작업장에서일하기시작했다. 그것은고행이었다. 방직실에서1일 3교대로일하고있는 90 명의소녀들은속옷을짜는실을생 산하고 있었다. 소음이귀를멀게할 지경이었다. 실 보푸라기와먼지로 몇 시간만 지나면 소녀들은 걸어다니는 눈사람이 되었다. 휴식시간도 없었다. 기계는쉴 새 없이돌아갔다. 서로한 마디의말도주고받지않았다. 기계의 속도와소음이서로간에이야기하는것을불가능하게했다. 만성피로가일 상화된상황이었다.
조화순목사가교대해서처음으로방직실에갔을때, 전신이쑤셨다. 다리 가 너무 부어서 퇴근 후에 방으로 걸어갈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로지친몸을이끌고작고때묻은자신들의방으로돌아갔다. 교대 시간이서로다른소녀들이같은방을돌아가며쓰는경우도종종있었다. 조승혁 목사와 마찬가지로 조화순 목사도 새로운 상황이 주는충격을 극 복하는데두어달정도가걸렸다.“ 예수님은여기이어린여성노동자 가운 데계시는가?”라는질문이그녀를떠나지않았다.“ 나는예수님의구원을증 언하기위해이곳에있는가?”그녀는의심스러웠다.
조목사가그 해답을찾게된 것은동료들의도움을통해서 다. 노동자들 은 한 달에하루씩쉬었다. 어느쉬는날, 조화순 목사는동료몇 명과모여 노래도부르고놀면서, 공통된문제들에대해서로의논했다. 기독교인이건 비기도교인이건모두가부당한대우를받고있으며, 이해할수도통제할수 도 없는힘이자신들을억압하고있다고말했다. 그들의젊음이허비되고있 었다. 그들은뭔가를해야만했다. 그러나무엇을해야한단말인가? 그때에는 서로모여 함께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벌써좌절을 극 복하는과정에들어섰다는것을깨닫지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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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목사로서의경험과 공장목회프로그램을 통해공장 안에목회적 인 관심과상호간의배려가필요하다는사실이드러났다. 그필요성을충족 시키기위해우리는우리와함께공장을찾아갈지역의목사들을새롭게충 원했다. 좀더 전략적으로기독노동자들위한일련의 교육프로그램을개발 했다. 제강공장, 기계공장, 전기제품제조공장, 유리공장, 철도, 그리고통신 과교통관련업체에서온열사람이그교육을위해선발되었다. 2명의방직 공장여성노동자도참여했다. 세달동안 이“ 12 사도들”은 매주토요일퇴근 시간부터 일요교회예배시간인오전 11 시까지도시산업선교회사무실에모 여서공부하고, 이야기하고, 함께먹고, 함께잤다. 처음에는성서를공부했 다. 그런다음우리는 4가지지침에 초점을맞추어토론했다. (1)동료노동자 들에게필요한것이무엇인지계속예의주시한다, (2)각문제의원인들을파 악한다, (3)이문제를해결하기위해사도들이어떤행동을취할수있는가를 결정한다, (4)곤궁에처한형제자매를돕기위해행동을취한다. 각자가처음 3가지지침들과관련된자신의사례연구를함께나누었다. 다 음 주에는 그들이 어떤행동을 취했으며, 그행동으로인해어떤결과가 나 왔는지를함께이야기했다. 
그 과정이은혜로운방법임이증명되었다. 이렇게깊이있게만남을가진 지 2~3주 만에우리사이에는강한동지애가형성되었다. 한사람이직면한 문제는 모든사람이 직면한 문제 다. 문제의유형은 두 가지종류 다. 첫 번째문제는가족및 동료노동자와관련된문제 다. 모두일주일에엿새씩 뼈빠지게일했지만빈곤에허덕이고있었다. 한국은전쟁으로부터복구되지 않았으며,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여전히 전쟁의 멍에를 지고 있었다. 시골에서 막 상경한 어린여성 방직노동자들은남자들의 유혹을 받는 일이 잦았다. 남자들은어떻게일을나누어할것인지를놓고종종 싸움에휘말리 곤했다. 가족들은고리대금업자의빚때문에허덕이게되었다. 이런상황에 서 사도들은자신이친절한말을건네는것 이상은거의할 수 있는일이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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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사실을깨닫게되었다.
두 번째난관은보다조직적이고, 제도적인문제 다. 감독관들이편파적 이었다. 임금이정당하게계산되지 않았다. 안전절차가무시되었다. 그리고 남자들이이유없이해고당하거나처벌을받았다. 이런 제도적인 문제들을 논의할 때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주 나왔다. “ 노조는 어디에 있는가? 노조는 이런 사정에 처한 노동자들을 도와줘야 하 는것아닌가?”
이런 문제제기들이 도시선교활동에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노조는19 1 9 년으로거슬러올라갈정도로한국에서긴 역사를가지고있다. 불행하게도 그 대부분의기간동안노조는고용주의통제하에있었다. 19 6 0 년대에인천 지역 대부분의 공장에는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노조는 노동자를 돕는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사도들은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전 략적인동반자가되어야한다고 깨닫기시작했고, 그들중 일부가노조활동 에참여하기시작했다. 
19 6 0 년대후반기에 도시산업선교회는금속, 방직, 군속(미군부대에서 일 하는사람들), 철도및 운송, 전기, 항만, 자동차관련노조와함께정기적으 로노동교육프로그램을운 했다.
19 6 0 년대후반 정부는 사실 단체교섭을장려했다. 우리가 운 하고 있던 인천노동자교육프로그램이널리알려지면서, 중앙노동부처와지역노동 부처들이우리를초청했다. 서강대학교와고려대학교같은대학에서도노동 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조승혁목사와 조화순 목사 그리고 내가 정기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19 7 0 년대에정부가단체교섭권을제한하기시작했다.
도시산업선교회에서일하던 우리는 19 6 0 년대의 한국 노동운동이 한국을 민주주의와 경제가 함께발전하는 길로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중앙정보부 가 우리모임을해체시키려고움직이기전까지거의 10 년 동안우리는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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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산업노동 선교활동을 펼쳐 왔다. 불행하게도, 군사정권은 노동자들의 권리와경제발전은공존할수 없다고생각했다. 군의입장에서볼 때, 우리 의 목회활동은 공산주의라고이해할 수밖에 없는것이었다. 19 7 2 년 유신헌 법이공포되기 전에도인천도시산업선교회직원들은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감시와협박과체포에시달리고있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라는죄명으로 나의한국인 동료들을 연행했으며도 시산업선교회와연관된 사람은 공산주의적인경향을의심받게될 것이라는 경고를인천노동자들에게유포했다. 중앙정보부는우리선교활동과관련해 서여러측면을 좋아하지않았다. 우리선교사들이공장에서일하는것을싫 어했으며, 노동자가정을방문하는것도싫어했다. 공장에서다친노동자를 위해병원에서기도하는것도, 우리가노동조합과협력을하는것도모두싫 어했다. 
정부의압력에도불구하고, 도시산업선교회는19 7 0 년대초에 계속해서성 장했다. 도시산업선교회는수천 명의 노동자와 수백 명의 노동조합 지도자 들과함께일하고있었다. 인천지부는상근간사5명에수십명의자원봉사 자들이일하는큰조직이 되었다. 게다가, 도시산업선교회활동이몇몇다른 도시에서도시작되었다.
그러나유신기간동안(19 7 2 ~19 7 9 ), 군사 정부는 도시산업선교회가선교 활동을 펼치는 것을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수감기간은 더욱 길어졌고 심지어고문까지가해졌다. 군사독재정권은19 6 0 년대에노동조합과경 진 이이룩한진보를거의 와해시켰다. 그러나탄압이심해지자, 노동자들의결 의는더욱확고해졌다. 근20 년간군사독재에항거해투쟁한학생, 교수, 성 직자, 시민단체지도자및 일반시민들의광범위한연대속에서, 노동부분은 큰부분을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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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10 년 이상인천에서일했으며, 산업노동자들의삶에깊이관여하 게 되었다. 19 7 1 년 내가휴직으로 인천을 떠나게되면서, 내 동료인조승혁 목사와조화순목사가산업선교활동을전적으로책임지게되었다. 위스콘신대학교에서 노사 관계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친 후, 19 7 3 년 나는 서울대학교상과대학에서노사관계학을가르치는초빙교수로 초청되었다. 한국감리교주교가이 소명에동의했다. 그러나당시에는수많은학생들이 공부보다민주주의를위한활동에더 헌신하고있었다. 군사독재에저항하 는 학생시위때문에 대학은 자주폐쇄되었다. 그래서나는수업을 거의가 르칠수가없었다. 대신내 의무는군사독재정권의손아귀에서고통받고있 는한국동료들을지원하는것으로바뀌었다.
다른활동으로는월요모임과기독교 구속자들을위한목요기도회에참여 했다. 이모임을통해, 정부가조작한소위“ 인혁당”의여덟사람들의가족들 과관계를맺게되었다.
 
19 7 2 년 1월 유신선포만으로저항과항쟁을끝낼수는없었다. 박정권은 정부를비판하는행위에사형까지처벌할수있는긴급조치 4호를발표했다. 19 7 4 년 4월 정부는정부를 전복하려는대규모의 공산주의 음모를적발했다 고 발표했다. 기독교단체의 지도자 다수가 포함된 천 명 이상의 재야민주 인사들이이 사건에연루되어투옥되었다. 여덟명은남한정부를전복시키 고 공산 정권을 수립하려는 음모를 꾸민소위“ 인혁당”의 주동자로 기소되 었다. 인혁당이라는이름은 중앙정보부가역사책에서가져다 붙인이름이었다. 중앙정보부는이 명칭을 유용한 도구로 삼아, 19 6 0 년대에 일단의 학생운동 가들이법정에서무죄선고받았던사건에대해보복하고자했다. 그리고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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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주의냄새가나는명칭이야말로이 사건을조작하기위해꼭 필요한것이 었다. 정부를비판하는자들을북한이조정하는것처럼보이게하기위한것 이었다. 이사실로시민들을놀라게해서그들이박 정권에더욱순종하도록 만들기위한계략이었다.
군사정권은아무런증거도없이인혁당원으로지목된8명을고문했고, 그 들이북한에서온 첩자임을자백하도록강요했다. 그런뒤 8명 모두에게사 형선고가내려졌다.
 
뜻밖의 계기로, 아내 도로시와 나는 이 여덟 사람의 비극과 연루되었다. 19 7 4 년 가을, 우리는 연세대학교서울캠퍼스안에살고있었다. 어느늦은 밤에전화벨이울렸다. 한여성이한국어로“ 오목사님, 절 모르실겁니다. 저는 목사님 친구들에게서 목사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즉시 목사님을 만나 뵈야만합니다. 제가목사님댁으로가도될까요?”라고말했다.
“ 누구십니까? 뭘원하시는겁니까?”라고나는물었다. “ 전화상으로는 말 드릴 수 없습니다”,“ 전화는 안전하지 못하거든요”라 고그녀가말했다.
그당시 한국의정치적상황을고려하면서, 나는그녀가옳다고생각했다. 우리집전화를비롯해많은전화를중앙정보부가도청하고있었을것이다. “ 벌써늦은시간입니다.”라며“ 내일아침에와주실 수있겠습니까?”라고 나는말했다.
“ 그렇게하겠습니다. 9시까지목사님댁으로가겠습니다.”라고대답하고 그녀는전화를끊었다.
다음날 아침 9시종이 울리자, 현관 벨이울렸다. 그러나 한 명의여자가 아니라 여덟 명의 여자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들어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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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우리 모두가 자리를 잡고앉은뒤에, 그 여성분들은자신들을 소개하 기 시작했다. 자신들의이름을말하기시작하자, 나는어렴풋이기억이떠올 랐다. 나는전에그들의이름을들었다. 그런뒤기억이났다. 이여성분들은 중앙정보부가정부를전복하려는공산주의음모의주동자로 기소한여덟사 람의부인들이었다.
소개가 끝난뒤, 전날 밤에전화를 했던우홍선 씨 부인이매주자신들은 서대문 형무소에 있는남편들에게 음식과 물품들을 갖다주어야 한다고 설 명했다. 형무소안으로들어가기위해기다리는동안, 그들은기독교구속자 들의친척몇 명을만났다. 그 친척들이그 여성분들에게 나와상의하도록 제안했다는것이다.
몇몇여성분들이 동시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목사님, 저희는목사님 의 도움이필요합니다. 절망적입니다. 제발저희를도와주세요! 저희남편들 은 감옥 안에 있습니다. 남편들은 고문당하고 있으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대해자백하도록강요당하고있습니다.”
내가끼어들었다.“ 제가이해할수 있도록, 이야기를천천히풀어나갈필 요가있을것같습니다. 저도그음모가조작되었다는얘기를들었습니다만, 단지신문에서읽은사실만을알고있습니다. 여러분들이한분씩차례로제 게 각자의 사정들을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하신다면 제가이해를 더잘할수있겠는데요.”
우홍선씨 부인이시작했다.“ 처음우홍선씨를만났을때 저는겨우열여 덟 살이었습니다. 저는그가일하던은행에서 행원으로일했습니다. 사랑은 첫 눈에반하는 것 같았어요. 우리는젊어서 결혼하여 바로네 아이를 가졌 습니다. 제남편은서울에있는작은건설회사에서경리사원으로일했습니 다. 생활은항상어려웠지만, 우리는항상살림을잘 꾸려나갔고, 저희의사 랑도더욱깊어지는것 같았습니다. 결혼한지 십 년이지났지만, 저희는젊 은연인들처럼손을잡고남산을걸어올라가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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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일이올해 4월 16 일에일어났습니다. 통보도없이, 경찰이쳐들어와서 소위‘ 증거’라고하는것을찾기위해 저희집을뒤집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와아이들을 공포에떨게 했습니다. 제 남편은 집에서 끌려나갔고, 자기 가 알지도 못하는 반정부 음모에 가담했다고 기소되었습니다. 그는 고문을 당하고강제로 자백했습니다. 군사법정은그에게사형을선고했습니다. 스 스로를변론할기회조차주어지지않았습니다. 변호사들이그와이야기하는 것도허락되지않았습니다. 모든항소가기각되었습니다.” 그녀다음에다른일곱명의여성분들이 각각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오
후가되어서야이야기가끝났다. 
나는이 소박한여성분들이한말을 믿었지만, 그들이나남편들을위해무 슨 일을할 수 있을지는 떠오르지않았다. 외국인인나는한국정치에 개입 할수가없었다. 나는권력을가진사람들에대해 향력도없었다. 그러나그여성분들은그런변명을받아들이려하지않았다. “ 목사님께서저희들을 도와주셔야 합니다. 저희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기독교 선교사이신 목사님께서는 민간법정에 재심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저희가원하는전부입니다.”
마침내그들을보내고생각할시간을가지려고나는,“ 저는정치적인문제 에 대해서는아무 향력이없기때문에아무것도약속드릴수는없지만제 가 그 일을조사는해 보겠습니다.”라고말했다. 이주저하며내뱉은마지막 여섯마디의말이나의인생을 원히바꿔놓았다.
여성분들이떠난뒤, 나는 정치적인 식견을 가진한국친구두 명을찾아 갔다. 두명모두 똑같은말을했다. 이여덟사람들에게주어진죄목은조작 이라는것이었다. 박정희군사정부는국민에대한그들의통제를더욱옥죄 기위해반공주의적공포를남한 사람들에게불어넣기를원했던것이다. 정 부의기소내용을유지할수있는 증거도없었다. 이여덟사람은도살장으로 끌려가는무고한양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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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행동계획을결정했다. 대단한것은아니었지만, 내가생각할수있는 전부 다. 정부는민주주의, 인권, 노동권에대한입장때문에거의천 명의 사람들을구속했다. 구속된사람들전부는아니지만많은사람들이기독교인 이었다. 구속된 기독교인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매주서울 기독교 회관에서 모여서목요기도회를개최했다. 기도회에서하느님께그들이사랑하는사람 들을보호해주도록, 그리고그들을감옥에서석방시켜주도록간청했다.
19 7 4 년 10 월 9일목요일, 묵상을하고기도를인도하는것이내 차례 다. 나는 기독교 구속자들뿐만 아니라유죄판결을 받은 비기독교인 여덟 명에 대해서말하고기도하기로결심했다.
사복 경찰들이 사방에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양복을 입은 경찰 여섯명이보 다. 내앞에10 0 여 명의사람들이앉아있었고, 그들중 대부 분이사랑하는사람을감옥에두고있었다.
나는 검은양복을 입은경찰을 비롯해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하기시작했다. 
“ 예수님은종종우리들의 형제자매들중 가장보잘것 없고약한자를통 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혹독한 형을 받은 여덟사람이있습니다. 증거가없음에도불구하고그들은사형선고를받았 습니다. 그들이기독교인은아니지만, 우리들중가장가난한자로서예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우리는 그들의 생명과 혼을 위해 기도해야 만합니다. 그들은사형을받을만한죄를짓지않았을것입니다.” 내가말할때, 검은양복을입은사람이열심히내가하는모든말을적어
내려갔다. 나는뒤에그들의메모가아주정확했다는것을알았다.
 
10 월 10 일 금요일오후 5시 중앙정보부의요원두 명이나를연행하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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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집에 왔다. 한 두어시간정도만 자리를 비우면 될 것이라고 그들이 말했 다. 아내도로시가그 순간집에없어서나는“ 남산(중앙정보부에대한완곡 어법)”에 간다는 것과“ 두어시간(기약없음에 대한완곡어법)” 자리를 비울 것이라는말을남겼다.
남산으로의차량이송은그 자체가하나의경험이었다. 운전사는마치죽 음의임무를수행중인것처럼서울의출퇴근차량속에서이리저리돌진했 다. 중앙정보부본부에도착한후, 나는달랑의자세 개만있는작은 방으로 끌려갔다. 심문관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소개하고 좋은말몇 마디를하는일반적인한국식예의범절을생략했다. 즉시심문이 시작되었다. 나는모든질문과대답을한국어로적어야할것이라고들었다. 그래서그 뒤 17 시간동안나는이전에는해 보지못했던 한 쓰기연습을 했다.
“ 왜매주목요일아침마다기도회를하는것이지?” 물론그들은이미 답을알고있었지만, 나는부당하게구속된친구들과가 족들의건강과안전을위한기도를하기위해우리가어떻게만났는지를설 명했다.
“ 죄인들의 석방을 위해기도할 무슨권리가 당신에게 있어? 정부는 그들 이 법을 위반한 죄를 지었다고 판결을 내렸다. 당신은 무슨 권리로 기도나 다른수단을통해그들을감옥에서빼내려고하는가?”
심문책임자인허 씨는무례하고심지어적대적이었다. 다른심문관윤씨
는 내 친구역할을했다. 내가질문에답하려고하면허 씨는내가진지하지 않다고 장황하게 질책하곤 했다. 나는 다른방법으로 대답을 했다. 허 씨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그가 질문을 약간바꾸곤 했다. 나는 다시 답하곤했다. 어떤순간에는윤씨가중재자처럼끼어들었으며, 기록에남길 만한그럴듯한답변을 찾으려고 애썼다. 나는내가작성한 답변서가내 자 신의자유의지여야만한다고들었지만, 허씨의공격적태도와고약한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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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고려할때그것은불가능해보 다. “ 당신은 어제 기도회에서 설교를 했다. 뭐라고 말했나?”라고 허 씨가 물 었다.
“ 나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의가장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촉구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말했으며, 우리가 사형이 선고된 여덟명을 위해기도를해야만한다고말했소.” “ 당신은 인혁당의 당원들이 무고하다고 말했다. 당신은 공산주의자들을 대변해서말했다, 그렇지않아?”
“ 나는한국중앙정보부가그여덟사람에 대한증거도제시하지못했으며, 그들은사형당할정도의범죄를저지르지않았을지모른다고말했다고생각 하오.”
허 씨는화를냈다.“ 그런말은반공법에위반되는것이다. 당신은설교를
하기전에이사람들이공산주의자들이란것을알았나?”
나는중앙정보부가그 사람들이공산주의자들이라고주장한다는것을알 았지만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인지아닌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대답 이허씨를더욱더화나게만들었다. “ 어떻게감히정부의판단을의심할수 있나? 정부가이 일들을결정하지 당신이하는것이아니야. 외국인인당신이우리나라에들어와서우리국민 과문화를모욕하다니!” “ 나는그 누구도 모욕하지 않았소. 나는한국과한국인들그리고한국문 화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소. 천여 명의 국민들이 이 땅에 민주주의가 존재해야만한다고생각했기때문에지금감옥에있는것이오.”
계속해서, 허 씨와 나는 정부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각자의견해를반복해서이야기했다. 약40 분 뒤에그가주제를바꿨다.“ 어 제, 당신이말하고나서, 누군가기도를했다. 그가누구며그는뭐라했나?” 내가답했다.“ 당신도 뻔히알고있잖소. 박목사요. 그의성만알지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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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모르오. 그의기도는그의소관이지, 내소관은아니오. 그에게물어보시 오. 내가말하는것이그에게악용될수도있소.” 윤 씨는 중앙정보부가 그런 식으로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나에게 보장 했다.
내가말한모든것이절대비 에 부쳐질 것이라고 그가말했다. 내가완 강하게 답변을 거부했을 때, 허 씨가그의공책에서 박 목사의 정확한 기도 문을읽어내려가기시작했다.
“ 그가이렇게말한게맞지, 그렇지?”라고허씨가물었다.
“ 그에게직접물어봐야만할것이오.”라고내가대답했다. 그때는몰랐으나, 바로그순간 다른중앙정보부요원이건물다른 곳에서 박 목사를취조하고있었다. 박목사는내가연행된지 두어시간뒤에연행 되었다. 뒤에기록들을비교했을때, 우리에게유사한방법을사용했다는것 을알았다. 그들이박목사에게는내가무슨 말을했는지를자세하게물었으 며, 그에게는나에대해한모든것은비 이유지될것이라고보장했다. 한편나를취조하던심문관은주제를바꾸었다. 이번에는두 요원이한국 에서내가아는 사람들전부의이름과주소그리고나와의관계에대해 쓰도 록 요구했다. 중앙정보부에서 심문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 를들었기에, 나는이질문을예상하고있었다. 만약내가이름을 대면, 중앙 정보부는 그 친구를 찾아가 그 사람이 반정부활동을 했다고 내가 고발했다 고 주장할것이다. 그다음그 친구는더 많은사람들의이름을대도록협박 당하게되며, 친구들간의신뢰는깨지게될 것이다. 나는한국에서내가일 했던교회와기관들의이름은적었지만개인의이름을대는것은거부했다. 허 씨의질책은 더욱커지고 거칠어졌다. 윤 씨가그를진정시켰다. 우리 가막 공산주의라는주제로되돌아오려할 때, 한사람이심문실로들어와서 는 허 씨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심문이중단되었으며, 나는다른방으로 끌 려갔다. 내 생각에 그곳은 중앙정보부의 제6분과 사무실이었다. 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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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책상뒤에앉아있었다. 그는감청색정장을입고있었다. 나더러앉 으라고지시했다. 
“ 오 씨, 나는 이 아무개라고합니다. 당신은한국에 오랫동안 계셨지만, 한국에 대해잘 모르는 게 분명하고, 공산주의에대해아무 것도모릅니다. 당신은우리나라반공법을위반했지만외국인이기때문에관용을베풀고자 합니다. 나는 당신이 기도했던 여덟 사람이 진짜 공산주의자들이라는것을 증명하려합니다.” 그런다음이사람은 신문에발표된것과정확히똑같은 것을나에게반복 해서 말했다. 그의 유일한 증거는 북한 수상 김일성의 연설문 사본이었다. 여덟사람중 한 명인하재완이그 연설을듣고옮겨적어서몇몇다른사람 들에게보여주었다는것이었다. 
그런다음, 갑작스럽고놀랍게이 씨는나에게증거를 보여주는것을그만 두고열변을 토하기시작했다.“ 이자들은우리의 적들이야. 우리는그들을 죽여야해. 이것은전쟁이야. 전쟁에서는심지어기독교인도적을죽이기위 해 방아쇠를당겨야할 거요. 만일우리가그들을죽이지못한다면, 나는국 립묘지를 방문해서 그곳에 묻힌모든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조국을 공산주 의자들에게팔았다고고백할것이요. 나는미국에가서한국전쟁에서죽은 용감한사람들에게그들이헛되이죽었다고말할것이요. 그 놈들은(여덟사
람) 죽어야만해!”
도대체무슨일인가? 이씨의감정적인독백은분명히그가나에게보여주 었던“ 증거”에서튀어나왔을리가없었다. 그의눈은막 전쟁터에나가는병 사처럼 빛났다. 그가 너무 감정적이어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훗날 한 친구가 말하기를 이 씨는십여년에걸쳐유죄선고를받은사람들 중 몇 사람에 대해 개인적인 피의 복수를 감행했다고 했다. 지금 그는 복수를 할 수있는지위에있었다. 이것이그의기괴한행동을설명해줄지모른다.  이 씨와의인터뷰는약 한시간 동안계속되었다. 그다음나는허씨와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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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와 함께 심문실로 되돌려보내졌다. 심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19 6 0 년대이후 내가관계한 도시산업선교활동에대한상세한설명을요구했 다. 그것이 언제시작되었으며누구누구가 도시산업선교회의회원인가? 목 적은 무엇인가? 왜 성직자들을 공장들에서 일하게 했는가? 왜 노동조합과 협력했는가? 나는이것과다른 질문들에대한답변을써내려 갔지만, 각각이전투 다. 허 씨는내 첫 번째답변을 받아들이기를거부했다. 마침내우리모두가 받 아들일수있는답변에도달할때까지설전을주고받았다. 시간이대략새벽한 시 삼십분이었다. 허씨는지쳐있었다. 그는윤 씨 를 시켜 내가 기도했던 여덟 사람의 부인들 이름을 쓰도록 지시했다. 그런 다음그는얼마나자주우리가만났으며, 무엇에대해이야기했는가를알고 싶어했다. 그런뒤허씨는군용간이침대에서기지개를켜더니잠이들었다. 윤씨와나는두어시간정도더계속했다.
마침내, 잠이우리를엄습해오기시작했다. 윤씨는우리가몇 시간동안 휴식을 취하고난 다음심문을 마칠것이라고말했다.“ 아침에당신은 사과 문을써야할 것이며, 당신의잘못을자백하고그것들을되풀이하지않겠다 고약속해야할것이오.”라고그가말했다.
두 요원들은 내가서명할 사과문을 미리준비해 두었다. 첫째, 내가그들 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이었다는것을 알지못했다고 말해 야만했다. 둘째, 앞으로 나는정부의 모든정책에 복종할 것이라고 약속해 야만했다. 셋째, 나는다시는유죄판결을받은여덟사람들을대변해서결 코기도하거나설교하지않겠다고약속해야만했다.
내가이 최후의통첩을받은것이새벽 3시 30 분이었다. 윤씨는두어시간 동안잠을자고나서다시얘기하자고말했다. 나는허 씨가코를골고있는 간이침대옆으로기어들어갔으며카키색담요를덮었으나잠이오지않았다. 아침 7시에일어나우리는다시심문에들어갔다. 나는허 씨에게사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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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있는첫번째항목에 결코동의할수 없다고말했다.“ 당신이말했던방식 은 이제내가그들이공산주의자들임을알았다는것을암시한다. 나는그 어 떤 것도알지못한다.” 놀랍게도심문관들중 어느누구도그것을강요하지 않았다. 우리는정부의정책에복종해야한다는다음항목으로넘어갔다. “ 당신들은내가정부의모든정책과모든법에복종한다고말하길원합니 까?”라고나는물었다.
“ 정책말이야! 당신은여기서외국인이야. 당신은정부의모든정책들에복 종해야만해.”
“ 그러나그 많은정책들중에는내가동의하지 않는것도있습니다. 어떻 게내게모든정책들에복종하라고요구할수있습니까? 심지어당신조차그 렇게하지않습니다.”
허씨는다시거만해졌다.“ 우리나라에와서우리의방식을모욕하고있는 당신이도대체누구라고생각하는거야? 당신은외국인이야! 미국대사관이 당신을도울 수 있다고생각하지마. 우리나라법을위반하고도그냥넘어갈 수는없어.”
“ 나는15 년이상한국에서살았지만, 결코체포되거나법을위반해서처벌 받은적이없다.” 내가대답했다.“ 나는한국국민들을존경하며기꺼이당신 나라의법을지키며산다.” 그때쯤 군복을 입은 키작은 남자가 들어와서 허 씨에게 일을서두르라고 명령했다.
그의 개입이 내가 사과문의 두 번째 항목에 서명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했다. 여덟사람들중누군가를위해연설하거나기도하지않겠다는세 번째 항목만 남았다. 허 씨는 기도 금지조치를 풀어주겠으나, 대신 내가 다시는 그들을대변하지않겠다고약속해야만한다고말했다.“ 그들을대변해서말 하다”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대한긴 논쟁을 한 뒤, 마침내 나는설교에서 그들에대해말하지않을것이라는진술서에서명을 했다.“ 말하기”의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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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들을열어놓은상태 다. 오전 11 시경에 키작은 군인이 돌아와서 나를 그와동행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나를중앙정보부 보안과 부주임 사무실로 데려갔다. 부주임은 나에게 이 씨라고 소개했다. 그는자신이8년 동안미국에 살았으며미국인들을아 주 잘 안다고말했다. 그는이런상황에서나를만나서유감이나, 내죄목이 아주심각하다고말했다. “ 당신이다시공산주의자들을돕는다면, 나는당신을감옥에보내거나추 방시킬것이요.”라고그가말했다. 그런뒤그는커다란검은차로나를집에데려다줄것을명령했다.
 
일 주일뒤 내가서울대학교의학장사무실에 가고있는데, 한 남자가 내 앞을막아섰다. 그의태도만으로도중앙정보부요원임을알 수 있었다. 정중 한한국말로,“ 선생님께서조지오 박사십니까?”라고말했다. “ 제가맞습니다.”
“ 우리이야기좀나눌수있을까요?”그는자신을소개하려고하지않았다. “ 괜찮으시다면, 제 연구실로 가시지요. 그곳은 춥습니다만, 조용할 것입
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선생님께서는여덟 명의공산주의자들을 지지하
는발언을해서지난주에연행되셨지요?”라며그는말을시작했다. “ 나는고문으로거짓자백을강요당한여덟사람들을위해기도했다는이 유로중앙정보부에20 시간동안연행되어심문당했습니다.”
“ 선생님은 자신이 법을 위반하고 있으며우리의 적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위안을주고있었다는것을이해하지못하십니까?”
“ 나는한국에서거의 20 년 동안살았지만법을위반했다고비난받아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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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습니다. 나는한국과한국의전통을가장존경하지만, 기독교목사로서 감옥에있는사람들을위해언제든지기도할수있는자유가있습니다.” 그는분명히그문제를 계속이야기하길원하지않았다. 갑자기주제를바 꿨다.“ 오 박사님, 우리는‘ 도시산업선교회’라고불리는불온 조직과관련 된 선생님의배경을잘알고있습니다. 지금 당장선생님이대학교를떠나야 한다고주장하는것은아닙니다만, 도시산업선교회에서무슨일을진행하고 있는지에대해서는더많은정보가필요합니다.”
그는교환조건을제시했다. 도시산업선교회에대한내부정보와내직장에 대한보장을맞교환하는것이었다. 내가대답했다.“ 나는당신네요원이벌써 도시산업선교회에관한모든것을알고있다고확신합니다. 도시산업선교회 를 추적하는많은요원들이인천과등포에있습니다. 내가대학교에어떻 게 임명되었는가에대해말하자면, 교원초빙위원회로내 이력서를보냈고 대학교에서저를고용한것뿐입니다. 그에관해비 따위는없습니다.”
“ 도시산업선교회에대한질문에답할것입니까?” “ 물론이죠.” 라고나는말했다.“ 숨길 것이없으며, 도시산업선교회는 분 명히정부를전복하려는조직이 아닙니다. 산업노동자를대상으로한 교회 의 목회활동이죠. 우리는다양한교육과목회프로그램을운 하며, 노동자 들의노조설립에 대한권리와 단체교섭권을 지지하고있어요. 더 알고싶 은것이무엇입니까?” “ 선생님이성직자와 학생들을 인천의 공장에 위장 취업시켰다는것이 사
실입니까?”
“ 정확히말해서위장취업이아니죠.”라고나는말했다.“ 단지그들이성 직자라는사실을드러내지않았을뿐입니다. 그러나, 맞습니다, 우리는남녀 성직자에게공장에서일하도록했습니다.”
“ 왜그랬죠? 그것이아주의심스러워요. 왜속이려고하는것입니까? 그것 은 공산주의자들이하는수법과 비슷해요. 왜노동자들을위해정식으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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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를세우지않았나요?”
“ 교회가 가난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방법은여러 가지가있습니다.”라고 나는설명했다.“ 약15 년 전에우리감리교교회주교께서나와다른사람들 에게독특한 방식의 선교활동을 시작하도록명했습니다. 도시산업선교회에 서 일하는 성직자들은특별한 교육을 받습니다. 최소한일 년 동안힘든노 동을해야만합니다. 이런식으로성직자들은노동자들이처한환경을더잘 이해할 수 있는것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도 목수 습니다. 도시산업선교 회는공산주의와는아무관계가없습니다.”
“ 그것은 당신생각입니다.” 라고그는반박했다.“ 우리는공산주의자들이 남한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위한 전선으로 교회를이용하려고 한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 선생님은 노동조합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것입니까? 노조는항상공산주의자들이침투하는거점입니다.”
그날저녁에 나는조승혁 목사, 조화순 목사와 함께저녁식사를 했다. 나 는그들에게아침에방문한사람에 대해서말했고, 또그 사람이도시산업선 교회에대해관심을보 다고전했다. 조승혁목사는이해한다는듯 미소를 보냈다.
“ 그것이 군대식사고방식이죠.” 라고말했다.“ 군대가공산주의자라고단 정한사람들을위해공개적으로기도를했기때문에목사님께서연행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바로그들의사고방식을침범한것이죠. 그들에게찬성하 지않는사람이곧그들의적이지요.” “ 그리고 도시산업선교회에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가지난 십 년 간 해온 일 덕분에 노동자들은 활성화되었고 더 많은 노조들이 조직되었습 니다. 군부와고용주들은그것을원하지않죠. 그들은순종적인노동력을원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정의’란 그들에게 무의미한것입니다. 그런 말뒤에는틀림없이공산주의자들이있다고그들은생각하죠.”
그날밤 우리세 사람이 헤어질 때, 나는 우리가 앞으로 저녁식사를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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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차례만나지못할것 같은예감이들었다. 도시산업선교회와대학교와 유죄판결을받은여덟사람과관련된사건들은아주빨리진행되었다. 나는집으로걸어오면서공포의전율을느꼈다.
 
내가예상한것보다훨씬더 빨리일이터졌다. 중앙정보부에서심문을받 은 지 약 일주일뒤에, 놀랍게도나는미 대사관에있는에릭슨씨로부터점 심 초대를받았다. 한국외무부장관이나에게간단한말을전해주라고요청 했다고말했다. 나는정부에 사과하든지, 아니면한국에서추방당해야만했 다. 정부가 공산주의자라고공포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대변하는 일 은 한국의법을위반하는것이라고외무부장관이말했다. 외무부장관은나 에게24 시간이내에두 가지를서면으로작성할것을요구했다. 나의사과문 과앞으로한국에서의활동에대한진술서가그것이었다. 나는한국에서추방당하기를원하지않았다. 한국은나와내 가족의고향 이었다. 그러나 내가 사과하는 것은 여덟 사람들과 그 가족들뿐만 아니라, 감옥에있는수백명의다른무고한사람들이내게보내준신뢰를배신하는 일이었다.
마침내 나는 19 5 4 년 한국에 온 이후한국의 법, 전통 그리고 한국인들을 깊이존경하는마음밖에없다는진술서만쓰기로결심했다. 나는어떤법도 위반하지않았다고말했다. 그런다음나는 내 의도입부에서인용한한국 에서의앞으로선교활동에대한내생각을기술했다. 외무부장관은내 편지에움직이지않았다. 48 시간도못되어서, 나는집에
서호송되어지프차를타고출입국관리사무소로끌려갔다. “ 오 씨, 당신의비자와 체류허가에있어실수가있었습니다.” 출입국관 리사무소직원이 말했다.“ 당신의 비자는 선교사 비자입니다. 그비자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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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당신은 대학교수를 할 수는없습니다. (지난학기에 나는 서울대학교 에서노사 관계를 가르쳤다.) 당신은우리법을 위반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한국을떠나셔야만하겠습니다.”
“ 어떻게 그럴수가 있죠?” 나는말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나를 채용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오기 전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 다. 게다가, 유치원에서부터가장좋은대학교의대학원에이르기까지한국 에서 수백 명의 선교사들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당신은 이 처벌을 위해 나를선택하신거죠?”
“ 우리는다른사람들에대해이야기하는것이아니라당신에대해서만이 야기하는것입니다.”라고그직원이말했다.“ 당신은법을어겼습니다.” 그리하여19 7 4 년 12 월 14 일, 나는마침내한국에서추방당했다. 정부는미 국으로가는편도항공권의비용을지불했다. 정부는 내가 불법적인 어떤 행위를 했다고 공식적으로 기소하지는 않았
다. 대신에그들은내비자가잘못 발급되었다고주장하는편법을사용했다. 편법뒤에는무고한사람들을위한기도나산업노동자들을위한정의를용 납하지않았던군대식사고방식이존재하고있었다.
 
추방그 자체는슬픔과눈물로가득찬것이었다. 그러나광과희망의순
간들도있었다. 여기반지와엽서에관한두이야기가있다. 반지: 경찰이나를집에서끌어내김포공항으로싣고갈 지프로데려가고 있을때, 누군가 손을 뻗어 내 손에 작은금반지를 쥐어 주었다. 그것을 내 약지에 끼었을 때 내 눈은눈물로가득했다. 나는 직감적으로그 반지가 어 느날밤 내게전화를걸었고, 그다음날 인혁당사건 부인모두를우리집에 데려왔던 우홍선 씨 부인에게서 온 것임을 알았다. 추방되던날, 우홍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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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오후내내우리집 밖에서 있었다. 내가 추방당한다는것을알았을 때, 그녀는내가돈도없고갈 곳도없이일본또는미국어딘가에버려질지 모른다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반지를 가지러 집으로 갔다. 한 친구가반지를가지고와서, 그것을우리집정원으로접근하는것을막기 위해서 있는진압경찰 안쪽에 있던다른친구에게 던졌다. 경찰이 나를집 에서데리고나왔을때, 그친구가그반지를내손안에꼭쥐어주었다. 우편엽서: 대한항공 00 2 호기가태평양위로빠져나오고, 간식이제공되 었다. 한젊은여승무원이내앞에식판을놓고는내무릎에엽서한장을떨 어뜨리고는아무말없이서둘러갔다. 나는엽서를힐끗보았으나잠시기다 렸다가뒤집어서읽어보았다.
“ 오 목사님, 안녕히가십시요. 저는한 젊은이입니다. (제이름을쓸 수 없습니다.) 저희대부분은목사님께서저희나라의진정한 자유와민주주의 를 위해 일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마음도 목사님과 함께 울고 있습니 다. 목사님의 이름은역사에 남을것입니다. 상황이변할것이며 머지 않아 목사님께서는일을계속하기위해한국으로초청될것이라고저는생각합니
다. 제발건강하십시오.”
나는울기시작했다. 그것이눈물로가득찬순간들이많았던그 긴하루의 마지막순간이었다. 74 7 기가계속 미국을향해가고있었을때, 나는우편엽 서를무릎에올려놓은채차츰깊은잠에빠졌다.
 
19 7 5 년 4월 9일, 내가추방된지넉달뒤에, 마지막으로항소할권리도주 어지지 않은채, 정부는 갑자기, 여덟 명의 소위인혁당 관련자들을교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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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처했다. 외신기자들이베트남에서의종전을다루기위해한국을떠났기 때문에, 여덟사람의죽음은해외에서거의보도되지못했다. 인권활동가들 이가족들의장례식준비를도왔다. 인혁당 관련자들중몇몇의시신은 정부 가인도하지않았는데, 아마도고문의흔적들을감추기위한것으로추정된다.
28 년 동안이들의 가족은“ 유죄가확증된공산주의자들”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공개적인비난과불명예로고통을받았다. 마침내20 0 2 년, 한국의대 통령직속기관인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공식적으로인혁당사건은 박정 희 정부의 완벽한 조작극이었음을 선언했다. 20 0 5 년 12 월에 국가정보원의
“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는, 인혁당 사람들이 자백하도록 고문을 받았으며 “ 그들이혁명적공산주의자들이라는혐의는중앙정보부, 검찰, 경찰과국방 부가다른활동가들을위협하려는목적에서공동으로조작한데에서비롯된 것”임을말하면서 조작극임을 확증했다. 국가정보원전문위원회의 한 위원 은인혁당사건에박정희대통령이직접개입했음을입증하는“ 결정적증거” 는 없으나,“ 유대인 대학살에도 히틀러의 직접적인 개입에 대한 증거는 없 다”고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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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고립에서연대로
 랜디 라이스(Randy Rice)


19 6 6 년 8월 미국을떠날때, 나는의욕이넘치는이상주의자로사회활동 을지향하는 34 살의, 몸과마음이건전한, 4명의자식을둔장로교목사 다. 그리고19 6 5 년 10 월에있었던극적이며 적인경험으로부터여전히 감을 받고있었다.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에있는한 자매장로교회에서카리스 마가넘치는한 찬양과기도모임에 참석하면서, 나는적으로메마르고의 기소침했던 오랜 기간으로부터 나를벗어나게 해 준 기도팀의 안수기도를 경험했다. 
19 6 0 년에서 19 6 5 년까지 나는 미국연합장로교회에서 임명한 목회자로 봉 직했다. 처음에는오하이오 주의시골교구(19 6 0 년~62 년)에 있었으며 다음 에는브리지포트(19 6 2 년~65 년) 도심에있는교구의 부목사로 봉직했다. 내 가 자라난 뉴욕루이스톤의제일장로교회는사회적으로도개인적으로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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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교윤리를 매우강조하는 성서에 기반을 둔 신앙을 내게심어주었다. 나 는 또한주일학교에서들려주는선교사들의이야기에깊은감명을받았고, 일찍부터 선교사로서의 소명에 대한 강한 부르심을 느꼈다. 피츠버그 신학 교와예일대신학대학원(19 5 6 ~19 6 2 )에서공부를하면서, 이두 가지주제는 더욱 강해지고 풍성해졌다. 19 6 5 년 브리지포드에 있는 교회에서 봉직하고 있었을때, 아내수와나에게한국에선교사로갈 수있는기회가 왔다. 우리 는“ 좋아요”라고말했다.
우리는19 6 6 년 9월에처음으로 한국땅을밟았고 19 8 2 년 2월까지한국에 서 봉직했다. 처음두 해 동안우리는 한국어공부에전념했다. 19 6 8 년 6월 연세대학교 한국 어학당을 졸업하자, 대한 장로회는 나를 캠퍼스 목회자로 임명하여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과함께일하게했으며, 동시에당시급성장 하고있던종합대학인경희대학교에서 어를가르치도록했다.
19 7 1 년에휴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한국의 기독교서지 학회(CL S )에서 일할것을 명령받았다. 또한서울 락장로교회의 대학복음 전도부에서일했다. 이후10 년간이 젊은이들과관계를맺으면서나는한국 어가 유창하게 되었고, 한국인들의 방식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와인권을위한한국인들의투쟁에있어적극적인역할을하게되었다. 한국대학생들과친분을쌓고여러대학에서많은시간을보내면서, 나의경 력을 두 갈래로 펼쳐졌다. 즉, 나는 (1)위에서 언급한 나의“ 공식적인 업무 들”과, (2)정의와 인권 문제와 관련된비공식적인 임무들을 수행하게 되었 다. 월요모임은나의비공식적인임무를위한생각과감의모든원천이되 었다.
 
“ 여기 책이있습니다.”라고음모가같은목소리로 나는속삭 다. 전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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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상대편은약간침묵하다가알 수없다는듯이 대답했다.“ 책이요? 무슨 책이요?”
“ 당신도알다시피, 지난주에우리가이야기했던책말입니다.” 다시잠시침묵이흘 다.“ 저는 댁이무슨이야기를 하고있는지모르겠
습니다. 저는책에대해아무것도기억나지않는데요.”
이 대화는나와서울외국인 학교뒤에있는우리집에서한 블록위에살 던 캐나다연합교회선교사인월터비첨과늦은저녁 나눈대화의첫부분이 었다. 때는 중앙정보부에게쫓기고 있던 몇몇 한국인들이 월요모임 회원들 의집에서숨어지내던 19 7 0 년중반이었다. 월터와그의아내, 레노어는당국 의 연행을피해시골에서올라온한국의장로교회목사한 명을그들의집에 숨겨주었다. 그들집에서 머물고 있던몇 주 동안목사는 가족과 연락을 하지못했다. 우리기억으로는비첨이곧 결혼하게될 딸과목사와의만남을주선하고있 었고, 우리집에서만나는것으로계획했다. 그녀가도착하기전에비첨과나 는 우리집 전화가 도청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간략한 암호 메시지를 사용하 기로했다. 목사의딸이도착하면 내가비첨에게전화해서“ 책이왔다”라고 말하기로 되어있었다. (내 생각에는 그랬다.) 불행하게도, 우리중 한 사람 혹은두 사람모두그 암호를잊어버렸다. 도청자를속이려고몇 번 헛된시 도를해본뒤, 나는포기하고말했다.“ 따님이왔어요. 목사님을내려보내세 요.” 그순간 우리는 뜻이 통했고 일사천리로 일을진행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목사는 우리집 문을 두드렸고 아버지와 딸은 감동적인 포옹을 하고서 함께들어왔고, 수와나는다른방으로물러났다.
내가이 이야기를하는이유는, 그것이유머와기쁨이넘치는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하지만, (이두 가지는힘들었던그 시절에도넘쳐났다.) 동시에 그것이월요모임의성격을잘 보여주기때문이다. 우리는나름대로작은방 식으로 투쟁하며 힘을 발휘했지만, 그렇다고우리가 정치적인 행동에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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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제일능수능란한전술가는아니었다. 우리는오히려술수를모르는사 람들이었다. 우리는정부의감시와탄압, 전투경찰과연행, 또는중앙정보부 의 협박과 심문에 대처해 본 경험이전혀없었다. 비첨과나 사이에 오갔던 “ 누가먼저인가?”에대한대화가바로적절한실례가될것이다. 그러나땅벌을생각해보라. 널리알려진바처럼, 과학자들은땅벌이날수 없다고결론내렸지만, 그사실을모르는땅벌은평화로이꽃에서꽃으로계 속 날아다닌다. 마찬가지로 월요모임 회원들인 우리의 서투른 방식도 종종 성공을거두어정부당국을놀라게 했다. 심지어민주주의와민권을위해가 열차게 투쟁하는 한국인들을 지원하면서 우리들이 성취한 모든 것에 대해 우리스스로도놀랐다. 우리가마지막으로놀란일은그로부터30 년 뒤에한 국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지정한민주화 운동을 지원한 명예롭고 존경할 만한모임에우리자신이포함되었다는것을알았을때이다.
월요모임은언제시작되었는가? 우리중 누구도 확실하게 모임이 시작된 날짜를꼽을수는 없다. 그러나, 두가지에대해서는우리모두 생각이같다. 첫째, 월요모임은19 7 0 년대초에시작했다. 둘째, 나는“50 인 모임”으로기 억하고이 책의다른저자들로“ 50 인 위원회”로기억하는, 각자집에서돌아 가면서가졌던바로그 모임이월요모임의모태라는것이다. 그모임의회원 50 명 대부분이 미국시민이었다. 그 모임은 박정희가 반대를 무릅쓰고 헌법 개정을통하여세 번째로대통령에출마하려고한 19 6 8 ~19 6 9 년경에결성되 었다. 대학생들은이 뻔뻔스러운권력욕에저항했고, 전투경찰이퍼붓는최 루탄의세례를받았다. 그런데전투경찰을싣고온트럭의문에는미국 국제 개발부의 의장(意匠)인 악수하는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50 인 모임은 이런 억압적인정부와미 정부간의공개적인연합에반대하기위해결성되었다. 무슨조치를 취할 것인지를 상의하기 위해 모인사람들 중에는 서울대에서 어를 가르치고 있던 평화봉사단 자원봉사자인 에드베이커, 남부 장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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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인 데이브 로즈와 멜렌로즈부부, 감리교 선교사 조지오 , 장로교 선교사허브 화이트와매지화이트부부그리고수 라이스와랜디라이스부 부가있었고페이문과그레고리파이도있었다. 연세대학교에서사회윤리 를 가르치고 있던 제라드 브레덴스타인 교수역시 이 모임에서 활동했으며 그가 쓴 한국연구에 특화된 소책자“ 기독교와 사회정의”는 50 인 모임과 후 속모임인월요모임의최초공식문서들중하나 다고기억한다. 이 모임은페이문의남편인문동환목사에게서한국의정치적역사적배 경에대해배웠고 그의지도편달을받았다. 이 모임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허브 화이트는 지역조직의 대가인 솔 앨린스키에게교육을 받은조직가로 서 경험과전문성을모임에더했다. 이모임이취한행동중 하나는눈에확 띄는 미국국제개발부의의장이 새겨진 그 트럭들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해 서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권력욕을 지지하는 것을 철회할 것을 탄원하는 것 이었다. 이런취지의탄원서를에드베이커가미국 대사관에직접전달했다. 그 뒤 얼마지나지않아 미 대사관에서는윌리엄포터대사와우리의만남을 주선하기위해우리중 몇 명을초청했다. 우리는두 차례대사관의초청을 받았다. (메리언킴의 을참조하시오.) 
분명히 우리가 취한행동은 꽤 효과가 있었다. 모든 전경수송차량의 문 에 있던의장이페인트칠로지워졌다. 우리모임이취한다음행동은국빈방 문 차 한국에오는미국부통령허버트험프리를서울김포공항에서만나는 일이었다. 9· 11 사태이후공항경비가철통같이강화된오늘날에는상상할 수 없을만큼손쉽게우리모임회원몇 명이활주로를향해걸어나가비행 기에서내리는험프리부통령에게인사를했다. 남부장로교선교사인엘렌 로스와페이문은다른이들과함께반도호텔의험프리부통령숙소에서부 통령을만났다.
몇 년이지나지않아 50 인 모임은조용히월요모임으로“ 변신”했다. 월요 모임은50 인모임의몇 가지본질적인특징을 유지했다. 첫째는순서대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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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집에서 모임을갖는것이었다. 우리가생각하기에, 집집마다돌아가며 모임을 가지면 우리회원들을 감시하는 정부요원들을최소한 1주일단위로 나마따돌릴수 있었기때문이다. 둘째, 월요모임의회합과회원자격은열려 있었고, 어떤 외국인이든지참석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한 가지아주현 실적인 이유로 배제되었다. 월요모임의계획과 전략에 긴 하게 연루된 한 국인은우리외국인들보다훨씬더 극단적인결과를맞이할수 있었기때문 이다. 셋째, 50 인 모임과 마찬가지로 월요모임은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정확한정보수집과신중한분석에전념했다.
 
월요모임의회원자격이모두에게개방되어있다는것은 사람들이그냥모 다는것을뜻한다. 일부사람들은초대받았을지도모른다. 어떤사람들은 입 소문으로그 모임에 대해들었을것이다. 기록된명부도 없었으며“ 출석 여부”도 점검하지않았다. 월요모임이지닌회원자격의유동성은새로운선 교사들이오고, 활동기간이끝났거나휴가를떠나면서어떤사람들은떠나 고있었다는사실과도관련이있었다.
19 7 2 년까지월요모임의 핵심 회원은거의 선교사들(개신교)과 수도사들 (천주교)로구성되어져있었다. 어떤사람은수십년 동안한국에줄곧있었 고, (예를들면, 19 5 4 년에온윌라커넌, 19 5 6 년에온진매튜스) 다른사람들 은 한국에온 지 얼마되지않았다. (데이브존스와린다존스부부는19 7 2 년 에 왔다.) 미국, 캐나다, 프랑스,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이탈 리아, 그리고내가잊어버린나라등등국적도매우다양했다.
19 7 0 년대에월요모임에정규적으로참가했던것으로내가기억하는사람 들은다음과 같다: 빌 베이싱어와 진 베이싱어 부부, 월터 비첨과 리어노어 비첨 부부, 메리언 커런트, 버치와 루이즈 (모리스) 더스트, 돌로레스 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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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매들린쥬스티, 린다존스와데이빗존스부부, 윌라커넌, 메리언김, 찰 리 크로쓰와프랜(넬슨) 부부, 스티브라벤더, 마티로우리, 진매튜스, 앤젤 라 미스튜라, 페이문, 더크넬슨, 조지오 과도로시오 부부, 메리언폽, 배들프라이스, 수라이스와앤디라이스부부, 이안로브, 돌로레스슈미스 칼, 짐 시노트, 디어더 터스티븐스, 버니 즈웨버, 그리고30 년이 지난지금 내가 그들의 얼굴은 기억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희미해진 다른 사람들이 있 었다.
이 사람들은 다양한 신학적, 정치적, 경제적, 역사적그리고 문화적 관점 들을모임에 더했다. 우리는 서로간의많은차이에 대해논쟁하는 데 시간 을 쏟을수도있었다. 그러나그렇게하지않았다. 당시의급박한상황과결 부된 실천적인 행동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단결하여 목적에 집중했다. 예수님의복음은 사회적/정치적인차원을 지녔다는 암묵 적인 확신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단결하고 집중했다.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의 선교활동은 혼의 구원을 넘어정의와 자유를위한사람들의투쟁에동참하는것으로확장되어야한다고생각했다.
 
사람들이월요모임에참가한이유는무엇인가? 모임의회원숫자만큼이나 많은대답이있을수 있다. 그러나우리에게공통된한 가지이유가있었다. 우리모두는갈수록심해지는한국정부의독재정책에대해심각하게우려 하고있었다. 지식인, 학생, 노동자, 언론인, 가난한사람그리고 가난한 사 람들속에서일하는성직자에대한박 정권의잔인한탄압으로우리는마음 이 편하지 않았다. 우리 중 많은사람들이 이런억압의예봉을견디고 있던 한국인친구, 이웃그리고동료들과정기적으로만나고있었다. 그러나우리 는 무력감때문에좌절하곤하 다. 우리는우리의우려를행동으로옮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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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전혀알지못했다. 월요모임은이렇게고립된개인인우리에게고립으 로부터연대로나아갈수있는길을제공해주었다.
최소한 월요모임은 고립되고 무기력한 우리의 감정들을 나눌수 있는기 회를 제공해주었다. 미국에서 알콜 중독자가 알콜중독치료모임(Al c o h o l i c s An a n y m o u s )에 처음으로 가면, 12 단계 중 천 번째 단계에대해 듣게 된다. “ 우리는우리가술에대해무력하다는것을인정했다.. . ”“ 술”이라는단어를 “ 정치적상황”혹은“ 한국정부”또는“ 유신헌법”으로대치하면, 월요모임의 근거들중하나를이해하게될 것이다. 우리는무기력했기때문에함께했다. 우리는정보에굶주렸기때문에모 다. 우리는한국친구들과그들의가족 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와 관련된 개인적인 경험담들을 말할시 간과장소가필요했기때문에만났다. 우리는행동을할필요가있었고 이를 원했기때문에함께했다. 매회모임의마지막에는다음일주일간집단적또 는개별적으로취할행동에대해합의했다.
또한 우리개인들 또는 집단자체보다 더 큰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월요모임에 참가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 모임의의식안에지혜를불러일으키고, 신앙속에서목격하라고우리를부 르는성령의역사 을지도모른다.
 
월요모임은‘ 결집한모임’ 그리고‘ 흩어진모임’이라는두가지형태로기 능했다. 
소집된모임을이해하기위해서는“ 전형적인”월요모임의모임형식을알 필요가있다. 저녁7시, 서울에사는랜디라이스와수 라이스부부의집 문 앞에도착한다. 다음 번에는 버치더스트와 루이즈 더스트 부부, 또는 데이 브 존스와 린다 존스 부부의 집 아니면 서울 서부에 있는 메리놀 수녀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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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주거지에 갈 수도 있다. 엉클어진 신발 무더기가 문옆으로 치워진 걸 보면, 다른 사람들이벌써 도착했음을알 수 있다. 거실은 사람들로 가득하 다. 대부분의사람들은바닥에한국식으로앉아있고몇몇은 의자에앉아있
다. 책과 신문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 노란 서류봉투들이 바닥한가운데 놓여있다. 분위기는일상적이며활기차다. 사람들은서로편한사이다. 간사인린다존스가모임의시작을알린다. 이특별한저녁에누군가가모 임을 시작하기 위해「래디컬바이블(Radical Bib l e )」에서 뽑은말 을 낭독한 다. 항상그렇게해 왔듯이정리를잘 하고초점이분명한린다가제안된의 제를제시한다. 만만치않은분량이다. 먼저 그녀는 노란색 서류봉투에 우 리의이목을집중시키고그런다음봉투를돌린다. 봉투속에는정보문건이 들었으며, 모든사람에게 봉투가 돌아가고 나면몇 개가 남는다. 봉투 안에 는여러가지“ 최신의소식거리”가있다. 한국어와 어로된잡지, 신문기사 들 그리고월요모임의 사실보고서, 기도문, 편지등 한국의 다른어느 곳에 서도구할수없는자료들이었다. 정보를배분하는것이모든모임에서주된 일이었다.
의제에는기독교회관의목요기도회와갈릴리교회의일요일오후예배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작성한 구두보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범과그들 가족의근황에대한최신정보도포함되어있었다. 한국방문이예상되는포 드 대통령에게보낼편지의초안도있었다. 모임은약간씩의제에서벗어날 때도있지만, 앞에서설명한대로진행된다. 이날은두 가지시안에대해 결 정을 내려야 했다. 누가 을 쓰고, 타자를 치고, 서명하고 그 편지를 포드 대통령에게 보낼것인가,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는데 누가 따뜻한 옷가지를 (예를들면겨울내복) 구속자에게갖다주는책임을맡을것인가하는문제 가그것이다. 모임은계속된다. 사람들은마음대로 웃고, 심각해지기도하고울기도한 다. 누구도 모임을 주도하지 않는다. 발언권은 모두에게 주어진다. 편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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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에 대한합의에 도달한다. 누군가가구속자들에게 옷을 가져다주는 것 에 대한책임을맡는다. 우리는충당할비용도있다는것을안다. 다른누군 가가겨울옷이수감자에게전달되었는지확인할것이다. 모임은다음에우리가어디서만날것인지를상기시킨뒤에끝난다. 몇몇 사람들은남아서이야기를더하면서다음 주 계획을세운다. 현관으로와서 신발을 찾다보면 시간이 벌써 밤 10 시 30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정을 알리는 통금 사이렌이 울리기 전에 집에 갈 수 있는 시간이 불과 90 분밖에 남아있지않다.
 
독자들이‘ 흩어진모임’을이해하는것을돕기위해월요모임과다음월요 모임사이에매주일어났던많은활동들을설명하고자한다. 먼저월요모임 은 매주한 번씩만나는것이바람직했다는사실을알아야한다. 첫째, 이렇 게주당한번씩 만남으로써결정된의제들을실천에옮기고, 연락을취하고, 자료들을 수집복사하고, 기도 예배에 참석하는 등 많은일을할 충분한 시 간이생긴다. 둘째, 우리가정확히 일주일 뒤에다시만난다는 것을염두에 두는것이우리로 하여금 일을수행하는 것 즉,“ 월요모임의일을수행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게하 다. 이것은우리가우리에주어진 본연의 업무인 정규선교사의일을수행하면서시간을할애해야한다는것을뜻했다. 아래에서설명하는일들이“ 흩어진”월요모임과관련된12 가지 역을범
주화해본것이다.
1. 정치범: 구속자들의재판에 참가하기, 가족들과의 만남및 후원, 가족 들과함께교도소 면회, 구속자가족의생활비및 학비모금및 지급, 구속자 를 위한식료품과약품및 의복구매, 구속자들의처우에대한, 특히고문에 대한소문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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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도모임과예배: 서울도심지에있는기독교회관에서열리는목요기 도회와갈릴리교회의예배에참석하기. (가장많은월요모임회원들이주중 의다른어떤행사보다목요기도회에많이모 다.) 
3. 대학생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도시산업선 교회사람들과의만남.
4. 한국 사람들과 해외에서 방문한 사람들과의 만남주선. (기자들, 교회 임원들, 국회의원, 정부관련인사들등등). 
5. 정부와관련된인사들에게편지쓰기. (대사, 상원의원, 대통령, 국무부 관료들) 비록모임회원들의대다수가미국사람들이었지만, 다른국적들을 가진다른사람들또한그들의정부에편지를보냈다.
6. 정보문건을위한자료의수집, 복사, 번역및준비작업.
7. 사실보고서의조사, 작성및복사.
8. 인편으로해외자료를수집. 이작업이항상쉬운것은아니었다. 이것 에대해서는이책의다음장들을보면이해가될것이다.
9. 월요모임“ 서류철”정리. 우리는특히 19 7 0 년대에한국에서있었던 민 주주의, 인권그리고사회정의를 위한투쟁과관련된풍성한자료를수년에 걸쳐서 모았다. 이 기록들은 몇 개의커다란 상자를 가득채웠으며, 주기적 으로 보충하고 최신기록을 첨가하 다. 서류철은 주기적으로 한 장소에서 다른장소로옮겼다.
10 . 동료선교사들과의관계: 19 7 0 년대에는오늘날보다더많은서양선교 사들이한국에있었으며, 그선교사들중일부가월요모임활동에아주비판 적이었다. 이들은신학적그리고실천적차원에서우리활동에 반대했고, 월 요모임회원들은이두가지차원에서모두대응했다.
11 . 수배자숨겨주기: 많은월요모임회원들은중앙정보부에쫓기는한국 학생들, 목사들그리고다른활동가들을그들의집에 숨겨주었다. 자기집을 은신처로기꺼이제공한사람들로는데이브존스와린다존스부부, 빌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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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과진 베이싱어부부, 월터비첨와리어노어비첨부부, 그리고수 라이 스와랜디라이스부부가있었다. 월요모임에참석하지않았던다른선교사 들또한수배자를숨겨주었다. 
12 . 시위와다른형태의 공개적인항의집회에참가: 월요모임회원들이잡 혀가면다른회원들은도우러가고, 체포된회원의배우자와가족들에게정 서적인지원을하 다.
13 . 기타 활동: 월요모임에는대출을 하는작은도서관이 있었으며, 회원 들은모임때마다책을가지고왔다. 마틴루터킹, 간디, 솔앨린스키및 다 른 사람들의저작들이있었다. 또한한국을방문하는사람들에게설명과안 내를하기도 했다. 방문자들은정례월요모임에 오거나, 뉴욕 주 뉴어크 시 에 본부를둔 평화운동단체‘ 화해연대(Fel l o wship of Rec o n c i l i a t i o n )’의 소장이 던 리처드디츠처럼우리의주말묵도회를지도했다. 디츠는비폭력저항의 방법을비롯해우리에게비폭력을가르쳤다.
 
왜 월요모임은 회원의 숫자 또는우리 활동들을 훨씬뛰어넘는 향력을 끼치는 것처럼 보 을까? 나는 단지 추측만 할 뿐이지만,“ 무대”의 크기와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작고 모든 것이압축적으로 일어나는나라이다. 만일월요모임이중국또는소련과같이큰나라에서운 되었다면, 그 향력은필연적으로훨씬더 작았을것이었다. 또한서울이 한국에서정치, 종교, 경제, 군사, 외교, 언론등 모든것의절대적인중심이 었다는사실이큰 도움이되었다. 기차, 버스, 택시등뛰어난대중교통수단 으로서울시내어디나 쉽게갈 수 있었으며 다른지역에도 쉽게접근할수 있었다. 국민의30 퍼센트정도가서울에 살고있었으며, 주요대학들과교회 들, 선교본부들 또한서울에 있었다. 서울의한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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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전체에반향을불러일으켰다. 그리고때로는전세계에울려퍼졌다.
 
우리는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았다고 내가 말하면, 월요모임에
참여했던모든회원들은진심으로“ 아멘!”하고답할것이다. 이책은회원들 이 함께서술한결과물이다. 그러나우리들이개인적으로축복받아알게되 었던한국기독교인들의관대함과용기와놀라운신앙에대해논하자면, 각 회원마다책 한 권씩은더 쓸 수 있을것이다. 한국의위대한투쟁에서우리 가했던작은역할때문에, 20 0 3 년가을, 아내와내가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 업회초대로40 여 명의다른사람들과함께명예롭게초청받아한국에다시 왔을때, 내마음은끊임없이이런생각으로가득찼다.“ 여기는우리자리가 아닌데... 진정한웅들이 여기있어야만 하는데. 부인들, 자녀들, 학생들, 도시산업선교회목사들, 교수들그리고미망인들, 그들이진정한 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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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한국이나에게내조국과신앙에 대해가르쳐준것
 루이즈 모리스(Louise Mor r i s ) 

남편월터(버치) 더스트와 나는 19 7 2 년 9월 한국에 도착했다. 얼마되지 않아한국어를배우는것이일본어를배우는것보다더 어렵다는사실을깨 달았다. 19 6 0 년대후반일본에서단기선교사로서봉사하는동안나는일본 어를배운적이있었다. 당시에버치는한국에“ 단기체류선교사”로있었고, 각자가3년제선교임무를마치고미국으로돌아온뒤 우리는만났다. 일년 반 동안의장거리연애(그는콜로라도에, 나는테네시에) 끝에우리는결혼 을 했고선교분야에서 다시일을할 준비를 시작했다. 우리는한국에 가기 로 결정했다. 나는그 결정이내 삶을어떻게바꿀것인가는전혀생각지않 았다.
2년제프로그램으로구성된한국어공부를시작했을때, 우리는서울의선 교사주거지역에있는 2층으로된 서구식석조건물의2에 살도록배정받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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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선교사주거지역에있는집에는 가정부가 딸려있었다.“ 아주머니”라고 불 는데, 이 호칭은숙모, 이모를 의미했을 뿐만아니라 중년의 여성을 지 칭하기도 했다. 아주머니는일주일에 두세번 와서청소와 요리를 했다. 나 의 한국어실력은아주머니와대화를나눌정도는되지못했다. 19 4 5 년에끝 난 일제강점기동안많은한국인들이일본어를배웠다는사실을알고있었 기 때문에나는일본어를해보려고했다. 내가아주머니에게일본말을할 줄 아는지 물어보자, 그녀는 퉁명스럽게“ 왜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녀의 무뚝뚝함에 움칫해서, 내가 아직 한국말을 모르니까 한국말을 더 배울때까 지 일본어로대화할수 있으면좋겠다고우물쭈물말했다. 약간부드러워졌 지만그녀가일본어로말하는데관심이없다는것은분명했다. 
그런뒤 한 가지사실이떠올랐다. 당연하지! 일제강점기(19 0 5 ~19 4 5 ) 동 안 한국인들은일본식이름을강요당했고, 한국의역사또는한 을배우는 것도금지당했으며, 심지어자신의언어로말하는것조차허락되지않았다. 아주머니는 이전에 자신을 억압했던 자들의 언어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 이다. 그일은좋은교훈이되었고, 나는다시는일본어로한국사람들과이 야기하려하지않았다. 이일은나에게가능한빨리한국어에능통하기위해 더열심히노력하는동기가되었다. 
선교사주거지역에서살면서버치와나는“ 진정한”한국적인삶과동떨어 져 있다고느꼈으며, 그래서몇 주 뒤에우리는 한국인 집 2층에세를 들어 이사를갔다. 19 7 2 년 10 월어느날아침, 우리는평소대로일어났고, 서울연 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의또 다른하루를 준비했다. 전날밤, 나는 한국 알파벳인한 을외우기위해, 플래시카드를공부하고있었다. 버치는라디 오를켜 놓고있었다. 뉴스를들으면서한국어를연습하고있었으나그는방 송되는내용의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침식사후, 버치와 나는 15 분 걸어버스정류장으로가서연세대학교한국어학당으로가는버스를탔다. 버스에서내려평소대로교문으로걸어갔는데놀랍게도탱크와무장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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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문을가로막고있었다.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왜교문이가로막혀있는가? 밤새쿠데타가일어났나? 북한이남한 을쳐들어왔나? 수만가지의질문들이머릿속에서맴돌았다. 우리는주저하 며 군인들중 한 명에게다가가서교문을지나교정언덕위에있는한국어 학당까지 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자기들끼리의논한 후, 그들은 우리가 교 문을통과하는 것을허락해주었다. 교정은기분나쁘도록조용했다. 학생들 은 교정어디에도없었고, 평일의부산함과활기도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 어디에있는가? 우리는외국인을제외하고한국학생들은몇주동안학교에 들어오지못했다는것을나중에알았다. 
우리가교실에도착했을때 웅성웅성하는소리가들렸다. 우리는곧 전날 밤 박정희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다는것을알았다. 모든 은행, 정부 기 관과대학들이일반인들에게는폐쇄되었고, 탱크를동반한무장군인들이경 계를서고있었다. 그러자버치는전날밤 라디오에서들었던것이박 대통 령의계엄령선포라는것을깨달았다. 석사학위를받았고일 년동안 추가로 연구활동을한 나는교육은잘받았으나, 계엄령이무엇인지또는그로인해 무슨일이발생할지몰랐다. 오늘날돌이켜보면, 그때가나의‘ 진정한’ 교육 이시작된시기 다는것을깨닫는다.
 
어학당에서우리는한국에서일하는미국인과캐나다인그룹에대해알게 되었다. 그들은한국에서상황이어떻게돌아가는지파악하기위해함께모 인다고했다. 공공건물앞에있는탱크에“ 미국”이표시되어있는것을알게 되었고, 우리는미국과한국의계엄령이어떤관계가있는지궁금했다. 우리 는 혹시다른사람들은더 아는것이있는지몹시궁금했다. 우리가처음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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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한 모임에는15 명 정도가 참석했다. 대부분이 선교사 고 풀브라이트 장 학생들, 평화봉사단원들, 그리고다른사람들이있었다. 이로써우리는이후 “ 월요모임”으로알려지게될정기적인주간모임에참석하기시작했다. 다음주에, 우리는계엄령에대해더 많은것을알게되었고그것이왜 선 포되었는지알게되었다. 언론에따르면, 표면적인이유는북한공산주의자 들의위협때문이었다. 그러나우리가알게된 진짜이유는박정희대통령이 거의 무제한적인 권력으로 대중을통제하고 재야인사들을 억누를 수 있는 “ 국가보안법”과“ 긴급조치”를공포할목적으로공산주의자들의위협을이용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자신의 구집권이 가능하도록 개헌까지한 것을보면, 박대통령은 당시이미선제수단을강구하고 있었 는지도모른다. 
 
내가 한국에 왔을 때 나는 세상에 대해, 또는 적어도 한국이라는 부분에 대해아주잘알고있다고생각했다. 4년동안일본에살았고, 석사과정을마 쳤고, 2년 여름학기 과정의 선교입문과정을마쳤으며, 철저히한국에 초점 을맞춘대학원에서의 1년간의추가연구도수행했다. 한국의나라, 문화, 교 회, 정치· 경제사 그리고 국민에 대해연구했다. 미국 교회, 적어도 대부분 주류의교파들은점차적으로선교사업에대해더욱열린자세를보 고, 서 구의기독교정신을세상의모든사람들이받아들여야한다고 더 이상생각 하지는않았다. 대부분서구선교사들이무엇이든서구의것이더 진보되었 고더발전되었고심지어더“ 문명화”되었다고생각했던초창기시절과비교 하면, 우리는이런면에서약간의진보를이루었다. 
사실, 내가속해있던한국감리교회는몇 년 전에미국교회로부터 독립 해서, 자체의 신학을발전시키고, 자체의성가를작곡했으며자체신학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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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성직자를교육시키고있었다. 비록내가선교에 있어더“ 계몽된”시대에 속한다 할지라도, 아마도무의식 중에 나는서구의 교육기관들, 체제들, 구 조들, 그리고분명히민주주의와경제발전에있어서구의우월성에대한믿 음을여전히가지고있었다.
나는 곧 내가 지닌 무지함과 거만함의 정도를 배우게 될 것이었다. 나의 놀랄 정도의 교육과 소위 개방적인 마음가짐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곧바로 지정학적현실들에대한나의식견을넓혀 주었다. 한국은나에게인간혼 의고결함을새겨주었다. 그리고 기독교정신에대해내가이해하는바의외 견상의모순들을드러내주었다.
 
계엄령이선포된지 몇 주뒤 학생들이교정으로돌아왔고, 광범위한시위 가 시작되었다. 연세대학교정문에서군중들에게최루탄을던지고학생들을 때리고연행하는완벽한전투장비를갖춘전투경찰을보는것은흔한일이 되었다. 최루탄에“ 미국제”라고인쇄되어있는것을알았을때, 우리는당황 했다. 비록 페인트칠로 지워졌지만 계엄령을 강행했던 탱크에도 볼록하게 “ 미국(US A )”이라는 자가새겨져있었다. 이모든것이무엇을뜻하는것일 까? 미국정부가한국정부에게자기국민을 억압하는 수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월요모임에서우리는이문제와우리가앞으로무엇을해야할것인 가를논의했다. 마침내월요모임회원들중 미국에서온사람들이미국 대사 를만나서대답을듣기로합의했다.
한국에서 처음 몇 달 동안, 나는 미국 역사, 미국과 다른 나라와의 관계, 다국적 기업,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등에대해 더 깊이있는책들을 읽고 있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나는 더욱더 당황했다.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와 달리나는교과서에서누락되거나왜곡된것들에대해알게되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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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최강대국인 미국은 전 세계에 미국식자본주의를 전파하고 있었 고, 그 과정에서 다른나라의 정치, 경제 지도자들에게상당한 권력을 행사 하고있었고, 자국의원칙을다른나라에강요하고있었으며, 무역협상을통 해 다른나라의 자원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많은 나라에서 비민주적인 지도 자들을지원하고있었다. 그런행위들은열거하려면끝이없었다. 다른나라 들이자국의이익을우선시하는미국의입장에따르지않으면, 미국은어떤 일도서슴지않을것이며, 때로는목적을이루기위해심지어는폭력에도호 소할것같았다. 이것이선진화되고“ 계몽된”기독교국가가세계에서활약하는방식인가? 이것이 약소국을 지배하고, 미국의 편의에 따라 무역 균형을 흔들고, 종종 다른나라의희생으로, 항상막강한달러를추구하는것이미국의자본주의 가운 되는방식이었나? 우리의생활방식이나민주주의와자유를증진하고 자 하는우리열망때문이 아니라바로이런논리로미국이강대국이되었단 말인가? 우리는아프리카, 인도그리고다른나라를식민지화한시대의 국 의 예를따르고있을뿐인가? 이것이어떻게내가사랑한조국일수 있단말 인가? 나의순진한무지는점점분명해지고있었다.
이런생각들로머리가가득찬채, 나는월요모임의다른 회원들과함께미 대사를만나러갔다. 우리는대사관의육중한문을들어섰고, 커다란“ 거실” 안으로안내되어졌으며, 큰벽난로주변에앉았다. 필립하비브대사는우리 에게 차를 대접했고 사교적인 만남인양 몇 분 동안 잡담을 했으나, 곧바로 우리는질문을시작했다. 한국의계엄령에미국정부가개입했는가? 왜대학 교 앞에세워진탱크들이미국제인가? 왜전투경찰이“ 미국산”최루탄을사 용하고있는가? 박정권과미국의관계는어떤것인가? 무슨일이일어나고 있는가?
대사는변명을했고, 신경쓰지않는것이좋다고말했으며, 본질적으로는 우리의우려를하찮게여겼다.“ 물론걱정하고있습니다만, 우리가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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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일은없습니다. 한국은주권국가이며, 우리는주권국가의국내문제에간 섭할수없습니다.”라고우리에게말했다.
미국이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 미국이 필리핀의 독재자페르난드마르코스대통령을전폭지지하고, 원조를해 준것과그곳 에서자행되는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에도 개의치 말라는 것인 가. 미국이베트남에서무슨일을하고있는지에대한 국방부보고서의보도 와 폭로에도, 그리고미국이최근칠레에서민주적으로선출된대통령의암 살과정부의전복에직접 개입한것에도개의치말라는것인가. 이런현실들 앞에서, 하비브대사는우리에게미국은다른나라의일에결코간섭하지않 으며미국이할수있는일은없다고말할배짱을가지고있었다. 월요모임은그의말을받아들이지않았다. 특히미국은자신의원조를어 떻게사용하는가에대해“ 발언권”을가지고있을뿐만아니라미국회사들이 생산한“ 고문의도구들”의 판매는의회가동의를해야만가능하다는사실을 알았을때, 우리는미 대사의말을받아들일수가없었다. 그것이우리미국 이다른나라에고문의수단을자발적으로팔고있다는것을뜻하는가? 말할 필요도없이, 우리는역겨워하고화를내면서대사의집무실을떠났다. 우리 는 진리, 민주주의, 자유그리고다른사람에대한선한의지라는이상에기 초하여세워졌을것이라고여긴자국정부의고위관료에게기만당했다. 나는우리조국이어떻게이런안타까운상태에이르 는지궁금했다.
 
내가경험하고있는 모든것을이해하려고하는동안, 나는우연히미국이 인디언들을어떻게 다루었는가를기록한『나를운디드 니에묻어주오』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다시 충격을 받았으나, 나는 인디언들에 대한 미국의 처우속에서일정한패턴을보기 시작했다. 우리는그들의신뢰를이용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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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우리에게 땅을“ 판매”하도록 꾀거나, 만일 그일이 성공하지 못하면, 곧장그들에게서 땅을훔쳤고, 땅에서그들을 내쫓았다. 그래서많은“ 조약 들”이그들에게강요되었고, 이“ 계약들”은 남부와서부 확장에방해가되기 시작한그 순간부터지켜지지않았다. 우리는인디언들을그들의오랜 토 에서 내쫓았고, 그들을 미국 내의 낯선 지역으로의 긴 행진으로 내몰았다. 만일그들이토를지키려고하면죽이기조차했다— 어린아이로서내가 보았던카우보이와 인디언 화들에 의해 조장된 전형화와는 거의 완벽한 반대 다. 인디언들에 대해 저질러진 잔학 행위들에 대해 읽었을 때, 나는 바람이나를강타하는것같이느꼈다. 나는“ 오, 세상에! 미국에사는우리는 수 세기동안사람들을이렇게취급해왔구나! 미국은처음에순수한의도를 가지고출발했다가도중에타락한것이아니다. 미국역사가시작될때부터, 미국은방해되는사람들은모조리짓밟아온것이다.”라고생각했다. 『나를운디드니에묻어주오』를 읽은지 얼마되지않은어느토요일 오후 에버치와나는 화를보러가기로했다. 대개상 하고있는몇편의“ 외국” 화들이(한국어자막이 달린 어로 된 화) 있었다. 그래서 그날우리는 “ 솔저블루”라는 화한편을보았으며, 그것은재미없어보 다. 하지만그 화는 뜻밖에도 콜로라도 주에서 있었던 샌드크리크 대학살에 대한 것이 었다. 미국기마병부대가인디언의평화로운캠프로들어가서, 말그대로그 들을대학살했고, 그과정에서 온갖종류의잔혹행위들을저질 다. 군인들 중 한 명이인디언여인들과아이들중 일부를보호하려고애썼다는사실에 도 불구하고, 전체화는무기력한인디언들에대한백인들의잔혹행위와 폭력적인행위에대한 화 다. 도대체무엇을위하여? 화가끝나고불이 켜졌을 때, 나는 내 미국인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극장 밖으로 걸어나오면 서 — 우리둘은 한국인의 바다 속에서 유일한 백인들이었다 — 나는 난생 처음내가미국인임이부끄럽다는것을깨달았다.
그때부터나는정치와경제를, 특히미국정책들을회의적으로보기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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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나는과거에우리가가했고오늘날도계속가하고있는 고통의깊이를 이해하기시작했다. 내가한국에서더많은것을목격할수록더욱더그 화 가 꼭 들어맞기 시작했다. 나는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보기시작했다. 그 것은부유한나라들이가난한나라를이용하는것 이상이었다. 그것은착취 와 폭력에 기초한 총체적 문제, 즉 인간이 다른인간을 다루는 방식의 문제 인 것으로 보 다. 인디언에대한처우와 뒤이은 노예제 및 인종적 부당함, 성의불평등,“ 가진자”와“ 못가진자” 사이의경제적 불균형, 그리고전쟁 자체가그증거 다.
나는다른확실한(비록멀리떨어졌지만) 장소들에서이 체제— 무슨대 가를 치루더라도 미국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 의 증거를 찾았다: 미국 과일업체에의한과테말라의통제와남아프리카에서벌어지고있는인종차 별정책에대한미국의지원이 있었다; 이란의국왕, 니카라구아의소모사대 통령과 파나마의 노리에가 그리고 이라크의 사담후세인 등은미국의 목적 에도움이되는한미국의지원을받았다.
나는우리미국지도자들, 정치인들, 한국의미 대사와한국과다른제3세 계 국가들에서 사업을 하고있는 미국기업들이 전하는 공개적인 메시지와 PR 문건들을살펴보기시작했다. 내가알게된 사실은다른두 가지이야기 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와“ 자 유무역”에 관해이야기했지만, 다른한편으로현실에서발생하는일들은그 와는딴판이었다. 그들은불공정무역과독재정치를지원하고있었으며, 미 국을 떠나 노조들이 용납되지 않으며 노동력이 더 싼 다른 곳으로, 그리고 한국에있는“ 자유무역지구”같이세금혜택을받아이득이되는곳으로달아 난회사들을지원하고있었다.
미국공법 48 0 조항— 때론“ 평화를위한식량”으로불리우던, 구호물자 — 또한 있었다. 알려진 대로라면, 그것은 식량부족을 겪고 있는 나라들을 위해사용되도록하는것이었지만, 만약그것이사실이라면, 왜이“ 구호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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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부분은미국이정치적이해를갖는국가들에게만가고있는것일까? 사 실, 한국에 구호품이 사용된 방식은 구호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뒤 에 나는 <필라델피아 인콰이어>지의 돈 바트레트가 쓴“ 식량구호품: 금이 간 꿈”이라는, 수상을한 연재기사를읽었다. 몇개의수령국가들을조사하 면서, 그는미국의식량 구호품이실제로굶주린사람들에게가는경우가매 우드물다는결론을내렸다. 대신, 이프로그램은정치적무기로쓰여졌다.) 한국의경우, 우선식량부족이란존재하지않았다. 한국농부들은아주생 산적이었다. 그런데도, P.L . 4 8 0 을 통해한국은 도시시장을 위해수 많은양 의 쌀을원조받았고, 그결과한국의쌀 가격은떨어지게되었다. 그것은연 쇄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한국농부들은더 이상그들이 생산한 쌀에대해 공정한가격을받을수 없었다. 그들은가족들에게충분한생계비를제공할 수없게되었다; 그들은아이들을일하도록도시로내보내야만했다. 특히이아이들가운데 어린소녀들은도시안에서쉽게 착취당했다. 도시 생활에철저히무지했기때문에, 그들중많은아이들이부모에게밝힐수도 없고달아날수도없는부끄러운존재형식인매춘으로끌려들어갔다. 많은 아이들이하루에몇 달러를벌기위해공장에서일하게되었다. 박대통령이 이룩한“ 경제기적”의 많은부분은이와같은연쇄적사건들 (식량원조로인 해 쌀값이 떨어지고, 그로인해값싼노동력이 도시로 몰리는 것)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시골농부들과도시노동자들에게그 대가는상당한것이 었다. 물론농부들에대한압박과노동자들에대한착취는결코정부의공개 적인 메시지의 일부가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내가 목격하고 있던 현실은, 대중들이듣고있던것과일치하지않았다. 커다란골이선전과현실사이에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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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모임에서 우리는 한국 동료들에게서 알게된 것과 외부의 국제정보 통들로부터들은것을함께나눴다. 그러나우리가각자의본업인교파별선 교사모임에참석했을때에는이런 것에대해언급하지않았다. 우리는다른 선교사들이 직무에 태만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꺼내기만하면, 그들은문을모르겠다는표정을짓거나, 우리가 한국에 산 지 얼마안 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것은우리가 상황을잘못 해석하거나최소한과장하고있으며, 어쨌든정치적인일에“ 연 루”되어서는 안 되고 그러한 활동은 선교사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었 다. 이것이 모든다른선교사들의태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그들중 일부 는그들주변에서일어나고있는 일을무시하고있었다. 그러나우리는분명 히그들이사실을알기만한다면, 그들도이해할수있을것이라고생각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감리교 선교사 겸 기자로서 한국에 대해보도했던 짐 스텐츨은 주변을 이해시키는 방법으로 사실보고서를쓰자고 제안했다.“ 그 래요.”라며“ 이것이우리동료선교사들과외부세계에우리가목격하고있는 것과이 운동에참여하는한국인들, 특히한국기독교인들에게서직접듣고 있는것에대해정보를주는길일것입니다.”라고우리는생각했다. 우리의 첫 사실보고서의 내용은 서울의 가장존경받는 장로교 목사들 중 한 명인 박형규 목사의 연행에 대해서 다. 우리는 맹렬히 썼다 — 가능한 빨리알리길원했기때문에.
월요모임의회합에서, 우리는어떤문제를보도하고 누구에게사실보고서 를 맡길 것인가를 논의했다. 나는 보고서를 편집하고 타자를 치고, 배포를 준비하는일을도우려고애쓰면서, 그 일을조직화하고자애썼다. 당시에는 복사기가드물었기때문에, 원본밑에가능한한많은 복사지를깔고여러번 타자를쳐야했다. 가끔등사기를사용할수 있을때는 스텐실로원판을떠서 필요한 분량만큼 복사했다. 그것은 어디에나 복사기 또는 개인용컴퓨터와 프린터가넘쳐나는오늘날보다휠씬더힘든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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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보고서제목들은광범위한주제들을다뤘다—도시산업선교회, 헌법 개정, 연행된 반체제인사들, 학생시위들, 한일관계,“ 인혁당,” 한국 젊은이 들에대한사형선고, 긴급조치령, 김지하시인의투옥, 갈릴리교회, 한미관 계, 한국 공장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젊은 기독교인들의구금등등 화제 거리는 끝이없었다. (각기 다른경험과 집필능력을 지닌많은사람들이 공 헌했다는점에서, 당시사실보고서의작성은이책을위해 노고를결집한것 을 연상시킨다!) 70 년대중반에서80 년대초반까지, 우리는60 개 이상의 사 실보고서를써서배포했다.
정보를알리기위해, 우리는매달정보다발을모아서배포했다. 사실보고 서와아울러, 정보다발은한국사람들이쓴진술서들과<뉴욕타임스>, <워싱 턴 포스트>,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가디언>, 그리고일본언론 등에 서 발췌한 해외기사들을포함시켰다. 그 정보다발들을 평범한 갈색봉투에 가능한눈에띄지않게넣은다음, 한국에 있는다양한선교사모임들에 배 포했다— 연합감리교, 장로교, 캐나다및 다른나라출신선교사들이배포 대상이었다. 우리는또한사실 보고서가한국밖의 일본, 캐나다. 미국, 유럽 에 배포되도록 했다. 결국, 월요모임발송자 명단에는 전 세계에 걸쳐 수백 명의개인과단체들이포함되었다.
 
이 정보다발로인해한국내 선교사공동체가더많은 정보를얻게되었는 지 측량하기는 어려웠다. 정보다발에서 상황이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었던 가? 사람들이읽기는했을까? 우리는알수없었다. 정보다발에대해이렇게 들 저렇게들논평을한 사람들은극소수 다. 어떤사람들은동조적이었고, 다른어떤사람들은정반대인것처럼보 지만, 아마도대다수는그 중간의 어딘가에있었을것이다— 그들은풍파를일으키기를원하지않거나, 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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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거나, 단지 우리의 실천주 의를그들의소명의일부로생각하지않았을지모른다. 하지만우리가하는 일을반대하는몇몇사람들이있었으며, 슬프게도그 때문에우리의신학이 도전을받게되었다. 그들이반대하는이유는선교사들의역할은, 강론을하 고 가르치고사회봉사와치료등을제공하는것이란데에있었다. 즉, 직접 적인봉사들을일컫는것이었다. 그러나만일어떤정책이우리가봉사하는 사람들에게해를끼칠지라도, 우리는그 정책을반대하기위해봉사이상의 활동을해서는안된다는 것이었다. 교회와국가는분리되어야하며, 그것은 우리가정치밖에머물러 있어야만한다는것을뜻한다고그들은말했다. 결 국, 우리는한국정부의명령에따라이나라 안에있으면서선교사업을수행 하도록 허락받았으며, 그래서 우리는 정부의 정책에 도전하거나 또는 그런 사람들과연루되어서도안되었다.
복음에대한우리의이해가의심을받았다는사실, 더구나이방인들에의 해서가아닌동료선교사들에의해 의심받았다는사실에우리는놀랐고, 그 리고심지어는 상처를입었다. 그러나이런도전에있어서조차, 하느님께서 는 역사하고 계셨다. 우리의 믿음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선교단에 “ 우리의신학”(부록에있는우리시대의소명을보시오)을계획하고써보내 는 책임을맡았다. 이실천이우리가우리스스로에게(그리고바라건대, 다 른사람들에게) 우리행동을뒷받침해주었던신앙을명확히하도록도왔다. 우리는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곤궁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직접적인 도 움을주어야 하는가뿐만아니라, 힘있는자들의행동과 대치하더라도정의, 공정함그리고다른사람들에대한적절한대우를위한일도포함된다는것 을명확히밝히려고애썼다. 사실 우리는한국기독교인동료들과한국 교회 의 주요한지도자들의예를따르고있었다. 그것은한 기독교인그룹에게서 훈계를 받고 있는 반면에다른 기독교인 그룹에게서는 고무되어지고 있는 기이한병치— 똑같이충실한두 기독교인그룹에의한기독교 정신에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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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다른관점들—를이루고있었다. 
 
19 7 0 년대일부더진보적인한국지도자들이기독교빌딩에서목요아침기 도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 C C ), 한국기 독학생운동, 여성기독연대 그리고다른 단체들의 사무실이 입주해 있었던 도심의동쪽에위치한약 7층짜리건물이었다. 19 7 4 년 1월에가난한공장노 동자들에게목회활동을하는선교단인도시산업선교회(UI M )에서일하고있 는 일단의목사들은 정부의긴급조치령에 항의하고 교회들에게 박 정권의 탄압을반대하는활동에좀 더 개입할것을권고하기위하여, 기독교빌딩에 있는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사무실에서시위를하기로결정했다. 버치는도시산업선교회의일부목사들과긴 하게일하고있었고, 연대와 지원차원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결정했다. 그 사건 후 집에돌아와서, 그 는 내게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목사들이읽었던 성명서, 그리고그들이 펼 쳤던커다란현수막에대해이야기했다. 그는반쯤은사복경찰들에의해집 회가해산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같은일은일어나지 않았다. 버치는그 가 전체상황을 사진으로 찍었다고 말했고, 그 사진들이 잘 나오기 바랬다. 그리고그것이그사건의전부 다. 또는우리는그렇게생각했다. 그날이른오후, 중앙정보부에서보낸남자두 명이우리집에나타났으며, 시위에대하여조사받기위해버치가그들과동행해야한다고주장했다. 그 들은나에게그를어디로데려가는지를말해주려하지않았으나, 오래걸리 지 않을것이며 곧 집에돌아올 것이라고 나를안심시켰다. 나는순진한 사 람이었기에, 처음에는그들말을곧이곧대로 믿었으나, 곧 의심을 갖기시 작했다. 중앙정보부가 사람들에게서정보를 얻기 위해 사용했던 여러술책 들을 알았으므로, 나는 그 요원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해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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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가책을갖지않을 것임을깨달았다. 나는그요원들이버치에게정보 를캐내기위해 무슨일을할지걱정했다. 나는월요모임회원이며우리의가 장 가까운이웃인조지오 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그는 지난 20 년 대부 분을한국에있었으며아마도무엇을해야할지알지도몰랐다.
그날은19 7 4 년 1월 17 일로, 우연히도조지의생일이었다. 그는가족과함 께 생일만찬을하는중이었으나, 주저하지않고가족에게사과하고버치를 찾으려 떠났다. 조지는진 매튜스에게 연락했고, 조지와진은무슨일을해 야할지 의논했다. 마침내, 두사람은 무서운 중앙정보부 본부가 있는남산 — 반체제인사들이 심문을(그리고 고문을) 위해 끌려갔던 장소 — 에 함께 가기로 과감하게 결정했다. 조지와 진은적어도 당국자들에게 버치가 연행 된사실을다른사람들이알고있다는것을알릴필요가있다고생각했다. 조지에따르면,“ 그런일이어리석다는것을우리도알았지만우리는다른 생각이나지않았다. 한국중앙정보부에버치의행방을문의했다가우리둘 다감금될수도 있었다. 우리는마침내한국중앙정보부건물의대문을 찾아 내고문을두드렸다. 무장한경비가 약간당황했다.‘ 뭘원하나?’하고그가 소리쳤다.‘ 우리는오늘오후에연행된외국인 선교사에대해알아보려고왔 소.’라고대답했다. 몇분 안에, 평상복을입은한 남자가나와서 우리를그 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는아주정중했으며, 우리 둘 모두가 한국말을 잘 한다고말하면서우리에게차를대접했다. 그는우리가묻는내용을상세히 들었다. 그리고 그런 문제들은 중앙 정보부의 관할권에 있지 않으며, 대신 서울경찰청으로가야만한다고우리를확신시켰다. 그는종이에주소를적 어주면서길을알려주었다. 우리가떠날때, 그는절을하면서일상적인한 국인사인‘ 안녕히가십시오’라고했다.”
경찰청의방문에서도우리는아무런성과를얻지 못했다. 그저녁얼마뒤 에 조지는나에게전화를했다.“ 우리는아직그를찾지못했습니다. 남산과 경찰청에갔다왔지만그들은그 일에대해알지못한다고말했습니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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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걱정마십시오. 우리가계속찾아볼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히 몰랐다. 나는 걱정속에 왔다 갔다 하면서 집에혼자있었다. 버치는어디에있는것일까? 그들은그를어떻게하고있 는 것일까? 그들이오늘밤 그를풀어줄까? 만일그러지않으면어쩌나? 한 국 중앙정보부는사람들로부터그들이원하는종류의“ 자백”을 얻어내기위 해 다양한고문수단들을쓰는것으로악명이 높았다. 허나미국인에게는그 렇게까지하지못할것이므로, 나는버치가신체적으로해를입지는않으리 라고확신했으나, 그들이할 수 있는다른것들이있었다— 그를위협하고, 잠을재우지 않고, 그를 며칠 동안계속독방에 가둬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조지와진이도울수있을것이라믿었고, 걱정하지않으려애썼다. 결국, 조지와 진은버치의 소재를 알아내지 못했으나, 그날밤 늦게 다행 히도그는풀려나서집으로되돌아왔다. 그가나에게남산중앙정보부본부 에 잡혀있었다고말했을때 내 놀라움을상상해보라. 조지와진이한국중 앙정보부남자와— 버치의소재에대해알지못한다고부인했던사람 — 차 를마시고있는동안버치는바로옆방에서심문을당하고있었던것이다. 그뒤에우리전화는도청당했고, 몇주동안 우리집밖에는중앙정보부소 속의특수사복요원이배치되어우리의모든동향과우리가가는모든장소 를 감시했다. 버치는 많이 동요되었고, 거의 죄수처럼 집에 머물며 필요할 때만밖에나갔다. 그는 끌려갔던 다른사람들에 대해걱정했다. 그는 다시 끌려가지않을까, 또는어쩌면미국으로추방되지않을까걱정했다. 당시그 가 버틸수 있었던 것은자신의 신앙과 다른사람들의 지지덕분이었다. 마 침내그는과감히밖으로나가서기도회들, 시위들, 그리고운동을지원하는 다른방법들에참가하는일을재개했으나, 그경험은그에게흔적을남겼다. 이것이 우리가 개인적으로 직접 괴롭힘을 당했던 최초의 경험이었다. 당 국관계자들이 어떻게 할지 정확히 알지못한다는 사실이 무섭기는 했지만, 버치의행동에대한처벌은최소한에그쳤다. 서구인들에대한그런가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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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우는분명히한국인들을취급하는방법과대조되었다. 차량에수송되어갔 던학생들에 대한“ 표준”은남산에있는중앙정보부 본부내부에서꼬박2주 간(때로는더 장기간)“ 심문”을 당하는것이었다. 그기간동안, 그들은구타 당하고, 굶주리고, 전기고문이나“ 물고문(계속코속으로물이들어가는상태 로 거꾸로 물속에 박아넣는 것)”을 당했다. 또한 옆방에서 고문으로 비명을 지르는친구들의신음소리를듣도록강요당했다. 이런예를수도없이나열 할 수 있다. 소위“ 자살” 또는치명적인“ 사고”라 불리는 사건들도 있었다. 분명히한국인들은서구인들처럼관대하게다뤄지지않았다. 왜 당국관계자들이우리같은사람들을더 잔인하게다루지않았는지누 가 알겠는가? 의심할여지없이, 군사적, 경제적, 그리고정치적으로한국은 미국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은 남한편에 서서한국전쟁에서 싸웠 다. (미국은러시아와함께제2차 세계대전종전때38 선에서한국을두 국가 로나누기로 결정했던당사자들중하나 다.) 많은한국지식인들이미국에 서 교육받아왔다. 비록일부가미국정책들에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대체로 한국사람들은미국인들에대해아주좋은감정들을갖고있는 것 같았다. 아 마도미국인들을거칠게다루는것이, 한국당국자들에게는좋은생각으로여 겨지지않았던모양이었다. 그런처우가, 특히만일한국밖의언론에 퍼지게 된다면, 의도하지않았던부정적인파문을야기시킬수도있었다. 이유가무 엇이든지, 분명히 이중 잣대가 존재했다. 외국인들은한국인들과 비교해서 솜방망이로다뤄졌다. 먹을것을주지않거나휴식없이장시간심문당할수 는 있어도, 외국인들은신체적인학대를두려워할필요가없었다. 외국인에 게 최악의 경우는 한국에서 추방당하는것이었다. 실제로그 이후몇 년 동 안최소한세명의선교사가—미국인두명과호주인한명—추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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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4 년 봄에,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의침투라는 새로운 사건에 대해 신문 에서 읽었다. 한국 정부는 북한과 연대를 가지고“ 인민혁명당(PR P )”이라고 불리는조직을구성했던여덟명을체포했다. 신문에의하면, 인혁당은한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때쯤에 이르러 나는정부의 발표는 무엇이든 의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공산주의 — 특히 북한으로부 터 — 의위협에 대한경고는일상적이었기때문이었다. 나는그발표를심각 하게생각하지않았다. 하지만월요모임에서, 나는보도가단연코주목해야 할 것임을알았다— 그러나박 정권이국민들이주목하길원하는방식에서 는 아니었다. 우리는인혁당 사람들이부당하게 기소되었다고의심했다. 인 혁당같이 위험한 단체를 체포하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더 많은 공포심을 불 러일으키는방법이었고, 정부정책들에반대하는사람에대해점증하던 심각 한 탄압으로부터사람들의 관심을 점차적으로 돌리기 위한 방법이었다. 설 령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하는 실제 사건이 없을지라도, 정부는 간단히 사건 을조작할수있었다. 아주쉽게. 너무나쉽게.
일부기소된사람들의아내들이조지오 을찾아와도움을요청했다. 조 지는 그들의 남편들이 — 평범한 사람들, 정말로 정치적으로“ 중요치않은 사람들” — 어느 날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차량으로 끌려갔고, 그 이후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들에 관한 유일한 소식은 신문에보도된것이전부 다. 조지는같은죄목으로처벌받은동일한이름 을 가진몇 년전 다른단체의유사한사건을기억해 냈다. 그러나이전사건 은 증거 부족으로 기각되었다. 박 정권은 전과 똑같은 수법으로, 이번에는 법정과언론에대한더한통제력을가지면서, 꼼짝못하게얽어매려하고있 음이분명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권력과대중에대한통제를절박하게유 지하고자하는정부의모습을드러냈다— 심지어국가에반하는가장심각 한죄로무고한사람들을기소하면서까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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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4 년 12 월 조지 오 이 추방당한 직후, 버치와 나는우리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보내고우리를지원하고있는일부교회들에서연설하기위해 미국으로 돌아가는 짧은 여행을 준비했다. 우리는 서울김포공항에 도착해 서가방을부치고일상적인출국 수속을밟고있었다. 우리는종종기사들과 성명서들을밖으로몰래운반하거나, 한국정부가반입을원하지않는책들 과자료들을들여왔기때문에, 우리는항상공항에서긴장했다. 드디어우리차례가 되어여행서류를점검받을때, 직원이버치의여권을 아주오랫동안쳐다보았다. 그런뒤, 그는변명을하면서우리에게기다리라 고말했다. 그가몇 분뒤에 돌아왔을때는다른남자와 함께 다. 그남자는 버치에게다른방으로따라오라고말했다. 이남자는출입국관리소에서온 사람이었다. 우리이름이일종의블랙리스트에올라있었던것이분명했다. 그 직원은 우리에게, 만일 우리가 한국을 떠나면, 한국의재입국을 위한우 리 비자가(불행하게도, 우리가미국에있는동안, 우리비자가만료될것이 었다) 승인되는 것을 장담할수 없다고말했다. 우리가 이유를 묻자, 그는 “ 당신들은 한국의 국가안보에 위협적인 사람들이다.”라는 말만 했다. 우리 는 항의했지만, 그직원은우리가시내에있는출입국관리소에서문제를해 결해야할 것이라고말하면서우리의항의를무시했다. 우리는원히한국 에돌아오지못할수도있음을직감했다. 
우리는집으로되돌아가서, 19 5 0 년 중반이래한국에있으면서한국기관 들을다뤄왔던 경험이 더 많은진 매튜스에게 전화를 했다. 진은 하던일을 중단하고 우리와 출입국 관리소에 동행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진은 그 직원에게 우리가 재입국 비자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누군지 모르 는그직원은확신에 차서말했다.“ 물론이죠, 제가그문제를해결해드리죠. 승인을위해 윗층에있는상사에전화를하겠습니다.”그가수화기를들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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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확신에찬어조로,“ 여기재입국비자를필요로하는선교사두분이 와 계십니다. 이분들의비자를승인해주시겠지요? 이분들의성함은월터더스 트와루이즈더스트씨입니다.”그런뒤전화를끊고“ 승인”을기다렸다. 회신전화가 왔을 때, 그의 목소리는“ 오, 정말이요?” 하며2데시벨 정도 작아졌다. 통화를하면서그의 입은벌어진채 떨구어졌다. 그런뒤, 그는전 화를끊고그가처음했던 것보다훨씬확신없는태도로우리쪽으로걸어왔 다.“ 뭔가 문제가 있는것처럼 보이는군요. 여러분들은저의상관과이야기 를해야만할것같습니다.”
우리는 그의상관 사무실로 들어갔다.“ 여러분은 반정부활동으로의심을 받고있습니다. 제가이 문제에대해확인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진이“ 선 교사들에게재입국하는것을허락하지않는다면, 한국에좋지않을텐데요.” 라며끼어들었다. 그러나그 상관은 더 놓은책임자와 검토를 해야만 할 것 같다고반복했다.“ 내일다시오십시오.”라며우리를물리쳤다. 지난몇달에 걸쳐진은두어명의 중앙정보부요원들과친해졌고, 때로는 그들에게서“ 덤으로”정보를얻을수 있었다. 출입국관리소를나왔을때, 진 은 무슨 일인지 한 번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 요원들에게 연락해서 상황을설명했다. 그는만일우리가예정대로출국해서미국교회에연락하 지 못한다면, 그것은한국에 정말로 좋지않을것임을 강조했다. 진이 심각 하게탄원해야만했을게 틀림없었다. 우리가“ 전과”를 가지고있는것은사 실이었기 때문이다. 버치는 도시산업선교회가집회를 하는 동안 사진을 찍 었기때문에중앙정보부에차로끌려갔고, 우리둘모두가정기적으로 목요 아침기도회에서목격되었다. 우리가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될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진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날은 아무런 소식도 없었 다. 다음날 아침, 진은 그가알고있는중앙정보부 연락통에게서소식을 받 았다.“ 그들은 당신들의 재입국이 허락될 것으로생각하고있습니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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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시내의 출입국관리소로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비자가 승인되었다. 그들 은 비자를넘겨주면서, 우리에게문제를일으키지말고한국법을준수하라 고 경고했다. 그전날한국에서미리보낸짐들을찾을수 있기를바라면서, 우리는그날오후비행기로떠났다. 우리는 이것이우리에게겁을줘서 입을 다물게하려는또하나의조치 음을알았다.
미국에 돌아와서, 우리가교회 청중들에게 이 사건과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다른것들에 대해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놀랐다. 예전에미국교회를 방문했을 때에는, 청중들이 미국정부가 한국 독재정치를 지원하고 있는 것 을 믿으려 하지않았다. 마침내, 우리에게서이야기를 몇 년 동안반복해서 듣고, 워싱턴에있었던“ 코리안게이트”라는스캔들같은것들을읽은뒤, 신 자들은 우리의 전언을 좀 더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공항에서 우리에게 일어났던일은한국인들이매일견디고있던 것들과비교도되지않았다. 그 것은우리를괴롭히고우리가소동을일으키지못하게하기위한방편에불 과했다. 반면에, 한국인에겐말그대로그들의미래와목숨이걸려있었다.
 
조작된인혁당(PR P ) 지도자들의연행은그들의가족을파괴했다. 그아내 들은 생계를 남편의 봉급에 철저히 의존했다. 아이들은더러운 빨갱이들의 자식들이라고놀림을당했다. 그들모두가사회의적으로취급당했다. 조지는누군가이 속임수를폭로해야만한다는것을알았다. 그는그사람 들의신원과경력을조사했으며, 자신이찾아낸사실들에대한해명서를써 서 가능한 널리 알렸다. 그것은 한국 정부에게 사랑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 다. 그는위험을무릅쓰고발언했고심지어공개적으로그가족들을위한기 도를했기때문에, 여러 번 중앙정보부에심문을 받기위해끌려갔다. 마침 내이 문제를일으키고진실을말하는사람을침묵시키기위해, 정부는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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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하기로결정했다. 그래서19 7 4 년 12 월중순에, 그는자신과가족들의삶 의 방향을바꾸면서, 거의이십여년동안사랑했고봉사했던나라와국민으 로부터쫓겨났다. 하지만그것은“ 인혁당”사람들과그들의가족들이지불해 야만했던것보다휠씬적은대가 다.
19 7 5 년 4월, 그들이연행된지일 년 뒤에,“ 인혁당”사건에대한대법원 청 문회가있을 것이라고했다. 이크고고전적인스타일의법정은오래된건물 주변의좁은길에있어접근하기가어려웠다. 가시돋힌철책으로도로를막 은 채, 길은 높은벽으로 둘러싸인 위압적인 건물의 현관에 이르 다. 그날 은 음울했다. 비가 종일오락가락하고있었다. 수 백 명의지지자들이 법원 밖에모 다. 우리가모여있던법원바깥에는사복경찰들이사방에있었다. 그들은 흔히 시위나 다른 대규모 대중집회에서그랬던 것처럼, 사복경찰들 은사람들을떼어수송차에 어넣어서군중들을해산시키려고애썼다. 우리 외국인들 중 몇 명이피고들의 아내들을 지원하고 청문회를 지켜보 기 위해법정 안으로들어가기로결정했다. 버치, 짐시노트신부, 그리고내 가 법정안으로들어가아내들뒤에앉았다. 판사들이들어왔다. 우리는죄수 들이 들어오길 기다렸으나, 그들은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뒤, 변호사나 검 사의증언이나기소자들중 누구의진술도없이, 판사들이이 사람들은유죄 이기때문에선서증언을할 필요가없다고발표했다. 그들의사형선고가언 도되었다. 그런뒤, 판사들은돌아서법정밖으로걸어나갔다. 그일은아주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우리는 기가 막혀 말없이 서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아내들은 소리를 지르고 우산으로 좌석을 때리기 시작했다. 분노 다! 대법원“ 청문회”는 철저한사기극임이폭로되었다. 곧제복을입은경비 원들이법정으로들어왔고항의하는여자들을건물밖으로철저히호송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세 명의외국인들을제외하고모든사람들이법정에서내쫓 겼다. 나는이믿기지않는정의의희화극에항의하는무언가를해야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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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너무강하게느꼈다. 몇 가지이유로 두려움보다더한분노를 느끼 며, 나는그 방을 떠나는 것을거부하리라결심했다. 그것은 완전히 비이성 적이고비생산적인행동이었지만, 나는그들에대해반항하는어떤일을해 야만했다. 법정경위한명이우리에게건너와서“ 여러분들은지금가셔야합 니다. 점심시간입니다.”라고말했다. 
우리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경위들은 우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당황했다. 그들은그들끼리속닥거렸다. 그런뒤, 그들중한명이다가 와서“ 에스”자를약간틀리게 발음하면서어로크게말했다.“ 당신들은나 가야만합니다. 이곳, 이곳은대법원입니다.”
짐이되받아 소리질 다.“ 대법원이라고? 대법원이라고?! 이곳은 대법원 이 아니야! 이곳은염병할** !” 짐은계속그들에게소리를 질 고, 그들이 우리가나갈생각이없다는것을 알았을때, 그들은물리적으로우리를뒷계 단으로 어붙이기 시작했다. 그순간 나는바닥에 누웠다. 버치와짐도나 를 따라했다. 이것이그 사람들을놀라게했다. 다시한번그들은모여서무 엇인가를의논했다.
우리를들어서나르는수밖에도리가없다고결론짓고, 네사람이버치를 잡아서 뒷계단 아래로 데려갔다. 다음은 짐이었다. 마침내, 세 사람이 나에 게 다가왔다. 한국 남자가 여자를 쫓아내기 위해이렇게 다루는 것은, 그리 고나는미국여자 기에, 적절하지않았기때문인지이것은약간더“ 골치거 리” 다. 그러나나는태도를바꾸지않았고, 나를밖으로데려갈다른방법 이 없었기때문에세 사람은마침내나를들어뒷계단으로다소흔들거리며 데리고갔으며, 이일이다소불편하다는것은분명했다. 나는그들을편하게 해주지않으리라결심하고있었고내가할 수있는방
법에서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이나를계단아래로 옮기고 있을 때, 나 는층계참을가능한단단히잡았다. 그들이 내손을 느슨하게만들려고애쓸 때 나는그 중 한명이,“ 이봐, 이 여자정말힘센데.”라고숨을쉬며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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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들었다. 그것은나에게더용기를주었고나는계속그들에게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이내 비옷소매를잡았을때, 나는내 팔들을소매에서빼냈 고, 그들은빈소매만잡은채 다. 그들은순간적으로소리를질 다:“ 이런 제기.. . ? ” 물론, 결국그들은내 손을층계참에서떼어냈고나를 계단아래로 옮겼으며나를뒷문밖의시멘트바닥에내려놓았다. 짐과버치가 다음에 무엇을 해야할지알지못한채, 도로위에 앉아있었 다. 얼마나우리가어릿광대같은가! 주변에다른사람은하나도없었다. 갑 자기우리가세 명의광대들처럼보일게틀림없다고깨닫자, 긴장과좌절을 풀고우리모두웃음을터뜨렸다.
우리는법원정문으로되돌아갔고여전히거기에있었던다른 월요모임회 원들과합류했다. 끔직한날이었다— 그런천인공노(天人共怒)할선고가이 무고한 여덟사람들에게언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날이 휠씬 더 끔직 하리라는것을전혀알지못했다. —날이 새기전 이른아침에이 여덟사람 모두가교수형에처해졌다. 그들은거의일 년 전에거리에서낚아채져수감 되었기때문에, 그들의아내들과아이들은그들과만나거나이야기를할 기 회조차갖지못했다.
 
그 주월요모임회합에서, 우리는이죽음에 대해항의하는무언가를해야 만 한다는 것을알았다. 우리는 미국이 옆에서서아무것도 하지않고있다 는 것을알았기 때문에, 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인 들이대사관내에서시위를하는것은불법이 아니었다. 이곳은미국 토로 간주되었기때문에, 우리는법을위반하고있는것이 아니었다. 그리고미국 시민으로서 우리는 우리 정부와 이에 연루된 사실에 불쾌감을 부각시키는 것이더 적절하다고생각했다. 이전몇달동안에우리는미국대사관에 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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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건에대해항의할것을촉구하려고애썼고, 우리는대사관이“ 조용한외 교”를 사용해서“ 배후에서작용하고”있다는것을항상 확신하고있었다. 도 대체그말이 무슨뜻인지, 또는무엇을어떻게하겠다는것인지는확실하지 않았지만, 우리는미국이그말을해야만했었다는것과이 사람들의목숨은 구출될수있었다는것을알았다.
우리는월요모임회원들중 여덟사람이시위에참가하도록계획했다. 여 덟 사람이 검은 두건들과 올가미를 목에 두른 채, 교수형에 처해졌던 여덟 사람을 상징하는 침묵시위를할 예정이었다. 시위가있던날,“ 이것이 당신 들의조용한 외교인가?”라고쓰인 푯말을 들고서, 그들은 침묵속에 대사관 앞에서 있었다. 시위사진은『타임』지의그주 아시아판표지에실렸다. (대 사관시위에대해서는월터더스트장을보시오.) 
 
19 7 5 년여름에, 부모님이우리를방문하러오셨다. 나는그들을만나러도 쿄로갔다. 도쿄에있는동안, 나는일본에살고있고한국의인권운동을지 지하는데 아주중요한역할을하고있는예일대신학교대학원생인오재식 을 만났다. 그는 그때 투옥되어 있던 반체제 정치인 김대중을 위한 약품들 과, 한국에있는교회지도자들에게전해줄자료들을준비했다. 부모님과내가한국으로떠나려는전날밤, 나는세관원들에게들키지않 도록내가방에 그 약품들을챙기려고애쓰고있었다. 만일약품이나자료가 발각된다면, 관련된모든사람들에게골칫거리가될것이었다. 예기치않게, 나의아버지가내게물었다:“ 너는이런것들을 몰래운반해들여가면서공 산주의자들을 돕고있지 않느냐?” 나는너무 놀라서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약과정보를용감한한국의인권파수꾼들에게 가져다주는것 이“ 공산주의자들”과 어떤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아버지는우리가 일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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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공산주의운동에연루되어있다고생각하시는것일까? 최소한 나는아버지가 한국상황에 대해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는 것을깨달았다. 아마아버지는 당신이 알고있던은 하고 불쾌한, 유일 한 경험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매카시 시대의 공포
다. 물론 공산주의인북한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불과 몇 십 마일에 있었고, 아버지는그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버치와 나는한국에 도착한 이 래,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집에편지를 써 왔다— 그리고 아버 지는그것을“ 이해하지못했음”이 분명했다. 나는김대중이 누구인지, 그가 왜 감옥에 있는지, 그가 약품을 얻지못한채 쇠약한건강상태에 있다는 것 과 이것이해야할 옳은일이라는것 — 해야할 기독교적인일— 을아버지 에게설명하려애썼다. 나는내가얼마만큼아버지를확신시킬수 있는지자 신하지 못했으나, 아버지의위험에 대한 공포를 경감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부모님은 우리가 편지에서 말하려고 했던 것의전모를 직접파악하게되었다. 부모님도월요모임에참가했고, 관련된사람들이 모 두 교회사람들 — 개신교 선교사들, 천주교 신부들과 수녀들, 선교단 인턴 들, 그리고세계곳곳에서온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알았다. 그들은억 압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용기 있는 행동 때문에 끌려가고, 연행되고, 고문당하거나 투옥된 (그리고 때로는 더 끔직한) 한국 기독인들, 학생들, 기자들, 노동자들, 농부들의— 모든계층에서온 사람들— 이야기 를들었다. 
물론, 우리는 부모님에게 아름다운 한국의 시골풍경과 절들과 문화적인 명소들을보여주었다. 그러나우리는또한“ 평화시장”피복공장에있는십대 노동자들을보여주기위해, 그리고도시산업선교회의일부목사들을만나기 위해부모님을그곳으로모셔갔다. 부모님은우리와함께갈리리교회와목 요아침기도회에동행했고 투옥된 목사들의 아내들과 투옥된 학생들의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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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만났다. 시인김지하가갇혀있는군사감옥의정문에도갔다. 부모님은 우리가가는곳마다우리를미행하던사복경찰들을보았다. 그리고 부모님은 드디어 이해하셨다. 얼마나아름다운 나라인가 — 산과 절과풍부한역사, 마을들, 비옥한들판, 생기찬시장, 붐비는도시들그리고 훌륭한 사람들. 그리고 얼마나 비극인가 — 정부와 중앙정보부, 경찰, 군대 에 대한널리퍼진공포감; 자유를지키고민주주의를재건하려는사람들에 대한 잔인한 억압; 공산주의 북한에 대한 공포의 계속적인 선동 (사람들이 구속적인정부정책들을받아들이도록만드는술책); 그리고무슨일이 일어 나고있는지묻기조차 두려워하는사람들. 옆사람이당국에보고할거리를 찾기 위해엿듣는 정보원일까 두려워서, 사람들은 다방에서 친구에게 속삭 이는것조차자제할지경이었다.
미국으로돌아가신부모님은할수 있는한 최선을다하여그경험을 밖으 로 알리려고 애썼다. 의회와 백악관에 편지를 썼고, 자신들이 목격한 대로 이야기를했다. 그런뒤 우리에게보낸부모님의편지들에는한국에서부모 님이 만나거나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김지하는 어떠 냐? 그는감옥에서나왔느냐? 정부에비판적인기독교지도자티모시문(문 익환) 목사에게무슨일이있었느냐?
부모님들의변화를지켜보면서, 나는안도했다. 나와마찬가지로, 부모님 또한많은것을알게되었다. 한미관계의이면을 보았고, 이제 전에는 상상 하지못했던방식으로세상을이해했다. 또한한국이유일한경우가아니라 는 사실을알게되었다. 부모님은독재자가통치하고사람들이억압받는나 라들, 경제가 미국기업과 연결되어 있는 나라들, 대다수의국민은 점점가 난해지는데, 일부 지배계층은 더욱 부유해지도록 외국이 지원하는 나라들, 그리고 엘 살바도르에서 저항했던 로메로 대주교처럼 기독교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암살당하는 나라들의 소식을 들었을 때, 부모님은 현 실을이해할수 있었다. 이제는다른눈으로세계에서벌어지는사건들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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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되었기때문이다.
 
19 7 6 년 지미카터가대통령으로선출되었을때, 미국역사상처음으로인 권사무소가설립되었다. 이것이우리에게희망을주었다. 아마도미국정책 은한국내인권에대해긍정적인 향을끼칠것이었다. 3년뒤인 19 7 9 년봄 에 카터가 한국순방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들었을때, 우리는 박 대통 령이탄압을중단하는것에동의하지않으면방한하지말 것을카터대통령 에게요청하는편지를썼다. 그때까지구치소와감옥들에는수백명의정치 범들이있고, 사복경찰의감시가만연했으며, 수백명의학생들이숨어지내 고 있었다. 한국정부는카터가택할경로를따라서울 산꼭대기의무허가촌 들을정리하고있었다. 이것들은일일노동자와공장노동자와같이생계를 겨우이어가는서울의가장가난한사람들의집들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편지가 적발되지 않고한국 우편체계를 통과하지 못하리 라는것을알았기때문에, 연합감리교선교단위원회간부인패트패터슨에 게 그 편지를한국밖으로 직접가지고 나가미국에도착하는즉시카터대 통령에게부쳐달라고 부탁했다. 불행하게도, 그편지는공항에서몰수당했 다. 그리곤 그 편지에 서명했던 우리 모두가 출입국 관리소에 소환되었다. 관리소 직원들은 우리에게 어로 쓰여진 진술서를 건넸다. 그리고 우리에 게 자필로진술서를쓰고서명하라고했다. 진술서는다음과같은 것이었다: “ 나는다시는한국문제와 관련하여미국정부에편지를쓰지않을것을 약속 한다.”이것은참을수 없었다! 미국시민들이우리자신의대통령과대화할 민주적인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것을 약속하도록 요구받고 있었다. 출입국 관리소직원들이미친것이틀림없다고나는생각했다.
사실, 그들은 아주 집요했다. 만일우리가 서명하지 않는다면, 중대한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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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들을초래하는것이라고그들은말했다. 다시비논리와순수함이덮쳤고, 우리는동의하는것을거부했다. 그들이우리를위해마련한진술서대신에, 우리는“ 미국시민으로서, 우리는우리정부에게우리의견해를전달할민주 적 권리를인정한다.”라고썼다. 그직원들은그것을해석하기위해다른방 으로가져갔다. 그들은몇 분 안에아주불쾌해하면서돌아왔고, 그진술서 가 만족스럽지않다고말했다. 사실, 우리가제시한 그 무엇도 그들을 만족 시키지못했다. 시간이늦었기때문에그들은우리에게집으로간후 신중하 게숙고하고나서다음날다시오라고말했다.
다음 날,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진술서에 서명하려 하지 않았다. 상당한 논의를주고받은후 —아마도그들이지쳐가면서— 그들은마침내우리에 게서다음과같은 진술서를받았다:“ 우리는법을집행할한국정부의권리를 인정하며, 그법의결과들을받아들일것이다.”
그 사건뒤에, 카터에게보내는편지에서명했던우리각자의거주허가가 짧아졌다. 이제우리는 일 년에한 번보다 훨씬짧은석 달마다 거주허가를 갱신해야했다.
 
공항에서 카터에게 보내는 편지가 몰수된 뒤, 직원들이 그것을 처리하는 동안에 패트패터슨의 비행기는 지연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편지를 되돌려 받았고 비행기는 서울에서 이륙하도록 허가받았다. 그 편지와 서명들은 백 악관에 전달되었다. 그 결과 언론에 기사가 났고, 이는 한국의 인권이라는 대의를위해쓸모가있었다.『 워싱턴스타지』의칼럼리스트메리맥그로리가 미국시민은정부와대화를나눌권리와의무를갖는다는우리의주장을옹 호했다. 19 7 9 년 4월 29 일자신문에실린그녀의논설은“ 인권에반하는또다 른 일격이 될 카터의 한국 순방”이라고 제목이 붙여졌다. 언론기사가 나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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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편지에서명했던우리에게는불리하게작용했지만, 한국인들의투쟁에 는도움이되었다.
 
19 7 2 년으로돌아가, 처음한국에도착했을때, 우리는우리가사는곳에서 멀지않은한국감리교회에다니기시작했다. 그곳은전형적인설교를하는 전형적인교회 다. —설교의촛점은개인과신의관계, 죄에서해방된삶, 그리고기독교전파에있었다. 정의와관련된문제에— 굶주림, 가난, 집없 는 생활, 다른 사람에 대한 부당한 대우-대해 그다지 많이 말하지 않았고, 특히박 정권이자행하던탄압과관련된문제들은일체거론하지않았다. 우 리가 목사나 일부 장로들에게 그 주제를 꺼낼 때면, 그들은“ 기독교인들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그곳은우리의 자리가 아닙니다. 어쨌든, 그 것은너무위험합니다!”라고말하곤했다.
몇 달뒤, 인권운동에서활동하는일부한국 교회지도자들이진실을자유 롭게 말할 수 있는 새 교회를 설립하자고 결정했다. 그래서 갈릴리 교회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매주 목요아침 기도회와 갈릴리 교회의예배는아주의미가있었고우리가이전에경험했던것과는사뭇달 랐다. 이곳으로우리는 어려운 상황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기위해, 예수 가“ 정사와권세들”에 대해행한가르침을되새기기위해, 그리고예수가위 험을 무릅쓰고 당대 권력에저항하여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대변했던 사실을되새기기위해, 성경속에서지침을구했다.
갈릴리 교회는 진실이 권력에 우선하는 곳, 한국정부의 반민주적인 정책 과 국민에대한억압적인대우가직접적으로도전받는곳이었다. 그것은우 리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대변하여 행동하도록 소명받았고, 만일 그렇게 하 지 않으면,“ 돌들이 대신울부짖으리라.”는 믿음을 토대로 하고있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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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는항상많은찬송과 기도, 그리고당국관계자들과문제가발생한 사람 들 또는 연행되거나 투옥된 사람들에 대한소식을 공유하기가 포함되었다. 성서, 책, 대체식량, 그리고따뜻한옷들을난방이되지않는 감옥에있는사 람들에게제공하는데에도힘썼다. 
갈릴리 교회의 설교들은 힘이 있었다. 진부한 표현이나 상투적인 말들은 언급되지않았다. 이사람들은그들이직면한시험을(비유적으로그리고말 그대로) 통과하기위해서, 그리고예수님의이야기를현실에서 살기위해서 매일깊은신앙심을이끌어냈다. 무고한사람들에대한정부의행동에대해, 반대의 조짐이라도 보이면 잡아들이려는 탄압에 대해, 그리고 한국에서 불 의에저항하는 빛나는 지팡이 던 학생들에 대한무자비한 대우등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비판했다. 
매주일요일오후 정규아침예배가끝난뒤, 우리는갈릴리모임이소집되 던교회까지한 시간반을 버스를타고갔다. 우리는언덕을힘들게 올라, 인 접한 건물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사복경찰을 지나서 걸어갔다. 심지어 정부요원들이예배에참석하여, 듣고감시하기위해뒤쪽의자에앉아있었 다. 그들중극소수는정말기독교인이었을지도 모르지만말이다. 나는종종 사복경찰들이 이 예배에서 듣고 있는것에 대해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 그들은성서를읽고해석하고그것들이한국상황에적용되는것을들었 다. 그들은정부에대해의심을 품은적이있었을까? 그렇지않는지그들이 옳은일을하는지자신들의역할이무엇인가에대해의구심을품은적이있 었을까? 예배에서방문객들이환 받고소개될때, 사복경찰들또한그들자 신을 소개하도록 요청받았다. 어느 일요일 한 요원은“ 제가 아마도 여러분 중그누구보다더정기적으로 참석할지도모르겠습니다.”라고말해서참석 자들로부터웃음을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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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메시지를완곡하게바꾸지도않고공개적으로예배드리는위 험을무릅썼다. 우리모두가어떤박해를겪을지라도독실한종이되어야한 다고촉구하는 듯했다. 이것을보면서, 나는 더욱심오한 방식으로 나의신 앙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나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용기 있는지에 놀랐다. — 자기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안에서 더 낮은지위에 있는사람 들, 더 나약하고 목소리를 내지못하는 사람들을 위해발언했다, 그들은날 품팔이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빈민지역 거주자들, 가족들의 줄어든 농 가 소득을보조하기위해공장에서일하는어린여성들, 집권당의입장을보 도하는 대신정말 무슨 일이벌어지고 있는지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는기자들, 현실을외면하고자하지않았기때문에광고를수주하지못한 신문사등이었다. 그리고 물론 (일부 용기있는 교수들로부터 지지를 얻은) 학생들이있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희화화된한국의현실에대한성명서 를 발표했으며, 최류가스를뒤집어쓰고, 연행되거나, 운이좋으면연행을피 해서도피생활을했다.
나는한젊은감리교 목사가우리집에와서우리가짐을 쌀 준비가되었는 지를물었던날을기억한다.( 우리가그의요청을받아들이면한국에서 쫓겨 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는우리에게 당국에서 쫓고있기 때 문에머물장소를필요로하는한 학생에대해이야기하러왔다. 우리는그 것이 무엇을뜻하는 지를 알았다. 만일 그가 잡히면, 그것은 고문, 강요된 “ 자백,” 다른사람들의연루, 연행, 그리고 투옥을 의미할 것이었다. 우리는 결코한국인들만큼용기가있지 않았다. 그러나어떻게우리가안 된다고말 할수있겠는가?
우리는두 차례그들이 다시밖에나가도될 만큼상황이충분히안전해질 때까지학생들을몇 달 동안우리집에 데리고 있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집 안에있어야만했다. 만일신선한공기를마시기위해잠깐이라도밖에나간 다면, 그들은누군가에의해보고될위험이있다는것을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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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그랬듯이, 우리는 우리가 도우려고 했던 학생들만큼이나많은 혜택 을받았다. 학생들이우리와함께살았던 몇주 그리고몇달 동안우리는많 은 시간을 해방운동에대해대화를 하며보냈다. 비록우리의선교활동생 활에서, 우리는 신학교와 대학교“ 교수들”일지라도, 우리는 이 젊은이들로 부터 알게 되었던 일부 사실들에 대해 거의 완전히 무지했다. 과거와 현재 세계의다른지역에서발생한민중혁명, 한국의오랜역사속에서민중이야 기한 격변과 변화들, 심지어 그들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휠씬 더 자세하게 알고있었던미국의노동운동과시민권운동등이그것이었다. 그들은이 운 동들이어떻게 발생했는지, 어떤전략들이성공했는지, 어떤것이성공하지 못하는지와그이유에대해분석하는데열심이었다.
물론심각한토론도 있었지만, 언제나훈훈한농담과웃음이넘쳤다. 어느 날저녁식사를하면서학생들은우리김치가(모든한국식사에함께나오는 고추로가득버무린 발효되어진중국양배추)“ 싱거워서” 충분히맵지않다 고말했다. 충분히맵지않다니?! 우리가이매운명물에익숙해지는데몇달 이 걸렸다구!“ 그렇지 않아요, 아니라니까요.”라며“ 만일 한국식 식사를 한 후에땀이나지않으면, 정말먹은게아니라니까요.”라고학생들은말했다. 이젊은이들은그들의“ 감금”기간동안단지수동적으로집에앉아만있지 않았다. 그들은읽고쓰고생각하고계획하고있었다. 그들은아주헌신적이 었다. 그들은대학교에서쫓겨나게될 위험을기꺼이무릅썼고, 필요하다면 감옥에서 몇 년을기꺼이 보내려 했고, 문자 그대로 그들이 믿는것을위해 기꺼이목숨을걸었다. 그들의믿음은민주주의, 인권, 언론의자유, 집회의 자유등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조국의 더 밝은미래를 원했고 그것을 위해기꺼이희생하고자했다.
나는이 어린학생들에게서아주감동을받았다. 그들중 일부는기독교인 이었고일부는아니었다. 심지어일부는무신론자 으나, (아마도나를비롯 해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보다 더욱기독교적인 삶을 살고있는 것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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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보 다. 깊이 생각할수록, 나는만일 기꺼이 신앙을 행동에 옮기지 않는 다면단지스스로기독교인이라부르는것은아무의미가없다는것을깨달 았다. 나는외양적으로교회의주된초점이자그것의최우선사항이었던것 에 대해의문이들기시작했다. 그것은다른사람들을개종시켜서마침내모 든 사람이기독교신앙을고백하게되고예수님을구세주로서받아들이거나 적어도 신을믿는것이었다. 대학에서세계종교들을 공부할 때, 나는 하느 님께서정말로우리모두가기독교인이 되기를요구하시는지의구심이들었 다. 많은 공통주제들이모든주요종교들을통해흘 다 — 자비, 친절, 희 생, 봉사, 더높은소명에복종, 그리고신에대한믿음들이그것이었다. 내 게는신에게 이르는 수많은길들이있고, 기독교는 그들중 하나일 뿐인것 처럼보 다.
나는아마도하느님은많은기독교인들이매우중요하게생각하는것들을 그렇게중요하게여기지않을지도모른다는생각이들기시작했다. 나는하 느님은그/그녀의자녀들을차별하지않을것이라는생각이들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든, 유대교인이든, 불교인이든, 힌두교인이나 무슬림이든, 또는 심지어무신론자이든지중요하지않다. 나는가장중요한것은자비를베풀 면서사는것이라고점점더 확신했다. 기독교인으로서우리는아주훌륭한 안내자를가졌다. 예수의삶, 가르침, 그리고본보기가그것이다. 이것은때 로는현상유지에저항하도록우리에게촉구한다.
그때부터계속, 나는신앙의목적은천국행 티켓을얻는것도아니요, 기 독교인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사랑받고 받 아들여지기위해서“ 구원”받는것이아니었다. 나에게신앙은반드시하느님 께 바치는 선물이 아니라,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주는 선물인 것처럼 보
다. 그것은 호시절에는여러분을지탱시킬것이고, 곤궁한시절에는여러분 에게힘을주는, 특히 시기가 힘들고 희생이 필요하게 될 때 여러분내면에 최상의것을 불러내는그 어떤것이었다. 예수는분명히권위에저항하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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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로를희생했다는점에서우리의모델이었다. 이것은또한한국반체제지 도자들이—그 상당수가기독교인들이었다—하고 있는일이었고, 나는이 것이기독교인들이때로는행해야할일이라는걸알게되었다. 나는신앙을 다른누군가에게 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으 로 보기시작했다. 내가하는것처럼 다른사람들이 믿을것을주장하는 나 는누구 을까? 내가나의신앙을다른사람들과나누기를주저했던것은아 니지만, 내가믿는것을믿도록다른사람들을압박하거나설득하려하는일 을 지혜라고 보지는 않았다. 신앙은 그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것, 그들 자신의 확신에서 오는 믿음, 신의 은총에 대한 그들 자신의 체험에서 와야만 한다. 나아가, 만약 내가자신의 믿음에 따라산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다른사람들에게보여줄수 있는가장강력한개인적증거가될 것이었 다. 한국인들은분명히나에게그런증거들이었다. 사실, 한국기독교인들이 신앙속에닻을내리고 살아가는 것을지켜보면서, 매일나는“ 실천하는하 느님”을보고있었다. 게다가비신자들의행동속에서도하느님을목격했다. 그것은경이로운개안의체험이었다. 
용감한신앙공동체인갈릴리교회의일부로서받아들여진—심지어환
받는 — 것은 얼마나 겸허해지면서도 즐거운 일이었던가. 갈릴리교회의창 시자들 중 한 분인 스티븐 문(문동환) 목사에게서우리어린 아들이 세를 받았던것은얼마나멋진 일이었던가. 그날함께기뻐하면서, 우리친구들이 그 아이를사람과사람사이로건네면서춤추며노래했다. 심지어오늘날내 가“ 오자유”또는“ 우리승리하리라”를듣거나노래할때면, 나는언제나갈 릴리교회로되돌아가곤한다. 그곳에서“ 감사기도”를노래하거나다음주닥 칠 일들을 헤쳐나갈 힘을 모으면서, 우리는 매주 예배가 끝날 때마다 손을 잡고눈물을흘리며감동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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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내게, 참된신앙과진정한예배는사회적정의에 대한복음을포함 해야만 한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보다 더욱 심화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정사와권세”에 맞서발언하고, 권력기관이저지른잘못들을 인식하며,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책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악에저항하는 다른사람들을“ 지원”해야할 뿐만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그러한위험을기꺼이감수할수있어야한다. 이제나는어디에서든부당함 과 억압에대항하여, 허위와조작에대항하여, 착취와폭력에대항하여반드 시 발언해야만한다고느낀다. 그리고특히미국시민으로서보건대, 이런일 들을나의조국이지원하거나심지어자행하고있을때에는더욱그러하다. 그것이내가 미국에귀국할때따랐던, 그리고오늘날까지내 활동에동기를 부여하고있는바로그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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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아직도남아있는마음의상처
 페이 문(F ay e Moo n ) 

19 4 0 년대와50 년대에코네티컷주의길포드에서자라난중산층백인소녀 던나는내가얼마나많은것을모르고있는지몰랐다. 한국인과 결혼해서 한국에 갈 때까지 나는한국인들과 한국에 대해서 알 지못했다. 가족과친구들이독재와억압에저항하여싸우다감옥에갈 때까 지 나는독재정치와억압이무엇인지몰랐다. 외국에서그 향력을목격하 고서야 나는 미국의 외교 또는군사 정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가난, 마약, 또는 매춘이라는 올가미에 걸린 연약한사람들을 돕기 시작하고서야 나는 그것이무엇인지알게되었다. 직접몸으로체험하고서야나는문화적차이, 정체성 위기나 외로움과 우울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월요모 임의회원이되고서야다른사람들의우정과이해가나에게얼마나많이필 요했는지를알게되었다. 그리고민주주의와신학이풀뿌리에서부터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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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목격하고나서야, 그리고남편이유명한신학자이자한국의국회의 원이되는것을목격하고나서야, 비로소나는신학이나민주주의에대해알 게되었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나는 사회복지학을공부하여 석사학위를받는것이었고, 다른하나는성격이좋고성숙한남자를만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사명은 내가 하트포드 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한국에서 온 스티븐 문(문동환 목사)을 만나면서 완수되었다. 그는 기독교 교육학분야에서박사논문을쓰고있었다. 한참뒤에야나는스티브문이나 보다15 살연상이라는사실을 알았다. 그는확실히성숙한사람이었다. 그의 나이를알고는,“ 오, 세상에! 거의내 아버지뻘이군요!”라고생각했다. 19 3 6 년에내가태어났을 때, 그는 벌써고등학생이었다. 이사실을 알고망연자 실했으나때는이미너무늦었다. 나는벌써사랑에빠져있었다. 당시내가한국에대해알고있었던유일한사실은한국이아시아어디엔 가 있는 나라며 전쟁을 겪은 나라라는 정도 다. 내가 알던 것은 폭격당한 건물과 식량을 찾아서 배회하는 고아들을 보여준 화관 뉴스시간에 본 것 이었다. 스티븐은 피난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한국 노래를불러주면서 나에게구애를했지만, 나는한국의정치· 경제적인현실에대해아는것이 아무것도없었다. 그는일제의한국강점기(19 0 5 ~19 4 5 )에북한과국경을마 주하는만주에서태어났다. 그는한국전쟁당시가족이남쪽으로도망할때 까지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의 삶과 비교하면, 길포드에서 보낸 나의삶은온실속의꽃과같이편안한 것이었다. 나는그의심오함에 감동 받았고, 역경을극복하는그의의지를존경했으며, 조국에대한그의사랑을 느낄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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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논문을마친뒤, 스티븐은한국으로 돌아갔고, 2년이지난뒤 마침내 나는 그와결혼하기로 결심하 다. 나는19 6 1 년 12 월 10 일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한국에도착한지6일 만에결혼을했다. 우리가족중 아무도결혼식 에참석하지못했지만, 나는사랑하는남자와결혼하는것이너무행복했고, 결코다른생각을 해본 적이없었다. 모든서약은한국어로되어있었고, 나 는서약서의한 마디도이해하지못했다. 그래서어떤사람은내가실제로는 결혼하지않았다고말할수도있을지모르겠지만, 내가결혼서약서를이해 했든이해하지 못했든, 내 마음은 분명히 그러한 서약을 했다. 사실 스티븐 의 아내가되어가정을 꾸리는 것이내가한국으로간 단 하나의유일한이 유 다.
결혼한처음5년 동안네 명의아이들중 세 명이태어났다. 당시40 대 중 반이던스티븐이손자를볼때 너무늙지않도록, 우리는연년생으로아이를 낳았다. 한편으로나는가능한빨리한국인이되려고노력했다. 나는한국식 옷들만 입었고 철저히 한국음식만 먹었고, 한국여성들처럼공공장소에서도 아이들에게 젖을 먹 고서양인들과는 멀리했다. 우리는 스티븐이 교수로 있었던 서울 북부지역의 한국신학대학교 교정에서 살았다. 우리는 완전히 한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우리가살던방 세 칸짜리 집은방음이 되 지 않았고, 중앙난방이아니었으며, 냉장고, 난로, 세탁기도없었다. 그것은 마치캠핑여행이연장된것같았다.
나는대부분의시간을집에서보내면서아이들을보살피고한국어를배웠 다. 새로운언어를배우는것은내 장점이아니었지만, 한국문화에흠뻑젖 어 있었기때문에크게도움이되었다. 시댁식구중 유일하게어를할 줄 모르는 시어머니는 비록 내가말 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집에 오셔 서나에게이야기를하곤 하셨다. 다른누구보다내가한국어를배우는것을 도와준 사람이 바로 시어머니 다. 종종 시장에 가면, 사람들은 나를 멈춰 세우고는,“ 아주머니, 어떻게함경도 사투리를쓰세요?”라고말했다.“ 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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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에게배웠어요.”라고나는대답하곤했다.
결혼한지2년이될 무렵, 나는 너무나외롭다고느끼기시작했다. 스티븐 을 제외하고나에게는친구가없었다. 나는이웃사람들과사귀고싶었지만, 내 한국어실력이여전히변변치못해서한계가있었다. 너무 외로움을느껴 서 서양인몇 명을만나야겠다고생각했다. 추천받은선교사기도모임에나 가기로 결정했지만, 이 선교사들은 미국 문화만을 골라서 한국으로 가져와 심으려는것처럼보 다. 그들의집과가구와음식은그들이 미국의것과다 르지않았고, 나는그들과함께있는것이아주이상하게느껴졌다. 내삶과 그들의삶은하늘과땅만큼다른것같았다. 
나는훗날모든선교사들이그런식으로살지는않는다는것을알았지만, 그 당시에는선교사는모두그렇게산다는인상을받았다. 나의삶이그들의 삶보다훨씬 더 힘들었기때문에나는그들에 대해약간의분노조차느꼈다. 그러나한편으로약간의질투도느꼈다는것을인정해야만할 것이다. 나또 한 그들이미군부대매점에서얻는 버터, 치즈, 오렌지주스, 햄같은것들을 원했다. 나와는 너무다른삶을살고있는사람들과 친구가 되는것은힘들 었다. 나는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질문인“ 나는어디에 속하는가? 나는 한 국인인가미국인가?”라는질문과씨름하고있었다. 
스티븐이서울중심가에 있는어떤교회의 목사가되었을때, 나는“ 목사 사모님”이라는새로운역할을맡게되었다. 놀랍게도목사사모님역할은 내 성격에아주잘 맞는것 같았다. 나는다른사람들과사귀고, 활기찬대화를 위한분위기를조성하는것을좋아했다. 스티븐이목회방문을할 때면나도 동행하곤 하 다. 그는 아주진지한 반면에, 나는 다정하게 농담을 하는경 향이있었다. 우리는훌륭한짝을이루었다.
어느 날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고려대학교 앞을 지나가는데 소요사태가 일어나고있었다. 학생들이시위를하고있는것이었다. 학생들은일본과의 국교 정상화(19 6 5 )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일본의 한국 강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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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종결되었지만, 일본인들은 한국사람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 결코 사과를 한 적이 없었다. 학생들은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 없이는일본과의국교정상화를받아들이는것을거부했다. 시위는곧 모든 대학교로 번졌고, 박정희는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해 재빨리 군대를 파견했 다. 한국 군인들이 사용하는 트럭들에는 미국인과 한국인이 악수하는 그림 이그려져있었다. 그것은미국과한국간의 관계를상징적으로보여주는것 이지만, 이 경우에는 억압적인 박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미국이군부쿠데타로권력을잡았고아주억압적인박정 희 같은 사람을 지원하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런 생각은 그 당시 내가 정치에대해얼마나순진했는지를보여주는예이다.
이것에대응하여, 도시개발지역에서일하던장로교선교사허브화이트가 한-미 관계에 대해우려하고 있던다른선교사들 몇 사람과 상황을 논의했 다. 그들은 모임을만들기로결정했고, 최소한50 명 정도는 모을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자신들을“50 인 위원회”라고불 다. 이모임은 변화하는 한국의정치상황에서무슨일이일어나고있는지를서로나누기위해정기 적으로 만났다. 나는 이 선교사들이 기도모임에서 만났던 선교사들과 아주 다르다는것을알았다. 그들은관심사를봉사활동으로제한하지않았다. 그 들은민주주의를위한한국인의노력을지원하길원했다. 나는 훨씬더 자연 스럽게이 진보적인선교사들의모임에참여하 고, 한국에온 이래처음으 로 내 자신을 드러내 놓고 한국에 살고 있는 다른 미국인들과 의견을 나눌 수있다고느꼈다. 
내 깊고내 한문제들에대해서는스티븐외의다른사람과이야기를나 누는것이여전히 힘들었지만, 이 모임에서 내 마음은 새로워졌다. 나는이 새로운 친구들과는 공통 관심사와 심지어 개인적인 감정까지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내가정말누구인지에대해다시생각하기시작한것은바로 이때
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한국 사람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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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게되었다. 마침내나는이상적인생각을그만두고내 스스로를미국인 으로다시보기시작했다. “ 50 인위원회”가한일중한가지는미국이억압적인박정권을갈수록더 많이 지지하고 있는 데 대한 우리의 우려를 논의하기 위해 주한 미 대사와 만난것이었다. 대사는우리의 주의를한국의 급속한경제성장으로돌리고, 한국정부가심지어여성들을위해서까지많은새로운일자리를창출하는훌 륭한일을하고 있는가를 말하면서 문제를 피하려고 했다. 물론, 경제 발전 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새로운 일자리의 작업 조건은, 특히여성근로자들의경우는, 아주혹독했다. 대사는외형적성공을만들어 내기위해이용되는정치의이면을무시하고, 사물의표면만을보기를원하 는 것처럼보 다. 대사와의만남이실패로끝나고난 뒤로미국정부관리가 한국에올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직접만나서 이 나라에서 무슨일이벌어 지고있는가에대해총체적인설명을해주려고애썼다.
19 6 8 년 2월 박정희의취임식에참석하기위해허버트험프리부통령이온 다는소식을들었을때, 우리는그와만날계획을세웠다. 우리모두가너무 열심이어서누가가야하는가를 정하기위해제비뽑기를해야만했다. 남부 사투리가 심한 보수적인 남부 장로교인인 바바라 로스와 내가 제비를 뽑았 다. 바바라처럼보수적으로보이는사람이동행함으로써, 우리모임이 급진 적이라는인상을약간 지울수있을 것이라고생각했다. 우리는미국의부통 령을만난다는사실에긴장을했지만, 허브화이트는“ 험프리부통령도다른 사람들처럼아침에바지를입는다는걸기억하세요.”라면서훈수를두었다. 모임은잘 진행되었다. 우리가우려하는바를험프리부통령이흔쾌히듣는 것을보고우리는 깊은감동을 받았다. 그것이미국정책에 큰 향을 끼치 지못할지는모르지만, 적어도부통령은대사처럼우리를취급하지는않았다. 기회가생길때마다우리모임은 미국정부의다른관리들, 전세계에서온 교회지도자들, 국제인권단체에서온 대표자들을만났다. 우리는항상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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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한국에서 무슨 일이벌어지고 있는지를 설명했고 그들에게 한국의 민 주주의와인권운동을지원해줄것을요청했다.
허브화이트가19 6 0 년말한국을떠나고,“ 50 인위원회”모임은더산발적
이 되었다. 그 후 70 년대초반에, 갓 도착한 선교사들이 관심을 표명하면서 50 인 위원회는 다시 살아났고 바로그 모임이“ 월요모임”으로알려지게 되 었다. 월요모임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매주 장소를 바꿔 옮겨가면서 모
다. 나는이모임에서집처럼편안하게느꼈고많은 회원들과절친한친구가 되었다.
 
다시가정문제로돌아와서, 스티브와나는“ 기독교공동체”안에사는시 험을시작했다. 그것은모든것을공동으로나누는초기기독교실천에 대한 스티브의 교회에서 있었던 토론에서 비롯되었다. 교회의몇몇 젊은 사람들 이 이 생각에상당히관심을보 다. 1년 동안연구와토론을한 뒤, 우리가 운데 13 명이가진 것을공동으로 나누면서 공동체적으로함께 살아갈 것을 맹세했다. 우리는그공동체를“ 새벽의집”이라불 다. 대략같은 시기에, 스티브와나는한국의급속한산업화로인해수많은고 아들이생겨나고있다는사실을알게되었다. 농촌지역에서젊은여성들이 공장에서 일하려고 서울로 왔다. 그들은 가난했고, 교육을 받지못했고, 너 무도순진했다. 젊은 여자노동자가 임신을 하는일이드물지 않았으나, 이 런비참한환경에서장시간일하고 살면서아이를키울방법이없었다. 성서 는 기독교인들에게과부와 고아를 돌보도록 가르쳤고, 스티븐과 나는 만일 모든가정에서한 아이씩입양한다면, 고아문제는어느정도해결될것이라 고생각했다. 우리스스로가먼저시작해야한다고결론을지었고그래서우 리는경찰서에버려진어린소녀 혜를입양했고, 그애는우리집의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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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아이가되었다.
새벽의 집 공동체에서 산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천국과 같았다. 언니, 오 빠,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의역할을 하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가정에서살면서, 아이들은무럭무럭자랐다. 그것은우여곡절이있을수밖 에 없는용감한시험이었지만, 거의십여년 동안지속되었다. 주요회원한 사람의예기치못한이른죽음과매우개인적으로우리에게향을미친정 치적상황만없었다면, 그공동체는아마도더오래지속되었을것이었다.
 
결혼한 후 첫 십여년을아이들을기르는데 보내면서 나는집에있는엄 마의 역할에 대해 좌절하기 시작했고 나의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유용하 게 사용하길 원했다. 불행하게도 미국 여자가 한국에서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자리를찾기란쉽지않았다. 새로운월요모임 친구들중 한 명인린다존 스가미군부대내에있는사회복지사일자리에대해이야기를 했다. 나는즉 시 대답했다.“ 미쳤어요? 나더러미군부대에서일을하라고요?! ” 비록미국 이 왜한국전쟁에참가했고, 왜한국에계속주둔하고있는지는이해하지만, 나는“ 군부대”라는말만들어도강한분노를느꼈다. 나는미국이한국의군 사 독재정치를지지하고있다는 것을알았고, 미군이이를지지하는커다란 부분이라고보았다. 그때비무장지대에서한국의남쪽끝에이르는전국곳 곳에주둔하고있는미군은 4만명정도 다. (현재도거의그정도로많다.) 미군 부대에서 일자리를 찾지 않으면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나는 “ 전방” 근처서울북쪽지역에있는캠프케이시에있는일자리를알아보기 로 결심했다. 처음그부대에발을 들여놓았을때, 수백명의미국인들이전 형적인미국마을처럼보이는막사에살고있는것을보자불안감이엄습했 다. 군인들은키가컸고 번지르르하게차려입었지만, 많은군인들이소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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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거나가난한백인농부의자식들이었고, 이것은그들의첫 해외나들이 다.“ 어떻게내가이 사람들과사귈수 있을까?”의심스러웠다. 나는12 년 동안한국적인환경에살았고, 이것은확실히나에게는문화적인충격이었다. 사무실에서, 그들은나에게마약재활센터와알콜재활센터중 한 곳에서 일할사람을찾고있다고말했다. 만일그 일을맡으면, 나는미국생활기준 에 따라미화로봉급을 받게될 것이었다. 나는 월급이 상당히 후하고 건강 보험과 같은다른많은혜택이 있다는 것을알았다. 하지만나는마약또는 마약재활에대해서아무 것도몰랐다. 나는마리화나와해시시의차이도몰 랐다. 그러나내가공부한분야에서일하길너무나원했기때문에그 일자리 를 맡기로 결정했다. 나는 재활센터에 있는 유일한 전문 사회복지사 지만 애송이에불과했다. 이중독된 젊은이들과사귀는방법을전혀몰랐기때문 에, 나는비록정규교육을많이받지는못했지만마약문화에대해많이 알고 있는젊은직원에게의존해야했다. 나에게는그것이분명히실전교육이었 고, 군인들에게 도움이 될 정도로 알게 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점점더 많이배웠고, 그뒤 8년 동안나는용산미군본부의사회복지사업의 감독관이자치료책임자 다.
 
미군 부대의 다른 문제들이 내 관심을 끌었다. 나는 미군을 위해 청소와 세탁을하는 한국 사람들에 대한 대우를 보고 어안이벙벙해졌다. 그들을 “ 하우스보이”라고불 고, 그들은생쥐처럼 온순하게 행동했다. 나는이전 에는얌전한 한국인들을결코만난적이 없었다. 그러나이사람들은19 5 0 년 대 초 한국전쟁이시작된이래이 부대에서일해왔고, 자신들에게“ 적합한 역할”을 배워온 것으로보 다. 인종차별폐지와 시민권운동이전에 미국 에서흑인들이당한것과아주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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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했던 한 가지 일은 미군들에게 한국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선택의 날”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미군들을 서울중심가에 데리고 갔고, 사찰을 방문하게했고, 맛있는한국음식을맛보게하는등,“ 진정한”한국식생활을 두루경험하도록하 다. 창녀촌으로이끄는뚜쟁이가 없는(미군기지촌에 서 흔히일어나는일) 거리를걸어다니는것만도미군들에게는새로운경험 이었다. 기지촌에는경제적으로살아남기위해창녀가된한국여성들이가득했다. 그들은군인들이가하는심한정신적인학대에시달리고있었다. 한번은최 고 높은지위에있는군목중 한 명이나에게“ 군인들은매주사람들을죽이 는 혹독한훈련을받습니다. 주말에그들은부대를나가서스트레스를풀지 요.”라고말했다. 나는곧 매춘이미군생활의효과적인운 을위해배후에 서권장되고있다는것을알게되었다. 내가보기에는이것이큰문제 다.
 
내가 미국군인을 위해열심히 일하고 사회복지사로서내 직업을 즐기고 있는동안, 한국의정치상황은훨씬더 가열되고있었다. 19 7 2 년 공포된유 신헌법은 박정희에게 무제한적인 권력을주었다. 그리고19 7 4 년에 일련의 “ 긴급조치”가정부에대한비판을통제하기위해선포되기시작했다. 스티븐 과 그의동료들은 반정부 활동에 참여하여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연설 을 하기시작했다. 정부는만일교수들을해고하지않으면신학대학교를폐 쇄하겠다고협박했다. 대학교는순응했고, 스티븐은다른여러명의교수와 함께해직되었다.
이제직장이없는대학교수들은훨씬더 많은시간과정력을민주화운동 에 쏟을수 있었다. 스티븐은형인문익환목사와다른교수 몇명과 함께공 개적으로자신들의생각을말할수 있는교회를설립하기로결정했다.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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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이 교회를갈릴리교회라고불 다. 그들은또한국에만있는새로운 해방 신학을 발전시켰다.“ 일반 사람들”의 신학이라는 의미에서 이것을“ 민중신 학”이라고 불 다. 민중신학은 일반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췄고, 신학이론이아닌일반사람들을통해하나님이발견될것이라고말 했다.
 
스티븐, 문익환목사그리고 다른유명한 한국인몇 명이 19 7 6 년 했던일 들 중 하나가“ 3· 1구국선언”이라는제목의성명서의초안을작성한것이다. 3월 1일은한국인들에게는아주중요한날이다. 19 1 9 년 3월 1일, 한국인들은 자신을점령하고있던일본에비폭력시위로저항, 봉기하여한국의독립을 선언했다. 비록그때독립을달성하지는못했지만, 그때부터3월 1일은한국 의독립기념일로인식되었다. 19 7 6 년의“ 3· 1”선언은독재 통치로부터의독 립을선언하고국민을위한진정한민주주의를이룩하려는시도 다. 선언문에 서명한사람들은만일민주주의가이루어지지않는다면 민족의 장래는암담하다고굳게믿었다. 선언문은서울의천주교성당에서미사시 간을통해알려졌다. 그성명서는한국교회여성연합회회장인이우정여사 에의해결연하게낭독되었다. 놀랄 것도없이모든 서명자들은연행되었고, 미사에서장문의설교를했던스티븐을비롯해몇 명은재판을기다리는동 안독방에수감되었다. 박정권은3· 1구국선언이정부를전복시키려는시도 라고생각했다. 사실그것은양심선언이자신앙의증언이었다. 우리의 새벽의 집 공동체는 스티븐이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우리집은 행동을 계획하고 실천하기 위한 모임 장소가되었다. 그러나스티븐이연행되기바로전에우리공동체는우리가 농사를지으면서좀더 자급자족할수있도록서울에서북쪽으로세시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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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있는농촌지역으로이사를 갔다. 물론공동체는계속스티브를지지했 고 나도분명히그가참여하는것을 반대하지는않았지만, 그가이것때문에 감옥에가고내가구속자의아내가되리라고는꿈에도생각하지못했다. 그 는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고 이제는 내가유일하게 우리가족을 책임져야만 했다. 
뿐만아니라나는새벽공동체에서유일하게돈을버는회원이었다. 직장 을 다니는모든회원들은공동체기금을기부했지만, 우리가시골로이사했 을 때, 그들은농사를 짓고식량을재배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울에 있는 돈버는 일자리를 그만두어야만 했다. 우리의 새로운 시골집은 의정부 근처 캠프 케이시에 있는 내 직장에서는 사실 더 가까웠다. 운좋게도 내 봉급은 공동체 모두를 부양하기에 충분했다. 다른 회원들은 차례로 심리적으로 나 를 지원해주었고, 아버지역할을대신하면서우리아이들을돌봐주었다. 우 리 식사는아주간단했고생활비는아주저렴했다. 그리고나는필요한자금 을제공할수있어서행복했다. 심지어저축을할돈도남았다. 나는감옥에있는스티븐에게면회를가고싶었지만, 감옥까지는차로세 시간거리 고, 직장일때문에 주말에만 갈 수가있었다. 나는 주중에는 비 번을받을수없어, 주중에있었던 첫번째 면회를놓칠수밖에없었다. 나는 우리 큰 아들 창근이를 첫 면회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자식이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보는것이너무나큰 충격일것이라며다른구속자의아내는아이 들이아버지를면회하러가기위해학교를빠지게하지않았다. 반대로 나는 아이들이가능한자주 아버지를보는것이좋다고생각했다. 나는또한조국 을 위해그런 위험을 무릅쓴 것에 자식들이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도록 가 르치길원했다.
창근이는그 당시어린중학생이었고, 새벽공동체회원들중 한 명이아 버지를면회하도록그를감옥으로데려갔다. 처음에그는감옥분위기에압 도되었다. 감옥은얼마나황량하고끔찍한가. 그러나창근이는또한진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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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버지를자랑스럽게생각했다. 그는아버지에게줄몇켤레의두꺼운양 말과옷을가져갔으며, 옷과양말이난방이되지않는 감옥에서그를따뜻하 게해 주길희망했다. 면회를마치고창근이는가족구성원중누군가가감옥 에 있으면 사람들이 보통갖게될 부끄러운 감정을 전혀갖지않았다. 그는 아버지가하고있는일이 옳은것이라고믿었고, 그리고그런아버지의아들 인것이좋다고생각했다.
이시점에서월요모임은나에게 훨씬더중요하게되었다. 비록나는퇴근 후자주 늦은적은있지만, 한번도이모임을 빠지려고하지는않았다. 그들 은 적극적으로나를지원하면서, 따뜻하게맞이했고돌봐주었다. 그들과이 야기를하고어떻게지내는지를말하고나면, 나는완전히짐을벗은 느낌이 었다. 그래서아이들은자주불평했다.“ 엄마, 오늘도그월요모임에다시갈 건가요?” 그것은내가 집에 아주 늦게 온다는 것을 뜻했고, 늦게까지 일을 해야할경우에도나는 자주늦었다. 아이들은아버지를그리워했으며, 그래 서 내가가능한많이함께있기를원했다. 다행히도공동체 생활을 했기때 문에다른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있어줄 수 있었다. 공동체회원들중 한 사람인 최 선생님이 스티븐이 없는 동안에 아이들에게 훌륭한 아버지 역할 을 해 주었다. 아이들은그와함께있는것을좋아했고 어디에서나그를따 라다녔다.
“ 3· 1” 사건의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는, 다행히 토요일에 재판이 열려서 나도재판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우리 아내들이 법원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그 재판이한국에서“ 최초”로 일반인들에게공개되지않을것이라는 사실을알게되었다. 출입증은재판에 참석할가족들에게만발행되었다. 집 단적으로 우리는 출입증을 거부하기로 결정하고, 대신 언론과 다른 시민들 이 무슨일이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거리에서시위를하기로했다. 우리가침묵시위를벌이자수많은구경꾼들이모여들었고, 그것은외국언 론의특종기사가되었다. 재판후 몇 주 동안, 우리는거리에서계속항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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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벌 다. 우리는법정에 들어가는 것을거부했고, 열네 번 있었던 모든 공판에참석을거부했다.
우리는시위가보여주는시각적효과에대해아주창조적이어서, 매주새 로운생각들이떠오르곤했다. 처음에는재판이비 리에진행되고있고언 론의자유가 없다는 것을보여주기위해, 검은 색 테이프를 우리들 입에가 로 질러붙 다. 어떤주에는“ 민주주의구속자를석방하라.”라고쓴 접이식 부채를가져왔다. 우리는거리에나가서정해진시간에모든 사람들이볼 수 있도록 부채를 폈다. 처음에는 경찰이 머뭇거리며 우리 시위를 해산시키지 못했다. 육체적으로여성과접촉하는것이적절하지않아서, 그들은남자들 의시위를해산시키기위해하는것처럼우리를거칠게다루지못했다. 그러나우리를제압하기위해무언가를해야만했기에, 그들은우리의부 채들을 빼앗아 갔다. 우리는 경찰의 허를찌르고자 매주 다른일을벌 다. 어떤주에는민주주의회복에대한우리의메시지를쓴 보라색으로된 우산 을 펼쳐들었다. 이번에도경찰은우산에무엇이쓰여있는지를알자마자우 리의시위용품인우산을낚아채 갔지만, 우리는이미사람들이우리의요구 를볼수있도록시청근처의번화한거리로내려가있었다. 한국에서보라색은고통과승리의색깔이기때문에다음에우리는보라색 옷을만들어 입었다. 우리는 남편의 죄수번호를 윗 주머니에 수놓았다. 나 는 결코잊지못할스티븐의 번호인“ 69 0 7 ”을 내 옷에새겼다. 경찰이자꾸 시위도구들을빼앗아갔기때문에, 우리는우리옷 앞면에커다란십자가를 박음질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얇은트렌치 코트를 입었고 시위를 시작했 다. 처음에는경찰이아무것도눈치 채지못했으나, 코트를벗고우리옷 위 에 단단히박음질된 십자가를보고는그들의입이벌어졌다. 또한 번 그들 은 난처해진것이다. 그들이어떻게하겠는가? 손으로그것들을찢어내겠는 가?! 시청근처거리에서여름내내우리는두려움없이재판에항의하는시 위를벌 다. 당국은만일 우리를 연행하면,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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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될것임을알고있었던것이분명했다.
그런뒤 우리는또다른 아이디어를떠올렸다. 코바늘로숄을뜨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나는뜨개질하는데 재능이 없었지만, 나도그 계획을 지지했 다. 다시우리는한국적의미때문이기도하고그것이 기독교의사순절에쓰 이는색깔이기도했기때문에보라색을사용했다. 우연하게도그 색깔은또 한국의국화인무궁화꽃의색깔이었다. 숄은보라색, 라일락색그리고암청 색의세가지로만들어졌다. 숄의모양이“ 브이”자모양이었기때문에, 우리 는 그것을 빅토리숄이라고불 다. 숄은각각작은단위가4땀이었고아내 들은각 단위를뜨개질할때,“ 민주주의재건”을 의미하는4음절로된“ 민주-회-복”을 말하곤 하 다. 이 어귀는 그들의성가가되었고기도가 되었 다. 한숄을완성하는데 정확히만 땀이필요했다. 그들은남편들의곤경을 생각하면서 울기 보다는, 오히려 민주회복을 부르면서 뜨개질을 하는 동안 민주주의에대한염원을가지고더욱결의를다졌다.
처음에는그숄을 친구들에게주면서, 그들의기도와도움을요청했다. 뒤 에는선교사친구몇 명이이 운동을 지원할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그 숄을 한국과해외에서팔것을제안했다.
그계획이 커져서아내들은더많은 숄들을만들었다. 그들은다니는곳마 다뜨개실과뜨개바늘을가방안에 가지고다녔고, 시간이날때마다바늘을 꺼내뜨개질을 했다. 물론 많은뜨개실이 필요해서, 동대문근처큰 시장에 자주갔고, 숄을몇 개뜰 수있는충분한 뜨개실을샀으며뜨개실이똑같은 염료를사용한것임을확인했다. 아주많은숄을만들었고마침내그것이당 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숄들이 (그리고 그들 남편들의 이야기들이) 해 외로도나갔기때문에당국자들은숄을전혀좋아하지않았다. 정부“ 조사관 들”이 가게주인들이우리에게더이상보라색뜨개실을파는것을 막기위해 시장으로 파견되었으나, 판매상들은 조사관들이 지나갈 때 그 뜨개실을 감 추기만 했다. 그런 뒤 아내들이 더 많은실을사러오면판매여종업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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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실을숨긴장소에서꺼내와서흔쾌하게우리에게팔곤했다. 외국에있 는친구들조차우리에게보라색뜨개실을보내왔다. 숄 판매로 조성된 기금은 운동을 지원하거나 때로는 면회할 사람이 없는
구속자들의내복을사거나돌보는데사용되었다. 
나는뜨개질하는법은잘 몰랐지만상자를포장하는방법은알았다. 나는 숄을차례차례상자에포장하여, 내가미국군사우체국을이용할수 있다는 점을이용해 해외로 보냈다. 나는 또 각 숄마다승리의숄에대한이야기를 적어서, 그 이야기가 널리 공유되도록 했다. 우리“ 3· 1구국선언” 구속자들 의아내들은정부측에서는단연코가시같은존재 다. 
 
나는19 7 6 년 7월 인디애나주 퍼듀대학에서개최되는미국장로교회여성 총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미국에 초대를 받았다. 나는 수천 명의 여성들 앞에서긴장한채 민주주의를위한한국인의투쟁에대해이야기를했다. 나 는 보라색 옷 위에빅토리 숄을걸치고 그들에게 그 숄에대한이야기를 했 다. 내가연설을마쳤을때 청중들은조용해졌다. 나는“ 아마도이 여성분들 에게한국은단지아주먼 나라일뿐이고, 아마도인권과민주화투쟁에대한 주제가그들에게너무추상적인것”이라고생각했다. 
그러나내가잘못생각한것이었다. 그들은너무나감동했기때문에침묵 하고있었던것이다. 자신의이야기를하는평범한미국여자인나와자신들 을 동일시할 수가있었다. 미국정부가한국의독재정권을지원하고있다는 것을듣고충격을 받은까닭에, 그들은 빅토리 숄을샀고자기지역구 국회 의원과미국및 한국대통령에게보내는편지쓰기운동을시작했다. 그들은 나에게도 편지를 써서보냈고 우리는 그들이 보내는 편지가 넘쳐나는 것을 보면서격려를받았다. 그들의기도와편지는운동에참여한 나와다른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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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게커다란위안이되었다.
 
스티븐이감옥에있는동안 내삶은 힘들었다. 물론대의가고결했고나는 그의 용기있는 행동을 자랑스러워했지만, 마음한구석에서는 배신감을 느 꼈다. 나는그가나와4명의우리아이와새벽공동체를버렸다는것에화가 나서잠을이루지못하는 외로운많은밤들을보냈다. 하지만다른수감자들 의아내들과함께있는 것이커다란위로 고, 그들과함께행동에참여하는 것이나의분노와슬픔을건설적으로완화시키는방법이었다. 비록미국인이지만나는다른아내들과어떤차이도느끼지못했다. 우리 모두는똑같이어려운상황에직면해있었다. 남편들이언제돌아올지를몰 라서 우리는 우울했다. 우리의 집들이 서울 전역에 흩어져 있어서, 우리는 단지함께있기위해서서울중심가의기독교회관에있는한국기독교교회협 의회의인권위원회사무실로종종가곤하 다. 나는퇴근후에그들을 그곳 에서만났다. 우리는함께기도했고서로를위로했고, 평화적인시위에대한 생각들을제안했다. 비록우리남편들은감옥에있었지만, 우리들의분위기 는 농담과 웃음으로 가득했다.“ 과부만이 과부 마음을안다.”는 농담처럼, 우리는서로를이해했고함께있음으로써힘과용기가생겼다. 때때로 외국 기자가 우리를 인터뷰하기 위해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때 뭔가에대해크게웃고있곤했다. 즉시, 우리는표정을바꾸고더 심각해지 려고노력했다. 이 여성분들과공유한 상황을 통해, 나는 유머의 가치에 대 해감사하게되었고그것이어떻게사람이 역경을참을수있게 만드는지알 았다.
말할필요도 없이, 외신은 우리의 시위로 매우놀랐고, 우리 시위는 그들 에게멋진사진을제공했다. 외신기자들이재판을취재하기위해세계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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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왔다. 한번은부활절아침동틀무렵에우리는남편들에게찬송가를불 러주기위해감옥밖에서모 다. 남편들은노래소리를들을수는있었지만 처음에는 누가 그 노래를 부르는지 몰랐다. 그런 뒤 그 찬송가들이 우리가 갈릴리 교회에서 자주불 던 노래라는 것을깨달고는 드디어 누가그들에 게노래를부르고있는지를알게되었다.
 
다음날 내가 부대에 일을하러 도착하자 어떤 직원이 군대신문인『성조』
지의그날판을나에게보여주었다. 표지면에“ 박정희의적들”이라는 제목 과 함께감옥앞에서노래를부르고있는우리의큰 사진이실려있었다. 내 얼굴도사진에서선명하게보 다. 그리고내이름이바로 그 밑에인쇄되어 있었다. 곧 나는 서울에 있는 용산 미군 본부의 검찰관인 제인 핀클스타인 대령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아주 무뚝뚝하게“ 지금헬리콥터를 타고 당신 부대로날아가고있소, 그지역을떠나지마시오!”라고말했다. 그것이그가 말한전부 다.
이런 종류의 곤란에 빠져본 적이 없었던 나는 매우 두려웠다. 그 대령은 헬리콥터대신지프에서뛰어내려나를 만났다.“ 미군부대에서일하는미국 시민이자신이거주하는나라를‘ 적’으로모독하는것은불법이오. 세 가지 선택이있소: (1)한국을떠난다, (2)미군부대내의직장을그만둔다, (3)조용 히 한다.”라고차갑게말했다. 그리고는그는진창을걸어서지프로돌아가 서떠났다.
정말큰딜레마 다. 머리에는갖가지생각들이떠올랐다. 계속시위를하 면 추방을당할지도모른다. 한편으로그렇다면세계의다른사람들에게내 남편이취해온입장에대해이야기할수있을지도모른다. 나는해외에있는 교회에서한국의인권문제들을부각시킬수 있을지모른다. 이것이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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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는 힘들지도 모르지만,“ 3· 1구국선언” 사건을 한국밖으로 더 잘 알려 지게할지도모른다.
그리고 나서 나는 다른 결과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아이들을 생각해야만 했다. 새벽 공동체는 내 봉급에 의존하고있다. 내가직장을잃으면, 그들은어떻게될까? 그런뒤 내 생각은다른방향으로달렸다. 만일내가계속직장에남아있 고 다른아내들과함께시위하는것을그만둔다면, 그들에게사과를해야만 할것이다. 그들은내가겁쟁이고배신자라고생각할지도모른다. 나는어떻 게해야하나? 만일한국부인들과시위를하지않으면, 나는더이상그들과 같아질 수 없었다. 내가사실그들의 한국역사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스 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동시에, 내가겪었던것과 같은강도높은투쟁을 겪 지않은미국사람들과도역시동일시될수 없다고생각했다. 나는한국에살 던 초기에 내가가졌던 감정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두문화사이에 사는것 에서오는좌절감과외로움을떠올렸다. 나의일부는인권활동가로이루어 진주한미국인문화와동일시되었고, 다른일부는남편과그의형과같은한 국인권활동가와동일시되었다. 내가그어느쪽과 완전히일치된다는것은 불가능했다.
나는월요모임에서 분노를 분출했다. 그들이가끔씩 한국 인권 활동가들 은 무엇을생각하고, 느끼냐는질문을하면나는화가나곤했다. 이것은공 정한 질문이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한국인들을 대변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한번, 내가크고 분명하게주저없이 말한적이있다. 그것은월요모임이인 권 박해때문에한국에오지말라고요청하는편지를카터대통령에게보낸 바로뒤의일이었다. 감리교연합선교단에서파견된패트패터슨이미국으 로 돌아가는길에그 편지를외국으로몰래가져가려했는데공항에서발각 되었다.
문제의월요모임이열린그날밤은특히어둡고폭풍우가닥쳐오는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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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으나, 그것은 아마도회원들이 격렬한감정을 드러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월요모임 회원들은 편지가가로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화를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한국비자가 취소되거 나 추방당할지도모를가능성에 대해이야기를했다. 그것이그들개개인의 삶, 직무, 가족들에는무엇을뜻하게되는것인가? 이논의가계속되었고어 조는점점더격분되어갔다. 
갑자기, 더이상내 자신을자제할수 없었다.“ 당신들, 그지긋지긋한비 자라니!”하고그들에게소리를질 다.“ 내남편같은사람은 감옥에있고, 사람들이고문을당하고죽어가고있는데, 당신들이생각할수있는 것은지 긋지긋한비자야!”순간쥐 죽은듯이조용해졌다. 아무도말을하지않았다. 그런뒤 서서히얼음이녹기시작했고, 사람들은내가현실을상기시켜주어 서고맙다고했다.
 
내가 핀클스타인 대령의 경고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워싱턴 포스트』지 의존사르기자가인터뷰를하려고내게연락을해왔다. 그의기사( 19 7 6 년 8 월 6일자『워싱턴 포스트』지)는“ 페이 문의 불평등한 전쟁: 미육군, 구속된 한국기독교인의미국인아내에게압력을행사”라고제목이붙여졌다. 사르 기자는“ 코네티컷주 태생인페이문이맞이한삶의위기는명석한한국신 학자와 결혼한 15 년 전에 시작되었는가? 아니면 그녀에게‘ 이제내가 감옥 에 갈 차례가된 것 같소’라고남편이 말한불과몇 달 전에시작되었는가? 문 여사는최근다른구속자의아내들이토요일법정밖에서벌이는활발한 시위에서떨어져나왔다.... 자신의고용주인주한미군의압력때문에그만 두었다... 문여사는잠도못 자고체중이줄도록걱정에지친끝에, 결국상 부지시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에게는한국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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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것이가장 중요하다는결론을내렸다. 만일내가강제로한국을떠나게 된다면감옥에있는내 남편에게무슨일이일어날지걱정이되었다... 우리 는내가냉정해져야한다는것에동의했다.’ 그녀는당황스럽게한국인과미 국인의사이에서왔다갔다하는정체성위기때문에매우지쳐있었다.‘ 미국 인들은여기서는외부인들이다. 그러나나는연루되어있다. 나는내남편을 감옥에둔채여기를떠날수없기에, 내상황은다른미국인들과 다르다.’라 고그녀는설명했다.”
다른아내들이내 처지를이해했고나에게정말로안 됐다고하면서위로 했다. 그들과 함께있을때, 우리가 울고함께투쟁할 때, 나는새로운힘을 얻었다. 그러나재판이끝나고, 구속자들은전국각지에있는 여러감옥들로 분산, 수감되었고, 다른아내들을 만날기회도 점점사라지기 시작했다. 스 티븐은한반도의가장남단에있는항구도시인목포에있는교도소로보내 졌다. 면회는오직한달에한번밖에허용되지않았고, 목포까지는 7시간이 나걸렸다. 나는번잡한장례식이 끝난뒤속이 텅빈과부와같았다. 나는위 안을얻기위해부모님의집에갈수도없었다. 그리고내가아이들이있는집 으로가면, 아이들은배고픈아이처럼내사랑을갈구하며기다리고있었다. 나는스티븐과내가보통이상으로가까운부부라고생각했고, 내가그에 게과도하게의존했을가능성도크다. 이제나는모든 책임을혼자서떠안아 야만했다. 도망가고싶었지만갈 곳이없었다. 나는멀리살고있기때문에 월요모임에여러차례빠져야만했지만, 그모임은나에게는없어서는안될 지원 모임이었고 나는 회원들과 개인적으로 자주 만났다. 루이즈 모리스와 버치더스트가서울에서우리를찾아오곤했다. 나는그들과몇시간씩 이야 기하면서, 좌절을날려버리고 내 인생의중요한문제들을결정하려고노력 했다. 린다 존스도 최고의 조언자가 되었고, 수 라이스는 내가항상의지할 수 있는절친한친구 다. 몇 시간씩 기차를 혼자타고교도소까지길을찾 아 가는 것이 불안했기 때문에, 재판이 끝나고 목포 교도소에 스티브를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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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갈때 그녀는나와함께갔다. 나는수의친절함과후원을결코잊을수 없다.
남편을감옥에가둔박 정권과가는곳마다지겹도록따라다니는사복경 찰들을 나는싫어했다. 내가아침마다 출근할 때, 버스가 가는길에검문소 가 있었다. 한국헌병이버스에올라와서큰 소리로“ 이버스에미국여성분 이 타고있나요?”라고외치곤 했다. 다른 승객들의 눈이 나에게 쏠렸다. 내 가 버스에 탄 것을확인하자 마자, 그 날의임무를 완수했기때문에헌병은 버스에서내렸다. 내가밤에버스정류장에서집까지택스를타면, 헌병은나 를 확인하기 위해 택시를 세우고 내 얼굴에 전등을 비추곤 하 다. 깜깜한 택시안에서찌뿌린내 하얀얼굴이전등빛에비쳐지곤했다. 지금도나는내 가 받은모멸감을 결코잊을수가없다. 비록날마다벌어지는일이기는 하 지만, 나는 그것에 절대익숙해지지 않았고,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는 무섭 기도했다. 절대 끝날것 같지않은이런모든감시와 미행으로부터도망치 고 싶었다. 인생에서즐거운일이아무것도 없는것처럼보 다. 내가할 수 있는모든것은이상황을견뎌내는것뿐이었다.
그리고 내 직업에서 또 다른커다란혜택을발견했다. 더 이상다른부인 들과 함께시위를 할 수는없었으나, 내가 할 수 있는또 다른역할이 있었 다. 박 정권에 비판적인 외국 언론기사들은 한국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나는미군의군사우편체계를통해쉽고안전하게우편물을받고보 낼 수 있었다. 나는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일을바깥세상으로 보내기 위 해 이 커뮤니케이션통로를이용할수 있었다. 마찬가지로나는인권운동을 하는한국사람들이함께나눌수 있는외신기사들을 얻을수도있었다. 내 가 얻은정보중 일부는 한국독재자에 대한미국의 지원을 비판하고, 종교 지도자들을투옥시킨박정희를비판하거나 한국정부의다른탄압수단들을 폭로하는기사들이었다. 때때로나는한국내 인권유린에대한도날드프레 이저 의원(민주당, 미네소타 주)이 주도한 청문회와 같은 미의회 청문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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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록을 받았다. 그것은 또한한국에 대한 미국정부의 입장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방법이었고, 특히미국정부가어떻게박정희정권을지지하는지 를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한국의운동지도자들과 학생지도자들에게 이런 정보들은 매우 중요했다. 한국과의 관계에서 미국정부가 어떤 방향을 취하 는가를알려주는정보 다.
나는 또한 한국의 운동에 관한 정보를 미국과 다른 나라에 있는 친구들, 교회, 인권단체등에보내곤하 다. 예를들면, 나는월요모임이만든사실 보고서(부록을보시오)와노동자들과함께일했다는이유로처벌을 받은도 시산업선교회지도자에대한보고서등을친구들에게보냈다. 또연행된이 유와형기를 포함한 정치범들의 명단도 보냈다. 물론, 나는 이 통로를 통해 미국으로 빅토리 숄을여러상자보내기도 했다. 이 통신수단이 한국내외 의 운동을 위해 아주 유용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내가 그 일을 한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러나, 어느 날, 미군기지의 우체국 조사관이 나를 찾아왔다. 우송되어 온 일부 우편물이 비에 젖어 포장이 뜯겨져 있었다. 그는 나를 우체국으로 데려갔고, 나에게온우편물이세탁물처럼바닥에온통흩어져있었다. 거기 에는한국정부를비판하는자료들도포함되어있었다. 그는나에게“ 당신은 이런 종류의자료들을 보내고받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아시나요?”라고 물었다. 나는무슨말을해야 할지모르고긴장한 채서 있었다. 그리고나서 내가무슨일을하는지 모르는 그 조사관은,“ 당신, 선생님입니까?”라고물 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나는“ 예, 그렇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했 다.“ 그래요, 선생님이기때문에, 왜이런신문기사들을모으고있는지이해 가됩니다만, 앞으로는제발주의해주십시오.”
이 사건후, 나는“ 그래, 편리할때면, 넌거짓말할거야, 응?”하고생각했 다. 나는 은 하고 불법적인일들을하고있지만모두선한대의를 위한것 이었다. 그때부터나는매우주의를기울 고, 절대적으로필요하지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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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오해받지않도록애썼다.
 
19 7 7 년 12 월, 첫눈이온후아이들은보통때처럼크리스마스를기념하고 선물교환준비로야단법석이었다. 나는내심으로,“ 이번크리스마스에남편 의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희망이었다. 나는이 전에도바랜적이있지만실망만했을뿐이 다. 그러나 다시희망이 피어 오르는 한 나는희망에 매달렸다. 크리스마스 가 왔고스티브 없이지나갔다. 그리고나서 22 개월을 감옥에서, 그것도독 방에서 18 개월을보낸뒤, 스티브는19 7 7 년 12 월 31 일에풀려났다. 그는짐 들을 가지고 택시로 도착했고 머리는 짧게 깎은 채 다. 그는 아주 말랐고 얼굴은상했고거칠었다. 그리고매우늙어보 다. 그러나우리는황홀했다. 우리는힘껏껴안았고, 그리고공동체회원과함께아이들이달려와서모두 들웃으며그를껴안았다.
마침내 내가 사랑한, 삶이 중단되었던 사람이 내 곁으로 돌아왔다. 나는 기뻤고감사로충만했다. 비록서로적응하는 데 그리고 다시함께사는데 시간이걸렸지만, 나는삶이다시 정상으로돌아갈수 있을것이라고생각했 다. 그런 정치적상황한 가운데에서“ 정상적”이라는것이과연무엇일지는 정확히모르겠지만, 갑자기그리고예상밖으로우리사이에는긴장이표면 화되기시작했다. 스티브의구속기간동안에내가느낀분노가쉽게진정되 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혼자남겨져 있었다는 것과집안의 모든일을책임 져야만했다는것에화가났다.
감옥에서 스티브는“ 길 위에서의 기쁨”(19 7 8 년 크리스천 센츄리에서 출 간)이라칭하는새로운신학을이론화하고있었다. 그가이“ 기쁨”에대해더 많이말할수록나는더욱더 분노를 느꼈다. 나는 그가없는동안에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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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기쁨도경험하지못했다. 그가감옥에서경험했던일들은나에게는완 전히낯선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는내가경험했던것을이해하지못했고 우리는자주다퉜다.
밤에누워서이야기를하면 결국우리목소리는높아지곤 했다. 그러면아 이들이 걱정이 되어“ 엄마! 아빠! 또싸우시는 거예요? 시끄러워서잠을잘 수가없어요!”라고소리치곤했다. 우리는얼마 동안논쟁하고이야기하면서 우리의 감정과 서로의 차이를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속 적인대화와 노력으로, 심지어얼마간 상담까지 받은뒤, 우리는 서로의 경 험을더잘이해하고서로경험한것을인정할수가있었다. 
 
우리집 앞에주둔해있는몇 명의사복경찰을보고“ 오, 이런, 오늘우리 는 다시가택연금이 되었네.”라고나는말했다. 중요한 행사나 시위가 있을 때 혹은그런소문이돌 때, 어김없이우리는가택연금을당했다. 그것은창 살없는감옥과도같았다. 어느토요일, 스티브가석방된지 며칠뒤, 우리는 의사의진찰을받고스티브의혈압약을받기 위해병원에가려고했다. 우리 는 곧장되돌아올것을약속하고경찰에게외출허가를요청했다. 그것은아 무 소용없었고,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스티브는 집에 감금된 채 벌써사흘을보냈다.
바로그때, 장난스러운계획이머리에떠올랐다.“ 여보.”나는스티브에게 “ 경찰은우리집앞만지키고있으니까, 우리뒷문으로살짝빠져나가요.”라 고 말했다. 대부분의한국집들의돌담대신에, 우리집 뒷마당주위에는철 조망으로된울타리가있었다. 아이들이자기들이드나들수 있는구멍을울 타리에만들어두었다. 은 하게스티브와나는구멍을통해빠져나왔고숲 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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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있는큰언덕을넘어서마침내반대편에도달해소리쳐택시를잡았다. 아무런사고없이병원에도착해서약을 받았다. 그리고나서스티브는우 리가 사라졌다는 것을경찰이 알면 상관들에게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기시작했다. 그는서둘러집에돌아가자고했다. 그러나나는돌아가 려고하지않았다. 나는 완전히 이렇게 새로이 찾은자유를 누리길 원했다. 나는남편처럼경찰에대해동정을하지않았고솔직히그들이곤란을당하 길 원했다. 나는그의형인문익환 목사의집에가자고 제안했다. 그또한가 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거기 가면 어머님도 뵐 수 있을 거예요.”라고 나는 설득력 있게말했다. 우리는 다시출발했다. 문익환목사집 앞에경계하고 있는경찰들을피하기위해, 우리는다시언덕을넘어야만했고뒷문을통해 집으로 들어가려고했다. 불행히도, 문목사의 집 뒤편둘레에는 돌담이 있 었지만 우리는 용케돌담을 넘어마침내 집으로 들어갔다. 문익환목사, 그 의 아내박용길그리고시어머님이우리를보고는, 눈이접시처럼둥그래졌 다. 그들은 서둘러 우리를 안으로 데려갔고, 우리모두는 서로부둥켜 안고 웃으면서이야기를나누었다.
음식을함께나눠먹고 원하는만큼오랫동안이야기를하고, 스티븐과나 는 여유있게앞문으로걸어나왔다. 십여명의거칠어보이는사복경찰들이 즉시우리를붙잡아차에태워집으로데려왔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뒷창문으로밖을내다보니, 우리뒤뜰주변에는철 의 장막처럼견고한담장이세워져있었다. 예상대로이제정문뿐만아니라 뒷문에도다섯명 이상의사복경찰들이경비를서고있었다. 우리는“ 소잃 고 외양간고치기”라는속담을생각하면서킬킬거렸다. 뒤에상황이어려워 질때면언제나, 우리는이모험에 가득찬날을회상하고우리가어떻게울타 리에 있는 구멍을 통해버둥거리면서 도망쳤는지를 회상하면서 웃곤 했다. 우리는아직도그것에대해이야기하는것을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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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9 년이었다. 스티븐이감옥에서나온지2년이지났다. 그는인권운동에 대해전보다더 열성적이었고휠씬더 깊이관여하 다. 그해여름, 그는열 악한 작업조건과 저임금(수 라이스 편을 보시오)에 항의하는 YH 공장 여성 노동자들을돕고있었다. 이사건은눈덩이처럼커졌고, 혼란중에스티븐은 다시연행되었다. 3· 1 구국선언사건과는달리, 이번의연행은완전히예상 밖이었다. 그 누구도 연좌농성을 하면서 노동자들을 도왔다고 연행될 것이 라고는의심하지않았다. 교도소관계자들이내가가져다주는혈압약을그 에게주지않을것이기때문에나는스티브의고혈압이걱정되었다. 마침내 나는 교도관이 스티븐에게 혈압약을 줄 때까지 미대사관에 항의를 해야만 했다.
스티븐의첫 번째구속과달리이번에는내가연락을취할사람이아무도 없었다. 3· 1 구국선언 사건과 달리 이번에는 만나서 의논할 다른 부인들이 나 가족들이 없었다. 이번에는휠씬더 의기소침해졌다. 다시견딜수 없는 감정들이 나를 엄습해왔다. 예전에 우울증을 한 번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 에, 이번에는더욱무서웠다. 매일나는살얼음판을걷고있는것같았다.
그리고나서 19 7 9 년 10 월 26 일, 박정희대통령이암살되었다. 어떻게해서 든지나는스티브에게이 사실을알려야만했다. 우리의면회는철저하게감 시받고있었고, 정치 이야기는절대적으로금지되어있었다. 교도관이우리 대화를알아듣고기록할수 없었기때문에, 우리가어로이야기하는것도 허용되지않았다. 아이들과나는신문기사를복사해서, 어떤식으로든그것 을 남편에게 보여줄 생각을 했다. 면회실에서 나는 내 가방으로 손을 뻗어 기사제목인“ 박정희대통령암살”이라는신문기사제목을살짝보여주고손 가락을 총처럼 내 머리에 꽂았다. 스티븐은재빨리 그 의미를 파악했다. 박 정희암살 이후에 사면이 있을지 모르고 그래서 스티븐이 풀려나길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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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바랬지만, 거의두달이더지나고서야스티븐은풀려났다. 
19 8 0 년 봄에스티븐은 세계교회협의회의교육및 교회쇄신위원회에 참 석하려고유럽에갔다. 박정희는사라지고새로운중도파임시대통령이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고, 그때까지 많은 한국인들은 민주주의가 곧 회복될 것이라는 부푼 희망을 가졌다. 우리는 남쪽에 있는 도시 광주에서 곧 무슨 일이벌어질것이라고는전혀생각지못했다.
서울에서, 스티븐의형 문익환목사와많은다른민주교수들과학생들이 연행되었고, 그들중 누구도이 눈부시게푸르른5월에정말무슨일이벌어 지고있는지 전혀몰랐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전화를 하셔서 빨리남편과 연락을 취해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말도록 하라고 말 하셨다. 만일 돌아오 면, 그는 분명히 다시연행될 것이었다. 우리는광주에서 무슨일이벌어지 고 있다는소문을듣기시작했다. 만일한국군이소요를진압하는일에개입 했다면, 그들은반드시미군사령관의허락을받아야만한다는것을 나는알 고있었다. 그것이한국군대를전선에서빼낼수있는유일한방법이다. 광주에서무슨일이일어나고있는지알고있을것이라고생각하면서, 나 는 용산 미군기지에 있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그들의 유일한 대답은“ 지금 즉시한국을떠나는것이좋을것이며조만간다시 돌아올생각은하지마시 오. 이곳에서민주주의가회복되려면50 년은있어야할 걸요!” 다. 그대답 에서나는그들이광주에서무슨일이벌어지고있는지알고 있다는것과상 황이아주좋지않다는것을(한국군인들이수많은반정부시위자들을학살 했다는 것을우리는 뒤에알았다) 추측했다. 박정권보다 더 끔직한 무엇인 가가오고있다는불길한예감이들었다. 
최대한빨리비행기표를구매했고걱정이가득했으나그것을내색하지않 으려고애쓰면서, 네아이들과함께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안전하게세관 을 통과했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안전하다.”라고생각하며 안도의 한숨 을 쉬며자리에눌러앉았다. 바로그때,“ 자리를뜨지마세요. 자기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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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있어주십시오. 출발이지연될 것입니다. 여러분의양해를 바랍니다.” 라는안내방송이들려왔다. 비행기는한없이지체되는것만같았고, 나의심 장은 무겁게 뛰고 있었다. 관계자들이 항공기를 지연시키면서 세관을 통과 한 우리 가방들을 조사하거나, 내가 출국하도록 허용해도 되는지 상관들에 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나에게는 분명히 나 때문에 비행기가지연되는것같았다. 아이들은좌석에서꼼지락거리며,“ 왜이륙하 지 않는거예요?”라고소란을피웠다. 마침내, 약한 시간뒤에비행기는천 천히 활주로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단지 기계적인 문제로 이륙이 지연된 것이 틀림없었다. 점차 공포는 가라앉았고, 나는 다시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내가 망명객의 도피같은 방식으로 한국을떠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못했다. 창밖을내다보니단정히정돈된논두 이보 다. 약20 년 전 내가처음한국에도착했을때의모습들이차례로내게물결치듯려왔 다. 둥근 초가지붕들이 다채로운 슬라브 지붕으로 바뀌었고, 울퉁불퉁하던 논두 들이 이제는 반듯하게 자로 잘라낸 것처럼 보 다. 자동차들이 고속 도로양방향으로속력을 내고있었다. 바깥풍경들이20 여 년 동안변한것 처럼, 나또한처음이 나라에비행기를타고왔을때와비교하면상당히변 했다. 비행기창밖을 내다보았을때 뒤얽힌감정들이나를엄습해 왔다. 한 국 친구들이 한국에 대한 나의 사랑을 인정하여 사용했던 말인, 내“ 제2의 고향”을떠나는데대한감정이었다.
마침내비행기를타고몇 시간뒤에, 우리는코네티컷주의길포드에 있는 어머니의집에도착했다. 우리가광주대학살에대한소식을처음접한 것은 바로그때 다. 무슨일이벌어졌는지를듣고는아이들과나는함께울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라 군대에 의해 살육되었다. 아주 많은 용감한 사람들이거리에서살육되었다. 그리고나는미군이이 살육을직접지원하 지는않았을지라도, 그것을묵인했다는것을알았다. 민주주의회복에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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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꿈은산산이부서졌다.
 
약 한 달 뒤에나는미군법무관인 제임스A. 먼트 대령에게서아주이상 한 편지를 받았다. 그는 미 대사관의 제안으로 나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밝혔다. 그 편지를 읽고나는충격을 받았다.“ 한국정부당국자들은당신이 미군 군사우편체계를통해 유명한 북한 관리가 쓴 선동적인 자료를 입수했 으며, 그것을한국의반정부인사에게전달했다고생각하는것 같습니다. 한 국정부당국자들은한국정부가만일당신이한국에돌아오면적절한한국법 에 의거해 당신을 기소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어디서이런 터무니없는생각을떠올렸는지는알수가없었다. 내가아는한 분명히북한사람이 쓴 것은어떤것도받은적이없었으나, 정부관계자들 은 내가무슨말을하든관심도 없으리라는생각이 들었다. 그것은내 머리 위에걸린또하나의먹구름이었다.
 
우리가족은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광주학살 바로 뒤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군장성에서 대통령으로 둔갑한 전두환 의 독재정치 하에서 국민들은더욱가혹한탄압을몇 년 더 겪어야만 했다. 마침내정치적으로상황이다소 진정되는것 같았을때, 우리는돌아가는것 에 대해생각하기시작했다. 이때즈음전두환은더이상대통령이아니었고 상황은다소 느슨해지는것 같았다. 한국신학대학교도다시문을열었고, 대 학 행정담당자들은 당국에 의해교직원들이 더 이상 직장을 잃거나 괴롭힘 을 당하는그런위협을받지않는다고생각했다. 그들은스티브가교수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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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할것을제안했다. 그러나 내 경우, 먼트 대령에게서 온 위협적인 편지문제가 남아있었다. 게다가, 나는한국으로돌아가는일과관련하여또다른 걱정거리가있었다. 자식들이이제더 나이가들었고, 아이들대부분은학교졸업을마친상태
다. 이제한국에서내 역할이무엇이있을까? 단지뒤로물러나있어야하는 가? 나는분명히미군기지의내옛날일자리를다시찾을수없을것이었다. 내가할 무언가가있을까? 나는할 의미있는일이없다면한국으로돌아가 지않으리라고결심했다. 오래된나의꿈을실현하기위해미국장로교 선교 위원회에신청을했다. 한국의미군기지주변에살고 있는매춘여성들을상 담하고교육시키는센터를여는것이나의오랜꿈이었다. 미군들은레크레 이션센터, 의료시설, 교회, 매점, 화관등등, 필요한 모든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여성들또한미군들에게손쉽게제공되었다. 그러나매춘여성 들에게는아무시설도제공되지않았다. 사실, 그들에게제공된유일한것은 정기적인성병검사를위한의료시설뿐이었다.
이꿈은 하느님의소명처럼느껴졌다. 나는내가이일을 완벽하게수행할
수 있는사람이라는것을알았다. 장로교선교위원회는내 신청을받아들 고, 나는한국여성을위한선교사가되었다. 한국장로교회와협력하여, 우 리는“ 자매의집”이라는이름의센터를건립할수 있었다. 그센터의목적은 생계를버는수단때문에가족들과크게는사회로부터거절당한여성들에게 정신적인 가정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또한 그들에게 실질적인 기술 을제공하기도했다. 
매춘여성들의신뢰를얻는데는약간의시간이걸렸다. 우리가센터를열 었을때, 단지세 명의여성만이자기 발로찾아왔다. 그러나점차신뢰가쌓 이자, 직원들은 그 여성들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고, 우리 모임은 사랑의 공동체가되었다. 상담과정, 인식교육, 건강교실, 어수업, 요리강좌등 필 요한 모든 과정을 개설하 다. 우리는 미군들이 한국 음식과 문화를 더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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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록 하기위해, 특별한 한국음식을 차려그들을 초대했다. 심지어직업 을바꾸고자하는여성들을위해작은빵집도시작했다. 물론내가줄 수 있는것보다더 많은것을이 억압받는한국자매들로부 터 배웠다. 어느날우리는미군과 결혼한어떤한국 여성의집에있었다. 그 들에게는어린아이가있었고, 어공부를함께하면서, 나는그녀가아이를 등에업을작은포대기를샀다는것을알았다.“ 그포대기를얼마주고샀어 요?”라고내가물었다.“ 8천원인데요(미화8달러). ”라고그녀는답했다.“ 너 무 많이주었네요. 흥정을 했어야만 했는데.”라고내가 말했다.“ 재봉틀 위 에서온갖누비질을하는것이얼마나힘이드는지생각해보세요. 공장에서 일하는여성들을 생각해야 해요.”라고그녀는 대답했다. 나는할 말을잃었 다. 침대 하나, 작은 난방기구, 그리고라디오 한 대 밖에없는단칸방에 살 고 있었지만, 그녀는 더 가난한 사람들을 흔쾌히 도왔다. 나는 기독교적인 삶을사는법을안다고생각했으나, 진정하게기독교인으로서사는법을이 매춘여성에게서배우고있었다. 그녀는나에게현대판예수가되었다. 이것은사회의가장밑바닥에서, 멸시와거부를당하는여성들이나를가 르친여러방법들중 한가지 예에불과했다. 그들은나에게자비, 관용그리 고 사랑을가르쳤다. 내가“ 자매의집”에서보낸세월은여러측면에서대단 했고, 20 년이지난오늘날까지“ 자매의집”이 계속성공적으로활동하고있 는것이자랑스럽다.
 
비록지금은퇴임해서미국에다시살고 있지만, 나는가끔씩세계속에서 의 미국의역할과다른나라에대한미국의 향력에대해곰곰이생각해보 곤 한다. 미군과 관계가 있는여성들이 곤란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직접알 았을때, 나는이런관계가미군이주둔하고 있는세계방방곡곡 모든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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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일어나고 있다는것을깨달았다. 군인들에게는항상여자가제공되었고, 특히아주빈곤한나라에서는더욱 그랬다. 그여성들은미국남자와결혼해 미국이라불리는부유하고풍요로운나라에가서사는더 나은삶을바라고 있을것이다. 때로는이러한관계때문에미국에서자신을기다리고있는부 인과 이혼하는 군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안전을 기대하다가, 미군의목적은단지성적욕망을충족시키는것일뿐임을깨닫 고현지여성이망가지는경우가훨씬흔했다.
나는술집에서만난한국여성과데이트를하는미국군인에게만약결혼 할생각이없으면데이트를그만두라고충고한기억이난다. 그는그 여자와 결혼할의사가없다는것을분명히 했다고말했다. 나는그녀는희망을계속 붙잡고싶어할것이고, 그의행동을말들보다더신뢰할것이라고그에게경 고했다. 그가미국으로떠나기전날, 그의여자친구는자살을했다. 미국군인들은 다른문화와 민족에 대한 적절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지않 았다. 그들은 다른 민족을 이해하지 못한다. 전쟁과 살상의 공포를 별개로 하더라도, 미국에있는우리는미국이다른나라에끼치는피해를종종 깨닫 지 못한다. 고맙게도, 자매의집은한국에 있는일부여성들에게 희망의 빛 을제공했다. 그러나세계도처의여성들이깨어진관계로상처입고, 자신의 가족들과멀어지고, 다시술집으로돌아가정신병이나그보다더한일로고 통받는것을생각하면, 나는여전히마음이아프다.
 
그러나한국의민주주의를생각하면내 마음은더이상 아프지않다. 처음 김 삼, 그뒤 김대중이대통령에당선됨에따라 19 9 0 년대에공개적인자유 선거가치러지기시작했다. 스티븐은한국의국회의원이되어, 평민당이지 명한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한 번의 임기를 마쳤다. 새로운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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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어두웠던투쟁의밤들은끝이났다.
그러나 외국인으로서우리의 책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향후에도 우리 는 한반도의통일을위해일해야만한다. 모든한국인들의궁극적목적은평 화로운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것이고, 미국의 행위가 비극적인 분단을 초래 하는데에서큰역할을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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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그들이농장에서우리에게 결코가르쳐주지않았던것들
 진 매튜스(G ene Mat t h e ws ) 

“ 아니요, 한국에는어떤고문도존재하.. 지않습니다.”
- 19 7 5 년 국 BB C 텔레비전과의인터뷰에서전 한국외무부장관노신 이한말.‘ 그는자신이말하고있는것을믿고있었을지도모른다.’
“ 한국인들은아주놀랄정도로원기를잘회복합니다. 그들을감옥에쳐넣 고, 야구방망이로때릴수 있습니다. 하지만그들은원기를회복하여똑같은 일을할기회를엿볼것입니다.”
- 전주한미국대사윌리엄 F. 라이스틴이저자가 안내한 외국손님에 게한말.
정재룡이정확하게언제내 사무실에왔는가는기억이나지않는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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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크고, 마르고, 험하지만잘 생긴, 연배를 알 수 없는이 남성의외모에 충격을받았던것을기억한다. 한국사람들이어떤것을들고다니는데아주 유용하게이용하는천 조각인 흔히볼 수 있는보자기를그는손에들고있 었다. 
그는자신을대학교수이자당시한국교회여성연합회회장이었던내 친구 인 (작고한) 이우정 박사가 보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보자기를 풀어서 중앙 정보부가수 년 동안자행한고문을기록한 친필로쓴 두꺼운원고를보여주 었다. 한국에서는그런원고를 출판한다는것이불가능하기때문에, 미국에 서 번역출판하기 위해내가그 원고를 미국으로 몰래가져갈수 있을지 모 른다고이박사가제안했다고그는설명했다. 그런다음정재룡은나에게자 신의이야기를하기시작했다. 내가자란아이오와주의시골마을에서는생 각지도못한인간행동의양태들을나에게폭로하 다. 
 
아이오와주의시골마을에서자라면서, 젖소의젖을짜는법, 여러가지종 류의트랙터를운전하는법, 건초를만드는법, 비료주는법등과 농촌생활 의 다른모든즐거움들을나는어려서 배웠다. 내 어린시절허드렛일들 중 하나는닭을보살피고너무심한냄새가나는닭장을매주토요일마다청소 하는것이었다. 비록그때가 경제대공황기 지만, 그것은나에게는소중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학교선생님이라는일자리가있어서운이좋았고, 일년 중 아홉
달 밖에지급되지않은박봉을여름방학 동안여러가지부업으로보충하셨 다. 아버지의월급과커다란정원, 한무리의닭들 그리고귀여운돼지한 쌍 으로 우리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놀랄 정도로 일을 잘하는 중서부여인들중 한사람이었다. 어머니역시학교선생님이었지만형 셋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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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자라는동안일자리를그만두어야만했다. 어머니는쉬지않고요리하 고, 바느질하고, 설거지하고, 다림질하고, 통조림을만들고, 빵을굽고, 버터 를 만들고청소를하셨다. 어머니의대단한노력으로우리집안은얼마되지 않던수입으로견딜수있었고, 덕분에우리는배가고팠던적이없었다. 매주일요일우리는 시내로차를타고주일학교와교회에 갔다. 그것이민 주적인것은아니었다. 부모님이우리를19 3 7 년산포드차안에태우고교회 에 데려갔다. 주일학교에서우리는 시편 23 장과 십계명을 암송했고 청소년 부합창단에서‘ 신뢰와복종’을노래했고우리는항상“ 서로인자하게”대해 야 한다고 배웠고, 그것은여전히 아주훌륭한 조언이다. 우리는다른많은 것들을배웠으나결코고문에대해서는배운적이없다.
정 선생은12 년 동안감옥에있었으며, 감옥에있는동안, 당국은북한공 작원이라는 자백을 그에게 강요했다. 마지막에는그렇게 많은 고문을 했지 만 자백을 거부하는 것을보고는 분명히 무죄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포기했다. 
그러나그들이가했던고문은 정선생의육체를망가뜨려 놓았다. 한번은 겉옷을벗고나에게몽둥이(대사의야구방망이?) 에의한심한구타로갈비뼈 두개가함몰된곳을보여주었다. 그는이것으로인한폐질환과만성적인늑 막염으로 인한고통의 나날을 설명했다. 아주 눈에띄는상처와얼굴한 쪽 의 함몰은 또 다른 구타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숨쉬기도 어려워 보 고 자주말을멈추고곁눈질을했으며눈이뒤집혀지곤하 다. 내가졸라서물어보자, 그는 자신이 견뎠던 많은고문중 몇 가지가 그의 공동을손상시켰고, 만성적인감염이천천히뇌안으로파고들어가계속현 기증이나고호흡이가쁘다고말했다. 고문관들은옷을벗겨벌거벗은상태 로 하의날씨에바깥에세워놓고찬물을부으면서즐거워했다고말했다. 그들은또한가죽끈으로그의등을때리고고춧가루를섞은물에코를쳐박 는 등 독특한한국식고문을그에게행했다. 다른 때에는 호스를 이용해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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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물을강제로집어넣은뒤 부푼배 위에서뛰곤하 다. 한번은입을 벌려입술을뒤집어서어금니가 많이없는곳을보여주었다. 그는중앙정보 부 요원들이 녹슨펜치로아주천천히 물론마취도 하지않은채 하나씩 어 금니들을뽑았다고말했다. 그가설명한고문때문에나도몸이아팠다. 그들이가한가장끔직한고문을 설명해달라고요청하자, 고문의모든수 단 중 가장교활한것으로 음식과식수를사용했다고설명해나는깜짝놀랐 다. 어떤 때는 며칠동안 음식도 없이갇혀 있었다. 그는 음식이 없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음식 생각이 전혀 나지 않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깨어 있을때는음식생각밖에나지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들은그의배고픈 고 통이가장첨예할때를알았고고통이극에달했을때, 그들은그를어떤방 으로데려가 의자에 묶었다. 그런 다음음식이 차려진 식탁을 그 앞에가져 왔고그에게음식을바라보도록강요했다. 갑자기문이열렸고몇몇사람들 이 방으로들어와식탁에앉아음식을게걸스럽게먹기시작했다. 그는 배가 고파거의기절할뻔했다. 그들이식사를마치고방을떠났을때, 식탁은깨 끗이치워지고 더 많은음식이 들어왔다. 갑자기, 정선생을 풀어주고는 음 식을 먹게 했다. 식탁으로 달려가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그는 음식이 짜고식탁에마실것이없다는것을깨달을때까지식사에푹빠져있었다. 그리고나서그는다시 의자에묶 고한사람이다양한 종류의찬음료들 을 담은커다란쟁반을들고나타났다. 정선생은몇 시간동안이것을지켜 볼 것을강요당했다. 그는너무목이타서자신의 혀를깨물어피를마시려 고 했다. 교도관이낡은천으로혀를 묶어서그는혀를 깨물수없었다. 이것 이 12 년을통털어가장파괴에근접한순간이었다고정선생은설명했다. 몇 차례나는점심을함께하자고그를초대했으나그가단지앞에차려놓 은 음식을조금씩입질밖에하지않는다는것을알고는포기했다. 나는고문 때문에음식은자신의적이라고생각하게되었는지종종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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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오랫동안 신자들을이끌었던(최소한내게는그렇게 보 던) 노신사 를 대신하여젊은목사가우리마을감리교회에부임한것은내가고등학교 상급생시절이었다. 젊은레너드틴커목사는정의라는개념이기독교신앙 의중심에있다고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호와께서네게구하시는것이오 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네 하느님과 함께행하는 것이 라”는 미가서의 말 으로 그는 물었다. 일요일에 일하는 것, 술 마시는 것, 담배피우는것, 욕하는 것 등 내가피하도록 배운(그래서 천국에갈 수 있 는) 많은것들보다 휠씬더 중요한 것이기독교 신앙에 있다는 것이신선한 개념을나는열정적으로받아들 다. 그리고비록나를흥분시켰던젊은목 사가정선생이 경험했을불의에대해서는아무것도말하지않았지만, 정의 에대한관심의씨앗은확실하게심어졌다.
 
장로교선교사친구인존 서머빌이정선생에게생명을 구할수있을 진료 를주선해줄수 있었다. 마침내, 그의육신이어느정도치유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과 혼은 원히 고통받고 있었다. 비록 내가 그의 원고를 몰래 한국에서 가지고 나와 재미교포 사회에있는 친구들에게 성공리에 건넸지 만, 그들은원고가출판을하기에는너무연결이되지않고뒤죽박죽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원고가정신적으로불안한사람의 같다고말했다. 사실 이그랬다! 정선생은계속해서고문에사로잡히게되었고고문의역사에대 한 연구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이용되는 고문에 대해서도 집중 적인연구를시작했다. 스스로의힘으로그는고문이라는주제에대한두꺼 운 책을출판했다. 정선생은그 책을서머빌과나에게헌정했다. 그책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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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가해졌던 고문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고문에 대한 많은사진들이 있다. 정선생과그의가족이포즈를 취해이사진들을 찍었다. 그사진들중 하나에는정 선생은 묶여서누워있고, 어떤 남자가 망치로 그의얼굴을 치 려고 하고 있다. 그 망치는 아직까지 얼굴에 남아 있는 상처난 함몰자국을 정확히겨냥하고있다.
 
19 5 2 년에시작하여아이오와주의에임스에있는아이오와주립대학교에 서 보낸4년이란세월은아주중요한경험이었다. 일생동안친구가될 훌륭 한 교수들과의 만남과 새로운 지식의 습득은 내가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던것보다 훨씬더 넓은세계속으로 발을들여놓는것과같은경험을 나에게주었다. 에이미즈에있는합동감리교회와웨슬리재단또한나의 적인삶을넓혀주었다. 일요일마다미국에서가장뛰어난강론자중 한 사람 이라고<크리스천센츄리>지가거명한사무엘니콜스목사의설교에서나는 감을받았다. 돌이켜보면그의 설교는인종차별과냉전의먹구름에의해 찢겨진당시사회에서는심오하게예언적인것이었다. 부목사 딘 월터스와 웨슬리재단 이사장 메이 고티어는 나의 고향의 목사 가 심어준정의의씨앗에물을더 주고양분을준최상의정신적 안내자들이 었다. 이경험의결합을 통해서나는인생을선교사업에바치라는부름을받 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봉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의사, 심리학자, 그리고교회지도자들로구성된팀에의한 육체와정신과 혼의집중적인훈련에스스로를맡겨야만했다. 긴훈련과정은성서의이해, 언어능력향상, 다른문화에대한감수성을향상시키는것에집중되어있었 다. 훈련은 훌륭했지만 이 훈련기간 동안 어느 누구도 고문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언급하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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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고문이한국에만존재하는것은아니다. 그러나한국은우리가고 문에대해직접적인지식을얻은 곳이며, 고문이수많은우리의절친한친구 와 동료들에게어떤 향을미쳤는가를목격한나라이다. 결국나는고문을 자행하는사람들에대해궁금증이일기시작했다. 사람은인생의어떤순간 에고문관이되는것을선택하는것일까? 그런직업에적합하다는것을결정 하는적성검사가 있을까? 고문관은일과를 마치고 어떻게 긴장을 풀까? 고 문을흔쾌히수행하는사람들이어떤대가를치루더라도권력을유지하려는 독재자에게 얼마나 소중할 지 오직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고문은 무고한 사람들에게서허위 자백들을 받아내는 데 유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박정희의 중앙정보부가“ 인혁당” 사건에서한 것처럼 정부를 전복시킨다는 조작된공작들을날조하는데는유용한것임에틀림없다. 그러나아마도가 장 지독한일은한국에서고문이협박의수단으로사용되었다는것이다. 아 무 일도하지 않은사람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풀려났다. 정부는이것 이 정부에반대하려는생각을할지도모르는사람들에게다시한 번 생각하 게만들것이라고기대했던것이다.
월요모임에참가했던 사람들은 고문의편재성과정부가 너무도 태연하게 거리낌없이고문을자행한것을보고너무나놀랐다. 충격, 분노, 슬픔그리 고절망감은때로는견디기힘들 정도 다. 그러나그런감정들이자유와민 주주의를 위한한국의 투쟁에 우리 자신이 미약하게나마 참여하는 강한원 동력이되었다. 우리는소식을바깥에알리고, 세계의도덕적분노를유발하 고, 미국정부지도자들이개입하도록설득하려했다. 이런측면에서우리는 대단히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이 한국의 상황을 아는 것 같았고, 그것 때문에화가난 것 같았지만, 실망스럽게도그것을중단시킬조치를취할만 큼 관심이 크지는 않았다. 우리는 자료를 모으고, 진료를 주선하고, 고문을 당한피해자들과그들의가족에게위안을주는일에는약간 더 능숙했다. 하 지만그들의경험에도불구하고, 고문을견뎌낸우리친구들중많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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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하지않는신념, 이전보다더 강인해진용기, 그리고더 확고해진결단 력을가지게되었다.
19 9 9 년 10 월, 수백명의정치범들을고문한것으로기소된전직경감(고문 피해자들에게서“ 고문 기술자”라고 불려진) 이근안이 잠적한지 12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고 지방 검찰청에 자진출두했다. 수많은 피해자들 중에는 노 동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 활동가인 김근태라 불리는한 젊은이가 있었고, 그는19 8 7 년권위있는로버트 F. 케네디인권상을수상하게되었다. 그 뒤 20 0 5 년 2월 7일, 당시국회의삼선의원이자, 뒤에보건복지부장관 이 되고장래대통령후보로종종언급되는김근태는그의고문관인이근안 이 7년 형기를살고있는감옥을찾아갔다. 30 분간의 면회에서이근안이김 근태에게고개숙여인사하며“ 당신에게저지른내 죄를뼈저리게후회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당신의 용서를 빕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사과했다. 김근태는“ 오래전에당신을용서했습니다!”라고대답했다. 서로인자하게대하라.
 
솔직히내가월요모임을찾아다니다알게되었는지아니면월요모임이나 를 찾아냈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 대부분은 하느님이 우리를이끄는방향에대해준비되지않은, 신앙이깊은천주교와개신교선 교사들로 구성된 비범한 작은 모임에 참여하여 인생에서 가장 풍성하고 가 장 불안한 개입들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뿐이다. 나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 에 월요일은예배와휴식을조심스레준수한다음날로우리가들녘에서일 을 재개하는날이었다. 과거의어떤것도내게서울에서전투경찰과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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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피해자를돕도록준비시키지않았으며, 군사정부에의해처형당한무 고한사람들의미망인들을위로하도록준비시키지도않았다. 발전이라는명 목 하에한국사람들에게가해진불의에대한공동의관심때문에우리는거 의필연적으로함께모 던것으로나는생각한다.
선교사로 봉직할 것을신청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졌을 때, 나는 당시로부 터 6년 전 한국전쟁이발발할때까지존재하는지도몰랐던나라인한국으로 파견되었다. 한국에서나의첫 임무는정치적생각을할시간이나기회를전 혀 주지 않았다. 나는 한국의 시골에서 농부들과 함께 일했고, 구호사업을 했으며 어를 가르쳤다. 한국은 아주가난했고 여전히 전쟁상태에 있다고 말할수 있었다. 그 당시대통령은 이승만이었으며, 그가“ 기독교인”이기에 나는이나라가 안심할수 있다고추정할뿐이었다. 전쟁의황폐로부터나라 를 열심히재건하려는, 세계에서일인당국민소득이가장낮은축에속하는 나라에서, 나는경찰의잔인함과노동자에대한탄압을필연적인사소한불 평정도로도외시하는경향이있었다. 
내가봉사기간을마치고 19 5 9 년 갓 결혼한 사랑하는 아내인숙과 한국을 떠날때까지, 잔인성과탄압이야기들은점점강도높게누적되었다. 일리노 이 주 에반스턴에 있는 개럿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행정부의 부패한 정책에항의하는학생들이주도하는 봉기로19 6 0 년에이승만이하야했다는 소식을듣고놀라지않았다. 2년 뒤에우리가한국으로돌아왔을때, 이승만 의 하야에 이은아직 미숙한 민주주의가 군사쿠데타로 인해산산히 부서졌 다. 우리가도착했을때는계엄령이발효중이었다.
19 6 1 년 5월 16 일, 박정희가장면총리의중도파정부를전복시킨군사쿠 데타를 배경으로 갑자기, 그리고 극적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박정희는 즉시 국회를 해산시켰고, 예편하여 대통령선거에서 겨우 이긴 19 6 3 년까지 포고령을 통해 통치했다. 4년 뒤, 그는 좀 더 많은표차로 재선되어 헌법이 허용하는두번째임기를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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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는 민주적 자유에 대한소박한 바램이 계엄령의 발굽에 짓밟 히고있는한국으로돌아왔다. 동시에, 우리는경제적· 정치적발전의 놀라 운 증거들을목격했다. 19 6 2 년부터64 년까지한국어공부에바빴고, 그리고 나서는 부산에서 청년활동과 시골 교회를 발전시키는 일을 부여받았기 때 문에 나는 다소방관자적으로 지켜보았다. 박정희 개인의 거만함과 단호함 때문에나는 그를경계했지만, 한국국민들은이런자질때문에박정희를더 존경하는것처럼보 다. 그리고그는아주 눈에띄는경제발전을초래했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본과의 관계도 정상화되었다. 한국 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을 특징지었던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박정희 지배 하에 도로가 건설되고, 공장이 세워졌고, 거의 하룻밤 사이에 수세기동안 가난한농경사회 던한국은산업적인거인으로급속히발전하 기 시작했다. 그의경제정책은한국을해외무역에개방했고, 궁극적으로현 재의번 을가져온위대한산업혁명을시작하 다.
하지만 부산을떠나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울로돌아온 19 6 9 년 이 되어서야비로소나는경제적발전의엄청난대가를인식하기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착취는 만연했고, 비록 박정희가 군대를 제대한지 오래되었지 만, 이나라는여전히독재로운 되고있었다. 친한한국 친구들중몇 사람 이 분명하지않은이유로연행되었고, 그들중 많은사람들이잔인하게고문 당했다. 젊은 공장노동자들을 뻔뻔스럽게 착취해서 얻는 기업가들의 어마 어마한 수익에 대한 이야기들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기업가들 대다수가 유명한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뒤에는 분노가 치 어올랐다.
박 정권의 가혹함과 야만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제정책이 가져온 진정 한 경제발전은 만일그가 헌법이 허용하는 재선의 임기만 마치고 대통령을 끝냈다면 그에게 광을 안겨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과대망상증이 추악한머리를드러냈고, 19 7 1 년 그는삼선출마를허용하는헌법수정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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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행 통과시켰다.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보다 민주지향적인 김대중을 근소 한 표차로누르고대통령에당선되었다. 김대중은선거운동기간동안의문 의 교통사고로심각한부상을당했고, 훗날드디어한국의대통령에당선된 다. 많은사람들은이사고가그의 생명을위협한서투른시도 다고생각했
다. 박정희의선거승리는조작된것이라고일반적으로받아들이고있었다.
19 7 2 년 10 월 어느날 저녁, 차를타고월요모임에가는도중에우리는무 장한차량과 탱크와 군인들이 도시 전역에 운집해서 주요대학교 교정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우리는 그날 저녁 모임의 많은 시간을 무슨일이일어났는지를파악하려는데 보냈다. 우리가상황을완전히파악 하는데는며칠이 걸렸던 것 같다. 혹독한 통치하에 점차동요하고 있는나 라전역에박정희가갑자기계엄령을선포한 것이다. 마치자기자신의정부 에대한쿠데타를감행하는것과같았다.
전국을 확실하게 통제하에 두고, 박정희는 다시 국회를 해산하고 유신헌 법을(당시 어권 언론에서는 이를“ 개혁부흥”이라고 언급했다) 도입했다. 유신헌법은그를종신대통령직에임명했고, 그에게긴급조치를선포할특 권을부여했고, 그를감히비방하는사람누구나혹독하게처벌할수 있도록 했다. 효력이발생한신 헌법과이를이행할중앙정보부를이용하여, 7년 뒤 인 19 7 9 년 10 월 암살될때까지 박정희는권력을유지할수 있었다. 그의통 치는 가혹한 노동탄압, 모든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그리고 언론에 대한엄격한통제와모든독재자들에게필수적으로따라다니는 망상증으로 기억될것이다. 
박정권의주요 통치수단은국가보안법이었다. 겉으로는북쪽공산주의자 들의침투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19 4 8 년 12 월 1일 처음법제화된 이 후, 이법은계속해서한국을통치했던군사 독재자들의권력을강화하기위 해 수년에 걸쳐 반복적으로 개정되고 수정되었다. 박정희는 애매한 국가보 안법 제7조를 이용했다. 제7조에 따라“ 이적행위”를 한다고 판단되는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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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회원들을처벌할수있었으며, 이에더해가혹한긴급조치들을연달아발 표하여 수천명의 실제 혹은가상의 반대자들을 괴롭히고 위협하고 연행하 고고문하고투옥했다.
월요모임의 활동에 참가한 우리는 전체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했던 일의 중요성을 부풀려 자랑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또 개인적으 로 강도높은심문과어느 정도의탄압을경험했다는사실만으로, 우리가한 국정부의다양한기관들의특별한관심의대상이되었다는것을의미하지는 않는다. 당시한국을통치했던무자비한독재자들의 특징은, 모든다른독재 자들과마찬가지로, 과대망상증이었다. 그들은 그들에게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위협을 느꼈고, 자신의 망상증을 강화시키기 위해 광범위한기관과관료들을배치했다.
 
나는개인적으로최소한다섯개의정부기관들로부터의압력을경험했다. 최초이자가장큰 압력을가한기관은중앙정보부 다. 이전지전능한기관 은 미국의중앙정보국(CI A )을모델로삼고거기로부터훈련을받았으나, 독 재자들의 변덕에 대한실제 또는가상의 반대자들을 통제하고 위협하는 데 전적으로 이용되었다. 결국, 중앙정보부의 요원 한 명이 내게 배치되었다. 그는내가일하고있던곳에서가까운건물로 이사했고, 보통달콤쌉쌀한허 브 차인쌍화탕을 접대하면서적어도하루에 한 번씩나를만났다. 그의 접 근방식은 부분적으로 다른 정부기관들과 자기 기관에있는 다른 사람들의 협박을나에게“ 경고”함으로써우정을쌓아가는것처럼보 다. 놀랍게도, 우리의 관계는 수 년 동안 지속된 진정한 친구관계가 되었다. 그는나를감시하기 위해하루에 수 차례전화를 걸었고, 처음에는그 전화 들이성가셨지만결국전화와아침의쌍화탕한잔을 기다리고있는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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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발견했다. 마침내, 그는내 전화가도청되고있다는나의오랜의심을확 인해주었고, 내가친구들과전화로의논하기보다는직접만나서의논하는 편이낫겠다고몇차례조용히제안하기도했다.
 
19 7 9 년 박 대통령의암살이후, 내중앙정보부친구는 몇 달 동안사라졌 다. 그는어느날 아침갑자기마치아무일도없었다는듯이전화해서쌍화 탕 한 잔을대접하기위해나를밖으로 불러냈다. 우리는따뜻하게 서로인 사를나눴으나, 그는오랜부재기간동안어디에있었는지에대해아주 애매 하게말했다. 거의우연히, 나는그가손을 감추고있는것 같다는것을알아 차렸다. 예고없이, 나는탁자를가로질러손을 뻗어, 그의팔하나를 붙잡아 탁자이쪽의나에게로당겼다. 손톱마디위에들쑥날쑥하고탈색된상처가 있었다. 그를압박한끝에내가알아낸사실은, 박정희가중앙정보부부장에 의해암살되었기때문에, 그사건을조사하던계엄사관계자들이모든정보 부 직원들을 연행해서 그들이 대통령 암살 음모에 연루되었는지 조사하기 위해고문했다는것이었다. 그친구는모든손톱의색깔을변하게만들고상 처를낸전기고문을포함한여러 가지고문을견디어낸다음에야혐의를벗 어날수있었다.
19 9 7 년 한국에서은퇴한뒤, 나는그 요원의행방을알 수가없었다. 실수 하지마라. 그는잔인하게훈련받았고무자비한정부에스스로지원한요원 이었다. 그러나신기하게 우리는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가해를입지않기 를바라기때문에그의이름은밝히지않을것이다.
중앙정보부요원들은해외에서온 우편물을검사하기위해우체국에도배 치되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기술적으로 처리할 수 있음에도 불구 하고, 그들은내 우편물이배달되기전에이미개봉되어읽혔다는사실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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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알리기를원했다. 편지봉투를열고난 다음에대개편지자체가찢어지지 않고는열 수 없도록편지를봉투안쪽에두꺼운풀로다시봉해놓았다. 대 학을다닐때부터은퇴할때까지계속해서, 나는아버지와매주편지를서로 주고받아왔다. 나는아버지에게편지를써서아버지가보낸편지를한국중 앙정보부에서열어서읽어본다고이야기했다. 아버지가다음에보낸편지에 는겉봉투에거의읽기불가능한친필로다음과같은짧은 이있었다. 
친애하는 한국 정보부요원 여러분. 내 필체가 너무나 엉망이라서 죄송하 군요. 그것이당신들의임무를더욱어렵게한다는것을압니다. 제발제 사 과를받아주십시오. 여러분들은정말힘든일을하는군요. 즐거운하루되 세요.
중앙정보부에 보내는아버지의 짧은 은 그날부터 시작해서 마침내몇 달 뒤에내가우편물검사가끝났다고알려줄때까지계속되었다. 아버지는 항상정중했고검사요원들에게한국의날씨와그들의가족들에대한안부를 물었고, 자신의필체를읽어야만하는그들의운명을 동정했고, 계속그들에 게 좋은하루가 되도록 격려해 주었다. 마침내 하루에 한 번씩나를찾아오 는 내 친구중앙정보부요원이하루는자기와친구들이아버지에게서온 짧 은 을정말즐겼다고말했다.
전화도청은 너무흔한 일이어서 그 많은지루한 일상대화를 모두도청하 려면너무나많은요원들이투입되어야만했을것이다. 도청을한증거가자 주 우스꽝스러운방식으로 드러나곤 했다. 동료 선교사의 거주지와 관련된 문제로시청직원과전화를하면서, 나는이 문제를중앙정보부와의논했는 데 중앙정보부는이문제가잘해결되기를바라고있다고말했다. 내가 전화 를끊은즉시,“ 나의”중앙정보부요원이전화를걸었고내가이문제에대해 한국정보부의역할을언급한것에대해화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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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의촉각은광범위하게뻗어있었다. 미국에갈 계획이있던한 국 감리교회소속의아주절친한친구가미국교회에서강론할계획을잡아 줄 수 있는지를물었다. 나는내 고향아이오와주에있는몇몇교회들과연 락을해서그의방문계획을세웠다. 그가미국에머물고있는동안, 중앙정 보부요원이 나를찾아와서 왜 김 박사가아이오와 주에있는던커턴, 흄볼 트, 또 다른몇몇 도시의 교회들을 방문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심지 어그의강론내용까지알고있었다.
 
때로는경찰에서도요원을파견하여내 동태를확인하 다. 그는내 중앙 정보부친구만큼진지하게자신의임무를수행하는것같지 않았다. 그는꽤 미남이었는데형식적으로내 안부를확인하기위해간혹전화를했고, 그것 보다 더 드물게 나를 찾아왔다. 그는 어를 잘 했으며 대체적으로 어로 말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한 번은 자신의 현재 임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내게말했다. 그의임무가정확히뭐냐고물어보자, 그는“ 순찰”하는것이임 무라고설명했다. 그는자신과같이훌륭한사람에게“ 순찰”은 적합한일이 아니라고 했다. 나도 동의했다. 나를감시하는 것 또한 그의재능을 낭비하 는 것이다. 정부의많은고용인들은자신의재능들을단순히순찰을하면서 낭비하고있다는것을알았다고생각한다.
 
중앙정보부와경찰청과함께, 다양한지방경찰도우리의일거수일투족을 계속해서기록하고있었다. 작은물건들을사려고들 던가게를경찰이찾 아와내가 무엇을 샀으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지속적으로 조사를 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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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나는아주우연히 알게되었다. 한동안은정체를 알 수 없는경찰차가 우리집에서길건너편에있는시건설사무소에주차되어있었다. 내가차를 운전하고다니면, 바로 그 차가마찬가지로정체를 알 수 없는운전사와 정 체를알 수 없는승객을 태우고 따라오곤 하 다. 이것때문에우리아이들 은 창문밖으로 얼굴을 내 며 우리가 제임스 본드의 모험에 연루되었다고 생각하면서매우기뻐했다. 
정부가나를감시하는데얼마나 많은비용을치르고있는지궁금했다. 심 지어조금은망상증환자가되어, 그비용을정당화시키려고나에대해무언 가를조작하려한다고스스로의심해보기도하 다. 
 
성가신 외국인들을 지속적으로점검하는 가장 큰 책임을 맡고있던 기관 은 출입국관리사무소 다. 우리의한국체류는그들이좌우하고있었다. 그 들이 우리를 통제하는 데 사용한 수단으로는 조지 오 의 경우처럼 즉각적 인 추방에서부터 짐 시노트 신부의 경우처럼 거주허가가 만료되었을 때 거 주허가갱신을 거절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한국에서 선교사들을 강제로 추방하는 것은적어도 한국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알아서 처신하 라고경고를하려는목적이있었을것이다.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인혁당”의 주모자로 기소된 무고한 여덟 사람이 19 7 5 년에처형된 뒤, 우리모임은 미국이 이 사람들을 위해이 사건에 개입 하는것을분명히주저한것에항의하려고미국대사관앞에서시위를벌
다. 출입국 관리사무소는그날오후늦게우리를 소환해서 몇 시간동안심 문을했다.
이 사건에뒤이어그리고아마도 다른사건에우리가관여한것 때문에월 요모임회원 중 몇사람이 출입국관리사무소로부터아주짧은 거주허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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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을받았다. 예를들면, 우리중 일부는거주허가기간이보통일 년인데반 하여불과 3개월밖에받지못했다. 거주기간을연장하려면여러장으로된 신청서를작성하고거주허가기간만료이전에이것을사진과국세청확인증 을 첨부하여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제출해야만 했다. 날짜를 어기면 상당량 의벌금을내야했다.
이것이 나에게는 석 달마다 관련서류들을 모아서 신청서를 작성하고 사 진과국세청 확인증을 첨부하여 출입국 관리사무실에가야 한다는 것을의 미했다. 그리고나면예기치못한상황때문에내신청서를검토하는것이연 기될것이라는이야기를듣곤하 다. 내가다른석 달짜리거주허가증을받 으러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오라는 연락을 받기 전까지 한 달 또는 두 달이 지나가곤 하 다. 하지만 이미석 달의거주허가기간중 상당한 기간이 벌 써 지나버렸기때문에나는한두주일안에다시새로운거주허가연장신청 을 해야만 하 다. 이런현실이일상화되었던3년이라는 기간동안나는출 입국관리사무소직원들과아주친해지게되었다. 그들은내가그들의단골 손님(정기적인손님)이되었다고나와농담을하기시작했다.
 
내가 자주 접촉했던 다른 기관으로는 다양한 역할을 했던 문화공보부가 있다. 이거대한 기관은 현재두 개의기관으로 분화되었지만, 그당시에는 하나 고, 멋없는이름이암시했던것 이상의권력을휘둘렸다. 문화공보부 는 공격적이고열성적으로언론을엄격히통제하여정부의긍정적인이미지 를심어놓는책임뿐만아니라, 나라 전체의모든종교 단체들을통제하는임 무도맡고있었다. 종교단체의통제는 재산의 통제를 통해믿을수 없을정 도로 성공리에 이루어졌다. 한국의 법률에 따르면 종교단체가 소유한 모든 재산은 문화공보부에 등록해야만 했다. 매매, 기부, 재산양도, 또는 교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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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과같은건물의증축어느것도문화공보부의승인없이는이루어질수 없었다.
 
한국의교회들은나라자체의성장을반 하면서오랜기간의빈곤상태에 서 벗어나고있었다. 교회가성장하고번성해가면서더 크고웅장한교회건 물, 사무실과 기관들을 짓기를 갈망했다. 교회는 이런 식의 재산과 관련된 개발에대한승인은정부를비판하지않음으로써가능할뿐만아니라, 만일 교회가 공개적으로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면 종종 눈에띌 정도로 재산증식 이 빨라진다는것을재빨리알아차렸다. 일부교회지도자들은교회의사업 은 혼의구원이라고너무나확고히믿었고, 불의와싸우려는어떠한노력 도 교회 역바깥의일이라고생각했다. 그러나다른지도자들은독재정부 가 공산주의와 같은 반-기독교적인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고 확실히 믿으면서독재정부를성실하게옹호하 다.
하나의유명한사례가‘ 한국대학생선교회(C. C . C . )’이었다. 한국전쟁뒤에 한국전역에피난민이넘쳐났을때, 빈민들이실제로사용할수 있는대부분 의 공간을차지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시내중심가를 따라골판지, 합 판, 양철로된 조잡한작은판잣집을지었다. 더많은사람들이서울중심부 인 정동에있는옛 러시아대사관의터 주변으로옮겨왔다. 19 6 7 년 어느운 명적인날, 경찰부대가 경고도없이이지역에파견되었고거주자들을트럭 들에태워서 시골로 내쫓아 버렸다. 그들은자원도 없이, 집을 지을재료들 도 없이그리고그들의보잘것없는직장으로데려다 줄 운송수단도없이그 냥 생명을부지하라고황무지에내팽겨쳐졌다. 그당시그 근처에살던어떤 친구가, 이광경을약간멋지게윤색하여파도치는최루가스와언덕아래로 흘러내리는“ 피의강”이라고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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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제퇴거이후얼마지나지 않아,‘ 한국대학생선교회’가 매우비싼이 땅의등기소유주가되었다. 그위에그들은 훈련센터와임대사업으로돈을 벌 수 있는커다란 사무실건물을 세웠다.‘ 한국대학생선교회’에게그 땅이 기증되었을뿐만아니라건물의건축비도정부자금에서제공되었다는소문 이 무성했다. 이런소문들이사실이든사실이아니든분명한사실은그때부 터‘ 한국대학생선교회’는 종종있었던 친-정부“ 기독교” 시위와집회에 열 성적으로앞장섰다. 
비록 독재정권에 실제로 가담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정권이국민들에게 가한 잔혹한 탄압과 고문을 증오했을지라도, 많은 교회지도자들은 정부와 잘 지냈다. 그렇지않으면, 그들의 재산의 증식이 줄어들 것이라는 협박때 문에매번정부를 지지하는 모양을 취했다. 사실, 그들은친정부 집회와 기 도회에참여했고그들과관련된선교사들을제지하려고애썼다. 국내· 외에 서 정부의탄압을비판하는사람들은기독교교회를그런폭력의적절한잣 대로간주하는경향이있었기때문에, 정부는외견상의신뢰를받기위해적 어도기독교공동체의일부라도정부를지지해야한다고생각했다. 많은잠정적인비판자들은만일교회가정부를지지한다면, 그정부는분 명히 옳을것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반응했다. 이것이소름끼치는 무시무 시한 상호의존 체계를 낳았다. 어떤 기독교 단체들은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받았고, 그대가로정부는필요하면언제나정부에대한지지를 공개 적으로과시하기위하여이단체들을불러들일수있었다. 월요모임회원대부분은선교사들이었고, 한국의여러교회, 교파들과일 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국에서 우리의 임무들은 우리와 관련이 있는 한국교파들이부여했고, 그들은우리가문제를일으키지않도록하라는지 시를분명히받았다. 여러차례우리는교파의지도자와장로들앞에 소환되 어, 꾸지람을듣고, 위협받고, 용공주의자로낙인찍혔고,“ 그저당신들일이 나하고정치를잊어버리라.”는간청혹은명령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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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모두는어느정도순응하는것처럼보이는것에능숙하게되었으나, 교파의지도자들대부분이친구들이자존경하는동료들이었기때문에 그것 이 부담이었다. 우리는정부에게서피해를입는사람들을돕는것과 다른한 편으로 교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친구들의 안위를 위태롭게하는것 사 이의첨예한선을밟아야만했다.
우리동료선교사들 중 일부역시우리를비판했다. 그들은우리가 이 나 라의손님이라는것을상기시키면서, 그러므로적절하게처신해야만한다고 했다. 물론 우리는 손님이지만 우리의 주인들이 정부에게서 탄압받고 있다 고말하면서반박했다. 
정부의 탄압에 눈을 감는교회 지도자들의 실용적인 경향에 대해행복한 예외적인사례가있었다. 다양한주요교파들내의 수많은용기있는지도자 들과함께, 진보적인한국기독교장로회(PR OK )가(정부정책을훨씬더 지지 하는 것 같은 더 보수적인 장로교파와 달리) 인권을 위한 투쟁에 용기있게 나섰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목사들과 지도자들은 연행, 고문, 투옥이라는 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 한국기독학생 회총연맹의 지도자와 도시산업선교회의 지도자들 또한 용감하게 행동했으 며비슷한결과로고통받았다.
 
이 기간내내, 미국정부가박정희와그를계승한한국정부와긴 한동맹 관계에있는것이우리대부분에게는너무나분명했다. 북한은냉전국가들 중 가장 비열한 나라로 묘사되었고, 한국에계속해서 대규모의 미군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을정당화시키기 위해 모든노력을 기울 다. 한국의 독재에 맞선투쟁에서, 우리월요모임은미 대사관으로부터그들이기꺼이해줄수 있는것보다 더 많은지원을 바란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선교사라는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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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위치가 대사관에 접근하는 방법에 주의를 요했다. 예를 들면, 많은 미국 선교사 파견 단체들은 어떤식으로든 선교사들이 미국 정보국과 함께 일하 는것을금지하는정책들을가지고 있었다. 우리는그정책에동의했고정보 국의많은요원들이미대사관의주요보직에서일하고있다는것을알고있 었다.
하지만, 정의를위한투쟁에참여하고있는한국의친구들은우리가대사 관직원들의협력을얻어 억압적인체제에압력을가하라고했다. 이런측면 에서, 우리는어느정도성공적이었다. 우리가접촉한대부분의직원은대사 관정치부소속이었다. 대부분의경우, 우리는인권유린에대한우리의보고 서를그들이수긍한다는것을알았고, 우리가알려준정보가워싱턴에전달 된다는 것을확신했다. 많은 대사관 직원들은 개인적으로 독재통치에 대한 당혹스러움과 불만들을 표현했으나, 정치적 현실이독재정권과 협력할 수 밖에없다는것도분명하게보여주었다.
대사관 직원들의 태도는 미국대통령이 누구인가를 잘 반 하여 아주논 리적으로변하 다. 지미카터행정부시절에는, 한국정부가저지른인권유 린 사례를 찾아내고 보도하는 데 많은노력을 기울 다. 이기간동안에 우 리는그런인권 유린사례들을찾아내고우리가아는것을알리도록자주권 유받았다. 비록미국정부가그 기간동안독재의희생자들의실질적지원에 서는이룬바가사실상 거의없지만, 인권에 대해카터대통령이 자주진지 하게언급했다는사실은이투쟁에많은용기를주었다. 로널드레이건이카터의자리를대신하고조용한외교를공식적으로언급 하기시작하면서이런식의격려는갑작스럽게종지부를찍었다. 우리관점 에서보면이 조용한외교는현상태에대한 호전적인지지를우회적으로표 현한것에불과했다. 그것은또한고인이된 딕시워커대사의 아주불행한 “ 버릇없는녀석들”사건의무대를마련했다.
레이건대통령이19 8 1 년 워커를한국대사로임명했을때, 사우스캐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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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대학교의국제연구소와관계가있었던리처드(딕시) 워커는아시아연 구 전문가 다. 그는5년 동안그 지위에예롭게봉직했고, 한국사람들은 일반적으로그에게호감을가졌다. 그는능력이 있었고, 직업외교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직 대학교수로서, 외교적인미묘한 부분에는 지나치게 관 심이없었다. 그를알던우리대다수에게는이것이신선했다. 그러나 그는 재임기간 동안 한 가지 심각한 실수를 범했다. 미국 본국을 방문하는동안, 그는한국정부에반대하는재야인사들에대한질문을한 작 은 지역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워커 대사는, 아마도경계심을 풀고서, 한국의일부 사람들은이 재야인사들을버릇없는녀석들에불과하다고생각 한다고답했다.
하루 혹은 이틀이 지나지 않아 정부가 통제하는 한국 신문들은“ 주한 미 대사, 재야인사들 버릇없는 녀석들이라 일컫다”라는 커다란 머리기사를 실 었다. 이사건은반정부 인사들을화나게하고, 미국정부가반정부인사들을 확실하게헐뜯는것을즐긴다는두가지목적을달성했다. 나는그때까지점점꼴사납게되고있는상황에서워커대사를구출할방 법이있냐고묻는전화를대사관직원으로부터받았다. 나는아주진지한설 명과사과외에는어느것도만족스럽지못할것이라고그에게말했다. 조지H. W. 부시부통령의공식방한얼마뒤에사과할기회가있었다. 워 커 대사는부통령의방한을이용하여 상당수의반정부인사들과그들을지지 하는미국인몇 명을대사관저로아침식사초대를하 다. 그들중에는투옥 되고, 고문당하고, 해직된 많은 교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워커 대사 입장에서는 아주 과감하고 관대한행동이었다. 그리고 초대받은 한국인들 중에는 민주화 투쟁전선에 있었던 수많은 유명한 성직자와 다른지도자들 이 있었다. 나는 부시부통령 옆에자리를 잡았으며, 그는공항에서부터리 무진차를타고올 때, 거리에서줄을맞추어웃으면서성조기를 흔들던 학 교 어린이들을 언급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미국인들을 매우 사랑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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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없다는 아주 피상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어린이들 모두가 거기에 동원된것이고, 그환 은사실진실된것이 아니라는것을모르냐고비아냥 거리듯이말했다. 그는내말에당황해하는것같았다. 아침식사를마친뒤, 워커 대사는 아주진지하게 자신이 한 말에대해사 과하는가슴찡한 연설을했다. 비록자신이긴장이풀렸을 때한 말이고, 문 맥에서벗어나인용되었지만, 그는결코그런말들을하지말았어야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참석자들에게용서를 구했다. 그런 다음워커대사는 공 산주의또는그 노선을따르는 자들에맞서하나로 뭉친“ 우리의위대한국 민들”에 대한기억이별로나지않는몇 마디를한 부시부통령을소개했다. 그리고나서참석자들은질문을하거나의견을피력할수있었다. 여러가지 사건들로 투옥된 적이있었던 장로교 박형규 목사가 일어서서 워커대사의사과에감사를표했다. 그는모인사람들을대표해서사과를받 아들 고, 이로써“ 버릇없는녀석들”이라는언급이처음에자아낸분노를완 전히 가라앉혔다고 말했다. 그가 앉자 다른 사람이 일어났고, 부시를 향해 말을했다.“ 부통령각하”라고그는시작했으며,“ 지미카터가대통령이었을 때, 그는자주한국내 인권유린에대해말했습니다. 비록그는한국정부의 인권유린행위들을중단하는데 많은진척을이루지는못했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그의 연설로 힘을 얻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이 된 이후, 인권유린을비판하는연설은중지되었습니다. 우리는카터가대통령이었을 당시보다지금이더 나빠졌다고생각합니다. 부통령께서레이건대통령에게 그비판을재개하도록설득해줄수있습니까?”
눈을번쩍거리고뺨을 떨면서, 부시는자리에서벌떡일어났다. 그는질문 자에게손가락질을했고,“ 우리는베트남의인권에대해이야기했고이제베 트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란의 인권에 대해 말했고, 이제 이란은 존재하지않는다. 지금‘ 조용한외교’를 실천하고있고, 나는당신들에게왜 당신들이카터가대통령이었던때보다지금더 잘 살고있는가에대한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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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국가안전부의도날드그레그에게요청할것이요”라고쇳된콧소리로소 리질 다.
이 말속에서 드러난 어리석음, 방자함과오만함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통령에게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민주주의에 옹호하는 입장을 취 함으로써숱한희생을당한사람들에게연설을하고있었다. 대부분이투옥 되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상식이있는사람이라면그들의투쟁에대해전혀이해하지못하 는미래의미국대통령보다상황을훨씬더잘판단할수있었을것이다. 도날드 그레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발전에 대해 몇 마디를 중얼 거린다음자리에앉았고회동은끝났다. 사과와용서의분위기는완전히망 가졌다. 대사관저를 떠나면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교 학장이었으며, 훗날 상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찬국 박사는 부시 옆으로 다가가서“ 부통령각 하. 지미카터가대통령이었을때 나는직업이있었습니다. 레이건이대통령 인지금나는직업이없습니다”라고말했다.
몇 년 뒤 그레그자신이 한국대사로 임명되었을때, 그는부통령순방이 그의삶에서좋은순간들중하나는 아니었다고나에게말했다. 그레그는계 속한반도의인권과민주주의를위한유창한대변자가되었다.
 
한국민주화투쟁에대한월요모임이기여한중요한작은공헌이있다면, 그것은한국정부가뻔뻔하게인혁당과관련된여덟사람을처형한19 7 5 년 4 월의 그 끔찍한 일주일이다. 그 당시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결론나고 뒤에 역사에 의해증명된 것처럼, 그 사람들은 모두죄목에 대해 결백하다. 자신 을 구대통령으로만들려는계략의일부로서, 박정희는미 정보국을본따 고 미 정보국에 의해훈련받은 악명 높은한국중앙정보부에게 정부를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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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는용공주의자들의음모를조작하라고시켰다. 박정희독재정치가사악 한 공산주의자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모든 한국 시민들과세계에설득하기위해, 우리의많은친구들을비롯해수백명이연 행되고고문당하고날조된죄목에따라다양한형기의징역형을받았다. 이 조작된음모의정점에는비 스러운“ 인혁당”의 주동자로기소된여덟사람 이있었다.
이여덟 사람의부인들이요청한대로연합 감리교선교사조지오 박사 가 조사에 착수했고, 그여덟사람들이 실제음모에 가담한 것이아니라 알 수 없는이유로선택되었다는문서를작성하여발표했다. 실제로여덟사람 은서로모르는 사이 다. 그러나, 그들뿐만아니라부인들과아이들에대한 고문, 협박 그리고 압력을 통해, 중앙정보부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 증거” 는 그들이반역죄인임을밝히고사형을선고한제멋대로의재판으로그들을 끌고가는데이용되었다. 
선고가있고나서바로그 주일에발생한사건에월요모임은개입하지않 을 수가없었다. 우리들중 많은사람들에게이 주는생애에서 가장끔찍한 날들이되었다. 어느누구도정부가그사람들을실제로처형할정도로 뻔뻔 스러울것이라고는전혀생각지못했다. 
그주는 일요일아침을교회에서함께아주 충만되게시작했고, 한국상황 을 다큐멘터리로만들고 있는 국 BB C 방송국에서 온 제작자-감독-평론 가인바냐큐리와의점심으로이어졌다. 점심뒤에나는도시산업선교회관 련감리교목사들을만나려고어떤 집까지그녀와동행했다. 그날의나머지 시간들은순조로웠다.
월요일오후에는한국을방문중인국제사면위원회변호사와최근에석방 된사람을우리 집에서만나도록주선하는실현되지못할계획이있었다. 해 외에서많은사람들이한국을방문했기때문에정부는몹시신경을쓰고있 었다. BB C 직원들과두 명의국제사면위원회변호사들에다가, 뒤에미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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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시장이된 한국인권에열성적인도날드 프레이저하원의원이(미네 소타주, 민주당) 한국을방문하고있었다. 정부는최근에석방된모든정치 범들에게 서울을 떠나서 외곽지방(정부가 매춘부를 제공한 것으로 의심받 는 곳)에서안내가딸린여행을하거나아니면가택연금상태로서울에남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내가 국제사면위원회 변호사에게 소개시키 려 했던최근에석방된내 친구는자기집 앞경비를 속일수있을 것이라믿 으면서가택연금 하에 서울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은불가능 했다.
그날 밤 월요모임 회동이 있었다. 그날 저녁 많은 시간을 BB C와카메라 인터뷰를하는데보냈다. 우리는솔직하게자신들을표현했고, BBC 사람들 이 떠나고 남은 시간에는 김관석 목사, 조승혁 목사 그리고 박형규 목사를 비롯해 최근에 연행된 교회지도자들에 대해 논의했다. 그들은 독일교회로 부터 온 기금을 착복하거나 횡령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독일에본부를 둔‘ 세계에빵을(Bread for the Wor l d )’이라는 단체가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에 기금을 보냈다. 이 단체는 서면으로 그리고 재판을 감시하기 위해 보낸 대표를통해서 한국법정에 자기들이 보낸기금은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의도대로사용했다고말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교회지도자들은유죄판 결을받아감옥행을선고받았다.
그리고그 월요모임회동에서우리는서로에게“ 인혁당”과 다른사건들에 대한대법원의판결이내일있다는것을상기시켰다. 우리는가능한많은사 람들이재판에참관하도록 결정했다. 대법원에서인혁당에사형선고를내릴 것 같지는않아보 지만, 사형이선고될만일의경우에대비해서여덟사람 에 대한사면을 요청하는 박 대통령에게보낼특별편지에 서명을 했다. 그 러나, 그순간에우리중 누구도정부가감히 그렇게까지하리라고는생각지 못했다.
화요일 아침,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법원에 모 다. 재판이 시작되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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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두명의연세대학교학생들을제외하고모든판결이내려졌다는말이나 왔을때, 나는BB C 직원들을 돕느라 밖에서 분주했다. 나는BB C 제작자인 바냐큐리의팔을잡았고 우리는용케경비를지나서건물로들어갈수 있었 다. 잠시사복경찰이제지했지만, 우리는법정이있는 3층으로올라갔다. 우 리는법정에서흘러나오는절규와절망의고통스러운소리를들을수 있었 다. 우리는법정안으로들어갔고, 단테가생각했을것 같은바로그 장면을 목도했다. 인혁당부인들과다른여성들이비명을지르고, 신음을하고울부 짖으면서 충격과 히스테리에 휩싸여 법정 의자에가로질러 드러누워 있었 다. 몇명은충격상태에있는것처럼보 다. 몇몇선교사들과기자들이, 근 엄한판사들이 여덟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다른30 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 하는데 불과5분 밖에걸리지않았다고우리에게설명해주었다. 그때, 참석 했던사람들중몇 명이“ 조작이다, 불의다”라고소리를 지르면서벌떡일어 났으나 판사들은 그들을 외면하면서 꽂꽂하게 법정을 나갔다. 피고들도 그 들의변호사들도재판과정중에법정에출두하지않았다. 여성들이저절로 법정에서연좌시위를벌 다. 바냐의요구에, 나는BB C 카메라직원을데리러법정에서 나왔다. 그러나 카메라맨을 데리고왔을 때, 문 앞에는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 다. 우리는오후1시에안에남아있던모든사람이강제로옆문으로쫓겨났 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경찰을 노려보면서 법원 밖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법원 옆문으로 돌아서달려갔지만 전투경찰에 의해 작은 언덕 꼭대기에서 제지당했다. 언덕 아래에서 부인들이 버스에 태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조용히가지않았다. 버스창문을깨고절망과 분노의슬픈울부짖음 이 하늘을뒤덮었다. 우리도소리를질러대답했지만그들을위로할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지 못했다. 여자들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는 버스가 마침내출발했다. 우리는나중에그들이법원에서좀 떨어진곳에서풀려났 다는것을알았다. 법정안으로용케들어갔던월요모임회원들은들려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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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끌려나왔고뒷문밖으로내팽겨쳐쫓겨났다.
수요일아침, 불가능한일의전모를파헤치려고애쓰며사무실에있을때 전화가울렸다. 우홍선의12 살 먹은딸이아버지가처형된것이사실인지를 몹시흥분된상태로묻는전화를했다. 나는겨우충격에서벗어나한국법은 최종사형선고뒤 24 시간이내에집행을허용하지않기때문에그것은단지 소문에불과할것이라고애써설명했다. 나는그애에게알아보고다시전화 를 하겠다고말했다. 나는기독교회관으로달려가여덟사람 모두그날아침 일찍실제로교수형에처해졌다는것을알게되었다. 부인들이“ 남편들을면 회”하기 위해 그날 아침 일찍교도소에 갔다가 처형 소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들었다. 그들은 라디오를 통해 남편들이 모두 처형되었다는 소식을들을때까지교도소정문밖에있었다.
우리는 이우정의 사무실에서 우홍선의 어린 딸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소 식을확인시켜 주었다. 내 인생에서 어느것도, 무고한 아버지가 죽음을 당 했으며다시는그를만날수없을 것이라고확인하는전화를어린딸에게걸 도록나를준비시키지않았다. 그애와나모두가전화상으로무너져내렸다. 그날오후 2시경우리는부인들이여전히교도소에있으며남편들의시신 을 확인하기 위해 교도소 안으로 불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몇 사람이 택시를 잡아타고 서둘러 교도소로 갔다. 교도소 정문은 전투경찰이 에워싸고있었으며, 입구와길 건너편에는사람들이다니지못하게하고있 었다. 메리놀의짐시노트신부와 내가전투경찰을뚫고교도소정문까지걸 어갔다. 갑자기나는모자쓰는것을 좋아해서애칭으로“ 모자쓰는여인”으 로 불리는용기있는전여사를발견했다. 그녀는흥분하여울면서가벼운기 둥에기댄채 길 건너편에 서 있었다. 그녀의남편은사형선고를 받은사람 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완전히 함께하고있었다. 길건너편으로되돌아가서우리는서로부둥켜안고함께 울었다. 그런뒤, 그녀는나를교도소바로건너편에있는2층다방으로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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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 이수병의 아내를 비롯해 많은 가족들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런데다른인혁당부인들은교도소에들어갈수 있었지만 교도소경비들이그녀는들여보내지않는다고, 그녀가나에게말했다. 나는 반은끌고반은인도하여그녀를계단아래로데려가서길을건너진압경찰 을 통과하여정문경비에게다가갔다. 그리고나는그녀를안으로들어가게 하라고강력하게요구했다. 수많은말과몸짓과언성이높아진후에그녀는 비로소교도소안으로들어갔다. 
메리놀 수녀원에서 파견한 몇 명의선교사들과 함께 시노트 신부와 나는 건물 앞 가게에 진을 쳤다. 남편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투쟁에 참여하면서, 지난해 동안우리는이 여인들과매우가까워졌다. 우리는여러차례그들 과함께울었고 심지어는예기치못한기쁨의순간에는그들과함께웃었다. 그동안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결코 버리 지않았다. 이제그들은극도로무기력하고절망스러운지경에이르 다. 마침내 부인들 대부분이 완전히 충격을 받은상태로 차례차례 교도소 밖 으로나왔다. 교도소 정문을 나와서 그들은 우리팔에쓰러졌다. 우리는그 들을위로하고, 그들과함께울었다. 그들이 세상에 분노를 표출했을 때 우 리는그들을지지했다. 대통령을저주하고, 버스에함께타고 그들을조롱하 는 전투경찰들을 저주했을 때,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까지 저주했을 때에도, 우리는그들을부둥켜안았다. 우리는완전히무력감을느꼈다. 그때, 시노트신부가정문을통과해나아가교도소안에서경비들에게“ 설 교” 하며서 있었다. 사복경찰이와서제발시노트 신부가 떠나게 해달라고 나에게간청했다. 나는거절했고, 그들은마침내시노트신부를들어서 끌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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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사건은시간속에거의얼어붙은것 같았다. 그일들을회고할때, 나는기성교회에서 행한모든설교의 맥락안에서 그 일을생각하곤 한다. 나는그 설교에 잘못된 점이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 자신도 그러한 설 교를많이해왔다. 그러나갑자기내 교회가아무설교도해 주지않은상황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때는그 부인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어떤말도없었 다. 그래서 우리는 부인들을 안고함께울었다. 교회는때때로 그런상황에 처하는편이 좋다는생각이든다. 불의가가슴을태워구멍을내버렸기때문 에예수그리스도의이름으로할수있는일은우는것밖에없는상황말이다. 오후가 되어부인들은 점점기력이 쇠해졌다. 그들중 두 명이완전히 탈 진해 우리는 택시를 잡아 그들을 병원에 데려가야 했다. 한 사람은 거리로 뛰쳐나가달려오는차에자신을내던졌다. 경찰의호송하에, 친지들이그녀 를 근처 여관으로 데려갔다. 그때 우홍선, 이수병 그리고 김 원의 시신은 인도되었으나다른 사람들의 시신은 다음 날 아침까지 인도되지 않을 것임 을알았다. 
 
그 날 6시 30 분경, 부인들에게모든것을설명하고 집으로 보낸후, 우리 (몇명의한국신부들, 가벼운형을선고를받은몇사람의부인들과나)는함 께 기도하고위로하기위해우홍선의집으로갔다. 집에 도착하자사복경찰 이 가족들만들어갈수 있다면서우리를제지했다. 심한고함, 험한저주, 간 곡한부탁과몸짓에마침내 경찰들은당황해서뒤로물러섰고, 우리는집으 로 들어갔다. 그때가마침내 내가산산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그 주에 엄청나게울었지만나는억제하지못하고울먹거리기시작했다. 많은친척들 과 친구들, 그리고강 여사와딸들이시신과함께방에있었다. 물론거의두 서가없었으나, 그녀는계속해서말했고나는상황을파악할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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짖누르는슬픔과함께, 몇달 전 중앙정보부가그녀에게서받아낸“ 자백” 이 남편의 죽음을 가져왔다고믿었기 때문에 그녀는 심한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남편은아주미남이었다. 그녀는은근히남편을아주자랑스 러워했기때문에그녀가새로사귄많은친구들에게남편을자랑할날을기 대하고있었다. 그녀는마지막으로딸들이아빠를보도록볼품없는관을열 었고 고문과 교수형으로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남편을 발견했다. 다시 나는 하염없이눈물만흘렸다. 나는그날밤잠을이루지못했다. 가족의요청이있을때를대비해김 추기경은명동성당지하에시신을보 관할수있도록 조치를취했다. 만일가족이필요로하거나바란다면성당과 성당의묘지를제공하겠다고하 다. 분명히우홍선, 김 원, 이수병은가족 묘지에묻을계획이었다. 명동성당납골당은이미시신들로가득해서, 인권 투쟁에오랫동안몸담고있는함세웅신부가신부로봉직하고있는서울북 서쪽의성당에남은다섯명의시신을모시기로 계획을세웠다. 목요일3시 에미사를올릴 예정이었다. 교회에서고문증거를찾기위해 시신을검사하 고사진을찍을계획이었다. (우홍선과김 원의시신은목요일일찍검사하 고사진을찍었다.) 그 주에 수많은사람들이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목요기도회에 모 다. BB C 는 이것을 모두 촬 했다. 도시산업선교회의 용감한 감리교 목사 조화 순이 아주 훌륭한 기도를 드렸다. 자신의 형 문익환 목사와 함께 오랫동안 투쟁의 선두에 선 문동환 목사가 무고한 사람들의 고통에 직면한 기독교인 의 책임에 대해대단히 용기있는 설교를 했다. 그는 자신또한무고하게 죽 은 예수님께서우리에게무고한 사람들의고통앞에서기도하고, 항의하고, 그리고죽으라는세 가지일을촉구했다고말했다. 이런식으로이야기하면 약간이상하게들리겠지만, 그는굉장한카리스마와뛰어난논리로그 모든 것을 강론했다. 악이 그들의 이름으로 극복되어 이 여덟 사람의 피는 결국 모든 한국인들에게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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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사람들이그가말할때 울고있었고, 내자신의눈에서도눈물이 멈추 지 않았다. 건물앞에특별한현수막이있었다.“ 살인마독재자는물러나라” 는내가가장좋아하는구호 다.
기도회 동안, 우리는 남은 시신 다섯 구가 아직 인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많은 사람들이 교도소로 가기로 했다. 나는BB C 촬 팀의 안전을 위해 국대사관까지데리고갔다. 그런다음나는다른사람들과합류하려 고 감옥으로향했다. 소문은무성하고빨랐다. 일부시신들은인도되었으나 시신하나가분실되었다, 아니다, 모든시신들이인도되어각자의집으로보 내졌고집에는바리케이트때문에외부인들은들어갈수 없다, 등등의말이 돌았다. 마침내 모든 시신들이 인도되었고 함세웅 신부의 교회에 보내졌다 는 말이전해졌다. 우리모두는택시를타고 갔다. 우리중다섯 사람이나와 함께택시를탔고우리가교회에도착했을때, 시신이하나도도착하지않았 으며, 시신한 구를길 뒤쪽에서경찰이제지하고있다는말을들었다. 우리 는다시택시를잡아타고왔던길로재빨리되돌아갔다. 교회에서약 2마일돌아가서, 우리는교도소 구차가방향을돌려서시내 중심가로돌아가는것을발견했다. 차안에는송상진의시신과그의 아내그 리고가족들몇 명이타고 있었다. 교통경찰들이길위에오토바이를세워놓 고 있었고 사람들 몇 명이주변에 모여있었다. 우리는그 교통경찰들이시 신을교회까지호송해왔는데, 방향을돌려교회대신화장터로호송하라는 명령을받았다는것을나중에알았다. 가족들은구차가화장터로가는것 을거부했다. 우리가도착했을때싸움이시작되고있었다. 월요모임 친구들과 목요기도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오고 있었다. 동시에더 많은경찰들이 도착했다. 따지고달래보고 위협도 해 보 았지만, 경찰은우리가 시신을 교회로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우리 또한시 신을화장터로가져가지못하게했다.
마침내, 버스두대 분의전투경찰이두툼한복장, 마스크, 헬멧그리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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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최루탄을가지고도착했다. 전투경찰대부분은크고추하게생긴사람 들이었다. 한참더 따지고간청하고울부짖고나서, 전투경찰에게진압명령 이내려졌다. 몇 명의신부와선교사들이팔을끼고 구차앞에있는여인들을둘러쌌 다. 차 뒤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구차의문이덜컥열리면서 송상진의 부 인이발버둥치고소리를지르며도로로끌려나오는것을나는공포속에서 지켜보았다. 그녀는열두세 살 되는딸과함께 구차앞 노면에 몸을던졌 다. 우리는마침내흩어졌다( 리고, 쳐지고, 몸싸움을하고, 곤봉에맞았
다). 나는몸 채로멀리뒤로던져졌으나엄마와딸을보호하기위해전투경 찰을뚫고되돌아왔다. 건장한경찰이 군화로 그 딸을차고있었고, 엄마는 손으로구차의범퍼를움켜잡고있었다. 나는어리석게도경찰의발을잡 았고다시뒤로쫓겨나기전에그를쓰러뜨렸다. 뒤로내동댕이쳐지면서나 는 경찰이한 여자선교사를 잡아세게던져그녀가 다른여자와부딪혀둘 이도랑으로넘어지는것을보았다. 더많은 아드레날린이분비되었고, 나는 뒤에서경찰을잡고크게 좌우로흔들어그를거의넘어뜨렸다. 그는곤봉을 들고나에게달려들었으나내가팔짱을끼고그를아래로노려보자뒤로물 러났다. 
여기서 잠시멈춰서두 가지점을짚고넘어가야만한다. 한 가지는 분명 하다. 나는용감하지않았다. 만일내가그것을생각했다면, 나는공포에질 렸을것이다. 비록때로는피할수 없이화가났고분노는지혜로설명할수 가 없었지만, 전투경찰은마음만먹었다면나를구타하고심지어죽일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투경찰의 삶과 훈련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구타하는데 모 든 초점이맞춰져있었다. 많은외국인들과대치하고있다는당혹감때문에 그들은우리에게심각한손상을가하지는않았던것같았다. 두 번째는 천성적으로 또 원칙적으로 나는 평화주의자라는것이다. 그러 나그날내가 아주훌륭한평화주의자는아니라는것을나는깨달았다.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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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화주의자라면누구나지적하듯이, 그날우리의폭력은아무것도이루 지 못했다. 나는여전히, 천성적으로도원칙적으로도평화주의자다. 그러나 만일다시그런상황속에던져진다면, 그날내가했던것과똑같은어리석은 행동을할것이라고나는확신한다.
이것은 늘어나는 구경꾼들이 계속 우리를 지지하는 동안 그 넓은교차로 주변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던믿기지 않는 장면의 스쳐 지나가는 단편에 불과하다. 마침내우리는구차에서강제로떼어내졌다. 한목사가열쇠를 낚아채열쇠구멍에씹고있는껌을채웠다. 그러나레커차를불 고, 레커차 가재빨리 구차를묶어서시신을화장할교도소로다시끌고갔다. 구차가 떠난 뒤, 싸움은 점차 누그러졌다. 한 아일랜드계 목사가 아주 고의적으로 배를발로 채 으나, 상처를 입히려는 다른 고의적인 시도들은 없었던것 같았다. 임무를완수하자마자, 전투경찰은거리를가로질러 물러 갔으며버스를올라타고떠날준비를했다. 우리대부분은가벼운상처때문 에 피를흘리고 있었다. 여자들을보호하는 동안나는손가락 세 개가도로 에 혔다. 옷은찢기고우리모두는망연자실하고비통했으며, 분노했으며, 슬펐다.
전투경찰을실은첫번째버스가 막 출발하려고할때 한여자가모여있는 많은 구경꾼들 사이에서 나타나 우리에게 절실했던 위안을 주었다. 그녀는 커다란콘크리트조각을가져와그것을온 힘을다해들어올려버스측면을 향해던졌다. 커다란충돌이 있었고 버스옆에커다란 자국이 생겼다. 운전 사가브레이크를밟았고, 많은전투경찰들이버스바닥에내동댕이쳐졌다. 버스밖에서 있던서너명의전투경찰이그 여자를잡고손을흔들어 버 스를 출발시켰다. 그녀는아주 조용하게, 잡고있는 경찰들에게 말했다. 나 는 그녀가무슨 말을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그녀를 풀어 주었다. 그녀는 조용히걸어와서, 다시콘크리트를집어서던졌고, 다시한 번 더 버스에또 다른커다란자국이생겼다. 이번에는경찰도그녀를제지하지않았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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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용감한 여인이 19 7 0 년에 피복공장 지역의 끔직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며 서울 중심가에 있는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한 전태일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나중에알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추스렸고, 시신없는장례미사를 위해교회로 갔고, 그 리고나서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금요일, 나는문동환 목사와 함세웅 신 부가 연행되었다는사실을 알았다. 토요일 아침나는 그동안 목요기도회를 이끌었던김상근목사와이해동목사가연행되었다는것을알았다. 두사람 모두얼마간감옥에서보내게될것이다.
몇 가지 질문이 여전히 우리를 괴롭힌다. 왜 그 시신을 인도하지 않았을 까? 강제화장은 이해가되지않는다. 시신을인도하면그들이은 하게고 문을자행한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질 것이기 때문에 시신들이 인도되지 않 았다고 뒤에들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신 여덟구 중 세 구는인도되고나머지다섯구를강제로화장한다른합리적인이유는없는 것같다. 
수년이 지난뒤, 이여덟사람들이무죄 음이입증되었다는사실을아는 것은중요하다. 비록그들의선고를취소하기위한약간의공식적인절차가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들의 무고함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그런 조치가 취해지면 과거의 주요한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먼 길을가야할 것이다. 그 일이 그 사람들의 부인과 가족들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생명을 되돌려주지는못할것이다. 거짓혐의로인한처형은계속해서가족과친구 들을괴롭힐것이다. 여덟사람의교수형은한국의오랜민주화투쟁에서진 정한상징으로남아있다.
 
박정희, 전두환정권하에 연행, 고문, 조작된재판들, 그리고가혹한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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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로 고통을 받은한국사람들은그들의 용기로 믿음으로 우리 모두를 감 동시켰다. 우리는말로형용할수 없는역경과고통속에서그들을지탱시킨 차분한위엄에정말놀랐다. 몇번씩이나투옥되었던그들의이야기에우리 는감동하여눈물을흘렸다. 
그러나 투옥된 사람들을 대신해 정부와 대결했던 놀라운 여인들 또한 마 찬가지로 감동적이었다. 이 놀라운 부인들, 어머니들, 누이들, 그리고 친구 들은철야기도를조직했고, 거리를행진했고, 재판에참석했고, 항의문을발 표했다. 기지와결단력있는용기를가지고 그들은부당한정부에맞섰을뿐 만 아니라한국에서무슨일이벌어지고있는지를해외에알리는중요한역 할을했다. 그들의 창조력은 끝이없었다. 나는 후자의 일에서 작은역할을 담당했을뿐이다. 그일은이제와돌이켜보면당시보다훨씬유머러스해보 인다.
19 1 9 년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독립선언기념일인19 7 6 년 3 월 1일, 유명한기독교지도자18 명이민주회복을호소하는성명서를작성하 여 서명을했다. 그성명서는서울한복판에있는명동성당에서열리는특별 미사 중에 크게 낭송되었다. 열여덟 명은 즉시 연행되었고, 분명히 형량을 사전에 결정한“ 재판”에서 여러가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구속된18 명의 부인들중 여러명은재판이일반인에게공개되지않는사실에분노하여재 판을거부했다. 재판기간동안매주시위를하면서, 그들은보라색“ 승리의 숄”을뜨개질로만들었다.
숄에는많은상징이있었다. 그것은승리를함축하는“ V”자로디자인되었 으며, 고통과승리의기독교적인색상이자한국국화인무궁화의색깔인보 라색으로되어있었다. 숄에있는각각의작은 V형태로된 문양은 4개의땀 을 필요로 했다. 여자들은4땀으로 된 한 세트를 뜨개질 할 때마다“ 민주주 의회복”이라는의미의“ 민주회복”이라는4개음절을반복하곤했다. 승리의 숄 하나를완성하려면총 만땀이 필요했다. 여자들은여기에한국의민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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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회복시키기 위해 만 개의 지원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담아 세계로보낼계획이었다.
뜨개질로제작한숄의갯수가늘어나면서, 지지에대한감사의선물로해 외에있는친구들에게그 숄을보냈다. 선교사친구몇몇이여성분들의대의 명문을지원하는기금을모으기위해숄을외국에팔아보겠다고제안했다. 한모임에참석하기위해뉴욕에가야한다고말하자, 그들은내가“ 몇벌” 의 숄을뉴욕으로가져가서친구들이팔 수 있게전달해 줄 수 있는지 물었 다. 내활동이감시를받고있었기 때문에주저했지만, 여성분들을거절하기 란 어려웠다. 그들이겪는모든일들을 되돌아보면서, 내게닥칠아주작은 위험은중요하지않다는결론을내렸다. 나는여행가방의옷가지사이에숄 들을분산하여넣기로하고, 그것을아무도알아차리지못하길바랬다. 출발하는날까지나는숄을받지못했다. 나는여자들이잊어버렸다고확 신했다. 그러나내가집을떠나기바로직전전화가 걸려와서숄이공항에 서 직접배달될것이라고했다. 여행가방에신중하게숄을숨기겠다는생각 은물건너가 버렸다! 그러나아직은경악할정도는아니었다. 공항에도착해 서, 끙끙거리며커다란 짐꾸러미 두 개를끌고오는젊은숙녀를 만나고 나 는 기절초풍했다. 그녀는 내게짐꾸러미들을 건넸으며 정중한 인사와 감사 의말을하고는 사라졌다. 꾸러미는각각갈색종이로 포장되었고, 단단하고 두꺼운끈으로묶여있었다. 그리고꾸러미는각각내 가슴까지올라올정도 의 크기 다. 각각40 ~50 파운드 정도 무게가 나갔다. 그것을 나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깨 넓이로 팔을 벌려 그것들을 잡는 것이었다. 신중이여, 그대이름은어리석도다!
나는짐을 가지고탑승수속카운터까지늘어선긴 줄에서서낑낑대고있 었다. 부칠가방이없냐는질문을받고나는 애매하게팽개쳐진작은여행가 방 옆에놓여있는 2개의꾸러미를 몸짓으로가리켰다. 밝은표정의직원은 참을성있게모든 짐을달았고, 두개의짐 밖에부칠 수없지만그녀가특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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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봐줘서세개를 모두부쳐 주겠다고하 다. 하지만, 나는검사를받기위 해 특별세관원에게그짐 모두를가져가야만했다. 짐들과여행가방을세관 원 카운터까지운반하면서고잡아당기는동안침착한내 태도에나도놀 랐다.
여행가방을열고조사를하는동안특별한것이나오지않자세관원과나 는 잡담을나눴다. 그리고나서세관원은꾸러미안에무엇이있는지를물었 다.“ 직물들입니다!”라고나는거의소리를질 다. 그러자세관원은미국에 서 장차 판매를 하기위해 가져가는 견본들인지를 물었다.“ 그렇습니다”라 고 나는소리를질 다.“ 견본입니다”그런뒤, 그는견본을봐도되냐고물 었다. 떨리는손으로, 나는마침내끈의매듭중 하나를간신히풀었고포장 지 모퉁이를 벗겼다. 숄의 화려한 자주빛이 전체공항을 채우는 것 같았고, 나는커다란소리의“ 민주회복”이라는말이들릴것이라고확신했다. 세관원 은카운터에서돌아나와서, 가장위에있는숄을만졌다.“ 정말훌륭하군요” 라고그는말했다.“ 미국에서틀림없이잘팔릴겁니다.”
그 여행의나머지는아주몽롱했다. 서울에서뉴욕까지(앵커리지에서여 섯 시간체류를 포함해) 18 시간비행은끝날것 같지가않았다. 앵커리지에 서, 나는미국세관을통과해그 꾸러미들을끌고다녔다. 다행히, 이번은그 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뉴욕의 라구아디아 공항에 도착하니 맨해튼으 로 택시를 타고들어가려는사람들이길게줄을서 있었다. 결국 나는내가 묵을호텔에서2마일정도떨어진곳까지나를실어다 줄 버스에모든것을 싣기로결정했다.
버스에서내린곳에서도사람들이택시를잡으려고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들이 참을성 있게줄에서 있지 않았다. 모퉁이에서서, 뉴욕 사람들은참을성도 없으며 사려도 깊지않다는 것을알았다. 만일이 두 개 의 커다란꾸러미에내가한국민주주의의미래를짊어지고있다는것을알 았다면, 그들은 옆으로 비켜 주었을 것이다. 택시가 승객을 내려놓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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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차할때마다, 나는짐꾸러미와찌그러진여행가방을들고 면서기를쓰 고그 쪽으로걸어갔다. 허나내가도착하기훨씬 전에, 짐이별로없는다른 사람이먼저택시를잡아타고가버렸다. 마침내모든인내와훌륭한예의범 절을포기하고, 나는꾸러미로가로막은끝에택시를잡았다. 마침내 두 개의꾸러미와 여행가방을 내 방까지 옮겨준 벨보이에게 팁을 준 뒤 침대에몸을던졌을때는자정이훨씬지났다. 거의30 시간을깨어있 었고, 팔을 뻗은채 짐들을 옮기려 했기때문에 팔과어깨가 쑤셔왔으며완 전히지쳐버렸다.
시차때문에나는새벽2시에잠에서깼다. 한시간동안뒤척거리다가포 기하고8시에내 선교사업단사무실이 열릴때까지책을읽었다. 그리고나 서, 나는여행이 아직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호텔에서링컨센터로 갔 다가맨해튼위쪽에있는선교본부로가는길은지하철을이용하는것이최 상이었다. 이렇게 하려면 좀 걸어야만 했다. 처음에도 걷고 마지막에도 몇 블록을걷고, 또회전문을통과하고지저분한지하철계단을오르내려야했 다. 버스를 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출퇴근 시간이어서 만원이었다. 최종적 으로마음대로 정차할 수 있는택시를 타기로 했다. 그러나내가큰 꾸러미 두개를들고 있는것을보고택시 운전사는택시를멈출까말까했다. 운전사 는마지못해내가짐꾸러미를택시트 크에구겨넣는것을보고있었다. 맨해튼서쪽위로 택시를타고가면서우리는 재미있게이야기를했고, 내 가 내릴쯤에우리는어느정도친해졌다. 짐꾸러미두 개를리버사이드드 라이브 47 5 번지에 있는 19 층 짜리 건물 현관으로 어넣고, 안내 데스크를 지나서 15 층 선교본부로 올라가는 만원엘리베이터에다시짐을 구겨넣었 다. 선교본부에서일하는사람은흥분하여나에게서짐을받았다. 우리는모 두 너무기뻤다. 그들은보석같은숄을그렇게많이받아서, 나는임무를성 공적으로수행했기때문에, 그리고드디어무거운짐을벗어서기뻤다. 선교본부에서북미전역의기독교사회에숄을팔기위해배분하 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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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통해 운동자금을 만들었으나,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투 쟁, 그리고정부의의표를찌르고숄을제작한용감하고창의적인여성들에 대해알게되었다는것이다. 바쁘게숄포장을풀어서쌓던선교위원회위원 한 사람이 하던일을멈추고 나에게로 돌아서서 말했다.“ 이렇게 중요한 일 에 나도동참하게되어정말보람을느낍니다.”나는잠시생각했다. 김포공 항에서발각될지도모른다는두려움, 이큰 짐꾸러미를여러교통수단을통 해 날라온거의 불가능했던일, 이제는 쑤시는 팔과어깨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내가생각해도놀랍게,“ 예, 정말그렇지요”하고말했다.
 
시간은일을흥미롭게해결한다. 세월이지나면서, 나에게배치된한국중 앙정보부 요원과 경찰 요원은 친구가 되었다. 19 9 7 년 한국에서의 선교활동 에서은퇴하기일년 전, 나는서울거리에서한 사람과부딪혔다. 우리는서 로를알아봤으나어디서만났는지는알지못했다. 이야기를하는동안그가 미 대사관앞에서시위를한 뒤 나를심문했던출입국관리사무소직원이라 는 것을알았다. 그는 내가유머로 심문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개인적으로 그를 공격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출입국 관리사무소보안책임자가되었으니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이야기했 다. 뒤에우리선교사들중 한 명이비자와체재허가를받기위해도움이필 요했을때, 그는그일을처리하는데도움을주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려고 자주 만났으며, 한 번은 출입국관리사무소가 나 에 대해수 년 동안수집했던 대규모 파일을 없앴다고 알려주었다. 그는그 파일이얼마나두꺼웠는지를보여주려고양 손을벌려보 다. 비록직접적 으로말하지않았지만, 나는그가과거의독재정부들에맞섰던일군의외국 인들에게 얼마간 고마워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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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나를위해 구거주증을 주선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더이상나는거 주 허가증을 갱신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다닐 필요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일주일내로한국을떠나기로예정되었고그의 관대한제의를활용할수없었다. 
 
이런경험들이내삶을이루어왔다. 19 9 7 년 선교봉사활동에서은퇴할때 까지 41 년 동안, 나는 한국의 도전, 투쟁 그리고 재판들에 관여해 왔다. 그 기간 동안, 내 한국 친구들이 암흑기에도 지칠 줄 모르는 유머를 보여줬기 때문에나도즐겁게웃었다. 그리고한국친구들이그들의깊은슬픔을 함께 나눴기때문에나도참담한눈물을 흘렸다. 그들의용기와희생에관한 갑작 스런기억들이나를덮칠때, 아직도나는가끔씩울곤한다. 하느님을찬송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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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모든경계를넘어, 하나의공동체
 메리언 킴(M arion Kim)

19 6 9 년 미국집을 떠나 한국에 오기 전까지 나는한국에 발을 들여 놓아 본 적이없었다. 내한국인남편김용복은19 1 9 년 3월 1일 일본에맞서독립 운동에참여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나에게 들려 주었 다. 그는또한19 6 0 년부패한 이승만정부를몰아내는데기독교학생들이한 중요한역할과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기독교지도자들과 교회가 한 역할에 대해이야기해주었다.
서울에도착해서한국적인것에대해배우는것은이것보다휠씬더 실질 적인것이었다. 시어머니와시댁의일가친척들을알게되었다. 그리고 장보 고, 요리하고먹는법을계속해서배워나갔다. 나는가끔씩버스를잘못타 서 길을잃었다. 새롭고낯선문화속에서의 삶이지닌여러가지놀라움들 을 즐기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갑작스러운 의사소통의 단절때문에 심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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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훼손되어있었던내 자화상을고칠수있다는희망을가지고 한국어를열 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나는월요모임의 모체인“ 50 인 위원회”라는 모임에 참석하기시작했다.
그모임의 이름은서울에있는미 대사윌리엄포터를단체로방문했던선 교사들과한국거주외국인들의숫자를따서지은것이다. 정중했지만비판 적인질문공세를통해, 미국정부가한국시민들을억압하고있는박정희독 재정치를 지원하는 것을 중단하라는 우리의 강력한 요구를 전달해 줄 것을 대사에게 요청했다. 예를 들면, 무장 트럭들과 다른 군중 통제용 장비들을 한국정부에 공급하는 일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포터 대사는“ 많은 다른 곳들과비교해서한국의경우는점잖은편에속합니다”라고말했다. 한국에 서 대학교수로재직하던미국인마가렛화이트가대사에게응수했다.“ 우리 학생들이 기본적인 권리인 언론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사님 은 제가돌아가서학생들에게,‘ 자진정해요, 한국의경우는점잖은편에속 합니다’라고말하라는것입니까?”
그날대사관모임은비록긍정적인결과는없었지만, 한국에살면서일하 는 외국인들을 조직하고 동원할 수 있는 월요모임의 잠재력을 우리 스스로 에게보여주었다. 그들은 미국의 외교정책, 특히미국이 실제로 한국국민 들을지원할수있는방식들을논의하기위해계속해서정기적으로모 다. 나는몇 달 뒤 미국의회사절단의서울순방행사에 50 인 위원회의여러 사람과합류했다. 50 인 위원회의일부미국인회원들이의원들을만나러워 커힐호텔로갔다. 오랫동안기다린뒤에, 마침내미 의원들이부부동반으로 만찬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미국의 외교정책과 관련하여 그들과 대화를 하려고애썼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내 고향오하이오 주의 의원은 약간취하여 욕을하면서 내 면전에서 호텔방문을 꽝 닫았다. 우리 가 버취베이와월터먼데일의 아내들을 만난것은다행이었다. 두여자모 두 머리를새로다듬어(한국미용사들은그당시에도 세계적으로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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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름다웠다. 그 부인들은 우호적이었고친절했으며 우리와 자리를 함 께하 다. 그들은한국상황에대한우리의 설명과, 인권을존중하고민주발 전을이룰수 있는미국의 외교정책에대한우리의 요구에 귀 기울 다. 베 이와 먼데일 상원의원이 그곳에 도착하자 부인들은 그들을 앉도록 했으며 잠시동안우리와대화를나누도록하 다. 두상원의원은신중히들었고우 리가 제기한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겠다고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이 약속을 지켰다는말은듣지못했다.
 
남편과 나는 1 9 7 0년 미국으로 갔고, 그후 일본으로 가서 4년 동안 (19 7 3 ~76 ) 일본에서살았다. 도쿄에서우리는한국에있는범기독교네트워 크가 주도한, 한국 민주화운동을 위한 국제커뮤니케이션과지원 네트워크 의 일원으로 일했다. 우리는 도쿄에서 오재식, 강문규, 그리고유명한 연재 물 <T.K . 생으로부터의편지>의실제저자로 최근에드러난지명관의가족들 과함께작지만역동적인한인모임에참가하 다. 
도쿄에 있는동안, 린다존스가우리를 방문했고, 남편의사무실인‘ 아시 아 활동단체를 위한 문서정보실’도 방문하 다. 이곳에서는 한국으로부터 자료를받기도하고한국으로자료를보내기도하 다. 그곳은한국에대한 정보를 얻고배포하는, 일본에있는몇 개의주요한 연락처들 중 하나 다. 일본에서내 주된업무는중학생, 고등학생그리고대학생들에게어를가 르치는것이었으나, 나도남편을도와19 7 3 년판“ 한국기독교인들의신학적 선언”을비롯해많은자료들을편집했다. 
당시네 명으로늘어난우리가족은 19 7 8 년 1월 한국으로돌아왔다. 시어 머니의자상함덕택에, 어린 두 아들과 그 많은가사일을 맡기고 나는한국 기독교민주화운동과관련된일을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도보답할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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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지만나는시어머니께감사한다. 아이들이아주어려서떨어져있는것이 힘들었으나, 저녁때나주말에아이들과함께있을때는최선을다했다.
 
그해나는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일을시작했다. 나는일전에일본에 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김관석목사를만난적이있었고, 그리고나 서그의 어 문서작업을도와주었다. 아직까지도나는조용하고친절한용 모와 달리, 직설적인 연설을 하고 신념이 확고했던 이 키가 크고 신사적인 분과일했던것을 내삶에서가장 큰특권들중 하나로여기고있다. 그가무 슨말을하면 그것은그의마음속에서부터우러나온다는것, 그리고그를완 전히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알 수 있었다. 김관석 목사가 민주주의와인권 이라는 대의를 위해기독교인들의광범위한 토대를조직하고 활성화시키는 데에서담당했던중요한역할에대해서는나중에이야기할것이다. 내 일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에 관하여 제작한 여러성명서와선언문들의번역을돕는일과, 그것을해외에있는관심있는 개인과교회그리고다른 외국단체들에보내는것을준비하는일이었다. 나 는 또 다양한인권침해사례에대한보고서들을번역했다. 이러한어문서 들은구금, 고문, 가택 연금 뿐만아니라 박정희 독재정치에 대항하여 용감 하게발언하거나, 을 쓰거나, 단체를조직하거나 시위를 했던학생들, 노 동자들그리고다른사람들의처형과투옥등을다루었다. 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나는김한림(김윤의어머니)과이소선(전태일의어 머니)을비롯해많은용감한민주투사들을 만났다. 이들을비롯한여러사람 들이우리사무실을방문하곤했으며, 종종중요한사건들에대한성명서나 정보를가져다주었다. 우리는운동의과정에서나온이런자료들과특히교 회협의회인권위원회에서나온자료를번역하여국제적으로배포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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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월요모임에 소속된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해 많은이야기를 들었고, 초기에도쿄에서 서울을방문했을때 루이즈(모리스)와버치더스트를 만난 적도있었다. 나는19 7 8 년 월요모임에나가기시작했으며한국사람들과교 회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따뜻하고 우호적인 기독교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 들은 억압적인 정치상황에서 고통받고 있는사람들을 돕기위해 자신의 지 위와안전을희생할각오를하 다. 이선교사들은한국에있는전형적인외 국인처럼살지않았고, 심지어전형적인선교사들처럼살지도않았다. 그들 은 한국인들과떨어져있는별도의주거지역에서살지않았고, 특권을누리 려 하지도않았다. 그들은자신들의시간과자원과사랑을한국인이웃들과 나누었다.
진과빌 베이싱어부부, 수와랜디라이스부부, 윌라커넌, 페이문, 메리 언 포프, 메리언커런트, 진매튜스, 그리고이언롭이 내가기억하기로가장 자주만난월요모임회원들이었다. 존서머빌은가끔대전에서올라왔고, 그 리고 한국의 상황에 대해 기본적인 소개를 원하는 대규모 교회단체들을 비 롯한 많은 방문객이 있었고, 월요모임은 이러한 자료를 아낌없이 제공하
다. 당시그모임은선교사들의집에서이루어졌다. 전형적인모임은간략하 게 성경을읽거나반성을하거나기도로시작했으며, 그런뒤에개인적인이 야기를나누거나그 주에걱정되는일또는 희망적인일들에대한정보를함 께 나누었다. 가끔씩 집에서 구운 맛있는 과자들이 나왔다. 군사 독재정권 하의한국이연출하는부조리연극의주연배우들을풍자하는수많은농담과 이야기들이항상있었다.
심지어 지금 되돌아보면, 월요모임은나에게 아주 중요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고 일했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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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서로의지했다. 엄격한검열과언론, 출판및 집회의자유에대한탄 압 때문에 정식 뉴스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고, 따라서 믿을 만하지 않았 다. 그래서월요모임에서는모든토막뉴스가소중했고, 나는한국기독교교 회협의회에서내가제작하고있던“ 한국민주화운동의사건연대기”에 수록 하기위해열심히기록을 했다. 그연대기를사진으로찍어서한국민주화운 동을 지원하는 해외지지자들이 사용하도록 일본과 독일로 보냈다. 심지어 김관석 목사가 19 8 0 년 초에 기독교방송국(CB S )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에도 나는계속연대기를제작했다. 나도김관석목사를따라기독교방송국으로 갔다.
월요모임은 또 다른 이유로 소중했다. 나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살면서일했기때문에대부분시간을귀가 멀고벙어리같다고느꼈는데, 월 요모임은내 어귀들을 다시열어주는기회 고쌓여있던내 생각들을말 로표현할수 있는기회 다. 자신을가능한빨리한국에동화시키려는헛된 희망에서“ 오직한국인들만”만나는생활방식을고수했기때문에, 월요모임 은 한국에 살던나의 유일한 비(非) 한국인 공동체 다. 월요모임에서사용 된 언어는특출한어 다. 고통과용기에대한이야기들을들으며감을 얻었던 까닭에, 나는 무엇보다도그 모임을 기대했다. 내 자신의 언어로 이 야기를나누면서, 나는다시진정한내 자신이될 수 있는기회덕분에새로 워져서집으로돌아오곤했다. 
또한 월요모임은 모든 회원들이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는 따뜻한 공동체 역할도 수행했다. 이러한 연대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직업으로도 확대되 었고, 우리는 민주화라는 위험한 운동을 하는한국 기독교인들, 학생들, 그 리고노동자들을우리가지원하게되었다. 이런지원은우리모두에게중요 한힘의원천이되었다.
월요모임의가장중요한동반자는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고, 나는두조 직의연결고리역할을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한국에서일어나고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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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일에대한소식을해외에있는 교회들에게알리기위해많은자료들을수 집하고준비했다. 전세계에배포할자료들을정리하느라한국에서자신들의 지위를위태롭게했던월요모임회원들은이 과정에서믿을수 있는연결고 리 역할을했다. 한국에서의투쟁현실과관련된모든표현물을금지했던혹 독한긴급조치상황에서는이모든자료가“ 불법”이었다. 최근까지비 이지켜진이 투쟁의과정에서가장중요한공헌중 하나는 월요모임회원인메리언포프가한 일이다. 19 7 8 년 2월 남편과내가일본에 서 돌아온 직후, 김관석 목사가 내 남편에게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한 비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남편은 막 기독교연구소를 설립했고, 김관 석 목사가그곳의이사장이었다. 남편은메리언 포프에게도움을 요청했고, 그녀는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인권위원회로가서많은자료들을모았다. 한 편 남편은 다른곳에서 더 많은자료들을 수집했고, 그두 사람은 공동으로 보고서를작성했다. 메리언포프가마지막으로보고서를편집했다. 이 보고 서를사진으로찍은필름은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 )의빅터슈가한국 밖으로가지고나갔다. 공항에있는검사관이필름들을흘끗보았지만조사 하지는않았다.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가 이 보고서를 출판했고, 미국교회협의회를 비롯 해 다른단체들도 이 보고서를 출판했다. 더 중요한 것은이 보고서가 공화 당 소속도널드프레이저의원이이끄는아시아태평양위원회가 소집한‘ 한 국인권에 대한미 의회청문회’의 공식보고서의일부로서 미국연방의회 의 사록으로출판되었다는것이다. 그리고가장중요한것은미 국무장관인사 이러스밴스가 19 7 9 년 6월 말지미 카터대통령의한국순방동안박정희대 통령에게 제시하기 위해바로 이“ 한국의인권 보고서”의 사본을 가져왔던 것이다. 인권문제에 대해 박정희를 비판하면서, 카터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국무위원과함께한 만찬석상의연설중이것을언급했다. 정부요원들이그 보고서의 출처를알아내려고 김관석 목사를조사했으나 아무 단서도 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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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었다. 
 
월요모임 회원들은19 8 0 년 5월 19 일부터 두 달 동안 전두환이 이끄는 신 군부로부터숨어지내던내 남편을많이도왔다. 남편은그 이전에“ 위장결 혼식” 사건의주모자라는 혐의로 전두환의 보안사령부에끌려가 거의죽을 만큼구타당하고, 경찰청특별수사반에서취조당한적이있었다. 위장결혼 식사건은박정희의암살뒤선포된계엄령하인 19 7 9 년 11 월 26 일발생했다.
“ 위장결혼식”에대해서는이장의뒤에서자세히설명된다( .) 감옥에서 25 일을 보낸 뒤, 남편은 즉결 재판에서 최초의 혐의를 벗었다. 그러나 19 8 0 년 5월 광주학살의 소식은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이 연행되거나 더한위험에처하게되었음을의미했다. 그래서남편도얼마동안두려워했 다. 그는 친척과 함께있다가, 나중에는친구와 함께지냈다. 그 이후, 추적 을피해계속 떠돌아다녀야했기때문에, 우리는월요모임회원인랜디와수 라이스에게도움을청했고, 그들은친철하게자기집에있는방을제공해주 었다.
경찰이우리전화를 도청하여그가어디있는지를아는 것 같다는말을들 을때까지남편은거기에 머물 다. 랜디는그가연행되지않도록재빨리떠 날수 있게도와주었다. 남편은어떤독일외교관집에장기간 머물수있을 때까지한국친구와함께 옆집에머물 다. 우리의독일선교사친구인도로 테아슈바이처가그 외교관을우리에게소개해주었다. 그는한국정부의노 동교육관으로일하고 있었다. 나는 주말마다 외교관의 집으로 남편을 방문 했고, 깨끗한옷을가져다주고그의세탁물들을집으로가져왔다. 월요모임 회원들은 각자의 활동을서로 지지했고, 구속자들의 가족들을 위한 비상기금을 조성하는 데 협력했으며, 경찰또는 중앙정보부에게서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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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많은사람들에게피난처를 제공했다. 한국상황을보고하고분석한월 요모임의“ 사실보고서”는 해외에있는사람들이한국상황을잘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기독교회관에서 일하는 동안 마음씨 고운“ 언 니”이자정신적 지지자인 윌라커넌을 만나는 은총을 입었다. 윌라는 연락, 번역, 편집을담당하거나숨을장소내지 금전적지원을제공하면서항상누 군가를, 대개는동시에여러사람을도와주고있었다. 나는19 7 0 년대중반에 한국에 있지 않았지만, 그 당시에 윌라가 서류들을 준비하고 전달하는 등, 김관석목사에게큰도움이되었다는것을들었다. 
문화를 함께공유한다는 의미에서 나의가장 절친한 월요모임 친구는 나 처럼 한국인 목사와 결혼하고 한국적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두 개의문화권 에서 아이를 키우는 미국 시민인 페이문이었다. 그녀는 한국기독교교회협 의회가 민감한 자료들을 해외로 발송하는 것을돕기 위해 자신이 미군우편 체계접근할수 있다는사실을이용했다. 이것은한국기독교운동에정말중 요한공헌을했다.
 
박정권말기부터전두환의군사적인정권탈취초기동안은지속적인감시 때문에 계속적으로경계를늦출수가없었다. 사복요원들은 사람들을미행 하고대화를엿듣고사무실로 찾아와 이것저것을 캐물었다. 비판적인말을 할 때는길을걸으면서 귓속말로 했고, 실내에 있을때는우리가 하는말을 도청하기위해감추어져있을“ 도청기”를교란시키려고라디오를켜놓았다. “ 국가안보”라는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나는 매우 긴장했고, 특히 가방에 정부를 비판하는 서류들을 옮길때마다 긴장하 다. 한국 젊은이에게 흔히 하는것처럼경찰이세우고 가방을조사할까봐두려웠다. 내가일했던 기독 교회관은자주경찰이에워싸고“ 불순한인사들”과접촉하거나“ 불순한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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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수행할 것으로 의심받는사람들을입구와출구에서차단했다. 박정희 에게서전두환으로군사정권이넘어가는기간동안광주에서학살이일어났 고, 그때부터오랫동안커다란 탱크가 기독교회관의출입문바로앞에배치 되었고무장한군인들이기독교방송국현관앞의계단꼭대기에서있었다.
 
19 7 9 년 11 월 26 일, 서울YWCA 회관에서있었던“ 위장결혼식”사건은항 상 뚜렷한기억으로남을것이다. 그사건은박정희대통령의암살한 달 뒤 에 발생했다. 억압적인 계엄령 하에 모든 집회는 종교의식,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을 제외하고 금지되었다. 그래서민주청년협의회는결혼식을 열어서 사람들을 모으고, 메시지를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것 이진짜결혼식이아니라는것을 알았다. 신랑이널리알려진청년지도자인 홍성엽이었기때문에많은민주인사들이참석했다. “ 모르는”참석자들중에내 남편도있었다. 그당시, 나는남편이그 행사 에간사실도몰랐다. 다만그가 11 월 26 일밤에집에오지않아서 걱정을했
다. 다음날내 사무실동료들이많은사람들이연행되었다는것을알려주었 지만,“ 김박사는대개그런공개적인 시위에참가하지않기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며칠이 더 지났고 여전히 그로부터 소식이 없자, 애들과나와시어머니는점점불안하고걱정이되었다. 나는 신랑이 하객들 앞에 자리를 잡고,“ 결혼식”은 전형적으로 시작되었 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리고 신부 입장 순서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예복을 입은젊은신부는나타나지않았다. 대신, 예식을진행하던존경받는퀘이커 지도자함석헌이계엄령의해제를요구하는강력한성명서를읽었다. 그계 획은너무도신중하고은 하게진행되었기때문에심지어경찰조차도낌새 를 채지못했다. 경찰이무슨일이일어나고있는지알아차리고는참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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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연행하려고들이닥치자아수라장이되었다. 남편과다른사람들은그 계 획과 무관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연행되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회관에서 걸 어나왔다. 그러나그들은잡혀서끌려갔다.
며칠뒤, 작가이자활동가인이철용이끔찍한소식을가지고우리사무실 을 찾아왔다. 그는“ 위장결혼식”에 참석한다른사람들과함께연행되어끌 려가서, 국군보안사령부의우두머리인전두환의군대에게서말로형용할수 없는잔인한취급을받았다.“ 그들은우리를‘ 특별’팀에배치했어요”라고이 철용이 말했다.“ 처음은 당수 팀이었는데, 그들은 당수로 우리를 가격했어 요. 그들이 끝나자, 두 번째 팀이 와서나무 곤봉으로 우리를 때렸지요. 세 번째팀은군홧발로우리를찼어요.”이철용에따르면, 군인들은고문당하는 사람이정신을 잃으면 의식을 되찾을때까지 내버려두었다가 다시 때리고 발로찼다. 자신도구타당해서정신을잃었고, 눈을떴을때얼굴이“ 보통크 기의두배로부풀어진” 한남자가자기옆에누워있는것을보았다. 이철용 은 잠시멈춘다음말했다.“ 그가누구일까궁금했는데, 마침내그가김용복 박사라는것을알게됐습니다.”
나는 충격을 받고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남편이 있는 곳을 찾아야만 했 다. 시어머니와나는남편에대해 묻고그의석방을호소하기위해서빙고동 에 있는악명높은보안사령부본부로갔다. 경비들이상관에게문의하고나 서, 남편에대해들은것이없다고우리에게말했다. 나는그를석방시킬방 법을생각하려고머리를쥐어짰다. 이정권은외국의압력에아주민감하다 는 남편의말이기억났다. 중앙정보부요원들이도처에깔려있는상태에서, 안전을위해 나는호텔에가서우리를도울 수 있을것이라고생각되는국제 기구에서일하는몇몇친구들에게팩스를보냈다. 
밤에시어머니와나는서로손을잡고울었지만, 그당시 7살과 3살인어 린 애들앞에서는대범한태도를보이면서“ 아버지가나쁜사람들에게잡혀 갔지만 아버지는 세계도처에 많은 친구들이 있으니 그들이 아버지를 도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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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란다”라고 말했다. 남편이 이미 겪었던 고통에 대한 나의 상상과 그의 목숨과관련된나의두려움은별개로하더라도, 나에게가장강하게일어난 감정은분노 다. 비록기독교인답지않은것이지만, 나는전두환장군과그 의 부하들이훌륭하고용감한내 남편에게가했던것과똑같은고통을당하 길바랬다.
약 10 일 뒤, 여기저기문의한끝에교회에서활동하는친구들이남편이마 포경찰서로이송되었고, 시어머니와내가이제그를면회할수있다는사실을 알아냈다. 우리는다음날새벽이되기전에택시를타고경찰서로갔다. 남편 의 모습은끔찍했다. 면도도하지않았으며, 연행된이후쭉 같은옷을입고 있었고 얼굴은 멍으로 얼룩져있었다. 우리는창살을 사이에 두고이야기를 해야만했다. 그는전신에멍이들었으나회복중이며, 가슴쪽에약간통증이 있다고말했다. 또한구타와고문의후유증으로발이감염되어있었다. 처음짧은면회에뒤이어, 시어머니와나는사이에아무것도없이얼굴을 맞대고남편과두 번 더 만날수 있었다. 두번 모두, 경찰이우리옆에앉아 서대화를기록했고, 만일우리가면회한사실을다른 사람에게말하면심한 벌을받을것이라고으름장을놓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충고에따라, 우리는즉결재판을요청했다.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진다면, 남편이좀 더 일찍감옥에서 풀어날 수 있었다. 그 래서연행된 지 25 일만에, 그는미결수인상태로집에돌아왔다. 남편은자 신이겪은고초에대해이야기하길원하지않았지만, 사건의주모자급인“ A” 급으로분류되었고보안사령부에서구타당하고고문당했다고말했다. 그다 음, 경찰청에있는희미한불빛이비치는사방이흰 벽으로 된 독방에 며칠 동안 갇혀있었고, 마포경찰서로 이송되기 전에경찰청 특별조사반의 조사 를받았다고말했다.
즉결재판은희극이었다. 검사와변호사로부터간략한진술을들은뒤, 판 사는남편과그의활동들에대해 6인치두께의 기록을읽어보았다. 판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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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잘못된연행사건을어떻게판결할까딜레마에빠진것 같았다. 마침 내 판사는“ 위장결혼식”사건과관련해서남편이사소한불법행위를저질 다고선언했다. 남편에게그가이미감옥에서보낸 것과똑같은 25 일구류가 선고되었기때문에, 정부는잘못된연행으로인한보상을할 필요가없게되 었다. 몇주 뒤, 마포경찰서에서한 경찰관이우리집으로찾아왔다. 그는당 국의잘못에대해남편과우리가족 전체에게사과하면서, 남편에게거듭인 사를했다. 다행스럽게, 남편은발 위에 난 큰 상처를 제외하고는구적인 신체손상을입지않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초대총무이며그 뒤 기독교방송국사장이된 김 관석목사는불의와폭력적인독재정권에대한한국의저항운동에서기독교 교회운동이중심이될수있도록중요한역할을했다. 김 목사는아주조용한사람이고깊은사색가이며헌신적인기독교인이었 다. 그를포함한여러사람들은전세계교회들과연결된기독교조직망으로 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한국내 다른단체들보다민주개혁을위해실천 할 수 있는여지가더 많다는것을깨달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정부 에대한비판을잠재우려는술책인“ 공산주의자”라는비난을받을이유가없 었다. 잔혹한군사통치시절동안, 한국의종교지도자들은대응하는방법을 놓고항상의견의일치를보지못했다. 서로다른의견들때문에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집행위원회는자주난항을겪었다. 김목사는항상모든의견을 들었으며충분한토론을보장했고, 참을성있게그들이의견의일치를이룰 때까지함께하자고회원들을설득했다.
김 목사는민중의(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권리에대한강한인식을가지 고 지속적으로 이를 주창했다. 그는 사회정의에 관한 쟁점들을 한국교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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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고, 교회가노동자들의문제에 관심을갖도록했으며, 특히도시빈민 들을위한수도권공동체조직을통해교회의지지를받았다. 김목사는이 공 동체와 관련되어 연행되고 구속되었다. 박형규 목사, 권호경 목사, 그리고 조승혁목사와함께, 그는기독교기아원조기구인‘ 브래드포 더월드 (Brea d for the Wor l d )’로부터 기증받은 기금들을 남용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 죄목들은모두기각되었다.
김 목사의 관심은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을 조직했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 때문에구속된 학생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그들의 친구들과가족들은법적지원과기타도움을구하기위해한국기독교교회협 의회를찾아왔다. 김관석목사를지도자로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많은일들을 수행했 다. 그중 하나가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소속인권위원회의설립이었다. 김 목사는인권위원회설립을위한제안서를작성했고, (인권위원회첫 책임자) 이경배와 함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집행위원회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김 목사는독립적인운 을위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는법적으로독 립된 체계로 인권위원회를 설립했다. 그의 강력한 지도력으로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는인권활동을할수있었다.
김관석목사는광주민주항쟁이일어나기불과몇 달 전인19 8 0 년 초 기독 교방송국의사장이되었다. 19 8 0 년 5월 목격자들이서울로올라와단편적인 소식을 전하면서, 우리는 군인들이 수백명의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알면 알수록 우리의 충격은 더욱더 깊어갔다. 정부의억압적 인통치하에 이것을공개적으로말하는것은불가능했다. 언론은진실을한 줄도말하지않았다. 그리고공포가모든것을뒤덮었다. 그해여름오하이오에있는가족들을방문했을때, 나는비로소자유롭게
말할수있었고, 광주외에다른이야기는하지않았던것으로기억한다. 광주학살의전모가일반한국인들에게알려지기까지는많은세월이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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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신군부는한국기독교방송국을해체시키려하 다. 전두환일당 은국회를폐쇄했고헌법을난도질했으며, 수천명의사람들을“ 삼청교육대” 로 끌고 갔고 일부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또 그들은 민주발전으로 가는 길에여러가지다른장애물을세웠다. 전정권의주요한프로그램중하나가 언론사의통폐합이었다. 정부는몇 개의 TV 방송사를폐쇄시키고다른방송 사들은통합시키는한편, 여러신문사들을폐쇄하고“ 말안듣는 언론”을 막 기 위해새로운법률을제정했다. 그러나교회의강력한지지를받는전국적 인 라디오방송국인CB S 를 정부는쉽게폐쇄하거나합병할수 없었다. 그리 하여CB S 는모든뉴스방송과광고방송을중단하라는명령을받았다. 김목 사는 전국적인 CB S 후원자 모임을 결성함으로써 이에 응수했다. 조성호와 다른CB S 주요간부들의도움으로, 반민주정권에도전하는내용을담은새 로운종류의문화프로그램들을제작하여방송하 다. 마침내CB S 의뉴스와 광고기능이 다시재개되었다. CB S 의 운동은한국교회로부터지지를 받았 을뿐만아니라, CB S 의수호가한국내언론출판의자유회복으로가는중요 한단계로인식한많은시민사회단체들로부터지지를받았다. 
19 8 0 년대내내김관석목사와한국교회운동의다른지도자들과회원들은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운동을 계속적으로 의미있게 발전시켰다. 또 한 그들은 한국교회가19 9 0 년대에 마침내 민주적인 한국을 이끌게 될 정치 적발전과정에더욱더적극적으로참여할수있는길을닦았다. 
 
월요모임은공포스럽고어려웠던전두환 통치기간 내내계속해서이루어 졌다. 이후 갈수록 더욱 민주적인 대통령들이 선출되고 정치상황이 개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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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라, 월요모임은한 달에한 번으로 줄어들었다. 모임의토론도 강도가 약화되고더 느긋해지게되었다. 우리의초점은정의와평화에대한문제들 에맞춰졌다. 
최근 몇 년간, 월요모임의 관심 주제에는 환경문제와 한국 내 외국 이주
노동자들이부딪히는어려움등이포함되었다.
한국에서 나에게 월요모임은 집이나마차가지 다. 그것은 내게 선함과 인간의혼에대한신념을지킬수 있게해 주었다. 그것은내게우리가모 든 종류의경계를넘어하나의공동체라는것을깨닫게하 다. 한국인들과 의 연대의 경험을 나누면서, 우리는 한국사회를 변화시킨 그들의 용기있는 행동으로부터배웠다. 또한“ 하느님과네이웃을사랑하라”는위대한계명을 실천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서로서로의 자비로운 행위로부터 많이 배웠다. 이계명은한국기독교교회운동의기본적인신학적원칙이었다. 월 요모임에서우리를이끌어주었던것도바로이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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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방관자로남는것은가능하지않았다
 
윌라 커넌(Willa Ker n e n ) 
돌이켜 보면, 교회는 내 인생의 중심이었다. 그것은 캐나다에 있는 작은 마을교회의주일학교에서시작되었다. 10 살까지는서스캐처원주새스커툰 시에서있었던큰 교회에서여러활동에참여했다. 고등학교를마치고나서 는 회사에서 일을했고특수상과과정을 이수했다. 이후 마음이 있는곳에 서 일을해야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토론토로가서성직을 받지못한여성 교회활동가들을위한 2년거주교육과정에등록했다.
그때가19 5 1 년에서53 년이었고한국전쟁이한창이었다. 교육과정의학생 중 두명이한국인이었다. 교육과정중 선교수업은, 중국에서강제로추방된 캐서린호킨박사가담당하 다. 그녀는교회와세계를우리에게열어주었 다.“ 교회는 하나며 그것은 전 세계적입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어디에 있는 교회에서 일하는가는 여러분이 어디로 부름을 받고, 어디에서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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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필요로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신청했다. 예일대학에서어학연수를마친후, 전쟁이끝난지1년 조금지난 19 5 4 년 9월에한국에도착했다.
내 활동의 대부분은 시골에서, 특히 전라북도 이리에서의 전도사업이었 다. 나는시골교회들을방문했으며평신도교육프로그램을시작했다. 인근 지역에서 온 고등 학생들이 참여한 이리 기독교센터가 우리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나는청소년과성인들에게 어를가르쳤고때로는번역일을했다.
19 7 0 년 나는서울에있는대한장로교회소속의한국교회여성연합에서일 했다. 나는모임계획을짜고 문편지들을취급했고, 해외에서온 방문객들 을도왔으며, 전국적으로한국교회여성연합선교교육부워크샵을도왔다. 사람들이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투쟁에 가담하기 시작하자, 많은 여성들 이 우리사무실을방문했다. 그들은학생과노동자들의어머니들이거나, 당 국과 문제가있는 사람들의 부인들이었다. 우리는 친구가되었다. 우리는 ‘ 세계 기도의 날’ 활동을통해 한국교회여성연합과관계를 맺었다. 우리는 여성노동자들과 함께일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한국인 원 폭 피해자들을찾아봉사했다. 나는이 민목사가시작한‘ 생명의전화’ 일 을도왔고, 종종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일을거들었다. 박정희가 억압통치의 시작인 19 6 1 년, 군사 쿠데타로 정부를 장악했다. 19 7 2 년 10 월에공포된그의유신헌법은억압을강화했다. 탱크와무장한군 인들은거리에서볼수 있는흔한광경이었다. 학생들의시위도정기적인행 사가 되었다. 그리고 학생시위는 몽둥이와 최루탄으로 진압부대에 의해 거 칠고잔인하게 진압되었다. 심지어군대내부에도간헐적인봉기가있었다. 모든젊은이들은군대에서최소한3년을복무해야만했기에, 군대에는많은 대학생들이있었다. 이런봉기의소식들은대개덮어졌다. 그러나사무실에 서 우리는 군부에 의해투옥된 대한장로교 소속대학생이었던이광일의 어 머니를만났다. 이광일은뒤에신학을공부하여목사가되었고, 처음으로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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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에간 한국선교사들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90 대 초 온타리오주에서
봉직했다.) 
믿기지 않을정도의 장시간 노동과 말도안되는 저임금에 지친노동자들 의 항거도있었다. 남성노동자뿐만아니라여성노동자들의파업도있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회원들은 때때로 여성노동자들과함께농성을 벌 고, 그들이농성때문에해고당하면그들에게생활비를제공했다. 평화시장은기독교회관에서멀지않았다. 평화시장은복도의양쪽에작고 복잡한공장들이있는한 블럭정도길이의3층 짜리건물이었다. 1, 2 층에 서는신발, 옷, 직물, 값싼보석과로션등을비롯해상상할수 있는모든물 건이팔렸다. 3층에는옷을만드는공장들이들어서있었다. 이공장의환경 은 견딜수 없는것이었다. 똑바로 설 수 없는너무 낮은 천장들, 사람들과 기계들로꽉 찬바닥, 심하게부적절한난방또는냉방 장치, 그리고믿기어 려운장시간노동과저임금이그공장의작업환경이었다. 업자들은 더 나은 작업환경에 대한불만과 요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 다. 절망적인상황이었다. 19 7 0 년 11 월 어느날 오후, 봉제공장에서일하던 한 젊은이가 평화시장밖 거리에서분신을했다. 그는 그날밤 병원에서 숨 졌다. 22 세의 천주교 신자인 전태일은 노동조건에 항의하면서, 그가 할 수 있다고생각한유일한방식으로변화를추구했다. 죽기전그가어머니이소 선여사에게했던마지막부탁은“ 어머니, 제발저의투쟁을계속해주세요!” 다. 나는 이소선 여사와 알게되었고 함께일했다. 그리고그녀는 평화시 장에서일하는젊은노동자들을위해자신이맡은임무를충실하게해냈다. 분신은 비극적이지만, 또한어쩔수 없었다. 그것은인권에 대한열정이 있 는 많은사람들이 한국 노동자들을 위한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무언가 를해야한다고생각하는계기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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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2 년 10 월유신헌법이공포된지얼마뒤, 전라북도전주에있는한국기 독교장로회 소속 교회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유신헌법에의하면 정부에 반 대하는행위나연설을한 사람들을연행하고투옥시킬수 있었다. 중앙정보 부요원들이그런반정부행위를할 수 있는사람을감시하고있었다. 남문교 회 목사인 은명기 목사도 미행당하고 감시당하는 많은 교회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다. 수요예배를마치고난 후, 은목사는교회에남아무릎을꿇고기 도하다가중앙정보부요원들에의해연행되었다. 그가예배중에용납될수 없는말을했던것이다.
나는전주근처인이리에서살 때 은 목사와그의부인을알고지냈다. 그 래서재판을방청하고판결을보기 위해전주로가기로결심했다. 그러나은 목사는거의일년동안감옥에있었지만아무런판결도내려지지않았다. 은 목사는뒤에전라남도광주에있는교회에봉직했다. 19 8 0 년 5월 광주 학살기간에, 그는다시정부에저항하는사람들과동조했다고심한의심을 받았다. 연행의 공포 때문에 그는 숨어 지냈으며, 19 8 0 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캐나다연합교회에소속된선교사의집에머물 다. 그집은월터비 첨목사부부의집이었다.
비첨목사의 부인리어노어는그 경험을다음과같이 회상했다.“ 19 8 0 년 9 월, 우리는 캐나다연합교회 선교 간호사인 메리언 포프에게서 목숨이 위험 한 목사한 명에게 숨을장소를 제공할 수 있냐는 전화를 받았다. 처음에는 교회장로의지하실에숨어있었지만, 그의가족은두 아이가있었고아이들 이 우연히젊은친구에게무언가를말하면서조사를받을수 있다는두려움 을느끼게되었다. 다른캐나다연합교회선교사내외가2주일동안숨겨주었 지만더 이상그를데리고있을수는없었다. 다행히우리집에는다락이 있 었고다락으로 가는층계밑에는 잠 수 있는문이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우리집으로오라고했다.”
은 목사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다. 그에게“ 반역”이라는 이유로 사형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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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내려졌다. 그는무슨죄를지은것일까? 그는시위에참가한학생들과정 부 간의협상을담당하는연락위원회일을하도록요청받은것 같았다. 그의 죄목은젊은 학생들을경찰에넘겨주지않고그일을 수락한것이었다. 그를 잡을수있는정보를주는대가로현상금 10 0 만원이붙었다. 그의부인도그 가 비첨의 집 다락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우리친구메리언은 부인 에게 그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려고 애썼다. 은목사는 결국은 하 게사람를통해부인에게간단한편지를보낼수있었다.
19 8 1 년 3월 1일부터정치적긴장이완화되었고, 친구들은은 목사가그의 가족과교회로돌아가는것이안전하다고생각했다. 리어노어비첨은“ 교인 들을돌보며모든사람을위한진실과사랑그리고정의를주장하는사회정 의의복음을계속강론하면서, 그는목회활동을성실하게다시수행할수 있 었다”라고썼다.
 
박형규목사는서울평화시장에서멀지않은곳에위치한제일 교회(한국 기독교장로회) 목사 다. 남산에서열린 19 7 3 년 부활절예배는모든교파를 뛰어넘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연중 행사 고 많은사람들이 모 다. 권호경 목사를비롯한여러친구들의지지로, 박목사는정부정책의변화를요구하 는 선언문사본을돌렸다. 나는목사들이연행된뒤에이 사건을알았다. 나 는 목사두 사람모두를 개인적으로 알았고 목사부인이자 교회여성연합회 의열성회원인박목사의아내와도친분이있었다. 
19 7 3 년 8월에 열린 재판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참석했다. 나는 사람들을 재판에데려올 구치소차량을 기다리며 법원 밖에 줄을서 있었다. 그들이 흰 죄수복을 입고 나타나자마자, 사람들이 갑자기 박수를쳤다. 죄수들은 (박목사와권 목사그리고다른두 사람)은모두(수갑의한국적인형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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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승줄에묶여있었고, 증언을하는동안에만풀어주었다. 첫공판에서, 모 든 사람이 보기에박 목사와 권 목사가당당하게 그들의 신앙과교회에 대 해 증언을했다. 한한국인여자친구는“ 하느님은실제로하느님의말 을 듣지 못했을 사람들에게 역사하기 위해 그들을 활용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나는그 공판에서월요모임의회원인루이즈모리스, 버치더스트그리고 린다존스를알게되었다. 재판이끝나고죄수들이차를타고 구치소로돌아 갈 길 양편에줄을짓고서 있는군중들을 아직도 나는기억한다. 사람들은 네 사람이 지나갈 때 박수를보냈다. 나는 아직도 박 목사가 고개를 끄떡이 고 모두에게미소를지은채 사람들에게경의를 표하고있는것을볼 수 있 다. 또한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그에게 포기하지 말고 계속투쟁하라고 격려하던그의노모의힘찬목소리를기억한다. 그의강한성격이어디서비 롯되었는지확실히알수있었다. 
남편의입장을 완전히이해하고있었지만 조정하(박목사의 아내)는그가 구속될것이라고는미처생각하지못한것 같았다. 그녀는전체적으로아주 힘들어했다. 석방되자마자박 목사가 우선적으로 해야 했던 과제는 그녀를 “ 다음 번 구속”에 대비시키는것이었다. 그일을어떻게해냈는지는모르지 만, 박목사가다시구속되었을때 박 목사의아내는다른사람들이잘 견디 도록도와주는강한사람이되어있었다.
선고공판이있던날, 사람들이밖에줄 서 있었지만, 법원의문은결코열 리지않았다. 구속자들은아무도모르게법정으로호송되었고, 재판후에는 아무도보지못한가운데송치되었다. 당국이무엇을두려워했는지는알려 지지않았다. 그들은각각2년 징역형을받았지만, 선고공판이있고며칠뒤 에대통령특별사면인“ 금보석”으로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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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3 년 가을, 부활절 선언문 서명자들의 비 회동이 YM C A 회관의 다방 에서있을예정이었다. 이번목표는유신헌법에반대하는다른성명서를발 표하는것이었다. 지난번모임은 중앙정보부가막았지만, 이사람들은막을 수 있는사람들이아니었다. 월터비첨(캐나다연합교회선교사)에게이 모임 을 외신기자들에게 연락하고, 본인도카메라를 가지고 오라는 전갈이 있었 다. 린다존스는기자들을만나이야기를전했다. 린다는선언문의복사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발각당하거나 빼앗길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그녀 는 한국어를거의몰랐고한자를전혀몰랐기때문에 양파껍질같은얇은종 이를 복사 원본 위에 올려놓고 모든 성명서를 베꼈다. 문동환 목사와 페이 문 그리고 이우정이 다음날 밤에 그것을 번역했고,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그것을타자로쳐서여기저기로보낼준비를하 다. 
월터는 YM C A 다방으로 갔고, 그곳에는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커다란 현 수막이벽에 걸려있었다. 김재준목사와퀘이커원로인함석훈을비롯해약 열 명이거기있었다. 한 사람이 성명서를 낭독했고, 다른사람들은 연설을 했다. 그때사복경찰이그들에게밖으로나가준비한트럭을타라고명령했 다. 만세삼창을한후사람들은차분하게나갔다.
그런다음, 린다와월터는기독교회관에 갔다. 린다는한국기독학생회총 연맹에그 소식을전했고월터는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사무실에소식을전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인김관석목사가그 소식을접했을때, 그 는즉시“ 조치를취하기”시작했다.
연행된사람들은당국에항의하면서하룻밤을보낸다음곧 풀려났다. 중 앙정보부요원들은그들에게더 이상그런활동을하지않겠다고각서를쓰 라고했다. 당연히 그들은 거부했다. 요원들은각서에 서명을 받고 나서풀 어주라는 명령을받았다고 설명하면서 서명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들이 거부했기때문에계획은엉망이 되었다. 연행된사람들은풀려나고싶지않 다고말했다. 중앙정보부요원들은계속해서각서에서명하라고했다.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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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겼을것이라고생각하는가? 결국그들은서명을하지않고풀려났다. 그들 은요원들에게훌륭한점심까지대접받고차를타고집으로왔다.
 
김재준박사는민주주의와인권을위한투쟁을직접지원하지는않더라도 이해는 해야한다고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들을 설득하는 데 큰 역할을 했 다. 박형규 목사혼자서 주장할 때에는, 다른 목사들이 그가어리석게도순 교와 같은 행위를 하려 한다고 말했다. 많은 성직자들이 박 목사의 공개적 활동을비판했다. 그러나김재준박사역시위험을무릅쓰자, 다른목사들은 박목사와그의공개적인저항을더욱진지하게받아들이기시작했다. 김박사는한국기독교장로회의실제설립자는아니지만아주오랫동안지 도자로 받아들여졌다. 교수이자뒤에 서울 소재한국신학대학교총장에 취 임하게 되는김 박사의 가르침에 대해,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너무 자유주의 적이라고생각했다. 예를들어, 그는성서를절대적으로말그대로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으며, 기독교인도성모의 처녀수태를 의심할 수 있다 고 가르쳤다. 또한 교회는 초교파적이어야한다고 주장하고, 세계교회협의 회와아시아기독교협의회와연대를권장했다. 당시는미국의보수교회지도 자들이세계교회협의회가공산주의라고주장했던때이다. 교회가사회문제들에개입해야한다는김 박사의가르침도논쟁의대상이 되었다. 19 5 3 년 봄 총회에서한국예수교장로회는그러한활동가적신앙교 의를 지닌 사람들은 더 이상 한국예수교장로회에서 환 받지 못할 것이라 고 선언했다. 이것이 장로교회의 분열을가져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환 받지못한지도자들은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조직을구성했다. 처음부 터 김재준 박사는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가장알려진 지도자들중 한 명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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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4 년, 우리는 소위“ 인민혁명당” 관련자들의사건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지오 과짐 시노트의을자세히보시오). 다음내용들은인혁당사건 에대한내개인적인관계와회상을정리한것이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구속된 사람들의 부인들 중 몇 사람이 갈릴리교회 의 일요일오후예배와한국기독교회관에서열리는목요기도회에참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혁당부인들”을 알게되었고, 가능하면그들을도왔다. 그들역시서로의지하기위해정기적으로모 다. 항상모자를썼기때문에, 부인들중한명은“ 모자를쓴부인”으로알려졌 다. 그녀는거리낌이없었고, 듣고자하는사람이면누구에게나인혁당사건 의 진상을이야기했다. 다른부인으로는근육발육장애가있는십대의아들 을 둔의상 디자이너가있었다. 내가그녀의집을방문했을때, 그아들이요 위에누워있던기억이난다. 나는 또 그녀가 만든옷도가지고있었던 것으 로 기억한다. 그녀의남편은서대문교도소에서적십자병원으로옮겨져서숨 졌는데, 우리는그가고문때문에죽었는지자연사했는지확실하게알지못 한다. 
우 여사는우리가알게된 부인들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키가크고매 력적이며, 교육도많이받은사람이었다. 그녀는잘 생겼고 교육을 많이받 은 남편을새 친구들에게열심히설명했다. 불행하게도그는결국사형선고 를받은사람들중한명이었고, 우리는그를 만나지못했다. 그때, 우리는 많은 부인들이 중앙정보부 본부에 끌려가서 남편들이 공산 주의자라고 자백하도록 강요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소심한 사람일수록 더 잔인하게 대했고, 허위자백을받는데 걸린시간도 더 짧았다. 그런 허위자 백이대법원재판에서“ 증거”로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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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성은잠을재우지않은채 4일동안잡혀있었다. 그녀는결국아이들 이 기다리는집으로돌아오기위해허위자백을했고, 남편은무기징역을선 고받았다. 다른여성은풀려난뒤에다시끌려가는것이두려워집에 가기를 무서워했다. 그녀는자신도사형을선고받을수있고, 아버지의죄를보상하 기 위해 자식들까지 죽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여성들은 이렇게 “ 증거”를찾으려고혈안이되어있다는것은당국자들이증거를전혀확보하 지못하고있다는것을증명한다고생각했다.
많은정치범들은 심지어 가까운 가족들의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인 혁당관련자들에게는절대면회가허락되지않았다. (사실, 가족들은그들의 연행을공식적으로통보받지도못했으며, 신문을읽고나서야그 사실을알
았다.) 
예전에는누구나교도소에가서 특정구속자에게돈, 책또는선물들을
치할수 있었다. 그러나가족들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법령이 발표되었다. 당국이방문객들을통제할수 있도록, 방문객들은신분증을제시해야했다. 이것은 가난한 가족과 구치소에서 멀리떨어져 있는 가족들에게커다란 문 제를야기시켰다. 서울에서먼대구에살고있는인혁당가족들이그런 경우 다. 수감자들은서울서대문 구치소에 있었다. 돈을 버는사람이 없는그 들의가족은 서울로 오는것은 고사하고, 먹고살기도 힘들었다. 대개서울 에사는친척들이구속자들에게줄돈을모았다.
서대문구치소, 특히인혁당 관련자들이 구금되어 있던곳의 사정은 끔찍 했다. 인혁당관련자중 일부가수감되어있던감방에서풀려난수감자와이 야기를나눈부인은“ 개돼지만도못한취급을받고있대요”라고말했다. 그 녀는 몇 차례씩,“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취급을 당하고 있답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또한 보리밥 외에아무것도먹을것을주지않는다고 말 했다. 김치를원하면돈을내야만했다.
인혁당과 다른 사건들에 대한대법원 판결예정일 전날밤에 월요모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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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우리는가능한많은사람들이대법원에가도록결정했다. 나는19 7 5 년 4월 8일 소위“ 공개재판”에 갔지만, 자신있게말하건대그것은결코‘ 공 개’도아니었고‘ 재판’도아니었다. 판사들이줄지어들어왔고, 이름과판결 을 읽었다. 판사들이서른일곱사람들에대한판결을하는데, 그리고그 중 여덟사람에 대해서는 사형선고를내리는데 10 분도걸리지 않았다. 이 여 덟사람들은정부가조작한“ 인혁당공작”의비극적인희생자들이었다. 내가간신히법정에들어갔을때, 여덟사람의부인들과 그리고미혼인한 사람의어머니는충격, 슬픔, 분노그리고좌절에휩싸여있었다. 그들은“ 모 두 조작이다! 증거없이사형선고라니!”라고소리를지르면서우산으로의자 를 치고있었다. 월요모임의몇몇회원들과다른선교사들은아내들과함께 법정안에있다가모두끌려나오거나들려나왔다. 
다음날아침(4월 9일) 동틀무렵, 사형이집행되었다. (월요모임의대응에
대해서는제10 장을보시오.) 
같은 날, 정부는 공식적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관석 목사를 횡령이라는말도안 되는혐의로기소했다. 제일교회권호경부목사, 제일교 회 박형규목사, 그리고도시산업선교회의지도자인조승혁목사역시기소 되었다. 정부의통제를받는뉴스매체들조차이 횡령죄는네 명의목사들이 구속자들, 특히인혁당관련자들의가족들을도왔기때문이라고간접적으로 보도했다. 정부는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신뢰성이 훼손되어야하는 반정 부인사들의아성이라고생각했다. 인혁당관련자들의사형집행에대한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와교회의예상되는항의를미리차단하기 위해서이 때를 시기로잡은것이었다. 
처형 이틀뒤 목요기도회에서 무슨일이일어날까봐 우리는 상당히 걱정 하고있었다. 문동환목사가 예배중에설교를 했다. 그는 사정없이 정부를 비난했다. 물론 그곳은 형사들과 중앙정보부 요원들로 득실거렸다. 기도를 주도한사람과예배를 집전한사람은위험에처했다. 당국자들은그들을“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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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주의자”또는“ 용공분자”로만들고자했다.
우리는 대구에서 올라온 인혁당 부인들이 구치소에 있다는 소식을들었 고, 기도회에참가하고 있던우리중 몇 사람이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그곳 으로향했다. 우리는그들이아직죽은남편의시신들을인도받지못했다는 소문을들었다. 
우리가구치소에도착했을때, 그곳에는아무도없었다. 그래서우리는모 두 장례식을위한절차를준비하고있다는외곽에있는천주교회로향했다. 버스를타고가는길에 우리는우리가알고있는많은 사람들을포함한일단 의군중이구치소운구차를둘러싸고있는 것을보았다. 우리는버스에서내 려서그들과합류했다. 
우리는처형당한사람의아내와 딸을태우고교회로가는 도중, 운구차운 전사가 시신을 곧장 화장터로 가져가라는 명령을 갑자기 받았다는 것을알 게되었다. 가족들의장례식조차허락하지않았다!
우리의수가많지는 않았지만, 있는힘을다해이극단적인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기로 결정했다. 몇 시간 동안 차량을 저지했지만, 결국 우리는 차량 앞에있는 우리를 해산시키기위해 파견된 수백명 정도의 진압경찰에게는 상대가되지않았다.
정부는시신을검사하기전에화장시키기로했던것이다. 부인이운구차에서끌려나왔다. 그러자그녀는범퍼를 움켜잡으면서, 차 량 앞에몸을던졌다. 나머지사람들은최대한오랫동안경찰들을막았지만 결국그것은 시간의 문제 다. 우리가차량정면을 막고있는동안, 견인차 가 구차의뒤를연결해서끌고가버렸다. 진압부대와교착상태에빠져있 는 동안, 시위대 가운데 몇몇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결국 시신없이 사람 들은계속교회로 향했고,“ 우리승리하리라”라는노래를 부르며길을걸었 다. 우리는살해당한사람들을위해천주교-개신교합동장례식을올렸다. 시신들중 몇 구는화장되었지만, 가족의바람에반하여강제로화장시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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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지아닌지는그 당시에 알 수가없었다. 장례식으로가는도중있었던 사 건은더 많은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여러가지추론이 있었다. 이 시신들을 화장하는것이왜그렇게중요한것일까? 그들이고문으로너무망가져서도 저히다른사람들에게보여줄수 없는지경이었나? 이것이이들을재판정에 데리고나오지않은이유 는가? 그리고그 때문에인혁당관련자들을처형 해야만했는가? 당시여러달 동안, 인혁당사람들중 누구도가족들을만난 적이없었다. 다음 날 오후, 목요기도회와관련된 목사들이 중앙정보부 본부로 끌려갔 다. 신부들은 다음날 풀려났다. 목사들은매일밤 늦게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음날다시 돌아와보고해야만했다. 다음목요일, 목요기도회의책임을맡 은 사람들은기도회가열리지않을것이라는게시물을붙여야만했다. 대신, 소규모의비공식적인예배가보통사용하던강당밖의복도에서열렸다. 대 구 인혁당 관련자 부인들 중 세 명이상복을 입고참석했다. 그들은목요기 도회의힘과 예배가주는위로를얻기위해 서울로왔으며, 우리에게민주회 복을 위한 투쟁을 계속할 것과 남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해 줄 것을 촉구했다.
그 날 기독교회관에는예배참석자들보다더 많은정보부 요원들이 있었
지만, 우리는약식예배를마칠수있었다.
 
“ 횡령”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19 7 5 년 감옥에서 석방된 후, 박형규 목사가갈릴리교회에서해준이야기들에대한특별한기억이있다. 박 목사는그가알게 된많은재소자들의목사가 되었다. 그는무단침입과 관련되어구속된두 젊은이들의이야기를했다. 그들은생활비를벌길이없 어 거리에서살고있었다. 그들은박 목사에게자기들이어떻게살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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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했다.“ 담벼락위에앉아있다가정원으로뛰어내리면서, 혼잣말을합 니다.‘ 만약 내가잡힌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만일 내가 잡히지 않는다 면, 그것은더좋은일이다.’”그이유는비록난방이되지않더라도, 감옥안 에 있으면 적어도 매서운 겨울추위에서 피할수 있기때문이다. 비록 양이 많지않고맛이끔찍하더라도, 최소한먹을것도있기때문이다. 박목사는 나와많은다른사람들에게가난한 사람들, 부랑자들그리고죄 수들에대한예수의사랑을가르쳤다. 한번은3,00 0 명의개신교도들이모인 집회에서연설하면서, 박목사는마이크로“ 우리는감옥안의엄청난비 을 알고있습니다”라고속삭인다음,“ 하느님은살아계십니다!”라고외쳤다.
 
19 7 5 년 1월, 박대통령은2월에자신의통치에대해국민투표를실시할것 이며, 그후로는더이상의반정부활동은허용되지않을것이라고발표했다. 그의의도는두려울정도로명확했다. 박정희는자신과자신의책략에반대 하는사람들을짓밟을수 있도록휠씬더많은권한을 스스로에게부여한유 신헌법하의강압적인통치가국민들의전폭적인지지를받는다고발표하고 자했던것이다.
 
투표일이다가오면서, 정부는투표찬반여부에향을끼칠수 있는토론 을 일체하지말라고말했다. 연설, 광고, 소책자, 포스터, 확성기, 카셋테입 등이모두금지대상이었다. 그러나거리는국민들에게애국적인의무감으로 투표를 꼭 해야한다는 것을포함해 대통령의 국민투표 연설문이 적힌 커다 란포스터들로가득찼다. 야당이이런모순된상황을지적하자, 정부는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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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에게강요하는것이아니라단지그들을“ 계몽”하는것이라고설명했다. 그러나야당 지도자들이 국민투표의 진정한의미에 대해 유권자들을 감히 “ 계몽”하려한다면, 구속되어5년이하의징역에처할수있었다. 정부는 2월 12 일 국민투표에 유효투표자의80 퍼센트가 참가했고, 그 중 73 퍼센트가“ 찬성”했다고 발표했다. 반대진 의어느 누구도 그 수치를 믿 지 않았다. 그러나대통령이재야인사들에대한더욱가혹한탄압을합법화 하기위해국민투표를이용할수있고, 또이용할것임은분명했다.
 
주요 일간지 중 하나인 동아일보를 제외한 모든 언론매체가 국민투표에
대한정부의선전을그대로보도했다. 그때가동아일보가군사독재의대변인이되기를거부한처음은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그러나19 7 4 년경정부는 동아일보에 광 고를중단하라고회사들에게압력을가하면서보복을시작했다. 
19 7 4 년 12 월 26 일, 신문은 빈 칸이 있는 그대로 인쇄되었고, 동아일보는 개인이나단체들이언론자유를위해투쟁하는동아일보에대한지지의 표시 로광고란을채워줄것을공개적으로호소했다. 
반응은놀라웠다.“ 평범한사람”도 발언할기회가생긴것이다. 어느날세 어보니두 페이지에 걸쳐페이지당 60 개씩작은광고가실려있었고, 다른 두 페이지에는그보다 좀 더 큰 10 여 개의광고가 실려있었다. 광고내용은 동아일보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 는 한국인들에게희망을 주는것이기도 했다. 많은 광고가 슬픔, 절망 그리 고 좌절을 나타냈다. 어떤대학교수가서명한 한 광고는“ 나는조용히 미쳐 가고있다!”라고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런슬픈광고조차도국민들이 정부 의의도를알고있음을보여준다는측면에서고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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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치 초기에는 지식인들만이그런 호소에 반응을 했을것이다. 그러 나 이제 노동자, 택시 운전사, 중소기업인, 그리고 일반시민들이 진심어린 광고를보내왔다. 많은광고들이시골교회, 교회단체들, 그리고더큰기독 교단체들로부터왔다. 이런광고들은노예나정의에대한성서의구절을인 용했다. 많은광고주들은비록돈이아주조금밖에없지만, 동아일보에도움 이된다면가능한만큼돈을내고싶다고밝혔다. 
 
“ 종교의 자유”는 갈수록 공론에 불과하게 되었다. 박형규 목사의 제일교 회에서진행되는예배를방해하기위해“ 깡패”들이왔다. 그교회의장로한 사람이중앙정보부에끌려가서,“ 어떤목사가”다시는그교회에서가르치거 나강론하는것을허락하지말라는통고를받았다.
이런저런이유로, 제일교회는거리에서일요예배를드리게되었다. 길거 리에서여러 달 (또는 몇 년?) 동안 예배를드렸고, 그 과정에서 대중들의 많은 지지를얻었다. 서울을 방문한외국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노상에서 열리는교회의예배에데려가달라고부탁했다. 그 위치는우연히정부에 더 협조적이었던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가장 큰 교회 바로 옆이었다. 그 교 회의교인들은 일요예배를보러갈 때 제일교회의노상예배를지나가야만 했다. 
정부는노상의예배참석자들을쫓아내기위해진압경찰을보낼수는없 다고 생각했지만, 대담하게도 기독교 지도자들을 연행해서 고문할 수는 있 다고 여겼다. 예를 들면,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사무총장 대리가 중앙정 보부본부에끌려가서24 시간동안고문을당했다. 왜? 중앙정보부의목표는 목요기도회를끝장내는것이었기때문이다. 특히목요기도회가구속자가족 들을지원하기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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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웅중한사람이이우정교수 다. 그녀는 19 7 0 년대와그후 대부 분의활동의중심에 있던인물이다. 나는이우정이 토론토(19 5 1 ~53 년)에서 유학하던시절에함께공부하면서그녀를알게되었고, 특히19 7 0 년 서울에 서 일하기시작한다음부터는그녀와긴 하게일하는광을누렸다. 19 5 1 년 유학생으로 캐나다에 도착했을때, 이 여사는 아주수줍고, 부족한 어 구사력에 지나치게 민감했으며, 사회적인 실수를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했 다. 한국은 전쟁중이었다. 그녀는 여러면에서 곤란을 겪었으며, 풍요로운 사회에서생활하고공부하면서자주고국에있는가족들과친구들을생각하 다. 
19 2 3 년 8월 1일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독선적이고유교적인 아버지와온화한불교신자인어머니는그녀를전통적으로키웠다. 논리적으 로 그녀는순종적이고, 유순하고, 상냥한한국여인이되어야만했다. 한국은 이 여사가22 세가될때까지일제의 가혹한통치를받는 식민지 다. 부모들 은 일본군대의종군위안부로끌려가는것으로부터그녀를보호하기위해, 그녀의이름을족보에서빼고기독교인친구와함께은둔할곳으로보냈다.
 
이우정은교회에다니기시작했고, 기독교인이되어, 신학교에가기로결 심했다. 아버지는강력하게반대했다. 한국전쟁동안, 지주인아버지와공장 소유주이고 판사인 오빠들이 위험에 처해있었다. 한 오빠는 공산당원에게 납치되어다시만날수 없게되었다. 이우정은가족모두집을떠나서 시골 에 있는친척집으로 가야한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날 밤, 가족들이 집 을 떠난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집이폭격당했다. 부모님은하느님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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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구했다고 생각했고, 오랜 피난생활 동안 하느님이 그들을 보호해주신 다고믿었다. 
한국에서한국신학대학교를마친후, 이우정은토론토에서2년 동안신학 과 그리스어를공부했다. 한국에돌아오자마자, 그녀는신학교 교원이되었 다. 19 7 4 년그녀는 서울여자대학교에서윤리학과신약성경을가르치는교수 가되었다. 그녀의정치의식은19 6 0 년대후반과 70 년대초반에성장했고, 다 른교수들과함께탄원서에서명하고정부정책에항의하기시작했다.
19 7 3 년 이우정은 한국교회여성연합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범교회적인 여성조직인 한국교회여성연합은 주요 개신교 교파들의 여성지도자들을 단 합시켰다. 이우정의 지도하에, 그들은 용기있게 다양한 사회정의 문제들에 개입하기시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젊은 한국여성들을 대가로 하여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일본 남자들의 한국방문을 권장하고 있었고, 기생관광은 당시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 다. 기자회견, 강연, 여성단체의집회, 공개적인항의등을통해, 이우정 교수와 한국교회여성연합은 이 부끄러운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19 7 8 년경매춘관광산업의근거지는서울에서 남쪽의제주도로옮겨갔지만, 한국교회여성연합은기생관광반대운동을계속해서진행했다. 
19 7 4 년 3월, 이우정은 미국 등지에서 온 교회여성연합 회원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이 만남을 통해 정의에 대한 이우정의 헌신은 더욱 깊어졌다. 예를 들면, 그녀는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걱정을접하게되었다. 하나는재일교포에대한차별대우이며, 다른하 나는한국인원자폭탄피해자들의슬픈현실이었다.
많은한국인들은히로시마와나가사키에살던 2만 명 이상의한국인원폭 피해자들이보상과진료도받지못한채 일본에의해조용히한국으로송환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한국교회여성연합은 이 피폭자(히바쿠 샤)들을찾아나섰고만나기 시작했다. 또한그들에게의료보험을보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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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고주장했고, 병원에데리고갔으며, 그들을지원하기위한기금을조성 했다. 나아가그들의상황을공개했고, 그들을대신해서한국, 일본, 미국의 정부에탄원을하기도했다.
이우정은또 한국인이라는이유로채용을공개적으로거부했던히다치사 가 한국인을채용하도록압력을행사했다. 한국교회여성연합이전개한공론 화 작업과 보이코트 운동은 아주 효과적이어서, 중앙정보부가 이들에게 탄 원을취소하라고압력을가할정도 다. 이들은취소하지않았고결국승리 했다.
박정희정부의탄압이더욱강해짐에따라, 한국교회여성연합은정치범들 과 그들의가족을지원하기위한기금을모으기시작했다. 또한 유신헌법철 폐운동도지원했다. 이우정은착감시를받았고, 자주경찰에게시달림을 당했다. 19 7 4 년 4월말, 그녀는중앙정보부본부에끌려가일주일동안억류 되었고학생 활동가들을경제적으로지원했다는이유로기소되었다. 정부는 그녀가한국학생을북한과연결시키려는공산주의공작에가담했다고 주장 했다. 이러한조작은민주적인반대파를위협하기위한정부의전형적인계 략이었다.
이우정교수는점점당국의노여움을샀는데, 부분적으로그 이유는외신 으로부터 신뢰를 받았고 외신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그녀가 국제적인 모임에서 한국의 민주화투쟁 이야기들을 했기 때문에 미워했고, 그녀를침묵시킬방법을찾았다.
정부는19 7 6 년 2월까지교수직에서그녀를해직시키라고서울여자대학교 에 압력을 가했다. 이우정은 교수직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한국교회여성연 합의회장직을사임하거나양자택일해야만했다.“ 교수로서나의직업을기 꺼이 대신할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교회여성연합의 일을 맡아서 필요 한 일을할 사람은없습니다. 게다가내가[대학으로부터] 해고당하지않으리 라는확신도없습니다”라고그녀는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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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날 조용하고수줍었던, 이우정은용감하고자기확신에찬 여성으로 성장하여 인권과 민주주의의 강력한수호자가 되었다. 한번은 중앙정보부 조사관들에게이렇게 말한적도있다.“ 이제 내가결혼을하지않은이유를 알겠다. 나때문에고통받거나걱정할사람은없다. 맘대로해라! 15 년 징역 형을때리거라!”
 
내가기술한모든사건들중 내가가장직접적으로관련된사건은19 7 6 년 3월 1일사건이다. 
이 일은갈릴리교회에서2월 29 일 일요일오후아무것도모른채 시작되 었다. 나는 다음날(3월 1일) 있을 메리언 포프의 생일파티에이우정 장로를 초대했다. 이자리에는메리언커런트도참석할예정이었다. 이우정을제외 한 우리 셋은 모두캐나다연합교회소속 선교사들이었다. 이우정은 초청을 수락했고, 와서함께저녁을 먹었다. 그리고그녀는 밤새도록 있을수 있는 지물었다. 놀란우리는즉시좋다고했다. 
그녀는예상밖의 부탁을한이유를 설명했다. 그녀는문익환목사을비롯 해뜻이같은 열두명이서명한구국선언문을 가지고있었다. 다음날명동성 당에서열리는범교파적예배에서그선언문을낭독할예정이었다. 
3월 1일은한국의국경일로19 1 9 년 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선언”을 기념하는날이다. 19 1 9 년 당시, 놀랍게도전국에걸쳐약속이은 하게전달 되어, 정해진시각에전국의모든도시에서사람들이모여독립선언을외쳤
다.“ 만세!”
그 사건으로많은사람들이목숨을잃었지만독립은실현되지않았다. 그 러나한국인들은여전히19 1 9 년 독립선언정신을기리고, 매년그 정신에담 긴용기와저력을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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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6 년 3월 1일구국선언은예배시간에낭독되는순간까지비 이지켜져 야만했다. 중앙정보부의가공할정보수집능력을감안할때, 선언문의서명 자들은 가장안전한 방법은 여성이 그 선언문을 예배장소로 가져가는 것이 라고결론을내렸다. 그렇게하더라도, 누군가알아채고공개적으로낭독하 기전에선언문을압수할위험이있었다. 그래서이우정은밤새우리와함께있자고부탁한것이었다. 분명히선언
문을추적해외국인의집까지오지는않을것이다. 
다음날, 더욱조심하기위해선언문을메리언포프의지갑속에 넣고명동 성당으로가져갔다. 선언문서명자들은문익환목사, 문동환목사, 연세대학 교 교수 서남동 목사, 한국신학대학교안병무 교수, 이우정 장로 등이었다. (위 사람들은 한국기독교장로회소속.) 그 밖에도 이태 변호사 (감리교신 자), 고려대학교 이문 교수, 야당 정치지도자이자 뒤에 대통령이 된
(19 9 8 ~20 0 3 ) 김대중 (천주교신자), 그리고20 0 4 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이된함세웅신부(천주교) 등이있었다.
예상대로예배중에중앙정보부요원들이왔고, 서명자전원이연행될 것 임을알았다. 우리는이우정에게그날밤다시우리에게와서함께지낼것을 제안했다. 그녀는그러면우리가위험에빠질수있다고말하면서거절했다. 그녀는그날밤아주 늦게우리에게전화를했다. 신중하게어로말하면 서(보통 우리는 어로대화하지않는다) 그녀는“ 경찰이왔어요. 그리고경 찰과함께가야만합니다. 약속한대로내일당신을만나러갈 수 없다는것 을 알리도록 전화는 해도 된다는군요. 나는경찰에게 외국인이 한국인들은 믿을수없다고생각하면안된다면서설득했답니다.” 우리는다음날만날약속을하지않았기때문에, 이것이중앙정보부에끌
려가고있다는것을우리에게알리는이우정의방식임을알아차렸다. 우리는 전화를 끊었고, 몇 분간 의논한 끝에, 뉴욕에 있는 교회여성연합 사무총장인도로시와그너에게전화를걸기로결정했다. 도로시는이우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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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아는사이 고, 한국의민주주의와인권을위한투쟁에대해서도잘알 고있었다. 몇년전 와그너여사는미국교회여성연합사람들을인솔하고한 국을포함한아시아 6개국을방문한적이있었다. 그후미국교회여성연합은 일본교회여성연합의주최로도쿄에서열리는‘ 세계기도의날’에 참가할대 표를순방국마다두 명씩초대했다. 한국의대표로는이우정과공덕귀가초 대받았다. 공덕귀는이승만 대통령을 쫓아낸 19 6 0 년 학생혁명과19 6 2 년 박 정희의쿠데타사이에재임했던전직대통령윤보선의아내다. 교회여성연합의한국방문동안, 우리선교사들은도로시와그너와친분을 텄고, 그녀가이우정과친구이며이우정을높이평가하고있다는것을알게 되었다. 그래서19 7 6 년 3월 1일 밤, 우리는뉴욕에있는그녀에게전화를걸 어서명동성당에서무슨일이벌어졌으며이우정에게무슨일이일어났는지 를설명했다.
다음날 아침, 중앙정보부는 도대체 어떻게 <뉴욕 타임스>지가 그렇게 빨 리이우정의체포에대해 보도할수 있었는지도무지이해할수가없었을것 이다. 
그이후 두주일동안은 매우걱정스러웠다. 우리는선언문에서명한사람 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중앙정보부 본부로끌려갔다는 사실을알았 다. 10 일뒤, 우리는이우정이풀려나서세브란스병원에있다는소식을접했
다. 우리가 곧바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가풀려나서 크게 안도했고, 그녀 와 함께끌려간다른사람들이어떻게되었는지매우걱정되었다. 이우정은 잠을자지못한 채 계속심문을당한것을 제외하고고문을당하지는않았다 고말했다. 10 일간의구금기간중 7일동안잠을재우지않았다고했다. 선언문의서명자가운데유일한여성은풀려났다. 다른사람들은모두기 소되었고구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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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구국 선언문에 서명한 사람들의 부인들에게 재판에 참석할 수 있는 가족용방청권몇 장이주어졌다. 가족들은그들의방청권을던져버리고, 방 청권을가지고재판정에간다는것은한국의4천 년 역사중 최초의비공개 재판이라고항의하면서14 번의재판을모두거부했다.
부인들은남편을지원할독창적인방식들을생각해냈다. 예를들면, 모두 보라색한복을만들어(자주는고통과승리의색깔이다) 재판이열리는날에 입었고때로는숄을걸쳤다. 그들은종종“ 우리승리하리라”라는노래를부 르며법원앞을함께 걷곤했다. 어느날은각자양산을가져와서, 그것을손 목에걸치기도하 다. 이목을집중시킬장소에도착하여일렬로서서신호 에 맞춰다함께양산을펴기도했다. 양산에는사건에대한 이나항의문구 가 적혀있었다. 그 다음번에는 양산대신접이식 부채를 이용했다. 부인들 은함께부채를펴서그위에쓴 자를보여주었다. 
부인들은젊지않았고, 모두같은옷을입고 거리를함께걸으면서저항의 노래를불 고, 경찰이나사복경찰이뒤를따라가고있었다. 이광경은굉장 한 관심을끌었다. 그들은신중하게시위장소를선택했다. 어느날은법원에 서 멀리떨어지지 않은덕수궁 정문앞 계단아래 다. 여러번 공무차량이 와서그들모두를 강제로차 안에태워어딘가방해가되지않는곳으로 데 려가서내려놓고가버렸다. 부인들은집이나기독교회관으로알아서돌아가 야했다.
부인들은기도회를 계속했고, 기독교회관에있는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정기적으로 만났다. 3· 1 선언문의 여성 서명자인 이우정과 이태 박사가 그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상 에 알릴새로운방법들을모색했다. 그들은곧 감을얻었다. 그방법은승 리의숄을짜는것이었다.
그들은승리의 숄을 보라색과 라벤더의 다양한색상으로 뜨개질했는데, 이는예수의고통과승리를상징할뿐만아니라한국의국화인무궁화의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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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을상징했다. 양모로만들어진숄은“ V”자 형태로승리를상징했고, 스티 치는선언문을발표한날인 3월 1일을의미하는3-1이었다. 각각의작은 V 형태의 문양은 4개로뜨개질된 스티치가 필요했다. 부인들은 민주회복이라 는 말을반복하면서뜨개질했다. 숄을통해그들은 고통과 승리, 그리고 조 국애를표현하고자했다. 
소박하지만 감동적인 이 사업은 급속히 성장했다. 숄은 국지적으로 팔렸 지만, 말이 퍼지면서 곧 전 세계로 팔려나가게 되었다. (진 매튜스의 중 관련된이야기를보시오.) 숄은한국정치범들의고통에대한국제적인관심 을 끌었으며, 구속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대의를 위한 후원금을 모아주었다.
미국에서는 뉴욕에 있는‘ 한국인권을 위한 북미연대’와 시카고에 있는 ‘ 아시아인권을위한교회위원회’가 개당15 달러의기부금을받고숄을팔았 다. 캐나다에서는교회여성연합이캐나다연합교회소속교회들에숄을팔았
다. 캐나다신도들은가끔숄 값을지불한다음에숄을다시돌려줘되팔수 있도록했다. 미국, 캐나다, 기타지역에서모은기금은가족이없는구속자 들을지원하는데사용되었다.
이 사업에 참여한 우리 개개인은 아직도 자랑스럽게 자주빛 숄을 간직하 고 있다. 나는 부인들이 숄을만들었던 건물에서 일했기 때문에, 매일 그들 과인사했을뿐만아니라, 나도뜨개질을배워서부인들과함께숄을짰다. 김대중의 부인(이희호) 역시 그 모임의 중요한 일원이었고, 우리 모두와
친구가되었다. 내가한국을떠날 때, 그녀는남편이써서표구한서예 한점 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나는 집안의 눈에 띄는 장소에 그것을 자랑스럽게 걸어놓았다. 이 작품에대한긍지는 20 년 뒤 김대중이한국의대통령이된 다음휠씬더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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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구국선언문 서명자들의 공판 전날마다, 가족과 관심있는 친구들은 제일교회에모여예배를드렸다. 나는정기적으로이예배에참석했고, 방청 권이있을때는재판에도참석했다. 이예배 중하나를 나는잊을수가 없다. 대개, 교회뒤쪽에는수많은사복경찰들이앉아있었다. 예배가시작할즈음 에, 앞쪽에 앉아있던이해동 목사부인이 일어서서 예배참석자들을 향해, “ 저사람들이나가길바랍니다!”라고말했다. 요원들중누구도움직이지않았다. 그러자그녀는직접그들을향해,“ 제발나가주십시오!”라고소리쳤다. 그 순간, 예배에참석한남자들이모두조용히일어서서요원들쪽으로움
직이기시작했다
요원들은조용히일어서서교회를떠났다.
이후사복경찰은재판전날의예배에모습을드러내지않았다. 그들은틀
림없이건물바로밖에있었지만, 최소한눈에띄지는않았다. 그 다음일요일갈릴리교회에서, 예배를감시하기위해항상참석하는요 원이교회뒤쪽에있는일상적으로자기가앉았던자리에앉았다. 예배가시 작되자,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요원이 앉은 곳으로 걸어가서 조용히 나가줄 것을요청했다. 그가 나가지 않자, 박 장로 는 팔을뻗어그의손을잡더니 힘껏잡아당겼다. 그러나체구가 작았기 때 문에그를강제로밖으로쫓을수가없었다. 그러나그 요원은박 장로의결 심을알아차리고일어나서밖으로나갔고, 그때부터계속매주예배 동안교 회밖에있었다.
선언문서명자들은헌법을위반한죄를범한것으로밝혀졌다. 그들은15 년 징역형을선고받았으나김대중을제외하고는모두2년 이하복역하는것 으로끝났다. (김대중에대해서는아래를 보시오.) 여성두 명은추가로 3년 간시민권정지와함께 5년간집행유예를선고받았다. 나는 기독교회관의 사무실에서 여성들의 모임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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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목요기도회와갈릴리교회일요일오후예배에참석했다. 갈릴리 교회예배중에 있었던나눔의시간에, 당시십대 던문동환목사의아들이 아주자랑스러운목소리로구속된아버지에대해서이야기했던것을기억한 다. 안병무부인박 숙여사는자신의열 살도안된어린아들이소신을지 키다가 감옥에 갇힌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이러한 증언들 에 힘입어, 저명한기독교지도자들의가족들은갈릴리교회와목요기도회에 참석한다른양심수가족들과돈돈한유대를형성했다. 구속된지 얼마지나지않아문익환 목사는단식투쟁을시작했다. 그는광 야에서 40 일간 단식한 예수의 본보기를 따라서 40 일간의 단식을 계획했다. 그의 부모님은 당시캐나다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단식소식을 전해들은 어 머니는 감옥에 있는 두 아들(문익환, 문동환)을 면회하고 문익환 목사에게 아버지의 특별 전언을 전달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오기로 결심했다. 한국정 부를거리낌없이 비판했던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당시 자신이 직접 한국에 가는것은위험하다고생각했다. 그가문익환목사에게보낸전언은문익환 목사의단식의목적과관계가있었다. 그것이하느님의 광을위한것인가? 아니면자신의명예를위한것인가?
문익환 목사는 아버지의 전언을 심각하게 경청했고, 아마도 아버지가 옳
다고생각한것으로우리는들었다. 그래서그는단식을끝내기로했다. 문익환목사의아내인박 길 장로와이이야기를나누는 동안, 우리각자 가 문익환목사의단식을이어받아한번에하루씩그날을나라와특히인권 을위한특별기도시간으로만들자고제안했다.
오늘날까지나는이 단식을기념하기위해박용길장로가나에게준 책갈 피를 나의 성경책에 끼워 두고 있다. 이 책갈피는 어울리게도 보라색이다. 앞면상단에는하얀잉크로그녀가 쓴“ 나라를구원해 주소서.”라는 씨가 있다. 다른 면 아래에 있는작은금색 십자가에는“ 단식기도”라고쓰여있 다. 그아래에는다음 귀가있다.“ 먼저하느님의왕국과그의정의를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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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태복음6장 33 절). 책갈피뒷면에그녀는나의한국이름과 19 7 7 년 11 월 3일과19 7 8 년 1월 27 일이라는두개의날짜를기록했는데그날짜들은내 가단식과기도를할순번인날짜 다.
 
김대중을제외한(19 7 8 년 12 월 22 일석방) 3· 1 구국선언문서명자모두는 다른인권운동가들과함께19 7 8 년새해의특별사면으로감옥에서풀려났다. 커다란기쁨이자경사 다.
그들이풀려나고얼마지나지않아목요기도회에서예배참석자들이떠날 때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한다. 남편문익환 목사가 옆에 있는가운데, 박용 길 장로가계단아래에있는요원과충돌했다. 대개한국여성들은조용하고 순종적이다. 남편의 어깨에 간신히 미치는 단신의 박용길 장로는 굳건하게 서서건장한요원과대치하고있었으며, 이를지켜보는문 목사의얼굴에는 놀라움, 즐거움, 그리고자랑스러움이드러났다. 감옥밖에 있던우리는 이 강하고 자랑스럽고 신념에 찬 여인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지켜보았다. 남편 의 구속은 이들을 변화시킨 원동력이었으나, 정작남편들은 변화가 일어나 는 것을보지못했었다. 그러다갑자기완전히변화된부인의모습을발견하 게된것이다. 여러분은그들의놀라움을상상할수있을것이다! 이우정은 쉬지않고 구속자의 석방과 아픈 사람들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위해일했고, 부인들의항의집회에도참가했다. 그녀는3월 1일 사건에자신 이 참여한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가족들과 구속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받음으로써, 그리고피고인이되었지만동시에같은사건에처한다 른 사람들의가족들과하나가됨으로써, 나는일종의축복을받았습니다. 그 것은거의기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참여를 통해다른한국인들과의, 그리고세계전역의 기독교인들과의기독교적인연대와기독교적인사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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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신뢰를알게되었습니다. 이것이단지말에불과한것이 아니라사실이 라는것을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서로의고통속에서서로에대한 사랑으 로가까워졌으며서로의지했다는사실을결코잊지못할것입니다.”
 
한국에서 내가 만났던 기회들을 내게 줄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것이다. 인권, 민주화, 그리고최근에는 통일을 위한투쟁이 한국에서 일어나는 동안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나는 한 인간 으로서한여성으로서, 그리고한 기독교인으로서성장할수있었다. 거기에 덧붙여서나는세계도처의교회에서온 사람들과알게되고함께일하는행 운도누렸다. 
한국의 인권운동 웅들을 알게되고 함께했다는것은 얼마나 커다란 자 랑인가! 연행되어 구속될 일인줄 알면서도 양심적으로 충실하게 그것을 행 했던사람들과함께일했다는것은얼마나명예로운일인가! 재판중에용감 하게인권과 민주화에 대해이야기하는 모습 속에서 그들의 믿음과 신념을 목격할수있었다.
교회는정치에개입해서는안 된다고주장하는사람들에게, 나는아무말 도 하지 않는것이 사실은 현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임을 배웠다고 말하고자 한다. 즉, 방관자로있는것은가능하지않았다.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사람들 곁에서 일하는 것이나에게는 특권 이었다. 조국의더나은미래를위해일하는 구속자들의부인들과이우정장 로와같은용감한여성들과함께있는것은배움그 자체 다. 이책 안에서 우리가언급한많은사람들은“ 정부를음해했다”는죄목으로고통받았다. 정 부는그들을“ 반역자”라고불 다. 그러나사실, 그들은진정한애국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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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용기와희생이있기에, 한국은역동적인민주국가인것이다. 3· 1
구국선언문의서명자들중한명은대통령이되었다. 아마도 한국역사의 다음장은남한과 북한의 통일이 될 것이다. 만일 그 렇다면, 그공로의많은부분을이 웅들과애국자들에게돌려야한다.
 
월요모임관련사진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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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선교사, 소떼그리고월요모임
 월터“ 버치” 더스트(Walter “ But c h ” Dur s t ) 

오늘날조차도 내가 한국생활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는 미스테리이다. 19 6 0 년대초반대학시절에아주중요한 사건이내인생을바꿔놓았다. 나는 당시대학교의필수과정이었던ROTC에 가입했다. 군대를심각하게생각하 지는 않았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었던 해인 19 6 2 년 군대는 내게너무 분명하고 뚜렷하게 다가왔다. 존F. 케네디 대통령은소련에게쿠바에서미 사일을 철수할 것을요구했고, 그렇지않으면 미국으로부터전면적인핵 공 격을받게될것임을천명했다. 시한이빠르게다가오고있었고, 내게그것은 내가알고있는문명이말 그대로끝날수도있다는것을의미했다. 나는위 기를 모면할 수 있게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수많은 공포스러운 밤들을 보냈 다. 그리고전쟁이아닌평화를위해일하기로결심한것은바로그때 다. 처음에나는케네디대통령이창설한새로운프로그램인평화봉사단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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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할까생각했다. 그러나대학교교목이연합감리교에도유사한프로그램이 있다고알려주었다. 그것은단기선교프로그램이었다. 나는평화봉사단프 로그램이감리교의이프로그램을모델로삼아만들어졌다는것을뒤에알게 되었다. 열렬한감리교신자인나는교회와운명을함께하기로결심했다. “ 단기선교사”가 될 때까지나는고향인콜로라도주의서쪽으로가 본적 이 없었다. 우리단기선교사일곱명은지구를반을돌아우리를한국에데 려다줄미 해군항공모함화물선인프레지던트먼로호에승선했다. 헤이퍼 재단에서 보내는 소 30 마리가우리와 함께그 배를타고있었다. 가난한나 라에살고 있는사람들에게 가축을 보내는 기아퇴치 단체인 헤이퍼 재단은 가장효과적인방법을알고있었다. 보내는동물은모두가암컷이었고새끼 를 배고있었다. 태어날송아지를다른농부에게기증함으로써, 프로그램도 지속되고부도계속늘어나는것이다. 새끼를밴 소 30 마리는곧 두 배로늘 어나서농부들에게큰이익을가져다줄것이었다.
태평양에서열흘을지낸뒤, 우리는부산이라는남부도시에닿았다. 먼로 호가부산항에 들어온 날, 나는 아침에 깨어나완만한언덕위로빛나는 태 양을보았던것을잊지 못한다. 우리는마침내한국에도착해서너무흥분했 다. 좀 떨어진 곳에서 몇몇사람들이 커다란 환 푯말을들고있는것을볼 수 있었다. 가까이 갔을때, 그들이 환 하는 것은우리가 아니라 소떼들이 었음을 깨달았다. 곧이어 한쪽 옆에 새로 온 선교사들을 환 하는 또 다른 작은푯말이있는것을보았다. 한국인들은실용적인민족일것이라는생각 이떠올랐다. 나는우리도소떼들처럼그들에게쓸모있기를바랬다. 우리단기 선교사 7명이 한국에서 해야 할 첫 과제는 6개월 과정의 어학 코스 다. 기본적인 한국어를 배우면서, 우리는 언어를 배우려는 선교사들 에게있었던 많은재미있는 이야기들을들었다. 그 중 초기선교사들중 한 명인케이트쿠퍼에게서들은이야기는결코 잊지못할것이다. 그당시에는 공식적인어학원이없었고, 케이트는배우겠다는의지가아주확고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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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는 자주시장으로 내려가서 소리내며 물건을 파는 행상인들의 말을 듣곤 했다. 어느날 그녀는어떤농부가“ 소요! 소요!”라고외치자사람들이 바로 넓게 간격을 벌리는 것을 보았다. 농부는 소를 끌고 뚫린 시장을 통과해서 유유히지나갔다.“ 길을비켜요”와 같은뜻을지녔을것이틀림없는외우기 쉬운구문이었다. 다음에5척 장신인케이트가장에가서, 새로운한국어구 문인“ 소요! 소요!”를 실험해보기로결심했다. 그러자, 모든사람들이 박장 대소했다. 그런 뒤, 그녀는 그 구문이 실제뜻하는 것을알았다:“ 자, 소가 지나갑니다!”도대체선교사들과소떼들이뭐란말인지?! 
 
나는배재고등학교에서어를 가르치는임무를부여받았고, 뒤에는이화 여자대학교와관련된 초급시범어학당에서어를가르치게되었다. 대학에 서 교육학을전공했기때문에가르치는일이아주재미있었다. 더욱이, 나는 한국인들과한국이라는아름다운 나라에 완전히빠져있었다. 수업후 자주 나는학생들과함께근처다방에가곤했다. 그것이나에게는친구들을사귈 수 있는좋은방법이고, 학생들에게는어를배울수있는좋은방법이었다. 우리는“ 여름에더위를이겨내는방법”과 같은엉뚱한주제들에대해토론하 곤했다. 하지만종종한국의장래와같은더욱심각한주제를다루기도했다. 한국은 비록 가난했지만, 한국인들의근면성과 재주는 놀라운 것이었다. 19 6 0 년대중반, 발전의징후들이분명히나타났다. 새로운건물들이올라가 고, 도로가개선되었고, 과일과같은“ 사치품”들이시장에나타나기시작했 다. 그러나 대부분의발전은 산업분야에치중되었다. 이것이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오는 대규모 이농현상을 초래했다. 사람들을 적은 돈 이라도벌기위해앞다투어도시로몰려들었다. 한국의모든도시에서인구 가 폭발적으로 증가하 다. 예를들면, 내가 서울에 처음도착했을 때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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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는3십만명이었다. 불과6년뒤, 내가미국으로돌아갈때의인구는 두배 인 6십만명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많은한국인들은나라가진보하고있 다고느끼고 있었다. 어느날 나는교회에서 어떤젊은이와 함께이 문제에 대해이야기했다. 그는이렇게 말했다.“ 맞습니다. 하지만마음 한구석에서 는 이 정부가두 번째임기를마칠때 쯤이면무슨일이일어나지않을까걱 정됩니다. 그들이순순히정권을내놓을지아니면다른일이생길지알 수가 없어요.” 그때가 19 6 6 년이었다. 나는그것이무슨의미인지곰곰이생각해 보았다.
단기선교사로서3년을 보낸 뒤,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대학원을 마치 고, 루이즈모리스(그녀의 을보시오)와결혼하여19 7 2 년가을에 한국으로 다시돌아왔다. 우리가돌아온지불과몇 주일이지나지않아, 박정권은새 로운“ 유신”헌법으로국회를해산시켰다. 한국인들은박정희정부의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그때부터알고있었다고생각한다. 헌법상의이러한변화는 수평선위에낀 먹구름과같았다. 그것은민주주의의미래에대한불길한징 조 다. 6년 전 교회에서나와이야기를나눈젊은이는바로이런것에대해 우려했던것이다. 아마다른사람들도이미그때부터 이런일이일어나리라 예감하고있었던것이다.
 
나는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만, 또한 다른방식으로도 한국에 기여하고 자했다. 나는감리교최초의여성목사로서기독교전 교파에서인정받고한 국에서오랫동안장기선교사로일했던모드 젠슨과알게되었다. 내가한국 에 부임한 초기에 그녀와 나눈 대화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나를 앉혀 놓고 선교사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의 가르침은 아주 명확했다: “ 어를 가르치는 것도 당신이 여기 있는‘ 구실’일 뿐입니다. 당신이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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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진짜이유는바로선교입니다.”
도시산업선교회는예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받아들이는 단체이다. 이곳 을 운 하는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공장 노동자들과빈민지역거주자들을도우려는한국목사들이었다. 기독교의기 본적인 교리중 하나가 사회정의, 즉 모든사람의 평등이었고, 내가보기에 도시산업선교회가그 방면에서는가장앞서있었다. 도시산업선교회는사회 에서가장가난한 사람들에게힘을줄 수 있는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나 는 이 일에 끌리게 되었는데, 아마도 나의 가족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나의아버지는가족을부양하기위해힘든육체노동현장에서일주 일에6일씩평생을일했다.
도시산업선교회지도자들은활동기금을 마련하기위해무척고생을 해야 만 했다. 가끔은외국으로부터, 특히미국이나유럽에있는주요교회기관들 에게도움을요청하곤했다. 이런기관들에보내는보고서들은어로작성 해야만했고, 도시산업선교회는 나에게 문번역을 도와줄것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최전선에서 복음을실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진정으로 봉사할수 있는방법이었다. 이제내가원했던의미있는일을찾은것이다. 이헌신적인목사들에게내가조금이라도도움이되는것이기뻤다. 번역을하면 할수록,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과공장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해더많이알게되었다. 그들은수출물량을채우기위해하루에 12 ~14 시 간을, 때로는하루24 시간을일해야만했다. 의료혜택도없고오직시간수당 밖에없었지만, 가끔씩젊은사장들은수당조차제대로지급하지않았기때 문에항상싸움이계속되고있었다.
처음에, 경 진은도시산업선교회목사들이 공장에서 점심시간에노동자 들에게성경을가르칠수 있게해 주었다. 경 진은이것이노동자들에게조 금이라도 위로가 되어 그들의 처지를 더욱 잘 견딜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사들이 노동자들에게“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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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가치있는소중한사람입니다”라고말하기시작하자, 경 진은이것 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느끼게 되면, 더욱 안전한노동조건, 정당한임금, 또는다른골치 아픈요구들을하게될 수있 었다. 이런 복음전도는“ 좋은투자여건”의 필요조건인온순한(그리고 저임 금의) 노동력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되지 않아, 공장에서 복음을 전도하는허가가취소되었다.
도시산업선교회목사들은굴하지않고 공장밖에서노동자들과만남을계 속했다. 경 진이몰랐던사실은목사들이기독교정신을가르칠뿐만아니 라, 실행되지않고있는남한의노동법도가르치고있었다는것이다. 이런저 런 방식으로도시산업선교회는노동자들이그들의조건을개선할방법을모 색하는것을돕고있었다.
공장지역중 대표적인곳이 등포 다. 직물, 장난감, 소형금속제품, 컴 퓨터부품, 전기부품등을생산하는80 0 여 개의공장들이 등포에있었다. 이공장지역에가려면좁은골목과 높은담으로된미로를통과하고, 노동자 들이살고있는단칸셋방들이집한주거지를지나야만했다. 6명 혹은그 이상의노동자가임대료를분담하고근무조별로교대로그곳에서먹고자야 만했다. 
하루는등포도시산업선교회의책임자인조지성목사가젊은 여성공장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자취방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데려갔다. 노동자들 이임대한방의 대부분은넓이8피트에높이6피트정도 크기의방으로형광 등 하나가천장에달려있었다. 벽에는여성노동자들의옷가지, 이불, 화장 품, 솥단지, 그릇, 식기등을놓는몇 개의선반들이 있었다. 깨끗했지만부 족한것이많았다. 그들은다른사람들과함께밖에있는공동화장실을 사 용해야만 했고, 가끔씩 화장실을사용하기 위해너무긴 줄을서야만 했다. 또한, 그지역에있는모든사람들이사용하는수도꼭지가한 개 또는두 개 밖에없기때문에, 물을긷기 위해서도긴줄을 서야만했다. 어떤때는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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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길어서씻고옷입을 수 있는시간이부족하여정시에교대시간에 맞춰 갈수가없었다.
나는그런삶을상상할수가없었다. 그렇게장시간일하고, 자취방동료들 이교대시간에맞춰일하러나간후에야, 집으로돌아와재빨리밥을차려먹 고, 곧바로다음동료들이집으로돌아오기전에몇 시간잠자리에들고, 그 런 뒤 다시공장으로가야만했다. 이들젊은여성들의삶은시골에남아있 는 가족들의 삶과는 아주달랐다. 그러나 그들은 최선을 다해돈을벌었고, 기본적필수품을사는것을제외하고남은모든돈을가족에게송금했다. 도시산업선교회와의 관계는 나에게아주 중요한 향을주었다. 그것은 나의신앙심을깊게하는데크게 이바지하 다. 나는하느님은가난하고억 눌린자들의편에있으며그들을버리지않는다는생각을의심하지않았다. 다른 기독교인들은 공장노동자들과 빈민지역 거주자들을 꺼려 했지만, 도 시산업선교회에서 일하는 기독교인들은 개인적으로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 면서그들과함께거기에있으면서, 날마다가르치고위로하며그들을대변 해 행동에 나섰다. 나에게 있어 이것은 정말 예수가 우리들 가운데 현시한 것이었다.
 
19 7 2 년 9월, 내가한국에돌아온지불과며칠뒤에, 박정희는계엄령을선 포했다. 탱크와군인들이사방에깔려있는것같았다. 어학원에서우리부부는일리노이주에서새로온 장로교선교사부부린 다 존스와데이브존스를만났다. 그부부가뒤에월요모임으로알려진모임 에 우리를소개하 다. 우리외국인들은한국이직면하고있는이 긴급한사 태에서우리의역할이무엇인지 파악할필요가있었다. 한국인친구들은우 리에게 대학교와 정부건물 앞에진을 치고있는 탱크와 학생시위 진압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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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용하는최루탄에대해물어보았다. 모든 탱크에는한미관계의상징인, 서로악수하는두 손을그린미국원조로고가새겨져있었다. 그러나왜 미 국의원조를한국정부가자기시민을진압하는데사용할수있는가? 월요모 임에서우리는이런문제들을토론하고, 각자가알고있는정보를공유했으 며, 우리가과연무엇을할수있는가를고민하 다. 
독재정치가권력을유지하기위해필요한 것 중하나가 정보, 특히외국에 서들어오는정보를통제하는일이다. <타임지>, <뉴스위크지> 또는다른해 의 언론에 보도된 한국의계엄령과 민주주의에 대한 기사들을 한국정부는 좋아하지않았다. 그런기사들이일반한국인들에게전달되는것을막기위 해, 박정희정부는독자들이읽기전에신문과잡지들을검열했다. 목록에는 한국에 대한기사가 있는 <뉴스위크>지 최신호를 샀더라도, 해당 페이지를 펴면기사가통째로삭제되어없는 경우가허다했다. 아니면때로는더욱눈 에 띄도록 기사 전체가 온통 검게 칠해져 있었는데, 그것은 독자들에게 그 기사내용이도대체무엇인지궁금하게만들었다. 
다행히, 월요모임은다른정보통이있었고, 특히일본에있는기독교친구 들이우리에게 한국관련기사들을보내주곤하 다. 물론, 그들도정상적인 통로를사용할수 없었지만, 한국에가는사람들에게부탁해서한국관련기 사들을주머니나가방안에숨겨서한국으로가져왔다. 일단한국에도착하 면, 방문자는우리와연락을취해서몰래들여온자료들을넘겨줄약속을정 하곤 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그 자료들을 한국 친구들에게 전달하 다. 린다존스는이런자료를 전달하는일을맡았던주된인물들중 한 사람이었 다. 그녀는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회장안재웅, YM C A 사무총장강문규목 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관석목사와 기타 중요한지도자들에게 이 자료를 전달했다. 이 지도자들은한국 바깥의 뉴스를 알 필요가 있었고, 한국에대한소식들이어떻게보도되고있는지도알필요가있었다. 가끔이러한기사들을전달하기 전에복사를해야만했다. 그것이우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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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인들이도울수 있었던다른방법이었다. 당시에는복사기가 희귀했지만, 서울에서내가살던곳근처에작은 복사가게가있었다. 가끔나는복사가게 로 가서복사를하는사람이어를쉽게읽지못하는사람이기를바라면서 복사를주문하곤하 다. 나는“ 오, 저는 어선생님이예요. 저는수업과과 제용으로이자료들이필요하답니다.”라고말하곤했다. 그자료들은그것을 필요로하는한국인들에게는정말수업과과제를위한자료가되었다. 나는특히어떤한 복사가게를기억한다. 내가부탁한자료를복사하고있 을 때, 주인이들러서살펴보았다. 교육을많이받은사람같아보이는주인 은 그 자료들을 보고난 뒤, 종업원한 사람에게“ 좌익의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게말하는 것을듣고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서, 나는 주인의주의를분산시키려고무진애를썼다. 곧장그를쳐다보고웃으면서 “ 오늘날씨가참 좋지요?”하고말했다. 나는그를날씨에대한대화로끌어 들 고, 복사가끝나자마자가능한빨리복사집에서나와절대다시는 그 가 게에가지않았다. 
 
도시산업선교회의사업은 공장노동자에게만국한되지는 않았다. 도시빈 민과 힘없고 주변화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사업이 확대되었다. 빈민촌은 서울전역에산재했고, 대개중산층거주지역에서떨어진서울주변의산꼭 대기에 있었다. 나는 빈민촌을 직접 경험하여 알고 있었다. 내가 가르쳤던 감리교신학교바로뒤산중턱위의판잣집에많은빈민들이살고있었다. 도시산업선교회이규상 목사가 빈민지역 중 한 곳에일일 탁아소를 개설 했고, 그 덕분에 낮 시간 동안엄마들은 일을해서 약간의 돈을 벌 수 있었 다. 월요모임에서나는페이문으로부터이 목사에 대해 들었다. 그녀는서 울 동부지역의빈민들을조직하고있는그와같은목사들을알고있었다.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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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와 나는 이 목사가 빈민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그들의 협조를 이끌어내 는지알아보기위해그지역을방문하 다. 
도시빈민들은도시지역에값싼식량을공급하기위해정부가 의도적으로 쌀값과농산물가격을억제해서더이상 농사를지을수없게 된 농촌지역에 서 올라온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농촌에서 상경한 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생활을꾸려야만했기때문에도시에서닥치는대로 일을하고있었다. 제일 먼저하는일은 여기저기판자들을뒤져서살 움막을짓는것이었다. 외관상 으로, 판잣집은급하고어설프게만들어진것처럼보 다. 아마얼마동안이 나그곳에살 수있을지 알수 없어대강지었기때문일 것이다. 그러나판잣 집내부에는모든것이 아주가지런히정리되어있었다. 분명히이사람들은 가족을위해할수있는한최선을다하려고노력하고있었다. 문제는정부관리들이주기적으로와서판잣집들을“ 철거”하곤한다는것 이었다. 정부는무허가거주자들에게최루탄을쏘아대고, 머리를두들겨패 고, 그들의 집을 불도저로 무너뜨려서 잔해들을 다른 지역에 버리곤 했다. 아무것도 없이다시 한번집을 잃어버린 가족들은 또다시 시작할 무언가를 찾기위해잔해를뒤져야만했다. 그런다음, 정부는또 다른지역을개발하 기 위해 그 지역의 무허가 거주자들을 몰아내곤 했다. 19 7 9 년에 지미 카터 대통령이한국을방문했을때와같이종종도시를“ 미화한다”는명목을내세 우기도 하 다. 이 목사의역할은그들이이런식의취급을 받는것에저항 할수있도록무허가거주인들이스스로조직화하는것을돕는것이었다. 우리는이 목사의사업에대해더 많이듣기위해그를 저녁식사에초대했 다. 저녁식사후, 그는다른도시산업선교회목사들과함께정부의억압적인 정책에 항의하는 작은 집회를 개최하려고 서울 시내에 있는 기독교회관에 갈것이라고말했다. 정부정책을 비판하는사람에게최고징역15 년 형까지 처할수 있는긴급조치가선포된지 채 2주가되지않은때 다. 도시산업선 교회목사들은참으로용감했고, 민주주의에대한신념을위해감옥에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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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두려워하지않았다. 나는이사건을목격하기위해사진기를가지고시 내로갔다. 이것이역사가이루어지는한장면일수있다고나는생각했다. 기독교회관에서 성명서를 낭독한뒤, 목사들은“ 민주회복! 긴급조치 해 제!”라고쓴 8피트짜리 종이현수막을 펼쳤다. 나는 그 장면을 촬 했다. 마 음 한 구석에는, 언론사에 있는 누군가가 그 사진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도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이 사진들에 더 관심을 가질것이라고는 전혀생각하 지못했다.
 
첫 번째선교활동 기간인 19 6 6 년부터 19 7 0 년까지, 나는상대적으로 자유 롭게살았다. 이 기간동안에는 어떤억압조치도없었다. 박 대통령을 암살 하려고청와대까지북한무장간첩들이침투했던19 6 8 년에도억압적인 조치 들이없었다. 같은해(19 6 8 년) 미해군정보수집함이북한 해에너무 가까 이 가서나포되었을때조차어떤긴급조치도내려지지않았다. 북한이선원 들을억류했을때 긴장은고조되었지만, 한국정부는일상적이지않은어떤 조치도취하지않았다. 아마도합법적으로선출된박 정권은19 6 8 년당시 안 전하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권위주의가 심해진 것은그러한 합법성이 퇴락 한이후 다. 19 7 3 년까지정권은억압적인조치들을거의취하지않았다. 기독교회관집회에서집으로돌아와루이즈와내가점심식사를막끝내려 할 때, 대문을두드리는소리가들렸다. 문을열고보니양복을잘 차려입은 두 명의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중앙정보부에서왔고, 내가 시내에서 있 었던집회에참가했기때문에함께가서조사를받아야한다고 말했다. 그들 은 나를태우고 남산(중앙정보부 본부)으로 갔다. 조사를 받기 위해중앙정 보부에끌려간사람들이야기를많이들어서솔직히나는겁이 났다. 가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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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생각은했지만, 그들이나에게물리적으로해를입히는것에대해서는 겁나지 않았다. 내가 정말 무서웠던 것은“ 내가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을까?”또“ 내가한국에서쫓겨나게 되는것이 아닐까”하는것이었다. 정 말로나는어떤한국사람도곤경에빠뜨리고 싶지않았고, 물론내가사랑 하는나라를강제로떠나기도원치않았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산기슭까지 나를 차로 데려가서, 엘리베이터를 태 워, 조사실로데리고갔다. 조사실앞쪽에는큰 책상이있었고, 방의길이에 따라일렬로 몇 개의다른책상들이놓여있었다. 그들은구석에 있는방으 로 나를데리고 갔다. 그들 중에는“ 오, 더스트씨, 걱정 마세요. 모두 것이 금방끝날겁니다”라고나를안심시키려는친절한사람도있었다. 그는통역 사 같았다. 또다른기록하는사람도있었다. 그리고방에는다른사람이한 사람더 있었다. 그는다른사람보다더 나이든40 대 후반이나50 대 초반이 었고, 다른 사람보다더 높은지위에 있다는 것을가리키는 어깨에 별을단 가죽옷을입고있었다. 그는그부서의책임자 음에틀림없고, 혼자서모든 질문을다했다. 
그는곧바로나에게소리를지르기시작했다.“ 왜거기에 있었나?”“ 왜그 집회에참석했지?”“ 그집회를어떻게알았지?”“ 거기서무엇을했지?”“ 누 가 당신을 부른거야?” 그래서나는그 질문들에답했다. 나는 집회가 있을 것이라들었고, 집회참가자중 이규상목사를안다고말했다.“ 이규상목사 를어떻게알게 되었나?”나는미국인친구인페이문을통해 그를만났다고 대답했다. 그들은내가다른목사누구를 아는지 알고자 했지만, 사실 나는 목사들 중 많은 사람들을 알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떤 남자를 방으로 데려와서전에본적이 있냐고물었다. 나는“ 만난적이없습니다”라고말했 다. (나는 아직도 그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들이 사건에 연루시키려고 했던
사람일것이다.) 
나를그곳에오래 감금할의도는없었다고보지만, 질문과대답모두를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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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해야만 했기 때문에 예상보다 길게 4, 5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한국말로 질문을했기때문에, 나는대개묻는말의요지를이해할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질문을 두 번, 처음에는 한국말로, 두 번째는 어통역으로듣는 이점 이있었다. 그래서대답을준비할시간이조금더있었다. 나는항상법을존중하고절대법과는문제를일으키지말라는교육을받 고 자랐다. 어떤일로차량에실려연행된것은내 생애에서그 날이처음이 었다. 나는 긴급조치를위반했다는이유로, 그리고정부를비판하는사람들 을 방조했다는 이유로 거기서 한국 당국의 심문을 받았다. 심문 중에 이런 억압적인 정부가무지하고 무능한선교사인 나처럼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이처럼대한다면, 도시산업선교회는정말옳은일을하고있는것 이틀림없다는생각이들었다.
또한 한국인들이속 마음을 말하는 것을주저한다고는상상할 수 없음에
도불구하고, 정부당국자들은어떠한비판도용납하려하질않았다. 마침내 저녁 9시경에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집에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으면서약간성급하게도 안도의 숨을쉬었다. 그 다음날, 그들은“ 우리는 당신이집회에서사진을찍었다고들었소. 그필름이필요해요”라고말했다. 나는“ 오, 좋습니다”라고답했다. 그리고침실로가서카메라에서내가찍은 사진들이들어있는필름을뽑아냈다. 그런뒤 카메라에빈필름을집어넣고 요원들이기다리고있는거실로가져갔다. 나는그들에게필름을주었고, 그 들은만족해서떠났다.
물론예상대로, 그들은그날늦게다시찾아왔다. 정보부요원이찾아올것 을 예상해서루이즈는감리교 선교사진 매튜스와조지오 에게전화를 해 서오후에우리집에올수있는지를물었다. 요원들이도착했을때, 루이즈는 모두에게 쿠키와 커피를 대접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면서 둘러앉아있었다. 요원들은곧장용무에들어갔다.“ 필름에는사진이찍혀있 지 않더군요. 그필름에왜 아무사진도 없는거죠?”나는“ 필름이좋지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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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보군요”라고말했다. 그러나그 말을믿지않았다.“ 아니요, 당신이다른 방에있을때, 카메라에서필름을꺼내는소리를들은것 같아요.”나는“ 오, 나는단지카메라에필름을다시감고있었습니다. 카메라가새것이라아직 작동법을잘모릅니다. 아마사진이찍히지않았나보죠”라고대답했다. 물론그것은사실이 아니었고, 그들도분명히그것을알고있었지만더이
상강요하지않았다. 아마도그들은문제를피하는법을모르는무지한 외국 인과더이상 상대하길원치않았을지도모른다. 그러나떠나기전에그들은 “ 그사진중 어느것도, 어디에도게재되면안 됩니다. 만일그 사진들이외 국에서 실린다면, 당신은 아주곤란하게 될 것이요!”라고경고했다. 그것은 아마내가한국에서추방될수 있다는것을의미했고, 그것이그들이나에게 할수있는가장끔찍한일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추방당하는 것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내가다른 한국인 에게해를끼칠지도모른다는것이었다. 나는특히이규상목사에대해 굉장 히 걱정했다. 그와나의관계가밝혀져, 그에게더 많은문제를야기시켰다. 나에게그집회를알려 주었다는이유로그는다른사람들보다더오래 심문 을당했다. (중앙정보부가심문하는시간이늘어나면늘어날수록, 특히한국 사람에게는 심문이 더 끔찍해진다.) 나중에 그들이 이 목사에게“ 더스트는 한국말을잘못하더군. 당신은어를하는가?”라고했다고들었다. 그가아 니라고대답하자그들은“ 그럼, 어떻게대화를하지?”라고물었다. 그는“ 쎄, 우리는서로고개를끄덕이고, 눈을깜박이고, 머리를흔드는그런류의 대화를한다”라고대답했다고한다. 나는심문관들이그런바보는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이나를다그쳐서그에 대해물어볼 수도있었다. 그러나아 마도그들은나를 겁주려했던것일 뿐이었고, 사실그일은아주 잘해냈다. 그모든경험은 한동안나를의기소침하게했고, 나에게일종의그늘을드리 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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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괴롭힘이시작되었다. 루이즈와나는한밤중에이상한전화를받 곤했다. 전화저쪽편에서신원을알수없는 사람이“ 어디가는거야?”라고 묻곤했다. 전화벨이 울리고 나서얼마뒤에나는수화기를 들고아무말도 하지않고듣기만 하곤했다. 상대가 말을해서그 전화가 중앙정보부나경 찰에서걸려온것이면 끊어버렸다. 친구들도우리집에전화했을 때, 수화기 를 드는소리가들리고저쪽에서는아무말도하지 않는이상한경험을하곤 했다. 숨소리밖에들리지않아, 그들은“ 버치니?”또는“ 루이즈니?”하고말 하곤했다. 그러면 나는누군지를 알고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가 통화 를 하는동안전화기에서계속찰칵대는소리가났고, 아마도 통화를녹음하 는 것 같았다. 어떤때는이런성가신전화가 아주자주와서, 나는얼마동 안그냥전화선을뽑아놓곤했다.
다른 괴롭힘으로는사복경찰의 미행이 있었다. 비록 이례적인 경우는 아 니었으나, 나는항상미행당했던것같다. 미행은정부가의심스러운사람들 을 감시하던 방법중 하나 다. 종종나는미행자를 떼어버리는 데 성공했 다. 거리를걸어내려가다가예고없이갑자기18 0 도 회전해서, 그의바로앞 을 지나 되돌아가곤 했다. 그러면 그들은 잡지를 보거나 가게의 창문 안에 있는 무엇을 보는 척하면서 갑자기 분주해지기 때문에, 누가 사복경찰인지 알아보기는 쉬웠다. 때로는 샛골목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기 다렸다가가던길을계속갔다.
한 사내가항상우리 집 건너편골목에태연하게서서 우리가오가는것을 지켜보았다. 그는보통신문을읽고있었다. 그는정말로우리가알아차리지 못했다고생각했을까? 매시간정장을입은사람이골목에서신문을읽고서 있는것이어떻게“ 정상적”일까? 무전기의안테나가신문뒤로나온것은 말 할것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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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미국에서친구가방문하여몇 가지일을보러 오후에집을나섰다. 우리는분명미행당하고있었다. 내“ 꼬리”는 거리를좀 유지하고있었지만, 그가있다는것을알아차리기에충분한거리 다. 미행자가나에대한경계 를막늦추는순간, 우리는버스정류장으로가서버스에올라탔다.“ 꼬리씨” 는 자기의 차를타고우리버스를따라왔다. 버스에서나는내 친구와 함께 모의를해서그를따돌리려고하 다. 
다음정류장에서우리는재빨리버스에서내려택시를잡아타고신촌시장 으로서둘러출발했다. 시장입구에서우리는택시에서내려다른쪽 입구로 걸어가다른택시를타고시내로향했다. 성공이다! 우리의꼬리는어디에서 도보이지않았다! 우리는시내에서일을마치고 그날오후우쭐거리며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우리집 건너편 골목에 우리의 꼬리씨가웃으면 서 서 있었다. 우리도웃음으로답했다. 비록그가당국을위해일하고정치 적으로우리와반대입장에서있지만, 그웃음에는한국사람의천성적인명 랑함이느껴진다. 그는아마돈을벌고있는보통사람일것이다. 그순간에 그는 단지경찰관이나 중앙정보부 요원 이상의 사람이었다. 그를 미워하기 란힘들었다.
모든곳에서미행을당하는것은신경쓰이는일이지만, 당시에는그냥일 상적인절차처럼보 다. 내가다른한국인들에게말하면그들은“ 아, 네, 흔 히 있는 일이지요.”라고말하곤 했다. 한국기독교학생회총연맹집행위원장 안재웅목사는내게편지를보내서, 의기소침하지말라면서미행은우리모 두에게일어나고있다고말했다. 안재웅자신도연행되어끌려가서여러차 례 취조를 받았고, 심지어남산중앙정보부 본부에서 몇 주 동안고문을 당 했다는 사실을 나는알고있었다. 그가 보낸그런편지는 정말나에게 많은 것을의미했다. 그것은내가서투른방식으로나마했던일이나하려고하는 일에대해감사하다는뜻을전달하는것이었다. 그것이모든시련을보다잘 견딜수있게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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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모임에서 우리는 한국인 친구와 동료들, 특히 한국기독교인들을 지 원하기위해 외국인으로서우리가무엇을할 수있는가고민했다. 그리고우 리가할 수 있는한 가지는목격자가되는것임을알았다. 우리는정부를비 판했다는이유로, 즉다시말해서정의와민주주의를위해항변했다는이유 로 긴급조치로기소된사람들의재판에참석할수있었다. 우리는“ 외부”방 청객이될수있었다.
내가참석한첫번째 재판은서울에서개최된, 유명한장로교박형규목사 의 재판이었다. 그는수갑을차고흰 죄수복을입은채 법정에들어왔다. 나 는 아주당당하게서 있던모습을보고박형규목사가자랑스러웠다고느꼈 다. 그에게던진첫 번째질문은“ 직업이무엇입니까?” 고, 그는자랑스럽 게“ 목사입니다”라고 말했다. 여기 민주주의를 위해 외치다가 마치 죄인처 럼 재판을 받는목사가 있었다. 그리고다른나라에서 온 소수인 우리는 이 것을지켜보고기독교의증인이되기위해그곳에있었다. 우리가 참석한다른재판은, 비록 법정안으로 들어갈 수는없었지만, 야 당정치인김대중의재판이었다. 법정밖에서 월요모임회원들에게“ 치즈신 부”로알려진 벨기에인디디에테르스테벤스가내옆에있었다. 그의한국식 호칭인“ 지신부”조차“ 치즈”처럼들렸지만, 이별명이붙은진짜이유는그 의 교구가있는시골에서치즈공장을운 하기때문이었다. 한국인들은치 즈를많이먹지않았기때문에(한국인들에게치즈는더러운발냄새가 나는 외국음식이었다), 그는외국인을상대하는 몇몇관광호텔에치즈를공급하 기 위해종종서울에 왔다. 덩치가크고금방웃음을터뜨릴 것같은 수염난 이 친구는 아주독특한 인물이었다. 한번은다양한 반정부 인사들이 쓴 설 교문, 성명서, 양심선언문등과같이금지된자료들을모아서월요모임에가 져왔다. 그는 수천부를복사해서 배포할 수 있는모든곳에배포하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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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표지 위에는 마태복음의‘ 팔복’에서 발췌한 인용문이 있었다:“ 정의를 위해박해받는사람들은축복받을지어다.”
치즈 신부와 내가 김대중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법정 밖에 서 있는데, 갑자기 소란이 발생했다. 재판은몇 가지 이유로 갑자기 끝났고, 경찰이군 중을해산하려고했다. 이소란속에서내 신발이벗겨졌다. 치즈신부가신 발을잡고화가나서경찰중한명의헬멧쓴머리를세게때렸다. 경찰이버 스안으로우리 둘을 쳐넣은 다음신발을집어 우리뒤로던져 넣었다. 그 리고나서나는신부가 왜 경찰의머리를세게쳤는지알았다. 경찰이신부 를버스안으로 어넣을때그의“ 은 한부분”을잡고있었기때문이었다. 경찰버스는우리를서울주변부공단지역인등포로태우고가서, 우리 가알아서시내로가도록 그곳에남겨놓았다. 그러나재주좋은치즈 신부가 엄지손가락을들어올리자, 지나가던한국인운전자가즉시우리를태워주 었다. 시내로들어가는도중디디에신부는운전자에게경찰에자기물건이 잡혔던것을포함해서무슨일이 있었는지모두말했다. 나는운전자가너무 크게웃어서길에서벗어날까걱정이되었다. 
 
19 7 4 년봄, 한국정부는“ 인혁당”사건을조작했다. 그들은몇명을 연행해 서 광범위한학생시위를선동하는공산주의단체의주동자라는죄목으로기 소했다.
기소된 사람들의 몇몇부인들이 조지 오 목사를 찾아와서 도움을 청했 다. 오 목사는 19 6 4 년에이와유사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기억하고, 당 시 사건에대해알아보기위해 자신문인<코리안타임스>와<코리아해럴 드>지를 조사해달라고내게부탁했다. 나는미 대사관 근처에있는문화원 에가서 19 6 4 년판신문들을훑어보았다. 나는예전의“ 인혁당”에대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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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쉽게찾았다. 그런데어찌된문인지, 그당시중앙정보부부장이었던 사람이현재중앙정보부부장과동일한인물이었다.
물론 19 6 4 년은 유신헌법 훨씬 이전이어서, 사법부가 상대적으로 박정희 정부로부터독립적이었다. 그러나지금은법원과사법체계모두가박정희의 손아귀에놓여있었다. 박정희가다시한번“ 인혁당”을공산주의자들의음모 처럼 보이게 해서, 그것을 학생시위와 연결해 학생시위의 정당성을 훼손하 려는 의도가 뻔하게 보 다. 그것은 한일국교 정상화에 항의하는 학생들을 저지하기위해 19 6 4 ~65 년에한 번 시도했던것과똑같은계락이었다. 나는 이 기사들을읽고큰 일이날것 같은무너지는감정을 숨길수가없었다. 나 는 당시신문을복사해서오 목사의집으로갔다. 버스를타고가면서, 나 는 인혁당 관련자들과 가족들 그리고 오 목사에게 험난한 길이펼쳐질지 도모른다는예감이들었다.
19 6 4 년의기사들을보고, 나는이새로운인혁당사건역시조작된것이 틀 림없다고생각했다. 오 목사의해석도마찬가지 다. 오 목사는티없는 성격이어서나는그를 매우신뢰했다. 불행하게도, 그가밟아야할지모르는 이 위험한 길에대한나의예감은 적중했다. 첫번 째“ 인혁당”사건뒤 대략 10 년이지난뒤에, 오 목사는 수감자들과그아내들을도왔다는이유로 그 가 그렇게사랑했고, 자식들을키웠고, 성인시절의대부분을보낸나라인한 국에서추방되었다. 우리선교사공동체의한 기둥이한국에서강제로추방 되는것이너무슬펐다. 그는몇몇한국기독교인들과더불어도시산업선교 회를시작했고, 가난한사람들과억눌린사람들에게깊은관심을쏟은사람 이었다. 우리가오 목사에게이별을고한19 7 4 년 12 월의그날은너무도쓸 쓸했다.
이듬해 4월 인혁당관련자들에대한대법원판결공판때, 루이즈와나 그 리고몇몇다른사람들이용케법정 안으로들어갔다. 다른사람들은들어오 려고 했으나 보안검사를 통과하기가 힘들었다. 법정 안에는 인혁당 관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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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부인들이 있었다. 판사 모두가 줄지어 나와착석했다. 그런 뒤 재판장 이“ 판결이확정되었다”라고말했다. 그말만남기고, 판사들은일어나서걸 어 나갔다. 그 일이 너무나 빨리 벌어져서 우리는 어리벙벙했다. 부인들이 소리를 지르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우 여사가 우산으로 의자 뒤를 때렸던것과우산살이법정안으로흩어졌던것을기억한다. 그녀는다른부 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판결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던 것이 틀림없다. 남편을잃게된다는것을알았던것이다.
우리는충격 속에서무엇을해야 할지모른채그곳에서 있었다. 곧, 굉장 히 화가난 짐 시노트신부가 항의하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것은 조작이다! 이것은조작이다!”그순간국제사면위원회에서온변호사인브라 이언로블이계단을뛰어올라와법정으로왔다. 브라이언은인혁당사건과 정치범들의현황을기록하기위해몇주전에한국에왔다. 그는“ 방청”을하 기 위해법정에들어가려했으나사복경찰의저지로재판이끝날때까지밖 에 있었다. 마침내법정으로 들어와 그 소란을 보고“ 판사들은어디에 있나 요?”라고물었다. 우리가무슨일이 있었는지이야기하자, 그는서류가방을 내게맡기면서부탁하고소위“ 방청”에대해항의하기위해판사들을찾으러 서둘러떠났다. 나는그가모은한국의정치범들과인권침해에 대한모든자 료와중요한문건들을가지고거기에 서 있었다.“ 만일그들이우리를 체포 한다면이가방은어떻게 될까?”하는생각이들었다. 나는엄청난책임감을 느꼈고, 무슨일이있어도가방만큼은지키기로결심했다. 다른사람들이 모두법정밖으로나간뒤, 법원경찰들중 한 명이시계를 보더니우리에게“ 점심시간입니다. 모두지금가셔야합니다” 라고말했다. 그러나 루이즈는 자리에 앉아서 떠나지 않을생각이었다. 즉석에서 소규모 연좌시위가벌어졌다. 우리 세 명은(루이즈, 짐 시노트, 그리고나) 바닥에 앉았다. 나는 브라이언의 귀중한 서류가방을 무릎에 올려 놓은 채 앉았다. 마침내몇명의 사복경찰들이와서우리에게나갈것을명령했다. 두사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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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와무릎밑으로 나를잡아들고계단밑으로 옮겼으며, 나는마치마차 나 그와비슷한것에 탄것 같았다. 나는서류가방을가능한꽉쥐었다. 그들 이 나를 법원 뒤 콘크리트 광장에 내려 놓았다. 다행히 서류가방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고개를 들어 담장을 쳐다보니, 사건 전체를 촬 하고 있는 경찰이있었다. 나는희미하게미소지으며손을흔들었다. 그도웃으며손을 흔들었다.
 
다음 월요모임은랜디 라이스와 수 라이스 부부의 집에서 있었으며 매우 침통한모임이었다. 우리는법정에서있었던일과다음날있을여덟 명의인 혁당 관련자들의 처형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모두 분노했지만 무력 했다. 그러나동시에어떤식으로든정의에 대한왜곡에대응을해야한다고 강하게느꼈다.“ 아시다시피, 저는우리가무엇인가를해야만한다고생각합 니다.”랜디가말했다.“ 우리목에검은두건을뒤집어쓰고일종의공개적인 증언, 즉우리의분노에대한상징적인행동을보여줍시다.” 나는그생각을 받아들여,“ 맞아요, 검정두건을쓰고우리목 둘레에줄이나그와같은것 을묶고미대사관앞에서시위를벌입시다!” 라고말했다. 그것은이비극적 인 사건에미국이동조한것에대한 항의 다. 대사관직원들은그사람들이 무고하다는것을알았으나, 그것에반대하여발언하지는않았다. 우리는계 속해서 미국이 그 사람들을 위해박정희 정부에 개입해야 한다고 이야기했 지만,“ 우리는막후에서일하고있습니다”라는변명밖에없었다. 또그들은 “ 우리는조용한외교를펼치고있습니다”라고말했다. 우리는결정을내렸다. 교수형을당한여덟사람을의미하는월요모임회 원 여덟사람이 시위를 벌일계획이었다. 메리놀수녀몇 명과다른월요모 임 여성회원들이검정천을구해서바느질로두건을만들었다. 나는신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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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가서올가미를만들아주두꺼운밧줄을구입했다. 짐 시노트신부는여덟명 중 한 명이었고두건한 개를받았으나, 당국이 그를 의심하여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시위 전날, 우리는 덕수궁 근처에 있는진 매튜스의 집에서 모 다. 나는시노트신부에게우리를만날수 있 는지묻기위해 전화를했으나그는 집을나갈수 없을것 같다고말했다. 그 의 전화가 도청된다는것을알고있었기 때문에, 나는그와대화를 하기위 해 되도록 은 한 언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저,‘ 파티’에 당신이 와준다면좋을 거예요. 당신이올수 없을것 같다니애석하네요. 당신도알 다시피.. . ” 내가 적당한 말을 찾으려고 더듬거리고 있을 때 시노트신부는 “ 아, 내자리를대신할사람을말하는군요?”하고말을받았다. 시노트신부 는“ 누군가나대신거기에갈겁니다”라고말했다.
시위당일에우리모두는미 대사관에서멀지않은선교사주택단지에있 는 한 집에서모 다. 부산에서온 타이난 신부가 짐을대신해서 서울에 올 라왔다. 우리는물건들을 모아서 15 분을걸어미 대사관에 갔다. 미 대사관 앞에자리를 잡고, 조용히 두건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밧줄을 목에감았다. 그런뒤긴현수막을펼쳐서치켜들었다.“ 이것이조용한외교의결과인가?” 이것은 미국의 막후외교, 소위 조용한 (아주 비효율적인) 외교에 대한우리 의생각을표현한것이었다.
한국당국은우리의소규모시위에대해아주불만스러워했다. 각자집으 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로교 선교사인 프랜 넬슨 크로쓰에게서 전화가왔다. 어떤사람들이와서시위를 한여덟명 중한 명인자기 남편을 데려갔다는것이었다. 나는이리저리전화를해서찰리크로쓰진 매튜스가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심문을받고있다는것을알았다. 그들이내게오는것은단지시간문제 다. 이윽고문에서노크소리가났 다. 나는경찰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지않았다. 그들은더스트 씨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서 소리를질 다.“ 누구십니까?”라고 나는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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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경찰입니다.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라고 그들이말했다.
“ 저는당신을알지못합니다. 당신들이경찰인지제가어찌알겠습니까? 체 포 장을가져왔습니까? 당신들과아무데도가지않을 겁니다”라고나는 소 리질러답했다. 반시간동안소리를지르고그들은떠났다. 그들이다시온다는것을알았지만, 우리는그들을편하게대하지않기로 결심했다. 날이어두워진 후, 루이즈와 나는모든불을끄고전화를 뽑아놓 고 누구하고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얼마 후 경찰이 돌아왔다. 그들은 문을 두드리고들여보내줄것을요구했다. 우리는대답하지않았다. 그들은“ 당신 들이안에있다는것을알고있소! 우리를들여보내주시오!”라고소리를질 다. 그들은심지어여자경찰관을대문으로보내 마치잃어버린아이를찾 는엄마인체하도록했다.“ 순이야.”그녀는우리에게자기의어린딸순이가 있는지 물으면서 소리쳤다. 그것은 명백한 속임수 기 때문에 나는대문을 열지않았다.
그런뒤 경찰은옆집마당으로가서, 두집 사이에있는콘크리트담 너머
로훔쳐보면서우리집을 향해소리쳤다.“ 더스트씨, 우리와함께가주셔야 만합니다. 우리는 장을가지고있습니다!”나는얼마 동안그들이계속 소 리를지르게내버려두었지만마침내마음이누그러졌다. 그들이이웃을괴 롭히길원치 않아서그들과동행하기로하 다. 적어도몇시간동안그들을 곤란하게만든것에만족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의심문은남산에있는중앙정보부에서의심문과는 아주달랐다. 이번에는미대사관에서파견한입회인이줄곧 배석했다. 우리 의 항의가미 대사관을향한것임을생각하면그것은아이러니컬하 다. 물 론, 출입국관리사무소측은우리에게다시는그와같은일을 절대하지않겠 다고약속하는진술서에서명하길원했다. 나는어떤서명도거부했으며, 그 것은나자신과내 조국간의문제일 뿐이라고말했다. 나는내가한 일에대 해 진술하지 않았고, 불법적인행동을 했다는 것을인정하지 않았다. 내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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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서 보면, 나는 대사관에서 내 정부와 정부의 행동(혹은 행동을 하지않 은 것)에대해대화한것이기때문에불법적인것은없었다. 나는계속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시간이 게속흘러 늦은저녁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 은 모두 이미 풀려났기 때문에 그들은 마침내 나도 귀가시켰다. 용케 아무 서명도하지않은채그곳에서빠져나올수있어서기분이좋았다.
 
우리선교사들이 한국당국, 특히 비 과 고립이 필요한 독재정치에게는 골칫거리 다고생각한다. 그러나정권에게는불행하게도, 선교사들은고립 된 사람들이아니며한국지식인들, 특히외국에서공부하고살았던사람들 또한고립된사람들이아니었다. 그들은바깥세상과연결고리를가지고있 었다. 아마도그것이당국이외국선교사인우리를심하게다루지않은 이유 일 것이다. 선교사들을심하게 욕보이면 부정적인 결과들이 초래될 것이라 고 두려워했을지도모른다. 아니면그들에게는심문해야할 더 중요한사람 들이있었는지도모른다. 우리들에게극단적인조치를취하면박 정권이곤 란해졌을지아닐지는결코알 수가없다. 그러나다른나라에서는미국인들 이고문을당하고심지어 살해당했지만, 미국이그들에대해거의아무 말이 나 행동도취하지않은사례들도있었다. 다행스럽게도한국당국은그처럼 뻔뻔하지는않았다.
미대사관 시위뒤에있었던월요모임에짐 시노트신부의대역을했던타 이난신부가부산에서올라와우리를만났다. 그는부산에서유명했고아주 존경받는신부 다. 부산지역관리들역시그를알고있었고그의업적을존 경했다.
월요모임에서우리는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받은심문에 대해함께이야 기했다. 우리는타이난신부도 부산에돌아가연행당해심문을받았다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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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을 알았다. 부산 경찰청장이 그를 불러“ 저는이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 다. 우리부산지역신부가서울로상경해서문제를야기시켰다는사실이믿 어지지않습니다”라고말했다고한다. 타이난신부는정면으로그를바라보 고“ 그럼, 믿지마십시요”라고말했다.
우리의 행동과 공개적인 시위가 가져온 부작용 중 하나는 우리의 거주허 가 기간이짧아졌다는것이다. 대개거주허가는일년마다갱신되었다. 비록 우리가친절하고우호적이며너그러운한국인들사이에서살기때문에 잊어 버릴수 있지만, 거주허가증은우리가다른나라에사는손님이라는사실을 항상상기시켜주었다. 허가증갱신은일상적인일로, 우리는그것을심각하 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류를 제출하고 수수료를 지불하고 승인도장이 찍히 면, 출입국관리사무소로가서허가증을찾아서이“ 고요한아침의나라”에서 합법적으로등록된외국인으로다시일년을보내는것이다. 그러나이 과정은이제결코일상적인일이아니었다. 우리에게주어지는 거주허가증은불과3개월짜리 고, 한동안은심지어이보다더짧았다. 이제 는 거주허가가승인되자마자, 다음거주허가를받을절차를밟아야만했다. 그것은또다른정부탄압이었다.
 
인혁당 관련자들의 처형과 그것에 항의한 우리의 노력과 이에따른 심문 뒤에, 우리는 할 수 있는모든방식으로계속인혁당관련가족들을지원하 려고애썼다. 우여사자택으로특별방문을한 기억이난다. 그토록사랑했 던 그녀의남편은그가저지른죄때문이아니라더 큰 정치적이해관계의희 생양으로처형되었다. 처음으로나는“ 고래싸움에새우등 터진다”는 한국 속담을들었다. 그녀는남편과다른사람들이그랬던 것처럼, 강대국들간의 갈등에한국이자주끼어서등이터진역사에 대해계속해서설명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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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많은것을설명한다고생각했다. 한국역사를통틀어러시아와중국 간, 중국과일본간, 그리고일본과러시아간에전쟁들이있었고, 그과정에 서 한국은 짓밟혔다. 이제 미국의 이해관계, 일본의이해관계, 그리고권력 을 유지하려는 박정희 정부의 이해관계 때문에 평범한 한국사람들이 새우 처럼붙잡혀서등이터졌던것이다.
나는 전쟁의 폭력, 혹은 이 경우에는 국민에 대한 정부의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의 정신에는 아주 깊은 상처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인들 은 너무회복이 빨라서 나를놀라게 했다. 다행히도, 한국은외국군들이일 으킨 전쟁에서 벗어난지 이제 50 년이 되었고, 계속 번창하고 있다. 그것은 오직그들의역동적인정신과자유롭게살려는강한 욕망때문일것이다. 그 들은 자신의 문화를 유지하고, 신이 창조한 바로 그 민족이 되기로 결심했 다. 한국인들은유머감각이풍부한놀랍고강인하고사랑스러운민족이다.
 
12 년 동안한국에서살면서일했다는것은나에게개안의경험이었다. 자 라면서나는미국인들이매우근면하고창조적이고창의적인민족이며, 미국 이 정말위대한나라라고배웠다. 이모두가어느정도맞는말이다. 그러나 미국은위대한나라중하나에불과했다. 한국역시위대한나라이고, 일본도 위대한나라이며, 다른나라들역시위대하다. 그래서동료미국시민들이우 리나라가다른나라보다 훌륭하다고말하는것을들으면 슬프다. 스스로항 상 최고여야만한다고하면, 미국인들은다른나라들이지닌좋은점을이해 하거나그로인한혜택을입을수없게된다. 다른나라사람들의다양한재능 과 훌륭한 자질들이 주는혜택을 놓치게 되는것이다. 아마도더 위험한 것 은, 그것이 미국을 다른나라들과 협력할 수 없는나라로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은미국의이익이있을때만협력한다. 불행히도, 이로인해일종의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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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이생겼고, 오늘날미국은전세계적으로오만한나라로알려지고있다. 나는다른관점을얻을만큼오랫동안다른나라에살았다는것을다행스 럽게생각한다. 그것은훌륭한미국인이되려면, 훌륭한세계의시민이되어 야 한다는것을깨닫게해주었다. 나는단지한 나라또는한 문화에국한된 “ 문화적으로배타적인”존재가아닌, 더넓은세상의일원이되고싶다. 그것 이 어느나라이든지, 그들의언어가무엇이든지, 그들의관습이어떤것이든 지 또는심지어그들의종교가무엇이든지, 그것은내가하느님이모든인간 에게주신공동의 가치인 인간애를볼 수 있도록 한다. 하느님은 우리자신 을 비롯해인간이만든어떠한제도, 문화나전통보다더 크시며, 이세상의 자식들을차별하지않고모두똑같이사랑한다.
내가한국에서배운또 하나의사실은현재우리가살고있는지구촌에서 한 나라에향을미치는것은다른모든 나라에도어떤 향을미친다는것 이다. 예를들면, 힘있는자들의행동은힘없는자들에게향을미친다. 좋 은 예가미국의소비주의다. 나는미국에돌아와서너무많은식료품가게선 반들이애완동물먹이에할애되어있는것을보고소름끼치게놀랐다. 미국 의 소비주의는 거의역겨운 수준에 이르 다. 우리는너무많이가졌고, 그 때문에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소유한물질에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다른나라들 에게상처를준다.
미국의경제정책은미국식소비생활을다른나라에수출하고, 그로인해 종종 다른 나라들은 해를 입는다. 나는 한국에서 그 직접적인 향을 보았 다. 작은실례를들어보자. 우리아들이서울의세브란스병원에서태어났을 때, 루이즈는 모든산모들 가운데 모유수유를 선택한 유일한 엄마 다. 한 국 여성들은어린자식들의삶을비싸고건강에좋지 않은분유로시작했다. 모두 미국과 유럽 회사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행하는 대규모 판촉사업 때문 이었다. 또 다른 예가있다. 시장에 가면싸고 건강에 더 좋은 신선한 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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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들바로옆에더비싼미국산야채통조림들이진열되어있다. 또한미국은 미국식 고급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전세계의 자원을 흡 수하는일종의스폰지가되었다. 이에기반하여미국의외교및 군사정책이 형성된다. 나는 한국에서 직접이것을 보았다. 서울 미 대사관에서가장큰 부서는한국사람들이더 나은삶을 누리는것을돕지않으며, 자유와민주주 의또는인권을 지지하지도않았다. 대사관의가장큰 부서인상공부는열심 히 일하는한국노동자들의저임금의대가로미국사업가들이더 나은계약 을 맺도록 한다. 그러한정책의 결과로 젊은한국공장노동자들이닭장같 은숙소에서생활하게되었으며, 그광경은오늘날까지나에게고통을준다. 나는정부지도자들을별로신뢰하지않는다. 왜냐하면그들은너무나자 주 자국 시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업가나 군대를 위해서 행동하거나 말 하기때문이다.
미국산업의이익을뒤받침하는것이미국군대이다. 군대는미국의대외 정책에서 가장 큰 요소이다. 미국이 개입한 모든 갈등과 전쟁에서, 전쟁의 진짜동기는자유와민주주의에대한모든 수사들의저변에있다. 대개진짜 동기는그나라의자원에대한미국의강력한관심이다.
19 5 0 년대초반의종전이래, 미국은한국에5만 명의군대를유지하여왔 다. 오늘날까지 한국에는 수만명의미군이 존재한다. 20 0 1 년 9월 11 일, 상 업의 상징인 미국 세계무역센터와 미국 군사본부인 펜타곤이 공격당했다. 미국인들은이 공격이 정말무엇을 상징하는지이해하는가? 제3세계가 오 늘날세계의 주요한 경제제국이며 가장큰 군사제국인 미국을 응징하고 있 다는것이나에게는분명하다. 9· 11 테러리스트들의행동을용납하는것은 아니지만, 나는미국의정책이세계의다른나라에살고있는 사람들에게얼 마나많은고통을야기하는지를대부분의미국인들이깨닫지못하고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정의에기초한 평화는 단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우리의 정책과행동에반 되어야만한다. 불행하게도, 아직갈길은멀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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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노력하는 다른 나라의 기독교인들과함께 일 할 수있는 좋은기회를가진것에 나는항상감사할 것이다. 마치예수와그 의 제자들이옛날에그랬던것처럼, 그들은엄청난역경과탄압앞에서용감 하게일어섰다. 미약한방식으로나마그들을지원할기회를가진것이 내 신 앙을깊게했고, 내게더 훌륭한기독교인이되는법을가르쳐주었다. 내가 한국에서 보낸시간이 나에게 유익했던 것 만큼, (그리고 헤이퍼 재단이 보 낸 소 30 마리가 시골농부에게 유익했던 만큼,) 한국인들에게도 유익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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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신념으로실천하다
 수 라이스(S ue Rice)

남편과나는 19 6 5 년 미국장로교회산하범교회선교단에의해한국선교 사로임명되었다. 우리는갓난아이부터여덟살짜리까지4명의자식을데리 고,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에서살았다. 남편인W. 랜섬 라이스2세(랜디) 목사는제일장로교회의부목사 다. 
나는캐나다국경지대의나이아가라폭포와뉴욕주의루이스턴에서성장 했다. 내가다닌고등학교는동유럽계, 유태계, 이탈리아계, 폴란드계, 그리 고흑인 등많은인종들이함께 다닌학교 다. 나는뉴욕주 북부에있는세 인트로렌스대학을다녔다. 대학교교목이나를기독교학생운동으로인도했 으며, 기독교학생운동은국내외문제들에대해적극적이었다. 뉴욕시 출신 흑인목사인 제임스 로빈슨 목사와 브라질에 파견된 선교사인 리처드 샤숄 박사가주도한여름학회에서, 나는교회의전세계적인활동에대해비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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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펜팔 친구를 제외하고, 나는 동양과는 아무런관계가없었다. 
19 6 5 년 나는장로교연합회(현재의미국장로교)의형제봉사자로임명되 었다. 랜디와나는뉴욕 주 스토니포인트에위치한선교사교육센터에서여 섯 달 동안교육을받은뒤 서울로와서, 연세대학교한국어학당에서2년간 집중적으로 한국어교육을 받았다. 그후, 우리는 어회화 선생으로 경희대 학교에배치되었다. 랜디는 또 한국기독교학생회총연맹과 함께 일하게 되 었다.
 
최초로내가19 6 0 년대남한의슬픈현실에관심을가진것은일자리를찾 아 서울로상경한가난한농촌출신어린여성들의궁핍한처지때문이었다. 궁핍하게살면서다른 일자리를찾을수가없어서, 그들은종종매춘으로이 끌리곤하 다. 나는이 어린여성들을위한안식처를마련하는선교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직 장로교 연합회선교사이자 사회활동가인 엘리노어 반 리리로프가연세대학교교수부인들과함께그 사업을시작했다. 그들은 이곳을 은혜원이라 불 다. 나의 취미인 바느질과 뜨개질도 은혜원에서 하 나의기술로가르칠수있었다. 나중에나는간부가되었고 19 7 2 년에는원장 으로일했다.
은혜원은13 세 이상의여자아이들에게도움을주었다. 이어린여성들대 부분이초등학교를졸업한뒤 (한국은초등학교만무상으로실시되었다) 시 골 집을떠났다. 그리고 집안이 가난해서 학비를 낼 수 없었기때문에 직장 을 구했다. 대부분의경우, 여성들은 남자형제들이 학교에 다닐수 있도록 돈을 집으로 보냈다. 가족들 중 남자 형제들이 교육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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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소녀들은서울에있는가게나식당에서일할수 있을것이라고생 각했다. 그러나그들중 대다수는도심이나서울용산의미8군 근처유흥가 에서일하게 되었다. 그러면올가미에 걸려들게되었다. 유흥가의주인들은 그들의주민등록증을압수하고강제로빚을지게한 다음, 빠져나갈유일한 방법은매춘여성으로일하는것뿐이라고말했다.
나는한국어실력이아직은미흡했기때문에, 은혜원을찾기전에그들의 삶이과연어떠했는지완전히이해할수는 없었다. 나는은혜원의주별임원 회의, 사례 발표회, 그리고시골방문 등을통해그들의 상황을 알게되었고 법의보호가필요하다는것를알게되었다.
말구유에 있는 마리아와 요셉을 그리고 있는어린 소녀들의 천사같은 얼 굴을 보면서, 나는 은혜원의 연례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 안식처마련사업이미혼모와아이들의임시거처가되는것을보고특히마 음이아팠다.
 
나는기독교인이면서미국인 아내이자미국인 어머니 기에, 한국정부와 가족제도내의유교적위계질서에대한이해가거의 없이한국에왔다. 사실 나는한국여성들이직면한문제들을알수 없었고, 내감정을언어로표현할 수도없었다. 그러다가이화여자대학교의유명한사회학교수이자『한국여 성의지위』라는책의저자인이효재의강연을들으면서비로소바뀌게되었 다. 그녀는 한국여성들이아버지, 남편, 다음에는 큰 아들의 휘하에서 어떻 게 살아가는지를내게가르쳐주었다. 그녀는여성이결혼해서아들을낳지 못하면사람취급을받지 못한다고설명했다. 그리고오랜불의와차별의역 사에서비롯된한국사람들, 특히여성들이느낀뿌리 깊은고통과타오르는 분노의응축된결정체를‘ 한’이라는용어로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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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훗날인구 천만명의수도 서울의 공단지역에거주하면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어린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끔찍한대우를 목격하고 특히 충격을 받았다. 나는은혜원과이화여대사회복지센터에서소녀들을상담하는동안 이런현실의일부를경험하 다. 사회복지관련공부를더 할 필요가있다는 것을깨닫고1년 동안이화여자대학교사회복지학과에등록했고, 대학교근 처에있는가난한지역에설립된사회복지센터에서일했다.
나는 19 6 0 년대에“ 50 인 모임”의 (랜디 라이스 참조) 회원이었고, 19 7 0 년 초 월요모임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참석하기 시작했다. 월요모임에서 나 는 생각과슬픔과분노의감정을토론하고그런감정들을행동으로옮길수 있다는것을알게되었다. 월요모임은교육을시키고정보를제공하고외국 인으로서 행동을 취하기 위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회원들은 외국에 살면서 책임 있는 미국인이 된다는것이 무엇을뜻하는지를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나를 도와주었다. 여기에는인권과 정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정부와 의 사소통을하는것도포함되었다.
 
나는한국의공장생활, 특히어린여성노동자들의생활에대해배울것이 많았다. 산업화는남한을급격하게농촌사회에서도시사회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변화시키고있었다. 어린여성들은순종적이고숙련된노동력의 일부분으로간주되었다.
장기간 월요모임을 갖는 동안, 우리는 언론이 노동착취에 대해서는 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의 실태를알게되었고, 노조활동이심각하게위축되어있다는것을알게되었 다. 월요모임회원들은이 문제를연구하는과정에서, 억압적인노동조건을 제시하는공장대다수가직· 간접적으로미국회사와연결되어있다는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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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발견했다.
도시산업선교회의간부인조지성목사가19 7 1 년 4월 두 차례에걸쳐월요 모임과자리를함께했다. 도시산업선교회와천주교산하의노동단체청년기 독교노동자회는 억압적인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지원했다. 조 목사는등포공단지역에있는도시산업선교회에서일하고있는목사들중 한명이었다.
그는우리에게고배율현미경으로하루에여덟시간동안컴퓨터칩을바 라보는일을한 뒤 시력을잃은십대와이십대초반의 여성노동자들의처지 를 설명했다. 그노동자들은점심시간30 분을제외하고는쉬는시간이없었 다. 눈 질환에 대한 불만들이 콘트롤데이타, 모토롤라, 시그네틱스 그리고 페어차일드반도체를 비롯해 7개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로부터접 수되었다. 
공장장과사장들은시력검사도하지않았고작업환경에대해관심도보이 지 않았다. 도시산업선교회의도움으로, 대략15 0 명의노동자들이시력검사 를 받고 필요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검사결과에 따르면, 여성들은 휴식도 없고현미경 렌즈를 청소하고 수선할 장비도 없는상태에서 눈을 피로하게 하는장시간의긴장된작업을한탓에시력을상실하고있었다. 나는어린여성들에게일어나고있는일로인해너무나괴로웠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다른 월요모임 회원들과 함께 등포에있는도시산업선교회본부에서몇 명의여성들을만났다. 어린노 동자들은 리하고 쾌활했다. 교육을더 받으면 혜택을 누릴수 있을것 같 았다. 
그들은 억압적인 작업환경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다. 우리가 만났던 방은 벽에책상을붙여놓은 황량한곳이었다. 그러나어린여성들이자기자신과 직장에 대해대담하고 용감하게 말하면서 방을 밝혔다. 그들이 도시선교사 업회에간 것이알려지면해고당하게된다는것을나는깨달았다. 해고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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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어떻게될까?
소녀들이 이야기할 때 나는 걱정이 되었다. 누군가 얇은 벽에 난 틈새나 문을 통해 엿듣거나, 전화를 도청하여 듣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어느 날 조 목사가 전화기를 들었는데, 이전에그가한 통화들 가운데 녹음된 것 하나가들렸다. 우리에게그들의이야기를하는것이너무위험하다고생각 하는다른회사노동자들이있지않을까? 나는이여성들을이렇게용감하게 만드는것이 무엇인지궁금했다. 그리고나는그들이손상된시력에대해어 떻게느끼는지궁금했다.
우리는힘을얻은느낌으로모임을마쳤다. 이노동자들이우리와만나기 위해없는시간을쪼개서찾아온만큼, 우리는이들의이야기에귀기울이고 행동할 용기를 내어야 할 것이었다. 나는 서울의 서부지역에 있는, 남편과 아들이있는안전한집으로돌아갈때쯤되어서야내가어떤결과를맞이하 게될지걱정이들기시작했다. 
백병원에서실시한검사에서, 2년 이상일한여성들은시력이나빠졌음이 입증되었다. 조목사는월요모임회원들중 몇 사람에게미국회사중 하나인 페어차일드반도체의관리자들을만나달라고요청했다. 그공장의주작업장 으로안내받았던일을나는생생하게기억한다. 여성노동자들은일렬로앉 아 머리를 현미경에 대고 일하는 동안 잠시도 위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들 뒤에는젊은남성감독관들이서서누가머리를드는지를감독하고있었다. 그곳은을씨년스러웠다. 노동자들은거의기계인간같았고심지어조사하
러온낯선외국인을보는것조차허락되지않았다. 
한국인이 운 하는 회사의미국인 관리자가 우리를 사무실로 안내했다. 우리는그에게시력검사결과, 노동자들의시력이손상되고있다고말했다. 그는일이그들의눈을혹사시킨다는것을인정했다. 회사노동자들의시력 검사 장비의 부족과 오전 또는 오후 휴식도 없는 장시간 노동에 대해 따지 자, 그는중간에끼어들어우리가뭐하는사람들인지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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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 교회와 연계된 선교사업을 하는우리의 임무에 대해 설명했 다. 그리고 관심있는 미국인으로서, 미국회사의 관리자들에게 노동자의 육 체적, 정신적인 건강에 대한 우리의 우려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 했다. 그관리자는“ 여러분들은선교사로한국에봉사하러오셨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 회사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말 했다.
나는곤혹스러웠다. 물론, 이윤을남기기위해서겠지! 우리는참으로순진 하고천진난만하지않은가! 공장을설립하기위해세계의절반을돌아온데 에는 분명 동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동기가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그것은 내게하나의계시 다.
그는그 사실에 대해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는것처럼 말했다. 나는그
의노골적이고직설적인말에감탄했고, 그것에대해그에게감사했다. 얼마뒤, 페어차일드회사는오전과오후에휴식시간을주었고, 시력검사
용기계한대를들여왔다. 
우리는 다른 회사들도 찾아서 면담을 요청했지만아무 회사도 응하지 않 았다. 그러나조 목사에따르면, 다른회사들도결국도시산업선교회의요구 를 수용하여깨지거나초점이맞지않는현미경을수선하고, 현미경을닦을 수있는고급화장지를충분히공급하게되었다. 
도시산업선교회는 콘트롤데이타와 시그네틱스의 노동조합을 통해 그곳 관리자들을공장에서만났다. 우리는한국법에따르면공장노동자들은4시 간마다5분 내지 10 분씩휴식할권리가있다는것을환기시켰다. 그들은법 을알면서도지키지않았다. 특히 빠른성장을바라마지않는 정부가이런것 에신경을쓰지않았기때문에더더욱그러했다.
시력검사가 월요모임에 남긴 향은 막대하다. 우리는중요한 과정의 일 부를체험했다. 외국기독교인으로서우리는다국적기업의행태에대해공 부할수 있었다. 우리는한국기독교노동활동가들과함께일하면서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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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작업조건을개선하는 데 중요한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덕분에 우리 는 노동자, 특히여성노동자들의세력화를추구하는다른활동가들과도만 나게되었다. 
 
뉴욕 주 나이아가라 폭포인근의 산업도시에서 자랐지만, 나는 노동조합 에 대해아는것이거의없었다. 내 고향은19 4 0 년대와 50 년대에생겨난 신 흥도시로서, 나이아가라전력회사의저렴한전력에의존하는주요화학공장 들이많이있었다. 
나는대학교1, 2학년동안화학을전공했고, 어느여름방학에는화학공장 에 취직하기로 결심했다. 인사관리부장이 나를 쓱 보고는이렇게말했다. “ 요즘 저희회사에는여성들이할 일이정말없습니다. 우리일은화학물질 을 다루는 아주위험한 일이어서, 우리 회사는 여성들이 그런일을하는것 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대신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게 어떠겠습니
까?”
나는그의말에어안이벙벙해졌다. 나는여자로서결코열등하다고느끼 지 않았다. 내가퀴리부인도될 수 있으며치료제도발견할수 있다고생각 했던것이기억난다. 그래서그 사람이 나를선입견대로보는것에화가났 지만, 그에게내느낌을 말하지는않았다. 서울에서현미경아래마이크로칩 부품들을 조립하는 여성들이 날마다 작업대에 구부리고 일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그런느낌이되살아났다.
도대체어떤미국회사들이정부의규제와감시를피하고노동자들과노조 의 요구를무시하면서노동자를착취함으로써이윤을창출하기위해외국으 로 공장을 옮기는지 묻지않을수 없었다. 그들은서울도심의청계천에 있 는“ 평화시장”같이비좁은공장에서 일하고있는어린한국봉제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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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믿기지않는상황을철처히외면하지않는가?
평화시장을떠올리려면, 원래노출된하수구 던넓은지하수로를따라6 층짜리길다란시멘트 건물들이줄지어있는모습을상상해 보라. 1층은여 러 종류의 의복들을 진열한 도매시장이었다. 윗층에는노동자들이 옷을 만 드는공장이있었다. 대부분십대인수 많은아이들이서 있을수도없는비 좁은 공장에서 주로수출용 의복들을 바느질하면서성과급으로 일했다. 그 들은 직물의 유독한 냄새가 섞인 후텁지근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여름에는 찌는듯이무더웠다. 겨울에는손가락이너무나시려서일의속도가늦어졌 다. 그들은주로일본과 미국으로수출하게될 10 억달러의직물을 생산하는 기계에부착된톱니바퀴같았다.
이런현실은노동자들의비참한환경을알리기위해평화시장에서일하는 3천 노동자들중 한 명의극적인 자살을불러왔다. 평화시장의어린노동자 던전태일은어린노동자들의청춘이소모되는현실과그들의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대해괴로워했다. 그는잔혹하게착취당하는동료노동자들에게 대중이관심을갖도록만들기위해조사하고조직하고항의하는등 모든일 을 했다. 그리고마침내시장앞 노상에서분신자살을했다. 그의죽음과그 가 남긴유언장은 강력하고 지속적인 향을 미쳤다. 수년 동안그의어머 니 이소선과 누이는 그의 일을 실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청계피복노조를이끌면서평화시장뿐만아니라이 나라곳곳에서 노동자들 을 위한정의를구현하는일에참여했다. 20 0 5 년에도이소선은여전히그의 아들이시작했던일을계속하고있다.
 
월요모임은미국의전국라디오방송에나가평화시장 노동자들과그들의 작업환경들에 대해이야기하기로결심했다. 19 7 3 년 어느날 월요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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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데이빗존스, 린다 존스, 그리고 나는풀브라이트 장학생인 버니와이드 먼과연계해서과감하게평화시장건물들중 한곳에 들어갔다. 우리의장비 는 아주저급한 수준이었다. 오늘날사람이 들고다니는 것 같은작은이동 식 트랜지스터녹음기가없었기 때문에, 손수만든녹음장비를데이빗존스 가등에졌다. 그것은오늘날광고 화카메라만큼컸다! 노동자들 중 몇 명과 인터뷰를 시작하자, 우리 모습은 더욱 부각되었다. 그들은 몇 명의 미국인들이 그들의 환경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것에 놀랐 다. 그들은 바느질감위에구부려재봉틀을돌리면서이야기했는데, 우리의 관심에놀랄 때에만올려다보았다. 그들은한달평균60 달러를벌고하루에 최소한10 시간씩일하고있다고말했다.
린다는경찰을아래층에묶어두는데 성공했다. 그러나얼마되지않아서 카메라의불빛때문에작업반장이무슨일인지보기위해고개를내 었다. 재빨리떠나야할시간이된것이다.
이 이야기는미국공 라디오방송국의5분짜리작품이되었다. 억압적인 한국의공장에있는노동자들에 대한우리들의녹음이고향에서뉴스거리가 될것이라고는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러나대부분의 옷감들이 미국시장으로 수출되기때문에그것은뉴스가 되었다. 우리가미국사람들이입을값싼의 복을 생산하는 억압적인 환경에 대해 미국인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기 때문 에 나는기분이좋았다. 우리모두는옷을사기전에그 옷을어디에서누가 만들었는지, 혹시저임금을벌기위해열악한환경에서장시간노동하는어 리고순진한아이들이만들지는않았는지환기할필요가있다. 
 
나는외국인이미력한방식으로나마한국에서민주주의를회복하는데 기 여할수 있다는것을월요모임을통해배웠다. 그러나무엇보다도그것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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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인들의투쟁이라는사실또한잘 알고있었다. 월요모임회원들의주변에 는 열정적인동시에남을고무시키는한국활동가들이많았고, 평범하게살 다가분노하게되어마침내민주화운동에합류하게된일반인들도많았다. 우리에게가장중요한감의장소는서울중심가에있는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건물에서열렸던목요기도회와서울외곽에위치한갈릴리교회의일 요일오후예배 다. 갈릴리교회는민주화운동, 노동운동, 그리고인권운동 을 지원하다가혹독한징역형을받은정치범들의부인들과어머니들이세웠 다. 이예배에서부인들과어머니들은기도하고, 성서를되새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에대한소식을나누고, 서로를격려하는특별한시간을가졌다. 많은한국인들과월요모임회원을비롯한외국인들은그들을격려하고소 식을 들으려고 참석했으며, 그들의 신앙에도 감복하 다. 이들은 극단적인 고통속에있는여성들로서, 감옥에서건강이좋지않은남편에대한고통스 러운소식이나독방에갇힌아들의 소식, 또는다가오는재판에대한근심을 서로나누었다. 이여성들이서로에게서, 그리고하느님으로부터용기를얻 는것이눈에보 고, 그러는가운데에우리에게도힘을주었다. 네 명의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일요일이면, 나는 한참 동안 만원버스를 타고서울동쪽외곽으로 가서 용기를 얻었다. 나는 부인들과 어머니들, 그 리고일요일오후에신앙심으로갈릴리교회예배를찾는정치범들의기독교 후원자들에게서힘을얻었다. 그들은남편이나아들, 딸의일시적인상실이 주는심한고통에기반한유대감을함께나누었다. 그들은사랑하는이들의 투쟁을계속하리라고맹세했다. 그것은민주회복, 노동권, 그리고집회와언 론및출판의자유를위한투쟁이었다.
우리는찬송가뿐만아니라“ 우리승리하리라”와 같은자유, 평화, 정의에 대한미국노래들을 불 다. 웃음과 눈물을 통해, 이 여성들은 밖에서 어떤 일을당하고어떤사람과 맞서더라도헤쳐나갈수있는용기를얻었다. 밖에 서 그들을기다리는사람들로는도처에서그리고심지어교회까지미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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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차림의중앙정보부요원들이포함되었다.
갈릴리교회는 나에게 여성들을 위한 안전한천국을 의미했다. 그곳에서 약한사람들과강한사람들이만나서서로를위로하고, 사랑하는이들의활 동을지속하기위해필요한힘을얻었다. 갈릴리교회는그들과나에게하느 님이준 선물이었다. 그곳에서나는그들의위대한투쟁에작은기여를하기 위해필요한신앙과용기를발견했다.
 
나는 미국이 탄압, 연행, 고문, 노동자들의착취, 집회와 언론 및 출판의 자유 억압과 같은 한국경제의 어두운 측면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그것에 대 해 걱정했다고는결코생각하지 않았다. 미국무성은한국의야당의관점은 말할것도없고, 나를포함하여관심있는미국인들의미국외교정책에대한 의견에도특별한관심이 없는것 같았다. 서울 미 대사관의 가장큰 부서인 경제부에서 대부분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처럼 보 다. 설사 그들이 남한에 서 정치· 경제적으로 무슨 일이벌어지는지 알고있었다 할지라도, 우리들 이나한국인에게표시를내지않았다.
 
19 7 1 년 뉴욕루이스턴에서1년간 휴가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랜 디와나는연희동에있는연세대학교교직원사택으로옮겼다. 우리를처음 으로방문한사람들가운데연세대교수인김찬국목사와그의아내성윤선 이 있었다. 그녀는우리를 편하게 해 주었으며, 음식도가져오고 우리를 집 으로초대도하 다. 우리는매우환 받았고, 한국의일상생활에대한생각 을 즐거이이야기했다. 김목사는연세대학교신학과학장으로서자신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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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이야기할 때 항상 사랑스럽고 밝은 미소를 띠었다. 그들의 딸 민성해는 우리딸리즈에게피아노를가르치려고애썼다.
서리가내린어느 겨울아침에우리는함께 스케이트를타러갈것인지물 어 보려고김 목사댁을방문했다. 막내아들은규가가길원해서, 우리모두 는짐을싸서 서울외곽에있는규모가큰 스피드스케이트장으로차를타고 갔다. 우리의우호적인 관계는 역경의 시기에 우리가 서로쉽게나눌수 있 다는것을의미했다.
19 7 4 년 5월 7일, 중앙정보부가김목사를그의연구실에서데려갔다. 그의 가족은5주 동안그의행방을알지못했다. 그의부인이다방면으로정보를 모아서 그가남산의 중앙정보부 본부에 억류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정부를전복하려는 음모에학생들을 충동질했다고 기소되었고, 10 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아홉달 뒤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 기간내내 우리는 김 목사를 위해기도했고, 위로와용기를북돋아주기위해그의아 내를방문했다.
우리는민주주의와인권을수호하는그의용기에감탄했고, 남편뒤에굳 건히서서가정의의무를수행하는성윤선의강인함을보았다. 아이들또한 어머니를도와어머니의바램에맞는행동을하 다. 
김목사의 연행, 구속, 그리고이어지는모든일들을 보면서, 나는한국활 동가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경험했던 시련과 슬픔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월요모임회원들과이러한한국기독인들과의연대는한국정부의더욱가혹 해지는 탄압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항의하는 우리의 실천활동 속에서 더욱 확고해졌다.
김 목사의딸인민성해는내가김 목사의구속과관련된이야기를기억해 내도록도와주었다. 독방에있는동안, 그에게는아내의면회조차허락되지 않았고, 세 아들과 딸에대한어떤소식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구속자 가족은구속자의세탁물을책임져야했기때문에, 성윤성은매주평평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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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줄위에짧게소식을써서남편의헐 한속옷에끼웠다. 한참뒤에이 이 야기는 가장힘든 시절에 등장한 창의적이고 배려깊은 사례로 한국텔레비 전에서방 되었다.
정부의억압으로김목사는6년 동안연세대학교에서쫓겨났다. 이것이가 장어려운일이었다. 19 8 0 년의봄에잠깐복직했고, 19 8 4 년마침내정교수로 복직하 다.
 
또다른특출한사람으로는한국의첫 여성변호사인이태 박사가있다. 그녀는 인권투쟁과 여성의 권익을 위한투쟁에서 모범적이었다. 이 박사는 여성백인회관사업을조직하 다. 이사업은남한에10 0 명, 미국에10 0 명씩 한국여성의두그룹에경의를표하여명명된사업이다. 이들은이사업에재 정적으로크게기여했다. 
어려운 조건속에서도회관은완성되었고,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이곳에 자리잡았다. 이태 은 한국가족법 하에서 여성들이 동등한 권리를 찾도록 돕기위해이 상담소를설립하 다. 이곳에서는특히여성과가정문제에대 한 최초의 무료 법률상담 프로그램을 운 했다. 17 년 동안 이 박사는 한국 가족법을개정하기위해일했고, 가족법은점차적으로개정되었다. 얼마동 안 나는서울중심가에있는여성백인회관에있는사무실에서일했다. 나는 매일여성상담원들이다양한개인적, 가정적, 그리고사회적문제들을어떻 게다루는지를보았다.
이 박사는 인권운동과 민주회복운동에지대한 향을 미쳤다. 그녀는 다 른 한국여성들에게상징적인존재 고감을주었다. 그녀는19 7 6 년 3월 1 일“ 구국선언문”에서명한두명의여성중한명이었다. 심지어변호사자격 을 박탈당해도 항상 법률적인 조언을 아낌없이 제공했고, 독재정권의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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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과조치에 강력하게저항하 다. 그녀는유능한국제적조직가 다. 그 녀는한국의 자매들과 형제들이 매일직면하는 억압적인 환경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수많은 해외여행에서이런 현실들에 대해 분명하고 과감하게 이 야기했다.
 
이렇게많은훌륭한한국인들과의관계로인해한국에있는동안나의생 활은 원히변했다. 나는많이성장했다. 내정신과마음은한국의정치적, 경제적 현실들에 의해 더욱 넓어졌다. 나는 신념에 따라 실천할 힘을 얻었 다. 한국의현실을파악하려하고, 그현실을바꾸기위해실천에나섰던외 국인선교사들과알게되고함께일했던경험은내게축복이었다. 월요모임에소속된우리는지도자가따로없었다. 모두함께일을분담했 고, 서로의 집에서 모여새로운 것을배웠으며, 미국 정부와 교회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간 교회구성원들에게 어떻게 향을줄 것인가를 결정했다. 더 많은것을배우게되면서우리는역으로 다른사람을교육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한국을 방문한 YWCA 와 미국교회여성연합의 대표들을 만났을 때, 우리는이 여행사절단을교육시키고, 우리가눈가리개를벗었던것처럼 그들도 눈가리개를 벗도록 이끌고, 많은 주변부 한국인들이 경험하고 있던 엄청난불평등을보고이해하도록돕는것이월요모임의사명임을깨달았다. 또한 월요모임은 특별한방문객들도 맞이했다. 미국 민주당 소속의원인 도널드프레이저가그중 한명이었다. 19 7 0 년대중반에그는아시아의인권 침해를 조사하는 하원 소위원회 위원장이었다. 프레이저의원도 우리 집에 서 열렸던월요모임에왔다. 외국인선교사들이서울전역과다른지역에서 와서, 거실과 부엌까지 사람들이꽉 찼다. 그들은 바닥에 앉거나 무릎꿇고 있었다. 신발은원래하듯이문에서벗었다. (그날밤은신발이수북이쌓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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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의원은늦게도착했다. 문에서신발을벗는관습을몰랐기때문 에 그는 검은 신을 신고 모임 한가운데까지 걸어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의 손이나발을 밟지않으려고애쓰면서방안으로기우뚱거리며들어서는것이 불편해보 다. 그는우리가한국의인권유린에대해말하는것을신중하게 들었다. 우리는공장노동자들, 대학생들, 그리고정치범들의어머니들과부 인들의소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꽉찬 답답한 방 때문인지 오래 있지 는 않았지만, 그와같은지위에있는사람이우리를만난것에우리는감사 했다.
가끔씩 월요모임은 우리가 다루는 문제와대의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국가의대사관인사들을초대했다. 예를들면, 캐나다에서한국에 새 대사가 부임했을 때, 우리는 대사와 그의 아내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우리는편안한온돌에서간단한식사를마친뒤좋은토론을하 다. 대사와그의아내를대문까지걸어서배웅했을때, 우리는작업복을입지 않은 사람이 전봇대 위에서 전화선을 통해 듣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수신상태가좋지않았는지, 며칠뒤에“ 전화국직원”이 거실에있는전화를 “ 수선”하기위해왔다. 그는뚜껑을열고그안에어떤장치를설치하고나사 를 조인뒤,“ 됐습니다. 이제잘들릴것입니다”라고말했다. 나는그에게웃 으며감사하다고 했다. 그때부터 거실에서 대화를 할 때, 우리는 전화기 옆 에있는라디오의음악을틀어서감시자들을놀렸다.
여덞명의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정부의 처형과 19 7 5 년 4월 짐 시노트 신부의추방 뒤, 월요모임은약간물러서기로결정했다. 우리는비폭력적저 항의방법들에대해배워야할필요를느꼈고, 우리를가르칠좋은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미국 화해연대(Fel l o wship of Rec o u c i l i a t i o n )에서 파견한 리처드 디츠 목사 다. 우리는 서울 외곽에 있는 기독교 캠프장에서 만났다. 여덟 사람의교수형에대한거센감정들을계속억눌러야했기때문에그 주말은 힘들었다. 우리가했던일중 하나는그여덟 사람이대법원에서사형선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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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장면을재현하는것이었다. 우리는당시의충격, 분노, 절망감, 그리고 무력감에대해이야기했다. 그리고그당시우리자신이느꼈던감정은 이해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처형된 사람들의 부인들이 경험한 충격, 분노, 절망, 그리고무력감은결코이해할수없을것이라는이야기를나눴다.
 
19 8 1 년 미국 장로교여성회 회장이던 엘리노어 그레고리가 미국여성들이 여성백인회관의기부를 통해지원했던 가정법률상담소의25 주년행사차한 국에왔다. 엘리노어와나는연세대학교교정에서만났고, 나는그녀에게내 임무에대해이야기했다. 그녀는먼저서울도심에있는봉제 공장노동자들 의 열악한 상황을 직접 보길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봉제공장 지역으로 갔 다. 우리는 의류를파는가게들을보았고, 의류를만드는 4층과 5층에있는 공장까지 어둡고 우중충한 계단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어린 여성들이 숨막 히는작업실에서작업물위로구부리고있는것을보았다.
23 년 뒤인 20 0 4 년 12 월, 나는현재뉴욕주 이스트오로라에소재한어느 장로교회의 신자인 엘리노어에게서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다. 그녀는“ 저 는 아직도한국에서당신과함께방문했던곳을기억한답니다. 당신은아주 많은 것들에 대해 제 마음과 눈을 열리게 해주었지요. 특히 어린 소녀들이 일에쫓기고있었던오래된창고를 방문했던것을기억합니다. 내마음은아 팠고, 이곳미국을비롯해세계도처에있는 노동자를착취하는공장에대해 읽을때면여전히마음이아프답니다.”
 
한국과 한국인들은 나에게 많은것을 가르쳐 주었다. 투쟁하는 한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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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옆에서목격하고그들과함께하면서, 나는나자신의발전과사회의개선 을 위해지역적인 동시에 전지구적으로, 한번에한 사람씩 내지한 단체씩 활동하는것이얼마나중요한지깨달았다. 월요모임이그랬던것처럼말이다. 사회의 대립과 이탈을 목격하는 곳 어디에서든지, 우리는자신의 신념에 따라교육하고정보를제공하고 실천해야만자유로워질수 있다. 이러한생 각에힘입어, 현재나는미국에서이민자들과정신질환에서회복한사람들과 함께일하고 있다. 보고 배우는 것만으로는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보고배 운것을실천해야만한다. 그것이한국과한국인들이내게가르쳐준것이다. 그들은우리에게이사야서16 장 1~2절에나오는위대한진실을가르쳐주 었다.“ 하느님의도움으로, 우리모두는이 땅위에정의와평화의사도가되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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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 장 한번경험해보자
 진 베이싱어(Jean Bas i n g e r ) 

19 3 0 년대와 40 년대에 아이오와 주 골드필드의 농장에서 자란나는, 아시 아에살면서 그곳 사람들의 기쁨과 비통함을 함께나눌 것이라고는 생각지 도 못했다. 아마도어릴때 가축을 집으로 몰고오면서 해질녘 들판을 가로 질러 걸을 때 미래에 대한 모습을 언뜻 보았을지는 모른다. 나는 하느님이 전세계에서서로연관되어있다는느낌을가졌던적이종종있었다. 
8년동안집에서 1.5 마일정도떨어진시골학교를다녔다. 매일학교를오 가면서나는지리책에서배운아이들에대해 생각했다. 나는그들역시 하느 님의자녀이기때문에나의형제, 자매라고생각했다. 아마도내가외동이라 서이런사실이더의미가있었는지모른다. 
아주어린아이 을때부터, 나는감리교회의주일학교와예배에항상참 석했다. 하느님은내 삶의중심이었다. 나는6학년때부터교회수련회에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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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했다. 8학년 때는 하느님이 선교사가 되도록 나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했 다. 대부분의감리교선교사들이아프리카나중국으로가는것 같았기때문 에, 나도아프리카나중국에가는것을상상했다. 고등학교시절에는선교사 가 되는소명을의심한 불행한때가있었다. 그러나어느일요일 아침, 한친 구가내게드모인에 있는아이오와감리교병원의간병인학교에대해이야기 했다. 갑자기 다음에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가 분명해졌다. 나는 평생하 느님이원하는방향으로나아가고있다고확신했다.
둘다드레이크대학교학생이었을때, 나는장래의남편빌 베이싱어를만 났다. 그 역시골드필드 출신이었다. 의사인그의아버지가 내가태어날 때 나를받았다. 빌과나는사실7살 차이가나기때문에자라면서는서로알지 못했다. 우리는19 5 5 년에결혼했고, 곧바로 드모인의 녹스장로교회에합류 했다. 빌은아이오와대학교에서재활상담으로석사학위를받았다. 결혼한 뒤, 빌과 나는해외선교사업에대한꿈을함께꾸었다. 그는 해군 으로복무했던일본으로가길원했다. 여름마다우리가족은장로교교회학 교에참가했다. 1년 뒤, 어떤 기독교교육담당선생님이나에게 유치원 선생 님들을위한교회학교워크샵을 지도하는것을도와달라고요청했다. 나는 선생님에게유치원수업을해본적이없다고말했다. 그녀는“ 음, 한번경험 해보세요!”라고말했다. 그때부터그말은내모토가되었다. 진정으로하고 싶지만경험이부족한경우에, 일을하도록요청을받으면언제나나는이렇 게생각했다.“ 한번경험해보자!”
 
19 6 7 년 2월, 9살 먹은 로리, 7살의데니스, 3살짜리 크리스, 그리고 빌과 나로구성된우리가족은국제이해협회에서후원했던연례외국학생주말체 류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더뷰크 신학대학교에 다니던 인도네시아 학생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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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우리집에 머물 다. 그들은우리와 불과몇 시간밖에같이있지않았 지만, 우리에게 아시아에 가서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는 너무 많은 의료진들이 있지만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는 극히소수의 의료진 밖에없 다고말했다. 그들은우리가더큰봉사를할수있는곳에갈수있다면멋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빌과 나는이것이 선교사업이라는우리의 오랜 소명에 대해결정을 내릴 시간이 왔다는 것을말하는 하느님의 방식임에 틀림없다 고결론지었다.
우리는 장로교 선교사업부에 전화를 걸었고, 그곳에서사람이 와서 인터 뷰를했다. 우리는 시험을 치고, 지원서를 제출하고, 어찌어찌 하다보니 스 토니포인트(뉴욕) 선교사교육센터로가게되었다. 여섯달 동안강도 높은 교육을받은다음, 19 6 8 년 2월우리는일본의도쿄로향했다.
빌이일본에도착한 때는독특한시기 다. 정신적신체적장애를지닌아 이와어른을위한최신식 센터가도쿄에설립될예정이었다. 그센터는일본 전역에그런종류의다른센터들의모델이될 것이었다. 일본인들은장애인 에게 봉사하는 일에 앞장 설 재력과 의지가 있었다. 빌은 이것이 일본에서 정신적신체적장애인을위한프로그램을개발하고, 아시아전역의이 분야 의전문가들을위한교육센터를세울수있는기회라고보았다. 우리가일본에있던 6년동안, 빌은한국의홀트아동복지회간사들을일본 에서 교육받도록 데려왔다. 그는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재활상담을 하기 위 해 한국에여러차례다녀왔다. 19 7 3 년 한국인들이그에게정식으로한국에 와서일해줄 것을요청했다. 그요청에대한답신에서, 그는한국전쟁의참 전용사로서늘 언젠가는한국으로돌아갈것을알고있었다고썼다. 미국인 으로서그는 19 4 5 년한국의 분단에있어 미국의역할과그결과초래된한국 전쟁에대해, 그리고그 전쟁이야기한빈곤에대해 일말의책임감을느낀다 고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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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4 년 8월 한국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한국에서 진행되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투쟁을 어느정도이해하고 있었다. 일본에 있는동안, 우리는 박정희독재정권하의한국의현실에대해조금알게되었다. 그러나외국에 서 듣는것과직접보는 것은같지않았다. 월요모임은우리에게독재정치의 혹독한현실을알려주었고, 그것이어떻게한국인들의모든삶에 향을끼 치는지를가르쳐주었다. 
서울에도착한지불과 일주일뒤에우리는월요모임을알게되었다. 우리 는 서울역장로교선교사업부의모임에서린다존스를만났다. 인권과정의 를 위해투쟁하는한국인들과감옥에있는사람들을위한그녀의기도에우 리는깊은감동을받았다. 우리는그녀의초대를받아들여월요모임에참석 했다. 모임에 도착했을 때, 린다는 문 밖에서 우리를 맞이하면서우리가 불 편하게생각하는것들을 하도록 강요당한다고생각하지말라고이야기했던 것이항상기억난다. 그때 우리는 우리앞에놓인모든선택과경험들이 무 엇을뜻하는지거의깨닫지못하고있었다.
첫 월요모임에서 우리는박정희정부가 미국이 자기를승인하는 것으로 악용하기 때문에 포드대통령에게 한국을 방문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편지 에 서명한사람들과함께있었다. 또한이후 1년 내에한국에서추방당하게 될두명의월요모임회원인짐시노트신부와조지오 목사를만났다. 업무와관련하여, 빌과나는연세대학교의과대학과세브란스병원에서일 하는 동안 기본적인 인권이 부정되는 것을 목격했다. 두 기관 모두 서울의 가장가난한사람들과장애로인해소외된사람들에게의료봉사를제공하려 고열심히애썼다.
우리친구들 중 한 사람은빌이 60 년대와 70 년대에 21 세기의 재활기관을 예고하듯뛰어난설비를갖춘‘ 정신및 육체장애인들을위한도쿄센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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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일자리를찾았어야한다고언급했다. 그에비하면, 19 7 0 년대에한국에서 재활사업을하는것은19 세기로되돌아가는것과마찬가지라고말했다. 어느 정도이것은사실이었다. 한국의유일한정부재활센터는우리가도착하기 바로전에문을닫았다. 장애인들의재활은비정부기구(NG O )에떠넘겨졌다. 
 
전체주의정권이취한첫 번째행동은당연히인간개개인의권리를억압 하는 것이었고, 불행하게도 기본적인 의료보건에 대한 권리까지 억압했다. 박정희 통치 아래에서는 최소한의 의료조차도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 들에게는 부정되었다. 이것은 농촌에서 도시로의 대규모 이농으로 인해 더 복잡해졌다. 노동력을농촌에서도시로 입하기위해, 정부는농업을지원 하지않았다. 이정책덕분에한국의공장에소위“ 경제기적”을위한인간연 료들인값싼노동력이과잉공급 되었다. 이정책은도시와시골에비극적인 향을끼쳤다. 서울에있는연희의료원에서진료를받는사람들을보면, 처 음으로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서비스가 부정당할 때 어떤인간비극이발생하는지잘알 수 있었다. 또한그것은기독교에기반한 기관이이러한사람들의요구에어떻게부응했는지를보여주었다. 연희의료원에서 치료를받는 사람들은 서울 외곽의 서울 외국인 학교와 연세대학교 사이에 있는 연희동 산동네에 살았다. 연세대 인접지역 사람들 의 요구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던 연세대학교 도시연구 프로그램 학생들이 그들을찾아낸것이다. 학생들은이들의첫 번째요구가기본적인건강 의료 서비스라는것을알아냈다. 서울시는한 층에개수대 한 개와화장실한 개 가 있는 표준 도시 주거 개발지인 연희아파트 건물 중 아래층의 한 공간을 제공하기로 하 다. 이것이 한국정부가 의료원에 기여한 유일한 것이었다. 한 번은 서울시가 수도료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도공급을 중단한 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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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신문은 서울시가 연희동의 가난한 사람에게 무료로 의료봉사를 하는 진료소에수도공급을어떻게중단했는가를보도했다. 그러자수도물이다시 공급되기시작했다.
연세대학교의과대학은직원봉급, 약품과장비등에드는5만달러를의료 원에제공하기로하 다. 50 개의기본적인약품이갖추어진약국이있었다. 소아병동과 일반병동의 의료진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레지던트들로 구성 되었다. 결핵병동은일주일에 한 번씩열렸고, 세브란스병원의폐결핵 전문 의들이왔다. 원장, 공중보건간호사, 사회복지사, 산파, 약사, 엑스레이기 사및몇명의정식간호사와수위들이함께일했다.
나는일주일중이틀은 소아과병동에서일했고, 폐결핵전문의가오는날 에는폐결핵병동에서일했다. 오후에는자주직원들과함께가정방문을하 다. 나는기초의료교육을받지는못했지만, 간호분야에종사한이후내 꿈 은 공중보건분야에서일하는것이었다. 일단나는그 선생님의충고를기억 해야만했다.“ 한번경험해보세요.”확실히그랬다. 
의료원은그지역에살고 있는대략 2만 5천명의저임금 세대들에게기초 의료봉사를 하고자 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할수 있는모든재료를동원하 여 만든 판잣집에 살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산위로 려 올라갔 고, 그나마거의없는기본적인서비스로부터도더욱멀어져갔다. 멀리서물 을 길어와야했고, 전기는불법전기선으로끌어왔다. 쓰레기수거, 연탄과 식료품배달과, 대중교통수단등은존재하지않았다. 산반대편에살고있는 사람들은갓난아이들과어린아이들을데리고몇 시간을걸어서의료원으로 왔다. 하루하루먹고살기도힘든지경이었다. 
이 가난한사람들은공장에서일할희망으로도시로왔지만구할수 있는 일자리는 대개 순종적이고 비참한 환경에서 낮은 임금을 받고도 일을 하려 는 소녀와여성들을위한것이었다. 실직상태인남자들은몇원을받기위해 팔 수 있는것들을찾아 쓰레기통을뒤졌다. 남자들사이에는알콜중독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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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란 문제 다. 그들은 종종 가족들을 부양할 수 없다는 고통을 잊기 위해 값싼술을마셨다. 우리는일반성인병동에온많은 사람들이위궤양과고혈 압그리고일상에서오는스트레스증후군으로시달리는것을보았다. 의료원에서직면한 첫 번째문제는 우리가 봉사하는 빈민지역의2만 5천 인구가운데폐결핵환자의발병빈도가높다는것이었다. 이들중 대다수에 게 일반 폐결핵 치료제는 약효가 없었다. 이 폐결핵 약은 정부가 무상으로 주는 것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회복될 정도로 오랜 기간 동안 이 약을복용하지않았다. 그들은약을오랫동안복용하는것이얼마나중요한 지를이해하지못하거나, 아니면부작용을원하지않았다. 질병에대한교육 을받지못한것역시문제가되었다.
만약우리가구매할 수만있다면, 폐결핵의일반치료제가약효가없는많 은 사람들을2차 결핵치료제로치료할수 있었다. 나는미국을포함한다른 나라의교회와개인들이개별환자를위해 그 약품을구매할자금을보낼수 있도록 지원프로그램을 계획했다. 나는 기증자들에게 특정환자에 대한 최 신정보를보내주었다. 이프로그램덕택에죽을뻔했던많은 사람들이회복 할 수 있었다. 다른 긍정적인 측면은 연세대학교가이 결과에 주목하고, 필 요한사람들에게무료로이 약품을제공하기로결정한것이다. 그래서다른 나라에서온기금들이필요없게되었다. 
또한우리가 목표로삼은지역에 살고있는 2만 5천 명의거주자들가운데 에는이미치료를하고있는 50 0 명보다더 많은양성폐결핵환자들이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는 새로운 직원 5명을 채용해서 집집마다사람들을찾아가만나고, 타액견본을채집하고, 의료원에올것을 권했다. 이운동은많은새로운결핵환자들을찾아냈다는것과더많은 사람 들에게소아병동, 산부인과병동그리고예방병동을포함한기본적인건강보 건서비스에대해알렸다는측면에서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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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7 년 한국정부는새로운 건강보건 프로그램을위한표어로“ 건강할때 질병을살피자”를제안했다. 그러나많은저임금의시민들에게는“ 병을살피 는것”이불가능하지는않더라도매우어려웠다. 정부의새로운의료보건체 계에대한 어판광고와선전이대단했지만그 결과는전혀인상적이지못 했다. 시급한상황에진료를원하는저임금 생활자들의경험은종종너무가 슴이아팠다.
자주“ 무료”의료체계로잘못알려진두번째프로그램은“ 옐로우카드”와 “ 그린카드”프로그램이었다. 만일개인이수입이 없고자신을부양할 친척 도 없는데 위급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 그 사람은“ 그린카드”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치료를받아야한다면그 사람은입원비와병원비의30 퍼센트 만 지불하게 된다. 정부가 나머지 70 퍼센트를 지불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수입도 없고병원비를 도와줄 가족들도 없다는 것이 이미 판정되었기 때문 에, 그런사람이어디서청구서의30 퍼센트에해당하는돈을마련할것인지 궁금했다.
“ 옐로우카드” 체계는저임금및 비정규직노동자들을위한것이었다. 이 경우에는 개인이 병원 치료비의 70 퍼센트를 지불하고, 정부가30 퍼센트를 지불한다.“ 옐로우 카드”로 인정받으려면다섯명으로구성된 한 가구의 월 수입이10 0 달러이하이어야만한다. 마찬가지로그런저임금가구가입원비 와치료비의 70 퍼센트를지불한다는것은거의불가능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고통과 의료보건 체계를 통해 치료를한다는주장의공허함을 보여주는좋은예가있다. 목요일에우리는 2차 결핵치료제프로그램에등록한결핵환자들을 방문했다. 어느목요일, 나에게강한인상을 준 환자황 씨를방문했다. 그는아주신사적인사람이 었다. 그는우리들의서비스를아주신뢰했고그가 받는도움에감사하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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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았다. 
공중보건 간호사가 황 씨, 그의 아내그리고 작은두 딸들이 사는단칸방 으로 들어갔다. 그리고간호사가 숨을헐떡이며 충격을 받아 뒷걸음질하고 있었다. 방안을살펴보니, 얼굴은새하얗고눈이휑한것이 분명히아무것도 보지못하는황 씨가바닥에누워있었다. 그는자주기침을했고, 질병으로 황폐해진폐로부터피묻은타액을뱉어냈다. 우리는즉시그가각혈을하고 있으며, 가능한빨리병원에입원시켜야한다는것을알았다. 황씨의 어린두 딸은집에 있었고그의아내는곧집에왔다. 그녀는우리 에게 지난 주 내내 황 씨의 상태가 어떻게 계속 나빠졌는가를 이야기했다. 그는먹지도못하고점차 쇠약해져서, 계속기침을하면서침에피가 묻어나 왔다. 그녀는우리에게바로전날저녁그를적십자병원에치료를받으려고 데려갔다고말했다. 옐로우카드를가지고있었지만, 90 달러입원비를지불 할수없었기때문에그는입원을거부당했다.
황 씨 부인은울기시작했다. 딸이어머니에게팔을두른채 서 있었고조 용히눈물을훔쳤다. 딸은불과4살이었지만어머니의슬픔과고통을이해하 고있었다.
응급상황으로 판명되지 않으면 어떤병원도 그를받아 주지않는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응급상황을 연출해야만 했다. 심지어 시립 병원조차꼭 해야할 경우가아니면돈이없는환자를받아주지않았다. 사 회복지사가 경찰을불러 몹시 아픈 사람을발견했다고 말하고앰뷸런스를 보내줄것을요청했다. 그런다음그녀는동장과연락해서그 상황을설명했 다. 그는바퀴가두 개 달린리어카를가지고왔다. 리어카는한국에서물자 를 옮기고과일을팔고쓰레기를 치우는 것과같은일을할 때 자주사용된 다. 이날은리어카를울퉁불퉁한거리에서도움이필요한몹시아픈빈민환 자를나르기위해사용했다. 
우리는황 씨를리어카에태우고그의머리를뾰족한가장자리위에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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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았다. (그는 그것을 잡을힘도없었다.) 그의 입술과 볼 위의핏방울이 폐 를 쥐어뜯는질병을보여주고있었다. 이웃이리어카를큰 도로까지어서 앰뷸런스가기다리고있는맞은 편으로건너갔다. 만일경찰이이사람을도 울 친구와가족이있다는것을알면그를데려가는것을거절할지도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가까이 오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우리는 길 건너편에서 지켜보았다. 6월의햇살이환자에게내리쪼이고그의얼굴은고통으로일그 러졌다. 몇분이원한것 같았다. 그의고통을목격했을때, 나는현기증이 나기시작했다. 속이메스꺼웠다. 스스로를나무랬다. 나는자신의육체적반 응으로흐트러지고싶지않았다. 나는황씨와그의고통에집중하길원했다. 그러나내정신과마음은여러 질문들로메아리쳤다. 왜우리는이와같은 미친짓을참아야하는가? 왜동료인간에게가해지는이 역겨움에대해소 리치지않는가? 그이유는아마도 유일한대안은우리가할 수 있는최선을 다하는것임을경험을통해배웠기때문일것이다.
우리는도움을기다렸다. 버스를기다리는사람들이려들었다. 나는얼 마나여러차례빈민지역사람들이이런광경을목격하는지궁금했다. 경찰 이 두 번 왔지만황 씨 근처에는가지도않았다. 앰뷸런스도없는것이분명 해 보 다. 그들은 사회복지사가 그를 택시로 시립병원으로데려갈 것이라 고말했다.
다음날나는사회복지사가겨우그를병원에데려갔고, 그는입원하여곧 수술을 받았다는 것을알았다. 그러나 이미너무늦었다. 그는 수술대 위에 서 죽었다. 만일 당신의 손에돈이 없다면,“ 건강할 때 질병을 살피자”라는 표어는박정희통치하에서신화이지현실은아니었다.
 
19 7 6 년 7월 5일은연희동산동네에살던수천명의사람들이이사를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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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었다. 그들대부분은임시판자촌에사는불법거주자들이었다. 그들은 “ 시의토지개발”때문에2주 이내에이주하라는통지를받았다. 그빈민지역 이내려다보이는산에 명문대학이있어많은외국방문객들이찾아왔다. 이 것때문에명문대학은시에많은 돈을주어빈민가를철거하고그자리에아 름다운공원을만들것을요청한것같았다.
대부분의사람들은일자리를찾아, 가족이좀더 나은생활을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농촌지역에서온 사람들이다. 희망대신에 그들은 빈곤, 질병, 그리고 외로움으로 고통받았다. 그들 모두가 의료원의 진료대상 지역에 살 고 있었고, 우리는상당히걱정을했다. 우리는그들이살고있는땅에대한 법적권리가없는불법거주자들이라는것을알고있었다. 그러나또한이들 을 도울수 있는권력과부를가진사람들이 절대돕지않으리라는것도알 고 있었다. 부자들은 철거에 대한 두려움 없이 가족과 함께 살아갈 산동네 사람들의주거권을부정하고있었다. 
나는그런 일이내이웃들에게일어난다는것은상상할 수도없었다. 나는 내가들은이야기가사실인지확인하려고길을건너산위로걸어올라갔다. 전쟁터에 가 본 적은없지만그날내가본 철거작업은전쟁과도 같았다. 철 거민들은 소지품들을앞에쌓아놓은채 둘러서 있었다. 빌과내가우리전 재산을 한군데 쌓아놓는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아마 작은산 더미만 할것이라고생각했다. 아마도그것이쓰러져그무게가우리를압사시킬지 도 모른다. 압사는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할당분보다 휠씬 많은 것을소유한우리같은사람들이치러야할마땅한대가일것이다. 몇몇 세대는 자기의 가재도구를 실어 나를 작은 트럭을 함께 불 다. 몇 몇 사람들은 운좋게 갈 곳이있었다. 모두 이사를 하려고 하자마자 시 직원 들은벌써큰망치로집을부수고있었다. 나는몇 달 전에방문했던집을보 았다. 그때는하얀금줄이출산을 알리기위해문에걸려 있었다. 그당시어 머니는 새 아이에 대한희망과 꿈에부풀어 있었다. 지금 나는어떤직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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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서문짝을뜯어내고있는것을지켜보고있다. 나는마치그가내 팔 을뜯어내는것같이느꼈다.
아마도 그런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처럼, 자기 집이 부서지고 있는 것을 보는 철거민들의 얼굴에는 고통과 절망의 표정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그들은전에이런일들을여러번 경험했기때문인지내가그들의얼 굴에서 본 것은 슬픔과 피로 다. 서울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평균 여섯 달마다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겨 다니며 점점 더 작고 좁은 판자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언젠가는그들자신소유의저소득자용주택을가질 수있으리라는헛된약속이있었다. 
한 달 안에대부분의 집들이사라졌고, 철거잔해들이 실려가고, 높은 울 타리가 세워져 잔해들이 가리워졌다. 의료원직원들이 회진을 다니면서 철 거당한많은사람들을찾았다. 그들은배수구통, 상자, 천막그리고그들이 세울수 있는모든종류의 움막안에서살고있었다. 그들은의료보건서비스 를 받기위해우리의료원에 올 수 있기때문에 많은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떠나려하지않는다고말했다.
이 시기에나는내쫓긴사람들에게나눠주기위해서울연합교회의회원들 로부터외투들과슬리핑백들을모았다. 외투를받은한 사람이다음날외투 주머니에서발견한돈을돌려주기위해나를찾아왔다. 나는그렇게힘든상 황에서그가보여주는정직함에감동했다.
 
우리는의료원에정식산파를두었고, 임산부를찾아임신초기에출산보 건을제공을하기위해최선을다했다. 최상의노력에도불구하고, 7달 또는 8달째가된 임산부들을처음볼 때도있었다. 그런산모들은종종심한빈혈 상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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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한 여성들에게 피임을 할 것을 권장했다. 그들은 키울 수 없는 아이들을 계속 가지길 원치않았지만 남편들은 성관계를 요구했다. 심지어 무료로정관수술을해 주는데도남자들은거의시술을하지않았다. 그들은 정관수술이 성행위를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시어 머니또한산아제한을말렸다. 그들은늙었을때자신을부양할손주들을원 했다. 한국에는 어떤 사회보장제도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 이생존의문제라고생각했다.
선교사업을시작하기전 10 년 동안산부인과간호사로일했기때문에, 나 는 가정출산을위해출장가는의료원산파들과동행하길원했다. 우리지역 에 사는여성들은출산을위해병원에갈 수 없어서, 자주지역의산파를집 으로불러출산을 돕게했다. 그러나 의료원의산파가그 근처에 살지않거 나자정통금시간이넘어버리면, 출산을위해가정방문을할수없었다. 그산모는 산 꼭대기에살았고우리는길고 좁은널빤지다리로개천을건 너서그 집까지가야만했다. 산파가“ 빈약한가정용출산팩”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너무나 놀랐다. 빈약한 포장지 안에는 면도칼과 실뭉치가 있었다. 흔히 화에서하는것처럼, 산파가물을끓이길기대했지만그녀는대신에 식용유가어디에있는지를물었다. 그녀는갓 태어난아이의피부위에 기름 을바른다고설명했다. 산모가의료원을방문한뒤너무빨리 산통이시작되 었다면서 산파는 놀라움을 나타냈다. 산모는 당황해서 산통을 유도하기 위 해 한약방에서약을사왔다고 시인했다. 산파가부드럽게그녀를나무랬다. 우리환자들은자주한약을사용했다. 가족의건강을책임져야만한다고믿 는완고한시어머니의충고로다른사람들은무당을찾기도했다. 아름답고건강한사내아이가태어났다. 우리는기름으로아이를문지르고 탯줄을자르고어머니의품에눕혔다. 산모와아이가건강하다는것을확인 하고, 산모에게검사와산아제한교육을위해곧의료원으로올것을 당부한 후, 우리는의료원으로되돌아왔다. 먹일입이하나더 늘어난현실을깨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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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전까지한동안그집은기뻐할것이다. 아이의양육비부담은아이가중학교에입학하기전까지는대단하지않았 다. 정부는초등학교6학년까지 무상교육을실시했다. 그런뒤 학비와 교복 구입비가 들었다. 몇 가지 대안이 있었다. 하나는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일하러다니는것이었다. 다른하나는가족들이해외입양을위해아이를보 내는것이었다.
의료원의 사회복지사들과 함께 나는 그런 입양을 주선하기 위해 이웃에 사는집에간 적이있다. 그 집의가장큰 여자아이는고등학교에입학했고 가족은학비를낼 돈이없었다. 그들은 딸에게 미국에서 더 나은삶을마련 해 주기로 결심했다. 딸을 제외한 가족 모두는 울고 있었다. 딸은“ 나는 갈 사람이다”라고아주사실적으로이야기했다. 
 
월요모임은연희동의상황에대해매주최신정보를받았다. 나는또한의 료원직원으로부터얻은정보를이용해 월요모임“ 사실보고서”중 몇 개를 썼다. 그리고나는월요모임회원들이연희동산동네사람들과만나서이야 기하도록 주선했다. 그들 중 몇 명의 경우는 이것이 건강보건 혜택을 처음 받은것이었다.
한국에서지낸시절을생각하며, 사람들은자주“ 당신을가장감동시켰던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그렇게 풍부한 경험 가운데 어떻게 하나를 선택할수 있겠는가? 나의경우는물질적으로아무리가난하고고통을받을 지라도, 우리가어떤식으로그들을도우려고손을내 때, 그들은항상우 리에게 무언가를 되돌려 주었고 너무도 심오하고 소중하게 내 삶을풍요롭 게해주었다.
갓난아이가 있는 젊은부부가 의료원에 왔다. 남편은1차 결핵약이 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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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을정도로상당하게진행된폐결핵증을앓았다. 우리는그의후원자를구 했고그에게 2차 약품을 투여했으나, 그는너무가난했고병은더 진행되어 회복되지않았다. 그부부는결혼식을올리지않아서부모들이아이를데려 갔으며, 부인은혼자가되었다. 남편이죽은지얼마지나지않은어느날 아 침, 사회복지사가내게사무실로와 줄 것을요청했다. 그젊은여성이사무 실에있었다. 그녀는나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왔다. 그녀는 한국식으로두 손을내 어설탕봉지를나에게주었다. 약을살돈을 마련해주어서나에게 고맙다는것이었다. 그약은도움이되지않았다. 그녀는혼자남게되었다. 하지만그녀는선물을가져왔다.
인혁당 사건에서 공산주의자로기소된 관련자들 중 한 명이고문을 당한 뒤 심장병으로죽었다. 우리중 몇 사람이 그의아내가 옷가게를 여는것을 도왔다. 어느 날 우리가 그 가게에 갔을 때, 빌은 그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여성이소아마비를앓았던환자들에게나타나는신체장애가있다는것 을주목했다. 그기형은아주 쉽게고칠 수있지만, 고치지않고있으면심장 에 구적인손상을줄수있는것이었다. 
빌은그것을그녀에게이야기했지만그녀는수술을받을돈이없었다. 그 는 세브란스병원의동료들과 이야기했고, 그들이돈을 마련해 주고 수술과 치료를주선했다. 그녀의어머니는너무기뻐했고빌에게유리상자안에든 코바느질을한 풀 먹인꽃 부케를가져다주었다. 이 감사의 선물은 만드는 데 여러날이걸리는 것이었다. 어머니는딸에게 관심을 가지고, 딸의 장애 를교정하는것을도울 정도로걱정해준빌에게감사의표시로 무언가를하 고싶었던것이다.
 
연희의료원을열 계획을세웠을때, 연세대의대교수들은직원은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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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으로하는것이중요하다고결정했다. 아주도전적인상황에서적은임금 을 받고장시간 기꺼이 일할사람들에게는깊은 신앙심이 필요하다고 생각 했기때문이다. 나는필요한기술이있는다른종교인들도마찬가지로훌륭 하게도시빈민들에게의료봉사를할 수 있을것이라고생각했다. 그러나누 구도 아주힘든 선교활동에서나와 함께일했던 훌륭한 기독교인들보다 더 헌신적일수는없을것이다. 직원들은가장힘든시간까지도우리가견딜수 있게한깊고한결같은공동체의식을가지고있었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우리는 감히 정부의 끔직한 행위에 대해 말은못했지 만, 일부직원들의사랑하는사람들이인권투쟁에참여하고있다는것을알 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월요모임 회원이며 그 모임이 그 운동을 지 지하고있다는것을알았다. 우리는우리의대화를엿듣는사람들에게아주 친절한방식으로이야기를했다. 또한말을 하지않고도우리가운동을지지 한다는것을보여주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빌과 내가 하는 일에 참여했다. 어느날 의료원 산파인 김 여사가늦게귀가하고있었다. 거리에는가로등이거의없었고장애물들 이 있었다. 시민을 보호하는 일은 정부의 과제 중 우선순위에서 가장 밑에 있었다. 김여사는열린맨홀에 넘어져 심하게 부상당했다. 6살짜리우리아 들 미키가매우화가났다. 미키는자주나와함께의료원에갔고김 여사를 좋아했다. 미키의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김 여사에게 선물할 손전등을 사 서 미키를 데리고 병원에 문병을 갔다. 그녀는 미키가 걱정해 준 것에너무 나감동했다.
직원으로서우리는공동체를건설하기위해많은일들을했다. 매일아침 근무를 시작하기 전 예배를 드렸다. 한번은 우리모두가 기타를 배웠다. 나 는 불행하게도기타를잘 못쳐서직원들은, 만일내가연주를못하면노래라 도 부를수 있을것이라고결론지었다. 어느날 아파트에살면서의료서비 스를받았던베트남여성들이우리에게베트남식찐 만두를만드는법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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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쳐주러왔다. 매일 점심식사 후 나는 어와 미국요리를가르쳤다. 내가 후회하는한가지는한국말을제대로배우지못했다는것이다. 어느 12 월 우리는 의료원 직원들을 위해 우리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우리막내딸이크리스마스쿠키와사탕을만드는것을도왔다. 캐롤 을 불 고게임도했다. 직원들은내게푸른빛이도는한복을주었다. 나는 마침내 왜 직원들이 전 주에 나의 치수에 대해 그렇게 많이 물었는지 알게 되었다. 어느날은나를앉혀놓고발을쟀다. 내발이한국여성들과비교해 컸기때문에 그들은 경악했다. 그러나오랫동안 찾아다닌뒤, 그들은 정말 큰푸른신발을구할수있었다!
직원들은 무자비하고 전체주의적인 정부가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불필요 한빈곤 속에살고있는 사람들의고통, 아픔그리고죽음을함께 나눴다. 그 들은함께함으로써그것을 헤쳐 나갔고, 상호간의 신뢰, 책임감, 유머와단 호함으로 지탱해 나갔다. 비록 내가 준 선물들이 작은 것일지라도, 그들은 나를아주따뜻하게맞아주는것을축복이라고생각했다.
 
19 8 0 년 6월 아이오와 주로 돌아가기 전, 한국에서 있었던 나의 개인사에 서 가장 끔직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집에서 중고품 세일을 했고 이웃에 사는많은사람들이왔다. 한국인들은훌륭한장사꾼이었다. 그들은스스로 “ 잘산것”을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나는사실흥정을싫어했고가능한흥 정은피했다. 하루종일흥정을하고나면완전히지쳤다. 다음날물건을산 여자한명이집에왔다. 그녀는 10 0 원을주고깃털이불을샀는데, 남편이그 것을돌려주고 돈을받아오라고말했다고했다. 나는그녀의요청을거절했 다. 아마도 그 이불이 내 막내딸의 것이고 거의새것이었기때문일 수도있 고,아니면지쳐있었기때문이었을지도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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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항상그 결정을후회한다. 지금까지그일을 잊을수가 없다. 나는그 순간으로돌아가마음속으로곰곰이생각하고, 제대로하려면어떻게했어 야 하는지생각하려노력한다. 그녀에게백원을돌려주고그 이불도가지라 고 말하는 것을상상한다. 나는 백 원이그녀의일생에서 의미했던 것을생 각하려하지 않는다. 나는그녀의남편이그녀가집에왔을때 언어적으로나 육체적으로모욕을주었는지궁금해하지않았다. 그것은내마음의짐이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참여한 사람들은 우리가족 모두의 삶에 향을 주었다. 월요모임이 우리집에서 열렸다.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우 리 애들은이 모임에오는사람과모임에서이야기한것을다른사람들에게 는 이야기하면안 된다는 것을알고있었다. 아이들은조지오 목사와 짐 시노트 신부의 추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도로시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중고품세일을했을때, 나는조지의청바지를샀다. 우리아들이몇년 동안 그것을 입었다. 그는 언젠가는 박물관에 청바지를 기증하라는 요청을 받을 것이라고단단히믿고있다!
아이들은 우리 활동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우리를 감시하고, 우리의 외국 인 등록이쉽지않다는것을알았지만결코 불평하지않았다. 우리가드모인 으로돌아와우리거실에서모임을가졌을때, 한아이가우리 귀에대고“ 이 것이월요모임이예요?”라고속삭 다.
분노와 유머와 같은 감정들이 때로는 우리가 어려운 시기에 느끼는 공포 심을 줄여 주었다. 빌은 인혁당 관련자들이 사형을 당한 뒤 미 대사관에서 벌어진시위에참여했던사람들중 한명이다. 중앙정보부사람들이그를데 려가심문하려고 집에왔을때, 그들은 한국선교연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들이 우리 주소를 찾기 위해 그 책을 사용했다는 생각에 나는 너무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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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빌의연행에대한두려움마져잊고있었다!
어느날 버치더스트가전화해서, 빌이급히와서월요모임의서류들을가 져갈수 있는지물었다. 그는중앙정보부에서도시산업선교회와함께더 이 상일하지말라고경고를 받았다. 버치는월요모임에참석했을뿐만아니라, 도시산업선교회 일을일본 방송국 리포터와 함께 의논했다. 버치의 얼굴이 나온방송이 AF K N 때문에한국의텔레비전에방 되었다. 버치는중앙정보 부요원들이언젠가는집에올 것이라고확신했다. 빌은그의집으로뛰어가 서월요모임서류를가져와우리침대밑에숨겨두었다. 그일이 있고얼마지나지않아 둘째아들크리스가저녁식사에한국인친 구를데려왔고 우리는 그에게 아버지가 무얼하시는지를물었다. 그는“ 예, 아버지는중앙정보부에서일하십니다.”라고말했다. 우리모두는그의아버 지가우리가족에대해 아는지궁금해하며, 침실에있는상자를생각하고물 을 벌컥벌컥마셨다. 뒤에크리스의친구는크리스에게왜 식구들이모두자 기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에서일한다고 했을때 그렇게 놀랐는지를 물었다. 놀랍게도, 크리스는그에게중앙정보부가빌을연행해서아홉시간동안취조 했다고말했다. 그의친구는“ 맙소사, 크리스, 정말미안하구나”라고말했다.
 
광주대학살은우리가한국을떠나기한 달 전인 19 8 0 년 5월에발생했다. 어느날밤 11 시 30 분경, 우리는학생기독교운동의지도자인김윤에게서전 화를받았다. 민주주의와인권을위한투쟁으로인해그녀는몇차례 감옥에 투옥되었다. 김윤은 자신과 어머니인 김하림, 그리고 국제사면위원회 한국 지부 사무처장인 그녀의 친구가 있을 장소가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들이있는곳은 안전하지못했다. 의논조차하지않고, 빌과나는그 세사 람을즉시우리집에와서머물게해야한다는데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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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미국으로우리가떠나기한시간 전까지우리와함께있었다. 그들 은 우리가짐을꾸리는것을방해하지않으려고일찍떠나겠다고계속말했 지만, 우리는그들에게그냥있으라고말했다. 우리에게는그들의안전이중 요했다. 그녀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줄 냅킨을 뜨개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뜨개질 하면서 운동을 위해목숨을 바친사람들, 감옥에 있는사람들, 그리 고숨어지내는사람들을위해기도했다고우리에게말했다. 우리 가족이 외출하면 그들은 한국어를 못한다면서 어 또는 일본어로 전화를 받곤했다! 그들은 사면이 될 때까지 몇 달 동안숨어 있을수 있었 다. 우리는그들이인권활동으로인해처벌받지않았다는것에너무나안도 했다.
 
미국으로돌아온후 나의삶에서한국에서의경험이준 향은지대했다. 한국의상황을미국인들에게알리는것을비롯해, 나는계속한국의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일했다. 광주 대학살 기간에 서울의 갈릴리교회에서예배 를 하는동안나는이 일을하도록명령을받았다고생각했다. 예배중 문익 환 목사와 문동환 목사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미국선교사들이 미국으 로 돌아가일본의잔인한통치로고통받는한국에대한이야기를어떻게했 는지 말했다. 그녀는“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 우리의 이야기들을 해줄 미국 선교사들은어디에있습니까?”라고말했다.
우리는그 특별예배에참석한유일한미국선교사 기때문에이 일에특 별한 소명감을 느꼈다. 우리는 또한 신앙에 대해 말로만 하는 것은 충분치 않으며, 어떤대가를지불하든지우리는그 신앙을현실에서실천해야한다 고 믿게되었다. 한국친구들이평화와자유라는대의를위해그들의목숨을 무릅쓰는것을우리는한국에서 여러번 목격했다. 우리는이웃을자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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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과비폭력 시민불복종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뜻 하는지를알았다. 비록한국인들에비하면미약하지만, 나역시시민불복종 을실천하고연행되거나재판을받고, 감옥에갈위험을무릅쓰는데 필요한 용기를한국인들로부터얻었다.
20 0 4 년 말 8살짜리 우리 손주라이언은 냉장고 문에붙여놓은 내 사진을 보았다. 아이오와 주 군대의 이라크 전쟁 파병을 반대하는 시위에서, 내가 아이오와경찰국앞에서연행되는사진이었다. 그사진이찍히는순간, 보안 관의부관이내 손에수갑을채우고 있었다. 라이언은“ 할머니, 이때가전쟁 에반대하다가연행되었던때에요?”라고말했다.
나는놀라서잠시 한숨을돌려야만했다. 라이언은내가당연히그렇게했 으리라생각하는듯한말투로아주자연스럽게질문을했다. 나는흐뭇했지 만, 한국사람들의힘을목격하지않았다면내가그런일을할 수 없었을것 임을알고있다. 
나는냉장고위에붙은내 사진을 힐끗보고내 얼굴에 서린희미한 미소 를보았다. 나는분명히“ 한번경험해보자”라고생각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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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 장  생활지침으로삼는것보다 우리는성서를더많이알고있다
 프랜 넬슨(F ran Nel s o n ) 

항상인정하거나감사하지는않았지만, 어린시절부터하느님은늘 더 넓 은 세상에 대해내 시야와 마음이 열리도록 주관하셨던것 같다. 그세상은 가혹하기도하고, 동시에아름답기도했다.
목사집안에서성장하면서, 나는이따금씩해외선교에서돌아와우리집을 방문하는선교사들의무릎위에 앉아놀곤했다. 나는그들의이야기들을경 외감을느끼면서들었다.
초등학교학창시절내내(2차 세계대전동안) 나의펜팔은가족과함께수 용소에서 살던 일본계 미국인 소녀 다. 지금은 그녀의 이름이나 주고받은 편지의자세한내용이기억나지않지만, 그소녀가나의세계의경계선을확 장시켜주었다.
찰리크로쓰와 결혼하자마자우리는 연합장로교회에합류해서, 1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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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과국제연합을집중적으로연구했다. 나의전지구적지평은확장되 었고, 세계도처의사람들의상황에대해배우면서나의의식과열정은 고양 되었다. 그리고나는성경선생님께서연구기간동안말 하신한마디를결 코 잊지못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생활지침으로삼는것보다성서를더 많이알고있다.”
19 5 7 년 미국의작은마을을떠나(테네시주 오크리지) 당시“ 미국에서가 장인종차별적인도시”로알려진앨라배마주의버밍엄으로이사했을때, 나 는 새롭고 더 넓은세상을알게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도시에서 버스를 타 본적이없었다. 내가버밍엄에서처음탄버스는시 외곽으로출근하는흑인 여성들로만원이었다. 버스운전사는백인여자가타는것을보고놀라서, 내 가 앉도록앞자리두 좌석에앉아있던흑인여성들에게일어나라고말했다. 그들이 일어섰지만 나는 앉기를 거부했다. 나는 그들에게 앉으라고 권했지 만, 우리는모두서서갔다. 
우리교회모임에서흑인들이“ 기도”하러오면좌석에앉히지않기로결정 했을때, 찰리와나는버밍엄의인종문제에대해특히실망했다. 얼마후 우 리는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는 친구들의 임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북 캘리 포니아주 몬트리트로 갔다. 그 모임에서 다양한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아프 리카 선교사로 가는것을 고려해보라고 권유했다.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웅 성거리기시작했고, 우리는아프리카로가기로자원할 것을결심했다. 찰리 가 장로교 선교위원회에 보낼 편지를 작성하는 동안, 나는『장로교서베이
(Preb yterian Sur vey )』라는잡지를읽고있었다. 한광고가내눈에확들어왔다. 그것은“ 구인: 한국대전대학교화학과교수”라는광고 다. 나는화학자인 남편에게“ 이것좀봐요!”라고소리쳤다. 
찰리는지원지를아프리카에서한국으로바꿨고, 그후 일년도되지않은 19 6 5 년에우리는 세살짜리 딸과(세아들 중첫째는 한국에도착하고석달 뒤에태어났다) 함께대전에도착했다. 찰리는대학에서화학을가르치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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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했고, 나는 대전대학학생들과선교사자제들에게피아노를가르쳤다. 또 한 나는문화적충격, 전후의불황, 선교사공동체에적응하는일, 그리고육 체적질병과분투하면서“ 혼의어두운밤”을경험했다. 한국어실력이부족하고선교사거주지역에서미국인들과살고있다는사 실 때문에 나는신앙적인 위기를 맞았다. 그래서 한국에 선교사로 온 두 번 째 복무기간(19 6 9 ~73 )에, 찰리와 나는이런 문제들을 해결했다. 우리는 복 무기간의절반동안정식으로한국어교육을받았고, 서서히선교사주거지 역에서 나와 한국인들이 사는 동네로 이사를 했다. 찰리는 세종대학교에서 근무했고, 나는홀트아동복지회에서음악치료사로일했다. 그때는 행복하고 유쾌하고 희망찬 시기 다. 나는 노래하고 아이들과 노 는 것을좋아했고, 찰리는 가르치는 것을즐겼다. 그러나정치적 지평에 먹 구름이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향한 행군을 시작하면서 혼란이 일어난것이다. 그가권력의손아귀를옥죔에따라사람들의고통은늘어만 갔고, 우리는활동에참여해야만한다는것을알았다. 
 
우리는무엇이든해야한다는것은 알았지만, 무엇을해야할지는몰랐다. 그런상황에서월요모임이교량역할을했다. 그모임은우리모두가소속된 대가족이기도 했다. 찰리와 나는 월요모임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꼈으 며, 재빨리회원들과유대를형성했다. 월요모임은정보와생각과행동의원 천이었을뿐만아니라, 개인적인친분, 치료, 정신적위로, 그리고웃음의원 천이기도 하 다. 박정희 정부가 한국 친구들을 연행해서 짐승처럼 다루었 던 시기에, 유머는우리가어려운시기를견디는데있어서신앙만큼중요한 역할을했다. 나는가장 힘든시기에조차도한국사람들이놀라운유머감각 을발휘하는데항상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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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교회의지도자와 설교자로부터학생과평신도에이르기까지모든한 국 기독인들의 증언에 고취되고 감탄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생활지침으 로 삼는 것보다 성서를 더 많이알고 있다는 성경 선생님의 말 이 기억났 고, 한국기독교인들이일상속에서성서적지식과신앙적인실천간의 간격 을어떻게좁히는가를나에게가르치고있다는것을깨달았다. 찰리와내인생은박정희독재정치에 반대하는저명하고존경받는학생운 동 지도자 김윤를 알게된 19 7 5 년 초에 원히바뀌게되었다. 김윤과의관 계는찰리가기차를타고가는동안이루어진우연한만남에서시작되었다. 남편의옆 좌석사람이자신을목사라고소개했다. 찰리가장로교선교사라 는 것을 알고는 찰리를 자신의 교회로 초대했는데, 그 교회는 우연히 서울 연희동에 있는우리집 근처에 있었다. 다음 일요일, 찰리는 봉원교회에갔 고 교회게시판에서“ 감옥에갇힌김윤을 위해기도합시다.”라는문구를보 았다. 김윤이시위에체포된많은학생들중 유일한여성이라는것을비롯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도 그를 위한 일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우리는봉원교회나이목사부부가또다른 난처한상황에 봉착하길 원치 않았다. 우리는 이 목사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는 우리에게 양심에따라행동하도록권했다. 
감옥에있는동안, 김윤과그녀의오빠김인범은우리가족, 특히막내아 들 톰과가까워졌고, 인범은우리집에 가끔씩방문했다. 김윤이구속되었을 때, 우리는두 번째대가족인“ 봉원교회가족”으로서 그녀의재판이열리는 법정에함께갔다. 김윤의어머니인김하림은법정이나 기도모임에서, 그리 고 다른행사에서나를자기옆에앉게하 다. 나는늘 김윤의가족이내가 그들에게 해준 것보다더 많은 지지를 나에게보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 성서를생활지침으로사는”법을나에게몸소보여주었다. 매일아침처리해야 할 일상적인업무도없고꼭 가야할 곳도없었기때 문에, 나는다른봉원교회신자들이나월요모임회원들보다더 자주재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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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목요기도회에참석할수 있었다. 김인범은동생의재판날짜를나에게계 속 알려주었다. 몇 번은법정에 갔지만, 재판이연기되었다는소식만 들었 다. 내생각에그것은탄압의또다른형태인것같았다.
 
한번은김윤의재판에서법정밖에군중들이 모여있었다. 세대의버스가 재소자들을싣고오자, 경찰이우리를뒤로 었다. 김윤은버스에서내리면 서, 늘그랬던것처럼온화한태도로가볍게군중들에게인사를했다. 한경 찰이그녀를비웃었다. 재판이진행되는동안나는월요모임회원인베니츠 웨버와 김윤의 어머니 사이에 앉았다. 서강대학교에서 많은신부들이 와서 재판에참석했다. 검사는징역3년형을구형했다. 
2주일뒤에있었던선고공판에서, 그녀가호송용차량에서내릴때 나는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나를보고미소를 지었다. 경찰이나와내 카메라에 주목하는 것을눈치채고, 나는 좋지않은일이벌어질 것임을 알았다. 내가 법정에 자리를 잡고 앉자,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내가 사진을 찍은 사람인지를물었다. 그경찰은필름을요구했다. 나는필름이비싸니까먼저 필름값을 내라고 말하면서 따지려고 했다. 그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나의항의는묵살되었다.
김윤은1년 6개월형을선고받았다. (김윤에대한자세한이야기는진 베
이싱어의 끝부분을참조하시오.) 
 
월요모임안팎에서, 우리의심장이외치면외칠수록우리 혼이더 강해 진다는것을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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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기도는중요했다. 김윤과다른한국인구속자들을위해기도한것 만큼열정적인기도를해본적이 예전에는없었다. 유머감각은생존의수단 이었다. 한국인들은더이상외국인들과이야기할수 없다는새로운법에대 해 논의하던어느날 기도모임에서문동환 목사가 한 말이기억난다.“ 그럼 전 이제제 아내와 이야기하지말아야겠군요.” 구속된교회지도자들과“ 인 혁당” 관련자들의부인들에게는 음식과 동지애가 더 중요했다. 목요기도회 모임뒤에먹는점심은농담과웃음으로모든것을치유하기위한장소 다. 그러나나는음악, 특히성가를부름으로써힘든일을버텨냈다. 목요기도 회를포함한여러자리에서, 우리는종종“ 어느민족누구에게나”,“ 뜻없이 무릎 꿇는”,“ 우리 승리하리라,” 그리고“ 넌할 수 있어” 등의 노래를 불
다. 음악 치료사인 나는성가에 치유적인 힘이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노래 속에서한국인과외국인의목소리는하나가되었다. 또한노래를통해우리 는신의놀라운 광과사랑안에숨쉬게되었다.
 
기도, 유머, 동지애, 그리고음악은“ 인혁당”사건에서도필요했다. 19 7 4 년 봄부터 (인혁당 관련자들의 연행) 19 7 5 년 봄까지 (인혁당 관련자들의 처형 이후) 나는인생에서가장감정이고조된시기를살았다. 찰리가한국에서한 일 가운데가장의미있는것 중하나가 인혁당관련자 들 중 한 명의“ 후원인”이 된 것이었다. 찰리는침구를 감옥에 넣어주었고, 시골에가서그 사람의가족을만났다. 찰리는숭전대학교화학과에그딸을 취직시켰지만, 학교당국이인혁당가족이라는것을알고는해고시켰다. 그 리고나서 찰리는 그녀가 한의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직장을 얻는 것을 도와주었다. 
인혁당 관련자 여덟사람이 처형되던 날은우리 딸 엘리자베스의생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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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딸 아이도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해 너무나 걱정했기 때문에, 찰리와 나는딸에게 처형을 알려생일을 망치지 않기로 했다. 물론, 딸도 처형소식 을 나중에 알게 되었고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지금까지도엘리자베스는 자기 생일에 일어났던 그 끔찍한 비극을 기억하며, 그일로인하여세계관에큰 향을받았다. 월요모임은서울미대사관앞에서처형에대한항의시위를하기로결정했 다. 나는메리언커런트와메리언포프가월요모임의여덟사람이머리에덮 어쓰게될검정색두건을만들기위해천을자르고바느질하는것을도왔다. 시위하는날, 나는평소대로일상업무를보러다녔다. 그날은내가일산에 있는홀트고아원에음악치료를하러가는날이었다. 오후늦게집에도착하 니, 유모인인숙이문을열어주었다.
“ 왜아직여기에있어요? 찰리는어디갔어요?”라고그녀에게물었다.
“ 나쁜사람들이데리고갔어요.”라고그녀가말했다. 심장이내려앉았다. 찰리와월요모임의다른시위자일곱명이연행되거 나 구금된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들은놀라지 않은것 같았지만, 아마 내가 애들을놀라게만들었을것이다. 다음날아침서울외국인학교에서, 우리아 이들은다른연행자들의자녀들과복도에서만나함께걱정을나눴다. 다음날아침까지나는찰리소식을하나도 듣지못했다. 나는찰리가너무 나 걱정되었고, 나자신도 조금걱정이 되었다. 조사관이찰리에게 누가두 건을 만들었는지 말하라고 강요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빌 베이싱어가 자신의 조사관이 두건을 만든 사람 이름을 대라고 요구했다는 것을말해주 었기때문에, 나는더욱더걱정이되었다.
동료 선교사인 호머 리커보우는 찰리가 집에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나를 위로해주었다. 또한몇 달 뒤 찰리가 재판에 참석했다가다른외국인 한 명 과 함께연행되었을 때 찰리를 정신적으로 지원해준 것에 대해서도 호머에 게감사하게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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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6 년 찰리는 장로교회의“ 기근방지프로그램”으로부터기금을 지원받 아, 한국남서부지역의가장가난한농촌을개발하기위한사업을시작했다. 숭전대학교가후원한 이 사업은 농촌주민들과함께 대안 에너지원을 연구, 개발하는프로그램이었다.
우리는빈 집이있는작은산골마을을골랐다. 19 7 6 년 여름, 우리 가족은 번잡한서울에서떨어진외딴시골마을인마동으로이사를갔다. 우리는빨 리 정착했고, 도움이필요한 곳은어디든지“ 선행을하러돌아다니기” 시작 했다. 우리는겨울에는눈덮인풍경의평온함을즐겼고, 여름에는푸른들녘 과 개구리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즐겼으며, 가을에는 황금빛 벼와 붉은 고추와 감과코스모스를 즐겼다. 크리스마스에는뒷문에 진짜 소와 구유를 구비해놓았다.
서울에서일어났던모든것과비교해얼마나다른가. 우리는조용히살고 절대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정부의 감시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것을곧 깨달았다. 서울에있는우리의중앙정보부“ 꼬리”는 산골 마을까지따라왔다! 그들이모르게어디든 오가는것은불가능했다. 찰리와 내가차를마시러다방에가면,“ 낯선사람”이 남편에게말을걸고는버스까 지따라와서우리가탈 것이라말했던버스에실제로타는지확인했다. 찰리 는 군청에갈 때마다경찰서에서“ 초대”를 받았다. 찰리의일을궁금해하는 많은사람들가운데일부는충실한“ 감시자들”이었음이분명했다. 이런감시에도불구하고, 우리는월요모임과계속연락을취했다. 베이싱 어내외, 더스트내외, 혹은다른 사람들은가끔주말에마동에 있는우리집 을방문하여함께비공식적인모임을가졌다. 나역시 가끔씩정기적인월요 모임에참석하기위해서울에갔다. 이렇게월요모임과의계속관계를맺었 기 때문에,“ 감시자들”은 우리가무언가꾸미고있다고확신했을것이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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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은찰리가평소와반대방향인, 산을가로질러가는버스를탐으로써자신 의“ 꼬리”를떼어놓고는아주만족스러워하 다. 
 
19 7 8 년 7월에서울에서의임무가끝나자, 우리는선교휴가차미국으로돌 아왔다. 그러나한국에있는친구들과계속 연락을취했고, 결코월요모임의 회원임을포기하지않았다.
이 책의다른집필자들은심지어추방을당하기까지하면서, 내가한국에 서 했던것보다휠씬더 많은일을했다. 그들이지닌진취적기상과용기가 나에게는부족했다. 하지만나는한국인들에대한그들의지원에무한히감 사한다. 그리고성경을아는것 뿐만아니라성경대로사는것이중요하다는 사실을나에게상기시켜준것에대해서도항상고맙게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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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 장 새날이밝았다
 메리언 커런트(M arion Cur r en t ) 

19 5 6 년 8월 뉴질랜드에서물리치료사로일하기위해캐나다를 떠나기한 달전이었다. 26 살의독신인나는 이제막 세상을구경하기위해 출발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우연한만남이내인생의방향을바꿔놓았다. 그해8월나는교회여름수련회의인솔자 다. 수련회의책임자인로라버 틀러목사가모든인솔자들을개별적으로불러가벼운담소를나누었다. 그 녀가나에게 던진질문은“ 어디로향하고있습니까?” 다. 나는그것이지리 적인방향이아니라신앙과관련된 질문임을알았다. 공교롭게도전날밤,나 는 야곱이하느님과씨름하듯이뒤척거리며잠들지못했다. 나는어떤이국 적인나라에서“ 일하면서”관광도할 수 있는직장을잡을것인지를숙고하 고있었다. 이것이내인생에서충분한목표가되는가? 그래서버틀러목사의질문에대한내 답변은그저“ 모릅니다.” 다.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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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다음질문은“ 캐나다연합교회연수학교에 참가하는 것을 고려해본 적이 있습니까?” 다. 나는그 학교에대해들은적이없었다. 그녀는그것이부 목사또는선교사가되길원하는사람들을위한학교라고설명했다. 나는 재 미있을것같다며생각해보겠다고말했다.
그것이 인터뷰의 끝이자더욱 만족스러운 목표가 있는 새롭고흥미로운 인생여정의 시작이었다. 충분히심사숙고를한 뒤, 나는 뉴질랜드 행 배편 을 반환하고뉴질랜드에있는병원에계획이바뀌었다고편지를보냈다. 그 결정과이후2년간의공부, 그리고새로운직업의선택은말 그대로내 인생 을바꾸어놓았다. 
나는캐나다연합교회의부목사가되었고 의료분야의선교사가 될 계획이 었다. 한국에는 물리치료가 소규모로 시작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문적인 학교는 없었다. 이 기회야말로 내 배경과 지식수준에 가장 적합해 보 다. 연수학교에서, 나는신앙과정치, 그리고더많은것들에눈 뜨게되었다. 이 모두가마음이넓어지는경험이었다.
연수학교에서내가했던일 중 하나가세계각국의사건에대한신문기사 들을 수집하는 것이었고, 오늘날까지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유명한 선교학자이자중국에선교사로다녀온캐서린호킨을정신적스승으로모시 고 마음과 혼의지평을넓혔다. 호킨은19 4 9 년중국공산당혁명과중국 공 산주의자와 기독교인 사이의갈등을 경험했다. 그런 경험들과 중국에서의 추방이그녀의사상과강의자료의상당한토대가되었으며, 그덕분에나 자 신도편협한사고방식에서벗어나한국에서의삶을준비할수있었다. 한국에가기전 나는“ 선교사업에서의협력”이라는개념을강조한선교활 동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다. 우리는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상호존중의 중요성을배웠다. 설령우리가봉사하고있는사람들보다더 많은교육을받 았을지라도그들을내려다보는태도는금지되었다. 이러한신념을배웠기에, 나는동료선교사들이특정한 상황에서는“ 권위”를 행사하도록내게요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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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에도불구하고, 그반대로한국인들의지혜에대해경의를표할수있었다. 나는 19 5 9 년 9월에한국에 도착하여 세브란스병원(현연세대학교병원)에 서 일할것을명 받았다. 그후20 년 동안, 나는 의과대학에서물리치료사로 일했다. 또한 한국기독교장로회와도함께 일했다. 19 5 3 년에 건립된 한국기 독교장로회는캐나다연합교회가친 한동반관계를 유지하고 있던몇 개의 독립된한국 교회들가운데하나 다. 19 7 0 년대부터한국기독교장로회는한 국의 인권운동의 선구자에 속했다. 많은 소속 목사들이 인권운동에서 활발 하게활동하 다. 이교회는개인적으로내게아주큰 향을끼쳤다. 나는 19 7 0 년대초에 월요모임을알게 되어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는상대적으로순진한사람이었고, 특히정치적으로는더욱그랬다. 사실, 나는캐나다건다른나라건정치에는관심이 거의없었다. 내가최초로인권 문제에대해눈을뜬 것은당시한국에서무슨일이 일어나고있는지알고자 하면서부터 다. 한국내에서정보를 얻기는매우어려웠고, 외부정보에대 한 검열도엄격했다. 예를들면,『 타임』지나『뉴스위크』지와같은잡지에한 국정부에의한인권침해사례들이보도되면, 정부는그기사를삭제했다. 한국인들은아무도엿듣지않는다는확신이들지않으면정치상황을논의 하지말아야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전화가도청되고있다고생각했기때 문에, 우리는전화상으로일종의암호를사용하기시작했다. 신문에 대한 엄격한통제로 사실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국내의 상황에 대해알고있었고, 해외의정보를얻고싶어했다. 월요모임은검열된정보에 접근하고 실제일어나고 있는일들에대해더 많이알 수 있는중요한 길이 었다.
인권운동에대한나의관심은 대부분 한국인목사들과한국기독교장로회 의 교수들에 의해고무되었다. 나는문익환 목사와 그의아내, 그의 부모님 들, 또그의동생문동환목사와아내페이문과같은사람들의믿음과행동 으로고무되었다. 나는투쟁이깊어질수록그들이변화하는것을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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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서남동 목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이고 훌륭한 여성운동가이면서교수이자 장로로 재직 중이던 이우정도 알게 되었다. 이 책에언급한많은다른한국기독교인과마찬가지로, 그들은민주화에관심 을 갖고 열심히 활동했다. 이들을 보면서 나 역시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대해무언가를해야한다는생각이들었다. 월요모임은한국동료들 을지원할방법을고안할수있는중요한수단이었다. 
 
정치활동에참여하는것은나에게아주커다란변화 다. 온타리오주 북 서지역에서 자란나는 순진한 나머지, 그곳에서는불어 사용자들이 다수임 에도불구하고왜 어를사용하는소수가권력을장악했는지조차궁금해하 지 않았다. 그지역에는캐나다원주민도많이살고있었지만, 어릴때 나는 단한명의캐나다원주민도알지못했다.
돌이켜 보면, 내가지배문화에의해철저히‘ 세뇌’ 되었다는것을깨달은 것은한국에온 다음이었다. 캐나다에살 때, 나는왜 사회가어를말하는 백인 개신교 또는 천주교인의 이익을위하여 왜곡되었는지 의문을 품지도 못했다. 나는 자신의 편견을 깨닫지 못했고, 나의 태도가 변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19 6 0 년 4월의 학생혁명조차나 자 신이 행동으로 나갈 정도로 강력한 변화를 유발시키지 못했다. 대신에, 그 변화는박정희정부가점점억압적이고 반민주적으로되어감에따라점차적 으로 일어났다. 군대식 독재주의의 극치는 19 7 2 년 선포한 유신헌법이었다. 마침내나를 일깨워준 것은 한국 인권운동가들의 의식화운동이었다. 나의 재교육과정을 심화시켜준한국인권운동가들과월요모임회원들에게 나는 원히감사한다.
19 7 4 년 캐나다에서 국내업무을 맡고있을때, 교회모임에서내가한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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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탄압에 대해말하는 것을비판했던 두 명의한국 물리치료사 동료들을 위해통역을담당했던적이있다. 그들은나에게“ 우리조국의치부를 내걸 고있다.”고비난하면서내동기가무엇인지물었다.
나는이런문제에 대해솔직한 편이나으며, 캐나다인들, 특히우리교파 에게소위“ 경제발전”을위해한국노동자들이치루는댓가가무엇인지알려 주는것이좋다고설명했다. 
 
갈릴리교회는 박정희 정부가 반정부인사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던 19 7 4 년 7월에탄생하 다. 서울중심가에있는한식당에서 30 명의예배자들이(9명 의 중앙정보부사복요원과함께) 참석하여첫 예배를드렸다. 이새로운교 회의 목적은민주주의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인 기독교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박정희독재아래고통받는사람들에게하느님의사랑과연민을공 개적으로말할장소를제공하는것이었다.
두번째 일요일에식당에도착했을때, 우리는그날예배가다른 장소에서 개최된다는것을알리는쪽지를발견했다.“ 관계당국”이식당주인에게우리 에게그곳을빌려주지말라는압력을가한 것 같았다. 우리는집회의자유가 너무침해된다고생각했다. 사회에서“ 추방당한사람들”을 환 하는교회가 마치예수가죽은뒤예루살렘에서쫓겨난사람들처럼추방당한것이다. 결국, 갈릴리교회는정부 당국자들의 불쾌감을 살 각오를 한 한빛교회의 초청으로그곳에서오후예배를드리게되었다. 그러나계속되는정부의감 시는갈릴리교회의숙명이되었다.
“ 갈릴리”라는이름은마태복음16 장 7절을토대로했다. 예수가십자가에 못박혀묻힌뒤, 마리아막달레나는무덤에갔다가무덤이빈 것을발견하고 정원에서승천한예수를만났다. 그녀는다른 사도들에게,“ 예수께서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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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먼저갈릴리로가고계십니다. 그분이여러분께말 하셨던것처럼, 그 곳에서여러분은그분을뵙게될것입니다.”라고말했다. 사도들은(수도) 예 루살렘에서나와서백성들이짓밟히고억압받던갈릴리로돌아갔다. 그곳에 서사도들은다시모여서다음에무엇을할것인지결정했다. 갈릴리교회는“ 교회,” 즉신자들의 모임이라는정의에 딱 들어맞는 반면, 대부분의 전통적인 교회들과는 달랐다.“ 담당” 목사도 없었고, 교회건물도 없었다. 예배를일요일오후에드렸기때문에, 다른교회의신자들도참석할 수 있었다. 갈릴리교회에다니는사람들은양심수들의부인들, 어머니들, 그 리고 다른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정당한 권리를 주장했다가 혹독한 취급을 당한공장노동자들, 해직교수들, 활동때문에주기적으로투옥되었던목사 들, 우리 같은소수의 외국인 등도참석했다. 도처에사복경찰들이깔려있 었다.
갈릴리교회밖에서는, 부당하게고통받는사람들이심지어친한친구에게 조차자신의경험을이야기할수 없었다. 그들은이해받지못하는두려움을 비롯하여많은두려움을알고있었다. 경험을나누지않은친구들은그들의 고통을이해할수 없었다. 그러나갈릴리교회안에서는이런사람들이이해 와 위로를얻을수 있었다. 그곳은그들을속박하는불의에대한분노를표출 할 수 있는곳이었다. 마찬가지로그곳은기독교인들이불의와억압이만연 한 시기에신앙의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곳이었다. 대개20 명에서30 명 정 도 던참석자들모두가“ 내이름으로인해고통받는것”의의미를알았다. 작은 모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리교회의 증거는 널리 퍼져나갔다. 갈릴리교회는 더 크고“ 사회적으로” 더유명한 다른 한국 교회들보다 더욱 알려졌다. 해외의 교회 지도자들과 신문기자들을 포함하여 관심있는 많은 외국인들이갈릴리교회를방문했다. 캐나다연합교회의장인조지터틀박사 와 뉴질랜드장로교회의장도방문했다. 또한아파르트헤이트기간동안“ 유 색인”과 함께 목회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한 남아프리카 개혁교회의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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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란부삭도갈리리교회를방문했다. 당시나는세계적으로유명한교회지 도자와같이앉아있다는사실이믿어지지않아내 몸을꼬집어보았다. 알란 부삭은자기조국의인권을위해투쟁했고, 마찬가지로인권을위해투쟁하 던한국의형제자매들을지원했다.
갈릴리교회의이야기는외국에까지퍼졌다. 예를들면, 캐나다연합교회는 『옵저버』지에몇 개의한국관련기사들을실었다. 기사들중 하나는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인 윌라 커넌이 갈릴리교회의 강론도중 무엇인가 적는모 습을찍은사진을실었다. 그뒷자리에는중앙정보부요원이뭔가를기록하 고있다. 
일부『옵저버』독자들은왜교회가“ 정치에간섭”하고있는지의문을제기 했다.『 옵저버』측의답변은다음과 같았다.“ 선교사들은정치적인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았고, 재야인사들의시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단지 재야인사 들의가족들에대한사랑과목회자로서관심을표하고, 그들과함께기도할 뿐이다. 
물론, 한국정부는상황을그런식으로보지않았다. 중앙정보부요원들이 교회로 올라가는 골목을 따라 배치되었고, 예배에 참석하러 언덕으로 걸어 가는사람들을모두알고 있었다. 또요원들은예배에직접참석해서강론과 기도내용을기록하고참석한사람들을 촬 했다. 심지어갈릴리교회예배를 드리는장소인한빛교회목사조차구속했다. 그의죄목은한국의저명한지 도자들이 서명한“ 구국선언문”이 발표된 19 7 6 년 3월 1일의 예배순서를 등 사했다는것이었다.
윌라커넌과나는출입국관리사무소에불려갔고, 만약갈릴리예배에계 속 참석하면우리의 거주허가를취소하겠다는협박을 받았다. 당연히, 그것 은매우두려운일이었다. 어떻게해야하는지묻기위해나는믿을만한한국 친구몇 명을집으로초대했다. 그들의진심어린지지에힘입어나는갈릴리 교회에계속나갔지만, 그때가나에게는감정적으로아주힘든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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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캐나다연합교회에 내 결심을 알렸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 는 것을그만두어야만한다면계속선교사로일할수 없다고진심으로생각 한다고설명했다. 나는자유와민주화를위해목숨을건 사람들과함께해야 만 했다. 동시에한국정부가내역할을선교사로한정시키도록하고싶지않 았다. 그래서나는갈릴리교회에계속다녔으며, 내거주허가는취소되었다. 나는캐나다연합교회가한국선교사들과의관계에서취한입장에대해매
우자랑스럽게생각했다.
외국인선교사가주권국가에들어가는것은권리에의한것이아니라, 그 나라의 적법하게 구성된 당국의 고통에 의한 것이다. 선교사는 그 나라의 법을존중하고그에복종하도록 기대된다. 그러나선교사와그를보낸교회 의 예언적 발언은, 설사그것이 정치적 함의를 갖거나 정부에 의해전복적 인 것으로 간주되더라도, 기독교적 양심에 의해항상요구되는것이다. 만 일 선교사가 인권이 침해받거나 사회적 불의가 만연하거나 묵인되는 상황 에 직면한다면 특히 그러하다 ……그런상황에서하느님의말 을선포하 고자하는충동은, 비록그것이정부의불쾌함을불러일으킬지라도, 하느님에 대한기독교인의의무와동료들에대한책임감속에내재되어있는것이다.”
나는소속교회의이러한입장으로인해굉장히지지를받고있다고느꼈 고, 그 때문에갈릴리교회의예배에 참석하는 것과같은“ 반정부적”활동들 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저명한 지도자들 중 다수가갈릴리교회의일원이었다. 나는이 작고강한신앙 공동체안에서그 들과함께참여할수있었다는것을큰축복으로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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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은 무보다 강하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한국의 군사독재 시대에 도 명확한사실이었다. 군대는“ 무력”을 지녔고모든국민들은“ 문”을 가지 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 던가! 거의 매일마다 학생, 노동자, 교회지도자, 또는기자들이정치상황에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김지하를포함한여러시인들이박정권이저지른불의에관하여 을썼다. 그런 과감한 들을 썼던 사람들은 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수사관들”이 그들의 집을 샅샅히수색했다. 그들은 (중앙정보부 본부가있는) 남산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며칠또는몇 주 동안감금되어심문당하고고문당하 거나 수감되었다. 가족들은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학교에서 퇴학을당하는 것과같은시달림이나위협을당하곤했다. 그래서붓을휘두르는것은 가볍 게 행할수 있는일이아니었다. 그러나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기꺼이 자신의신념과조국의미래를위해이런위험을무릅썼다.
19 7 4 년후반경, 일간신문기자들의지위는매우취약해졌다. 특히동아일 보가엄청난 투쟁을 수행했다. 동아일보는19 7 0 년대에 한국에서 가장널리 읽히는신문이었다. 동아일보기자들이 정부의부정과 재계의비리, 게다가 민주화운동에참여하고 있는사람들이 당하는 불의를 폭로했다. 또한 당국 이조사차 끌고간사람들에게가한고문도보도했다. 엄격한정부의감시와 검열, 그리고그런기사들을싣지못하도록편집자들에게가한압력에도불 구하고 이런사실들이 보도되었던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의 자유 를믿었고침묵하기를거부했다.
위협이 전혀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정부는 광고주들에게신 문의주수입원인광고를 회수하라는압력을가했다. 재계소식통에따르면, 기업들은 동아일보에 광고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만 했다. 학교 선생님들은 (해고의 위협 하에) 동아일보를 읽지 말고, 학생들에게도 읽히지말라는경고를받았다. 시골읍이나마을에동아일보를배포하는것 이 금지되었다. 당시텔레비전과라디오는대도시에만있었기때문에, 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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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람들은소식을신문에의존했다.
광고수주가 사라지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본사 건 물앞에서시위를시작했다. 매일10 시부터12 시까지, 기자들은사건을설명 하는플래카드를들고길게서있었다. 수입이없어서급여를받지못했음에 도 불구하고, 기자들은매일출근했다.한국인동조자들뿐만아니라몇몇외 국인들도그들의철야농성에동참했다. 
그리고나서아주놀라운일이일어났다. 일반시민들과심지어외국인들 까지동아일보의광고란을구매함으로써대의에합류했던것이다. 동아일보 는 소득원이없음에도불구하고계속발행되었다. 일부“ 광고”는 1평방인치 도되지않았다. 좀더큰단체들이낸광고들은반페이지정도 다. “ 광고”는 개인의이름이나격려문구나현 상황에대한성명서 다.“ 자유 와 정의는승리할것이다!”“ 올바른투쟁을계속해주십시오!”어떤것은이 승만정부를전복시킨 19 6 0 년 4· 19 혁명을상기시키는문구인“ 봄은오고있 습니다.”를 인용했다. 사람들은광고비를 지불하기 위해몇 시간씩 줄을섰 다. 놀랍게도, 신문의하루판매량은6십만부에서 8십만부로급속하게 증 가했다.
격려와 재정지원이 폭발적으로늘어났지만, 동아일보는금전적으로 손실 을 입고있었다. 어떤사람들은 손실이 하루에 미화로7만 5천 달러에 이르 다고말했다. 동아일보에대한자선적인기부는불법이었다. 그리고개별 광고를하는것은절대로안전하지못했다. 19 7 5 년 1월 14 일자 1과 2분 1인 치 광고란에 낮은 직급의 한국군 중위의 이름이 실렸다. 그 광고에는 단지 계급만있을 뿐이름도 다른어떤정보도 없었다. 너무작아서, 내친구인한 국인교사가수많은광고들중에 이광고를 찾아내는데 30 분이나걸릴정도 다. 그러나정부는그것을위협으로간주하고,“ 군의단결과사기를저해” 했다는죄목으로동아일보간부 세 명을연행했다. 결국세사람은풀려났지 만, 이로인해(민주화투쟁을위해주요 성직자와지도자들이19 7 3 년에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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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국민에게 드리는 공 개적인호소문을발표했다.
광고를내기위해 줄을서있거나 매일본사앞에서침묵시위를벌이는기 자들과 연대하여 함께 서있던 모든 사람들의 용기있는 대응은 위대한 증거 다. 그리고그것은내게커다란향을주었다. 동아일보의시위로고무된 나는이후그런 종류의다른시위에기꺼이합류했다. 그리하여한국에서침 묵시위, 비폭력시위와행진, 편지쓰기운동 등에여러차례 참가했으며, 은 퇴하고캐나다로돌아온후에도그런류의시위들에합류했다. 동아일보기 자들의용기있는행동, 그리고그들이정의와언론의자유를위해떨쳐 일어 섬으로써나에게가르쳐준것에대해나는 원히감사할것이다. 일상적으로교회는사람들이예배를드리고다른사람들이함께하길기다 리는곳이다. 서울에소재한사랑방교회는그 반대 다. 사랑방교회는교회 건물도없는고통받는사람들의모임이었다. 사실, 그들은집도없었다. 그 들은 서울의 빈민촌 거주자들이 으며, 예배보다는 사회봉사를 더 필요로 하는사람들이었다. 그들은자기들의 고통의이야기를 들어줄사람, 생존을 위한그들의투쟁에서그들과함께연대해줄사람이필요했다. 이 빈민촌 거주자들은누구 나? 왜 그들이 빈민가에 살고있었나? 어떤 상황에 의해 그곳으로 왔는가? 그들은 한국의“ 경제기적”이 이루어지는 동 안 서울변두리로 려난, 그리고 존재의 벼랑끝까지 려난, 가난한사람 들 중에서도 가장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중 일부는더 이상생계를 유 지할수 없어서시골에서서울로상경했다. 그들은어떤대가를지불하든지 경제를 발전시키려는박정희 정책의 희생양들이었다. 사랑방교회의가난한 사람들은희생양들이었다.
나는서울기독교회관에서 열린목요기도회에서이 사람들의요구에대해 알게되었다. 빈민촌거주자들은서울남동쪽이문동에서골판지로된 판잣 집에살고있었다. 가진것은비를피할수 있는비닐장막밖에없었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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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제철거당할지경에처해있었다. 서울시도시계획자들이빈곤에찌든 그들이살아볼 꿈도꿀 수 없는아파트 단지를조성할터로그들이 살던땅 을 지정했기때문이었다. 그들이지닌보잘것없는소지품은탈취당했고, 그 들의미래는참으로막막해보 다. 판잣집에서철거당하고갈 곳도없던그들은겨우몇 개의천막만확보했 다. 낮에는 대부분 일용직 일자리를 구하러 시내로 갔다. 그러나 밤에 빈민 촌으로돌아 와서, 그들은종종관계당국자들이텐트를찢어놓은것을발견 했다. 이런 경우에“ 관계당국자들”은 정부 공무원들이 아니라 더러운 일을 하려고고용된깡패나건달들이었다.
목요기도회 모임의 일부 참석자들이 돕고자 해서, 우리는 그들의 처지에 대해더 알아보기위해서빈민촌거주자들을만났다. 그들이자신들의슬픈 상황을설명할때 서남동목사가옆에서서 듣고있던것을선명하게기억한 다. 그것은아주감동적이었다.
돌이켜보면, 이와 같은상황들이 서남동 목사에게 어떤 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그는가난하고억압받는사람들과함께하는민중신학연구자들 중한명이었다. 이빈민촌거주자들이그의선생님이되었다. 관심있는기독교인들과복음주의자들이빈민촌거주자들과함께계속일 했고,“ 담장없는 교회”의 기초를형성했다. 19 7 5 년 1월 30 일, 사랑방교회의 설립을 경축하기 위한 예배가 열렸다. 한국에서 사랑방은 손님을 맞이하는 별채의거실이다. 이예배당에는담장이없었다. 그것은빈민촌거주자들의 모임장소에 불과했다. 전직 한국대통령의 아내인 공덕귀 여사를 비롯해 많 은 지지자들이 사랑방교회의 첫 예배에 참석했다. 교회 장로이자 한국교회 여성연합 회장인 이우정 여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부터지원받는 서울 도시공동체의회원들과몇명의목사들, 인권활동가등이참석했다. 교회창립일에찍은사진에는, 초라한곳에흰색십자가를세우고예배를 올리는많은행복한얼굴들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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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다음주에모든것이부서졌다. 19 7 5 년 2월 9일, 불도저가와서천 막과천막아래바닥을 부수었다. 왜그런파괴적인행위를했을까? 우리는 빈민촌 거주자들이목요기도회에참석하지 말라는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때문이라고들었다. 
불도저가일을마쳤을때, 사람들의물건들은사방에흩어져있었고쌀과 가루가 땅바닥에 던져져 있었다. 남녀 그리고 어린이 30 명이 경찰서까지 연행되었다. 즉결재판소는아마도 천막을 철거할 때 난동을 부렸다는 이유 로여성 6명에게구류 5일, 남성4명에게는구류10 일형을선고했다. 이 소식을들었을때, 나는너무나화가났다. 어떻게이 가난한사람들에 게 그런짓을할 수 있단말인가? 이사람들이나라나정부의안전에위협적 인존재란말인가? 그들의고통이충분하지않단말인가? 나는다음일요일에그곳에서열리는예배에참석할것임을분명히했다. 그리고카메라를가져가서철거된곳을사진으로찍었다. 나는사진을아주 잘 찍지만, 그날 내가찍은사진들은흐릿하게나왔다. 너무감정에북받쳤 기때문이라는것을나중에깨달았다. 너무나분노에가득차서사진을 찍을 때손이흔들렸던것이다. 
한사진은 나중에아주유명해졌다. 그것은고개숙인문익한목사의 사진 이다. 그는고개를숙인채 어깨위에흰색판자로된 부서진십자가를지고 있었다. 십자가는짓밟히고깨지고쓰레기와뒤범벅이되었다. 그형상은내 기억속에 원히남아있을것이다.
투옥되지않은사랑방사람들은그들의지도자이철용과함께일시적으로 이사를했다. 40 여 명 정도의사람들이두 개의작은방에서며칠동안용케 살았다는 것이 내게는 믿겨지지 않았다. 이철용은 진정으로 빈민촌 거주자 들을 이해했다. 그는 서울도시공동체의 지원을 받는“ 훈련 중인노동자”
다. 그는정규교육을 거의받지못했지만, 따뜻한인간성과 함께일하는 사 람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비롯해 훌륭한 지도자로서의 모든자질을 갖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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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있었다. 또한전과기록도있었다. 그는19 7 5 년국민투표를책임진공무원 들의불법행위를폭로하여여덟달을복역했다.
관심 있는개인들과 교회대표자들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사랑방 사람 들을위해작은땅을매입하기 위한기금모금에 나섰다. 이제다시는 철거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랑방교회는여전히 살아남았고 번성 하 으나, 계속탄압을 받았다. 이 작은 집단의 투쟁을 목격하고 우리는 예 수가당대의 당국자들에게한 말을떠올렸다.“ 내가죽고사흘만에부활하 리라.”
 
월요모임의많은회원들은 자신들의 전화가도청당하고행동이감시당하 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에는 내가 얼마나 착감시 당하고있는지알지못했다. 내가예전에언급한한 사건이있었다. 윌라커 넌과나는갈릴리교회에참석하지 말라는 출입국관리사무소의경고를 받았 다. 그러나나의활동이정부요원에의해감시당하고있다는다른징표들이 갈수록많이있었다.
예를들면, 19 7 6 년 나는정부로부터더 이상고려대학교물리치료학과학 생들에게 치료실습을 가르치는 것을허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왜? 대학밖에서이루어지는나의인권운동때문이었다.
다음에는, 세브란스병원 재활병동 소장이나를 사무실로 불러서 문익환 목사와서남동 목사와 같은 활동가들과 관계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요청했 다. 재활병동소장은내가이 반정부인사들이나또 그들의활동에관여하지 못하도록하라는“ 관계당국”의전화를받은것이다. 
나는이 지시를무시했다. 나는이미한국정부가내“ 선교활동”을 규정짓 지 못하게하기로결심한바 있었다. 공무원들은인권과민주주의를대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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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내 활동이의료선교사인내 비자로는허용되지않는다고주장하곤했다. 그러나 교실에서 인권에 대해 언급한 적이없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과의 접촉을허용하지않겠다고위협하는것은앞뒤가맞지않았다. 나는문제시된 활동가들과계속해서관계를맺었고, 정의와인권을위한 활동을 이전보다 더 단호하게 지지했다. 그러자관계당국자들은내가 정치 적으로 큰 향력이있는연세대학교부속기관인세브란스병원에서일하지 못하도록방해했다. 만약당시연세대학교총장에게가서내게가해지는탄 압에대해따졌다면무슨 일이벌어졌을지궁금하다. 그러나당시나는 정치 적으로기민하지못했다. 그리고활동가친구들중 몇 명은내 일이너무중 요하니까 그런사소한 문제로 추방당하는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고 주 장했다.
19 7 9 년 말에일본외무부장관이처음으로한국을방문했을때 또 다른사 건이일어났다. 그것은아주큰 사건이었다. 나는누군가 전화를 해서대사 가 도착하는 날 저녁에 어디에 있을 것인지를 물어서 깜짝 놀랐다. 경찰이 외무부장관방문기간동안“ 문제인간들”중 누군가가소동을일으키지못하 도록확인하는것이었다. 나는전화를건 사람에게그 날 저녁집에있을것 이라고말했다. 
그리고 나서나는 저녁식사 초대를 받게 되었는데, 계획이변경되었다는 것을알리기 위해내게전화했던 사람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다음날, 그 사람이다시전화해서내게집에 있을것이라고말하고왜집에 있지않았냐 고 물었다. 고맙게도, 대사의 방문기간 동안 곤란한 일이 발생하지 않아서 나를감시하는업무를맡은그사람이곤란에빠지지는않았다.
 
19 8 0 년에나는캐나다에서국내업무를보았다. 19 8 1 년에한국으로돌아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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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때, 내 근무처가서울에서 버스로 세 시간거리인원주에위치한연세대 학교 분교의 보건대학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겨울과 여름방학을 제외하고는월요모임에참석할수 없다는것을의미했다. 그러나나는가능 하면월요모임에언제나참석했다. 나를원주로발령한것이서울에서내가 하는 인권활동을 단속하기 위한당국의 요구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나는서구와한국의문화를비교하는(19 8 1 년 출판된) 작은책을한 권 썼 다. 그책에는정치적인내용이없으며, 내친구들조차알지못할정도로알 려지지않은책이다. 그래서처음으로전화해서책의출판을축하해준사람 이 내가모르는사람이었다는것은아주흥미로웠다. 그사람은틀림없이나 의활동을감시하도록배정된요원이었을것이다. 엄청나게지루한일만해야하고,“ 감시”도중무슨일이벌어지면커다란
곤경에빠지게되는이사람들에게미안한감정이느껴졌다. 
 
월요모임은19 7 0 년대초반부터19 8 0 년대를통틀어내인생의가장중요한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초기회원들이19 8 0 년대에 한국을 떠났다. 80 년대와 90 년대에도 월요모임은 비정기적으로 필요할 때 모 다. 아주 소수의 사람 들만 참석했지만, 여전히월요모임의 최초의 목적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정말놀라웠다. 그 목적은 한국내에서 인권에 대한깊은관심을 가진사람 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인도하며, 서로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공유 하는것이었다.
비록 어를 잘 하는 한국인으로 제한되었지만, 나중에는 한국사람들도 월요모임에참석하는것이안전해졌다. 정치적분위기와회원들이바뀌었지 만, 월요모임은계속적인연대의식과공동의목적을유지하고있었다. 19 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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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의 한국이 군사적 지배에서 민주적인 통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월요 모임은 우리로 하여금 균형잡힌 시각에서 그것을 볼 수 있게해 주었다. 민 주정신이 성장하면서, 더많은정보와 소식을 접할수 있게되었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었다. 인권활동으로인해 투옥되고 종종 고문도 당했 던한국인들이정부요직에임명되기시작했다.
19 7 1 년 선거에서 박정희를 거의 낙선시킬 뻔했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대통령이되고뒤에노벨 평화상을수상하는것을보면서, 나는한국에는새 날이밝았다는것을알았다. 문동환목사는국회의원이되었다. 처음에는박 형규목사가, 이후에는함세웅신부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이사장이되 었다. 많은활동가들이고문을당했던중앙정보부가인권기념관으로바뀌었 다. 그리고오랫동안용감하게 투쟁해온 한국인들에게많은꿈들이현실화 되었다.
19 8 0 년 이후의월요모임회원들은19 7 0 년대한국의투쟁을상상하기조차 힘들것이다. 그렇기때문에그시기를살았던우리가 우리들의이야기를들 려주어야한다. 나는월요모임회원들을포함하여, 그시절에민주주의를지 지하고인도하고눈물과투쟁속에함께했던모든사람들에게감사한다. 그리고하느님께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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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 장
신부님이제마음껏이야기하십시오
 
짐 시노트 신부(F ather Jim Sin n o t t ) 
19 7 4 년 춥고눈 내리는1월 말, 뚱뚱하고행복에겨운44 세의독신인나는 시골섬에있는사제관에앉아서독재정권이통제의고삐를죄는것을지켜 보면서, 최근에 발표된“ 긴급조치”에 반대하며 항변하다가 투옥된 한국 목 사, 젊은남편과아버지들의나라기독교한국에대하여곰곰히생각했다. 봄이 되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많은 개신교 신자와 일부 천주교 신자 학생들이가장약한저항에도15 년 징역형을, 그리고더 심각한“ 반역죄”에 는 사형까지처할수 있는긴급조치4호의철퇴를맞았다. 나는이렇게반응 했다.“ 왜누군가(나외에다른사람이) 행동에나서지않는것일까?! ” 절망 속에서나는교회의수장인김수환추기경에게“ 조치를취하십시오”라는주 제넘은편지를써서보냈다.
김 추기경에게편지를보낸것이 불시에일어난일은아니었다. 나는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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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인권에관심이 많다는것을알고있었다. 김추기경은19 7 1 년 외국선 교사들에게강론을한적이있었다.“ 선교사여러분들은우리한국천주교인 들이교육과정에서큰약점을극복하는것을 도와줄수 있을것입니다. 한국 천주교인들은 이 세상에 살고있는 개인들의 존엄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 니다. 만일군대가스테인드라스창을부수고성당을파괴하러언덕을올 라온다면, 천주교인들은몸을 던지고 목숨을 바쳐 하느님의 성전을 보호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동료 한국인들이 기본적인 존엄성을 박탈당하고, 죄 없이감옥으로보내지고, 신념때문에고문당하고있는데, 우리천주교인 들은이에대응을하지않고있습니다. 서양인여러분들은이들에게압제의 위험에처한다른사람들에게관심을가지도록가르쳐주어야만합니다.” 뒤늦게 생각하니, 내 편지는 추기경에게 문제를 제기하려했던 시도라고 생각된다.“ 만일 성령이 어디에 있는지를제게묻는다면, 성령은개신교 목 사들과학생들이고문당하고있는교도소와경찰서위에떠돌고있으며…… 도대체 왜 우리 천주교인들은아무것도 하지않는것입니까?”라고나는편 지에썼다.
나는이 무례한 편지에 대한답신은 받지못했지만, 일주일정도뒤에서 울 본부를방문했을때 김 추기경이나를만나고싶어했다는이야기를들었 다. 놀라서 자세히 물어 보았지만, 추기경은 단지 만나고 싶다고만 했다는 것이다. 그는 화를 내거나 파문을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가 실제로 나의 내방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찾아가서 성급한 편지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옳다고생각했다.
나는뉴욕소교구의아일랜드천주교인학생처럼, 높은봉직에있는교회 인사가 할 말에대해좋은예감은들지않았지만, 용기를내서서울추기경 관저를방문했다. 한국의유일한추기경이자한국천주교회의수장인김 추 기경은 결코위협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나는권위를 존경하라는 교육을 받아왔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권위에 따르려고 했다. 낡고 외풍이 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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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삐걱거리는나무계단을올라갔다. 그리고나서나는방문을찾아깊은 숨을내쉰후 두들겼다. 그가문을열자, 내가편지를쓴 장본인이라고소개 했다.“ 오, 당신이 군요.”놀라며그가 말했다. 우리는전에만난적이있었 지만, 나는 편지에서 표현했던 것보다 훨씬약한말 한두마디도 감히하지 못했다. 그는뒤로물러서서들어오라고했다.
그는중키의마른체구에가장자리에붉은장식이있는흰색여름사제복 을 입고있었으며, 평소보다더 성스러워보 다. 금욕적이거나내세적이지 않고, 매우개방적이고우호적인훌륭한자질을갖추고있었다. 여전히나는 포도주를 들이키다가 붙잡힌 복사(altar boy)같이 느껴졌다. 앉기 전에 나는 편지에대한사과부터했다.“ 제 이 좀강했을것입니다만, 저……”“ 아니 예요. 아니예요. 아니예요. 아니예요.”라고 어로말하면서그는손을들어 나를제지하며나의사과를중지시켰다. 그런다음, 그는 어로오늘날까지 내 눈시울을 적시는 말들을 했다.“ 편지에서신부님께서 하신말들이 내 마 음의일상적인고민거리랍니다.”
입을벌린채, 나는의자에앉아내가가장듣고싶었던말을그가마음으 로부터이야기하는것을들었다. 그의인식과좌절감은나와아주비슷했으 며, 여기에서 나와함께그것을 나누고 있었다. 30 분 이상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아주고무되었다. 그는한마디충고를해주면서나를배웅했 다.“ 다른사람들앞에나서지는마십시오.”“ 순종적인학생”인나는그것이( 무슨 말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나는 붕 뜬 상태에서 성당에서 내려 왔 으며, 마치나의 광을기념하고 있는군중행렬의 선두에있는것처럼느 꼈다.
19 7 4 년 7월 23 일아침, 나는서울중심가인명동에있는성모병원에 9시까 지 도착하기위해일찍출발했다.『 워싱턴포스트』지 도쿄지부장인돈 오버 도퍼가그 주에서울에있었다. 전날밤, 그는익명의전화를받았다.“ 지학 순주교가 9시에성모병원에서당신을만나길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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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내게한국에온다는편지를썼고, 이제한국에와 있었다. 연행된주
교는그가원하는한국에대한소식을위한“ 단서” 다. 천주교 원주 교구의 지학순 주교는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한 시기에 현재 의북한에서자랐다. 12 살에천주교로개종한그의신앙심은 동쪽을향해신 사참배하는 것을 거부할정도 다. 지학순은 처벌을 받았고퇴학시킨다는 위협을받았다. 19 4 5 년 일본이갑자기물러갔지만, 이번엔소련이북쪽을점 령했다. 신부서품을받기일년 전 어린지학순은새로운정부당국으로부터 가톨릭과의 관계를 끊고 새롭게 구성된 한국 교회에 합류하라는명령을 받 았다. 젊고 잘 생긴 지학순은 이를 거부해 구타당하고 투옥되었다. 마침내 그는남한으로탈출했으며, 아마소련도그가월남하는것을보며기뻐했을 것이다. 그로부터20 여년이지났다. 
2주동안지학순주교에게관심이집중되어있었다. 공개적으로박정권을 비난했던그는독일과오스트리아에서돌아오는길에서울김포공항에서중 앙정보부에의해연행되었다. 로마교황청대사가노력한덕분에, 지학순은 그의형님집에서의가택연금으로풀려났다.“ 주변에경찰이너무많아서형 님 식구들이 제대로 살 수가없군요.”라고불평했다. 그래서천주교 수녀원 으로옮기도록허락을받았지만, 다시“ 경찰이너무많아서수녀님들이기도 를드릴수없군요.”라고말했다. 마침내그는성모병원의6층에감금되었다. 그의병실에서내려다보이는마당은아침 8시 30 분에벌써기도하는수 녀들과6층을바라보고있는지지자들로절반정도가메워졌다. 7월 23 일은 지학순주교의“ 축일”이었다. 돈오버도퍼와그의비상근통역자원봉사자인 나는8시 45 분에휴게실에서만났다. 나는오버도퍼가병원에서주교와인터 뷰를하는것을 일주일전에주선했다. 그를주교의방으로데려가서워싱턴 교구에서온동료신부로 변장시켰다. 검정셔츠와로만칼라만이필요했다. (유대인 출신인 오버도퍼는 지금도 천주교 신부 던20 분에 대해 이야기한 다.) 그 인터뷰에서 다른신부와 내가 도청장치를교란시키기 위해크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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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를 나누는 동안 오버도퍼는 주교와 담소를 나누었다. 물론 중앙정보부 직원들역시우리의방문동안줄곧거기에서우리를감시했다. 오버도퍼는 내게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주교는 감명을 받아 오늘아침그에게다시방문하라고했음이분명했다.
소란이일어났을때, 나는로비에서오버도퍼를6층으로데려가는허가를 받으려 하고있었다. 이때, 지학순주교가 주교복을 입고스스로 계단 아래 로 걸어와서나타났다. 그는연금상태를깨버렸다. 근무중인요원들이주위 에서“ 이렇게하시면안 됩니다.”라고말했지만감히강제로그를멈추게 할 수는없었다. 하지만주교가 일층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복경찰들이 주교 가 나가는것을막으려고몰려들었으며,『 워싱턴포스트』지 기자와나를비 롯한지지자들인“ 다른팀”역시주교주위로이동하여에워쌌다. 우리는법 과질서를집행하는인력들을수적으로능가했다.
그는 붉은 테두리를 두른 검정 사제복 소매에서 편지지 크기의 3~4장의 갈색봉투를 꺼냈다. 오버도퍼에게봉투한 개를주었다. 봉투를 찢어 열어 보고한 로쓰인것을안 그는“ 번역해주시오.”라고소리를지르며그것을 내게건네주었다. 모두들 고 리는상태에서, 나는거의서 있을수도없 어서, 적당한 번역자를 찾을수가없었다. 지학순주교쪽에서는 경찰을 포 함해서그를에워싼사람들이병원로비에서마당으로나가는길을막고있 었고, 병원마당에서는수녀들이여전히기도하고있었다. 이제병원마당은 7월의땡볕속에서친구와적들로가득차있었다. 
이렇게다소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에서,『 워싱턴 포스트』지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주교님, 당신께선 자유로우십니까?”“ 저는 결코 자유롭지 못 합니다. 당신이 보는 것처럼 육체적으로도신도들의 사제로서 자유롭지 못 해서심지어 그들과 기도를 할 수조차 없습니다.” 경찰들이주교쪽으로 오 려고하면서두 팔꿈치는하늘로날리고엉덩이가내뻗쳐져있었다. 공개적 인 촬 은금지되었고, 텔레비전카메라들이땅바닥에내동댕이쳐졌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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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수녀님들의 기도에 동참합시다.” 수녀들이기도를 하기 위해 모여 있던 마당의 다른 쪽 끝을 바라보면서 지학순 주교가 말했다. 그의 주변에 있던 군중들은 그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주교는 우리 한가운데에서놓친 축 구공같았으며, 경찰들은그것을되찾으려고노력했다. 수녀들이나타나자우리는경찰이물러서라는명령을받았다는것을알아 차렸다. (필리핀사람들은 우리로부터 이것을 배워그들이 시위를 할 때 수 녀들을가장잘 보이게함으로써독재자마르코스를물리치는데 도움을받 았다.) 기도를 마친 후에 지학순 주교가 한국에서의 불의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군중들 중에서 적당한 번역자를 찾아낼 시간이 있었다. 함세웅 신부는지학순주교가오버도퍼에게건네준“ 양심선언”을손에쥔채타자기 를찾으러갔다. 그것은정권에큰타격을주었다.
설교를 마치면서, 지학순주교는“ 자, 우리모두성당으로 올라가서 미사 를 올립시다.”라고말했다. 나는“ 어찌감히”라고 생각했으며, 수녀들이찬 송가를부르며길을인도하는것을 보고전율했다. 나는김수환추기경이언 덕 위에 도착하여 우리 집회를 내려다 보는 바로 그 순간에 언덕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놀라서입을벌리고있었다.
우리의알록달록한행렬이시멘트포장길을올라가삐거덕거리는낡은목 재로된 사제관을지나갔다. 수녀들, 신부들, 교구민들, 중앙정보부요원들, 신문기자들, 방송인들모두가2주전지주교의석방을요구하는기도를드리 기 위해아주경건하게 들어갔던바로그 정문으로 들어갔다. 사제단에에 워싸여, 그는미사용 성직복을입으러 성구보관실로갔다. 나는 오버도퍼와 함께뒤에있었다. 3백 명 정도의사람들이앞 좌석을채웠다. 작은종이울 리고지학순 주교가 성구보관실에서 나와미사를 드리기 위해제단으로 나 아갈때, 나는 천주교 미사절차에 대해신부겸 기술적인 조언자로서오버 도퍼에게 계속 설명을 해 주었다. 그의 옆에는 미사를 위한 사제복을 입은 김수환추기경도있었다.“ 저기추기경이있는것이보이지요.”라고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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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놓칠까봐오버도퍼에게말했다.
내가예수의재림과고통과 20 0 년전한국순교자들의재판에대한이야기 등 강론 내용을 설명하자, 중앙정보부 요원이 바로 우리 뒤에서 모든 말을 받아적고있었다. 그 때 지학순주교는성경을읽기위해설교단으로 다가 갔다. 그는“ 그리고예수께서그의사제들에게,‘ 나는예루살렘으로가서많 은 고통을 받을것이다’라고말 하셨다.”라는구절을선택했다. 내가오버 도퍼에게그것을통역할때는목이메 다. 미사가끝났을때, 지학순주교의예수의고통에대한 재현이시작되었다. 그는성당을떠나서중앙정보부의연금상태로되돌아갔으며군중들과언론 에서벗어나실제감옥으로끌려갔다. 여섯달 뒤에그가풀려났을때, 한국 천주교는평화와정의를위한불굴의원동력이되었다.
 
재빨리군사독재로돌변한, 민주정권으로가장한한국정부가가한탄압에 눈뜨게된 19 7 4 년 4월, 나는내 관심사를들어줄믿을만한사람을주변에서 찾고있었다. 서른다섯살의키가큰 조용한 시카고 출신마티로우리가 가 장 적당한친구 다. 10 년아래인메리놀의 동료신부인마티는 장로교활동 가이자목사인 박형규의 재판에도 참석했다.(“ 그들이 마티 당신을감옥에 넣으면, 내가‘ 구급품’을보내줄게요.”라고나는농담을했다.) 
나는 내 교구가 있는 섬에서 20 분 정도 배를타고 인천까지 와서 마티를 방문했다. 마티집은확실히도청될것이기 때문에다방에서만나자고했다. 내 관심사를토로하자, (엿듣는사람으로부터멀리떨어진탁자에서낮은목 소리로) 마티는 웃으면서“ 우리모임에 오신걸 환 합니다! 많은사람들이 이런일들을이야기하기위해서울에서모임을가집니다. 월요일에저랑같 이 갑시다.”라고 말했다. (비록 안전하게 오클라호마에배치되어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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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동안미군에서짧은기간을보낸것을비롯해19 5 0 년대에반 공산 주의에가담했기때문에, 나는즉각적으로대답했다.“ 나는점조직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을겁니다.” 그러나교인들에대해정부가 더 가혹한탄압을한 걱정스러운일주일이지난뒤에나는같이가기로했다. 몇 년 동안매주모 던월요모임은회원자격과모임장소가유동적이었 다. 미국외교정책에서인권부분이빈약하다는사실에분명한관심을가지 고있는돈 프레이저의원에게보내는편지에쓸적절한문법에 대해논쟁을 하고있을때, 마티와 나는도착했다. 이것이내게매우전복적으로 들리지 는않았다. 다소긴 토론과최종적인합의를본 이후, 다음토론주제인학생 구속자들에게 내복을 전달하는 방법에 대한 또 다른 긴 토론이 있었다. 이 “ 위험한사람들”에 대한경계를늦추며내가의도적으로지루해하고있었던 가? 거기에는미국인캐나다인, 장로교인과감리교인, 신부들과선교사들과 예비선교사로구성된대부분기혼인 12 명정도가있었다. 그날밤 모임을 초대한 사람은 부드럽게 수염을 기른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뉴욕주 서부지역에서온장로교목사인랜디라이스와그의아내 수
다. 수는모임장소를드나드는학교다니는아이들 4명의어머니이자사회 복지사 다. 수가우리에게남편이구속되어지금떨어져사는한국인부부 인 이웃이야기를했다. 신학대학교교수인남편은불복종에대한신학적인 도덕성을물어본학생에게다음과같이대답했다.“ 때로는그것이가능할수 있다.”이대답으로그는 2년징역형을선고받았다. 
이야기가 구속자들의요구사항으로바뀌었다. 셰익스피어와엘리어트 전 집을 요구한 구속자도 있었다. 월요모임회원들이 도우려는 사람들은 도대 체 어떤류의 범죄자들이란말인가? 19 5 0 년 내 누이 로리아가 나에게 엘 리어트의전집을크리스마스선물로주었다. 나는한국에그 책을가져왔고 여전히 그것을 소중히 여겼다. 19 6 7 년 어린 나이에 암으로 죽었기 때문에, 나는누이의 과서명도 소중히여겼다. 그러나엘리어트의책과같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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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있는범죄자들과좀 더가까워지고싶었기때문에, 나는 스스로소중한 장서를기증하겠다고말했다.
매력적이고신중한라이스부부도, 모임에참가한그 누구도한국에서벌 어지고있는 일을해결하는방법을알지못했다. 나는그들에게서내가느끼 는 것과똑 같은좌절된 근심을 보았고, 그것이나에게는 팔에총알을 맞은 것과도같았다. 난미치지않았다! 이들은내가전형화했던“ 공산주의자들의 점조직”이아니라, 오히려착한일반인들이었다. 그들은나와마찬가지로이 미친상황에대응하고, 그것에관해이야기하고, 무엇을할것인가를이야기 하고있다. 그리고그들은웃고농담을하며서로에게용기를주기도했다. 나는이 월요모임에더 참석하기로결심했고그 다음주에엘리어트의책 을 가져왔다. 그것은 나를 이“ 전복적인 점조직”에 어느 정도 묶어주었다. 즉, 그 모임은 나와 같이, 좌절하고 분노하고 거의 무기력하지만 무언가를 하려고시도를하는사람들이라는느낌을주었다. 그것은마침내알콜중독 자모임에가서자신과같이고통받는동료들을찾은알콜중독자와같았다. 나는 다음 주에 다시 참석했다. 이번에는 모임이 20 대 후반 감리교 신자 부부인 루이즈와 버치 더스트의 집에서 있었다. 버치는 최근 몇 달 동안의 항의집회에서 연행된 최초의 선교사라는 예를 얻었다. 연행은 그에게 겁 을 주어다시는 이런일을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그렇게 되지않 았다. 테네시주출신인 작은체구의금발인루이즈는처음에는일본에있는 교회에서일했고, 미국으로돌아가“ 버치”라는별명을지닌전형적인서부인 과는어울리는않는신사적이고사려깊은콜로라도출신의남성을만났다. 나의 참석으로 그 모임에는 천주교인의 참여가 두배로 늘어났다. 우리는 실종되거나, 비 경찰에 감금되어 육체적 위해를 당한 학생들에 대한보고 를 더 들었다. 학교는학생활동가들과자유롭게발언하는선생님들을쫓아 내라는압력을받고있었다.
다음월요모임은연세대학교교정에있는서구양식의석조로된 큰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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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렸다. 연세대학교는명문대학으로성장한개신교학교 다. 수와랜디, 루이즈와 버치, 그리고나와마티등 십여명 정도가 19 7 3 년의빌리그레이 엄을능가할것을약속한 단체에서온 대표인사를크고통풍이잘되는 집에 서 만나접대했다. 우리앞에나타난강력한힘을지닌외판원같은이 젊은 신도는 성령강림절 이래 가장 다국적 종교 행사라고 선전한 엑스플로7 4
(Explo ’74 ) 의 주창자 다. 엑스플로74 는 8월에 한국정부가 종교의자유를 권장하고있다는긍정적인증거를제시하기위해서울에서개최될예정이었 다. 너무도많은종교지도자들과교수들과기독교학생들이감옥에수감되 었기때문에그해에는더많은증거가필요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 C ) 의 창시자로유명한빌 브라이트가엑스플로74 를 개최하기 위한준비위원회를파견했다. 그해5월 어느월요일 저녁에, 옷을 잘 차려입은 얼굴이 빛나는 젊은이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행사가 계획되고 있는지를이야기했다. 우리의계획은그의확신을약간누르고정부가그행 사를 어떻게 조작할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젊은 낙천가는“ 정부에대해서는, 우리는로마서13 장 1절을따를 것입니 다.”라는허황된 답변을하 다. 마티와나는서로를쳐다보았다. 천주교신 부들은장과절로성서를 인용하는데 익숙하지않았다. 그것은개신교주일 학교와 여름성경학교 전문분야 다. 누군가 신부인 우리가 당황해 한다는 것을알고우리를위해로마서 13 장 1절에서사도바울의편지를인용해주었 다“ 모든정부는하느님에게서나왔도다. 너의정부에복종하라.”
“ 그것이 당신들이 말할 모든 것입니다.”라고 빌 브라이트의 사도는 주장 했고, 학교공간, 대회장소까지사람을운송하기위해대여해준 버스, 군대 텐트와 취사시설과 같은 정부의 관대한 원조를 계속 즐겁게 설명하고 있었 다. (만약로마군인들이그런원조를했더라면, 성령강림제는더욱더큰행 사 을것이다.) 
리한젊은이와그가인용한 성서구절이내 마음속에 맴돌았다. 며칠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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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김종필국무총리가기독교행사에서똑같은성서구절을인용하면서“ 이 말은 정부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죄악이라는 뜻입니다.”라고자신의 의견을 덧붙 다.
 
따뜻한 봄날, 나는내가해야하는것보다 적게내 교구의섬들을방문했 고, 더많은시간을서울에서보냈다. 내가연례쥐잡는 날을알리는포스터 라는시각적이미지에충격을 받은것이바로 5월 초 서울에서 다. 정해진 날에모든국민이 하나로일어나쥐들을“ 죽일”것이다. 올해의포스터에는 쌀자루를 갉아 먹는 털이 복실복실하고 통통하고 이가 긴, 눈이 예리한 쥐 가 있었다. 나는 그 운동에 반대하는 것은아니지만, 쥐처럼늘어나는 나의 새로운 걱정과 좌절감에 대해 쥐잡기 운동처럼 하나로 묶을 수단을 가지길 원했다. 
나는 다른 섬에 있는 동료 신부인 벤 즈베버에게 쥐 포스터에 대한 나의 어리석은생각을말했다. 나는털복숭이쥐 위에더고집불통인정부지도자 들을붙여넣는것을상상했다. 놀랍게도,“ 우리그렇게그려봅시다.”라고벤 이 말했다. 벤은 키가 작달막하고 정력적이고 원기 왕성한 멈출 줄 모르는 남자 다. 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피곤해지곤 했다. 쥐 포스터에 대한 나의 단순한언급이벤을움직 고 신문을넘기면서적당한사진들을가위질해서 깜깜한밤에풀통으로무장한채나를인천거리로데리고나갔다. 우리가처음멈춘곳은가장가까운경찰서 다. 경찰서의임시화장실로 가는컴컴한 옆문에 쥐 포스터가있었다.“ 누가 가까이 오면술취한체합시 다.”라고내가제안했다. 그러나뻐드 니가난 쥐의얼굴에풀을바르고경 찰청장의사진으로 붙이는 데 불과일 분 밖에걸리지 않았으며, 우리는재 빨리 그곳에서 번화한 사거리에 있는 주민 게시판쪽으로걸어갔다.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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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우리는모든반정부인사들을공산주의자라고비난하는조작의배후에있 는전 법무장관이자현중앙정보부부장신직수의사진을붙 다. 벤이붙이 고있는동안차량의불빛들이그를비쳤다.“ 소변을보는척하세요!”라고숨 어 있던가로등뒤에서 나는재빨리속삭 다. 벤은소변을 보는척하지 않 고 계속 사진을 붙 기 때문에, 우리는 재빨리 달아나는 대신에 그가 일을 끝낼때까지기다려야만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직도 붙여야 할 인사들의 사진이 있었다. 도심으로들어가는주도로를따라새롭게칠을한 벽돌담에포스터 가 있었다. 그도로의끝 부분은이 늦은시간에아스팔트작업을하고있었 다. 길을따라흰 종이로만든중국등들이걸려있었다. 최근몇 주 동안경 찰이인천지역상점의간판과외양을강제로재정비하고다시칠을하고있 었다. 그이유는 쥐 잡는날 포스터를 붙이기위한것이아니라, 다음날 아 침위대한기술적, 항해적, 상업적인진전인인천항의새로운수문의개장식 을빛내기위해 박정희가참석할예정이었기때문이었다. 벤과나는그 전에 제대로 붙지않은 쥐 포스터를 점찍어 두었다. 한밤중에 접근하여 포스터를 벽에서떼어내어그것을등으로장식한대로로가져왔다. 얼마떨어지지않 은 곳에 증기 롤러와 아스팔트 포장을 하는 일꾼들이 있었다. 우리는 새로 칠한붉은벽돌담가장자리를따라갔다. 우리손에는풀과대통령사진이아 니라 그의 두뇌인 김종필 국무총리의 사진이 있었다. 빠르게 그리고 대충, 우리는 남은 풀을 칠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그것을 새로 칠해서 반짝거리는 붉은벽돌담에단단히 눌러붙 다. 서서 우리의 작품을 감상할 시간도 없 이, 우리는서둘러달아나통금전에주교관저로돌아왔다. 다음날, 벤은새벽배를 타고섬으로 돌아갔고, 나는 도심을 거닐면서 세 지점을점검했다. 임시화장실로가는가장왕래가많은길에 붙인경찰청장 의사진이여전히그 자리에있다는것이놀라웠다. 중앙정보부부장의사진 도분주한거리 모퉁이에여전히붙어있었다. 그러나국무총리포스터는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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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이는붉은 벽돌담에서떨어져있었다. 단지종이자국만이붉은칠을망쳐 놓고있었다. 나는가까이다가가서우리가붙 던곳 앞바닥에찢어진포스 터가있는것을보았다. 찢어지지지않은국무총리사진이조심스럽게쓰레 기더미 위에 놓여 있었다. 마치 취조를 기다리고 있는 범죄자의 증거 같 았다.
나는 뒤로물러서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평상복을 입은작달만하고 체구 가 건장한 사복경찰 두 명이나를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태연한 척하며 걸 어갔다. 그들중한명이 따라왔다. 나는다른길로가는 짧은골목으로방향 을 바꾸어신부복을입었음에도불구하고골목을급하게도망쳐나와, 그순 간 감사하게도 하느님이 보내준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주교 관저로 안전하 게 돌아왔다. 아무도그 숙소를 침입하지 않았고 한두시간정도휴식을 취 한뒤내교구섬으로돌아가는배를탔다.
 
민주주의 쇠퇴와 인권침해, 학생시위의주장이 박 정권으로 하여금 학생 시위를공산주의자들의선동으로몰아붙이게하 다. 이로인해학생들에게 박 정권을전복시키려고직접적으로학생들을배후에서 조종했다는32 인의 용공분자로 구성된 모임인 소위“ 인혁당”사건이 조작되었다. 이32 명은 불 시에차에실려당국에연행되었다.
인혁당관련자들의가족들에대해 상상해보라. 19 7 4 년 5월 어느날 아침, 여러분이그날가족과헤어진한여인이라고상상해보라. 남편이집을나서 기 전에, 낯선사람이찾아와서남편에게친구가어디에사는지말하라고요 구하고있다. 그는 그 낯선사람과집을나가아침식사를 하러돌아오지 않 는다. 그날 밤에도 돌아오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비 경찰이당신의 작은 집을철저히수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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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서울과대구의32 가구에서목재하치장십장, 목욕탕주인, 서점점 원과고등학교어선생님의부인들에게벌어진일이다. 그부인들은교육 을많이받지도 않았고, 교회나사회단체의회원도아닌가정주부 다. 그들 은“ 아무말도하지마시오, 그냥 조용히 있으면남편들에게 아무일도없을 것이오.”라는말을들었다. 가택수색은소득이거의없었다. 한집에서야당 선거운동문건과다른한 집에서교육부장관의승인하에출판된『러시아혁 명』이라는책 한 권이나왔으며, 세번째집에서는 가게에서 공개적으로판 매하는트랜지스터라디오가 나왔다.( 이 모든물건들은그 사람들이공산주 의자라는증거로채택되었다.) 
가택수색 3주뒤에부인들은라디오를통해남편들이정부전복음모로재 판을받고있다는 것을 들었다.“ 정부를 전복하다니?! 내 남편은 만일정부 를 준다고해도무슨일을해야할지모를텐데요!”라고놀라서울부짖는다. 아이들이 싸워서 헝클어지고 골이 나거나 울먹이며 집으로 온다. 학교에서 는 심지어선생님도그 아이들의아버지를지칭하면서범죄자들과반역자들 임이 폭로되었다는이야기를 한다. 이웃도 피하기 시작하지만 어디를 가든 가까이따라붙는사람이있다. 
8월 초에부인들은32 명의재판에참석하도록군법재판소방청권을받게 된다. 법정으로들어가기 전“ 한마디라도 하거나 울거나 감정을 내비치면, 법정에서퇴장당하게될것”이라는말을 듣는다. 주위에는똑같이놀라고당 황하는31 명의부인들이있다. 마침내군경에에워싸여, 법정으로들어서게 된다.“ 재판”이 끝났을 때, 모두 유죄가 선고된다. 재판은 종결되고 퇴장하 라는말을듣는다.
반시간 전만해도서로 몰랐던부인들이서로끌어안는다. 바깥에는태양 이 잔인하게 비친다. 서로 헤어지고 싶지않다. 모두 함께 다방에 간다. 몇 명은다시만날약속을 정한다. 다음날아침라디오를통해왜 어제모의재 판참석이허락되었는지를알게된다. 정부가남편들이비 재판이아닌“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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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재판을받았다고발표했다는보도를듣는다. 남자들이집에다시찾아와 다른부인들과멀리하고조용히있으면모든일이잘될것이라고말한다. 우리월요모임회원중 한 명인서부 펜실베이니아출신의감리교목사조 지 오 은 노동자들의 전도사이며 개신교 도시산업선교회의창립자이다. 9 월 어느날 밤, 조지는신원을밝히지않은어떤여인으로부터다음날 만나 자고부탁을 하는전화를 받았다. 다음날현관문을 열자한 명이아닌여덟 명의부인들이왔을때그는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들은자기들이일곱사람 의 부인들이며 한명은 어머니라고 소개했다. 그들은32 명의 유죄판결을 받 은인혁당관련자중여덟명이었다. 조지는차례대로그들의이야기를들었다. “ 경찰이 우리에게 조용히 있으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계속 말하지 만, 사형선고에 대해 무엇이 잘 된다는 것입니까?”라고 한 사람이 말했다. “ 3학년인 제 아이는 더 이상 학교에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아버지가범죄자라고아이를놀립니다.”라고다른사람이말했다. 조지는그 들이왜자기를찾아왔는지를물었다.“ 우리중기독교인은없지만남편들에 게 치금과깨끗한옷을전하려고우리가구치소에가서만난여성분들대 부분이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중목사님아내몇분이 당신을만나보라 고 우리에게말했습니다. 두렵지만우리가이제잃을것이무엇이있겠습니 까? 우리가바라는것은목사님께서진상을독자적으로조사해달라는것입 니다.”40 대의통통하고자세가바른우 여사가 경계하는듯한표정으로 차 분하고교양있는목소리로말했다.“ 제남편은목사님처럼조용하고학자같 은사람이지혁명가가아닙니다.”
 
우리 형제기독교 교회들은 스스로를 맞서다, 저항하다라는 의미의 프로 테스탄트라고 부른다. 프로테스탄트각 종파는 가톨릭에 대해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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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함께 정부에 대해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가톨릭 교회는 우리를 앞서나갔으며정의에대한그들의소명을강화했다.“ 여러분은하나의공동 체이며 항상박해에 저항하는 바위 습니다. 우리는 그보다 작은 소집단이 며게릴라적인활동에참가하고있습니다.”라고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대표 가김수환추기경에게말했다.
게릴라는작은전쟁을뜻한다. 개신교도들은서울도심의종로에있는7층 짜리 기독교회관에서목요기도회를 필두로 작게 시작했다. 한두 개의 책상 주변에서함께기도하다가, 점점모임이커져회의실로옮겼다. 19 7 4 년가을 경 그들은매주목요일오전 10 시에로비바로위의 2층에있는 50 0 석의강 당을예약해야만했다. 전투경찰이로비문 밖에배치되었고사복경찰은로 비를 돌아다녔다. 투옥된 교인들의 부인들과 구속 학생어머니들이 구속자 들의최근 소식을 들으며 늘어난 지지자들과 함께찬송하고 기도하는 장소 에정보원들이투입되었다.
11 월 첫 번째기도모임에서월요모임회원인조지오 목사가기도할차 례가 되었고, 그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오 목사는 하느님은 권력자들이 소위인혁당, 특히사형선고를받은여덟사람에게공개적이고공정한민간 재판을 하도록 주관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는 인혁당 사건을 조사했으며 여덟사람이무고하다는것을확신했다.
만일인혁당사건의민감함에대한조금의의심이라도있었다면, 그의심
은그날로사라졌다. 조지는끔직한중앙정보부본부인남산으로끌려갔다. 조지는월요모임의다음회동에서우리모두에게설명했다.“ 기도모임후 목요일저녁에다섯명의 남자가집으로와서아주거칠고무례하게나를지 프차에태워서데려갔어요. 그들은나를겁주려고했고, 실제로겁을주었어 요! 오랫동안반복해서취조를한 뒤, 아래층으로데리고내려가한 시간동 안 나를향해소리를지른고릴라같은사내앞에세웠어요. 그는 공산주의 를광적으로증오하는사람이었어요. 긴밤 내내고함을지르면서나를 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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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그런다음또 다시나에게고함을질 어요. 마침내, 다시는공개적으 로 인혁당에대해이야기하지말라고명령했죠. 그들은손님으로있는나라 의 법체제에내가심각하게개입한것이라고말했죠. 다시는인혁당에대해 기도하지말라고한 뒤에풀어주었어요. 나는그들에게그 금지에는개인적 인 기도까지 포함되는지 물었어요. 그것 때문에 당혹해하면서 약간논쟁을 했지요. 그들중누구도 개인적인기도가무엇을뜻하는지모르는것같아서 논쟁을그만두었죠.”
조지 오 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조치는 다른 사람들도 결단을 하게 만들 었다. 진정으로자비로운행위에대한예수의우화를 사건에빗대어서, 인혁 당은“ 너희가내형제들인이 가장작은이들가운데한사람에게해준 것이 바로나에게해준것이다.”라고말했다. 
한국목회자모임과개신교도들도같은결론을내렸다. 비록그것때문에 가벼운 죄목으로 구속된 사람들을 석방시키는 것을 어렵게 만들지라도, 그 들의 기도와 지원에 인혁당 관련자들도 포함시켰다. 우리 월요모임 회원들 은우리가먼저그런결정을내린것을자랑스러워했다. 
 
19 7 4 년 11 월첫월요모임에서조지의설명을들은뒤, 우리로인해사건이 아주빨리진행되는것같아서우리의 원한의장인 일리노이주 락포드출 신 린다존스가우리에게신중할것과주의를 기울일것을요청했다. 린다와 그의남편데이브는장로교회에서2년제개척수련기간을곧 마칠예정이었 다. 대개, 린다는모임을위해목록을작성해왔다. 선의의노력에형식과방 향을 제시하기 위해, 린다는“ 우리는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주제를 정했 다. 그리고서류들을펼쳐놓은바닥에앉아서“ 우리가해야할 일들을 나누 어보았습니다. 먼저미국정부와우리의관계를살펴봅시다.”라고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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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는우리가스스로를좋은사람으로느끼도록만들면서우리의주의를 집중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를 외교적 인식을 요구하는 국민 처럼느끼게했다.“ 포드대통령은한달이내에한국을방문할것입니다. 우 리는그의수행원중누군가와 접견을요청하는편지를썼습니다.”라고린다 가 말했다. (우리 편지에는90 명의 서명이 있었다. 우리 모두의 선교기간을 다 합치면1, 0 0 0 년이넘었다.)“ 3주가지났지만아직답신이없습니다. 우리 의요구서복사본이미국 대사에게전달될것입니다. 그를만나우리의요구 를 설명하기위해 5명으로구성된 위원회를꾸릴것이며, 그위원회는지난
6달동안우리가목격한것을설명할것입니다. 그회동이다음주입니다.” 자세한설명없이린다는 재빨리두 번째안건인“ 노동문제”로 옮겨갔다. “ 예상했던대로조립라인에서현미경작업을하고있는젊은여성들의눈의 피로와시력손상에대한의료검사에대해 1년동안우리가조사한결과를회 사에서고용한의사들이모두거부했습니다. 우리는우리팀이수집한자료 들을신뢰하며, 전자기계와컴퓨터회사들의본부가있는도시에계속이자 료들을발송할것입니다.”라고린다가말했다. “ 마지막 세 번째안건은학생들과 관련된것입니다.” 여기서린다의목소 리는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감옥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 지난4월 연행된뒤 많은사람들이고문을당했다는결정적인증거가있습 니다. 학생들은학교에서제적당하는아픔속에다시는정권을비판하지않 을것을약속해야만했습니다. 그런 약속을받아내기위해각 학생들의저항 에 따라, 말에서부터 육체적인 처벌에 대한 협박, 실제 고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완력이 행사되었습니다. 우리는2백 명이 감옥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모두가아주잔인하게취급당하지만압력에굴복하지않고있 다고추론해야할것입니다.”
린다는 그녀의 과제를 완수했다. 그녀는 우리의 산만한 보고와 생각들을 질서정연하게만들었으며,“ 저는여러분들과함께보낸시간이끝나고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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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뒤에고국으로돌아가야하는것을유감스럽게생각합니다만, 우리는미 국에돌아가서도이런일을계속할것입니다.”라고끝을맺었다. “ 하느님의 나라”인“ 그곳”에 돌아가서도“ 일들”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 이 우리에게좀 더 분명해지고있었다. 일주일뒤, 포드대통령에게쓴 우리 의 편지와 관련해 우리대표단이 미 대사관을 찾아갔을때, 우리들의 순진 했던여러가지언동이사라졌다. 필립하비브의후임으로최근부임한리처 드 스나이더가 우리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그는 우리를 접견실로 안내했으 며, 그곳에는 권력자들과 함께하며 하느님의 의지와 미국 유권자를 일치시 키는경향이강한다섯명의다른전형적인기독교인들도벌써와있었다. 남산의중앙정보부졸업생인조지오 목사가우리의대변인으로선출되 었지만, 그가 이야기를 하기전에대사는 무엇을 마실건지 물어보았다. 조 지의차례가되어박 정권하의정치범들의수와상황에대해이야기하기시 작하자, 우리의대사스나이더가자리에서일어나땅콩을돌리기시작했다. 조지는화를내는사람은아니지만, 다음날월요모임에서이모든 일을설
명할때는마음의평정을잃고말았다.
다가오는국제적인 사건에 대해우리가할 수 있는일이거의없는것 같 아 약간 절망적이었다. 새로 임명된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은 모든 사람을 처형하는정권을 미국이 지원한다는서신을 가지고 19 7 4 년 11 월 말 한국을 방문했다. 커다란쌍둥이포스터를세웠다. 우호적인미국과한국대통령의 초상화가서로미소짓고있는것으로배치되었다. 그것을본다는것이고통 스러웠다.“ 환 , 미대통령각하, 제랄드포드”라는나무와종이로만든아치 가세워졌다. 태극기와성조기가모든가게창문에걸려있었다. 그 주 월요모임은포드와키신저의 방한 4일 전에있었다. 포드가아니라 키신저가박정희정권과의대화의수준과의제를정하는것 같아우리는경 각심을가지고토론을했다. 비록그 단어가기독교인들을감옥에가두고고 문하는것을포함할지라도, 헨리키신저가알았던유일한 단어가“ 안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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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것을우리는알게되었다. 헨리키신저는한국인들이미국인들에대해 지녔던많은좋은감정들을다 소진시키고있었다. 그좋은감정이란대부분 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살면서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운 하 면서일구었던것이다. 90 년동안 이룩한이 훌륭한업적들이미 외교정책의 소위“ 긴급한국가이익”을 위해소진되고있었다. 내가새롭게이해한바로 는, 미 대사관은CI A 와 미 통상부의 결합체 으며한국인들에게는전혀관 심이 없었다. 포드와 키신저는 그들의 국빈방문 기간 동안, 사람을 감옥에 쳐넣고고문한사람들과악수를나누며공산주의와의전쟁에서미국의지지 를재확신시키고, 미국기업수익에대한훌륭한풍토을존중하며다시 돌아 가는 것 같았다. 광고에서 보여지는 돈을 벌기 안전한 장소인 서울과 미국 역시주장하는것처럼공산당이위협하는서울사이에는모순이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의 침략이라는 공포는 나약한 식물처럼 물을 주고 돌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공포감이 많은 일들의 이유가 되 었다.
 
19 7 4 년 11 월 26 일, 뉴욕 타임 지가우리 모두에게 즉각적인 향을 끼칠 기사를실었다. 3단으로된 기사의제목은다음과같았다:“ 서울에서판결받 은 재야인사들, 간첩으로유죄판결”,“ 신뢰성부족한유죄확정”,“ 현중앙정 보부부장 10 년 전 기각된사건에서핵심역할.” 그기사가 실린지 4일 뒤, 한국의출입국관리사무소가조지오 에대한추방절차를 진행하기시작했 다. 조지오 은처음으로인혁당관련자부인여덟 사람의이야기를들었고 그 뒤 공개적으로유죄선고받은남편들에대해민간법원에서공개재판을 할 것을 기도하 다. 조지는 미 대사관 직원으로부터전화상으로 한국정부 는 그가 다시는 한국의 헌법을 비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한국에 머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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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허락할것이라고들었다. 미국대사관직원은조지가양심을버리고복 종하라고부추기는한국정권의중개자 다. 조지는감리교선교사들이누리 는 특권인4년 비자를가지고있었다. 법적으로그는 3년 더 한국에머물수 있었다. 그러나그는그들의요구를받아들이지않았다. 수요일에조지교회 의 간부들이 모임을 소집했다. 나는그와함께걸어갔다. 문에서인사를 하 고 크리스마스4일 전에오랫동안방치된내 교구섬에있는몇몇교회들로 향했다.
12 월 14 일토요일, 라디오에서“ 오 목사님이오늘 추방당했습니다”라는 뉴스를들었다. 배를기다리는것외에아무 것도할 수없어서, 기다리는동 안, 나는지는태양을뒤로한 채 시골길을걸었다. 부드러운겨울저녁, 별 이 하나둘씩뜨는것을바라보았다.“ 오 목사님이떠나셨습니다. 그들이 목사님을몇분전에비행기에탑승시켰습니다”라는말이흘러나올때 주위 는아주캄캄해졌다. 
나는조지가헛되이추방당하지는않았다고생각했다. 이제그 사건은국 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인혁당 관련자들은 쉽게 석방되지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그들의목숨은더안전하고, 광명에드러날것이다.
 
모든 반정부 인사들을 통제한다는 것은박 정권이 국내 언론을 통제한다 는 것을의미했다. 그런통제는 쉽지않았다. 19 7 4 년 10 월 26 일 자 몇 개의 한국신문에“ 양심선언”이 실렸다.“ 우리기자들은압력에굴종했던것을 부 끄럽게 여깁니다. 이제부터저희들은 명령받은 대로가 아니라 일어난 사건 그대로뉴스를보도할것입니다.”한국신문들중, 동아일보는오랜기간동 안 독립언론으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한국 강점기에 통치자들 이 싫어하는 보도때문에 동아일보는6개월 동안폐간되었다. 19 3 5 년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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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후, 동아일보는항상 6개월 분의필수품을 비축해 놓았고, 최근“ 양 심선언”을게재하고정부로부터계속비난을받은뒤에는농성을준비했다. 저장고를 비축하면서, 동아일보는 예상되는 손실을메우기 위해 새로운 구독신청에 박차를 가했으며, 판매를 늘릴 신문팔이 소년들을 추가로 고용 했다. 12 월 마지막주에예상대로신발가게와식당광고에서부터제너럴모 터스와포드사에이르는크고작은광고주들이광고를철회했다. 동아일보는광고가있었던그 자리에큰 여백의흰 공간을그대로발행함 으로써대응했다. 일주일만에흰여백의공간에에워싸인이 박사의엽서크 기만한감기치료제광고만이유일하게남았다. 당국은 광고료를미리낸이 박사의광고까지는취소시키지못했음이분명했다.
그런뒤 반격이시작되었다. 민주주의회복을위한한국천주교사제단이 구원의행진을한 최초의단체중에있었다. 그들은전면광고를내서7월 이 래교회에서발표한선언문들과성명서들중 가장좋은것들을실었다. 이전 에는 감추어졌던 모든 문서들이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었다. 더많은 광고들이들어오기시작했다:“ 동아일보여 원하라!”“ 표현의자유 를 지키자!”그리고곧“ 나는이 박사의감기약만마신다.”라는광고도있었 다. 하루하루가지남에따라, 광고가더과감해지고, 더재미있고더 아이러 니컬했으며우회적이었다. 일부는익명이었으며대부분이 광고주의 이름이 있었다.“ 만일 동아일보가죽는다면, 이나라도함께죽는것이다!” 또다른 광고는 내용은 온건했지만 광고국장을 중앙정보부에서4일 밤낮을 취조를 받게한“ 대한민국국군장교”라고과감하게서명된광고도있었다. 동아일보에 의해, 동아일보를 위해벌어진 언론자유를 위한 용기있는 투 쟁은 이 책의 다른 장에서도 다루어진다.( 특히 메리온 커런트의 을 보시 오.) 내가여기에서함께나누고싶은것은몇가지개인적인이야기들이다. 나는신문광고를 즐겨읽기는 하지만 미군도서관에서 섬으로 가져갈 책 들을고르던어느날까지는광고에 참여할소명을느끼지는않았다. 내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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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저리책을고르고 있는동안음악테이프를 틀어놓았지만, 한국운동가 요인“ 승리”라는한 구절을알아차릴 때까지그 멜로디를의식하지않고있 었다. 하지만그곡에는 어로된 가사들이있었는데, 그것은“ 우리승리하 리라” 다. 잠시 뒤에나는힘차고격정적인익숙한 목소리로“ 제게는꿈이 있습니다.”라는연설을시작하는것을들었다. 그날은마틴루더킹 탄생기 념일인1월 15 일이었다. 그는46 세가될 것이었다. 그보다6달 어린나는45 세 다. 킹의생일이틀뒤에조지오 은 46 세가될것이었다. 그 이후한 차례이상, 나는 무엇이 나로하여금행동하게했는가라는 질 문을받아왔다. 부끄럼없이잔다르크를인용하면서, 나는대답하 다.“ 저는 제목소리를듣습니다. 그목소리가제가할일을말해 줍니다.”그리고그것 은 사실이었다. 나는목소리들을들었고 그 중 하나가 마틴루터킹의목소 리 다. 19 7 5 년 그의탄생기념일 오후에, 킹 목사의 목소리가 나를도서관 에서불러내동아일보로보냈다.
나는 신문사 건물의 위치를 몰랐지만 택시가 단단한 노란벽돌로 된 4층 건물이있는서울도심으로나를데려다 주었다. 그 건물은 두 개의교차로 사이에있는모든공간을 차지하며, 서 있는곳에대해강한자부심을 가진 것처럼보 다. 나는건물로올라가서내가 생각한대로광고를내려고기다 리는사람들의긴 줄 뒤에섰다. 나는유일한외국인이었으며, 곧누군가나 를 안으로 데리고 가서차를대접했다. 차를대접한 검은얼굴의 유쾌한 남 자가내게매일광고를실는사람들의 줄이더 길어진다고이야기했다.“ 급 우들로부터푼돈을수집한학생들, 잘차려입은 여성분들, 노동자들이있으 며, 모두들미소지으며행복해보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것은19 7 2 년계엄령 선포이래대중적인침묵의벽에생긴 최초의틈입니다.”라고자랑스럽게그 는말했다.“ 저희는한국의다른모든신문의질투의대상이되었습니다.” 나는사람들에게어떻게하여광고를싣게되었는지말했다. 오늘이마틴 루터킹의생일이며그와조지오 그리고 나는모두같은해에 태어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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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다. 그들은 그때까지 내가시노트 신부라는 것을몰랐다. 그들이그 사 실을 알았을때, 약간 흥분했다.“ 저희가 사진을찍어 광고에 실어도될까 요?” 전혀 불쾌해하지 않으며 나는 당당하게“ 그렇게하시지요.”라고 말했 다. 다음날광고는내가돈을낸 것보다두배가컸으며, 사진속의내 얼굴은 흘끗거리는 술에 취한 모습이었고, 커다란 검은 씨의 오 과 시노트라는 이름이있었다. 그것이나를다채롭고약간화려한사람으로생각하는더엄 격한동료선교사들중 몇 사람에게공격수단을주었기때문에, 약간허풍을 떤것을후회했다. 그러나동아일보에참여한첫느낌은좋은 기억으로남았 으며경찰국가저널리즘에대한나의교육이시작되었다. 
 
나는「월간동아」에 인혁당관련자들의부인에대한 을썼다. 그것은출 판되지 않았으며, 나에게그 을부탁했던 황 선생이내가쓴 을좋아하 지않았다고추측했다. 잡지사로가서어떻게되고있는지알아보는좋은구 실이되었다. 건물로다시들어가서나는반정부신부가쓴 인혁당기사뿐만 아니라, 잡지자체가전혀인쇄되지않았다는것을곧 알게되었다. 이작은 잡지의 지난호들로가득찬 작은사무실에는한 여직원만 있고텅 비어있 었다. 용무를 말하고발행인을만나길 요청하자, 그녀는“ 아, 예. 바로여기 신부님의 이 있습니다. 황 선생님은 그것을 출판하길 간절히 원하셨습니 다. 황선생님이신부님을만나면아주기뻐하실겁니다.”라고말했다. 황선 생이 인쇄실을 점령하고 있는 20 명의 농성자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경비를통과해서인쇄실로가는방법을들었다.“ 신부님은미국인이라 서 경비들이지나가게해 줄 것입니다. 지금까지4일간황 선생님과다른19 명이인쇄기를붙잡아두고있습니다.”라고그녀는자랑스럽게말했다. 나는편집국으로 가는길을 따라갔으며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이 경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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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통과해서 3층편집국으로가는층계를올라가서황선생을만나러왔다고 말했다. 20 명이 2층을봉쇄하고 단식을 하기로 결의한지4일째라고 자랑스 럽게기자가 말했다. 그들은 내가온 바로그 방향으로있는메시지통로를 통해아래로 공수된 보리차로 생존하고 있었다. 그 기자가 몸을숙여서, 바 닥에있는관에입을대고방문객이 찾아왔다면서 황 선생을 불 다. 그가 일어서서마치나에게광의자리를제공하는것처럼내쪽으로왔으며, 나 에게품위없이엎드리는자세를 취하고기다리라고했다. 나는예의범절을 버리고납작 엎드려서눈을구멍바로위에 대었다. 작은구멍으로상기되고 정중하면서 아주기뻐하는 황 선생의 얼굴이 보 다.“ 안녕하세요, 황선생 님. 뵙게되어서기쁘군요!”
“ 신부님, 의게재가지연되어서죄송합니다만, 아시다시피저들이저희 잡지를폐간시켰답니다.”라고그가말했다.
나는이제이해가되었다. 광고국에있는친구들이일시적으로넘긴역경 이 여기편집국에서는생존의문제 다. 이사람들에게, 신문을찍어내는것 은 생계를유지하는것 이상이었다. 나는황 선생에게행운을빌었으며, 그 는 더 많은서양사람들이올수록즉각적인탄압의기회가줄어든다는전에 자주들었던말을 반복하면서다시방문해줄것을 요청했다. 나는편집국의 어둡고좁은 층계를서둘러내려와내교구 섬으로가는그날의마지막배로 향했다. 
 
마틴루터킹의생일이자동아일보사를처음방문한지 두 달 뒤인3월 15 일 다시방문할 기회가 있을것 같았다. 서울에는경찰의 감시를 받지않는 곳이없었다. 내가동아일보건물에도착했을때, 기자들중 한명이내게 다 가와서아주다급하게3층 편집실로데려갔다. 우리는내 친구황 선생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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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해20 명의농성자들이단단히봉쇄한2층기자실을지나재빨리올라갔다.
3층에는일하는사람이아무도없었다. 50 명의기자들이“ 해고된네 명의 기자들이복직될때까지”편집실을점거하고있었다. 매우감동적이었다. 비 록 언론의자유를위한목소리를막는것이효과가있는지완전히확신하지 는 못했지만, 그것은나에게훌륭하고도전적인행동으로보 으며나도도 전적인분위기에젖었다. 나는비농성자들이아무일도없다는듯이다른곳 에서여전히신문을인쇄하고있다는것을알았다. 그들은광고란을여전히 그대로운 하면서똑같이언론자유운동을하는체 하면서신문을내고있 었다. 그들이좋다고할 때까지 더 이상광고를 게재하지 않겠다고 농성중 인 50 명에게약속했으며그들대부분이찬성했다.
다음에그들은 나를 4층에있는동아라디오방송국으로데리고갔다. 당 당하게건물을점령하고, 아무도일은하지않고있었다. 내가“ 시노트와즈 웨버” 광고팀 중 시노트라는 것을 알고 농성자들이 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나는동아일보광고비를지불할때 베니즈웨버에게서기금을받았으며그 는 나를 도와주었다. 단, 그의 이름 또한 광고에 게재된다는 조건에서!) 그 방에는2층에있는 20 명과3층에있는 50 명과모두대의를함께하는 12 명의 여성을비롯해35 명이있었다. 절반정도의기자들이광고국, 인쇄공에서트 럭 운전사들과 신문팔이 소년에 이르는 수백 명과연대해 경 자들과 맞섰 다. 방송장비들은 사용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경 진이 전기와 난방을 차단시켰지만, 3월중순의날씨는온화했으며농성자들은자유롭게음식, 촛 불 그리고몇 개의작은이동식난로용등유를가져올수 있었다. 그들에대 한나의존경심은그지없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고오후에 나는 지학순 주교의 사제관을 방문했다. 나는주교에게 동아일보 파업에 대해이야기했고 그는 파업에 완전히 공감 했다. 주교는만일지난몇 달 동안동아일보가없었다면, 한국국민들은정 의에 대한 교회의 입장에 대해 몰랐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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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주교가약간예외적인나의삶에지지를보내고있다는것을감지했으 며 이에감사했다. 그의멋진비서인내 친구저스틴조이스수사가일부사 람들이 내가 4월에 있을비자 심사에서 비자를 얻지 못할것이라고 내기를 걸고있다고 말했다. 그러나나는박 정권이 한 신부때문에로마가톨릭과 대립할것이라고생각하지는않았다. 내편에도많은사람들이있었다. 그날밤 내가다시동아일보건물로갔을때는, 저녁 하늘이 아주캄캄해 졌다. 건물 자체는 가로등 불빛으로 부드러운 황금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안에있는희미한그림자들을보고기뻤다. 농성자들이아직그곳에있는것 이 분명했다. 어떤감정이나를덮쳐왔다.“ 이곳이 바로내가있어야 할 곳 이다.”
내가드디어건물로들어가자,“ 경찰이쳐들어와서우리는쫓겨날것입니 다”라고이선생이내게말했다. 이선생은나를창가로데려갔다. 우리 아래 에,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는사람들처럼 모여있는 20 여명의 기원자들이 있었다. 가로등아래에는흰머리를날리는 함석헌이있었다. 퀘이커신자이 자 오랫동안정의를사랑하는한국인들의지도자 던함석헌은때로는한국 의 간디로 불렸다. 일생 동안, 그는3개의 다른압제적인 정권에 저항했다. 일본식민주의정권과북한의집단주의정권그리고이제‘ 민주적인’ 남한의 정권이었다. 거의80 세에 이르는, 항상 한복을 입는 그는 비폭력과 정의에 대한 위대한 메세지로 천주교도와 개신교도들의 심금을울렸다. 함석헌을 거기서본 것이오늘밤내가있어야할 곳이동아일보라는생각을확신시켜 주었다.
통금시간이 다가오자 기원자들이 흩어졌고, 일부는내일 아침에 일찍 다 시 올 것을약속했다. 긴 굴 같은편집실안으로돌아와서, 오래됐지만강력 한감리교성가의한구절이적힌칠판 주변에촛불을밝혔다.“ 어느민족 누 구에게나 결단해야 할 순간이 온다”는 권력자와 지배자에 저항하는 성스러 운 의무를 상기시키는 말이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합회는“ 어느민족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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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나”를그들의공식적인찬송가로삼았다. 차에실려연행된 많은학생들 이 중앙정보부의외롭고고통스러운지하취조실이나감옥에서이 찬송가를 되새기곤했다. 이제나는이방안에서동아일보의남녀기자들과함께 하면 서, 그 찬송가의 한국어 가사를 알게되었고 촛불속에서 그들과 함께노래 했다. 어두운빛 때문에노래하는사람들이학생들처럼어리고순수하게보 다.
나는7명의용감한 여성들이포함된농성단으로부터우리가건물에서“ 쫓 겨난다”는것의의미가 무엇인지알게되었다. 정부가고용한깡패들이직장 을 지키려는신문팔이소년이나판매사원으로위장하고 농성자들에게와서 시비를걸것이다. 그들은농성자들이“ 신문사를망치고”있다고비난하면서 건물을점거할것이다. 이런방식은정부의개입없이 내부의차이가해결되 는것으로비쳐질것이었다.
망보는사람들이각 창문에배치되었다. 나는2시 22 분에잠이들었다. 나 는“ 그들이 왔다”라는 고함에 깜짝 놀라 깼다. 그리고 기자들이“ 창문에서 물러나세요. 소화기를준비하세요. 불을끄십시요!”라고외치는소리를들었 다. 그런 뒤 아래층에서갑작스럽게거친소리가들려올 때까지 사방이 고 요했다. 메시지전송관의조그만구멍으로는무슨일이일어나는지알수없 었지만, 우리는울부짖는소리, 물건이떨어지는소리, 사람들이끌려가는소 리, 그리고저항하며울부짖는소리를들었다. 그런뒤곧완전히고요해졌다. 누군가“ 우리가다음 차례일 겁니다. 창문에서 떨어지십시요.”라고 말했 다. 오랜정적이고통스러웠다. 갑자기합판으로된장애물이치워지고창문 들이깨지고철망이걷혔다. 우리중세 명이소화기로침입자들에게뿌렸지 만 그것은순간의힘없는몸짓이었다. 곧억센목소리가앞에서 있던세 명 의 기자들에게 소리쳤다. 그들은 이 선생, 현 선생, 그리고 송 선생이었다. 그 남자는그들과악수를하고인사를했다. 그런뒤 그는가판책임자로신 문을살리려고이런행동을취했다고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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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요구가관철될때까지신문은나오지않을것입니다”라고송선생 이대답했다.“ 우리는신문을파멸시키려는것이아니라살리고있습니다.” 침입자들이이제열려있는층계 쪽의문으로우리를몰아갔다. 일부는카 메라를들고 일부는원고들을팔에 끼고45 명 중처음 사람들이계단으로내 려가기시작했을때, 그들은신중하게느린목소리로애국가를부르기시작 했다. 아름다운 가삿말과 음에서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실한 모든 것을 애도하는 장송곡처럼 들렸다. 남녀 모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 다. 이런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계단을 천천히 밟고내려오면서, 나는이것 을 광이라고생각했다.
나는평화롭게물러난 3층과달리위아래층에서는폭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2층에있던 20 명이트럭으로병원에실려갔다. 동이트기시작했기 때문에 4층에있던남녀는서둘러내쫓기면서구타를당했고, 한사람은 병 원에입원했다.
빌딩을되찾자, 경 진과비농성자들은아무일도없었다는듯이신문을찍 었다. 신문은다른다섯또는여섯일간지보다더 자유롭게악의없는기사 들을 쓰는 것이 허용되어, 그 비열한 항복을 일반 독자들이 알아보기 힘들 었다. 해고된동아일보기자들이건물밖에서피켓시위를했고나도동참했다. 어느 날 아침, 피켓을 든 줄에있는 작은체구의 한 남자가 내 소매를 잡고 “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제가 잡지사에 근무했던 황입니다! 신부님의 에 대해선 죄송합니다. 그은사무실에 있습니다만, 제가그 을실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말했다. 그래서나는“ 알아보지못해서 미안합니다. 마룻 바닥에있는구멍대신이렇게밖에서보니다르군요.”라고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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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5 년 4월 초 다.“ 한국에는인권이거부된사례가없다”라고박정희의 19 6 1 년 쿠데타 이래 막후의 두뇌이자 강력한 팔이었던 국무총리 김종필이 진술했다. 그는세 그룹의 조사단이 한국에 오는것을허락했다. 첫 번째는 미국하원 산하인권위원회 의장인 도날드 프레이저 의원과 그의 보좌관들 이었다.( 11 개월전에 월요모임이 문법적으로 고민을 하면서 지루한 편지를 보냈던바로그사람이다.) 국무총리김종필은프레이저하원의원을아주바 쁘게하려고노력했지만, 월요모임은프레이저에게정치범들과고문에대한 많은 1차 정보를제공한 지하실모임과늦은밤 회동을주선했다. 국무총리 김종필은 언론에서 프레이저 하원의원을“ 무례한방문객”이라고 논평했다. 김 총리에게는유감스럽게도, 그것은우리탓이었다! 월요모임때문에프레 이저하원의원은거물과의어떤모임에늦게갔다.
두번째 그룹은세계적으로유명한 국 국 방송BB C 에서왔다. 그팀에 는짙은밤색 머리카락에체구가작은바냐큐리가인솔하는촬 팀도왔다. “ 안노 도미나이”라 불리는국내 일요일저녁방송을위해그녀는전 세계 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종교적인 표현의 특징들을 조사했다. 한국정부 는 BB C 직원들이“ 한국의이야기를” 조사하고“ 보도하는것”을 허락했다. 하지만BB C 직원들이도착하기전, 국무총리는석방된모든학생들을안내 원이있는관광버스에태워“ 경제성장”을구경하기위해서울에서멀리떨어 진남쪽으로가도록명령했다. 
대법원에서인혁당 관련자들의 운명을 결정짓기 전날밤인 19 7 5 년 4월 7 일 BB C 직원들이 월요모임에 참석했다. 월요모임 회원인 윌라 커넌, 버치 더스트와진매튜스모두 유창하게말했으며, 물론한국을제외하고전 세계 에서방 된 BB C 의“ 안노도미나이”의일화에출연하 다. 상황의 조사를 허락받은 세 번째 그룹은 양심수들을 학대하는 정부들에 대한, 매우 신뢰받는 감시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 다. 덴마크의 의사인 페 터센 박사와 국변호사 브라이언 로블이 대표 으며, 그들은 정권을 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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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비난하 기때문에고문을당한한국군장성을비롯해몇 명의용감한 피해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참전용사인 이세주 장군은 페터센 박사에게 고 문의상처들을보여주었다. 로블은인혁당의(모든사형선고사건들의 경우 법적권리인) 항소가접수된것을확인하기위해4월 8일새벽에대법원으로 뛰어들어간 사람이었다. 이러한 권리에도 불구하고, 여덟 사람들은 교수형 에처해졌다. 사형은김종필이“ 어떤권리도부정되지않는다”라는성명서를 발표한 후 집행되었다. 국무총리는월요모임이 로블에게 한국에 더 머물면 서조사를하라고촉구한사실을몰랐다.
다음번 월요모임에서는지나간 날들의 무시무시함이되살아났다. 우리는 감정적으로망연자실했지만무기력하지는않았다. 여자회원들이월요회원8 명이머리에뒤집어쓰고 목에두를검정 두건8벌과동아줄8개를만들기로 하 다. 그들은“ 이것이조용한외교의결과인가?”라고쓴현수막을들고 미 대사관으로갔다. 그것은미국이자신의강력한향력하에있는부패한정 권에 향력을행사하지않는이유로미 대사관이우리에게자주했던변명 이었다. 
『뉴요커』지는19 7 4 년 긴급조치5호에이어이 상황을다음과같이요약했 다:“ 미국은자국민들에게는민주주의를제공하지만자국의이익을위한안 식처로해외에서는독재정권들을더지지한다.”
 
19 7 5 년 4월 내가서울에서보낸마지막저녁중 어느날나는월요모임동 료인벤 즈웨버와 함께만원버스에 타고있었다. 공로상을 수여한다면, 벤 은 가장먼 곳에서월요모임에통근했기때문에마땅히그 공로상을받아야 만 할 것이다. 부임지가황해의먼 군도 기때문에비정기적으로월요모임 에 참석했지만, 그는교수형이집행된뒤 서대문형무소밖에서미망인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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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애도했고검은두건을쓰고 목에밧줄을두른채 미 대사관에서애도할 때도거기에있었다. 
그날밤 버스를 타고가면서, 벤과나는사형당한여덟사람의 미망인들 과 (23 명의) 아이들에 대해이야기했다. 우리가 앉은자리에서 만원버스의 통로에서있는 사람들의얼굴을볼 수있었는데모두들 무심하고조용했다. 서로어떤신호도주고 받지않았지만, 벤과나는한국말로바꿔서말하면서 조용한승객들이들을수 있을정도로큰목소리로인혁당사건의진실을이 야기하기시작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승객들의 표정은얼어붙었고 우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나우리바로뒷자리에서 한 남자가말하기 시작했다.“ 당신들 이 옳습니다. 한국은이제끔찍합니다”라고그가여러번 반복해서 말했다. 외국인인벤과나는한국인들이가질수 없는특권이있었지만, 그가우리에 게맞장구를치게해서 곤란에빠뜨릴권리는없었다. 정식으로고용된정보 원들과 정보를 제공하고 포상을 받는사람들이 사방에 있었다. 그 당시(지 금도여전히그렇지만) 한국에는중세스페인이나미국의“ 애국법”에필적할 국가보안법이있었다. 벤은그 남자를돌아보고, 낮은목소리로말했다.“ 당 신은그렇게말하면안됩니다.”
“ 왜안된다는겁니까? 사실인걸요!”그남자가답했다. “ 당신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지요, 당신 술 마셨군요! 술이 취했군 요!”라고내가크게말했다. 
“ 예. 저는 술취했습니다”라고그가 말했다.“ 취한 상태지요. 그것이제가 내조국에서벌어지고있는일을견뎌내는방법이랍니다.”
 
19 7 5 년 4월 28 일에나는인천 소재출입국관리사무소소장인고모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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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일년짜리 비자신청이거절되었을뿐만아니라48 시간내에 한국을떠나 야 한다는 말을들었다.“ 어떤나라나 비자를 갱신하지 않고신청자를 받아 들이지않을권리가있습니다. 당신은추방당하는것이아닙니다”라고고 모 씨가 설명했다.“ 저희는 당신 전에 다른 사람들도 쫓아낸적이 있습니다.” “ 도둑, 살인범, 마약 매자들 말이군요, 맞아요! 하지만 신부는 아니었지 요”라고나는큰소리로대답했다. 
그는추방당하는것이아니라거부당했다는것을내게환기시켰다. (유효 한 비자가있는조지오 을비행기에강제로태워 추방했을때 그들은외교 적인원칙을위반했고, 미국대사관은이에항의를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는 다시는그런일을 저지르지않는법을알고있었다.) 고 모씨는확실한법 적근거가있었고더이상설명하지않았다.
정식문서로된사유서를받기 전까지는가지말아야한다는내 생각에대 해나의상관들도동의했다. 그들은출입국관리사무소소장이만일4월 30 일 까지나를데리고있으면법을위반한다는것을상기시키기위해전화를했 을 때 이 사실을 소장에게 말했다. 조지 오 처럼, 미 대사관이 중개역할을 했고나를구하려고그들은일상적인체면치레같은시도도했다. 그것은내 입장에서볼 때 공개적이고비열한항복과도같은불가능한협상을하는것 이고그러면내 경우를“ 재고할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사관은한국정부가 보낸메세지를내게전달했다:“ 우리의모든법에복종할것이라고서명하시 오, 그러면 재고할 수 있습니다.” 오 목사는 그 미끼를 거부했다. 그리고 오 이추방당한4달뒤, 나역시이를거부했다.
김 추기경이4월 28 일에명동성당에서항의집회를소집했다. 그는저녁미 사를집전하며, 나는어떤죄도짓지않았다고주장했다. 내옆에있던지학 순 주교와함께2백 명의공동집전하는신부들이제단둘레에서 있었다. 언 덕 위에있는성당은 한여름만큼밝았으나, 그것이내겐 더 어둡게 보 다. 마지막에2백 명의신부들이주 통로로내려가앞으로갔다. 나는제단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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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고 돌아서 그들을 뒤따랐으며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통로를 따라가면서지난 12 달간의내 삶을음미해보았다. 낯선사람들과친구들이 내게 손을 뻗었다. 교복을 입은 새로운 얼굴들이 내게 자필서명을 할 펜과 연필을건네주었다. 나는결코이와같은 행사에버금가는장례식을치르지 는못할것이다. 
나는 5월 3일 교구신부로서10 주년을 기념하는 경축기념 야유회가 개최 될 내 교구인섬에결코돌아가지못했다. 내가거기에참석못했을뿐만아 니라내가하게될 모든것은통곡뿐이었다. 교구민들은10 주년기념선물 로 양복을준비해놓았다. 그것이이별의선물이되어버렸다.“ 감상적인생 각”을 나는성공한 뚱뚱한서울백화점 소유자에게말했으며, 그로인해억 압앞에선침묵의미덕에대해강연을하게되었다.
나는주어진 마지막 날인 4월 30 일 마지막 비행기로 출국했다. 자정뒤엔 나는불법체류자가될 것이며, 나를먹여주거나보호하는사람은모두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이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온 고 모씨가 내가 거부당한 다음과같은문서화된사유서를가지고거기에있었다: (1) 19 6 8 년 1년 짜리 비자갱신을늦게신청하 음. (2) 거리에서경찰업무를방해했음. (3) 대법원 의권위를손상시켰음.
첫번째 사유는물론관료주적인말도안되는 허튼소리 다. 마지막두개
는 허튼소리는 아니었지만 내가 추방되는 진짜 이유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 했다. 내죄목은조지오 이그랬던것처럼“ 인혁당”사건에대해공개적으 로조작이라고이야기했다는것이다.
내가“ 거리에서경찰업무를방해했음”은 사실이지만, 다른사람들도많이 그렇게했다. 나는이것이어떤대규모가두시위에서절망적인순간에우연 히 체득한기술인“ 헬멧뒤집기”로 알려지게된 행위때문일것으로추측한 다. 최전선에 있던우리는 어리석게도 팔짱을 끼었고, 그 뒤 대규모의 시위 대가뒤에서 고있었을 때, 경찰들이되받아 어붙이면서발을헛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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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빈 틈도없이빽빽한 대열속에서, 나는경찰과경찰의손에서 곤봉 을 빼앗으려는 다른 신부 사이에 갇혔다. 경찰이 반격하면서, 곤봉을 들고 내 목을짓눌렸다. 나는경찰의 헬멧아래에 놓여있는한 손을제외하고는 움직일수가없었다. 나는내 팔목을세워그의헬멧을돌려떨어뜨렸다. 즉 각적인무장해제 다! 그는나를풀어주고잃어버린헬멧을찾기위해몸을 구부렸다.
나는이계획되지않은평화적방법을한번이상사용했고, 연이은연행뒤 에 경찰서서장이내게어디서그것을배웠는지를물었다. 협조하고싶어서, 나는“ 저, 신학교에서요”라고말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반응했다.“ 메리 놀 신학교에서는그런것도가르칩니까?”“ 아닙니다, 아니예요.” 나는재빨 리 정정해서,“ 서울신학교에서있던시위에서요”라고말했다. 그는듣지않 았고기록을했다. 그런뒤, 전투경찰은목보호대를부착한더 안정된플라 스틱 보호대를 썼다. 가끔씩 나는 그 발명에 내가 일익을 담당했다고 생각 한다.
내가거부당한세번째이자 마지막이유는아직도나를 화나게한다: 대법 원의 권위를 손상시켰음. 천만에! 대법원은(곧고 높은붉은 등받이 의자에 앉아있던 13 명의대법원판사전원이) 군사재판에의해부당하게유죄판결 을 받은여덟 사람의 사형선고를 확정함으로써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손상 시켰다. 나는아우성을치며눈물을 흘리며“ 조작이다”라고외쳤기 때문에, 부인들이끌려나온뒤 법정에서끌려나왔다. 나는그뒤에 떠나려고했고주 위를돌아보다 월요모임루이즈더스트(루이즈모리스)가바닥에누워있는 것을보았다. 그녀의남편버치가그녀옆에꿇어앉아있었다. 내생각에그 녀는다치지는않았다. 단지 항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해야만 해 요”라고그녀는말했다.
미국신문기자인로이왕이우리와합류했다. 법정이갑자기 조용해졌다. 우리들만있었다. 잠시후, 우리각자에게4명씩16 명의건물경비들이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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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들어서뒷 계단으로내려가통로에내려놓았다. 우리는부인들이끌려간 장소로 가면서 계속“ 조작이다.”라고 외쳤다.“ 그것은 조작이었다.” 인혁당 사건에대한대법원의판결과다음날새벽너무나놀라운처형에우리모두 는좌절했다.
 
한국을떠나는것은 끔찍한용두사미 고거의김이빠졌다. 나는단지하 룻밤묵을가방만챙겼고, 내새 양복주머니에있던미 대사관시위에서사 용한검정두건을제외하면기념품도없었다. 상징적인이유로, 그리고언론 을위해서, 친구들에게작별인사를하기전 나는머리에두건을 썼다. 진, 윌 라, 루이즈, 버치, 그리고모든월요모임회원들이거기에있었다. 그들과개 신교와천주교성직자친구들, 그리고구속자가족들과여덟사람을빼앗긴 사람들모두가나에게똑같은주문을 했다:“ 신부님이제마음껏이야기하십 시요. 가서우리들의이야기를널리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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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 장 봉사에서연대로
 린다 존스(Linda Jon e s ) 

어느민족누구에게나결단할때있나니, 참과거짓싸울때에어느편에설건가. 주가주신새목표가우리앞에보이니, 빛과어둠사이에서선택하며살리라.
나는미국중서부의 소박한 중하층 가정에서 성장했다. 19 6 2 년부터 66 년 까지 리킨대학교를 다녔고, 나이지리아에 있는 이바단대학교에서3학년 한 해를보냈다. 그곳에서나는미국의중하층은나이지리아에서는아주부 자를뜻한다는것을알았다. 나는남아프리카를방문했고, 그곳에서인종차 별정책반대투쟁과연대활동을접하게되었다. 미국에돌아오기전 10 주 동 안나는아프리카동해안을여행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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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돌아와서는 오하이와 주의 안티오크대학에서 교육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학위과정의대학원생들은워싱턴 D. C . 시내의 고등학교 수업에 배 치되었다. 우리는과정의2/ 3 를 고등학교에서가르쳤고야간에안티오크교 수들과교과과정을이수했다. 가르치는것, 심사숙고하는것, 그리고배우는 것을통합시킨이교육은최고 다.
내가워싱턴D. C . 에서학생들을가르치고있는동안마틴루터킹 목사가 암살되었다. 나는이웃들이분노로불타고있는흑인도시에사는백인이라 는 정신적인트로마를경험하면서살았다. 그러나내 학교가위치한특정한 흑인이웃들과의연대와안정에대해서도알고있었다. 그곳 거리에있는모 든 십대들이 나를알았고, 나는 그들사이에서 두려울 것이없었다. 그들이 나를보호해주곤했다.
데이빗존스와결혼한뒤, 우리는데이빗이 장로교목사로있던시카고남 쪽의 (백색에서 흑색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역으로 옮겼다. 나는 소수 학생들을 (유대인과흑인) 위해유대인들이재정지원을하는루즈벨트대학 에서 도시학을 공부했다. 나는 또 시카고대학교의 로만가톨릭 학생센터에 서 외국학생 업무처의 수습직원으로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일했다. 그곳에 서 나는진실되고사려깊은호의를확대하는것이중요하다는것을배웠다.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전쟁정책이 지닌복잡한 사정을 좀 더 깊이 알게 된 곳도바로그곳에서 다.
 
워싱턴에서 가르치던 어느 여름에, 나는 아시아와 미국의대학원생들과 함께10 주 동안아시아로여행을 했다. 우리는아시아의일곱나라를 방문했 다. 일본, 홍콩,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그리고대만을여행했
다. 각국에서우리를맞이한사람들은대학기독교운동(UC M )의회원들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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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들은 우리에게 미국 외교정책의실태, 국내정치와경제, 그리고 기독 교 공동체의대응과활동에대해알려주었다. 나는언젠가는 아시아로돌아 오겠다고스스로맹세를했다. 
19 7 2 년 남편데이빗과나는미국의세 개 종단이지원하는2년제개척인 턴쉽프로그램에선정된16 명에포함되었다. 세개의종단은연합감리교회, 장로교회 (미국), 그리고 연합예수교회 다. 스위스제네바에서 한 달 동안 입문과정을수료한뒤, 우리는 파키스탄의라호르를경유해베트남 3, 0 0 0 피 트 상공을지나한국으로날아왔다. 우리가족의세금으로재정지원을받은 미국전투기에서투하된폭탄으로타버린마을들과구멍난 정 위를날아 가면서나는흐느꼈다. 
나는정치적으로도신학적으로도진보적이며, 민주당지지자이며, 장로교 도이고반인종차별주의자이며, 베트남전쟁반대자이며, 시민권을찬성하는 여성주의 선생이었다. 지난10 년 중 7년 동안아프리카, 워싱턴D. C . , 시카 고에서소수백인으로살며일했다. 이제는한국으로가고있었고한국말은 한마디도못하고한국정치에 대해아무것도모르고 평생불과두 명의한 국인들과포괄적으로이야기를해본정도 다. 다가올것에대한준비가되었는가? 누가준비를할수있겠는가? 데이빗과나는공부를시작한지5일 만에매일아침연세대학교어학당까 지 걸어가던언덕길에서멈추어섰다. 우리는돈을벌 희망으로시골에서도 시로유입된한국인들의판잣집을지나서, 흩어져있는연세대캠퍼스를내 려다보았다. 군용트럭들과텐트, 군복을입은군인들, 탱크는보았지만학 생들은보이지않았다. 정문은폐쇄되었고총과방패로무장한군인들이삼 엄한경계를하고있었다. 무슨일이벌어지고있는것일까? 그때가19 7 2 년 10 월이었다. 한국에온지불과몇 주 밖에되지 않아“ 한국 의일상”에익숙해질시간도없었는데, 이제우리는한국인들조차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모든 대학들이 폐쇄되었고 사방에 군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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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19 6 1 년 이후통치를했던박정희가이제전권을 쥐고있었다. 박정 희는곧정부가민주주의나 시민권의회복에대하여말하는모든시민을“ 공 산주의자”로 처벌할수 있는새 헌법과가혹한“ 국가보안법”을 공포할것이 었다. 그런 사람들을 이제 북한의 동조자로 간주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것을알기전, 우리머릿속은우리가보고있는것과우리가한국에 대해이해하지못했던것들로빙빙돌고있었다.
 
빛과어둠사이에서선택하며살리라.
미국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사무실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여전히 외국인이운 하는오래된이 사무실은한국에서체류하는동안서류작업을 돕는 것을비롯해 재정 및 물품의 지원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업무처”
다. 공식적으로장로교선교단에소속되어있다는것은우리가그 당시25 명 에서 30 명의 장기 선교사들로 구성된 서울 선교단의 월례모임에 참석하는 것을뜻했다. 
선교사들과의유대는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모두 있었다. 한 신사가한국에 있는첫 주 동안서울미8군 본부에있는장교클럽에서식사 대접을하면서우리를그의휘하에 두었다. 그는틀림없이우리가벌써 훌륭 하지만값비싼미국음식을필요로한다고생각했을것이다. 군장교들이막 사에서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경험은 정말 놀랄만한 것이었다. 또한우리는미국선교사들이장교클럽과군 면세점을사용할수 있으며, 기지내 극장에서화를보고군대도서관을이용할수 있다는 사 실에충격을받았다.
다음으로 그 선교사는 한국인 가정부, 경비원, 그리고 잔디 관리인을 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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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개의서구식주택이있는“ 선교사마을”이었던, 연세대근처언덕위에위 치한 그의 벽돌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수습 개척선교사인데이빗과 나는 우리가함께일하게될 한국인들처럼“ 경제적으로절제”하면서살려고해왔 다. 우리는한국에있는 대부분의미국인선교사들과같은수준으로살 수도 없으며살지도않을것임을알았다. 
선교사무실은우리가연세대근처에있는서구식으로된 한국인집의위 층을찾아계약하는것을도와주었다. 우리는세명의한국인가족과욕실과 부엌을함께 사용했으며, 위층에는우리가사용할침실과거실이있었다. 이 것은 일반적으로 서양인이 한국에서 사는 법과일상적인 가사일을 원치 않 는정식직장인부부로살수있는법사이의훌륭한절충안이었다.
 
우리는 즉시목사인 데이빗이 미국에서보다 훨씬더 높은 존경을 한국인 들에게서받게될 것임을알았다. 한국인은물론배우자대부분이남편을도 와 자원봉사일을 하는선교사들이 나의 일을중요하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 다는의심이들었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접촉하는 한국인은 연세대학교 도시개발연구소의 노 정현 박사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재일교포 선교사업을 시 작하려고 일본 비자를 기다리는 개척선교단 수습 한국인 선교사박세일이 었다.
우리가정기적으로만난다른사람들은서울에있는장로교선교사들이었
으며, 그들은너무나다양해서하나로규정지을수가없었다. 군대가 대학을폐쇄했을 때, 우리는이 사람들에게 자문를 구했다. 노 박 사의연구소 역시폐쇄되었고, 그도상황이 언제정상으로 돌아갈 지 알 수 가 없었다. 도시빈민가에서진행하는연구소활동도대부분중단되었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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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은군대의점령에대해다양하게추측을하고있었지만무슨일이일 어날지에대해서는더아는게없었다.“ 배를흔들지마시오. 상황은벌써충 분히위급합니다.”라고말하면서, 그들은동료선교사들에게상당한주의를 요할것을촉구했다.
박세일이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박 세일은 명문서울대학교의 최근 졸업생이었다. 다방면에재능을 지닌 그는 서울대내 다양한학회의학생지도자로활동하던친구를둔 민하고조리 가있는젊은이 다.
자신의대통령직을계속허용하도록헌법을개정하는것을비롯한박정희 의 조치들로모든학생지도자들이감금되어있었다. 그러나학생들은박대 통령이 부패했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앞으로 닥쳐 올일이분명좋지않다는것을알고있었다.
비자를 기다리는 동안, 박세일은 데이빗과 나를 학생활동가 친구들에게 소개해주었다. 이로써그가일본에간 뒤에도, 우리가방향을찾는데도움을 줄한국단체내의훌륭한연락책이확보되었다.
이친구들 중 서경석과그의여자 친구신혜수는우리의절친한친구가되 었다. 또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도시빈민들, 그리고 도시산업선교회를 통 한 노동자들과의 연계라는 세 개의활동조직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었다. 서 경석은 군대에 있었지만, 군대의기술자로 주 5일 9시부터 5시까지 일했기 때문에주말마다우리와다른사람들을만날수 있었다. 신혜수는이화여대 졸업생이었다. 그녀는 문과졸업생이었기 때문에우리가 대화를하는데 크게도움이되었다.
서경석과만난지 몇 주만에그는당시서울제일교회의박형규목사에게 우리를 데려가 만나게 했다. 박 목사는 60 년대후반에 한국기독학생회총연 맹의사무총장으로활동했다. 서경석은우리가곤란을겪게되면, 박목사와 연락을취해야한다고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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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박목사에대한 그의소개말을떠올리면아직도웃곤하는데, 그것 은 우리가곤경에빠지기도했지만박목사는우리보다훨씬 더 자주곤경에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우리가 한국에 있는대부분의 기간동 안감옥에있었다.
박세일과그의친구들은아주바빴다. 그들은모교에서는학생지도자 기 때문에, 재학생들은한국내에서벌어지고있는일을이해하고점점커지는 독재정치에대응하는방법에대한도움을받기위해그들을찾았다. 그래서 박세일과 그의 친구들은 우리에게 한국문화, 경제, 역사, 또는 한국교회에 대해가르칠시간이없었다. 정치상황이악화됨에따라, 그들이무소부재의 중앙정보부의감시를받거나우리가감시를받고있었기때문에, 우리는이 새로운친구들과만날수없다는사실을이해하게되었다. 우리가돕기를원한다는것을알게된 학생들이우리가도울수 있는방법 을찾으려고애썼다. 처음에그들은우리집에서“ 스터디그룹”모임을할수 있도록요청했다. 단지공간만을제공하기때문에이것은수월했다. 우리가 참여하지않는것은필수적이었다. 데이빗과나는우리집에온 학생들대부 분의이름도, 그들이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몰랐다. 여러 달이지나고 나 서야, 우리는 그들이 여러대학교에서 온 기독교 학생지도자들이었다는 것 을 알게되었다. 그들은정보를교환하고박정희의비열한조치들에대응하 는방법을결정하는장소로우리집을이용했다.
 
참과거짓싸울때에어느편에설건가.
데이빗과나는한국에서 보낸처음몇 달 동안은아주외로웠다. 어학공 부는너무어려웠고우리는정규수업에합류할수 있는시기에도착하지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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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기때문에우리끼리수업을하고 있었다. 새로운한국학생친구들은너무 바빠서 우리와 만날수가 없었다. 도시연구소를비롯해 연세대학교는 폐쇄 된 지 몇 주 뒤에다시문을열었다. 그러나연구소는빈민가안에서의연구 를 제외하고 교정밖에서 많은일을할 수가없었다. 데이빗은기꺼이 연구 소사무실에서일을했고, 내가가난하고억압받는자들가운데일하는 단체 들을자유롭게돕도록했다. 
나는서경석에게그런종류의 일을원한다고이야기했다. 그는내가할수
있는일들이있다고말했지만, 나에게참여를요청해야할지확신할수 없었 다. 그는어느대학에서특정한날 특정한시간에반정부시위가있을것임을 내게말해주었다. 그는비 이유지되어야하는시위니까누구에게도말하 지말라고했다. 그것은정부에게기습시위가되어야만했다. 이틀내에 내가아는서경석의다른친구가 나를다른곳에서만나서 시위
계획에대해아는것이있는지를물었다. 나는그에게모른다고말했다. 그날부터 봇물이 터졌다. 나는 더 많은정보를 얻기시작했고, 운동을돕 는 일들이 차례차례 주어졌다. 서경석의친구와의 만남은 하나의 시험이었 다. 그리고 나는그 시험에 통과했다. 학생지도자들은내가할 일이있다는 것을알았지만, 내가믿을만하고정치적으로깨어있으며분별력이있는지 를먼저확인할 필요가있었다. 그들은내가미국중앙정보부요원이아니라 는 결론을내렸다. 그리고그들은내가여성이자미국인으로서그들에게어 떤가치가있다는것을 알았다. 여성인나를경찰이심각하게취급하지는않 을것이다. 미국인으로서나는그들이할수없는위험을무릅쓸수있었다.
 
악이비록성하여도진리더욱강하다. 진리따라살아갈때어려움도당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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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웅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집행부간사 다. 황인성은 기독학생 회총연맹의 사회발전봉사단의 학생대표 다. 이 두 사람이 나에게 세계 다 른 지역에서있었던인권운동에대한교회의참여와관련된들을써 달라 고 요청했다. 나는조사해서집필을했고, 그들은그것을번역해서몇 개 대 학에서온기독교학생대표들의월례회의에서발표했다. 그 임무는내게완벽하게어울리는 것이었다. 나는해외신문들과단체들, 인권연대단체들, 국제교회와심지어미8군도서관에서도정보를수집할수 있었다. 계엄령은 모든 한국언론에 대해 엄격한 감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들어오는 모든 매체에 대해서도 심한 검열을 했기 때문에, 이 모든 정보는 일반한국인들이접근할 수 없는것이었다. 내가정보를 얻는곳 중 하나는 놀랍게도개봉되지도않고뉴욕에서오는 국의좌파독립신문인「가디언」 지 다. 그것이어떻게한국의검열을통과했을까? 아마도단단하게말려서 배달되었기때문에, 달력이나포스터로보 기때문일것이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학회에서는미국의 흑인, 인종차별정책하의남아 프리카, 중국, 브라질, 칠레, 그리고필리핀의인권에대한열띤 논쟁들이벌 어졌다. 학생들은한국학생운동과다른나라학생운동들간의유사점과차 이점에 대해 토론했다. 그들은 미국과 일본의 외교정책의 유형을 주목하고 토론했다. 한 월례회의에서는정부가 전복될 것이라는 내 예견을 포함해서 칠레를 주제로 다루었다. 2주일 뒤에 미국이 아옌데 정부의 몰락을 초래했 고, 그래서다음달회의에서칠레에다시초점을맞추었다. 이때학습을한 자료를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에서책으로출간하 다. 그
책이한국어로되었기때문에나는내가쓴유일한책을결코읽지못했다!
 
그 당시내가알지 못했던것들중 하나가다른나라에서의인권투쟁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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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논의와더불어, 학생 대표들은학회때마다시간을 내어박정희대통령의 유신헌법에 대한 서울시내 대학생들의 대규모대응에 대한 논의와 계획을 했다는것이다. 학회는그들이함께모인다는것을감추어주었다. 왜냐하면 중앙정보부는아직 월례학회의 중요성을 알지못했거나, 그렇게 많은 뒷골 목을지나학회에참가하는학생들을따라잡을수없었기때문일것이었다. 박정희독재정권에항의하는대규모의잘조직된학생시위들이19 7 3 년가 을에서울전역에있는대학교에서동시에벌어졌다. 중앙정보부와다른정 보기관들이놀랐다. 외국언론들이이기사들을비중있게다루었고, 그것은 정부가 훨씬더 단호하게, 시민의 불만을 당혹스럽게 폭로하려고 계획했던 모든사람들을찾아구속하게만들었다. 다음학회는열리지않았다. 모든학생들이숨어있었다.
 
순교자의빛을따라주님의뒤를좆아서.
이와같이 한국에서나의두번째 중요한임무가시작되었다. 학생들은중 앙정보부를피해숨어있어야했다. 일부학생들은빈민가에서피난처와은 신처를찾을수 있었지만, 대부분의다른학생들은안전한장소들을찾지못 했다. 분명히 그들의 집과친구들, 친척들또는교회사람들의 집은안전하 지 못했다. 한편, 아직도박 정권이 독재정치로나아가고 있다는 것을확신 하지못하는대부분의한국인중, 상류층은—특히 학생들이반체제용공분 자들이라고말하는정부를믿는다면— 반정부시민들에게거처를제공하지 않을것이다.
그 뒤 몇 달 동안, 도망다니는 학생들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일은 서울에 있는 외국인 가정에 할애되었다. 자연스럽게 그 문제가 월요모임의 안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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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우리는숨어있어야하는사람들에게안전한장소를찾아주기시작 했다. 요점은학생들을원히 숨겨주는것이아니라, 경찰과중앙정보부가 다른소식통으로부터정보를얻을충분한기간동안숨겨주는것이었다. 그 런 다음숨어있던이 지도자들이잡히면, 정부가이미정보를얻었기 때문 에 그들은고문을당하지않을것이다. 우리가만났던학생들은당시민주화 운동에서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도적 역할 을계속하도록하는것이매우중요했다. 
학생활동가들과집에서함께지내면서, 우리외국인들은정의에대한우 리의헌신속에서개인적인구원과대조되는사회적구원을이해할수 있는 좋은기회를가졌다. 우리는집에사람들을맞이하는특권을누렸다. 학생들 은 한국학생운동의역사와위험을무릅쓴과거의애국자와한국내외국군 대에의해자행된 대학살에대해, 그리고 우리가 전에듣지못했던 다른이 야기들을우리에게가르쳐주었다. 
우리가 보호했던 학생들은 자신들은 국가의위기상황에서분연히일어선 한국인들의대장정에서중요한사람들이아니라고생각한다고말했다. 기독 교인들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모든 인간은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 노예화된공장노동자들, 미망인들, 매춘부들, 그리고구속자들에게 다가가함께하는것이, 즉한을가진사람들과의모든연대가, 학생들이한 국역사 속에서 이 중대한 시기에 그들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논리적인 소명 이었다. 그것은단순히설교하고이야기하는것이아니라, 복음안에살면서 그것을반성하는실천의문제 다.
 
데이빗과 나는한국인과 함께 살지않는개인 아파트로 이사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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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다니는사람들을숨겨주는일에참여할수 있었다. 우리가가장오랫동 안모신손님은 황인성이었으며, 우리가한국에대해알게하려는그의 진지 함은 대단했다. 한번 내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사무실에 실수로남겨둔 보따리를가져다주려고몇 시간을노력했던것처럼, 그는한국에대한미국 과 일본정책의문제점을설명하는데도수고를아끼지않았다. 이젊은이의 태도는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수백 명의 학생들을 지도하는 전략가나 조직가라기보다는오히려친절하고부드럽게말하는한국의 합창단 소년과 비슷했다.
경찰이 너무나 근접해 와서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했을 때 그와 작별인사 를하기란힘들었다. 모든사람을 위해, 오직다른한 사람만이숨어있는사 람들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이것은황인성이 우리집을떠나자마자, 우리 는 그의자취를알 수 없다는것을뜻했다. 그러나그것은또 우리가실수로 도그의거처를폭로할수없다는것을뜻했다. 
월요모임회원들은계속해서사람들을숨겨주거나그들이숨을장소를찾 아 주었지만, 우리가은신처를 제공하거나함께일한사람들의이름은결코 말하지 않았다. 봉사에서 한국친구들과 동료들과의 연대로 옮겨가기 시작 하면서, 우리는“ 뱀처럼 리하고비둘기처럼부드럽게”신뢰를주고 리해 지는법을알게되었다.
 
진리따라사는자는 언제나전진하리. 
나에게주어진다른임무는비 리에 한국에들어오는자료들을전달하는 일이었다. 민주화 투쟁에 몸담은 한국의 주요 기독교인들은 세계가 한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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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에대해무엇을알고있으며어떻게말하고있는지를파악할필요가있 었다. 일본과미국정부가박정희 정권과긴 한관계 기때문에일본과미 국언론의반응들이특히중요했다.
나의 전달통로에는 기독교방송국 사장 김관석 목사, 제일교회 목사이자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전 사무총장이며한국 기독활동단체의빈민-조직화 프로그램의 위원인 박형규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화여대 교수 들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도시산업선교회, 한국 교회여성연합회와YM C A 등이포함되어있었다. 그리고내가전달한각 자 료집은각 단체에서믿을만한사람들에게전달되었다. 각단체에서오직한 사람만이그 자료를전달하는사람을알고있었으며, 다른수령인들은그 자 료들이어떻게한국으로들어오는지몰랐다. 
자료집에는한국의위기상황에대하여일본, 미국, 그리고유럽의잡지와 신문에기고한 , 미의회또는 일본국회에대해 채택한성명서, 세계교회 의 성명서들, 기타다른서류들이포함되었다. 이러한자료들이공개적으로 한국으로 전달되었다면 검열당했을 것이다. 또 이런자료를 가지고 있다가 잡힌한국인들은구속되었을것이다. 미국인인나에게일어날수 있는최악 의경우는추방이었다. 그래서내가그일을하기에적합했다. 대부분의자료들이일본을경유해서한국에들어왔다. 그곳에서극동아시 아기독교연맹, 아시아행동단체,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 동아시아기독교회 의 (현재의 아시아기독교회의), 아시아행동그룹을 위한자료센터등지에서 일하는(박세일을비롯한) 한국인들과다른사람들이자료들을선별해서 복 사했다. 그자료들이일본의인권단체에서일하고있는선교사들과다른외 국인들을비롯한다양한통로를통해한국으로들어왔다. 가장 중요한 통로는 페이 문이었다.( 그녀의 을 보시오.) 신학교 교수이 자 한국의활동가인문동환박사와결혼한페이는주한미군들의약물과알 콜 재활상담원으로미 육군에서일하는미국인사회복지사 다. 페이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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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군사우편을이용할수 있었고, 그것은한국의우편체계와달리검열을받 지 않았다. 그녀는자료꾸러미에서자료들을받아서그것을부대에서가지 고 나왔다. 그런뒤 나는그녀의 집에가서그것들을 분류하고 나의전달통 로로향하곤했다.
 
우리는또 민감한정보를한국밖으로보내는 것도도왔다. 가끔씩우리는 도쿄로중요한문서들을가져갔다. 우리는종종암호로을써서우편으로 전송했다. 가끔우리는미군군사우편을이용했다. 종종자료를전달할다른 외국인들도있었지만안전한통로는아니었다. 이사람들은공항에서몇 차 례잡혀서조사를받았고, 가끔은문서가발각되어당국에몰수되기도하 다. 외신기자들이서울에 올 때 월요모임은 그들의 중요한 정보원이 되었다. 기자들은우리의비 회동에는거의오지않았지만, 우리중 한사람을 찾아 질문을 하곤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한국인과 인터뷰를 해야하며, 그들 을어떻게만날 수 있는가를포함해중요한정보를주었다. 물론언론사들의 호텔 전화와 한국의 모든 활동지도자들의 전화가 도청되었기 때문에, 기자 들과한국지도자들간의은 한만남은입에서입을통해주선해야했다. 우리는 외신기자들이한국인들과 인터뷰를 할 때 종종 통역을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민주인사들을 위해 통역을 하고, 그들과 주요 국제 어권신문잡지사기자들과의만남을알선하는데많은시간을보냈다. 모 든통화를암호로 해야했기때문에, 가끔일이잘 맞지않았다. 우리가“ 1시 에 동대문 앞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하면, 그것은2시에 서대문에서 만나자 는것을의미했다. 외신기자가암호를잊어버리면, 바쁜데다위험을무릅쓰 고나오는한국의지도자 또는통역은무례하게바람을맞게되고중요한이 야기가해외에서보도되지못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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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스”라는이름이운동에관여하고있는사람으로중앙정보부파일에계 속 등장했다. 연행된학생들이조사를받으면서가끔그들이 숨었던집 주인 의 이름을댈 수밖에없을때도있었다. 한국사람의이름을대면그 사람이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외국인의이름을 대는것은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을 사용했다. 우리는 운동의 동지 지만 없어도 되는 동지들이 었다.
구속자를 위한 기도모임, 재판,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사무실, 노동자들 이 노동현장을 바꾸기 위해 조직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등등에 우리가 종 종나타났기때문에중앙정보부는우리에게“ 붙어”있었다. 많은기독교집회에서한국어로“ 어느민족누구에게나”라는찬송가를불 다. 그 노래는 우리의“ 행진곡”이 되었고, 우리는 모두 함께일어서서 그 노래를불 다. 그 노래의 가사는 우리가 믿는것과우리가 모인이유를 표 현하고있다. 하지만뒷방에서엿듣고있는중앙정보부요원들은우리의원 래의도를알아차리지못했다.
지금까지도이찬송가를부르면, 그노래를부를때 가졌던감정과역경들 이 기억나서눈물이난다. 우리는구속과고문을견뎌낸남녀노소한국인들 과 함께그 노래를불 다. 우리는항상체포될위험이있는사람들과, 자기 집에다른사람들을숨겨주거나그들이숨을장소를찾아주는사람들과함 께 그 노래를불 다. 우리는고통당하는민중과함께연대해서진실을말하 고 행동했다는이유로투옥된아들, 딸, 배우자를둔 어머니, 아내들과함께 그 노래를불 다. 우리는원로애국자, 교수들과함께그 노래를불 으며, 이름은알 수없지만여러 방면에서운동의핵심이었던여성들과함께 그 노 래를불 다. 그리고우리는구속을각오하고해외언론에진실을밝힌사람 들과함께그노래를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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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요원들이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곤 했다. 그들은 찬송가 가사들을적곤했지만, 기독교인이아니라면우리가노래하고있는바를결 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들이“ 악이비록 강하여도 진리만이 강하다”를 통해우리가뜻하는바를알 수 있겠는가? 어떻게그들이우리가 장래에 언젠가 단두대의 날이현재 단두대를 통제하는 사람들을 물리칠 것 이라는확신에차서노래하는것을이해할수있겠는가? 그것은20 년 이상이걸릴 수도있지만, 단두대로고통을받은사람들이그
것을통제한사람들을물리쳤다. 
 
데이빗과 내 이름이 중앙정보부 파일에 자주 등장하자, 정보부는 우리를 심문하기위해우리아파트로진지하고직급이낮은기관원들을두 차례보 냈다. 두차례모두, 나는침실로갔고, 그들은거실에서데이빗과이야기했 다. 한국의모든상식적인기준에서보면데이빗이집안에서결정을내리는 사람임에틀림없다. 모두가서툰어나서툰한국어로말했기때문에, 데이 빗의 주된 한국인 교우관계와 정기적으로 만나는사람들을 알려는 취조는 우스꽝스러웠지곤 하 다. 그가 도시개발연구소에서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활동하는것이실제로효과가있음이밝혀졌다. 그것은내가하고있는 일에 대한효과적인“ 은폐물”임이입증되었다. 
데이빗은 사실대로 연구소에 있는 모든사람을 거명했고, 어를 사용하 는 서울 연합교회 사람들을 그의 주된 교우관계로 거명했다. 이 사람들 중 누구도운동에관여하지않았다. 기관원들은나와나의활동또는교우관계 는 결코 묻지않았고 운동의 지도자들에게 전달될 자료집들은 발견되지 않 았다. 두차례방문후, 정보부요원들은왜 그들이존스부부를심문해야하 는지의아해하면서우리아파트를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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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더불안하게한것은한국내미국장로교회선교단대표인 R. 스탠 튼 윌슨에게서온 긴급전화 다. 스탠튼윌슨은한국정부뿐만아니라미대 사관과미국인사업가들사이에 친구가많았다. 그는모든장로교선교사들 과 그 선교사들이일하고있는기관에서일하는많은 한국인들도잘알고있 었다. 그러나 많은 선교사들처럼 윌슨도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의 다른 측면들을알지못했다. 월례장로교선교단모임에서, 장기선교사들은학생 들 사이에 무슨 일이벌어지고 있으며 해외언론은 어떻게 되는지를 한국에 온지몇달밖에안되는우리에게종종물었다. 
윌슨 씨는 한국정부로부터경고를 받았다는 것을알리려고 (도청이 되지 않을것으로 추정되는) 자기집에우리를 초대하는 전화를 했다. 존스 부부 가 민주화운동에서한국인들을계속지지하여한국정부에계속반대한다면, 한국의 모든장로교 선교사들이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곤란할 것이라고 했 다. 다시말해서, 우리는추방당하게될것이고모든 장기선교사들, 즉의사 들, 의료봉사자들, 교수들, 전도사들, 사회복지사들과선교단지도자들역 시 추방당할지도몰랐다. 그는분명하게젊은단기 선교봉사자인우리가한 국과수십년동안관계를 맺어온사람들이추방당하는것을원치않을것이 라고말했다. 
윌슨 씨는 미국장로교회 선교 전체를 위해서우리에게 저자세를 취하고 우리가하는 일에대해아주신중한 결정을내리라고거듭간청했다. 우리는 그의경고를듣고정중하게감사를표했다. 그리고한국인동료와친구들이 우리에게요구하는우리의일상적인활동으로되돌아왔다. 그런시기에, 월요모임의지지와연대의식은우리두 사람모두에게가장 중요했다. 민주화와인권을위해일하고있는한국인들의지시에따라서우 리는정보를전달하고, 울분을토하고, 웃고울고, 다음활동들을계획할수 있었다. 월요모임은우리가종종느꼈던고독함을없애주었다. 그고독함은 우리와아주긴 한관계를맺은한국친구들이운동에깊이연루되어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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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공개적으로우리를만날수 없고직접대면하기어려웠기때문에생 긴것이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 모두가 혼란에 빠진 가장 멋진 이야기들 중 하나가
19 7 9 년에있었던깜짝놀랄만한위장결혼사건이었다. 운동권에소속된한 남성지도자가 명동 YWCA 회관에서 결혼을 하게되었다. 운동권에 소속된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회관은 벌집처럼 사람들로 북적 거렸다. 여러달 동안서로얼굴을보지못한사람들은서로할 이야기가너 무나많았다.
경찰들과 중앙정보부는이 행사를 충분히 인지하고 검은가죽 점퍼를 입 고참석했다. 그러나전략적인이유로(못된해외언론때문에?) 그들은그와 같은큰기독교모임을방해하지않기로결정했다. 
개인적인이야기를주고받고 계속다정하게인사를했다. 왜냐하면몇가
지 이유로신부가늦게도착했기때문이다. 중앙정보부요원들은더욱긴장 했다. 운동권의모든주요인사들은함께이야기하고상황을분석하고계획 을세울예상치 못한기회를누리고있었다. 사람들은회관안을돌아다니면 서새로운대화를시작하며멋진 시간을보내고있었다. 이제경찰들은진땀 을 흘리고 있었다. 예정된 결혼시간보다약 두 시간뒤에, 유감스럽게도신 부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 순간, 경찰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자신들이속았다는것을깨달았다. 결혼식은원래계획에포함된것이결코 아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이 위장결혼식을 계획했다는 이유 로투옥되었다. (메리언킴의 을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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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짧은기간동안한국을떠나“ 입양비행기”를탄적이있다. 이것은
나와다른세 명의어른들이미국입양가정으로가는 18 명의아이들을데리 고 갔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리고우리는 비행기 요금의 3분의 2 정도를 할 인 받았다. 그 일로나는 불편했다. 저렴한비행기표가 필요했지만, 아이들 을 고국으로부터소수민족이될나라로, 그리고한국문화를접하기힘든다 른문화로데려가는것이미안했다. 
우리가도쿄에잠시들리는것을알았기때문에, 한국기독교계인권지도 자들은나에게약 3인치두께의촌각을다투는문서들, 성명서들, 정보, 그리 고 편지들을 주었다. 이 자료들을 직접 도쿄의 D AG A에 전달해야 했다. DA GA 는당시한국기독교인들과세계언론과전세계의교회를연결하는중 요한허브역할을했다. 
나는도쿄공항에서DA GA 소장인김용복 박사를만날예정이었다. 나는 환승라운지와공항방문객구역사이에있는시멘트 벽의구멍을통해자료 들을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과거에는 이러한 전달방법이 아주성공적 이었다.
잠시체류하는동안, 아이들은일본자원봉사자들이돌보았다. 나는여권 없이비행기에서내렸고여권은아이들의입양서류들을넣은서류가방속에 있었다. 그러나놀랍게도나는구멍이있는 벽이바뀌었다는것을알게되었 다. 이제는환승라운지를벗어나지않고는공항에있는다른사람에게어떤 것도 전할 수가 없었다. 이 자료들은 아주 중요하며 촌각을 다툰다는 것을 나는한국에서분명히들었다. 나는그자료들을전달해야만했다. 순간적으로중대한결정을내려야했기때문에, 나는여권도항공권도없 이 환승라운지에서나오기로결정했다. 나는김용복을발견하고그에게자 료들을준 다음비행기로 돌아갈 방법을 궁리했다. 내 논리는 네 명의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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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중에서내가 기저귀를갈아채우는법을아는(또 기꺼이이일을 하려는) 유일한사람이기때문에, 내가비행기로돌아가야만한다는것이었다. 공항은 붐볐다. 모든 사람들이 동양인이었고 검은머리 다. 그리고 시끄 러웠다. 어떻게내가김박사를찾을수있을것인가? 그를부르는방송을하 기 위해안내데스크로나아갈때, 내옆에서고들어오는사람이있었다. 그는김박사 으며방송을통해나를부르려는중이었다. 우리둘 모두안도했다. 나는그의손에자료들을넘기고 내가위임받았던 구두메시지들을전했다. 그리고나서비행기로돌아갈수 있도록도와달라 고 요청했다. 우리는그것이환승라운지에서는불가능하다는것을알았다.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하는 승객들을 개찰하는 다음 터미널로 가야만 했다. 시간이없어서 달렸다. 당시공항안전요원은오늘날처럼거칠지않았지만, 당시에도항공권과여권없이비행기를타는것은불가능했다. 나는일본어를전혀하지못했고김용복의일본어도유창하지않아서, 우 리는우선 항공사 직원에게 어로 내 상황을 설명했고 다음에는 출입국관 리소직원에게설명했다. 우리가상대한모든사람은내가서류도없이 비행 기를떠났다는 것에놀랐고 이유를 물었다.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내가 말 할수있는 것은“ 아이들을돕기위해제가어떻게 비행기로되돌아갈수있 습니까?” 다. 마침내 아슬아슬한 순간에, 우리는 항공사 직원에게 비행기 에 전화를해서나처럼생긴사람이아이를돌보기위해탑승했는지를물어 보라고설득했다. 즉시사실임이밝혀졌고, 승무원들은나의재탑승을돕는 것이그들에게매우중요하다는것을깨달았다.( 기억하고있죠, 내가기저귀 를 갈아야하는사람이었다는것을!) 그래서여권과탑승권을찾아서비행기 에서내려개찰구지역에있는나에게가져다주었다.
기적이었다. 자료들은전달되었다. 구두메시지들도전했다. 비행기재탑 승도 이루어졌다. 18 명의 아기들의 보송보송한 엉덩이도 보장되었다. 그러 나 나는 거의 24 시간 동안 열댓 번 기저귀를 갈아주고 모든 아이들이 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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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 미니애폴리스, 그리고시카고에 있는양부모들의손에안전하게인도될 때까지, 그기적을제대로떠올릴수가없었다.
드디어 시카고 집에도착하여 나는 꿈과 현실간의 몽롱한 상태에서3일 동안잠을잤다. 도쿄에서일어났던일이악몽이었나? 그러나미국신문의도 쿄주재특파원이 쓴 기사들을 읽고 그것이현실이었음을 알았다. 그 기사 들에는내가 도쿄에서 전달한 공식문건과 성명서에서 따온 인용문들이 있 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오갔던 것들 중 일부는 TK 로만 신원을 밝힌 익명의 저자를위한 정보와그가쓴 들이 있었다. 그는매달한국의민주화투쟁을 분석해서 일본의 유명한 월간지인「세카이」에“ TK 생으로부터의 통신”이라 는 칼럼을 썼다. 나는 뒤에 어판으로『TK 생으로부터의 통신(Letters from TK ) 』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매우중요한 저서에 정보를 전하는데 조금이 나마기여했다는것을하나의 광이라고생각했다.
TK 의신분은 20 0 4 년에공개되었다. 그는당시일본대학의교수지명관이 었다. TK 가 누군지알게되었을때, 도쿄에서그를두 번 만났다는것을깨 달았다. 그는 내가이제껏 만난, 가장 부드럽게 말하고 가장현명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마침내신원이밝혀진이후, 그는한국민주화장정의웅 으로인정되었다. 
 
십자가를등에지고 앞만향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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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 4 년 봄, 우리가 한국에 온지 18 개월이 되었을 때, 박정희 독재정권은 학생들에대한대규모탄압을시작했다. 박정희는몇 달전에 대학교에다시 휴교령을 내렸지만, 19 7 3 년 가을의조직적인 학생시위를 여전히두려워했 다. 봄까지 긴급조치1호에서3호까지선포되었다. 긴급조치3호에의하면, 공개적인 반정부집회를계획한사람에게15 년형에서 무기징역까지처할수 있었다. 많은학생운동지도자들이겨울내내숨어지내고있었다. 우리는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을위해인권에 관한책을쓰면서 황인성을 알게되었다. 부드러운목소리의황인성학생은19 7 3 년 거의 6개월동안우 리 집에 숨어 있었다. 그가 지도하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산하 사회봉사 단이많은학생들을가난한사람들의현실을배우도록빈민가와공장지대에 배치했기때문에, 황인성은운동권의 중요한지도자 다. 정부는그런활동 은 공개적이고 폭력적이며, 공산주의식 폭동을 위해 빈민들을 조직하려는 의도가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학생지도자라는이유로그를의심했고, 박 정권은 학생들이 정부에 대한공개적인 폭동과 혁명을 계획하고 있다고 주 장했다.
19 7 4 년봄에수사망이가동되었을때, 황인성은우리집에숨어있을수가 없었다. 그때까지우리는친구로서로잘 알았고민주화운동에서서로를지 지했다. 그러나나는가끔그가숨어있을새로운장소를찾아나섰다. 예를 들면, 그해 봄에그가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는몰랐지만나는그가있을새 로운안전한장소를찾으라는요청을받았다. 나는그에게약속시간과 장소 를 알려주기위해어떤다방에서만날예정이었다. 모든월요회원들은이미 “ 손님들”이 있거나손님을받기에는정부에너무노출되었기때문에안전한 집을찾기가 어려워졌다. 대부분의외국인은도우려하지않았고, 도울한국 사람을찾는것은우리의일이아니었다. 
내가 황인성을 만나기 하루 전, 굉장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든 사람이 정부가 다음에 무엇을 계획하는가에대해 긴장했다. 투쟁에서 결정적인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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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사무실에서 종종 일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 한 젊은남자타자수가땀에흠뻑젖은체 겁에질려서내 방문을두드렸다. 짧 은 한국어실력으로이것은생사가걸린문제이며, 그가가능한빨리황인성 을 만나서긴급한메시지를전해주려고한다는것을파악했다. 내가그가있 는 곳을알고있나? 아니다, 알지 못했지만 나는그가내일있을곳은 알고 있었다. 나는 다방의위치와 시간을 말했고, 그 직원에게 그때황인성을 만 날수있다고말했다.
그 젊은이가나가자마자, 나는방금무슨일이 벌어졌는지를깨달았다. 나 는 황인성에게생사의메시지를전달해야했기때문이아니라, 나또는다른 사람에게서 정보를 얻도록 경찰의 협박을 받았기 때문에 땀에 젖어걱정하 는 척하는이젊은이를통해황인성을곧장 경찰에인도해버린것이다. 가슴 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월요모임에 회원가족을 만나러 갔고, 그들은 내가 속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방법이 없었다. 나는 황인성과 연락할 방법과그에게오지말라고전할방법이없었다. 나는그의친한친구몇 명 에게연락을취했고, 그들은집에서민주화운동관련자료모두를서둘러없 애고나서, 경찰이다음에연행할것으로예상되는다른사람들에게경고를 하 다. 왜냐하면정부가운동권의다른중요한지도자들에대한정보를얻 기위해황인성을구타하고고문할것같았기때문이었다. 그날밤은내 인생에서가장길고끔찍한밤이었다. 황인성뿐만아니라아 마 다른 민하고친절하며재능있는젊은지도자들이연행되게하는실수 를저지르고내가어떻게살아갈수있겠는가?
아침이 되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평생 가장 무거운 마음으로 다방에 도착했다. 12 명의 한국사람들이 각각 다른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읽고 차 를 마시고있었고, 그젊은사무실직원도벌써 와 있었다. 일상적인모습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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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성이다방에들어왔을 때, 그는거리에서신원을감추려고머리를짧 게 자르고 선 라스를쓰고 있었다. 사무실 직원은 그에게 인사를 했다. 즉 시 황인성의천사같은얼굴을공포가뒤덮었다. 한순간에, 다방안에있던 모든 사람이난동을 부리며 뛰어올라 권총을 번쩍이며 그에게꼼짝말라고 고함을지르며달려가서, 마치위험한살인자인양그에게수갑을채웠다. 사 무실직원이 고개를 숙인 채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이 황인성을 끌고 갈 때, 나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라며울부짖었다.
그런다음, 사방이조용했다. 사무실직원은떠났다. 나는다시는그를보
지못했다. 우리가한국에있는동안나는황인성을다시만나지못했다. 그때가부활절기간 중 수난주간전 주 다. 예수가이중으로십자가에못 박히고 당국에 넘겨졌던 그 수난을, 나는 그 해 수난주간 이전에는 그렇게 깊이느껴보지못했다. 나는황인성에게가해지고있을모든것들을상상할 수있었다. 차례차례그의친구들도연행되었다. 서경석과그의형제인서창 석, 그리고 우리 집에서 있었던 학회나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인권 세미 나에서알았던몇명의 다른학생들도연행되었다. 나는황인성과다른학생 들을위해기도했다. 나는용서를기원했다. 나는그들이정상적으로살아나 오길기도했다. 과거에고문당한학생들중 일부가정신적으로아주나약해 져감옥에서나온적이있었기때문이다. 
세족식날, 나는교회예배에참가해서그날의강론자인문동환박사가준 성체를받았다. 우리가성체를포도주에담 때, 그가우리모두에게“ 죄가 사하여졌습니다.”라고말했다. 나는용서받았다고느끼지못했다. 나는아팠 고 여전히먹을수도잘 수도없었다. 부활절아침, 그날이부활처럼느껴지 지 않았다. 그날은성 금요일의어두워진세상과같았고, 원히그런상태 로있을것같았다.
부활절열흘 뒤, 누군가우리집 문을두들겼다. 처음보는사람이어떤의 사가이 작은꾸러미를 내게전해주라고 했다고 말했다. 작은상자안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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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이있었겠는가? 두장의작은종이조각이있었다. 첫번째쪽지한 면에는 한 로“ 서경석-소변샘플”이라는씨와날짜가적혀있었다. 다른면에는 “ 가능하다면, 제발 이 쪽지를 린다 존스 여사에게 전해주십시오”라는 과 함께내주소가있었다. 두번째쪽지에는“ 친애하는린다존스 여사, 저희는 여사께서잘 지내기를기원합니다. 저희는우리운동이여사께가져다준모 든역경들에대해정말미안합니다. 친구로부터.”라고쓰여 있었다. 첫번째 쪽지는 서경석이 감옥에서 의사에게 건네주었던 소변 샘플 병에 말려 있 었다.
나는 학생들이 감옥에서 내가 그들과 함께 일했기 때문에 추방당했다고
들었다는것을나중에야알았다.
 
우리가는앞길에어둔장막드리워도.
여러분은그 쪽지가내게무엇을의미했는지를알 수 있는가? 우선, 그것 은 서경석이정신을잃을정도로고문을당하지않았다는것을 의미했다. 그 가 투옥된다른친구들과연락을취하고있다는것을 뜻했다. 그것은그들을 감옥에갇히게한 나의실수를용서했다는것을의미했다. 그리고 적어도한 명의경비와한 명의의사와한 명의전달자가서경석의편지를감옥으로부 터 은 히 가지고 나와서 내게 전달한 것처럼,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깊이운동이침투해있다는것을의미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얼마나 감사했는지! 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싶었다!“ 이것이 누군가 부활했을 때 느끼는 감정일까?” 하고나는 생각했 다. 많은사람들이단지 메시지를전달하기위해많은위험을무릅썼다는것 을 깨닫고나는너무도감동했다. 친한친구들에게이 이야기를했을때,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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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나와 월요모임에 있는친구들은 가능한 모든방식으로 그들을 지원하 기로했다. 나는운동에더깊이관여하게되었다.
학생들은장기징역형을받았지만, 19 7 4 년 미 대통령제럴드포드의방한 과관련된정치적이유로 박정희대통령이대부분석방했다. 그때나는나의 가장끔찍한두려움이사실이었다는것을알게되었다. 황인성은고문을당 했다. 그는결코내게그것을말하지않았지만, 그의친구들이그 사실을말 했다.
학생들이 석방되었을 때는 비록 한국에 더 이상 살지 않았지만, 나는 수 년에 걸쳐 황인성을 여러 차례 만났다. 그는 남북한의 통일과 관련된 일을 몇 년 동안계속하고있다. 19 9 0 년대중반까지그런일은위험했고, 그로인 해그는한차례이상투옥되었다.
이 을쓰는현재황인성은민주적으로선출된노무현대통령과함께청 와대에서일하고있다. 나와다른월요모임회원들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의 예로운 손님으로한국을방문했던20 0 3 년 가을에, 그와함께훌륭한한 국음식을먹은것이나에겐커다란즐거움이었다. 
나는19 7 0 년대의황인성을알았던것이 광이었고, 오늘날그를아는것
도나에겐 광이다.
 
낙심한자돌아오는그날까지서리라.
남한전역으로 확대된 수사망으로 인해수많은 학생들이 투옥되었다. 공 개적인기도모임, 집회, 언론과의인터뷰에서한걸음앞서 나아간사람들은 바로 그들의 어머니 다. 서경석의 어머니김명진은 서울의기도모임에서 그녀가올린기도가전세계로알려지면서국제적인인물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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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8 2 년김명진(서경석의어머니), 신혜수(서경석의아내), 페이문, 그리고 나는(다른월요모임회원들과함께) 5천 명의다른여성들과함께인디애나 주의 퍼듀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린 기독교 여성대회에 참석하 다. 우리는 미국여성기독교인들이어떻게인권과민주화투쟁에관심을 갖고참여하게 되었는가에대해많은 것을배웠다. 그리고우리는성공했다. 다양한종파에 속한여성들이미국정부와국회가한국의독재정권을지원하는것을중단하 라는요구에앞장섰다. 
아들, 딸들이 투옥됨으로써 변화한 것은 어머니들만이 아니었다. 아내와 여자친구들이 힘든 겨울 내내 구속자들에게 사식과 따뜻한 담요를 보내는 연대단체의활동에합류했다. 그들은편지를쓰고, 기도모임을주도하고, 언 론과 이야기하고, 시청 앞이나 판사들이 정부의 선고를 형식적으로 승인하 는법원앞에서시위를했다.
19 7 6 년 3· 1 구국선언으로 구속된 12 명의 정치범 아내들은 단지 남편의 얼굴을보는것 외에는아무의미가없다며비공개재판정에들어가는것을 거부했다. 대신, 그들은서울의 가장번화한 거리에서 줄을서서“ 구속자에 게자유를”이라고쓰인양산으로시위를벌 다.
한국의 여성활동의 결과 중 하나는그들 자신의자긍심이 고무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남편들은 구속되기 전에도 대변인, 작가, 교회와다른 곳에 서 활동하는공인들이었다. 남편이투옥되자, 부인들이일어나서스스로 공 인이되어변호하고큰 소리로항변하면서빈자리를메웠다. 남성정치범들 은 석방된후집에와서 아내나어머니가이전의자기자신처럼강력한대중 적인인물이 되어있는것을보고매우놀라게 되었다. 그 여성들은 단지안 주인노릇이나하고요리하는일로돌아갈수는없었다. 나는일부가정에서 는이것이가족생활에서크게조정해야할문제 다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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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시대는새의무를우리에게주나니
19 7 4 년 우리가2년제임무를끝내고한국을떠날때, 남편들이감옥에있 었기 때문에 공항에서 내게“ 작별인사”를 한 사람들은 바로 여성들이었다. 그들은아주분명하게“ 2년동안우리는우리가할수있는모든것을당신에 게가르쳤습니다. 당신은 어로말합니다. 당신은교육받은선생입니다. 이 제 미국으로돌아가서임무를수행하십시오. 당신이보고들은것을말하십 시오. 당신나라에서민주화가작동케하세요. 만약당신의일이잘 된다면, 여기서우리일도훨씬더잘될수있을것입니다”라고말했다. 나는한국에선교를다녀왔다고생각했었다. 이제나는그 모든것이다가 올것을위해준비하는교육기간이었다는것을깨달았다. 운동권사람들과연 대하는시험에통과해야했던한국에서의초기시절처럼, 나는미국으로돌아 와미국에서한국과의연대사업을시작할수있을지알아봐야할것이었다. 나는어떤식으로든봉사할수 있을것이라고생각하면서한국에왔었다. 봉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것은 봉사가 연대로 발전한다는 것이었다. 나 는 함께일했던사람들을사랑하게되었고, 그들에게깊은존경심을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울고걱정하고 웃고, 그리고 함께계획하고 분석 하고토론하는것을배웠다. 우리는팀으로, 그리고하나가되어일했다. 나 는 외부압력을물리치는공동체와우정의중요성을알게되었다. 나는세상 에 존재하는하느님의가시적인선한공동체와하나가되었고, 그것이나의 일부가되었다.
미국에돌아온이후, 유사한축복이새로운 방식으로다시일어났다. 나는 비슷한 마음을 지닌 한국계 미국인들과 다른 기독교인들의 작은 공동체를 발견하여그후 18 년간그들과함께일했다. 우리가한국을위한연대사업을 하는동안, 우리생전에한국에서민주주의가실현될것이라는어떤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19 9 0 년대에 이루어졌다. 그것을 위해, 깊은 우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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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가르침받았던모든것을위해, 그리고 성장하는모든것을위해,“ 그 늘속에서, 하늘위에서계속지켜보고”서있는하느님을찬양한다.
 
어느민족누구에게나
어느민족누구에게나결단할때있나니, 참과거짓싸울때에어느편에설건가. 주가주신새목표가우리앞에보이니, 빛과어둠사이에서선택하며살리라.
고상하고아름답다진리편에서는일, 진리위해억압받고명예이익잃어도, 비겁한자물러서나용감한자굳세게, 낙심한자돌아오는그날까지서리라.
순교자의빛을따라주님의뒤를좆아서, 십자가를등에지고앞만향해가리라. 새시대는새의무를우리에게주나니, 진리따라사는자는언제나전진하리.
악이비록성하여도진리더욱강하다. 진리따라살아갈때어려움도당하리. 우리가는앞길에어둔장막드리워도, 하나님이함께계셔항상지켜주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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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 장
1979~ 80:폭력이극에달하고 독재정권이약화되기시작할때
편집자들
19 7 5 년경박정희독재정권은확고히자리를잡았다. 그는군대, 중앙정보 부, 국회, 그리고 법원을 완전히 통제했다. 반정부 인사들을 괴롭히고 위협 하고 연행할 수 있는 아홉 개의 긴급조치와 다른 억압적인 법령을 통해서, 박정희는언론, 대학, 노동운동, 그리고심지어대다수의교회들까지도효과 적으로통제했다. 그러나여전히반대진 의아성으로서, 특히월요모임회 원들과 관계가 좋은곳이남아 있었다. 그곳은범종파적 교회써클, 그리고 대학과공장이었다.
19 7 9 년 여름, 남한에서긴장의수위는높아가고있었다. 점차편집증적이 된 박정희는실제나가상의모든반대진 을근절하는데 사로잡힌것 같았 다. 박정희의탄압기구로경험을쌓은중앙정보부는그를기쁘게해 주려고 혈안이었다. 더 나은 노동조건과 생계비를 얻기위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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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투쟁을 경찰은 무자비하게 탄압하 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권익에 관심 을 갖는도시산업선교회와다른단체들이공산주의이념에물들었다고대중 에게선전하는광범위한운동을시작했다.
박정희정부는노동자, 학생, 그리고일반인들이부산과마산과같은남동 쪽 산업 중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 도시들은 정권의 경제발전계획에서특혜를 받은 곳이었다. 박 정권 내에서는 시위를 다루는방법을놓고견해의차이가생겼다. 박정희가이끈그룹은더엄격한 통제를원한반면에, 다른사람들은유신의통제를완화시키기를원했다. 
19 7 9 년 10 월 26 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부장김재규와시국을의논하기 위해청와대 근처에 있던몇 개의중앙정보부“ 안가” 중한 곳을 방문했다. 열띤 토론이 시작되자 김재규는 권총을 꺼내박대통령과 경호원을 모두 쏴 서죽 다.
나라는불확실성의 시대로빠져들었다. 암살에 대한 소식을조심스럽게 통제했지만조금씩조금씩새어나왔다. 처음에는청와대근처에서원인모를 총격전이있었고박정희가부상을당해의식불명이라고만보도되었다. 마침 내 우리는그가오랜친구인중앙정보부부장에의해 암살당해죽은것을알 았다. 끔찍한 중앙정보부가이제 국가를 운 할지도 모른다는 상당한 우려 와공포감이일었다.
처음에는충격을받고불확실한시간이지난 뒤, 한국친구들과함께월요 모임회원은굉장히안도를했다. 우리는암살이마침내억압적인독재자의 통치를종결시켰다는것을깨달았다. 우리는남한의오랜세월의억압과가 혹한인권침해가박정희의죽음과함께종결될가능성을환 했다. 뒤이어몇 주 동안우리의안도는확실한것 같았다. 헌법에따라, 국무총 리 최규하가대통령직무대행이되었다. 그는19 4 6 년 정부공무원으로들어 와 19 7 6 년 국무총리로 지명되기까지 여러 관직을 역임했던 전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의교수 다. 최규하는마음이좋고선한사람처럼보 으나,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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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질때문에결국박정희암살에따른거친내란을막지못했다. 최규하는한국을옳은방향으로움직이고있다는인상을주었다. 그는정 부나유신헌법에대한비판을범죄화했던긴급조치9호를폐지하 다. 우리 친구들중 많은사람들이감옥에서풀려났다. 노동자들은표현의자유를더 누리기시작했다. 엄격히통제되었던언론은약간개방되기시작했다. 최대 통령은 전 이화여대 총장인 김옥길 박사를 남한의 최초 여성장관으로임명 하기까지 했다. 문교부장관에 지명된 김옥길 장관은 곧바로 대학의 통제를 없애는일련의조치들을취하기시작했다.
그짧은 기간동안가장 흥미로운사실은답답한박정권의 통치기간을그 에게아첨하며 보냈던 모든정부와 언론 관계자들이 갑자기 공개적으로 박 정희와그의통치를비난하기시작한것이었다. 
이런진전 때문에 월요모임 회원들 중 일부가 우리의 존재이유가 없어지 는게아닌가 하고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우리는좋은 소식을 전하는 기쁨 에빠져있었다. 그러나그뒷전에전두환이숨어있었다.
 
박정희 암살에대한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되었을 당시, 한국 육군소장 전두환은보안사령부의사령관이었다. 이러한권력의자리에서전두환과그 의 친한 친구 노태우 장군은 정권을 찬탈할 음모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첫 조치가두 사람이쿠데타를일으킨다른장교들과합류한19 7 9 년 12 월 12 일 에취해졌다. 육군부대가육군본부앞에집결했고, 곧대한민국육군참모총 장정승화가부상을입고연행되었다.
그 당시육군부대는표면상유엔연합사령부사령관인미군장군존 위컴 의 지휘하에 있었다. 대한민국 육군부대는 위컴에게 통지하여 그의 허가를 받지않고서는 전선에서 차출될 수 없었다. 그런 군 부대의 이동은 (북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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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경계의) 일부지역을지키고있는미군의측면을노출시키기 때문에위컴 이 알 필요가있었다. 다른상황이라면전두환의불법적인부대이동은가장 위험한 반역으로 처벌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의 경우, 결과는 한국군의완전한장악이었다. 
반란이일어나는동안, 위컴장군과윌리엄라이스틴미 대사는미군본 부 건물에있는벙커안으로도피해야만했다. 그들은내란을두려워했던것 같다. 이후 공식보도에서 위컴과 라이스틴이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화가 났다고했지만, 그들은이두사람에대해어떤조치도취하지않았다. 대통령권한대행인최규하를표면상의수반으로하고, 전두환과노태우는
막후에서실제로정부를운 하기시작했다. 
우리는사태가이렇게변하자아주냉정해졌다. 기쁜소식을누리던시절 이 끝나고있는것처럼보 다. 그러나다시한번긍정적방향으로놀라워했 다. 19 8 0 년 초에정치적 분위기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대 통령권한대행최규하는박정희의긴급조치들을해제하고야당지도자인김 대중을복권시켰다. 새로운헌법에대한논의가 시작되었다. 대학교수들과 학생들이감옥에서석방되고대학교에복직되었다.
오랫동안억압당했던노동운동또한자유롭게숨쉬기시작했다. 노동자들 은 마침내수십년간정부가강요한 착취에대해자유롭게불만을표시했다. 파업이아주일상적으로일어났고, 박정희시절있었던경찰의폭력적인진 압은없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단지 그의시대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동해안의 광부들이 위험한 작업환경과 저임금에 항의했을 때, 전두환은 그의군지위 를보안사령관으로유지하면서스스로중앙정보부부장으로취임하 다. 월요모임의우리대부분은 여전히 천진난만하게잘될것이라고희망했지 만 일부한국인들, 특히학생들은전두환의의도를재빨리감지했다. 그들은 군부의 정권찬탈에 대해지지를 표시한 위컴장군의 공개적인 발언에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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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개했다. 가장 나쁜 비유로 위컴은 한국인들을 맹목적으로 지도자를 따르 는 나그네쥐로비유했고, 한국인들을올바른방향으로이끌강한지도자를 요구했다. 그는그런지도자는오직군대에서만찾을수있다고선언했다. 나그네 쥐는한국에 서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자들은 위컴이 의미하는 것을설명하는데어려움을겪었다. 그래서“ 들쥐”라고표현했다. 질나쁜비 유적표현과강력한군부통치에대한위컴의요청은, 당시지도력을확보하 려했지만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인기 없는 전두환에게 예기치못한 보너스 다. 일부에서는위컴이그의“ 나그네쥐”인터뷰를뉘우치길바랐지 만, 피해가 있었다. 12 · 12 쿠데타 동안미국의 승인없이군대를 전선에서 차출한전두환과노태우에대한제재없이, 미국은또 다시많은한국인들의 여론에대해눈감고말았다. 
전두환이 스스로 중앙정보부 부장에취임하자, 전국적인 대규모시위가 일어났다. 서울중심가에살던진 매튜스는시위학생들이그들의얼굴과눈 에 묻은최루가스를씻어내기위해그의마당에있는우물을사용하도록대 문을열어놓았다고회상한다.
이 대규모저항에대한조치로, 전두환은5월 17 일부터18 일 밤에갑자기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국회를 해산하고 수많은 학생들과 정치인들을 연행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두환은 완전히새로운 억압체계를구축했다. 그는시민통제에직접군대를투입했다. 비록박정희 도군사쿠데타로정권을 잡았고계엄령기간동안군대에크게 의존했지만, 대중들을 통제하는 데는 주로 중앙정보부와경찰을 이용했다. 전두환의계 엄령 선포 뒤, 우리 친구들을 포함해 수 천명의 정치 지도자들과 교수들이 군대에 연행되어 군사감옥으로끌려갔고, 벌거벗겨져서무자비하게 구타당 했다. 월요모임회원메리언김의남편김용복도이런 끔찍한폭력의피해자 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 혐의도 없이 체포되었다. 피해자들은 아주끔찍 하게구타당한뒤 풀려나집으로기어갔다. 사람들에게겁을주려는의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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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했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아주 두드러진 예외가 있었다. 그곳은광주 다. 
 
복잡한역사적이유로, 전라남북도로구성된한국남서쪽주민들은수 세 기 동안특히 전두환과 박정희의 고향인 소위 경상남북도 엘리트들에 의해 차별을 받아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 산업발전을 추진 함으로써전라도지방을차별했다. 박정희와마찬가지로전두환도전라남도 출신야당지도자김대중에대해특별한혐오감을가지고있었다. 한국의네 번째도시이자전라남도도청소재지인광주사람들은결코수 동적으로 그런 차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오랫동안 반골기질 로유명했다. 모든한국인들이전두환의최종적인군부권력장악에다소순응 했을때, 광주시민들은대부분“ 들쥐같지않은”태도로반란을일으켰고도 심 한복판에서대규모시위를벌 다. 5월 18 일, 전두환장군은김대중을시 위의빌미로비난하면서체포하라고명령했다. 전라도의아들이연행되었다 는 소식이 퍼지면서, 광주 시위자들은 계엄령 철폐와 민주적인 선거일정을 요구했다. 학생, 노동자, 시민들로구성된 시위대는 십 만명이상까지 늘어 났다. 전두환은 공수부대를 광주 진압군으로 보냄으로써 반란에 대응했다. 공수부대는 훈련이 잘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잔혹한 것으로 악명 이높았다. 전두환은분명히시위자들에게두려움을불러일으키려고했다. 완전무장한군대가총검을장착하고군중에게나아가서발사하기시작했 다. 잇따라일어난일이 너무잔인해서사람들은학살보도를믿을수가없었
다. 시위자들은 총과 총검으로 구타당해 죽었다. 나이 든 여자들을 비롯해 여성들은강간당했다. 사람들을벌거벗겨도로위에강제로눕혔다. 어떤목 격자는 군인들이 골목아래쪽으로 임신한 여성을 쫓아가 그녀의 배를 총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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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갈라서 피로 물든 태아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어떤 보도는
(19 8 0 년 5월 22 일자「뉴욕타임즈」) 학생들이목에밧줄이묶인채거리로끌 려 다녔고, 경찰이죽은시위자들을공원에거꾸로매달아놓았다고보도했 다. 시민들은공수부대원들이신원을확인하지못하도록희생자들의얼굴들 을 일그러뜨렸다고보도했다. 군인들이진압전에술에취했거나마약을했 다는이야기가떠돌았다. 그렇지않고는한국군인들이동료시민들에게그렇 게 잔인할수 있다는것을믿을수 없었기때문이다. 아들을잃은한 아버지 는 그 잔혹함을 보고,“ 아주미친개처럼, 주인조차알아보지못하는것 같 았다”라고 말했다. 광주의 병원들은 중상을 당한 시민들로 넘쳐났고, 죽은 시신들이거리에흩어져있었다. 
믿기지않게도폭력과혼란의와중에학생들이주도한광주시위대는5월 21 일 광주를다시장악하 다. 군대가시위대에총을발사하여11 명을사살 하자, 부엌칼, 쇠파이프, 짱돌, 깨어진병들로무장한약 2십만명의시위대 가 군대와대치했다. 일부시위자들이군대와경찰서에진입하여무기를획 득하고공수부대를몰아낸후도시를장악했다. 동시에, 16 개의다른전라도 지역도시들에서도연대하여시위대가봉기했고, 대부분의전라도지역경찰 서장들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광주 시민들은 효과적으로 도시를 군대의 통 치에서벗어나게했다. 
군대는광주외곽으로퇴각하여바리케이드를치고교통의왕래를통제하 다. 도시내에는시민들이스스로질서를유지하고교통을지도하며, 부상 자들을 병원으로 옮기고 헌혈을 호소하고 죽은 사람들을 매장했다. 그리고 음식과식수공급을책임질효율적인시민규찰대를구성했다. 성직자, 대학 교수, 학생, 시민지도자등으로구성된30 인의시민위원회가계엄사령부와 의 협상을위해구성되었다. 위원회는휴전을선포하고평화적해결을위해 정부군과 협상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간접적으로 미대사관에 중재를 호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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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그의권위에대한이 성공적인도전에분노했다. 그는즉시광주 를 탈환하고 감히 그에게 도전했던 사람들을 처벌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 다. 그가착수한방법은미국에또다른수치를안겨주었다. 며칠동안도시를장악하고격리된뒤 5월 26 일 월요일, 1만 7천 명의군
대가광주를기습했다. 5월 27 일이른아침에시민들은항복해야만했다. 한미연합사령관인위컴장군이광주항쟁을진압할목적으로그의휘하에 있는수많은한국군을풀어주었다는것을우리는나중에알았다. 한국군20 사단을풀어주었을뿐만아니라, 미국이보급한무기와탱크들이광주로진 입하는한국공수부대와함께들어갔다.
 
월요모임회원이자캐나다선교 간호사겸교육자인메리언포프가광주학 살을 목격했다. 음악가이고 부목사이자 신앙심 깊은 여성인 메리언은19 5 7 년에서93 년까지한국에서봉사했다. 19 8 0 년 5월 항쟁기간에, 그녀는광주 에 소재한간호대학에서일하고있었다. 아래의설명은20 0 5 년 전화인터뷰 에서옮겨편집한것이다. 그녀는25 년이지난뒤에도학살에 대한기억들이 생생하고 아직도 고통과 슬픔을 불러일으킨다고말했다. 그녀의 설명은 다 음과같다.
“ 공수부대가5월 18 일 일요일에광주로들어왔어요. 그날아침에교회(양 림동 대한장로교회)에서우리는 광주에 있는 대학교에서 일어난 휴교에 항 의하는학생시위와그 진압과정에대해들었어요. 교회신자인명노근교수 가 정부당국이교수들에게학생감시를강요했다는성명서에 서명을했다는 이유로1년간의감옥살이를막끝냈어요. 그는감옥에서풀려난뒤전남대학 교에복직되었어요. 대학들이다시엄격한감시를받을것이 틀림없었고, 그 는 과거행적들로인해목표물이될것이었기때문에 교회장로들이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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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재빨리광주를떠나라고재촉했지요.”
“ 예배후 나는교회장로들중 한 명과무슨일이벌어지고있는지를알아 보기 위해중심가로 갔어요. 난투가 있었음을 암시하듯이 경찰서 앞거리에 주먹크기의 자갈들이 있었지만, 전투 경찰들은 거기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 고 있었어요. 우리는거기에서별다른조짐을찾을수 없어서, 몇명의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있던YWCA 로 향했어요. 지도자들은지난 며칠동안 일어 났던 일에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었어요. 전국적으로학생지도자들의 투옥 과계엄령선포, 군의경계령강화와서울에서의데모, 지난며칠밤 동안있 었던평화시위, 광주와다른도시에서 대학들의 휴교, 그리고 그날아침휴 교에항의하는학생시위등등일련의사건들이있었어요.”
“ 그곳을떠날때, 우리는지방의회근처거리 끝에잠시서있었어요. 새로 운 일이일어나고 있는것 같지않아, 우리 둘은시내에서 집으로 돌아왔어 요. 내가 집으로 향한지 15 분 만에 공수부대의 습격이 있었지요. 당시에는 몰랐지만, 18 일로부터2주전에많은도시들과마을로군대가파견되다는것 을 나중에 시골사람들에게들었어요. 일부 도심지역에서소규모 접전이 벌 어졌다고했어요.”
“ 군대는 중심가를 급습했어요. 처음에는 사람들을 구타했지만, 나중에는 총검을 사용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총을쏘기시작했지요.” (한스님에 따 르면, 공수부대원중 한 명이군인들은 시내에공산당이있으며 군인 1명당 다섯명의공산당들을죽여야한다고들었다고그에게고백했다. 당시군인 들은굶주렸고, 감각을마비시킬정도로술을마셨다고한다.) “ 심지어 미국정부조차광주기습 계획에 대해 아는것이없다고 부인했고 이와 어떤관련도 없다고 했지만, 광주로 들어간 정규군들이 작전개시2주 전후로미군공군기지에있었다는것이지금은알려져있지요.”
“ 5월 22 일, 처음군인이도시로들어간지 사흘뒤, 학생들이광주남쪽에 있는 시내 경찰서에서 무기를탈취했고 지프차와 군장비들을 빼앗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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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도시를다시장악할수있었어요. 전도시가학생들을지지하고군인 의 잔혹함에 대항하여 일어났어요. 학생들은 시민들을 보호하는데 막중한 책임감을느끼고있었어요. 학생들은할수 있는한최선을다해부상자들과 시민들에게필수품을제공하기위해스스로를조직했지요. 약탈이나파괴는 없었어요. 파괴된 유일한 재산은 라디오 방송국이었어요. 방송국이 사실을 보도하기를 거부했고, 모든 사람이부적절하다고 느끼는 감상적인 음악을 계속내보내고있었기때문에공격당했지요.”(라디오방송국을학생들이불 질 는지, 아니면 시민들이 방송국을 장악해서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 국으로방송하는것을두려워한공수부대가그랬는지는모른다.) “ 부시장이YM C A 와 우리병원출신의장로들을비롯하여몇몇교회장로 와목사들에게군대와학생들사이에개입해줄것을요청했어요. 그리고5월 25 일 휴전이성립되었지요. 그러나26 일 새벽에군인들이다시장로교선교 사 구역을통해도심으로재진입했어요. 그들은구YM C A 건물로들어가사 람들을건물밖으로 몰아내고사살했어요. 건물앞에지키고 서 있던두 명 의 여중생들이총에맞아죽었어요. 그런다음군인들은중심가로향했지요. 그들은 학생들이 무기와 탄약을 쌓아놓고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도청 건
물로갔어요.”
“ 그주에광주에있었던 젊은이들중 한 명은당시에우연히집에있었던 서울 한신대학교 학생이었어요. 그의 아버지는 광주 성결교회 목사 지요. 그 학생은습격하는공수부대에저항하는항쟁에가담해서연행되었다가풀 려나집으로왔어요. 그의어머니는나가지말라고애원했지만, 아들은그냥 집에조용히있을수가없다는것을알았어요. 그는다른학생들과함께 있어 야 하며그들이도시를지키는것을 도와야만한다고생각했어요. 그는어머 니를 진정시키려 했고, 어머니에게 휴전이 성립되어서 사태가 이제조용해 졌기때문에모든것이 잘 될 것이라고말했지요. 그러나그 날이(5월 26 일) 군인들이다시도시로재진입한 날이었어요. 그들이도청건물로향하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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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군인들은기관총을난사하여이 학생을비롯해많은사람들을죽 어요. 그를본사람들은그가사살되기전에고문을당했다고말했지요.” “ 군대가광주를장악했을때, 부상자들은전남대병원이나시내개인병원 으로호송되었어요. 내가일하던병원은시내바깥에있었지요. 우리는부상 자들을돕기위해수혈팀을조직했지만처음에는아무도오지않았어요. 우 리는그것이 군대가 사람들이 광주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있었기 때문이라 는것을나중에알았어요. 그러나5월 21 일수요일정오무렵, 부상자들이우 리 병원에오기시작했어요. 공수부대가전날일반군인으로대치되었고, 학 생들이부상자들을탈취한지프차로실어우리병원으로 호송하기시작했어 요. 한부상당한젊은여성은다시 돌아가서다른사람들을도와야하기때문 에 자기를먼저치료해달라고간청했어요. 그리고치료가끝나자마자서둘 러떠났어요. 그러나광주로들어가자마자사살되어죽었지요.” “ 마침내군대가학생들을진압했고, 정부는학생들을도운목사들과교회 지도자들을 반란죄로 기소했지요. 명노근 교수도 징역형을 선고받았어요. 우리교회의은명기목사를비롯해네 명의다른사람들은사형선고를받았 어요. 다행히은 목사는체포를피해숨을수 있었지요. 광주가너무위험해 서떠나야만할 때까지, 그는약두 달동안 광주에숨어있었어요. 경찰들이 그를찾는데 혈안이되었고, 그가 숨어있던집 아이들이 물어보기 시작했 지요.”
“ 나는그가서울에있는캐나다선교사월터 비첨과리어노어비첨부부와 함께머물도록주선했어요. 은목사는적당한시기에구급차에실려광주를 빠져나와 서울로이동했어요. 그는그 집 다락방에숨어서 6개월동안비첨 내외와 함께지냈지요. 은목사아내는 내내남편이 있는곳을몰라서 몹시 걱정했어요. 그녀를위험에빠뜨릴지도몰랐기때문에, 우리는그가있는곳 을 알려줄 수 없다고생각했어요. 우리가그녀에게 말할수 있는것은누군 가가남편을돌보고있으니걱정하지말라는것이었어요. 몇달 뒤, 나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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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에게 남편의 편지를 건네주었지만, 그녀는편지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 게 전달되었는지를 계속 몰랐지요.” (결국 모든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감형되어풀려났다.) 
“ 군대가도시를장악하고있는동안, 우리교회장로들은외국인들과 공산 주의자들이“ 반란”을 선동했다는 (헬리콥터와 경비행기에서 보내는 방송을 비롯해서) 소문이퍼지고있으니까도심으로가지말라고말했어요. 교회장 로들은 만일내가 공개적으로 목격되거나 사진이 찍히면 소문에 기름을 부 을 것이라우려했어요. 이 기간동안모든통신이 단절되었지만, 여전히장 거리전화를 받을수 있는전화가 있는선교사 집이있었어요. 그 집에는 많 은 사람들이 피신하고있었고, 그들 중에전두환의 경호원들 중 한 명의친 척이있다는말이있었어요. 서울출신인그 여성은친구를방문하러광주에 와 있었어요. 한밤중에몇차례 기관총발사소리를들었을때 그녀는옆집에 있었는데, 총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 같아서 공포에 질려 안전함을 찾아 이 선교사집으로왔어요. 그녀가선교사집에있는동안청와대로부터전화가 왔고, 그녀에게그곳에있으라고말했어요. 분명서울에있는당국자는그녀 가 그곳에있는 것을알았어요. 한번은다른선교사 집도전화를 받았어요. 전화를건사람은광주를떠나라고말하며“ 그캐나다여성” (나를지칭하며) 역시 광주를 떠나라고 했어요. 선교사들은발신자에게 자신들은 떠나지 않 을것이며, 캐나다여성도떠나지않을것이라고말했어요.” “ 대학병원직원들이시신들을야외의임시 안소에안치해놓았지만, 군 인들이와서시신들을가져갔어요. 또한군인들은아직살아있는심하게구 타당한환자들을데려갔어요. 군인들이그들을 트럭에실고사라졌어요. 근 처 농부가트랙터로논을깨끗이정리하고떠나라고명령받았다는이야기를 나중에들었어요. 군대가그곳과다른농부의논에서포병훈련을했다고하 니까그곳에사람들을묻었을지도모르지요.”
“ 공수부대가철수하고, 일반군인들이광주일대의학교운동장에천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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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고주둔했지요. 군인들은천막을친 학교교문과운동장주변을경계했는 데, 놀랍게도광주에서일어나고있는일을전혀몰랐어요. 아무도그들에게 알려주지않았지요. 예를들면, 그들은도시전체시민들이공수부대에게이 유없이 공격당했다는것을 몰랐어요. 그래서 일부 교회사람들이 군인들에 게일어났던일을알리려고막사 주위로갔지요. 군인들은먹을것이없었기 때문에교인들은음식도막사로가져갔지요.” “ 이기간 동안일어났던놀랍고감동적인일은광주시민들의수많은친절 한 행동이었어요. 사실전 도시가 학생들을지지하고군대의 잔혹함에저항 하며일어났어요. 군대가두 차례도시를 장악했을 때, 그들은 도시진입로 들을차단해서아무도드나들지못하게했지요. 그러나농부들은도시로진 입하는 뒷길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우유를 배달하곤 했지요. 그들은 우리에 게우유를살균하지않았으니마시기전에끓여먹으라고했어요.
“ 군인들은 사람들을 굶겨서 항복하게 하려고 모든점포들을 닫도록 명령 했어요. 그러나점포주인들은 재빨리점포뒷문을열고사람들에게생활필 수품을제공했어요. 시내밖의교회와지역단체에서온 많은여성들이점심 도시락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져왔어요.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가장 가난 한 사람인, 신발 가게에서일하는여성한 분은맛있는 두유를 만들어 학생 들에게 주었어요. 심지어 매춘부들도 자기 돈으로 학생들에게 음료수와 간 식을사주었어요.”
“ 우리병원직원들은계속절반으로식량배급을했기때문에, 우리는충분 한식량을가지고있었어요. 안전하게집으로돌아갈수없는 많은사람들이 피난처를찾아왔기때문에병원 인구가두배로늘었어요. 나는이것이하느 님의왕국과닮았다는극적인감정을기억하고있어요. 모든사람들이서로 를돕고돌보고있었어요.” “ 이기간동안한국사람들과다른사람이사진을찍었어요. 장로교선교사 인 마사 헌틀리와 베츠헌틀리는 한국을 떠나는 사람에게 사진들을 안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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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가지고갈방법에대해 세 하게지시하여해외로반출하려고했어요. 불 행하게도, 그 사람은 지시를 따르지 못했고 사진들은 공항에서 압수당했어 요. 그러나 다른사람들이 조금씩 사진을 광주밖으로 가지고 나갈수 있었 어요. 월요모임회원인메리언커런트는휴가차캐나다로돌아갈때 짐 안에 몇 장의사진들을가져가는데성공했어요. 몸에들어가면여러조각으로파 편화되는 총알로 사살된 사람들 사진이 있었어요. 일부러 사진작가의 신원 은 메리언에게알리지않았기에, 설사공항에서조사를받아도그녀는솔직 하게누가그사진을찍었는지모른다고말할수있었지요.” “ 우리는 광주학살 동안 3천에서 4천 명이 살해되었다고 믿었어요. 몇 년 뒤, 어느 인구조사 연구자가 평상시보다 몇 배 높은, 가장 높은 사망률이 19 8 0 년 5월 광주에서 기록되었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그 수치를보고했던 사람은직장을잃었고, 그수치는결국“ 수정”되었어요.”
“ 광주대학살은이제한국의 5천년역사에서한 축으로생각되고있어요. 그런끔찍한비극이‘ 진보하고문명화된’ 현대세계에서일어날수있다는사 실이여전히믿기지않아요. 만일제눈으로그광경을 보지않았다면, 저역 시여전히믿지않았을거예요.”라고메리온포프가말했다.
 
메리언포프와같이많은월요모임회원들이한국에수십년 동안살면서 일한반면에, 린다존스와같은다른사람들은불과몇 년 동안한국에있었 다. 고국에돌아간월요모임회원들은민주주의와인권운동을돕는일을결 코그만두지않았다. 린다가가장좋은본보기이다. 19 7 5 년그녀는시카고로 돌아가곧바로아시아교회인권위원회를설립했다. 그녀는다른월요모임회 원들및 한국의지도자들과계속긴 하게연락을취했고, 미국시민들에게 특히 미국기독교인들에게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알리고 한국의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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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투쟁을 지지할 것을 촉구하는 독특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아시아교 회인권위원회의월간지「아시아인권수호」는 인권투쟁일지를계속실었다. 그 소식지는 한국 운동권에서직접 전달된 세계에서 가장최신의 소식통이 었다. 
「아시아 인권수호」의 19 8 0 년 1, 2월호의표제는“ 한국: 어떤일이든지일 어날 수 있다” 다. 그것은 강경파 전두환 장군의 새로운 계엄정부와 다시 한번완전히재갈물린한국언론, 그리고김종필이권력자로부상하여다수 당 당수로등극한사실등에대해 보도했다. 19 8 0 년 4월 판의“ 긴급”뉴스에 서는최근 한국역사에서가장끔직한 고문을 감독한 전두환에 대해 독자들 에게 경고했다. 이 잡지는 전두환이 어떻게 계엄사령관뿐만 아니라 중앙정 보부장이되었는지를보도했고,“ 전환기에놓인한국정치가막을내리고본 격적으로고통의시기가시작된것같다”라고결론지었다. “ 우리는그와같은말들이 정말기정사실화되고있다는것을거의알지못 했어요”라고오늘날린다존스는회상한다. 미국에서19 8 0 년 현충일이(5월 마지막 월요일) 다가올 때, 그녀는 한국에서 걸려온 긴급 전화를 받기시작 했다. 광주에서벌어지고있는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수많은한국군이광주 외곽에집하여도시를탈환할준비를하고 있었다. 무슨일이벌어지고있 는지알고있는한국인들은(대부분은알지못하고있었다) 미국정부에있는 사람들에게알리려고백방으로노력했다. 그들은미국이전두환과광주시민 간의협상을중재하기를원했고, 재앙이광주를덮치기전에미군이개입하 길원했다.
린다와아시아교회인권위원회가있는일리노이주에는강력한상원국제외 교위원회위원인찰스퍼시라는유능하고믿을만한상원의원이있었다. 그러 나그날이현충일이었기때문에의회사무실은사흘 동안닫혀있었다. 린다 와위원회간부들이계속상원의원과전화를시도했지만연결되지않았다. 한국군대가5월 26 일 광주재탈환을시도하기 두시간전에, 워싱턴에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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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미 국무성대변인은미국이평화적인해결을위해최대한노력을촉구했 지만“ 총체적인 무질서와 혼란을 무한정 계속 용납할 수는 없다”고 발표했 다. 미 국무성은 군대가 도시를 떠나고 경찰이 무기를 내려놓은뒤 광주가 고요함을 되찾았다는 것을 몰랐음이 분명했다. 습격이 있기 3일 전 미국의 견해에대한질문에, 국무성은광주에서평화가회복될때까지민주화가지 연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전두환은 광주에 대한 폭력적인 재탈환보다 더확실한승인은필요로하지않았다.
미국인들이현충일파티를끝내고잠을자고있는동안, 전두환의군대가 광주에 재진입했다. 린다는“19 7 5 년 부활절, 한국인 친구들의 투옥과 고문 뒤에수난주간이내게새로운 의미를가져다주었듯이, 5년 뒤 현충일은 더 욱 깊은 애도와 슬픔의 감정을 품게 했다. 미국 민주주의의 무력감이 나를 짓누르고있었다. 그것은 마치광주에서 내 자신의 일부역시죽은것과같 았다”고회고한다. 
19 8 0 년 6월에「아시아인권수호(A sian Rights Adv oc a t e ) 」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 대개 조국에 필요한 정치개혁에 보수적이고, 조심스럽고 침 묵했던한국인들이` —`광주시민과연대해서미국전역에서일상을중단하고 집회를열었다고보도했다. 수많은사람들이로스앤젤레스, 워싱턴D. C , 시 카고, 그리고메사추세츠주의캠브리지에서열린집회에 참석했다. 5월 29 일, 뉴욕시의리버사이드교회에서열린광주희생자에대한애도예배에는 수많은한국인들과미국인들이참석했다.
학살에대한세부적인사실들이서서히폭로되었다. 며칠동안광주는고 립되었다. 외신기자들도들어가기힘들었으며시민들은빠져나올수가없었 다. 마침내이야기가한국내에퍼지기시작했다. 사람들은자신이목격하고 들은것들을이야기하기시작했고, 해외언론은학살에대해 더 자세히보도 했다. 한국언론에서는광주에대한소식들이모두 통제되었기때문에, 아시 아교회인권위원회에서린다의역할은한국에서일어난사건에대한해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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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과의견들을모아서한국에보내는것이었다. 투쟁에깊이몸담고있는한 국인들은해외에서보도되는것들을알고자했다.
광주에서벌어진비극으로인해국제인권단체들은다음해에한국인수감 자들을석방시키고, 한국에대한미국외교정책을재평가하고, 값싼한국인 노동력을이용하고있는서양기업들의활동을분석하고, 제2차세계대전후 미국과소련에의해분단된남한과북한의현실을새롭게보기위해상당한 노력을하게되었다.
군사통치는몇 년 동안한국에서종식되지않았다. 그러나광주순교자들 의 피는 국내외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새로운 생명과 에너지, 그리고 결단력을주었다.
 
진매튜스는개인적으로다음과같이회고했다. “ 광주항쟁과그것이해결되는방식은저와많은친구들, 동료들에게는개 인적으로 커다란 슬픔의 시대를 가져왔어요. 슬픔과 쓰라린 실망감은 광주 를 넘어한국전역에서 계속되는 일반적인 진압, 대규모 연행, 그리고 고문 과 학대에 대한 이야기로 번져갔어요. 이 모든 과정에서 저는 당시 서울에 있던윌리암F. 라이스틴대사와존 A. 위컴장군을통해감지되는미국의 개입때문에우울했어요.” “ 저는 라이스틴대사를자주만났고이따금위컴 장군도만났지요. 저는 두 사람모두훌륭하고선량한사람이라고생각합니다. 20 0 2 년에죽은 라 이스틴과위컴은각각19 7 9 년과19 8 0 년 사이그들이취한조치와취하지않 은 조치들에 대해설명하는 책들을 썼지요. 둘다 자신들이 행한조치와 행 하지않은 조치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필요한 것이었다고 강하 게 확신하고 있더군요. 불행하게도, 당시그들의조치와공개적인성명서는
42 9 
미국이공식적으로전두환의군부가정부를장악하고광주민중항쟁을잔인 하게진압하는것을지지한다는강한인상을주지요.” “ 광주 진압과정에서 한국군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 는가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관심있는역사가들은 대략 2천명의 시민들이 광주에서 사살되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리고 평생 절름발이가 된 사람들을포함해서수많은사람들이심각하게부상당했다고추정합니다. 전 두환정권의 변명꾼들은사망자 통계가“ 불과”20 0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지 요. 전두환과그의장군들은20 0 명이라고말하면밤에잠을잘잘수있을것 입니다. 그러나 저는, 권력에 굶주린 장군의 자아도취를 위한 것이라면 단 한명의목숨도너무많은것이라고생각합니다.”
“ 20 0 3 년에한국민주화를지원했던 다른사람들과함께월요모임회원인 우리는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초청으로한국에갔지요. 우리는광주에가 서 군인들이 시민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담긴 상물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수많은학생과젊은이들이음식이나식수, 그리고화장실도없이갇혀있었 던 좁은감방을보았습니다. 우리는죽은사람들이묻혀있는묘지도참배했 습니다. 잠시 저는 그 많은 무덤들 사이를 혼자 배회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서 있었습니다. 제가진정으로그들의죽음을애도하기때문에커다 란 슬픔의눈물이났지요. 그러나짧은기간동안한 도시가자유에대한전 망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은 한국인들이 지닌 자부심에 감동한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강력한군대의총검에맞섰습니다. 그리고최고의상을위 해 가장비싼댓가를지불했습니다. 군인들은철수했고, 아름다운광주는이 제자유의등대로서있습니다.”
 
광주를 하나의 등대로 삼아, 한국인들은 여전히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43 0 
을 정립하기 위해 할 일이 많았다. 첫째, 한국인들은19 8 0 년 8월 대통령에 취임한전두환의통치에시달렸다. 전두환의무질서한통치에뒤이어, 19 7 9 년 군사 쿠데타의 공모자인 노태우가 후임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는 시민들이하향식통치를용납할수 없었고, 민주적인목소리를갈망하고 있었다. 노태우의권위주의적인선출에항의하는학생시위에시민들이합류 하여노태우의대통령지명을철회했다. 
그결과, 19 8 7 년한국은노태우가두명의오랜민주지도자인 김 삼과김 대중과함께출마한, 최초의공개적이고상대적으로자유로운대통령선거를 치루게되었다. 양김은처음에단일화에대해이야기했지만, 당파분쟁과분 열로단일화에실패했다. 민주진 의투표가양 김에의해분할되고노태우 가불과총투표자수의 3분의1을득표하여대통령으로당선되었다. 비록그의선임자들이세운혹독한수많은정책들을계속시행했지만, 노 태우의 임기기간은 강력한 강제력이 없는 어느 정도의 완충기로 기록된다. 임기가 만료되었을때, 조사를 통해두 사람모두공직기간 동안엄청난 개 인적인부를축적했다는사실이폭로되면서전두환과노태우에대한신뢰는 완전히사라졌다. 둘다감옥에갇혔다. (그리고마침내사면되었다.) 
19 9 2 년까지 민주주의에 대한대중의 염원은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김 삼이19 9 3 년에시작된5년제대통령으로선출되었다. 19 9 8 년에취임한김대 중이그뒤를이었다.
 
20 세기의마지막20 여 년동안, 민주화는천천히, 그리고때로는고통스럽 게, 한국정치풍토에 뿌리를 깊이박았다. 전국에서군부의 권력은 점차쇠 퇴했다. 중앙정보부와 경찰의 역할은 정치풍토와 함께 바뀌었다. 사법부도 정부의통제에서점차벗어났다. 언론도마침내자유롭게보도할수있게되
43 1 
었다.
이 모든것에도불구하고, 월요모임은만남을지속했다. 그러나회원들이 서서히 줄어들고19 7 0 년대모임을 이끌던 긴박감은 덜 정치적이고 보다사 회적인요구에길을내주었다. 오늘날월요모임은가끔한달에한번씩만난 다. 여전히안건을논의하지만, 이제는긴장을풀고서로함께있는것을즐 기게되었다. 그리고한국의유구한역사에서새날을축하할때이다.
20 세기동안대한민국은잔인한외세의점령, 조국의 비극적인분단, 미국 의 통치, 황폐한전쟁, 잔인한군사독재자들의정권 계승, 그리고미군의지 속적인 오랜 점령에서 살아나 놀랍게도 민주주의를 성취하 다. 자유에 대 한 갈망이내부에서기인했기에, 한국인들은그들의목표을성취했다. 한줌 의 용기있는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씨앗을 심었고, 그들 대부분을 여러분들 은 이 책에서만났다. 민주화행진이계속되는한, 그씨앗들은자라서수십 년에걸쳐번성해왔다.
우리월요모임회원들은이 웅들을알고함께일했던것에 원히감사 한다. 그리고그들은이루헤아릴수없을정도로우리의삶을축복해주었다.
 
 투쟁은계속된다 
 
 
 
 
 
 
 
 
 
 
 
 
 
 
46 0 시대를지킨양심
는“ 코리안타임”으로예정보다15 분 늦게 시작되었다. 작은방이꽉 찼다. 지혜롭고멋진백발의“ 한국의마하트마간디”함석헌이10 여 명 정도의옷 을 잘 차려입은구속된기독교인들의어머니와부인들사이에앉아있었다. 나는얼굴이 붉은평상복 차림의 부인들 곁에서 있었다. 한 선교사가 그들 이 소위“ 인혁당”공산주의자들의부인들이며, 그들중 몇 사람은사형을받 았다고 말했다. 그 부인들 중 기독교인은 없었다. 하지만그들은 이 모임이 자기들의고통과투쟁을함께나누었기때문에여기에왔다. 장로교의 윤 목사가 일어서서 기도회가 시작될 것이라고 알리면서, 먼저 참석자들에게다음과같이충고했다.“ 지난주에내기도때문에 중앙정보부 의 심한조사를받았습니다. 저와같은일을당하길원치않는분은지금나 가주시기 바랍니다.”40 여 명의참석자 중 아무도움직이지않았고, 기도회 가시작되었다. 
적어도80 % 정도는알아들을수 없었지만, 나는기도의심오한깊이에이 끌렸다. 기도의대부분은올해에정치, 종교, 사회적인이유로구속된20 0 여 명에대한것이었다. 일본에서왔기때문에나는눈물을흘리지않으려고애 썼다. 남들이 알아차릴까봐코도닦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대 부분의사람들은눈물을흘리고있었다. 나의몸을통하여— 판단과속죄의 — 감이 물결처럼 전해졌다. 나는이제더 이상일본에서 온 한국을 지나 가는미국인이 아니었다. 나는몇 년 동안기도를 하지않은사람처럼 기도 했다. 구속자의속박과가족의 고통이우리의집단적혼에서우러나는고 백의기도속에서나의— 우리의— 고통이되었다. 그러나나의육체에갇 힌 혼이 엑스타시와 환상 속으로 날아오른 것은 절대 아니다. 오늘 오전 우리모두에게는지상의일이일어난것이다. 육체와혼이솟구쳐일어서 서 말했다.“ 예, 주여, 우리는이 땅에두 발을굳건히딛고서당신께올라갑 니다. 두렵지만우리는당신의뜻을압니다.”


부록- 사실보고서에붙여 46 1 

조지오 이(한국말로) 마태복음25 장 34 -40 절을이용해설교를했다. 그 는 고통받은 유명한 한국인들과 정의를 위한투쟁에서 목숨을 바친사람들 을 언급했다. 그는 이들은 예수의 육화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들이예수의육화를상징하지만유명하지않은사람들에대해서는 이해나관심을보이지않고있다고말했다. 특히 사형을 받을죄를짓지않 은 소위 인혁당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항변했다. 이들은 우리가 더 많이 기도해주는 감옥에 있는 많은 유명인사보다 더한고통과 부당함을 경 험하고있다고말하면서, 오 목사는하느님의자식모두에대한기독교의 사랑과열정을간청했다.
몇 차례의찬송과기도가있고 나서, 지난주에중앙정보부에끌려갔던목 사가그 경험을이야기했다. 통로가없었기때문에아무도비집고들어올수 없었다. 그러나그의설명은매우유쾌했다. 그는키가작은사람이었다. 그 는 중앙정보부에서 자신이 어떻게 굳건히 서서키가 크게 보이려고 했는지 를 몸소보여주었으며, 15 0 센티의 작은 키와 90 킬로의 육중한 몸무게를 말 할 때마다매번주먹을 들었다. 중앙정보부요원이그의기도의“ 잘못”을 고 백하라면서구타의위협을가했다. 그러나그의신앙과용기는오늘이곳에 와서자신의이야기를할정도로대담했다. 
그 뒤에나는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이우정을만났다. 그녀는자신의투 옥경험과중앙정보부조사라는매우심각한이야기를하면서도, 우스꽝스러 운 몇 가지정부원칙을비웃을 여유가 있었다. 그녀가해준한 가지이야기 는, 올해 초에그녀가 한국교회여성연합을조직하여(재일교포에대한차별 대우때문에) 히다치불매운동을매우열심히벌 다는것이었다. 중앙정보 부 요원이그녀에게“ 반일항의”를 그만두라고강요하면서위협을가했다. 8 월에한국정부가(재일교포가대통령부인을 살해했기때문에) 서울에서반 일폭동을 조직하고 지원했을 때, 중앙정보부의 다른요원이 이우정을 찾아
 
 
 
 
 
 
 
 
 
 
 
 
 
48 4 시대를지킨양심
현재에도그들은자신들이간직하고있는한국민주화운동의소중한기억을 한국인이아닌, 어를모국어로사용하는독자들과함께나누고자하는것 이다. 이는한국민주화운동의보편적인가치를더욱확산시키는일로그들 이 19 7 0 년대우리의민주화운동에직접참여했던당시의신념을지금도그 대로가지고있음을보여주는실로아름다운모습인것이다. 둘째, 인간의마음이소박하고진지하면작고보잘 것없는시작도 커다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이들 선교사들은 온몸을통한 실천으로 보여주었 다. 한국에대하여조금의지식이라도가지고한국에왔던선교사는거의없
다. 대부분 한국에 와서 한국을 배우고자 했고, 한국을 사랑하고자 했으며 그 과정에서억압받는현실을알고자했고, 억압받는한국인과함께하고자 했던소박한마음이월요모임을만들게했으며, 이것이한국의민주화와인 권을위한역사에중요한기여를한것이다. 
셋째, 월요모임선교사들은억압적인박정희정권에서누릴수 있는서양 인으로서의 특권을 오히려민주화운동에 활용했다. 특권을 애초에부여한 목적이 아니라, 특권을 부여한 목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방식으로 활용한 것 또한본인들은언급하지않지만엄청난용기와헌신을필요로한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페이문의경우미군군사우편시설을 활용하여큰고초를겪 었고, 오 목사는 중앙정보부에 소환되어 심문도 받고 추방도 당했다. 진 매튜스는커다란‘ 빅토리숄’ 보따리를들고김포공항에서부터어려움을겪 었다. 린다존스는중요한서류를일본공항에서전달해주기위해비행기를 놓칠수 있는위험에처하기도했다. 또짐 시노트신부는비자갱신이거부 당해 실질적으로 추방당했다. 이제는 우리는 몰랐던 이들 선교사들만이간 직했던이소중한기억을 우리가함께나누어야할차례다. 민주화와인권을 위한투쟁에서 한국인들이 경험한 일들에 대한 기억만을 나누는 것도 일종 의억압이다. 이제월요모임의기억을우리한국인들이나누어야한다. 이것
역자후기 48 5 
이 원래 어권독자를위해집필한이 책의한국어판을내는중요한의의일 것이다. 
넷째, 우리의기억에서가물가물해지는구체적인사례들을오히려월요모 임 선교사들의기억을통해서이제새롭게해야 할것이다. 19 7 0 년대쥐잡기 운동 포스터를 독재정권에 대한저항으로 절묘하게 결합했던 짐 시노트 신 부의일화를통해우리는우리에게서멀어져가는과거의기억을되살릴수 있을것이다. 또월요모임선교사들을통해전해오는도시빈민, 평화시장노 동자들의삶이다시한번우리에게과거의기억을현재화시켜줄것이다. 우 리에게 멀어져 가는기억이 오히려 이들외국인 선교사들에게는너무나 생 생한기억이다. 그것이이책을통해우리가다시회복해야할기억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에서 사귀었던 친구들을 너무 소중하게여기며, 한국인들의용기와헌신을매우찬양하고있다. 그리고이 러한 경험이 자신들의 인생 특히종교적인 삶을 세워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고 고백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한국인들은 이 책의 저자인 선교사들에게는웅이었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이제 이들은 한국사회에서 대통령에서 시작하여 많은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 이것또한이들선교사에겐하나의자랑거리로등장한다. 자신들의‘ 보잘것 없는’ 역할이이렇게큰성과를 가져왔다는것이다. 하지만여기에서우리는 다시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과거에 이들의 웅이었던 우리가 현재 에도이들에게웅으로나설자격이있는지스스로반성해야할것이다. 이 것 또한이 책의한국어판을내는또 다른중요한 이유가 되어야만 할 것이 다. 과거에대한기억이 현재에아름다운추억으로, 때로는날카로운비수로 우리에게다가와현재를풍부하게하고, 미래를준비하게해야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비록 한국에 수십 년 씩을 있었지만 이제는 연로했고,
19 7 0 년대의경험도기억에는생생하지만먼 과거의경험이다. 그리고이 책
 
 





===














 


Posted by Sejin at 11:50 AM
Labels: 무속, 반일, 일제강점기, 한미관계,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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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라딘: 서교동에서 죽다 고영범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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