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원자력계 불멸의 자산 '한필순 소장'을 기억하며
기자명 대덕넷
HelloDDnews@hellodd.com
입력 2025.03.11 10:51
수정 2025.03.13 10:06
댓글 0
SNS 기사보내기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 네이버라인(으)로 기사보내기
바로가기 복사하기 본문 글씨 줄이기 본문 글씨 키우기
글: 김대호 한전원자력연료 감사
한필순 소장. 한필순 박사의 묘비에는 ‘에너지 자립 없는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은 없다’라는 지론이 새겨져 있다.[사진= 한전원자력연료]우리는 '빛의 바다'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 밝음 뒤에는 한 사람이 뚫은 깊은 우물이 있다. 한국 원자력의 선구자, 한필순 박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기술 자립을 이끌며 산업 경쟁력의 기반을 닦았다. 그의 도전과 신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 물의 근원, 감사의 마음
음수사원 굴정지인(飮水思源 掘井之人)이라는 말이 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고, 우물을 판 사람에게 감사하라는 말이 다. 네 글자로 압축하면 음수지원(飮水知源)이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의 원천은 저렴하고 안정적인 전기·에너지 공급이고, 그 중핵은 원자력 발전이다. 야간 위성 사진에서 북한은 사막이나 히말라야 산맥 같은 암흑 지대로 보이고, 남한은 빛의 바다로 보이는 이유는 최고 통치자와 과학기술자들이 전심전력한 지점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에, 남한은 핵발전과 수출산업에 쏟았다.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에 이어, K-팝(POP), K-드라마, K-푸드(FOOD)가 세계로 뻗어나갔는데, 최근에는 K-원전과 K-방산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우리가 마시는 K-원전과 K-방산이라는 물은 한필순(1933~2015)이라는 위대한 굴착자의 애국심과 리더십을 빼놓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K-원전은 반도체나 휴대폰 같은 하나의 상품이 아니다. 저렴하고 안정적인 전기 공급은 거의 모든 산업의 원가와 품질 경쟁력의 뒷배다.
그런데 이 땅은 수력·태양광·풍력 자원을 비롯해, 석유·석탄·가스 자원 도 너무나 빈약한 땅이다. 반면에 창의와 열정이 넘치는 두뇌는 풍부 하다. 따라서 두뇌로 만드는 원자력 에너지 없이는 산업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 에너지 수입에 필요한 외화 절약도, 원전 수출을 통한 외화 획득도 전적으로 높은 원자력 기술력에 의존하고 있다.
제1호 소결로 화입식(사진 위). 시제품 생산 완료 기념식(사진 가운데). 재변환공장 기공식(사진 아래).[사진= 한전원자력연료]◇ K-원전의 위대한 굴착자K-원전이라는 우물을 판 세 명의 굴착자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의 요람(연구원)을 만들고, 인재를 길렀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캐나다·프랑스로부터 원전을 도입하면서 운영·건설 기술 습득과 기자재 국산화에 힘썼다. 한필순 박사는 탁월한 리더십으 로 넘사벽이던 자금·기술·체념 장벽을 돌파했다.
올해(2025년) 1월 25일은 한필순 박사 서거 10주기다. 한박사는 1983년 6월부터 1990년 12월까지 7년 반이나 우리회사(당시 한국핵연료주식 회사) 사장을 역임했다. 비슷한 시기에 원자력연구소(당시 한국에너지 연구소) 소장도 겸직했다.
한 박사와 원자력의 인연은 국방과학연구소의 인력·사업 구조조정으 로 원자력연구소 대덕공학센터(구 한국핵연료개발공단, 1976년 설립) 책임자로 부임한 1982년 3월부터다. 부임 당시 센터는 대량 감원 바람이 불던 국방과학연구소 보다 분위기가 더 침체되어 있었다. 시설과 예산도, 희망과 활력도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는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화에 매진하던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였고, 미국의 핵비확산 정책에 따라 한국의 핵과 미사일 관련 연구를 강력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1981년 1월, 한국원자력연구소(Korea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를 한국 에너지연구소(Korea Advanced Energy Research Institute)로 명칭을 바꾸면서, 원자력과 핵(Nuclear)이라는 단어를 지웠겠는가!
미국의 견제와 전두환 정부의 홀대로 조직·인력·예산이 크게 줄고, 조직 전반이 실의에 빠진 상황에서 한 박사는 특유의 리더십으로 떠나려 는 인재를 붙잡고, 의욕과 활력을 불어넣었다. 센터 부임 1년 만에 태부족한 인력과 예산을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와 대전차 관통자(무기) 개발에 집중 투입하여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냈다. 이를 기폭제로 삼아 연구소 분위기를 일신하고, 1983년 4월 센터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관심과 자신감을 심었다.
◇ 원자력, 국내 자본과 기술로 바로 세우다
이 힘으로 기술 장벽이 더 높은 경수로 연료 개발을 외국 자본·기술(설계 및 평가)에 의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 자본·기술로 하는 방식으 로 바꿨다. 이에 따라 미국, 프랑스, 독일 회사들을 대상으로 기술 도입 국제입찰을 하면서 공동설계(Joint Design)라는 기상천외한 조건을 관철시켰다.
공동설계는 우리 엔지니어와 외국 엔지니어가 처음부터 반반씩 설계 를 하되, 별도의 비용없이 설계 기술을 우리 엔지니어에게 가르쳐 주 고, 책임은 외국 낙찰사(독일 까베유사)가 지는 것이다. 이는 1979년 미국 쓰리마일섬 원전사고로 인해 1980년대 내내 선진국 회사들이 일 감이 없는 상황(수요자 우위 시장)과 우리 엔지니어의 빼어난 능력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방식이다.
이는 미국 CE(컨버스천엔지니어링)사가 낙찰된, 원전 기술의 정점인 계통설계 기술 도입 과정에서도 재연되었다. 한 박사는 기술 도입선 선정 과정에서도 엔지니어 40여 명으로 구성된 평가단이 오직 기술의 우수성, 경제성, 기술전수 조건을 기준으로 선정하도록 완전히 위임했 다. 이렇듯 원자력 기술자립은 한 박사의 창의와 열정, 그리고 도전 정신없이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 원자력 최강국을 향한 열망
한필순 박사의 묘비에는 ‘에너지 자립 없는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은 없다’라는 지론이 새겨져 있다. 이제 터무니없는 무지와 미신과 선동 외에는 에너지 자립을 막아서는 것은 없다. 한 박사가 살아계셨다면, 우리 같은 후배와 후학들에게 에너지 자립을 넘어 원자력 최강국이 되 어 인류의 에너지·기후 위기를 타개하는데 앞장설 것을 주문했을 것이 다. 한 박사, 아니 한 사장의 정신과 방법은 한전원자력연료의 불멸의 자산이다.
◇ 한필순 소장은
원자력 분야 최고 권위자. 1933년 평남 강남군에서 출생해 공군사관학교와 서울대 문리과 졸업 후 미국 일리노이대 석사, 캘리포니아대 박사를 마쳤다. 1970년 전기계창(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한국형 수류탄과 방탄철모, 벌컨포 등을 개발하며 국방 현대화를 주도했다. 1982년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전신인 한국에너지연구소 대덕공학센터장으로 취임해 원자력 기술 자립국으로 견인했다. 이후 1991년까지 한국원자력연구소장과 한국핵연료주식회사 사장으로 재임했다. 중·경수로 핵연료 국산화를 비롯해 원자로계통 설계를 통한 한국 표준형 원자로와 열출력 30MW 다목적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개발 을 성공적으로 일구며 원자력기술을 끌어올렸다. 1991년 프랑스 국가훈장 ‘뢰종드뇌르’를 수여했고 2010년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받았다. 2015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다.
◇ 김대호 한전원자력연료 감사 및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지난 18년간 국가, 정당, 지방자치단체의 이념·정책·사업 혁신 방략을 연구, 교육, 자문해 왔다.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과 국회 미래전략자문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윤석열정부와 근대화세력의 미래』(2024, 타임라인), 『엔지니어의 서울 & 지방 디자인』(2021, 타임라인) 등을 펴냈다.
* 이 글은 한전원자력연료 사보에 실린 글을 편집해 게재한 것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