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1

원폭 투하(2) (4) 식민지 지배를 사과하지 않는 것이 국제 사회의 상식

원폭 투하(2)

(4) 식민지 지배를 사과하지 않는 것이 국제 사회의 상식

한때 식민지 지배를 한 국가는 G-8 국가를 비롯해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등 세계에 많이 있습니다 . 에서 유일하게  일본뿐  이었습니다. ,

헤이세이 9년(1997년)에 행해진 홍콩 반환의 실례를 봐도, 아편 전쟁에 의한 침략 이후 156년이나 계속된 홍콩, 구룡 반도의 식민지 지배를 영국은 결코 사죄하지 않고, 일전의 보상 금을 지불하지 않았지만 중국 정부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

패전국이 전승국에 「국가배상」을 지불하는 것이 보통의 방법이며,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전승국(?, 중국)의 시민에게 패전국측이 「개인배상」한다(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예) 등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왜 구미국가는 사과나 보상을 하지 않고, 또 구식민지 정부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하면 그것이 국제사회의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국제상식에 대한 무지 를 중국, 한국, (북한) 등에 담겨진 것입니다. 서양 측의 주장에 따르면,

  1. 무력에 의해 미개국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하는 행위는 당시의 국제법에 의해 합법이었다. 합법적 행위 에 대해 사과나 보상금을 지불할 필요는 없다.

  2. 식민지 지배는 당시 미개국에 문명을 가져와 지역 주민에게 현대 문명의 혜택을 주고 생활이 향상되어 인구가 증가해 주민의 수명도 늘었다.

  3. 식민지 지배가 괴롭다 고 말한다면, 그들은 이전과 같은 미개생 생활, 무지창태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4. 식민지정책에 따라 생활을 진보 향상을 시켜준 것을 종주국에 감사해야 하며, 그에 대한 사과요구 등으로 외다. 만약 요구되어도 그것에는 절대로 응하지 않는 것이 서구사회의 상식 이다.

  5. 우리는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죄책감을 품는 등 결코 없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점령군 총사령부에 의한 「전쟁에 대한 죄악감을 일본인에게 심기 위한 선전 계획(War Guilt Information Program)」의 손끝이 된 좌익 언론이나 반일 좌익주의자들이 국민에 대하여 속죄 : 의식의 쇄도 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구미 국가의 그것과 비교하여 결코 가혹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정주의적(후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국제사회의 상식 을 깨닫지 못하고 영국처럼 구식민지 정부와의 협상에 의연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이나 한국 등에서 약점을 쏟아져 외교상 우위에 서기 위한 도구 ( 카드 ) 에 사용되어 또 현재에 이르는 끝없는 사죄 요구 나 보상금 지불 문제 를 일으킨 것입니다.


[사과 요구에는 조선에 문명개화를 가져온 은인이론에서]

페리 상륙 기념비일본 있어도 카나가 6년(1853년)에 도쿄만에 내항해, 무력으로 위협하면서 개국을 육박한 미국 동 인도 함대 사령관의 페리를 개국의 은인 으로 간주해, 상륙 지점인 가나가와현, 미우라반도의 쿠리하마에는 거대한 기념비까지 세워 매년 미일 우호의 식전을 하고 있습니다.

비문에는 「북미 합중국 수사 제독 백리(페리의 의미) 상륙 기념비」의 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일본은 흑선 내항이 계기가 되어 가져온 문명 개화를, 상대에게 감사하면서, 한편으로 미개최의 세계 최빈약국 (상기)이었던 조선에 대해서, 식민지 지배에 의해 문명의 혜택을 가져왔다는 엄연한 사실을 상대의 사과, 보상 요구에 대해서는 이 때 명확하게 주장해야 합니다.

400년간 중국의 속국의 지위에 달콤하고 유교의 가르침인 4서 5경의 세계에서 빠지지 않고, 빈곤과 부위생, 뇌물로 부패 타락한 양반(얀팡, 귀족) 정치하에 매치 1 상자 만드는 산업도 없어 (이사벨라 버드의 조선기행) 수입에 의지하고 있던 조선에, 문명을 가져온 것은, 식민지 지배자의 일본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죄 중 죄만이 한국 등에 속죄 의식을 긁는 무기 로 이용되어 앞서 언급했듯이 세계의 구식민지 종주국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만이 사죄와 돈의 지불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이중 기준에 모순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아편 전쟁 후 영국에 의한 홍콩의 침략 통치와 일본의 한반도 통치와 어디가 얼마나 달랐는지 아십니까? .


[한반도에서 일본이 저지른 가장 큰 실패란 ]

식민지 통치에 대해 구미 국가와의 차이를 명확하게 말하면, 서양 국가에서는 식민지 주민을 인간으로서는 취급하지 않고, 노예나 벌레 케라와 같이 취급했습니다만 , 이에 대해 일본은 조선인 ( 한반도의 주민)을 황민(황국의 백성), 즉 인간으로 취급 하고 교육을 실시한 것이었습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왕조 시대의 가난한 조선에는 근대적인 학교 제도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소수의 귀족이나 부유층의 자제등이, 사학원인 서원 이나 테라코야와 같은 서당 에 다니는 것만으로 , 일반 서민은 교육과는 무관하고 대부분이 문맹 이었습니다 .

그 무지창매(무치도마, 무지하고 사물의 도리에 어둡다)였던 사람들을 위해, 일본 ​​정부는 한일병합의 다음해, 메이지 44년(1911년)에는 보통학교(조선인을 위한 초등학교) ) 173교를 만들어 2만명 의 아동에게 교육을 실시해, 쇼와 9년(1934년)에는 그 수가 2,221교가 되어, 64만명 의 아동이 통학했습니다.

비록 일본어를 사용했다고 해도, 학교에 갈 수 없었던 대다수의 조선인 아동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 1943년부터 조선 전토에서 의무 교육을 실시해 , 한층 더 대학 교육에 대해서도 일본 국내에 있어서의 오사카 제국 대학 ( 현, 오사카 대학)이나 나고야 제국 대학(현, 나고야 대학)의 개교보다 빠르고, 다이쇼 15년(1926년)에는 경성(현 서울)에 경성 제국 대학을 만들고, 학생 정원의 30%  를 조선인 학생에게 개방했습니다.

식민지 주민에게 대학교육을 포함한 이 정도 충실한 교육의 기회를 준 나라는 그 당시는 물론, 제2차 대전 종료 시점에서 전세계 어느 식민지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했다 . 한반도 식민지 통치정책에서 일본이 저지른 최대의 실패 란, 그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여 필요한 교육을 풀어, 지식을 주고, 기술을 습득시킨 것이었습니다. 일본인의 교육 열심, 그들에 대한 친절심이 반대로 「센」 이 되어, 준 교육이 패전에 의한 식민지 지배 종료 후에는 일본에 대한 반일 교육을 진행할 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식민지 주민을 노예나 가축처럼 취급교육을 주지 않고 무치창매의 상태에 둔다는 구미 국가의 어민화 정책 을 일본은 견습해야 했지만 이 점이 대실패였습니다. 더욱이 말하자면 앞서 언급했듯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나 보상을 한 국가는 구미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기해야 합니다.


(한국의 박 대통령의 말)

후쿠다 준오 전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술자리에서 한일의 각료들이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측의 어느 고관이 과거의 일본에 의한 식민지 통치를 비판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시작했더니, 군인 출신의 박 대통령(1917~1979년)이 그를 갸웃한 뒤,

일본의 조선통치는 그렇게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매우 가난한 농촌의 아이로 학교에도 갈 수 없었는데, 일본인이 와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부모는 처벌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소중한 노동력이었던 자신을 학교에 갔다. 그러자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일본인 선생님이 사범학교에 가라고 권해주었다.

또한 군관학교를 거쳐 도쿄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수석에서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식에서는 일본인을 포함한 졸업생을 대표해 답사를 읽었다. 일본의 교육은 비교적 공평했다고 생각하고 , 일본이 한 정치도 나는 감정적으로 비난할 생각도 없다, 오히려 나는 평가하고 있다 .

라고 말했습니다.


주:) 영국의 식민지 정책
참고까지, 아편 전쟁 이래 150년간 홍콩을 지배한 영국은, 1997년의 영토 반환 까지 의무 교육의 제도를 드디어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

영국이 지배한 인도, 버마, 말레이, 싱가포르 등의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현지인에게는 교육을 주지 않고 , 식민지 주민을 위해 자국의 돈을 사용하지 않고, 부를 수탈했다 가 서구형 식민지 지배의 상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일본 정부는 조선 대만 통치에 매년 다액의 돈을 지출했기 때문에 주민에 대한 교육도 가능하게 되었다.


모잠비크 대통령 학력

아프리카 남동부에 있는 모잠비크 인민공화국은 1975년 1975년에 독립할 때까지 400년간 포르투갈 식민지였습니다. 초대 대통령이 된 사모라 마셸 은 간호 조수 양성소, 졸업 학력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간호 조수가 되고 싶어서 양성소에 들어간 것은 아니고, 그 당시 모잠비크의 식민지 주민에게 허락되어 있던 최고의 교육이란 , 초등학교를 마친 후, 백인의 감독하에서 하직의 일 하기 위해 간호 조수 양성소에 가는 것이 었습니다 .

물론 포르투갈어에 의한 교육이었습니다. 모잠비크에 대한 정확한 문학률 조사는 없었지만 유엔의 추정치는 10% 입니다.

식민지 시대의 모잠비크와 일본 통치하의 조선을 비교해, 당신은 어떤 감상을 가졌습니까? . 하시 (게시스)의 후지혜 (아지시에)입니다만, 조선인에게는 어민화 정책을 채택해야 했다 , 라고 후회하고 있지 않습니까? .

일본의 언론이 결코 보도하지 않는, 서양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는 이유(이 페이지에서 전술)나, 교육이 어느 나라의 말로 행해지려고, 식민지 주민에게 있어서 교육을 하지 않는 것보다 , 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훨씬 이익이 되어, 그 견지로부터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교육을, 일본이 식민지의 주민에게 준 세계에 자랑해야 할 업적을 공평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 식민지 주민에게 최선의 선물, 그것은 교육입니다 ]

조선인은 일본인에게 말을 빼앗겼다고 자주 주장하지만, 전술과 같이 이왕조하의 서민에게는 학교도 없고 조선어로는 받을 기회가 전무했던 교육이라는 귀중한 보물 을 한일 병합 후에 일본이 만든 근대적 학교 제도 아래에서 일본어에 의해 처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일본어를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어를 통해 학문, 문화, 기술을 배우고 인간으로서 시야를 넓히는 것입니다.

조선, 대만 등 일본의 구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나라는 일본의 기술, 경제원조에 의해 1965년대부터 한강의 기적(한국), 세계 유수의 외화준비고(대만) )라고 말할 정도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습니다만, 그 반면 전술한 모잠비크를 처음으로 구미의 구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나라들은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그 근본 원인은 오랜 세월 계속된 구미 식민지 지배에 있어서의 어민화 정책, 즉 교육으로부터의 격리 정책 에 있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교육면에서 세계에 자랑해야 할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역사의 진실 을 일본인은 잘 인식하고 가슴을 뻗어 한국인이나 조선인에게 가르쳐 주세요. 그 왜곡된 반일교육 에서는 이 사실을 학교에서는 결코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만의 캠브리지, 옥스포드 라고 불리는 총독부 의학교와 사범학교가 생긴 것은 메이지 32년(1899년)이었지만, 대만인을 위한 전문 교육은 메이지 33년(1900년)에 창설 된 국어학교의 철도과, 전신과를 시작으로 고등중학, 고등여학교, 실업학교, 맹인학교 등이 속속 설립되었습니다.

식민지 대만에 타이베이 제국대학이 창립된 것은 앞서 언급한 경성(현 서울 ) 제국대학에 이어 두 번째로 오사카나 나고야제국대학보다 빠른 시기였습니다.

태평양 전쟁 전에 식민지 주민을 위해 맹인학교를 만든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일본뿐이었습니다. 이것을 포함해 일본이 어떻게 식민지 교육에 열심히 임하고 있었는지의 증거입니다.


나병 환자의 치료

교육뿐만 아니라 의료에 대해서도 조선인에게 의료를 실시했습니다. 한일병합 이전의 이왕조하의 조선에는 현대적인 의료설비를 가진 병원도 없고, '한센병 환자'는 치료도 없이 야방한 상태였습니다. 거기서 조선총독부는 다이쇼 5년(1916년)에 부령 제7호를 통해, 전라남도에 오가시마 자혜 병원을 세워 환자의 치료에 당했습니다만, 일본에서 최초의 국립 한센병 요양소인 나가시마 아이생원이, 쇼와 5년(1930년)에 만들어지는 14년도 전이었습니다 .

이상의 사실 을 알고도 일본은 "식민지 지배로 좋은 것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자학사관에 당신은 찬성합니까? . 그리고 항상 편향된 시점에서만 일본의 역사를 보려고 하는 자학사관에 대해 어떻게 느꼈습니까? .


[일본에 통치된 측의 사람들의 의견]

  1. 대만 출신의 작가인 영영한씨의 말로,

    "대만에 일본 통치의 50년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한 생활로 유명한) 중국의 해남도와 같은 정도의 낮은 수준에 있었을 것 "
    홍콩의 남동쪽에 위치한 중국 대륙 바로 옆에 있으며, 크기도 대만과 거의 같은 해남도는 여전히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입니다. 1 인당 GDP는 중국인 평균의 절반 이하이지만 대만의 1 인당 GDP는 중국인의 20 배에서 30 배입니다 .

    해남도는 2천년 전의 한 시대부터 중국의 영토였지만, 대만이 중국 문명을 만난 것은 마침내 300년 전이었습니다. 그 후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불과 50년간 받았을 뿐인데, 왜 양자의 사이에 하늘과 땅 정도의 격차가 태어났을까요? . 그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2. 대만사범대학 역사학부의 오문성 교수에 따르면

    일본이 가져온 교육제도나 쌀의 품종 개량 등 새로운 농업기술이 ​​전전 전후 경제발전의 기초가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전쟁 말기인 쇼와 18년(1943년)에는 대만에서의 초등학교의 취학률은 71.3%로,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위였다 .

    이것은 아시아의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과 같은 서양 식민지의 교육 상황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만의 개발은 일본을 위해 행해졌지만, 그것이 대만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해, 대만인에게 이익을 가져온 사실도 공평하게 평가 해야 한다.

  3. 한국의 산양식품의 전중윤 회장의 말

    한일병합에 관해서 당시 한국은 결코 자신들 한 나라만으로는 서지 않았고, 조만간 러시아, 중국(청국), 일본 중 하나의 지배하에 들어가야 할 수 없었다.

    만약 (스탈린 지배하의) 러시아나, (창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에 의한 내전 상태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알면 알수록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 (괄호 안은 관리인의 주석)

  4. 싱가포르의 총리를 오랫동안 근무한 이 쿠안 유(Lee Kuan Yew)의 말,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남긴 교육제도, 근면, 충성심은 훌륭하다. 역사를 자신이 좋아하는 시점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다면적인 관점에서 공평하게 평가하지 않으면, 역사를 올바르게 배운 것은 아니다.
이상은 반일이라는 짙은 색안경으로 밖에 사물을 보지 않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해서도, 한국에 불리한 사실의 주장을 망언(이름, 속임수의 말) 이라고 칭해 부정함과 동시에, 일본의 공적을 무시 하고, 죄의 부분만 밖에  보는 것을 하지 않는 한국의 언론이나 역사학자, 그리고 재일이나, 일본의 자학 사관의 지지자, 좌익주의자들에게, 꼭 들려, 읽어 주고 싶은 말입니다.


[ 역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 방법이란 ]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특정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입장에 자신의 몸을 두고 역사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역사에 대해 선악의 판단, 평가를 하는 경우에는 현대의 가치관 이 아니라 그 시대의 법률, 도덕, 사회규범 등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입니다.

이것은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논하는 경우에도 당연히 적용됩니다. 한일병합(1910년)이라는  100년 가까이 전의 사건을  현대의 법률, 도덕, 인권감각 등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많은 재일이나 일부 어리석은 일본인은 역사를 판단할 때 기본 원칙 에 대한 자신의 무지와 얕은 사고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100년 전의 물가를, 현재의 화폐 가치 를 기준으로 하고 판단해, 높은 싼 것을 논하는 같은 어리석은 행위와 같습니다 .



(5), 일본인의 나쁜 습성 ,

원한 증오의 기념비를 만든 중국, 한국 등에 비해 일본인의 무려 오메데타이, 노 날씨의 행동 입니까? . 원폭에 의한 대량 학살의 가해자를 규탄하는 대신, 반대로 피해자인 일본인이 원폭의 희생자에게 사죄를 한다는 세계에 전례가 없는 히로시마의 원폭 위령비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패전 후의 미군 첩보부에 의한 다액의 자금 투입에 의해 행해진 「전쟁의 죄악감을 일본인의 마음에 심는다」를 목적으로 한 심리 작전(War Guilt Information Program) 에 의해 세뇌되어 더욱 점령 군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권력자의 의향에 영합해, 그 가해 책임의 교체 에 스스로도 협력한다고 하는, 일본인 특유의 비굴한 습성 ,의 산물이었습니다.

이 「긴 것에는 감아라」라는 사대주의의 비굴한 습성은 일본인의 DNA 유전자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 입니다.

위령비의 건에 한하지 않고 패전 후의 시베리아의 포로 수용소에 억류된 60만명 에 이르는 일본병의 사이에서도, 소련 당국에의 영합으로부터 공산주의에의 비동조자를 「반동 분자」라고 하는 밀고가 활발히 행해졌습니다.

그 결과 자기 신념에 충실한 일본인이 반혁명 혹은 반소행위의 죄를 입혀 소련의 재판에 걸린 말, 20년부터 25년의 형을 선고받아 강제수용소 이송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밀고와 동료에게 배신 행위로 적극적으로 소련 측에 협력하여 정치 장교에 도입하여 그 권력을 배경으로 일본인에 대한 지배권을 잡고 현지에서는 시베리아 천황 당시의 모로토프 「소련 외상」의 이름을 낳은 것)이나 치타(지명) 법황이라고 불린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그 연중 중에는 귀국 후, 이번은 180도의 사상 전환을 해 모대학의 교수가 되었던, 변신의 빠른 비열한 남자도 있었습니다.

헤이세이 10년(1998년) 6월, 중국계 미국인의 반일 단체인 「얼라이언스」가 조직한, 「731부대전, 아시아의 잊혀진 홀로 코스트」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서 도미한 전 731 부대대원 S 가 시카고 공항에서 입국 부적격자 리스트에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입국 거부되어 일본으로 강제 송환되었습니다. (아사히신문 6월 23일자)

일설에 의하면 731 부대의 악행의 「말하기부」 로서 활약하고 있던 그를 미국에 밀고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NGO 조직의 동료였다고 말해지고 있었습니다.

주 :) 731 부대
구 만주 (중국 동북부)에 설치된 일본군의 세균 무기의 연구, 개발을 실시하는 부대에서 중국인 포로 등을 사용하여 인체 실험을 실시했습니다만, 패전 후에는 미군에 실험 데이터를 모두 인도하는 것을 조건으로 전범의 소추를 면했습니다.


변심, 변신, 마치에 씨의 경우

소년 병 모집 포스터마키에다 전 문씨는 닛교조의 위원장, 서기장을 1983년까지 연속 21년 근무해, 북한을 예찬해(주:4 참조), 2003년(1991년) 에는 북한으로부터 국제친선상 1급의 훈장을 수여되었습니다.

그는 오카야마현에 있는 청년학교(주:3)의 교사를 근무하고 전시 중에는  15세 전후의 많은 청소년을 적극적으로 소년병(비행병, 전차병, 통신병, 포병, 병기병) 에 지원했습니다.

그 후는 삿포로에 있는 육군의 북부군 사령부의 헌병대(군사 경찰)에서 범죄 수사, 사상 탄압에 빠지는 헌병 장교 가 되었습니다. 패전이 되면 이번에는 180도의 몹시 바늘을 하고, 당시 유행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에게 재빠르게 의복해 노동 운동에 전념해, 일교조의 활동가가 되어, 후에는 일교조의 위원장을 맡을 때까지 네.

교사에서 헌병으로, 그리고 일본 교직원 조합의  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능숙하게 「변심, 변침, 변신」을 반복한 그의 처세술이나, 절조의 없음을 , 전사한 그의 가르침들 그 세상에서 어떻게 느꼈습니까 ? .

그에 의해 군국주의 사상을 불어 넣어 인생의 싹이 무렵에 전사한 소년 병들은 마치에 씨에게 전혀 배신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 : 1 )
마키에 씨는 한때 헌병 장교 였다는 사실 을 자주 인정 하고 있습니다만 , 그의 말에 의하면 일시 적으로 ( ? ) 헌병 장교 가 되었다고 합니다 . 전시중이라고는 해도 헌병 장교란 임시로 될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주:2)
헌병이란 메이지 14년(1881년)에 헌병 조례에 의해 설치되어 군대내의 질서 유지를 주임무로 하는 병대로, 범죄 수사, 군기 유지, 사상 단속에 해당했습니다만, 점차 권한을 확대 그리고 민간인에 대한 공안 대책, 사상 탄압, 방첩 등에도 강한 권한을 흔들었습니다.

주:3)
청년학교란 초등학교 졸업의 근로청소년에게 실업교육, 보통교육 및 군사교육을 실시한 학교로 수업연한은 보통 2년이었습니다.

주:4)
인간을 혁명의 도구로 간주하여 자유와 인권을 빼앗기 로 다하는 좌익주의 사상을 숭배하고 중국이나 북한을 동경해 이데올로기에 굳어지면 이 정도까지 상식과 정상적인 판단력 잃어버린의 일반적인 예는 다음 문장입니다.

이 나라(북한)에는 도둑이 없고 , 도둑과는 부의 편재한 곳에 발생한다. 이 나라에는 도둑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도둑도 살인범도 없으니 경찰관도 없다.

교통정리나 부상자를 위해 사회안전원이 길거리와 교차로에 서 있는 것 뿐이다. (추체의 나라, 조선을 찾아가. 원일 교조서 기장의 망치 원문 저로부터 인용.)

굶주림이나 빈곤으로 고통받는 자가 대세 있다는데, 장군님을 비롯해 정부나 노동당 간부 등 특권 계급의 사람만이 풍부한 생활을 하는 현상을, 부의 편재와 저자는 전혀 인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둑이 없는 커녕 북한에서 부모와 함께 귀국한 렌지씨, 지촌씨의 아이들의 소감에 의하면, 일본의 거리에 있는 자동판매기를 보고, 북한이면 곧바로 파괴되어 내용 라고 돈을 훔칠 수 있지만, 일본은 안전한 나라인 것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차가 통행하지 않는 평양 시내의 도로나 시내에 부상인이 왜 발생하는 것입니까? . 사회안전원이라는 이름의 경찰이 다수 존재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상으로서, 사람들의 행동이나 언동을 감시해, 밀고에 대처하기 위해서 인 것을 그는 모르는 것입니다.

거기에 도둑이 없는 커녕, 지방에서는 굶주려 달려 도둑이 횡행해, 농촌에서는 소중한 소까지 죽여 먹거나, 식인 사건까지 다발해( 저서, 북한인 먹이 수용소 ) 사형이 되었다 농민도있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국민의 10% 이상, 300만명 의 아사자가 나온 사실도 그는 모르는 것입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북한을 「지상의 낙원」이라고까지 칭찬했습니다. 그의 전쟁 중, 전후의 행동에는 절조가 없고 현명하게 서있는 처세술에 뛰어난 점에서, 교육자 집단인 일교조의 위원장이나 서기장으로서 진정으로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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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저지른 미군 포로의 처형이나 학대에 관한 패전 후의 B, C급 전쟁 범죄의 적발에 있어도, 밀고가 활발히 행해졌습니다.

조사에 맞고 있던 미군 계관도,

일본인은 왜 동료를 배반하는 밀고를 하는지, 우리 외국인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미군에 전해진 밀고의 많음에는 놀랐습니다. (고도의 땅이 되더라도 BC급 전범 재판)

이들은 모두 새로운 권력자에 대한 애처로운 충의립이나 자기 보신을 위한, 비굴한 영합, 기분 탓 에 의한 것으로, 그 때문에는 동료나 국가에의 배신을 부끄러움도 없고, 함께 싸웠다 전우조차 평기로 밀고한다는 일본인의 나쁜 습성 이 나타났습니다.


4: 부끄러운 대량 학살 기념비의 비문

위령비

일본에 대한 평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이 쇼와 27년 4월 28일에 발효했습니다만, 같은 해의 7월 22일에 원폭 사몰자 위령비(공식 명칭은 히로시마 평화 도시 기념비)에 쓴다 비문이 결정되었습니다. 평화를 바라며 히로시마의 비극을 두 번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할  있습니다 . 불가능합니다.

위령비의 비문은 다음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편안하게 잠을 자십시오
실수는
반복하지 않기 때문에

아야마치는 무엇을 의미하고, 잘못을 저지른 자, 그 잘못을 사과해야 할 사람 은 누구였는가? .

히로시마 시민과 일본인은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던 앞서 언급한 미군의 심리작전 이나 거기에 동조한 일부 언론, 자학주의자, 좌익주의자 등의 프로파간다를 가라앉히는 것이 아니라 일미 개전에 이른 경위나 일본이 항복 직전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바와 같이 전후의 대립을 노려본 소련에 대한 전략상의 이유(위협)로부터, 원폭의 위력을 대인 테스트하기 위해 투하한 사실 에 대해 확인한 적이 있습니까? .

게다가 쇼와 23년(1948년)의 제2회 평화제(후의 원폭 위령제)에 있어서, 내빈의 영연방군 총사령관 로버트슨 중장은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히로시마시가 받은 징벌 은 전쟁 수행 도상에서 받을 일본 전체에 대한 보복 의 일부이다.
원폭 투하는 보복 이나 징벌 이라고 상대가 말하고 있는데, 몇 10만명도 징벌에 의해 육친이 살해되어, 히로시마 시민은 회개하지 않습니까? . 피해자의 측이 잔학 행위를 저지른 가해자에게 엎드려서, 잘못은 반복하지 않는다 등과, 왜 비굴하고 무의미한 사과를 계속하는 것입니까? . 사과하여 구워진 죽은 자는 납득하고 희생자의 영이 성불하는가? . 죽은 자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


(4-1, 비문의 해석의 왜곡)

쇼와 27년(1952년) 4월 28일에 평화조약이 발효할 때까지, 점령하의 일본에서는 원폭 투하에 대한 비판, 사상자의 수의 공표는, 점령군의 프레스·코드(검열 규정)에 의해 일체 금지 되었습니다. 점령 종결로부터 불과 3개월 후에 원폭 기념비가 만들어져, 게다가 미일 안보 조약에 의해 미군의 주류가 점령하와 변함없는 상태로 계속된 당시, 비문에 기록된 진짜 의미는 ,

일본이 침략전쟁전쟁을 한 결과 원폭의 피해를 당했지만 이 잘못은 반복하지 않습니다. 편안하게 잠자십시오.

라는 것이 올바른 해석입니다. 일본인에게 전쟁책임 과 원폭투하가 가져온 대참해의 책임을 지는 자학적 사고 의 산물 이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반핵의 의지표시인 등이라고 주장했지만, 바보도 쉬고 말해야 하고, 점령군의 지배로부터 해방된지 얼마 안된 일본에서 반핵 사상이나 반핵 운동 등 일어날 리가 없고, 패전 후 의 역사에 무지한 사람 의 똥입니다 .

일본에서 최초의 반핵운동이 일어난 것은 쇼와 29년(1954년) 3월 1일의 제5 후쿠류마루·피폭 사건 (주 참조) 이후의 일이며, 히로시마에서 제1회의 원수금 세계대회가 개최된 것은, 쇼와 30년(1955년) 8월 6일이었습니다. 역사상의 사실을 잘 확인하고 나서 주장해야 합니다.

주 :) 제5 후쿠류마루 피폭 사건
시즈오카현 야이즈 어항 소속의 원양 참치 어선 “제5후쿠류마루”가 서부 태평양의 마셜 제도에 있는 비키니 아톨 근처에서, 미국이 행한 최초의 수폭 실험에 의한 죽음의 재를 받는 피폭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23명이 방사능에 피폭하고, 구보산 통신장(반년 후 사망)을 포함한 8명이 나중에 피폭으로 사망했습니다.

비문의 진정한 의미를 자신들의 운동에 있어서 편리하게 왜곡해 해석한 것은 일부 히로시마 시민과 패전 후의 역사에  무지한  좌익주의자들입니다 .

시장이나 히로시마 시민, 일본인은 외국에서 방문하는 사람들도 지적하는 이 비문의 내용에, 의문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요? . 마야카시의 평화주의자, 좌익주의자들은 그 후가 되어, 실수 속에 핵무기 사용도 포함된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때까지 원폭을 가진 적이 없는 일본이, 투하의 실수를 다시 반복 하지 않으면 비문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 으로 모순됩니다 . 반복하지만 반핵운동이 일어난 것은 1954년(제5복룡환피폭사건) 이후였음을 잊지 말아라.

세계에서 원폭실험이 이루어질 때마다 히로시마시장이 발신한 항의전보가 1,500통을 넘었다 고 합니다만, 그다지 효과가 없는 항의전보 등 발신자인 히로시마시장의 퍼포먼스와 자기만족 이외 무엇이든 없었던 증거입니다.

시장이나 히로시마 시민의 혼자서의 자기 만족( 환언하면 전쟁 피해자 중(안)에서의 엘리트 의식?

여기까지 쓰여져 회개하면 피폭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히로시마현민과의 수명의 차이를 공표하면 어떻습니까? . 피폭의 20년 후부터 양자의 차이가 없어졌다고 은밀하게 말해지고 있습니다만, 왜 나라도 히로시마시도, 피폭자 단체도 그 것을 계속 숨기고 있는 것입니까? .

덧붙여서 쇼와 54년(1979년) 이후 오늘까지, 피폭하려 버리지만, 일본인의 사망 원인의 제1위는 건인 것을 잊지 말고 통계과의 "인구 역학 통계"참조).


(4-2, 팔 판사의 비문 비판)

도쿄 재판에서 인도 대표 판사였던 팔 박사는 쇼와 27년(1952년)에 재래일했을 때에, 히로시마의 원폭 위령비의 비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습니다.

실수는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물론 일본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무슨 실수인지 나는 의심한다 . 여기에 모시고 있는 것은 원폭 희생자의 영이며, 원폭을 떨어뜨린 것은 일본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떨어뜨린 자의 손은 깨끗하게 되어 있지 않다. 이 잘못은 만약 전의 전쟁(태평양전쟁)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것도 일본의 책임이 아니다 . 그 원인은 서양국가가 동양침략으로 인한 것임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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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비문의 주어는 인류로 하는 바보 같은  )

마야카시의 평화운동가와 좌익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론하고 있습니다. 비문의 주어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라고! .

농담도 적당히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잔학 행위의 가해 책임 은 어떻게 됩니까? . 20만명의 시민을 학살한 가해 책임은 미국이 아니라 누가 지는 것입니까? . 해석상의 주어가 되는 일본인이나 인류 전체가, 그 학살 책임을 지는 것입니까? . 인류 전체에 포함된 다른 나라 사람들도 이에 동의하는가? .

그와 관련하여 질문한다면 사실인지 여부를 제외하고 30만명이 죽었다고 중국이 주장하는 난징 학살의 책임을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왜 인류 전체에서 지지 않는 것일까요? . 히로시마에 비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4-4, 인류 전체의 사과를 외우는, 우론 에 대한 3단 논법)

  1. 원폭 투하에 대해 사과해야 할 인류 전체 중에는 13억명의 중국인도 당연히 포함된다 . 그러므로 중국인도 원폭 희생자에게 사과해야 한다 .
  2. 원폭 희생자에게 사과하면서 난징 학살(?)의 희생자에게 사죄하지 않는 것은 중국인에게 있어서 자기 모순 이다 .
  3. 그러므로 중국인도 난징 학살의 희생자에게 사과해야 한다 .
라고 하는 3단론법이 성립됩니다만, 그에 대한 반론을 좌익주의자, 자학주의의 히로시마 시민, 에세(표시만의) 평화 운동가로부터는,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습니다 .

백보 양보해도 일본이 침략 전쟁을 시작했다고 해도 히로시마, 나가사키, 도쿄 대공습 등 비전투원의 무차별 대량 학살의 책임을 일본인이 지고, 가해자가 아니라 일본인이 원폭 희생 사람에게 사과한다고 하는 이유 가, 나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미군의 심리작전의 결과이며, 미국이 생각하는 화병입니다.

환언하면 점령군이라는 새로운 지배자에 대한 앞서 언급한 자기보신을 위한 충의립, 비굴한 영합, 최음의 산물이나 자학주의에 그치지 않습니다.


5:투하책임 부재의 평화운동

게다가 평화운동가, 원폭의 말씀부, 편향 매스컴은 지금까지 원폭의 피해를 호소해 핵무기의 폐절을 주장해도,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에 의한 수 10만명의 학살에 대해서, 미국의 가해 책임을 결코 추구하지 않습니다 했다.

본래, 피해와 가해 책임은 불가분의 일입니다. 원폭에 의한 피해의 비참한 상황을 몇 10년이나 계속 호소하면서, 그 대량 학살의 책임을, 의도적으로 군부나 일본인의 책임으로 바꿔 넣는다 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왜 미국의 가해 책임을 추구하지 않습니까? .

책임의 교체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미국의 과거 행동은 원폭 투하를 포함하여 정의와 인도주의에 따라 정확했다고 생각합니까? , 그리고 현재의 행동도--- .

이 비문은 '잘못'을 저지른 주어가 부재한 것처럼 잔학 행위의 가해 책임 조차도 부재한 것입니다 . 그것만이 아닙니다. 가해책임을 일본인에게 밀어붙임으로써 가해자인 미국에 비굴할 때까지 맞이해 대량 학살의 가해책임을 애매하게 한 위령비에 히로시마 시민은 오로지 무의미한 사과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

히로시마 시장이, 원폭 투하는 전쟁 범죄라고 공식의 자리에서 처음 발언한 것은, 투하로부터 실로 50년도 지나고 나서의 것이었습니다만, 너무 늦은 발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전쟁범죄의 희생자에게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측이 지금도 사과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구도에 의문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 나는 모순된다고 생각합니다. 끔찍한 것 같지만 다시 말해 달라고합니다.

원폭 피해자 측의 사과, 반성 에 근거한 반핵운동은 실수이며, 가해자의 사죄 나 가해예비군(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의 반성과 인류의 장래를 찾는다 타지 없이 핵무기의 폐지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최근 우와지마 수산고등학교의 연습선 에히메마루 조난 사고의 위령비가 호놀룰루에 세워졌지만, 그 비문에는 미국 잠수함과의 충돌에 의해 침몰했다고 쓰여졌습니다. 실제로는 급속히 부상한 잠수함에 의해 충돌 되어 침몰했음에도 불구하고. !

이 비문에서도 사고 원인은 모호하게 하고 있지만, 물론 미국이 그렇게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안락하게 잠들어 주세요. 잘못은, 반복하지 않으니까」가 더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


세계유산등록

2008년 12월 6일(일본시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원폭돔을 아우슈비츠와 함께 세계유산에 등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은 원폭돔의 지정에는 끝까지 반대하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아우슈비츠츠야말로 미국이 두드렸다 「인류에 대한 범죄」의 상징입니다만, 그와 함께 자신들이 저지른 비전투원의 대량 학살의 상징 가 동렬로 다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20대 뉴스

헤세이 11년(1999년) 12월 20일에 세계 3대 통신사의 하나인, AP 통신에 가맹하는, 세계 36개국에 있는 7의 보도 기관이 선택한 20세기에 있어서 20대 뉴스의 1위 에 선정된 것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였습니다. 덧붙여서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은 18위였습니다.

세계의 저널리스트가 원폭 투하를 20세기 최대의 뉴스로 한 것은, 핵무기의 사용이 인류사상, 희귀하게 보이는 잔학한 행위이며, 국가(미국)가 저지른 최대의 범죄·잘못 이었기 때문입니다 .


이상 말한 사실을 생각할 때, 「2 종류의 원폭의 성능 실험」의 기니피그가 되면서, 게다가 겁쟁이도 없고, 가해자를 대신해, 희생자에게의 불합리한 사죄를 계속하고 있다 ,

일본인의 역사에 대한 무지, 자학성 , 사대주의(세력이 강한 자에게 추종하여 자기보신을 도모하는 사고방식), 이들에 근거한 구원할 수 없는 비문의 어리석음 에는 말해야 할 말을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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