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06

김일성대학에서 띄우는 편지 - 신은희 > 기타 | 민족통신



김일성대학에서 띄우는 편지 - 신은희 > 기타 | 민족통신



김일성대학에서 띄우는 편지 - 신은희
작성자 민족통신 06-06-20 14:15 조회1,180회 댓글0건

<신은희의 통일문화 이야기>가 이번 20회로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매주(또는 격주) 화요일에 연재된 이 칼럼을 애독해 주신 독자, 네티즌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그동안 남과 북, 해외를 오가면서도 따뜻한 민족적 감성과 냉철한 이성으로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과의 접맥을 시도하면서 그속에서 ‘주체문화’의 전도사 역할을 해온 신은희 교수에게도 고마움을 표합니다.다른 기회에 신은희 교수와 독자들이 통일뉴스를 통해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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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슴과 같은 자유는 싫다”

신은희 (미국 심슨 대학교 종교철학부 교수)


내가 만난 김일성대 학생들은 남쪽의 학생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싶다고 했다.
“우린 사슴과 같은 자유는 싫다!”

북쪽학생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사자와 사슴의 공생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사슴은 사자와 공생하는 동안은 다른 맹수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슴은 사자의 힘과 야생성에 의지해서 생존과 먹이사슬의 이중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논리다. 이런 사슴의 판단은 어떻게 보면 힘의 논리가 보편적 국제질서로 자리 잡고 있는 외교상황에서 대단히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북쪽 학생들은 즉각적으로 되묻는다.

“정말 그렇게 비굴한 사슴처럼 살고 싶어?”

그들은 사슴의 생존이란 너무도 타율적이라는 것이다. 사자의 먹이가 궁해지면 사슴은 언제라도 잡아먹힐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수동적이고 나약한 외교를 하기 때문에 한국은 여전히 일본에도, 미국에도 굴욕외교의 역사를 쓸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는 항변을 했다.

그들은 ‘사슴과 같은 그런 구속된 자유는 싫다’고 한다. 그들은 타율적 자유가 어떻게 진정한 자유인가라고 반문한다. 북쪽학생들이 기독교의 구원관에 의문을 갖는 것도 바로 타율적 구원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국가와 민족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타민족의 지도자를 구원자로 믿으라고 하는 기독교의 교리세계가 어떻게 한 많은 우리 ‘조선민족’에게 절대적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묻는다.

“차라리 사자가 되리라”

실제로 김일성대 학생들은 기독교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다. 종교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남쪽학생들 이상으로 세계종교와 문화에 대한 교양이 높다. 그들은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전공했기 때문에 외교부서에 나가 일을 많이 한다고 한다. 하지만 북쪽학생들의 종교관은 남쪽학생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정치성은 구분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우리는 흔히 북의 조선천주교인협회나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등 종교단체들이 ‘순수한 신앙활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종교를 대외정책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종교와 정치의 연관성’에 관한 문제이며, 이는 곧 ‘종교의 인식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종교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북쪽 학생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가 역사상 ‘순수한 신앙활동’으로만 존재했던 때가 있었는지, ‘순수한 신앙’이란 무엇인지, 개인의 믿음에 ‘정치성’이 결합되면 순수한 신앙일 수 없는 것인지를 묻는다. 서양의 대표적인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종교는 역사적으로 강력한 정치적 동기와 목적, 그리고 민족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영토싸움을 기초로 진행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구약성경의 기록에는 부족이나 민족들 사이에서 벌어진 잔혹한 전쟁사가 포함되어 있다. 종교의 경전이지만 대단히 정치적인 기록들이며, 종교와 정치성을 구분하기 어려운 내용들로 가득하다. 신앙은 특정 민족의 이익과 정치적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종교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신약성경의 경우도 비슷하다. 역사예수는 후대에 종교적 인물로 신격화되어 숭배되지만 그는 로마시대에 대단히 정치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죽음은 정치적 죽음이기도 했다.

또한 동양의 종교문화로 대표되는 유교와 불교도 특정시대의 정치적 흐름과 성패에 따라 종교의 운명이 좌우되기도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토속종교인 천도교, 증산교, 대종교 등은 종교성과 정치성을 도식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정치적 종교’ 형태를 띠고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신앙이 포함된 종교의 역사는 정치와 종교가 역사상 만나서는 안 되는 ‘불륜’관계가 아니라 상호 연결된 관계성 속에서 발전해 왔다. 그 만남의 결과가 역사적으로 긍정적이었든, 부정적이었든 밀접한 관계성 속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듯 종교역사 관점에서 북쪽 학생들의 종교인식은 종교성과 정치성이 혼재되어 ‘조선민족의 이익’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정치적 종교’ 형태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는 북의 특수한 상황에서 지극히 ‘순수한 신앙적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종교의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도식과 근본주의 관점으로만 해석하려는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북의 ‘조선식 사회주의’ 이념에 기초해 보면 애국애족의 행위가 없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북의 정치권에서 강압적으로 인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북의 경우는 종교의 출발과 내용, 형식이 남쪽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구원도 철저하게 주체적이어야 한다. 꼭 구원자가 필요하다면 자기민족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인물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가 없는 사슴은 가라, 우리는 차라리 사자가 되리라’고 한다. 북쪽 학생들은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 자유가 있는 사자가 되고 싶다고,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이를 악물고 살아간다.

“대한민국아, 조선아, 너를 빛내리라!”

김일성대 학생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유란 바로 ‘주체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가난해도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해결하는 것,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의 자주권을 옹위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개인적 자유쯤은 얼마든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물론 북쪽 학생들이 국제정치에 대한 현실적 분석이 부족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기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민족적 자긍심은 대단히 강렬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북쪽 학생들의 삶의 목표는 한가지이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을 세계에 빛내는 일이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우니 경제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강성대국의 꿈’으로 조선을 빛내려고 노력한다. 때로, 그들은 공부시간을 쪼개어 노동판으로 나간다. 도로를 건설하고 건물을 짓는 등 어려운 나라살림을 젊은 그들이 책임 있게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김일성대 학생들을 만나면서 남쪽의 학생들이 떠올랐다. 남쪽 학생들도 나라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통일문화이야기> 칼럼 연재를 마치면서 앞으로 그들과 함께 21세기 통일문화의 주체자가 되어야 할 남쪽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슴으로 호소하고 싶다.

첫째,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진지하게 배우고 새롭게 해석하자. 서양의 시각에서 열등한 것으로 세뇌당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는 이제 제대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자연주의에 입각한 평화와 공존의 역사와 문화는 세계를 향해 자랑스럽게 내놓아도 모자랄 것이 없다.

둘째, 깊이와 균형감각을 가지고 북에 대한 연구를 하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분야에 이르기까지 잃어버린 우리 민족 반쪽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과거 반공교육에 기초한 단편적 연구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낭만적 민족주의에 빠져 건전한 비판 없는 친북적 연구도 미래가 없다. 균형과 비판의식을 지닌 중용의 새로운 통일문화를 창조하여야 한다.

셋째, 21세기 통일문화를 여는 지도자로서 국제화에 어울리는 실력을 키우자. 필요하다면 영어, 중국어 등 외국어에 능통하고 입체적 사고력과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젊은 당신은 과거로부터 답습되어온 운동권의 투쟁 일변도의 논리나 정통과 비정통의 이분 구조에서 이제는 해방되어도 좋을 것이다. 유연한 철학적 사고와 세련된 감각으로 동북아지역에 새로운 평화 주도의 지도자로 우뚝 서야한다.

넷째, 통일운동문화를 소수 운동권 세력의 문화가 아니라 폭넓고 건강한 시민운동으로 승화시키자. 이제는 폭력적 시위보다는 문화수준의 멋과 격을 갖춘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통일운동문화로 재창조하여야 한다.

다섯째, 홀로 명상하자.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분열과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초연한 마음의 수련은 누구에게나 필요할 것이다. 개인의 아집과 인간에 대한 분노의 아우성을 잠시 접고 조용히 홀로 명상하는 것이다. 멋과 격을 갖춘 인격자의 모습으로 민족문제에 참여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섯째, 젊은 당신이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든, 남이건, 북이건, 세계 어디에 살건 당신의 가슴에 뜨거운 민족애를 품고 살아가자. 한반도의 아픔을 품고 살되 지치지 않는 젊은 당신. 당신의 뜨거운 열망과 꿈이 갈라진 우리 조국의 통일과 평화의 큰 이상을 결국 이루어낼 것이다. 한 많은 조국과 민족을 향해 우리는 매일, 매순간 함께 외쳐야 한다. 온 세계와 우주를 품고 뜨겁게 외쳐야 한다. ‘대한민국아, 너를 빛내리라!’ ‘조선아, 너를 빛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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