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0

Byungheon Kim |어느 위안부의 이야기 - 이영숙 하순녀


Byungheon Kim
(淨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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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위안부의 이야기 - 하순녀(1)

나는 1920년에 진주에서 태어났다. 호적에는 1918년으로 신고되어 있다.
 태어나서 곧 목포로 이사했는데 아버지가 몸이 아파 친척들이 사는 영암으로 다시 이사했다. 나는 영암에서 살던 시절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딸 여덟을 낳았는데 다 죽고 나만 남았다. 나는 본래 둘째딸이었는데 언니가 아홉 살에 죽어 큰딸이 되었다. 아버지는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었고 집안 살림은 어려웠다.
학비를 낼 형편도 못 되어 학교 입학을 미루다가 열두 살에 보통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나이가 많은 애가 입학했다고 놀려댔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학교에 갔다가 중간에 빠져나오기도 했고 학교에 안 간다고 울곤 했다. 
내 또래의 애들은 대개 여덟 살에 학교에 들어가서 이미 5학년이 됐는데, 그들은 갓 입학한 나를 보고 “우리는 곧 6학년이 돼서 졸업하는데 넌 언제 졸업할래?”, “뚱뚱한 것이 언제 졸업할 것이냐?" 라면서 놀려댔다. 
그래서 학교를 안 갈라치면 아버지는 형편이 좋아서 학교를 보내는 게 아니고 아들이 없어서 아들처럼 기르려고 하는 것이니 학교에 가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공부보다 애들과 뛰어다니는 것이 더 좋았다.
아버지는 줄곧 학교에 가라고 하는데, 나는 학교에 가기가 싫어 그 해에 집을 나와 버렸다. 집에는 가지고 나올 돈이 없어서 맨몸으로 무작정 기차를 탔다. 광주역에 내려 사람들이 불쌍하다며 주는 음식을 얻어먹고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 나이가 50대쯤 되는 아주머니가 "아가, 나 따라가자”고 해서 따라갔다. 그 아주머니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이튿날 그 아주머니의 친척집에 남의집살이로 들어갔다. 그 집은 큰 장사를 하는 집이었다. <하순녀, 정대협 증언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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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위안부의 이야기 - 하순녀(2)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스물인가 스물한 살 먹었을 때라고 기억이 된다. 이 기억대로라면 1939년이나 1940년이 된다. 그런데 상해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보고 아버지가 홧병으로 돌아갔다고도 하는데, 아버지가 죽는 해가 호적에 1937년 9월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상해로 간 해가 1937년 이전인 것으로 추측된다.
 하루는 애기를 재워 놓고 그 동네 식모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조선인 남자 한 명과 일본인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남자들은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나이는 젊어 보였다. 그들이 다가와 “광주에서 얼마 받느냐”고 물었다. “월급도 안 받고 밥 먹고 옷이나 얻어 입는다.”고 대답했더니, “아이고 조선 사람들, 도둑놈들” 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을 따라 일본 오사카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돈에 욕심이 나서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따라나섰다. 주인집에 알리지도 않았다.
나하고 같이 간 처녀들이 여덟 명이었다. 광주 아이도 있고 장성아이도 있었다. 나는 소매가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봄으로 기억한다. 광주에서 오후 두 시경 그 남자들을 따라 기차로 여수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일본 가는 배를 탔다. 배에는 일본으로 돈 벌러 가는 조선 남자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배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오전 열 시경에 오사카에 내려 우리들은 일본인 남자의 집으로 갔다. 

그 집에는 애기 둘과 할머니가 있었다. 오사카에서 다시 상해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오사카에 온다더니 왜 상해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일본인 남자는 자기가 상해에서 큰 장사를 시작했는데 거기 가서 심부름을 하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 집에서 하루 밤을 자고 난 다음날 배를 타고 상해로 갔다.
배 안에는 민간인이 많았고 여러 밤을 배 안에서 잤다. 밥은 강냉이 밥을 먹었다. 상해에 내리니 군부대 차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차를 타고 어떤 집으로 갔다. 그 집은 부대 바로 옆에 있었다. 그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자도 같이 갔는데 상해에 와서는 서로 헤어졌다

<하순녀, 정대협 증언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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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위안부의 이야기 - 하순녀(3)

그 집에 도착해 보니 우리를 데리고 간 일본인 남자가 그 집 주인이었다. 집에는 주인의 부인과 평양에서 온 여자 그리고 밥을 하는 중국인 부부가 있었다. 그 부인은 일본인 여자로 남편보다 나이가 더 들어보였는데 남편에게 늦게 왔다고 야단을 하며 싸웠다. 같이 온 여덟 명의 여자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졌다. 나만 그 집에 있게 되었다. 그 집은 단층 건물로 조그만 방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 중국 사람이 하숙을 쳤다던가 여관을 했다던가 하는 집을 빼앗은 것이라고 했다.
그 집에 도착한 뒤 주인이 여자들을 계속 데리고 와서 서른 명 정도가 되었다. 내가 들어온 지 서너 달 뒤에 중국인 여자 두 명과 일본인 여자 두 명도 들어왔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 여자였는데 부산내기, 포항내기도 있었다. 중국인 여자는 그 부락에 살던 사람이었다. 상해에 있는 소개소에서 여자가 있다는 연락을 하면 주인이 데리러 가곤 했다. 처음에 같이 온 조선인 남자도 여자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 집 입구에 간판이 있었는데 글자를 몰라서 읽지 못했다. 그 집은 상해의 복판에 있었고, 그 일대가 불란서 조계라고 들었다. 거기에는 일본군 부대가 여러 개 있었고 여자 장사를 하는 집도 많았다.
여자들에게 방을 하나씩 주고는 군인을 받으라고 했다. 내가 있던 방은 두 사람이 간신히 누울 정도로 좁았으며 바닥에 종이가 깔려 있었고 담요가 두 장 있었다. 휴지는 없었고 조그만 쓰레기통이 하나 있었다.

처음 보름 동안은 하루에 군인이 하나둘씩 들어왔는데 나중에는 무리로 달려들어 “아이고 죽으면 죽었지. 이 짓은 못하겠다.”고 주인에게 말했다. 군인들에게 술을 팔기도 했는데 술을 마신 군인들은 더 못살게 굴었다. 주인에게 “군인을 받는 대신에 밥하고 식구들 빨래를 할게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인은 군인을 안 받는다고 뺨을 때리고 발로 차고 했다.

주인은 내 이름을 ‘오도마루' 라고 지어줬다. 다른 여자 이름 중에 기억나는 것으로는 나와 같은 '오도마루'가 한 명 더 있었고 '다께코'도 있었다. 그 집에 오는 군인은 육군이었는데, 졸병도 있고 장교도 있었다. 민간인은 들어오지 못했다. 해군이 오면 못 들어오게 하고 “너희는 너희를 받는 곳으로 가라"고 군인들끼리 싸웠다.
 <하순녀, 정대협 증언집(1)>

***위안소에서 술을 팔았다는 증언으로 보아 하순녀는 일본군 위안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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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위안부의 이야기 - 이영숙(1)

1939년 12월, 내 나이 열일곱 살 되던 해였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취직을 시켜 준다는 사람이 있으니 일본으로 같이 가자고 하였다. 조선에 있으나 일본에 있으나 고생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조선에서보다 살기가 더 좋다고 하길래 그 길로 살던 집을 나왔다. 
친구와 같이 평안도 신의주가 고향이라고 하는 조선인 부부를 만났는데, 그곳에는 우리들 이외에 네 명의 여자가 더 있었다. 그 조선인 부부는 우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고 간단한 옷가지도 사주었다. 머리는 모두 단발로 자르게 하고 외모를 가꾸도록 하였다.
그 사람들과 같이 부산의 여관에서 일주일 동안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배가 오지 않았던지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가자고해서 조선인 부부를 따라 신의주로 갔다. 조선인 남자는 우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쇠꼬챙이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고문을 하는 등 우리를 몹시 학대했다. 
신의주에서 일주일 가량을 조선인 민가에 머물렀다가 새벽에 기차를 타고 다시 부산으로 왔다. 부산에 도착하니 지척을 분간하기가 어려운 깜깜한 밤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일본인에게 넘겨졌다. 그 일본인은 군속이었는데, 군복을 입었으나 계급장은 없었다. 우리는 그 일본인을 오토상(아버지)이라고 불렀다.

 <이영숙, 정대협 증언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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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위안부의 이야기 - 이영숙(2)

식사와 청소는 중국인 남녀가 담당했다. 중국인의 처지도 우리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주인은 일본인 부부였는데 남자는 마흔 살,여자는 서른다섯 살 정도로 보였다. 남자에게는 오빠, 여자에게는 언니라 부르라 했다. 일본인 주인이 내 이름을 '아이코'라고 지어 주었다.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자 새로 온 우리들을 찾는 군인들이 있어 그날부터 군인들을 상대하였다. 밑이 찢어져서 일주일 동안 피가 멈추질 않았다. 월경은 열아홉 살 때부터 하였는데 월경을 하려고하면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오전 일곱 시경에 일어나서 청소하고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은 뒤 군인을 맞이했다. 식사는 아침, 저녁 두 번 먹었으며 밥은 안남미로 지은 것이었다. 1층에는 출입문을 마주보고 디귿자형으로 긴 의자를 놓아두었는데 아침에 외모를 단정히 한 뒤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의자 뒤의 벽에는 우리들 이름과 번호가 씌어져 있는 벽보판이 붙어 있었다. 

우리가 그 의자에 앉아 있으면 군인이 와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데리고 방으로 갔다. 하루에 상대한 군인은 대개 5명에서 6명 정도였다. 군인이 없는 날도 있었고 자고 가는 군인도 있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되면 15명 정도를 상대했다. 이럴 때는 바빠서 밥을 먹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대 군인은 장교도 있었고, 사병들이었다. 군인이 오면 주인여자나 먼저 와 있던 위안부 여자들이 방으로 따라 들어와서 돈을 받았다. 돈을 받은 후에 가격표시가 되어 있는 전표를 삿쿠와 같이 나에게 주었다. 내가 군인에게 돈을 받아 주인에게 갖다 줄 때도 있었다. 그날 받아두었던 전표는 모아서 저녁에 주인에게 갖다 주었다. 
한 달이 지나면 전표로 매상을 많이 올린 사람과 적게 올린 사람을 구분해서 많이 올린 사람에게는 칭찬을 해주고, 적게 올린 사람에게는 쇠꼬챙이로 때리거나 욕설을 해댔다. 나는 보통사람과 비슷했지만 성병에 자주 걸려서 매상이 적었기 때문에 많이 맞았다. -계속-

 <이영숙, 정대협 증언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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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위안부의 이야기 - 이영숙(3)

돈은 필요할 때 주인에게 신청하면 줄 때도 있었고 안 줄 때도 있었다. 외출할 기회가 있으면 돈을 받아서 속옷도 사고 화장품도 샀다. 외출은 군인이 많이 오지 않는 날을 택해서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갈 때는 주인이 데리고 가거나 아니면 우리들끼리 갔는데 중국인이 끄는 인력거를 타고 갔다. 중국인은 우리가 일본인인 줄 알고 말을 잘 들었다.
옷과 생활필수품은 주인이 주었는데 옷은 기모노였다. 그 골목에는 중국인 남자들이 하는 미장원이 있었다. 그곳에 가서 파마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나자 그곳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환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한 여자가 "너는 계약 기간이 지났으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2년이 지나고 며칠이 지나도 주인이 아무런 말도 안했다. 

그래서 어느 날 술 한 되를 사먹고 술주정을 했다. 주인이 이것을 보고 헌병대에 고발한다고 해서 “고발 할 테면 해라. 나도 고발 할 꺼다. 계약기간이 지난 것도 모두 안다. 그리고 너희들이 나에게 학대한 모든 것을 고발 할 테다.” 하면서 엄포를 놓았다. 그 다음부터는 나에게 오는 군인을 한 사람도 받지 않았다. 

그 골목에는 위안부를 업자에게 소개해 주는 일본인 영감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 일본인 영감이 나에게 와서 귓속말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으냐? 좋은 곳으로 소개시켜주겠다.” 하면서 물어보았다. 나는 좋다고 했다. 그러자 그 영감이 좋은 곳을 알아봐 준다고 하면서 가더니 며칠 후에 나를 다른 집으로 소개해 주었다. 
나는 그날부터 짐을 옮기고 옮긴 집에서 생활을 했다. 그 집에서 나올 때는 계약기간이 지나고 일한 동안의 값을 쳐서 돈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 자유로운 몸이 되면 주인과 50대 50으로 나누게 되어 있었다.

내가 새로 간 집에는 모두 일본인 위안부들만 있었다. 나 혼자 조선 사람이었다. 방은 위안부들에게 각각 하나씩 주었다. 주인은 일본인 부부였고 시부모를 모시고 있었으며 일곱 살 난 아들이 하나 있었다. 주인여자 이름은 에이코였다. 이곳에서는 비교적 지내기가 좋았다. 상대 군인도 대부분 장교들이었다. 개중에 어쩌다 사병도 있었다. 

여기서는 내가 군인을 받고 싶을 때만 군인을 상대했다. 주인과 이익배분은 50대 50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돈이 있으면 조선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였으며 내가 조선으로 나갈 만큼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있었다. 

 <이영숙, 정대협 증언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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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위안부의 이야기 - 이영숙(4)

그렇게 지내던 중 어느 날 군인들과 위안부 여자들이 파티를 한 적이 있었다. 식사를 주문하는데 주인여자가 모두 우동을 시켰다. 나는 워낙 밀가루 음식을 싫어해서 나 혼자 밥으로 시켜먹었다. 그랬더니 주인여자가 “조선 년은 할 수 없어” 하고 한마디 했다. 주인여자는 몰래 말을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들었다. 

파티가 끝난 후 나는 계속 포도주를 마셨다. 달콤해서 마신 것이 그만 취해 버렸다. 취한 김에 여자들을 불러 세워서 “조선 년이라고 욕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서 나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욕한 사람 없다고 했다. 나는 주인여자를 가리키면서 “에이코 언니가 아니냐?"면서 멱살을 잡아끌고는 마구 때려 주었다. 

주인여자는 남편 몰래 헌병대위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나는 때리면서 너는 헌병 대위와 놀아난 여자다. 너희들 일본 사람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되었는데 그럴 수 있느냐, 그리고 헌병대에서 분명히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지 말라고 했는데 학대를 했으니 헌병대에 고발한다고 하면서 계속 때렸다. 그랬더니 주인여자가 헌병대로 가서 고발을 해버렸다. 헌병 대위가 와서 나를 끌고 갔다. 그래서 헌병대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나왔다.

다카노 교오이치라는 군인이 나에게 자주 왔는데 그는 나를 무척 좋아했다. 어느 날 이 군인이 나에게 백금시계를 선물로 사준 적도 있었다. 그 시계를 사준 뒤 그 군인이 오지를 않아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돈을 훔쳤는데 그것 때문에 징역살이를 하러 갔다고 했다. 그 이후로 전쟁 끝나기 며칠 전에 한번 만난 뒤 곧바로 전쟁이 끝나 만나지를 못했다. 군인들은 오면 건빵을 주기도 했고 용돈으로 쓰라고 하면서 얼마씩 주고가기도 했다. 


<이영숙, 정대협 증언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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