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천]출가교역생활 20년 대한 회고 | 여래20년 여래문집
으라차차 2013. 11. 16. 21:38http://blog.daum.net/kose1000/206755
출가교역생활 20년 대한 회고
원기 78년에 출가했으니 내년이면 20년이 됩니다. 입학은 삼심학년으로 하고 졸업은 여래학년으로 했습니다. 중도훈련원에 들어가면 단장을 맞기고 교당에서는 주임교무로 발령을 받으니 어느덧 중진으로 들어섰다고 보아야 겠지요. 출가 20주년 행사를 한다고 동기회 임원들에게서 부탁이 들어옵니다. 달달이 회비를 모아 여행을 준비하고 20년 기념 세미나, 학술회, 책자 발간등 꿈과 비전이 무성합니다. 20주년 준비를 책임진 교무님의 원을 들어주기 위해 출가 20년을 돌아보는 글을 준비했습니다.
교역생활 20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Ⅰ. 나는 1986년 원불교학과(삼심학년)에 입학을 하였다. 이른바 재수를 하여서 학교에 들어왔다. 물론 처음 시험을 쳤던 학과는 따로 있다.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나서 가슴 설레이는 일이 무엇일까 했을 때 우연찮게 원불교 교무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졌고 아들의 출가를 기쁘게 생각했을 아버지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부모님 원망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으시고 허락하셨다. 서원관 기숙사에 들어와서 생각되어지는 것이 원불교 교무로 입문함이 처음 같지 않아 내가 태어나던 때 즈음에 열반하신 선진님이 누구인지 도서관에서 찾아 보기도 했다.
Ⅱ. 이성을 몰랐던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눈을 떳다. 그도 그럴것이 잠만 따로 잘뿐 같은 식당에서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으니 군대 가기 전까지 정화원의 그늘을 벋어날 수 없었다. 4월 신학기 총부 반백년 기념관 옆에 핀 목련화의 하얀 속살도 정화원 교우들보다 싱그럽지 않았다. 안에서 채우지 못한 마음을 밖에서 찾기도 했다. 학과 수업이 끝나면 또래의 교우들과 같이 타과 여학생들하고 미팅을 하였다. 그러던 1학년 2학기 어느날 사회복지수업시간 한 여학생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 학생 주변에 오로라가 비쳐지고 너무나 예쁘게 보인 것이다. 그 인연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서까지 이어졌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Ⅲ. 2학년을 마치고 1988년 3월 군대에 자원입대하였다. 운전면허증이 있어서 운전병으로 들어간 것이다. 논산훈련소에서 6주 기초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는데 광주 상무대 안에 있는 군수지원사령부 예하 보급품을 공급하는 부대에서 4.5톤 복사트럭을 운전하였다. 일요일에는 상무대 무각사에서 종교활동도 하였다. 남자들만의 군대 생활은 색다른 경험이었고 사회성이 길러졌다. 또한 명령에 복종하는 단순한 생활속에서 수양공부가 많이 되었다. 1990년 6월 육군 병장 계급장을 달고 제대를 하였다. 복학하기전 총부 훈련부에서 간사근무를 하였다. 총부 송대 뒷산에서 전국 청소년훈련과 전국 어린이회장단 훈련을 진행한 것이다. 이때도 참 재미있었다. 겨울이 되었고 만덕산동선을 들어갔다. 승산종사님의 일원상진리는 알 듯 말 듯묘하게 끄는 맛이 있어 방학만 되면 동선에 참여했었는데 그해 동선에서 결말이 났다.
훈련이 마지막으로 치닫고 승산님의 일원상진리 강의를 듣던중 ‘이렇게 쉬운 이치를 그렇게 어렵게 알려주는가, 내가 원장님에게 속았구나, 이것을 알려고 이 고생을 하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아 이런것인데 너무 여기에 집착했구나. 깨달음은 그렇게 황홀하지도 신기하지도 않은 지금 바로 이것인데 스스로 환상을 만들어 나를 묶었구나‘ 싶었다. 그 다음부터 만덕산 동선은 한번도 가질 않았다. 마음이 열린 것이다. 교전에서 견성(見性) 즉 성품을 본다고 하는데 나도 견성을 한 것이다. 좌타원님에게 문답감정을 받았는데 삼대불공법 법문을 주셨다.
Ⅳ. 1991년 3학년(여래학년)에 복학하였다. 입학학년인 삼심은 형님들과 누님들이 많아서 그에 의지를 하고 막내의 티를 냈는데 여래학년은 여학생이 많고 남학생은 패가 나뉘어 적응하기 힘들었다. 뭔가 탈출구를 찾던차에 심장병어린이돕기 자전거순례를 지원하였다. 장호준 교무를 중심으로 총 5명이 순례단을 꾸려 33일간 전국을 돌며 성금을 모금하였다. 이때 활동이 시사저널 90호에 인터뷰 기사로 나왔다.
[인터뷰] 심장병 아동 돕기 은륜 대장정 시사저널 [90호] 1991년 07월 18(목)
원광대 원불교학과 학생5명으로 구성된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새생명 국토순례단’이 은륜의 장정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달 6월 26일 이리를 출발한 사이클순례단은 서울 속초 부산 목포 등을 돌며 33일간의 순례 모금행사를 벌인다.
87년부터 매년 계속돼온 이 행사는 86년 8월 강해윤씨(당시 원광대 2학년)가 유아원에서 어린이 여름훈련을 지도하던 도중 심장병으로 쓰러진 한 어린이를 돕기 위해 모금운동을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제5기 순례단 단장 장호준(25 · 사진 맨 왼쪽)씨 등 5명의 단원은 작년 12월 순례단을 결성하여 지난 3월부터 1백일 기도와 체력훈련, 그리고 풍물연습을 해왔다. 이들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풍물실력을 동원, 가두모금 활동을 한다. 주위의 호응도 매우 높아 작년의 경우 7천8백만원을 모금했다고 한다. 올해 목표는 60명의 심장병 어린이에게 수술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금년 7월까지 수술을 받은 어린이는 모두 1백5명. 성금은 각 지방 원불교 교당, 혹은 이리시 원불교 중앙총부(전화 0653-50-3352)에서 접수하고 있다.
Ⅴ. 4학년이 되어 도올선생님이 특강을 해 주셨다. 원대 한의대에 편입하였던 차에 배움의 장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참 열심히 들었다. 원불교 미래는 여러분들에게 있고 여러분 중 기독교의 바울같은 사람이 나와 대종사님 교법을 세계에 전해주어서 광대무량한 낙원세계가 펼쳐지길 기대한다는 염원이 가슴에 다가왔다. 서원관 학림사에 286 컴퓨터가 막 들어오기 시작했었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 성심성의껏 숙제를 하여 기말시험 레포트가 A++ 나왔다. 난생 처음 A++ 받았다. 학부 교수님들에게도 받지 못한 성적이다. 도올선생님이 나의 밑 바닥에 있던 잠재성을 한껏 끌어올려 주셨다. 내가 남원에서 이렇게 나마 교화를 할 수 있었던 저변에는 도올선생님의 공이 크다. 선생님의 강의를 받던 여래동기중에 교단 인재가 많다. 외국에도 가장 많은 동기가 나가있고 교단의 중진으로 커 나가고 있다. 21년이 지난 2012년 도올 선생님이 다시 원불교학과 학생들에게 강의를 해 주신다. 지금 강의 받는 후배들 중에서도 교단의 인재가 많이 나올 것이다. 역사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Ⅵ. 4학년 후반기부터 교무고시공부를 재미있게 했다. 교무고시에 대한 전설은 입학하여 받는 ‘신입생훈련’에서 이미지화 되었었다. 당시 방장님이 쉬는 시간이면 원불교 전서를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이 교무고시공부였다. 원불교 교무가 되기 위해서는 전서를 달달달 외워야 한다는 선배들의 이야기 속에 내심 겁도 나고 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다행히 떨어지지 않았다. 졸업을 하고 동산훈련원으로 배움의 장을 옮겼다. 동산훈련원 시절에는 교무로서의 자질을 준비하는데 이때부터 동기생들의 모습속에서 많은 변화가 보였다.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 선을 보거나 데이트를 하는 남자 동기생들과 독신을 서원하는 여자 동기생들의 미묘한 차이점과 함께 할 수 없는 애틋함이 묻어 났다. 출가식을 하고 인사발령이 동산훈련원 게시판에 게첨되었는데 만덕산 훈련원으로 되어있었다. ‘참 나!! 승산님 일원상진리와 졸업한 줄 알았는데 아직 인연이 남아있었단 말인가’ 궁시렁 거렸지만 만덕산훈련원으로 부임하였다. 교당발령을 원했던 나는 만덕산 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마지못해 생활했다. 이렇게 1년을 보낸 뒤 포항교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다.
Ⅶ. 아! 포항교당.. 나의 첫 교당인 포항만 생각하면 마음이 저려온다. 1994년 1월 교당 이바지 교도님들을 태운 대형버스에 탑승하여 산타원 김정민 교무님과 산타원님 동생인 도무님 그렇게 3명이 포항교당에 부임하였다. 포항교당은 유치원이 부설로 딸린 교당이다. 포항시 죽항동에 위치한 교당은 일반법회출석 40여명과 어린이법회 10명, 학생법회 7-8명, 청년법회 10명 정도 나오는 교단 내에서는 중간정도 규모의 교당이다. 유치원은 도무님이 담당하고 나는 청소년 법회를 책임지었다. 일요일이면 교당 1층 조그만 방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법회를 보고 토요일은 학생들 대상으로, 목요일은 청년들 대상으로 법회를 보았다. 교도님들은 포항제철에 근무하는 분들이 대부분이고 직장따라 호남에서 포항으로 이사오신 분들도 많았다. 그때만 하여도 학생과 청년교화가 명색을 유지하였다. 교당은 나오지 않았지만 꿈나무 음악학원 원장님을 찾아가 원두커피를 마시고 지곡동 포항공대 단지 영빈관인 영일대에서 교도님들과 식사도 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다. 2년이 지나서 이임을 하게 되었다. 인사이동 희망지역을 경인교구로 하여서 부천교당에 발령받았다. 부천교당은 최광현 교무가 첫발령 받아 최법신 교무와 결혼을 하여 그만두고 후임으로 문제호 교무가 있다가 이임하여 내가 부임한 것이다. 부천교당은 부천역과 소사역 사이 모텔이 많은 유흥가에 위치해 있어 눈이 호사를 누렸다. 교당은 공간이 비좁아 1층 교무방이 학생들과 청년들의 대중방이 되었다. 또한 화장실이 따로 없어 대중화장실을 함께 사용했다. 2층은 어린이집이 있어서 아침 저녁으로 차량운전을 했다. 한번은 운행을 마치고 선생님이 차량에 타지 않았는데 출발하여 오기도 했다. 보통 선생님이 차에 타면 문 닫치는 소리를 듣고 출발하는데 다른 소리를 문 닫는 소리로 알고 출발한 것이다. 차량 선생님 왈..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고 왔는데 차가 떠나서 황당했다고 한다. 1년이 지나 주임교무님이 다른 교당으로 이임을 하게 되어 옆 교당인 인천교당으로 옮기게 되었다.
Ⅷ. 인천교당에 갈타원 박영륜, 김기연 교무님과 함께 부임하였다. 인천교당은 제법 규모가 되었고 교도들도 열성이어서 그간의 청소년 교화 경험을 들이대 학생교화 청년교화에 정성을 다하였다.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것은 연말에 있는 경기인천교구 청소년 예술제. 첫해엔 청년회가 대상(大賞)을, 이듬해엔 학생, 청년 연합회가 대상(大賞)을 받았다. 인천교당이 연거푸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저는 청소년 교화가 단순한 법회 활동이 아닌 그들의 감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예술활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는데 마침 행사 교도 중에 시립극단 단원이 있어 의상 소품협조와 연극, 무용의 지도를 받아서 청년, 학생들과 공동작품을 만들었다.
2년의 부임기간동안 청소년 교화의 한계를 절감했다. 서서히 청소년 교화는 내 능력 밖으로 밀려났고 1년이 다르게 변화해 가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내가 따라 갈 수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도 순간순간 달라져 가는데 교무인 나는 변화지 않으니 그들도 법회및 활동에 흥미를 잃어 갔다. 이런 차에 교화 2년차부터 생각되어졌던 해외교화, 특히 남미교화에 관심이 가졌고 마침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교당에서 근무하는 장호준교무의 인사요청이 받아들여져서 인사이동을 하게 되었다.
Ⅸ. 부에노스 선교소는 교당이나 교도회가 조직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역자만 파견 시켰다 뿐이지 경제적으로 제도적으로 지원되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먹고 살며 어떻게 교화를 해야할 것인가 계획이 서지질 않았다. 그래서 한의업 즉 침구를 배워가면 그것으로 경제도 해결하고 간접교화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 한의학(韓醫學)을 공부 하게 되었다. 서울로 거쳐를 옮기고 나서 수지침 기초반과 고급 과정을 이수하니 주위에서 미국침구사 시험에 응시해 국제 침구사가 되면 해외에서 침구사로 활동할 수 있다는 정보를 주어서 몸에 놓는 체침과 한약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되었다. 이렇게 공부하기까지 근 1년 6개월이 걸렸고 국제침구사 시험(침, 한약)에 합격하고 아르헨티나에 오게 되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당에 있던 중 한국에 나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도 남미에 다시 갔었는데 큰 아이 태어나고 정토와 아이를 데리고 갈 용기가 나지 않아 국내에 머물기로 하여 2003년 3월 영광교구사무국으로 발령이 났다.
Ⅹ. 당시 영광교구사무국은 핵폐기장을 막기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교역자 한 사람을 더 배치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영광지역에 방사능폐기장을 건설하려고 시도하였고 교구에서는 2월달부터 무기한 천막농성과 단식기도를 실시하였다. 교구 교무님들과 광주시에 있는 전남도청 앞에서 좌판을 깔고 일원상서원문 독경과 108배 기도를 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힘이 약했다. 이윽고 7월이 되어 총부에서 교역자 100여명이 영광교구로 파견되어 비상기획단 사무실이 꾸려지고 조직적인 방폐장 막기 투쟁이 펼쳐졌다. 그 한가운데 내가 있었다. 면면촌촌으로 반대 홍보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렇게 8월이 가고 방폐장 선정은 인근 부안군으로 옮겨갔다. 10월달 영광교구 금강산관광 실무를 맞아 교무님들을 모시고 금강산을 다녀왔다. 연말 인사이동철이 되어 어디로 이동할까 고심 되어졌다. 새로운 교당으로 가면 사회복지사 자격증과 보육교사 자격증이 필요할 것 같아 사이버학교에 편입을 하여 공부하였다. 당시 사이버학교는 4년제가 14개, 2년제가 2개였다. 2년제 전문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Ⅺ. 2004년 1월 종타원 서위진 교무님과 광주공항에서 만나 함께 남원교당에 부임하였다. 교당에 도착하니 교도님들이 모두 나오셔서 환영을 해 주셨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남원교당은 원기 23년인 1938년 상산 박장식 대원정사 모친 계타원 정형섭 대희사님의 환갑기념으로 만들어졌다. 금암봉에 있다가 1986년 지금의 자리로 이사와 전임 교무님이신 은타원 김성전 교무님의 노력으로 1층 청소년실, 2층 소법당, 생활관, 3층 대각전이 있는 우람한 교당이 지어졌다. 부임해서 보니 부설 혜중원광어린이집 시설이 낙후되어 기능보강을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교도회장의 퇴직금을 담보로 8천만원 빚을 내 공사를 하고 종타원님 원장 급여와 교사인 내 월급을 3년간 모아 원금과 이자를 갚았다. 어린이집 필리핀 이주여성 자녀들의 행동이 거칠다는 것을 알았다. 법회를 2층 법당에서 보고 있어서 후반기부터 3층 법당으로 올라갔다.
2005년 교당 1층을 리모델링하여 노인복지센터와 지역아동센터를 개설하였다. 사이버학교를 졸업하고 보육교사 1급과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통계청 종교인구조사 결과 남원지역에 원불교 신자가 1,700여명 되었다. 한사람이라도 원불교 신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이리 저리 뛰어다녀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2006년 오해심교무가 부교무로 부임하였다. 3월부터 본격적으로 결혼이민자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국어교육을 실시하고 7월달에 전북도청에 남원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 비영리민간단체 등록을 하였다. 같은 해 5월 비영리 민간단체 남원춘향도령원화어린이예술단을 창단하고 12월 창단공연을 하였다. 9월 JTV 전주방송 피우자 민들레에 출연하였다. 원광노인복지센터가 마사회로부터 12인승 승합차량을 지원받았다. 11월달에 원광지역아동센터가 EBS 사랑의 네발자전거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남원교당 여성회를 결성함과 동시에 사단법인 한울안운동 남원지회를 개설하였다. 전북지역에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가 설치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익산 원광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채옥희 교수님을 찾아 자문상담중 남원지역에도 결혼이민자센터가 생길것이니 준비하라는 정보를 들었다. 남원센터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신다.
2007년 설명절 때 전주방송 15초 공익광고에 출연하여 다문화사회 도래를 알렸다. 설 연휴기간에 하루 5번 이상 방영되어 남원센터 홍보가 많이 되고 고향친구들도 TV를 보고 연락을 해 왔다. 예술단은 독일 레겐스부르크시 첫 해외공연을 다녀오고 정기공연을 펼쳤다. 나용수교무가 보절교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국립국어원 한국어 교육 프로포절에 응모하여 사업비를 받았다. 돈암교당 이현성교도(이준석)가 도움을 주었다.
2008년 남원시로부터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위탁받아 3월 개소식을 하였다.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데 박명원 교무의 도움이 컷다. 센터로 지정받기까지 우여곡절과 애피소드가 많았다. 교당 1층에서 센터를 운영하기가 힘들어 교당 옆 이정섭외과건물을 임대하였다. 남원에서 광주로 이사하여 우암병원을 운영하시는 불자(佛子) 이정섭 원장님이 10년간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고마우신 분이다. 예술단이 모스크바교당 공연을 다녀왔다. 4월부터 09년 4월까지 원음방송 ‘아침의향기’에 출연하고 6월 원음방송 다문화사회인식개선 연중캠페인에 참여하였다. 5월달에 전주 KBS 무허가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2009년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이정섭 외과병원으로 이사하고 남원시와 전라북도의 예산 1억원을 지원 받아 다문화센터 리모델링을 하였다. 연말 이웃초청법회로써 법회출석 200명을 채웠다. 예술단 독일 공연을 다녀왔다. 원불교 사회공헌상을 만들어 남원지역사회를 위해 헌신 봉공하는 개인과 단체를 시상하게 되었다. 시상 첫해 대상자는 남원교당 봉공회이다.
2010년 어린이집 옆 교육청 땅 156평을 매입하였다. 남원시로부터 건강가정지원센터를 위탁받아 7월달에 개소식을 하였다. 연말 이웃초대 300명 법회출석 법회를 진행하였다. 예술단 독일공연과 12월 정기공연을 하였다. 총부 정책연구소 주관 교화단공동교화를 신청하여 세미나에서 교화단공동교화에 대해 발표하였다. 노약자를 위한 교당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였다.
2011년 총부에서 교화단공동교화 경과보고 세미나 발표를 하였다. 7월 아동센터가 경차를 담배인삼공사로부터 받고 10월달에 다문화센터가 경차를 공동모금회로부터 받았다.
2012년 강신오 교무가 이임하고 장성각 교무가 부임하였다. 남원교당에 부임하여 9년이 되어간다. 교역인생 10년차부터 19년차, 나이 38세부터 47세, 원기 88년에서 97년,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인생에서 가장 꽃다운 시간들을 재미있고 즐겁게 지내고 있다.
Ⅻ. 내년이면 출가 20년이 된다. 지난 20년을 되돌아 볼 때 10년간은 준비기간이었고 10년간은 열심히 교활활동에 매진하였다. 특히 남원교당에서의 9년은 기쁨과 보람이 많았다. 새로운 인연도 많이 만났다. 전주방송국에 있다가 TV조선으로 옮긴 정한피디가 그중 하나다. 피우자 민들레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만났는데 피디라는 직업이 겉으론 화려할 것 같아도 안으론 3D 직업임을 알게해 준 장본인이다. 필리핀 이주여성 “메쉘”을 방영하여 한국피디대상, 민영방송대상을 받았다. 내 나름대로 격려해 주기 위해 사단법인 한울안운동 지타원 한지성 회장님에게 추천하여 한울안상을 주었다. 상금으로 2백만원을 본인이 받지 않고 남원 다문화센터로 희사하였고 나는 다시 법인에 기부하였다. 어느 누구도 금전적으로 이익을 차지 하지 않았지만 생색은 다 냈다. 이 사실을 안 전주방송 사장님이 별도로 정한피디를 챙겼다고 한다. 어느날 류시화씨가 전화를 했왔다. 방송에서 ‘뭬셀’을 시청했는데 마음이 짠해 도와주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류시화씨는 책을 쓰거나 외국을 여행하기에 1년에 TV를 한 두 번 보는 편이라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필리핀 이주여성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난 것이다. 사단법인 한울안운동과도 인연이 되었다. 다문화사업을 하면서 법인에 소속되었으면 해서 법인을 찾다가 원불교 여성회가 제일 좋을 것 같아 원불교 여성회 남원지회를 만들고 한울안운동 정관에 결혼이민자지원사업과 건강가정지원사업을 넣고 남원지부도 등기하였다. 이런 작업이 있었기에 남원시 다문화센터, 순창군 다문화센터가 법인산하에 들어올 수 있었다. 어린이국악예술단인 리틀아리랑을 통하여 외국에 있는 교당에 지원도 하였다. 독일 레겐스부르크교당에 3번 교화지원공연을 가고 러시아 모스크바 교당에 1번, 그리고 아프리카 스와질랜드 교당에 1번 공연을 다녀왔다. 남원은 판소리 동편제의 탯자리이며 국악의 성지이다. 이런 지역적인 특성을 살리고 민족종교인 원불교의 고유성이 가감되어 어린이국악예술단 활동을 한 것이다.
남원교당의 특성을 잘 나타낸 것을 들라면 다문화가족지원센터 활동일 것이다. 원불교에서 다문화활동하면 의례껏 남원교당을 말하고 자문을 구하는 전화가 많이 온다. 남원교당에 부임하여 계획적으로 다문화센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어린이집에 보육되는 필리핀 자녀의 성격이 거칠었는데 원인이 엄마에게 말을 배우지 못해 몸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주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다문화센터가 된 것이다. 국가에서 인정하는 센터가 된지 5년째인 지금 다문화센터에 종사하는 상근직원이 15명, 비상근을 포함하여 70여명의 일자리를 제공하여 남원지역 경제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다문화센터를 활용하여 베트남 초등학교에 봉사활동 한 것도 자랑스럽다. 총부 공익부 은혜확산 지원사업의 하나이다. 이런 인연으로 올 초 베트남 공무원들을 초청하여 한국의 발전상과 베트남 이주여성들이 잘 살고 있음을 보여준 것도 잘했다고 본다. 남원에서 시작한 다문화센터가 무주군, 정읍시, 성주군, 순창군으로 새끼를 쳐갔다.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다문화센터의 시발점이 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남원교당에 부임하여 스스로 생각해 볼 때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시대의 조류에 따라 사업기관을 만들었고 지역의 젊은사람들을 인재로 채용하여 자기개발 할 수 있도록 눈을 떠준 것이다. 남원은 최고학력이 초급대학이다. 4년제 학사이상은 드물고 전주나 광주 등 대도시권에서 활동하려고 하지 남원에 있으려고 하질 않는다. 기관을 만들면서 함께 한 일이 인재를 키우는 일이었다. 어린이집을 하면서 자모들 중 젊고 똑똑하다고 싶은 자모에게 학비를 주고 사이버 대학에 입학시켰다. 2년뒤 졸업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면 직원으로 채용하는 수순을 밟았다. 직원으로 채용되어서도 4년데 학교에 편입하게 하고 4년제 학사인 경우는 대학원에 입학하여 석사를 취득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세계화의 물결속에 글로벌 마인드를 심어주기 위해 직원들에게 1년에 한차례 해외견학을 권장하여 일본,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독일을 다녀올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정책연구소에 공모한 교화단공동교화를 신청하여 남원, 도통, 보절, 산동, 수지 5개 교당이 함께 교화하고 공부하고 있다.
반대로 못하고 부족한 부분도 많다. 교도들 교리공부와 법위단계별 훈련을 하지 못하였다. 아쉽게도 법회출석만 강조했지 교도님들에게 삼학팔조, 사은사요 등 교리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초입교도훈련, 보통급, 특신급, 법마상전급훈련을 체계적으로 해야 함에도 그러질 못했다. 비단 남원교당만의 문제이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아쉽고 부끄럽다. 지금이라도 하면 되지 않냐 싶지만 월화수목금금금인 근무여건속에서 생각뿐이고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변명같지만 교당과 기관을 함께 하기에 쉴 날이 없다. 주중은 기관을 돌봐야 하고 주말은 법회를 봐야 한다. 이렇게 9년을 살았다. 그래도 교당의 제일 큰 어른인 종타원 서위진 지구장님 이하 함께 하는 교무님들에게 고마운 마음 뿐이다. 능력은 없지만 열심히 살았고 나름대로 교단의 발전에 기여하려고 노력하였다.
ⅩⅢ. 남원의 가장 큰 자랑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천하의 명산으로서 대종사님은 전망품에서 금강산과 지리산에 대해서 평가해 놓았다. 대산종사님은 열반하시기 2달전에 제자들을 통해서 국제훈련원부지를 매입해 놓으셨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법문이 “땅만 매입해 놓으면 나중에 훈련원을 발전시킬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이다” - 조불불사 대산여래 – 이 대목을 읽으면서 행간에 생략된 법문에 필이 왔다. “따로 있을 것이다” 이 대목이다. 누가 지리산국제훈련원을 운영할 것이냐.. 준비되지 못한 사람은 절대 못한다. 교단 내에 훈련원이 많지만 삼동원을 제외하고 흑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 원불교 마인드로는 안된다.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그 준비를 하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지리산 국제훈련원은 이렇다. 인도에 가면 명상산업이 흥행하는데 뿌나지역에 라즈니쉬 아쉬람이 있다. 라즈니쉬 사후에도 핵심제자들이 공동으로 운영해 가는데 한해에 6만명씩 찾아온다고 하다. 체(體)는 원불교법에다 두되 용(用)은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익산 신용동 문화 기준으로 세계를 감싸는것으로는 부족하다. 명상문화의 첨단을 걷고 있는 인도와 미국 유럽, 그리고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을 다 껴않아야 한다고 본다. 앞으로 세계사람들이 갈구하고 답답해 하는 그것을 해결해 주려면 외부에 대한 연구와 연마가 필요하다. 나에게 9년간 남원교당에서 근무하게 한 사은님의 뜻 중 하나가 더 넓은 세계를 돌아보고 지리산에 물질문명에 지친 세계 사람들의 정신을 휴식케 하고 영성을 일깨워 다함께 잘사는 지구촌을 만들라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공부를 좀더 하였으면 한다. 영어를 비롯한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 앞으로 세계의 중심은 아시아로 온다. 8년뒤인 2020년에 중국이 19억, 인도가 16억 등 아시아는 급속도로 인구가 증가하는데 미국은 4억, 유럽은 다 합쳐서 2억밖에 안될거라고 미래학자들은 예측한다. 그러면 결과는 자명하다. 물건을 팔 수 있는 시장은 아시아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계의 중심인 아시아를 선도할 한국의 준비가 필요하고 동남아시아의 거점을 잡을 필요성도 제기 된다. 따라서 영어와 중국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언어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그들 문화를 공부하는 인재양성도 시급하다. 세계언어로서 영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기존의 영어 중심국인 미국, 영국이 아닌 아시아 영어가 뜰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아시아사람들이 쓰는 영어이다보니 아시아적 문화가 가미된 영어로써 네거티브가 아닌 로컬영어, 통하는 영어가 대세일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둘레길이 올해 1개 시와 5개군을 포괄하여 전구간 개통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에 찾아온다. 왜 지리산으로 오는 것일까. 지리산은 어머니산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아프면 제일 먼저 찾는 대상이 엄마이다. 비단 아이뿐만 아니라 사람이 힘들면 그리운 것이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 용서해주고 품어주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이름만으로도 사람에게 안정감을 준다. 앞으로 전 세계에서 지리산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히말라야 트레킹만큼 인기있고 명상수행하기 좋은 산이 지리산이라 믿어 의심치 않다.
ⅩⅣ.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출가 30년이 된다. 내 나이 58세이다. 그때가 되면 교단의 정책 결정권자가 될것이고 교단의 흐름을 우리 세대가 이끌고 간다. 선배님들에게 해바라기처럼 기대고 의지하던 연약한 모습이 아니다. 십년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무어의 법칙처럼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물질이 개벽되는 시대를 표방하고 나온 교법이기에 교법의 필요성은 더욱 부각된다고 보여진다. 오늘 점심식사시간 잠깐 짬이 나서 교당 서재에서 책을 펼쳐 들었는데 주산 박용덕 교무님의 초기교단사 ‘신용벌 도덕공동의 터전확립’ 중 출재가공동체정신이 출가위주로 퇴화되었음을 염려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2003년에 펴냈으니 9년이 지났다. 지금 내가 아파하고 있는 고뇌를 주산님이 선병자가 되어 아파하고 있었다. 그 아픔을 후배들에게 전해 주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40년생 독신 정녀 교무님들이 정년퇴임하고 기혼 남자 교무님들이 교단의 주체 세력으로 커 나오는 선두권이 75 삼심 입학동기 이후부터라고 볼 때 교단을 어떻게 바꾸어 갈것인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 한축을 미력하나마 담당해 나가려 한다는 다짐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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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춘풍2014.04.21 23:37 신고 수정/삭제 답글
교무님 인천 영산임다 늦은 밤 눈이 안 감기네요. 정진정진하시어 견고한 공덕탑을 이루시길 심축드립니다.
우리 교무님 화이팅~!
유유자적2015.01.11 20:38 신고 수정/삭제 답글
교무님 반갑습니다... 검색하다가 우연치 않게 글을 다 읽어 보네요.
圓滿人(원만인)2015.08.06 10:42 신고 수정/삭제 답글
전무출신이시네요. 반갑습니다. 자주 들르고 싶습니다. 친구신청합니다. 제불로그에는 친구가 참 적거든요. 제가 네이버에도 불로그를 합니당 예쁘게 보아 주세요.
김성진2016.08.05 22:07 신고 수정/삭제 답글
반갑습니다! 전북 익산에 있는 '서이리교당' 청년 교도, 1987년생 김성진 입니다! 저는 민산 이중정 원정사님의 외손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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