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3

[제1405호]정은정, ‘쓰기’보다 사람과 이야기를 ‘적는’ 농촌사회학자 [21WRITERS②]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21

[제1405호]정은정, ‘쓰기’보다 사람과 이야기를 ‘적는’ 농촌사회학자 [21WRITERS②]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21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

정은정, ‘저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21WRITERS①]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대한민국 치킨전(展)> 쓴 정은정 작가 인터뷰

제14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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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진수 선임기자

이 글에서 나는 의식적으로 글을 ‘쓴다’라는 말 대신 ‘적는다’라는 말을 선택했다. 사전적 의미로는 차이가 없다. 다만 이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글을 쓰는 단계 이전에 철저히(때로는 처절히) 기록하고 적어두는 이의 엄중함을 드러내고 싶어서였다. 나는 이제 백남기 농민을 적을 것이다. (…) 한국 농업, 농촌의 역사에서 이미 많은 백남기들이 있어왔음을 적으려 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여성 농민’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한 걸음 걸어 나왔던 것처럼, 이제 나는 백남기 농민을 적으면서 두 걸음 더 나아가보려고 한다. 흔들리면서 말이다. -<질적 연구자 좌충우돌기>

글로생활자? 말로생활자?
정은정(45) 작가는 끊임없이 스스로 묻고, “소심하다”고 할 만큼 고뇌한다. ‘쓰다’와 ‘적다’ 사이에서 굳이 선택이라는 것을 하는 엄밀함이 그렇다. 엄격해서도, 올바름을 추구해서도 아니다. 글의 무게를 누구보다 무겁게 느껴서다. 글 쓰는 자신의 마음가짐, 그 글 속에 기록한 사람들, 나아가 글을 읽을 독자의 마음까지 헤아려 세심하게 단어를 고르고, 글의 고갱이를 예리하게 벼린다. 작가이되 연구자여서 몸에 밴 태도다.

그는 스스로를 ‘농촌사회학자’라고 소개한다. 소속된 기관이나 학교는 없다. “주로 하는 일은 전국을 떠돌며 말과 글을 팔러 다니는 일이다. 이런 직업을 두고 우스갯소리로 ‘글로생활자’라고도 하고 ‘말로생활자’라고도 한다. 글과 말로 쌀과 반찬을 구한다.”(<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농민을 대상으로 강의를 다니고, 라디오방송과 팟캐스트에 출연한다. 신문에 칼럼을 쓰고, 세 권의 단독 저서를 냈다.(어린이책 제외)

2014년 처음 쓴 <대한민국 치킨전(展)>은 11쇄를 찍은 베스트셀러다. “음식사회학의 시작”이라는 평가(최진규 포도출판사 대표)와 함께 ‘2010년대의 책’으로 꼽혔다.(2019년 신문 <한겨레>가 출판·서점계 전문가들에게 추천받아 선정) 4년 뒤 나온 두 번째 책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는 백남기 농민 투쟁을 기록한, 일종의 르포르타주다. 2021년 펴낸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은 따듯하면서 문학적인 에세이집이다. 셋 다, 장르도 문체도, 달라도 한참 다르다.

<대한민국 치킨전>에서 그의 글은 발랄하고 유머러스하다. “치킨이야말로 끼니-안주-간식의 삼위일체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메뉴, ‘치느님’이다. 다양한 치킨 메뉴 고르기도 귀찮다면 한마디만 외치면 된다. ‘반반 무 많이!’”

백남기 농민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단단하고 곧다. “백도라지는 병원에 도착한 후 비닐봉투에 담긴 아버지의 옷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 백도라지는 그 옷 봉투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쓰러진 아버지 곁을 지켰다. 물 202톤과 최루액 440리터의 무게이자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간 죄의 무게였다. 함부로 내려놓을 수도, 번쩍 들어올릴 수도 없는 그런 무게.”(<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에서는 문학소녀 같은 감수성이 포근하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엄마는 사 남매의 생일을 모두 과일이나 먹거리로 빗대서 말씀해주셨다. (…) 음력 7월 말이 생일인 작은언니는 포도의 계절에 태어났다. (…) 자기 생일을 보름 앞두고 포도의 계절에 태어난 작은언니는 포도의 계절에 떠났다.”

다만 공통점은 있다. 음식(밥상), 사람, 사회(농촌·농업)가 글의 주재료라는 점이다. 같은 재료를 놓고서 어떻게 이렇게 매번 다른 글을, 그것도 맛깔나게 쓸 수 있는지 궁금했다. 2022년 3월6일 경기도 남양주에 사는 정은정 작가가 가끔 글을 쓰러 찾는다는 정약용도서관에서 그를 만났다.

-책마다 문장의 결이 굉장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부러 의도하고 쓰신 걸까요?

“저는 글쓰기 실험을 많이 해요. 좀 빤한 글을 많이 경계하는 편이거든요. ‘(두 책의 저자가) 동일인이라는 걸 몰랐어요’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되게 좋아요. 의도적으로 흐트러뜨리는 재미죠.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는 화자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르는 글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은 이 땅에서 아이 키우면서 글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강력하게 드러냈고요. 나중에라도 혹시 엉뚱한 글을 쓰면, 정말 상상도 못할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요. 하하.”

-학술언어와 글쓰기 방식이 완전히 달라서 힘들진 않았나요?

“<대한민국 치킨전>은 첫 책이기도 했고, 원래 쓰려던 박사 논문을 밀쳐놓고 쓰는 바람에 대중서 감각이 없었죠. 처음에 논문처럼 엄청 자료를 붙여 보내서 편집자님이 당황하셨어요. 당시 출판사 따비의 신수진 편집자님이 ‘고등학교 2학년 정도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면 좋겠다’고 해서 많이 따라갔어요.

<대한민국 치킨전>이 그렇게 훅훅 읽히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아버지예요. 평생 농사짓고 노동하셨던 아버지는 거의 무학자에 가까워요. 제가 사회학과를 나왔는지 사학과를 나왔는지조차 아직 모르시는 분이거든요. 적어도 아버지가 이 책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셨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컸어요. 글의 대상자가 뚜렷했죠. 책을 드리니 아버지가 단박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시더라고요. 다행이다, 생각했죠.”

‘도마도 집’ 막내딸, 농촌연구자 되다

정은정 작가는 ‘도마도 집’ 막내딸이다. 충북 충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은, 1980~1990년대 경기도 남양주에서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었다. 겨울부터 온실을 따로 만들어 토마토 모종을 직접 길러도, 값이 내려 팔리지 못한 토마토는 밭에 짓이겨지곤 했다. “지금도 토마토는 입에 대지 않는” 이유다. 토마토는 먹지 않아도 그는 “‘도마도 농사’를 짓는 이들을 관찰하는 농촌사회학 연구자”가 됐다. 대학교 학부에서는 문학을 전공했지만, 2000년 어머니가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본 뒤 대학원에서 “사회학으로 급하게 항로를 변경했다”. 농촌, 농업, 농민은 “집안일”이었고 ‘여성 농민의 죽음’을 구조적으로 규명하고 싶었다.

농촌문제를 더 친숙하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면 ‘먹는’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했다. 머리는 이론에 있어도, 손발과 입은 구체적인 현실에 있어야 하니까. 음식사회학 글쓰기의 첫 소재는 치킨이었다. 그의 석사 논문에서 ‘스토리를 끌고 가는 힘’을 용케 발견해낸 편집자가 출판을 제의했다. 석사 논문 주제가 치킨이었냐고? 전혀 아니다. ‘1960년대 미국의 한국 ‘농촌 만들기’ 담론 전략-미 공보원(USIS) 발간 농촌 사람들을 위한 잡지 <새힘> 분석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기술 원조’를 받은 근대화 이야기에 주목해, 이를 무려 ‘치킨’ 이야기까지 끌어간 편집자의 놀라운 힘이다. 하지만 연구자에서 작가로 정체성을 바꾸기가 쉽진 않았다.

-첫 책을 쓰는 데 4년이나 걸리셨다고요.

“2011년 출판 계약서를 덜컥 쓰고 2014년 책이 나왔으니, 출판사도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어요. 계약금을 다시 돌려주려고 부단히 애썼던 기억이 나요.(웃음) 출판사 대표님의 후일담에 따르면, 연락하면 제가 계속 ‘논문 읽고 있다’ ‘취재하고 있다’고 하고, 어느 날 전화하면 ‘치킨 프랜차이즈 창업 설명회 와 있다’고 하니까 너무하다고 생각하셨대요. 초짜의 과잉 열정이 일을 망치겠다 싶어서, 출판 공모전에 확 내버리셨대요.”

정은정 작가의 꼼꼼하고도 세세한 취재는 기자도 놀라울 정도다. 1년간 치킨 창업 온라인 카페를 탐구하고, 몇 년간 여러 치킨 프랜차이즈 창업 설명회를 쫓아다니고, 치킨집 사장님들을 인터뷰하고, 직접 치킨을 튀겨보며 영업비밀을 알려주는 속성 ‘창업 학원’에 등록하는 식이다.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를 쓸 때는 “평전들과 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 백남기 농민 투쟁 관련 기록을 훑는 데 반년을 보냈다”.

*정은정, ‘쓰기’보다 사람과 이야기를 ‘적는’ 농촌사회학자 [21WRITERS②]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89.html

출간 목록
<가축전염병의 최전선에서 ‘고기’를 지키는 사람들>(2022)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지부 의뢰를 받아 정은정·라연재·이민재가 가축 방역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했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한티재, 2021)

농촌사회학자 정은정의 밥과 노동, 우리 시대에 관한 에세이.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공저, 창비, 2021)

<그렇게 치킨이 된다>(노란상상, 2020)

밥보다 맛있는 치킨이 우리 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는지를 오케이치킨집에 얽힌 사람들 이야기로 풀어낸 동화책.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백남기 농민 투쟁 기록>(따비, 2018)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석했다가 물대포에 맞아 숨진 백남기 농민의 삶과 죽음, 이와 함께했던 수많은 ‘백남기들’에 대한 기록. ‘백남기농민투쟁기록단’을 대표해 정은정이 집필을, 윤성희가 사진을 맡았다.

<질적 연구자 좌충우돌기>(공저, 한울아카데미, 2018)

<대한민국 치킨전(展)>(따비, 2014)

치킨이 어떻게 한국인의 ‘소울푸드’가 됐는지, 한국에서 치킨집 사장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을 음식사회학 관점에서 두루, 깊이 다뤘다. 정은정의 첫 책이자, 대중 작가로 이름을 알리게 해준 베스트셀러.

황예랑 기자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

정은정, ‘쓰기’보다 사람과 이야기를 ‘적는’ 농촌사회학자 [21WRITERS②]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대한민국 치킨전(展)> 쓴 정은정 작가 인터뷰

제1405호
등록 : 2022-03-30 01:42 수정 : 2022-03-3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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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진수 선임기자

*정은정,‘저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21WRITERS①]에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88.html

‘들려주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글을 쓰기에 앞서 기초취재를 굉장히 꼼꼼히 하시네요.

“기초취재는 일단 관련 자료를 전부 내려받아서 다 읽어요. 그런 뒤 현장취재와 인터뷰를 시작하죠. 좋은 작가는 좋은 인터뷰어인 것 같아요. 이게 막 능수능란한 게 아니라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중요해요. ‘칙카이드’(치킨 염지 작업용 용액)란 말을 아는 인터뷰어와 그렇지 못한 인터뷰어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거든요. 내가 이 분야에서 이만큼 공부했는데 내밀한 이야기는 모르니 대답해주세요, 이렇게 돼야 하잖아요.”

-작가보다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이 도움이 된 건가요?

“저는 단행본보다 오히려 집요하게 논문을 봐요. 유통, 산업 관련 보고서 등도. 한 주제를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이, 웬만한 단행본보다 글쓰기에 훨씬 더 도움이 돼요. 그리고 인터뷰할 때도, 작가로서는 좌충우돌하며 부딪혀도 원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끌어내라고 하잖아요? 사회학과 대학원에선 멈춰야 할 땐 멈춰야 한다고 가르쳐요. 연구 윤리의 문제죠. 저는 작가로서의 자존심보다, 인터뷰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주신 분들께 예의를 다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해요.”

-좋은 논픽션 작가의 자질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전철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그 상황을 관찰하는 사람. 식당에서 누군가 이야기하는데 ‘아휴, 왜 이렇게 시끄러워?’ 하는 대신에 ‘저 사람이 어떤 일 때문에 저렇게 술이 많이 취했을까’ 앞뒤 스토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 (인터뷰 대상자가) 자기 삶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고 싶게 만드는 게, 논픽션 작가한테 1순위로 중요한 자질인 것 같아요. 어느 날 나는 대독, 대필한다는 느낌으로 글을 쓸 때가 있어요. 나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냥 대신 타이핑해서 옮기는 사람? 그런 느낌으로.”

그래서 정은정 작가의 책에서는 ‘저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늘 그의 눈길은 사람에게 머문다. <대한민국 치킨전>에서는 ‘치킨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닭을 키우고 치킨을 직접 튀기고 배달하는, ‘치킨과 관련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엮어 따로 어린이 동화책 <그렇게 치킨이 된다>도 냈다.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오래된 치킨집을 운영하는 노부부, 여기서 일하는 젊은 배달노동자가 동화의 주인공이다. 다음 동화책으로는 떡볶이 이야기를 준비 중이다. “떡볶이는 여고 앞에서 인기 있고, 농촌에서 대도시로 온 여성들이 자립할 기반이 떡볶이집이었고, 이런 과정을 쓰려고 해요. 여성들 간의 ‘빨간 연대’랄까.”

치킨에 이어 떡볶이. 다 음식이다. 사실 그가 글쓰기에 빠져든 것도, 알고 보면 다 짜장면 때문이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백일장 준비를 잘 못했어요. 엄마는 공장 다니느라 바빠서 잘 챙겨주지도 않고. 성격 급한 3살 터울 언니가 대신 제 글을 써준 거예요. 그런데 그게 덜컥 교내 장원이 됐죠. 엄청 울었어요, 선생님한테 들켜서 야단맞을까봐. 며칠을 끙끙 앓고 울고불고했는데, 제가 학교 대표로 교육청 백일장에 나가서 장원했어요. 반공 글짓기였는데, 못 쓰진 않나보다 했죠.”

① 정은정 작가가 현재 집필하는 원고를 위해 쌓아놓은 책들. 작업 공간인 식탁 옆 바닥에 저렇게 쌓아뒀던 책들은, 원고 집필이 끝나면 다시 책꽂이로 돌아간다. 김진수 선임기자

글발의 팔 할은 짜장면 덕분

점심밥도 주지 않는 공장에 다니던 엄마는 “짧은 점심시간에 집으로 와서 대충 물에 밥을 말아 드시면서”도, 딸이 각종 글쓰기로 상을 받아오면 짜장면을 한 그릇씩 사줬다. 800원짜리 딱 한 그릇. 언니오빠도 못 먹고, 혼자만 짜장면을 독차지했다. “그 재미에 홀딱 빠져서 온갖 독후감대회, 백일장 다 열심히 했죠.” “정은정 글발의 팔 할은 짜장면”이라는 박찬일 셰프의 표현도 무리가 아니다. 실로 “개개의 모든 음식에는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자연의 변천까지 망라되어 있고, 여기에 개인의 기억과 사연까지 깃들어 있다”.(<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썼던 비결이 있나요?

“집에 책이 아예 없었어요. 전집도 없고. 고작 읽은 책이 언니오빠들 교과서였어요. 국어, 사회, 역사는 스토리북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책을 절대적인 글쓰기의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책을 쓰지만 제가 그렇게 많이 읽은 사람은 아니거든요. 교과서부터 여성잡지까지 계보 없는 독서. 이문구의 <관촌수필> 같은 책을 좋아해요. 왜 배꼽 째지게 울다가 웃게 되잖아요. 일상이 스토리가 될 수 있다는 건 박완서 선생님의 책에서 배웠죠.”

-꼭 책이 아니라도, 스토리에 대한 욕구는 다른 동기부여가 있지 않았을까요?

“아버지가 말씀을 되게 잘하세요. 어릴 때, 똑순이 김민희씨가 나오는 드라마(<달동네>)가 히트였거든요. 아버지가 서울 와서 취직 못하고 백수일 때니까, 이 양반이 심심해서 막내딸인 저한테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 다시 해봐라. 그러면 200원 줄게’ 하는 거예요. 다음날 또 물어봐요. 저도 똑같은 이야기 또 하기 지겨워서 플롯을 바꾸고, 장르를 바꾸기도 하고 아버지랑 그런 장난을 많이 쳤어요. 아버지가 스토리텔러를 키우셨죠.”

정은정 작가는 여기서 또 한번 스스로 묻고, 고뇌한다. “제가 글 쓰는 게 부끄러울 때가 있어요. 자기 경험의 자장 속에서 계속 머물러 있다보니, 가족이나 친인척을 너무 소재로만 삼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 저의 윤리적 갈등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쓴 책을 친척들은 읽을 형편이 안 돼요. 글이랑 되게 먼 삶을 살기 때문에. 저에겐 항상 그게 관통하기 어려운 고통 중 하나예요.”

가족만이 아니라, 글의 소재가 되는 사람 모두에게 그는 미안한 마음을 품는다. 험한 곳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쓰고는 “내가 눈을 낚아챌 만한 소재로서 죽음을 다뤘던 것은 아닐까”를 묻고, 고뇌한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얼마 전 언니도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쪽에 항상 마음이 많이 가요. 예전에 ‘당신은 어떤 글쓰기를 합니까’ 질문받으면 ‘염장이 같다’고 답했어요. 죽음에 대한 고민을 늘 해서.” 한국의 농촌과 농업, 그런 것을 바라보는 마음도 비슷하다. “진짜 죽었는데, 그 이후에 희망이란 건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은 누군가가 지켜봐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제가 감히 (…) 적어놓고 싶었어요.”(<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② 정은정의 연필깎이. 김진수 선임기자

대안이 아니라, 현상을 적는 사람

-농촌의 마지막을 어떻게 적어두고 계신가요?

“농촌에 강의 갈 때마다 버스를 타면 배차 간격이 길어서 네댓 시간 먼저 도착하거든요. 동네를 엄청 헤매다니면서 곳곳을 사진 찍어둬요. 다음에 오면 없어질 확률이 높으니까. 집도 슈퍼마켓도 학교도 없어지고. 오늘 적어놓지 않으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거다, 그런 강박이 늘 있죠.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동네는 오후 2시만 돼도 스산하고 쓸쓸해요. 그 풍경 사진에서 느껴지는 황망함 같은 것이 있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문장으로 표현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건조한 문장을 써야겠다는 욕구가 커져요.”

-글과 관련해, 최근의 가장 큰 고민은 뭔가요?

“제가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책에 왜 대안이나 결론이 없느냐는 거예요. 답답하다고 해요. 그러면 저는 대안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고, 지금의 현상을 적는 사람이라고 답해요. 내가 조금이라도 바꿔볼 수 있는 게 있다면, 깜냥껏 힘을 보태고 싶어요. 2021년 가을 내내 가축 방역 노동자들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가축전염병의 최전선에서 ‘고기’를 지키는 사람들>)을 한 것처럼요. 동물권도 중요하고, 육식 문제는 많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그 논의에서 누락시킨 삶, 거기에 얽혀 있는 사람들이 먼저 보여요. 축사에 사료를 가져다주는 사람, 방역하고 도축하는 사람, 그 부산물을 가져다가 뒷손질해서 파는 유통업자, 고깃집에 숯불을 공급하는 업자.”

그래서 정은정 작가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쓰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기록하는, 적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③ 식탁에서 주로 원고를 쓰기 때문에, 식사는 양은 밥상에 차려 먹는다. 세상을 떠난 언니가 조카(정 작가의 둘째 아이) 생일을 축하하며 보낸 떡갈비가 언니 장례식을 치르고 집에 돌아오니 배송돼 있었다. 언니가 남긴 ‘지상의 마지막 밥상’이다. 정은정 제공

윤독, 많이 돌려 읽어라!
함께 성장하는 비법

정은정 작가는 따로 글쓰기 연습이나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런 그에게도 “이 판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영업비밀”이 한 가지 있다. 비밀은 윤독, 여러 사람과 돌려읽기다.

언론에 보내는 칼럼 초고는 최소 서너 명에게는 미리 보내 읽어봐달라고 “괴롭힌다”. 이를테면, 정은정의 ‘윤독팀’이 존재하는 셈이다. 1997년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처음 만나 지금은 남매처럼 지내는 사회학자 엄기호와는 서로 초고를 주고받으며 “글 어때?” 편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다. 박찬일 셰프, 고영 작가 등 유명한 글쟁이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도 글을 보내 오류가 없는지 꼼꼼하게 검수받는다. “농업이나 농촌 관련해서 잘못 써서 업계에 피해를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가끔 책을 전혀 안 읽는 20대 조카도 괴롭힌다. “이 글이 뭔 말인지 알겠냐?” 조카가 “띄엄띄엄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면, 사람들 눈높이에 맞겠다 싶다.

“저도 가끔 보여드리기 부끄럽고 창피한 글도 많거든요. 그래도 그 순간을 넘겨야 하는 것 같아요. 윤독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단체대화방에서 서로서로 글을 보여주고 또 읽어주면서, 저도 많이 배우고 성장하거든요. (내가 쓴 글이라도) 나만의 글이 아니잖아요. 세상에서 벌어진 일을 적는 거니까요.”

에필로그
이날 만난 정은정 작가는 이사를 앞두고 있었다. 10대 때 부모님이 농사지었던 경기도 남양주로 그는 10년 전쯤 돌아와 터를 잡았다. 여전히 친구들, 친척들이 이곳에 산다.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숨진 원진레이온 공장과 빙그레 공장 등이 있던 곳이다. 30여 년 전엔 “청량리발 3번 버스의 종착지를 다들 ‘빙그레’라 했다. (…) 누구 하나 웃지도 않으면서 ‘빙그레’라 했다.” 지금 동네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신도시가 됐다. 그가 지금 사는(정확히는 빌린) 아파트 단지가 원진레이온 공장 터다. 인터뷰 뒤인 3월14일, 그는 남양주의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집이 바뀌어도 작업 공간은 그대로다. 식탁에 앉아 글을 쓰다가, 틈틈이 빨래도 하고 밥도 한다. 식탁에서 밥도 먹고 일도 하다가 “널브러진 자료와 노트북을 밀고 밥상을 차리는 것이 싫어서” 양은 밥상에 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에 ‘남양주지옥분식통신’이라는 이름으로 밥상 사진을 매일 올리기 시작했다. “농업부터 유통, 폐기까지 우리 밥상이 천국보다는 지옥에 가깝”기 때문에 ‘지옥’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헤어진 30여 분 뒤, 정 작가가 밥상 사진을 몇 장 보내왔다. 그중에는 2020년 세상을 떠난 언니가 눈을 감기 며칠 전에 미리 보냈던 조카(정 작가의 둘째 아이) 생일 선물(떡갈비)로 차린 밥상 사진(위 사진③)도 있었다.

전철에서 정은정 작가가 내 손에 쥐여준 <창작과 비평> 2022년 봄호를 펴보았다. 그가 ‘내가 사는 곳’이라는 주제로 쓴 산문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웃을 일은 없지만, 그래도 빙그레.” 글을 읽다가 나도 빙그레 웃고 말았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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