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2

[위근우의 리플레이]중년 남성에 대한 연민에서만 일관적인, 마구잡이 서바이벌 ‘오징어게임’ - 경향신문

[위근우의 리플레이]중년 남성에 대한 연민에서만 일관적인, 마구잡이 서바이벌 ‘오징어게임’ - 경향신문

중년 남성에 대한 연민에서만 일관적인, 마구잡이 서바이벌 ‘오징어게임’

칼럼니스트 위근우

자가당착에 빠진 악당의 사연을 또 들어줄 필요가 있을까

456억원의 상금을 놓고 벌이는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그린 <오징어게임>이 한국 드라마 최초 미국 넷플릭스에서 1위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밖에 홍콩, 말레이시아, 카타르,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태국 등에서도 1위에 랭크됐다. 넷플릭스 제공

456억원의 상금을 놓고 벌이는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그린 <오징어게임>이 한국 드라마 최초 미국 넷플릭스에서 1위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밖에 홍콩, 말레이시아, 카타르,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태국 등에서도 1위에 랭크됐다. 넷플릭스 제공

※본 기사는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대한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로 글을 시작해야겠다. 지난 9월17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 마지막 화에서, 게임 참가자인 줄 알았지만 실은 흑막이었던 오일남(오영수)은 게임 우승자 성기훈(이정재)에게 자신이 그런 일을 벌인 이유가 삶의 권태 때문이었다며 “뭘 하면 좀 재밌을까” 고민했다고 말한다. 이에 성기훈은 “재미로 그런 짓을 시켰다고?”라며 분노한다. 하지만 일남이 주최하고 고안했던 게임을 모두 지켜본 시청자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질문이 튀어나온다. 그 돈과 권력으로 재밌자고 고안한 게 고작 그거라고? 가령 첫 게임이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떠올려보자. 이 게임의 진정한 묘미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문구 속도를 조절하며(보통 느릿느릿 하다가 마지막 순간 1.5배속) 상대를 속이는 술래의 능력과 술래에게 잡혀 죽 늘어선 참가자들을 살리는 과정에서의 협업, 그 와중에 모두 살리느냐 일부만 살리느냐 고민해야 하는 딜레마에 있다. 하지만 <오징어게임> 속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그저 움직이는 걸 술래에게 들킨 참가자가 총에 맞고 죽어나가는 단순한 서바이벌일 뿐이다.

456억원의 상금을 놓고 벌이는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그린 <오징어게임>이 한국 드라마 최초 미국 넷플릭스에서 1위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밖에 홍콩, 말레이시아, 카타르,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태국 등에서도 1위에 랭크됐다. 넷플릭스 제공

456억원의 상금을 놓고 벌이는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그린 <오징어게임>이 한국 드라마 최초 미국 넷플릭스에서 1위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밖에 홍콩, 말레이시아, 카타르,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태국 등에서도 1위에 랭크됐다. 넷플릭스 제공

원래 게임이 지니고 있던 재미의 디테일은 모두 제거한 채 그저 잔인함을 통해 자극만을 강조하고선 재미 운운하는 일남은 그래서 이 게임의 실제 설계자인 황동혁 감독의 페르소나처럼 보인다. 재미도 없는 게임을 재밌다고 우기면서, 죽어가는 와중에 인간에 대한 믿음과 불신에 대한 개똥철학, 아내와 아들과 살던 옛날 골목 풍경에 대한 회한, 게임이 억지로 진행된 건 아니라는 당위 등을 구구절절 늘어놓는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일남이 하는 모든 말은 재미에서 실패한 게임 설계자가 가져다 붙인 사후적 변명에 가깝다. 그리고 그 변명은 모두 <오징어게임>이라는 작품 자체로 소급한다. 아주 간단한 옛날 아이들 놀이를 목숨을 걸고 한다는, 대단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아이디어를 9부작 시리즈로 확장하느라 이런저런 이유를 덕지덕지 가져다 붙인 결과물, 그게 <오징어게임>이다.

사실 <오징어게임>은 한 호흡의 칼럼보다는 차라리 ‘<오징어게임>이 별로인 99가지 이유’ 같은 리스티클 형식으로 풀어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작품이다. 단점들조차 유기적이지 않고 산발적이기 때문이다. ‘평등한 세상’이란 제목의 에피소드에서 게임의 지휘자인 검은 가면의 프론트맨은 참가자 병기(유성주)와 내통하던 진행요원을 죽이며 “이 게임 안에선 모두가 평등해. 참가자들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공평하게 경쟁하지. 바깥세상에서 불평등과 차별에 시달려 온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라고 말한다. 헛소리다. 이것은 정확히 이준석식 공정 경쟁 담론의 또 다른 버전일 뿐이다. 승자독식의 게임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놓고서 마치 이것이 평등하고 원초적인 세계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기만적이지만, 당장 완력을 비롯해 다수 게임에서 유리한 재능은 불공평하게 배분되어 있으며 게임 설계 자체가 대부분 참가자의 운에 맡겨져 있다. 운은 얼핏 공평하게 배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기훈을 비롯해 막대한 빚을 지고 이 미친 게임에 참가하게 된 이들 다수는 운이 없어 여기까지 몰린 사람들이다.

아무 존재감 없던 유리 공장 노동자가 다섯 번째 게임인 유리 다리 건너기에서 빛의 반사를 통해 강화 유리를 구별하는 재능을 보이자 평등한 싸움 운운하던 프론트맨은 조명을 꺼서 그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프론트맨이 말하는 공평은 약자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이러한 자가당착으로부터 이 서바이벌 세계의 모순을 비판하기란 어렵지 않으며 또한 의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 주제에만 집중하기엔, 이미 이 게임에선 어이없는 편법이 대놓고 등장한다. 밖에서 몰래 라이터를 반입한 한미녀(김주령)는 달고나 뽑기 게임에서 바늘을 불에 달궈 쉽게 통과한다. 뽑기 모양을 맞추지 못하고 달고나를 쪼개면 바로바로 옆의 진행요원 총에 맞고 죽어나가는 세계에서 미녀는 미끄럼틀 밑에 숨어 잘도 이런 짓을 한다. 모두가 평등한 싸움을 하도록 통제된 세계라는 게 실제론 어떻게 모순적인지 비판하자니, 그들의 통제란 이토록 선택적으로만 전능하다. 그러니 이 작품은 동의할 수 없는 세계관으로 설계되었다기보다는 마구잡이로 설계되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456억원의 상금을 놓고 벌이는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그린 <오징어게임>이 한국 드라마 최초 미국 넷플릭스에서 1위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밖에 홍콩, 말레이시아, 카타르,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태국 등에서도 1위에 랭크됐다. 넷플릭스 제공

456억원의 상금을 놓고 벌이는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그린 <오징어게임>이 한국 드라마 최초 미국 넷플릭스에서 1위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밖에 홍콩, 말레이시아, 카타르,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태국 등에서도 1위에 랭크됐다. 넷플릭스 제공

그럼에도 이 세계에서 어느 정도 일관되게 유지되는 것이 있다면 한국 중년 남성에 대한 연민의 정서다. 일남이 설계한 작품 속 게임은 종종 단순함보다는 중년의 추억에 방점이 찍힌다. 구슬치기 게임이 진행된 옛 골목은 일남이 살던 골목을 재현해놓은 것이며, 기훈의 동네 후배이자 서울대 경영학과 수석입학 출신 조상우(박해수)가 설탕물에 대한 강새벽(정호연)의 힌트로부터 달고나를 떠올린 것은 경영학이 아닌 과거 운동장 풍경에 대한 기억 덕이다. 거의 100% 운으로 최종전까지 살아남은 기훈이 처음으로 주인공다운 당당함을 보여주는 건 마지막 오징어게임에서 중간의 다리를 가로지르는 ‘암행어사’를 성공하고 그 명칭을 굳이 입 밖으로까지 내놓을 때다. 사채에 쫓겨 벼랑 끝에 몰렸던 중년 남성이 화려하게 귀환할 수 있는 무대로서의 옛날 게임. 그에 반해 공기놀이나 고무줄놀이처럼 중년 여성에게 좀 더 익숙할 게임은 참가자들의 대화에서만 언급될 뿐 여성 캐릭터에게 과거에의 추억은 별다른 어드밴티지로 작동하지 않는다.

주요 여성 캐릭터 삼인방 중 중년인 미녀는 섹스를 재화 삼아 깡패 장덕수(허성태)와 거래하고, 나머지 둘인 새벽과 지영(이유미)은 옛날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청년으로 설정해 서사 안에서 도구적으로 활용한 건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작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뒤 게임 중 뜬금없이 불우한 과거사를 고백하다 자신을 한 팀으로 맺어줘 고맙다며 새벽을 위해 죽어주는 지영 캐릭터의 납작한 프로필은 해당 에피소드의 비극미를 위해 대충 끼워 넣은 서사적 톱니바퀴 수준이다. 배우 정호연의 열연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새벽은, 그럼에도 최종전을 앞두고 상우의 타락과 기훈의 각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죽음을 맞이한다.

아주 간단한 아이들 놀이를 목숨 걸고 한다는 아이디어에
이런저런 이유를 덕지덕지 가져다 붙인 결과물
주인공 기훈을 포장하는데 얼마나 많은 프로필이 동원됐나
악당의 전능함은 장르적 허용으로 넘어가는 게 낫지
개연성을 부여하려다 보면 창작자의 허술함만 드러날 뿐이다


그에 반해 주인공 기훈을 괜찮은 인물로 포장하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프로필이 부여됐는지 앞서의 여성 캐릭터들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다. 딸 생일에 치킨이라도 사주라며 노모(김영옥)가 준 용돈뿐 아니라 노모의 카드까지 털어 경마에 걸던 개차반이지만, 그에겐 쌍용차 노조 복직 투쟁의 알레고리가 분명한 드래곤모터스 복직 투쟁의 아픈 기억이 있고, 이혼한 아내(강말금)에게 양육비 한 푼 주지 않는 무책임한 생부지만 딸에 대한 진심은 패밀리 레스토랑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포장마차 떡볶이의 정감 있는 맛으로 증명하는 따뜻한 아빠다. 꼴 보기 싫던 인간 안의 존엄성이란 건 분명 주인공으로서 매력적인 요소지만, 작품은 기훈의 무책임함을 직시하며 그 안의 인간성을 살피기보단 쉬지 않고 그를 위해 사후적인 변명거리를 던져준다. 아이 낳을 때 그 자리에도 없던 인간이 무슨 아빠 노릇이냐는 전처의 분노에 대해, 투쟁하던 동료가 쓰러져서 어쩔 수 없다고 기훈이 답할 때, 피치 못할 사정은 오로지 기훈의 몫이 된다. 첫 화부터 기훈을 위한 변명으로 점철되던 이야기는 타락한 상우가 마지막 게임에서 “형(기훈)하고 이러고 놀다보면 꼭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불렀는데”라며 회한에 빠지다 스스로 목에 칼을 꽂고 “우리 엄마”를 수없이 되뇌는 장면을 통해 험진 세상에서 망가져왔지만 가슴속엔 자식과 엄마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잃은 적 없는 한국 중년 남성 판타지를 완성한다. 마지막 에피소드 제목이 아내를 때리지만 마음으론 따뜻하게 아낀다던 김첨지 이야기를 그린 현진건의 동명 소설을 모티브로 한 ‘운수 좋은 날’인 건 어떤 무의식의 발현처럼도 보인다.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노골적으로 다음 시즌을 암시한 <오징어게임>의 시즌 2가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건 그래서다. 이병헌이란 거물급 배우를 캐스팅한 프론트맨의 과거와 그가 오징어게임의 지휘관이 된 이유도 궁금하지 않다. 그는 앞서 인용한 대사에서 불평등에 시달린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겠다는 대의를 말했지만, 정작 그가 직접 지휘한 게임은 딱히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자가당착에 빠진 중년 남성 악당의 사연을 우리가 또 들어줄 필요가 있을까. 이미 시즌 1 마지막 화에서 일남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어주지 않았나. 어떻게 해외 V.I.P.까지 참여하는 거대한 서바이벌 게임이 존재하고 가능할 수 있는지 그 구조도 궁금하지 않다. 작품 막바지에 기훈이 출국 중이란 것까지 알고 그의 재참여를 만류할 정도로 전능하지만, 또한 기훈이 충분히 인식 가능한 범위에서 오징어게임 참가자 영입을 벌일 정도로 그 전능함은 선택적으로 허술하다. 악당의 전능함은 장르적 허용으로 넘어가는 게 낫지, 거기에 개연성을 부여하려다 보면 창작자의 허술함만 드러날 뿐이다. 오징어게임 우승자가 되어 각성한 기훈이 어떻게 이 거대한 조직과 싸워나갈지도 궁금하지 않다. 그가 우승한 건 90%의 운과 일남의 호의 덕이지 소시민의 평범한 위대함 때문이 아니며, 그가 주인공으로서 상징하는 건 한 줌의 인류애가 아닌 한국 중년 남성의 자기연민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뿐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의 흥행을 기록한 이 작품의 다음 시즌이 제작될 확률은 첫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의 생존 확률보다도 높을 것이다. 그걸 부정할 이유는 없다. 작품 속 게임이 증명하듯, 승리란 꼭 능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므로.



원문보기:
https://www.khan.co.kr/national/media/article/202109241602005?fbclid=IwAR190RPwDebFD2bXTPiUTkl8NrzTig8nbKJQsloiKo75_ZPBrEtTxiySG50#csidxcc999b1315783289193be47b8b8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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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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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근우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읽어본 게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대부분 관심 없어서 안 보다가 내 탐라에 계신 몇몇 분들이 극대노하시면 이상한 소리를 했나보다 하고 넘겼는데 오징어게임은 내가 본 것이기도 하고 나도 기분 나빴던 포인트가 있어서 읽어봤다. 
 1. 일단 비평이라는 게 이런건가? 나는 문예 쪽에는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비평이라 함은 미적인 가치를 논하는 게 있든지, 형식적인 부분을 다루든지, 그도 아니라면 사회를 읽어내는 것이라도 있어야 한다. 이 글에는 위근우 본인이 세련됐다는 자의식 외에는 어느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게 왜 비평글로 돈받고 팔리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2. 위근우는 "그 돈과 권력으로 재밌자고 고안한 게 고작 그거라고?"라는 질문을 던진다. 너무 단언하길래 재벌인줄 알았다. 실제의 재벌들은 어떨까? 이건희가 '조선족' 여성과 성매매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이재용이 간호사에게 '오빠'라고 해보라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이건희정도의 부자가 '값싼' 조선족 여성과 성매매한다는 것에 놀라고, 이재용이 간호사에게 오빠 운운하는 모습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저정도의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재미를 느낄만한 것은 '순수한' 타인의 의지밖에 없다. 돈도, 권력도 초월한 순수한 의지야말로 유일하게 재미 있는 장난감이다. 어차피 돈과 권력으로 타인을 자신의 의도대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딱히 그 돈과 권력으로 할 수 있는 것에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그러니 이건희가 나한테 힘이 된 그 키스, 좋았어 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의혹(판사님, 저는 추호도 사실이 아니라 믿습니다)을 받고, 간호사한테 넌 내 돈과 권력을 보고 다가온 다른 여자들하고 달라, 이러면서 이재용씩이나 되는 사람이 오빠라고 해보라고 하는 것이겠지. 이들은 그 순수한 의지를 자기가 갖고 놀 수 있을 때 비로소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이 맥락에서 일남은 자신이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이 상황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순수한 의지들을 농락하고 있으니까. 
 3. 일남이라는 캐릭터의 설정이 위근우의 말처럼 비현실적일까? 우리는 이미 타인의 '의지'를 갖고 놀며 그것으로 돈까지 벌었던 무리를 알고 있다. N번방이다. N번방이 주는 쾌감은 단순히 자극적인 영상이라서가 아니다. 타인의 의지를 농락하고 갖고 노는 것 자체가 재밌는 것이다. 이 점에서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은 '인간수업'과 한쌍으로 묶여야 한다.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존재인 오지수가 '보통'의 삶을 살기 위해 포주 역할을 수행하며 타인의 의지를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상황과 사회적 최강자에 속하는 존재가 어렸을 적의 '보통'의 삶을 그리워하며 타인의 의지를 농락하는 상황이 겹친다. 사회적 최하층과 최상층이 묘하게 만나는 이 지점. 현실의 N번방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 위근우는 이 맥락에 별 관심이 없다. 그는 이 시리즈가 중년남성을 연민한다고 광광우럭하기 바쁘다. 지도 중년남성이면서..
 4. 그러니까, 현실의 한국인들은 오징어게임과 인간수업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다. 오징어게임은 이를 우화적으로 보여준다. 위근우는 오징어게임이 말하는 '운'이 "이준석식 공정 경쟁 담론의 또 다른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게임에 유리한 재능"이 "불공평하게 배분"되어 있으며 게임 자체가 "운"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그 재능조차도 제대로 발휘하게 하지 못하니 일관성까지 없다는 게 위근우의 비판이다.  
 "헛소리다." 오징어게임이, 그리고 그 설계자들이 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개인이 압도적인 기량과 재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하는 게 아니다. '개인'이 아니라 "단체", 더 정확하게는 "타인의 의지"를 어떻게 이용해서 승리하는가이다. 왜? 부자들은 그 타인의 의지를 이용해서 승리해 부자가 됐으니까. 그렇게 부자가 돼서 돈과 권력, 순수한 타인의 의지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돈과 권력이라는 편리한 수단으로 타인의 의지를 움직일 수 있게 돼서 '재미'를 잃은 거니까. 오징어게임은 그걸 잘하는 사람이 승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여성이 성을 수단으로 하든 남성이 완력을 수단으로 하든 뭘 수단으로 하든 그렇게 타인의 의지를 움직여야 승리하도록 짜여 있다. 다시 말해서 오징어게임은 부자들이 자기 자신과 닮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는 게임이다. 자폐적이고 변태적이다. 일남이 그리워했던 순수했던 어린시절은 어린아이와 같이 아무것도 갖지 못한 인간들의 상태와 일치한다. 가난한 사람이 어린아이가 돼서 일남의 인생을 반복해서 살게 한다는 점에서 나는 오징어게임이 기분나쁘다. 중년남성이 나와서 나쁜 게 아니라..
 5. 그래서 오징어게임은 한국 사회를 우화적으로 그리는 작품이다. 현실에서 운이 없어서든 재능이 없어서든 실패한 인간들을 모아다가 다시 한번 경쟁하고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 경쟁에서는 타인과 연대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개인이 압도적인 기량을 가져야 승리하는 게 아니다. 타인의 순수한 의지를 어떻게 이용하는가? 부자인 일남은 이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일남은 모든 게임에서, 심지어 죽음을 앞두고 이정재와 한 내기에서조차 자신이 승리했다는 만족감 속에서 죽을 정도로 타인의 의지를 기민하게 이용하며 승리해왔다. 일남처럼 될 수 있는 기회를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에게 준 것이다. 그럼 이제 여기서 필요한 건 압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죽음이다. 그런 무조건적인 상황, 도저히 다른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현실의 습격 앞에서 개별적인 순수한 의지들이 어떤 선택을 보여줄지, 다시 말해서 어떤 의지를 보여줄지가 부자들의 관전 포인트가 된다. 총 막 갈겨야돼. 근데 재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한다? 에이, 재미없지.
 6. 깜빡하고 덧붙이는 걸 까먹었는데, 그래서 주인공은 무조건 최고 순진무구해야 한다. 순진무구하다는 말이 무슨 착한 사람 데려다놓아라 그런 게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를 유지하면서 이 아수라장을 거쳐 나올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가만 보면 주인공 이정재야말로 뒤로 살짝 발만 빼면서 나머지 사람들이 서로의 의지를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사람 아닌가? 가장 손해를 덜 보면서 타인의 의지를 이용하는 그런 사람 아닌가? 마지막 경쟁자를 자발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정재야말로 타인의 의지를 가장 능수능란하게 이용해먹는 인간 아닌가? 이정재가 현실에서 노모 등처먹으면서도 인간성을 버리지 못하는 캐릭터로 설정되어야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적당히 더러우면서도 적당히 인간성을 갖춘.. 아, 그게 왜 꼭 중년남성이어야 하냐고? 감독이 중년남성이라 그런가보지 뭐 어쩌라고..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일남과 오지수 사이에서 방황하며 산다. 오징어게임을 통해 일남 혹은 오지수가 되거나 그들에게 잡아먹히는 약자가 되거나. 중년남성이 나왔다고 광광우럭하는 중년남성 위근우의 무사안일한 세계관 속에서는 보이지 않을 한국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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